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시골 학교로 발령난 지 벌써 2년이 지나갑니다. 덕분에 관사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씀도 드린 적이 있고, 학교의 정경도 여러 차례 올렸지요.

오늘은 지난 주말 찍었던 집 앞 시골가게 사진을 올려봅니다. 제가 사는관사로부터 직선 거리로 30미터 떨어져 있으니 이웃분이시지요. 시골 가게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십니다. 30여년 전, 학교 전교생이 300명 정도로 꽤 컸었던 시절부터 터를 잡으셨으니 말그대로 터줏대감이십니다. 어린이들을 손자손녀처럼 아껴주시는 그분들 모습 속에서 마을 공동체에서 아이들을 키웠던 예전 분위기가 이어옴을 느낍니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학교 아이들이 동전을 모아 과자와 사탕을 사먹는 시골가게(가게 이름도 ‘시골 가게‘)를 보면, 도심의 편의점 또는 할인마트에서 살 수 없는 추억을 느끼게 됩니다.

미세먼지가 있었던 지난 주말 시골가게의 꽃사진과 함께 제가 그곳에서 주로 사는 과자 사진을 올려 봅니다. (비닐안의 쫀쫀이는 연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사탕은 별로 안 좋아해서요.)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 제게는 추억의 가게가 옆에 있어 바로 이 순간의 삶이기도 합니다.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지 못해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추석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지금 사진을 올려봅니다.

ps. 시골가게에서는 추억을 팔지만 현재 가격으로 팝니다. 1980년도에 100원에 팔던 뽀빠이 가격이 지금은 1,000원이 되었습니다 ㅜㅜ. 과자를 발견할 때는 추억을 떠올리지만, 계산할 때는 매우 빠르게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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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9-27 21: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게가 사진으로 봐서 그런지 영화 세트장 같아요.^^
뽀빠이는 라면처럼 생겼네요. ^^

겨울호랑이 2017-09-27 21:57   좋아요 2 | URL
^^: 실제로는 더 예쁜데 제가 사진을 못 찍어 아쉽네요ㅜㅜ ‘뽀빠이 별사탕‘은 추억의 불량 식품이지요 ㅋ

2017-09-27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7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9-27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ㅜ 가게 이름이 ‘시골가게‘네요. 뭐지, 왜 감동적이지....

겨울호랑이 2017-09-28 04:07   좋아요 0 | URL
^^: 네 우리 모두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시키는 분위기가 있는 가게입니다.

jeje 2017-09-27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크롤 내리면서 아아 뽀빠이 사진도 있었으면 좋겠다...생각했어요 ㅎㅎ 정말 예쁩니다. 시골가게 라는 이름도 시골가게 풍경도 추억도.

겨울호랑이 2017-09-28 04:10   좋아요 1 | URL
jeje님 감사합니다.^^: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7-09-28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0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17-09-28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사탕 들어있는 뽀빠이 과자인가요?
정겨운 풍경과 다정한 사진에 추억이 새록새록~~
감사해요!!

겨울호랑이 2017-09-28 15:08   좋아요 0 | URL
^^: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억과 함께 즐거운 추석 연휴 되세요!
 

<태백산맥> 2권에 가장 큰 반전(?)은 정하섭과 소화의 관계설정이라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한국 현대사와 관련되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 이번 <태백산맥>2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이번 페이퍼를 정리해본다.


 1. 근친상간 문제 : 천륜(天倫)인가 아니면 인륜(人倫)인가


<택백산맥> 에서 소화는 정하섭을 사랑하고 있으나, 이들은 사실 이복남매 관계다. 그리고, 본인들은 이러한 사이를 알지 못한다. 이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소화의 어머니 월녀. 그렇지만, 어머니 월녀는 병에 걸려 이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이 사실을 딸에게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은 그녀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끈다.


 '어머니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부릅뜬 눈에 이상한 빛이 서렸다. 그녀는 몸이 달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 뒤여, 안 뒤여, 술도가 집 아들허고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 짓 혀서는 안 뒤여. 월녀는 목이 찢어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년아, 머시가 신령님 뜻이냐. 신령님이 천벌 내릴 죄럴 니년이 저질러뿌린겨. 이년아, 넋 나간 년아. 이 일얼 워째야 쓸 것이다냐. 월녀는 정신이 아찔아찔해지기 시작했다. 딸의 얼굴이 대중없이 흔들렸다. 숨길이 막혀왔다.(p67)'

 

가족간의 근친상간을 다룬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왕>을 살펴보면,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있다. 테바이를 휩쓴 재난의 원인이 그들의 근친상간임을 지목했을 때, 이오카스테 역시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자살하셨어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하셨으니, 그 참상은 알지 못하실 거에요. 하지만 저 불쌍하신 마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내가 기억나는 대로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겠어요. 마님께서는 미친 듯 현관에 들어서시더니 두 손 끝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으시며 곧장 결혼침대로 달려가셨어요... 그분께서는 누가 신호라도 하는 양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이중의 문으로 달려가시더니 걸쇠에서 빗장을 뜯어내며 방안으로 뛰어드셨어요. 그리고 방안에서 우리는 흔들리는 밧줄의 꼬인 고에 마님께서 목을 매달고 계신 것을 보았어요.(1236 ~ 1264)' <오이디푸스 왕>


[그림] 오이디푸스왕(르누아르) (출처 : http://www.bhgoo.com/2011/56460)

 

 '소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소화가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 앞으로 외롭겠다...... 무당 노릇은 할래나.......(p216)'


 <태백산맥>에서 소화는 자신이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어머지의 장례를 자신의 손으로 치룰 수 있었다. 


