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동해안 여행과 서예 전시회를 다녀왔다. 일정 중 경포대에서 본 일출(日出)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 상설 전시된 검여 유희강 상설전시관의 <관서악부>를 보고 이번 페이퍼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먼저 일출. 해뜨는 것을 보기 위해 1시간 전에 일어나 밖을 보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만이 들려온다. 잠시 씻고 나온 사이 어느새 밖은 붉은 색으로 물들면서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만 같다. 예상일출 시간 오전 7시전에 해가 뜰 곳으로 생각되는 지점으로 핸드폰을 들고 기다려본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서 올라오는 태양. 어둠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서서히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올라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소리를 켜서 들으시면 더 좋습니다! ^^:)


[사진] 경포대에서의 일출(by 겨울호랑이)



 여러모로 부족한 일반인이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이기에 부족함이 많은 사진이지만, 앵글 너머의 현상은 숭고(崇高)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숭고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버크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숭고한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경악(astonishment)이다. 경악은 우리 영혼의 모든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데, 거기에는 약간의 공포가 수반된다. 이 경우 우리의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어떤 대상도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 그 대상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숭고의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_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 p99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1729 ~ 1797)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에서 숭고와 아름다움의 개념을 분리, 분석한다. 버크에게 숭고와 아름다움은 다르다. 아름다움이 빛을 통해 경험의 결과로 우리에게 인식된 것이라면, 숭고는 빛의 부재(不在)다. 버크에 의하면 빛이 없는 어둠의 상태. 여기에서 오는 경외와 공포. 이로부터 오는 이중적인 감정 - 공포와 매혹 - 으로부터 인간은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수평선 너머로부터 빛을 뿜어내면서 장대한 광경을 연출하는 일출은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까,  숭고라 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란 물체들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감각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성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감각적 성질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경험적으로 느끼거가, 우리 안에 사랑의 감정이나 그에 상응하는 감정을 불어일으키는 사물 속에 어떤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_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 p180


 빛이 없는 어둠의 상태에서 느껴지는 공포의 감정이 '숭고'라면 해가 떠오르면서 드러나는 형상과 이로부터 받는 느낌은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숭고가 인식 가능한 경계 넘은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위대함이라면, 아름다움은 인식할 수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출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경악과 공포로부터의 해방감이라고 설명되는 것일까? 이러한 설명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지기에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할거리로 남겨두어야겠다.


 빛이 숭고의 원인이 되려면 다른 대상들을 보여주는 빛의 원래 기능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빛은 너무 흔하기 때문에 단순한 빛만으로는 우리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없다. 강한 인상이 없으면 어떤 사물도 숭고한 느낌을 줄 수 없다. 하지만 태양빛과 같은 경우는 우리 눈에 직접 비치게 되면 감각 기관을 압도해버리며, 그렇게 되면 빛이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_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 p134


  다른 한 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354 ~ 430)의 조명설(照明說, the theory of illumination)을 떠올리게 된다. 캄캄한 어둠에서 솟아나는 빛으로부터 점차 구별되는 형상(形狀)들의 모습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신적 이성(logos)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그의 논리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지중해 수평선 너머 또는 북아프리카 사막 너머의 일출에서 신적 이성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땅은 저희가 지금 느끼고 만지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틀이 잡히지 않은 심연이었으며 그 위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해서 심연 위에 어둠이 있었습니다. 저것은 전적으로 무에 가까웠으니 모든 것이 무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존재는 하고 있어서 형상화될 가능성은 있었습니다(p469)... 보이지 않고 틀이 잡히지 않고, 심연 위로 어둠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보이지 않고 틀이 잡히지 않은 바로 그 땅으로부터, 바로 그 무형성 無形性으로부터, 거의 무에 해당하는 것으로부터 이 모든 것들을 당신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런 사물들로 인해서 이 가변적 세계는 지속하면서도 지속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계에 가변성 可變性 자체가 출현하고, 그 가변성에서 시간이 감지되고 측정되며, 형상들이 달라지고 교체하는 가운데 사물들의 변화로 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_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2장, p470


 경포대에서의 일출이 자연이 주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이었다면,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 ~ 1976)의 <관서악부 關西樂府>는 인간의 예술혼이 빚어낸 아름다움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신광수(申光洙, 1712 ~ 1775)의 <관서악부> 108수 전체를 글로 형상화한 작품은 폭이 34m에 이르며 작품을 보는 순간 감상하는 이들을 압도한다. 마치 백두대간의 거대한 산줄기를 접하는 느낌을 풍기면서도, 작품 안의 글 한자 한 자가 하나의 생명체인 듯 자리잡은 모습은 일출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숭고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평양의 모습이 신광수의 감각을 통해 그의 시(詩)로 재현되었다면, 그의 시는 검여의 서(書)로 다시 변환된다. 감각적인 18세기 조선의 풍경이 추상화되고, 다시 새롭게 해석되면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예술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숭고와 아름다움이 아닐까.


