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여러 얼굴의 니체 가운데 그동안 우리가 만난 니체는 대체로 온건한 표정의 니체였다. 진리 문제에 몰두하는 학자 같은 니체였다. 신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안고 대낮에 램프를 들고 배회하는 광인 같은 니체라고 해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약간 이상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생각이 깊은 니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어권에 니체를 알렸던 월터 카우프만이 그런 니체상을 유포한 사람 가운데 대표자였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발견한 니체는 ‘의심의 대가’다. 이 철학자들의 묘사 안에서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도덕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리의 폭정을 허물어뜨린 위대한 반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특히 들뢰즈의 해석 속에서 니체는 ‘다름’을 창출하고 ‘다름’을 향유하는 차이의 철학자, 긍정과 기쁨만을 아는 밝고 환한 철학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들이 주목한 니체는 싸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싸움은 철학자가 철학의 역사를 대상으로 벌이는 지적인 싸움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의 정복 대상은 인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칸트의 상상력 안에서 시작한 모험은 그 인식의 바다를 벗어나 삶 그 자체의 전장으로 나아간다. 니체의 분신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제자들에게 삶의 전쟁터에 선 전사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니체가 니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니체는 감추지 않고 강자의 승리, 강자의 지배를 옹호한다. 그는 연민과 같은, 약자를 이롭게 하는 감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민주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념도 부정한다. 약자를 이롭게 하고 약자의 삶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념도 가치도 모두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런 위험하고 잔인한 측면을 외면하고서는 니체 사상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한 것은 니체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질병의 침탈과 회복의 반복이 니체의 일생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의욕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 니체에게 삶은 끝도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삶은 또 그 고통을 넘어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었다.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테세우스는 권력의지이고, 아리아드네의 실은 진리 의지다. 권력의지가 진리 의지의 힘을 빌려 괴물의 실체와 만날 수 있을지, 한번 용기를 내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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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Theaitetos>에서는 제기된 '앎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난관(aporia)에 봉착되고, 소크라테스는 테오도로스와 동틀 녘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대화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밤사이 무너져 내린 대화의 논리 대신 떠오르는 햇살이 비친 후 드러나는 것은 단일한 총체로서의 이데아(idea)이며, 필멸의 감각 너머에 있는 불멸의 형상(形像) 그리고 형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유(思惟)와 상기(想起)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이 사실상 기대고 있는 근거들을 아주 풍부하게 서술하는 곳은 <테아이테토스>이다. 왜냐하면 이데아론은 감각과 앎[인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고, 앎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존재들을 그 자신의 대상들로 요구한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감각과 앎의 차이에 관한 가장 정교한 증명을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곳도 <테아이테토스>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명시적으로 <티마이오스>에서 말하듯이, 그의 이론은 앎과 참인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가장 정교한 증명이 <테아이테토스>에 제시되어 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20


 

 형상은 이성(理性, logos)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이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동굴 안의 우리는 동굴 밖 태양과도 같은 불변의 진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지만, 손발이 묶인 죄수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魂)이라면 모를까.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논증에 실패하며 마무리되는 <테아이테토스>의 논리 붕괴는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긍정을 의미한다.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자체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플라톤)는 [정견] 인식= 인식에 의거한 바른 견해라는 관점에 이릅니다. 가능하지 않는 정의입니다. 지각도, 바른 견해도, 이성에 의한 정견도 인식일수는 없을 겁니다. _ 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외 (유고 1864 가을 ~)>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 p120/387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로서 진리에 근접하는 경계면은 '서술될 수 있는 것이면서 판단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 보편적인 진리를 인식하는데는 실패할 지라도, 동굴 속의 흐릿한 불로 간접적으로 형상을 인지하듯 개별적인 특징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며 더듬으며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보여주는 수많은 은유를 통해 논리를 끌어가는 방식은 이데아가 드러난 구체성으로부터 진리를 찾아가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형상의 세계로의 여정 - 양극과 유비- 이라 할 것이다.


 그(플라톤)는 한 가지 감각만의 대상들인 소리와 색과 같은 대상들과, 우리가 여러 감각의 대상들에 공통된 것으로 인정하는 특징들 - 존재와 비존재, 다름과 같음, 둘임과 하나임, 비슷하지 않음과 비슷함, 짝수임과 홀수임,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 모두' - 을 구별한다. 더 나아가 그는 뒤의 것들은 감각이 아닌 사유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두 가지 접근 관점으로부터 플라톤은 아주 폭넓게 미치는 속성들의 부류를 따로 뽑아내는 데에 이른다. 이것을 이후 사상가들은 초월자들(transcendentalia)로 인정하게 되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19


 현실 속에서 이데아는 서술된다. 그 서술은 언제나 거짓되지 않고 참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플라톤의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가 연결되며, 이러한 세계관은 고대를 넘어 중세로까지 이어지며, 이데아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로 대체된다. 


