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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칭성을 가진 물체는 몇 가지 조작을 해도, 예를 들어 회전시키거나, 거울에 비춰 보거나, 한 부분을 바꿔치기해도 처음과 같은 모양을 갖는다. 예를 들면, 메노라 양쪽 끝에 있는 똑같이 생긴 초를 서로 바꾸어 끼워도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또 십자가를 거울에 비춰 보아도 원래의 십자가와 다를 바 없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241/623


 톰 리들과 해리 포터.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이들은 대칭성을 갖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분면에 위치한 많은 공통점을 갖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갖는 태생, 능력, 성향, 외모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처럼 선(善)-악(惡)의 축을 중심으로 반대편에 위치한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곧 애써 끔찍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렇단 말이지. 네 어머니가 너를 구하려고 죽었다. 그래, 그건 강력한 반격 마법이지. 이제 알겠군. 결국 너한테는 특별한 게 전혀 없었어. 있지, 난 궁금했어. 너랑 나 사이에는 이상하게 닮은 점들이 있잖아, 해리 포터, 너도 분명 알아챘을 거야. 둘 다 머글 집안의 피가 섞인 데다, 고아에, 머글 손에서 자랐지. 아마 위대한 슬리데린 이후 호그와트에 입학한 파셀마우스는 너와 나 둘 뿐일거야. 우린 심지어 생긴 것도 어딘지 비슷해....... 하지만 어쨌거나 네가 나한테서 살아남은 건 그저 군이 좋았기 때문이야.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그게 전부야." _ J.K. 롤링,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 p361


 이러한 대칭성의 특성은 J.K 롤링( J. K. Rowling, 1965 ~ )보다 물리학자인 리사 랜들(Lisa Randall, 1962 ~ )이 보다 상세하게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랜들은 저서 <숨겨진 우주 Warped Passages: Unraveling the Mysteries of the Universe's Hidden Dimensions>에서 대칭성을 활용해서 우리는 보다 쉽게(최소한 한 개 이상의 변수를 줄이면서) 우릭가 속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톰 리들이 해리 포터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갖는 대칭성 때문일 것이다. 


 대칭성은 예술과 건축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입이 없는 자연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당신은 물리학에서 대칭성을 종종 보게 된다. 물리학의 목표는 서로 다른 물리량들을 연관지어 관측에 기반한 예측을 하는 데에 있다. 이 과정에서 대칭성은 자연스럽게 어떤 역할을 한다. 물리계가 대칭을 갖고 있다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적은 관측값에 기초해 계를 기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동일한 성질을 갖는 두 물체가 있을 때, 한 물체의 움직임을 이미 측정했다면 곧바로 나머지 하나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도 알 수 있다. 두 물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 물체도 같은 식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243/623


 빈 공간에서는 모든 방향이 동등함을 말해 주는 회전 불변성(rotational invariance)이나 모든 위치가 동등함을 말해 주는 병진 불변성(translation invariance) 같은 여러 대칭성들이 보존된다. 하지만 실제 공간, 즉 우주는 비어 있지 않다. 별이나 태양계 같은 구조가 특정한 위치에 특정한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대칭성은 완벽하게 보존되지 않는다. 대칭성은 원리적으로 모든 곳에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어디에나 있을 수는 없다. 대칭성은 반드시 깨질 수밖에 없다. 다만 세계를 기술하는 물리 법칙 속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259/623


 그렇지만, 바로 다음에서 랜들은 이론과는 달리 실제 세계에서 대칭성은 깨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확률적으로 이길 확률이 50%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실제 확률 50%를 보장해줄 수 없듯이.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톰 리들과 해리 포터의 깨어진 대칭성은 선택(Choice)에서 나온다. 출생(Birth)와 죽음(Death) 사이에 위치한 것이 선택인 것을 생각하면, 선택은 우리 인생(Life)에서 무한의 자유도(freedom of degree)로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변수인지도 모르겠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하나를 취한다면, 이 부분을 갖고 싶다. 다른 부분은 독서를 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도럭 하자.


 "기숙사 배정 모자는 너를 그리핀도르에 넣었다. 이유는 너도 알고 있어. 생각해 보려무나." " 모자가 저를 그리핀도르에 넣은 건 단지......." 해리가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슬리데린에 넣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인데요......." "바로 그거야." 덤블도어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너와 톰 리들의 큰 차이점이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말이다, 해리, 우리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선택이란다." _ J.K. 롤링,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 p382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미나리마 판이 갖는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책의 팝업 일러스트레이션에 숨겨진 여분의 차원이라 생각한다.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에서는 여분의 차원을 중력의 세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미나리마 판 일러스트레이션의 숨겨진 차원은 추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시공간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켜 준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홀 (Edward T. Hall, 1914 ~ 2009)의 <숨겨진 차원 The Hidden Dimension>에서 고정 형태의 공간에 반대되는 반고정 형태의 공간과 가깝다 생각된다.


 여분 차원 이론의 흥미로운 면들 중 하나는 각각 다른 규모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결론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에서 중력은, 말려 있는 차원보다 짧은 거리, 즉 곡률이 너무 작아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작은 규모에서 보이는 행동과, 차원이 보이지 않거나 비틀림이 중요해지는 커다른 규모에서 다른 행동을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여분 차원이 결과적으로 우주론에서 발견되는 수수께끼 같은 성질들을 해결해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536/623


 고정 형태의 공간은 개인과 집단의 활동을 조직하는 기본적인 방식 중 하나로서 인간이 지구상에서 움직일 때 행동을 지배하는 물질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감추어지고 내면화된 구도를 포함한다. 건물은 고정 형태를 표현하는 하나의 패턴이지만 또한 특징적인 방식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마을, 도읍, 도시의 배치, 그리고 사이사이의 시골 풍경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계획을 따른 것이다. _ 에드워드 홀, <숨겨진 차원> , p164


