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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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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2>(이하 도마복음 한글역주 2)는 도올 김용옥(檮杌 金容沃, 1948 ~ )교수가 본격적으로 <도마복음 Gospel According to Thomas>에 대해 풀이한 주석서다. <도마복음(토마스의 복음)>은 기독교 신약성경의 외경(外經)이고, 이 문헌은 1945년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최근 문서다. 때문에 이에 대한 통일된 해석보다는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도마복음 한글역주 2>는 이들과는 또다른 차별화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도마복음 한글역주2>는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동양철학 특히 노자(老子, BC 533 ? ~ ?)적 관점에서 <도마복음>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도마복음>에 대한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저자의 <도마복음> 관련된 책은 총 3권이다. 그 중 도입에 해당하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를 제외하고, 주석에 해당하는 <도마복음 한글역주>는 전체 2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도마복음 한글역주 2>에서는 전체 114장 중에서 25장을 주석하고 있는데 나머지 89장을 분량이 비슷한 <도마복음 한글역주 3>에서 할당하였음을 생각해본다면, 저자는 <도마복음 한글역주 2>에서는 복음서에 대한 전체적인 틀을 잡는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도마복음>의 전체 틀은 무엇일까? 이번 리뷰에서는 그 줄기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말씀의 해석과 영원한 생명


  <도마복음>의 1장에서는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18장에서는 시작이 곧 종말이며, 여기에 서 있는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도마복음>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의 해석'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제1장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p115)... 제18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p319)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2. 말씀의 해석에 이르는 길 : 고통과 경이로움


 그렇지만,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고통을 겪고 고통 속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말씀의 해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나가는 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길은 다같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숫타니파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실존적 고독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이런 고통을 통해 발견한 경이(驚異)는 무엇일까?


 제2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p133)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제16장 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p307)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3. 말씀의 해석에 이르기 위한 하나됨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지지만, 제25장까지 반복되는 주제 중 하나는 '둘이 하나됨'이 아닐까 여겨진다.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고(18장), 나라가 너희 안과 밖에 있으며(3장), 남자와 여자가 하나된 자로서 존재할 때(22장), 비로소 그는 말씀의 해석을 발견을 위한 출발점에 설 수 있다.


 제3장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p157)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제22장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 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p355)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는 안타깝게도 말씀의 해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실,  <도마복음> 전체에서 결코 '말씀의 해석'에 대해 결코 명료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나라'로 끊임없이 은유될 뿐이다. '아버지 나라는 ~과 같다.' 뚜렷이 볼 수 없는 그리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길을 외롭게 가되, 자신의 영(靈)과 육(肉), 자신 내면의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를 통합시켰을 때 그는 비로소 시작점에 설 수 있음을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림] 아니마와 아니무스(출처 : http://toma.daretodonate.co/anima-animus/)


 제11장 너희가 죽은 것을 먹던 그날에는 너희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 너희가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는 과연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너희가 하나였던 바로 그 날에 너희는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p265)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는 이러한 큰 틀에서 <도마복음>을 해석한다. <도마복음>에 대한 해석을 성경(聖經)내에서만 찾지 않고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기존 신학(神學)의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독자들은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방법은 신선함과 낯섬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이 책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갈리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책과 해석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개인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도마복음>에 대한 해석을 3권에서 이어가는데, 남은 이야기는 <도마복음 한글역주 3>리뷰로 넘기도록 하며 리뷰를 갈무리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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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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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0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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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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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 Bardo Thos-grol>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라고 번역된다.(p10)... 생을 마치고 사후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대 앞에는 많은 빛들이 나타날 것이다. 임종의 순간에는 최초의 투명한 빛이 그대를 맞이하러 나타나리라. 그대는 그 빛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 빛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진리의 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p12) <티벳 사자의 서> 서문 中 


 <티벳 死者의 書>는 죽음을 맞이한 후 환생(還生) 이전까지 윤회(輪回)의 전체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티벳 전통 사상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후 49일 동안 인간이 마주하게 될 여러 모습 - 빛의 인도, 평화의 신(神)들과 분노의 신들 - 을 확인하게 되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명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이다.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p12) <티벳 사자의 서> 서문中