 196c  왜냐하면 이런 일을 겪는 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린 거짓된 판단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일세... 사실은 거짓된 판단이 없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87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의 신 존재 증명은 순수 사유에 의한 이데아의 인식과 언제나 참인 판단에 의한 논증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준다. 거칠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존재성에 대한 판단 유무로 존재성을 부여하며, 이 존재보다 더 큰 존재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증명하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테아이테토스>의 깊은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단순히 지성 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이것은 [지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단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 속에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6


 그런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실재는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우리의 하느님인 당신입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8


 이러한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적 논증에 대해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은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을 통해 논박한다. 플라톤의 논리- 서술 자체가 참이며, 실존을 증명한다 - 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형상의 세계가 감각의 세계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네가 "실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데?" 라고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그것은 황금 산이야"라고 말할 경우, 나는 황금산이라는 구에 일종의 실존 existence을 돌리고 있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플라톤의 이데아는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어는 동사와 형용사로 설명된다. '스콧은 스코를랜드인이다', '스콧은 1771년에 태어났다', '스콧은 아이반호도 썼다'와 같이 스콧은 여러가지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된 문장 하나하나가 스콧의 존재성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존재성은 '독립된 존재가 있다'는 존재성에 대한 별도의 기술로만 참/거짓 판단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논증에서와 같이 서술되었다는 것만으로 실증되거나, 사유만으로 실재를 파악한다는 안셀무스의 논증은 기술이론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사유는 결코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더욱이 형상의 존재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것 the so-and-so'이라는 형식의 구를 포함한 진술은 올바르게 분석될 때, '그러한 것'이라는 구가 사라진다. "스콧은 <웨이벌리>의 저자였다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기술 이론은 이러한 진술을 "한 사람이,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이 <웨이벌리>를 저술했으며, 그 사람은 스콧이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또는 더 충분히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x가 c라면 'x는 <웨이벌리>를 썼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된 존재 entity가 있고, 더욱이 c는 스콧이다." '더욱이'라는 낱말 앞에 첫 부분은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혹은 실존했거나 실존할 것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정의한다. 따라서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의미한다. "x가 c라면 'x는 황금이고 산이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적 존재는 없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기술 이론에 따르면 '실존'은 기술구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스콧이 실존한다"라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되어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1/1474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를 통해 아포리아를 통해서 논리의 한계, 감각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며, 이로부터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여백으로 제시했다면, 러셀은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사실은 '존재에 관한 서술'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무수히 많은 서술의 집합으로서의 '감각의 이데아'를 보여주며 고대 형이상학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형상의 속성이 실은 감각의 연장임이 드러났다. 실존은 과연 서술 안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페이퍼에서 하이데거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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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듀이 지음, 김진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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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상대성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의 개념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더 억압적으로 느끼는 세력에 항상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구체적으로 자유는 특정한 억압적 세력의 영향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그것은 한 때는 인간의 삶의 당연한 부분으로 간주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속박이 된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53/146

자유주의(自由主義)에서 자유(freedom)은 언제나 ‘-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의 형태로 정의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 도피 Escape From Freedom‘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조금 예외적이긴 하지만, 존 듀이(John Dewey, 1859 ~ 1952)에게 자유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여, 이로부터 우리는 듀이의 ‘자유론‘이 단순한 ‘절대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생존과 인간일수 있도록 하는 보다 적극적 형태의 자유임을 알게 된다.

