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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국의 지배 하에서 살게 된다. 그녀 자신이 왕의 딸이고 하이몬의 약혼자이므로 그녀는 영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크레온 자신도 아버지이자 남편이므로 혈연의 신성함을 존중해야 하며, 이 경건성에 대립되는 어떤 명령도 내려서는 안 된다. 이처럼 그들 두 사람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이 내재하면서 서로 대항하고 뒤바뀌며 강조되며, 그 개인들은 바로 자신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파멸한다... 고대와 근대 세계의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들 가운데 <안티고네 Antigone>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보인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소포클레스(Spphokles, BCE 497~406)의 <안티고네 Antigone>를 근대까지의 문학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안티고네>가 갖는 뛰어난 문학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쟁하는 개인과 그들이 저항해 싸우는 것과의 대립구조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약 파토스의 일면성이 충돌의 근거가 되면 다름 아니라 그 파토스는 생생하게 행위로 드러남으로써 어느 특정한 개인만이 파토스가 되었다는 것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만약에 그 일면성이 해소되어야 한다면, 그 파토스는 오직 하나의 파토스로만 행동해야 하므로 결국 제거되고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개인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오직 이 하나의 삶일 뿐이기 때문이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2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서 설명되는 직접적인 대립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다. 사자(死者)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은 신의 법칙과 인간 법칙이라는 인륜(人倫)의 대립, 여성의 원리와 남성의 원리,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으로 전환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는 <안티고네>에서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헤겔은 <안티고네>를 높게 평가한다.


 인륜적 위력들 서로 간의 운동과 인륜적 위력들을 생명과 행위 속에 정립하는 개체들의 운동은 양측이 다 똑같은 파멸을 경험하는 데에서 그 참된 결말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 위력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실체의 좀 더 본질적인 계기가 되는 데에 하등 앞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측의 동등한 본질성 그리고 그것들의 아무런들 상관없는 병존이 곧 그것들의 자기(自己)를 결여한 존재이다. 행실 속에서는 그것들이 자기 본질로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이한 것으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자기(自己)의 통일과 모순되고 또 그것들의 무법성과 필연적 파멸을 이루는 것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6


 크레온이 상징하는 인간적 법칙은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되는 정신적 본질이다. 이에 대항하는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신적 법칙은 자기 의식이다. 보편적인 정신적 본질과 개별적인 자기의식은 대립하지만, 사실 그들의 뿌리는 서로에게 두고있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기에 , 그들의 대립은 어느 일방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어느 한편에 의한 다른 편의 전복이 일어나는 그 지점에서 승리는 패배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자리 전환이 일어나면서 모두가 부정되며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적 본질은 우선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칙(법률)으로서 존재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성이 아닌 형식적 보편성이었던 검증의 보편성은 지양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정신적 본질은 또한 영원한 법칙인데, 그런 영원한 법칙은 바로 이 개인의 의지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히려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며, 직접적 존재의 형식을 가진 만인의 절대적인 순수 의지이다. 이 만인의 순수 의지는 또한 단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뿐인 계율이 아니며, 그것은 존재하고 또 유효하다. 정신적 본질은 직접적으로 현실인 범주의 보편적 자아이고, 또 세계는 오직 이 현실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존재하는 법칙이 단적으로 유효하다고 해서 자기의식의 복종이 결코 자의적으로 명령하고 그 안에서 자기의식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터인 그런 주인에 대한 봉사는 아니다. 오히려 법칙은 자기의식이 스스로 직접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자신의 절대적 의식의 사고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1> , p417


  <안티고네>에서 결말은 안티고네와 약혼자 하이몬, 크레온의 부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생존자는 크레온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모든 것을 잃었고, 패배자는 죽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정신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을까.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다음 상황에서 소외된 정신과 국가 권력과의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면서 정신의 고양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안티고네>에서는 이러한 고양이 표현되어 있을까?


