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지음, 이용철 옮김 / 에피스테메(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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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에 자연과학이 했던 일을 18세기에는 정신과학이 완성시킨다. 방대한 영역의 학문들 전체는 이후로 비종교적 정신에 따르게 된다. 이처럼 신학적 방식이 강요했던 족쇄에서 풀려난 정치적 개념들은 심층적인 변모를 겪게 될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사회현상을 자유롭게 분석하고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관계들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절대주의 체계가 근거를 두고 있는 이론들의 공허함을 보여 주었다. 정신과학의 영역에서 교회의 권위를 몰아내는 것은 동시에 교회가 강력하게 지지했던 절대군주제의 권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68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Philosophie de la Revolution francaise precede de Montesquieu>은 몽테스키외( 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 볼테르(Voltaire, 1694 ~ 1778)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로 이어지는 대혁명 철학의 큰 흐름을 짚어주는 책이다. 비록, 저자로 소개된 베르나르 그뢰퇴유젠(Bernard Groethuysen, 1880 ~ 1946) 이 집필한 내용은 미완성 유작 '몽테스키외'에 한정되지만, 이어지는 글들의 논조는 매끄럽게 전편과 이어지며, 프랑스 대혁명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7세기 초반에 과학은 세계, 세계의 체계를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이러한 점에 과학의 가치, 존재 이유가 있었다. 반면 18세기에 과학의 목적은 개별 사실들을 알고 그것들을 최대한 모아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다양한 관계를 그 개별 사실들 사이에서 확립하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32


 우리에게 '계몽시대 철학자'로 알려진 이들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절대적이고 단일한 법칙 세계를 부정하고 다양한 현상들로부터 가능성에 주목한 몽테스키외와 절대적인 이성을 강조한 볼테르. 마치 몽테스키외가 17세기 절대왕정과도 같은 바로크(Baroque)양식을 대신하는 섬세한 18세기 로코코(Rococo)양식을 도입시켰다고 한다면, 볼테르는 이를 더 심화시켜 로코코 양식을 발전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율성의 몽테스키외와 통일성의 볼테르. 이 부분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몽테스키외가 생각하는 질서는 유연하고 자율적이다. 그는 삶의 표현되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형태들을 인정한다. 몽테스키외가 생각하는 이러한 넓은 개념의 사회에는 아무리 다양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그것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있다. 그것들이 설사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모든 발현을 위한 자리가 있다. 정치적 문제는 사회조직 안에서 나타나고자 하는 여러 다양한 경험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86


 볼테르에게 인간 정신의 역사가 제시한 다양한 사실에서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도덕적 가치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그리고 각자의 내면에서 결정적인 객관적 요인으로 나타난다.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동일한 원칙, 즉 자연법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지침들이 무엇인지 또 우주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규정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볼테르와 몽테스키외의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64


 몽테스키외에게 법은 목적론적 이성의 창조물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몇몇 규칙에서 기인하기는커녕 다양한 역사적 여건들에 항상 적응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는 집단적 형태들을 유지하는 수단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볼테르의 사유에 내재적인 논리는 법이 그 평가에서 최고의 권한을 갖고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운 절대적 이성의 산물일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 이성은 혼란스러운 법들과 관례들의 부조리함 모두를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원칙들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98


 그렇지만, 몽테스키외의 사상은 '법의 기원' 부분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개인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으로는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담아낼 수 없고, 이는 볼테르의 통일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볼테르의 사상이 바로 대혁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볼테르는 통일성있는 외부 법칙에 의해 주어지는 밝은 미래를 말한다. 그렇지만, 볼테르의 비판이성 대신 대혁명의 정신과 연결되는 것은 스위스 출신의 루소 철학이다.


  (몽테스키외와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은 법을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에서 나오는 산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은 그 본성상 자의적이고 편협하며 개인적 이유들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법의 비개인적 본성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비개인적 입법권밖에 없다. 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일반 의지이다. 스스로에게 법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뿐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54 


 볼테르와 루소는 인류가 다른 시대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희망과 개인적 성찰의 유용성에 대한 믿음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엇이 특별히 인간적인가라는 문제에서는 의견이 같지 않다. 볼테르가 인간의 가치를 사유 능력과 그 능력이 도달하는 결론의 명료함에 둔다면, 루소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것에 그 가치를 둔다. 볼테르는 인류에게 그들이 더 훌륭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계몽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말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희망으로 가득 채운다. 루소는 사람들의 영혼, 그들의 본성, 내면에 있는 행복,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프랑스 대혁명 동안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것은 루소의 이해 방식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52


 볼테르가 이성을 통한 통일성있는 미래를 보기 위해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루소의 눈은 내면으로 향한다. 가치는 외부에 의해 강제로 계몽(啓蒙)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았을 때 비로소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의 울림은 밖이 아닌 우리 내부에 밝은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로부터 우리는 '천부인권(天賦人權)'의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단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Retour a la nature.)"는 이러한 루소의 철학을 잘 표현한 문장이다.


