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생각의 출현 - 대칭, 대칭의 붕괴에서 의식까지, 개정판
박문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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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  ★★  C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몸이 허약한 그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천장은 데카르트를 위한 석판이다. 그는 총명한 눈빛으로 거대한 석판에 철학의 제일원리(first principle)를 새겼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생각하는 나모든 지식을 의심한다. 다만 생각하는 나를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의심)하는 동안 나는 확실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1]


생각하는 나는 주체도, 자아도 아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영혼이다. 데카르트는 뇌를 해부하다가 솔방울 모양을 한 아주 작은 샘(분비샘)’을 발견한다. 그는 이 부위가 영혼이 있는 자리라고 주장한다.[주2] 그러나 데카르트의 주장은 틀렸다. 샘은 영혼의 집이 아닌 송과체(송과선, 솔방울샘)라는 내분비기관이다. 밤이 되면 송과체는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만든다.


우리는 헛다리 짚은 데카르트를 비웃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고, 대부분 사람은 뇌를 잘 모른다뇌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주 먼 부위이다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철학 명제를 빌려서 뇌 과학의 제일원리를 쓰면 이렇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뇌가 존재한다.” 우리가 생각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뇌가 있어야 한다.


출간된 지 17년 만에 개정판으로 나온 , 생각의 출현두 개의 역사를 다룬다. 하나는 우리 몸속에 새겨진 생명의 역사. 이 역사는 세포에서 시작해서 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뇌가 형성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뇌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으면 인간은 직립보행이 가능해지고 생각하는 동물이 된. 부지런한 뇌 덕분에 인간은 학자와 예술가가 되었다. 똑똑해진 인간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인 과거의 역사를 돌아봤고, 생명의 기원을 알아냈다. 이 책이 두 번째로 다룬 역사는 우주와 지구, 인류의 역사를 아우른 거대 역사(Big History)’.


빅 브레인(Big Brain)은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까지 지켜보고 있다빅 브라더(Big Brother)는 인간을 감시하지만, 빅 브레인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끔 이끌어준다. 뇌는 주변 환경을 살피고, 직접 수집한 여러 정보를 범주화해서 를 차곡차곡 만든다뇌가 제공해 준 정보를 얻은 는 감정을 느끼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기억한다저자는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뇌의 역할을 환경에 적응하는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뇌는 우리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운동한다. 뇌가 열심히 운동하는 내내 우리는 살아있다








, 생각의 출현2008년 출간 당시 뇌 과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한 책이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은 책의 판형이 커졌고, 책값도 2배로 불어났다그러나 구판 속 내용과 거의 달라진 게 없는 책은 개정판이 아니라 개판이다. 잘 만든 과학책 개정판은 본문의 오류와 오탈자가 고쳐져 있다. 과학 공부를 좋아하는 저자와 편집자가 과학책 개정판을 잘 만들고 싶다면 새롭게 밝혀진 연구 성과나 최근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과학 분야를 소개해야 한다.


잘못된 용어와 명칭 표기는 저자의 가벼운 실수로 이해하고 넘길 수 있다. 그래도 글을 쓸 때나 다 쓴 후에도 정확히 썼는지 확인해야 한다.

 


 

* 37




 


 1-8은 허블우주망원경이 성간 거대분자구름에서 원시별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한 사진입니다. 맨 위는 지상에서 저배율 망원경으로 본 독수리자리 성운 부근의 밤하늘이고, 그 왼쪽 사진의 구름 기둥을 허블망원경이 관측한 것이 아래 사진들이죠.

 


저자는 독수리 성운(Eagle Nebula)’독수리자리 성운으로 잘못 썼다. 독수리 성운은 뱀자리에 있는 성운이다.







그다음 페이지에 독수리 성운을 확대한 사진 도판(1-8)이 있다. 맨 위의 사진에 별자리 이름이 적혀 있는데, 독수리자리 바로 옆에 말굽자리가 있다


국제천문연맹(IAU)이 공인한 별자리는 총 88개이다. 말굽자리는 국제천문연맹 공인 별자리가 아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말굽자리를 설명한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말굽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명칭이다. 궁수자리는 독수리자리 근처에 있는 별자리다. 궁수자리에 있는 오메가 성운(Omega Nebula)의 별칭이 말굽 성운이다.

