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에 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8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책세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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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자연 법칙의 위반이다. 확고하고 불변하는 경험은 자연의 법칙을 확립해왔으며, 따라서 모든 경험에 입각한 추론이 완벽한 것처럼 기적에 상반되는 증거 역시 그 성격상 완벽하다... 자연의 일상적인 과정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면 어떤 것도 기적이 될 수 없다. 건강해 보이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죽음은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종종 목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면 그것은 어떤 시대에도 어떤 지역에서도 목격된 적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기적이다. 따라서 모든 기적적인 사건에는 그것에 상반되는 일양(一樣)적인 경험이 있게 마련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사건은 기적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다. _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p19

점점 계몽됨에 따라 우리는 개국 역사에는 기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기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들은 신비한 것을 향한 인류의 일상적인 성향에서 야기된 것이며, 이 같은 성향이 식견과 학식을 통해 종종 제어를 받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에서 철저히 근절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_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p24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 ~ 1776)은 <기적에 관하여 Of Miracles> 에서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현상을 기적이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자연 법칙의 위반이 종교의 토대가 될 수 없음을 비판한다. <기적에 관하여>에서 흄은 경험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사건보다 일상에서 발생할 가능성을 높은 사건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면서 종교란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측면에서 다가가야함을 말한다.

흄의 기적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흄이 정의한 기적이 바로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 즉 위반 기적이라는 점이다. 기적이란 종교를 지지하는 합리적인 토대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의 표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흄의 기적에 대한 비판이 갖는 철학적 의의를 종교의 참된 토대는 이신론자들이 신뢰했던 경험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자연적인 인식 능력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_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해제, p113

이 기적이 어떤 새로운 종교 체계와 연관될 경우,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아무런 확인 없이도 거부할 만큼 거짓임이 명확한 우스꽝스러운 거짓말에 모든 사람들이 속아왔다... 어떤 다른 사태에 관한 증언에서보다 종교적 기적에 관한 증언에서 진리의 위반이 좀더 흔한 일이기에 종교적 기적에 관한 증언의 권위는 훨씬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 _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p35

이성만으로 기적의 진실성을 확증시키는 것은 역부족이다. 신앙에 의해 기적에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 이해력의 모든 원리를 전복시키며 관습과 경험에 어긋나는 것을 믿게 만드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어떤 기적을 의식한다. _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p38

사실, <기적에 관하여>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신앙심이 깊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이 생긴다면 우리 삶은 제대로 영위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거나 죽어서도 살아나고, 모든 병에서 낫고, 하는 일마다 잘 된다면 더이상 기적이 아닌 일상일 것이고, 기적으로 인해 우리 삶은 그보다 더 불안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과연 신은 원할까?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렸을 때 기적을 바라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피하게 해달라는 바람. 여기에 더해 만약 기도를 이루어 준다면, 다른 무언가를 하겠다는 흥정까지. 인간이기에 당연하게 드는 마음이겠지만, 참된 기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 아닐까.

큰 시련이 왔을 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다는 것. 완고했던 마음을 풀고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것 자체가 안정을 추구하는 생명의 본성을 거슬리는 위대한 기적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언제나 바라는 기적을 얻지는 못하지만, 기적 안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흄이 말한 신앙의 토대 위에 선 종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국 기적이란 신앙의 다른 이름이며 올바른 신앙이란 올바른 기적관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흄의 지적처럼 인간은 본성적으로 기적을 바라는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오직 요행을 바라는 위반 기적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토대를 붕괴시킬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기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참된 종교와 사교(邪敎)를 구별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며, 이러한 점에서 흄의 기적에 대한 소론은 참된 종교와 사교가 혼재하며 서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_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해제,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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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파시즘의 이론들」에서 발터 벤야민은 윙거 이론안의 모호한 추상적 언어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이를 통한 전체주의의 개인 희생 강요를 비판한다. 같은 ‘기술‘의 속성에 대한 공통된 이해에도 불구하고, 거의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벤야민과 윙거의 논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전쟁과 기술의 사용 문제에 집중한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 바 있다. 여기서 벤야민은 기술의 실현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제1의 기술˝과 인간과 자연 조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제2의 기술˝을 구분하며,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기술에서 ˝행복으로의 열쇠˝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윙거와 그의 친구들이 추구하는 기술과 기술의 사용은 바로 전쟁적 기술, 기술의 전쟁적인 사용이며, 이는 바로 벤야민이 ‘제1의 기술‘로 규정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기술에 다름아닌 것이다.(p357)

