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고 1945년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난 유럽 전쟁은 총력전이었다. 전쟁은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끌어들였다. 사실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까지, 노르웨이에서 그리스까지 나치 독일이 점령한 나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주로 민간인의 경험이었다. 정규군 전투는 전쟁 시작과 끝에 한정되었다. 그사이 전쟁은 점령과 억압, 착취, 절멸에 관한 전쟁이었다.

 

 

나치 독일은, 특히 후기에, 점령한 국가의 경제를 약탈함으로써 (1805년 이후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보헤미아-모라바이, 그리고 특히 프랑스는 본의 아니게 독일 전쟁 수행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나라들의 광산과 공장, 농장, 철도는 독일 요구에 도움이 되도록 관리되었으며, 주민들은 독일의 전시 생산을 위해 처음에서는 자국에서, 나중에는 독일에서 일해야만 했다. 대부분 자신 의사와 무관하게 독일에 끌려왔던 이들은 독일 노동력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나치의 착취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사실상 독일 민간인들은 1944년에나 가서야 전시의 제한과 부족의 충격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정한 전쟁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서유럽이 아니라 동쪽으로 더 나아간 곳에 있었다. 비록 이용해 먹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만, 나치는 서유럽인들을 어느 정도 존중하여 대했고, 서유럽인들도 비교적 독일 전쟁 수행을 망치거나 방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하지만 동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독일 점령군은 가혹했다. 그 지역의 빨치산들, 특히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우크라이나 빨치산들이 희망이 없는 중에도 독일 점령군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동부에서 독일의 점령, 소련의 진격, 빨치산 투쟁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은 서유럽 전쟁 경험과는 전혀 다르게 더욱 처참했다.

 

 

유럽인들이 전쟁 중 겪은 물질적 손실은 비록 끔찍하기는 해도 인명 손실과 비교했을 때는 하찮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가 가장 큰 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민간인과 군인 등 모든 사망자를 다 계산할 때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소련, 그리스가 최악이었다. 폴란드는 전쟁 이전 인구의 약 5분의 1을 잃었다. 교육받은 주민 사망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나치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파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이전 주민의 8분의 1을, 소련은 11분의 1을, 그리스는 14분의 1을 잃었다. 두드러진 차이를 강조하자면, 독일은 15분의 1, 프랑스는 77분의 1, 영국은 125분의 1의 희생을 보였다.

 

 

전쟁에서 주된 희생자는 연령 불문의 모든 여성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소련군이 도착한 이후 3주 동안 여성 8만7,000명이 병사들에 의해 강간당했다. 소련군이 독일 베를린에 진입하면서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그들 대부분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5월 2일에서 5월 7일 사이 당했다. 이 수치는 분명 둘 다 적게 어림한 것이며, 소련군의 오스트리아 진격로와 서부 폴란드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하는 길에 있던 촌락과 도시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은 합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전쟁 기간 내내 소련 군대에 휴가란 없었다. 많은 보병과 전차 승무원은 3년이라는 끔찍한 시간 동안 중단 없이 지속된 일련의 전투와 진격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서부 소련을 가로질러 왔다. 그들은 전진 중에 독일군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 넘치는 증거를 보고 들었다. 나치가 전쟁 포로와 민간인, 빨치산 그리고 실로 그 앞길에 놓인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처리한 방식은 그 지역 주민들과 소련군 병사들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소련군이 마침내 중부 유럽에 도달했을 때, 지친 병사들은 다른 세계를 보았다. 러시아와 서유럽은 언제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 차르 알렉산드로 1세는 오래 전 러시아인들에게 서유럽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도록 허락한 것을 후회했다 – 전쟁 중에 그 차이는 훨씬 더 두드러졌다. 독일 병사들이 동부 유럽에서 파괴와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 독일 자체는 계속 번영하고 있었다. 너무나 번영한 나머지 독일 모든 민간인은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는 전쟁의 물질적 비용에 대한 느낌을 거의 갖지 못했다. 전시 독일은 도회지의 세계, 식량과 의복, 상점과 소비재 세계, 영양 상태가 상당히 좋은 여인들과 이이들의 세계였다. 소련 병사들은 황폐해진 고향과의 극명한 차이를 이해하기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소련 사람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이제 그들이 당할 차례였다.

