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에서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충분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인간의 마음에는 의지력 말고도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복적인 행동 패턴, 우리의 습관 말이다._웬디 우드, 「해빗」, p42

「해빗」의 저자 웬디 우드는 책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의지는 한계가 있으니, 바뀌기 위해선 비의식적인 습관을 활용할 것을 강조한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저자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고 상환을 재배열하며 적절한 보상을 통해 습관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끝. 자기계발서의 다수가 그러하듯 나머지 부분은 ‘습관 예찬‘이기에 책의 핵심은 이 정도가 될 듯하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독자 각자의 실천뿐이다. 자기계발서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심한 비판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몇 가지 의문을 지우기는 힘들다.

개인적으로「해빗」의 저자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습관화 과정이다. 저자는 인위적인 인간 의지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이를 대신한 습관화에서는 ‘보상‘이라는또다른 인위적인 개입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습관화의 주체를 폐쇄적인 ‘뇌‘로 한정시켜 바라보는 저자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저자는 인간 행동의 주체로서 ‘뇌‘를 설정하지만, 행동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뇌‘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마치 뇌를 기독교의 ‘신‘과 같은 절대적인 위치에 놓고 폐쇄계로서 시스템을 가정했기에 결국 ‘동기 부여를 통한 습관형성‘이라는 스키너의 주장에서 크게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전화번호를 누를 때 자주 사용하는 번호는 ‘손가락이 기억‘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반응은 의식적인 인간 기관인 뇌가 아닌 몸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서구적인 사고와 뇌과학에 기반한 습관화 연구가 선뜻 동의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습관화와 관련해서는 「해빗」보다 노자의 「도덕경」이 더 바람직한 길을 제시해 준다 생각된다.

인위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둔 상태(let it be)에서 별다른 감정의 기복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면 그것이 습관화가 아닐런지... 「해빗」을 통해 「도덕경」의 무위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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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9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이번 페이퍼를 읽기 전 먼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읽으시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부족하지만, 제 리뷰를 먼저 훑어 보시면 조금은 수월하게 페이퍼를 읽으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1248750


  다양한 대안들 중 오직 하나만 실재를 표상할 수 있으며,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과학자는 자신이 그 하나 또는 그것의 입수 가능한 근사치에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학자는 이렇게 하나의 특정한 대안을 신봉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그는 실수를 했을 수 있다. 그의 이론과 양립 불가능한 단 하나의 관찰은 그가 줄곧 잘못된 이론을 사용해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면 그의 개념 체계는 버려지고 교체되어야 한다. 이는 과학 혁명의 개략적인 논리적 구조다.(p139)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이번 페이퍼에서는 리뷰에 이어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 ~ 1996)은 코페르니쿠스(Mikołaj Kopernik, 1473 ~ 1543)의 태양중심설이 과학 혁명의 조건을 충족하는가를 <코페르니쿠스 혁명 The Corpernican Revolution>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당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기되기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위치를 차지한 이론은 무엇이었지부터 시작해 보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Almagest>는 고대 천문학의 위대한 성취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으로, 모든 천체 운동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하고, 정량적인 설명을 제공한 최초의 체계적인 수학적 논문이었다. 그 결과는 아주 훌륭했고 그 방법은 아주 강력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의 계승자들은 행성 이론의 정확성 또는 단순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주전원에 주전원을 더하고 이심원에 이심원을 더하며, 근본적인 프톨레마이오스 기법의 엄청난 다양성 모두를 샅샅이 파헤쳤다.(p133)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코페르니쿠스 이전 정상과학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와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100 ? ~ 170 ?)의 이론이었다. 여기에 중세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 결합되면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는 이들 정상과학에 의해 굳건하게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의 패러다임은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새롭게 도전받는다. 


 발견으로든 이론으로든 간에,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우선 개인이나 소수의 마음에서 나타난다. 과학과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처음 익힌 것은 바로 그들이며, 전이를 일으키게 하는 그들의 능력은 전문 분야의 대다수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공유되지 않은 두 가지 상황에 의해서 성숙된다.(p253) <과학 혁명의 구조> 中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에 자전을 도입함으로써 항성 천구를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고, 이는 항성 천구에게서  물리적 기능을 빼앗았다. 그리고 지구에 공전을 도입함으로써 천구의 크기를 엄청나게 키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행성 간 물질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그것의 본질적인 기능 대다수를 없애는 동시에 그것이 훨씬 더 많이 있어야 함을 요구했다... 지상계에서는 기압이 17세기 공기 역학 관념에서 진공을 대체했다.(p168)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宇宙論)은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옮기고, 지구에 자전과 공전을 도입하면서 '태양중심설'이라는 새로운 내용을 주장했다는 면에서 '전환된 패러다임(shift paradigm)'이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기존 정상과학의 언어인 주전원(epicycle)을 통해 설명했기에, 우리는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과거 용어의 차용'의 예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주전원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것과 달랐기에 전통적 사용과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확인사항에 포함된다.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옛 것들로부터 탄생된 것이므로, 그것들은 보통 전통적 패러다임이 이전에 사용해왔던 개념적이며 조작적인 용어와 장치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차용한 이 요소들을 전통적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p260) <과학 혁명의 구조> 中


