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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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이제 22일 남았다. 시간 새끼, 정말 잘도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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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이 책을 통해 syo는 총 4가지를 새로 알거나 고쳐 알게 되었다.


  

첫째, 타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감수성이 늘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썰. 특히 그의 저작을 읽은 이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바를 생각해보면 이것 참 뜻밖이로세 싶을 정도.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 교육하는 것은 미국수정헌법 제 14조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남부는 즉시 들끓었다. 이 판결로 학교를 갈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엘리자베스 엑포드라는 이름의 14살 흑인 여자아이가 리틀록 센트럴고등학교로 등교하는 첫날, 195794, 주지사는 그녀의 등교를 막기 위해 총검으로 무장한 주 방위군을 그녀의 등교 길에 투입했다. 길에 늘어선 백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위협했다



그러나 엑포드는 자신이 얻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그리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백인들의 험한 표정이) 찍힌 사진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자 마침내 한나 아렌트에게도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뜻밖에도(이 뜻은 syo 뜻) 아렌트는 공립학교에 흑인과 백인의 통합 교육을 강요하는 연방정부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정부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합법적으로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부는 평등-사적 영역에서는 획득될 수 없는 원리-의 이름으로만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부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이런 관행들이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 교육은 사적인 문제이어야 하며, 정부는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에 대한 부모의 결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만일 유대인인 내가 유대인 친구들과만 내 휴가를 즐기겠다고 한다면 이런 내 계획을 어떻게 누가 합리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는 마치 다른 휴양지 업소가 휴일을 보낼 때 유대인을 보고 싶지 않아하는 고객을 유치하면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내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그녀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그러나 휴가를 함께 보낼 친구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관련된 (그다지 악성이 아닌사회적 차별과 흑인들이 일상적 삶에서 강제로 경험해야 했던 폭력적 차별을 비교하는 것은 극도로 무감각한 것이다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사회적인 것사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구별을 잘못 강요했다. (...)

  아렌트의 둔감함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인종차별에 대해 더욱 공감할 수 있고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그녀의 저술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유대인과 흑인을 유비적으로 보는 방식은 조심해야 하지만그런데도 아렌트는 누군가가 유대인으로서 공격받을 때는 독일인으로서가 아니라 또 인권의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때의 자기 경험에 근거해 흑인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86)


추후 아렌트는 그녀에게 쏟아진 다양한 비판들을 수용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의 견해가 올바르지 못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인간의 조건의 저자이며 향후 몇 년 안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대한 무능력함을 강력하게 비판하게 될 거장조차 모든 순간 쉬지 않고 위대한 인간일 수는 없다는, 어찌보면 평범한(진부한) 사실의 진부한(평범한) 사례라고 해도 될까?

 

 

둘째, 알고 보니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지만, 오히려 속았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기막힌 통찰을 길어낼 수 있었다는 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예루살렘 재판정에서 보여준 태도, 광신적인 나치 분자보다는 평범한 관료에 가까운 모습, 상투어로 가득한 변론 등을 토대로, 내면에 수천 마리의 괴물이 들끓는 것이 악이 아니라 괴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악이며,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선량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조차 무사유의 허방을 잘못 짚으면 상상도 못할 크기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 후로 아이히만의 행적이 더 상세히 알려졌는데, 독일을 탈출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때의 아이히만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평범하지 않은 악인의 모습에 가깝다고 한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까지 보았더라면 악의 평범성개념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이렇게 판단했다.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가해자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히만에 대해서는 아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자기연출 전략에 속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부분적 이유는 그가 흉내 낼만한 수많은 가해자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98)


아이히만이 자기가 개새끼라는 데 당당한 개새끼였다면 악의 평범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더라도 한나 아렌트의 작품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봐도 될까?

 

 

셋째, 이건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이지만,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똑바로) 읽어봐야 되겠다는 썰......

 

플라톤의 국가의 주요 주제는 철학과 정치 사이의 갈등즉 철학적 진리와 정치적 의견 사이의 갈등이다정치는 불안정하고 서로 충돌하는 의견들에 기초한 것이지 영원한 형상에 대한 참된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므로, “진짜” 정치에서는 권력과 힘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국가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논박하고참된 정의는 철학자들이 알기를 열망하는 이성적 진리의 영원한 기준에 부합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관적 논증으로 읽을 수 있다. (107)

 

일단 2500살쯤 먹은 책은 그 자체로 뜨악한 데가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syo같은 새빨간 유물론자와 이데아’, ‘영원한 형상같은 단어가 만나 일으키는 화학작용은 찌푸린 미간, - 하는 비릿한 웃음과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유발하고, 그 결과 책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는 확률로 침대 한 구석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배배 꼬인 마인드를 견지하고 국가를 계속 읽어나가면, 결국은 철학자가 독재 정치해야 된다는 거잖아. 이건 철학자라는 양반들이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 짜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군, 하는 시시껄렁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의 신이 강림하신다고 해도 그의 독재에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정치체제를 다루는 책으로서의 국가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국가정의에 대한 생각거리로 쓰자고 들면, 좀 다른 결론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철학자들이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이 정의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정의 구현이라는 뜻이다. 정의는 불변의 실체일까, 합의의 결과일까, 강한 자의 이데올로기일까. 정의는 과연 이룩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못 들어 올릴 것 같은데 자꾸 한 개만 더, 한 개만 더를 외쳐대는 트레이너처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만 주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는 데 의의가 있는 가상의 골인 지점일까.

 

결국 달리 생각하면 국가는 정의를 정의하는 토론회에서 어느 한쪽 참가자가 토해놓은 열변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통치하는지의 문제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숨겨져 있는 구조를 세세하게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아직 많지만, 거시적으로 봐서는 거의 답이 나온 문제라 진부하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이야기라면 유통기한이 없지. 어쩌면국가를 국가에 대한 책으로 읽어서 재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앞으로는 책 좀 똑바로 읽어.....

 

 

마지막으로, 번역자 김선욱 선생님에 대한 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이 책의 역자가 같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주술호응이 어긋나거나 잘못된 조사가 사용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독히도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가득해, 가뜩이나 없는 재미가 더 없었다. syo는 그것이 역자의 역량, 편집자의 역량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정말 건방지게도. 그런데 이 책의 문장은 깔끔하고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뭐야, 그러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은 한나 아렌트가 그런 거야? , 아렌트가 그랬어?

 

그러고는 뒤져봤더니, syo는 이미 김선욱 선생님이 쓰신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기억이 났다. 아주 괜찮게 읽었었는데. 그리고 그때의 평을 찾아보니 이렇게 써 놨다.

 

- 깔끔하다.

-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몹시 훌륭하다.

- 핵심만 쉽게 꽂아놓았다.

- 그러다보니 원전을 왜곡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입문 첫 책은 바로 이것.


