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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 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 state)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에서 국가 체제를 분석할 때 등장하는 중심 개념 중 하나다. 베버에 의하면, 가산 국가란 가부장제하의 가정(oikos)을 확대한 개념이다... 베버에 따르면 가산 국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경제 체제는 "특권 체제(liturgic governance)"다. 특권 체제란 특정 집단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와 용역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대신, 그 대가로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에 걸맞는 독점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p4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란 서구에 특수한 근대적인 합리적 기업의 자본주의지, 3천 년 전부터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피렌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 퍼져 있는 고리대금업자, 전쟁 물품 조달자, 관직 및 징세권 임차인, 대상인 기업가, 대금융업자 등의 자본주의가 아니다.(p11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中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는 중국의 경제체제를 봉건제(封建制, feudalism)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정체, 유지되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를 통해 막스의 주장에 반박한다.


 내가 정의하는 가산 국가란 군주가 귀족 가문과 주권을 공유하는 국가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 450년 경 전제 군주 국가가 출현했는데, 그 이전까지가 가산 국가 체제였다. 막스 베버는 전형적인 가산 국가 체제가 왕조 시대 후기 중국의 정부 형태라고 했지만, 나의 견해는 다르다. 내가 보기에 기원전 3세기 최초의 통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가산 국가 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p44)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베버의 견해에 의하면 통치자와 신하가 일정 지역에 대해 '의무 - 독점권' 을 교환하지만, 글란은 중국경제사는 긴장과 화해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봉건제도는 주(周)나라 이후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경제 체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중원(中原)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한 반면, 변경 지역에서는 중앙의 지배를 받는 체제가 발달하게 된다. 


 전국(戰國) 시대 말에 두 가지 분명한 경제 발전 패턴이 출현했다. 화북평원(華北平原) 일대의 위(魏), 한(韓), 조(趙)나라들에서 상공인 계층은 군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이와 반대로 변경 지역의 진(秦), 초(楚), 연(燕) 나라는 전제 군주가 관료제를 공고히 하여 경제적 자원을 총괄했다. 여기서 재정 국가 체제가 비롯되었다...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경제를 통제하는 전국 시대 후기의 경제 체제는,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이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p164)<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중앙 집권 체제국가인 진(秦)과 뒤를 이은 한(漢)에 의해 중국 경제 체제의 전체 틀이 만들어진다. 특히, 한 무제(武帝, BC 156 ~ BC 87)이후 소금, 철의 전매 정책과 통화주조권은 황제의 경제지배권과 토지를 기반으로 한 호족의 저항은 이들의 갈등관계를 잘 보여준다. 