자유주의는 영속적이며 유연한 목적, 곧 능력 실현이 개인의 삶의 법칙이 될 수 있도록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 전념한다. 자유주의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 수단으로서 해방된 지성의 사용에 전념한다. 문명은 진행되는 변화들을 사회 조직의 일관된 형태로 통합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자유주의 정신이 요청받는 상像은 모든 개인의 정신과 영혼이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 자유와 기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조직이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61/146

무엇보다 듀이의 자유주의에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의 결합이다. 듀이가 개탄했듯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들은 자유를 원자화된 개인에게 귀속시키려고 했고 사회 변혁을 목표로 한 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개별성을 부르주아적 가치로 폄하하고 배척했다. 그 결과는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정당화, 혹은 비민주적 전체주의의 양 극단으로 나타났다. 반면 듀이는 사회 변혁의 중심에 개인의 자유와 개별성의 발현을 위치 지음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지속이라는 풀리지 않는 갈등 관계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10/146

또한,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개인은 국가와 사회에 대해 ‘냅둬유‘ 수준의 laissez-faire가 아닌 권리자로서 생존과 발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강조한다. 소극적 의미의 자유만을 강조했을 때, 개인은 사회의 원자(原子)로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이후 많은 분야가 전문화, 대규모화한 현대 사회에서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과연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듀이는 이 점에서 ‘자유‘의 의미가 재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현재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립이 아니라 기생적 의존이라는 사실이 대규모의 사적/공적 구호에 대한 필요를 입증한다. 공적 구제가 그 수혜자를 빈곤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에 반대한다는 현재의 주장은, 그 주장이 수백만 달러의 공적 자금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을 그대로 수수방관한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들린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46/146

E.H. 카(Edward Hallett Ted Carr, 1892 ~ 1982)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규정했다면, 듀이는 자유 역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사건 사이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성(Intelligence)‘이다.

자유주의의 교리들이 영원한 진리로 확립되는 순간 그것은 진전된 사회 변화를 반대하는 기득권의 도구와 빈말의 제전이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새로 등장한 힘에 의해 분쇄되었다. 그러나, 자유, 개별성, 그리고 해방된 지성의 이념은 지속적 가치를 지니는데, 여태껏 그 가치가 지금보다 더 진실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 축적된 경험에 의지하지만 항상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새로운 요구들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그 새로운 세력이 작동하고 새로운 요구가 충족될 수 있도록 과거 경험의 형식에 대한 재구성을 요구한다. 옛것과 새것은 옛 경험의 가치가 새로운 욕구와 목표의 종복이자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53/146

지성을 통한 자유의 재해석이 이루어졌다면,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실천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을 담은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제도 개선을 위해서는 자유주의는 혁명(革命)과 같이 급진적일 필요가 있다. 어제까지의 경험이 오늘날에는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변화는 단절적이며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인식. 이러한 인식으로 듀이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과거 유클리드 기하학은 뉴턴의 절대공간-절대시간의 토대가 되었다면, 유클리드의 공리(axiom) 하나가 깨어졌을 때,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했고, 리만 기하학에 기반하여 상대성이론이 받아들어질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과학사(科學史)는 듀이의 주장에 대한 자연과학에의 반증이 될 것이다.

처음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있더라도 다시 시작할 필요 없이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옛것과 새로운 것을 통합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이 지성의 본질이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지식으로 전환하고 그 지식을 생각과 목적에 투영해 미래에 무엇을 예견하고, 또 바라는 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지시해준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54/146

간단히 말해서 자유주의는 이제 급진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제도 구성의 철저한 변호와 그 변화를 가져올 상응하는 행위의 필요성에 대한 ‘급진적‘ 인식을 의미한다. 현 상태 자체와 그것이 불러올 변화의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수행되는 단편적 정책으로는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 변화를 생성하는 과정은 어떤 경우라도 점진적일 것이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65/146

‘자유‘를 단순히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극적 의미의 해석이 아닌, 해방의 목적까지 고려한 듀이의 자유론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의 이론이 절대권력에 대한 순종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마치 절대신에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명한다는 중세적 종교관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게 파야할 것 같지만, 이는 뒤로 미루도록 하자.

다만, 급진적 자유주의자인 듀이도 자유를 지키기 위한 무력과 전쟁에는 반대한는 입장을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를 지키기위해 선제타격도 불사하겠다는 ‘선제타격 자유주의자‘는 초급진적 자유주의자라고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철학이 없는 ‘굥(空)‘이라고 볼 것인가... 글자 하나가 틀린 듯 하지만, 그냥 빠르게 가도록 하자.