 <회전에 관하여>의 우주는 모든 면에서 전통적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에게 그 우주는 지구의 운동과 양립 가능해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태양의 운동은 단순히 지구로 이전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여전히 유한하며, 여전히 모든 행성은 동심 천구들에 의해 돌려진다. 그러나 그 천구들은 더 이상 바깥 천구에 의해 돌려질 수 없는데, 바깥 천구는 이제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은 원들의 합성이어야 했으며, 지구를 움직였음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주전원을 버릴 수 없었다.(p304)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이처럼 과학 혁명의 여러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의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과학혁명이 될 수 있었을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과학 가설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수용하려면 인간과 신의 관계 및 인간 도덕의 근거에 관한 견해를 변화시켜야 했다. 그러한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증거가 <회전에 관하여>에서처럼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있는 동안에는 거의 시작도 되기 어려웠다.(p379)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16, 17세기의 위대한 새 과학 이론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체계가 스콜라적 비판에 의해 찢어진 곳들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 과학자들이 중세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태도로,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의 이성의 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고인이 된 화이트헤드 교수가 지적했듯이, "현대 과학이론의 발전에 앞서 형성된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중세 신학의 무의식적 파생물이다."(p233)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혁신적인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충분한 여건의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브루노(Giordano Bruno, 1548 ~ 1600)을 화형시키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 ~ 1642)를 종교재판으로 넘기려고 했던 기독교의 신앙(信仰) 이 역설적으로 과학을 또다른 신앙으로 만드는 것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여건의 중요함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降, 1941 ~ )의 <16세기 문화혁명>, <과학의 탄생>이 충분한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과학 연구에 속어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은 언어적 차원에서 본다면 단순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은 속어가 여러 분야의 전문용어나 라틴어 또는 외국어에서 어휘를 빌려 와 표현을 풍부하게 만들고, 학문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된 속어는 규범화와 표준화를 통해 국어로 승화되었다. 이는 유럽의 언어와 문화에서 나타난 근본적 변화였다. 이제 국어가 된 속어의 사용은 확실하게 널리 확대돼 갔다. 이와 함께 과학과 기술의 연구 기반을 닦은 사람들의 수도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16세기 문화혁명의 커다란 성과이자, 17세기 과학혁명의 전개와 확대를 밑에서부터 지탱해 주었던 것이다.(p684) <16세기 문화혁명> 中


 17세기 과학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망원경, 현미경과 같은 관측기기를 개발하고 개량함으로써 경험의 세계를 일변시켰다. 진공펌프처럼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함으로써 실험 과학을 전혀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던 것이다.(p769) <16세기 문화혁명> 中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6세기 문화혁명>을 통해 당대의 언어로 과학이 보급되었기에, 대중적으로 과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며, 대중적인 과학도구의 개발이 많은 데이터의 축적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 ~ 1630) 등에 의해 뒷받침되고 수정, 보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론과 실험의 일치를 증진시키거나 또는 어찌하든 간에 그런 일치가 증명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는 일은 실험과학자와 관찰자의 숙련과 상상력에 끊임없는 도전을 제기한다. 연주시차(parallax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예측을 증명하기 위한 특수 망원경 등이 그 예인데, 이런 특수장치는 자연과 이론을 점점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드는 데에 엄청난 노력과 발명의 재능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p95) <과학 혁명의 구조> 中


 일반적인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이 근대 천문학 나아가 근대 물리학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 과학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진정한 전환점은 오히려 케플러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정지한 상태의 태양계를 제창하긴 했지만, 천문학이 어떠한 과학인가 하는 점에서는 고대 이래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케플러의 천문학은 단순히 태양을 중심에 놓고, 원궤도를 타원궤도로 바꾸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개혁의 본질적인 점은 행성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태양이 행성에 미치는 힘이라는 관념을 도입함으로써, 천문학을 궤도의 기하학에서 천체의 동역학으로, 천공의 지리학에서 천계의 물리학으로 변환시킨 데 있다. 그 근저에는 사고의 결정적인 전환이 있었다.(p636) <과학의 탄생> 中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당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되고, 이에 대한 주장이 널리퍼졌음에도 당대 천동설(天動說)의 주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과학 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개념이 향후의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 혁명의 전형적인 예(例)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p263) <과학 혁명의 구조> 中


