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큐어 하는 남자 - 강남순의 철학에세이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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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남성, 여성이라는 두 개의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한 존재로 규정해버린다. 젠더(gender)는 외모와 행동을 통해 단박에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믿음은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의 외모와 행동만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정하거나 판단한다. 상대방의 젠더를 외모와 행동과 같은 외적인 단서로 추정하는 것을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이라고 한다.[주1] 젠더 귀인에 의해 부여된 성 역할은 개개인을 속박하고 예외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은 안정적이다. 견고하던 젠더 이분법에 파열음이 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남녀 사이의 구분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많은 젠더가 있으며 그 젠더마다 어떤 규범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각각 부여된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며 새로운 성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 또 외모와 행동이 알려주는 정보, 그중에서 젠더 귀인과 관련한 정보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상대방의 젠더가 모호하거나 젠더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여 ‘저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라는 반응을 드러내는 순간 젠더를 인식한다. 이를테면 손톱에 매니큐어를 한 남자를 만났다고 치자. 아마도 당신은 ‘저 사람, 남자 맞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남자를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자가 매니큐어를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게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화장하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자가 화장하는 것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게이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을 써서 미용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실제 인물이다. 신학자 강남순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젠더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남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젠더 귀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남성으로, 매니큐어 하는 행위를 보고 여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할까? 이것은 본인만이 답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남성인 동시에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에이젠더(Agender)로 인식할 수 있다.

 

강남순이 쓴 글의 제목이자 에세이집의 표제인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퀴어(queer)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견고한 젠더 이분법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구조 바깥에서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젠더 이분법은 너무 일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분법은 젠더에 대한 구분과 편견을 강화하고 다른 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대상을 둘로 나누면 편하다. 이러한 간편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효과적인 선전 도구가 된다. 강남순의 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병은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이다. 쉽게 말하면 시스젠더(cisgender)는 성별과 관련된 ‘획일화된 프레임’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시스젠더는 성별이 남성과 여성, 이 두 가지로 고정돼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의사나 부모에 의해 하나의 성별을 지정받고 그것에 따른 겉모습, 성역할 등을 요구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젠더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이 어떤지, 성격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든지 등 여러 가지 간섭과 억압을 받는다. 이러한 억압이 강압적으로 반복되면 획일화된 젠더 이분법의 틀에 벗어난 퀴어를 향한 혐오와 증오 범죄가 일어난다.

 

저자는 성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 신학의 맹목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그녀는 성서가 인간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적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서를 잘 읽는 방식’을 제시한다. 성서와 함께 생각하면서, 성서에 ‘저항(비판)’하는 독서 방식이다. 교회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소명을 거부하는 불순종은 죄악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여성 해방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 창녀 · 죄인 · 이단으로 취급하여 배척한다. 보수적인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물음표를 박탈하는 종교’[주2]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이다. 차별과 혐오를 묵인하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기독교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성서에 갇힌 종교가 되었다.

 

누구나 ‘연대’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연대’는 참으로 어렵고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말이다. 특정 집단이나 상대방을 지지하면서 ‘연대’를 누누이 외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차별할 수 있고 차별을 묵인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든 진보주의자이든 누구나 ‘인식론적 사각지대’[주3]에 빠진다. 그러나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라는 함정에 여러 차례 빠질 수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한 지속적인 사유를 멈출 수 없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젠더 트러블》 서문에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 의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인간이라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욕망이 있다. 이 기본적인 욕망이 없는 인간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게 된다.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이다. 나를 둘러싼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지,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누구와 함께 연대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독자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욕망을 깨운다.

 

 

 

 

 

 

 

 

[주1] 케이트 본스타인, 조은혜 옮김,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54~56쪽, 2015.

 

[주2] 강남순, 「아담과 하와는 몇 살이었을까」,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212쪽, 2018.

 

[주3] 강남순,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136쪽,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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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해로행(薤露行)토머스 맬러리(Thomas Malory)아서왕의 죽음을 각색한 단편소설이다. 5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 나쓰메 소세키, 박현석 옮김,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현인, 2018)

* 나쓰메 소세키, 노재명 옮김, 런던 소식(하늘연못, 2010)

    

 

 

 

 

 

 

 

 

 

 

 

 

 

 

 

 

 

 

 

 

 

 

 

 

 

 

 

 

 

 

 

 

 

* 토머스 맬러리, 아서 왕의 죽음(나남출판, 2009)

* [절판] 토머스 불핀치,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황금가지, 2004)

* [절판] 토머스 불핀치,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현대지성사, 1998)

 

 

 

 

아서왕의 죽음은 아서왕(King Arthur)의 일대기와 원탁의 기사들에 대해 쓴 장편 산문이다. 이 작품은 중세 유럽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대성한 토머스 불핀치(Thomas Bulfinch)는 여러 판본으로 전해져온 아서왕 전설을 추려 엮어 펴냈는데, 국내에선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The Age of Chivalry, or Legends of King Arthur)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 [e-Book] 앨프레드 테니슨, 김천봉 옮김, 율리시스: 테니슨 시선(글과글사이, 2017)

* [e-Book] 앨프레드 테니슨, 테니슨 시선(지만지, 2015)

* [품절] 앨프레드 테니슨, 테니슨 시선(지만지, 2011)

