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셔가의 몰락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아구스틴 코모토 그림, 이봄이랑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결핍 때문에, 어쩌면 이 방계의 결핍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유산과 가문의 이름이 고스란히 대물림된 탓에, 결국에는 저택과 가문이 동일시되어 사유지의 본래 이름이 예스럽고 모호한 '어셔가'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이 명칭을 사용하는 소작농들에게 그것은 가문과 가문의 저택 모두를 의미하는 듯했다. _ <어셔가의 몰락>, p.15/70


 하나된 가문과 저택, 어셔가(家). 어셔가의 몰락은 가문의 몰락일까, 저택의 붕괴일까 또는 둘 다일까. 이름에 담긴 의미만큼 모호함에 대한 물음으로 읽어내려간 <어셔가의 몰락>은 가문과 저택의 붕괴라는 답을 내놓는다. 정말 이들은 하나였을까, 아니면 하나의 형상과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었을까. 아마도 후자 쪽에 가깝지 않을까 여겨진다. 가문의 몰락이라는 내면의 추락과, 이를 처절하게 형상화한 저택의 물리적 붕괴.


 내가 지켜보는 동안 균열은 빠르게 넓어졌고, 회오리바람의 사나운 입김이 몰아쳤고, 완전한 구형의 달이 내 시야에 불쑥 난입했고, 거대한 벽들이 산산이 무너져내리는 광경에 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고, 수천 개의 물줄기가 내는 목소리 같은 길고 떠들썩한 아우성이 어어졌으며, 이윽고 내 발치에 있던 깊고 음습한 호수가 침울하게 침묵하며 '어셔가'의 잔해를 삼키고 수면을 닫았다.  _ <어셔가의 몰락>, p.64/70


 작품에서 저택은 가문의 몰락을 극적으로 보이기 위한 장치만은 아니다. 특별히 하자가 없는 외관과 이를 이루는 벽돌들의 낡은 상태. 그것은 방계를 허락하지 않는 어셔가의 높은 자존심인 동시에 유전적 질환을 대물림한 개인들의 불행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화 속에 찾아온 것은 '두려움에 대한 공포'였다.


 나는 건물의 실제 면면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장 주요한 특징은 지극히 고색이 짙다는 점인 듯 했다. 세월로 인한 변색이 극심했다. 미세한 이끼와 외벽 전체를 뒤덮고 가늘게 뒤엉켜 처마에 거미줄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건물에 특별한 하자는 전혀 없었다. 돌벽이 무너진 부분도 없었다. 완벽하게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의 각 부분과, 바스러져가는 벽돌 개개의 상태가 현저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_ <어셔가의 몰락>, p.18/70


 오랜 세월이 건물을 서서히 낡게 만들다가 결국에는 무너뜨리는 것처럼, 로드릭 어셔는 순수 혈통만을 강조한 가문의 폐쇄성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유전적 취약성을, 정신적으로 심기증을 앓게 된다. 이제는 가문의 마지막 상속인이 돼버린 로더릭과 누이동생. 순수성에 대한 가문의 집착이 가져온 비극적 결과를 지켜봐야하는 로더릭의 공포. 결국 그는 두려워하던 공포(누이의 귀환)를 스스로 집행함으로써 가문과 저택의 몰락이라는 예언을 완성했다. 이같은 공포가 작품 전반에 음울하게 자리하기에 화자인 '나'는 로더릭의 공포와 대면 후 황급히 자리를 뜨게 된다. 