전쟁은 전장에서 발생하는 군사 간 접전이 아니라 모든 일상적인 사회 활동의 마비를 수반한다(p80)... 지성의 사용을 위한 마지막 논지는 그 방법이 사용되면 실제 목표, 즉 결과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폭력 사용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폭력의 필연성의 도그마를 주창하는 자칭 민주주의의 진정한 신봉자들의 주장보다 더 큰 오류를 나는 알지 못한다. 폭력은 대항하는 폭력을 낳는다. 뉴턴의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물리학에서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데 폭력은 물리적이다. _ 존 듀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 p8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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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0-22 0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 변화를 생성하는 과정은 점진적이라는 점, 지성이 사회적 실천이라는 점 등등 여러 대목에서 듀이의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는지 짐작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2 07:06   좋아요 1 | URL
실질적인 사회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변화가 반영되는 제도상 변화는 단속적으로 일어나기에, 듀이가 급진적 혁명을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초원님 감사합니다.좋은 하루 되세요!^^:)
 

 니체는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로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의 분출하는 힘을 극한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반면에 하이데거의 글에서는 아폴론적인 냉정함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는 단단한 문장 아래서 소리 없이 끓어오른다. 니체의 문체가 '아폴론을 품은 디오니소스'라고 한다면, 하이데거의 문체는 '디오니소스를 품은 아폴론'이라고 할 수 있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4


 고명섭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하이데거를 통해 수많은 사상가들을 소환한다. 가깝게는 니체, 딜타이, 야스퍼스, 아렌트, 칸트, 헤겔로부터 멀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사상의 넓이와 깊이를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주저들을 설명한다. 저자는 1편에서는 <존재와 시간>, 2편에서는 <니체 1> <니체2>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본다. 낯설게 느껴지는 하이데거의 용어들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존재'와 '현-존재', '존재자' 그리고 '현존'만 간단하게 살펴보자.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를 분석하는 하이데거의 여정은 '세계'와 '세인'을 거쳐 이제 '내 존재'에 이른다. 여기서 먼저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세계를 열어 밝히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현존재는 어떻게 세계를 열어 밝히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말 자체를 해부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현존재(Dasein)는 세계-내-존재 곧 인간을 지징하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현-존재'(Da-Sein)라고 분철해 쓰기도 하는데, 그때 이 말은 '존재의 현'(Das Da des Seins)을 뜻한다. 현존재란 단지 인간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현'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현'이라고 번역된 다(Da)는 독일어로 '거기' 나 '여기', 곧 어떤 장소나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존재의 자리가 현-존재인 셈이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가 현-존재의 현이다. 그래서 현-존재(現-存在)다. 현-존재는 순우리말로 하면 '거기-있음'이 된다. '거기-있음'이란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 있음'을 뜻한다. 더 과감하게 말하면, 현-존재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6


 죽음과도 같은 극단적인 불안의 상황으로부터 '존재'를 인식하는 '현-존재'. 현-존재가 던지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동시에 자기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현-존재의 내부에 있으며 또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있기에, 존재는 현-존재의 내부와 외부의 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지만, 존재는 개별 존재자들에게는 '상대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뉴턴의 절대공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입자와 파동으로 공존하는 '빛'과 같은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될까.


 하이데거가 현-존재가 존재자가 되는 계기를 '죽음'에서 찾는다면, 아렌트는 이를 '생명'에서 찾는다. 마치, 하이데거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자연법칙으로 선택했다면, 아렌트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을 실존의 계기로 삼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하이데거의 용어에서처럼 죽음 또한 그 이면에 상반된 이미지를 갖는다면 '죽음-생명, 그렇지만 죽음'을 선택한 하이데거는 '디오니소스-아폴론'적인 요소를 과연 '아폴론'의 측면에서 통합한 철학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로서 주목하면, '현-존재'는 세계가 열리고 밝혀지는 장이 된다.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현존재는 애초부터 세계를 개시하고 열어 밝혀지는 장이 된다.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7