 

저자는 뇌 시스템의 진화 순서를 설명하면서 뇌 시스템에 위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뇌가 세 단계로 진화하는 과정을 뇌 과학 용어로 뇌의 삼위일체설이라고 한다.




* 372




 

 세 단계로 뇌의 시스템이 진화되어 온 순서는 이렇습니다. 맨 처음 나타난 게 파충류 뇌. 뇌간을 중심으로 발달한 시스템입니다. 주로 호흡 작용이나 맥박 등과 관련되어 있죠. 그다음에 나타난 것이 고() 포유동물의 뇌입니다. 흔히 뇌의 삼위일체설(미국의 심리학자 폴 맥클린이 인간의 뇌를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 등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창한 것)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감정을 생성하는 부위죠. 변연계를 중심으로 발달한, 원시 포유동물이 갖고 있는 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대상회를 완전히 덮으며 신피질이 크게 발달하게 되죠.



파충류 뇌는 도마뱀 뇌라고 불리기도 한다. 뇌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대중은 파충류 뇌를 감정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한 야성적인 뇌라고 인식한다. 반면 신피질은 감정을 조절하고 충동을 억제하는 이성적인 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뇌의 삼위일체설은 한참 오래전에 오류로 밝혀진 잘못된 과학 상식이다.[주3] 뇌 구조와 뇌 시스템에 위계는 없다. 뇌는 신경세포를 만들어가면서 진화하고, 점점 커지면서 재조직한다. 신피질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가 점점 발달하면서 형성된 조직이다.




* 442




 

 기존 입자와 상호작용의 표준 모델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입자가 힉스(Higgs) 보존입니다.

 

 


* 463




 

 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중력파를 측정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죠.

 



2012년에 힉스 보손이 발견되었다. 2015년에 중력파 검출에 성공했고, 이듬해에 과학자들은 중력파의 존재를 인정했다


저자는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는 일을 멈춘 상태다. 얼굴과 몸집만 달라진 책의 속살에 빛바랜 지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1] 르네 데카르트, 이재훈 옮김, 방법서설: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휴머니스트, 2024), 84.


[주2르네 데카르트, 김선영 옮김, 정념론(문예출판사, 2013), 45.


[주3리사 펠드먼 배럿변지영 옮김이토록 뜻밖의 뇌과학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더퀘스트, 2021년), 1강 뇌는 하나다삼위일체의 뇌는 버려라







<좋은 책인지 그저 그런 책인지 구별하는 cyrus의 정오표>



* 299, 368






정신분열증 조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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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 - 장애인 신탁 예언자가 전하는 지구 행성 이야기
앨리스 웡 지음, 김승진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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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열일곱 번째 선정 도서

(모임 날짜: 2025년 9월 27일 토요일)






잘 만든 자서전에 과연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자서전의 주인공은 자서전을 쓰는 글쓴이다소설을 쓰고 남는 시간에 서평과 에세이를 써온 조지 오웰(George Orwell)한 편의 스트립쇼와 같은 어느 예술가의 자서전을 만났다오웰이 읽은 자서전의 주인공은 자아도취가 심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오웰은 달리의 자서전을 비판적으로 비평한 글에서 잘 만든 자서전의 중요한 요소를 강조했다.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일을 들추어낼 때만 신뢰할 수 있다. 자기 마음속에서 바라본 삶은 누구에게나 그저 패배의 연속이기 때문에 자기 모습을 보기 좋게 설명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조지 오웰, 성직자의 특권: 살바도르 달리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중에서, 오웰의 에세이 선집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79)

 


 