 권력을 지니고서 백일하에 놓여 있는 법칙에 맞서 무의식적 정신은 현실적 수행을 위한 도움을 오직 핏기없는 그림자에서만 지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와 어둠의 법칙으로서 무의식적 정신은 처음에는 환한 대낮과 힘의 법칙에 굴복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권력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그 명예와 위력을 탈취한 현실적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먹어 치운 셈이다... 공개적인 정신의 완성은 그 반대로 전환되며, 그는 자신의 최고 권리가 최고의 불법이고 또 자신의 승리가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네이케스나 안티고네처럼) 자신의 권리를 훼손당한 사자(死者)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그를 침해한 위력과 동등한 현실성과 권력을 갖춘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위력들이 적대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힘인 가족 간의 공경심을 모독하고 부숴버린 공동체를 파괴한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60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헤겔의 미학강의>로 돌아가자. 헤겔은 본문에서 합창(코러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이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서정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는 최종 주제가 담긴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코러스에 의한 마무리는 휘브리스에 대한 경구로 끝맺음된다.


 합창은 사실은 행위 속으로 파고들어가 이와 관계하지도 않으며, 투쟁하는 주인공들에 대항해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심판을 내리고 경고하고 연민을 보이거나, 상상 속에 지배하는 신들의 영역으로 외화되는 신적인 권리와 내면적인 위력에 호소한다. 이렇게 표현될 때 이미 보았듯이 합창은 서정성을 띤다. 왜냐하면 합창은 행동을 하지 않으며, 또 어떤 사건도 서사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본질적이고 보편성을 띤 서사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24


코러스 : 양식(良識)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네. 신들에게 불경을 범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오. 뽐내며 허풍을 떨면 언제나 큰 매를 벌기 마련. 나이를 먹으며 지혜를 배우게 되는구나.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 p80/332


 개인적으로 <안티고네>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무리하게 해석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앞선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 사실은 그 이전에 있었던 오이디푸스 아들간의 대립의 연장 구도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공격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 안티고네와 크레온 이전에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있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공동체를 점유하지 못한 채 그 정상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그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폴리네이케스)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낱 개별자로 포착할 줄 알고 이런 무력함 속에서 추방하는 자(에테오클레스)는 권리를 자신의 편에 둔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8


  크레온은 테베를 지키려는 에테오클레스를 인정하는 대신, 공격해온 폴리네이케스를 부정하고 매장을 금지한다. 이때,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 것에 대해 헤겔은 신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소포클레스의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우리는 신의 저주를 아버지로부터 받는 폴뤼네이케스를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 너는 추방한 아우를 죽이고 아우의 손에 죽게 되리라. 그렇게 저주하노라. 너에게 새 집을 주라고 아버지 타르타로스의 가증스러운 어둠을 부르고 여기 복수의 여신들을 부르며, 너희들의 마음에 무서운 증오를 불어넣은 전쟁의 신 아레스도 부르노라. 자, 내 말은 다 들었으니 이제 가거라. 가서, 모든 카드모스인들과 그 믿음직한 동맹군들에게 말해라. 오이디푸스가 그런 저주를 두 아들에게 상으로 주었다고.


 코러스 : 폴뤼네이케스여, 당신의 과거 행적이 마음에 들지 않소. 이제 서둘러 돌아가시오. 


 폴뤼네이케스 : 아아, 내가 온 길이여, 내 임무는 실패로 끝났구나. 아아, 동료들이여. 아르고스에서 군대를 이끌었지만, 어떤 종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불행한 자로다.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39/332


 결국 폴뤼네이케스가 선택한 것은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나 반항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에 따라간 어쩔 수 없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티고네의 선택 또한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와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에서 드러나듯 신들에 대한 불경(휘브리스 hybris)의 대가를 치루는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공동체 윤리와 정신과 같은 냉정한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점에서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 감탄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폴뤼네이케스 :  그래, 날 잡지 마라. 이 길이 내 앞에 놓여 있구나. 아버지와, 아버지가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정한, 불행하고 사악한 길을 가야겠구나.  제우스 신께서 너희들에게 행운을 내리시길 빌겠다. 내가 죽어서 요구한 임무를 수행한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장례를 베풀 수 없으니까.〕 자, 이제 날 놓아 다오. 잘 있어라! 너희들이 살아 있는 나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안티고네  : 아, 불쌍한 내 신세!

