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구월 동학군은 남접과 북접이 호응 합세, 항일구국의 대전선을 결성하여 또다시 일어섰으나 십이월에 들어 연이은 패전으로 동학군이 완전 붕괴되고 농민전쟁이자 민족전쟁인 갑오 동학란의 비극의 막이 내려졌을 때 살아남았던 환이는 추적의 눈을 피하여 방랑하다가 백부인 우관선사를 찾지 아니하고 최참판댁 문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윤씨는 김개주가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는 말을 문의원으로부터 들었을 때, 무쇠 같은 이 여인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_박경리, <토지 2>, p100/540


 <토지 2>에는 여러 인물들의 죽음이 나온다. 최치수, 윤씨 부인 등등 대하소설의 초반부에 서희를 둘러싼 여러 어른들이 빠르게 퇴장하면서 서희가 독립적인 인물로 성장했겠지만, 개인적으로 인물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 중 서희의 할머니 윤씨 부인은 여러 면에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집안인 윤씨 가문은 서학(西學) 천주교로 인해 풍비박산나고, 자신은 동학(東學) 군 장수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해 죄의식 속에 살아야 했다는 점에서 윤씨 부인은 근대시기 조선시대의 비극을 한몸에 진 인물이라 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윤지충(尹持忠, 1759 ~ 1791)의 본관이 해남(海南)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윤씨 부인의 본관이 해남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잠시 해보지만, 별 근거는 없다. 해남 윤씨 가문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제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살펴보도록 하고([토지독서챌린지]는 장기 프로젝트이니만큼 조기에 소재를 고갈시켜서는 안된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윤씨 부인에게 개인적인 불행을 안겨 준 김개주라는 인물에 집중해 보자.


[사진] 김개남(출처 : 위키백과)


 사실, 김개주는 김개남(金開南, 1853 ~ 1894)이라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다. 전봉준(全琫準, 1855 ~ 1895), 손화중(孫華仲, 1861~1895)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당시 3대 지도자로 꼽힐만큼 뛰어난 인물인 김개남은 매우 과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남원(南原)을 주로 거점으로 한 그의 행동은 <토지>에서도 냉혹한 농민군 장수의 모습으로 잘 재현되었다. 과감한 농민군 장수였던 김개주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역사 속 인물 김개남은 이상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

 

김개남은 김학진의 화약 제의가 미지근하다고 여겨 거절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왕 노릇을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임금처럼 받들게 하면서 왕의 제복을 입고 왕에 걸맞은 호칭을 썼다 한다. 김개남은 남원부사를 죽여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p241)...  전라도 김개남포에서 지휘하는 집강소의 경우 이런 폭력적 방법이 자주 동원되었다. 그들은 부호들에게 동의나 협조를 구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군수품을 모아들였다. 남원은 양반 부호의 수난이 가장 심했던 곳으로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죽일 정도였다. 김개남은 남원부사 이용헌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그를 죽여버렸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p283


 뒤늦게 삼례로 나온 김개남은 전봉준의 후원이 되어 뒤따라 은진으로 올라왔고 청주병영 공격에도 나섰다. 하지만 김개남의 독자적이고 과격한 태도는 연합전선 형성에 차질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p101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 안으로 들어가서 국왕 고종과 대면하고, 다음과 같이 구두로 전했다... 국왕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은 조선병 일소와 무장해제를 완료하고, 궁전 주위에 초병을 세웠다. 이렇게 오전 9시가 지났을 즈음 국왕과 왕비는 확보되었고, 경복궁은 일본군이 완전히 제압했다. 통상적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라 부르는 전쟁은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_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1>, p218


 갑작스럽게 모인 농민군에게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지도자가 요구되었을 것이고, 김개남은 이러한 농민군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왕을 참칭(僭稱)하는 오만한 모습은 다소나마 동학농민군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중도/지배층에게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실제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에는 동학농민군에는 농민뿐 아니라 중간 계층의 지주,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분노한 유생, 관리들도 일부 합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개남의 과격하고 오만한 행동이 요즘말로 중도층의 이탈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을까. 보다 폭넓게 외연 확장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그는 분명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동학은 이 나라의 마지막 힘이었소." "오합지졸이었지요." "식자들은 그 이유를 왜 깨닫지 못했을꼬?" "살생과 약탈이었지요. 왜적에게 대항하겠다는 기특한 생각 말고는."_박경리, <토지 2>, p163/540


