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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6~17세기에 사가기록화를 만들어낸 집안은 다른 지역보다 영남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안동 지역은 기록화 외에도 각종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기로 유명하다. 조상의 손때가 묻은 각종 전적, 편지와 문서 등을 소중히 간직했을 뿐 아니라 사환, 모임, 행사, 여행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을 남기는 버릇이 강했다.

이상으로 사가기록화의 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을 영남 지역의 사족과 이유간 및 홍이상 집안에 한정하여 살펴본 것은 사가기록화 각각의 제작 배경에 이들이 비교적 자주 등장하여 결과적으로 다른 집안보다 비중있게 다룰 만했기 때문이다. 높은 관직에 이르면 관료 사회의 관행에 따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궁중기록화나 관청기록화를 집안에 쉽게 소장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사가기록화를 집안에 남기기 위해서는 기록화의 효용성과 역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일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집안의 전통이나 개인의 교유망 안에서 공유되는 경험이 중요했으며 이를 짚어나가다 보니 특정한 집안과 지역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지방에 비하면, 안동 사족들은 단단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지주 계층으로서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이황을 매개로 학문과 정치적으로 결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안동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학맥이 생활화된 공동체적 특징을 가진 영남의 사족들은 16세기 이래 사가기록화의 제작 배경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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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도에는 사가기록화의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 사가기록화는 시대를 거듭하며 양반 사대부 개인의 이력을 기념하고 집안의 명예를 높이는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과거 급제를 추억하는 방회도나 회방연도, 유수나 관찰사 등의 지방 수령 행차, 장수를 축원하는 경수연(회갑연), 가정 화목과 집안 번창의 상징인 회혼례 등 사가기록화가 함의하고 있는 길상과 염원이 평생도 안에서 종합적으로 시각화되어 있다. 사가기록화를 통해 축적된 여러 양상이 양반 사대부들이 열망하는 인생 행로를 시각화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여기에 18세기 이후 병풍화의 유행이 평생도 병풍이라는 한국 고유의 형식을 성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존중되는 이념이나 가치관은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그와 상관없이 숭상된 덕목은 높은 연치, 즉 장수였음을 사가기록화와 평생도는 시사하고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 노인, 덕이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현덕의 소유자로서 높은 지위에 올라 국가를 태평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인식을 평생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7 그중에서도 노인은, 사회적으로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은 따랐지만, 연치가 높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래 살아야만 그 모든 복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9세기에는 장수하는 조신을 우대하는 조정의 분위기가 이전보다 더욱 강해짐에 따라 왕은 회갑, 회혼, 회방을 맞은 대신 정원용과 그 자손들에게 최고의 은택을 베풀었고 기념일마다 어필도 하사하였다. 고종은 정원용이 벼슬살이를 시작한 지 70년이 되는 1871년에는 장손 정범조鄭範朝, 1833~1898에게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려주고 90세가 된 해에도 내외손을 초사에 등용하고 옷감과 음식을 예외적으로 후하게 보냈다. 이처럼 국가에서 장수한 대신들의 기념일에 왕이 직접 의례에 친림하여 축하하고 자손들까지도 우대하는 것은 수를 누리는 인물을 조신으로 두는 것 자체를 국가의 경사이자 길조로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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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2첩 병풍에는 화성유수가 통솔하는 세 종류의 행사가 한 화면에 동시에 그려졌다. 특정한 날에 실제로 치러진 행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화성유수의 권한과 위용을 가시적으로 잘 표출할 수 있는 주요 임무를 한 화면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구성한 것이다.

관할 지역을 배경으로 그려진 지방관의 행렬은 지방관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지역의 읍격과 도시의 위상을 과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주문자나 화가 모두 행렬도의 오랜 전통에 익숙하지만 화려한 의장이 주는 압도적인 시각적 효과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읍성도 병풍은 초기에는 관아에 설치될 용도로 읍성의 전모를 인물 묘사 없이 그리기 시작했으며 〈화성전도〉가 연폭 읍성도 병풍의 유행에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용이든 감상이든 읍성도 병풍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점차 관찰사나 수령의 행렬이 첨가되었다.

이렇듯 19세기에는 읍성도 병풍이 반드시 관찰사의 업무 수행을 돕는 자료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감상물로 개인적으로 수장되었다. 그렇다면 관찰사의 위용이 시각화된 그림들이 반드시 관찰사 한 사람을 위해 제작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정할 수 있는 사실이나 행사를 그린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그 외에 관찰사나 수령의 이미지가 포함된 읍성도 병풍은 이상적인 관로官路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 대형 화면이 주는 장식 효과와 함께 개인적인 소장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듯하다.