폴뤼네이케스 : 울지 마라!


안티고네 : 오빠, 오빠가 예언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한탄하지 않겠어요?


폴뤼네이케스 :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겠지.


안티고네 : 그건 안 돼요. 내 말을 들어요.


폴뤼네이케스  : 설득해도 안 되니까 설득하려 들지 마라.


안티고네 : 나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오빠를 잃게 되면.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41/332


 헤겔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의 안티고네 해석 일부를 옮겨본다. 안티고네가 갖는 이중성에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이라는 매개로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의 해석과도 결을 달리한 버틀러의 해석도 흥미롭지만,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티고네는 친족의 경계에 드러난 인식 가능성의 한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순수하지 못한 방식으로, 누구든 낭만화하거나 사실 모범적 사례로 참고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친족의 인식 가능성을 상징한다. 결국 안티고네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의 위상이나 언어를 전유해서 크레온의 통치권을 가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오빠에게 운명지어진 영광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극 전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다. 즉 그녀는 살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낳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죽음은 살지 못했던 삶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크레온이 마련한 삶의 무덤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지금껏 내내 자신의 것이었던 어떤 운명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존속될 수 없는 욕망, 안티고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름 아닌 근친상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닌가? _ 주디스 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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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8-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들 사회책에서는 법단원에서 안티고네를 자연법 예비시아버지(?)를 실정법 이렇게 대립해 놓는 읽을 거리가 있었거든요? 헤겔의 인간적 법칙대 자기 의식을 그렇게 변용한 건지 다른 관점인지 궁금해지네요 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8-27 21:52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요즘 학생들 수준이 매우 높네요...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도는 <정신현상학>에 있는 여러 예시 중 하나로 보다 와닿는 내용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녔을 적에는 헤겔과 변증법 이름만 들어본 것 같은데, 학생들이 할 일이 참 많을 것 같네요... 일찍 학교가 가서 다행입니다.^^:)

英賢. 2023-08-27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의《안티고네》에서 주인공 안티고네는 이를 두고 신들에 의한, 글로 쓰이지 못한
틀림이 없는 법이며 정의롭다고 부른다.

˝어제, 오늘이 아닌 영원히 산다는 걸 법이라고 부르니,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느니라.˝

- 헤겔, 《정신현상학》, p.447

반유행열반인 2023-08-28 08:0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Andy님. 인용해주신 부분을 보면 자연법이라고 지칭할 만한 정의가 나오는 군요 ㅎㅎㅎ워낙 청소년용으로 풀어둔 토막글만 봐서 출처가 궁금했는데 원전이 헤겔이었다니ㄷㄷ

