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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 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52 역자 해설 中


 이 페이퍼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zantzakis, 1883 ~ 1957)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호메로스(Homeros, BC 8세기 ?),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 ~ 194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을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1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인 '나'가 조르바에 대해 설명한 말이다. 여러 면에서 자신과 다른 조르바. 두 주인공의 다른 성향 속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 > 속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떠올리게 된다. 거칠게 표현해 '이성'에 가까운 아폴론을 '나'를 대입할 수 있다면, '감정'의 디오니소스에는 '조르바'를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함께 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러한 면에서 그리스 비극(悲劇)의 요소를 갖는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 예술가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非)조형적 음악 예술 사이에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그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나고, 이 짝짓기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의 비극을 산출한다.(p29)... 그렇다. 원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와 그 안에 사로잡혀 있는 자의 고요한 정좌가 아폴론의 형상 속에 가장 숭고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개별화의 원리가 깨졌을 때 인간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즉 자연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환희에 찬 황홀을 이 전율과 함께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p33)...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주의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 밖에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자연주의적 격정으로 변했음을 인지할 수 있다. _ 프리디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p111


 조르바를 디오니소스에 대치시키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면, 다음에 나오는 '개별화 원리의 부정'을 통해 공통점을 찾아보자. 여기에 더해 조르바의 연인인 오스탕스 부인에게서 여신(女神)아프로디테를 발견한다면, 애인인 조르바에게도 신격(神格)을 부여해 주는 편이 공정하지 않을까. 다소 억지스런 설정이지만, 이렇게 봤을 때 이들의 세계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이고, 올림푸스의 신계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들 밖의 세계는 다른 세계다. 수도원의 숨겨진 비밀과 과부를 마녀로 모는 어둠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주위는 분명 화자와 조르바의 세계와는 구분되는 중세(中世)시대다. 이렇게 본다면, 다른 세계는 고대와 중세의 대립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잠시 옆으로 새지만,  개인적으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과부의 등장 장면을 통해 영화 <말레나 Malena>에서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ci)를 떠올리게 된다. 많이 예쁘다.


 그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반쯤 미라가 되고 화장을 치적치적한 늙은 여자가 아니라, 그가 입버릇처럼 여자를 지칭할 때 쓰는 <암컷들> 전체였다. 개별적 존재는 사라지고 개별적 특징들은 말소되었다. 젋었느냐 늙었느냐, 아름다우냐 추하냐 따위는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차이일 뿐이었다. 모든 여자 뒤에는 위엄이 있고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68


 수도원은 성모의 과수원이 아니고 마귀의 정원이오. 가난, 겸손, 정절... 말로는 이게 수도승의 왕관이라고! 글쎄올시다, 돌아가라니까. 돈, 오만, 미소년! 이게 수도승들의 삼위일체올시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94


 1300 ~  1500년 사이의 유럽으로 돌아가 보자. 어떤 부류의 여성들이 마술에 가담했다고 고발당했던가? 혼인상의 지위가 알려진 한에서 보면 그녀들의 대부분은 결혼을 한 것 같다. 어떤 여성들은 마법적 치유를 행했고 약초를 다루는 데 능했으며, 어던 여성들은 실패한 산파 내지 치유자였다. 유산은 흔히 마술의 탓으로 돌려졌다. 어떤 여성들은 창녀나 늙은 포주였다.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알려진 여성들은 마술로 고발당하기도 쉬웠다. _ 슐람미스 샤하르, <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p477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숱 많은 머리채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검은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빗속을 달려가는 여자가 보였다. 탄탄하고 둥그스름한 몸매가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위로 드러나 고혹적이었다.(p51)...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바로 그날부터 과부는 끊임없이 내 고독한 가슴 앞을 지나며 내게 손짓하고 엉덩이를 흔들어 대었다. 낮 동안은 나도 강건했다... 낮 동안은 전력으로 싸웠지만, 밤이 되면 내 마음은 무기를 놓았고, 내면의 문이 열리면서 과부가 들어왔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59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낯선 크레타로 왔을까. 나는 사업에 성공해서 이상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막연한 꿈에 불과하다. 화자는 무엇인가 없애야할 것은 알지만, 그것을 넘어서 무엇을 건설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 '나'의 모습에서 혁명의 시대를 이끈 '계몽주의 이성'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주의 이성은 과연 중세 이후 근대의 방향성을 제시했는가.