 케플러의 타원과 갈릴레오의 망원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를 곧바로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p439)... 1610년 갈릴레오가 관찰을 발표한 후,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유용하지만 물리적 의미는 없는 단지 수학적 도구일 뿐이라며 묵살할 수가 없었다.(p441)... 옛 개념 체계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나 옛 개념 체계는 정말로 사라졌고, [당시에는]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웠겠지만 지구의 유일성과 안정성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사라진 것은 분명히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p443)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케플러의 법칙을 따르는 행성의 운동은 속도, 방향, 곡률이 케플러의 법칙을 따르는 행성의 운동은 속도, 방향, 곡률이 궤도의 매 지점에서 변한다. 지구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비대칭적인 운동은 끊임없이 밀고 당김의 결과로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되었다. 달리 말해,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은 우선 행성 운동의 전통적인 설명을 파괴했고, 이제 케플러에 의해 수정되면서 천체 물리학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제안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자연스러운 원형의 천체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지구에 적용함으로써 통일성을 달성했다.(p476)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태양의 흑점과 신성만이 코페르니쿠스 직후의 서양 천문학계에서 파악한 천상계 변화의 유일한 사례들은 아니다. 실오라기같이 단순한 것을 비롯한 전통적인 천문기구를 사용하면서, 16세기 말의 천문학자들은 그 이전에는 불면의 행성과 항성에만 허용되던 공간에서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혜성들을 계속 발견했다. 옛 대상을 옛 기기로 관측하면서 천문학자들이 그토록 쉽고 빠르게 새로운 것들을 보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천문학자들이 전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을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그들의 연구는 마치 그런 것처럼 반응했다.(p217) <과학 혁명의 구조> 中


 페이퍼를 통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제시한 사상과 그 영향이 과학 혁명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과학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천재 한 명의 영감(靈感)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쿤이 비판한 칼 포퍼(Sir Karl Raimund Popper, 1902 ~ 1994)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학자와 과학적 시기의 유형론에 대한 쿤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것은 제한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나의 주도적 이론(쿤의 용어법으로 한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되고 예외적인 혁명이 뒤따르는 '정상적' 시기들에 관한 그의 도식은 천문학에는 썩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예컨대 물질이론의 진화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또, 다윈과 파스퇴르(L. Pasteur) 이후 생물학의 진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p99)... 내가 비록 쿤이 그의 소위 '정상' 과학을 발견한 것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정상적으로' 각각의 과학 영역에는 하나의 지배적인 이론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과학의 역사가 지지한다거나, '비통상적' 과학의 혁명적 기간들, 즉 지배적 이론의 부재로 말미암아 과학자들간의 의사소통이 마치 단절된 것인 양 그가 기술한 시기가 중간중간에 끼여드는 일련의 지배적 이론들로 과학의 역사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p100) <현대 과학철학 논쟁, 정상과학과 그 위험성> 中


 쿤의 주장처럼 과학의 발전이 단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으면, 포퍼의 주장처럼 반증(反證)되면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개인적으로 과학계이라는 폐쇄계(closed sysem)에서 본다면, 쿤의 혁명적 발전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사회 전체의 열린 사회에서는 포퍼의 주장에 더 귀가 열린다. 공정한 판단을 위해서는 포퍼의 다른 저작들 <추측과 논박>,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정리해야겠다. <추측과 논박>은 포퍼의 과학철학이 담겨 있기에<과학 혁명의 구조>에 대한 하나의 반증이 될 것이며,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사회에 대한 포퍼의 철학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계(open system)에서의 철학을 정리하는 다른 계기가 될 것이다.


 갈릴레오 사후 150년 동안 수용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우주도 아니었다... 18, 19, 20세기가 물려받은 코페르니쿠스주의는 17세기 뉴턴주의적 세계 - 기계 관념에 맞추어 재건설된 코페르니쿠스주의다.(p444)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이제 긴 페이퍼를 마무리하자.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분명 과학사의 전환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과학 혁명임에 불과하지만,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한 그 배경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여러 사람의 기여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과학 혁명은 갑작스럽지만, 예정된 수순이었음을 확인하며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불교(佛敎)에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역시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게 된다. 포퍼와 쿤의 논쟁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들은 지식인 마을의 책을 추천한다...


 PS2. 우리는 15세기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주장대로 글(언어)의 보급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면, 당대 성리학자들의 한글 사용 반대는 추상학문인 성리학과 보편학문인 과학기술의 주도권 다툼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다툼이 조선 초기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본다. (물론, 충분히 논박당할 수 있다.) 조선 초기 과학 기술이 후기에 이어지지 못한 것에는 패러다임 다툼에서 기(氣)의 학문이 이(理)의 학문에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1900 ~ 1995)의 <조선의 서운관 The Hall of Heavenly Records: Korean Astronomical Instruments and Clocks, 1380-1780>에서 정리해야겠다... 참 읽을 책은 많고 읽은 책은 적다... 少年易老 學難成 一寸光陰 不可輕.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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