  우리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우리를 만든다는 말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면서 쓸데없는 일만 벌이는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미나리마 판 <해리 포터> 시리즈는 우리의 추상과 작가의 세계를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작품 몰입도를 높여준다. 2차원 면에 표현된 텍스트의 내용을 3차원의 시공간에 표현한 예쁜 책. 미나리마판이 갖는 매력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고정 형태의 공간에서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행동이 형성되는 틀이라는 점이다. 윈스턴 처칠 경이 "우리는 건물의 모양을 만들고 건물은 우리의 모양을 만든다"고 말했을 때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공간의 그러한 측면이었다. _ 에드워드 홀, <숨겨진 차원> , p168


 ps. 글을 마치기 전에 떠오른 생각. '누군가'로 표현했는데, 그런 내 자신을 보니 <해리 포터>에서 볼드모트를 두려워하는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굳이 '누군가'의 이름을 명확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를 엄밀히 하자면 두렵기보다는 짜증이 나기 때문이지만, 여기서 '누군가'는 윤석열임을 굳이 밝히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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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3-01-06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리학에서의 대칭성은 인간의 양면성에 비견될 수도 있겠네요. 말씀처럼 차원의 추가는 사고의 풍성함을 가져오지만 그 이상의 차원을 생각하면 언제나 머리에 쥐가 날것 같아요. 리사랜들은 책만 어렵게 쓰는 줄 알았는데, 저번에 이비에스에서 얘기하는 걸보고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딱히 설명이라는 걸 할 생각이 없구나- (:-)

겨울호랑이 2023-01-06 09:37   좋아요 1 | URL
갱지님 말씀처럼 차원의 추가는 고려해야 할 요소를 승(乘)으로 증가시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리사 랜들 교수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브라이언 그린, 미치오 카쿠 교수와는 달리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되도록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편이라 여겨집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장점인 반면 그 명확함을 이해하기는 참 쉽지 않네요... ㅜㅜ

갱지 2023-01-06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랜들교수 머릿속에선 아마도 명징할 것으로...

겨울호랑이 2023-01-06 10:04   좋아요 1 | URL
^^:) 분명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니데이 2023-02-07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2-07 22:5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 서재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꾸준하게 이웃을 배려하시는 서니데이님께 고마움과 함께 많은 것을 배웁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크리스마스 캐럴>을 이전의 모든 연말 휴가철 책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이 명절이 스크루지에게 첫째 마당에서 상기시키듯, "다른 어떤 계절보다도 이때 결핍이 무엇이며 풍요가 무엇인지를 가장 뼈저리게 절감하게 마련"임을 의식적으로 인식시킨다는 점이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39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 ~ 1870)의 <크리스마스 캐럴 The Annotated Christmas Carol>과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의 <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 크리스마스에 널리 사랑받는 이들 작품이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안에 담겨진 의미는 사뭇 진지하다.  


 스크루지의 영혼은 말리의 영혼처럼 "현찰 통, 열쇠, 자물쇠, 장부, 증서 묵직한 철가방"에 짓눌려 있다. 그의 직업은 엄밀성과 정확성을 요구하기에 엄격한 수학과 경제학의 법칙들을 흔들어놓는 인간적 감성이나 나약함이 설 자리는 전혀 없다. 그의 작고 좁은 세계에는 헛소리나 개소리 같은 헛것들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그의 냉랭한 의견들은 당시 경제이론가들의 뒤틀린 학설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가난한 자들이 가난한 이유는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니 스크루지는 "게으름뱅이들이 흥청거릴 돈"을 제공할 의향이 전혀 없다. 그가 이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감옥과 구빈원인데, 이미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이 기관들의 유지비를 내고 있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22


 주인공 스크루지는 전형적인 맬서스주의자(Malthusianism)다. 또한,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장주의자이기도 하며, 개인의 효용극대화를 추구한는 공리주의자(Utilitarianism)다. 그런 그에게 무능력하고 천성적으로 게을러 가난해진 이들에게 자선은 낭비에 불과하다.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을 잉여인력으로, 그리고 이들을 악덕(惡德)의 근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안에 자리한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 ~ 1834)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지주들은 꼭 필요한 인력 외에는 가급적 빈민들을 자신의 땅에 들이지 않기 위해 남아 있는 빈민 오두막을 허물어버린다. 이로 인한 주택부족은 필연적으로 혼인의 강력한 억제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구빈법 제도가 오랜 세월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억제요소 덕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억제요인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을 선택한 빈민들은 더럽고 초라한 거처에 머물며 보잘것없는 보조금에 의지해 연명해가거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비좁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구빈원에 수용되어야 한다. 구빈원의 끔찍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의 사망비율이 두드러진다. _ 맬서스, <인구론> , p356


 그런데 여기서 살아남은 과잉인구의 존재로 인해 노동유지기금은 본래의 적정 인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고, 그 결과 근면하고 신중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게으르고 무지한 빈민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는 해가 갈수록 구빈원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부담이 되어 결국엔 개탄해야 마땅할 거대한 악덕을 낳는다. 전체 인구 가운데 자선에 의지하는 이들으 ㅣ숫자가 비정상적일 만큼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_ 맬서스, <인구론> , p357


  소설에서 냉혹한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유령을 만난다. '과거-현재-미래'의 유령을 만나면서 점차 변화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평가와 미래의 자신의 죽음을 본 스크루지가 마음을 차츰 열어가는 과정에 대해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보호자는 '현재의 크리스마스 정령'이다. '과거의 크리스마스 정령'은 "이미 지난 일들의 그림자"를 보여줄 능력만 있을 뿐, 판단을 내리거나 지난 일들을 바꾸지 못한다. '미래의 크리스마스 정령'은 뒤를 돌아볼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음침한 추수자는 오직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고 그의 필연적인 여정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오직 '현재의 크리스마스 정령'만이 사건들에 대해 논평하고 스크루지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시한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23

 마치 그리스 신화의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Moirai) - 클로토(Klotho), 라케시스((Lachesis), 아트로포스(Atropos)-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 존재를 거치면서 스크루지는 자신 안의 숨겨진 어린이와 같은 감성을 의식의 세계로 끄집어 올릴 수 있었고,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여기서 잠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맥베스 Macbeth>를 떠올리게 된다. 스크루지와 같이 이질적인 세 존재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루지는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미래를 그렸다면, 맥베스는 미래를 향해 폭주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언의 시점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예언이 보여주는 미래의 전망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스크루지에게 세 정령은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자신의 삶을 보여주면서 비참한 결말을 통해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면, 맥베스에게 세 마녀는 '가까운 미래 - 먼 미래 - 훗날'과 그의 인생에 내릴 빛나는 미래를 하면서 이들의 운명을 바꿨다. 이후 구두쇠 스쿠르지는 좋은 이웃이 되지만, 충신 맥베스는 대역죄인으로 변화된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 안의 예언(oracle)은 여러 모로 비교된다.