이렇게 빨아놓고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번역이 구리다고 깠다..... 왜 그랬을까. syo가 왜 그랬을까..... 여러분, syo라는 놈의 서평 능력이 이렇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맨날 잡글만 쓰는 거라구요(핑계)......

 

 



--- 읽은 ---

+ 심용환의 역사토크 / 심용환 : 78 ~ 294

+ 감염된 독서 / 최영화 : 54 ~ 306

+ 싸우는 식물 / 이나가키 히데히로 : 11 ~ 235

 

 

--- 읽는 ---

- 산수의 감각 / 조지 셰프너 : 38 ~ 124

- 이야기 한국 미술사 / 이태호 : 62 ~ 124

- 도시를 보다 / 앤 미콜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 8 ~ 55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7 ~ 46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61 ~ 68

- 화재의 색 / 피에르 르메트르 : 11 ~ 302

- 책 쓰자면 맞춤법 / 박태하 : 5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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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5-2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성인들의 이론적 한계를 알게 되면 그들을 멀리하기보다는 더 자세히 알고 싶어져요. 인간적인 그들을 알기 위한 인간적인 공부죠... ^^

syo 2019-05-24 13:2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전 어차피 까먹어서.... 나나 조심하고 살아야겠다- 하고는 얼릉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스타일입니다 ㅎㅎ

2019-05-24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2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너마저...남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회의가 드네요. 자신과 어떤 최소한의 접점이 있는 소수자에게만 우리가 선택적 이입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박정희 초상 보며 유생 차림으로 절하는 할아버지에게 제가 공감과 위로를 보내지 못하는 것처럼요.) 타자 감수성이라는 게 정말 다른 누군가를 헤아리고 그들의 입장에 서는 능력이라기보다 다른 누군가와 자신이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을 (매의 눈으로) 낚아채는 능력이 아닐까(아니면 너도 나고 내가 너야 하고 스스로를 잘 속아?넘기는 능력이 아닐까)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선택된 민족이면서 핍박받은 민족 소속이라는 자기 인식에 갇힌 사람이 흑인 차별(혹은 차별 금지)정책에 대해 저런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니들은 그래도 수용소나 학살은 안 겪어 봤잖아? 뭐 이런) 유대인도 흑인도 아닌 저의 뇌피셜이니 이것도 그냥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자 입장이 되지 못하고 열심히 까기만 했던 또다른 1인으로서 반성해야 겠네요. (범인은 누구냐...)

syo 2019-05-24 15:19   좋아요 1 | URL
와, ‘속아넘긴다‘는 표현 탐나네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헤아릴 수 있으면 헤아리고 헤아리지 못하겠으면 그냥 들어야 될 것 같아요.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독서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효적으로는 경험과 부딪힘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테니 의도적으로 획득하려 노력한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만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 정도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요즘은 ‘헤아릴 수 있는 능력‘보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더 절실한 것 같아요.
그저 들어야 할 일에 먼저 말을 하는 것이 말해야 할 사람의 말을 막는 일이 될까봐 겁이 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24 16:13   좋아요 0 | URL
탐나시면..바치옵니다ㅎㅎ착한 자기기만? 저는 착한 쪽도 나쁜 쪽도 잘 못하네요...먼저 말하지 않기, 말 한 마디 덜 하기, 한 마디 더 듣기, 나는 아직 쟬 잘 모른다 되새기기,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

2019-05-24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대 syo3요소

 

 

1. 독서

 

시험은 이제 25일 남았다. 본격 총정리 씨-즌이군.

 

그런 와중이지만서도 매일 꼭 250~300쪽 씩은 읽으려 용쓰고 있다. 딴엔, 공부 밖에 하는 게 없는 놈이 꼴랑 공부한다는 핑계로 안 읽는다니, 직장이라도 다니는 날에는 뭐 아예 신나서 문맹이라도 될 작정인가 보지? 요런 마인드로부터 나온 귀결이긴 한데,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너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이 글들을 쓴 시기가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절이었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원 일과 환자를 보는 일과 요구받는 일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숨 막히는 시간이었습니다사실 그런 시절은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어깨에 지워진 본연의 업무를 달리 누구로 대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견뎠고 세월이 흘러간 것입니다꾹꾹 참아 견디기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데 저는 죽어가는 화분을 살리거나책에서 나와 같은 의사 혹은 감염병을 찾아내거나글로 신세 한탄을 하는 데서 탈출구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문은 닫혀 있었으나 그래도 어딘가 창 하나를 열어둔 셈이지요.

최영화감염된 독서

 

마음속에 약간의 성의만 있다면 아무리 난리 속이라도 반드시 진보할 수 있는 법이다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몸에 재주가 없느냐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영원히 폐족으로 지낼 작정이냐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꺼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잘못을 벗어날 수도 있고가난하고 곤궁하여 고생하다보면 그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생각을 넓히게 되어 인정이나 사물의 진실과 거짓을 옳게 판단할 수 있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정약용박석무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 육신

 

어린 syo(갑자기??) 작은 아이였다. 둘째 줄 책상 그 뒤, 키 큰 오랑캐놈들이 차지한 광활한 영토는 한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던, 꾸준하고 성실하게 조그만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라서 작은 어른이 되었다. 너무나 예상대로였다. 흔한 반전 하나 없었다. 남자는 군대 가도 키가 자란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군대 가도 키가 자라지 않는 자는 남자도 아니라는 말인데, 그 말 같지도 않은 말 때문에 스무 해 넘게 지켜온 성 정체성에 위기가 닥치는 것을 용납해야만 하는가? 용납해야지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syo는 여전히 syo를 둘러싼 모든 친구 그룹에서 가장 키가 작은, 혹은 그 다음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사람 참 안 변한다.

 

작은 어른으로 사는 게 불가피한 일이라면 그나마 작고 가벼운 어른이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허허허. 어린 syo는 작고 가벼운 아이였다. 국민학교 3학년 신체검사 날까지 20kg이 채 되지 않았다. 작고 가볍고 날렵한 아이여서, 여자아이들을 날렵하게 괴롭히고는 홍길동처럼 요리조리 잘도 도망 다녔고 잡힐 일이 없었다. 날쌘돌이 syo길동이는 축구도 잘했고, 어린이 운동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어달리기에서는 의심의 여지없는 라스트 주자이기도 했다. 꽃 같은 시절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변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랬는데, 시절이 바뀌어 초등학생이 되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하루가 멀다고 코피가 빵빵 터지는 국민학syo를 보다 못한 엄마가 어느 이름나고 음습한 한약방에서, 정말 고문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마실 수 없는 맛의 한약 오조 오만 톤을 지어 왔는데, 우리 조상들의 피땀눈물로 이룩한(맛이 피땀눈물 맛) 그 전통 깊은 지혜의 산물을 모조리 들이켜는데 장장 18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초등학syo는 코피를 잃는 대신, 놀라운 양의 체지방을 얻었다. 그건 엄마와 한약방 고문기술자님에겐 절반의 성공으로 해석되는 일일지 모르겠으나, syo에겐 그 후로 이어진 긴 인생 전체를 진한 스트레스빛으로 물들인 지독한 똥망이었다. 자라라는 키는 안 자라고!