 소금과 철은 일반적인 수요 공급의 탄력성이 떨어지는(비탄력적인) 상품이므로, 통치자는 이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직접세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더라도 상당히 줄일 수는 있다.(p229)... 게다가 통치자는 오직 자신만 가진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다.... 통치자는 화폐와 재정(財政) 정책을 통해, 화폐의 교환 가치를 조절할 수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상품의 가격도 통제할 수 있다. 이처럼 교환 가치를 지렛대 삼아 국가는 거래의 조건을 통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 경제 행위를 관리할 수 있다.(p23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무제(武帝)의 정책을 달가워 하지 않는 반-국가 개입주의 이데올로기와 중농주의 원칙이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무제가 실시했던 시장과 생산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호족(豪族)의 정치적 승리는 부와 투자의 중심이 상업에서 토지로 이동한 것이었다(p238)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반면, 이들의 협력 관계를 잘 보여주는 제도의 예로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를 들 수 있다. 균전제의 목적이 안정적인 세수 확보라면, 이러한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지방 호족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중앙집권체제 경제 하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당나라 시대 확립된 이들 제도는 '안사의 난'을 통해 무너지게 되고, 중국 경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균전제는 백성 간의 사적인 예속 관계를 끊고 국가가 직접 백성을 통제 및 관리하기 위한 폭넓은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균전제의 목적은 토지 경작 면적을 최대한 늘리고 국가의 세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토지 할당 기준을 각 가구의 소비량이 아니라 노동량에 둔 것은 그 목적이 백성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기보다 세금 수입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p322)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당(唐)나라 이전까지 '국가 - 지방' 권력자들의 긴밀한 협조 체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Lushan Rebellion, AD 755 ~ AD 763)을 통해 붕괴한다. 요(遼), 금(金), 원(元) 등 유목민족의 화북(華北)지역 지배는 이 지역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반면, 경제의 중심지는 시장 경제의 확대와 함께 강남(江南) 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중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재정 시스템의 기본을 고정된 인두세에서 진보적인 토지세로 바꾸는 등의 몇 가지 변화는 반란의 직접적 결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토지 소유는 더이상 균전제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後漢) 이후로 토지를 축적해온 귀족도 부침하는 시장 경제에 노출되었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사적인 기획이 번성했다. 특히 소금 산업처럼 경제의 일정 분야가 국가직속으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시장 경제를 규제하던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상인은 대체로 더 확대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바로 남부의 벼농사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었다.(p39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처음에 몽골은 북중국 평원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원으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집행하는 와중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계획은 중단되었지만 북중국의 농업 경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북중국은 극심한 인구 손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209년 금나라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와 명(明)나라 설립에 즈음하여 실시된 1393년 의 인구 조사를 비교하면 3분의 1이 줄어들었다.(p49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그렇지만, 원나라 시기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던 강남 경제는 명(明)나라 초기에 황제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쇠퇴하게 된다. 영락제(永樂帝, AD 1360 ~ AD 1424) 당시 정화(鄭和, AD 1371 ~ AD 1434)의 해외원정 역시 제국주의 성격이 강한 해외 진출이었기에, 송나라 이후 강남을 중심으로 한 중국경제의 발전은 주춤하게 된다.



[그림] Zheng He Returns from Treasure Voyage (출처 : https://www.nationalgeographic.org/thisday/jul6/zheng-he-returns-treasure-voyage/)


 처음 제국을 수립할 때 명 홍무제(주원장)는 강남 지도층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 1380년에 이르러 홍무제는 강남의 지도층이 정부 관료로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가 황제의 계획에 방해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결국 홍무제는 흐름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관리를 숙청하고 강남 대지주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p50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황제에 의한 경제통제와 화북/강남 지역의 경제 침체로 인해 명나라 경제는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침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유럽(정확하게는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은(銀)유입이었다. 오늘날의 양적완화(量的緩和, quantitative easing, QE) 정책을 연상시키는 통화팽창은 다시 명나라 경제를 끌어올렸으며, 이러한 명말의 경제성장은 청나라의 자유방임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명나라 후기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바로 1570년 이후 외국에서 들여온 은(銀)이었다. 화폐로 사용되는 은은 여전히 주조되지 않은 형태로 유통되었지만, 그럼에도 화폐 공급량이 급격히 확대되자 시장 경제의 숨통을 죄던 핵심적 문제가 제거되었다.(p545)... 청나라는 이전 왕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민간 경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상인 조합은 대개 거래 관계보다 출신지를 배경으로 형성되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번성했다.(p559)... 기본적으로 중개인 시스템이나 의집(자유시장)은 모두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 상권으로부터 세금을 간접 징수하는 방식에 속했다. 청나라 정부는 해외 무역에 대해서도 자유방임 정책을 채택했다.(p56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저자는 베버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 경제가 결코 정적인 체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무제 이후 지속적으로 경제지배력을 확대하려고 한 중앙정부와 토지에 기반한 지방실력자들의 협조와 긴장 관계 속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상업이 부수적으로 발달되어왔으며, 화북에서 강남 지역으로 개발이 확대된 역동적인 중국경제사를 우리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발견한다. 또한,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안에서 다음과 같이 역동성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기술 혁신의 부족'이라는 중국 경제의 한계성도 지적한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슘페터식 경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도 발전했지만, 정부와 제도도 함께 발전했다. 국가의 재정 운용과 폭넓은 사회경제의 상호 작용은 시대 상황이나 이념의 방향에 따라 달라졌다. 슘페터식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 왕조는 시의 적절하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p3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18세기 경기 호황은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점진적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p569)... 17세기 말부터 중국은 인구가 급격히 성장했는데, 1680년부터 1850년까지 무려 3배나 성장했다. 전근대 역사상 이런 사례는 없었다. 오래도록 유지된 국내 평화,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 생산의 지역별 전문화, 화폐 공급의 확대가 가져다 준 지속적 경제 성장이 이처럼 전례없는 인구 성장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산 기술의 혁신 부족이었다. 토지, 물, 식량, 에너지 등 자원의 압박은 갈수록 커졌고, 기술 혁신 없이는 이를 완화할 수 없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p60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이처럼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중국 경제체제가 결코 봉건제에서 정체된 체제가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 이래 자유경제와 통제경제 사이에서 다양한 방향 모색의 결과임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국경제사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서양에 비해 뒤지게 된 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일까? 서양의 자본주의, 과학, 종교에는 중국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통해 차차 알아볼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1. 중국 자본주의 관련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대분기>