 그렇다면, <티벳 사자의 서>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 완성된 부처임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비어있음(沖)과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無形) 본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이 죽은 자들의 과제임을 깨우쳐 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가볍게 해주는 위로를 느끼게 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p250) <티벳 사자의 서> 中


 <티벳 사자의 서>의 깨달음이 죽은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때가 바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기 때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 ~ 2004)이 '결정적 순간'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사진 한 장에 표현하는 바와 같이 죽음의 순간,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내야 한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갖는 마지막 생각이 그 다음 환생의 성격을 결정짓는다고 믿는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인도의 현자들은 가르친다.(p40) <티벳 사자의 서> 서문中


[사진] <국민당 최후의 날, 중국 1948> by Henri Cartier-Bresson (출처 : http://photovil.hani.co.kr/213534)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모든 것이 환상이고, 죽음의 순간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살았을 때 과연 착하게 살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답을 하고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깨달음으로 대자유에 이를지라도,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수는 많고 악한 카르마는 힘이 있다. 그리고 무지는 너무 깊고 나쁜 습성이 오랫동안 뿌리내렸기 때문에 무지와 환영의 수레바퀴는 힘이 떨어지지도 않고 가속이 붙지도 않는다.(p317) <티벳 사자의 서> 中


 이처럼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을 걸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을 긍정하면서도,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모습을 않는다면 고통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이러한 내용으로 죽은 자에게도, 이를 읽어주는 이들에게도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티벳 사자의 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서>이기도 할 것이다.



PS. 티벳의 전통 장례는 천장(天葬)으로 치뤄진다. 사람의 시신을 토막내어 독수리에게 던져주는 그들의 장례 문화는 외국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날아오르는 독수리와 함께 하늘로 돌아가는(歸天) 모습을 담은 천장의 준비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사진] 티벳 천장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7520)


 그대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사념체이기 때문에 베이고 잘리고 토막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대의 몸은 실제로는 텅 비어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죽을 수가 없다. 그대의 몸이 조각조각 난도질당해도 그대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거듭되는 난도질은 그대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리라.(p351) <티벳 사자의 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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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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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1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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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6-12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의 내용과는 생뚱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국민당 최후의 날, 이란 제목의 사진
이 압권이었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18-06-12 15:39   좋아요 0 | URL
^^:) 어쩐지 이 사진이 끌리더군요. 제목이 ‘최후의 날‘이어서 때문인지, 내일 지방선거 어느 당 때문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ㅋㅋ

양철나무꾼 2018-06-12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
제가 워낙 감정이입을 잘 하는 편이라,
몇번 들춰보기만 했을뿐 제대로 읽지를 못했네요.

제가 이 책을 버거워한 이유는 다른 사진책에서 ‘천장‘하는 사진을 보고나서였습니다.
무섭거나 두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달까요.

암튼, 언젠가는 읽어야할 숙제로 남겨두고 있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꾸벅~(__)

겨울호랑이 2018-06-12 16:42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천장‘의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느꼈습니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양철나무꾼님께서 말씀하신 경이로움이 무엇이었는지 공감하게 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06-14 15: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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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4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6-1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에 너무 제 사념에 빠져서 이 책을 읽은 게 아쉬워서 다시 읽어야지 읽어여지 하다가 어언....-_-; <이집트 사자의 서>는 이 책과 달리 백과사전식이라 이게 뭐야-ㅁ-), 영적이지 않잖아! 흥미를 잃고;;....죽기 전에 제대로 중심 좀 잡아야 카르마에 안 잡힐텐데 말입죠;

