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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진왕(秦王) 부견이 그를 예로 대하여 연인(燕人)들의 희망을 거둬들이고, 그를 가까이하여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다하게 하였으며, 그를 총애하여 연의 무리들을 기울게 하고, 그를 믿어서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맺도록 하였으니 아직은 허물을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왕맹이 어찌하여 모용수를 죽이는데 급급하여 마침내 시장에서 죽 파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 마치 그의 총애를 질투하여 그를 참소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었겠습니까?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9/92


 조금씩 읽던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도 100권을 넘어섰다. 매권이 얇긴 해도 100권이면 적지 않은 분량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전체 책이 294권이니 전체 분량의 30% 정도에 불과하여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읽고 있는 시대는 오호 십육국시기로(五胡 十六國時代, 304 ~ 439)의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7 ~ 385)의 치세로,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 ~ 384) 때 불교를 전파한 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부견은 재상 왕맹(王猛, 325 ~ 375)의 보좌를 받아 전진을 강국으로 만들었는데 독자들은 후한말부터 이어지던 극심한 혼란기에 태평성세의 빛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 이 시기를 읽던 중 저자 사마광의 논평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그의 말에 끌려서가 아니라 그의 논지에 반(反)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이 나온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왕맹은 자신이 멸망시킨 전연의 잔당인 모용수(慕容垂, 326 ~ 396) 일족을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지만,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왕맹은 모용수의 숨겨진 실력과 야심을 알아보고 진언을 하지만, 부견은 천자란 모든 이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를 거절한다.


 관중(關中)의 병사와 백성들은 평소 모용수 부자(父子)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흠모하였다. 왕맹이 부견에게 말하였다.  "모용수 부자는 비유하자면 용과 호랑이 같은데,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만약에 바람과 구름이 끼는 기회를 빌게 된다면 장차 다시는 제압할 수 없을 것이어서 일찍 그를 제거함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영웅을 거둬들여서 사해를 깨끗이 하고자 하는데 어찌 그를 죽인단 말이오? 또한 그가 처음 왔을 때 내가 이미 정성으로 그를 받아들였으니, 필부(匹夫)라도 오히려 자기가 한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마물며 만승(萬乘)의 경우에야?"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0/92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왕맹의 조언이 뛰어난 모용수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깎아내리면서, 부견의 행동이야말로 군주(君主)의 도(道)에 맞는다며 그를 두둔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전투였던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전진이 패배한 후 모용수는 자신의 일족을 거느리고 멀리 떠나 후연(後燕)을 건국하며 왕맹의 통찰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결국, 역사는 사마광이나 부견이 강조한 인(仁)이 송양지인(宋襄之仁)임에 불과했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모용수는 은밀히 연(燕)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의 복록(福祿)을 회복시키려는 모의를 하는데, 때마침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병사를 일으켜 진(秦)을 배반하여 예주목(豫州牧)인 평원공(平原公) 부휘(符暉)가 있는 낙양(落陽)을 공격하려고 모의하자 진왕(秦王) 부견이 역참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 모용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p29)... 모용수가 형양에 이르자 많은 부하들이 굳게 존호에 오를 것을 청하자 모용수는 마침내 진(晉)의 중종(中宗) 고사에 의거하여 대장군, 대도독, 연왕(燕王)이라고 칭하고 승제(承制)하여 업무를 시행하고 이를 통부(統府)라고 하였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34/103


 이해 11월 겨울, 송양공이 초성왕과 홍수에서 교전했다. 초나라 군사가 미처 강을 다 건너지 못했을 때 목이가 건의했다. "초나라는 병사가 많고 우리는 병사가 적으니 이들이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기회를 이용해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송양공이 듣지 않았다... 송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송나라 백성 모두 송양공을 원망했다. 송양공이 변명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 목이가 말했다. "전쟁을 하면 승리를 얻는 것이 공적입니다. 어찌 실제와 동떨어진 말만 늘어놓는 것입니까? 군주의 말씀대로라면 노비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어찌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_ 사마천, <사기 세가> <송미자세가>, p234


 진(秦)의 군사가 비수(肥水)에 가까이 가서 진을 치자 진(晉)나라 군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진(秦)의 제장들이 모두 말하였다. "우리들은 많고 저들은 적어서 그들을 막아 그들이 올라올 수 없게 하여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다만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나게 해서 그들에게 절반 쯤 건너게 한 다음 우리들의 철기(鐵驥)로 그들을 쫓아 죽이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1/103