 

 

소련군은 서부로 가는 길에 헝가리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에서 강간하고 약탈했다(이 표현은 이 경우만큼 더럽게 적절하다). 하지만 독일인 여성들이 단연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다. 1945년에서 1946년 사이 소련의 독일 점령 지구에서는 15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 아기들’이 태어났으며, 이 숫자는 보고되지 않은 수 많은 낙태 수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낙태 결과로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은 태아와 함께 사망했다.

 

 

 

 

레지스탕스 신화가 가장 크게 문제시된 곳은 서유럽인데, 사실 서유럽을 나치가 점령했을 때 서유럽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엄청난 수의 진짜 빨치산들이 점령군과 교전하고 또 상호 간에도 공공연히 교전했던 그리스나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는 다른 점에서도 흔히 그렇듯 사정이 훨씬 더 복잡했다. 예를 들어 소련 당국은 해방된 폴란드에서 무장 빨치산이 공개적으로 찬양받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무장 빨치산은 최소한 나치에 반대했던 만큼 공산주의에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1945년 그리스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듯이, 정권은 찾을 수 있는 모든 무장 빨치산을 체포하여 투옥하거나 사살했다. 요컨대 ‘저항 운동’은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하며 불분명한 범주였고 어떤 곳에서는 창안된 범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역’은 또 다른 문제였다. 부역자란 어떤 사람들인가? 부역자는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협력했는가? 살인이나 절도 같은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역자의 죄는 무엇인가? 누군가 국민이 겪은 고통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인 난제들은 나라마다 달랐으나 일반적인 딜레마는 동일했다. 6년 간 유럽인들이 겪은 경험은 선례가 없었다.

 

 

1939년 이전에는 ‘점령군에 협력’했다는 범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점령하는 군대가 피점령국 국민들로부터 협력과 지원을 구하고 얻어 낸 전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는 범죄가 아니라 전쟁에 부수된 손해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어쨌거나 하나의 대륙 전체가 그러한 규모로 일련의 부역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규정하고 범죄자들을 재판이라고 할만한 것에 부쳐 처벌하려 했던 적은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없었다. 카뮈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혐오스러운 견해라도 사람을 그 견해를 이유로 비난하고 처형하는 것은 부당하고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당시에 최악의 범죄들에 대해 동포를 비난하려 했던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러한 범죄들의 온전한 책임은 독일인들이 져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정서였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까지도 면죄부를 받았다. 1943년 맺어진 연합국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최초 희생자’로 선언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이는 윈스턴 처칠이 나치즘의 프로이센 기원을 주장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다른 동맹국들에도 편리했다. 오스트리아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했고 중부 유럽 정황은 앞날이 불확실했으므로, 오스트리아 운명과 독일 운명을 분리시키는 것이 신중한 일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가 나치즘에 허비했던 시절에서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장하는 것이 지역 모든 이해 당사자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전후 나치에 대한 재판이 독일과 독일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재교육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재판들이 ‘승자의 재판’이라고 분개했으며, 실제로 승자의 재판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실제 범죄자들에 대한 실제 재판이기도 했으며, 미래 국제 재판에 중요한 판례를 수립했다. 재판은 개인이 저지른 범죄는 이데올로기 목적이나 국가 목적에서 했더라도 개인 책임이며 법에 다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재판의 결점은 재판 절차의 성격에 내재했다. 히틀러 자신을 위시한 나치 지도부의 사적인 죄과는 너무나 완전하게 또 면밀하게 입증되었기에 많은 독일인들은 나머지 국민이 무죄이며 독일인도 집단적으로는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나치즘을 거역하지 못한 희생자였다고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치의 범죄들은 ‘독일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을지 모르지만, 독일인들이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진정한 인식은 없었다.

 

 

특히 미국은 이를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곧 신들의 점령 지구에서 재교육과 탈나치화 일정을 시작했다. 목표는 나치를 폐지하고 그 근거를 파괴하며 독일의 공적 생활에 민주주의와 자유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독일의 미국 군대에는 일단의 심리학자들과 기타 전문가들이 동행했는데, 이들에게는 독일인들이 그토록 심하게 탈선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내라는 과제가 할당되었다.