벤야민의 비판처럼 윙거는 서술 과정에서 ‘근원 Ursprung‘ ‘총체성 Totalitat‘ ‘근원적인 힘들 Elementare Krafte‘과 같은 비논증적이고 신비주의적 언어에 의존한다.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신비주의적 언어 뒤로 감추고, 위장하려는 윙거의 신비화 전략에 대응해 벤야민은 ‘인간적 사물의 제도‘인 언어를 통해 ‘사물들을 실제 그 이름으로 명명‘하는 언어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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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09-01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겨호 님이 읽는 독서의 양보다는 폭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겨호 님, 굉장히 넓게 파시는 유형 같습니다.. ㅎㅎㅎㅎ


벤야민 좋죠. 전 이 양반이 단문의 천재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니체처럼 아포리즘은 아닌데 묘하게 짧은 문장에 핵심을 찌르는 기술을 무척 탁월하신 분..

겨울호랑이 2020-09-01 19: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궁금한 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퍼져나가면서 고구마줄기처럼 되버렸습니다^^:) 제게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방대함을 보여준 저자로 다가옵니다. 짧은 문장과 긴 서사에 모두 능하다는 면에서 대단한 사상가임이 분명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9-0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시즘... 저도 무척 좋아하는 주제인데요.
인간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인지 궁금할 때 파시즘이 교훈이 되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님은 왜 이 주제에 관심 많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9-01 22:10   좋아요 1 | URL
그게... 사실 뚜렷한 목적 의식이 있다기보다는 파시즘과 엮인 사회문제가 많다보니 여러 책을 보게 되네요... 부끄럽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9-01 22:16   좋아요 1 | URL
말씀이 제겐 정답이세요. ^^

겨울호랑이 2020-09-01 22: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편한 밤 되세요!^^:)
 
당신의 선택은? 기업 윤리 Taking Sides 시리즈 1
리사 H. 뉴턴 외 엮음, 권루시안 옮김 / 양철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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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은? 기업윤리>는 경영윤리와 관련한 20 이슈 사항을 정리한 책으로, 현대 기업들이 당면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노동, 생명공학, 마케팅, 환경 등 여러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과 논거를 소개한다. 상관없어 보이는 각 주제들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큰 흐름이 눈에 띈다. 기업(企業)은 사회적 존재일까, 아니면 개인들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 다음 문제들이 잇따른다. 만약, 기업을 사회적 존재로 본다면 사회적 책임 문제가 뒤이어 제기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자유롭게 운영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기할 경우에는 법(法) 등을 활용한 규제가 이뤄져야 하며, 다음으로 어디까지 규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떠오른다. 규제의 한계에 대해 서양 전통의 가치인 재산권과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에서 현실과제인 노동자, 생명윤리, 마케팅 등에 대한 여러 논쟁들이 소개된다.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경우에도 논쟁은 이어진다. 공익(公益)의 이익 침해가 그것이다. 주주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닥쳐 수많은 기업이 도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시장자율에 맡겨야 하는가. 만약, 그 위험을 기업들이 초래한 경우에도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등. 주로 시장의 자율조정이 파괴될 경우,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이루어지는 이 주제는 다시 사회적 책임문제로 연결된다. '고위험 고수익 High Risk, High Return'이 아닌 '저위험 고수익 Low Risk, High Return'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내보내는 것에 대한 경계와 전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간의 조율이 이와 관련한 주된 주제일 것이다.

