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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겨울호랑이 > <총, 균, 쇠> : ‘도전과 응전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 물음

오늘 올린 「중국의 서진」과 관련하여 「총, 균, 쇠」의 내용과 관점이 의미있다 생각했는데, 마침 2년전 올린 글이 있어 참고로 올립니다. 자세한 비교는 추후 페이퍼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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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서진을 위한 사전 작업을 바라보다


 17세기 중반 중국의 유라시아 정복을 위해서는 당시 청에 닥친 기근과 안정적인 보급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었다. 청나라의 이러한 필요는 조선에게 있어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바라본다면 <남한산성> 속에 묘사된 주화파 - 주전파 논쟁이 의미가 있을 것인지는 조금 더 생각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1630년대 청 제국은 어떻게 자신의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는지 소현세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문명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유라시아 원정을 바라보다
















 <중국의 서진>에서는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대립 관점에서 준가르-청의 전쟁을 바라본다. 여기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몽골족의 천연두에 의한 피해가 40%에 달하는 점 그리고 유목 민족인 몽골족의 말, 양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총, 균, 쇠>와 비교해서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 문명의 수수께끼의 내용까지 곁들어 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 제국주의 국가로  청(淸)을 바라보다


 19세기에는 제국주의 피해자로 전락한 청이지만, 18세기 중앙 아시아에서 청나라가 한 행위를 본다면, 제국주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알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책이 도움이 될 듯하다. 여기에 퍼거슨도 불펜에서 대기시킨다면 제국과 관련해서 보다 안정적인 라인업이 구성될 것이다.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은 조금은 다른 내용이지만, 제국의 안정적인 유지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아 리스트에 추가한다.














4. 몽골 - 여진의 뿌리깊은 원한 관계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중국의 서진>에서는 여진족에게 가슴아프게 당한 몽골족이지만, 이들 역시 제국주의국가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과 여진족의 뿌리깊은 원한 관계는 금(金)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 제국과 몽골의 후예를 멸망시킨 청(淸)의 관계를 보면 춘추(春秋) 시대의 오월(吳越)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이와 관련한 독서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칭기스칸의 평전을 갈음해서 넣도록 한다.







 


















5. 중앙유라시아 역사와 실크로드. 그리고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의 서진>은 17세기와 18세기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중앙유라시아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역사책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보다 많이 알고 싶다면 유라시아 통사(通史)에 대한 이해도 같이 이루어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중앙유라시아가 가지는 중요성은 실크로드(silkroad)의 중요성과 무관하지 않다. 유라시아 역사와 실크로드에 대한 이해는 최근 미중 무역분쟁의 원인 중 하나인 일대일로 전략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지는 부분인만큼 알아두면 여러모로 유용할 듯 하다.




























 6. 러시아 사회사


<중국의 서진>의 두 주인공인 청나라와 몽골(준가르)의 내용은 이정도로 정리하면 될 듯하지만, 리스트 작성을 끝내고 보니 또 다른 러시아에 해당하는 책을 고르지 않은 듯 하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 이후 동방진출이 가속화된 배경과 러시아 농노제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러시아도 그렇게 서운해 하지는 않을 듯 싶다.














<중국의 서진>과 관련하여 위의 내용을 정리할 계획인데, 적어 놓고 보니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일단 말을 꺼내 놓았으니,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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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3-05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리의 <제국> 읽으셨네요.
무척 부럽습니다. 꼭 읽고 싶은 책이라 전 시도했다가 넘 어려워 포기했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님의 후기 기대합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3-05 20:30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만, 읽은 것과 이해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인 듯 합니다. 저도 낑낑대면서 일단 끝내긴 했습니다만, 온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리뷰 작성하면서 정리하다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후에 많이 부족한 리뷰가 되더라도 북다이제스터님의 날카로운 비판 감사히 받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3-05 20:41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
이 책은 여기저기 워낙 인용이 많이 되어 명성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10 페이지도 읽기 쉽지 않았습니다. ㅠㅠ
근데 정말 궁금한데요, 겨울호랑이 님은 대체 이 많은 책 언제 다 읽으세요?
회사도 열심히 잘, 가족에도 열심히 잘, 아기에게도 열심히 잘 하시는데... 반성 많이 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3-05 21:04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제국>은 여러 면에서 어려운 책이지만, 그만큼 유익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번 읽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정말 바랄 게 없을텐데 말이지요. 어렵습니다.ㅜㅜ 북다이제스터님 앞에서 책 많이 읽었다는 말씀 드리기는 부끄러워집니다. 다만, 너무 열심히는 안하려고 한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려면 어깨에 힘들어가고, 부담이 되어서 그냥 대충~ 그때 할 일 그때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ㅋ