 

 

독일 민간인들은 의무적으로 강제수용소를 방문해야 했으며 나치의 잔혹한 행위들에 관한 기록영화를 관람해야 했다. 나치 교사들은 퇴출되었고, 도서관의 책을 새로 교체했으며, 신문 용지와 종이는 연합국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공급되어 진정한 반나치 신임장을 받은 새로운 소유주와 편집자들에게 할당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서독 수상인 아데나워가 볼 때 탈나치화는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전혀 이롭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재판을 통해서든, 그밖의 법정이나 재교육 사업을 통해서든 독일인을 나치 범죄에 대면시키는 일은 회개를 부르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만 불러일으킬 공산이 더 컸다. 나치즘은 그 정도로 독일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에 수상은 그 문제에 관해 침묵을 허용하고 더 나아가 장려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 독일인들은 나머지 세계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인들과 독일의 지도자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피점령국 유럽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충보다 전후 어려웠던 자신들의 식량 부족, 주택 부족 등의 문제에 더 열중해 있었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희생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으며, 따라서 재판과 나치 범죄의 대면을 승리한 연합국이 소멸한 정권에 대해 벌이는 복수로 간주했다. 독일의 전후 정치적, 종교적 권력은 이러한 견해에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

 

 

재교육 효과는 확실히 제한적이었다. 독일인들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 가도록 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영화를 보도록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본 내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탈나치화는 단연코 큰 효과가 없었다. 1951년에 바이에른 주에서는 판사와 검사의 94퍼센트, 재무부 직원의 77퍼센트, 지역 농업부 공무원의 60퍼센트가 나치 전력자였다. 1952년에 본의 외무부 공무원 중 셋에 하나는 이전 나치당 당원이었다. 새로 구성된 서독 외교단의 43퍼센트는 전직 친위대 대원이었고 17퍼센트는 보안대나 게슈타포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에서 1949년에 이르는 동안, 대다수 독일인들은 변함없이 ‘나치즘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잘못 적용되었다’고 믿었다. 독일인의 37퍼센트는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절멸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은 아리아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견해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부의 통치를 12년간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진정 놀라운 일은 6년 뒤에 이루어진 여론 조사였다. 조사 결과 약간 더 높은 비율인 37퍼센트의 독일인들이 자신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단언했다.

 

 

전후 정치적인 활동을 대가로 나치 전력이나 파시스트 전력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트리아는 종종 파시스트 전력자들을 애호하여 언론이나 기타 민감한 직종에서 일하도록 허용했다.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1949년 9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 의회에서 행한 첫 번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방공화국 정부는 많은 사람들이 중하지 않은 죄과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속죄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를 잊는 것이 받아들여질듯한 곳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업다. 탈나치화가 무산되었다면, 그 이유는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인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자발적으로 ‘나치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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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15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내용의 책인 것 같습니다.

분량이 후덜덜하긴 하지만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북다이제스터 2019-10-15 18:4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근간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꽤 유명한 책이고 호평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직 몇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잘 몰랐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몇 가지 짚어보면요.....

