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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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젠더 효과는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되고, 따라서 이 효과는 몸의 제스처, 동작,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양식들이 안정된 젠더 자아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법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젠더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의 모델이라는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9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는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젠더를 불연속적이며, 수행적 성과물로 정의한다. '남성'여성'의 안정적 이분법 체계를 기존 권력 구조의 산물로 규정하고, 그의 결과물인 '이성애'를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젠더 트러블>. 우리는 책을 통해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체계를 거부하고, 불안정적이고 불연속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난다.  버틀러가 본문에서 던지는 첫 질문은 과연 '섹스와 젠더는 구분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버틀러의 답은 '섹스는 젠더다' 이며 구분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엄밀하게는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기존 권력 구조의 정치적 조작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섹스를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라 지칭되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담론 이전의(pre-discursive) 섹스'라는 결과를 생산하면서, 바로 그 담론적 생산 작용은 은폐시키는 권력관계를 포과하기 위해 젠더의 공식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p98)...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다. 사실,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99


 '주체'의 문제는 정치학, 특히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중대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법적 주체라는 것은 정치학의 사법적 체계가 굳어지면 필경 '보이지 않는' 어떤 배타적 관행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의 정치적 구조화는 특정한 합법화의 목표, 배타적 목표를 갖고 진행되는 것이며, 이 정치적 조작(操作)은 사법 권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정치적 해석이 있기에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사법적 권력은 자신이 그저 재현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생산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87


 버틀러는 이분법 대신 '젠더'안에서 통합된 관념을 제시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섹스가 젠더라고 말하지만, 젠더가 섹스인 것은 아니다.(섹스는 젠더의 충분조건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구별/구분을 벗어나 통합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젠더 트러블>에서 저자는 우리 몸의 소화기관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몸은 하나가 아니다. 가늘고 긴 소화관이 입으로부터 항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분짓는다. 평소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 우리 몸은 '윗턱-아래턱'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느낀다. '음식'이라는 타자를 통해 우리 내면 안에 위치한 외면이 인식되는 것처럼 이분법 체계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 내면과 외면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상은 불안정하고 모호하다.


 내부와 외부의 구분도 그렇지만, 몸의 경계도 원래 정체성의 일부였던 것을 더러운 타자로 방출하거나 전환하면서 확립된다... 주체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분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은, 사회적 규제와 통제라는 목적을 위해 희미하게 유지되는 구분선이고 경계선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사실상 내부가 외부로 되어버리는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런 배설 작용은 다른 정체성-변별화 형식이 획득되는 모델이 된다. 사실상 이것은 타자들이 배설물이 되는 양상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완전히 구분되려면 몸의 전체 표면이, 있을 수 없는 침투 불가능성을 이뤄내야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37


 그럼에도 우리가 '외면'과 '내면' 또는 '남성'과 '여성'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사법적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우리의 인식이 이처럼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러한 상식은 필연적 결과가 아닌 우연적 산물에 불과하다. 때문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진품이 갖는 아우라(Aura)에 대해 강조한 것과는 달리, 버틀러는 '젠더 패러디'라는 용어를 통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 우연성은 규제에 의해서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이라고 추측되는 인과론적 통일성의 문화적 배치에 직면한 섹스와 젠더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애적으로 일관된 법 대신 연기에 의해 탈자연화된 섹스와 젠더를 보게 된다. 이 연기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선언하고 조작된 통일성의 문화적 기제를 극화하는 것이다...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4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이성애' 를 부정하는 버틀러가 '이성애'를 부정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드래그'로 대표되는 일종의 가로지르기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는 '수행적'이라는 동사(verb)로 활성화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로부터 기존 질서를 '명사(noun)'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차별점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가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자아를 지칭하는 장소에서의) 젠더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또 섹스가 (이성애적이어서 자신이 욕망하는 다른 젠더와의 대립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변별화하는 장소에서의) 욕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젠더는 섹스, 젠더, 그리고 욕망에 관한 경험의 통일성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이나 여성, 양 젠더의 내적 일관성이나 통일성은 안정되고 대립적인 이성애를 필요로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26


 영속적 본질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구성물, 즉 강제적인 속성의 정렬을 통해 일관된 젠더 연쇄로 생산된 구성물이라면, 본질인 젠더나 명사인 남성, 여성의 존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영속적 본질이나 젠더화된 자아의 외관, 즉 정신과 의사 로버트 스톨러가 '젠더 핵심(gender core)'이라고 부른 것은 문화적으로 설정된 일관된 선을 따라 속성들에 대한 규제가 생산해낸 것이다...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자유롭게 떠도는 일군의 속성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31