 잠시 이야기가 엇나가지만, 전진의 부견을 보면서 송양공의 모습을 계속 연상하게 된다. 송양공이 자신의 신하 목이의 조언을 거절하며 분수에 넘치는 자비를 베풀다가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나, 부견이 왕맹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나라가 분열하게 되는 모습은 기시감(旣視感)을 안긴다. 여기에 곁들여, 두 군주 모두 강을 두고 벌일 싸움에서 패배한 점, 각각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다 실리를 놓친 점도 그러하다. 다만, 이에 대해서 사마광은 별다른 평을 하지 않는다. 사실, 송나라 시대를 살았던 사마광이 부견이 모용수를 놓아준 일이 어떤 보답으로 돌아왔는가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그런 평을 <자치통감>에 남겼을까.


 권익(權翼)이 간하였다. "모용수의 용맹과 지략이 보통사람을 능가하고 대대로 동하(東夏)의 호족으로 잠시 화를 피해 왔으나 그 마음이 어찌 관군(冠軍)의 장군 노릇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 두십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이미 그에게 허락하였으니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만승(萬乘)인 경우에야! 만약 천명(天命)이 폐하고 흥함을 갖고 있다면 진실로 지혜와 힘으로써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고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이 보건대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관동의 혼란은 이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6/103


 그것은 <자치통감>이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서를 통해 정치 라이벌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을 경계하려는 사마광의 의중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법(新法)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왕안석과 이를 막으려는(捍) 사마광.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마광은 <대학 大學>에서 '격물(格物)'을 '막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사마광은 왕맹의 모습 속에서 라이벌 왕안석의 모습을 발견하고 왕맹에 대한 직접 비판을 통해 왕안석을 우회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자치통감>의 사마광 평을 보면서 <자치통감>에 자리한 역사관을 깊이 느끼게 된다...


 왕안석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사마광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신종은 사마광에게 <자치통감>의 편찬 작업을 하게 하고, 한 시대가 끝나면 바로 올리게 하고, 또 경연에서 이를 진강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사마광은 자기의 정치철학을 신종에게 말할 수 있었다.(p89)...  사마광이 왕안석의 정책을 '장사꾼이 마지막 이익을 강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서는 왕안석이 새로 만든 기구인 삼사조례사로 와서 근무할 것을 요구하자 돈과 곡식에 관해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했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과 유서의 생각이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눈앞의 이익보다는 도(道)를 추구하여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162/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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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3 23: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심으로 겨울호랑이님의 읽기가 부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03 23:39   좋아요 5 | URL
아닙니다... 진득한 면이 부족해서 마음가는대로 읽는 제 멋대로 독서인걸요... ㅜㅜ
 

 

 이 책은 철저히 서양 중심적인 시각으로 쓰인 책이다. 오시만 제국의 몰락과정을 설명하다 보니 당연히 가장 큰 대외 요인이었던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자 참고한 여러 문헌들과 본문 곳곳에 인용된 당대 정치인들의 일기 및 서신들에서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스만인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보니 오스만 제국의 초상은 마치 유럽 열강들의 선심 덕에 간간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환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456, 역자후가 中 


 앨런 파머(Alan Palmer)의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는 옮긴이의 말처럼 철저하게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본 제국의 몰락사다.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공식적으로 해제된 오스만 제국. 제국이 이와 같이 붕괴하게 된 원인을 저자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으로 바라본다. 

 

 많은 도전들을 극복하며 살아남았던 오스만 제국이 종국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술탄제와 이슬람교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한 논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의 근저에 깔려 있던 종교적인 성격은 제국의 장점이자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서유럽의 혁명기 동안 중앙집권정부라는 새로운 개념이 오스만 제국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 후 세속 정치가들은 종교 성직자들이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던 특권들을 점점 잠식해 갔고 징병제나 의회와 같은 서구적인 제도들이 오스만 제국에서도 실행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탄들은, 유럽과 아시아 영토 모두를 보존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속세와 종교계 모두의 수장이기를 원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449