 맥베스 : [마녀들에게] 말해라, 너희는 누구인가?

 마녀 1 :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성주 만세!

 마녀 2 : 맥베스 만세! 코더의 성주 만세!

 마녀 3 : 맥베스 만세! 훗날 왕이 되리라.

 뱅코   : 장군, 왜 놀라시오? 그처럼 좋은 말을 겁내는 듯하시오?... 내 말은 없었는데, 과연 너희가 시간의 씨앗을 살펴 자랄 싹,  못 자랄 싹을 알 수 있다면 내게 말하라. 나는 너희의 호의도 악의도 구하지 않으며 미움도 원치 않는다.

 마녀 1 : 맥베스보다 작으나 크다.

 마녀 2 : 그처럼 행복하지 못하나 더 행복하다.

 마녀 3 : 왕은 되지 못하나 왕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맥베스와 뱅코 만세.

 마녀 1 : 뱅코와 맥베스 만세.

 맥베스 : 잠깐, 불완전한 말이다. 더 말하라. _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전집> <맥베스> , p645


 그(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의 기쁨과 슬픔의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진실되다. 그는 자신의 옛 사랑 벨의 딸을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그의 탐욕으로 인해 상실한 가능성들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가 이 세 정령과 여행을 다니는 동안 그의 내부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분위기가 되살아난다. 음울한 안개가 크리스마스 날의 눈부시게 밝은 해 앞에서 물러나듯이, 차감고 딱딱한 외피는 녹아 없어진다. 그의 독기 섞인 냉소주의에도 불구하고 스크루지가 완전히 크리스마스 정신을 상실하지는 않았고, 다만 그 정신이 잠자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 정신을 되살리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가 선택한 것은 일상사의 기쁨과 성가심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한때 자신의 성품에서 핵심적 부분을 차지했던 감성들을 억압하게 되었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15


 구두쇠 스크루지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현재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배회에서 스크루지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결핍'과 '무지'의 모습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의 페이긴 집단의 아이들 모습과도 같은 소년, 소녀의 모습을 통해 현재 크리스마스 유령은 가난한 이들 - 특히 어린이들 - 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적 책임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묻는다. 


 가난한 이들의 아이들에 대한 그의 배려는 유령 소녀와 소년인 '결핍'과 '무지'를 통해 추가로 표현된다. 이들을 변호하면서 '현재 크리스마스의 정령'은 모든 버려진 아이들을, 잉글랜드의 공장과 콘월의 탄광에서 일하며 런던의 야학에 다니는 "비참하고, 처참하고,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고 비천한" 아이들을 위해 호소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디킨스는 예언자의 역할을 떠맡아 하며 사회의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경고한다. 결핍과 무지는 어린이들을 방치한 나라의 산물들인 것이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40


  이들은 남녀 어린이였다. 누렇고 깡마르고 남루하고 찡그리고 사나운 인상이었지만 그래도 미천하게 납작 엎드린 모습이기도 했다. 우아한 어린 생명이 이들의 안색에 생기를 주고 가장 신선한 색조로 빛나게 했어야 하건만, 꼭 늙은이처럼 깡마르고 쪼글쪼글한 손으로 꼬집고 비틀어서 너덜너덜해진 얼굴이었다. 천사들이 권좌에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악마들이 들어가서 도사리며 협박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어떤 변화, 어떤 타락, 어떤 인간성이 아무리 심하게 변질된 상태라고 해도, 이 놀라운 창조된 세계의 온갖 신비를 다 둘러보아도, 이들보다 더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괴물들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62


 "얘들은 인간의 아이들입니다." 정령이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기네들의 아버지에 대해 탄원을 하면서 나한테 달라붙는 거지요. 이 사내아이는 '무지'라고 합니다. 여자아이는 '결핍'이지요. 둘 다. 또 이들과 같은 급의 모든 아이들을 조심해야 할 거요, 특히 사내아이는요. 아이 이마에 파국의 조짐이 적혀 있는 것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오. 그것을 지우지 않는 한 조심해야 하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63


 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은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세트와 같은 책이다. 매년 읽는 책이지만, 올해 책이 주는 의미는 예년과는 참 다르다. 예전에는 스크루지의 굳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처럼 다가올 새해를 맞아 새롭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즐겁게 읽었다면, 올해에는 '무지'와 '결핍'의 어두움이 무엇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2022년 한 해를 보낸 내 자신과 주변 상황때문일 것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고전이 가진 매력이지만, 올해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 우리를 둘러싼 어두움에 시선이 가는 것을 어쩔수가 없다. 이러한 어두움이 계속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변화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2022년의 마지막은 희망과 기대보다는 더 굳은 각오로 마무리 되는 것 같다...