* [절판] 김천봉 엮음, 빅토리아 여왕 시대 1: 19세기 영국 명시(이담북스, 2011)

* 앨프레드 테니슨,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민음사, 1975)

 

 

 

 

영국의 시인 앨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22년에 걸쳐 아서왕 전설을 주제로 한 장편 서사시 국왕 목가(The Idylls of the King)를 썼다. 이 작품의 분량이 방대해서 국내에 완역된 적은 없다. 소세키는 테니슨의 장편 서사시를 칭송하면서 해로행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해로행의 두 번째 이야기 제목은 거울인데 샬럿의 여인(The Lady of Shalott)에 대한 내용이다. 테니슨은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에 나오는 랜슬롯(Launcelot)과 일레인(Elaine) 이야기를 바탕으로 샬럿의 여인이라는 시를 썼다.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샬럿의 여인이 수록되지 않은 테니슨의 시 선집이다)

 

랜슬롯은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으로 그가 아서왕 전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일레인은 랜슬롯에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는 영주의 딸이다. 테니슨은 일레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녀를 저주받은 여성으로 설정했다. 테니슨이 묘사한 일레인은 혼자 샬럿 섬의 성에 지내면서 직물을 짜야 하는 저주에 걸려 있다. 그녀는 성 밖에 나가지 못한다. 방 안에 있는 거울에 비쳐진 바깥 세계의 풍경(거울의 특성을 생각하면 거울 속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 환영이다)을 보면서 산다. 거울은 일레인이 사는 성 근처를 지나가는 랜슬롯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레인은 거울 속에 나타난 랜슬롯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 후로 그녀는 랜슬롯이 자신의 성 앞을 지나가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일레인은 거울의 환영을 계속 봐야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불만을 가진다. 결국 그녀는 저주를 무시하고, 랜슬롯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 순간 저주가 깨지면서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녀가 짜고 있던 직물은 풀어진다. 일레인의 저주가 깨지는 극적인 순간과 그녀가 랜슬롯을 찾기 위해 홀로 방황하다가 쓸쓸히 최후를 맞는 장면은 중세 문화에 심취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였다.

 

해로행런던 소식(하늘연못)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현인)에 수록되어 있다. 전자의 책을 번역한 노재명 씨는 고인이다. 그러나 고인이라고 해서 그의 번역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거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재명 씨의 번역에 대해 따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해로행북망행으로 바꾼 점이다. 노재명 씨는 제목을 바꾼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일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일본어를 쓰고 말할 줄 모른다. 번역해본 적도 없다. 네이버 일본어 사전과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면서 오역으로 의심되는 문장 하나하나 검토했다. 일어를 독해하고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능력이 없어서 해로행』 '거울' 편만 검토했지만, 생각보다 오역이 많았다. 이건 정말 심각하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독자는 엉터리로 번역된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번역을 검토하면서 하늘연못 판본의 별점을 네 개에서 두 개로 변경했다.

 

오역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문장에 대해선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일본어와 번역 비전공자인 내가 의견을 밝히면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대신 원문과 두 가지 번역본의 문장을 한 눈에 비교할 수 있게 써놨다.

 

 

 

 

 

* 해로행원문 출처: http://www.natsumesoseki.com/home/cairoko

      

 

 

 

 

 テニソンのアイジルス優麗都雅において古今雄篇たるのみならず性格描写においても十九世紀人間古代舞台おどらせるようなかきぶりであるからかかる短篇するにはおおいに参考すべき長詩であるはいうまでもない

 

 

テニソンの: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 영국의 시인).

古今雄篇: 고금의 웅편. 

 

* 하늘연못

  테니슨의 <아이딜스>[원주]는 유려한 문장이 돋보이는 위대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성격 묘사에 있어서도 19세기 인간을 고대라는 무대에 되살려 낸 작품이다. 이 소설을 쓰는 데 테니슨의 장시(長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주] The Idylls of the King의 약칭. 목가적인 서사시. 아서 왕과 그 기사들이 중심이다. 

 

* 현인 (387~388)

  테니슨의 아이지루스[역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고상하다는 점에서 고금의 웅편(雄篇)일 뿐만 아니라, 성격의 묘사에 있어서도 19세기 사람을 고대의 무대에서 뛰어놀게 한 듯한 필치이기에 이 단편을 집필하는 데 커다란 참고로 삼아야 할 장시(長詩)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역주] 테니슨의 샬럿의 아가씨(The Lady of Shalott)를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2 

 

 

 あるときはかしらよりただ一枚わるる真白上衣うわぎかぶりて眼口手足しかとちかねたるがけたたましげにかねらしてぎるもゆるこれはらいをやむ前世ごうをみずからぐるむご仕打ちなりとシャロットのるすべもあらぬ

 

 

けたたまし: 요란한

:

: 나환자

前世: 전세의 업

: 세상에 알리는

むご: 잔혹한

シャロットの: 샬럿의 여자

      

* 하늘연못

  또 어느 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윗도리 하나만 걸친 사람이 나타난다. 도무지 몸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형체가 거울에 비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나병이라도 앓은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현인 (396)

  또 어떨 때는 머리부터 단 한 겹이라 여겨지는 새하얀 상의를 뒤집어쓰고 눈과 입도 손과 발도 분명히도 알아볼 수 없지만 요란하게 징을 울리며 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는 문둥병 환자가 전세의 업을 스스로 세상에 알리는 잔혹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샬럿의 여자는 알 길이 없었다.