 '그분께서 마님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드시더니 자신의 두 눈알을 푹 찌르시며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예요.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된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1265 ~ 1274)'


 반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게 된다. 이처럼 같은 근친상간이 원인이 되었음에도, 다르게 처신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을 알았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것이다. 물론 자녀를 둔 오이디푸스와는 달리 소화는 후에 아이를 유산하게 되어 자식이라는 끈을 도중에 놓치기도 하지만. 우리가 천륜(天倫)이라고 부르는 도덕적 질서가 절대적인 것인가, 상대적인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2. 사회주의에 대한 상반된 시선


 작품 중 염상진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의 길이 우리 민족이 이루는 진정한 해방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염상진의 생각일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 이념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우리가 가야할 유일한 길이었다.


 '반도땅의 역사의 길이가 반만년(半萬年)이라고 했다. 그 장구한 세월을 무턱대고 자랑 삼으려 한다. 세월의 길이가 왜 자랑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배부른자, 인민대중의 생혈을 빨고 살아온 자들의 타령이고 최면술인 것이다. 그 긴 세월이 진정 자알이 되려면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갔어야 한다... 끝도 없는 착취의 역사일 뿐이었는데 그 세월을 무엇으로 자랑 삼는다는 것인가. 단군이 최초에 나라를 세울 때 그 건국이념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었다고 한다. 그 말은 누가 만들어낸 뻔뻔스런 잠꼬대인가... 해방은 반도땅의 역사 위에서 단순한 의미일 수가 없다. 자멸한 조선 봉건 왕조 위에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중차대한 기점이 바로 해방인 것이다... 남쪽 땅에는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지주계급과 친일 세력이 합세하여 남쪽만의 나라를 세우고 만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일 뿐이다.(p144)'


 반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 역시 <태백산맥>에서 소개되고 있다. 유물론(唯物論)을 내세우는 이념(理念)으로 '종교를 부정하는 종교'를 바라보는 스님의 소리를 통해 공산주의의 한계 역시 제시된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도의 대상이 된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공포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포가 다른 편 역시 극단으로 모는 것은 아닌지.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지주'에 불과했다.


 '불심 없는 인간, 아니 불심 없는 남자의 집단이 얼마나 무서운 동물의 집단인가를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그들의 집단이 내세우는 유물사상(唯物思想)이란 애당초 불심 같은 것은 완전히 묵살하고 있었다. 오로지 물질만을 좇는 그들은 앞뒤를 분간하지 않는 살인집단이었다... 그들 집단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을 위한 새 세상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살인을 너무나도 쉽게 저질렀기 때문이다. 물질을 탐한 지주들이 야수만도 못하다면 그 물질을 빼앗기 위해서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그 집단도 결국은 지주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p275)'


3. 분단의 이유


 <태백산맥>에서는 곳곳에서 김범우, 염상진, 서민영의 목소리를 통해 당대의 현실인식이 제시되고 있다. 마치 영화에서 정면 클로즈업 샷으로 관객들을 향해 말을 하듯, 독자들에게 상황설명을 하는 대목이 여러 곳에서 표현되고 있고, 이는 우리의 현대사 인식을 새롭게 한다. 


[사진] 정면 클로즈 업 샷 :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 中


 '연합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은 특히 일본 문제에 있어서는 발언권이 절대적이었지요. 일본을 도맡다시피 해서 싸운 것이 바로 미국이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일본 열도를 독일식으로 나눠먹지 않고 독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건 태평양으로 뻗치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는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당연히 한반도 분할이 필요했고,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 쪽에 전적이 미미한 소련은 한반도의 반이나마 차지하는 데 동의한 것입니다.(p303)'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아직도 '종북', '빨갱이' 등의 문제에 좌우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답답함 역시 느끼게 된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일제 식민지 시대 이후 모든 문제가 지금도 진행형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해방은 식민지 시대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식민지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대에는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적 명제나 자존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이즘"이라는 것에 최면이 걸리고 마취되어 우리끼리 적을 삼아 살육을 자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즘을 일단 정치도구화한 이상 상호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실현을 위한 상호 상승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생리이며 힘의 역학입니다. 벌써 서로를 괴뢰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하고 파렴치한 짓들입니까. 그러나 그 뻔뻔스러움과 무모함과 이율배반이 곧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비판이나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 획일적 모순의 질서에 줄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길입니다.(p304)'


'최익승은 "빨갱이"란 말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그 말은 지칭(指稱)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호칭(呼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공격의 무기였다. 지칭이든 호칭이든 그 말이 되풀이될때마다 기묘한 마력으로 육박해왔다...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냄새나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 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p20)


3. 소화(素花)와 소화(小花) : 흰 꽃과 작은 꽃


 '정 참봉은 월녀를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월녀는 그 품에서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을 흘렸다. 정 참봉이 조끼주머니에서 꺼낸 한지에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소화 素花"였다.(p83)'


 <태백산맥>을 읽다보니 '소화'라는 여주인공의 이름에 관심이 가게 된다. '흰 꽃'이라는 뜻을 가진 '소화'라는 이름을 통해 내가 가진 종교적 배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톨릭 성녀(聖女) '소화 데레사'를 연상하게 된다.