겨울호랑이 2018-06-16 10:50   좋아요 1 | URL
저는 버스에서 할머니에게 자리 양보하기, 연의와 놀아주기 등으로 작은 선업을 쌓은 후 죽기 전 ‘모든 것이 다 뻥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세상을 떠나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집트 사자의 서>도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데, 이집트 신화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선의 황금시대 - 인간 정신의 위대한 경지를 보여준 禪의 역사와 그 정신
존 C. H. 우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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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믿는 종교(宗敎)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구도자(求道者)들이 자신의 삶을 바쳐 진리나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이보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교리(敎理) 또는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노력 외에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信仰) 문제가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가톨릭)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불교(佛敎) 특히, 선불교(禪佛敎)가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이 어렵게 느껴진다.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세계관(世界觀)과 개인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함이 불교 이해 어려움의 원인으로 다가온다. 그런 면에서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공사를 역임하기도 한 존 C.H우(John C.H.Wu)가 저술한 <선 禪의 황금시대>는 나와 같이 선(禪)에 대해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을 선의 세계로 편안하게 안내해주는 친절한 책이라 여겨진다.


  육조 六祖 혜능 慧能(638 ~ 713)부터 법안 法眼 문익 文益(885 ~ 958)까지 선(禪)의 불꽃을 이은 이들과 이들에 얽힌 짧은 예화를 저자 자신과 불교 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그리고 기독교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 ~ 1968)의 해설과 함께 소개된다. 무엇보다 <선의 황금시대>의 큰 장점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는 토머스 머튼이 책을 소개하며 쓴 <기독교인이 바라보는 선> 속에 잘 드러난다.


 이 간단하고 보잘 것 없는 글이 기독교의 경험과 선의 경험을 '비교하려고'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언젠가는 둘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종교적 희망을 피력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글을 읽고 기독교인이나 서구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펼칠 수 있다면, 잠시라도 판단을 내리려는 생각을 멈추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선이란 난해하고 괴상한 것이라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p393) 


 나 역시 기독교의 경험을 통해 선의 경험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구절 속에서 성경의 구절을 느끼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몇 구절을 옮겨본다.


1. 대승의 그릇과 악마의 유혹


 대승의 그릇


 황벽 黃檗 희운 希運( ? ~ 850)은 어린 나이에 중이 되었다. 한번은 천태산 天台山을 여행하다가 기이한 중과 마주쳤다. 그 중은 마치 황벽의 오랜 친구라도 되는 양 말을 트고 농담을 건넸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다가 불어난 개천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은 황벽에게 함께 건너가자고 했다. 황벽은 건너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노형! 건너가고 싶다면 혼자서 가 보시오." 중은 딱딱한 땅 위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황벽에게 말했다. "따라오라니까, 따라와!" 황벽이 말했다. "빌어먹을, 이 혼자서 다 해먹는 놈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놈의 정강이를 분질러 버렸을 텐데." 그 중은 이런 반응에 감동을 받은 듯 이렇게 말했다. "자네야말로 진정한 대승의 그릇이네! 나는 자네 상대가 아니야."(p134)


 악마의 유혹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 : 9 ~ 13)


2. 손님의 대접


 손님의 대접


 시중을 드는 중이 스승(조주)에게 물었다. "세자가 왔을 때는 방석에서 내려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장군에 불과한데도 당장에 내려와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예법이 어디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너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 제일 가는 손님이 오면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한다. 둘째 가는 손님이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하찮은 손님이 오면 문 앞까지 나가서 맞이할 게야."(p156)


첫째가 꼴찌가 되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


 저자는 서문에서 머튼 신부의 소개글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으며, 머튼 신부는 소개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 외에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음도 밝히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모두 동등하게 충분히 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말로 이루어진 교의와 언어적 편견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순수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p376)... 주관적인 신비(혹은 형이상학적) 체험과 객관적 교리는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기독교와 선에서는 이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 보거나 높은 위치로 보거나 늘 우선했다. 선에서는 체험이 항상 우월했는데, 이는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중요성에서도 그렇다.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에, 어떤 계시에 대한 관념이든 모두 폐기하고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서는 대단히 독립적인 견해를 취하는 선은, 존재에 대한 자연적인 존재론적 입장을 관철하는 길을 찾기 때문이다.(p377)


 기독교 교리가 top-down 방식이라면, 불교는 bottom-up 방식으로 수행을 한다고 느껴지는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예화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가르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러 종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봄꽃 (출처 : 한국관광공사)


  봄이다. 얼어던 땅이 풀리면서 싹이 올라오고 있고, 머지않아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서로 다른 색깔의 많은 꽃들이 있지만, 봄이 아름다운 것은 어느 하나의 꽃때문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생명력 때문이리라. <선 禪의 황금시대>를 통해 선불교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알지 못했던 다른 아름다운 깨달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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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3-13 0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이 읽으시는 책들을 보면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고 미뤄둔 책들을 쭉쭉, 쉽게 읽어내신다니까요. 그 사람이 선택하는 책을 보면 성격과 인격이 묻어난다는 생각도 들어요.

