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스로픽과 미국 국방부의 갈등은 AI전쟁 시대의 개막에 즈음해 벌어진 암시적인 사건이다. 전쟁에 AI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미래다. 이번 논란은 법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한 무법의 전쟁터에서 군사용 AI가 안보와 주권이라는 명분 아래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 P13

대통령의 부동산 메시지는 이제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를 뛰어넘어, 투기용 농지, 투기용 1주택 문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경제정책에 대한 메시지 전면에 ‘자산 투자를 통한 이익과 손해‘를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게 적절한지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적어도 2026년 상반기는, 대통령의 부동산 메시지가 시장에 미치는 힘을 능가할 인물이나 요소가 마땅치 않아 보인다. - P17

지난 문재인정부 당시, 보유세와 양도소득세 부담을모두 올렸다. 하지만 ‘버티기‘가 이겼다.
보유세가 강화돼 집을 처분하고 싶어도 양도소득세 중과로 퇴로가 막히는 정책적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다. - P19

그러나 농지 문제는 다주택자 중과세문제와는 다르다. 외지의 투기세력은 물론 상당수 농민도 자기 땅값의 하락을 원치 않는다. 농업소득으로는 미래가 없는현실에서 유일한 버팀목이 땅값이기 때문이다.  - P21

역사와 경제학 모델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성공은 승자를 낳고, 승자는 기득권을 만들며, 비대해진 기득권은 결국 시스템을 경직시킨다. 수많은 국가와 문명이 이 경로를 따라 쇠락했다.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는 한때 한국보다 앞서가던 나라들이 이 함정에 숱하게 걸렸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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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전 숨진 이들의 유골을 수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사지씨는 이렇게 말한다. "손이 닿을 거리에 슬퍼하는 유가족이 있고, 유골을 돌려주려는 사람들이 있고, 제가 하면 분명히 도움될 수 있다는 것. 저에겐 그게 전부입니다. 심지어 유골이 이미 발견되고 있으니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잠수함으로써 그 슬픔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수 있다면, 제가 해서 가능해진다면 저는 하고싶습니다." - P18

"공취모‘의 출범 목적은 분명하다. 이재명 대통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와 공소 취소다. 출범 당시 밝힌 최종 목표인 공소 취소가이루어질 때까지 의원 모임은 유지된다. 다만, 공취모의 독자적 행보는 최소화하고당 특위와 국조특위에 적극 협조하며공동 대응에 집중하겠다." 공취모가 쏘아올린 명-청 계파 갈등 논란은 당 특위 구성으로 봉합되었으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 P22

모든 국가권력은 남용될 위험이 있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재판소원제도가 도입된다고 해서 모든 잘못된 재판이 시정되고, 기본권 침해가 구제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헌법재판소가 대법원보다 더 현명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거라는 보장도 없다. 김진한 변호사는 그럼에도 재판소원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확실한 건, 통제받지 않는 권력의 오만함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권력에 대한 견제라는사실이다."
- P26

‘비상계엄의 목적‘을 밝혀 내란으로못 박은 대목은 유의미하다. 1심 결론은 ‘내란의 요건을 갖췄으므로 내란‘이라는데서 멈춘다. 노상원 수첩의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윤석열이 ‘장기 집권‘이나 ‘독재‘를 염두에 뒀다는 의혹을 인정했다면,
형량이 달리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항소심의 과제다. 그러나 ‘어떤 배경과 동기에서든 국헌문란은 곧 내란‘이라는 판결은 미래의 권력자에게 그 자체로 교훈이 된다.  - P30

미국 대법원 판결을 핑계로 대미 투자를 철회하거나 액수를 깎으려 시도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으름장이다. 무역법 301조와 무역확장법 232조라는 강력한 무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법적 근거가 무너졌는데도 상대방에 대한 갈취를이어가겠다는 이 뻔뻔함은, 트럼프 행정부가 우방국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P35