 '리지외의 테레스(데레사)(Therese of Lisieux, 1873년 1월 2일 ~ 1897년 9월 30일)는 프랑스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로, 오늘날 널리 존경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본명은 마리 프랑수아즈 테레스 마르탱(Marie Francoise-Therese Martin)이며, 리지외의 성 테레스(Saint Therese of Lisieux)라고도 한다. 예수의 작은 꽃, 단순히 작은 꽃(소화, 小花)이라고도 불린다. 테레스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알랑송 루 세인트 블레이즈(Rue Saint-Blaise)[1]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르멜회 수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14세 때 가르멜회 입회를 바랐지만, 나이를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다. 1889년 4월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아기예수의 데레사"라는 이름을 받는다. 1894년 7월 28일 아버지 루이가 사망하였다. 테레스는 1897년 9월 30일, 결핵으로 2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신령님을 모시는 무녀(巫女) 소화(素花) 와 예수님을 따랐던 소화(小花)의 삶은 그들의 종교, 나라가 달랐던 것만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각자의 위치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신(神)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종교적 인간의 원형(原形)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성녀 소화 데레사(출처 : http://www.carmel.kr/Theresa)


<태백산맥>에는 한국 현대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대의 세계사적인 흐름과 개인사적인 내용, 개인의 내면이 서로 잘 조화되면서 현실을 그려내고 있기에 <태백산맥>이 우리시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닐까.


ps. <태백산맥>의 향토성은 전라도 사투리에서 배어나오는데, <태백산맥>을 표준영어로 번역한다면 그 맛이 상당히 반감될 듯하다. <태백산맥>의 번역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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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5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7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7-09-25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에서 이렇게 여러 가지를 뻗어내시다니..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김범우, 염상진 넘 멋져..!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ㅋㅋ
오.. 영어라니 그 구수함을 번역하는 게 어찌 가능할까요. 그 감칠맛나는 욕설은 또.. 전혀 상상이 안 되네요;;

겨울호랑이 2017-09-25 22:03   좋아요 1 | URL
^^: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가지를 썼습니다만,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맥을 남쪽에 있는 벌교까지 끌어내린 작가만 하겠습니까 ㅋ 대하소설이다보니 이런저런 감상거리가 떠오른 것 같습니다. 언어에 혼이 실렸다는 것을 「태백산맥」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외국어교육도 우리 정서를 외국인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는 능력향상으로 초점을 두어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cyrus 2017-09-25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복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막장 드라마의 기본 요소는 간혹 문학작품에서도 나오는군요. ^^;;

겨울호랑이 2017-09-26 06:47   좋아요 0 | URL
^^: 저도 많은 문학을 접하지 못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도저히 의지만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 중 하나가 우리가 ‘인륜‘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AgalmA 2017-09-26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화론을 알면 알수록 재밌는 것이 근친상간이 진화생물학적으로 돌연변이를 많이 만들어내죠. 결국 자멸로 향하는 길. 현실 속 근친상간은 윤리적 터부로 굳어졌지만 생물학적으로도 나쁜 결과란 말이죠.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의 금지는 사회학적 과정이었다고 봤지만서도.
현재의 국가 대 국가도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볼 것만도 아닌 것이 생존을 위해 무리 생활을 하던 동물적 생활방식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봐요. 근대 사회, 도시의 탄생 등 거창하게 말해도 어쩐지 그 본질은 원시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차원적으로 보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6 08:05   좋아요 1 | URL
^^: AgalmA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물학적으로 근친상간을 통한 종족의 번식은 나쁜 형질의 유전자가 도태되지 않고, 계승/강화되면서 부작용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생물들은 근친교배를 피하게 되고, 이는 결국 교류의 확장 또는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 같네요. 이러한 부분이 인간의 집단인 국가로도 확대된다고 말씀하신 의견에 공감합니다. 아울러, 이렇게 극단적으로 확장되어 보편성=특수성인 되버린 시점, 더이상 확장될 수 없는 시점이 되면 그때부터 쇠퇴가 시작된다고도 생각되네요.^^:
 

며칠전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바흐>를 샀습니다. <음악의 기쁨>을 읽으며 여러 곡을 듣던 중 다른 작곡가들보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의 곡이 편하게 제게 다가오더군요. 그러던 중 바흐의 작품이 소개된 책이 마침 눈에 띄어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리는 중에 나가는 속도보다 들어오는 속도가 몇 배로 빠르니, 우리나라 가계 부채 증가(2017년 현재 가계부채 약 1,400조)하듯이 책들이 쌓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평소 그물망을 쳐 놓고 리스트(list)에 올라와 있지 않은 책들은 마음에 들더라도 일단 넘기고 있습니다. 그런 후 다음에도 그녀(?)가 중고서점에 있으면, '우린 운명이야'하며 사고 있지요. 이정도 만남은 아내도 이해해주지 않을까요?ㅋ 오늘은 <바흐>에 있는 곡(曲) 중에서 브란데부르크 협주곡1번을 올려봅니다.