자신을 보기 좋게 꾸미는 자서전의 주인공은 남들보다 잘살고 있다고 거들먹거린다. 하찮은 자서전은 같잖은 거짓말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다. 진솔하지 않은 자서전은 독자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회고록(memoir) 자서전(autobiography)을 조금 닮았다회고록은 자서전과 다르게 글의 주인공이 여러 명이다. 회고록의 글쓴이는 자신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종이에 불러들인다회고록(reminiscence)을 쓰는 내내 글쓴이는 친애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절의 추억에 잠긴다(reminisce)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 모두가 회고록의 주인공이 된다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은 잘 만든 회고록이다회고록의 주인공 앨리스 웡(Alice Wong)은 장애 인권 활동가다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근육이 점점 수축하는 희귀 질환을 앓았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휠체어와 호흡기는 삶을 연장해 주는 의료 보조 기기가 아니다. 삶과 결합한 몸의 일부. 앨리스는 기계와 한 몸이 된 자신을 사이보그적 존재라고 부른다사이보그적 존재는 SF에 나오는 허구의 피조물이 아니다. 유기체와 기계의 잡종이다. 사이보그적 존재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쓴 사이보그 선언문[주1]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개념이다. 해러웨이가 새롭게 정의한 사이보그는 정신과 육체, 유기체와 기계,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사회 현실 속의 피조물이다.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잡종의 책이다. 에세이, 시, 일기, 인터뷰 기록, 사진과 음식 조리법까지 어우러져 있다여러 종류의 글과 그림이 섞인 책을 읽어나갈수록 책의 매력은 하나둘씩 늘어난다. 저자의 인터뷰는 정상성과 비장애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찌르는 창이 되어주기도 하고, 일기는 즐겁게 살아가는 저자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앨범이 된다.


저자는 욕망에 충실하다. 음식을 먹는 일에 진심이다. 식탐이 많은 것을 인정한다. 군것질은 인생의 낙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다음식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각자에게 주어진 음식을 다 같이 먹는 행위는 우호 관계를 더욱 돈독해지게 만든다. 해러웨이는 식탁에 함께 앉은 식사 동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려(companion)’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반려는 ()의 경계를 없애고 서로 돌보면서 관계를 맺는다.[주2]


저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침을 자주 뱉지 않으면 그녀는 숨을 쉴 수 없다. 타구(唾具) 컵은 그녀의 호흡을 도와주는 친구다. 책에 실린 그녀의 에세이 타구에 바치는 송가는 지저분해 보이는 침을 다시 보게 만든다. 더러운 분비물로 여기는 침은 우리 몸의 일부다. 침은 첫 번째로 음식물 소화에 관여한다. 저자는 침을 함께 사는 적으로 인식한다. 호흡을 원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침은 인간의 취약성을 떠올려준다. 침은 소중하다. 그래서 저자는 침의 분비를 줄이는 약을 먹기보다는 타구 컵에 침을 뱉는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모른다장애인에 대한 삶의 지식이 부족하면 장애인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투명한 괴물이 된다. 비장애인은 장애를 두려워한다. 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장애는 건강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불편함을 수반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인식은 장애인을 계속 피하게 만드는 부당한 편견이다장애인은 항상 그늘 속에 지내지 않는다. 장애인은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 어딘지 잘 안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자립성이다. 장애인은 행복을 그러모으기 위해 꾸준히 움직인다.







<안경 쓴 사이보그 cyrus가 만든 주석>








[1] 원제는 사이보그 선언문: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다. 이 글의 전문은 해러웨이의 저서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자연의 재발명(황희선 · 임옥희 함께 옮김, arte, 2023)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에 수록되어 있다.



[2] 도나 해러웨이최유미 옮김종과 종이 만날 때복수종들의 정치(갈무리, 2022), 1장 종과 종이 만날 때서문, 29쪽과 48.


종과 종이 만날 때서평

<모순 속에서 함께 번영하는 법>, 2022922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3923077





* 74




 

수전 웬델 [3]



[3] 수전 웬델(Susan Wendell)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강지영 · 김은정 · 황지성 함께 옮김, 그린비, 2013)을 쓴 미국의 여성학자다


거부당한 몸서평 <정상을 거부한다>, 2018125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0514815






* 417




 

스테이시 파크 밀번,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주4]

 

 


* 420





 

 2019310 <내 조상들의 지평에서: 크립의 전승과 우리 운동의 유산>(On the Ancestral Plane: Crip Hand Me Downs and the Legacy of our Movements)이라는 제목으로 스테이시의 글이 게재되었다. (중략)

 나는 스테이시의 예지력 있는 글을 내가 편찬한 에세이집 급진적으로 존재하기에 수록했다. 책이 나오기 불과 1~2주 전인 6월에, 스테이시는 세상을 떠났다[주4]



[주4앨리스 웡이 엮은 에세이집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장애, 상호 교차성, 삶과 정의에 관한 최전선의 이야기들(박우진 옮김, 가망서사, 2023)스테이시 파크 밀번(Stacey Park Milbern)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가 쓴 글이 실려 있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번역본에 표기된 밀번의 글 제목은 <양말의 계보: 내가 물려받은 장애 운동의 유산>이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의 원제는 ‘Disability Visibility’. 우리말로 번역하면 장애 가시성이다. 이 용어는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에 수록된 저자의 인터뷰 미국장애인법에 언급된다.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의 저서 가장 느린 정의: 돌봄과 장애 정의가 만드는 세계(전혜은 · 제이 함께 옮김, 오월의봄, 2024)도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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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보기 전에 책 얼굴(앞표지)부터 살펴본다내가 선호하는 책 얼굴은 화가의 그림이 있는 것이다. 특히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으로 장식된 책 얼굴을 만나면 반갑다. 최근에 완독한 탄소라는 세계의 책 얼굴은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그림이다.