 하이데거 철학에서 확정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진리가 비은폐성이며, 비은폐성의 본질은 비밀이라는, 현존은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현존에는 기재(旣在)와 미래(未來)가 포함되어 있다는 본문의 내용은 그의 사상 안에서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의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와도 같이 현-존재는 각각의 상황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률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있음'과 '없음'이 하나의 현존 속에서 존재한다면, 그 현존의 형식은 'y=(-x)^n'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n이 짝수이면 x는 언제나 양수의 형태로, n이 홀수이면 x는 음의 형태로도 표현되는 방정식처럼, 하나의 존재 안에 두 개의 상반된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런지... 어렴풋한 이미지를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안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이론(descriptive theory)를 떠올리게 된다. 주어에 대한 술어의 표현을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기본 구도로 이해한 러셀의 도식에서 존재를 술부에서 찾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과는 조금 다른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래 독일철학의 독특성이라 봐야할까. 마치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에서 독일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피러 슈라이어를 영입한 이후 한국차에 독일DNA에 이식된 것처럼, 독일 철학에 동양사상의 DNA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본래적인 시간을 알려면 '현존'(An-wesen)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때 현존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현존이라는 말에는 현재라는 의미의 시간과 함께 현존이라는 의미의 존재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이란 '존재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존재가 다가와 머무르고 있음'이 바로 현존이다. 그런데 현존에는 눈앞에 실제로 있다는 의미의 '현재'(Gegenwart)만이 아니라 '부재'(Abwesenheit)도 포함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때 부재가 가리키는 것이 '더는 현존하지 않음'(Nicht-mehr-Anwesenheit, 더는 현재가 아님)과 '아직 현존하지 않음'(Noch-nich-Anwesenheit, 아직 현재가 아님), 다른 말로 하면 기재(Gewesenheit)와 미래(Zukunft)다. 우리에게 다가와 머무르는 현존에는 현재만이 아니라 지나간 것의 기재(지나옴)와 다가올 것의 미래(다가옴)도 포함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 현존이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07


 들어가는 페이퍼를 작성하다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나열되는 무의미한 글이 되버렸다. 이는 자신이 하이데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는 없었기에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하이데거를 주인공으로 서양철학사의 주요 인물들을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나고 보니, 쉽게 손에서 떨쳐버리기도 어렵다. 그렇게 한 번 읽었으나, 리뷰로 다 정리하기에는 많이 부족함이 들기에 본문을 다시 리뷰로 정리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본다.


 진리란 하이데거의 용어로 하면 '비은폐성'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그런데 진리의 본질은 비밀이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되 그냥 감추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음이다. 우리가 비밀을 비밀로 알려면, 그 비밀이 비밀로서 알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감추어진 것을 향해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바로 이렇게 감추어진 채 드러난 비밀이다. 친밀성이라는 것은 바로 진리의 본질이며 비밀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8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이중적이며 모호한 면이 드러난다. 나치당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14년 그의  노트에 드러난 반유대주의 성향.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인생 속에 진리, 현존 등의 이중적인 면을 투영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어려운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그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글을 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이데거는 나치의 인종적/생물학적 반유대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조처를 혁명 과정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수적 사태로 이해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하이데거에게 인종적 반유대주의는 아니더라도 특정한 형태의 반유대주의적태도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45


 "x가 c라면 x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이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존재가 없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그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기술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기술 어구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지만, "스콧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분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된, '실존 existence'를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 p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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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우 2022-10-1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과연 하이데거 같은 나치 히틀러의 악행에 동조한 자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나 회의감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10-16 21:42   좋아요 1 | URL
김민우님 말씀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상과 행적을 분리할 수 없기에, 인간 하이데거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발자취가 20세기 사상사에 너무도 뚜렷하기에 이를 쉽게 무시하기도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의 명암이 있듯이, 하이데거의 사상 또한 명암이 있음을 인지하고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긴 기대이다. 즉 그것은 먼저 우리 목적의 실현에 대한 기대이고,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이다... 우리의 인생은, 단순이 여러 가지 기대만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여러 가지 기대를 기대하는, 기대의 기대로도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성(自己性)의 구조 그 자체이다. 모든 계열은 원리상 결코 '주어지지' 않는 이 궁극적인 항에 달려있다. 이 궁극적인 항은 우리 인생의 가치이며, 다시 말해서 명백하게 하나의 '즉자-대자'라는 형식의 하나의 충실이다. 이 궁극적인 항에 의하면 우리의 과거에 대한 회복은 앞으로도 뒤로도 단 한 번만 이루어질 것이다. _ 사르트르, <존재와 무>, p871


 "Life is Choice(C) between Birth(B) and Death(D)"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 ~ 1980)의 <존재와 무 L'Etre et le Neant >를 읽으며 그가 한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 명제에 담겨있는 인생이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내용은 <존재와 무>의 큰 얼개인 과거-인생-죽음의 관계를 보다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과거의 불변적인 요소 중 하나인 '탄생(birth)'과 '죽음(death)' 모두 현재와 관계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과거의 자유와 죽음의 불확실성 모두 우리의 현재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과거-현재-미래'의 시간(time) 구조를 연결해주는 것은 '선택'이며, '기도'이고 '기대'가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인생은 선택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보다 잘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자유는 과거와 관련하여 하나의 목적의 선택이 되지만, 거꾸로 말하면, 과거는 선택된 목적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것으로 있다... 과거의 의미는 나의 현재적인 기도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결코 앞서는 내 행위의 의미를 내 마음 내키는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오직 나만 이 순간순간에 과거의 '유효범위'를 결정지을 수 있다. _ 사르트르, <존재와 무>, p813