 

저학년 syo길동이는 그렇게 고학년 syo꺽정이가 되었다. 꺽정이도 길동이처럼 역시 특별한 이유 없이 여자아이들에게 짓궂게 굴었으나, 뭔가 양상이 많이 변했다. 꺽정이는 길동이처럼 압도적인 스피드를 이용해 쫓아오는 여자아이들을 여유롭게 따돌릴 수가 없었다. 전략은 바뀌었다. 그렇다면 쫓아오는 아이가 지칠 때까지 나도 참고 달린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력이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재미가 없는 일이었다. 1분만 달려도 추격자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여유로운 시절에는 몰랐다. 쉬는 시간 10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쫓고 쫓기고 숨 고르고 땀 닦는데 통째로 낭비하기에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변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길동이나 꺽정이나 땋은 머리를 잡아당긴다거나, 고무줄을 끊는다거나, 쪽지나 신발주머니를 날치기한다거나 하는 짓은 비슷했지만, 길동이와 그런 시간을 보낸 여자아이들은 편지랄지, 초콜릿이랄지, 구하기 힘든 따조랄지, 인기 가요를 직접 녹음해 만든 믹스 테이프랄지 뭐 이런 것들을 길동이에게 건네주며 우리 주말에 같이 롤러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을래? 와 같은 유형의 다양하고 앙증맞은 교섭을 시도하곤 했다. 그러나 꺽정이가 나타나자 그 아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선생님, 반장이 괴롭혀요! 반장은 반장이므로 훈방조치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운동장을 돌리는 비겁한 담임선생이 아니었다면 syo꺽정이도 한층 더 힘든 시간을 보냈겠으나, 운동장을 돌지 않는다고 해서 기운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길동이가 너무 그리웠고, 반장은 괴롭힐 의지를 상실했다. 꺽정이는 자기 처지를 알고 나자 기하급수적으로 소심해졌고, 중학교에 올라가자 꺽정이는 마침내 걱정이가 되고 말았다.

 

왜 좋은 것들은 다 변하고, 안 좋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가. 물론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군대-방구석의 길고 긴 인생의 사슬 위에서 때에 따라 약간씩의 변동은 있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syo는 늘 배나온 민족이었다. 배 나온 중학생 -> 배 나온 고등학생 -> 배 나온 대학생 -> 배 들어간 이등병(만세!) -> 배 들어간 일병(영원하라!) -> 배 나오기 시작한 상병(어어어) -> 배 엄청 나온 병장(안녕, 나야, 배. 오랜만이지?) -> 배 나온 백수(넌 나를 벗어날 수 없어) -> 배 나온 백수 아저씨(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일관성 있는 인생이란 참 복잡한 심정을 유발한다......

 

요즘 체중은 큰 변화가 없는데 배는 자꾸 나온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판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TMI 죄송합니다.


 

물론 그때는 살아온 인생 중에서 제일 늙었을 때였기는 했지만앞으로 이보다 더 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마음이 그래서인지 서른 살을 갓 넘겼을 때였는데회사에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제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더라고요그때는 김 과장이었는데그래서 그런 포스가 풍겼을지도 모르죠마음이 그보다 더 늙었었어요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거든요. 10대와 20살아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했던 청춘 시절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여분의 삶이다그런 생각이제부터는 인생이 크게 바뀌지는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이다뭐 그런 생각지금 그때의 제게 돌아가서 뭔가 얘기해준다면정신 차리라고 하고 싶네요네가 얼마나 어린지 아느냐고그러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하지만 못 돌아가는 거니까요그건 누구나 다 거치는 과정 같은 것이겠죠지금은 그때처럼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생각 같은 걸 안 해요그때 이후로는 계속 그랬어요그런 의미에서 가장 늙었던 시절이었죠.

김연수금정연청춘의 문장들+ 

 

기억은 실존의 문제입니다여러분이 여러분일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억들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의 거울뉴런은 끊임없이 여러분을 구축하는 기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외부자극을 찾습니다하지만 그런 자극을 줄 수 있는 기억의 공간들이 점점 사라진다면 여러분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승효상 외도시 인문학 강의 서울의 재발견


 

 

3. 사랑


수갑을 차고 사랑하는 것만 같다.


 

예전에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보세요눈을 감고 뜨는 방법그 한 가지 행위만으로도 두려움과 아름다움슬픔과 사랑그 이외 원하는 어떤 감정이라도 드러낼 수 있음을 당신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요사랑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일생 동안 단 한번이라도 사랑이 무엇인지사랑에 빠지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솔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느껴 본 상태라야만 합니다물론 분노나 이름 없는 슬픔 등 모든 이가 살면서 한 번쯤 겪게 되는 감정들의 경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로베르트 발저문의에 대한 답변


 

 

--- 읽은 ---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본격 한중일 세계사 3 / 굽시니스트 지음

세상을 바꾼 씨앗 / 장인용 지음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 임병걸 지음

도시 인문학 강의 : 서울의 재발견 / 승효상 외 지음

 

 

--- 읽는 ---

심용환의 역사토크 / 심용환 지음

이야기 한국 미술사 / 이태호 지음

산수의 감각 / 조지 세프너 지음

감염된 독서 / 최영화 지음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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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2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5일 남은 시험도 그리고 꾸준한 독서도
파이팅!입니다.

그나저나 발저의 <산책자>는 한 번 읽어
보겠다고 도전하기는 했는데 저랑은 여엉~
맞지 않아서 어딘가에 둔 모양입니다.

syo 2019-05-21 18:50   좋아요 0 | URL
와, 저도 처음에 사서 읽었을 때 정말 나랑 안 맞는다 싶어서 던져놨었는데요. 이제는 곧 죽어도 딱 하루에 한 꼭지씩만 읽고 덮는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두 꼭지 세 꼭지씩 읽는 반칙을 저지르고 싶어졌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5-2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나온 백수라...난 그냥 배씨...

syo 2019-05-21 18:51   좋아요 0 | URL
중요한 것은 배나온 배씨인가 배안나온 배씨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5-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3요소 중 사랑이 가장 맘에 닿습니다. 근데 다음주 시작하는 JTBC 드라마 ‘바람이 분다’ 예고편이 맘에 들어오더라구요. ㅎ
시험 방해해야지. ㅋㅋ

syo 2019-05-24 11:13   좋아요 0 | URL
헉 ㅋㅋㅋㅋㅋㅋㅋ 엄근진 이미지의 북다님께서 드라마 공격을 시전하실 줄은 몰랐네요.
그러다보니 더욱 공격력이 강력합니다....

