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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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두 가지 삶이 있었다. 그 삶은 그의 지인이나 친구들의 삶과 쏙 닮은, 조건부 진실과 조건부 기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비밀스럽게 흘러갔다. 몇몇 낯선 우연들이 겹치다보니, 말 그대로 우연이겠지만, 그에게 중요하고 흥미로우며 꼭 필요한 모든 것, 그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실할 수 있는 모든 것, 그의 삶의 알맹이를 이루는 모든 것은 다른 이들 모르게 이루어졌고, 진실을 가리기 위해 덮어쓰고 있는 그의 거짓과 껍데기, 가령 은행 업무나 클럽에서의 논쟁, '저급한 인종'이라는 말, 아내와 함께 기념일 파티에 가는 일만이 명백하게 겉으로 드러났다.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51

겉과 속이 다른 삶.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
겉으로 드러난 삶은 거짓이고, 속으로 흘러가는 삶은 진실이다. 거짓은 영원이며, 항구적이고 진실은 비밀이며, 은폐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속 구로프의 삶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반복 속을 살아가는 구로프는 영원 대신 자신에게는 진실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저급한 사랑을 선택한다. 그 사랑의 끝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지만.

이 얼마나 무의미한 밤들이고, 무료하고 시시한 날들인가! 얼빠진 카드놀이, 폭식, 만취, 그리고 끝도 없이 반복되는 늘 똑같은 얘기들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고 결국 우리에겐 날개도 없고 꼬리도 잘린 삶, 헛소리 같은 삶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39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구로프와 안나는 영원한 생명 대신 순간의 욕망을 선택한다. 그들의 선택의 주위로부터 지지받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이성보다는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청개구리'와 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기 때문일까.

조금만 지나면 해결책을 찾아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복잡하고 힘겨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57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마지막은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와 같은 행복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선택의 마지막이 불행의 시작임을 알리는 글에서, 구로프와 안나는 감정의 일상에서는 어떤 일탈을 꿈을 꾸게될 지 생각하게 된다. 권태로운 일상이라는 항구성에서 일탈의 씨앗이 있다면, 뜨거운 사랑이라는 일상에서는 어떤 일탈이 잉태될 수 있을까...

이런 항구성에, 우리들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아마도 영원한 구원의 약속, 지상에서의 삶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완성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_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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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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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니, 불쌍하기도 해라!  _ 에밀 졸라, <돈>, p178/278


 에밀 졸라의 <돈>은 19세기 프랑스 주식시장에서 일어난 자본(資本)들의 격돌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을 통해 제국(帝國)은 팽창되었으며, 승리의 결과로 얻어진 식민지에서의 이권(利權)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주가로 반영되었고, 그 결과로 주식시장에는 수많은 이들의 욕망이 밀어닥친다.


 시장이 개장된 이후, 군중은 개별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넘쳐흐르는 대하大河처럼 끊임없이 들이치는 물결 소리를 냈다. 이 엄청난 파도 소리 위로 공급과 수요의 불협화음, 즉 퐁풍 속에서 약탈에 나선 맹금들의 울음처럼 불안정한 음표로 고조되고, 잦아들고, 멈추고, 다시 시작되는 날카로운 외침이 지나갔다. _ 에밀 졸라, <돈>, p203/278


 <돈>에서는 주식시장에서의 인간 욕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미시적으로는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상황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두 개의 가치관이 충돌한다. 소비를 위해 주가를 부양하는 사카르가 매개 기능을 대표한다면, 로스차일드가의 모습이 비춰지는 군데르만은 저장 기능을 대변하며 또다른 워터루 전쟁을 치룬다. 


 50세의 정력적인 은행가 사카르는 집요하게 돈을 추구하지만, 재물을 축적하기만 하는 수전노가 아니다. 그가 축재에 몰두하는 진정한 이유는 재물을 소비하기 위해서, 그것도 과시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다(p268)... 유대인 은행가의 상징인 제임스 드 로트실드가 모델이라고 알려진 60대의 유대인 은행가 군데르만에게 가장 중요한 돈의 기능은 세번째 기능, 즉 저장 기능이다. _ 에밀 졸라, <돈>, p268/278


 <돈>에서 사카르와 군데르만의 자본전쟁이 사건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지만,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것은 사카르의 성공 과정에서 카롤린 부인이 제기하는 물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돈은 선(善)일까 악(惡)일까. 아니면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할까.  