북다이제스터 2019-03-05 20:57   좋아요 1 | URL
우문현답이세요. ^^
즐거운 저녁 시간 되세요. ^^
제 팬에게 안부도 전해 주시구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9-03-05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평안한 저녁 되세요!^^:)
 
중국의 서진 - 청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역사도서관 9
피터 C. 퍼듀 지음, 공원국 옮김 / 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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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나는 유럽 국가들과 유라시아에서 경합하는 세 주요 제국, 즉 준가르 몽골, 러시아, 중국이 유사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세 국가 모두 지정학적 경쟁의 추동을 받아 전쟁과 무역과 외교를 통해 상대방과 경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맞수와 경쟁하기 위해 개별 정권들은 자기 영내의 민족들과 이웃 민족들에게서 자원을 거둬들임으로써 '국가성(stateness)'을 증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실질적인 사회적/제도적 개혁을 이루게 된다.(p45)... 나는 이 정복을 중국의 '신장 新疆' 정복이라 보지 않고, 중앙유라시아와 중국 핵심부를 최대한 자신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 중앙유라시아 국가가 거대한 중국의 관료제와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팽창한 것으로 파악한다.(p48) <중국의 서진> 中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은 청(淸)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옹정제(雍正帝 ; 1678 ~1735), 건륭제(乾隆帝, 1711 ~ 1799)가 지금의 신장/위구르 지역의 지배권을 어떻게 확립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러시아인들이 이익을 좇아서 단지 모피와 엄니가 있는 곳에만 관심이 있었던 반면, 중국인들은 안보를 추구하여 단지 즉각적인 위협에만 관심을 두었다.(p132) ...  몽골 원정은 청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중앙유라시아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표지였다.(p181) <중국의 서진> 中 


 1세기에 걸친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다룬 이 시기의 주인공은 3개 제국(帝國)이었다. '중국의 서진' 결과 최후의 유목 제국이었던 준가르(準噶爾, 1619 ~ 1758)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고, 청은 이를 통해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당초 이 전쟁의 배경은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국은 자신의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자신의 역량을 집결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이해 관계는 중앙아시아에서 맞아떨어졌다.


 16세기 말 러시아인과 만주족이라는 두 삼림 민족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서로가 북쪽의 초원을 양분할 때까지 계속해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양자 모두 조직화와 정치기구로 인구의 열세를 보충해야 했다... 혈연관계가 통치 엘리트들을 하나로 묶었고, 농노제 혹은 속박 노예제가 농업 생산자들을 군사화된 국가에 묶어놓았다. 양자는 농경 지대 가장자리의 제한된 자원을 집중시키기 위해 군사적 귀족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양자는 농경 지대 가장자리의 제한된 자원을 집중시키기 위해 군사적 귀족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p80) <중국의 서진> 中


 '경제적 이익'과 '안보'의 관점에서 시작된 청의 진출은 러시아의 양해 속에서 가속화되었다. 중앙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묵인과 양보는 제국의 북쪽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이미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 1637)을 통해 동쪽의 조선을 제압하고, 타이완의 정성공(鄭成功, 1624 ~ 1662)을 제압하면서 제국의 남쪽 안정을 기한 청은 서쪽으로의 진출에 거침이 없었다.


 중국 황제의 갈단 원전은 러시아의 묵인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1727년 캬흐타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들은 중앙유라시아 권력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경선이 정해지지 않은 지역들이 없어짐으로써 변경의 모호성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p211) <중국의 서진> 中


[지도] 준가르-청 전쟁(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Dzungar%E2%80%93Qing_Wars)


 그렇지만, 당초 강희제의 친정(親征)으로 청의 국력을 쏟아부은 이 전쟁은 예상과는 달리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는 침입을 받았을 때 초원 깊이 철수하여 상대의 보급선을 길게 늘어뜨리고, 느슨해진 상대를 각개격파하는 초원의 전통적인 전술의 영향이 컸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 ~ 1821)의 모스크바 침입을 격퇴한 러시아군 전략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의 독일군을 맞이한 소련군 전략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의 전술은 전쟁을 장기전 양상으로 끌고갈 수 있었지만, 청의 물량공세 앞에 결국은 무릎을 꿇게 되었다.