겨울호랑이 2023-08-28 12:19   좋아요 2 | URL
Andy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런 여러 얼굴의 니체 가운데 그동안 우리가 만난 니체는 대체로 온건한 표정의 니체였다. 진리 문제에 몰두하는 학자 같은 니체였다. 신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안고 대낮에 램프를 들고 배회하는 광인 같은 니체라고 해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약간 이상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생각이 깊은 니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어권에 니체를 알렸던 월터 카우프만이 그런 니체상을 유포한 사람 가운데 대표자였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발견한 니체는 ‘의심의 대가’다. 이 철학자들의 묘사 안에서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도덕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리의 폭정을 허물어뜨린 위대한 반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특히 들뢰즈의 해석 속에서 니체는 ‘다름’을 창출하고 ‘다름’을 향유하는 차이의 철학자, 긍정과 기쁨만을 아는 밝고 환한 철학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들이 주목한 니체는 싸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싸움은 철학자가 철학의 역사를 대상으로 벌이는 지적인 싸움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의 정복 대상은 인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칸트의 상상력 안에서 시작한 모험은 그 인식의 바다를 벗어나 삶 그 자체의 전장으로 나아간다. 니체의 분신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제자들에게 삶의 전쟁터에 선 전사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니체가 니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니체는 감추지 않고 강자의 승리, 강자의 지배를 옹호한다. 그는 연민과 같은, 약자를 이롭게 하는 감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민주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념도 부정한다. 약자를 이롭게 하고 약자의 삶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념도 가치도 모두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런 위험하고 잔인한 측면을 외면하고서는 니체 사상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한 것은 니체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질병의 침탈과 회복의 반복이 니체의 일생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의욕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 니체에게 삶은 끝도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삶은 또 그 고통을 넘어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었다.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테세우스는 권력의지이고, 아리아드네의 실은 진리 의지다. 권력의지가 진리 의지의 힘을 빌려 괴물의 실체와 만날 수 있을지, 한번 용기를 내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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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Theaitetos>에서는 제기된 '앎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난관(aporia)에 봉착되고, 소크라테스는 테오도로스와 동틀 녘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대화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밤사이 무너져 내린 대화의 논리 대신 떠오르는 햇살이 비친 후 드러나는 것은 단일한 총체로서의 이데아(idea)이며, 필멸의 감각 너머에 있는 불멸의 형상(形像) 그리고 형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유(思惟)와 상기(想起)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이 사실상 기대고 있는 근거들을 아주 풍부하게 서술하는 곳은 <테아이테토스>이다. 왜냐하면 이데아론은 감각과 앎[인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고, 앎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존재들을 그 자신의 대상들로 요구한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감각과 앎의 차이에 관한 가장 정교한 증명을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곳도 <테아이테토스>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명시적으로 <티마이오스>에서 말하듯이, 그의 이론은 앎과 참인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가장 정교한 증명이 <테아이테토스>에 제시되어 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20


 

 형상은 이성(理性, logos)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이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동굴 안의 우리는 동굴 밖 태양과도 같은 불변의 진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지만, 손발이 묶인 죄수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魂)이라면 모를까.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논증에 실패하며 마무리되는 <테아이테토스>의 논리 붕괴는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긍정을 의미한다.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자체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플라톤)는 [정견] 인식= 인식에 의거한 바른 견해라는 관점에 이릅니다. 가능하지 않는 정의입니다. 지각도, 바른 견해도, 이성에 의한 정견도 인식일수는 없을 겁니다. _ 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외 (유고 1864 가을 ~)>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 p120/387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로서 진리에 근접하는 경계면은 '서술될 수 있는 것이면서 판단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 보편적인 진리를 인식하는데는 실패할 지라도, 동굴 속의 흐릿한 불로 간접적으로 형상을 인지하듯 개별적인 특징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며 더듬으며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보여주는 수많은 은유를 통해 논리를 끌어가는 방식은 이데아가 드러난 구체성으로부터 진리를 찾아가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형상의 세계로의 여정 - 양극과 유비- 이라 할 것이다.


 그(플라톤)는 한 가지 감각만의 대상들인 소리와 색과 같은 대상들과, 우리가 여러 감각의 대상들에 공통된 것으로 인정하는 특징들 - 존재와 비존재, 다름과 같음, 둘임과 하나임, 비슷하지 않음과 비슷함, 짝수임과 홀수임,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 모두' - 을 구별한다. 더 나아가 그는 뒤의 것들은 감각이 아닌 사유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두 가지 접근 관점으로부터 플라톤은 아주 폭넓게 미치는 속성들의 부류를 따로 뽑아내는 데에 이른다. 이것을 이후 사상가들은 초월자들(transcendentalia)로 인정하게 되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19


 현실 속에서 이데아는 서술된다. 그 서술은 언제나 거짓되지 않고 참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플라톤의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가 연결되며, 이러한 세계관은 고대를 넘어 중세로까지 이어지며, 이데아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로 대체된다. 