 이와 같이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서 규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젠더'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권력의 재배치'에 대해 말한다. 재배치되는 권력은 '문화/규범' 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들은 다시 '젠더'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젠더' 역시 '규범'을 만드는 또다른 변인(變因)임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범에 의해 결정지워지는 젠더가 아니라, 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젠더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젠더'가 '규범'을 만들고, 다시 '젠더'를 만드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결정되는 '젠더'. 마치 <주역 周易> <계사전 繫辭傳>에 나오는 '생생지위역 生生之謂易'이라는 표현처럼 새롭게 변화하는 젠더를 버틀러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젠더 트러블>의 논의를  통해 버틀러는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얻었을까. 아마도 잃은 것은 '젠더 정체성'이고, 얻은 것은 '정치성'이 아닐까. <젠더 트러블>을 통해 '~이 아닌'으로 정의되었던 기존 도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기존 질서에 '명사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체제에 '동사성'을 가져오고, '젠더'안에 동성애를 가져오면서, 기존 질서를 정(靜)으로 새로운 질서를 동(動)의 구분지으며 거대 담론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안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젠더 트러블>에서 받는다. 다만, 이렇게 거대 담론이 되면서. 페미니즘의 정체성이 약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 부분은 행동주의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성향과도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젠더 트러블>에 표현된 저자의 생각이 <젠더 허물기>에서는 어떻게 확대될지와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지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는 다음으로 넘기도록 하자...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63


젠더의 속성이 표현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이라면, 이런 속성들은 자신이 표현하거나 드러낸다고 하는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구성할 것이다. 표현과 수행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젠더의 속성과 행위둘, 몸이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보여주고 생산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수행적인 것이라면, 어떤 행위나 속성이 재단될 수 있는 선험적 정체성이란 없다. 그리고 진정하거나 거짓된 젠더 행위, 사실적이거나 왜곡된 젠더 행위 또한 없다. 결국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규정은 규제가 만든 허구임이 드러날 것이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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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4-21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앞에 서문 몇 쪽 겨우 읽다 어려워서 포기할까...하는 중입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4-21 15:44   좋아요 2 | URL
아... 처음 서문에 전체 주체가 압축되다보니 엄청 높아보이는데, 우선 본문을 부담없이 읽어보시고 서문을 다시 보시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버틀러의 용어가 다소 낯설게 다가오긴 합니다만, 그냥 끝까지 가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긴 합니다... 제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겠지만요...

황금모자 2021-04-21 16: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 철학 수용사로 박사를 받아서 헤겔 철학이랑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좀 더 와닿습니다. ‘Identity‘의 번역어 ‘정체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기서 ‘정‘자가 ‘올바를 정‘입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페미니즘/퀴어 이론은 그 반대의 기준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 방법은 결국 정-반-합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증법의 순환에 갇히게 됩니다. 버틀러는 이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이 아닌‘으로 설정되는 방식을 버리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수행성을 택한 것이지요. 버틀러가 제시한 가면의 비유, 드래그가 수행성의 일환입니다. 수행성 연구로 어빙 고프먼 - <자아 연출의 사회학>도 추천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4-21 17:01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황금모자님 설명을 들으니 더 명확해지네요. 고프먼의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에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성서 해석은 텍스트의 자료나 역사적 자료를 꼼꼼하게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이성적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성서해석과 성서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성은 <에티카>와 같이 철학이나 정치학 연구를 위해 필요로 하는, 추상적 사유 내지 이를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라기보다는 성서를 읽고 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과 같은 이성이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8 


  <스피노자의 [윤리학] 읽기>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모두 스피노자 철학 입문서로, 스피노자의 개인 철학과 정치 철학이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이해시켜준다. <윤리학 (에티카)> 에서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파악했다면, <신학정치론>에서는 이성을 사용해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고 급기야 인간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점이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비판적 이해를 통해 종교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신학정치론>의 가장 주요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1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전반의 내용 즉, 고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신의 뜻이 대리인을 통해 행해진 사례 - 모세 등 - 를 통해, '국가에 의해 제약된 종교', '개인의 자유에 의해 제약된 국가'를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제시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 드러난 정치철학은 '자유'라는 자연권을 기반으로 '종교'-'국가'-'개인'의 관계 정립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을 가지고 스피노자 선집에 담긴 스피노자 철학을 리뷰를 통해 보다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페이퍼의 마지막은 저자가 번역한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스피노자는 종교의 본질인 정의와 자비가 오직 통치자의 권리를 통해 법과 권리라는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 이럴 경우, 통치권은 주권을 보유한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에 종교는 오직 명령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권리를 통한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으며, 신은 지상의 군주를 도구로 해서만 인간을 다스린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4


 스피노자가 신학과 종교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이유는 바로 종교의 설립이 국가가 제정한 법령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았듯이 종교의 자유 역시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의 근거가 되는 생각의 자유는 일종의 자연권에 속한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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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정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신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E, 3부 정리2 주석], 이는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원리가 되며, 그것은 내가 다음의 연구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세 가지 논제로 요약될 수 있다. 