  종교계와 세속계의 대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16세기 대항해시대와 함께 밀려드는 신대륙에서의 은 유입이 제국의 경제구조를 흔들었고, 이미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는 제국은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의 강제병합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저자의 이러한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현대 학계에서 하렘 정치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역사가들일지라도 17세기 중반 제국이 쇠퇴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 당시 적어도 여섯 가지의 만성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제노바와 라구사(두브로브니크) 출신의 상인들이 페루에서 가져온 싸구려 은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 결과 기초 식량가는 3배로 인상되었다. 피라미드식 구조의 티마르 조세 징수제도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으며 아나톨리아에서는 인구폭발로 인해 산적이 횡행하였고 초만원이 된 여러 도시들에서는 파괴적인 화재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방법과 정복지 통치 방식을 옛 것 그대로 고수하려는 완고함과 1536년부터 유럽 국가들과 체결하기 시작한 '특권협정 Capitulations'도 위의 현상들과 함께 당시의 문제점들로 지적된다....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제국의 이러한 징조들을 당대의 술탄의 신민들이나 외국의 관찰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21 


 성(聖)과 속(俗)이라는 서양 중세의 정치 구도 형태를 그대로 대입해서 분석하는 관점은 이슬람 문화만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역사의 도식에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강제로 끼워 넣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은폐된 제국주의 시대의 중동을 향한 유럽 열강들의 침탈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소 그 뜻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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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경제학부터 도시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의 글을 써왔다. 나의 글은 복합적응체계(Complex Adaptive System) 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세상을 다양한 사건들이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흘러가는 곳으로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어떤 사건의 원인과 개별 행위자 사이의 관계가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복합적응체계의 예로는 생태계, 금융시장, 경제, 영어권, 도시, 기상 시스템, 관습법 체계,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힌두교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_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p32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는 인도를 중심으로 인근 동남아시아사, 아라비아 해 인근, , 오세아니아 대륙과 북동아프리카 해안을 중심의 세계사를 서술한다. 저자 산지브 산얄 (Sanjeev Sanyal)은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 인도양(印度洋, Indian Ocean) 문화권을 연속성 관점에서 구분하고, 주요한 기준은 힌두교의 영향과 모계사회 여부다. 이런 관점에서 인도양을 바라보기에, 자연스럽게 책의 중심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사회가 주가 된다.  


 인도양 연안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몇 가지 연속성이 발견된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주부터 수백 년동안 구전된 전설에 이르기까지, 연속성의 사례는 다양하다... 연속성의 두 번째 주제는 모계사회다. 즉 인도양의 역사에서 모계 관습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모계(matrilineal)"는 개념적으로 "모권(matriarchal, 가모장제)'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모권사회는 관습적으로 여성이 통치자/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는 사회를 말한다. 이와는 달리 모계사회란, 계보가 어머니를 거쳐 여성 조상들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p35)... 인도 서해안을 제외하면 모든 모계사회가 동남아시아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해보자... 왜 어떤 사회는 모계 시스템을 선택하고 다른 사회는 그렇지 않은지를 비교해보면 자못 흥미롭다. 인도 남서부 해안 지역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관습은 아마도 원거리 해상 무역의 결과로 진화했던 것 같다._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p32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상호관계를 말하지만, 저자 자신이 인도인이어서 갖는 인도 중심주의라는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서는 인도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책 내용은 '인도를 갖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국(大國)중심의 교양 역사서라 하겠다. 다만, 인도와 동남아시아사에 대한 역사책 자체가 드문 현실을 생각한다면 크게 흠이 될 정도는 아니라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모계사회'라는 기준을 갖는 저자의 문화권 분류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탐라국(耽羅國)으로 알려져 한반도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 내륙 지방과는 언어, 문화 면에서 차이가 있는 제주도 지역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주체는 여자라는 점에서 모계 중심의 동남아 국가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삼국유사 三國遺事>  속의 김 수로왕(首露王, 42 ~ 199)의 이야기 속의 부인 허황옥(許黃玉, 32 ~ 189) 이야기를 통해 동남아시아 문화권과의 연계성을 찾으려 한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갑자기 완하국(玩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했는데, 달이 차자 알을 낳았다.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었으니, 이름은 탈해(脫解)였다. 그가 바닷길을 따라 (가야에) 왔는데, 키가 석자에다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그가 흔연히 대궐로 가서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그렇다면, 술법으로써 겨뤄보는 것이 좋겠소." 왕이 "좋다"고 했다... 탈해가 마침내 엎드려 항복했다.(p209)... 건무 24년 무신(48) 7월 27일 , 왕이 왕후와 더불어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蹂陁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인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올해 5월에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를 좇으며, 진수로써 외람되게도 왕을 모시고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_ 일연, <삼국유사>, p212 


