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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불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8
데미언 키온 지음, 고승학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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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목적은 '어딘가에' 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완전히 의식하고 깨어 있는 상태로 있으려는 것이다(p83)... 명상 수행자는 외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들, 곧 다름 아닌 망상의 근원에 집중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휙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통제하려 들지도 않고, 그것의 마력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점차 마음을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을 배운다. _ 데미언 키온, <불교>, p89/127

불교(佛敎)가 다른 종교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인격신(人格神)을 믿는 종교와 차이점을 갖는다면,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 대신 현재의 내면에 집중하는 명상이 아닐까. 절대신과의 대화가 기도라면, 생각의 면(面)을 선(線)으로, 선을 다시 점(点)으로 점차 소멸시켜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덕과 지혜의 융합인 열반(nirva)을 추구하는 불교의 큰 틀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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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니즘 까치글방 7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윤기 옮김 / 까치 /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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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격한 의미에서 샤마니즘은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종교 현상이다... 중앙 및 북아시아를 싸잡는 광대한 지역 전반에서 사회의 주술적/종교적 생활이 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샤만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탈혼망아(脫魂忘我) 체험이야말로 고귀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정되는 지역안에서는 오직 샤만만이 접신의 전문가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 부담이 작은 정의는 샤마니즘=접신술이라는 정의가 될 것이다._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p24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샤머니즘(Shamanism)을 '엑스터시(Ecstasy)'로 이해한다. 사물에 수많은 정령들이 존재한다는 애니미즘(animism)을 바탕으로 이들과 우리 세계를 연결해주는 연결자로서 샤먼은 엄청난 힘과 지혜를 가진 존재였으며, 제정일치 시대 지배자이기도 했다. 혹독한 신체 고난과 이상한 소리 그리고 향정신성 재료의 도움으로 샤먼만이 종교적 환각 상태에 빠져들 수 있었고, 불안에 빠진 공동체를 구원할 수 있었다. 


 라만은, "샤마니즘은 본질적으로 수호영신과의 특수한 관계로 이어져 있다. 이 수호영신은 자신이 샤만을 영매로 선택할 경우 샤만의 몸 속으로 들어가 고도의 지식과 힘으로 샤만을 가르칠 경우 혹은 다른 영신들을 다스릴 때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정의는 북부 및 중부 인도의 샤마니즘의 특징에는 타당하지만, 샤마니즘의 다른 형태에는 적합하지 않을 듯 하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p374


 이상이 샤먼이 가진 보편성이라 했을 때, <샤마니즘>에서는 지역에 따른 샤머니즘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주관(宇宙觀)의 차이이기도 하다. 인도 등 남부아시아에서의 샤먼이 수직적인 위계 속에서 절대자와의 연결짓는 중개자라면, 동북아시아의 샤먼에서는 '조상신'이라는 존재가 절대질서 사이에 자리한다. 조상과 후손 사이의 긴밀한 유대는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 세계관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남아시아와 북아시아의 샤먼은 차이를 보인다. 


 불교 전파 이전의 퉁구스 인의 종교는 부가(Buga), 즉 천공신(天空神) 숭배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풍토에서 이 종교를 거들어 나름의 역할을 맡아 하던 것이 사자의례(死者儀禮)였다(p424)... 라마 교의 영향은 주로 "영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이 영신들을  통제, 체현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에서 나타난다. 샤마니즘의 특징적인 요소는 샤만에 의한 "영신"의 체현이 아니라, 샤만의 천계상승 혹은 지하계 하강에 의해 야기되는 접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p425


 엘리아데는 본문을 통해 이러한 차이가 불교 유입의 영향임을 밝히지만, 엄밀히 말해 불교가 남아시아인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론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인도/네팔에서 형성된 불교의 영향이 아닌 아시아의 민본(民本)주의에 기원을 찾거나, 유교의 제례에서 샤머니즘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조상 숭배의 유입과 더불어 시작된 개혁은 이 입문 도식의 구조에 특히 선명한 영향의 흔적을 남겼다... 우리는 아시아적 샤마니즘을, 그 원초적 바탕 이데올로기 - 인간으로 하여금 천상계 상승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천상계의 절대신에 대한 신앙 - 가 불교의 침투를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기나긴 외래 문화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온 고대의 접신술로 이해해야 한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p430