 

 

하늘연못 판본에 요란하게 징을 울리며 가는 모습도 보였다(원문에 밑줄 친 구절)라는 구절이 없다. 현인 판본에 문둥병 환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나병 환자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문둥병 환자’, ‘문둥이는 나병 환자를 비하하는 혐오 단어이므로 번역할 때 이러한 표현을 써선 안 된다.

 

 

 

 

 

 

3

 

 旅商人たびあきゅうどのせにえるつつみのにはきリボンのあるか下着のあるか珊瑚さんご瑪瑙めのう水晶真珠のあるかめるらさねばにあるものはにはらず

 

 

旅商人: 떠돌이 장사꾼

きリボン: 붉은 리본

下着: 하얀 속옷

 

      

* 하늘연못

  상인들의 등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흰 의복이라도 들어 있을까? 산호, 마노(瑪瑙), 수정, 진주라도 들어 있는가? 포장 속에 있는 것들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 현인 (396)

떠돌이 장사꾼들이 등에 짊어진 보따리 속에는 빨간 리본이 있는지, 하얀 속옷이 있는지, 산호, 마노, 수정, 진주가 있는지, 보따리 안을 비추지 않으면 안에 들어 있는 물건도 거울에는 비치지 않았다.

 

 

 

하늘연못 판본에 원문의 빨간 리본(きリボン)이 빠져 있고, 노재명 씨는 햐안 속옷(下着)흰 의복으로 번역했다.

 

 

 

    

 

 

 

4

 

 シャロットのるは不断はたであるむらの萌草もえぐさのれる釣鐘めるるときはのいつくべしともえぬほどのであるうなのうねりなみのかすときは底知れぬさを一枚きにあるときはじにゆるほのおのにて十字架濁世じょくせにはびこる罪障すきまなく天下いて十字れる経緯たてよこのにもるとしくのみははたをれてばんとす

 

 

不断: 평소(=독특하지 않은), 끊임없음(계속하거나 이어져 있던 것이 끊이지 아니하다)

: 꽃 그림자

うな(海原, うなばら): 넓고 넓은 바다

うねり: 파도

: ~(), ~처럼(동작 · 상태 따위를 나타내는 데 씀)

濁世: 더러운 세상

罪障: 죄장. 성불의 장애가 되는 죄업 

 

* 하늘연못

  샤롯 여인이 짜는 그림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풀밭을 배경으로 종() 모양의 꽃을 짤 때는 꽃 그림자가 지금이라도 당장 솟아나올 것처럼 보인다. 짙은 꽃이다.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과 지는 꽃을 수놓을 때도 있다. 어느 때는 검은 대지를 배경으로, 타오르는 불꽃같은 십자가를 만든다. 그 순간 그림 속의 불꽃들은 그림을 떠나서 공중으로 날아오를 듯하다 

 

* 현인 (399~400)

  샬럿의 여자가 짜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단이었다. 수풀에 새로 돋은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바탕에 초롱꽃이 잠겨있는 모습을 짤 때는 꽃이 언제 떠오를지도 모를 만큼 짙은 색이었다. 널따란 바다의 파도 속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물결의 꽃을 새길 때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한 겹 얇은 천에 새겼다. 어떨 때는 검은 바탕에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색으로 십자를 새겼다. 더러운 세상에 만연한 죄업(罪業)의 바람은 온 천하에 불어, 십자를 짜는 날줄과 씨줄 사이에도 들어가는 듯, 불꽃만은 비단에서 나와 치솟으려 했다.

 

 

 

원문의 不断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항상’, ‘평소’, ‘끊임없음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용한 문장을 보면 샬럿의 여인이 직물로 짠 그림에 묘사된 대상들은 하나같이 역동적이다. 이런 그림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노재명 씨는 원문의 넓고 넓은 바다의 파도(うなのうねり)넓은 들판으로 번역했는데 명백한 오역이다.

 

 

 

 

 

   

5

 

 まことの横縦くぐらせばせてげるマリヤの姿となるいをたてにりをよこにあられふる木枯こがらしせば荒野ひげリア面影ずかしきくれないとめしき鉄色をよりせてはうてえたるむべく温和おとなしきがれるかわるがわるにめばわれし乙女おとめのわれはがおにぶれるさまをたもとくにまつわるえぬねがいれなるべし

 

 

, あられ: 싸라기눈(빗방울이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木枯(), こがらし: 초겨울(늦가을)의 찬바람

: 밝은

リア: 리어 왕

: 만나다

: 길다

, たもと: 소맷자락

まつわる: 휘감긴

いえぬ: 말할 수 없는

, ねがい: 소망

: 어지러운

      

* 하늘연못

  사랑의 실()과 정성의 실을 종횡으로 연결하면, 두 손을 어깨에 올려놓고 하늘을 향한 마리아의 모습이 된다. 광기와 분노를 섞어 고목을 만들면 그 모습은 흰 수염의 리어(King Lear)가 된다. 부끄러운 붉은색과 한 맺힌 회색을 섞으면 떠나간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 또 온화한 황색과 기운찬 자색을 섞으면 마귀에 홀린 여인의 흥분된 얼굴이 나타난다. 이렇듯 그녀의 베틀에는 구름에 휘감긴 사람들의 소원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 현인 (400)