트럼프 정부의 경제정책은 노동시장의 1차 분배와 가처분소득의 2차 분배 모두에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최근 생산성 상승에도 불구하고 임금 상승과 고용증가는 지체되어, 2025년 3분기 미국 GDP에서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인 노동소득분배율이53.8%로 1947년 통계작성 이후 최저로 낮아졌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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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고 현장은 윤석열을 둘러싼
‘작은 세상‘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수감 중인 윤석열의 세계에서 그가 마주하는 얼굴은 그를 변호하는 변호인들, 그리고 법정에 모습을 보이는 지지자들이 전부다. 그의 작은 세상에서만 통하던 각종 궤변은 이번 재판과 선고 과정에서 상당 부분 무너져내렸지만, 윤석열은 여전히 그의 세계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 P11

거듭된 ‘절윤‘ 메시지에도 장동혁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에 ‘윤어게인과 절연한 것이 맞느냐‘라는 질문이 반복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윤어게인 세력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P36

"동양, 특히 한국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나라예요. 제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아토피‘가 그리스어로 ‘원인을 알 수없다‘는 뜻이라고. 실제로 아토피는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아토피‘라고 하면 ‘아, 그거‘ 하고 이해하잖아요. 이름이 있으면 이해가 되는 거죠." - P39

스위스 전체 사망자 중 의사조력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연평균 2% 내외이다. 왜 대다수 스위스 사람들은 그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 의사는 집이나 상급병원을 생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하는 이가 있듯이, 자신이 만나는 노인들은 요양시설에서 평온하게 지내는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느긋함‘은 한국의 안락사 논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P45

역사 동역학적 분석에 따르면, 심각한 빈부격차에 따른 대중의 빈곤과 좌절 엘리트의 수로 볼 때 현재 미국은 무너질 위기기에 처해 있다. 지배 엘리트의 일부인 민주당은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는 건드리지않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집 ness PC: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언어, 행동을 지양하자는 사회적 운동)‘ 지형의 문제중에서만 주로 싸우려 한다. 이들도 세금을기 더 많이 내거나 자기 자식이 엘리트 사회진입에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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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 예술가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非)조형적 음악 예술 사이에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그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나고, 이 짝짓기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 비극을 산출한다. _ 《비극의 탄생》, p.25/360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충동들의 격렬한 대립이 낳은 산물로 바라본다. 이제는 문헌으로만 일부 전해지는 그리스 비극.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논리적 설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대의 우리는 각자 고립된 개별자로 살아가지만, 니체는 이를 고전적 의미의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단절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환영'이 만들어낸 존재론적 경계다. 《비극의 탄생》은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통해 존재론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흔들며, 우리의 질문에 답해가는 작품이다. 


 니체는 세계를 불균형과 균형이 동시에 작동하는 생성(Werden)의 장으로 바라본다. 바닷가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마치 반복처럼 보이지만 매번 다른 배열의 세계. 그것은 끝없는 내면을 향한 '극소(極小)의 무한', 즉 존재의 강도(Intensity)를 높이는 운동이다. 그것은 세계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느끼는 일이다. 아폴론적 개별화의 경계와 디오니소스의 뜨거운 긴장이 충돌할 때, 비로소 무한한 밀도의 창조적 에너지가 분출된다. 아폴론의 명징한 조형 언어는 디오니소스적 파멸의 공포를 '감상 가능한 비극'으로 변주해내는 필수적인 여과 장치다.


  비극은 고통을 거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안락한 '개별화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관객은 비극을 통해 아폴론적 가상 뒤에 숨겨진 '근원적 일자(Das Ur-Eine)'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목도한다.