 엘리아데의 <샤마니즘>은 고대 농경 사회에서 공통된 종교형태인 샤머니즘의 보편성과 차이점을 밝히려는 선구적인 연구라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지만, 서구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동양을 해석한 한계 또한 분명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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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즈나(prajna)는 지혜인데, 이것은 다르마(Dharma, 얼나)의 변형이고 바라미타(Paramita)는 니르바나님께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얼나(다르마)로 니르바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프라즈나 바라미타‘의 뜻이다... 니르바나님은 반야바라밀다의 체(體)요, 반야바라밀다는 니르바나님의 용(用)이다. 니르바나님의 얼(반야바라밀)을 받은사람은 얼나의 붓다(Buddha)가 된다. - P48

개체(個體)의 제나(自我)가 전체의 얼나(三我)로 돌아가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제나(自我)가 없어지고 사랑과 기쁨과 광명의 얼나가 황홀하다. 석가붓다가 깨달음을 알고서 3칠일 동안 법열(法悅)에 있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나 쪽에서 말하면 제나의 죽음인 상아(喪我)의 좌망(坐忘)이다. 그러나 얼나 쪽에서 말하면영원한 생명인 얼나(다르마, 프뉴마)의 실현이요 영광이다. 이 얼나로 솟나야 혈연(血緣)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붓다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개체의 생명이 전체의 생명과 하나(一)되는 것이다. 이것이 귀일(歸一) 신앙이다. - P325

류영모가 말씀만을 믿는다는 것이 니르바나님의 말씀(만트라)은 참되어 거짓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몸나도 거짓이고, 세상도 거짓이고, 우주도 거짓인데 오직 니르바나님만이 그리고 니르바나님의 말씀만이 참되어 거짓이 없다. 거짓은 반드시 죽고 반드시 죽으면 거짓이다. 영원한 것이 참이고 참은 영원한 것이다. 니르바나님(하느님)은우리의 사모할 영원한 님이요, 또한 우리가 찾아야 할 참나다.  - P357

석가붓다는 팔정도(八正道)로 사는 사람은 저 언덕(피안)에 이른 것이요, 팔정도로 못 사는 이는 저 언덕(피안)에 이르지 못한 이라고 말했다. 팔정도로 사는 사람은 얼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얼나(法我)는 니르바나님의 생명인 얼(Dharma)인 것이다.
그러므로 얼나를 깨닫는 것이 니르바나님께로 가는 것이 된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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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 태자가 6년 동안 결사적인 고행 끝에 얻은 깨달음을 한마디로 나타낸 것이고, 집, 멸, 도(苦集滅道) 4성제(四聖諦)이다. 괴로운 몸과 모여진 맘의 제나(自我)를버리고 니르바나님(Nirvana)이 주신 얼나(法我)로 솟나라는 것이다. 얼나(法我)는 니르비나님(하느님)의 생명으로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노자(老子)와 예수가 깨달은 것도 이것이고 마하트마 간디와 류영모가 깨달은 것도 이것이다. 앞으로어떠한 성인이 온다 해도 이 진리밖에 다른 것은 없다.  - P41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 내 마음에 와 얼나(프뉴마)가 되었다고 하듯이 붓다는 니르바나님의 생명인 불성이 내 마음에 와 얼나(다르마)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쓰는 말이 달라 그렇지 실체(世體)는 하나인 것이다. 전체가 하나인데 다를 까닭이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 얼나가 하나이듯이 니르바나님과 다르마가 하나인 것이다. - P69

진여(眞如)인 니르바나님이 보낸 얼나는 제나(自我) 너머에 있다. 거짓나는 참나가있기 때문에 거짓나가 있다. 거짓나(假我)가 참나(眞我) 앞에 서면 거짓나는 없어진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제나가 없어져 무아(無我)가 되면 참나인 얼나(無我)가 드러난다.  - P85

수심(修心)의 명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제나(自我)가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질때가 온다. 그러면 이때까지 여름 장마 때의 구름처럼 내 마음을 덮고 있던 번뇌망상의 잡념이 사라진다. 이것이 이른바 공심(空心)이요 청정심(淸淨心)인 것이다.  - P170

