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조사 결과가 말하는 바는 뚜렷하다. 중국을 둘러싼 모든 이슈에 정치가 깊숙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쿠데타 이후 윤석열과 극우세력이 들고나온 혐중 선동의 결과 혹은 ‘반작용‘이라고 풀이할 수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사회의 대(對)중국 정책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해석되고 좌우될 가능성이 높게 됐다. 이것이 공동체에 이로운 일일까? - P13

조사팀이 규정한 ‘혐중 집단‘의 규모는 전체의약 7%였다. 규모가 작은 만큼 전체 평균값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지만, 혐중 집단과 ‘비중 집단‘의 차이가 뚜렷해지는 결과가 나왔다.  - P13

반중 정서는 어쩌면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여러 분야에서 한국을 추월해 시시각각 경제적·군사적으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중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반중을 기치로 혐오 정서를 자양분 삼아 세력을 키우고, 공동체에 해가 되는 정책을 지지하는 집단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 선두에 선 이가 윤석열이다.  - P14

(2030 세대) 나름의 세계관에 밑바탕을 두며, 일관된 논리 구조가 있다. ‘중국은 부국이지만 정치적 수준이 낮은 독재국가다. 한국은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직간접적 손해를 입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동맹국인 미국을 꺾을 가능성은 사실상없다. 중국에 반대하는 집회는 표현의 자유영역이다‘ 등이다. - P18

대장동 사건에 대한 검찰의 기소 취지와 주요 혐의에서 무죄가 나온 이번 대장동 일당 1심 판결 결과를 종합하면, 항소는 당연한 수순으로 통했다. 실제 검찰은 일찌감치 1심 판단에 불복해 항소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항소 기한 마감직전에 지휘부가 돌연 결정을 번복하면서 항소장은 제출되지 않았다. 무죄로 선고된 내용들을 다시 다뤄볼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 P21

<시사IN>이 입수한 ‘택배분야 사회적 대화기구 1차 실무회의 논의 결과‘ 자료를 보면, 쿠팡 CLS는 밤 12시에서 새벽5시까지 배송을 중단하자는 택배노조의 제안에 대해 "배송 시간 부족으로 인한기사 과로 위험 증가"를 이유로 "수용 불가"하다고 답했다. 새벽배송 품목 제한도
"소비자의 수요가 다양하여 수용 불가"하다고 했다. - P27

구본창 소장은 "학령인구가 매년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사교육 시장이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물리적 시간을 트는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까지 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사안은 정말 중요한 ‘선택‘이 맞다.
"경쟁에 용이한 구조를 청소년에게 만들어줄 것인지, 과열된 경쟁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후자에 방점을 찍는다면, 이번 조례 개정안은 ‘입시 경쟁을 줄이고 아동청소년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에서 퇴행한 결정이다." - P29

대통령실은 서울 내 주택공급을 ‘국가적 사안으로 여기고, 야당은 주택공급을 명분으로 정부를 비판한다. 부동산을 두고 펼쳐지는 정치권의 기묘한 대치 국면은 대중의 수요, 즉 ‘자산가치가 보전되는 서울 주택을 보유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 P33

이미 인공지능에 의한 혁명이 진행중이라면, 가장 시급한 일은 인공지능에게 어떤 윤리를 학습시킬 것인가를 정하는 데 있다. 그러지 못하면 인공지능이 바꿀 우리 모든 삶의 영역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 P41

한반도 상황은 과거와 180도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북한의 통일 전략 변화다. 북한은 남과 북을 ‘교전 중인 두 개의 적대국가라고 규정했다. 분단 이후 천명해온 통일 지향성을 포기한 것이다. 남북 사이에 직접 대화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둘째, 미국의 대북 접근 태도 변화이다.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에 대해 "호감을 갖고 만나보고 싶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기존 미국 지도자들과 완전히 다른 행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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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합본 2) -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합본) 2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각색 및 그림, 정재곤 옮김 / 열화당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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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 시구가 낭송되기 전에 이미 모든 주의력을 기울여 대기하면서, 단어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고, 마치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최대한 깊숙이 파고들듯이 임하려 애썼다. 하지만 간격이 어찌나 짧던지! 음절 하나가 내 귀에 닿자마자 이내 다른 음절로 바뀌었다. 여배우는 이미 장소를 옮겼고,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장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생생한 현실과 마주하기를 기대한다면, 인공적인 도구를 통해 보는 방법은 실제로 그러한 현실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본 것은 라 베르마가 아니라, 그저 확대경을 통해서 본 그녀의 이미지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작아진 가운데 맨눈으로 포착하는 이미지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라 베르마의 두 이미지 중 어느 쪽이 진짜일까?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15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화자는 연극 <페드르>에서 라 베르마의 연기를 지켜보며, 라 베르마의 진정한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연극의 재현 시간은 매우 짧기에 화자는 여배우의 이미지를 뒤쫓을 수밖에 없고, 여기에 무대와 객석과의 공간적 거리는 화자를 더 어렵게 한다.