 루소는 두 종류의 인간을 창조한다. 한편에는 자연인, 자연이 만들었던 그대로의 인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자신의 영혼에만 열중하는 인간이 있다. 또 다른 한 편에는 시민이 있는데, 그의 자아는 공동체의 대(大)자아에 녹아들어 가고 그의 감정과 생각과 행위와 전 존재는 자기 인민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당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인간들의 삶에 대한 동일한 반감에서 생겨났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32


 영혼이 자신의 진정성과 현실 속에서 느끼는 것, 그것이 최종적인 가치이다. 너의 감정은 네 안에 있다. 그것이 너를 고양시키고 이끈다. 네 영혼을 믿어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도야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들은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멋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혼에 단지 외면적인 삶만을 부여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래야 된다고 믿는 존재를 추구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를 왜곡할 뿐이다. 네 영혼에 사람들이 가하고 싶어 하는 모든 변형을 멀리하고 네 영혼의 진정한 삶을 살아라. 이렇게 해서 영혼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한다. 바로 이 점에서 루소는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43


 그렇지만, 이들 사상가들의 생각이 서로 대체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개념은 서로간에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비판적 계승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구성한다.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몽테스키외에 의한 다양성의 인정은 '자유'를 개인의 본성으로 인정케 했으며, 볼테르의 통일성에 의해 '자유'는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고, 루소의 사회계약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평등한 권리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이들 사상가들의 다른 생각은 저마다의 빛깔을 남기면서 프랑스 혁명의 철학으로 융합되었음을 깨닫게된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고유한 권리의 성격을 표현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지 개념이다. 자유의 개념에서 볼 때 각 개인의 본성은 법적으로 이해된다. 인간 삶의 모든 발현은, 그것이 본성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그리고 자연적 성향의 표현인 한 권리에 근거를 둔다. 그것은 폭력으로 방해받을 수 없다. 자유는 인간 본성의 법적 표현, 즉 자연권이다. 따라서 권리가 갖는 이러한 자연적 성격을 일반화하고,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하면, 필연적으로 권리의 평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68


 프랑스 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기본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이 우애를 강조하며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한 이후 생겨나는 개인과 공적 권리의 충돌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과제다. 점차 거대해지는 집단(자본, 국가)의 권력앞에 개인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은 문제의 근원을 알려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프랑스 대혁명이 영감을 받은 공적 권리의 체계를 요약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그 체계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두 가지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하나는 시민들이 서로 간에 맺는 법적인 상호 약속의 개념, 즉 사회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 법으로 이해되는 국민의 의지의 개념, 즉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다. 이 일반 의지만이 국민의 권력 행사를 국민에 의해 지명된 대리인에게 위임하게 될 헌법을 국가에 부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입법권과 행정권 행사가 누구에게 위임될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입법권 행사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맡겨지고, 행정권 행사는 왕에게 맡겨질 것이다. 따라서 우선 권리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계약이 있고, 그로부터 결사가 형성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327

근대인에게서 인류는 말하자면 탈중심화되었다. 인간사 전체를 단일한 관점에서 정리하고, 인간의 운명들을 ‘보편적 섭리‘에 종속시켜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세계적 질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근대인에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옛 세계의 지형은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여러 민족의 무한히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 눈에 보이는 통일성도 없고 그리 뚜렷한 경계도 없는 광대한 계획의 전망만이 남아있었다. 영원히 변화하는 이 삶은 그 자체 안에서만 고찰될 수 있었고, 신학적 개념의 협소한 틀 속에 갇여 있을 수 없었다 - P19

예상치 못한 것, 그것은 바로 인간 정신이 인지할 수 있는 개별적 원인들 너머에 신의 섭리라는 영원한 하느님의 뜻을 개입시켜서 교회만이 밝혀낼 수 있는 총체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가 사용하는 주요 논거이다. - P37