1. 4년 간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 시 대부분 지역에서 군인들 전쟁은 시작과 끝에서만 있었다는 점
2. 독일은 자국 경제의 어려움 없이 전쟁을 수행했고 독일 국민은 별로 경제적 고통이 없었다는 점
3.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대부분 영화는 서유럽을 배경으로 하기에, 그곳 희생이 컸다는 착각을 주지만, 실질적으로 더 큰 피해 지역은 동유럽과 남동유럽, 러시아라는 점
4. 다양한 책과 영화로 호도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신화는 과장되었을 수 있고, 독일 점령시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 국민 희생이 다른 나라 비해 월등히 적었다는 점에서 결국 현명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5.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적군에 부역이 범죄라고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 (무언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개념도 형성된 지 정말 얼마 안 되었다는 점)
6. 주축국인 오스트리아가 독일만큼 비난받지 않는 이유. 결국 처칠 같은 사람이 프레임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사람들 생각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 (불가리아가 독일 편이었다는 사실은 덤으로 알게 됨)
7. 일본과 달리 독일은 전쟁범죄자를 철저하게 심판하고 처벌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일본과 달리 현재 전 세계에 반성하는 메시지를 지속 내보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으로 책을 읽으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모스크바국은 외국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서구의 방문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모스크바국을 마법의 세계와 비슷한 무엇인가로 묘사했다. 기이하기도 하고, 호화롭기도 하고, 다채롭기도 하고, 그들이 그때까지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달랐으며, 아주 야만적이기도 했다. 외국의 사절들은 호화로운 복장, 특히 모피 옷, 눈에 띄는 회색 수염, 정교한 궁정 예식, 풍성한 연회 그리고 엄청난 음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모스크바국을 떨어져 있는 이상한 세계로 보았던 견해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국 러시아는 키예프 루시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모스크바국 러시아는 종교와 의식주의에 기반을 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외부의 어떠한 영향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으며 독선적인 태도를 취했다.



2.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말까지 남부 러시아를 지배했다. 당대에 살았던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이 세운 국가는 최대로 확대되었을 때, 서쪽으로는 다뉴브 강의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는 캅카스를 넘어서 소아시아에 이르렀다.


스키타이인들은 전형적인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황소가 끄는 텐트처럼 생긴 마차에서 생활했으며, 식량으로 삼기도 했던 말의 숫자로써 자신 재산을 셈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탁월한 경기병 부대를 구성했는데, 말의 안장을 사용했으며 활과 화살과 단검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기동력과 치고 빠지기 작전에 기반을 둔 그들의 전술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심지어 강력한 이란 계통의 적수인 페르시아인들도 자신들의 고국 영토에서 그들을 패퇴시키지 못했을 정도였다.


스키타이인들은 남부 러시아에서 강한 군사 국가를 수립했으며, 수 세기 이상 그 지역을 상당히 안정시켰다. 이 시기에 토착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하면서, 새로운 접촉과 기회를 통해서 풍요로워졌다. 특히 스키타이인들의 유목민적 성격과 목축 중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흑해 북부의 스텝 지대에서는 농업이 계속해서 번성했다.


3.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는 군주가 비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탁월한 신과 세속적인 정치적 권위와 결합된 교회를 강조하는 종교의 도움을 받아서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자신 및 자신의 왕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얻으려고 계획한것이다. 기독교화는 비잔티움과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용이하기도 했다.


4.

조금도 과장 없이 러시아 목조 건축은 놀랄 만한 업적이다. 각각 약 6~7미터 길이의 나무기둥을 쌓아놓은 직사각형 꾸조물인 클렛 혹은 스럽은 고대 러시아 목조 건축의 기본이었다.


러시아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비잔티움의 교회 건축 규범을 자신의 목조 건축에 적용시켰다. 교회에서 필수적인 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세워졌다. 항상 동쪽에 있는 성소는 작은 클렛으로 이루어졌다. 회중이 서 있는 교회의 중심 부분은 커다란 이중 클렛으로 건축되었는데, 하나의 클렛은 다른 클렛 꼭대기 위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쪽 편에 있는 또다른 작은 클렛은 프리트보르(pritvor), 즉 독립된 현관 입구를 이루었다. 이곳은 원래 초심자들이 본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던 곳이었다. 커다란 클렛으로 된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진 높은 지붕 위에는 작은 쿠폴라(cupola)가 얹혀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이러한 단순한 고대 형태의 교회는 오래된 성상화에서 볼 수 있으며, 그중 북부 러시아에 있는 몇몇 교회 -그러나 17세기에 건축된 것들-는 우리 시대까지 전해진다.


교회 건축에서는 다양한 발전이 뒤따랐다. 특히 교회의 지붕은 점점 더 가파르게 되어, 그중의 많은 것들은 쐐기 모양과 비슷해졌다. 하나 혹은 다섯 개의 쿠폴라를 가진 교회를 건축하던 비잔티움의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석재로든지 목재로든지 간에 더 많은 쿠폴라를 선호하는 성향을 보였다. 키예프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는 13개의 쿠폴라가 있었고, 키예프에 있는 또 다른 교회인 티테에는 25개의 쿠폴라가 있었다.