  준가르족은 청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대항하여 놀랄 만큼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을 보호한 두 가지 결정적인 요인, 즉 그들의 기동성과 그들에 닿기까지의 거리 덕분이었다.(p658) ... 만주족은 일단 중국의 중심부를 정복하자 준가르족보다 훨씬 더 많은 경제적인 가용 자원을 얻게 되었고, 인력/곡물/화폐가 조밀한 교환 체계 안에서 연결된 수송망을 물려받았다. 준가르족은 광대하고 통합되지 않은 공간에서 훨씬 더 파편화된 물자들을 긁어 모아야 했고, 이로 인해 그들의 국가 건설 기획은 훨씬 어려웠으며 결국 단명했다. (p657) <중국의 서진> 中


 준가르 제국의 멸망은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규모 억압과 박해로 이어져 이후 몽골 민족은 다시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준가르-청의 전쟁' 결말이다.


  18세기 전반기 내내 과거에 이동하던 할하 유목민들의 경제는 중국 자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화폐화되었고, 청은 그들에게 원정에 필요한 가축을 대라고 점점 강하게 압박했으며, 그들은 관료제의 통제 아래 엄격한 행정적 경계선 속에 점점 한정되어갔다.(p349)... 학살 정책으로 청은 중국 서북 변경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는데, 이는 한 세기가량 지속되었다. 준가르 국가와 민족은 함께 사라졌고, 준가르 초원은 거의 완전한 인구 희박 지역으로 바뀌었다.(p359) <중국의 서진> 中


 그렇다면, 이러한 중국의 서진 결과는 세계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17세기 제국주의 국가 청의 부상과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침턀국으로 청으로 몰락의 흐름을 파악하는 중대 사건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리뷰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처럼 중국 중심부에서 힘을 비축한 청은 그 힘을 변경으로 펼치면서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팽창시켰다. 그렇지만, 전쟁을 통해 효율적인 관료체제를 구축했던 청 제국은, 전쟁의 종료와 함께 관료제의 효율성도 함께 잃게 되어 이후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청의 정복은 중국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중앙유라시아 민족들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나는 청-준가르의 갈등을 국가 건설 경쟁 과정으로 분석했는데, 그 과정에서 쌍방은 경제적, 군사적 자원들을 동원하고, 통치 조직들을 구축하고, 정복과 통치의 이념들을 발전시켜야 했다.(p359)... 대륙을 통틀어, 몽골 제국 해체 와중에 중앙유라시아의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대제국들은 인구가 밀집된 정주 지역의 심장부를 차지했고, 군사력을 공급하기 위해 이 지역들의 자원을 이용했으며, 심장부에서 대륙의 중심부로 다시 밀고 나왔다. 경계에서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협상으로 조약을 체결해 초원, 사막, 오아시스를 가로질러 고정된 경계선을 그었으며, 변경 지역의 이동 민족들을 위한 피난처를 남겨놓지 않았다.(p38) <중국의 서진> 中


 제국 관료제의 효율성이 결정적으로 전환된 것은 18세기 중엽 무렵, 바로 제국의 팽창이 끝났을 때였다. 변경에서의 군사적인 도전이 종료됨으로써 관료 체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가게 되었다. (p699) <중국의 서진> 中


 몽골을 격퇴한 직후 남부 해안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한 것, 초원 유목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던 정책들이 남쪽의 해양 환경에서 실패한 것, 청에서 중안의 이해와 지방 세력가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던 협상을 통한 타협이 탈중앙집권화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 그리고 16세기부터 진행되던 상업화가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침식한 것이 19세기 청을 서구의 침투에 노출시켰다.(p719) <중국의 서진> 中