 다른 한 편으로, 과감함을 넘어서 오만함까지 느끼게 하는 김개남의 행동은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의 동왕 양슈칭(東王 楊秀淸, 1821~1856)을, 젊은 나이에 죽어 민가에 영웅이 된 익왕 스다카이(翼王 石達開, 1831 ~ 1863)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김개남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 혁명 사이에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까운 시일에 조너선 스펜스 (Jonathan D. Spence)의 <신의 아들 洪秀全과 太平天國>로 정리할 예정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넘기겠지만, 두 혁명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간략하게 짚고만 넘기자. coming soon. 


 봉건 모순에는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불균형한 토지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신분 차별과 일부 특권층의 토지 소유 및 농업생산의 독점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이런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제도를 타파하려는 민중 봉기는 역사의 추진 동력이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이를 개혁하지 않고는 평등과 인권을 추구하는 근대를 지향할 수 없었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 p7


 김개남은 이후 동학농민혁명 말기에 친구의 배반으로 붙잡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당하게 되면서 삶을 마감한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새야 새야'의 녹두장군이 전봉준이 아닌 김개주라는 의견도 있지만, 진위 여부는 알기 힘들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가 사랑받았던 농민군 지도자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때문에, <토지>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흘렸던 윤씨 부인의 눈물은 반드시 한 남자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윤씨 부인만의 눈물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개남은 이 마을에 사는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다. 한 사람은 옛부하, 한 사람은 옛친구의 밀고로 12월 2일 한날에 잡혔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었다.(p316)... 개남이 잡혀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호남에서는 김을 진으로 발음한다. 이는 김제를 진개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동우리가 웬 말이냐?" 또는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遺屍)했노"라는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지금 그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효수된 사진만이 전해진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p317


  <토지>에서 김개남이라는 인물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윤씨 부인, 아들 환이를 통해 회상되거나 언급되는 지난 시대의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핏줄과 정신은 주인공 서희를 보이지 않은 곳에서 도와주는 힘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투쟁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김개남, 아니 김개주를 살펴보는 것은 <토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물소개]에 담긴 김개주의 설명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김개주 : 중인출신이며 우관스님의 동생. 우관선사가 있는 연곡사에 휴양차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는다. 동학혁명이 한창일 무렵 무리를 이끌고 최참판가에 와서 윤씨부인에게 은밀히 환이의 성장소식을 전하며, 환이에게 생모의 존재를 알려주고 떠난다. 후에 혁명의 허무감과 상민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아들인 김환의 회상을 통해 드러난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 전주 감영에서 효수당한다._박경리, <토지 2>, p531/540  [인물소개]  中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7-25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김개주 실존 인물이 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깊이 있게 엮어 읽으시다니, 같은 토지 다른 느낌이네요~ㅋ
김개남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우리나라 동학농민혁명은 여러모로 더 알려지고 연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7-25 16:44   좋아요 1 | URL
저도 잘 몰랐다가 인물의 이름이 비슷해 찾아보니, 다행히 실존인물에서 빌려온 캐릭터였네요. 붕븡툐툐 말씀처럼 동학혁명의 의의를 저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제게 여러모로 의미있는 챌린지가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생각키에 민주란 뭐 대단한 이상이 아니라,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정당성 (legitimacy)이 보다 더 많은 다수의 합의(consent)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형태를 추상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민주(民主)보다는 민본(民本)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직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_ 도올 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1> , P43


서학이 조선민중의 샤마니즘적 파토스와 결합되면  매우 폭발적인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사상의 공동을 전염병처럼 메꾸어 나갔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성리학과 서학이 제시하는 내재와 초월의 모든 패러다임을 만족시키면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는 운동이 19세기 중엽에 조선에 잉태하게 된다. 그 이론적 표현이 기학이었고, 그 실천적 표현이 동학이었다. 동학에 이르러 조선역사에 내재해온 플레타르키아의 열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게 된다. 그것이 "개벽" 이었다._ 도올 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1> , P140

 최근 출판된 「동경대전1」의 구판. 2004년에 초판이 출판된 후 17년이 지난 후에서야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을 읽기 전에 마침 <토지>를 읽으며 가볍게 동학농민혁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꺼내든 책이다.