  사랑의 실과 정성의 실을 가로와 세로로 물레의 북을 지나게 하면 손을 어깨에 엇갈려 얹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었다. 광기를 종으로 분노를 횡으로, 진눈깨비 날리며 삭풍이 부는 밤을 베틀 앞에서 밝히면, 황야에서 흰 수염을 흩날리는 리어의 모습이 나타났다. 부끄러운 주홍과 원망스러운 쇳빛을 한데 모아 간절히 만남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낸 듯했으며, 온화한 노랑과 흥분한 보라를 차례로 짜면 마법에 걸린 아가씨가 자신의 얼굴에 감동한 모습이 나타났다. 기다란 자락에 구름처럼 휘감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의 실이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원문의 木枯고목이 아니라 목고로 읽는다. 마를 고이다. 리어 왕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싸라기눈(あられ)은 빗방울이 찬바람으로 만나 얼은 상태에서 내리는 눈을 뜻한다. 싸라기눈과 진눈깨비는 다르다. 진눈깨비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다[출처].

 

[출처] <카드뉴스> 가루눈보다 굵고 함박눈보다 가는 것은? (뉴스웨이, 2018113) http://www.newsway.co.kr/news/view?tp=1&ud=2018011217351479073

 

 

 

 

 

 

 

6 

 

     

うつせみの

うつつめば

みうからまし

むかしも

うつくしき

うつす

やうつろう

なに

 

 

うつせみ: 이승, 이 세상

うつつ: 제 정신

      

 

* 하늘연못

허망한 세상을

혼미하게 살면

살기 힘들다네

옛날도 지금도

아름다운 사랑이

비치는 거울에

색이 비치리라

아침 저녁마다

      

* 현인 (401)

이 세상을,

맑은 정신으로 살면

살기 괴로울 테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사랑,

비치는 거울에

색이 비치네,

아침저녁으로.

 

 

노재명 씨는 원문에 없는 허망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7 

 

   

らしてすえる

 

すえる: 응시하다, 눈여겨보다

      

* 하늘연못

여인은 순간 숨을 몰아쉰다. 눈을 감는다. 

 

* 현인 (402)

여자는 숨을 멈추고 눈을 고정시켰다.

 

 

 

すえる(응시하다)눈을 감는다로 번역하다니…‥.

 

 

 

 

 

   

8

 

 

 このシャロットのサー・ランスロットんでそばにかけってあおきいだすとはきに地震くにける

ぴちりとがして々こうこうたる真二つにれるれたるおもてはびぴちぴちとくがこな微塵みじんになってしつの七巻ななまき八巻やまきりかけたる布帛きぬはふつふつとれてなきに鉄片はほつれ千切ちぎれもつれてつち蜘蛛ぐものくにシャロットの髪毛にまつわる。「シャロットのすものはランスロットランスロットをすものはシャロットのわが末期まつごののろいをうてかたへ両手げてちたる野分のわきをけたる五色あざむく砕片るる[革堂][cyrus ]どうとたおれる

 

[cyrus ] 원문에는 (가죽 혁)+(집 당)이 합쳐진 한자(‘이 부수인 한자)로 표기되어 있음. 네이버 한자사전, 일어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한자라 뜻과 음은 모르겠음 

 

 

サー: ()

ランスロット: 랜슬롯

きに地震: 멀어져 가는 지진

: 지나가다, 달리다

 

       

* 하늘연못

  그때 샤롯의 여인은 다시 소리친다. “랜슬롯 경!” 여인은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놀란 얼굴을 세상 속으로 반이나 내민다. 사람과 말이 하나가 된 물체는 높은 저택 아래를 그냥 지나쳐간다.

      

* 현인 (402~403)

  이때 샬럿의 여자가 다시 랜슬롯 경.”하고 외치며 홀연 창 옆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세상 속으로 반쯤 내밀었다. 사람과 말은 높다란 전각 아래를 멀어져가는 지진처럼 달려 나갔다.

  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교교하던 거울이 갑자기 한가운데서 2개로 갈라졌다. 갈라진 표면이 다시 쩍쩍 얼음이 갈라지듯 산산조각 나서 방 안으로 튀었다. 일곱 두루마리, 여덟 두루마리, 짜던 비단이 갈가리 찢어져 바람도 없는데 철조각과 함께 날아올랐다. 붉은 실, 초록 실, 노란 실, 보라색 실은 흐트러지고 끊어지고 풀리고 엉켜 땅거미가 친 그물처럼 샬럿의 여자의 얼굴에, 손에, 소매에, 기다란 머리카락에 휘감겼다. “샬럿의 여자를 죽이는 것은 랜슬롯. 랜슬롯을 죽이는 것은 샬럿의 여자. 내 마지막 저주를 짊어지고 북쪽으로 달려라.”라며 여자는 두 손을 높이 하늘로 올리고 썩은 나무가 태풍을 맞을 때처럼 오색실과 얼음과도 같은 파편이 어지러운 가운데로 털썩 쓰러졌다.