2019-05-23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탕소년(중년)

 

 

1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인 하루를 어떻게 쪼개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수면욕에게 6시간을, 그 이외의 욕구들을 뭉뚱그려 2시간을 배급한다. 그러고 나면 16시간이() 주어지는지라, 공부에 12시간을 꼬라박는다 쳐도 4시간이 남는다. 무려 4시간씩이나 독서에 투자할 수 있다! , 완벽한 계획이다. 똭. .

 

원래 수능 만점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못해 간결하다. 만점 받을 때까지 열심히공부할 것. 성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늘 그랬던 것 같다.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나는 아닌 그런. 그러니까 방법만 알면 뭐해. 그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모르는데...... 결국 완벽한 방법을 고안해 낸 인간이 완벽하지 못하여 완벽하게 망하는 법이라.

 

세상에는 독서욕이라는 것이 수면욕, 식욕, 성욕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간이 있는데, 특히 독서에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 국면, 예를 들면 중간고사 기간이랄지, 한 달 뒤에 필기시험을 치러야 하는 공시생 입장이랄지, 하는 상황에 이르면 독서욕은 대차게 팽창하야 책이라면 성경 창세기마저 박진감 넘치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을 낳고 게난이 마할랄렐을..... 우오와아아아 너무 재밌어, 소오오름.....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월요일 화요일을 책으로 꼴딱 말아 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으하하하.....

 

 

 

2


    

 

1971년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그녀는 특히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전제에 도전하며미술가로 성공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그녀는 19세기에는 미술가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에 '누드모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수'였다는 사실을 검토했다그러나 19세기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어떤 누드모델을 그리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노클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권리를 박탈당한 이 한 가지 불합리한 예-여성 미술도들이 누드모델을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만 보아도여성의 재능과 천재성이 남성과 같은 기반에서 성공을 거두기란 제도적으로 절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근본적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 책임은 우리의 제도와 교육-인간이 의미 가득한 상징기호와 신호들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에 있는 것이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어느 날 저녁에 집주인 노파가 곁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이니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를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며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고 복()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였습니다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하였으니 이건 너무도 편파적이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셨다라고 했기 때문에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처음 태어나게 하신 분으로 나와 있소어머니의 은혜도 무척 깊기는 하지만하늘의 으뜸탄생되게 하는 근본의 은혜가 더 중요한 탓일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그러자 노파는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내가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풀이나 나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종자입니다어머니는 나무나 풀로 보면 토양입니다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 베풂이 지극히 미미한 것이지만부드러운 흙의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토양의 은공은 대단히 큽니다밤의 종자가 밤나무가 되고 벼의 종자가 벼가 되는데 그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은 모두가 땅기운입니다그러나 결국 나무나 풀의 종류는 본래의 씨를 따라서 나뉘게 되는 것이니옛날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예를 제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노파의 말을 듣고 흠칫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오묘한 진리가 이렇게 밥 파는 노파에게서 나올 줄이냐 누가 알았겠습니까기특하고 기특한 일입니다.

정약용 지음박석무 엮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딱히 엮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의 지혜와 재능이 발현되어 인정받는 과정에서 교육이나 사회 일반의 제도적 문화적 제약이 작용한다는 사실과, 그런 압박 속에서도 피어날 지혜는 피어난다는 것을 큰 눈으로 묶어 보는 것도 완전 억지는 아닐 것이다.

 

정약용이 형에게 보낸 저 편지를 옮겨 놓은 엮은이는 각주의 짧은 해설을 통해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배우는 다산 선생의 태도를 칭찬하였다. 물론 다산의 태도에 찬사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저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저건 그냥 다산 선생이 배울 만해서 배운 것이다. 다산의 입을 틀어막은 저 말을 밥 파는 노파가 아니라 이름난 유학자가 똑같이 했다면 누구에게서나 배움을 찾는 다산의 태도 운운했을까.

 

아랫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 불치하문不恥下問의 말은 훌륭한 듯 보이나, 배움과 별개로 두 사람의 고정된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배울 게 있어서 배우긴 했지만 배움이 끝나도 낮은 이는 낮은 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준 이가 지니고 있던 지혜가 훌륭한 게 아니라, 배운 이의 인품이 훌륭한 것이다. 그는 이제 모든 걸 가졌다. 지혜를 얻었고, 덕성을 인정받았고, 권력은 그대로 지켰다.

 

아랫사람이라 하여 아예 묻지 않는 이가 하급이라 하겠으나, 불치하문의 옛 인식을 고수하는 이도 상급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난 인정 못 해. .

 

 

 

3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어느 겨울 당신과 친구는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고, 이틀을 묵은 온천장을 나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으로 머그컵 한 쌍을 사서 나누어 가졌다. 그 컵에는 너무도 유명한 저 설국의 도입부 첫 두 문장이 세련된 흘림체로 각각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은 고민 없이 각자 좋아하는 문장을 골랐고, 겹치지 않았으므로 다툼 없이 자기가 원하는 머그컵을 챙길 수 있었다,

 

고 한다면, 어느 컵을 챙기시겠어요?

 

자체로 더 아름다운 것은 두 번째 문장이지만 저 홀로 설국의 문장임을 주장할 수 있는 문장은 첫 번째 문장이다. 첫 번째 문장 없이 두 번째 문장만 툭 주어진다면 우린 저게 설국의 두 번째 문장임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 첫 번째 문장 속 설국, ‘눈의 고장이라는 말이 앞서지 않으면,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다는 표현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문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아, 이것은 딜레마.....

 

 

 

4



각각의 모든 인간 조건에는 영혼이 있습니다이건 당신이 무조건 들어야 하고내가 무조건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나는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존중합니다타인에 대한 질투는 무조건 어리석습니다질투는 일종의 망상입니다모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그래야 모든 이들에게 이롭습니다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이 나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영향 또한 두렵습니다그 의미는 당신의 영향력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행해져야만 하는 내면의 불필요한 노동이 두렵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러 달려가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달려갈 수가 없습니다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일그건 어떤 의미에서건 어느 정도는 노동입니다그리고 이미 당신에게 밝혔듯이나는 전적으로 편한 것이 좋습니다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하지만 그런 건 내게 상관이 없습니다나는 그런 일을 상관하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또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굳이 사과를 늘어놓지도 않겠습니다어차피 입에 발린 사과일 테니까요누구나 진실을 말할 때는 정중할 수 없는 법입니다.

로베르트 발저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실패가 쌓이면 사람이 두려워진다.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아는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은 새로운 사람을 만들지 않는 단계, 그리고 실패의 탑 꼭대기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마침내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거리끼게 된다. 오래 머물면 결국 모든 사람을 잃어버리는 탑, 나라는 사람마저 녹아내리는 높고 뾰족한 탑이 잔뜩 지어진 세상이다. 달도 가려진 새벽 신림동 고시원 옥상에서 나는 보았다. 사방에서 빛나는 교회당 붉은 십자가들 사이사이로, 저마다의 모양과 높이로 자라고 있는 회색 탑의 바다를. 그들은 이른 점심을 먹는다.