 이처럼 <중국의 서진>에서는 17세기에 팽창을 하던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두 제국과 이의 희생이 된 다른 하나의 제국을 다룬다. 경제적 이익을 가진 러시아를 협약으로 묶어두고, 안보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제국주의 국가 '청'은 효율적인 관료제를 기반으로 최후의 몽골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상세한 이야기는 다른 리스트와 페이퍼를 통해 소개하기로 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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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 1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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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 1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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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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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0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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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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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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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5: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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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 1961 ~ )의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 ~ 1976 The Cultural Revolution : A People's History 1962 ~ 1976>으로 마무리된다. 일반에게 홍위병(紅衛兵)으로 대표되는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의 시작은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 ~ 1953) 사후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 ~ 1971)에 의한 스탈린 비판과 이를 지켜본 마오쩌둥의 불안감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의 집중적인 집산화 프로그램은 1956년 거대한 역화에 직면했다.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의 마지막 날인 2월 25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하에서 재판도 없이 행해진 무자비한 숙청과 대규모 추방, 처형을 비판했다... 몇 개월 뒤 총리인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일단의 인물들이 국영 농장을 비판한 흐루쇼프를 인용하며 집산화 속도를 견제하고 나섰다. 바야흐로 마오쩌둥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듯 보였다.(p39)  <문화대혁명> 中


 권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마오쩌둥은 자신을 향한 비판의 칼날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생겼다. 특히, 그에게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라는 아픈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과 문화, 예술부문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p53)... 대약진 운동 이후로 힘을 얻어 온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려면 탄압만으로 부족했다. 마오 주석은 혁명의 계승자인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p79)  <문화대혁명> 中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구성원은 달라지겠지만 문화 대혁명이 지속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계속해서 태풍의 눈으로 남을 터였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p114)...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p115) <문화대혁명> 中


 그렇지만, 마오쩌둥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직접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대신 측근들과 인민을 이용한다. 먼저, 자신의 측근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면서 공작대를 만들어 냈다. 공작대에 의해 일련의 사람들이 반동, 반프롤레타리아로 몰리게 되자, 이번에는 마오쩌둥은 반대편에 서면서 공작대 해산을 지시하게 된다. 마오쩌둥에 의해 혐의를 벗게 된 이들은 마오쩌둥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들이 후에 홍위병의 중추가 된다. 마치 <삼국지 三國志>에서 조조(曹操, AD 155 ~ 220)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게 된 30만 청주병(靑州兵)이 하북(河北) 제패의 기반이 된 것처럼, 이들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에게 큰 힘이 되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당이 늘 하던 대로 나아가기로 했다. 요컨대 공작대를 파견해서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석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래서 항저우로 날아갔다. 주석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주석은 편안히 앉아서 중국이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참이었다. (p120) <문화대혁명> 中


 당에 반대하는 중등학교나 대학교의 시위를 그대로 묵인할 경우 반혁명 세력이 미쳐 날뛰도록 방치한다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책망할 수 있었다. 반대로 가장 노골적인 비평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에도 이번에는 주석이 태도를 바꾸어서 '대중을 억압한다'라고 비난할 수 있었다.(p133) <문화대혁명> 中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공작대는 사과 성명을 내고 해산했다. 반역자로 몰렸던 학생들은 혐의를 벗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오쩌둥을 그들의 해방자로 여겼다. 1966년 7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공식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제 그곳에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참가한 1만여 명의 학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p131)...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공작대의 손에 명예가 훼손되고 감금을 당했던 사람들은 한때의 가해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섰다.(p135) <문화대혁명> 中


  복수심에 불타는 홍위병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모든 것을 인습(因習)으로 규정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 대혁명의 수많은 파괴가 이때 발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 이루어진 파괴였지만, 문화 혁명이 끼친 영향은 컸다. 오랜 역사 전통과 단절된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고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진] 문화 대혁명(출처 : 한계레)


  홍위병이 진정한 조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구(舊) 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p150) <문화대혁명> 中


 낡은 세상을 파괴하려는 폭력 사태는 이삼 주 남짓하게 지속되었지만 그 파장은 오래갔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검소한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파란색이나 회색 면으로 된 군복과 검은색 헝겊신을 주로 선택했다.(p169)... 예술과 공예, 산업 부문이 완전히 전멸했다... 문화 대혁명은 산업 분야 곳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장난감이나 원단, 화장품, 가정용품부터 도자기까지 모든 제품은 상표와 포장, 내용에서 봉건적인 과거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p170) <문화대혁명> 中


 <문화대혁명>에서는 홍위병에 의한 파괴 이후에도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여러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홍위병의 세력이 위축된 이후 군대의 등장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 대오 정화 운동, 상산하향 운동을 통해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간 과정과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외국과의 분쟁이 <문화 대혁명>에서 펼쳐진다.