 













* 폴 호컨, 이한음 옮김 탄소라는 세계(웅진지식하우스, 2025)

 

*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이영주 옮김 앙리 루소(마로니에북스, 2006)

 

* [절판] 정금희 · 조명식 · 쥬세페 고아 편집 앙리 루소(재원, 2005)





책 앞날개에 적힌 루소의 그림 제목은 Jungle with Setting Sun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해가 지는 정글이다







루소는 이국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러나 루소는 열대우림이 많은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다정글에 가지 않아도 정글을 그리는 방법이 있다. 열대 식물들이 자라는 식물원에 가면 된다. 루소는 식물원에 드나들면서 열대 식물들의 생김새를 눈여겨봤다하지만 그는 꽃과 나무를 똑같이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루소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는 원근법을 무시하거나 상상력을 덧칠해서 풍경화를 그렸다.








 

그림의 실체를 잘 모르는 독자는 루소가 평화로운 정글을 상상해서 그린 풍경화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책 얼굴의 절반을 가린 띠지를 벗기면 참담한 형상이 나타난다수풀 사이로 야생 동물에 잡아먹히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보인. 이 그림의 다른 제목은 Black Man Attacked by a Jaguar. 야생 동물의 정체는 재규어상상화에 묘사된 세상은 환상이고, 정확하지 않다. 재규어의 습격에 당한 아프리카 흑인은 모순이다. 재규어는 아프리카가 아닌 중남미에 서식한다.


루소의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모순적 이미지는 예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다루소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사실을 바라보려는 눈을 감아야 한다. 그러면 루소가 그린 환상의 세계를 들어갈 수 있다.

















* 찰스 로버트 다윈,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 2019)



탄소라는 세계를 다 읽은 후에 다시 책 얼굴을 살펴봤다. 책 얼굴과 책의 속살(책의 핵심 내용)이 다르다.


책 얼굴이 된 루소의 그림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정글을 연상시킨다.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고 멸망시킨다지금까지 살아남는 존재는 강자다정글에 오직 힘의 논리만이 통한다탄소라는 세계는 정글이 생각보다 냉혹하지 않으며 자연에 살벌한 경쟁만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책이 독자에게 보여주고픈 속살은 협력하고 공생하는 자연 생태계다.



































* [개정판] 최재천 다윈 지능: 최재천의 진화학 에세이(사이언스북스, 2022)

 

* 브라이언 헤어 · 버네사 우즈 함께 씀,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디플롯[주1], 2021)

 

* 다니엘 S. 밀로, 이충호 옮김 굿 이너프: 평범한 종을 위한 진화론(다산사이언스, 2021)

 

* 프란츠 부케티츠, 이덕임 옮김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이가서, 2011)




지금도 여전히 대중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자연관을 주장한 생물학자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을 지목한다. 다윈은 억울하다. 그는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책 종의 기원에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비정한 논리로 사용됐다하지만 다윈의 의도와 다르게 진화론은 경쟁을 부추기고 사회적 약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 도구로 변질되었다.


자연에서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적자는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진화는 생명체가 완벽한 상태로 거듭나는 과정이 아니다. 약점이 있는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신현철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소명출판, 2025)

 

[수정 증보판] 찰스 로버트 다윈신현철 옮김 종의 기원 톺아보기》 (소명출판, 2024)