2. 중국 과학 관련 :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중국 철학 관련 : <중국철학사> <중국고대사상사론> <중국근대사상사론> <중국현대사상사론> <중국정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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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9-08-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꺼운 책을 이렇게 잘 소화해주시다니.. 감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27 21:25   좋아요 1 | URL
사마천님 잘 지내셨는지요? 사마천님께 좋은 말씀을 들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1 칭기스 카한의 뿌리 : 지고하신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난 부르테 치노(잿빛 푸른 이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이었다. 그들이 텡기스를 건너와 오난 강의 발원인 보르칸 성산에 터를 잡으면서 태어난 것이 바타치 칸이다.(p23)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몽골제국의 건설자 칭기스 칸이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친다. 저자는 책에서 고구려 멸망 후 연남생(淵男生, AD 634 ~ AD 679)으로 대표되는 대대로 집안과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연합해서 세운 발해(渤海, 大震)과의 대립 구도가 타타르와 몽골 부족 사이 대립의 기원으로 이어내려왔음을 주장한다.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에서 그 후손 대조영(大祚榮)의 발해(渤海)가 나왔고, 이 발해에서 대조영의 아우 야발(野勃)의 4세손 금행(今幸)의 아들 함보(函普)에서 금(金)나라가 나왔다.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保活里)에서 그 14대 후손 칭기스 칸(成吉思汗)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원(元)나라 황가가 나왔다. 비록 우리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이기는 하나, 고구려(高句麗) 왕가에서 나온 이 계보는 지나 땅의 명明) 대를 거쳐, 금나라 유부(金國遺部)에서 태어난 "아이신교로 누르하지(愛新覺羅 努爾哈赤)"의 청(淸, 1616 ~ 192) 황실로까지 이어진다.(p91)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칭기스칸의 선조는 원리 "고구려왕족(高句麗王族)의 서자(殘蘗)"들로 지방통치자로 파견된 "말 골(말갈)"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고구려가 망해 정통 왕가의 적자(嫡子)들이 사라지자 이들을 대신하여 한 세대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손에 찢기어 무너진 고려구의 옛 땅자리에 "발해(渤海) = 고려(高麗)"를 세운 고구려 왕족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고려 별종") 말갈 대씨 가문이다.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나라에서 안동(安東, 요동 고구려)으로 돌아오자마자 말갈과 접촉하여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p120)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북동부에 거대한 세력을 가진 고구려의 후손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세력을 통합한 것이 테무진, 후에 칭기스 칸(成吉思汗, AD 1162 ~ 1227)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인의 후예였던 장보고(張保皐, AD 787 ~ 846)의 손자인 궁예(金弓裔, AD 869 ~ AD 918). 금(金)을 세운 시조 역시 같은 고구려인의 후손임을 책에서 밝힌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 - 몽골(元) - 청(淸) 순으로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는 나라들이 북방에서 건립된 것으로 해석된다. 


