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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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과 깨어남의 변증법은 그 구조를 두고 볼 때 비평적 인식의 방법론으로서 침잠과 파괴라는 두 원칙, 다시 말해 대상(꿈) 속으로의 미메시스적 '침잠'과, 그 대상(꿈)의 연속성을 중단시키고 이로부터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전복적으로 얻어내는 '파괴'라는 비평의 두 원칙에 상응한다. _ <해제 :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구제비평>, p29


 진리에 대한 신화의 무차별성은 이의성으로 현상되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여 신화의 신화성을 파악하는 것이 인식의 목표가 된다. 즉 신화의 극복은 역사를 그 신화에 추상적으로 대결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작용하는 신화적 이의성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사유를 통해 현상이 구제된다. _ <해제 :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구제비평>, p35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 선집에 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등은 그의 역사철학적 인식이 담긴 미학 비평서다. 벤야민에게 역사성은 단독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낡음과 새로움, 법적 목적과 자연적 목적, 운명과 성격 등 상호 대립하는 이미지들을 '언어'를 통해 규정하려는 노력은 오류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강한 결속은 신화성의 부활을 가져오게 되며 우리는 이를  20세기 모더니티에서 신화적 키치(kitsch)롤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처음에는 예전 생산수단의 형식에 지배받기 마련이다(마르크스). 이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집단의식 속에 이미지들을 산출하는데, 이 이미지들 속에서 새것은 옛것과 상호 침투한다. 이 상들은 소망의 이미지들(Wunschbider)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 속에서 집단은 사회적 생산물의 미숙함과 사회적 생산질서의 결함들은 지양하면서 동시에 미화하려 한다. 그와 함께 이 소망의 이미지들 속에는 낡아버린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강한 노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것에서 자극을 받는 구상적 판타지로 하여금 태고의 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_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5)>, p179


  만국박람회와 철제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아'.  여기에서 사람들은 교환가치에 대한 환영에 빠지게 되고, 환영 안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만다. 벤야민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기한 방안이 바로 '침잠'과 '파괴'다. 이들을 통해서 환영에 대한 연속적 인식은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으며, 역사는 과학적 인식과 기억의 대상의 결합을 통해 현재성을 갖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식과 기억의 결합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주체에 의해 올바르게 해석된다.   


 어떤 희망도 없는 체념이 바로 위대한 혁명가의 최후의 말이다. 19세기는 새로운 기술적 잠재성들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 최후의 말이 옛것과 새것의 길 잃은 중개자들, 판타스마고리아의 심장부에 있는 그 중개자들에게 남겨지게 된 이유이다. 판타스마고리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바로 그 세계가 모더니티이다. _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9)>, p250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_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p334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얽힘으로 인한 과거로의 퇴행을 막는 것을 역사적 소명으로 인식한 발터 벤야민에게 '도도한 역사의 흐름', '끊임없이 상승하는 역사의 법칙'을 강조하는 전통적 진보(進步)사관은 역사적 실체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진을 극도로 싫어했던 벤야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의 <결정적 순간>이 역설적으로 벤야민의 '침잠'과 '파괴' 그리고 '파괴'와 '구제'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상호통합적인 구조를 변증법적인 틀을 통해 바라보고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으로부터 정치적 실천을 강조한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읽으며, 미학과 역사철학을 넘나드는 그의 사상에서 '수행'과 '전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유(思惟)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갑자기 정지하는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그 상황은 하나의 단자(單子, Monade)로 결정(結晶)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적 대상에 다가가되, 그가 그 대상을 단자로 맞닥뜨리는 곳에서만 다가간다.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지, 달리 말해 억압받는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폭파하여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 기회를 포착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_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p348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에만 정향할 뿐인 시선은 기껏해야 법정립적인 것과 법보존적인 것으로서의 폭력의 형상들에서 변증법적 부침(浮沈) 정도를 감지해낼 수 있을 뿐이다. - P115