류영모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절대진리(니르바나님)라는 것이 없다. 절대진리는 하늘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절대를 좇아 올라가는 것이다. 절대(하나)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땅위의 것은 훌훌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사람의 일이다. 절대진리(니르바나님)를 위해서는 내버릴것은 죄다 내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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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인 니르바나님(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인 얼나(法我)를 참나로 깨달아 참나의 권능으로 제나(自我)의 수성(獸性)을 다스려 제나의 수성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이른 사람을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얻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얼인 참나를 깨달아 붓다(부처님)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금강경을 포함한 모든 불경은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이루는 길을 밝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한 생명(Dharma)을 얻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멸망의 생명(自我)에서 영원한 생명(靈我)으로 솟나게 하고자 한 것과 일치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금강경>, p63


 박영호의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는 <금강경 金剛經>과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 ~ 1981)의 관점에서 풀이한 책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나(自我)와 얼나(法我)가 있다. 저자는 짐승의 본성인 수성(獸性)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나를 벗어나 자신의 다르마(Dhrama)를 깨닫고 얼나(法我)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일관된 주제로 <금강경>과 <반야심경> 전체를 설명한다.


 석가는 우리를 위하여 니르바나님께로 건너갈 떼배를 만들었다고 하고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나라에 있을 곳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무임승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모습을 본받아 내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너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고 한 석가요 내가 떠나가는 것이 좋다고 한 예수가 아닌가. 그들처럼 우리도 니르바나님(하느님)을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금강경>, p99


 저자는 <금강경>에서 벼락같은 깨달음으로 제나가 죽고 얼나가 태어나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도 연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는 본문의 여러 곳에서 불교사상을 설명하는데, 기독교, 유교, 도교의 사상을 가져오면서 보편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는 자칫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이러한 해석에 앞서 언어(言語)에 매이지 않고 언어에 담긴 뜻을 볼 것을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석가붓다는 법(法)에 의하라는 것이다. 법이라면 먼저 의언진여(依言眞如)의 법(法)이 있고 이언진여(離言眞如)의 법이 있다. 의언진여는 사람의 말씀으로 바뀐 진리의 말씀이고 이언진여는 사람의 말씀 이전의 얼나이다. 석가붓다의 유언은 거짓이 생기므로 의언진여의 법(말씀)을 다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엔 이언진여의 법(얼나)에 의지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얼나(Dharma)로 모든 경전을 검토하고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반야심경>, p34


 기독교 사상가이자 이를 바탕으로 유불선(儒佛仙)을 바라보려 했던 다석 사상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의 연결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이 불자 입장에서는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는 불교 안의 진리를 타 종교 신자들도 자신들의 배경 아래에서 쉽게 이해시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영원절대인 하나(一)가 하느님인 니르바나님이다. 니르바나님은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다만 내 마음속에 온 니르바나님을 다르마(Dhrama)라고 한다. 다르마(얼나)를 의식화(意識化)하면 반야바라밀다(Prajna paramita)로 도피안(度彼岸)의 지혜이다. 니르바나님으로부터 온 얼나만이 니르바나님에게 이른 얼나이다. 반야바라밀다가 제나(自我)의 수성(獸性)을 온전히 다스리면 붓다(Buddha)가 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반야심경>, p326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의 제나(自我)를 버리지 않으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제나(自我)에서 얼나(法我)로 솟나면 거짓나인 제나(自我)의 생노병사의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나(自我)가 생노병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석가붓다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반야심경>,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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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12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10-12 07: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yamoo 2023-10-12 0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석 유영모는 많이 안알려진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사상가이죠. 함석헌은 알아도 다석 모르는 사람들 많습니다. 기독교도 중에서도 아주 많아요. 책이 출간됐음에도 읽는 개신교도는 별로 없죠. 내가 아는 기독교도 중 10년 이상을 교회에 다녔음에도 다석을 모르는 사람들 부지기수에요. 참 거시기 합니다. 저는 다석 유영모를 소개한 책을 본 후 다석에 관계된 출판물은 구할 수 있으면 거의 구했는데, 위 두 책만 구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석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일종의 종교철학자인 듯해요. 불교 도교 기독교 등 종교의 핵심 경전들을 연구한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석의 저작들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렇지 않은 거 같아 아쉬운 감이 들었는데, 호랑이 님 서재에서 다석의 책도 보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3-10-12 16:32   좋아요 1 | URL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의 이름이 낯설지만, 기독교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종교의 틀을 제시하고 이를 삶으로 옮긴 실천적 철학자라는 점에서 yamoo님 말씀처럼 다석 사상이 보다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함석헌의 사상이 공동체의 윤리를 강조한다면, 다석 사상은 공동체 이전의 개인의 깨달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더불어 읽을 사상가들의 책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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