 칭기스 칸은 대야발의 19세 손인데, 그 모골 가계와 숙적이었던 타타르 종족 두 가계는 알고보니 둘 다 한 할아버지에서 나온 가계였고, 그들의 태시조는 바로 고구려 주몽이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바로 이 "진국왕(震國王)" ="팅기스 콘"이 구개음화를 거친 소리의 이름이었고, 그의 어릴 적 이름 "테무진"은 좀더 나중에 보게될 것이나,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大武神)"왕이라는 말이다... 그 주몽의 손자가 바로 어릴적 이름이 달리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었는데, 이 이의 성씨는 "대씨(大氏)"의 유래로 보이고, 그의 이름은 "무쿠리"는 "모굴/몽골"과도 같다.(p86)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후삼국 세 나라,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가운데 스스로를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선포한 궁예의 경우를 보자. 그의 어머니는 사실은 궁파(弓巴) 장보고의 딸이자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 어머니에게서 난 출신성분 때문에 궁예는 갓난아이 시절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러 신라 궁정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는 그 때문에 애꾸눈이 된 불운의 왕자였다.(p188)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은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7세 선조인 금시조 함보에게 아버지이자 동시에 칭기스 칸의 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다. 이 때문에 "고려왕(王)씨"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황족 "완안(完顔)씨"는 서로 같은 것이다. <금사> "금국어해성씨"편의 "왕안은 곧 왕씨다(完顔曰王)"라고 한 말은 바로 이 뜻인 것이다!(p4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소 새롭게 느껴지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나라 - 원(元)나라 - 청(淸)나라를 세운 이들이 한 사람의 선조 "주몽"에서 나온 한 집안 한 가계였다. 이런데도 아직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아역사공정이 설 땅이 있겠는가?(p46)... 이 연구를 통해 나는 발해 - 금나라 - 원나라가 이룬 사적들이 이 땅을 떠나간 고구려 - 발해의 백성,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이룬 세계사적발전 과정이었음을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결과를 알린다.(p47)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먼저, '테무진'을 '대무신왕'으로 해석한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 칸의 이름이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의 테무진 우게를 죽이고,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만약, 저자의 말이 맞는다면, '테무진  우게'야 말로 'original 대무신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테무진'이 '대무신왕'이라는 의미가 맞다고 해도, 그것은 왕을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용사(勇士)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의 뜻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50 예수게이 용사가 타타르의 테무진 우게, 코리 보카를 비롯한 타타르족을 약탈하고 돌아온 바로 그때 임신중이던 후엘룬 부인은 오난강의 델리운 동산에서 칭기스 카한을 낳았다. 태어날 때 오른손에 주사위뼈만한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다. 타타르족의 테무진 우게를 잡아왔을 때 태어났다고 해서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주었다.(p39)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또한,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의 많은 내용을 '음(音)의 유사성'에 의해 설명하는데, 책에서 다른 저자의 내용을 비판할 때 자신이 주장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음의 유사성' 역시 우리가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주류이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은 오늘날의 "아르군 강"이 "에르게네 쿤"과 음운적으로 상응하기 때문에, 곧 이 두 지명이 서로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을 주요한 근거로 보고, 이 때문에 양자가 서로 같은 곳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름소리가 서로 비슷하거나 같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양자가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르게네쿤"이라고 보는 만주 서북방의 "아르군 하"와 정확히 소리가 같은 강이 또 하나 있기 때문이다.(p26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또한, 저자가 주된 근거로 하는 <몽골비사>의 경우, 일종의 암호문이기에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몽골비사>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그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 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 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p27)... 이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암호를 판독하고 내용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문건은 몽골의 왕가 내 소수를 대상으로 쓴 것이고, 이들은 당연히 13세기의 몽골 문화만이 아니라 지형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 때문에 번역을 해놓아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p30)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은 '몽골 = 칭기스 칸'이라는 등식이다.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칭기스 칸 =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등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몽골의 유라시아 제국 정복이 칭기스 칸 개인 또는 집안의 힘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금 제국의 시조라는 함보가 한반도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해서 청(淸)의 중국 정복을 한민족의 대외 정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개인 의견으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었던 고려(高麗)와 몽골과의 관계처럼 지배층의 관계에 한정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몽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몽골인들이 지닌 정치 관념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외교관계를 '국가'나 '왕조'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칭기스 일족과 다른 나라 군주들과의 인신적, 개별적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 고려 국왕은 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갖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 내적 존재였다. 몽골 제국 시기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p155)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사회 다수 구성원인 민중(民衆)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몽골의 세계 정복은 풍부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얻으려는 욕구와 이를 충족하기 위한 움직임이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과 맞물려 얻어진 결과이지, 개인의 힘만으로 이 거대한 정복사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칭기스 칸은 몽골 역사의 한 방편(方便)이라 여겨지다. 극단적이지만, 만약 칭기스 칸이 없었더라도 이 시기 몽골부족의 통합과 남쪽으로의 진출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칭기스 칸만큼의 성과는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비단길의 교역 도시들에 가까이 사는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사람들은 무기도 좋았다. 따라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북쪽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하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다. 이렇게 교역과 습격을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금속과 직물이 북방으로도 흘러들었다.(p59)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유목민의 전투에서 중요한 화살촉은 철로 제작되었으며 대형화/다량화 양상이 나타난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기의 재료인 철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각종 무기와 물자가 유입되는 경로를 장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에 따라 주요한 철의 산지나 교역 통로에 위치한 집단들과 제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p129)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남쪽으로 진출을 위한 동기와 진출의 필요성이 오랜 기간 분열되어 온 몽골족을 통합했다고 바라봤을 때,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가능태(可能態) 중 실현된 하나의 현실태(現實態)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칭기스 칸이 어느 민족의 피를 받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에서 70년대 우리 경제 발전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인 칭기스 칸>은 저자 전원철 박사가 <몽골비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오랜기간 연구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매우 새롭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페이퍼에서 저자의 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것이 사실이지만, 책의 내용 전체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위치에 있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 페이퍼는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쪽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썼음을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칭기스 칸 = 중국인'을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우리의 역사 연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조선의 왕 위만은 원래 연(燕)나라 출신이다. 연나라는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격해 복속시키고 관원을 두어 요새를 쌓았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 땅으로 들어가자 노관 휘하에 있던 위만도 망명해 1,000여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북상투 모양응로 튼 뒤 만이의 옷차림으로 동쪽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사기열전 史記列傳 조선열전 朝鮮列傳> 中