초현실주의자들은 확실성을 가지고 심리가 아니라 사물들을 추적한다. 대상들의 토템 나무(Totembaum)를 그들은 긍원사의 밀림 속에서 찾아 헤맨다. 이 토템 나무 최상단의, 최후의 찡그린 얼굴이 키치이다.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 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p138)...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 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 - P162

잔재가 남는다. 집단 역시 신체적이다. 그리고 기술 속에서 그 집단에게 조직되는 자연(physis)은 그것의 정치적이고 개관적인 현실에 따라 볼 때 저 이미지 공간 속에서만, 즉 범속한 각성이 우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그 이미지 공간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그 자연 속에서 신체와 이미지 공간이 서로 깊이 침투함으로써 모든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kollecktive Innervation)이 되고 집단의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이 혁명적 방전(放電)이 되어야만 비로소, 현실은 <공산주의자 선언>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 P167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것에서 그(역사의 천사)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그는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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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법칙 - 새로운 윤리학 원리를 찾아서 게오르그 짐멜 선집 4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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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은 당위적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진행되는 삶이야말로 현실적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진행되는 바로 이 삶을 위한 법칙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원론을 삶의 총체성 그 자체 안으로 이전한다. 그는 삶의 총체성을 본래적 또는 이성적 자아와 이러한 자아에 비해 단지 주변적인 또는 자아에 대치되는 감성으로 분열시킨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29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개인법칙>을 통해 윤리적 측면에서  보편법칙으로부터 개인법칙을 구해낸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으로 대표되는 사회법칙을 비판하는데 이는 보편법칙이 가진 한계성을 비판한다.


 보편적인 법칙은 생생한 내용을 그것이 체험되는 형식에서가 아니라 개념화된 내용성의 형식에서 파악하는데, 이 형식은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삶의 과정에서 반복될 수 있으며 모든 삶의 과정에서 도덕법칙으로부터 추론된 동일한 판단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모든 윤리적 성찰에서 기계론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음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60


 보편법칙이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삶의 형식들간의 무수한 투쟁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개인들의 주관적인 경험은 무수한 대립 속에서 불연속적으로 단절되고 고립된다. 결과적으로 부분의 합과 전체는 달라지게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보편적인 정언명령이 개인들의 삶의 원칙이 되지 못한다. 


 보편적인 법칙은 오직 개인적인 삶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개별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들에만 지향된다. 어느 한 개념에 예속됨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의 개인화는, 행위하는 주체의 전체적인 삶의 무대 또는 맥박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도덕적 의미가 확증되는 행위의 개인화와 모순된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79


  짐멜은 여기에 더해 정언명령은 인간의 감성이 배제된 이성이 이끄는 삶을 강요할 뿐이라고 본다. '~ 해야 한다'는 당위의 가치판단 명제는 18세기 계몽시대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일깨웠지만, 개인의 감성을 인정하지 못한 한계를 갖는다. 19세기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개인 감성에 대한 인정, 미(美)적 판단기준과 철학적 판단기준이 만나는 지점에서 짐멜은 사회법칙과 분화된 개인법칙을 발견한다.

 

 인간은 통일적인 연속성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전체적인 삶의 안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이러한 삶과 더불어 주어진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의 본질은 삶 일반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종종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행위들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본질은 삶 일반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종종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행위들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행위는 총체적 인간에 의해 창출된다는 바로 그 원리로부터 개별적인 행위가 총체적 인간에 의해 도덕적으로 결정된다. 행위는 삶을 초월해 보편적인 것으로 되도록 하는 개념화가 아니라 총체적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당위성을 창조해야 한다. 이상적인 삶의 연속성은 그 전체가 각각 명명할 수 있는 행위의 내용들로 발전되어야만 비로소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115