 사실 내가 꺼리는 것은 특정한 위험이 아니야. 다만 그것이 동반하는 절대적인 결과 - 공포 - 지. 이렇게 불안하고, 이렇게 한심한 처지에 놓인 채 나는 그 시기가 곧 다가올 것임을 느끼네. '두려움'이라는 음침한 환영과 사투를 벌이다 삶과 이성을 전부 내던지는 날이." _ <어셔가의 몰락>, p.26/70


 <어셔가의 몰락>을 통해 독자들은 로더릭과 친구인 '나'가 직면한 상황와 두려움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정작 독자들이 실감하는 공포는 조금 다르다. 로더릭이 처한 상황적 공포 대신 화자가 서술한 달빛 아래와 황량함에 대한 세세한 서술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새 머리 속으로 이토 준지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음습함을 느끼게 한다. 글로 접하는 이토 준지의 작품 세계가 있다면 이럴까.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저택 그 자체와 주변 사유지의 단순한 지형지물을, 음산한 벽을, 텅 빈 눈 같은 창문들을, 몇몇 무성한 사초 莎草 덤불을, 그리고 썩은 나무 몇 그루의 흰 나무줄기를 지극히 우울한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상에 존재하는 감각 중 이때의 심정에 제대로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아편에 취해 흥청거리던 이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감각, 그 일상으로의 혹독한 귀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의 끔찍함뿐이리라. _ <어셔가의 몰락>, p.11/70


 <어셔가의 몰락>은 피가 튀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잔인한 공포는 없다. 대신, 가문의 전통으로 인해 고통받는 개인의 한계상황과 이로인해 피어나는 공포와 두려움과 함께 이를 건물로 형상화한 저자의 세세한 묘사들은 독자들의 머리 안에 음습함이 퍼져 나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공포문학의 고전이라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에겐 두 가지 삶이 있었다. 그 삶은 그의 지인이나 친구들의 삶과 쏙 닮은, 조건부 진실과 조건부 기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비밀스럽게 흘러갔다. 몇몇 낯선 우연들이 겹치다보니, 말 그대로 우연이겠지만, 그에게 중요하고 흥미로우며 꼭 필요한 모든 것, 그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실할 수 있는 모든 것, 그의 삶의 알맹이를 이루는 모든 것은 다른 이들 모르게 이루어졌고, 진실을 가리기 위해 덮어쓰고 있는 그의 거짓과 껍데기, 가령 은행 업무나 클럽에서의 논쟁, '저급한 인종'이라는 말, 아내와 함께 기념일 파티에 가는 일만이 명백하게 겉으로 드러났다.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51

겉과 속이 다른 삶.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
겉으로 드러난 삶은 거짓이고, 속으로 흘러가는 삶은 진실이다. 거짓은 영원이며, 항구적이고 진실은 비밀이며, 은폐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속 구로프의 삶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반복 속을 살아가는 구로프는 영원 대신 자신에게는 진실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저급한 사랑을 선택한다. 그 사랑의 끝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지만.

이 얼마나 무의미한 밤들이고, 무료하고 시시한 날들인가! 얼빠진 카드놀이, 폭식, 만취, 그리고 끝도 없이 반복되는 늘 똑같은 얘기들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고 결국 우리에겐 날개도 없고 꼬리도 잘린 삶, 헛소리 같은 삶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39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구로프와 안나는 영원한 생명 대신 순간의 욕망을 선택한다. 그들의 선택의 주위로부터 지지받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이성보다는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청개구리'와 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기 때문일까.

조금만 지나면 해결책을 찾아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복잡하고 힘겨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57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마지막은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와 같은 행복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선택의 마지막이 불행의 시작임을 알리는 글에서, 구로프와 안나는 감정의 일상에서는 어떤 일탈을 꿈을 꾸게될 지 생각하게 된다. 권태로운 일상이라는 항구성에서 일탈의 씨앗이 있다면, 뜨거운 사랑이라는 일상에서는 어떤 일탈이 잉태될 수 있을까...

이런 항구성에, 우리들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아마도 영원한 구원의 약속, 지상에서의 삶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완성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니, 불쌍하기도 해라!  _ 에밀 졸라, <돈>, p178/278


 에밀 졸라의 <돈>은 19세기 프랑스 주식시장에서 일어난 자본(資本)들의 격돌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을 통해 제국(帝國)은 팽창되었으며, 승리의 결과로 얻어진 식민지에서의 이권(利權)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주가로 반영되었고, 그 결과로 주식시장에는 수많은 이들의 욕망이 밀어닥친다.