겨울호랑이 2018-03-13 07: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amadhi님^^:) 제가 모르는게 많아 밀린 숙제하듯 책을 읽고 있는 요즘입니다. 들려주신 격려 말씀에 큰 힘 얻게 됩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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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의 종교(宗敎)관련 에세이(essay)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는 종교에 대한 러셀의 생각이 담긴 여러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제목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대한 주제와 연관된 글 두편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자.


 [그림] 버트런트 러셀( 출처: http://bonlivre.tistory.com/474)


1.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The Existence of God


 우리는 러셀과 F.C코플스턴(Frederick Charles Copleston, 1907 ~ 1994) 예수회 신부간 이루어진 토론을 정리한 이 내용을 통해 기독교의 신 존재(存在)에 대한 한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코플스턴 신부는 많은 존재(存在)들이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갖지(內在) 못하여, 존재 이유를 밖에서 찾게 되고 이러한 존재는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다.


'코플스턴 : 무엇보다도 나는, 세상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 속에 지니지 못한 존재들이 적어도 일부는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로, 세상은 실제의 혹은 상상의 총체이거나 개별 대상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데 그 어느 것도 오로지 자신의 존재 이유만 지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대상이나 사건들이 존재하는 이상, 어떤 경험의 대상도 자체속에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이상, 그 이유는 대상들의 총체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유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이어야 합니다.'(p247)


코플스턴 신부의 이런 존재이유의 외재성(外在性)에 대해 러셀은 '실체를 포함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분석적 명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분석적 명제에서 '주어(主語)'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실재의 의미를 '술어(述語)'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의 기술 이론 (description theory)에서 지적한  '황금산 문제' 또는 '웨이틀리의 문제'가 여기서 다시 언급된다.


'러셀 : 신부님의 이론에 답하는 가장 적합한 출발점은 필연적 존재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필연"이란 말은 명제에 붙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분석 명제 같은 것들 다시 말해 부정하면 자기 모순이 되는 그런 것에만 붙여야겠지요. 만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자기 모순이 되는 존재가 있다고 하면 나로서도 필연적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수 없겠지요. (p248)... 신부님이 지금까지 하신 얘기는, 제가 보기엔 우리를 존재론적 증명으로 되돌려 놓는 것 같습니다. "실재를 포함하는 존재가 있으며 따라서 그의 실재는 분석적이다."고 하는 증명 말입니다. 나로서는 그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실재의 의미가 무엇이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여기에 대해 나는, 이름 붙여진 주사(主辭: subject)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서술된 주사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상 그 실재가 술어(術語 : predicate)가 아닌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p251)


 기술이론의 내용을 신(하나님)의 실재 문제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의 주어(명사)로 놓았을 때 '세상의 원인'과 '실재'는 각각 이를 설명하는 술어(동사/형용사)에 해당하고, 이들 술부들은 각각 주어를 설명할 뿐이지 이들간 관계를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세상의 원인은 실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분명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신부님이 "그렇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인이다."고 말한다면 그 경우 당신은 하나님을 고유 명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것은 의미를 가지는 진술이 아닐 것이며,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 혹은 저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석 명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p252)


 러셀의 이러한 내용에 대해 코플스턴 신부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토론은 이후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코플스턴 신부의 주장 속에는 기독교의 원인론과 목적론에 대한 주장이 담겨 있는데 러셀은 이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비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첫 단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자세히 담겨 있다.