  이처럼 <문화 대혁명>에서 저자는 문화 대혁명 전후 상황에 대해 독자에게 알려 준다. 저자인 프랑크 디쾨터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등장으로 스탈린주의자였던 마오저뚱이 느꼈을 불안감과 국면 전환의 필요성, 마오저뚱의 모호한 태도, 인민들의 복수가 한데 얽혀져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문화 대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3부작의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문화 대혁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임을 책 전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문화 대혁명 말기에 농촌에서 널리 퍼졌던 은밀한 관행들이 이제는 완전히 활성화되었고 농민들은 가족농으로 회귀하거나, 환금 작물을 재배하거나, 개인 소유의 상점을 운영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농촌의 탈집산화는 보다 많은 농촌 인력을 해방시켰고 향진 기업 붐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p492) <문화대혁명> 中


 현재 중국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하급 이주 노동자인 농민공(農民工) 문제가 큰 사회 불안 요인 중 하나이지만, 이들 농민공의 저렴한 노동력 제공이 현대 중국 성장 밑거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최근 중국 경제 성장 역시 문화 대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문화 대혁명을 절대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볼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던지게 된다. (긍정적인 면도 약간 있다는 뜻이지, 문화 대혁명 전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농민공 실직자 문제(출처 : 아시아 투데이)


 이제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을 마무리 하자. 

 

1부인 <해방의 비극 1945 ~ 1957>에서는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후 국민당 정부의 잔재를 지우기 위한 숙청이 주로 다뤄진다. 2부인 <마오의 대기근 1958 ~ 1962>에서는  빠른 시간 내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위한 대약진 운동과 이의 실패가 그려지며, 마지막 3부에서는 <문화 대혁명 1962 ~ 1976>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어난 내전(內戰)인 문화 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사망을 서술한다. 


 인민 3부작의 특징은 개별 사건의 상세한 제시가 될 것이다. 비교적 최근 공개된 사례를 시기별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책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보다 생생한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인민 3부작에서 다루는 사례를 대부분이 비참하다. 이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무엇이며, 이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절로 던지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책이 끝난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되짚을 필요가 있다. 인민 3부작에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마지막으로 끝나지만, 이후 오늘날 미국과 G2를 이루는 강대국으로 서는 시간까지 연결고리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책의 행간 속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무모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발생하지만, 그 속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작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인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현실에 담담히 대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죽음 소식을 들은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묵묵하게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의 모습을 찾게 된다.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그다지 회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윈난 성의 성도 쿤밍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가게마다 술이 매진되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절친한 친구를 초대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있던 유일한 포도주를 개봉했다고 회상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들은 공공 추도식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너무나 슬프게 통곡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어른들의 표정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전날 밤 그렇게 행복해했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p483) <문화 대혁명> 中 


 우리는 인민 3부작을 통해 1945년 ~ 1976년의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중국 민중들의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어려웠던 이념과 배고픔의 시기를 살아낸 이들의 축적된 힘이 오늘날 중국을 만들었음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삶 또한 잘 묘사하기 때문에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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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6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8-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읽어 봤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습니다. 이 책 빠는 수꿜이 있는거 보고 좀 읽기 싫어졌던 기억이.ㅋ 마오와 현대 중국을 알기 위해선 이 책보단 마오쩌둥 평전이 나았던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18-08-11 20:02   좋아요 2 | URL
말씀하신대로 저자가 중국공산당 통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거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이와 관련한 다른 관점의 책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화혁명 역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겠지요. 다만, 누구에게 장점이었는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독자의 기준은 스스로 세워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NamGiKim 2018-08-11 20:06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쪽입니다. 네 여러 책을 보며 해석해야 한다는 호랑이님의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전 개인적으론 이 책 1권의 제목부터 좀 맘에 안들었습니다. ㅎㅎ 많은 사람들에게 읽더라도 좀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에요.ㅎ

겨울호랑이 2018-08-11 20:11   좋아요 1 | URL
인민 3부작의 전체 구성이 저자의 역사 해석과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보다 실감나게 읽히긴 합니다만, 극단적인 사례를 제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징가 2018-08-27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역사가의 세계관을 반영할수밖에 없다는 E.H.Carr 의 견해를 전제로 읽는다면 별 문제없다고 봅니다 다만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도 같이 읽어본다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8-08-27 12:04   좋아요 0 | URL
네 민정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의 양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절대적인 ‘역사적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겠지요. 민정식님께서 추천해 주신 <중국의 붉은 별>은 제목만 들어봤고,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다만, 에드가 스노가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겨우 알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관점은 또 다르겠지요. 말씀을 들은 김에 챙겨놓아야겠습니다. 민정식님 좋은 책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은 중국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전래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네스토리우스 파의 생성과 중앙아시아, 중국으로의 진출과 소멸등의 과정 속에서 이들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본문의 내용을 따라 가보도록 하자.  