결국, 기업윤리의 문제는 공익(公益)과 주주의 사익(私益)의 충돌 문제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치열한 논쟁이 있는 이유는 서구 사회의 오랜 논쟁 주제인 재산권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택은? 기업윤리> 안의 주제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사회의 많은 제도가 서구의 방식으로 제정되고 운영되고 있음에도 아직 우리 의식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 <당신의 선택은? 기업윤리> 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기에 이들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수많은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모든 주제들로부터 해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관점의 차이 속에서 어렵지만, 자신의 관점을 정리하고 근거를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여겨진다...

책 안의 20가지 논점들 -

1. 자본주의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2. 위험은 자본주의를 위한 최선의 이론일까?
3. 이익 증대가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일까?
4. 개인의 도덕성이 기업의 압력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5. 윤리 강령으로 "진정한" 기업 윤리를 세울 수 있을까?
6. 2008년 경제 붕괴의 책임은 금융 산업에게 있을까?
7. 정부는 경제 파탄을 피하기 위해 책임지고 금융 기관을 구제해야 할까?
8. 파생상품의 위험은 관리 가능할까?
9. 폭리를 규제해야 할까?
10. 내부자 고발은 회사에 대한 충성을 어기는 것일까?
11. 고용주가 종업원의 소셜 미디어를 감시하는 행위는 정당할까?
12. "임의 고용"은 사회적으로 좋은 정책일까?
13. 실적이 CEO 보상의 명분이 될까?
14. 어린이를 겨냥하는 광고를 규제해야 할까?
15. 주택 소유자는 담보 대출에 대해 전략적 채무불이행을 실행해도 될까?
16. 유전자 변형 식품에 표시를 요구해야 할까?
17. 다국적 기업에게는 도덕적 의무가 면제될까?
18. 노동 착취 작업장은 비인도적인 기업 행위일까?
19. 유전자 특허를 비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할까?
20. 세계는 앞으로도 계속 주요 에너지원으로 석유에 의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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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09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질문에서부터 턱 막히네요.

아무래도 자본주의와 인본주의는
잘 들어 맞는 궁합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허구헌날 자유민주주의
플러스 자본주의 타령을 하는 걸
보면 또 그만큼의 파워가 있는 듯
하기도 하구요... 미스터리네요.

겨울호랑이 2020-08-09 19:33   좋아요 0 | URL
아, 사실 책에서 첫 번째 주제의 논쟁자들이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로 전체 논쟁자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도 높고, 에이스들의 논쟁이라 할 만 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철학적인 주제이면서 근원적인 물음이니만큼 우리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저로서는 이 주제가 기업윤리로 들어오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판단력비판 대우고전총서 24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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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 V168 선험적인 구성적 인식원리들을 함유하고 있는 한에서, 자기 고유의 구역을, 그것도 인식능력에서 갖는 것은 본래 지성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명명된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해 여타의 모든 경쟁자들에 대항해서 확실한, 그러나 유일한 소유지를 확보해야 할 것이었다.  그와 똑같이 오로지 욕구능력과 관련해서만 선험적인 구성적 원리들을 함유하는 이성은 실천 이성 비판에서 그 소유지를 지정받았다. 그런데 우리 인식능력의 순서에서 지성과 이성 사이의 중간항을 이루는 판단력도 독자적으로 선험적 원리들을 가지는가, 이 원리들은 구성적인가 아니면 한낱 규제적인 것인가, 그리고 판단력이 인식능력과 욕구능력 사이의 중간항으로서의 쾌/불쾌의 감정에게 선험적으로 규칙을 주는가, BVI 이것이 지금의 이 판단력 비판이 다루는 문제이다.(p146) <판단력 비판> 中 