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담긴 신 존재에 대한 러셀의 물음


 러셀은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입각될 수 있다는 교리에 물음을 던진다. 코플스턴 신부와의 대담은 이러한 가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많은 분량을 기독교의 신 존재에 관한 주요 원인인 제1원인론, 자연 법칙론, 목적론, 신성을 위한 도덕론, 불의 치유론 등에 대해 물음을 제시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 1274)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Schola 哲學)에 대한 러셀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가. '제1원인론'에 대한 물음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론은 제1원인론일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우리가 보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다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제일 마지막의 원인에 하나님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누가 날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 라는 보다 깊은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p22)


나. '자연 법칙론'에 대한 물음


'"그러나 자연 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기술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곧 다음의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그러한 자연 법칙들만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에 하나님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뜻도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 법칙의 일관성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p25)


다. '목적론'에 대한 물음


'세상 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이 상태에서 조금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각자의 주위 환경에 적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p28)


라. '신성을 위한 도덕론'에 대한 물음


'칸트의 도덕론에는 온갖 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의 관심사는 옳고 그름에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 그 차이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거라면  하나님 자신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선(善)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p29)


마. '불의 치유론'에 대한 물음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不義)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긴 안목에서 결국 정의가 존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확률에만 입각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우주 전체의 평균적 표본일 것이고 그러니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다른 곳들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의를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p30)


3. 종교란 무엇인가와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시한 러셀은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이고,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함이 파생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두려움, 큰 공포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현상을 통해 확인한다.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함이 나온다면, 종교의 기반을 두려움이라고 했을 때, 종교가 잔인함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 된다.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p40)


 러셀은 이러한 종교의 문제에서 벗어나 결국 우리가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을 통해  훌륭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자유인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p41)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제기된 신 존재에 대한 러셀의 물음은 과학적이고 치밀하다. 러셀의 물음에 대해 대답이 명확하지 못한 이유는 '신 존재 증명'이 명사적인 의미의 신(神)을 지시하는 선에서 멈췄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존 교단의 논리에 대해 철학적 비판을 가한 후 러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이 지향해야할 삶을 제시한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 러셀 -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제시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훌륭한 삶을 지향하는 러셀의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제시한다. 종교가 가져온 폐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자는 러셀의 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러셀의 논리를 우리는 비판없이 수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러셀은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종교의 모든 폐해가 서양의 전통이 아니라, 동양에서 흘러든 이른바 적폐(積弊)로 규정하는 러셀의 글 속에서 '기독교의 폐해'를 동양으로 넘기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626)이래 서양에서 강조된 과학적 탐구자세를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겨난 기독교가 유럽으로 전파된 이후 많은 공과(功過)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중세(中世) 천 년을 지내면서 신(God)을 강조한 기독교는 유럽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유럽 전통(傳統)의 주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관념을 동양적인 사상으로만 몰아갈 수 있을까. 또한, 러셀이 말하는 훌륭한 삶에서 '사랑'이라는 개념 역시 세계 문명에 공통된 황금률(黃金律)에 기반했다는 사실과 함께 서양의 많은 '지식'이 '신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中世) 1,000년의 시간적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지향하는 '훌륭한 삶'이 과연 서구의 과학적인 전통만의 산물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러한 러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선 러셀의 통찰과 그가 지적한 문제가 현재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유익한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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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23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어려워 보이는군요... ^^;;

겨울호랑이 2017-04-23 17:50   좋아요 0 | URL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전체 15편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2개 장(1장과 13장)을 제외한 다른 13개 장의 내용은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1장과 13장의 2개 장은 ‘존재론‘, ‘인식론‘ 관련한 내용이라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 이번 리뷰를 썼어요..^^; 주제는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다른 장을 통해서도 종교에 관한 러셀의 생각을 충분히 맛보실 수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7-04-24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양 탓으로 돌려 버리다니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로 빠지는 것처럼 황당하네요 ㄷㄷ