 무한한 권력 속에서 덧없는 인간의 양심보다 더 높이 추앙받는 돈, 피와 눈물보다 더 높이 군림하는 돈, 돈이라는 제왕, 돈이라는 신!(p145)... 불현듯 카롤린 부인은 돈이란 내일의 인류를 자라나게 할 거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카르에 따르면 투기 없이는 풍요를 생산하는 거대 기업도 있을 수 없었고, 욕망이 없으므로 후세도 있을 수 없었다. 생명의 존속에는 이런 과도한 열정, 이처럼 천박하게 소진되는 욕망이 반드시 필요했다. _ 에밀 졸라, <돈>, p147/278


 사카르에게도, 군데르만에게도 돈은 수단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욕망으로 들끓는 시장에서 자신의 초심(初心)을 화학적 변화를 통해 잃지 않고 남아있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투자자가 초심을 찾는 그 순간은 이미 모든 게 무너지는 너무 늦은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주식을 갖고 있지 않는 순간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때가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욕망과 함께 돈을 손에서 떠나 보낸 후에야 비로소 현재가치와 미래가치의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에밀 졸라의 <돈>은 21세기 엔비디아, 테슬라 주식에 물려있는 이들에게도 매우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고전이라 생각된다...


 모든 게 너무 잘 나갈 때, 바로 그때 모든 게 무너지잖소. _ 에밀 졸라, <돈>, p20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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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크리스토프 1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32
로맹 롤랑 지음, 손석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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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상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는 표현하는 힘이 결여된 불행한 천재가 있다. 그의 명상은 남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그는 무덤 속으로 그것을 가지고 간다. 저 뛰어난 벙어리와 말더음이 일족의 일원인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말한 바와 같다."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13/613


  베토벤을 주요 모델로 만들어진 천재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의 일생을 다룬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처음 이 책을 읽었던 중학생 때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와 같은 주인공에게 많은 공감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 크리스토프가 가진 재능도 없었고, 그만큼 불우한 가정 환경도 아니었지만, 사춘기 시절을 보내며 주위와의 단절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만큼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오늘을 살아라. 하루하루에 대해서 믿음을 갖는 거야.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거지. 하루하루를 존경하는 거야. 특히 그것을 시들어 버리게 해서는 안 된단다. 그것이 꽃을 피우는 것을 훼방해서는 안 되는 거야. 오늘처럼 잿빛 하늘의 음산한 하루라도 사랑해야지. 걱정할 건 없다. 보려무나. 지금은 겨울이다. 모든 것이 잠자고 있지. 그러나 강한 땅은 또다시 눈을 뜰 거다! 억센 땅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믿는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기다리는 거야. 네가 만약 선량하다면 모든 일이 잘되어 가겠지.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290/613


 하루하루가 짙은 어둠에 싸여 있고 불안한 현실을 강렬한 의지를 갖고 헤쳐 나가는 모습이 어린 시절 인상 깊었다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주인공 크리스토프가 찾고자 했던 혼(魂)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자신이 눈 앞의 문제밖에 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살아가는 방향과 목적에 대해 더 관심이 있다는 다른 방증이 될까.


 크리스토프는 이러한 힘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일인의 혼에서 흘러나오는 이러한 음악의 힘의 은총을 똑똑히 느꼈다. 그 힘은 흔히 평범하고 조잡하기도 했지만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중요한 일은 힘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가득 넘쳐 흐른다는 일이다. 프랑스의 음악은 파스퇴르식 여과기에 의해 간단히 밀봉된 병 속에 한 방울씩 모아서 담겼다. 그리고 이 맛없는 물을 늘 마시던 자들은 독일 음악에 대해 거부하는 얼굴을 짓는다! 그들은 독일 정신의 흠을 잡아낸다!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586/613


 시간이 흐른 지금도 <장 크리스토프>는 내게 인생책이다. 그가 겪은 불행에 함께 마음 아파했고, 그가 점차 불행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쳤을 때 자신의 일인 듯 기뻤으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제는 책에서 보는 관점은 달라졌지만, 장 크리스토프가 성장할 수 있었던 힘과 그가 찾고자 했던 목적의 근원이 음악(音樂)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게는 무엇이 음악을 대신하고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한 답은 2권을 읽으며 천천히 생각해볼까 싶다...