 "그런들 어떻소? 죽어야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소, 잉여인구도 줄일 겸." 정령이 대답했다. 스크루지는 정령이 자기가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고, 뉘우침과 애통함에 압도되었다. "이보시오, 인간." 정령이 말했다. "댁이 돌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잉여'라는 게 무엇이고 그게 어디 있는지 발견하기 전에는 그 사악한 괴담은 좀 자제하시오. 어떤 사람이 살고 어떤 사람은 죽어야 할지를 당신이 정하겠다는 거요?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44 


 "꼬마 팀은 안 죽고 살아 있었기에 스크루지가 이 아이의 제2의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이 문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으로 본래 원고에는 나오지 않는다. 디킨스는 교정쇄 단계에서 독자에게, 현재의 크리스마스 정령이 언급한 빈자리가 이제는 없고 사람이 달라진 스크루지는 '무지'와 '결핍'의 유령들의 운명에서 적어도 한 아이는 건져낼 수 있었음을 확인시켜줘야 할 필요는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306


 여전히 정령은 무덤만을 가리킬 뿐이었다. "인간들의 삶의 여정은 계속 그대로 그 길을 따라 산다면 결국에는 예정된 지점에 도착하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런 길에서 떠난다면 도착점도 바뀔 것이오. 정령님이 나한테 보여주고 있는 바도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시오!" 정령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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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23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크루지 나오는 책이 크리스마스 캐럴이었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면 생각나는 책 중의 하나예요.
겨울호랑이님, 이번 일요일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겨울호랑이 2022-12-23 23:17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말씀처럼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는 산타 클로스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캐릭터라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이어서 공휴일이 줄어 아쉬움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사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다는 작은 즐거움을 느끼려 합니다.ㅋ 서니데이님께서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Dora 2022-12-24 0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메리크리스마스~

겨울호랑이 2022-12-24 09:31   좋아요 2 | URL
도라님께서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12-24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디킨스가 그의 작품들에서 멜서스주의, 공리주의, 자본주의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더라구요.

성탄절에 읽는 크리스마스캐럴!

복된 성탄되세요.

겨울호랑이 2022-12-24 10:17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디킨스의 맬서스주의, 공리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린 시절 노동현장에서 힘들게 일해야 했던 작가 자신의 불우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께서도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

하나의책장 2022-12-25 1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만 되면 크리스마스 관련된 책과 영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
돌아오는 주가 지나면 2023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네요ㅎㅎ
따뜻하고 행복한 저녁 보내세요! Merry Christmas🎄❤

겨울호랑이 2022-12-25 21:35   좋아요 0 | URL
올해는 유난히 12월부터 추운 겨울인 듯합니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하나의책장님께서도 좋은 시간 되셨는지요? 이제 한 주만 지나면 2022년도 마무리되네요. 남은 한 주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 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77/196


 어젯밤에는 몸도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도 병이 난 것처럼 한속이 나는가 하면, 다시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밤새 내내,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아침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5/196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 ~ 2008)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수용소에 수감된 슈호프의 '어느 평범한 하루'를 배경으로 한다. 대체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이룰 수 있었던 운 좋은 하루. 수용소 밖의 사람들 시선에는 행복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는 만족해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슈호프가 마음 편하게 잠을 자고 난 후에도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온다. 그가 눈을 뜬 다음날에는 '운수 나쁜 날'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10년이라는 기간을 매번 운수 좋게 지낼 확률은 '동전 앞 면'이 3,650번 연속으로 나올 확률보다는 분명 낮을테니까. 아마 슈호프는 그렇게 평균적으로는 '그렇고 그런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수용소 군도>는 '그렇고 그런' 많은 날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저자의 다른 작품 <수용소 군도>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작품이다. 전자가 하루의 수용소 생활을 다룬다면, 후자는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거쳐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수용소 군도>의 축소판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듯, <수용소 군도>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담고 있지 않은 부분을 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10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자부심 넘치던 인간이 반복되는 수용소의 나날을 거치면서, 제로(0)가 되고 출소의 즈음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본인은 원치 않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람의 변화가 아닐까. 


 혁명 후 첫 10년 동안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단지 좁은 계급적 의미만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원 노릇을 단호하게 거부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모조리 가차 없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1> , p60/341


 <어떻게> 하여 인간은 악인이 되고, <어떻게> 하여 선인이 되는지, 젊어서 성공에 도취된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 절대 옳다고 믿어서 잔혹했다. 지나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살인자였으며, 탄압자였다. 가장 나쁜 행동을 할 때,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형무소의  썪은 짚단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최초의 선(善)의 태동을 느꼈다. 차츰 나에게 분명해진 것은, 선악을 가르는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는 곳은 국가 간도, 계급 간도, 정당 간도 아니고, 각 인간의 마음속, 모든 인간의 마음속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이동하고 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들 마음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 악을 가진 마음속에도 선은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아무리 선량한 마음속에도 근절되지 않는 악의 한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세계의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이해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4> , p227/290


 한 인간의 미래를 더 명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석방 때 느낀 <마음속의 변화>다. 이 변화는 영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위병소의 출입구에 서면, 비로소 감옥인 동시에 고향을 떠난다는 감회가 솟구친다. 자신은 여기서 정신적으로 거듭났고, 그 감춰진 마음의 일부는 영구히 여기에 남기고 가는데, 당신의 발만이 <사회>라는 말도 없고 반향도 없는 공간을 향해 가는 것이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6> , p108/220


 수용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법칙 - 밀름의 법칙, 노동의 법칙 - 등은 그들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몰아 넣고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 모습이 수용소의 하루에서 보여지지만, 10년의 수용소 생활에서는 이들이 서로에 대한 투쟁상태를 어느 정도 종식시키고, 수용소의 부당한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다함께 단식투쟁을 하는 '사회계약'에 의한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수용소 생활에서 인류 문명의 진보를 찾는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도 맞지 않고 무리한 논지가 될 것이다. 다만, 적어도 연속된 게임의 법칙에서 '이기적' 행동보다 '이타적' 행동이 보다 더 이롭다는 시행착오를 통한 공감대의 형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일의 기간은 <그 일에 의해서> 결정된다. - 요컨대 그 일이 완료된 때가 노동일이 끝나는 것이다. 만약 일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에는 숙소로 돌아가지 못한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3> , p56/437


 "이봐,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의 법칙이라는 것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 가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는 놈들이고,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놈들, 그리고 정보부원들을 찾아다니는 놈들이야."(p5)...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75/196


 죄수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옆의 죄수다. 만일 모든 죄수들이 서로 시기하지 않고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에이!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29/196


 수용소 안의 밀고는 수용소의 가장 강력한 투쟁 형식이 된다. 즉, <너는 오늘 죽어라, 나는 내일 죽겠다!> 하는 식으로.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4> , p9/290