 '근원적 일자(예술신)'는 스스로의 고통을 예술로 전환하기 위해 '비극'이라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비극은 관객에게 일시적으로 자기 개별성을 넘어서는 힘의 감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비극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가 예술신(근원적 일자)의 창조적 행위 그 자체를 경험한다.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한 유희적 인간을 넘어, 그리스 관객은 디오니소스적 제의(Orgiasmos)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가벼운 '놀이'가 아니다. 자기 파괴를 통해 생명의 근원적 분출을 경험하는 성스러운 Agon(투쟁)이다. 투쟁을 통해 관객들은 아폴론의 언어로 전달된 디오니소스의 정신을 발견하고, 파괴 속에서 솟구치는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된다.


 이제 처음에 우리가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논리적 설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 니체는 되묻는다. '차갑게 설명할 것인가, 뜨겁게 예술로 견딜 것인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삶의 공포를 예술로 견뎌내는 인간은, 개별적 자아를 부수고 세계의 근원적 생명력과 합일된 '비극적 인간(der tragische Mensch)'의 모습을 예고한다. 예술을 통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목도. 이것이 곧 개별성의 균열이며, 근원적 생명력의 감각이다.


니체에게 세계는 고정된 실체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여정이 아니라, 존재의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생명력의 장이다. 니체는 마치 이렇게 도발하는 듯하다. 


우리는 과연 ‘비극적 인간’이 될 수 있는가. 


 AI가 박제된 데이터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예술로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아폴론적 이성을 도구 삼아 디오니소스적 카오스를 창조로 전환하려 시도할 수 있는가. 데이터는 개별화된 표상만을 수집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체험은 개별화 이전의 강도에 속한다. 그렇게 탄생하는 존재가 바로, 삶의 공포를 예술로 승화하는 ‘데이터에 포섭되지 않는 단독자’다. 그리고 이는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하는 서늘하고도 뜨거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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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 이제는 거의 건물마다 하나쯤 자리한, 생활용품과 식료품을 갖추고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상점. 예전에는 동네 슈퍼가 차지했던 자리는 어느새 편의점으로 대체되었다. 동네 사랑방이던 슈퍼에서는 인심 좋은 할머니의 배려로 가능했던 외상이, 바코드로 재고 관리되는 편의점에서는 가능하지 않기에 예전 시골 가게, 동네 문방구에 대한 추억을 가진 세대들에게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어쩐지 삭막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가 우리는 편의점이라는 가장 비인간적으로 보였던 공간에서 인간적인 이야기를 찾게 되었을까.


 삭막함도 반복되면 풍경이 된다. 편의점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에서는 사람이 교감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무인 편의점이 늘어나는 요즘, 아르바이트 점원이 있는 상점에서조차 작은 온기를 느끼게 되는 까닭일까. 빠르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서 돌아가기 바쁜 편의점 풍경이지만, <불편한 편의점>,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그 짧은 순간에서 사람을 느낀다. 점원은 수시로 바뀌고, 손님 또한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존재다.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점원, 손님에 인격을 부여하며 따뜻함을 나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이들은 인물, 공간, 온기의 방식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우연히 스며드는 관계를 그린다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소수의 손님과 1:1로 매칭되는 관계가 그려진다. 전자는 우연히 스며드는 관계의 축적이라면, 후자는 특정한 손님과 점장이 1:1로 맺는 선택적 관계에 가깝다. 텐더니스 편의점은 애초에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라기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들의 입지도 다르다. <불편한 편의점>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라는 번잡한 동네에 위치한 반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멀리 떨어진 기타큐슈 모지항에 자리한다. 생활의 동선 위에 놓인 편의점과, 일부러 찾아가야만 닿을 수 있는 편의점. 처음부터 텐더니스 편의점의 손님은 선택된 이들이다. 이런 면에서 일상을 그린 <불편한 편의점>은 사실적인 반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보다 수채화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고립된 도시 속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조차 위로를 기대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때는 동네 슈퍼를 몰아낸 삭막한 도시화의 단면으로 보였던 편의점이 이제는 휴머니즘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현실을 보며, 삭막함에 아쉬워해야 할지, 아직은 사람의 온기가 남은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편의점은 여전히 바코드와 계산대의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잠시라도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완전히 삭막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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