  비록「동경대전 1, 2」편에 비해 얇은 책이고, 오래전 출판된 책이지만 이 책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간의 저자의 학문 여정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난 시간 동안 혜강 최한기의 <기학 氣學>, 「맹자 孟子」, 「노자 老子」, 수운의 「동경대전 東經大全」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자칫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 저작들이 최종적으로 <동경대전>으로 향하는 과정이었음을 지난 2004년에 출판된 책에서 발견하게 된다.


 <노자>에서 말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이,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민중. 이러한 민중의 의식 구조를 형성하는 기학(氣學)과 실천으로서의 동학(東學)이 하나가 되어 비로소 21세기 혁명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를 이룬다는 저자의 철학. 이것이 저자가 평생 강조한 정치철학으로서의 몸철학의 얼개가 아닐까. 이 얼개를 완성하고 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까지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2004년에 출간된 얇은 책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와 군국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을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항상 전쟁을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로만 보았다. 그렇지만 전쟁은 의심할 바 없이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p7)... 전쟁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즉 전쟁은 자본주의 발전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사실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모든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조건들이 처음으로 전쟁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이다.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p13/147


  과연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인가?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 ~ 1941)는 <전쟁과 자본주의 Krieg Und Kapitalismus>에서 이 질문에 대해 집중하면서, 전쟁이 오히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입증한다. 이를 위해 베르너는 1) 자본주의 성장에는 근대 국가가 필요하며, 2) 근대 국가는 무력(武力)의 산물이었고, 3) 무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차원에서 효율적인 시장이 필요했으며, 4) 그 결과 공급과 수요 측면에서 전쟁과 전쟁 준비는 일정 부분 기여를 했다는 것이 주된 논지다.


  국가 형성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독특한 발전을 위한 전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국가는 특별히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전적으로 무기의 산물이다. 근대 국가의 겉모습, 즉 국경선도 그 내부 구성 못지 않게 무기의 산물이다. 행정과 재정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전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곧바로 발전하였다.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p13/147


 내가 언제나 무엇보다도 먼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근대 군대가 1) 재산 형성자로서, 2) 성향 형성자로서, 3) (특히) 시장 형성자로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발전을 얼마나 촉진시켰는가이다.(p15)... 근대 군대는 상비군이며 국가 군대이다. 이미 언제나 존재한 두 가지 경향, 즉 제후를 유일한 지휘관으로 여기는 것과 그에게 지속적으로 군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계속해서 효과를 거뒤 마침내는 보편타당한 원칙이 되었다. 이 두 원칙의 승리는 외견상으로는 말하자면, 상징적으로는 국가 상비군의 식량 조달과 장비를 위한 자금을 지속적으로 준비하거나 제공하는 것에서 표현된다... 세 가지 계기, 즉 자금 조달, 지속성 및 국가에 의한 관리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p21/147


  좀바르트에 의하면, 전쟁은 국가의 군수품 수요와 민간의 군수품 및 물자 공급 모두를 자극하게 되고, 생산과 유통 혁신을 가져왔다. 막대한 무기 수요는 무기 생산 시스템의 변화를 자극해 분업(分業)을 통한 생산 방식이 나타났고, 피복과 선박에 대한 수요는 경공업과 중공업 등 산업 전반에 경기호황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의 푸거가와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재벌이 등장하면서 금융업의 발달도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 좀바르트의 분석이다.  