 시장이 개장된 이후, 군중은 개별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넘쳐흐르는 대하大河처럼 끊임없이 들이치는 물결 소리를 냈다. 이 엄청난 파도 소리 위로 공급과 수요의 불협화음, 즉 퐁풍 속에서 약탈에 나선 맹금들의 울음처럼 불안정한 음표로 고조되고, 잦아들고, 멈추고, 다시 시작되는 날카로운 외침이 지나갔다. _ 에밀 졸라, <돈>, p203/278


 <돈>에서는 주식시장에서의 인간 욕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미시적으로는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상황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두 개의 가치관이 충돌한다. 소비를 위해 주가를 부양하는 사카르가 매개 기능을 대표한다면, 로스차일드가의 모습이 비춰지는 군데르만은 저장 기능을 대변하며 또다른 워터루 전쟁을 치룬다. 


 50세의 정력적인 은행가 사카르는 집요하게 돈을 추구하지만, 재물을 축적하기만 하는 수전노가 아니다. 그가 축재에 몰두하는 진정한 이유는 재물을 소비하기 위해서, 그것도 과시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다(p268)... 유대인 은행가의 상징인 제임스 드 로트실드가 모델이라고 알려진 60대의 유대인 은행가 군데르만에게 가장 중요한 돈의 기능은 세번째 기능, 즉 저장 기능이다. _ 에밀 졸라, <돈>, p268/278


 <돈>에서 사카르와 군데르만의 자본전쟁이 사건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지만,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것은 사카르의 성공 과정에서 카롤린 부인이 제기하는 물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돈은 선(善)일까 악(惡)일까. 아니면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할까.  


 무한한 권력 속에서 덧없는 인간의 양심보다 더 높이 추앙받는 돈, 피와 눈물보다 더 높이 군림하는 돈, 돈이라는 제왕, 돈이라는 신!(p145)... 불현듯 카롤린 부인은 돈이란 내일의 인류를 자라나게 할 거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카르에 따르면 투기 없이는 풍요를 생산하는 거대 기업도 있을 수 없었고, 욕망이 없으므로 후세도 있을 수 없었다. 생명의 존속에는 이런 과도한 열정, 이처럼 천박하게 소진되는 욕망이 반드시 필요했다. _ 에밀 졸라, <돈>, p147/278


 사카르에게도, 군데르만에게도 돈은 수단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욕망으로 들끓는 시장에서 자신의 초심(初心)을 화학적 변화를 통해 잃지 않고 남아있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투자자가 초심을 찾는 그 순간은 이미 모든 게 무너지는 너무 늦은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주식을 갖고 있지 않는 순간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때가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욕망과 함께 돈을 손에서 떠나 보낸 후에야 비로소 현재가치와 미래가치의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에밀 졸라의 <돈>은 21세기 엔비디아, 테슬라 주식에 물려있는 이들에게도 매우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고전이라 생각된다...


 모든 게 너무 잘 나갈 때, 바로 그때 모든 게 무너지잖소. _ 에밀 졸라, <돈>, p206/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 크리스토프 1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32
로맹 롤랑 지음, 손석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르주 상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는 표현하는 힘이 결여된 불행한 천재가 있다. 그의 명상은 남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그는 무덤 속으로 그것을 가지고 간다. 저 뛰어난 벙어리와 말더음이 일족의 일원인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말한 바와 같다."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13/613