브란데부르크 협주곡 제1번 F장조 BWV1046 Brandeburgische Konzert Nr.1E-Dur BWV1046


악기 편성 : [독주악기군] 오보에3, 파곳, 코르노다캇차(사냥용 호른2), 비올리노 파콜로(바이올린) [협주악기군] 바이올린 2부, 비올라, 첼로, 통주저음


제1악장 [알레그로] F장조, 2/2박자. 무엇보다도 <관혁악 모음곡>의 도입악장을 생각나게 하는 대규모의 악기 편성이 특징적이다. 리토르넬로 형식이지만, 솔로에 투티주제의 동기가 사용되고 있어서 투티와 솔로의 선율적 대비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당당한 악상과 고심하여 다듬은 듯한 치밀한 악곡 구성이 아주 매력적이다.


제2악장 [아다지오] D단조 3/4박자. 역시 동일 주제의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파시칼리아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 애가풍의 선율이 독주 악기 사이에서 계속 연주되고 있는데, 그 선율이 파사칼리아 주제의 장식형이다.


제3악장 [알레그로] F장조, 6/8박자. 이 악장은 나중에 고쳐쓴 것 같다. 역시 리토르넬로 형식이며, 투티와 솔로의 대비가 한층 명확해져 있다. 6박자이기도 해서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쾌하게 흐른다.


제4악장 [미뉴에트] F장조, 3/4박자. 지금까지의 세 개의 악장으로 끝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두 개의 트리오와 폴로네즈가 딸린 미뉴에트가 계속된다. 론도풍으로 네 번 연주되는 미뉴에트는 투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특정한 악기로만 연주되는 솔로풍의 두 개의 트리오나 폴로네즈와는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두 개의 오보에와 파곳에 의한 제1트리오, 현악 합주만으로 연주되는 폴로네즈, 두 개의 호른과 유니즌의 오보에, 이처럼 이 세가지도 서로 두드러지게 대조적이다. 

    

마음에 드는 바흐의 곡에 대해 좀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입니다. 비록 지금은 조사만 이해하지만요.( 이는 ** 형식이며, 두 개의 ***와 ****가 딸린 *****가 계속된다.) 계속 듣다보면 수준이 나아지겠지요. 이웃분들 모두 즐거운 일요일 아침 되세요^^:


2. 헤겔의 미학(美學)

 

바흐에 대해 찾아보던 중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이 바흐를 비판했다는 내용의 동영상이 있어 추가로 옮겨봅니다.



그렇다면, 헤겔은 음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찾아보게 됩니다. <헤겔의음악미학>을 읽으면 좋겠지만, 제게는 없는 책이라 대신 <헤겔 미학3>의 내용을 옮겨봅니다.(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좀더 자세한 것에 접근하려면 다음과 같은 면들을 구분해야 한다. 첫째, 악곡에 적합한 가사의 특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말의 특정한 내용은 음악적인 표현에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로, 악곡에서 새로운 요소, 즉 특성을 띤 낭송조가 덧붙질 때 우리는 이것과 앞서 이미 선율 속에서 발견한 원리와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 셋째, 이런 식의 음악적 표현방식 속에서 가장 탁월한 위상을 차지하는 장르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p407)'


'좋은 가사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것은 내용은 참되고 건실해야 하다는 점이다. 만약 내용이 지루하고 통속적이거나 공허하고 부조리하면 숙련되고 심오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없다.(p407)... 내용은 그 특징에 맞게 선율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가사는 진지한 심정, 희극적인 것, 비극적이고 위대한 열정, 종교적인 표상과 감정, 인간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위력과 운명을 내포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 작곡가도 역시 거기에 심혈을 기울여 전심으로 그 내용을 철저히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p410)'


<헤겔 미학>에서는 직접적인 바흐에 대한 비판은 언급되어 있지 않네요. 다만 헤겔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음악의 조건과 음악가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직접 자신을 위해 울리면서 스스로 인지하는 가운데 자족하는 정신이요 영혼이다. 그러나 순수예술로서의 음악은 곧 정신적인 측면에서 열정을 마친 마치 디오니소스신처럼 토해 내면서 혼란스러운 난무 속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절망적인 분규에 빠지지 않게 하고, 기쁜 환호와 극단적인 고통 속에도 자유로이 주입함으로써 열락을 느끼기 위해 이의 열정적인 표현을 규제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진정 이상적인 음악을 한 사람으로 팔레스트리나(1523 ~ 1594), 뒤란트(16894~1755), 로티(1667 ~1740), 페르골레시(1710 ~ 1736), 글룩(1714 ~ 1784), 하이든(1732 ~ 1809), 모차르트(1756~1791) 등을 들 수 있다.(p401)'


 '디오니소스'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공식처럼 '디오니소스-아폴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따라 나오게 되겠지요. 또한, 니체의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비판'도 나올 것이며, 바그너 작품 중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와 관련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야기도 굴비 엮듯이 나오겠지만, 다 언급했다가는 이번에는 중편소설을 쓰게 될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일요일이잖아요^^: 그럼 정말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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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7-09-24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집니다. ^^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는 소중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흐편을 비롯해서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쭉 읽기보다는 해당 곡을 찾아보는, 사전처럼 활용합니다.

중편소설 기대하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9-24 16:5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저도 좋은 책이라 생각이 드네요. 음악 애호가분들은 분명 소장 가치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좀더 깊이있는 독서 후 중편소설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는 철학자 강신주(姜信珠)가 생각하는 노자(老子)사상과 장자(莊子)사상이 다름을 주장하고 있는 책이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하나인 <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내용을 보다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프롤로그에 책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어 이를 옮겨본다.