 

커지는 무기 수요를 완전히 또 제때에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은 경제 생활의 형성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p60)... 다음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소총 산업이 그 당시에 이미 매뉴팩처 단계를 넘어 공장 방식으로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아담 스미스가 미숙한 핀 산업 대신에 이 선진 산업에 입각해서 노동 조직 관념을 얻었다면, 그는 이미 그 당시에 사회의 대기업에서 노동 성과 상승의 이유를 올바르게 인식했을 것이다.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p64/147


 증대되는 무기 수요는 경제 생활의 형성에 큰 작용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진행 과정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p67)... 군대의 피복은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필요한 물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가능성은 도외시하기 때문에, 피복과 피복 재료에 대한 매우 많은 수요는 이제 시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p98)... 나는 결론으로서 조선(造船)과 자본주의라는 두 현상 간에, 넓은 의미에서는 전쟁과 자본주의 간에 존재하는 연관을 지적하고 싶다. 이 연관은 아마도 그 군사 활동의 전체적인 거대한 작용을 보여줄 것이다. 제철 공업이 특히 무기 수요에 의해 그리고 조선이 전함 수요에 의해 한층 더 높은 형태로 번형되었다면, 따라서 제철 공업과 조선이 결국 전쟁이 낳은 아이들이라면, 전쟁은 이로 인해 다시 파괴자가 되었다. 즉, 유럽 삼림의 파괴자가 되었다.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p124/147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총포와 무장된 범선, 숙련된 선원들은 대항해 시대를 맞아 전세계로 침략해 들어가면서 이전 시대까지 유럽 열위(劣位)를 한 번에 뒤집는다. 치폴라(Carlo M. Cipolla, 1922 ~ 2000)는 그의 저작 <대포, 범선, 제국 Guns, Sails and Empires: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the Early Phases of European Expansion 1400~1700>에서 이렇게 생산된 무력을 바탕으로 유럽 우위를 설명하지만, 이언 모리스(Ian Morris, 1960 ~ )는 조금 관점을 달리한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Why The West Rules - For Now>에서 그는 서양의 압도적인 무력도 중요했지만, 보다 근원을 '에너지 활용 능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조금은 다른 해석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서구에서의 고전 역학에 기반한 물리학의 발전과 발전이 가져온 교통혁명은 소수의 유럽인이 세계를 틀어쥐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5세기 말 유럽 팽창의 역사에서 지중해 세계의 공헌은 기술적이라기보다 재정적 · 상업적인 것이었다. 14, 15세기에 대서양 유럽이 개발한, 대포로 무장한 배는 유럽의 영웅담을 가능케 한 발명품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선원이 전례 없이 막대한 양의 물리적 에너지를 이동과 파괴를 위해 제어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경제적인 고안물이었다. 어느 순간 유럽이 극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66


 마운틴은 배와 항구를 날려 버리는 것은 서양의 지배를 설명하는 가장 인접한 원인, 서양의 장점이 길게 열거된 사슬의 마지막 고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영국의 공장들이 포탄과 뛰어난 대포,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전함을 생산해낼 수 있고, 영국 정부가 지구 반대편에서 수행되는 원정을 기획하고 자금을 대며 지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서양인이 어느 누구보다도 에너지 대사슬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뿐 아니라 매우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력을 전 세계에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정리될 수 있다._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p104/472


 교통 혁명의 전체적인 효과는 일련의 부수적 효과와 연결된 직접적인 운송 개선에서 생겼다. 그러한 부수적 효과의 하나는 철도 역사의 건축에 따른 도시 경관의 개조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경제적 공간의 창출이다. 따라서 철도와 해운의 역사는 단순한 교통의 역사를 뛰어넘는다. 가장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이주의 성장과 변화다. 이는 몇몇 지역에서 발흥한 산업자본주의와 새로운 변경의 개척 같은 다른 자극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한 세계사의 한 과정이었다._ 세바스찬 콘라드 외 1, <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750~1870>, p553/713


 이언 모리스는 최근의 서양의 우위가 단순한 무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Science Technology)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지만, 개인적으로 여기에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다. 서구의 에너지 활용이 다각화 된 것은 좀바르트가 지적했듯 대형 선박 건조를 위한 무분별한 벌목 등의 사례에서 보듯 자원 고갈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 )가 <엔트로피 Entropy: A New World View>에서 지적했듯, 서유럽의 문명사가 거칠게 표현해서 자연파괴의 역사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대 서양의 우위는 과학기술의 승리가 아닌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덧붙이자면, 치폴라 역시 <시계와 문명 Clocks and Culture: 1300-1700>에서 과학 혁명에 대해 말하기에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리뷰로 넘기는 것으로 하자.