 196c  왜냐하면 이런 일을 겪는 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린 거짓된 판단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일세... 사실은 거짓된 판단이 없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87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의 신 존재 증명은 순수 사유에 의한 이데아의 인식과 언제나 참인 판단에 의한 논증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준다. 거칠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존재성에 대한 판단 유무로 존재성을 부여하며, 이 존재보다 더 큰 존재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증명하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테아이테토스>의 깊은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단순히 지성 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이것은 [지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단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 속에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6


 그런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실재는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우리의 하느님인 당신입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8


 이러한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적 논증에 대해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은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을 통해 논박한다. 플라톤의 논리- 서술 자체가 참이며, 실존을 증명한다 - 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형상의 세계가 감각의 세계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네가 "실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데?" 라고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그것은 황금 산이야"라고 말할 경우, 나는 황금산이라는 구에 일종의 실존 existence을 돌리고 있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플라톤의 이데아는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어는 동사와 형용사로 설명된다. '스콧은 스코를랜드인이다', '스콧은 1771년에 태어났다', '스콧은 아이반호도 썼다'와 같이 스콧은 여러가지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된 문장 하나하나가 스콧의 존재성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존재성은 '독립된 존재가 있다'는 존재성에 대한 별도의 기술로만 참/거짓 판단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논증에서와 같이 서술되었다는 것만으로 실증되거나, 사유만으로 실재를 파악한다는 안셀무스의 논증은 기술이론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사유는 결코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더욱이 형상의 존재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것 the so-and-so'이라는 형식의 구를 포함한 진술은 올바르게 분석될 때, '그러한 것'이라는 구가 사라진다. "스콧은 <웨이벌리>의 저자였다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기술 이론은 이러한 진술을 "한 사람이,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이 <웨이벌리>를 저술했으며, 그 사람은 스콧이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또는 더 충분히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x가 c라면 'x는 <웨이벌리>를 썼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된 존재 entity가 있고, 더욱이 c는 스콧이다." '더욱이'라는 낱말 앞에 첫 부분은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혹은 실존했거나 실존할 것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정의한다. 따라서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의미한다. "x가 c라면 'x는 황금이고 산이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적 존재는 없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기술 이론에 따르면 '실존'은 기술구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스콧이 실존한다"라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되어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1/1474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를 통해 아포리아를 통해서 논리의 한계, 감각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며, 이로부터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여백으로 제시했다면, 러셀은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사실은 '존재에 관한 서술'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무수히 많은 서술의 집합으로서의 '감각의 이데아'를 보여주며 고대 형이상학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형상의 속성이 실은 감각의 연장임이 드러났다. 실존은 과연 서술 안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페이퍼에서 하이데거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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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듀이 지음, 김진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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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상대성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의 개념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더 억압적으로 느끼는 세력에 항상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구체적으로 자유는 특정한 억압적 세력의 영향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그것은 한 때는 인간의 삶의 당연한 부분으로 간주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속박이 된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53/146

자유주의(自由主義)에서 자유(freedom)은 언제나 ‘-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의 형태로 정의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 도피 Escape From Freedom‘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조금 예외적이긴 하지만, 존 듀이(John Dewey, 1859 ~ 1952)에게 자유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여, 이로부터 우리는 듀이의 ‘자유론‘이 단순한 ‘절대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생존과 인간일수 있도록 하는 보다 적극적 형태의 자유임을 알게 된다.