 

 '통치자는 피통치자에게 노동력이든 재화든 수탈하고, 그걸 (재)분배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수탈과 재분배의 메커니즘이 바로 국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수탈과 재분배의 메커니즘이 바로 국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위대함, 아니 무서움은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포착하여 그걸 싸늘한 눈으로 통치자의 정치에 응용하려는 데 있다. 바로 이 수탈과 재분배의 메커니즘을 노자는 "도(道)"라고 불렀던 것이다.(p13)... 나는 장자의 속내는 타자와의 소통에 있다고 생각했다...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했던 치열한 자기 수양은 타자와 소통하려는 열망에 종속된다는 것, 내 첫 책이 밝히려고 했던 건 바로 이것이다. 운 좋게도 타자와 소통했다면, 그 흔적도 남을 수밖에 없을 터. 그것이 바로 장자의 머릿속에 있던 "도(道)"였다. 바로 여기에서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그러니까 "길은 걸어가야 이루어진다"는 장자의 사자후가 포효하게 된다.(p12)'


 저자는 2004년에 펴낸 <노자 :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을 통해 노자 사상에서 파시즘, 제국주의를 끌어내고 있다.(이 책은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제의 변형>과 <노자 :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의 합본이다.) '무위(無爲)'에서 에떻게 '제국주의 帝國主義'가 나올 수 있는지 결론만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지만, 이 책은 이에 대한 논리를 서술하는 책이다. 이하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 책에서 <노자>사상이 어떤 방식으로 제국주의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 서양철학과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려고 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도덕경>에 대한 다른 해석과 함께 개인 의견을 적었는데 미리 말하자면 내용이 많이 긴 편이라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까지 읽으셔도 읽으시는 것을 권하고 싶다.  


1. <도덕경 道德經> 42章


 가. 개별자를 통해 도(道)를 끌어냄 


'백서본 5장(왕필본 42장)에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만큼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해 노자와 장자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대립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p51)'


 저자는 먼저 도덕경 42장을 통해 노자 사상과 장자 사상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노자는 하나, 둘, 셋의 개별자들이 서로 모순되지만, 조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질서인 도(道)를 도출한다. 이는 수학적으로 1+1=2, 2+1=3... 무한수(無限數)를 도출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연속된 수(數)의 확장을 통해 만물을 설명하는 일정한 법칙(자연법칙)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이해가 된다.(더하는 수의 동일성(同一性)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인지소악, 유고, 과, 불곡, 이왕공이위칭. 


도는 일을 내고, 일은 이를 살리며, 이는 삼을 기르고, 삼은 말물을 이룬다. 

만물은 음을 진 채 양을 품고 있는데, 두 기가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 것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특히 고(孤)와 과(寡) 그리고 불곡(不穀)이지만, 

오히려 왕은 그것들도 자신의 호칭을 삼는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첫 번째 단락이 개체의 발생론을 피력하고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은 군주의 수양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단락이 두 번째 단락의 근거로 제안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전체 5장의 구조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첫번째 단락에 따르면 도는 하나(一)를 낳고, 이 하나(一)는 둘(二)를 낳는다. 그리고 이 둘(二)은 셋(三)을 낳고 최종적으로 이 셋(三)이 만물을 낳는다... 난해해 보이는 하나, 둘, 셋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노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有名)"논리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반복하자면 노자는 이 세계를 도에 의해 설명하고자 했던 사변적 형이상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아주 재빠르게 만물의 층위로 곧바로 미끄러져 나가버리는 것이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별자들은 상호모순적이고 대립적인 이중적 규정의 존재이며 또한 이런 이중적 규정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p53)


'노자의 발생론은 역으로 읽어야 한다. 즉 만물은 상호모순적인 두 계기로 규정되지만 아울러 이런 모순적인 규정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부터 노자는 셋, 둘, 하나라는 추상적인 계기를 발견해낸다. 그리고 결국 만물들을 규정하는 모든 대립과 조화의 계기는 오직 내재적 원인(causa immanens)으로서의 "도(道)"에 의해 조율될 수 밖에 없다고 발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별자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층위에서 "도"를 발견한 다음에 이것을 발생론적 도식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첫번 째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p54)'


나. 군주(君主), 국가(國家) 개념의 도출


이어서 저자는 군주(또는 국가)의 개념과 노자 사상을 결합시킨다. 사실, 이 지점이 노자 사상에 대한 해석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는 지점이다. 본문에서 '而王公以爲稱'이라고 하는 부분에 있어 저자는 '왕=군주'로 해석을 하고, 이를 통해 "짐이 곧 국가다(L'Etat, c'est moi)"라는 말과 유사하게 이로부터 '국가' 개념을 끌어낸다. 이제 논의는 '국가'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상의 자연법칙과 사회법칙과의 연결고리는 다음 주장의 주요한 논거가 된다.