  베토벤을 주요 모델로 만들어진 천재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의 일생을 다룬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처음 이 책을 읽었던 중학생 때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와 같은 주인공에게 많은 공감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 크리스토프가 가진 재능도 없었고, 그만큼 불우한 가정 환경도 아니었지만, 사춘기 시절을 보내며 주위와의 단절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만큼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오늘을 살아라. 하루하루에 대해서 믿음을 갖는 거야.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거지. 하루하루를 존경하는 거야. 특히 그것을 시들어 버리게 해서는 안 된단다. 그것이 꽃을 피우는 것을 훼방해서는 안 되는 거야. 오늘처럼 잿빛 하늘의 음산한 하루라도 사랑해야지. 걱정할 건 없다. 보려무나. 지금은 겨울이다. 모든 것이 잠자고 있지. 그러나 강한 땅은 또다시 눈을 뜰 거다! 억센 땅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믿는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기다리는 거야. 네가 만약 선량하다면 모든 일이 잘되어 가겠지.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290/613


 하루하루가 짙은 어둠에 싸여 있고 불안한 현실을 강렬한 의지를 갖고 헤쳐 나가는 모습이 어린 시절 인상 깊었다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주인공 크리스토프가 찾고자 했던 혼(魂)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자신이 눈 앞의 문제밖에 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살아가는 방향과 목적에 대해 더 관심이 있다는 다른 방증이 될까.


 크리스토프는 이러한 힘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일인의 혼에서 흘러나오는 이러한 음악의 힘의 은총을 똑똑히 느꼈다. 그 힘은 흔히 평범하고 조잡하기도 했지만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중요한 일은 힘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가득 넘쳐 흐른다는 일이다. 프랑스의 음악은 파스퇴르식 여과기에 의해 간단히 밀봉된 병 속에 한 방울씩 모아서 담겼다. 그리고 이 맛없는 물을 늘 마시던 자들은 독일 음악에 대해 거부하는 얼굴을 짓는다! 그들은 독일 정신의 흠을 잡아낸다!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586/613


 시간이 흐른 지금도 <장 크리스토프>는 내게 인생책이다. 그가 겪은 불행에 함께 마음 아파했고, 그가 점차 불행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쳤을 때 자신의 일인 듯 기뻤으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제는 책에서 보는 관점은 달라졌지만, 장 크리스토프가 성장할 수 있었던 힘과 그가 찾고자 했던 목적의 근원이 음악(音樂)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게는 무엇이 음악을 대신하고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한 답은 2권을 읽으며 천천히 생각해볼까 싶다...


 음악이 그러한 기적을 이루었다. 음악은 여러 가지 대상을 어렴풋한 분위기로 감싸 줬고, 모든 것이 거기에서는 아름답고 고귀하고 바람직한 것이 되어 있었다. 음악은 사랑하고 싶다는 탐욕스런 욕망을 영혼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숱한 사랑의 환상을 주어, 음악 자신이 파놓은 그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있었다. 어린 크리스토프는 감동으로 거의 넋을 잃었다. 음악의 온갖 대사와 동작과 악구(樂句)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68/6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신앙의 와해는 레온하르트와의 대화에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것은 한갓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혼란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혼란은 그의 내부에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낯선 괴물을 느꼈다. 자신의 사상을 성찰하고 자신의 악(惡)을 똑바로 바라볼 만큼 용기가 없었다…… 악? 그것은 하나의 악인가? 권태, 도취, 유쾌한 고뇌가 몸에 스며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닳아빠지고 시든 영혼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좀더 젊고 힘찬 새로운 영혼이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일생 동안 육체가 변하듯이 영혼도 또한 변하는 법이다. 그 변화는 반드시 나날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이루어진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위기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낡은 껍질은 떨어져 버린다. 이러한 고뇌의 시기에 그는 온갖 일이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다. 하나의 생명이 죽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생명이 이미 태어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스물이나 서른에 죽어 버린다. 그 시기가 지나면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의 반영(反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나머지 생애는 한갓 스스로를 모방하는 데 헛되이 쓰여 없어질 뿐이다. 그 옛날 그들이 살아 있던 때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사랑하던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기계적으로 또한 더욱 멋없이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