 <삼국유사> 속에서는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 이야기와 함께 석탈해(昔脫解, BC 19 ~ AD 80)이야기도 나온다. 석탈해가 가야(伽倻)를 빼앗으려 했으나, 수로왕과의 술법 대결에서 패배한 후 떠나갔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속의 다른 전승과도 연결된다. 비록 두 이야기가 내용 상 충돌하는 면이 있으나, 그가 왜(倭)의 동북쪽 천리되는 곳(캄차캬 반도 ?)에서 왔다는 이야기 속에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이 가야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를 고대 '초원의 길' 세력과 '바다의 길' 세력 간의 충돌로 보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양의 역사 속에서 아직도 수수께끼인 고대사를 상상해 보는 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탈해잇금(脫解齒叱今)은 남해왕 때 가락국 바다 가운데 배를 타고 와서 닿았다. 그나라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함께 북 치고 시끌벅적하게 맞이해 머물게 하려 했지만 배가 나는 듯이 달려서 계름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배를 끌어내어 찾아가보았더니 어떤 배 위에 까치들이 모여 있었다. 배 안에 하나 궤가 있었는데 길이가 20자에다 너비는 13자쯤 되었다. 하늘을 향해 아뢴 뒤에 조금 있다 열어보니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고, 일곱 가지의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대접하자 그가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_ 일연, <삼국유사>, p93


 과거에 대한 상상은 이 정도로 하고,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동남아시아 역사를 마저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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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도 점점 모계사회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자 자매들 중심으로 많이 모여요.
사어머니보단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 가는 가족도 많고요. 우리 시댁도 그렇답니다.

겨울호랑이 2020-09-10 13:55   좋아요 1 | URL
친가보다 외가 친척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도 그렇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자주 가다보니 더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 결과로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페크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생각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 형성된 친밀감이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사회분업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부계사회의 결과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가산 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 state)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에서 국가 체제를 분석할 때 등장하는 중심 개념 중 하나다. 베버에 의하면, 가산 국가란 가부장제하의 가정(oikos)을 확대한 개념이다... 베버에 따르면 가산 국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경제 체제는 "특권 체제(liturgic governance)"다. 특권 체제란 특정 집단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와 용역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대신, 그 대가로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에 걸맞는 독점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p4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란 서구에 특수한 근대적인 합리적 기업의 자본주의지, 3천 년 전부터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피렌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 퍼져 있는 고리대금업자, 전쟁 물품 조달자, 관직 및 징세권 임차인, 대상인 기업가, 대금융업자 등의 자본주의가 아니다.(p11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中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는 중국의 경제체제를 봉건제(封建制, feudalism)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정체, 유지되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를 통해 막스의 주장에 반박한다.


 내가 정의하는 가산 국가란 군주가 귀족 가문과 주권을 공유하는 국가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 450년 경 전제 군주 국가가 출현했는데, 그 이전까지가 가산 국가 체제였다. 막스 베버는 전형적인 가산 국가 체제가 왕조 시대 후기 중국의 정부 형태라고 했지만, 나의 견해는 다르다. 내가 보기에 기원전 3세기 최초의 통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가산 국가 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p44)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베버의 견해에 의하면 통치자와 신하가 일정 지역에 대해 '의무 - 독점권' 을 교환하지만, 글란은 중국경제사는 긴장과 화해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봉건제도는 주(周)나라 이후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경제 체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중원(中原)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한 반면, 변경 지역에서는 중앙의 지배를 받는 체제가 발달하게 된다. 