자유주의는 영속적이며 유연한 목적, 곧 능력 실현이 개인의 삶의 법칙이 될 수 있도록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 전념한다. 자유주의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 수단으로서 해방된 지성의 사용에 전념한다. 문명은 진행되는 변화들을 사회 조직의 일관된 형태로 통합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자유주의 정신이 요청받는 상像은 모든 개인의 정신과 영혼이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 자유와 기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조직이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61/146

무엇보다 듀이의 자유주의에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의 결합이다. 듀이가 개탄했듯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들은 자유를 원자화된 개인에게 귀속시키려고 했고 사회 변혁을 목표로 한 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개별성을 부르주아적 가치로 폄하하고 배척했다. 그 결과는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정당화, 혹은 비민주적 전체주의의 양 극단으로 나타났다. 반면 듀이는 사회 변혁의 중심에 개인의 자유와 개별성의 발현을 위치 지음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지속이라는 풀리지 않는 갈등 관계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10/146

또한,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개인은 국가와 사회에 대해 ‘냅둬유‘ 수준의 laissez-faire가 아닌 권리자로서 생존과 발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강조한다. 소극적 의미의 자유만을 강조했을 때, 개인은 사회의 원자(原子)로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이후 많은 분야가 전문화, 대규모화한 현대 사회에서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과연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듀이는 이 점에서 ‘자유‘의 의미가 재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현재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립이 아니라 기생적 의존이라는 사실이 대규모의 사적/공적 구호에 대한 필요를 입증한다. 공적 구제가 그 수혜자를 빈곤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에 반대한다는 현재의 주장은, 그 주장이 수백만 달러의 공적 자금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을 그대로 수수방관한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들린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46/146

E.H. 카(Edward Hallett Ted Carr, 1892 ~ 1982)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규정했다면, 듀이는 자유 역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사건 사이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성(Intelligence)‘이다.

자유주의의 교리들이 영원한 진리로 확립되는 순간 그것은 진전된 사회 변화를 반대하는 기득권의 도구와 빈말의 제전이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새로 등장한 힘에 의해 분쇄되었다. 그러나, 자유, 개별성, 그리고 해방된 지성의 이념은 지속적 가치를 지니는데, 여태껏 그 가치가 지금보다 더 진실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 축적된 경험에 의지하지만 항상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새로운 요구들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그 새로운 세력이 작동하고 새로운 요구가 충족될 수 있도록 과거 경험의 형식에 대한 재구성을 요구한다. 옛것과 새것은 옛 경험의 가치가 새로운 욕구와 목표의 종복이자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53/146

지성을 통한 자유의 재해석이 이루어졌다면,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실천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을 담은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제도 개선을 위해서는 자유주의는 혁명(革命)과 같이 급진적일 필요가 있다. 어제까지의 경험이 오늘날에는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변화는 단절적이며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인식. 이러한 인식으로 듀이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과거 유클리드 기하학은 뉴턴의 절대공간-절대시간의 토대가 되었다면, 유클리드의 공리(axiom) 하나가 깨어졌을 때,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했고, 리만 기하학에 기반하여 상대성이론이 받아들어질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과학사(科學史)는 듀이의 주장에 대한 자연과학에의 반증이 될 것이다.

처음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있더라도 다시 시작할 필요 없이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옛것과 새로운 것을 통합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이 지성의 본질이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지식으로 전환하고 그 지식을 생각과 목적에 투영해 미래에 무엇을 예견하고, 또 바라는 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지시해준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54/146

간단히 말해서 자유주의는 이제 급진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제도 구성의 철저한 변호와 그 변화를 가져올 상응하는 행위의 필요성에 대한 ‘급진적‘ 인식을 의미한다. 현 상태 자체와 그것이 불러올 변화의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수행되는 단편적 정책으로는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 변화를 생성하는 과정은 어떤 경우라도 점진적일 것이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65/146

‘자유‘를 단순히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극적 의미의 해석이 아닌, 해방의 목적까지 고려한 듀이의 자유론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의 이론이 절대권력에 대한 순종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마치 절대신에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명한다는 중세적 종교관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게 파야할 것 같지만, 이는 뒤로 미루도록 하자.

다만, 급진적 자유주의자인 듀이도 자유를 지키기 위한 무력과 전쟁에는 반대한는 입장을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를 지키기위해 선제타격도 불사하겠다는 ‘선제타격 자유주의자‘는 초급진적 자유주의자라고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철학이 없는 ‘굥(空)‘이라고 볼 것인가... 글자 하나가 틀린 듯 하지만, 그냥 빠르게 가도록 하자.