 저자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통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삶 속에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먼저 자유를 포기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잊어버리는 삶을 강요받는다. 수용소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을 살아야 하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극한에 내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삶을 강요받는 것은 죄수들 뿐이 아니라 수용소의 간수를 비롯한 구성원 전체라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현재'의 삶을 잘 그려낸 것이 바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고 생각된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에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43/196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 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슈호프가 자유를 그리워한 것은 오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단 한 가지 희망에서였다. 그런데,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74/196


 그렇지만, 이와 함께 반복되는 '현재'는 우리를 알게 모르게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하루에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는 <수용소 군도>를 통해 발견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마치 바로 물이 빠지듯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콩나물 싹이 움트듯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용이 독자들이 <수용소 군도>에서의 10년에서 깊이 느낄 수 잇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집단 단식 투쟁은 혼자 하는 것보다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가장 강한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맞춰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단식 투쟁은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결행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의가 없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2> , p207/403


 "하루 중에 제일 추울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야." 부이노프스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밤새껏 내려간 기온이 마지막 고비에 이를 때거든."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38/196 


 이런 점에서 단기(短期) <이반 데니ㅅ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장기(長期) <수용소 군도>는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온전하게 수용소의 삶을 보여주는 두 작품은 2개의 직선이 교차해서 하나의 점(點)이 맺히듯, 독자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비로소 작가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2개의 직선이 교차해야 점 하나가 생기듯이, 어떤 사건이라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개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p143)... <선을 그을 때, 직선과 곡선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직선을 긋기 위해서는 기구가 필요하지만, 곡선은 술 취한 사람이 한 발로도 그을 수 있지. 인생의 선도 이것과 같아.>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3> , p287/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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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8-02 16:4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비교해서 보여주는 글 너무 좋아요. 이반데니소비치는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요. 수용소군도 양이 너무 엄청나서 눈길만 주고 있다는.... 지금은 이것말고도 읽을 책이 쌓여 있는지라, 올 겨울쯤에 한번 도전해볼까 싶네요.

겨울호랑이 2021-08-02 16:47   좋아요 6 | URL
저도 책을 덮고 나면 대부분의 내용을 반납하는 편이라... 가끔은 제가 영화 ‘메멘토‘ 주인공의 증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보곤 합니다 ㅜㅜ. 읽은 책의 내용은 잊어버리고, 읽을 책들은 끝도 없고... 저야말로 ‘현재‘를 사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만, 어쩔 수 없겠지요.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독서괭 2021-08-02 16: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흑흑 <수용소 군도>랑 <이반~> 다 집에 있거든요. <수용소 군도>는 한동안 알라딘서재에서 구매열풍(?)이 불어서 느닷없이 샀는데.. 둘다 못 읽고 있습니다 ㅜㅜ
겨울호랑이님도 읽은 책 내용을 잊으신다니 위로가 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08-02 17:00   좋아요 6 | URL
저도 읽은 책은 쌓여있는 책 중 일부에 불과해서 독서괭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한 권 읽고 열 권을 사는 형편이다보니... ㅠㅠ 한 권 읽고 한 권을 사겠다고 다집을 해봅니다만 지키기 쉽지 않네요. 이젠 그러려니 하고 삽니다.ㅋ 독서괭님 좋은 하루 되세요! ^^:)

미미 2021-08-02 17: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수용소 군도>읽기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북플의 하이클라스인 겨울호랑이님과 같은 책 읽었다는 점도 기쁘고요!!😊

겨울호랑이 2021-08-02 17:32   좋아요 4 | URL
^^:) 저야말로 미미님 덕분에 <수용소 군도>를 읽게 되었어요. 좋은 책을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등급이 ‘안녕(hi)‘ 등급으로 자주 글쓰는 클래스에 속하는 줄도 미미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

mini74 2021-08-02 17: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반 데니소비치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ㅠㅠ 불합리한 상황과 대우에도 묵묵히 노동하며 스프를 휘저으며 건더기를 찾던 인물들ㅠㅠ 그래서 수용소 군도도 읽게됐는데 ㅠㅠ 혈압이 올라서 ㅠㅠ

겨울호랑이 2021-08-02 17:27   좋아요 5 | URL
저는 못 읽었습니다만, 「피에 젖은 땅」을 읽으신 mini님을 비롯한 다른 이웃분들은 더 깊이 내용에 몰입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mini님의 분노도 그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1-08-02 18: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로 이 두 권의 책을 꼭 읽고 싶습니다. 작가의 글로써 이 모든것을 이해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글로써 어떤 삶들을 알 수는 있을것 같아요.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8-02 19:12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께서 직접 읽으시면 부족한 제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도움이 되어 저도 좋네요. 페넬로페님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붕붕툐툐 2021-08-02 2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반~>은 ‘하루‘라 부담 없이 읽었는데, 수용소군도는 아직 엄두가 안나네요~ 비교해 주신 거 참 좋네요~~ 읽어야 하는 리스트가 늘어났습니디~👍

겨울호랑이 2021-08-03 04:43   좋아요 0 | URL
<수용소군도>가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이반~>을 읽으신 붕붕툐툐님이라면 좋은 독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1820~1895)는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서문을 통해 아이스킬로스(Aischylos, BC525~BC456)의 <오레스테이아 Oresteia> 3부작을 몰락해가는 '모권 母權'과 '부권 父權'의 대립으로 해석한 바호펜(Johann Jokof Bachofen)의 <모권론>을 소개한다. 