V177 상위 인식능력들의 가족 안에는 지성과 이성 사이에 중간 성원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이 판단력인데,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고유한 법칙수립[입법]을 함유하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법칙들을 찾는 자기 자신의 원리를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유비에 의하여 추측할 이유를 갖는다.(p160) <판단력 비판> 中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자연'에 적용되는 선험적 원리인 '합법칙성'과 인식능력인 '지성'을 '자유'에 적용되는 선험적 원리인 '궁극목적'과 인식능력인 '이성'을 매개하는 '판단력'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기예'에 적용되는 '합목적성'과 이를 인식하는 '판단력'은 다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BXXV  지성과 이성 사이에 판단력이 포함되어 있듯이, 인식능력과 욕구능력 사이에 쾌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잠정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판단력도 독자적으로 선험적인 원리를 함유한다는 것, 그리고 욕구능력에는 필연적으로 쾌 또는 불쾌가 결합되어 있으므로, 판단력이 논리적 사용에서 지성으로부터 이성으로 넘어감을 가능하게 하듯이, 순수 인식능력, 다시 말해 자연개념의 관할구역으로부터 자유개념의 관할구역으로의 넘어감을 야기할 것이라는 것이다.(p162) <판단력 비판> 中 


 칸트는 판단력을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BXXV=V179)로 규정하고, 판단력이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 수렴시키거나(규정적 판단력), 주어진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반성적 판단력)고 본다. 이 중에서 특히 반성적 판단력은 미감적 사용에서 쾌/불쾌의 감정 영역에서 합목적성이라는 법칙수립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합목적성을 매개로 판단력에 의해 지성과 이성은 연결된다.  


BXLIII V189 하나의 표상에서 전혀 인식의 요소가 될 수 없는 주관적인 면은 그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쾌 또는 불쾌이다. 왜냐하면, 설령 이 쾌 또는 불쾌가 어느 인식의 결과일 수 있을지라도, 이를 통해서 나는 표상의 대상에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p176)... BXLIV V190 쾌는 다름 아니라 객관이 반성적 판단력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반성적 판단력 안에 있는 한에서의 인식능력들에 대한 적합성을, 그러므로 한낱 객관의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p177) <판단력 비판> 中 


BLV V196 지성은 그가 자연에 대해 선험적으로 법칙들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자연은 우리에게 단지 현상으로서만 인식된다고 증명하고, 그러니까 동시에 자연의 초감성적인 기체[基體]를 고지한다. 그러나 이 기체는 전적으로 무규정인 채로 남겨둔다. 판단력은 자연의 가능한 특수한 법칙들에 따라 자연을 판정하는 그의 선험적 원리에 의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자연의 초감성적 기체가 지성적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성은 똑같은 기체를 그의 선험적 실천 법칙에 의해 규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판단력은 자연개념의 관할구역에서 자유개념의 관할구역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p186) <판단력 비판> 中 


BXXX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는 하나의 초월적 원리이다. 왜냐하면 객관들에 대한 개념은, 그것들이 이 원리 아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한에서, 단지 가능한 경험인식 일반의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개념일 따름으로, 아무런 경험적인 것도 함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V182 그에 반해, 자유 의지의 규정이라는 이념에서 생각될 수밖에 없는 실천적 합목적성의 원리는 형이상학적 원리이겠다. 왜냐하면, 의지라는 욕구능력의 개념은 그래도 경험적으로 주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원리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 원리들이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의 주어인 경험적 개념에 술어를 결합하기 위해 더 이상의 경험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 결합은 온전히 선험적으로 통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p166) <판단력 비판> 中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하는 원리인 미감적 판단력을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미감적 판단력 비판을 수행한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합법칙성과 관련하여 대상을 판정하는 능력인 취미는 아름다움을 - 미(美) - 판단하는 능력이다.


V211 B16 취미는 대상 또는 표상방식을 일체의 관심 없이 흡족이나 부적의[不適意]함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다. 그러한 흡족의 대상을 아름답다[미적이라]고 일컫는다. B17 미는 개념들 없이 보편적인 흡족의 객관으로서 표상되는 것이다.(p202)... V212 취미판단에는, 일체의 관심에서 떠나 있다는 의식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해야 한다는 요구주장이, 객관들 위에 세워진 보편성 없이도, 부수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취미판단에는 주관적 보편성에 대한 요구주장이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p203) <판단력 비판> 中


 그렇지만, 미학은 아름다움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아름다운 대상과 함께 숭고한 것도 적의하며, 하나의 반성판을 전제로 단칭판단에서 표현된다는 점에서 숭고함 역시 미학의 대상이다. 이들은 같은 미학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차이점도 가진다. 거칠게 표현해서, 아름다움이 지성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면, 숭고함은 이성 개념과 연결된다. 


