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무함마드의 종교체험 이후 그는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이 땅에 전하는 '신의 사자 使者'가 되었다. 처음에는 메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들과 중소상인 계층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점차 무함마드의 추종자 수가 증가하여 메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그들에 대하여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심해지는 탄압에 견디지 못한 일부 추종자가 615년경에는 기독교 국가인 아비니니아 Abyssia로 피신하기도 했다. 무함마드 자신도 하쉼가 家의 족장이며 자신의 보호자였던 삼촌 아부 딸림과 그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아내 카디자가 메카 포교 10년째 되는 해에 모두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_ 손주영, <이슬람 : 교리, 사상, 역사> , p69


  서기 622년의 헤지라(Hegira)는 이슬람력(歷) 원년으로, 무함마드(마호메트 Muhammad, 570~632)의 메디나 이주에 기원을 두고 있다. 종교적 체험 후 메카의 유력자에게 핍박을 받으며 무함마드는 점차 고립되고 있었다. 이 시기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도시가 메디나다. 민족 구성과 도시 분위기 열어 면에서 메카와 대척점에 있던 메디나는 무함마드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었다.


 메디나, 원래는 야슬리브라고 하였으나 무함마드가 메카 지배계급의 박해를 받고 이 도시로 그를 따르는 일단의 신자들과 옮긴 후, 이 도시 주민의 지지를 얻어 8년 동안 메카와 아라비아 북서지방의 유목부족들과 무장충돌을 하여 630년 무함마드 자신이 메카를 항복시킴으로써 이 도시를 마디나(메디나), 즉 '예언자의 도시'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메디나는 모든 점에서 메카와 극히 대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메디나와 대조적인 메카에서 있었던 무함마드의 종교활동, 즉 코란의 계시는 두 개의 다른 세계에서 전개된 것을 의식하고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_ 김용선, <꾸란> , p29


 2022년 5월 9일. 이제 내일부터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약 두 달 정도의 인수위 기간을 거치면서 그로 인해 경험한 고립감과 답답함이 더 커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함마드의 이주가 새로운 시대의 기원이 되었듯, 내일 이후의 역사가 우리에게  의미있는 분기점이 되길 소망해 본다...


 이러한 좌절의 시기에 메디나에서 구원의 손길이 온다. 메디나 주민들이 그를 그들의 중재자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메디나는 씨족간의 장기간 불화와 유혈 투쟁으로 주민들이 평화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을 중재해줄 공정한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그 적임자로 무함마드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메디나 주민의 요구에 응해 수백 명의 추종자들을 먼저 메디나로 보내고, 그도 622년에 그곳으로 이주한다. 이 해는 후에 이슬람력의 원년이 된다.  _ 손주영, <이슬람 : 교리, 사상, 역사> , p71


 무함마드는 혼란에 빠져 있던 메디나 주민을 이슬람의 기치 아래 통합시키고 그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추종자들을 합쳐 최초의 움마 ummmah(이슬람 공동체)를 만들었다... 메디나에 이슬람 공동체를 수립한 무함마드는 메카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p71)... 메카와 메디나 간의 대결이 되었으며 바드르 전투(624년)를 시작으로 양측간에 세 번의 전투가 있었다. 이러한 전투의 결과 메디나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디나의 무슬림군을 이끌고 630년 메카를 평화적으로 점령한다.  _ 손주영, <이슬람 : 교리, 사상, 역사> , p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톨릭 성가 161번. 성체를 찬송하세.


   1) 하늘에 별들을 누가 셀 수 있는가

   2)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3)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4)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5)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6)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후렴 : 이만큼 무수히 성체(聖體)를 찬송하세 


 성가듣기 : https://maria.catholic.or.kr/musicfiles/mp3/2004090161.mp3


 얼마 전 주일학교 개학을 맞아 딸아이와 함께 참여한 어린이 미사 중 들었던 성체성가 <성체를 찬송하세>. 성인 성가로 듣던 음색, 빠르기와는 다르게 경쾌하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다소 엉뚱하게도 <금강경 金剛經>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진리(眞理)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을 성가와 금강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수선했던 2022년의 3월도 다 지나갔지만, 모르는 사이 봄은 우리 곁에 와있었다. 들판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작은 꽃을 보며, 영원(永遠)의 시간 앞에 필멸(必滅)의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제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11-1.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11-2. 須菩提言 : "甚多, 世尊!  但諸恒河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가 사뢰었다 :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11-3.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써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11-4. 須菩提言 : "甚多, 世尊!" 수보리가 사뢰었다 :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11-5. 佛告須菩提 :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_ 김용옥,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p25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파엘 2022-03-30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글을 읽으며 저도 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평화를 빕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30 00:0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라파엘님께서도 평안한 밤 되세요! ^^:)

페넬로페 2022-03-30 0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성가를 듣습니다^^
성가의 가사를 금강경에 비유하시다니👍👍

겨울호랑이 2022-03-30 00:09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그냥 성가를 듣다보니 떠오르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분심(分心)이 많은 듯 합니다... ^^:)
 

49 이제야 너는 연옥에 다다랐으니

저어기 빙 둘러막은 벼랑을 보라.