 

 가족사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이 출판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바호펜은 아주 열심히 수집한 고대 고전 문헌의 무수한 구절에서 이 명제들에 대한 논거를 찾고 있다. "난교"에서 일부일처제로 또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은, 그의 의견에 따르면 특히 그리스 인의 경우에 종교적 표상의 계속적 발전의 결과이며, 새로운 견해를 대표하는 새로운 신들이 낡은 견해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신들 사이에 끼어들어 후자를 점차 뒤로 밀어내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호펜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를 몰락해 가는 모권과 영웅 시대에 발생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는 부권 간의 투쟁의 극적 묘사로 보고 있다.(p20)... <오레스테이아>에 대한 새롭고도 아주 정당한 이 해석은 바호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다._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제4판 서문>, p21


 잠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살펴보자. 먼저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 <아가멤논 Agamemnon>에서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뤼타이메스트라가, 두 번째 작품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Choephoroi>에서는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한 오레스테스가 그려진다. <아가멤논>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아가멤논 살해 이유가 딸 이피게네이아를 트로이아 출정을 위한 제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는 것과 함께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동생 튀에스테르의 관계까지 고려해본다면 과거의 모든 질서가 파괴가 한 가문의 역사 속에 모두 담긴다. 여기서, 바호펜은  혼돈의 원인을 '모권제'와 '부권제'의 대립에서 찾고, 마지막 작품인 <자비로운 여신들 Eumenides>에서 아테네에 의해 부권제의 승리가 선포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바호펜의 해석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문을 던지게 된다. 바호펜의 해석이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그의 해석에 따르면 아가멤논의 딸 살해가 이해되지 않는다. 아테나의 판결로 부권의 승리가 결정되었다면, 그 이전 트로이아 원정 함대의 출정 시점에서는 적어도 두 권한이 비등해야 한다. 자신의 남편을 살해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다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동등한 권한을 사용해 아가멤논을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미 아테나의 재판 이전에 부권제가 확립되었다는 반증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오레스테스>에서 바호펜의 '모권제-부권제'의 대립 구도를 걷어낸다면, 여기에 무엇을 새롭게 대입할 수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여신 아르테미스의 제물로 바치는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이윽고 손위 왕이 이렇게 말했다네.

 "복종치 않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오.

 하나 내 집안의 낙인 자식을 죽임으로써

 제단 옆에서 이 아비의 손을 

 딸의 피로 더럽힌다면, 

 이 또한 괴로운 일이오.

 그 어느 것인들 불행이 아니겠소?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저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오."

 그리하여 그가 한번 운명의 멍에를 목에 매니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불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치욕을 꾀하는 미망(迷妄)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이제 그는 한 여인의 원수를 갚는 전쟁을 돕고

 함대를 위해 미리 제사를 지내고자

 제 딸을 손수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네._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205-227), p38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아가멤논을 '딸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여기지만, 작품 내에서는 함대의 총사령관과 아버지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아가멤논의 모습이 그려진다.  비록, 결심을 하고 나서는 매우 빠른 결단력을 보인 아가멤논이지만, 적어도 그의 내면에서는 아레스가 휘두르는 '두 개의 채찍'이 그에게 내려쳐지고 있었다.


 도시는 모든 시민들에게 공통된 상처를 입었으며

 많은 집에서 나간 많은 남자들이 아레스가 사랑하는

 이중의 채찍, 두 창의 불행, 피 묻은 한 쌍에 의하여

 저승으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는 경우라면, 

 사자가 그런 재앙의 짐을 지고 돌아오는 경우라면,

 그런 복수의 여신들의 찬가를 부르는 것도 어울리겠지요._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640-645), p54


* 각주 : '이중의 채찍' - 국가와 개인을 동시에 치는 채찍이란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가멤논은 '국가'로 대표되는 함대 사령관의 위치와 '개인'(가정)으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국가'의 위치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에 대해 가족의 구성원인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회 발전 단계에서 '가정'공동체의 윤리와 '국가' 공동체의 규범 사이의 대립이, 거칠게 표현해서 '제가 齊家'와 '치국 治國'의 충돌이 <아가멤논>의 주제가 아닐까. 추가적으로 '이중의 채찍'은 아가멤논 뿐 아니라<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남매들에게도, 어머니와 애인에게도 내리쳐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직면한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중의 채찍 소리 가까이 다가오니,

  이미 지하에는 그대들을 도울 이들이 

  누워 있고 지금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저 가증스런 자들의 손은 피로 물들었음이지요._아이스퀼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375-378), p116 


** 각주 : '이중의 채찍' -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 남매의 고통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고,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 가해질 복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그리스어 원문을 확인해봐야 보다 정확하겠지만, 아가멤논을 지칭할 때 '한나라의 왕', '자기 남편' 순으로 지칭했다는 것은 그 역시 '국가' 공동체의 이념을 선택했음을 짐작케 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혈연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보편적인 우리의 아버지에게 탄원하면서 자신의 죄를 정화시키려 한다. 이는 '혈연'이 아닌 '국가'라는 형이상학적 이념에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의미가 아닐까.


 오오, 잔인하고 뻔뻔스런 어머니,

 마치 적의 병사를 묻어버리듯

 시민들의 접근과 애도를 금지한 가운데

 한 나라의 왕을, 자기 남편을

 눈물도 없이 묻어버리다니!_아이스퀼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429-433), p119


 가까이 둘러서서 남자를 위한 이 큰 수의를 

 펼쳐 보여드려라. 아버지께서 보실 수 있도록.

 내 아버지가 아니라 만물을 굽어보시는 위대한 아버지

 태양신께서 말이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어머니의 저주받을

 소행을 보시고 언젠가 내가 심판받는 날,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나를 위해 증언해주실 게

 아니냐._아이스퀼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991-997), p143


 결국 오레스테스는 그를 편드는 아폴론과 클뤼타이메스트라를 편드는 분노의 여신 에리뉘에스의 대립이 벌어지는 법정으로 넘겨진다. 이 재판의 단순한 재판이 아니다.  아폴론이 올림푸스 신이라면, 가이아 여신의 딸인 에리뉘에스는 기간테스에 해당되기에 이 재판은 가치관의 전쟁이자, 소(小) 기간토마키아 Gigantomachia)인 것이다.  '혈연'과 '국가'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이 재판은 결국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오레스테스를 편들면서 결론이 내려진다. '국가'의 이념이 승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내 소임이니라.

 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해 이 투표석을 던지노라.

 나는 결혼하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니라.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734-740), p168 


  여자인 아테나는 왜 오레스테스 편을 들었을까? 이것을 바호펜의 구도인 '모권제-부권제'의 구도에서 바라본다면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남자인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편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폴론의 아테나 설득 이유이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대신 작품 속 아테나의 독백에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머나먼 스카만드로스 강변에 머물던 내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곳은 내가 점유한 땅이라오.