 1.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2.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3. 이런 정리들의 쓰인 형식은 앞서 존재하는 정신의, 영혼의 의도를 현실화하거나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체들 사이의 신체로서 그 자체로 물질적 실존을 소유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22


 워런 몬탁 (Warren Montag)은 <신체, 대중들, 역량 - 스피노자와 그의 동시대인들 Bodies, Masses, Power>에서 신체, 역량, 대중들의 관계를 스피노자 철학의 범위  안에서 '해방'이라는 주제로 따라간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유물론(唯物論)에서 바라보는 스피노자 철학의 개관을 알게 된다. 본문에는 여러 내용이 있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저자가 말한 세 가지 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따라가 보자.


 1.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이 사물들의 탐구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결코 어떤 것을 추론해서도 안 되며, 오직 지성 안에만 있는 것들을 사물 안에 있는 것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결론은 어떤 특수한 긍정적인 본질로부터 또는 참답고 타당한 정의(定義)로부터 도출된다._스피노자, <지성개선론>, p84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거나, 또는 오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연장의 양태일 뿐이다._스피노자, <에티카>, p96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는 <지성개선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추론이 아닌, 지성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의 추론에 대해 말한다. 지성으로부터 참된 인식으로의 나아감.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도구들로부터 복잡한 것들을 만들어 내듯, 지성도 타고한 힘으로 지혜의 정점(sapientiae culmen)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정신과 신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몬탁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인식 위에 해방의 문제를 '신체'와 '신체들의 변용'으로 돌린다. 정신이 신체와 동일하다면,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은 지극히 당연하다.


 해방에 이르는 길은 다른 곳, 대답을 전제하지 않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신체들에 대해 정신들을 더 이상 초월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때, 정신적 결정들, 의지의 행위들이 자신의 창조에 관한 신처럼 신체들과 무관한 실존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원인이라고 말해지는 물리적 행위들에 전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보일 때, 무엇이 벌어질까? 우리의 주의는 뜻밖에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인간의 내면성의 현상들, 의지의 행위들, 주어지거나 없어진 동의, 찬성이나 반대 그리고 그것들이 토대가 되는 권리와 법의 전적인 사법적 장치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 그리고 종속은 물리적/물질적 문제, 신체들이 하고 하지 않는 것의 문제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변용하는지의 문제가 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88


 2.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몬탁이 해석하는 신체는 단일(單一)한 개체 단위가 아니다. 신체는 생존을 하기 위해 상/하위 단위, 다른 신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신체'는 사회적 관계를 필연적으로 만들게 된다.


 신체는 공기, 물, 영양, 즉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아주 많은 이질적인 신체들의 섭취를 요구하며 그것이 없다면 신체는 빠르게 소멸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바로 신체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의 신체들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수많은 부분들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생존의 조건으로서 자연의 일부를 형성하는 인간 사회를 포함하여 다른 신체들, 보다 큰 신체들, 보다 큰 단일체들, 보다 큰 집합들의 다른 부분들 가운데 한 부분을 구성하면서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을 해야만 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75


(2) 우리가 정치를 역량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개체는 유의미한 분석 단위가 되지 않는다. 개체로서, 즉 분리된 자율적인 것으로서 개체의 역량은 이론적으로 무시될 정도로 미미하다. 사실상 자연 상태라는 통념은 이것이 분리되고 고립된 개체들의 사회 이전 상태인 한에서, 스피노자에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립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상 시민사회를 열망하며 그것을 결코 완전히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따라나온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62


 이와 함께 몬탁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과 '권리'를 동일하게 보고 있는 마트롱(Alexandre Matheron)의 해석을 빌린다. 이로부터 결국, 작은 신체보다 큰 신체가 더 큰 역량과 권리를 갖는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결정적인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다중'이다. 마트롱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윤리학>과 <신학-정치론> <정치학>이 같은 기하학적 구조를 가졌음을 말했다면, 몬탁은 양태(樣態)에 따라 정치철학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로부터정치 주체로서 다중에 의한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없다'가 도출된다.


 (1) 스피노자는 역량과 권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자연은 자연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 전체의 보편적 역량은 집합적으로 고려된 모든 개체들의 역량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61


 <정치론>에서 그(스피노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권리가 역량만큼이라면, 개체 하나만으로는 단지 작은 역량이나 권리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개체가 어떠한 실재성을 갖는 것이라면, 개체의 권리는 국가와 관련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리는... 각 개인의 역량 potentia이 아니라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38


 3. 이런 정리들의 쓰인 형식은 앞서 존재하는 정신의, 영혼의 의도를 현실화하거나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체들 사이의 신체로서 그 자체로 물질적 실존을 소유한다


 이상의 <신체, 대중들, 역량>들의 관계를 종합해보자. <지성개선론>에서 언급되었듯이, 스피노자는 현존하는 모든 지각으로부터 참다운 관념으로 나가고자 했다. 지각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정신-신체가 필요하며, 인간 해방의 문제는 결국 신체의 해방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신체들은 '생존'하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생존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크기의 신체들은  그 크기 만큼의 역량을 갖는다. (마트롱이 해석한) 스피노자는 권리와 역량을 별도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가장 강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얼핏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동일한 결론에 이른듯 보이지만, 국가의 배후가 되는 다중(multitude)의 역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왕권신수설'의 홉스와는 다르다는 것이 책 전반의 큰 줄기다. 