 

 '노자는 아주 재빠르게 "군주"의 논의를 도입한다. 노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개별자들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도"에 대한 논의와 "개별자(萬物)'의 규정에 대한 논의는 군주에 대한 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안된 근거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 "도"와 "개별자" 사이의 관계는 "국가"와 "군주" 사이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안된 말이다.(p54)... 국가는 군주의 내재적 원인이고  따라서 군주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인식은 국가의 기능과 위상에 대한 인식으로 파생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 점에서 노자에게 "도"와 "개별자" 사이의 인과관계는 "국가"와 "군주"사이의 인과관계의 "내재적 문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p55)'


2. <도덕경 道德經> 77章


제77장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有餘者損之,

천지도, 기유장궁여, 고자억지, 하자거지,유여자손지,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부족자보지, 천지도손유여이보부족,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인지도칙불연, 손부족이봉유여, 숙능유여이봉천하, 유유도자,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견현.


자연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 같구나! 높으면 눌러주고 낮으면 들어준다. 

남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준다. 자연의 도는 남은 것은 덜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데, 인간의 도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데서 덜어내어 여유 있는 쪽을 봉양한다.

누가 남는 것을 가지고 천하를 봉양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도를 체득한 자(聖人)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나은 점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42장에서 '국가'의 개념을 끌어냈다면, 이 국가가 어떤 기능을 하는가는 77장에서 살펴본다. 77장에서 언급된 '성인(聖人)'은  저자에게는 '재분배자'로서의 권력이 된다. 이로써, 성인은 더이상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도(道)'와 결별하고 하나의 구조(structure)가 되어버린다. 


'백서본 42장(=왕필본 77장)은 빛을 발휘하고 있다. 이 백서본 42장에서 노자는 국가의 기능에 대해 자신의 사유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은 높은 것을 누르고 낮은 것을 올리고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채우는 데 있다. 그런데 노자는 이런 자연의 법칙에 비추어 인간 사회 법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 부유한 사람에게 더해주는 것이 법칙인 것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노자는 이상적인 통치자, 즉 성인(聖人)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노자의 이상적인 통치자(=聖人)는 기본적으로 "재분배(redistribution)"가 국가의 핵심 기능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p117)'


'노자 철학의 탁월한 점은 그가 국가를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어나는 교환의 관계, 즉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에 입각해서 파악했다는 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국가를 어떤 신비한 무엇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경제적인 기구(economical mechnism)로 파악했다는 것이다.(p125)'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노자와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결부시킨다. 이제, 노자사상은 자본주의 경제사상으로 변화되었다. '자본주의 사상'으로 변신한 이상 '제국주의'로의 이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지닌 중요성은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교환 관계로 통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진에 따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통한 우월성 확보, 이어서 약탈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위해서 수행되는 재분배의 과정을 통해 작동한다. 결국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가 옳다면, 국가의 교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는 여러 모로 구별할 수 있지만, 자본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p126)'


3. <도덕경 道德經> 80章 : 국가의 발전(by 겨울호랑이)


 책에는 소쉬르,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 많은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파시즘과 제국주의로의 이행을 설명한다. 그래서, 책과는 다른 방법으로 발전단계를 설명해본다. 이하 체제의 변화는 <도덕경>, <국가>, <정치학>,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백성들이 국가를 이루고, 제국을 이뤄서 붕괴되는 것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구성해봤다. 논의의 서두는 도덕경 80장을 먼저 서두로 잡았다. <도덕경 80장>이 백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기도 하지만, 이는 노자 사상과 제국주의가 결합되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의 제기이기도 하다. 나라를 적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하라는 것(小國寡民)은 <도덕경>의 문장 그대로다. 지극히 반(反)제국주의 적인 내용을 본문으로 확인하면서도, <도덕경>을 현대 사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규모를 팽창시켜가는 제국주의 사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도 생각해볼 과제라 여겨진다.


<도덕경 제80장>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소국과민, 사유십백지기이불용, 사민중사이불원사,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수유주여, 무소승지, 수유갑병, 무소진지,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사인부결승이용지,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낙기속,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많은 도구가 있더라도 쓸 일이 없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생각하여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더라도 탈 일이 없고 군대가 있더라도 펼칠 일이 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결승 문자를 회복하여 쓰게 한다. 그 음식을 맛있어 하고

그 옷을 곱다고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해 하고 그 풍속에 기꺼워한다.


 이와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부족함이 생겨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점차 나라는 커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더 많은 사람이 생겨남에 따라 부족함은 점점 더 커지게 되고 그 결과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전쟁을 통해 나라와 나라가 병합되고 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플라톤(Platon, BC 427 ~ 347) 이전 세대에서 '아테네 제국'과 이를 낳은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 ~ 429)'를 통해 역사 속에서 소국(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의 발전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사람들에겐 많은 것이 필요하니까, 많은 사람이 동반자 및 협력자들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생활공동체(synoikia)"에다 우리가 "나라(polis)"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네..."최소 한도의 나라(he anankaiotate polis)"는 넷 또는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지겠네.(2권 369b ~ 369d)'


 '다시금 이 나라를 한층 더 크게 만들어야만 되네. 앞의 그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지 못한데, 이는 이미 그 규모에서 확장을, 수에서 충만을 보아야만 하겠기 때문일세...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다보면 영토 또한 그때에는 그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이젠 충분하기는커녕 아마도 작아 빠지게 될 것세. 아니면 어떻다고 말할까?... 우리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 할 경우에는, 우리로서는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만 되겠고, 다시 그들은 그들대로, 만약에 그들 역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를 벗어나, 재화의 끝없는 소유에 자신들을 내맡겨 버리게 될 때는, 역시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되지 않겠는가? 그 다음에는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되겠지.(2권 373d ~ 373e)'



[지도]아테네 제국(출처 : http://kalnaf.egloos.com/m/3379624)


 페리클레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다스린 50여년의 시간동안 아테네는 황금시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멸망의 씨앗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그에 대해 언급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페리클레스 편을 살펴보자.