      

 

노재명 씨는 해로행의 결말에 해당하는 문장을 번역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해로행거울편과 테니슨의 시 샬럿의 여인의 결말은 다르다.

 

 

 

 

 

 

 

 

 

 

 

 

 

 

 

 

 

  

* [품절]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하늘연못, 2002)

 

 

지금은 절판되어 사라졌지만, 하늘연못 출판사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최악의 번역본이 있었다. 그 책이 바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우울과 몽상이다. 그 책에 엉터리 번역문이 많았지만, 가장 최악의 오역은 진자와 함정의 결말 마지막 문장이 누락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문을 참고하시라[출처].

      

[출처]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 알 것 같습니다(20151214)

http://blog.aladin.co.kr/haesung/8052770

 

 

 

 

 

 

+1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예경, 2002)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오역 사례 하나 더 언급한다. 예경 출판사라파엘 전파160‘The Lady of Shalott’샬롯 양으로 번역했다. 샬럿은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섬 이름이다. 이 섬에 있는 성에 저주받은 여인이 산다고 해서 샬롯의 여인으로 알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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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8 18:14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서 일정이 꼬였어요. 토요일 새벽에 번역문 대조 작업을 했어요. 이거 하느라 오늘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못했어요. 제가 다른 책을 보느라 독서모임 책을 안 읽은 것도 있었지만, 괜한 작업 때문에 힘을 너무 많이 소모했습니다... ^^;;

syo 2019-02-1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렸다...... 역시 당신은....bbbb

cyrus 2019-02-18 18:15   좋아요 0 | URL
일문학 전공자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을 다시 읽어보라고 말씀하셔서 읽어봤는데 정말 노재명 씨의 번역에 문제가 많았어요. 대조하면서 글 쓸 때 정말 짜증이 났어요... ㅎㅎㅎ

oren 2019-02-18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어도 공부하시지 않으셨는데, 정말 꼼꼼히 비교하셨네요.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과 본문에서도 간혹 잘못 입력된 이름들이 보입니다. ㅎㅎ
(나쓰메 소메키, 캐슬롯)
책에서든 블로그에서든 오탈자들은 그나마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판매중인 책에서 발견되는 엉터리 번역은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9-02-19 15:13   좋아요 1 | URL
오자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주말 새벽에 글을 써서 그런지 실수가 많네요. 이 때 정말 힘들었어요... ^^;;

카알벨루치 2019-02-18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시루스박사!!!!🔥🔥🔥

cyrus 2019-02-19 15:14   좋아요 0 | URL
저는 아마추어입니다.. ^^
 
해부학 교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일본 최고의 지성이 안내하는 해부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
요로 다케시 지음, 박성민 옮김 / 궁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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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몸을 가까이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내키지도 않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인체의 구조를 알아야하는 의대생들이다. 의대생에게 해부학은 성인식과 같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의대생들은 직접 사체를 해부하면서 의사가 갖춰야 할 담대함을 배운다. 사체 기증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는다. 해부학 실습 전에 교수와 학생들은 고인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연다.

 

해부해본 적이 있는 의대생이나 해부학을 전공한 사람을 만나면 꼭 한번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해부 실습실에 안치된 진짜 사체와 공포영화에 묘사된 사체 중 어느 게 무섭지 않으세요?” 나 같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일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해부학 교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는 일반인에게는 으스스하게만 느껴질 해부학을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인체의 구조, 해부의 기본 순서와 원리, 해부용 사체, 해부학의 역사 등에 관해 알려준다. 이 책의 저자는 해부학과 뇌 과학을 전공한 작가 요로 다케시(養老孟司)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바보의 벽》(재인, 2003)은 자신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는 인간의 행동을 뇌 과학적 관점으로 설명한 책이다. 요로는 인간의 뇌 속에는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바보의 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벽으로 인해 인간들은 알고 싶지 않은 것, 자신과 반대되는 내용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보를 차단해버리면서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해부학 교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는 청소년을 위한 해부학 입문서로 1993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며 2005년에 문고판으로 다시 나왔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호기심 많은 청소년부터 의학 상식을 배우고 싶은 어른들까지 두루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습 정도를 다루겠지 하면서 본다면 오산이다. 책은 해부에 관한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연거푸 던진다. 인간은 왜 해부를 금기시하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해부를 시도하려고 했을까. 사체는 ‘죽은 몸’일까, 아니면 ‘물건’일까. 몸과 마음의 관계는?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인데도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을 만나면 훌훌 책장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해부학은 의학에 바탕이 되는 기초 학문이다. 대부분 사람에게는 해부학이 의대생들을 위한 전문적인 학문으로 인식될지 모르나 해부학은 몸을 알기 위해 배울 게 많은 학문이다. 우리는 어릴 적 한 번쯤은 인체 장기를 본뜬 모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 경험이 있다. 소독약 냄새나는 실험실에서, 약간 겁먹은 눈으로 과학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내 몸 안에도 저런 것들이 들어 있을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 대한 소소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굳이 여러 가지 사례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동서양에서는 몸이 중요한 주제였다. 학문의 역사 속에서 몸은 사색의 대상이자 탐구의 대상이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호기심은 해부학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요로 다케시가 생각하는 해부의 목적은 몸을 아는 것이며, 더 넓게 말하자면 해부는 ‘인간’을 알기 위한 과정이다. 몸은 지구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복잡 오묘하고 경이롭다. 그래서 몸은 ‘소우주’,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도 불린다.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몸을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환경과 문화 같은 외부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장소가 모두 몸이다. 그런 점에서 몸을 아는 것은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는 인간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해부용 사체를 다시 보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사체는 ‘죽은 몸’이지만,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완전히 해체되기 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나는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무엇으로 선택할까. 누군가의 눈이 될 수도 있고 심장이나 간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진열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하나?