이처럼 지방 수령으로 재임할 때 이룩한 특정한 공적이 아닌, 부임 그 자체를 기념화의 주제로 삼은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 사가기록화에 나타나는 새로운 특징이다. 배경을 무시하고 오로지 행렬만을 보여주는 반차도 형식을 채택한 것도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료라면 공적인 회사繪事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반차도의 전통에 익숙했을 테니 수령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는 화려한 기치와 인물들이 행진하는 부임 행렬이 제일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에 정약용이 『목민심서 』에서도 말했듯이 지방관들이 부임 후 실무를 시작하면서 우선으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화공을 불러 지도[四境圖]를 작성하는 일이었다.19 소속 군현의 지형과 실정을 정확히 반영한 지도를 정당正堂의 벽에 걸어두고 행정에 참조하라는 것이다. 관할 구역의 상세한 지리적·인문적 정보를 담고 있는 대형 읍성도 병풍은 이와 같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산수 표현에서 특정한 수지법이나 준법이라고 부를 만한 표현의 구사 없이 자유롭게 붓질을 가하는 것도 중앙 화단의 교육과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화사의 특징이다. 원근에 관한 의식이나 공간의 깊이에 대한 관심이 없어 화면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한편 19세기 경화사족들은 기행 탐승을 즐겼고 이를 기념한 기행사경도의 제작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동시에 집안에 소장된 가전의 기행사경화첩이나 화병畵屛을 돌려보고 다시 제작함으로써 문벌의식을 표출하는 한 방법으로 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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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모에게 녹봉으로 봉양하는 영화[祿養之榮]를 누리게 해드리는 것을 아주 중요한 효도의 법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왕이면 큰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를 기다려 성대하게 수연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출세하여 지위가 고귀하게 된 뒤에 연로한 부모를 연석宴席에 모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맹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대개 왕이 되어 천하를 소유하는 것은 사람의 큰 소망인데 저것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지 않으니 세 가지 즐거움이 천하보다 큰 점이 어떠하겠는가.

근경의 중층 누각 건물은 서대문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고, 원산에는 도성의 성가퀴 일부가 보인다. 실제로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장소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구름이나 안개를 이용해 임의적으로 거리를 축소한 뒤 멀리 있는 경물을 화면 안에 끌어다 놓는 것은 기록화에서 흔히 쓰인 표현 기법이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매화나무, 푸르른 소나무와 대나무, 화분의 큼직한 괴석, 시동이 들고 오는 거문고 등 사대부를 표상하는 여러 장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제1폭과 반대로 화면 왼편에 무게를 두어 두 그림을 나란히 배치했을 때 대칭의 구도를 형성하게끔 고려하였다.

경수연에 앞서 수친계의 결성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은 경수연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림 제작의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아울러 수친계를 기반으로 열린 행사의 기념화였으므로 그림의 내용, 제작 및 분배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1603년의 수연은 이거의 노모를 위한 개인 집안 차원의 사적인 설행이었지만, 1605년의 경수연은 수친계 계원이 주축이 된 수연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공적인 성격이 강했다. 아울러 그림도 참석 집안 수대로 여러 건을 제작하여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특히 모란 병풍, 복식의 장식, 화병과 그릇의 문양 등이 모두 강렬한데, 바닥 전체에 무늬를 넣는 것은 배경 전체를 꽃무늬로 처리한 〈하연 부부 초상〉과 상통하는 19세기 후반적인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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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계회도나 동관 계회도의 제작이 관료 사회 전반에 만연하였던 현상이었다면, 사가기록화의 제작은 하나의 관행이 될 만큼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관직, 번성한 자손의 존재, 서화의 효용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제작 경험, 제작 비용을 충당할 경제력 등 그림 제작에 이를 만한 환경과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중기록화나 관청기록화와는 달리 사가기록화를 제작하고 후원했던 사람들은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 사가기록화의 제작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경상도 즉, 영남 지방에 기반을 둔 사족들이며 다른 하나는 한양을 중심으로 명문가를 형성한 경화사족들이다.

다시 말해 사가기록화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장수·높은 관직·가문의 번성 등 크게 세 가지로 함축되는데, 이는 사가기록화를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양반 관료들은 조선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했던 유교적 가치를 사가기록화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내려 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어느 장소에서나 관작·나이·덕망[三達尊]이 존중되었으며
10 사람들은 ‘큰 덕德을 지니면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으며 명성을 얻고 수명을 누린다’는 『중용』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겼다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관료 지배 체제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직이었으며, 관직 진출을 위해서는 과거 급제가 절대적인 순서였다. 고위 관료가 되어 가문의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을 영광되게 하는 효의 실천은 양반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사가기록화는 유교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한 본인과 조상의 자취를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후손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제작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이 평생 이루려고 노력했던 세속적 욕망이 투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제작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지역성이다. 제작을 이끌어간 두 축은 크게 영남 지방의 사족과 한양을 중심으로 명문을 이룬 경화사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16세기 이래 사가기록화를 제작하고 보존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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