 전국(戰國) 시대 말에 두 가지 분명한 경제 발전 패턴이 출현했다. 화북평원(華北平原) 일대의 위(魏), 한(韓), 조(趙)나라들에서 상공인 계층은 군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이와 반대로 변경 지역의 진(秦), 초(楚), 연(燕) 나라는 전제 군주가 관료제를 공고히 하여 경제적 자원을 총괄했다. 여기서 재정 국가 체제가 비롯되었다...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경제를 통제하는 전국 시대 후기의 경제 체제는,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이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p164)<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중앙 집권 체제국가인 진(秦)과 뒤를 이은 한(漢)에 의해 중국 경제 체제의 전체 틀이 만들어진다. 특히, 한 무제(武帝, BC 156 ~ BC 87)이후 소금, 철의 전매 정책과 통화주조권은 황제의 경제지배권과 토지를 기반으로 한 호족의 저항은 이들의 갈등관계를 잘 보여준다. 


 소금과 철은 일반적인 수요 공급의 탄력성이 떨어지는(비탄력적인) 상품이므로, 통치자는 이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직접세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더라도 상당히 줄일 수는 있다.(p229)... 게다가 통치자는 오직 자신만 가진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다.... 통치자는 화폐와 재정(財政) 정책을 통해, 화폐의 교환 가치를 조절할 수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상품의 가격도 통제할 수 있다. 이처럼 교환 가치를 지렛대 삼아 국가는 거래의 조건을 통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 경제 행위를 관리할 수 있다.(p23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무제(武帝)의 정책을 달가워 하지 않는 반-국가 개입주의 이데올로기와 중농주의 원칙이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무제가 실시했던 시장과 생산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호족(豪族)의 정치적 승리는 부와 투자의 중심이 상업에서 토지로 이동한 것이었다(p238)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반면, 이들의 협력 관계를 잘 보여주는 제도의 예로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를 들 수 있다. 균전제의 목적이 안정적인 세수 확보라면, 이러한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지방 호족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중앙집권체제 경제 하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당나라 시대 확립된 이들 제도는 '안사의 난'을 통해 무너지게 되고, 중국 경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균전제는 백성 간의 사적인 예속 관계를 끊고 국가가 직접 백성을 통제 및 관리하기 위한 폭넓은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균전제의 목적은 토지 경작 면적을 최대한 늘리고 국가의 세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토지 할당 기준을 각 가구의 소비량이 아니라 노동량에 둔 것은 그 목적이 백성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기보다 세금 수입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p322)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당(唐)나라 이전까지 '국가 - 지방' 권력자들의 긴밀한 협조 체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Lushan Rebellion, AD 755 ~ AD 763)을 통해 붕괴한다. 요(遼), 금(金), 원(元) 등 유목민족의 화북(華北)지역 지배는 이 지역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반면, 경제의 중심지는 시장 경제의 확대와 함께 강남(江南) 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중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재정 시스템의 기본을 고정된 인두세에서 진보적인 토지세로 바꾸는 등의 몇 가지 변화는 반란의 직접적 결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토지 소유는 더이상 균전제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後漢) 이후로 토지를 축적해온 귀족도 부침하는 시장 경제에 노출되었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사적인 기획이 번성했다. 특히 소금 산업처럼 경제의 일정 분야가 국가직속으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시장 경제를 규제하던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상인은 대체로 더 확대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바로 남부의 벼농사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었다.(p39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처음에 몽골은 북중국 평원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원으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집행하는 와중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계획은 중단되었지만 북중국의 농업 경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북중국은 극심한 인구 손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209년 금나라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와 명(明)나라 설립에 즈음하여 실시된 1393년 의 인구 조사를 비교하면 3분의 1이 줄어들었다.(p49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그렇지만, 원나라 시기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던 강남 경제는 명(明)나라 초기에 황제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쇠퇴하게 된다. 영락제(永樂帝, AD 1360 ~ AD 1424) 당시 정화(鄭和, AD 1371 ~ AD 1434)의 해외원정 역시 제국주의 성격이 강한 해외 진출이었기에, 송나라 이후 강남을 중심으로 한 중국경제의 발전은 주춤하게 된다.