 다시 좀바르트로 돌아가서, 우리는 전작 <사치와 자본주의>와 <전쟁과 자본주의>를 통해 유럽 사회의 사치품 수요와 군수품 수요가 자본주의의 탄생에 기여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1> 에서 기술, 화폐, 도시화 등 다른 요인들과 함께 역사의 하부 지층으로 보다 잘 설명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본주의 태동기에 사치와 전쟁이 자본주의 발달에 기여했다는 좀바르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일종의 소규모 "군사 케인스 주의" - 군사비 지출이 그 지출을 부담하는 국가 시민들의 소득을 끌어올리고, 그럼으로써 조세 수입을 늘리고 새로운 군사비 지출을 지불할 능력을 상승시키는 관행 - 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모든 군사 케인스주의와 마찬가지로, 다른 관할권역으로의 영구적인 유효수요 누출  때문에, 또 비용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리고 점점 더 늘어나는 군사비 지출의 기타 재분배 효과들이 이런 목적을 위한 자본가 계층의 조세 납부 의지를 꺾었기 때문에, 군사비 지출의 "자기 팽창"은 엄격하게 제한된다._ 조반니 아리기, <장기 20세기> , p91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 ~ 2009),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2019)이 분석했고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가 전망했듯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은 무력 사용에 의해 경쟁자들을 제압하기보다는 체제 내 안정과 안정 속에서의 번영을 추구하며 제국주의 노선을 수정했고, 그 마저도 제국주의가 효율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자 식민지 독립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오일쇼크 전까지.


 전쟁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국민의 열정에 부채질 하는 일을 용이하게 해주는 요인으로는 전쟁의 경제적 원인, 즉 인구의 압력과 시장 확보를 위한 경쟁적 투쟁을 들 수 있다.(p459)... 만일 여러 나라들이 그들의 국내정책에 의해 완전고용을 달성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국 상품을 타국에 강매하거나 이웃나라의 매출을 격퇴시켜야 할 절박할 동기는, 그것도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구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대금을 지불할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역수지가 자국(自國)에 대해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국제수지(國際收支)의 균형을 뒤집으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할 동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_존 메이나드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p460


  이로부터 우리는 좀바르트가 두 저서 <사치와 자본주의>, <전쟁과 자본주의>를 통해 사치와 전쟁이 자본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를 살펴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좀바르트 이론이 자본주의의 변화상을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자본주의 태동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음도 알게 된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근검, 절약하는 청빈하고 신앙심 깊은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물질과 영토 등에 욕심을 내던 이들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좀바르트의 이론은 절대체제로서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눈돌릴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을 선물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1-07-18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자본주의 발달에 엄청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 한 표 겁니다. ^^

겨울호랑이 2021-07-18 17:55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대체로 전쟁 수행에 많은 비용이 소모되며, 전후 복구에 따른 유효 수요 증가 등을 고려했을 때 대체로 인접국가의 전쟁 관련 기업들을 특수를 누린다고 여겨집니다만, 범위를 넓혀 본다면 전쟁에 따른 불이익을 받는 집단도 있느니만큼 경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7-18 17:59   좋아요 1 | URL
평등은 태초 이후 그리고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전쟁에 따른 불이익을 받는 집단은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맘에 들지 않지만 서글픈 현실인 것 같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1-07-18 18:03   좋아요 0 | URL
네...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불평등을 전제로 한 시스템이다보니 더욱 그런 면이 어둡게 느껴집니다...
 