저기 벌어진 듯한 들머리를 보라...


73 우리는 가까이 가서 한군데에 다다르니

먼저 보던 자리처럼 벽이

쩍 벌어진 듯 틈이 있는데, 거기


76 문 하나가 있어 그 아래엔 그리로

통하는 서로 색이 다른 세 층계와 아직껏 

한마디 말도 없는 문지기를 보았노라.


94 그리로 우리가 갔는데, 그 첫 층계의 

한 대리석은 어찌나 닦여져서 맑던지

그 안에 내가 있는 양 나를 바라보았노라.


97 어두운 자줏빛보다 진하게 물들여진 둘째 층은

껄끄럽고 구워진 돌로 되었는데 

가로 세로 금이 간 것이고, 


100 위에 얹힌 셋째 층은 활활 타는

반암 班岩인 양 핏줄에서 용솟음치는 피와 같이 보이더라... _ 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연옥편> (제9곡)  


[그림] Dante's Purgatory(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ederest/dantes-purgatory/)


 이승과 저승에서의 창조 체계의 연관을 단테 이상으로 잘 표현한 이는 없었다. 지옥을 벗어나 중간적이고 일시적인 세계, 즉 지상에 이르며, 거기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연옥산의 정상에 지상 낙원이 있다. 지상 낙원은 더 이상 세상 어딘가 잊혀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적 차원, 즉 연옥에서의 정화를 마치고 천국에서의 영화(榮化)에 들어가기 전의 무오(無汚)의 차원에 위치한다._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636


 자크 르 고프 (Jacques Le Goff, 1924 ~ 2014)는 <연옥의 탄생 La Naissance du purgatoire> 에서 중세에 등장한 교리적으로는 스콜라 철학으로, 문학적으로는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에 의해 완성된 '연옥'의 역사를 보여준다. 비록 성경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중세 가톨릭 철학에서 '연옥'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심판 전과 심판 후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알게 된다.


  연옥 체계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연옥이 생겨남으로 인해 죽음 이전의 기간이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도 죄인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경고와 늦기 전에 지옥을 면할 준비를 하라는 권고를 받아오긴 했지만, 그처럼 중한 저주를 면하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부터 열심히 준비해야 할 것이었고 추문스러운 생활을 하거나 과도한 죄악을 저질러서도 안 되며 죄를 지었다며 가능한 속히 모범적인 참회를 해야 할 것이었다.(p558)... 연옥 체계가 가져온 두번째 결과는 그것이 산 자들과 죽은 자들간의 관계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연옥의 영혼들은 누구에게 구원을 청하러 나타나는가? 우선은 그들의 혈육지친이고, 그 다음이 배우자로서, 특히 13세기에는 연옥에 있는 망자들의 과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_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560


 오늘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평화방송(CPBC)을 듣고 있던 중, 묵주(로사리오)기도가 흘러나왔다. 기도문은 듣던 중 유난히 "구원송"의 한 구절이 걸린다.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해당 구절은 오랜 기간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로 번역되어 사용되다가, 약 10년 전부터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정확하지는 않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기도문을 음미하고 그 뜻을 새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으나, 신앙심이 부족한 나와 같은 이들은 습관적으로 기도문을 외우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자꾸 생각나게 된다. 해당 기도문의 영어 원문은 아래와 같다.


[Fatima Prayer] "O my Jesus, forgive us our sins. Save us from the fires of hell. Lead all souls to heaven, especially those in most need of Thy mercy."


 라틴어 원문도 있지만, 라틴어는 잘 모르기에 영어 구문을 들여다 보고 생각을 해본다. 한국어와 영어 기도문을 1:1로 대응시키면,  (A)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 forgive us our sins, (B)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Save us from the fires of hell, (C)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 Lead all souls to heaven (D)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 especially those in most need of Thy mercy 로 연결시킬 수 있겠다. 


 (C)와 (D)의 번역과 관련해서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용이 길어질 듯 하니여기서는 일단 넘기고, 내용상의 연결로만 생각해보자. 기도문에서 (C)와 (D)의 연결을 '돌보시며'가 아닌 '돌보시되'로 할 경우에는 (D)가 (C)에 종속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반면, 영어 원문에서는 (D)가 (A), (B), (C) 전체와 관련을 맺기에 구 번역에서 내용상의 차이가 생긴 것은 아니었을까.


