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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예전 콩브레 시절 이후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바로 그 지고한 희열감이 나를 엄습해 왔다. 마르탱빌 종탑을 보면서 느꼈던 바로 그 희열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희열감은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세 그루 소나무가 서 있는 광경을 보았는데, 그 너머로는 숲으로 덮인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언젠가 이미 보았던 광경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연 그와 똑같은 광경을 예전에 어디서 보았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지만, 언젠가 틀림없이 본 광경이란 느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저 소나무들을 대체 어디서 봤단 말인가. 콩브레엔 오솔길이 저런 식으로 나 있는 경우가 없는데... 마차가 갈림길에 이르자 그 광경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듯이 보이는 그 감정, 나를 진정으로 행복감에 휩싸이게 한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멀리 떠나가는 마차는 마치 내 인생이 그러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中


 화자는 예전 콩브레에서 마르탱빌 종탑을 보면서 지고한 희열감을 느꼈다. 반면, 세 그루 소나무가 서 있던 광경을 보면서는 익숙함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지 못한다. 콩브레의 오솔길과 차이점 이외에는. 마차가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의미를 찾지 못한 화자는 지고한 희열감도 함께 놓친다. 개인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에서 가장 인상 깊은 위의 장면에서 다음 칸트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린다면 다소 엉뚱해 보인다. 이번 페이퍼는 이 뜬금없는 결론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화자가 왜 '마르탱빌'에서는 성공하고 '세 그루 소나무'에서는 실패했는지를 밝혀주는 가장 예리한 열쇠이기도 하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Sensation without concept is blind, concept without sensation is empty.)


 화자가 위디메닐로 가면서 마차가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고민을 거듭한다. 만약 화자가 콩브레에서의 갈림길이 게르망트 쪽과 메제글리즈 쪽으로 향하고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위디메닐에서의 갈림길이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았을까. 갈림길에서의 유사성으로부터 데자뷰를 느꼈다면, 우리는 게르망트와 메제글리즈로 난 길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앞선 페이퍼에서 게르망트 쪽(영속)과 메제글리즈 쪽(감각)으로 규정했었던 결론을 가져온다면,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감각적인 메제그리즈 쪽을 이번에는 직관/경험으로, 영속적인 게르망트 쪽을 개념/지성으로 대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속성'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덧없이 스러지는 '감각(직관)'에 '형식(개념)'과 '의미(지성)'를 부여하려는 이성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전 페이퍼 : 감각의 향연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CommunityType=AllView&page=2&cnt=4060


 다시 칸트의 명제로 돌아가서 직관과 개념에 각각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를 대입시키면 다음과 같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화자가 알지 못했던 마르탱빌 종탑에서 느꼈던 희열이, 세 그루 소나무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개념 없는 메제글리즈 쪽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게르망트 쪽은 공허하다." 


 화자는 마르탱빌 종탑에서 느꼈던 감각을 글쓰기를 통해 해석하고 번역하는 데 성공하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었지만, 세 그루 소나무에서는 감각을 인식하는 데 그쳤고,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감각은 예술적 승화에 실패하고 멀리 떠나가버린 것이 아닐까. 결국 프루스트(화자)에게 예술로 가는 길은 메제그리즈와 게르망트로 가는 변증법적 종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양 쪽을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은 여러 모습으로 변주되며 재현된다. 오데트에 대한 스완의 사랑은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으로 재현되지만, 스완에게 뱅퇴유의 소나타가 고통으로의 회귀를 이끄는 예술이었다면, 화자에게 뱅퇴유의 소나타는 보다 높은 예술로 이끄는 동력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다른 변주다.