 그곳은 아카이오이족 장수들과 대장들이 창으로 얻은

 전리품 가운데 큰 몫으로서 나에게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나누어준 곳이오.

 테세우스의 자손들을 위한 정선된 몫으로 말이오.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397-401), p168 


 결국, 아테나는 아가멤논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제공받은 것이다. 트로이아 정복 전쟁의 수혜자인 아테나 입장에서는 아가멤논의 죽음으로 더는 헌금을 받을 수 없었기에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내심 기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테나의 오레스테스 편들기도 설명된다. 

 

이를 해석해보면, 아테나가 오레스테스의 편을 들어준 것은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한 경제적 이권 획득에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 편으로, 작품 내에서 아폴론은 동생 헤르메스를 부르며 함께 하는데, 헤르메스가 상업의 신임을 생각하고, 에리뉘에스의 어머니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임을 생각해 본다면, 기간토마키아는 다른 한 편으로 '상업'과 '농업'의 대립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작품의 현실적인 배경을 작가 아이스퀼로스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대립,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대립까지도 끌어온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자.


 오레스테스는 무죄가 선언되었지만, 아직 분노의 여신(구질서, 농업계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팔라스(아테네)는 가장 좋은 몫을 떼어줄 것임을 약속하면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이것은 상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력들이 기존 질서(또는 지주)에게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한 부(富)의 배분을 약속하면서 사회통합이 이루어진 것임을 그려낸 것은 아닐까...


 나는 팔라스와의 동거를 받아들일 것이며, 

 결코 이 도시를 모욕하지 않으리라.

 전능한 제우스와 아레스도

 신들의 성채로 존중하는 이 도시는

 헬라스 신들의 제단을 지켜주는 

 자랑거리가 아니던가!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916-921), p189 


 이제 팔라스의 시민들과 그들의 재류외인들 사이에

 영원한 맹약이 맺어졌도다. 만물을 굽어보시는 제우스께서

 그렇게 하셨고, 운명의 여신이 이에 동의했도다.

 모두들 환성을 올려 우리 노래의 대미를 장식하시오!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1044-1047), p194 


  다소 산만했지만, 이제 <오레스테스> 3부작을 '국가-가족'의 관점에서 정리해보자. 고대 부족 국가에서 도시 국가로 발전하는 시기, 가치관 측면에서는 작은 공동체인 '가족/씨족' 윤리와 '(도시)국가' 윤리가, 경제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상업'과 전통적인 '농업'이 충돌하는 사건이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났다. 초창기에 일어난 이들의 대립은 '국가'의 대외 진출에서 얻어지는 일련의 전리품들을 나누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상업과 농업이 함께 번성하고, 개인/사회적으로 '제가'와 '치국'은 하나의 이념으로 통합되어 갔다... 이런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오레스테스>에서 '국가'를 말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리스 비극의 시대가 바로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429)시대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무리한 연결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그리스 비극이 씌여진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국가를 강조한 그리스 비극을 보면서 자란 시민들이 팔랑크스(Phalanx)를 이루며 전장으로 나아갔다면, 우리가 고전으로 생각하는 그리스 비극이 사실은 '대한뉴스' 수준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할만한 권위자의 추론을 덧붙이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7[23] 민족의 선생으로서 고대 비극은 국가에 헌신적이었다. 정치적 삶과 국가를 위한 충성이 고조되었기에, 예술가들 역시 무엇보다 국가를 생각했다. 국가는 예술 현실의 한 수단이었다 : 그 때문에 국가에 대한 열망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 모임에서 최고의 것이었다.(p189)... 그리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겨냥한 것은 개체가 아니라 국가이다 : 그리고 다시금 국가의 교육은 예술 작품을 향유하도록 모든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예술, 건축물의 모든 위대한 창작은 위대한 민족의 정서를 의도하고 있으며, 그것은 국가가 보존한다. 특히 비극은 해마다 국가를 위해 축제처럼 준비하고, 전 민족을 통합하는 활동이다. 국가는 예술의 현실을 위한 필연적인 수단이었다._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1869년 가을~1872년 가을)> <U I 2b, 1870년 말~1871년 4월>, p222






7[23] 민족의 선생으로서 고대 비극은 국가에 헌신적이었다. 정치적 삶과 국가를 위한 충성이 고조되었기에, 예술가들 역시 무엇보다 국가를 생각했다. 국가는 예술 현실의 한 수단이었다 : 그 때문에 국가에 대한 열망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 모임에서 최고의 것이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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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4-27 14: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레스테스 3부작이 이렇게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네요~~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4-27 15:15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죽을 때에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전의 마음의 준비가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이미 그 두려움, 괴로움, 가련함을 <지나서>, 이미 슬픔을 뛰어넘어, 자기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승복하고, 지금은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에서는 비참한 군도생활의 끝이 그려진다.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의 탈주와 이들에 대한 엄한 처벌 그리고 반란. 죽음을 각오한 후에야 비로소 탈옥을 할 준비가 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우리는 광산 갱도의 마지막 끝, 막장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공통된, 돌멩이가 많은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인격은 그 시기에 완성되어 갔으며, 그 이후에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때 익숙해진 시선과 습관에 충실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지만, <수용소 군도 5>에서 저자 솔제니친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뿐 아니라 이들을 감시하는 경비병들 역시 같은 밑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벗어날 희망을 갖지 못한 버림받은 땅에 놓여진 이들은 분명히 같은 처지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다. 때문에, 이들은 반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각자의 사회적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 계급이 '주인 계급'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다면, 다른 계급은 '노예 계급'이라는 기반에 있어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우리를 가둔 자들도 우리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특수 수용소의 규율은 완전한 격리를 시키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호소할 수도 없고, 아무도 여기서는 석방되지 않고, 아무도 여기서는 도망치지 못한다... 어찌하여 이렇게 순종하게 되었는가? 이런 수용소는 따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배받는 측도, 지배하는 측도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와서, 전자는 몇십 년의 노예의 전통을 짊어지고, 후자는 몇십 년의 주인의 전통을 짋어지고 왔기 때문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결국, 문제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그래,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정치 기구를 가진 사회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에 있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이제 우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말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을 수용소 질서에 가져올 수 있겠다. 위력에 의해 강제로 수감된 이들이 갖는 '힘에의 열망'과 능동적인 힘에 의해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동(Reaktion)에 의해 생겨난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모습은 니체의 도식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강자(경비병)=악인'으로 간주하지만, 강자인 경비병들에게 복종함으로서 겨우 살 수 있었던 노예(죄수)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는 탈옥, 후에는 집단 항명 등을 통해 거부하는 모습은 글자그대로 '노예의 반란'이다. 그렇지만, 결국 진압된 항명과 구질서로의 회귀는 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선과 악 Gut und Bose'의 반복의 전형으로 보여진다. 결국, 죄수들의 르상티망은 자신들을 선(善)으로 규정하고,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절망하게 된다.