 개인적으로 짐멜의 <개인법칙>에서 근대 이후 불연속적인 보편 기준 대신 개인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논지 안에서 아우라(Aura)의 회복을 열망하는 반(反)근대화의 흐름을 발견한다. 오늘날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강요된 보편가치 대신 소외된 소수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기울여야 한다면, <개인법칙>은 이에 대한 좋은 논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것은 주관적일 필요가 없고 객관적인 것은 초개인적일 필요가 없다. 결정적인 개념은 오히려 개인적인 것의 객관성이다. 일단 특별히 개인화된 삶이 존재하면, 이 삶의 이상적 당위도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상적 당위에 대한 올바른 표상과 잘못된 표상은 그것의 주체와 더불어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125

끊임없는 삶에 대한 지식은 그 어떤 내용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바, 이 둘은 온전히 진술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부단히 무엇인가를 알고, 희망하고, 믿고, 느끼며, 모든 관찰과 성찰은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다. 그러나 우리가 내용들을 표상하고 바로 이 내용들로 삶을 구성하게 되면 삶의 연속성은 파괴된다... 우리가 표상된 내용들을 내용들로서 의식하게 되면, 다시 말해 그것들을 심리학적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이 소유와 더불어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되면 이 의미한 것은 즉시 불연속적이고 그 자신의 고유한 타당성을 지니는 구성물이 된다. - P63

단어들은 고립되면 판단구조 속에서 실종되며, 그 결과 판단구조는 단어들을 외적으로 상호결합하지도 못하고 이전에 뿌리가 뽑힌 채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단어들을 공통적인 그물망 안으로 끌어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판단의 사유된 의미는 내적으로 완전히 통일적인 그 무엇이다. - P74

정언명령이 실천적인 것이 되고자 한다면 상대적인 보편성들의 가능한 합으로 분해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삶 전체와 간단없이 섞여 짜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바로 지금 관찰된 물결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런 식으로 파악된 행위는 결코 보편화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행위하는 개인의 전체적인 삶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생각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 P90

정언명령이 개별적인 행위의 준칙을 위해 요구하는 보편타당성은, 행위가 그 내용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의미를 지녀야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징후 또는 인식 표징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명령은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절대성에 따라서 보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미만을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개인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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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트만이 말한 대로 개인법칙ㅡ곧 상론하게 되는 바와 같이 이는 논의의 문맥에 따라 개체법칙으로 읽어야 할 때도 있다―은 짐멜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개인법칙이 짐멜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는 정언명령이 칸트철학에서, 그리고 힘에의 의지와 초인이 니체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 및 의미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짐멜이 보기에 개인법칙은 근대 이후 인간 정신과 개인적 삶과 행위를 규정짓는 원리이자 법칙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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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발터 벤야민 선집 3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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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함으로써 감정을 다스리려 애쎴다. 이러한 통찰의 결과로 이 책의 회상 작업에서는 경험의 깊이가 아니라 연속적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개인사적 면모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만약 시골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자연감정에 따르는 어떤 형식에 담아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대도시 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은 아마 미래의 역사적 경험을 미리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서문 中, p3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유년시절 회상기.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독일어 번역을 했던 저자였기에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안에서 프루스트의 시간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년기에 대한 회상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는 기억 주체의 의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회상에서 주체의 의식적 노력을 배제함으로써 의식과 회상을 분리시킨다. 즉 자아는 더 이상 회상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마치 카메라 렌즈에 의해 촬영되는 이미지 전부가 의식적 지각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해제 中, p12


 그렇지만 동시에 프루스트의 시간과 벤야민의 시간은 같지 않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화자라는 개인의 경험이라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의 화자는 집단적, 역사적 화자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예술가다. 아우라(Aura)를 지닌 자신만이 갖는 독특한 정형성을 갖는 경험이 마들렌의 과자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눈 앞에 의식적으로 드러난다. 