[그림] Zheng He Returns from Treasure Voyage (출처 : https://www.nationalgeographic.org/thisday/jul6/zheng-he-returns-treasure-voyage/)


 처음 제국을 수립할 때 명 홍무제(주원장)는 강남 지도층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 1380년에 이르러 홍무제는 강남의 지도층이 정부 관료로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가 황제의 계획에 방해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결국 홍무제는 흐름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관리를 숙청하고 강남 대지주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p50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황제에 의한 경제통제와 화북/강남 지역의 경제 침체로 인해 명나라 경제는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침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유럽(정확하게는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은(銀)유입이었다. 오늘날의 양적완화(量的緩和, quantitative easing, QE) 정책을 연상시키는 통화팽창은 다시 명나라 경제를 끌어올렸으며, 이러한 명말의 경제성장은 청나라의 자유방임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명나라 후기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바로 1570년 이후 외국에서 들여온 은(銀)이었다. 화폐로 사용되는 은은 여전히 주조되지 않은 형태로 유통되었지만, 그럼에도 화폐 공급량이 급격히 확대되자 시장 경제의 숨통을 죄던 핵심적 문제가 제거되었다.(p545)... 청나라는 이전 왕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민간 경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상인 조합은 대개 거래 관계보다 출신지를 배경으로 형성되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번성했다.(p559)... 기본적으로 중개인 시스템이나 의집(자유시장)은 모두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 상권으로부터 세금을 간접 징수하는 방식에 속했다. 청나라 정부는 해외 무역에 대해서도 자유방임 정책을 채택했다.(p56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저자는 베버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 경제가 결코 정적인 체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무제 이후 지속적으로 경제지배력을 확대하려고 한 중앙정부와 토지에 기반한 지방실력자들의 협조와 긴장 관계 속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상업이 부수적으로 발달되어왔으며, 화북에서 강남 지역으로 개발이 확대된 역동적인 중국경제사를 우리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발견한다. 또한,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안에서 다음과 같이 역동성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기술 혁신의 부족'이라는 중국 경제의 한계성도 지적한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슘페터식 경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도 발전했지만, 정부와 제도도 함께 발전했다. 국가의 재정 운용과 폭넓은 사회경제의 상호 작용은 시대 상황이나 이념의 방향에 따라 달라졌다. 슘페터식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 왕조는 시의 적절하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p3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18세기 경기 호황은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점진적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p569)... 17세기 말부터 중국은 인구가 급격히 성장했는데, 1680년부터 1850년까지 무려 3배나 성장했다. 전근대 역사상 이런 사례는 없었다. 오래도록 유지된 국내 평화,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 생산의 지역별 전문화, 화폐 공급의 확대가 가져다 준 지속적 경제 성장이 이처럼 전례없는 인구 성장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산 기술의 혁신 부족이었다. 토지, 물, 식량, 에너지 등 자원의 압박은 갈수록 커졌고, 기술 혁신 없이는 이를 완화할 수 없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p60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이처럼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중국 경제체제가 결코 봉건제에서 정체된 체제가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 이래 자유경제와 통제경제 사이에서 다양한 방향 모색의 결과임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국경제사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서양에 비해 뒤지게 된 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일까? 서양의 자본주의, 과학, 종교에는 중국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통해 차차 알아볼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1. 중국 자본주의 관련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대분기>

2. 중국 과학 관련 :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중국 철학 관련 : <중국철학사> <중국고대사상사론> <중국근대사상사론> <중국현대사상사론> <중국정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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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9-08-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꺼운 책을 이렇게 잘 소화해주시다니.. 감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27 21:25   좋아요 1 | URL
사마천님 잘 지내셨는지요? 사마천님께 좋은 말씀을 들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1 칭기스 카한의 뿌리 : 지고하신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난 부르테 치노(잿빛 푸른 이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이었다. 그들이 텡기스를 건너와 오난 강의 발원인 보르칸 성산에 터를 잡으면서 태어난 것이 바타치 칸이다.(p23)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몽골제국의 건설자 칭기스 칸이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친다. 저자는 책에서 고구려 멸망 후 연남생(淵男生, AD 634 ~ AD 679)으로 대표되는 대대로 집안과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연합해서 세운 발해(渤海, 大震)과의 대립 구도가 타타르와 몽골 부족 사이 대립의 기원으로 이어내려왔음을 주장한다.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에서 그 후손 대조영(大祚榮)의 발해(渤海)가 나왔고, 이 발해에서 대조영의 아우 야발(野勃)의 4세손 금행(今幸)의 아들 함보(函普)에서 금(金)나라가 나왔다.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保活里)에서 그 14대 후손 칭기스 칸(成吉思汗)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원(元)나라 황가가 나왔다. 비록 우리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이기는 하나, 고구려(高句麗) 왕가에서 나온 이 계보는 지나 땅의 명明) 대를 거쳐, 금나라 유부(金國遺部)에서 태어난 "아이신교로 누르하지(愛新覺羅 努爾哈赤)"의 청(淸, 1616 ~ 192) 황실로까지 이어진다.(p91)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칭기스칸의 선조는 원리 "고구려왕족(高句麗王族)의 서자(殘蘗)"들로 지방통치자로 파견된 "말 골(말갈)"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고구려가 망해 정통 왕가의 적자(嫡子)들이 사라지자 이들을 대신하여 한 세대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손에 찢기어 무너진 고려구의 옛 땅자리에 "발해(渤海) = 고려(高麗)"를 세운 고구려 왕족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고려 별종") 말갈 대씨 가문이다.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나라에서 안동(安東, 요동 고구려)으로 돌아오자마자 말갈과 접촉하여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p120)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북동부에 거대한 세력을 가진 고구려의 후손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세력을 통합한 것이 테무진, 후에 칭기스 칸(成吉思汗, AD 1162 ~ 1227)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인의 후예였던 장보고(張保皐, AD 787 ~ 846)의 손자인 궁예(金弓裔, AD 869 ~ AD 918). 금(金)을 세운 시조 역시 같은 고구려인의 후손임을 책에서 밝힌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 - 몽골(元) - 청(淸) 순으로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는 나라들이 북방에서 건립된 것으로 해석된다. 