 

무릎 나온 회색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거리에 나와,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오기 전에 밥집에 들러 후다닥 한 끼를 해결한다. 하나의 테이블엔 한 사람만 앉아 있다. 어제 내가 앉은 테이블에 오늘 앉은 이가 어제 앉은 테이블에 오늘 내가 앉는다. 그럼에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서로의 탑을 맞대어 높이를 재지 않는다. 그래봐야 그것은 진 사람과 진 사람의 지는 싸움일 뿐이다.

 

문제는 그렇게도 살아진다는 것이다. 조금 비참하고 가끔 슬프고 문득 외롭고 항상 지치면서도, 어떻게 숨은 쉬어진다는 것이다. 적응이 된다는 이야기, 무뎌진다는 이야기,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이 조금씩 줄어들고, 없이도 살아지는 것을 보니 인간에게 인간이란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이로구나, 하루에 한 움큼씩 딱딱해진다는 이야기다.

 

꼭 실패하지 않은 인간에게도 인간과 엮이는 일 자체가 하나의 노동인 세상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그 노동 하는 법을 잊고 살았다. 완전히 다 까먹기 전에, 관계를 만드는 장치의 엔진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이제 슬슬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백수 생활 5년이면, 야근이 소원이 된다.

 

 

 

5

 

다시금 잠적을 시도하자. 자꾸 시도해서 쪽팔리긴 한데, 일단 시도는 하자.

 

 

 

 

--- 읽은 ---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 김연수 지음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 / 루스 볼 지음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론 볼턴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 박시백 지음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늦은 인사 / 전윤호 지음

 

 

--- 읽는 ---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지음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 임병걸 지음

도시 인문학 강의 : 서울의 재발견 / 승효상 외 지음

한번 과학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 사카이 구니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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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6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16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번째 문장이 적힌 알라딘에서 준 (고장난)독서대가 있는데요. 고르라면 두번째 문장이 적힌 컵을 고를래요. 그나저나 저는 깨끗해 보이는 여자가 등장한 20페이지에 책표지를 끼워 넣고 몇 달을 안 보고 있네요. 나도 봐야지. (언젠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도 애들이 교실에 버리고? 간 걸 6년째 소장중인데 이거도 봐야지... 온갖 뽐뿌질만 하고 잠수하시(는거죠?)다니... 응원합니다. (저도 뽐뿌를 하자면 공무원이 되면 복지포인트라는 걸 주는데 그걸 전부 책 바꿔 먹어도 되요! 나랏돈으로 책읽기! 대신 백수를 벗어나면 읽을 시간이 없어지는 허점....)

syo 2019-05-16 22:36   좋아요 1 | URL
복지포인트 아니 그런 좋은 정보를?!
으하하하. 의욕이 뿜뿜입니다.

<설국>은 확실히 아름답습니다. 3회독짼데, 4회독 5회독 때는 더 아름답게 느껴질 것 같구요.

2019-05-16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모운 2019-05-1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밤의 밑바닥 고를 듯.

syo 2019-05-16 22:38   좋아요 0 | URL
다들 이거로구만. 나도 그렇고.
사실 첫 번째 문장도 아름다운데.....

clavis 2019-05-16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음악회 감상문을 잘 써서 내고 싶은 바람에 한 시간만 자고 (‘쓰기‘이기 때문에 거기에 꽂혀서) 기말 고사로 보아야하는 뮤지컬 가사 외우기에 실패했습니다.

친구들 노래 반주를 잘 해주고 싶었는데 그들의 스케쥴과 제 스케쥴이 맞지 않아서 같이 연습하는데에 실패했고, 오늘 친구들의 노래 반주를 해 주는데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실패들이 못나고 지겨워서, 비싼 커피도 먹고, 하소연도 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해 보았지만 마음을 일으켜내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힘들었다가, 우리 쇼님의 글을 보고,저 내일 전공 실기ㅡ한 학기 내내 그거에만 매달렸던 그거 보는 날이라,

제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해서,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자려고요. 예쁜 내일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명문가 쇼님, 멋지쇼요!의 쇼님ㅇㅣ시라던데!

syo 2019-05-16 22:42   좋아요 0 | URL
클래비스 님께 오늘은 힘든 하루였네요. 클래비스 님께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은 참 잘하신 결정인 것 같습니다. 응원하고, 동시에 클래비스 님의 열정에 스스로를 다잡게 됩니다.

마지막 말씀은 똑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뭔가 좀 알 것 같기도 한데요!! ㅎㅎㅎ

clavis 2019-05-1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거맞아요!

syo 2019-05-16 22:4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얼른 주무시고, 예쁜 내일을 맞이하소서!!

2019-05-17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7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의과도기 2019-05-18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랫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 불치하문의 말은 훌륭한 듯 보이나, 배움과 별개로 두 사람의 고정된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 문장에 가장 크게 공감했어요. 현실의 권력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행하는 사려깊음은 또다른 형태의 시혜이자 권력 관계의 강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새 자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점점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인지도...

syo 2019-05-19 09:1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이네요. 저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싶어요. 마음만 가졌지 실제로 그렇게 하고 다니지는 못하는 지혜들이 쌓여만 가는구나....
 
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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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소설을 쓰고 싶은 욕심이라곤 개불 새끼발가락만큼도 없지만 제임스 설터처럼 쓸 수 있게만 해준다면야 소설 그거 몇 만 번이고 시도해 볼 수 있다- 뭐 이런 주의다. 설터를 향한 나의 사랑이 이렇게 맹목적이다.

  

-1.1  나도 이 사람처럼 쓰고 싶다- 라는 욕심에 부질없이 몸부림치게 만드는 작가가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있는 줄만 알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은 확고하지만 딱히 워너비 작가가 있는 것은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또 어른 쪽으로 씁쓸하게 한 발짝 더 밀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르구나. 너는 내가 이상하겠지. 내게 네가 이상하듯이.

 

 

2  나는 언제나 나의 글이 싫었다. 대체로 하찮고, 그래서 늘 보잘것없어 보였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하찮고 보잘것없을 예정이다. 예정이란 말은 살짝 비겁한 것 같고, 그러면 운명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걸 다 알면서도 쓸 일만 생기면 썼고, 쓸 일이 생기지 않으면 쓸 일을 만들어서 썼고, 쓸 일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냥 썼다. 쓰레기를 만드는 일에는 늘 양심의 가책이 뒤따르지만 한 가지 강령만 준수하면 그런대로 견뎌낼 만하다.

 

-2.1  지금 쓰는 문장이 지금까지의 내가 고민 없이 써낼 법한 그저 그런 문장이라면, 미련 없이 내다버릴 것.