우리나라에 번역된 진화경쟁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를 수입한 것이다. 두 개의 단어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 전인 대한제국 시절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근대 일본에서 번역된 진화경쟁은 명확한 정의가 없는 불완전한 단어였다. 서양 사상을 받아들인 일본 지식인들은 진화경쟁을 다윈의 생각과 다르게 이해했다. 다윈이 생각한 자연관을 제대로 이해한 일본 지식인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닌 모두가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육강식’을 내세우는 진화론이 우세했다유럽과 자웅을 겨룰 만한 강대국이 된 일본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한다. 이 시기에 진화경쟁은 우리가 아는 약육강식과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굴욕적인 약소국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론적 대안으로 약육강식을 주장했다. 처음에 그들은 부국강병을 주장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이 식어버린 이후부터 강자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고개 숙인 지식인들은 아시아의 강대국 일본에 순응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9월의 세계 문학]

조지 오웰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25개정 증보판)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아카넷[주1], 2025)

 



조지 오웰(George Orwell)정치와 영어라는 글에서 정치적 언어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적 언어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순전한 헛소리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다.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중에서, 나는 왜 쓰는가수록, 291)




진화는 다양한 생명이 한데 어우러진 자연의 참모습이 담긴 과학 용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생각들이 묻혀서 지저분한 정치적 용어가 되고 말았다. 다윈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진화를 거쳐야 인간이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다윈은 진화가 진보의 동일한 단어로 쓰이는 것에 반대했다. 진화론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 우파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개인을 존중한다. 얼치기 진화론자는 진화의 정의가 강한 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거짓말하고, ‘남을 쓰러뜨려 이기는 경쟁을 정당화한다. 정치적 언어가 된 진화는 위험하다.


최근에 새로 나온 니체(Nietzsche)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번역본은 기존의 번역서들보다 번역자의 주석이 많은 편이다. 이번 번역본의 역자는 니체 철학 연구의 권위자 박찬국 교수그런데 본문이 시작되는 부분에 위험한 주석이 있다. 문제의 주석은 다윈의 자연관과 니체의 자연관을 비교한 내용이다.








 자연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종과 다채로운 변화와 풍요로움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니체의 자연관은 자연을 부족한 자원을 둘러싸고 생명체들이 투쟁하는 결핍의 장소로 보는 다윈식의 진화론적인 자연관과는 다르다.

 니체에게서 자연은 마치 넘쳐흐르는 자신의 힘을 분출하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생명체와 유사하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의 지혜를 베푸는 일이 행복이다.

 

(주석 5, 14)




박 교수가 언급한 다윈의 진화론적 자연관은 정치로 오염된진화의 잘못된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다윈은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생물 다양성에 의해 건강한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유기체 간의 상호 관계, 그리고 각 유기체와 물리적 환경 간의 상호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딱 들어맞는가도 생각해 보라.

 

(찰스 다윈, 장대익 옮김, 종의 기원》 「4장 자연선택중에서, 141)



다윈의 진화론을 편협하게 설명한 위험한 주석은 사소하지 않다. 주석의 심각성에 둔감한 독자들이 있다면 거꾸로 생각해 보자. 니체의 철학이 독일 나치즘(Nazism)에 영향을 준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보기만 할 텐가. 니체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니체 철학의 핵심 위버멘쉬(Übermensch)’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Hitler)가 좋아하는 정치적 용어가 되었다.


다윈과 니체는 억울하다. 두 사람은 정치에 물들인 언어 진화와 위버멘쉬를 말하지 않았다그들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은 이론과 사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색을 입혔다













<다윈과 니체를 좋아하는 cyrus가 만든 주석>



[1] 디플롯 출판사는 학술서와 고전을 주로 펴낸 아카넷 출판사 소속의 임프린트 출판사(독립 브랜드).

 





*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104




 

 다윈이 쓴 또 다른 책 Desecnt of Man[2]인간의 친연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기원이나 인간의 유래또는 인간의 계승으로 번역한다면, 다윈이 생각하는 바가 조금은 오해될 수 있을 것이다.



[2] Desecnt Descent. 인간의 유래로 알려진 다윈의 책 제목의 영어 철자가 틀렸다중간에 있는 ec가 바뀌었다.






*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214




 

 다윈이 모든 생명체 사이에서, 그리고 생명체와 물리적인 살아가는[3] 조건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상호 연관성이 얼마나 무한히 복잡하면서도 서로에게 잘 부합하는지도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했듯이, 생물과 환경과의 적절한 관계가 생물다양성의 지속성을 담보할 것이다.