 같은 이유로 위만조선의 선조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고조선(古朝鮮)이 중국 왕조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칭기스 칸의 일대기를 다룬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알기 쉬우면서도 <몽골 비사>의 대부분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는 훌륭한 책이라 여겨지기에, 시간 되실 때 편한 맘으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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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8-1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리가 스코틀랜드 인의 후예라는 책도 읽은 적 있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9-08-11 21:56   좋아요 1 | URL
헉. 제가 들은 가장 먼 조상은 이스라엘 ‘단‘ 족과 수메르인, 훈족의 앗틸라 정도가 가장 멀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브레이브 하트」의 후예라는 상상은 감히 못했습니다 ㅋ

2019-08-1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겨울호랑이 > <총, 균, 쇠> : ‘도전과 응전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 물음

오늘 올린 「중국의 서진」과 관련하여 「총, 균, 쇠」의 내용과 관점이 의미있다 생각했는데, 마침 2년전 올린 글이 있어 참고로 올립니다. 자세한 비교는 추후 페이퍼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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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서진을 위한 사전 작업을 바라보다


 17세기 중반 중국의 유라시아 정복을 위해서는 당시 청에 닥친 기근과 안정적인 보급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었다. 청나라의 이러한 필요는 조선에게 있어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바라본다면 <남한산성> 속에 묘사된 주화파 - 주전파 논쟁이 의미가 있을 것인지는 조금 더 생각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1630년대 청 제국은 어떻게 자신의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는지 소현세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문명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유라시아 원정을 바라보다
