 

 안티오키아 태생이고, AD 427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지낸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C 말 ~ 451)가 이끄는 이단은 교회의 분열을 낳았으며,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두 개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실재하며,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호칭도, '신의 어머니(Theotokos / Deipara)'란 호칭도 붙일 수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칼게돈 공의회(AD 451)에서는 단성설을 거부했으며, 네스토리우스의 논문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가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진 유일한 위격 位格이라고 선언했다. 불만을 품은 네스토리우스 추종자들은 자치적인 교회를 설립했으며, 이 교회는 이슬람교가 도래하기 전까지 폭넓게 확산될 운명이었다. 즉 민족 교회가 된 페르시아, 아라비아, 시리아, 인도, 심지어는 수백년 동안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살아남은 중국까지 확산되었다.(p155)' <중세 1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지도]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전파(출처 : http://rolfgross.dreamhosters.com/ManandhisGods/CHRIST/Christianity.html)

 

 동방으로의 전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갔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영내를 빠져나와 파르티아 왕조가 지배하던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적어도 2세기 말까지는 이란을 거쳐 박트리아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부근- 지방까지 퍼지게 되었다.(p101)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AD 5세기경 칼게돈 공의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로마를 떠나 사산조 페르시아로 전파 되면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지만,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이들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박해를 당한 이들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중앙아시아를 건너 중국에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당대(唐代)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샤푸르 2세의 치세(AD 309 ~ 379)에 기독교도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AD 312 년에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하고 이어서 AD 324년에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던 제국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AD 318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처음에는 부분적이었지만, AD 339년 이후에는 전면적인 형태로 확대되었다.(p104)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연구자별로 여러 학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이 비(碑)는 네스토리우스파보다 정통 기독교에 근거한 기독교도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에서 기존 종교와 타협을 모색하다가 자리잡지 못하고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의 저자 김호동 교수와 일치된 견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도 소멸한 이들 네스토리우스파는 어디로 갔을까. 


[사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출처 : 위키백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비문에 보이는 경교의 기본 교리와 전도상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당대(唐代) 경교는 신관이나 성관, 구원관 등 기본 교리에 입각해 판단하면 정통 기독교에 바탕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일파다. 2) 당대 경교는 비록 페르시아 기독교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어떤 상관성은 찾아볼 수 있으나 이단으로 모함된 네스토리우스파 그 자체이거나 또는 그 동전(東傳) 동문(同門)은 아니다.  3) 당대 경교는 시종일관 외래적 이방 요소를 탈피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타종교와 융화, 타협하고 왕치위본주의적인 전도를 표방함으로써 250여년이란 짧지 않은 생존 기간을 갖고도 토착화하지 못한 채 종당에는 중원 일원에서 멸적하고 말았다.(p97) <문명교류사 연구> 中


 비문의 서두에 천명된 경교 교리의 핵심 내용은 서방의 정통교단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 양성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전교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 핵심적인 관념을 불교나 도교의 용어에서 차용하던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p127)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네스토리우스 파는 중국에서 벗어나 육로 실크로드 인근 도시를 대상으로 선교를 강화했고,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이들의 주된 선교지였던 중앙아시아는 몽골도 포함되는데, 이 지역의 유력부족장 역시 네스토리우스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제왕 요한 전설의 한 갈래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교는 9세기 후반 이래로 중국 본토에서는 종교적 탄압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서 거의 소멸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실크로드 연변의 도시와 촌락들에서는 오히려 확고한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교세를 넓혀나갔고, 오대십국 시대 이래로 줄곧 이민족의 통치하에 들어간 북중국에서도 그런 대로 명맥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교가 이처럼 중앙 아시아와 중국 서부, 북부에서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많은 수의 현지주민들을 개종시켜 신도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p170)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사제왕 요한 전설 그리고 소멸