 <관서악부(關西樂府)>에서 '관서'는 평안도 지역을 뜻한다. '악부'는 한문학의 한 갈래이다. 이 작품이 7언 4구 형식의 108수로 이루어져있고 내용이 평안도, 특히 평양의 전모를 형상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서죽지사(關西竹枝詞)' 또는 '평양죽지사(平壤竹枝詞)'가 좀 더 적절한 제목일 것이다(p9)... 중국과 한국의 죽지사에는 낯선 지역의 독특함을 엿보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다. 죽지사의 탄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인이 민가를 윤색한다는 것은 낯선 지방을 문인이 탐색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지사는 노래로 쓴 유기(遊記)'라고 할 수 있다. _ 신광수, <관서악부> 해제, p13


 이제 일출과 <관서악부>로 부터 받은 느낌을 정리해보자. 일출이 만들어낸 숭고와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예술혼이 만들어낸 숭고와 아름다움. 이들 모두 '숭고'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지만, 근원은 다르다. 영원(永遠)의 자연과 필멸(必滅)의 인간이 길이 다르듯. 개인적으로는 일출과 <관서악부>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무한(無限)'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술의 기본 개념 가운데는 너무 단순하고 원시적이어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도 있다. 반면, 아무리 정의를 거슬러 올라가 계속하여도 여전히 같은 꼴의 정의가 계속되어 '끝이 없음'을 생각할 수도 있으며, 또 분석을 거듭하다 보면 더 이상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해져서 논리적으로는 더 이상 분석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말에 도달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같은 경우)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인간의 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정의가 비록 영원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정의되지 않은 말을 기초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 유의하면 충분하다. _ 버트런드 러셀, <수리철학의 기초> , p4


 끝도 없는 무한. 그렇지만 무한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무한대와 무한소. 끝도 없이 수가 커지는 것도 무한이지만, 0과 1 사이에도 셀 수 없는 많은 수가 있는 것처럼, 영원의 자연이 주는 감동과 필멸의 인간이 주는 감동은 끝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근원은 다르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관서악부> 서문에서 읽을 수 있는 주요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평안감사라는 직책의 인물형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이라는 공간의 성격이다. 이 둘은 <관서악부>를 교직하는 핵심축으로, 서문에서 신광수 자신이 <관서악부> 성격을 '평안감사가 사계절 행락하는 노래(關西伯四時行樂詞)'와 '서관지(西關志)'로 요약한 바 있다. 이는 곧 이 시의 중심축이 '평안감사'와 '평양'이며, 이것이 '행락'이라는 색채로 그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광수는 자신의 경험과 함께 평양의 지역적 정보를 최대한 포함시키려 했고 이것은 윤두수의 <평양지>의 내용이 시에 반영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_ 신광수, <관서악부> 해제,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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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3-03 15: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실, 일출 장면은 동영상 촬영본이 있는데 서재에 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파일을 올리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같이 나누고 싶네요 ^^:)

2023-03-03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3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3-03-03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씨가 참 멋지네요.

겨울호랑이 2023-03-03 15:41   좋아요 2 | URL
제가 서예를 잘 모르지만, 문외한인 제가 봐도 글씨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직접 보시면 글 이상의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응리라 생각합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5: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출 사진 넘 좋아요.
숭고함 그 자체입니다.
동해여행과 일출을 이렇게 깊이 있게 쓰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겨울호랑이 2023-03-03 15:50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참, 지금 막 일출 동영상을 이웃님 조언으로 올렸습니다. 같이 보시면 사진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으실 듯 합니다! ^^:)

Falstaff 2023-03-03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사진이 관훈청정, 관동의 햇무리가 맑고 깨끗하다.... 뭐 이런 뜻인가요? 아휴, 저 글씨 체는 읽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죠. 1965년 을사년 한가을에 쓴 글씨인 거 같은데.... 제 집에 걸려있는 이백의 시보다 천배, 만배, 십만배 잘 썼네요!!!!