V244 B74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은 양자가 그것 자신만으로 적의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더 나아가 양자는 감관판단이나 논리적 - 규정적 판단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판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B75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 또한 눈에 띈다. 자연의 미적인 것은 대상의 형식에 관련이 있고, 대상의 형식은 한정에서 성립한다. 그에 반해 숭고한 것은, 무한정성이 대상에서 또는 그 대상을 유인동기로 해서 표상되고 또한 무한정성의 전체가 덧붙여 생각되는 한에서는, 무형식의 대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적인 것은 무규정적인 지성 개념의 대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적인 것은 무규정적인 지성 개념의 현시이지만, 숭고한 것은 무규정적인 이성개념의 현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흡족이 전자에서는 질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지만, 후자에서는 양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다. 미적인 것은 직접적으로 생명을 촉진하는 감정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매력이나 유희하는 상상력과 합일할 수 있지만, 숭고의 감정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생기는 쾌이다.(p249) <판단력 비판> 中


 숭고함은 외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숭고함이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과 이성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미학적 판단력 아래 지성과 이성을 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 <판단력 비판>의 큰 줄기다.


V246 B78 우리는 자연의 미적인 것을 위해서는 우리 밖에서 하나의 근거를 찾아야 하지만, 숭고한 것을 위해서는 한낱 우리 안에서, 그리고 자연의 표상에 숭고성을 집어넣는 사유방식[성정] 안에서 하나의 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매우 긴요한 예비적 주의로서, 이 주의는 숭고한 것의 이념들을 자연의 합목적성의 이념과 전적으로 분리시키고, 숭고한 것에 대한 이론을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미감적 판정의 한낱 부록으로 만드는 바이다. 숭고한 것에 의해서는 자연 안의 어떠한 특수한 형식도 표상되지 않고, 단지 상상력의 자연의 표상에 대한 합목적적 사용만이 전개될 뿐이니 말이다.(p251) <판단력 비판> 中


  <판단력 비판>의 세부 내용에서는 앞선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에서 논의된 사항들이 간략하게 재논의되면서 칸트 비판 철학의 전체 구조를 완성시킨다. 이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리뷰에서 다루기엔 한계가 있기에 세부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추가적으로 정리토록 하자. 넓고 깊은 칸트 철학을 정리하기에 부족함을 많이 느끼지만, 어렴풋하게 윤곽을 잡은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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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7-05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인생의 하나의 큰 사건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완독을 무척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0-07-05 16: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의 페이퍼 덕분에 칸트 이후에 읽을 과제를 찾게 되었습니다. ^^:)

2020-07-05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5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칸트의 역사 철학 -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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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이성의 이끌려 인간의 무한한 진보를 낙관한 칸트의 역사주의.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 ~ 1918)이 가져온 파멸적 결과는 이성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20세기 초 이성시대의 종말은 <실천이성비판>의 기본 전제인 '선의지'의 부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gusto, taste) 판단의 근거인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의 부재 때문이었을까.

다음과 같은 명제는 모든 회의에도 불구하고 가장 엄밀한 이론으로서도 타당한 명제인 것이다. 즉 인류는 항상 더 나은 것으로의 진보 과정에 있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 진보해 갈 것이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p126)... 인간의 자연적 권리와 조화하는 정치 체제의 이념은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 외에도 입법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모든 국가 형태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순수 이성을 통해 그 이념에 적합한 것으로서 생각된 플라톤적 이상(respublica noumenon)을 의미하는 정치적 조직체는 공허한 상상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적 정치 체제 일반에 대한 영원한 규범이며, 모든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다.(p129) <칸트의 역사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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