겨울호랑이 2017-04-24 16:35   좋아요 1 | URL
^^: 그러게요. 러셀 형님을 그리 안 봤는데, ‘저엉말~ 실망입니다.‘ ㅋㅋ
 
바가바드 기타 - 함석헌저작집 28 함석헌 저작집 28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바가바드 기타>는  성스러운 신에 대한 기타(歌頌(가송))라는 뜻이며, 기원전 4∼2·3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에 대한 신애(信愛)의 실천은 카스트나 남녀의 구별을 초월하여 모두 최고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정통적 브라만교 사상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열렬한 신애(信愛)의 정은 사상적 입장의 차이를 초월하여 브라만교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 위키백과)


<바가바드 기타>의 주요 화자(話者)는 '아르주나'와 '크리슈나'다. 친척간의 다툼은 큰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를 괴로워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비슈누 Vishnu의 화신)은 해탈을 통해 진정한 답을 찾도록 이끌어준다. 크리슈나는 지식의 최고의 경지인 브라만에 이르는 길을 아르주나에게 알려주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아르주나는 각성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근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가에 힘써 브라만에 이르는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5/Krishna_shows_Arjuna_his_universal_form_%28bazaar_art_by_C._Konddiah_Raja%2C_c.1950%27s.jpg)


1. 요가에 힘써야 하는 이유


제2장 상캬 요가


27. 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요,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 마라.

40. 여기는 힘써서 헛된 법이 없고 잘못에 빠짐도 없다. 이 법(다르마)을 조금 지킴으로써만도 너를 큰 두려움에서 건져줄 것이다.

48. 부의 정복자야, 너는 집착을 내버리고, 요가에 굳게 머물러 서서 되고 안 되고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요가라 하느니라.

50. 이성의 요가를 닦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능히 선행과 악행을 다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어나 요가에 힘을 쓰라. 요가는 행동의 훈련이다.


2. 온전한 요가


'만일 인생의 목적은 알면서도 행동이 결과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는 카르마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크리슈나인 것은 알면서도 크리슈나를 깨닫기 위해서 하는 명상에만 빠져 있다면, 그는 즈나나 요가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알고 온전히 크리슈나 의식과 헌신하는 믿음에서 크리슈나를 찾는다면, 그는 바로 박티 요가 곧 부디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요가다.'(p314)


3. 브라만에 이르는 길 : 지식의 최고의 경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50. 쿤티의 아들아, 완선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브라만에 이르는가를 간단히 들어보아라. 그것이 지식의 최고의 경지니라.

51.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52.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적게 먹고, 몸과 말과 뜻을 억제하여 명상과 요가에 전념하고, 언제나 이욕(離慾)에 의지하며,

53. 아집, 폭력, 오만, 욕망, 분노, 탐욕을 벗어나 아욕(我慾)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54. 브라만과 하나로 되어 마음이 안정에 든 사람은 근심도 바람도 없고, 일체 만물을 평등으로 보며, 나에 대한 최고의 믿음에 이른다.

55. 정성된 믿음에 의하여 그는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크며,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참으로 알게 되면 그러면 곧바로 내게로 돌아온다.

56. 언제나 온가지 행작을 하면서도 그는 나를 의지하고 내 은혜에 의하여 영원불멸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57. 마음으로 일체 행작을 내게 맡기고, 나를 최고의 돌아갈 곳으로 알고, 이성의 요가에 의지하여, 끊임없이 생각을 내게 두어라.

58. 생각을 내게 두면, 나의 은혜에 의하여 일체의 고난을 초월할 것이요, 만일 네 아집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할 것이니라.

63. 이처럼 모든 비밀 중의 비밀인 지혜를 나는 너에게 말했으니, 깊이깊이 생각한 후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의 경전(經典)이다. 한 문장도 수 많은 해석이 가능하기에 책이 주는 의미는 개인에 따라 매우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기독교(가톨릭)이고, 민족으로는 한(韓)민족이기에 이러한  틀(frame) 속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접하게 되었다. 함석헌 역의 <바가바드 기타>에는 다른 고전을 활용한 풍부한 구절 인용이 있지만, 역자의 인용/해석외에 인상깊었던 내용을 정리해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리(眞理)의 길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1.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최 영장군의 유언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바가바드 기타>의 다음 구절을 통해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제6강 진정한 요가


8. 요가를 닦은 자가 만일 지혜와 지식으로 혼의 만족을 얻고, 감각을 제어함으로써 부동의 자리에 서서, 흙이나 돌이나 금을 평등으로 보면, 그를 가리켜 요가의 통일을 얻은 자라 하느니라.