 칭기스 칸은 대야발의 19세 손인데, 그 모골 가계와 숙적이었던 타타르 종족 두 가계는 알고보니 둘 다 한 할아버지에서 나온 가계였고, 그들의 태시조는 바로 고구려 주몽이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바로 이 "진국왕(震國王)" ="팅기스 콘"이 구개음화를 거친 소리의 이름이었고, 그의 어릴 적 이름 "테무진"은 좀더 나중에 보게될 것이나,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大武神)"왕이라는 말이다... 그 주몽의 손자가 바로 어릴적 이름이 달리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었는데, 이 이의 성씨는 "대씨(大氏)"의 유래로 보이고, 그의 이름은 "무쿠리"는 "모굴/몽골"과도 같다.(p86)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후삼국 세 나라,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가운데 스스로를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선포한 궁예의 경우를 보자. 그의 어머니는 사실은 궁파(弓巴) 장보고의 딸이자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 어머니에게서 난 출신성분 때문에 궁예는 갓난아이 시절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러 신라 궁정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는 그 때문에 애꾸눈이 된 불운의 왕자였다.(p188)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은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7세 선조인 금시조 함보에게 아버지이자 동시에 칭기스 칸의 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다. 이 때문에 "고려왕(王)씨"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황족 "완안(完顔)씨"는 서로 같은 것이다. <금사> "금국어해성씨"편의 "왕안은 곧 왕씨다(完顔曰王)"라고 한 말은 바로 이 뜻인 것이다!(p4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소 새롭게 느껴지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나라 - 원(元)나라 - 청(淸)나라를 세운 이들이 한 사람의 선조 "주몽"에서 나온 한 집안 한 가계였다. 이런데도 아직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아역사공정이 설 땅이 있겠는가?(p46)... 이 연구를 통해 나는 발해 - 금나라 - 원나라가 이룬 사적들이 이 땅을 떠나간 고구려 - 발해의 백성,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이룬 세계사적발전 과정이었음을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결과를 알린다.(p47)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먼저, '테무진'을 '대무신왕'으로 해석한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 칸의 이름이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의 테무진 우게를 죽이고,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만약, 저자의 말이 맞는다면, '테무진  우게'야 말로 'original 대무신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테무진'이 '대무신왕'이라는 의미가 맞다고 해도, 그것은 왕을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용사(勇士)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의 뜻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50 예수게이 용사가 타타르의 테무진 우게, 코리 보카를 비롯한 타타르족을 약탈하고 돌아온 바로 그때 임신중이던 후엘룬 부인은 오난강의 델리운 동산에서 칭기스 카한을 낳았다. 태어날 때 오른손에 주사위뼈만한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다. 타타르족의 테무진 우게를 잡아왔을 때 태어났다고 해서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주었다.(p39)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또한,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의 많은 내용을 '음(音)의 유사성'에 의해 설명하는데, 책에서 다른 저자의 내용을 비판할 때 자신이 주장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음의 유사성' 역시 우리가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주류이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은 오늘날의 "아르군 강"이 "에르게네 쿤"과 음운적으로 상응하기 때문에, 곧 이 두 지명이 서로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을 주요한 근거로 보고, 이 때문에 양자가 서로 같은 곳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름소리가 서로 비슷하거나 같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양자가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르게네쿤"이라고 보는 만주 서북방의 "아르군 하"와 정확히 소리가 같은 강이 또 하나 있기 때문이다.(p26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또한, 저자가 주된 근거로 하는 <몽골비사>의 경우, 일종의 암호문이기에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몽골비사>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그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 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 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p27)... 이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암호를 판독하고 내용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문건은 몽골의 왕가 내 소수를 대상으로 쓴 것이고, 이들은 당연히 13세기의 몽골 문화만이 아니라 지형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 때문에 번역을 해놓아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p30)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은 '몽골 = 칭기스 칸'이라는 등식이다.