 

 

 

 

※ Trivia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재판이 끝나고 나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38쪽)

 

 

→ 갈릴레오의 명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갈릴레오 사후에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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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3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3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2-14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을 위한 해부학 입문서라면 제가 읽으면 좋을 책 같습니다. 다방면의 독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전혀 상관 없는 책 같지만 막상 읽어 보면 어떤 책과 어떤 책 사이에 어떤 연결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예술로 가는 길은 하나다, 또는 배움의 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져요.

cyrus 2019-02-18 15:21   좋아요 0 | URL
이 책이랑 김승섭 씨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과 같이 읽으면 좋아요. 두 책에 연결고리가 있거든요. ^^
 

 

 

올해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러스킨의 생일은 2월 8일이다. 러스킨은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미술비평가, 사회 사상가로 활동했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과 러스킨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1837년에 여왕이 왕좌에 오르면서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었고, 여왕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던 1843년에 러스킨은 『근대 화가론』을 펴내면서 미술비평가로 주목받았다. 빅토리아 시대는 여왕이 1901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러스킨은 19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죽음은 대내외적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대영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 영국 빅토리아 시대와 라파엘 전파에 대한 책들

 

 

 

 

 

 

 

 

 

 

 

 

 

 

 

 

 

 

 

 

 

 

 

 

 

 

 

 

 

 

 

 

* 존 러스킨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좁쌀한알, 2018)

* 이주은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이봄, 2016)

* [품절] 리처드 D. 앨틱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아카넷, 2011)

* 티머시 힐턴 《라파엘 전파》 (시공사, 2006)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 (예경, 2002)

 

 

 

1840년대 후반, 영국 화단의 보수성에 반기를 든 신진 예술가 집단이 등장한다. 1786년에 창립된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는 고전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화의 전통을 중시하고, 상류층 중심의 예술가를 배출하는 보수적인 곳이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보수적인 화풍을 벗어나 라파엘로(Raffaello) 이전에 활동한 중세 화가들의 작품을 본보기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이름으로 작품들을 남겼다.

 

‘Pre-Raphaelite Brotherhood’를 직역하면 ‘라파엘 전(全) 형제동맹’이다. 우리나라에선 ‘라파엘 전파’로 단순하게 번역되어 알려지는 바람에 라파엘로의 화풍을 이어받는 예술가 단체로 오해하기 쉽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주의 화풍을 거부하고 중세 예술을 선호했다. 라파엘로를 거부하는 화가들의 목적은 르네상스 미술을 모방하는데 급급하던 당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전통을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라파엘 전파는 전통적이고 엄격한 기법과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직접 관찰해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준 지지자다. 라파엘 전파가 혹평을 받으면 러스킨이 나서서 라파엘 전파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러스킨은 1857년에 발표한 평론집 《라파엘 전파》에 밀레이와 홀트를 ‘온갖 만류와 반대를 무릅쓰고 견뎌대는’[주] 전도유망한 청년 화가로 소개했다. 러스킨과 밀레이는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러스킨은 밀레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그의 화풍의 방향성까지 알려주는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주었다.

 

 

 

 

 

 

 

 

 

 

 

 

 

 

 

 

* 이주헌 《그리다, 너를》 (아트북스, 2015)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밀레이가 러스킨의 아내 유페미아 그레이(Euphemia Gray, 애칭은 ‘에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에피도 밀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에피와 러스킨의 결혼은 사랑보다 집안 체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 에피의 연애 행각을 비난할 수만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건 러스킨과 관련되어 있다. 러스킨은 6년 동안 에피와 부부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의 섹스를 피했다. 러스킨은 벌거벗은 에피의 몸에 난 털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그는 음모(陰毛)를 싫어했다. 러스킨은 털 한 올도 없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여성의 몸을 좋아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과 시부모의 지나친 간섭에 싫증이 난 에피는 러스킨과 이혼하기로 결심한다. 이 삼각 스캔들이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자신의 친구이자 지지자인 아내를 뺏어간 밀레이와 대담하게도 자기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낸 에피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이혼 소송을 접수한 교회 법정은 에피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에피와 러스킨은 부부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다. 그 후 에피는 밀레이와 결혼하여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

 

 

 

 

 

 