 

-2.2  하지만 재능 없는 사람에게 그건 결국 아무것도 쓰지 말자는 다짐이나 같다. 보채듯 깜빡거리는 커서를 마주하고 앉아서 자신 있게 누를 수 있는 키라고는 스페이스와 백스페이스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시간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타협의 때가 왔다. 살아야 했으니까.

 

-2.3  딱 한 문장, 한편의 글 속에 어제까지는 결코 이 세상에 없었을 문장을 더도 말고 딱 하나만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2.4  세상은 넓고, 냉혹하리만치 좋은 문장들이 많고, 그 결과 스스로를 용서해줄 설득력 있는 변명거리가 될 딱 한 문장을 찾는 것조차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2.5  결국 나는 철저하고 처절하게 물러선다. 내가 뭐라고. 내 깜냥에 뭐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 거야, 토지를 만들 거야. 유별나게 굴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살자.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3  한 인간의 삶과 또 그가 스스로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갖춰야 할 글 솜씨를 놓고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삶에 비해 글이 부족한 사람, 글에 비해 삶이 부족한 사람, 그리고 삶과 글이 서로에게 충분하고 충만한 사람.

 

-3.1  어느 시점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넘치는 삶과 그 삶을 다 표현하기에 너무도 미흡한 글을 지니고 산다. 그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특정한 경계선을 넘어서는 때가 찾아오고, 인간은 세 갈래 길 가운데 한 쪽으로 떠밀려 나아간다. 삶이란 지칠 줄 모르고 덤벼드는 짐승 같아서, 대부분의 경우 삶이 축적되는 속도는 몸 가누기 어려울 만큼 빠른데 비해 글이 단련되는 속도는 느리다


-3.2  또 어떤 이들은 삶에 실컷 물리고 두들겨 맞은 상처를 품에 안고 골방으로 숨어들어 죽은 체하거나 와신상담한다. 숨어버린 그들을 찾는 삶의 이빨이 닿지 않는 동안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신의 글을 단련하는데, 그런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간혹 글이 삶을 넘치는 인간이 탄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 같은.

 

-3.3  돌을 맞은 호수의 파문이 수면보다 높이 섰다 낮게 앉았다를 반복하다가 잠잠해지듯, 삶과 글이 서로에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인간이 되는 일은,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초과하는 국면이 교대로 일어나는 파도 위에서 실컷 자빠져가며 긴 서핑을 끝내고 난 뒤에야 겨우 이를 수 있는 드높은 경지다. 빼어난 글을 욕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아야 하며, 훌륭한 삶을 갈구하는 데 지치지 않아야 한다. 훌륭한 삶을 빼어난 글로 드러내는 것. 훌륭한 내용과 빼어난 스타일,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소설을 사랑할 때 놓치지 않고 손에 꼽는 조건들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이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한 권의 소설책처럼 여겨진다면, 좋은 소설을 쓰는 방법은 좋은 인간이 되는 방법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삶이 한 편의 소설이라면.


-3.4   삶이 한 편의 소설이라면.


-3.5   

사심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건 기교의 문제가 아니에요나는 솔기가 터져서 나 자신이 적절히 드러나게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 고백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어요동시에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내 삶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 77

 

4  어디서든 흔히 들을 수 있을 것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듣기란 의외로 쉽지 않은 말 가운데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 인생 역정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 한 편은 거뜬하다고같은 대사가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주로 인간사보다는 인간됨을 드러내는 용도로, 그가 없는 자리에서 타인의 입으로부터 또 다른 타인의 귀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하지만 조롱으로 쓰고 버리기에 아까운 어떤 진실의 작은 파편 같은 것들을 저 말이 지니고 있어서 한 번 쪼개 본다.

 

-4.1  잘 된 소설들을 뒤져보면 의외로 역정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의 연속이 없이도 단단한 서사와 설득력 있는 서술로 책 한 권을 꽉 채운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는 이제 초현실적/비현실적 사건들을 만나면 소설 같다라기 보다는 영화 같다고 표현하는 쪽을 즐긴다. 소설 같은 이야기의 문턱은 예상보다 낮다. 소설 속 사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겪음직하고, 실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어 넘기는 사건들은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더 소설적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에 이야기는 충분하다. 그리고 이야기에 우리의 삶은 충분하다(물론 아닌 인간도 있다. 예를 들면 나 같은.)

 

-4.2  그러니까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하루의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혹은 더 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더 세심하게, 혹은 더 아름답게 묘파할 수 있는 글 솜씨일 수 있다. 가만 두면 허공에 흩어져버릴 뿐인 삶을 잡아채 고정시키면 우리는 그것으로 서랍을 만들어 과거를 보관하고, 거울을 만들어 현재를 살피고, 비료를 만들어 미래를 가꿀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을 쓰지 않는 이에게 역시 소설을 쓰는 법은 불필요하지 않다.

 

 

5 

  물론 하나하나의 단어가 모두 다 완벽한 단어일 수는 없습니다모든 방이 다 강이 바라보이는 방일 수는 없잖아요수많은 평범한 단어들이 한 권의 책을 만듭니다수많은 평범한 군인들 사이에 가끔씩 영웅들이 있는 군대처럼 말입니다하지만 잘못된 단어들또는 문장이나 해당 페이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단어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감식력이 있어야 합니다글이 나빠졌을 때 그걸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요.

실은 올바른 단어는 없을 겁니다완벽한 단어는 더더욱 없을 테고요어쩌면 우리는 마음을 바꾸어서 두 단어를 바꾸거나 혹은 그 문장을 다시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모든 책이 모든 문장모든 단락에 대해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모든 작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좋은 정도가 있는 거예요.

  하지만 문체style는 그와는 다른 것입니다문체는 철저히 작가인 것이지요독자가 몇 줄 또는 한 페이지의 일부만 읽고 나서 작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면그때 그 작가는 문체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플로베르는 작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없애려 노력했지요마치 자신의 태도자신의 아이러니 감각자신의 취향 등이 작품의 일부가 아니라는 듯 자기 자신 없이 작품이 존재하게 하려고 노력한 겁니다하지만 그는 작품에서 자신을 없앨 수 없었습니다작품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있으니까요나는 '문체'라는 말에 저항감을 느낍니다왜냐하면 그 말은 '장식'이나 '양식같은뭔가 긴요하지 않은 것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그래서 나는 종종 문체 대신 '목소리'라는 말을 선호하곤 합니다문체와 목소리는 정확히 똑같은 것은 아니에요문체는 선택적인 것이고 목소리는 거의 유전적인 것전적으로 독특한 것이지요다른 어떤 작가의 글도 이사크 디네센처럼 들리지 않습니다그 누구의 글도 레이먼드 카버나 포크너처럼 들리지 않습니다그들은 끊임없이 고쳐 씁니다바벨플로베르톨스토이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 말입니다그들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고쳐 써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그들이 쓰려고 했던 것은 그게 아니니까 말이에요혹은 쓰려고 했던 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으니까요또는 고치면 더 좋아질 수 있을 테니까요너무 길거나 단조롭거나 요점을 벗어났거나 좀 엉성한 것 같아 보이니까 말이에요그렇지만 그 작품은 언제나 그들이 한 말처럼 들립니다그것이 그들의 문체입니다그들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_ 30-31

 

-5.1  세상엔 목소리가 너무나 많고, 그 가운데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거나 부러울 정도로 힘 있는 목소리들도 있어서, 초라하고 약한 내 목소리 하나를 세상에 풀어 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히려 뭔가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걱정한다. 그럼에도 뭔가를 계속 쓰는 이유는, 아무리 아름답고 힘 있는 목소리라도 세상 모든 곳에 닿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예 소리를 내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이 삶이라면 내 목소리가 미치는 좁은 영역을 들어 줄만한 소리로 채워나가는 것은 내 책임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목소리를 가장 크게 듣는 귀는 바로 내 귀라는 것 때문이겠다.