 정리해보자면, 영어 원문에서는 (A), (B), C) 중에 (D)가 especially로 연결되는 반면, 이전 번역에서는 (A), (B), (C)가 대등하게 나열되고 (D)는 (C)에 종속되는 의미로 느껴져 기도문이 수정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연옥과 기도문에 관한 내용이다 보니, 종교가 다른 이들에게는 다소 껄끄러운 부분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럴 경우에는 이번 페이퍼를 그냥 구문론과 서양 문화의 한 부분 - 연옥 - 을 잠시 생각하는 수준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연옥은 그 모든 지옥적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천국 쪾으로 훨씬 더 가까이 쏠려 있다. 그러므로 카톨릭 기독교의 저승 신앙의 원동력은, 연옥의 영혼들이 <신곡>에 나오는 것과 같은 환희에 찬 지진음을 내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그 중단 없는 행렬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이 천국의 열망일 것이다._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68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1-07-04 16: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때마침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었는데, 겨울 호랑님 덕분에 좋은 정보 알게 되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7-04 18:58   좋아요 2 | URL
작은 나눔이 되어서 저도 기쁩니다. 김민우님 남은 일요일 저녁 행복한 시간 되세요! ^^:)
 

 크게 신비롭고, 크게 밝고, 더없는, 비견할 바 없는 이 주문은, 이 주문을 외우는 사람에게 위대한 선물을 가져다 주지요. 이 무등등주는 일체의 고를 제거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의 경지를 나타냈지만, 마지막 구절은 모든 보살,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모든 보살들의 삶의 문제로 귀착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이해하고 주문을 독송하면 곧 일체의 고(苦)가 사라진다는 것이죠.(p237)...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아제아제 바라아제(揭諦揭諦 波羅揭諦)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모지사바하(苦提娑婆訶)


 건너간 자여 건너간 자여! 피안에 건너간 자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p238)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中


 이 가르침을 바르게 읽어 줌으로써 이해력이 뛰어난 구도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곧바로 의식체의 탈바꿈을 이룰 수가 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방황할 필요도 없이 공중으로 난 수직의 길을 통해 곧바로 영원한 자유에 이를 것이다.(p448)...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만일 그대가 애착심과 혐오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면 앞에서 말한 어떤 환영이 나타나더라도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에게 기도하라. 그리고 자비의 신에게 기도하라.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걸으라. 그대가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라. 모든 나약함을 버리라. 그대의 아들과 딸들 또는 두고 온 친척들에 대한 애착을 끊으라. 그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천상계에서 나오는 흰색 빛의 길과 인간 세상에서 나오는 노란색 빛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라. 보석들로 장식된 대저택과 아름다운 정원 속으로 들어가라.(p447) <티벳 사자의 서>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금요일 친척 어른 중 한 분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여수에서 3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3일장을 치르면서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과 함께 오랫만에 친지들을 만나는 반가움도 느낀 자리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죽은 이의 중재로 살아있는 이들이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가 장례식임을 재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번 장례는 불교의식으로 진행된 장례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게는 조금은 특별한 자리였습니다. 가톨릭에서 진행되는 의식에 익숙한 제게 불교 의식은 생소했고,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빈소에서 ‘연도‘를 바치게 됩니다. 연도는 죽은 이에 대한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내용의 기도로 주로 신자들이 모여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블교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독송하는데, 스님들과 불자분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가톨릭의 미사는 제사의 의미로 제사장인 사제(신부)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며, 사제의 참여는 미사와 성사로 한정된 반면, 수행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스님과 불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는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은 이의 안식을 청하는 「연도」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추구하는 「금강경」의 독송은 구원의 종교와 깨달음의 종교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여겨집니다.

동시에, 두 종교에 공통된 면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입관의식에서 「반야심경」의 구절을 외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교 의식에서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께 청하는 묵주기도(로사리오 기도)를 떠올려 봅니다. 성모 마리아와 관세음보살께 의지하는 마음은 아기가 무서운 일을 당했을 때 엄마의 치마 뒤로 숨는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자한 엄마에 대한 기대. 이것은 종교를 뛰어넘은 우리 모두의 같은 마음은 이닐까 생각해 봅니다...

3일동안 곁눈으로 불교의식을 지켜봤기에 제 생각은 거칠고 부족함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부분은 차차 다듬어가야할 부분이라 생각하면서 다음 과제로 넘겨 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같다면 2020-02-20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께서 장례를 치르면서 생각했을 수 많은 질문들과 의문이 이 글보다 훨씬 깊은 심연까지 였음을 압니다. 글 너머의 생각과 마음도 전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0-02-20 05:11   좋아요 1 | URL
죽음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을 임을 실감하게 장례에 참여할 때마다 느낍니다. 그런 면에서 장례는 죽은 이의 의식이라기 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라는 필립 아리에스의 말이 계속 떠오르네요... 나와같다면님 감사합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