 화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반을 통해 '예술'이라는 이데아를 찾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감각적인 현실과 유리된 이데아가 아니다. 현실을 딛고 이상을 추구해야 하며, 순간으로부터 영원을 끌어내야 하고, 법칙을 다시 일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안의 인물처럼 동굴 밖을 나가 태양을 보고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되찾은 시간>에서 게르망트 공작의 파티를 통해 재현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게르망트의 살롱, 그곳에서 화자는 시간에 의해 끔찍하게 일그러지고 늙어버린 '그림자' 이자 '유령'들이다. 화자는 그들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지만, 파티에 들어서기 전 '불균형한 보도블록', '찻잔 소리', '별처럼 빛나는 냅킨' 등을 통해 마르탱빌 종탑에서와 같은 희열을 다시 엿보면서 '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예술의 '변증법적 종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되찾은 시간>의 리뷰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결국, 앞서 말한 한 단락은 메제글리즈를 거쳐 게르망트에 이르는 프루스트 예술론의 변증법적 종합을 그렸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 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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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특히 관심을 두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어느 날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무리의 다른 아가씨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쉽사리 흥분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가씨들의 무리를보았을 때 느꼈던 혼돈스런 마음 상태처럼 아직도 어떤 때는 이 아가씨, 어떤 때는 저 아가씨 하는식으로 끊임없이 대상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아가씨들 모두를 무리지어 생각하고,
아가씨들 스스로가 그렇게 의식하고 처신하듯 나 자신도 그들을 그들만의 동떨어진 생명체로여겼다. 내가 마치, 종교인들 사이에 섞여 있긴 하지만 세련된 태도 때문에 표가 나지 않는 무신론자이거나 야만인들 사이에 버젓이 끼어든 조심스런 기독교도처럼 아가씨들 틈에 비집고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속에서 건강과무심함, 관능, 잔인함, 반지성(性), 기쁨이 넘치는 젊음의 활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듯이 보였다. - P12

아가씨들이 함께 모여 있는 걸 바라다보면,
서로 조금씩 다른 생김생김이 마치 하늘에 사는 어느 정원사가 장미꽃 사이를 누비며 다닐 수 있도록 환한 빛을 부어 만든 오솔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질 무렵, 아가씨들 얼굴이 붉은 노을에 물들 때에는 누가 누군지 거의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아직 자기만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기다릴 짬도 없이 아가씨의 얼굴이 영원히 고정된 형태로 굳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후론 그 얼굴은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더욱더 젊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가씨들의 얼굴을 비추는 아침 햇살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우리는 가지고 온 음식을 다 먹고 나면 놀이를 했는데 나는 아가씨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환희와 함께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에겐 어른에게는 없는 분비샘이 있어서 우유를 마셔도 별 탈이 없듯이, 이 앳된 아가씨들의 목소리에는 성숙한 여인에게는없는 특별한 음조가 담겨 있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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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까지 내가 본 발벡 성당은 그저 사진으로만보았을 따름이지, 그것도 고작 사도상(像)이나 성당 정문에 새겨져 있는 성모상이나기껏해야 성당 유물을 본떠  만든 것들이 고작이었지.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바로 진짜성당이야. 조각상들도 물론 진짜고,
아니, 진짜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지.
혹은 그 이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동안 머리 속에서 무수하게 그려 봤던 발벡 성당 조각상이 실제 크기의 조각상으로 바뀌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세상에 하나뿐인 그 크기로 말이다.
- P8

어둠에 묻힌 채 넋을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인간 어류학에 능통한 문필가도 끼어 있을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음식물을 삼키는 여느 늙은 암컷 물고기의 주둥이를 관찰하면서 이를 종에 따라,
혹은 선천적 성질에 따라 분류하고픈 욕망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후천적 성질에 따라 분류하는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제 막 샐러드를 입에 쳐 넣는 세르비아 출신의 늙은 부인을 발견하고는 이 여자는 바다 물고기 주둥이를 하긴 했지만 라로슈푸코 집안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포부르 생 제르맹이란 민물에서 성장한 물고기란 사실을 간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 P21

느닷없이 예전 콤브레 시절 이후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바로 그 지고한 희열감이 나를 엄습해 왔다.
마르탱빌 종탑을 보면서 느꼈던 바로 그 희열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희열감은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세 그루 소나무가 서 있는 광경을 보았는데,
그 너머로는 숲으로 덮인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언젠가 이미 보았던 광경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연 그와 똑같은 광경을 예전에 어디서 보았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지만, 언젠가 틀림없이 본 광경이란 느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P26