고려시대 벽란도를 통해 많은 이슬람 상인등이 오고 갔었고 , 원나라 간섭시기를 거치면서 색목인(色目人)으로 불리던 외국인들이 고려에 들어온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이들을 통해 이슬람, 인도 문물이 전해지지는 않았을까. 단순한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 영장군의 유언도 물욕(物慾)을 버리라는 말씀을 넘어서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으라는 보다 깊은 의미도 이 말씀에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2.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元素)론


<바가바드 기타> 에는 자성(自性)을 다음과 같이 8갈래로 구분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앞의 5가지의 요소를 우리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제7장 즈나나/비즈나나 요가


4.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에테르(空), 마음(識), 이성, 나(我執, 自我意識), 이것이 내 바탈(自性)의 여덟 갈래다.


'그래서 그(데미우르고스Demiurgos)는 생물들을 이처럼 다시 종류들과 부분들로 나누었다. 모든 생물의 요소들(stoicheia)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식으로 나누고서, 바로 이것들을 그는 다섯 가지의 형태들(skhemata)과 물체들(somata)이라 일컬었는데, 에테르(aither), 불, 물, 흙, 그리고 공기가 그것들이다.)' 박종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p156 주석


[그림] 플라톤의 입체 도형( 출처 : https://www.soobakc.com/Knowledge/Study_Infor/images/si_87/si87_img8.jpg)


3. <성경>과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를 읽다보면, 많은 경우 <성경> 속의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등장인물인 '크리슈나'가 '인도의 그리스도'로 불리워지며, 그의 일생이 '나자렛 예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역자의 해설 외에 연상되는 구절을 정리해 본다.


제8장 브라만 요가


7. 그러므로 어느 순간에도 나를 기억하라. 그리고 싸워라. 네 마음과 네 이성을 다 내게 바칠 때 너는 의심없이 내게로만 오느니라.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구약> (신명기 6장 4~6)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3. 오, 파란타파야, 이 길을 믿지 않는 자는 내게 이르지 못하고 다시금 죽음의 세상 길로 돌아가느니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신약>(요한복음 11장 25)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20. 구다사카야, 나는 모든 산 물건들 피조물들의 속에 있는 자아요, 나는 또 모든 산 물건들의 맨 첨이요 중간이며 또 나중이니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요한 묵시록 1:8)


아직 <금강경>, <반야심경>, <아함경> 등 불경에 대해 잘 모르기에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불교'의 틀을 가진 독자들은 이외에 또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배경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따라 이 책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1901 ~ 1989) 역주(譯註)의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 라다크리슈난 등 인도 철학자들의 해석에 노자, 장자, 공자, 기독교 성경 등에 대한 역자의 해박한 해석이 덧붙여져 있어,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가바드 기타>라는 점에서 곁에 두고 읽을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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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4-01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교와도 통하네요. 함석헌 역이라니, 그것도 재미나고요. 수행의 길이 적혀있어 흥미롭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4-01 21:48   좋아요 0 | URL
^^: 네 본문에 ‘삼매‘에 대한 언급이 있어 samadhi님 생각 했었습니다.. 불교를 종교를 가지신 분들은 더 깊이 있게 다가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7-04-01 2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이나 신령을 믿는 종교는 어쩌면 상호 공통점이 없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리뷰를 보니 이해가네요..ㅎㅎㅎ여튼 겨울호랑이님의 지적인 탐구는 브라만 요가!!!이네요..ㅎ

겨울호랑이 2017-04-02 07:23   좋아요 1 | URL
^^: 지적 탐구라고 하기엔 수박 겉핥기 정도 수준이지만, 유레카님 말씀처럼 모든 종교는 어떤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게된 시간이었습니다. 좀 더 많이 읽어야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올 것 같네요. 유레카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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