 이슬람 세력에 의해 포위된 중세 유럽인들에게 저 멀리 어디엔가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전설은 널리 퍼져 있었다. 사제왕 요한 전설 속의 나라는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로 생각되어지기도 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어느 왕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중에서 중앙아시아의 사제왕 요한은 칭기스칸(Cinggis Qaγan, AD 1155 ~ 1227)과 대립했던 커레이트 족의 옹 칸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칭기스 칸은 처음에 몽골리아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족의 옹 칸 - 본명은 토그릴- 휘화에 있으면서 그를 도와 여러 차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개띠 해인 AD 1202년에 전투가 벌어져 케레이트측이 패배하고 옹 칸은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케레이트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어왔고, 딸인 소르칵타니 베키 역시 기독교도였다. 따라서 옹 칸은 사제왕 요한으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던 셈이었다.(p61)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몽골비사>에 따르면 케레이트의 옹 칸은 칭기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 때부터 깊은 동맹의 관계였으나, 몽골의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케레이트/ 나이만 부족은 몽골 부족으로 병합되고, 옹 칸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은 끝나게 된다. 그렇지만, 사제왕 요한의 전설은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AD 1460 ~ 1524)의 항해 목적 중 하나가 기독교 왕국의 발견이라는 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케레이드의 옹 칸은 선대 예수게이 칸 시절에,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예수게이 칸과 의형제를 맺었다. 의형제를 맺게 된 내력은 옹 칸이 자기 아버지 코르차코스 보이록 칸(소생)의 동생들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 구르 칸과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싸움에 져서 카라온 협곡으로 숨어들었다가 겨우 100명만 데리고 빠져 나와 예수게이 칸에게 오게 되었다. 예수게이 칸은 그를 자기에게 오게 하고, 자기 군대를 출동시켜 구르 칸을 카신 쪽으로 몰아내고 그 백성을 도로 빼앗아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 그 일로 해서 두 사람은 의형제가 된 것이었다.(150) (p118) <몽골비사> 中 

 

 옹칸과 셍굼은 몸만 빼어 달아나다가 옹 칸이 목이 말라 디딕 사칼의 네쿤 오손에 들어갔다가 나이만의 전초 코리 수베치의 지역에 들게 되었다. 코리 수베치가 옹 칸을 체포했다. "나는 옹 칸이다"하고 신분을 밝혔으나 못 알아보고, 안 믿고 거기서 죽였다.(165)(p165) <몽골비사> 中


 옹 칸의 딸인 소르칵타니 벡키는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래서, 원나라에서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는 별다른 탄압을 받지 않고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AD 14세기 중반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에 의해 공동체가 붕괴되며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오아시스나 초원의 교역로를 따라서 소규모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경우 흑사병의 엄습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이시크 쿨 호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비석들이 AD 1345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가 흑사병으로 소멸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p293)<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네스토리우스 파 교회의 문화 공헌


 이처럼 네스토리우스 파 교회는 역사속으로 소멸되었지만, 이들이 이슬람과 중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슬람 문명은 이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s, BC 384 ~ 322) 등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으며, 중국 문명은 이들로 인해 기독교의 요소들을 불교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보다 사상적으로 심화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의 현자들은 두 가지 경로로 그리스의 과학에 대한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 도시들에 남아 있던 그리스어 원본이었으며, 다른 방법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그리스의 원본을 시리아로 번역한 2차 사료였다.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6~7세기에 페르시아 동쪽 지방에 위치한 준디스하푸르와 같은 도시에서 활동했고, 이곳은 당시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p444) <중세 1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우리에게 이단으로 알려진 네스토리우스 파 교회의 존재는 아직 낯설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최근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를 통해 이들이 일찍이 우리 문화에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 영향은 미미했겠지만. 


[사진] 불국사 돌 십자가(출처 : http://photohs.co.kr/xe/baejae/677)

 

 중국에 전파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의 이러한 융화와 타협의 일면을 이해하는 것은 인접한 한반도에 유입된 기독교의 실체를 알아내는 데 귀감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유입된 기독교가 경교라고 가정할 때, 불국사 경내에 십자가가 묻혀 있을 수도 있으며, 불교 속에 기독교적 요소가, 기독교 속에 불교적 요소가 섞여 있을 법도 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불교 속의 기독교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불교 유입의 수반품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종교로서의 기독교 자체의 직접적인 유입이나 전파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초전에 불과한 것이다.(p599) <고대문명교류사> 中


 네스토리우스 파는 유럽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인정받지 못한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고 다양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사회와 역사는 이처럼 기억되지 않는 이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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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1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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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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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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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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