 음악이 그러한 기적을 이루었다. 음악은 여러 가지 대상을 어렴풋한 분위기로 감싸 줬고, 모든 것이 거기에서는 아름답고 고귀하고 바람직한 것이 되어 있었다. 음악은 사랑하고 싶다는 탐욕스런 욕망을 영혼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숱한 사랑의 환상을 주어, 음악 자신이 파놓은 그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있었다. 어린 크리스토프는 감동으로 거의 넋을 잃었다. 음악의 온갖 대사와 동작과 악구(樂句)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_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 p68/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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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신앙의 와해는 레온하르트와의 대화에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것은 한갓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혼란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혼란은 그의 내부에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낯선 괴물을 느꼈다. 자신의 사상을 성찰하고 자신의 악(惡)을 똑바로 바라볼 만큼 용기가 없었다…… 악? 그것은 하나의 악인가? 권태, 도취, 유쾌한 고뇌가 몸에 스며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닳아빠지고 시든 영혼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좀더 젊고 힘찬 새로운 영혼이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일생 동안 육체가 변하듯이 영혼도 또한 변하는 법이다. 그 변화는 반드시 나날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이루어진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위기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낡은 껍질은 떨어져 버린다. 이러한 고뇌의 시기에 그는 온갖 일이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다. 하나의 생명이 죽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생명이 이미 태어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스물이나 서른에 죽어 버린다. 그 시기가 지나면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의 반영(反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나머지 생애는 한갓 스스로를 모방하는 데 헛되이 쓰여 없어질 뿐이다. 그 옛날 그들이 살아 있던 때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사랑하던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기계적으로 또한 더욱 멋없이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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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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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딸이여, 그대 이[齒]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도대체 뭔가요? 아니, 지금 이 안에, 화롯가에 있는 남편을 두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 말하다니! 당신의 기백은 언제나 믿으려 들지를 않아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23권 p349/410


 내겐 견뎌내는 기백이 있어요. 파도 속에서, 전쟁 속에서 나는 이미 숱하게 많은 몹쓸 것들을 겪어왔으니, 그 일도 그런 고생들을 따라 일어나야 하지요. 하지만 배[腹]라는 놈은, 수많은 재앙을 인간들에게 선사하는 그 저주받은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덮어둘 수가 없지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제17권 283-287, p266/410 


  '이[齒]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과 '기백'. 최근 출간된 <오뒷세이아> 번역본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다. 추천의 말에 새 번역의 예시로 설명된 '이[齒]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과 작품 전체에 반복되는 '기백'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 것은 단순한 번역의 생소함과 반복때문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책을 읽고 난 후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오뒷세우스와 구혼자들의 대결은 가정과 왕권의 회복이라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립과 타협이 불가능한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치의 충돌이며, 다른 한쪽이 소멸될 때까지는 끝날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의 타협안이나 대안을 거절한 채, 몰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 p401/410


 역자는 <오뒷세이아>를 통해 가부장제, 국가권력의 귀환, 계몽적 이성이 아닌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들의 충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같은 곳에서 암브로시아를 마시는 삶 대신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 임을 자각하며 인간으로의 각성을 통해 황금시대가 아닌 청동시대를 선택한 오뒷세우스의 모습에 주목한다. 


 인간이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영웅은 자신의 행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으로써 현존을 이어가게 되며, 그의 명성은 가객들의 노래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두 번째 죽음이자 완전한 죽음이며, 이러한 인간 현존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호메로스의 인간들이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85/410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삶을 선택한다. 전쟁을 피해서 신과 함께 불멸의 삶을 살기보다 명예를 선택하며 다른 모습의 영생(永生)을 누리지만, <오뒷세이아>에서 그는 생전의 선택을 후회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생의 삶을 유혹하는 여신 칼륍소를 뿌리치고 떠난 저승으로의 여행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선택이 현명치 못했음을 알 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고치지 않는다. 뒤이어 닥치는 고난. 그는 이를 '기백'으로 헤쳐나간다.