 나는 낭만적인 구상을 하기도 했다. 갈탄광이 성공했을 때 얘기지만, 일종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한 형제처럼 지낸다. 나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 있었다. 새로운 삶의 누룩이 될...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29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재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을 빚는 재료인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4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비겁하게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고 싶어 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82


 '나'로 표현되는 그런 혁명과 새로움에 대한 낙관주의는 조르바를 통해 새로운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육체, 고통 등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눈을 뜨면서 새롭게 변화해간다.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가 이루어진 듯 보인다. 


 이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조르바는 두 개의 바위 사이에다 불을 피우고 음식을 장만했다.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 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6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조화가 이루어졌을까. 여기에서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을 들고오자. 베르그송이 말한 닫힌 도덕과 닫힌 종교, 그리고 열린 도덕과 열린 종교의 개념에서 본다면 낙관적이었던 화자의 생각은 이후 부정적인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을까. '열린 사회'의 기대에서 '닫힌 사회'의 인정으로.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사랑과 살과 고통의 절규로 설명한 대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겠다.


 닫힌 도덕은 부동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그 도덕이 변한다면, 그 도덕은 자신이 변한것을 곧바로 망각하거나 변화를 고백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떤 순간에서도 이 도덕이 제시하는 형식은 결정적 형식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도덕은 하나의 발동이고, 운동에의 요구이다. 그것은 원리상 운동성이다. 이 점에 의해 이 도덕은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할 것이다. _ 앙리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p82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살과 고통의 절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이런저런 연금술로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버린다면?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68


 이처럼 닫힌 도덕과 종교를 인정하고 이들이 사회를 보존하기 위한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제는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말한 구절들이 조르바와의 만남속에서 구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인식과 선/악에 대한 모호성 등.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영원히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85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 _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259>, p273  


 하느님도 신나게 놀고, 죽이고, 부당한 짓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일을 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꼭 나처럼요. 하느님도 입맛 당기는 걸 먹고 끌리는 여자를 취해요. 물 찬 제비 같은 여가자 지나가는 걸 보면 당신 가슴도 뛸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갈라지고 이 여자가 사라져 버립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누가 이 여자를 데려갔을까요? 행실이 참한 여자라면 사람들이 <하느님이 데려가셨다>라고 할 거고, 행실이 걸레 같은 여자라면 사람들이 <악마가 데려갔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두목,  몇 번이나 말했지만 다시 말하건대, 하느님이나 악마는 하나고, 똑같은 거예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16


 이 책에는 선의를 가진 말은 없다...  모든 것이 휴양을 취한다 : 차라투스투라가 했던 것처럼 선의를 허비하는 일이 어떤 휴양을 필요로 하는지 결국 누가 알겠는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일의 끝에 인식의 나무 아래 뱀으로서 누워 있던 것은 바로 신 자신이다. : 신은 이런 식으로 신적 존재로부터의 휴양을 취했던 것이다. _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선악의 저편>,p440


 이렇게 문제는 도덕(道德)의 계보학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노예의 도덕인 '선(善)'과 '악(惡)'의 개념을 갖는 것이 두목인 '나'라는 것과 주인의 도덕인 '좋음'과 '나쁨'을 갖는 것이 부하인 조르바라는 점이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과연 '나'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창조적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될 때 시작된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p367)... 원한을 지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적'을 상상해보자 - 바로 여기에 그의 행위가 있고 그의 창조가 있다 : 그는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殘像) 또는 대립물로 다시 한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고귀한 인간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고, 거기에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된다. _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10>, p371


 그렇지만, 나는 온전하게 노예의 도덕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세시대 마녀 사냥에 비할 수 있는 과부의 죽음 앞에서 이를 지켜주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봐야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힘 없는 자의 전형을 보인다. 행동에 의해 반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상에 의한 복수를 통해 손실을 벌충하려는. 결국 '나'는 새롭게 창조하지 못하고 현실 속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내용면에서도 <그리스인 조르바>는 비극이다.


 내 졸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습관에 따라 다시 한 번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피와 살과 뼈를 제거하여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들과 연관시켜 지금 일어난 일은 결국 필연적이었다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오늘의 비극은 우주적인 조화(調和)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라는 최종의 가증스러운 위안에 이르렀던 것이다.(p122)... 내게 시간이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냈다. 과부는 수천 년 전인 에게 문명 시대에 죽은 것이며, 크노소스의 고수머리 처녀들은 오늘 아침에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죽은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23