 화자는 오페라글라스로 라 베르마를 바라보지만, 이내 의문에 빠지고 만다. 과연 확대경을 통한 인공적 이미지가 진정한 이미지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화자의 고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공간적 배경과 분리된 여배우의 이미지가 진실이 아니라면, 카메라로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절단하여 포착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또한 진실된 이미지라 할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찰나의 부분적 이미지가 과연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 화자는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연극이 끝난 후 관객들의 반응에서 발견한다.


 흥미로운 건 관객들이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순간이 라 베르마가 최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바로 그 순간이란 점을 내가 깨달았다는 점이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16


 배우의 연기가 관객들이 <페드르>에 대해 품고 있던 이해와 기대에 부합할 때, 관객들은 열광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리던 이상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재현된 것에 대한 찬사다. 대다수 관객이 감동하는 공연이 곧 성공적인 공연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결국 관객이 무대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새로운 실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원하고 있던 이미지', 즉 일종의 '기억(혹은 선입견)'의 확인일 것이다. 이는 뱅퇴유 소나타의 인상이 반복을 통해 기억으로 강화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음악을 듣는 동안 복잡한 인상들에 직면한 우리의 기억은 미미할 뿐더러,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절반쯤 젖어 있어 방금 들은 말도 일 분 후에 잊어버리는 사람의 기억처럼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다양한 인상을 대번에 제공하질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작품을 두세 차례 듣게 되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형성된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48


 화자가 라 베르마의 공연을 통해 그토록 잡고 싶어했던 진정한 이미지는 짧은 재현 시간으로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화자는 뱅퇴유 소나타를 계속해 들으며 반복된 재생을 통해 이미지와 기억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시간적 순서에 따른 재생이라는 음악적 한계로 인해 그것을 소유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화자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뵝퇴유 소나타의 가장 깊숙이 감춰진 부분을 간파해냈건만, 앞서 분간해낸 것은 내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소나타가 나에게 가져다준 모든 것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랑할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뵝퇴유의 소나타 전체를 소유할 순 없었다. 그것은 우리네 삶을 닮았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49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를 통해 작품의 뮤즈는 질베르트에서 알베르틴으로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옮겨간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무덤덤해질' 질베르트가 '오늘은 무덤덤하지만 내일은 사랑하게 될' 알베르틴으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먼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는 화자에게, 알베르틴 역시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완성된 결론이다. 하지만 질베르트가 떠난 빈자리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리치던 '그 순간의 화자'에게, 알베르틴은 고통을 잊게 해 줄 유일한 '상상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에서 시간은 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때로는 관객들이 박수와 환호를 지르는 순간과 라 베르마의 연기 순간이 일치하지 않고, 뵝퇴유 소나타의 이미지가 한 번에 형성되지 않듯이, 반복되는 예술처럼 시간은 반복 재생된다. 재생되는 시간 속에서 인식은 기억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믿었던 사랑이 실은 스쳐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고, '희망'과 '절망'이 서로 상반된 가지를 뻗어가며 뒤덮이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는 결코 바라볼 수 없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멀리서 조망했을 때, 즉 순간에 매몰되었던 자아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자아가 서로 동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사랑과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동일한 사건은 서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뻗은 가지를 가지고 있어서, 불행의 가지가 행복의 가지를 덮어 버리는 경우가 생겨난다. 나에게 자주 발생하곤 하는 일과 상반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즉, 기쁨을 욕망했는데, 욕망을 충족할 물리적 방도가 존재하질 않는 경우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에게, 물질적 방도는 마련돼 있지만, 동시에 기쁨은 잃어버렸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88


 우리네 삶의 다양한 시기는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 우리는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무덤덤해질 사람 때문에, 오늘은 무덤덤하지만 내일은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만하게 내친다. 행여 그 사람을 만나기로 했더라면 더 빨리 사랑에 빠졌을지 모르고, 하여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함으로써 지금의 고통을 실로 단축했을지도 모를텐데 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지속되는 우리의 기다림은 앞서 보았듯이, 우리가 겪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결정된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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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과다야말로 힘에 대한 증거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암담하고도 끔찍한 이 의문부호?이런 운명을 지닌 과제는 매 순간 태양에게 달려가라고 강요하고, 무거운 너무나도 무겁게 되어버린 진지함을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버리라고 강요한다. - P-1