 <중국의 서진>에서는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대립 관점에서 준가르-청의 전쟁을 바라본다. 여기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몽골족의 천연두에 의한 피해가 40%에 달하는 점 그리고 유목 민족인 몽골족의 말, 양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총, 균, 쇠>와 비교해서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 문명의 수수께끼의 내용까지 곁들어 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 제국주의 국가로  청(淸)을 바라보다


 19세기에는 제국주의 피해자로 전락한 청이지만, 18세기 중앙 아시아에서 청나라가 한 행위를 본다면, 제국주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알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책이 도움이 될 듯하다. 여기에 퍼거슨도 불펜에서 대기시킨다면 제국과 관련해서 보다 안정적인 라인업이 구성될 것이다.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은 조금은 다른 내용이지만, 제국의 안정적인 유지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아 리스트에 추가한다.














4. 몽골 - 여진의 뿌리깊은 원한 관계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중국의 서진>에서는 여진족에게 가슴아프게 당한 몽골족이지만, 이들 역시 제국주의국가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과 여진족의 뿌리깊은 원한 관계는 금(金)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 제국과 몽골의 후예를 멸망시킨 청(淸)의 관계를 보면 춘추(春秋) 시대의 오월(吳越)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이와 관련한 독서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칭기스칸의 평전을 갈음해서 넣도록 한다.







 


















5. 중앙유라시아 역사와 실크로드. 그리고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의 서진>은 17세기와 18세기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중앙유라시아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역사책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보다 많이 알고 싶다면 유라시아 통사(通史)에 대한 이해도 같이 이루어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중앙유라시아가 가지는 중요성은 실크로드(silkroad)의 중요성과 무관하지 않다. 유라시아 역사와 실크로드에 대한 이해는 최근 미중 무역분쟁의 원인 중 하나인 일대일로 전략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지는 부분인만큼 알아두면 여러모로 유용할 듯 하다.




























 6. 러시아 사회사


<중국의 서진>의 두 주인공인 청나라와 몽골(준가르)의 내용은 이정도로 정리하면 될 듯하지만, 리스트 작성을 끝내고 보니 또 다른 러시아에 해당하는 책을 고르지 않은 듯 하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 이후 동방진출이 가속화된 배경과 러시아 농노제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러시아도 그렇게 서운해 하지는 않을 듯 싶다.














<중국의 서진>과 관련하여 위의 내용을 정리할 계획인데, 적어 놓고 보니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일단 말을 꺼내 놓았으니,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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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3-05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리의 <제국> 읽으셨네요.
무척 부럽습니다. 꼭 읽고 싶은 책이라 전 시도했다가 넘 어려워 포기했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님의 후기 기대합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3-05 20:30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만, 읽은 것과 이해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인 듯 합니다. 저도 낑낑대면서 일단 끝내긴 했습니다만, 온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리뷰 작성하면서 정리하다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후에 많이 부족한 리뷰가 되더라도 북다이제스터님의 날카로운 비판 감사히 받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3-05 20:41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
이 책은 여기저기 워낙 인용이 많이 되어 명성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10 페이지도 읽기 쉽지 않았습니다. ㅠㅠ
근데 정말 궁금한데요, 겨울호랑이 님은 대체 이 많은 책 언제 다 읽으세요?
회사도 열심히 잘, 가족에도 열심히 잘, 아기에게도 열심히 잘 하시는데... 반성 많이 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3-05 21:04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제국>은 여러 면에서 어려운 책이지만, 그만큼 유익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번 읽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정말 바랄 게 없을텐데 말이지요. 어렵습니다.ㅜㅜ 북다이제스터님 앞에서 책 많이 읽었다는 말씀 드리기는 부끄러워집니다. 다만, 너무 열심히는 안하려고 한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려면 어깨에 힘들어가고, 부담이 되어서 그냥 대충~ 그때 할 일 그때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ㅋ

북다이제스터 2019-03-05 20:57   좋아요 1 | URL
우문현답이세요. ^^
즐거운 저녁 시간 되세요. ^^
제 팬에게 안부도 전해 주시구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9-03-05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평안한 저녁 되세요!^^:)
 