라파엘 전파번역본 끝부분에 러스킨의 생애를 정리한 연표가 있다. 당연히 이 연표에도 러스킨, 밀레이, 에피의 삼각 스캔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에피와 이혼한 지 4년이 되던 해에 러스킨은 아일랜드 출신의 로즈 라 투셰(Rose La Touche)와 사랑에 빠졌다. 이때 로즈는 아홉 (!), 러스킨은 39, 곧 마흔()을 앞둔 나이였다. 러스킨은 로즈가 18살이 되던 해인 1866년에 청혼하지만, 로즈는 3년을 더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1869년에 러스킨과 로즈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만났지만, 그때도 로즈는 러스킨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것도 있지만, 로즈의 부모 입장에선 이혼 경력이 있는 섹스리스(sexless)인 러스킨을 신랑감으로 볼 수가 없었다. 결국 1872년에 로즈는 러스킨의 청혼을 거절했다. 1875년에 로즈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러스킨은 큰 충격을 받았고, 말년에 강신술에 빠질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러스킨의 연표에 러스킨와 로즈 라 투셰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이 있지만, 상세하지 않다. 그리고 그 내용에 오류가 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 로즈 라 투셰에게 청혼하나 투셰는 3년을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3년 후인 1872년 로즈는 러스킨이 사회주의자이자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청혼을 거절했다.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153쪽)

 

 

1866년에서 3년을 지나면 1869년인데, 책의 연표에는 ‘3년 후인 1872년’이라고 적혀 있다. 연도를 계산하면 저렇게 나올 수가 없다. ‘6년 후인 1872년’으로 쓰는 게 맞다.

 

 

 

 

 

 

 

 

 

 

 

 

 

 

 

 

 

 

* [절판] M. 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2》 (까치, 1990)

 

 

 

절판된 《노튼 영문학 개관》 2권에 러스킨을 소개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도 삼각 스캔들, 그리고 로즈와의 관계가 언급된다. 하긴 두 번이나 실패한 사랑은 러스킨의 명성뿐만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사건이므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러스킨이 에피와 결혼한 것을 ‘재앙’이라고 했고, 부부 관계은 ‘예식’으로 순화하여 표현되었다.

 

 

 1848년 그가 에피 그레이와 결혼한 것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6년간을 동거한 후에 단지 예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결혼무효 소송을 제기하였다. 남들은 그녀를 대단한 미인으로 여겼으나, 러스킨 자신은 자기 아내의 몸매가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증언하였다. 그녀의 미모를 예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라파엘 전파 화가 존 밀레이는 그녀의 남편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 무효가 성립된 직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M.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2》, 213쪽)

 

 

인용한 문장만 보면 러스킨의 이혼 스캔들을 편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러스킨은 에피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여성에 향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녀가 러스킨을 만나 결혼한 것, 또 이혼 소송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시대를 만난 것이 재앙이었다.

 

 

 

 

[주] 존 러스킨, 임현승 옮김,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젊은 화가들의 새로운 도전』,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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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2-1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러스킨이 그 존 러스킨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그의 이름을 들은 게 중학생 때였어.
2학년쯤 됐을 것 같은데 베스트셀러가 시큰둥한 거야.
어려운 책을 읽고 싶었지.
단골 동네 서점에 존 러스킨의 책이 있냐고 했더니
없다는 거야. 내가 알기론 그 주인 아저씨도 나름
책 꽤나 아시는 분인데 말야.
난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런 동네에서 그런 책이 있을 리
없지 했는데 그때 참 겁이 없었어.
모르긴 해도 그때 러스킨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 전이었던 것 같아.
그때 누가 러스킨은 존경한다고 했걸랑 그래서 알고 싶었던 건데.ㅎㅎ

cyrus 2019-02-12 17:07   좋아요 0 | URL
<깨와 백합>이라는 책이 1972년에 을유문화사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된 적이 있어요. 혹시 누님이 읽은 책이 이거 아닌가요? ㅎㅎㅎㅎ 그 책이 작년 12월에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라는 이름으로 나왔어요. ^^

stella.K 2019-02-12 17:41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그게 또 작년에 새로 나왔구나.ㅋㅋ

페크(pek0501) 2019-02-1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의 이혼은 꽤 큰 사건이겠고 무척 상처가 되는 사건이었을 텐데 잘 극복했나 보군요.
다른 사람과 재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두다니... 질질 끌게 아니라 때론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9-02-18 15:24   좋아요 0 | URL
러스킨이 에피의 이혼 요구를 무시하고 질질 끌었죠. 왜냐하면 이혼 스캔들이 나면 미술비평가, 사회사상가로서 자신의 명성에도 흠집이 생기니까요. 아마도 러스킨은 본인의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고, 가족과 같은 친구 밀레이에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기 싫어서 에피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한 책읽기 - 세상을 이해하는 깊고 꼼꼼한 읽기의 힘
로버트 P. 왁슬러 지음, 김민영 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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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은 읽어도 남는 게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설은 유용한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다. 소설 속에도 지식이 있지만, 전문 분야를 다룬 책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도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소설은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인생의 정답이 없다. 그래서 소설 한 권 읽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읽기의 가장 큰 목적은 소설 속 상황에 부닥친 등장인물을 로 설정한 후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과 더불어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때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소설 속 인물에게 깊이 감정이입을 할수록 재미있고, 그렇지 못할수록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지와 영상, 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설 속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낯설어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사람들은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아예 책을 멀리하고 인터넷이 있는 스마트폰을 더 좋아한다.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책은 아무도 찾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쾌락을 찾는 데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끈질기게 책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책의 매력을 느끼려면,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위험한 책읽기언어로 빚어진 이야기(linguistic narrative)를 이해하기 위해 깊이 읽기(deep reading)를 강조한다. 언어로 빚어진 이야기는 종이책 속에 있다. 위험한 책읽기에 언급되는 깊이 읽기종이책을 느리게 읽으면서 사색하는 방식이다. 위험한 책읽기의 저자가 깊이 읽기를 강조하는 것은 작가의 화려한 문체를 익혀 좋은 문장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 자신과 타자를 둘러싼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책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내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다.