 벤야민에 의한 기억의 감광판에 어떤 이미지가 찍히는가의 여부는 거기에 필요한 '조명'에 달려 있다. 순간적으로 조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관습의 지배를 받는 일상적 자아를 벗어나는 순간이자 보다 깊은 곳에 위치한 심층적 자아가 충격을 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체험 내용을 시간 속에서 배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해제 中, p13


 반면, 벤야민의 유년시절은 기술복제 시대에 해석된 시간이다. 일회적이고 지속적인 개인의 경험 대신 일시적이고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된 시간.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의 서로 다른 기억과 중첩된 기억의 사실성은 이미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의 전통적 권위가 흔들리는 대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역사성이 발견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리 창문에서 발견한 유물론적인 문구의 의미는 과거의 벤야민이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의 작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 현재의 벤야민이 발견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의미가 앞으로의 그의 미학(美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고전시기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이라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는 기술복제 시대 시대정신이 표현된 정치물이라고 해석해야 할까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중에 나는 티어가르텐의 새로운 구석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다른 곳들도 계속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이처럼 새로운 장소들을 알려준 것은 어느 소녀도, 어떤 다른 체험도, 어떤 책도 아니다. 30년 뒤 지리에 밝은 한 베를린의 농부가 오랫동안 함께 베를린을 떠났다 돌아온 나를 데리고 나섰다(p38)... 나는 유리창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알아챘다. "노동은 시민의 명예이고, 축복은 수고의 대가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p39


 유년시절 회상에서 "은폐가 필연적"이라고 한 벤야민 자신의 말처럼, 일견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회상 뒤에 집단적 역사에 대한 성찰이 은폐되어 있다. 비록 베를린 유년시절에 대한 벤야민의 글에는 집단적 삶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벤야민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이 마주치는 차원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해제 中, p23



벤야민의 회상에서 순간들은 하나의 이미지 혹은 소리의 형태로 떠오른다. 이미지로 떠오르는 회상의 메커니즘은 종종 사진의 비유로 설명된다. 사진의 비유에서 보듯이 유년기 회상은 서사적 연속성을 구성하지 않는 불연속적 순간들의 단편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 - P11

유년에 대한 추억은 단지 잠자고 있을 뿐 아니라 자라는 아이처럼 성장한다. 망각된 유년시절은 그 유년의 체험과 연관성을 지닌 삶의 순간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망각된 것은 지난 모든 삶의 무게로 무거워진다. 이처럼 벤야민의 기억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 망각이 기억과 대립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기억이라는 점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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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관의 역사 - 칸트.괴테.니체 게오르그 짐멜 선집 2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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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는 주체와 객체의 방정식을 객체의 측면에서 푸는 반면, 칸트는 주체의 측면에서 푼다. 비록 후자의 주체는 우연적이고 개인에 따라 분화된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의 초개인적 담지자인 주체다. 과학적-방법론적으로 보면, 칸트는 당연히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사상가이다. 반면 괴테는 주관적이고 존재의 상(像)을 자신의 정열적인 개별성에 따라 형성하는 사상가이다. 그러나 세계관적으로 내용적 결과에 입각해 보면 칸트는 주관주의자이다. 그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안으로 끌어들여 의식의 형식에 의해 형성되도록 한다. 이에 반해 괴테는 오직 자족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만을 인정하는 바, 이 존재의 내부에서는 주체와 그의 삶 또한 자연의 총체적 삶이 고동치는 맥박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32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근대 세계관의 역사>에서 세 명의 사상을 통해 18~19세기 근대세계를 설명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분화'(分化)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통일'(統一) 그리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영원회귀'(ewig wiederkehren)와 '초인'(Ubermensch)이 근대 세계관을 지탱하는 세 개의 발이다.