 '제 10권인 이 책에서 나는 페리클레스와, 한니발과 처절하게 싸운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의 생애를 기술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탁월함은 서로 비슷하다. 특히 온유함과 올바름, 백성들과 동료 관리의 어리석음을 참는 능력에 힘입어 두 사람은 그들의 조국에 크게 이바지했다.(p186)... 그가 죽은 뒤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아테나이인들은 곧 그의 가치를 알게 되어 그를 몹시 아쉬워했다... 남들의 시샘을 사 독재정치니 참주정치니 하고 비난받던 그의 권력이 국가를 지켜주는 보루였음이 밝혀진 셈이다. 왜냐하면 치유할 수 없는 화근으로 자라나지 못하도록 그가 늘 억제하고 눈에 띄지 않게 했던 온갖 부패와 해악이 이제는 국가를 덮쳤기 때문이다.(p241)'


 페리클레스 치세(治世) 동안 번영의 시기를 맞이했지만, 그의 치세는 '참주정치'라는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정체의 한계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미 대내적으로는 정적(政適)과 민중들의 견제, 대외적으로는 외국과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며 결국, 아테네 제국은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BC 431 ~ 404)'을 통해 무너지는 결과를 맞게 된다.

 

'참주정체도 다른 정체와 마찬가지로 참주정체에 반대하는 더 강력한 국가가 있을 경우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무너질 수도 있다. 이념이 상반된 까닭에 그 국가는 참주정체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럴 힘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마련이다... 왕정과 귀족정체는 정체(政體)가 다르기 때문에 참주정체를 적대시한다. 그런 이유에서 라케다이몬인들은 수많은 참주정체를 해체했고, 쉬라쿠사이인들도 좋은 정체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했다.(1312a39)' 


4. 노자 사상 = 제국주의 사상(?)


 기본적으로 이 논의의 시작은 '왕=군주'라고 해석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앞서 책의 내용으로 볼때 왕을 군주로 해석하고 이로부터 국가가 도출된 것으로부터 '제국주의' 개념이 나왔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여기에서 출발점을 달리해서 <노자>를 살펴보자.


<도덕경 제3장>


爲無爲 위무위

 

則無不治 즉무불치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노자 사상을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서처럼 경제학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은 '무위=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출발한다. 시장의 질서에 맡기도록 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내용은 '무위'사상과 의미면에서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security)을 위해서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gain)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p552)'


 추가적으로, 최근 신자유주의자들이 규제철폐를 외치며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는데, 이는 <국부론>의 전제가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임을 외면하는 논리다. <도덕감정론>에서 애담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는 타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는 인간을 전제하고, 이러한 인간의 감정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경제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이 남용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 selfish)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 :nature)에는 분명히 행동원리(principles)가 존재한다. 이 행동원리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기 그 행운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을 얻은 타인의 행복이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연민(憐憫 : pity)이나 동정심(同情心 : compassion)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드는 종류의 감정이다.(p3)


이렇게 본다면 '도(道)'를 통해 체제와 권위를 부여하기 보다는, 선(善)하다(또는 동점심이 있다)는 인간의 본성(本性)믿고, 일체의 간섭을 배격하자는 주장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다시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로 돌아와서 '노자 사상'에서 '제국주의'를 끌어낸 관점은 충분히 의미있고 즐거운 지적 과정이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도덕경> 42장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자연질서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되는 이 부문에 대한 설명은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 ~ 1981)의 <老子 : 빛으로 쓴 얼의 노래>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자> 42장에 해당되는 한 구절의 설명을 보자.

 

'萬物負陰而抱陽 만물부음이포양. 거의 모든 생물들은 향일성(向一性)을 지니고 있다. 짐승은 암놈이 숫놈을 지고 숫놈이 암놈을 안는다. 이 세상은 거의 모든 것이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서양 문화는 양(陽)의 특성이 음의 특성을 월등히 능가하는 문화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에는 양이 극에 이르면 음으로 전환되고 음이 극에 이르면 양으로 전환한다고 하였다. 스티븐 호킹이 말한 특이점(特異點)도 양이 음으로 변하고 음이 양으로 변하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의 법칙이 인연(因緣)의 법칙이다. 토인비의 도전 응전의 법칙이나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도 같은 상대성의 법칙을 말한 것이다.(p222)' : 페이지수는 전판(前版)


 류영모의 <노자>에서도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등장하면서 종합적인 관점에서 <도덕경>을 조망하고 있기에,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 비해 종합적인 해석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이 책에서 설명된 42장의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해당 장의 구조를 살펴보자. 요약하면 편집오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의미상으로는 연결이 안된다. 이것은 이곳만이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거나 장(章)의 나뉨이 잘못된 곳이 여러 곳 있다. <노자>는 몇번인가 개정증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p223)'


 이처럼, 연결고리가 끊어진다고 한다면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의 논리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타격을 받게 된다고 생각된다. 이제 마무리를 해보자.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서 노자편은 이처럼 노자 사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또다른 저작 <철학 VS 철학>에서 나오는 많은 철학자들이 거의 한 번이상은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관점에서 노자 사상을 음미하는 맛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는 이처럼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논리전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혹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라 생각된다는 견해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끝낸다.