전쟁은 전장에서 발생하는 군사 간 접전이 아니라 모든 일상적인 사회 활동의 마비를 수반한다(p80)... 지성의 사용을 위한 마지막 논지는 그 방법이 사용되면 실제 목표, 즉 결과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폭력 사용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폭력의 필연성의 도그마를 주창하는 자칭 민주주의의 진정한 신봉자들의 주장보다 더 큰 오류를 나는 알지 못한다. 폭력은 대항하는 폭력을 낳는다. 뉴턴의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물리학에서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데 폭력은 물리적이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8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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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0-22 0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 변화를 생성하는 과정은 점진적이라는 점, 지성이 사회적 실천이라는 점 등등 여러 대목에서 듀이의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는지 짐작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2 07:06   좋아요 1 | URL
실질적인 사회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변화가 반영되는 제도상 변화는 단속적으로 일어나기에, 듀이가 급진적 혁명을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초원님 감사합니다.좋은 하루 되세요!^^:)
 

 니체는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로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의 분출하는 힘을 극한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반면에 하이데거의 글에서는 아폴론적인 냉정함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는 단단한 문장 아래서 소리 없이 끓어오른다. 니체의 문체가 '아폴론을 품은 디오니소스'라고 한다면, 하이데거의 문체는 '디오니소스를 품은 아폴론'이라고 할 수 있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4


 고명섭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하이데거를 통해 수많은 사상가들을 소환한다. 가깝게는 니체, 딜타이, 야스퍼스, 아렌트, 칸트, 헤겔로부터 멀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사상의 넓이와 깊이를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주저들을 설명한다. 저자는 1편에서는 <존재와 시간>, 2편에서는 <니체 1> <니체2>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본다. 낯설게 느껴지는 하이데거의 용어들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존재'와 '현-존재', '존재자' 그리고 '현존'만 간단하게 살펴보자.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를 분석하는 하이데거의 여정은 '세계'와 '세인'을 거쳐 이제 '내 존재'에 이른다. 여기서 먼저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세계를 열어 밝히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현존재는 어떻게 세계를 열어 밝히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말 자체를 해부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현존재(Dasein)는 세계-내-존재 곧 인간을 지징하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현-존재'(Da-Sein)라고 분철해 쓰기도 하는데, 그때 이 말은 '존재의 현'(Das Da des Seins)을 뜻한다. 현존재란 단지 인간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현'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현'이라고 번역된 다(Da)는 독일어로 '거기' 나 '여기', 곧 어떤 장소나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존재의 자리가 현-존재인 셈이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가 현-존재의 현이다. 그래서 현-존재(現-存在)다. 현-존재는 순우리말로 하면 '거기-있음'이 된다. '거기-있음'이란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 있음'을 뜻한다. 더 과감하게 말하면, 현-존재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6


 죽음과도 같은 극단적인 불안의 상황으로부터 '존재'를 인식하는 '현-존재'. 현-존재가 던지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동시에 자기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현-존재의 내부에 있으며 또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있기에, 존재는 현-존재의 내부와 외부의 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지만, 존재는 개별 존재자들에게는 '상대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뉴턴의 절대공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입자와 파동으로 공존하는 '빛'과 같은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될까.


 하이데거가 현-존재가 존재자가 되는 계기를 '죽음'에서 찾는다면, 아렌트는 이를 '생명'에서 찾는다. 마치, 하이데거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자연법칙으로 선택했다면, 아렌트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을 실존의 계기로 삼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하이데거의 용어에서처럼 죽음 또한 그 이면에 상반된 이미지를 갖는다면 '죽음-생명, 그렇지만 죽음'을 선택한 하이데거는 '디오니소스-아폴론'적인 요소를 과연 '아폴론'의 측면에서 통합한 철학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로서 주목하면, '현-존재'는 세계가 열리고 밝혀지는 장이 된다.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현존재는 애초부터 세계를 개시하고 열어 밝혀지는 장이 된다.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7