 결국, '나'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파산'이라는 외부 상황의 자극에 의해서 겨우 자유를 느꼈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불과했다. 때문에, 화자가 느낀 자유 안에서 진정한 해방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실어 내보낼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은 시험데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아지 않는 강력한 적 -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43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될 듯하다.  '나'로 표현되는 아폴론적인 요소(이성)와 '조르바'로 표현되는 디오니소스(감성)적 요소의 결합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된 내용이며, 공간적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세계와 주변 세계의 대립이 고대와 중세라는 시간적 갈등을 이룬다. 또한, 창녀로 몰린 과부와 수도원을 탈출한 수도사의 죽음이라는 시대적 모순에서 이성은 새로운 시대를 제시하지 못했고, 감성은 이를 막지 못하면서 구시대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여거에 더해 이들을 맺어주던 회사의 '파산'을 통해 이성과 감성은 분열되고 중세 이후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더 이상의 기회는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거칠게 이런 구도로 생각해 본다.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이후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步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7


 여태까지의 이야기에서 빠진 인물이 한 명있는데 바로 호메로스다. 호메로스의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전반에 걸쳐 조르바의 여행이야기가 회상되는 것을 보면 <오뒷세이아 ODYSSEIA>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나, 조르바 그리고 오르탕스 부인의 만찬에서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변화하는 오뒷세우스의 동료 모습이 떠올랐지만....  다소 두서없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억지스러운 부분도 분명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마른 목은 포도주로 축여 주었다. 음식은 곧 피로 변했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고, 우리 옆에 앉은 여자는 시시각각으로 젊여져,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22


 키르케는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등받이 의자와 안락의자에 

 앉히고 그들을 위해 치즈와 보릿가루와 노란 꿀과 프람네 산(産)

 포도주를 함께 섞어 저으며 여기에 해로운 약도 섞었으니,

 그들이 고향 땅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었소.

 그들이 그녀가 준 것을 다 받아 마시자마자 그녀는 즉시

 지팡이로 그들을 때리더니 돼지우리들 안에 가두어버렸소. _ 호메로스, <오뒷세이아제10권 233 ~ 238),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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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22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조르바를 제일 먼저 읽고, 그 다름에 니체랑 오뒷세이아를 읽었는데요. 겨울호랑이님의 읽기처럼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거 같아요.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도 편안히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0-09-22 19:49   좋아요 1 | URL
^^:) 네 읽을 때마다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이 고전의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작품이니 더 의미있게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행복한 저녁 되세요! 감사합니다.

2020-09-22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2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9-22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벨루치가 넘 예쁘다에 한표 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0-09-22 20:28   좋아요 1 | URL
^^:)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 중 한 명임이 분명합니다.

막시무스 2020-09-22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르바에 이런 깊은 철학적 세계가 있었다니 새삼스레 엄청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걸 대단한 열정으로 정리해주신 겨울호랑이님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크레타섬에 있는 카잔차키스 무덤까지 가봤는데 이 글보니 제가 정말 존경할만한 소설가를 만났었구나하는 자부심도 생기네요!ㅎ
즐거운 저녁시간 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0-09-23 04:4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을 정리했지만 작가는 더 많은 것을 작품 안에 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페이퍼에 담은 것은 일부이고, 그나마 정확하게 판단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부족하나마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작품은 분명해 보입니다.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
 
[eBook] 그리스인 조르바 - 열린책들 세계문학 021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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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비겁하게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고 싶어 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82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zantzakis, 1883 ~ 1957)의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의 '나'는 꿈과 이상에 가득찬 이성(理性)의 인간이다. 삼단논법의 논리학과 함께 불교의 자비심을 가지고, 갈탄 사업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갈망하는 근대의 인간이다. 그런 근대 인간의 전형인 '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물인 조르바를 만나면서 새로운 충격에 빠지고,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리스 조르바>의 큰 줄기다.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1

이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조르바는 두 개의 바위 사이에다 불을 피우고 음식을 장만했다.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 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6

많은 이들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절대 자유', '영혼의 투쟁'을 말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친 듯 어색하게 되버린 '나'의 변화에 더 눈이 간다. 조르바와 함께 지내며 새로운 충격을 받지만,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사막 여우와의 만남처럼 각자의 삶을 바꿀 정도로 이르지는 못한다.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조르바의 춤 zorba dance'을 '나'는 배우려고 했지만, 결코 조르바에게서 그 의미까지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 의미를 깨달았지만 선택하지 못한 쪽이었을까.