 

깊이 읽기는 산책(散策)으로 비유될 수 있다. 산책은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의 언어를 읽는 일이다. 산책은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 흙냄새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언어에 집중하는 깊이 읽기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독자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여덟 가지 산()코스를 공개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들려준다. 코스는 다양하다. 창세기 1~3, 프랑켄슈타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암흑의 핵심, 노인과 바다, 호밀밭의 파수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파이트 클럽,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등이 있다. 코스의 순서에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가면(읽으면)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책 읽기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까. 왜냐하면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줄거리가 아닌 이야기로 표현된 유한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조우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우리에게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무엇인지 상기시켜준다.

 

(27)

 

 

  우리는 상황을 용이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와 정보를 수집한다. 그러나 내러티브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질문으로 몰아넣는데,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이다.

  이야기는 무엇이 인간 세계에서 지속되며 무엇이 이 세상의 인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이 가진 불안정함,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평범함이다.

 

(291)

 

글꼴을 굵게 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작가와 독자 모두 인간이며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나약한 면모를 이야기를 통해 노골적으로 전하고, 독자도 자신 또한 초라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앞서 언급했듯이 소설에는 인생의 정답이 없다. 인간은 날마다 인생은 무엇이다라고 여러 번 정의를 내리면서 살아간다. 독자는 그러한 정의를 수차례 번복하면서까지 소설을 읽는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독서는 내가 누구인지, 나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아가는 지적인 여정이다.

 

저자는 깊이 읽기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 불능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데 인색해진다. 그들은 타인이 겪는 삶의 고통이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데 독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책을 접할 때 비로소 독자는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발견한다. 그렇게 받아들인 타인의 이야기는 독자의 자아를 성장시킨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비로소 책은 따분하고 위험한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될 것이며 평생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Trivia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말을 인용한 문장에 큰따옴표(”) 한 개가 없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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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2-11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는 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전보다 조금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cyrus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cyrus 2019-02-12 16:20   좋아요 1 | URL
소설도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주죠. 그래서 소설은 절대로 저평가해선 안 되는 장르입니다. ^^

레삭매냐 2019-02-11 1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소설을 읽습니다만.

소설읽기를 통한 내재화의 쾌락
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습니다.

단언코.

cyrus 2019-02-12 16:22   좋아요 0 | URL
요즘 소설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솟아나고 있습니다. 독서모임을 통해서 만나는 분들이 소설을 즐겨 읽어서 제가 이분들 덕분에 편식 독서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전 소설을 재미로 읽는데, 사람들도 만나고...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회사에 보고서 제출할 때도 훨씬 빠르고 쉽게 작성하는 것 같구요... 소설도 도움이 되는데... 왜 ㅠㅠ

cyrus 2019-02-14 17:20   좋아요 1 | URL
대부분 사람은 소설을 ‘시간 때울 때 읽는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라는 장르를 가볍게 보는 거죠. ^^;;

카알벨루치 2019-02-14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은 위대합니다!!!

cyrus 2019-02-14 17: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그 속에 다양한 사람들의 서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문학의 깊이를 알면 좋을텐데요. 킬링타임용 소설만 있는게 아닌데, 안타까워요. 저도 예전에 대표님께 소설책 나부랭이 읽는다고 여러 말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갑자기 울컥하네요ㅠㅠ

cyrus 2019-02-18 15:28   좋아요 0 | URL
상대방이 어떤 장르의 책을 읽느냐에 따라 시선과 반응이 다르죠. 상대방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면 ‘재미있는 책을 읽는구나’ 정도로 생각하지만, 인문학 책 같이 생소하고 어렵고 분량이 많은 책을 ‘들고 있기만 해도’ 그 사람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

페크(pek0501) 2019-02-1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알기까지 여러 권을 읽어야 합니다. 수십 권 정도?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해 알게 된다고 느낍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을 읽었는데 그런 게 나와요. 큰 농장을 가진 주인이 나이가 들어 자신은
늙었고 언젠가는 죽게 될 텐데, 하면서 자기 대신 농장을 경영할 사람이 없나, 하고 고민합니다.
딸이 대신 농장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딸은 그곳 좁은 지역에서 사는 게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큰 도시로 가고 싶어도 아버지의 농장 때문에 갈 수도 없고... 결국 많이 가진 아버지와 딸은 불행한 사람인 거죠. 소설 주제는 다른 거예요. 그런데 주제보다 저는 주제와 관련 없는 이런 이야기 - 부자들은 근심이 많다, 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소설로 배웁니다. 소설을 읽어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 생생하게 느끼게 되지요.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가 보지 않아도 소설을 통해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어요. 이런 게 소설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합니다.

cyrus 2019-02-18 15:33   좋아요 0 | URL
소설을 많이 읽으면 다양한 삶을 살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비록 가상 인물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했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종이 위에 살아 숨쉬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페크님의 말씀처럼 소설을 읽어야 인물을 이해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