 '용아, 나는 죽어도 무당은 안 될 기다. 용이가 다른 각시 얻어서 살아도 나는 무당 안 될 기다.'  계집애는 해죽이 웃었다. 아니 고달프게 웃었다. 신이 오르면 넉살 좋게 목을 뽑고 초혼가에 자지러지며, 천대에 대항하여 사내같이 굵게 놀던 월선네하고는 달리 말이 없고 또 말재주라고는 없던 월선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러서는 힘껏 제 마음을 표시한 셈이다.(p494)... 물방앗간 옆에 쌓아올려 놓은 보릿대에 기대서서 월선이는 남의 얘기처럼 말했다. '아무 데 가믄 우떻노.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매는 한탄하지마는.' 남의 말같이 하는데 월선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내기의 신세인 것이다._박경리, <토지 1>, p496/530


 이번 주 <토지 1>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월선과 용이의 사랑 이야기다.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지만, 상민과 천민의 신분 차이는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숨기고 각자 자신들의 가정을 꾸렸다. 스무 살 연상의 봇짐장수와 결혼한 월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하동으로 돌아왔지만, 용이의 본처인 강청댁의 핍박에 간도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떠난 월선을 찾던 용이의 기억에 담긴 지난 시간의 기억은 월선의 아픈 마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월선은 간도에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용이의 아이를 가진 임이네의 등쌀에 힘든 나날들을 보내다 서희를 따라 떠나게 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용이의 아들 홍이를 아들처럼 돌보다 결국 암(癌)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월선. 의도치 않은 선행학습(?)으로 이들 사랑의 결말을 알아 버리고 나니 월선의 죽음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선(禪)문답 같은 이들의 대화에는 끊어질 듯 이어온 이들의 사랑이 짙게 배여 있다. 사랑의 붉은 실이 있다면, 용이와 월선의 손을 이어주지 않았을까. 홍연(紅緣). 




 마루에 올라선 용이는 털모자를 벗어던졌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 던진다. 그러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임자."...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_박경리, <토지 8>, p292/504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에서 '타인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아리에스는 자신의 죽음이 '두려움'이었다면, 다른 사람과의 이별은 육체적인 이별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죽음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죄(악)과의 이별이었기에, 새로운 구원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죽음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용이와 월선의 헤어짐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아리에스가 말한 아름다움과는 결이 다르다. 용이와 월선은 그들의 고된 삶을 긍정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다면, 아리에스의 '타인의 죽음'은 현실 부정을 통한 아름다움의 승화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차차 정리하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토지1> 속의 용이와 월선의 가슴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언젠가 다가올 아내와의 헤어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에게 다가올 저 순간에 나는 과연 망설임없이 한(恨)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기에 용이와 월선의 마지막이 더 아름다운 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죽음은 오히려, 그때까지 억압되어 있던 비장감(파토스)을 불러일으켰다. 예전에는 과도한 감정 표출(혹은 지나친 무관심)에 대응하기 위한 방패막이로써 간주되던 침실에서의 의례 혹은 애도의 의식들이 본연의 의례성을 상실하게 되고, 유족들의 고통이 자발적으로 표출되는 장으로 개조된다. 그런데 이들이 비통해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고인과의 육체적인 이별이었다. 이제부터 죽음은 슬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고인과의 육체적인 이별이었다. 이제부터 죽음은 슬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순간으로서의 찬양의 대상이 된다. 죽음은 아름다움이었다._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p110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7-17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끝까지 구구절절 마음 아리게 해용~ 겨울호랑이님의 독서챌린지를 격하게 응원합니당!!😊

겨울호랑이 2021-07-17 12:32   좋아요 2 | URL
둘의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인 것 같아요....ㅜㅜ 붕붕툐툐님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이지만 건강하게 보내세요!

samadhi(眞我) 2021-07-17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겨울호랑이님이 발췌해 놓으니 시처럼 읽히네요.

겨울호랑이 2021-07-17 23: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amadhi님. 작품 속에서 애잔하게 진행된 이들의 사랑은 독자들의 시간 속에서는 얼음 조각처럼 페이지 페이지를 장식하며 끊임없이 감정을 불러 오는 것 같습니다. ^^:)

samadhi(眞我) 2021-07-17 23:55   좋아요 1 | URL
다시 읽어보면 그 전엔 찾을 수 없었던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21권을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네요. 안 그래도 읽을 책 많은데 욕심 내지 않을랍니다. 겨울호랑이님이 올려주시는 것으로 대리만족 하렵니다.