모든 국가는 고유의 규칙에 따라 발전하는 조직을 구성하는데, 그 특성들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정신은 예로부터 언제나 신학적 사고를 부추기는 이상, 즉 세계사의 관점을 포기하면서도 개별적인 현상들 그 자체 속에서 민족들을 지배하는 규칙을 탐구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간 정신은 예전에는 전체의 관점에서 찾던 그러한 법칙성을 각 민족의 개별적인 삶 속에서 되찾는다. 인간의 삶에 의해 이렇게 무한히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 형태들 속에는 우연이나 초월적인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되는 사건들이 불규칙하고 무질서해 보인다고 해도 그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는 내재적 논리가 존재하며, 우리는 바로 이 내재적 논리를 통해 민족들의 변화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 P41

과학은 이중의 목적을 지닌다. 우선 그것은 개별 사실들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이어서 자신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룩하게 될 연속적인 혹은 동시적인 발견들을 가지고 형이상학적 의미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종류에 따라 분류되고 항목별로 정리되거나 어떤 법칙들을 따르는 집합체들에 통합되는 잘 정돈된 전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속은 자신이 집합체에 가져오는 개별 지식들에 의해서만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는 개별 사실들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수단만이 중요하다. 과학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개별 사실들을 그것들이 주어진 그대로 아는 것이다. - P131

나는 본성상 한 인간, 자신을 의식하기에 이른 인간, 자연적으로 선량한 삶이 근본 여건으로 주어진 인간, 자연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혁명의 결과는 명백하다. 이러한 자의식, 사회와의 모든 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 인간은 현행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그것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사회에 대항하여 내세우는 것은 순전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사회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인간은 자신 안에 담고 있다. 자연이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인간은 근본적인 여건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저 인간 자체에 결부되어야만 하는 절대적 가치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임무가 될 것이다. - P245

모든 문제는 다음의 질문으로 귀착된다. 누구에게 법을 제정하는 책임을 맡겨야 하는가? 왜냐하면 바로 그 질문이 권리와 법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자연권 덕분에 나는 자유롭고,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과 법에 따른 구속이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권리는 법보다 앞선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자연권은 법에 앞선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와 함께 주어진 것이다. 법은 권리를 만들 수 없다. 법과 권리 사이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싶다면 법의 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법을 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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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5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던
종교개혁으로 출발한 자연에
대한 도전은 자연과학의 발전
으로 이어지게 되었나요.

역설적으로 자연과학의 끝판왕
은 결국 정신과학이라는 말의
방증일까요.

여전히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가
자연처럼 정복되질 않는 걸 보면
보다 심오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
을 해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6 07:47   좋아요 2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자연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 발견되는 ‘자연의 법칙‘을 인간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라는 면에서 ‘자연과학->정신과학‘으로의 진행은 자연스럽게 보여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 문제는 신에 대한 도전의 면도 있지만, 이와 함께 기존 교회질서에 대한 개혁의 성격도 있다 생각됩니다. 기존 질서의 붕괴 후 이를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발견 과정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려 자연에 대한 탐구, 자연 질서를 인간세계로 끌어오려는 여러 노력들이 있지 않았나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2-07-28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의 차이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유용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07-28 15:12   좋아요 0 | URL
짜라투스트라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러므로 한편에는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바와 같은 인간의 발전과정에 대한 비관적 이해 방식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이성이 명하는 새로운 사물들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병존한다. 이후 이성은 열정을, 17세기가 이해한 바와 같은 위대한 열정을 새로운 시대를 향해 이끌어 나갈 것이다. 이성은열정에게 인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할 것을 목표로 제시할 것이다. 열정이 이성이 되고, 이성의 열정은 프랑스 대혁명기의 사람들, 예를 들면 미라보 같은 사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인간의 철학은 야만적 미신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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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대 중국철학은 참인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또는 거짓인 것)을 구별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철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질서(治)와 혼란(亂)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컸으며, 특히 혼란이 아닌 질서를 세우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노자』에서 내가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측면은 이 텍스트가 인간적 행위주체성human agency에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측면이기도 하다. 주체성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의 전통은 자아ego와 그 자아의 힘들에 너무 집중해왔다. 이런 전통에서 『노자』의 입장은 다소 거북스러운 것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 『노자』의 격률인 "행위하지 않음(無爲)"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를 개별적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또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생산적autopoietic" 대안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노자』는 더 이상 그것이 생겨난 원래의 문화적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지금의 『노자』는 예전 어느 한 지역에서 생생하게 통용되었던 의미론 ─ 의미의 네트워크 ─ 이 화석화되어 나타난 변형물의 일종이며, 그 지역은 소위 "서양 문명"의 전신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곳이다. 『노자』에 담긴 의미가 엮어내는 의미론적 네트워크는 한때는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추정상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타당성을 가졌고 숭배되었지만, 지금은 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많은 독자에게 어둡고 불가해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놀랍게도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터넷의 소위 하이퍼텍스트hypertext 같은 비전통적이고 비선형적인 텍스트들에 견주는 것이 더 용이할 수도 있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역시 한 명의 명확한 저자가 결여되어 있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특정한 한 가지 사안만을 다루지도 않는다.