 인간이 정서나 감정 없이 사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것을 일단 악이라고 보게 되면, 그 속에 있는 선마저도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있는가? 우리의 인생에 광명이란 있을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억압받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근절할 수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다면, 세상에서 버려진 땅 수용소 군도에도 나타난 '주인 - 노예'계급의 갈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인에게는 스스로 '좋음'이라는 우월 의식을, 노예에게는 '아니다'라는 부정의 답을 끌어내는 이 힘을 솔제니친은 '체제'에서 발견한다. 체제로부터 '반동'으로 낙인 찍힌 이들은 말 그대로 노예(죄수)로 강등되니, 수용소에 있는 이들에게 체제는 말 그대로 하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수용소의 천명(天命)은 동양의 천명인 민본(民本)과는 분명히 다르다.


  만일 경비대의 <장교>가 죄수들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려고 한다면, 그는 그 친절을 병사들 앞에서, 그리고 병사들을 통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죄수들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는 가운데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밀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체제라는 것이다!...  이 체제의 힘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과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반드시 장교나 정치 지도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 있다. 이 청년들의 힘은 그들의 무지에 있다. 수용소의 힘은 이 청년들에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수용소의 '체제'는 개인과 개인을 고립시키고, 새로운 정보를 차단하며, 명령을 주입함으로써 수용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과 개인이, 개인과 집단이 의견을 나누며 교류를 하게 된다면, '여론'이 형성되고 꺾을 수 없는 힘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ebruary Revolution, 1917)으로 소련을 만든 이들 대부분이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곳곳에서 제정 시대보다 열악한 수용소 생활에 대해 언급한다.   

 

 결국, 수용소 내에서 빚어진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의 갈등이 더 첨예해진 것은 '무지'를 주입받은 이들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가지고 인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면에서 히틀러의 극우와 스탈린의 극좌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5>를 통해 '선(善) - 악(惡)'의 문제를 잠시 생각하며, 이제 <수용소 군도 6>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자기의 양심을 남에게 맡긴 채 명령에 따라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선악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인쇄된 지령서나 상사의 구두 명령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선서! 떨리는 음성으로 되풀이하는 이 엄숙한 맹세, 그 의미는 악당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 이런 선서를 통해 아주 간단히 그들은 악당의 편이 되어 국민들을 탄압하게 된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끄림반도 전쟁은 - 그것은 러시아에서 가장 행운의 전쟁이다 - 농노의 해방과 알렉산드로 황제의 여러 개혁을 가져오게 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에는 가장 위대한 힘, 즉 <여론>이 탄생했다... 여론! 사회학자들이 여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정부와 당의 견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자유롭게 표명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견해로서만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질서>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배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도적질을 하여 남을 짓밟고 살아가며, 죄수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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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5 22: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훌륭한 페이퍼로 니체와 아렌트를 다시 한번 복기합니다. 수용소군도가 엄청나군요! 글의 내용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요즘 고민해 보았던게 악의 평범성의 범위 내지 비난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답이 쉽지는 않더라구요!ㅎ 6권까지 힘차게 정진하시길 응원합니다!ㅎ

겨울호랑이 2021-02-15 23:01   좋아요 4 | URL
작가 솔제니친의 말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다녀온 이들에 관한 이야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처참한 삶의 기록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분명 작품 안에 있음을 느낍니다. 때문에 <수용소 군도>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철학은 죽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실증하는 대작이라 여겨집니다.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2-16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수용소 군도의 사유의 깊이가 대단하네요. 저런 사유를 저렇게 엄청난 양의 페이지에 펼쳐놓는단 말입니까? 작가는 역시 위대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2-16 05:47   좋아요 2 | URL
분량도 많지만, 절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서로 다른 이들의 인생은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들 전체가 철학의 실증으로 보입니다. 힘든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이로 인해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scott 2021-02-16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예의 반란을 진압하며 권력에 위력과 정당성을 확립시킨 로마 제국 처럼 수용소 군도속 자리잡은 주인 계급과 노예계급 ,,,죽음의 끝자락에서도 글쓰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솔제니친 작가,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다시한번 더 역사를 상기 시켜보게 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은 겨울 동면을 안하쉼 ^ㅎ^

겨울호랑이 2021-02-16 10:35   좋아요 1 | URL
scott님 말씀처럼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다른 이들처럼 소극적인 분노 표출에 그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쓴 솔제니친은 이를 통해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겨울잠을 자고 싶은데, 먹고 살다보니 봄이 가까이 와버렸네요.ㅋㅋ scott님께서 매일 들려주시는 음악 또한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겨울잠 자기는 틀린 듯 합니다. scott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2-16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 졸업하고 읽었던 기억이 나요
고등학생이였던 남동생이 허락없이 친구에게 빌려주고 아직도 못돌려받은책예요 ㅠ
아저씨가 되서도 그 친구는 누나책 아직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왜 안돌려주는지...
책장이 누렇게 바랬을텐데...ㅋ

겨울호랑이 2021-02-16 12:38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옛말에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제 책을 가져간 이를 그렇게 생각되지는... ㅋ 저도 돈을 빌려줘서 못 받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책을 못 받으면 잊히질 않더군요. 오랜 억류 생활로 수용소 생활을 겪고 있을 <수용소 군도>가 하루 빨리 그레이스님 품 안으로 돌아오길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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