중국의 서진 - 청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역사도서관 9
피터 C. 퍼듀 지음, 공원국 옮김 / 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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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나는 유럽 국가들과 유라시아에서 경합하는 세 주요 제국, 즉 준가르 몽골, 러시아, 중국이 유사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세 국가 모두 지정학적 경쟁의 추동을 받아 전쟁과 무역과 외교를 통해 상대방과 경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맞수와 경쟁하기 위해 개별 정권들은 자기 영내의 민족들과 이웃 민족들에게서 자원을 거둬들임으로써 '국가성(stateness)'을 증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실질적인 사회적/제도적 개혁을 이루게 된다.(p45)... 나는 이 정복을 중국의 '신장 新疆' 정복이라 보지 않고, 중앙유라시아와 중국 핵심부를 최대한 자신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 중앙유라시아 국가가 거대한 중국의 관료제와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팽창한 것으로 파악한다.(p48) <중국의 서진> 中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은 청(淸)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옹정제(雍正帝 ; 1678 ~1735), 건륭제(乾隆帝, 1711 ~ 1799)가 지금의 신장/위구르 지역의 지배권을 어떻게 확립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러시아인들이 이익을 좇아서 단지 모피와 엄니가 있는 곳에만 관심이 있었던 반면, 중국인들은 안보를 추구하여 단지 즉각적인 위협에만 관심을 두었다.(p132) ...  몽골 원정은 청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중앙유라시아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표지였다.(p181) <중국의 서진> 中 


 1세기에 걸친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다룬 이 시기의 주인공은 3개 제국(帝國)이었다. '중국의 서진' 결과 최후의 유목 제국이었던 준가르(準噶爾, 1619 ~ 1758)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고, 청은 이를 통해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당초 이 전쟁의 배경은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국은 자신의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자신의 역량을 집결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이해 관계는 중앙아시아에서 맞아떨어졌다.


 16세기 말 러시아인과 만주족이라는 두 삼림 민족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서로가 북쪽의 초원을 양분할 때까지 계속해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양자 모두 조직화와 정치기구로 인구의 열세를 보충해야 했다... 혈연관계가 통치 엘리트들을 하나로 묶었고, 농노제 혹은 속박 노예제가 농업 생산자들을 군사화된 국가에 묶어놓았다. 양자는 농경 지대 가장자리의 제한된 자원을 집중시키기 위해 군사적 귀족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양자는 농경 지대 가장자리의 제한된 자원을 집중시키기 위해 군사적 귀족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p80) <중국의 서진> 中


 '경제적 이익'과 '안보'의 관점에서 시작된 청의 진출은 러시아의 양해 속에서 가속화되었다. 중앙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묵인과 양보는 제국의 북쪽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이미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 1637)을 통해 동쪽의 조선을 제압하고, 타이완의 정성공(鄭成功, 1624 ~ 1662)을 제압하면서 제국의 남쪽 안정을 기한 청은 서쪽으로의 진출에 거침이 없었다.


 중국 황제의 갈단 원전은 러시아의 묵인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1727년 캬흐타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들은 중앙유라시아 권력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경선이 정해지지 않은 지역들이 없어짐으로써 변경의 모호성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p211) <중국의 서진> 中


[지도] 준가르-청 전쟁(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Dzungar%E2%80%93Qing_Wars)


 그렇지만, 당초 강희제의 친정(親征)으로 청의 국력을 쏟아부은 이 전쟁은 예상과는 달리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는 침입을 받았을 때 초원 깊이 철수하여 상대의 보급선을 길게 늘어뜨리고, 느슨해진 상대를 각개격파하는 초원의 전통적인 전술의 영향이 컸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 ~ 1821)의 모스크바 침입을 격퇴한 러시아군 전략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의 독일군을 맞이한 소련군 전략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의 전술은 전쟁을 장기전 양상으로 끌고갈 수 있었지만, 청의 물량공세 앞에 결국은 무릎을 꿇게 되었다.