   

-5.2  목소리는 힘이 세다. 잘 들리기만 한다면. 목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귀의 책임만은 아니다. 목청을 가다듬고, 혀를 부드럽게 하자. 웅얼거리지 말고, 진실한 눈빛과 따뜻한 표정으로, 목소리 뒤에 숨지 말고 목소리 앞을 가리지도 말고, 그저 목소리 위에 올라타서.

 

 

6  , 그리고 부록도 있다. 잘 들리게 말하는 사람은 잘 듣는다. 잘 듣지 않고 잘 들리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6.1  써놓고 생각해 보니 부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큼직한 선물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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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3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1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 읽고도 이렇게 멋있게 쓰시면...아니 게다가 설터보다 더 “-쓰고 싶다면”에 적합한 글을 이리 쓰시면...읽는 저는 감사합니다. 오늘은 (비루하게) 쓰는 저도 함께 감사드립니다.

syo 2019-05-13 13:11   좋아요 1 | URL
왜 또 이러세요ㅋㅋㅋㅋㅋㅋ 또 저하고 민망배틀 한 판 뜨실 거예요??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5-13 15:28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정도 잘 쓰신 글은 서재 올리면서 흠 나 좀 잘 쓰는 듯-하고 으쓱 하시지 않나요? ㅋㅋㅋ 계속 으쓱 하는 글 올려주세요. 저는 계속 으둠의 영역을 맡을게요. (넌 못 쓰고 너도 못 쓰고 난 더 못 써! syo는 잘 써!하는ㅋㅋ)

syo 2019-05-14 07:5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으쓱으쓱 아니랍니다.
올리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늘 삐꾸같은 데가 많아서 글 하나 올리면 ‘수정‘ 버튼을 평균적으로 5~6번은 누른다구요.
으둠의 영역도 좋지만, 밝은 세상 함께 만들어요.....?

반유행열반인 2019-05-14 10:06   좋아요 0 | URL
고치고 고치라는 설터 할배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고 계시군요. 짝짝짝. (으둠이 있어야 밝음이 더 짙어지지요ㅎㅎ)

2019-05-14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4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3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4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4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식쟁이 2019-05-1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적고뇌 중이신 쇼님. 👍👍

syo 2019-05-14 07:57   좋아요 0 | URL
작가적 고뇌 같은 무시무시한 고뇌 아니에요 ㅎㅎㅎㅎㅎ
우우

칼르페디엠 2019-05-1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무원 시험 준비중이셨군요. 제가 보기엔 쇼님은 작가를 하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재능이 아까워요.
공무원이라니요..T..T
제가 잘 아는데 공무원의 삶은 정말 쇼님하고 잘 안맞을 듯요.
재고하시고 쇼님의 재능을 살려보세요~!

syo 2019-05-14 08:04   좋아요 0 | URL
칼르페디엠님은 저를 항상 좋게 봐 주시지요. 늘 작가를 권하시구요 ㅎㅎㅎ
이것 참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항상요 ㅎㅎ

저는 공무원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제 재능에 대해서는 좀 알 것 같거든요. 전 그냥 알라딘 서재에 이런 저런 잡글이나 쓰면서 즐거워하면 될 딱 그 정도 깜냥이에요^-^

아직 공무원이 되지도 못했고, 운 좋게 공무원이 되어도 공무원으로 제 인생이 끝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작가의 길을 걷기에는 제 재능이 비루하다는 거? ㅎㅎㅎㅎ 칼르페디엠님의 말씀은 정말 기분 좋은 칭찬으로 듣고 만족하겠습니다.

2019-05-14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길담 2019-05-15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자주 쓰게 되는 대학원생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한 편의 글 속에 결코 이 세상에 없었을 문장을 딱 하나만 만들어내기. 이것만 할 수 있어도 참 감사할 것 같아요.

syo 2019-05-15 09:53   좋아요 1 | URL
길담님 반답습니다.
꿈의 한 문장, 재능 없는 사람에겐 정말 꿈 같은 이야기인데요. 요즘은 이번 생을 통틀어 딱 한 문장 건지는 걸 희망하며 살아야하나 싶습니다.....
 

 

우리 안으로 먹이를 던지세요 실컷 던지세요

 

 

1


 

유사 이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충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사랑은 3D 업종이에요. 30분에 한 번씩 먹이를 주는 일과 같아요사랑하듯이 우리가 공부하거나 일했다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만약 사랑하는 게 죽을 만큼 힘들다면그건 제대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대부분 노인으로 죽지연인으로 죽진 않으니까차라리 나중에 후회하면서 눈물 쏟지 말고 30분에 한 번씩 먹이를 주는 게 좋을 겁니다.

김연수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27 

 

그것은 내 사랑의 제일 큰 무기였다. 10년을 만나는 동안, 어떤 상황 아래서건 어떤 감정 아래서건, 하루도 보고 싶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는 것. 오늘은 목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구나, 생각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든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것. syo는 이 무기를 휘둘러 거지같은 상황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사랑을 누려 왔는데, 이것을 맹목이라 해야 할지 일종의 신앙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뭐라 부른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런 마음만으로 사랑이 다 되지는 않겠으나, 다 되었으나 저 마음이 빠진 사랑이라면 할 줄도 모르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믿어서 믿는 게 믿음이고, 사랑해서 사랑하는 게 사랑이라고 배웠다. 믿음이건 사랑이건 잘 하려면 꾸준함이 필요하다고도 배웠다. syo는 그냥 배운 대로 하는 중이다. 이 외에도 할 것들은 더 많은데, 그걸 못하고 있어서 문제지.

 

 

 

2



평등은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모든 남성은 평등하다는 정도로 머물 순 없었지요여러분이 모든 남성이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평등의 개념은 자동으로 확대됩니다그럼 어째서 여성은 평등하면 안 됩니까더 나아가 한 집에 사는 사람이 남녀 구분 없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그렇다면 집 안에 있는 사람과 집 밖에 있는 사람은 평등하지 않아야 합니까평등의 확장력은 일단 긍정적 가치가 되고 나면 모든 불평등에 설명과 해설을 요구하게 합니다더 이상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이것이 평등이 담고 있는 개조와 진보의 운동 에너지입니다.