요약하자면 『노자』에서 만나게 되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영속적이라든가 생산적이라든가 하는) 어떤 특성들을 가진 (텅 비어 있음/가득 차 있음, 낮음/높음 같은) 구조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들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그 이미지들은 전략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효력을 얻는 것에 대한 교수 모형이다.

『노자』에서 "네트워킹"은 언어학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장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메타포들을 사용함으로써, 또 유사한 모토들을 약간의 변주를 통해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동일한 일군의 어휘들을 응용함으로써 다른 장들과 연결되고 있다.

『노자』를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이 책은 수사학적 연결 고리들의 끝없는 연쇄이자 서로 연관된 격언들의 네트워크이며 서로 연상되는 이미지들과 교훈들의 모음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링크들을 따라가면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그 텍스트가 지닌 모호함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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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b판고전 19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손주경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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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악덕, 이 불행한 악덕은 무엇이란 말이냐?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들, 부모들, 아이들, 심지어는 자기만의 삶을 버리고 학대당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군인들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기 피와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맞서야 할 야만의 군대에 의해서도 아니고, 헤라클레스나 솔로몬 같은 자도 아닌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많은 경우 그 나라에서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유익하며, 전쟁의 화약을 결코 마셔보지도 않고, 결투의 모래바닥을 조금도 밟아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휘하는 데 뿐만 아니라 가장 가냘픈 여인네마저도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인간 같지도 않은 한 사람에 의해서 탈취와 방탕과 잔혹함을 겪에 되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8

에티엔 드 라 보에시(Etienne de La Boetie, 1530~1563)는 <자발적 복종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에서 물음을 제기한다. 왜 민중들은 폭군(暴君)에게 복종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단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상황이 다수에게 불행이라면, 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 보에시는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이유를 '자발적 복종'에서 찾는다.

우선 당장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마을들이, 많은 도시들이, 많은 국가들이 단 한 사람의 폭군을 때때로 지지하게 되는지 만을 생각해보자. 이 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준 권력 말고는 다른 권력을 갖지 않는다. 이 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준 권력 말고는 다른 권력을 갖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견뎌내기를 원하는 만큼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기보다는 스스로 참고 견디는 것을 더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4

한 명에 의해 많은 이들이 구속되어 있는 상황은 자발적 복종이 아니라면 설명되기 어렵다. 힘이 부족해서 일시적인 복종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힘의 크기가 현저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가 가능한 것은 자발적 복종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가 충족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자유(自由)망각' 때문이며, 자유망각은 '관습'에 의해 복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게 된다는 것이 보에시의 분석이다.

사람들이 복종을 당하자마자 자유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 자유를 다시 얻기 위해 깨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보는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서서 섬기고, 그것도 기꺼이 섬기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단지 단지 자유를 잃은 것이 아니라 복종을 얻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처음에는 힘에 의해 억압을 당해 굴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후에 사람들은 후회도 하지 않고 복종하며, 자기네 선조들이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을 자진해서 해낸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47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관습은 무엇보다도 복종을 배우게 만드는 관습이며, 독약에 길들여진 끝에 목숨을 잃었던 미트리다테스 Mithridates가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복종의 독이 쓰디쓰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자진해서 들이키도록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다.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48

보에시에 따르면 관습은 우리에게 사회를 살아가는 덕목들을 가르쳐 주지만, 관습이 지향하는 수많은 덕(德 vertu)에는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찬양받는 미덕(美德)에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지 않기에, 전승되는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따를 경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소수의 다수 지배라는 시스템에 자발적인 복종을 하게 된다.

용감한 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려 깊은 자들은 어떠한 고통도 물리치지 않는다(p26)...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들이 욕망하지 않는 단 하나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위대하고 감미로운 자유이다. 그것이 상실되면 모든 악덕이 이어지고, 자유 뒤에 놓여 있던 다른 모든 행복들은 굴종으로 인해 썩어버려서 맛과 풍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오직 이 자유, 그것을 인간들만이 유일하게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27

이러한 상황에서 결론은 자연스럽게 '계몽(啓蒙)'으로 흘러간다. 자기 스스로 관습을 깨치고 관습을 벗어날 수 있도록 잘 배우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구체제(Ancien Regime)의 모순을 극복하자는 결론이 <자발적 복종>의 구조이며 결론이다. 보에시가 말한 자유는 단순한 개인의 의지를 말하지 않는다. 보에시가 말한 자유는 '상호 보조'를 위한 것이며,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 사이의 연대(slidarite)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인간 이성(理性)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 깨닫고, 연대를 통해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현재의 '자발적 복종'을 넘어선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저자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

<자발적 복종>의 마지막 주장은 계몽시대의 교과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자칫 식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수로부터 권력을 받은 1인 혹은 소수에 의한 지배라는 상황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관점에서 합리화하지 않고, 개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모순된 제목의 책은 씁쓸함과 유용함을 현대의 독자들에게 함께 전달한다...