그 순간 바로 내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울타리를 만들며 거친 파도의 동선을 잠시 끊는 이 활짝 핀 아가씨들이야말로 신의 섭리에 의해 모여든 희귀종들의 무리처럼 보였다. 이 아가씨들이 발벡에 사는지, 과연 누구인지 못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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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만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꺼내들었다. 책을 읽으며 화자는 자신의 길을 찾았지만, 내 자신은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만들었던 책이라, 손에서 놓은 지 꽤 되었던 차다. 만화로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의 길을 잃어버린 나에게 시각적 지도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로 펼쳐들었지만, 19세기말의 시대상을 현대 독자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여줘 한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눈에 들어온 부분들이 있었다. 마들렌의 과자를 먹는 화자와 뱅퇴유의 소나타를 듣는 스완.


 이들은 모두 외부자극에 의해 자신의 기억을 찾는다는 점에서 '비자발적'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와 동시에 이들 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화자는 마들렌 과자를 먹으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반면, 스완은 뱅퇴유 소나타를 들으며 오데트와의 사랑을 되새기며 고뇌한다. 전자가 '미각/후각'이라는 여운을 남기는 감각을 통해 '개인의 시간'을 찾는다면, 후자는 '청각'이라는 일시적 감각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추구한다. 여운을 남기는 미각은 자신에게 머물며 자신의 시간을 돌려준다. 소멸되는 청각은 시간을 돌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에 의해 재생(연주)되어야 한다. 자립과 외부 의존. 그것은 문학과 음악의 차이로 연결된다. 화가의 캔버스와 작가의 문학작품은 '영속성'을 가진 높은 단계의 예술로 승화되어 화자에게 내면적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소멸하는 음악은 스완을 수동적인 감각의 덫에 묶어둔다.  뱅퇴유의 소나타가 스완을 오데트에게 묶었듯, 후에 화자를 알베르틴에게 묶었듯. 이러한 차이는 훗날 화자가 문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화자에게 되찾은 시간 속에서 '게르망트 쪽 길'과 '메제글리즈(스완네) 쪽 길' 사이의 차이일 것이다. 영속과 순간, 예술과 감각적 사랑 사이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떠올리게 된다. 신앙과 제롬 사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 알리사의 모습은 게르망트와 메제글리즈로 향한 두 갈래길에 선 화자를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알리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 제롬을 버렸고, 좁은 문에 들어가는 대신 현실에서의 사랑과 자신을 잃는다. 반면, 화자는 게르망트로 가기 전, 메제글리즈로도 가본다. 알베르틴을 통해. 오데트에 대한 스완의 사랑은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으로 변주되지만, 이러한 변주와 경험은 화자를 파멸이 아닌 한 단계 높은 완성으로 이끌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앙과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목표를 두고, 두 갈래 길에 선 두 주인공의 선택은 이렇게 같은 듯 다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텍스트로만 읽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많은 부분을 만화라는 시각자료를 통해 찾게 된다. 화자의 미각/후각 그리고 스완의 청각. 이들을 지켜보는 독자의 시각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감각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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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이 알고 있는 이 사랑의 병은 너무도 커져 버렸고, 그가 가진 모든 습관이며 그의 모든 행동,
생각, 건강, 수면, 삶, 심지어 자기가 죽고 난 후 바라는 바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깊숙이 개입돼 있고,
그 자신과 완전히 한 몸을 이루고 있어서, 그에게서 그 병을 끄집어내려면 거의 그 자신을 송두리째 파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외과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그의 사랑은 더 이상 수술할 수 없는 상태였다. - P22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고, 스완은 이미 시작된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는 빠져나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몹시도 괴로웠다.
게다가 그는 오데트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곳에 발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데트가 살롱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완이 미처 알아차릴 새도 없이, 오데트가 그에게 연정을 품었던 시절의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 P35

창백하고, 뺨이 너무나 여위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고, 눈가가 거무스름한 오데트의 모습뿐 아니라,
그녀를 처음 만난 이래 다시 마주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나쁜 기분이 가실 때 흔히 그러듯, 또 정신 상태가 한껏 고양돼 있지 않은 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간헐적으로 불평을 내뱉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내 타입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가 몇 년을 허비하고, 또 죽으려 했다니!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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