 칸트에게서는 가치가 인간에서 나와 자연으로 가지만, 괴테에게서는 자연에서 나와 인간에게로 간다. 인간의 특별한 지위는 자연이 그것의 최상의 창조물인 인간으로 발전했고 상승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세계발전의 최종목표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칸트에게서 인간을 그 외의 존재와 대립시키며 이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시킨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72


 짐멜에게 칸트와 괴테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이다. 칸트는 인간-자연의 구도에서 물자체인 자신과 현상적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말한다면, 괴테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통해 인간의 이념이 드러남을 강조한다.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선 외부에서의 결합. 이것이 본문에서 강조되는 칸트와 괴테의 사상이자 차이점이다. 


  개인적으로 이들 분화와 통일이라는 관점의 차이를 칸트와 괴테의 분야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칸트 철학과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괴테의 문학.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과학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예술.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현신처럼 칸트와 괴테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다른 한 편으로 시대가 자연을 바라보는 역사관, 시대관의 변천이기도 하다.


 18세기의 이상은 고립되고 본질적으로 동질인 개인을 요구했다. 개인은 합리적-보편적 법칙으로, 그리고 이해관계의 자연적인 조화로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19세기를 특징짓는 이상은 노동분업에 의해 분화된 개인들을 고려했는데, 이들은 분업과 분화의 맞물림 위에 토대를 둔 사회조직들과 결합되었다. 분업과 분화의 두 원리는 근대경제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22


 이성(reason)의 강조가 계몽주의를, 분업이 산업혁명을 가져와 18세기 근대를 열었다면 19세기 근대의 통일적 세계관은 분업과 분화 그리고 이성의 결과물이다.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을 강요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자연 앞에서 개인들은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다르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었다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된 이후 사회는 '서로 같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고, 이들의 유대와 연대가 강조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여기에서 머무른다면 자연에 대한 이성적인 인간의 승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선 필요가 생긴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니체의 세계관을 가져온다. 니체의 사상이 접목되어 '인류'와 '초인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인-사회'는 분화와 통일이라는 단순순환에서 벗어나 우상향의 진보적 세계관으로 정립될 수 있다.


  니체는 인류의 낮은 위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이상을 인류적 이상으로 대체시키려 한다... 니체는 우리 종족을 완성된, 따라서 불변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고 발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초인이란 인간종족의 훨씬 더 높은 단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시기는 발전능력이 있는 한 그 단계를 넘어서는 초인이 존재한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50


 이처럼 짐멜의 <근대 세계관의 역사>는 칸트와 괴테라는 다소 낯선 조합을 통해 개인-사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접근법이지만 철학과 문학의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려는 짐멜의 저작을 통해 근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괴테에게) 미학적 심상의 파괴는 곧 진리의 파괴이다. 수학적 자연과학이 사물을 가능한 한 무특성의 요소들로 분해해 얻어지는 계산적 표상은, 괴테에게 미학적-직관적 가치가 결여되기 때문에 심각한 방자함이자 사로(邪路)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칸트에게 미학적 규준은 자연인식의 대상에 대한 방자함이자 사로가 될 것이다. - P54

의지와 당위가 대립하게 되고, 자연적 주관성과 객관적 도덕법칙이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통일성에 대한 요구가 일어난다... 칸트에게서는 객관적 도덕명령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 명령은 모든 특수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지만 주체의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괴테에게서는 도덕적-실천적 삶의 요소들의 직접적인 내적 통일성, 즉 모든 대립을 포괄하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통해 주어진다. - P55

칸트에게 인간의 행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물자체‘에 속하는 내적인 측면이 하나요, 단지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측면이 다른 하나이다. 결국 인간은 화해되지 않은 두 세계에 머물게 된다. 이와 반대로, 괴테가 보기에, 가시적인 것에서 진행되면서 경험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한 행위는 인간의 이념을 드러낸다. 바로 이 이념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는 세계의 요소나 역량이 된다. - P92

칸트는 전적으로 기존의 도덕을 공식화하려 한 반면, 니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도덕‘으로 멈추어 서 있는 기존의 도덕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려 한다. 칸트는 주어진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는 이론가이며, 니체는 주어진 것을 실천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는 도덕의 사제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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