그러니 배우도록 하자. 잘 행동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의 명예 혹은 우리의 미덕에 대한 사랑을 위해, 아니 더 나아가 우리의 행동을 충실히 증명해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심판하시는 전지전능한 신의 명예와 사랑을 위해서 눈을 떠서 하늘을 바라보자. 폭정보다 선량하고 자유로운 신에게 대항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 신은 폭군들과 그들의 공모자들을 위해 몸소 이 땅에 어떤 특별한 몫을 남겨두었다는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03

우정 l'amitie이라는 공동의 의무가 우리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 때문이다. 미덕(vertu)을 사랑하고 훌륭한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의 명예와 이득을 더하기 위해 때때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줄이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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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14 0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네요.
다만 이러한 자발적 복종이 계몽에 의해서 바뀌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절감하는 요즘이라서요. 어렵네요.
주말이 끝났는데 다음주도 힘내서 화이팅하세요. ^^

겨울호랑이 2022-03-14 07:43   좋아요 2 | URL
<자발적 복종>을 읽으며 보에시가 말한 ‘자발적 복종‘과 이에 대한 계몽은 ‘상태에 대한 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자신이 자발적 복종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몽은 영화 <Matrix>에서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 수단을 통해 현실을 파악한 뒤 사람들은 또 저마다의 선택을 하겠지요.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것인가... 행동 이전에 무엇이 진실인가를 끊임없는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이마저도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쩌면 1회성 숙제가 아닌 평생에 걸쳐 해내야 할 과제라고도 생각되네요... 바람돌이님께서도 한 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논리야놀자 2022-03-14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사람은 복종하도록 길러진다.
2. 자신과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행위
3. 그냥 관심이 없다.
4. 두려움
5. 복종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다.
6. 그것이 법과 질서라고 믿는다.
7. 독재를 찬양한다.

사람들이 독재에 저항하지 못 하는 이유이겠죠..

겨울호랑이 2022-03-14 07:51   좋아요 3 | URL
현실에서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만큼 다양하게 나타나거나, 혼합되어 나타나겠지요. 논리야놀자님께서 구체적으로 나열해 주신 이유들도 이들 안에 포함되리라 여겨집니다.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에서 말씀하신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는 구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유‘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 자유가 ‘방종‘이 아닌 ‘이성‘의 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구조적 모순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읽힙니다. ‘독재‘라는 문제를 낳는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처하는 모습도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구조에 대한 고민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보에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논리야놀자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4-09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09 08:18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이하라 2022-04-09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4-09 08:19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꼬마요정 2022-04-09 0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4-09 08:19   좋아요 0 | URL
꼬마요점인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따라서 우정은 인간들이 서로 형제임을 밝혀주는 힘이고, 형제로 만드는 힘이며,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존재라는 증거이다. 우정은 인간의 자유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도록 허용하는  정당성도 부여해준다.
탐욕에 의해 복종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개인은 고립된, 즉 파편화된 존재일 뿐이며, 인간들이 상호 관계를  통해 만들수 있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자이다. 각자의 개인적 가치를완전하게 존중하는 우정은 공동체를 구축하는 토대가 된다. 정치적 형태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우정이 파괴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성이 파괴된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여기에서  폭군의  등장이 가능해지고, 복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오류가 발생한다. 우정이 파괴된 자리에 폭군을정의하는 요소인 탐욕이 언제나 개입하는 법이다.
이런 이유로 복종한 인간에게는 자연에 의해 각자가 우정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 P153

이것이 민중의 복종에 내재된 신비이다. 라 보에시는 폭군의 등장은 민중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면에서는 민중이 폭군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지적한다. 이 점에서 그는 민중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군주가 폭군이 되기 위해서는 다수의권한과 힘을 자신의 권한과 힘으로 몰수해야 한다. 달리 말해 폭군은 민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민중은 자발적으로 복종을 선택하는 자연적  성향을  띠고 있다. 폭군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근거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폭정은  인민정부(gouvernement populaire)와 구분될 수 없다. 즉 민주주의와 폭정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기능을 지닐 수 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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