"두목, 이런 말을 해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가망 없는 펜대 운전사올시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그 아름다운 녹암을 봐야 하는 건데, 당신은 보지 않았어요."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49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이후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步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7

'내'가 조르바에게서 배운 것은 '절대 자유'지만, 절대 자유를 느끼는 영혼은 육체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불확실해질 수 밖에 없었고, 불안함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안정감을 위해 나는 이성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동경하는 삶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나. 사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인생의 문제라는 점과 운명이 던져주는 문제에 좌절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와 선조 격인 그리스 비극(悲劇)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된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영원히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85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9

우리는 이제 우리의 영혼을 신뢰하지 않는다. 영원한 구멍가게 주인인 이성이 영혼을 비웃고 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48

우리에게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그리스인 조르바>지만, 영화에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그건 안소니 퀸(Anthony Quinn, 1915 ~ 2001)이라는 배우의 압도적 연기에 몰입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사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별도로 있지만, 내용이 길어질 듯하니 이는 다른 페이퍼를 통해 풀어가도록 하고 일단은 주제 정도로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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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21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저는 이 대목을 오래 좋아했는데, 겨울호랑이님의 리뷰를 읽으니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

겨울호랑이 2020-09-21 18:10   좋아요 1 | URL
제가 원하는 것을 많이 선택하지 못해서 그 부분이 더 크게 보인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마지막은 신앙 고백이 되버리네요. ㅋ

하나 2020-09-21 18:1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고요. 그래서 계속 조르바 좋아하는 거 같고요. ㅋㅋ) 겨울호랑이 님도 웃기셔 ㅋㅋㅋ 요즘 북플 지성과 유머감각 필수인가 봐요! (분발해야지 🔥)

겨울호랑이 2020-09-21 18:17   좋아요 1 | URL
제가 보기엔 하나님(?)의 작명 센스가... 즐거운 저녁 되세요! 감사합니다. ^^:)

하나 2020-09-21 18:19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도 좋은 저녁 되세요! 용기가 필요한 시점에 조르바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

막시무스 2020-09-21 1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르바 너무 조아합니다!ㅎ
다음 페이퍼도 기대잔뜩 모드로 기다릴께요!ㅎ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0-09-21 18: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어려운 페이퍼가 될 듯 하니 마음을 비워주심이.... 행복한 저녁 되세요!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강대진의 고전 산책 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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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지금껏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을 읽으며 부끄럽게도 저 문장 너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킬레우스는 전체 24권 중 1권에서 아가멤논에게 화를 내고 자기 진영에 틀어박힌 후 제16권 파트클로스가 죽은 후에서야 싸울 준비를 하고 제20권에 이르러서야 겨우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가 아니다. 그보다 절대적인 용맹을 지닌 아킬레우스의 빈 자리를 메꾸는 인물들 - 불멸의 신들마저 격퇴한 디오메데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트로이아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헥토르이며,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건 메넬라오스와 겁에 질려 헬레네 곁으로 도망치는 파리스, 아가멤논과 아이아스 등 -의 공동주연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바라보면 작품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들은 필멸의 인간이기에 각자 한계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한계가 저마다 죽음의 원인이 된다. 죽음은 제약 조건으로 작용한다.

‘어둠이 눈 앞을 가리면‘ 인간들은 더이상 전장에 나설 수 없다. 때문에 항상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인간의 영웅들은 신들은 물론 반신반인의 아킬레우스에 비해서도 한없이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고 끊임없이 감정에 휩쓸린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가진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불멸의 삶을 부여받는데, 그것은 각자의 삶을 배경으로 한 작품(그리스 비극)안에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는 영웅 아킬레우스가 아닌 필멸의 인간들이 불멸의 인간으로 우리 곁에 남을 수 있는 이유를 작품 해설을 통해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 설명을 통해 우리는 영화 <트로이>의 왜곡된 이미지가 아닌 호메로스 작품 안에서 살아 있는 인물의 모습을 온전히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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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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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의해 태어난 괴물. 유명한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맹신에 대한 경고로 흔히 해석된다. 그렇지만, 작가인 메리 셀리와 어머니 이자 초기 여권운동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조금 다르게 읽혀야 되지 않을까. 로고스(Logos)가 만들어 낸 뮈토스(Mytos), 역사 속에서 타자로서, 역사 속에서 어둠에 쌓인 괴물(Monster)로, ‘~이 아닌‘ 존재로 설정된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여다 본다면, 이제까지 알던 것과는 다른 낯선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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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6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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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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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달린 드라큘라 The New Annotated Dracula>는 제목 그대로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 ~ 1912) 의 <드라큘라 Dracula>에 주석을 단 책으로, 필자의 세세한 주석들은 시대적으로 낯선 약 120년 전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생생하게 당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여름날 무더위나 식힐 요량으로 <주석달린 드라큘라>를 꺼내들고 읽었지만, 주석달린 책 덕분에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예를 들면, 작품 내에 '코레아 Korea'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문장을 살펴보자.