겨울호랑이 2021-07-17 23:57   좋아요 1 | URL
^^:) 읽어야할 책이 많은데 시간은 정말 부족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도 선뜻 다시 읽기가 어렵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 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地經學的)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p145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2019)은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에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영국과의 헤게모니(hegemony) 투쟁에서의 패배에서 찾는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 ~ 1763), 인도에서의 플라시 전투(The Battle of Plassey, 1757) 그리고 후대 아프리카에서의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9)에서 보듯 세계 전역에서 프랑스는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었고,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 이후에는 신생 강국 프로이센(Prussia)으로부터 2인자의 위치도 위협받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는 <미슐레의 민중 Le Peuple>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희망을 민중으로부터 발견한다.


 하나의 민중 ! 하나의 조국 ! 하나의 프랑스 ! 결코 두 개의 국가가 되지 말기를 기원하노라. 단결이 없으면 우리는 파멸한다. 어찌 이것을 보지 못하는가? 모든 조건의, 모든 계급의, 모든 당의 프랑스인들이여, 한 가지만 기억하라. 당신들에게 이 지상엔 단 하나의 확실한 친구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프랑스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8/144


  민중에 대한 나의 오랜 연구 기간을 통틀어 언제나 나에게 충격을 주어왔던 그들의 중요하고 가장 현저한 특징은 결핍의 무질서와 비참한 악덕 속에서도 풍요로운 감정과 선한 심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네. 그런데 부유한 계층에게서는 그것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 게다가 누구라도 이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네.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기에 누가 고아들을 입양했는지 아는가? 가난한 사람들이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2/144


 <미슐레의 민중>은 '프랑스 민중'과 국가 '프랑스'를 연결시킨다. 그는 헤게모니 전쟁에서 패배하고 1848년 혁명전야의 혼란 속의 프랑스 정세를 프랑스 민중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산업화 시대 속에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쇠락해가는 프랑스의 모습에 다름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는 민중들의 모습에는 분명 미래 프랑스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육체적 허약함과 정신적 무능,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무능의 감정이다. 기계의 모든 움직임에 맞추면서 기계 앞에서 허약해진 이 사람은 공장주는 물론, 부지불식간에 그의 일감을 잃게 만들어 그의 빵을 빼앗아갈 수 있는 천 가지의 원인들에게도 종속하게 된다... 이들의 악행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극도로 육체에 의존하게 되어 본능적인 삶을 요구하게 되며 그것은 육체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어 결국 무능한 정신과 공허한 영혼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31/144


 이런 희망의 싹을 민중들은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들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드러난 부정적인 면 대신 드러나지 않은 긍정적인 면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미슐레는 현재 세대가 아닌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에게 주목하고, 이들에게 신념을 심어줄 것을 주문한다.


 프랑스가 다시 신념을 갖고 그 미래를 염원하기 위해서는 그 과거로 되돌아가 본연의 천재성에 천착해야 한다. 그 일을 진지하게 마음으로부터 하려 한다면 이 연구를 통해 확립된 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미래가, 즉 프랑스의 사명이 당신에게 흘러나오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 온전한 빛 속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당신은 믿을 것이고 믿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신념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15/144


 구체적으로 미슐레는 본문에서 공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신념을 불어넣어 줄 것을 주장한다. 민중들이 국립학교에서 국가에 대해 배우고, 자신의 신념을 세울 때 비로소 프랑스는 과거 프랑스 혁명 시대의 영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미슐레의 민중>을 관통하는 주제다. 