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칭기스 칸 =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등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몽골의 유라시아 제국 정복이 칭기스 칸 개인 또는 집안의 힘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금 제국의 시조라는 함보가 한반도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해서 청(淸)의 중국 정복을 한민족의 대외 정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개인 의견으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었던 고려(高麗)와 몽골과의 관계처럼 지배층의 관계에 한정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몽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몽골인들이 지닌 정치 관념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외교관계를 '국가'나 '왕조'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칭기스 일족과 다른 나라 군주들과의 인신적, 개별적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 고려 국왕은 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갖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 내적 존재였다. 몽골 제국 시기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p155)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사회 다수 구성원인 민중(民衆)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몽골의 세계 정복은 풍부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얻으려는 욕구와 이를 충족하기 위한 움직임이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과 맞물려 얻어진 결과이지, 개인의 힘만으로 이 거대한 정복사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칭기스 칸은 몽골 역사의 한 방편(方便)이라 여겨지다. 극단적이지만, 만약 칭기스 칸이 없었더라도 이 시기 몽골부족의 통합과 남쪽으로의 진출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칭기스 칸만큼의 성과는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비단길의 교역 도시들에 가까이 사는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사람들은 무기도 좋았다. 따라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북쪽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하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다. 이렇게 교역과 습격을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금속과 직물이 북방으로도 흘러들었다.(p59)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유목민의 전투에서 중요한 화살촉은 철로 제작되었으며 대형화/다량화 양상이 나타난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기의 재료인 철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각종 무기와 물자가 유입되는 경로를 장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에 따라 주요한 철의 산지나 교역 통로에 위치한 집단들과 제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p129)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남쪽으로 진출을 위한 동기와 진출의 필요성이 오랜 기간 분열되어 온 몽골족을 통합했다고 바라봤을 때,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가능태(可能態) 중 실현된 하나의 현실태(現實態)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칭기스 칸이 어느 민족의 피를 받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에서 70년대 우리 경제 발전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인 칭기스 칸>은 저자 전원철 박사가 <몽골비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오랜기간 연구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매우 새롭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페이퍼에서 저자의 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것이 사실이지만, 책의 내용 전체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위치에 있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 페이퍼는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쪽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썼음을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칭기스 칸 = 중국인'을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우리의 역사 연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조선의 왕 위만은 원래 연(燕)나라 출신이다. 연나라는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격해 복속시키고 관원을 두어 요새를 쌓았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 땅으로 들어가자 노관 휘하에 있던 위만도 망명해 1,000여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북상투 모양응로 튼 뒤 만이의 옷차림으로 동쪽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사기열전 史記列傳 조선열전 朝鮮列傳> 中


 같은 이유로 위만조선의 선조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고조선(古朝鮮)이 중국 왕조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칭기스 칸의 일대기를 다룬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알기 쉬우면서도 <몽골 비사>의 대부분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는 훌륭한 책이라 여겨지기에, 시간 되실 때 편한 맘으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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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8-1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리가 스코틀랜드 인의 후예라는 책도 읽은 적 있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9-08-11 21:56   좋아요 1 | URL
헉. 제가 들은 가장 먼 조상은 이스라엘 ‘단‘ 족과 수메르인, 훈족의 앗틸라 정도가 가장 멀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브레이브 하트」의 후예라는 상상은 감히 못했습니다 ㅋ

2019-08-1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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