 다시 말하면 인생이란, 우리가 유한성을 선택하고, 그 유한성을 바탕으로 우리의 목적을 선택할 때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 죽음의 특징은, 그것을 언제 어느 때의 일로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기한 이전에 언제라도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_ 사르트르, <존재와 무>, p869


 여기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 ~ BC322)에게 의견을 청해본다. '행복'에 관한 윤리학인 <에우데모스 윤리학 Ethica Eudaimonia>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덕(arete)은 선택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덕을 갖추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면,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기대를 갖는가'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를 지나 '인생에서 최상의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관점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1220b 모든 경우에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 중간인 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그것이 앎과 이성이 명령하는 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서나 그것이 가장 좋은 성향을 산출하기도 한다. 이것도 귀납과 추론을 통해 분명하다. 반대자들은 서로 파괴하니까. 양극단은 서로에게도, 중간에게도 반대이다... 따라서 성격의 덕을 필연적으로 어떤 종류의 중간과 어떤 중용(mesotes)에 관련된다. _ 아리스토텔레스, <에우데모스  윤리학>, p71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macheia>에서도 강조되는 중용(mesotes)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중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인생에서의 중용은 무엇일까.  우리의 선택은 다른 기회비용을 낳는다. 보다 큰 기회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후회하지 않도록)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마지막을 사르트르의 문장에 대응하며 정리하는 것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Life is Choice(C) between Birth(B) and Death(D)"


"Eudaimonis(Happiness) is Balance(B) between Alternative(A) and Choic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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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20 0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짧은 소설이지만 <구토> 읽고 전율했습니다.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들과 모퉁이를 돌아가는 노파의 뒷모습.... 실존체험에 대한 묘사가 넘 강렬해서..!

겨울호랑이 2021-10-20 05:24   좋아요 2 | URL
아직 <구토>를 읽지 않았는데, 그레이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조만간 읽고 싶네요. 그레이스님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blanca 2021-10-20 15: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부분이 너무 공감이 가네요.

겨울호랑이 2021-10-20 15:52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삶을 살지만, 인생을 어느정도 살다보면 커다란 공통분모는 공유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blanca님 감사합니다. ^^:)

morbid3 2021-10-23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에서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번역되어 출판된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역자 분이 철학 박사가 아닌 문학 박사여서 그런지, 철학 용어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의 철학계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고유한 한국어가 아닌 전부 다 중국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그 번역은 철학에서 전통하신 분들이 번역을 해도 참으로 오역인 경우가 수두룩 하지요..

뭐 출판된것만 해도 기적입니다만..

저는 몰랐는데, 실존주의를 전공한 한국의 철학 박사가 한 명도 없답니다...참..ㅋㅋㅋ

2021-10-23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1-05 16: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깊어 가는 가을~
가족 모두 화목하게 ^ㅅ^

그레이스 2021-11-05 16:26   좋아요 1 | URL
저두요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11-05 17:49   좋아요 2 | URL
scott님,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금요일 저녁시간 되세요!

mini74 2021-11-05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님 ~ 호랑이님 계절이 다가오네요 ㅎㅎ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11-05 17:49   좋아요 2 | URL
날이 제법 추워졌네요. mini님 건강하게 하루 마무리 하세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11-05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11-05 22:2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편한 밤 되세요!^^:)

짜라투스트라 2021-11-05 18: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11-05 22:27   좋아요 2 | URL
짜라투스트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이하라 2021-11-05 19: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11-05 22:28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하루 잘 마무리지으세요!^^:)

초란공 2021-11-05 2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1-11-06 10:08   좋아요 1 | URL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여유있는 주말 되세요! ^^:)

모나리자 2021-11-05 2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1-11-06 10:09   좋아요 0 | URL
모나리자님 감사합니다. 좋은 가을 즐기는 하루 되세요! ^^:)

thkang1001 2021-11-06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1-11-06 16:08   좋아요 0 | URL
thkang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가을 보내세요! ^^:)

초딩 2021-11-07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즐거운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1-11-07 13:10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오후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