 어린이에게 지속적으로 강력한 조국의 영향을 미칠 기관이란 학교로서 언젠가 세워질 위대한 국립학교이다. 나는 진정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학교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모든 계급의 모든 어린이들이 1~2년 동안 나란히 함께 앉아서 어떤 특정 교과를 배우기 이전에 프랑스에 대해서만 배우는 곳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17/144


 이 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대단히 강력한 것 두 가지를 갖고 있다. 프랑스는 원칙과 전설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가장 원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관념과 동시에 가장 많이 따르는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세에 은총이라는 교리 속에 묻혀 있던 이 원칙, 이 관념을 인간의 언어로는 형제애라고 부른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09/144


 <미슐레의 민중>은 이처럼 변화된 프랑스의 힘을 공립교육과 우정(박애)으로부터 찾지만, 사실 이들 모두는 프랑스 대혁명의 유산이다.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 1743~1794)가 제안한 공교육에 관한 개혁안, 프랑스 대혁명의 주요 이념인 '박애'를 생각해 본다면, 결국 미슐레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통한 자본시대 극복을 강조했음을 알게 된다. 

 

 "Liberte, Egalite, Fraternite ou La Mort." '자유, 평등, 박애,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이 과격한 문구가 프랑스의 국가적 이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자유와 평등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애초에 인간 사회는 평등하지 않으며 누구나 배타적 자유를 즐기고 싶어 하는데, 이 두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융합시킬 제3의 개념이 박애로 알려진 'Fraternite'인 셈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7> <자유, 평등, 그리고 능력주의>, p5


 평등과 자유의 고결한 친구들이여, 여러분의 힘을 한데 모아, 공권력으로부터 이성의 빛을 퍼뜨릴 수 있는 교육을 얻어내도록 하라. 그럴 생각이 없다면, 여러분이 기울인 고귀한 노력의 모든 결실이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p61)... 공권력은 자신의 첫 교육이 맺은 열매를 우연 속에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자상한 권위의 보살핌에 이어 이제 성인들에게는 공권력의 도움이 주어질 것이며, 그러한 도움은 성인의 독립적인 이성이 열렬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리라. _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144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다수 민중을 '목적'이 아닌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 파악한 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시키지 못하고 프랑스만의 사상으로 한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미슐레의 주장은 시대퇴행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글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무모한 돌격 전술을 감행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무모함을 떠올린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여기에 최근 폐지가 예정된 프랑스 엘리트층의 산실이었던 국립행정학교(ENA)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논쟁은 그가 강조한 공립학교 교육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게 된다. 


 [관련기사] :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8


 이러한 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한계가 명확해 보이지만, 새로운 시대의 빛을 어벤져스(Avengers)가 아닌 평범한 대중들로부터 찾으려 했다는 점만은 분명 그가 평가받을만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미슐레의 민중>이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민중을 인식했다면, 산업국가 영국의 민중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삶은 칼 마르크스 <자본 1>과도 연계된 부분인만큼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삶은 삶을 비추고 삶에 끌릴 뿐 고립에 의해서는 소멸한다. 삶이 자신과 다른 삶과 섞이고 다른 존재와 연계될 때 그것은 더 큰 힘과 행복과 풍요속에 존재하게 된다.(p53)... 단순한 사람들은 삶에 공감하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훌륭한 재능을 갖게 된다. 그것은 최소한의 흔적만으로도 그들은 삶을 충분히 직시하고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81/14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1-07-16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역사학자 카가 쓴 <새로운 사회>라는 책에서 프랑스 혁명이 없었으면 지금 세상이 더 좋아졌을거란 문장을 보고 충격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는 책 끝에 얘기해 준다고 하는데 넘 기대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7-16 21:04   좋아요 1 | URL
저도 말씀을 듣고 보니 매우 기대가 되어 책을 담아 갑니다.미끼용 멘트가 아닌 의미 있는 통찰이 담겨있었으면 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1-07-16 21:17   좋아요 1 | URL
다른 사람도 아닌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대학자 카인데 미끼는 아닐거라 믿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7-16 21:28   좋아요 1 | URL
전체는 아니겠습니다만, 대체로 영국과 프랑스 역사 학자들은 대체로 상대국의 역사 평가에 박한 듯 합니다. 혹시 카의 평가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물론 들여다보면 설득력이 있는지 알겠지만요.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