PS. 쓰다 보니 리뷰 페이퍼가 아니라 단편소설을 써버렸네요. ㅜㅜ 귀한 시간내서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남은 시간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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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23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은 알라딘에서 상 줘야 됩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알라딘.

겨울호랑이 2017-09-23 16:32   좋아요 0 | URL
^^: syo님 끝까지 읽어주시고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yo 2017-09-23 17:39   좋아요 1 | URL
감사할 사람과 감사받을 사람이 바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3 17:44   좋아요 0 | URL
^^: 이웃분들이 읽어주셔야 저도 글을 올리지요 ㅋ 그래서 이웃분들께 감사하게 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7-09-23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철학자의 말씀인지 퍼뜩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은 ‘해석된 것의 해석’이란 말이 문뜩 떠오릅니다. ^^

겨울호랑이 2017-09-23 20:03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보다 보편적인/ 타당한 지식의 DNA‘가 축적, 계승,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cyrus 2017-09-24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자를 읽으려고 했는데, 마침 참고할 수 있는 글이 나왔군요. ^^

겨울호랑이 2017-09-24 10:24   좋아요 0 | URL
^^: cyrus 님께 참고가 되어 좋네요. 다만 는강신주의 저서의독창적 시각에 대한 글의 내용이 많아서 이점 역시 같이 고려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1. aimer


사랑이란 비할 데 없는 경험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며 천하무적이라도 된 듯, 활기에 넘친다. 


사랑이란 상대가 일종의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이익에 무관심한 것은 한편으론 다른 것에 열정적으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의 새로운 차원이 드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과 모든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가 하면, 살아 있음을, 지나가는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심지어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다.


욕망과 성적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과의 사랑은 더 내밀한 관계를 만든다.


때로 사랑이란 서로를 가르치고 재교육하는 것이자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의 아픔은 사소한 고통이 아니라, 진짜 고통, 가장 격렬한 고통 중 하나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을 초월하는 힘에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강력한 상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중요성을 부여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며, 뒤집어 말해 사랑받는 것은 누군가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이란 돌보는 것이다. 상대를 돌보고 관계를 돌보며 또한 자신을 돌보는 것.


2. 사랑하다


 1994년의 일입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개인적으로는 <AIMER : 사랑하다>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보다 당시 여자 친구가 했던 한 마디의 말이 더 와닿았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단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책에서 이야기하는 'aimer' 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하다'는 의미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프랑스어인 aimer 와 한국어인 사랑하다의 뜻에서 오는 물화적인 차이일까요. 개인적인 경험의 차이일까요.아니면 둘 다 일까요? 저마다 생각하는 하늘의 별만큼 다양한 크기와 빛깔의 사랑이 있음에도 공통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보다 '사랑하다' 그 자체가 중요하겠지요. '애인(연인)과 사랑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라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는 거기까지로 두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여겨지기에 미소만 짓고는 말지요. 첫사랑의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두어야 더 아름답겠지요. 제게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대할 때에도 같은 마음이 듭니다. 적어도 '애인(愛人)과 사랑하다'는 의미는 더이상 추가적으로 분석(分析)하고 정의(定意)하기 보다는 1994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어느 순간으로 얼려 놓고 싶다는 그런 마음.



ps. 시간이 흘러 가사 내용처럼 '나를 걸어 너를 지킬께'가 아니라 '너를 걸어 나를 지킬께'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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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2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2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2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2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9-22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뭐죠. 오글거리면서도 간질간질하면서도 뜨끈뜨끈한 마무리ㅎㅎㅎㅎ

오그라드는 글이라면 syo도 한가닥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2 19:45   좋아요 0 | URL
^^: 제 감수성으로는 도저히 syo 님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지요. 인정합니다. ㅋㅋ

syo 2017-09-22 19:50   좋아요 1 | URL
에.... 자랑을 시도한 게 아닌데,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엄청 철없어 보이네요ㅎㅎㅎ 와, 들켰다.

겨울호랑이 2017-09-22 19:56   좋아요 1 | URL
^^: 객관적 사실이지요. 일종의 팩트폭행이기도 합니다만 ㅋ

cyrus 2017-09-22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1994년에 만났던 여자친구는 지금 겨울호랑이님 옆에 있는 분입니까?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09-22 20:21   좋아요 1 | URL
^^: 제 아내는 그때 초등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었지요.

나와같다면 2017-09-23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저에게 사랑은 그래요..

겨울호랑이 2017-09-23 16:36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도 나와같다면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틀‘ 안에 쏙 들어가네요.

2017-09-23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3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거서 2017-09-24 0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친말고요, 대개 친구는 나와 비슷한 성향이지만 다른 면이 있는데 서로의 단점을 덮어주기에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친구 역시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군요.

겨울호랑이 2017-09-24 15:28   좋아요 1 | URL
^^: 네 사랑한다는 의미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쓴다고 한다는 면에서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같은 남자에게 표현하기에는 아직은 어색하네요.ㅋ

커피소년 2017-09-27 17:35   좋아요 1 | URL
동성의 부모 또는 자녀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동성의 친구에게는 하지 못 한다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ㅎㅎ 아마 동성애에 대한 논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성끼리는 영화도 같이 못 볼 정도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