  준가르족은 청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대항하여 놀랄 만큼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을 보호한 두 가지 결정적인 요인, 즉 그들의 기동성과 그들에 닿기까지의 거리 덕분이었다.(p658) ... 만주족은 일단 중국의 중심부를 정복하자 준가르족보다 훨씬 더 많은 경제적인 가용 자원을 얻게 되었고, 인력/곡물/화폐가 조밀한 교환 체계 안에서 연결된 수송망을 물려받았다. 준가르족은 광대하고 통합되지 않은 공간에서 훨씬 더 파편화된 물자들을 긁어 모아야 했고, 이로 인해 그들의 국가 건설 기획은 훨씬 어려웠으며 결국 단명했다. (p657) <중국의 서진> 中


 준가르 제국의 멸망은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규모 억압과 박해로 이어져 이후 몽골 민족은 다시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준가르-청의 전쟁' 결말이다.


  18세기 전반기 내내 과거에 이동하던 할하 유목민들의 경제는 중국 자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화폐화되었고, 청은 그들에게 원정에 필요한 가축을 대라고 점점 강하게 압박했으며, 그들은 관료제의 통제 아래 엄격한 행정적 경계선 속에 점점 한정되어갔다.(p349)... 학살 정책으로 청은 중국 서북 변경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는데, 이는 한 세기가량 지속되었다. 준가르 국가와 민족은 함께 사라졌고, 준가르 초원은 거의 완전한 인구 희박 지역으로 바뀌었다.(p359) <중국의 서진> 中


 그렇다면, 이러한 중국의 서진 결과는 세계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17세기 제국주의 국가 청의 부상과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침턀국으로 청으로 몰락의 흐름을 파악하는 중대 사건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리뷰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처럼 중국 중심부에서 힘을 비축한 청은 그 힘을 변경으로 펼치면서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팽창시켰다. 그렇지만, 전쟁을 통해 효율적인 관료체제를 구축했던 청 제국은, 전쟁의 종료와 함께 관료제의 효율성도 함께 잃게 되어 이후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청의 정복은 중국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중앙유라시아 민족들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나는 청-준가르의 갈등을 국가 건설 경쟁 과정으로 분석했는데, 그 과정에서 쌍방은 경제적, 군사적 자원들을 동원하고, 통치 조직들을 구축하고, 정복과 통치의 이념들을 발전시켜야 했다.(p359)... 대륙을 통틀어, 몽골 제국 해체 와중에 중앙유라시아의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대제국들은 인구가 밀집된 정주 지역의 심장부를 차지했고, 군사력을 공급하기 위해 이 지역들의 자원을 이용했으며, 심장부에서 대륙의 중심부로 다시 밀고 나왔다. 경계에서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협상으로 조약을 체결해 초원, 사막, 오아시스를 가로질러 고정된 경계선을 그었으며, 변경 지역의 이동 민족들을 위한 피난처를 남겨놓지 않았다.(p38) <중국의 서진> 中


 제국 관료제의 효율성이 결정적으로 전환된 것은 18세기 중엽 무렵, 바로 제국의 팽창이 끝났을 때였다. 변경에서의 군사적인 도전이 종료됨으로써 관료 체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가게 되었다. (p699) <중국의 서진> 中


 몽골을 격퇴한 직후 남부 해안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한 것, 초원 유목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던 정책들이 남쪽의 해양 환경에서 실패한 것, 청에서 중안의 이해와 지방 세력가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던 협상을 통한 타협이 탈중앙집권화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 그리고 16세기부터 진행되던 상업화가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침식한 것이 19세기 청을 서구의 침투에 노출시켰다.(p719) <중국의 서진> 中


 이처럼 <중국의 서진>에서는 17세기에 팽창을 하던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두 제국과 이의 희생이 된 다른 하나의 제국을 다룬다. 경제적 이익을 가진 러시아를 협약으로 묶어두고, 안보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제국주의 국가 '청'은 효율적인 관료제를 기반으로 최후의 몽골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상세한 이야기는 다른 리스트와 페이퍼를 통해 소개하기로 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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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 1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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