2023-03-03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3-03-03 19:1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비밀글 아니어도 괜찮은데요. 전서체 비슷한 글씨를 요즘 누가 알아봅니까요. 저는 그래도 50점 받았잖습니까. ㅋㅋㅋㅋㅋ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무량청정. 청정하기 무량하다, 아휴, 없을 무는 그렇다 쳐도 헤아릴 량 자를 저렇게 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겨울호랑이 2023-03-03 19:17   좋아요 1 | URL
전서뿐 아니라 초서도 해독하기 참 힘든 것 갈아요. 글자를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오르기 힘든 것이 서도의 길인듯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3-03-03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장관인 일출과 멋진 페이퍼 글까지 잘 감상했습니다. 특히 서예 감동이에요. 한때는 서예박물관도 가서 전시도 보고 했었는데 한동안은 그러질 못했네요. 필력이 굉장히 힘있고 멋드러집니다.

겨울호랑이 2023-03-03 18:40   좋아요 1 | URL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초보자가 보기에도 다른 힘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

바람돌이 2023-03-04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장엄한 일출영상 잘 보았습니다. 저는 아침잠이 많아서 사실 일출을 잘 못봐요. 그래서 늘 일몰만.... ㅎㅎ
자연이 주는 숭고미와 인간의 창작품인 예술의 숭고미를 연결한 글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3-04 22:31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자연이 주는 웅장함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기에는 너무도 부족했고, 예술혼을 표현하기에는 제 글그릇이 많이 좁다는 것을 페이퍼 준비하면서 깊이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저녁 되세요! ^^:)
 

「산그늘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 연둣빛 새순을 피우고 있었다. 무위사 극락보전 뒤 언덕에는 해묵은 동백나무에 선홍빛 동백꽃이 윤기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점점이 붉은 홍채를 내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 떨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진읍 묵은 동네 토담 위로는 키 큰 살구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도의 봄빛이었다.(p33)」

어제는 전라도 강진에 다녀왔습니다. 매년 이맘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즈음에 할머니 산소에 가고 있는데, 어제가 그 날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때가 연의가 태어나고 2주 후 였습니다. 그래서 제게 2012년은 생명 탄생의 기쁨과 죽음이라는 슬픔을 함께 느꼈던 한 해로 기억됩니다. 그 후 할머니 산소에 가서는 손녀 잘 지내고 있다고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윤달이 있어 예년보다 늦은 가을 날을 보며 남도의 가을을 느껴봅니다. 마침 오늘은 「제2회 강진 갈대 축제」가 있어 남도의 가을을 낄 수 있었습니다. 순천 갈대 축제만큼 크지는 않지만, 작은 공간에서의 아기자기함이 오히려 남도의 정취를 더 잘 표현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겨울로 넘어가고 있는 11월 중순.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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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11-12 09: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의 글을 읽고서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생각했습니다. 할머니의 현신은 사라졌다고 해도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테고요. 증손자의 탄생으로 유대감이 이어졌다니 인연의 끈이 단단한 것 같습니다.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17-11-12 09:56   좋아요 2 | URL
^^: 오거서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뜻과 피가 흐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상님들을 추억하고 뜻을 기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거서님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감사합니다!^^

2017-11-12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子曰:「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

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

執柯以伐柯,睨而視之。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改而止。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안니하다. 사람이 도를 실천한다 하면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도를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시(詩)는 말한다.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벰의 법칙이 멀리 있지 않아.' 도끼가 꽂힌 도끼자루를 잡고 새 도끼자루를 말들려고 할 때에는 자기가 잡고 있는 도끼자루를 흘깃 보기만 해도 그 자루를 만드는 법칙을 알 수 있는 것이거늘. 오히려 그 법칙이 멀리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가!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사람의 도리를 가지고서, 사람을 다스릴 뿐이니,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치기만 하면 더 이상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p191)


'도끼자루를 자를 때, 그 자루에 관한 법칙(이상적 굵기, 싸이즈) 등은 바로 자기가 들고 있는 도끼자루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관한 법칙이 그 존재 자체에 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내재주의 사상이다.'(<중용, 인간의 맛> p195)


'도끼는 나무를 베려고 했다. 하지만 도끼가 나무를 벤다면 도끼는 나무뿌리 밑에 눌려 있을 수 없다. 벤 나무는 자랄 수 없고, 자랄 수 없는 나무는 도끼를 휘 감을 수 없다. 인공언어를 가지고 자연언어를 베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림] <알랙산더의 노동> 마그리트 1950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mage_speech&logNo=70167288801)


'세계 속에 살고 있으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세계 속의 지식이나 가치에 물들게 마련이다. 우리가 이 선입감을 벗고 세계를 맨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선이해야 말로 이해의 전제조건이다. 이 선이해를 이해의 지평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지평이 없으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없는 한 지평을 구성 할 수 없다. 이것은 이상한 고리의 악순환이다. 하지만 해석학은 이 이상한 고리를 적극 받아들인다. '해석학적 순환'은 전체적 지평과 개별적 이해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우리의 이해는 점점 더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미학 오디세이2, 진중권>