[3] 문장이 어색하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단 종의 기원 톺아보기에 있는 문장을 인용했다. 그런데 종의 기원 톺아보기구판(2019년 출간) 118쪽에 있는 비문(非文)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작년에 나온 수정 증보판에도 비문이 남아 있다. 비문이 나오는 쪽수는 구판과 똑같이 118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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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라는 세계
폴 호컨 지음, 이한음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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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지구는 모든 생명체가 춤을 추는 거대한 무대이다. 생명력이 넘실대는 지구는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인간은 30만 년 전부터 지구에서 생명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46억 년 지구의 나이를 하루 24시간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235955에 등장했다. 인간이 생명의 춤을 춘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슬기로운 춤꾼(Homo sapiens)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의 무대에 뒤늦게 오른 인간은 백업 댄서에 가깝다. 하지만 거만한 인간은 무대를 독차지하려고 오래전부터 생명의 춤을 춘 동물과 식물, 곤충을 쫓아냈다오늘날 지구는 인간의 독무대가 되었다인간의 춤 욕심은 끝이 없다. 춤을 더 잘 추고 싶어서 자기 입맛에 맞게 무대를 개조한다무대 위에 솟은 산을 깎고, 무대 위에 자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낸다자연의 무대에 인간이 무수히 남긴 흔적들만 있다. 생명의 독무(獨舞)에 열중한 인간은 지저분한 지구를 청소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짓밟힌 지구가 위태롭다. 심하게 망가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춤을 잘 추려면 안무가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아주 작은 안무가를 잘 만나서 생명의 춤을 출 수 있었다생명의 춤을 추게 만드는 안무가는 생명체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안무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비밀에 싸인 생명의 춤꾼인 안무가의 정체는 탄소(carbon)’.









탄소라는 세계재능이 많은 생명의 춤꾼 탄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탄소는 지구와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원소이다탄소가 없으면 지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탄소가 없는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메마른 무대다. 그곳에 죽음의 춤(the dance of death)이 펼쳐진다탄소는 바지런하다.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달린다(run). 인간의 세포 한 개에 12,000억 개의 탄소 원자가 있다저자가 인용한 탄소의 춤(the dance of carbon)은 시들해진 생명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생명의 춤꾼 탄소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알려준다. 첫 번째 교훈,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춤을 추지 말기. 탄소는 공평하다. 모든 생명체는 탄소를 만나고, 죽을 때까지 탄소와 더불어 살아간다. 생명체가 죽고 나면 탄소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든다. 생명의 춤을 추는 모든 존재는 탄소를 공유한다두 번째 교훈, 서로 돕고 살아가면서 춤추기인간보다 먼저 생명의 춤을 춘 동식물은 자신과 다른 종()들과 협력하면서 살았다곤충은 꽃가루를 퍼뜨리는 생명체다. 곤충 덕분에 식물은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곤충을 피하는 인간의 독무가 길어질수록 자연의 무대 위에 있어야 할 곤충이 사라지고 있다. 곤충의 도움을 받지 못한 식물은 생명의 춤을 추지 못한다. 식물이 멸종하면 그 식물을 먹고 살아야 할 동물과 인간도 멸종하고 죽음의 춤을 추게 된다.


인간이 하도 춤을 춰서 망가진 지구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온실가스가 생겨서 지구온난화 현상이 지속된다. 자신이 슬기롭다고 착각하는 춤꾼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탄소를 지목한다. 지구를 청소하는 환경 운동가들은 탄소와 이산화탄소를 뭉뚱그려서 온실가스라고 주장한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생명의 춤꾼은 오해로 둘러싸여 있다. 안무가의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생명의 독무를 고집한다. 지구가 건강해지려면 모든 생명체가 아울러 춤추는 합동 공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 다양성은 인간, 동물, 식물, 곤충, 곰팡이와 같은 미생물이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추는 춤이다. 탄소의 춤을 방해하고, 이기적인 생명의 독무(獨舞)를 유도하는 무지의 독무(毒霧)는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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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이 저물고 월()요일이 조용히 뜨기 시작하는 밤. 잠을 자야 할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일요일이 끝날 때만 생기는 불면증이다. 자꾸만 미룬 책들을 뒤늦게 펼쳐본다. 온종일 가만히 있었던 집중력이 되살아난다. 눈꺼풀에 매달린 졸음이 달아난다거뜬히 책을 읽고 나면 새벽 한 시. 집중력이 평소보다 높아지는 날이면 새벽 두 시까지 읽는다.

