 한 사람 더 올 걸세. '코레아 Korea'(50)에서 만난 우리의 오랜 친구 잭 수어드 말이야. 우리 둘은 술 한잔 하면서 같이 눈물도 흘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고귀한 마음을 가진 어떤 여인, 가장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여인을 얻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친구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술도 한잔 할 걸세.(p175) <주석 달린 드라큘라> 中


 주석없이 읽을 경우 우리는 19세기 후반에 이미 우리나라가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으리라고 넘겨짚기 쉽지만, 엮은이의 주석은 이러한 오해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 덕분에 우리는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지만, 이와 비례하여 책진도에도 과부하가 걸림을 실감하게 된다. 


 (50) 여기서 모리스가 말한 코레아(Korea)가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는 모호하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에 '코레아 Corea'로 더 잘 알려져 있던 한국(Korea)를 지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리버풀에서 풀항해 아시아로 항해했던 코레아(Corea)라는 배도 있었다. 레더데일은 이 명칭이 어떤 선술집이나 남자들이 모이는 클럽을 지칭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p176) <주석 달린 드라큘라> 中 


 또한, 주석은 문학작품에 몰입 대신 분석적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이 때문일까. 공포문학의 선조(先祖)라 할 수 있는 <드라큘라>지만, 생각만큼 무섭지 않다. 책의 내용을 영화화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1939 ~ )의 <드라큘라 Bram Stocker's Dracula>을 최근에 봤을 때에도, 생각만큼 무섭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각적으로 더 자극적인 공포물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해서 그런것이겠지만, 이들 작품에는 후대 작품이 따라갈 수 없는 아우라(Aura)가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의 경우 게리 올드만(Gary Leonard Oldman, 1958 ~ ), 앤소니 홉킨스( Sir Philip Anthony Hopkins, 1937 ~ )가 펼치는 연기는 지금봐도 관객을 압도하고, 다른 색깔의 공포를 선사한다. 


 [그림] Bram Stoker's Dracula(출처 : https://www.pinterest.es/pin/398498267010086356/)


  공포문학으로서 <드라큘라>는 어떨까. 개인적으로 <드라큘라>가 주는 공포는 치밀한 묘사나 빠른 전개보다는 작품 내용 전달에서 느껴진다. 책에서는 내용이 등장인물들의 일기, 편지, 축음기에 남긴 메세지 등으로 전달된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마치, 소극장에서 드라이 아이스가 놓여진 캄캄한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 줄로 앉아 한 명씩 일어나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한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서로 충돌되는 내용도 많지만, 정리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다. 


 때문에, 우리는 안정적으로 작품 내용을 들여다 보는 대신 혼란에 빠진 이들의 어지러운 증언만으로 내용을 짐작해야 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어두운 방안에서 흐릿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추는 불빛 속에서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박쥐로 변한 드라큘라 백작을 찾기에 억지로 동참한다. 어느 누구도 드라큘라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힘을 통해 어렴풋하게 그에 대해 정리해 나갈 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작품 안에서 전해지는 공포가 드라큘라의 날카로운 이빨이나 기괴한 모습이 공포의 근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진정한 공포임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를 3인칭으로 객관화하여 보여준다면, 문학에서는 그렇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다른 의미에서의 공포를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계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 이러한 부분이 문학작품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한다.  비슷한 종류의 공포로는 내기 볼링을 칠때 상대가 터키(Turkey)나 파이브배가(5 Begger)를 쳐서 점수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심정이 있지 않을까.  


 또한, <주석달린 드라큘라>는 작품 해설을 통해 <드라큘라>에 대한 여러 해석들도 함께 제시한다. 작품에 담겨진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도 문학만이 갖는 멋진 매력일 것이다.


 스토커의 이야기는 여러 이론으로 분석할 만한 광범위한 자료를 제공한다. 켄 젤더(Ken Gelder)가 <뱀파이어 읽기 Reading the Vampire>에서 밝혔듯이,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 이 작품에는, "민족학, 제국주의, 의학, 생물학적 퇴화(그리고 반대로 진화)에 대한 담론, 관상학, ...  여성주의, ... 남성주의, 신비주의 등의 다양한 분야의 담론과 함께 여러 비평 주제와 비평적 접근의 예가 나오기 때문이다.(p714) <주석 달린 드라큘라> 中


 당초 리뷰에서 해당 내용을 정리해보려 했으나, 막상 해보니 일이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져 별도로 정리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다만, <드라큘라>가 단순한 고전 문학 작품이 아니라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 절정기에 당대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당시 싹트고 있던 새로운 사상의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것을 정리하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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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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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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