 '죽음을 두고 상심하지 마오, 아킬레우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제게 즉시 대답하며 말하더군요. '죽음에 대해 날 위로하려 하진 말아요, 눈부신 오뒷세우스여. 쇠잔해진 망자들 모두에게 왕 노릇 하느니 차라리 재산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땅돼기라도 부쳐먹고 살고 싶다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11권 485-491, p166/410


 딱하기도 하지, 내 새끼.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심한 운명에 매인 녀석아. 이건 제우스의 따님 페르세포네께서 너를 속이시는 게 아니란다. 다만, 죽게 마련인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면 마땅히 그렇게 되는 법이지. 일단 목숨이 뽀얀 뼈를 떠나게 되면, 힘줄도 살과 뼈를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이것들을 제압해버리고 만단다. 그러면 영혼은 마치 꿈처럼 이리저리 날아가게 되는 거야. 그건 그렇고, 너는 빛을 향해 최대한 빨리 몸부림치거라.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11권 216-223, p171/410 


 이[齒]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 그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 그 자체가 아닐까.

 발화(發話) 되기 전 머리 속에 자리한 수많은 생각들과 가슴에 머무는 무수한 감정들. 이들은 형상화되기 전 형체 없는 영혼과도 같은 수많은 가능태(可能態)다. 그것이  이 울타리를 빠져나오며 언어로 형상화 되는 순간. 언어는 사회적 책임을 부여받고 발화자는 이를 행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말한 사람으로서 명예가 달린 문제이며, 명예는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잊혀지지 않을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뒷세우스의 귀환은 상상력의 실현, 추상의 세계에서 현실화를 이루는 과정 그 자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때문에 구혼자들은 멸망당해야 한다. 


 호메로스의 민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민회에서 구혼자들은 이 소통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이로써 이들은 이타카라는 하나의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구혼자들의 전횡 아래에서 이타카인들은 마치 퀴클롭스들과 같이 상호 연대 없이 개체화되고 고립되어 간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95/410 


 혼돈과 잔치. 매일 매일이 다르지 않는 황금시대의 삶은 '추상의 구체화'라는 사회적 관계의 소통을 근원적으로 부정한다. 필멸의 인간이라는 한계를 망각하고, 필멸의 존재가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부정하는 그들의 삶은 단죄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처단이 바로 문명(文明)으로의 확실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일리아스>에서의 수많은 신들은 사라졌다. 대신, <오뒷세이야>에는 귀환을 방해하는 포세이돈과 귀환을 돕는 아테네. 방관하는 제우스와 경계를 오가는 헤르메스만이 등장할 뿐이다. 트로이아의 멸망은 신들의 시대의 종말이며, 이러한 멸망을 통해 얻어진 최후의 승자는 아테네가 상징하는 가치관이다. 아테네를 실현하기 위한 추상으로부터 구체, 현실로의 여행.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끝은 해피엔딩은 아닌 듯하다. 마치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철이의 마지막 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기듯.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산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55/410


 <오뒷세이아>는 무한의 평안함 대신 유한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 이번 독서에서 이 주제는 '추상의 구체화'로 내게 다가왔다. 다음에 이 작품에 깔린 수많은 결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마도 그건 그때 가봐야 알 듯 싶다...

희랍인들은 인간 위로 신이 있고 아래로 짐승이 있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금기로 여겼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이 모두가 어지러이 섞인다... (<오뒷세이아>에는) 대신 자신이 불가피하게 맞게 될 소멸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훗날 그는 구혼자들에게 보복하고 마침내 페넬로페를 만나게 된다. 20년간 기다려왔던 가장 벅찬 순간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들이 잃어버린 젊음을 말하고, 남편은 테이레시아스가 알려준 바 그대로 그에게 남은 노역과 죽음을 말한다. 어떤 해석가 말대로, 가장 격렬한 싸움을 통해 얻은 승리 뒤에 곧바로 찾아오는 변화와 죽음에 대한 이 깊은 시선, 예외 없이 한계가 드리워진 모든 인간 운명에 대한 이 도저한 시선은 진정 호메로스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타케)은 지금 오뒷세우스와는 정반대의 욕망을 가진, 신들처럼 살고 싶은 자들에게 장악되어 가고 있다. 그는 반드시 지금 돌아가야만 한다. 이제 그는 철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아버지의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가 떠나는 칼륍소의 정원은 봄에 피는 제비꽃과 가을에 피는 셀러리가 동시에 만발한 무시간의 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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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9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이네요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겨울호랑이 2024-04-29 14: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