‘문화-국가’란 단지 근대적 이념일 뿐이다. 이 중 하나는 다른 것에 의존해 살아간다. 다른 것의 희생에 의거해 번성한다. 문화가 융성했던 시대는 전부 정치적으로는 하강기였다:문화적인 의미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정치적이었고, 심지어는 반정치적이기도 하다. - P-1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우화가 되어버렸는지. 어떤 오류의 역사>는 《우상의 황혼》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아주 간결한 몇 단어와 형식으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오류의 역사로서 개괄하고 있다. 플라톤에서부터 그리스도교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라는 이분법의 변천사가 제시되고, 실증주의를 거치고 니체에 이르러서 이분법 자체가 파괴되어버리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오류의 역사의 종말은 곧 형이상학적 사유의 종말이고, 이 종말은 니체에게서 가능해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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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는 역경이야말로 개인을 단련시켜 위대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강력하고 건강한 의지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오히려 그러한 역경을 요청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고통의 제거나 회피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통을 자신의 내적 성장을 위한 계기로 승화시키는 자기고양을 통해 획득된다. - P-1

플라톤주의에서 참된 세계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피안으로서 상정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체는 플라톤주의를 아직은 남성적인 강함과 자신감이 남아 있는 철학으로 본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구원을 신의 은총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의존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여성적인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 P-1

성욕을 불결한 것으로 파악하는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은 성관계에 의해 시작되고 이어지는 우리의 삶과 그 발단에 오물을 퍼붓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은 ‘삶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있다. - P-1

니체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 도취가 ‘개체가 자신의 개체성을 망각하고 우주의지와 하나가 되는 합일의 느낌’을 가리킨다면, 『우상의 황혼』에서 도취는 ‘힘의 상승과 고양의 느낌’을 가리킨다. - P-1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크게 반어법(反語法)과 산파술로 구성되어 있다. 반어법은 상대방의 주장에 내포된 모순점을 폭로하여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게 하는 방법이었고, 산파술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잠재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으로 특히 반어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 P-1

각 개인은 필연적인 존재이며 하나의 숙명이다. 그는 전체에 속해 있으며 전체 안에 존재한다. ― 우리의 존재를 심판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체를 심판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전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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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황혼 대우고전총서 39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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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은 도무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감각의 증언을 가지고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비로소 감각에 거짓말을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통일성이라는 거짓말, 사물성, 실체, 영속성이라는 거짓말을....... '이성' 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언을 왜곡하게 하는 원인이다. 감각이 생성, 소멸, 변천을 보여주는 한, 그것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_ <우상의 황혼>, p16/111 


 쇠망치(Hammer)는 말한다. 니체의 쇠망치는 서양정신사의 우상들을 내리친다. 그리고 산산히 조각내어 부순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의해 구현된 변증법과 산파술에 의해 세워진 참된 세계(Idea)라는 이상향이며, 기독교가 강조하는 천국이다. 감각은 생성, 소멸, 변천을 보여주지만, 이성은 이 변화하는 세계 뒤에 영속적이고 변치 않는 진리(형상/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곧 실체, 사물성, 통일성 등의 개념으로 굳어져 현실을 왜곡한다.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객관적 세계. 그것은 주역 63번째 괘(卦)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세상이기도 하다. 니체는 그 세상에 쇠망치를 휘둘러 이러한 완성을 산산이 조각낸다. 대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미결 상태로 남아있는 64번째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의 세계를 열어젖히고자 한다. 이성 대신 감성으로, 아폴론 대신 디오니소스로, 선악 대신 '그 너머로'. 


  니체는 현실-이상(참된)세계의 구조를 거부한다. 마치 '수학적 체계가 충분히 복잡하다면 자신이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그 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괴델의 불완전성(不完全性)' 정리처럼. '이성'이 세운 삶과 세계의 체계(도덕, 종교)는 그 체계 안에서는 삶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평가하거나 그 참됨을 증명할 수 없는 불완전성을 내포한다. 니체는 이성 체계 안에서 침묵하는 대신, '자기극복'을 통해 그 체제를 통째로 뛰어넘는(超越) 길을 선택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수도 있겠지만, 니체는 그 체제를 뛰어넘는 것을 선택한다. 체제뿐 아니라 체제에 속한 자신까지 뛰어넘는 '자기극복'을 통해 그는 한 단계 도약하며, 위버멘쉬(Ubermensch)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통해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영원히 다시 반복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이 영원회귀(永遠回歸)의 수레바퀴 앞에서 그는 해탈(解脫) 대신 고통까지도 웃으며 긍정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공포와 연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해석하는 것처럼 공포와 연민을 격렬하게 방출함으로써 그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의 영원한 기쁨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_  파괴에 대한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_ <우상의 황혼>, p60/111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정화)가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정화(Purification)'되는 것임에 반해, 니체는 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의 영원한 기쁨 자체로 존재'하고자 한다. 이는 순수 이상향을 거부하고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으로 나아가는 태도다. 이처럼 <우상의 황혼>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니체 사상의 주요 얼개와 강력한 메시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안내서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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