같은 나무와 도끼를 보면서도 동양(東洋)의 <중용中庸>에서 자사(子思, BC 483? ~ BC 402?)는 인간의 도(道)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반면,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 ~ 1967)는 그의 작품 <알렉산더의 노동>에서 자기모순과 해석의 순환을 발견한다. 분석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서양적 사유체계와 포괄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려는 동양적 사유체계는 이처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같은 사물을 보며 이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고 살만한 곳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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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8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블랙리스트를 쓰다가 걸린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도끼로 쳐내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2-08 11:4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사람들마저 우리는 포용해야하는지 참 고민이 됩니다... 우리도 그들을 거부한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고.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oren 2017-02-08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끼는 인류 진화 역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구였던 듯해요. ‘도끼에서 싹튼 ‘생각‘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법 거창한 제목을 달아놓고 제가 끄적거렸던 옛날 글을 찾아보니, 제가 한때나마 저런 글을 남겼다는 기억조차도 벌써 희미해져 있더군요. 그 사이에 벌써 도끼자루가 썩었나 봐요.. ㅠㅠ
* * *
초기 인류가 ‘도끼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약 7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인간이 불을 처음 사용한 시기였던 142만년 전으로부터 따지면 무려 70만 년 이상이나 더 지난 셈인데, 그 뒤로 인간은 ‘사냥을 통한 육식‘이 가능해지면서 두뇌를 키울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직립 보행 덕분에 인간은 턱의 구조가 바뀌고 혀의 정교한 놀림이 가능해져 언어에 필요한 여러가지 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돌도끼의 사용은 결국 사냥한 동물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한 이빨의 크기까지도 점차 줄이게 되어 언어의 발달에 더욱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집단 생활에 따른 의사소통의 발달은 결국 생각을 ‘공유‘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것이다.(http://blog.aladin.co.kr/oren/5987175)

겨울호랑이 2017-02-08 11:54   좋아요 0 | URL
Oren님께서 알려주신 서재글을 읽었습니다.^^: 생각의 시작이 ‘석기‘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의 발견, 직립보행, 언어의 사용 등으로 이어지면서, 인류는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좋은 리뷰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의 글을 통해서 도끼 등 석기는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기본도구이면서, 우리 생각의 뿌리가 되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좋은 채과 멋진 리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

yureka01 2017-02-08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도끼하나 가지고 싶어요...산에 갈려면 도끼는 필수 인데요(아 제가 댓글로 내용과 상관 없는 글만 쓴듯 ㅎㅎㅎㅎ) 도끼의 도리는 내손에 든 도끼와 가깝다..이런 이치에 공감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2-08 12:21   좋아요 2 | URL
^^: ㅋ 아니에요. 유레카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좋은 도끼가 좋은 이웃처럼 반드시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위의 글에 대해서 저보다 더 많이 공감하시리라 생각되네요. 유레카님 즐거운 오후 되세요.

AgalmA 2017-02-08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에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현대 수렵채집인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 수렵채집인들에게 어떤 가능성들이 있었을지 이해할 수 있지만, 고대엔 그 가능성의 지평*이 훨씬 넓었고 그 대부분은 우리 시야에서 가려져 있다˝
*가능성의 지평: 특정 사회에서 열려 있는 신념과 관행, 경험의 스펙트럼 전체를 말한다. 이는 나름의 생태적, 기술적, 문화적 한계를 전제로 한다. 하나의 사회나 개인이 각자의 가능성의 지평 안에서 실제로 탐색하는 범위는 매우 좁게 마련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는 포괄적으로 인간 이성의 오류와 한계(...그것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가 주를 이룸ㅎ;)를 짚어내는 게 많아 재밌더군요. 인간의 잔인성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2-08 18:57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Agalma님의 글을 읽으니 <사피엔스>는 <생각의 역사>처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작품인 것 같네요.아직 <사피엔스>를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조만간 읽어야겠네요.ㅋ 읽어야할 책이 많아서 2017년 연말까지 예약이 끝났네요..ㅋ

갱지 2017-02-09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다른과 틀린을 헷갈려 해,
바깥양반이랑 허구헌날 설전이네요:-p

겨울호랑이 2017-02-09 19:27   좋아요 0 | URL
^^: ‘다른‘과 ‘틀린‘은 많이 다른 말이겠지요? 제가 틀린 것은 아니면 좋겠습니다 ㅋ 갱지님 좋은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