양자오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273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진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등락은 있지만, 결국 긴 시간을 놓고 지켜보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일들. 일단 한 번 결정되고 나면 자연적으로는 되돌릴 수가 없고, 억지로, 어마어마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나친,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한 권력과 재력을 투여해야만 되돌릴 수 있는 일들. 어쨌든 표면적으로 보면 인간은, 이제 다시는 어느 거대한 한 명의 타인이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살리고 싶으면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다시는 자신이 상품으로 팔려나갈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는 배의 밑바닥에 묶여 채찍을 맞아가며 노를 젓지 않고, 태평양 한복판에서 폭풍우를 만나도 상아나 향신료가 든 상자보다 먼저 버려지지 않는다. 이제 어떤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인간의 손에 이미 쥐어진 투표용지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처박지는 못한다. 이제 이 모든 일은 최소한 겉보기로는 일어나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그러나 다시 시간이 지나면 그 비열한 실질 또한 조금씩 사라지고, 행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방 한 구석에 향수병을 내려놓고 뚜껑을 연다. 그리고 반대쪽 구석에 가 기다리고 있으면 곧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액체로 밀집되어 있던 향기 나는 분자들이 향수병을 탈출, 방의 공기를 가로질러 내 코에 도달한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모든 분자들이 박차고 나올 것이다. 향수의 수위는 줄어들고, 향기는 방에 골고루 퍼질 것이다. 종내는 방의 모든 위치에서 동일한 강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향기는 저절로 병으로 돌아가 다시 향수가 되지 않는다.

 

이미 뚜껑이 열렸고, 아무리 분주하게 팔을 휘휘 저으며 향기를 흩고 어느 한 쪽에 모아보려고 해 봤자다. 다 부질없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인간이 할 일도 아니다.

 

 

 

3


 

  나는 머그잔을 내밀었다머그잔을 받은 맷이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나는 그의 셔츠 세 번째 단추만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 마을에서 사 년을 살았죠그런데 이름을 아는 이웃이 분명 다섯 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그들 중에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당신은 오직 고슴도치에만 관심이 있죠또 앞으로 살날이 한 달도 안 남은 개를 위해 오늘 오십 파운드어치나 되는 약과 식품을 구해줬고요.”

  식탁에 기댄 그는 소름끼칠 만큼 나와 가까워서 상당히 불편했다그는 나에 대해 어떻게 모든 걸 알고 있을까또 샐리가?

  “동족에게도 기회를 줘요.”

  나는 계속 단추만 보았다.

  “지금 나 때문에 화가 납니까?”

  “아뇨.” 놀랍지만 진심이었다누군가가그것도 남자가 내 얼굴을 문제 삼지 않은 적은 내 기억으로 처음이었다나는 그와 마주보기까지 했다.

  “당신의 눈동자는 시월의 너도밤나무 잎처럼 연한 갈색인데 아무도 그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군요.”

샤론 볼턴뱀이 깨어나는 마을, 307-308

 

사내놈의 드립에 읽고 있던 사내놈이 무너졌다. 절도 있게 오글거리는 것이 완전 syo의 취향인 것인데. 당신의 눈동자는 시월의 너도밤나으윽윽...... 아름다운데 실제로 들었다고 생각하니 아아아 손발이 한 점으로 수렴한다.....

 

이런 장르를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스릴러? 미스터리? 추리소설? 댄 브라운이 내 독서인생에다 똥칠을 해놔 가지고, 뭔가 진범을 찾고 사랑도 찾고, 누명을 벗고 옷도 벗는 장르를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아직까지는 재미가 있다. 이 주인공도 당연히 진범을 찾고 누명도 벗겠지만 사랑도 찾고 옷도 벗을지는 좀 더 두고 볼일이다. 주인공 마음의 묵직한 빗장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왜 닫혔는지 그리고 어떻게 닫혀 있는지를 차근차근 조곤조곤 묘사하는 작가의 능력은 능력이다.

 

다정한 친구가 이 책이 천재의 작품이라 극찬을 하여 손에 들었는데, syo는 이 장르의 천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몰라서 여기까지만 말하려 한다.

 

 

 

4


 

  대부분의 미술사책들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5인치짜리 인물상은 약 2만 5000년 전에 만들어졌다우리는 이 물체가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누가 만들었는지누가 사용했는지또는 그들이 어떤 신앙과 의식을 가졌는지 모른다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이름도이를 미술로 여기는 생각도 현대의 미술사가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인물상을 미술 또는 조각으로 여긴다는 것은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말은 이 비너스상이 지닌 풍부한 형태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아마 이 상이 만들어졌을 때도 이는 특별히 중요한 물건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너스상은 수많은 상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또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용품이었을 수도 있다이 인물상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속단이며이 인물상을 처음 만든 사람들과 우리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무시하는 것이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54-55

 

도판이 잔뜩 있고(흑백이지만), 그러다보니 두께에 비해 텍스트는 두껍지 않은 이 책은, 과장을 좀 보태면 어느 문단을 떼어내어도 전체의 주제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집요하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특별히 여기가 포인트라서 짚어 낸 것은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눈감고 책을 드르륵 넘기다가 멈추었더니 독서의 신께서 이 문단을 점지해주셨다.

 

그렇게 모든 문단이 같은 뼈대에서 솟아나 있지만, 당연히 각 문단은 자기만의 깃털도 가지고 있다. 이 문단에서는 마지막 줄의 무시’라는 단어를 노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술을 정의하는 방식 뒤에 숨어 있는 특정한 의도,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모른 척 하는 태도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취향의 평면을 넘어서 윤리의 영역에서 그 기준의 일부를 빌려오려는 은근한 시도가 포착된다. 개개의 작품을 평가할 때 윤리를 들이대자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작품 바깥(제도, 학교, 비평, 미술관.....)에서 무엇이 미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규범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윤리의 영역을 완전히 표백시킨 관점으로 풀어보기엔 적당치 않다는 식으로 읽어도 지나친 오독은 아닌 것 같다.

 

 

 

--- 읽은 ---

만화 동사의 맛 / 김영화 지음, 김정선 원작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모든 것 / 백상진, 김예찬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 박시백 지음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지음

 

 

--- 읽는 ---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 김연수 지음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 / 루스 볼 지음

자기배려의 책 읽기 / 강민혁 지음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론 볼턴 지음

은는이가 / 정끝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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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5-21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향수를 만들기는 하지만 향기를 모으기는 어려운 인간의 난처함...생각하자니 재밌는 이미지입니다.
syo님 엄청난 사랑쟁이셨군요♡...후히히

syo 2019-05-21 13: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부끄럽다^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