 하이데거 철학에서 확정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진리가 비은폐성이며, 비은폐성의 본질은 비밀이라는, 현존은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현존에는 기재(旣在)와 미래(未來)가 포함되어 있다는 본문의 내용은 그의 사상 안에서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의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와도 같이 현-존재는 각각의 상황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률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있음'과 '없음'이 하나의 현존 속에서 존재한다면, 그 현존의 형식은 'y=(-x)^n'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n이 짝수이면 x는 언제나 양수의 형태로, n이 홀수이면 x는 음의 형태로도 표현되는 방정식처럼, 하나의 존재 안에 두 개의 상반된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런지... 어렴풋한 이미지를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안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이론(descriptive theory)를 떠올리게 된다. 주어에 대한 술어의 표현을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기본 구도로 이해한 러셀의 도식에서 존재를 술부에서 찾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과는 조금 다른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래 독일철학의 독특성이라 봐야할까. 마치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에서 독일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피러 슈라이어를 영입한 이후 한국차에 독일DNA에 이식된 것처럼, 독일 철학에 동양사상의 DNA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본래적인 시간을 알려면 '현존'(An-wesen)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때 현존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현존이라는 말에는 현재라는 의미의 시간과 함께 현존이라는 의미의 존재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이란 '존재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존재가 다가와 머무르고 있음'이 바로 현존이다. 그런데 현존에는 눈앞에 실제로 있다는 의미의 '현재'(Gegenwart)만이 아니라 '부재'(Abwesenheit)도 포함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때 부재가 가리키는 것이 '더는 현존하지 않음'(Nicht-mehr-Anwesenheit, 더는 현재가 아님)과 '아직 현존하지 않음'(Noch-nich-Anwesenheit, 아직 현재가 아님), 다른 말로 하면 기재(Gewesenheit)와 미래(Zukunft)다. 우리에게 다가와 머무르는 현존에는 현재만이 아니라 지나간 것의 기재(지나옴)와 다가올 것의 미래(다가옴)도 포함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 현존이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07


 들어가는 페이퍼를 작성하다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나열되는 무의미한 글이 되버렸다. 이는 자신이 하이데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는 없었기에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하이데거를 주인공으로 서양철학사의 주요 인물들을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나고 보니, 쉽게 손에서 떨쳐버리기도 어렵다. 그렇게 한 번 읽었으나, 리뷰로 다 정리하기에는 많이 부족함이 들기에 본문을 다시 리뷰로 정리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본다.


 진리란 하이데거의 용어로 하면 '비은폐성'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그런데 진리의 본질은 비밀이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되 그냥 감추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음이다. 우리가 비밀을 비밀로 알려면, 그 비밀이 비밀로서 알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감추어진 것을 향해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바로 이렇게 감추어진 채 드러난 비밀이다. 친밀성이라는 것은 바로 진리의 본질이며 비밀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8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이중적이며 모호한 면이 드러난다. 나치당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14년 그의  노트에 드러난 반유대주의 성향.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인생 속에 진리, 현존 등의 이중적인 면을 투영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어려운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그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글을 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이데거는 나치의 인종적/생물학적 반유대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조처를 혁명 과정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수적 사태로 이해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하이데거에게 인종적 반유대주의는 아니더라도 특정한 형태의 반유대주의적태도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45


 "x가 c라면 x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이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존재가 없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그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기술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기술 어구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지만, "스콧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분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된, '실존 existence'를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 p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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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10-1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과연 하이데거 같은 나치 히틀러의 악행에 동조한 자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나 회의감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10-16 21:42   좋아요 1 | URL
김민우님 말씀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상과 행적을 분리할 수 없기에, 인간 하이데거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발자취가 20세기 사상사에 너무도 뚜렷하기에 이를 쉽게 무시하기도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의 명암이 있듯이, 하이데거의 사상 또한 명암이 있음을 인지하고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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