* 파스칼 드튀랑, 김희라 옮김 우주를 품은 미술관: 예술가들이 바라본 하늘과 천문학 이야기(미술문화, 2025)

 




지난주 일요일(97)우주를 품은 미술관을 완독했다.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다른 책을 보면서 서평을 썼다.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월요일(98) 새벽이 될 때까지 썼다


월요일 새벽에 붉은 달(blood moon)’이 뜬다는 뉴스를 알고 있었다. 달이 붉게 변하는 현상은 개기월식이다. 달은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진 상태다. 우주를 품은 미술관에 일식과 월식 현상을 묘사한 그림들이 나온다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일식과 월식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시대가 변하면서 일식과 월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기독교 미술에서 묘사된 일식과 월식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신의 메시지를 의미했다.


달이 붉게 변할 때가 개기식 최대로 볼 수 있는 시간대다. 그런데 붉은 달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개기식 최대 시간이 새벽 311이다새벽 3시를 넘긴 채 월요일 새벽을 맞이한 적이 없다. 아침에 깨어날 때 막 몰려오는 피로감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자투리 잠을 잘 걸 그랬나. 하지만 서평 쓰는 데 몰입하느라 눈을 잠깐 붙일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서평을 다 쓰고 나니 새벽 2시였다잠이 오지 않아서 옥상에 갔다. 230분부터 개기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밤하늘에 구름이 많았다. 구름은 서서히 붉어지는 달을 가렸다.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다. 구름 뒤로 숨은 붉은 달이 있는 곳을 쳐다보기만 했다. 구름이 지나가길 바랐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은 붉은 달을 감쌌다.



















* 블레즈 파스칼, 이환 옮김 팡세(민음사, 2003)

 

* 칼 세이건, 현정준 옮김 창백한 푸른 점(사이언스북스, 2001)





한 시간 남짓 불빛 한 점 없는 옥상 한가운데 서서 밤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파스칼(Blaise Pascal)이 두려워하던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내 눈앞에 펼쳐진 구름 낀 밤하늘은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런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파스칼은 어린 나이에 계산기를 발명했고, 젊은 시절에 수학과 물리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한 학자다. 게다가 그는 팡세를 쓴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천문학에 관심을 드러나지 않았지만, 무한한 어둠의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을 티끌로 비유한 칼 세이건(Carl Sagan)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다파스칼은 무한을 두려워했지만, 사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기였다.








새벽 3시가 될 무렵에 구름이 전보다 줄어들었다. 지나가는 구름의 틈 사이로 붉은 달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붉은 달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어설프게 고화질로 설정해서 찍은 건데 생각보다 붉은 달빛이 진하게 나왔다. 달 표면이 뚜렷하게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맨눈으로 붉은 달을 봤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325. 붉은 달 관측 종료.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날따라 눈 속의 어둠이 무한한 우주의 어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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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1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생각보다 달이 잘 찍혔네요.요즘 스마트 폰의 사진 촬영능력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스마트 폰이 이리 좋아지니 카메라 회사들이 자꾸 힘들어 지는 것 같네요^^

cyrus 2025-09-14 23:33   좋아요 0 | URL
흐릿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사진 보정 기능을 아무거나 해보니까 진하게 나왔어요. ^^;;

꼬마요정 2025-09-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말씀처럼 여름밤에 무서운 건 모기죠!! 올해는 그나마 모기가 적다지만 독하더라구요ㅠㅠ 근데 사진이 정말 잘 찍혔네요. 가끔 달 찍어보면 저는 흐릿하거나 뭔가 잘 안 나오던데 멋집니다. 파스칼과 칼 세이건.... 똑똑한 사람들의 만남이로군요^^

cyrus 2025-09-14 23:35   좋아요 1 | URL
올해 여름은 신기하게도 집안에 모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역시나 새벽에 나가보니까 모기들이 돌아다니네요.. ^^;;

transient-guest 2025-09-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잠이 안 올때 책을 펼치면 아침까지 잠을 못자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잠이 안 와도 책은 안 읽어요.ㅎㅎ 새벽에 일찍 일어나려구요.ㅎ 글이 좋네요. 책과 우주와 미술과 생활과...낭만적입니다

cyrus 2025-09-14 23:38   좋아요 1 | URL
지금도 잠이 오지 않아요. 오늘 해야 할 일은 독서 모임 발제를 만드는 것인데, 다 만들었어요. 읽다 만 책 조금 보다가 자야겠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