 스피노자는 단지 정신들의 해방, 신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정신의 자유, 이미 실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때 가장 잘 확증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단지 그 자신과 자신의 권리들의 소유자인 개체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는 개체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과 별개로 개체의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집합체의 해방을 요구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20


 대중들의 본성과 역량이 설명되는 가장 공통적인 형상figure 가운데 하나는 대개 국가 업무에 대한 눈에 띠지 않는 배경이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다의 형상이다. 죽음이든 불화든 국가에서 사소한 균열은 대중 행동과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들의 진실은 정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부, 성난 다중의 역량에 있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41


  결국, <신체, 대중들, 역량>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분석하는 책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몬탁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3부작 <제국> <다중> <공동체>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일단 이들에 대한 정리는 다음으로 넘기자. 그런 면에서 몬탁의 <신체, 대중들, 역량>은 스피노자와 네그리를 연결해주는 튼튼한 다리라고 정리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제국>은 이미 많이 넘겨서... 빨리 정리해야겠다... ㅜㅜ 



스피노자는 단지 정신들의 해방, 신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정신의 자유, 이미 실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때 가장 잘 확증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단지 그 자신과 자신의 권리들의 소유자인 개체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는 개체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과 별개로 개체의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집합체의 해방을 요구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20

대중들의 본성과 역량이 설명되는 가장 공통적인 형상figure 가운데 하나는 대개 국가 업무에 대한 눈에 띠지 않는 배경이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다의 형상이다. 죽음이든 불화든 국가에서 사소한 균열은 대중 행동과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들의 진실은 정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부, 성난 다중의 역량에 있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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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4-18 1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극대화해서 뇌과학에 적용한 책도 있습니다ㅋ 안토니오 다마지오 - [스피노자의 뇌]도 나중에 읽어보세요~

겨울호랑이 2021-04-18 18:18   좋아요 2 | URL
[스피노자의 뇌]가 그런 내용이군요. 황금모자님 덕분에 좋은 책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뒤집히는 혼란에 빠졌다. 그까짓 사탕을 얻어먹기 위해서 말 노릇을 하는 아이들의 비굴을 미워했고, 얻어맞고도 아무런 대항을 하지 못하는 비겁을 쥐어박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모두 소작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은 너무나 단순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끼어든 것이 아이들을 도운 게 아니라 오히려 나쁘게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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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재난을 묻다 - 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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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가 발생하기 일 년 전인 2013년에 일어난 태안해병대캠프 참사. 모든 것을 덮기에만 급급했기에 결국 일년 뒤 대재난을 맞이했음을 확인한다. 기출문제도 풀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제도 풀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세월호를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 7주기에...

태안해병대캠프 참사의 고을 새기기 위해 7월 18일로 지정해정부가 추진해모던 학생안전의 날‘은 슬그머니 폐기됐고 4월 15일이 국민안전의 날‘로 지정했다. 유족들은 청소년 대상 체험활동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탐욕과 자본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요청했다. 재판이 중요했던 건 우리 아이 목슴값에 대한 복수가 아닌 재발방지를위한 일벌백계였다. 사고현장에서 대규모 모래채취가 이뤄져 바다 밑바닥이 고르지 않고 갯골(웅덩이)이 이 형성돼 참사가 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자연적인 갯골이라면 사고를 예측하기 어렵고 불가항력적인 면이 많지만, 인위적인 것이고 캠프 관계자가 모래채취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사건은 정반대로 진행될 공산이 컸다. 또한 캠프 참가비가 전년 대비 50퍼센트나 인상돼 학교 관계자와 캠프 간 거래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는확대되지 않았다. 경기도의 한 섬유업체가 사고업체의 실질적 소유주라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수사대상에도 모르지 않았다. 해병대캠프에 공유수면 사용허가를 내주고 1년간 점검조차 하지 않은 태안군과, 수상 안전시설인 보트 계류장이 필요 없다며 철거를 용인한 태만해경 담당자들은 형사처분 대상에서 제회됐다. 감사와 관련해 책임을 진 공무원은 단 한 명도없었다. 관리감독기관인 태안군과 해경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사고업체는 직접적인 책임성을 부인하며 사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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