5.

프랑스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적대국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는 대륙의 지배권을위한 최대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패퇴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해서 투르크, 폴란드, 스웨덴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는 그전부터 동유럽에 있는 이들프랑스의 세 동맹국과 반복적으로 싸움을 벌여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가장 신뢰할 동맹국이었다. 이 두 나라는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러시아에게는 좀더 중요한 사실로서 투르크와 스웨덴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중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대대적으로 개입한 것을 출발점으로, 독일 지역에서 계속해서 합스부르크 가문 이익에 거스르는 행동을 해 왔다.


6.

푸시킨은 죽은 이후에, 심지어 그의 짧은 생애 동안보다 훨씬 더 독자적인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국민 시인이라는 표현은 푸시킨이 살아 있을 때 고골이 다음과 같이 이미 사용한 구절이었다.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러시아 국민 시인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켜준다.……푸시킨은 러시아 정신이 명백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다.….…그의 내면에 러시아의 자연, 러시아의 영혼, 러시아의 언어, 러시아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1880년에 모스크바의 푸시킨기념상의 제막식에서 연설(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 연설은 황홀감의 울부짖음˝과 마주쳤다)을 했던 도스토옙스키에게, 푸시킨은 정확히 말해서 어떤 국가의 정신이든지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목소리는 러시아 자체처럼, ˝유럽의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우리의 보편적이며 인간적이고 통합적인 러시아의 혼 속에서 유럽적인 권태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예언적인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주장은 완전히 발달된 푸시킨 신화가되었고, 1800년대 후반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아주 강력하게 발전되었다.


7.

레르몬토프는 비록 푸시킨만큼 결코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푸시킨의 그늘 속에 가려져서는 안 될 작가이다. 1814년에 태어나서 1841년에 결투를 벌이다 사망한 레르몬토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상당량의 다채로운 문학 작품을 남겨놓았다. 레르몬토프는 푸시킨과는 기질이나 관점이 아주 달랐으며, 러시아 문학계에서 대표적인 낭만주의적 천재에 가장 근접했던 ˝러시아의 바이런˝ 이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반항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반항은 푸시킨의 죽음과 관련하여 러시아 상류사회를 비난하는 그의 아주 멋진 시와 같은 공개적인 의사 표시와, 자신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사적인 문제 모두에서 표현되었다. 레르몬토프는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장엄한 장편시인 「악마(Demon)」를 저술하거나 개작하면서, 차이와 소외의 정신을 상징하는 악마 현상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탐구했다.


나는 희망이 피어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시선 하나로 그것을 꺾어버리는 자,
나는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저주받는 자,
나는 내 지상의 노예들을 향한 천벌,
나는 인식과 자유의 황제,
나는 하늘의 원수, 나는 자연의 재앙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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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는 왜 17세기 뒤늦게 봉건제가 아닌 중앙집권 시기에 농노제가 발생했을까?


“모스크바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커져가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봉직자들, 즉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고 정부를 위해서 행정이나 여타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던 귀족들에게 의지했다. 봉직에 대한 대가로 부여된 영지인 포메스티예는 모스크바국 시회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모스크바국 정부는 포메스티예애 적합한 토지를 계속해서 찾기 위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중요한 것은 국민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 지위가 이로 인해 악하되었다는 점이다. 봉직귀족의 성장은 점점 더 많은 국유지와 농민들이 포메스티예 제도로 인해 봉직귀족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 자신이 국가에 대한 과중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농민들로부터 짜내야만 했다.


많은 농민들은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러시아가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함으로써 동남쪽 방향의 비옥한 토지로 향한 길이 열렸고, 정부는 처음에 이 지역에 러시아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농민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봉직귀족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봉직귀족이 국가에 봉사하려면, 그들이 데리고 있던 농민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에 모스크바국 당국은 봉직귀족이 노동력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합법적인 이주는 중단되었다.


사실 러시아 노에제를 포함하여, 초기에 성립된 농민들의 세속 상태는 자연스러운 계약의 결과였다. 농민들은 주로 금전이나 곡물 혹은 농기구를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지대를 납부하고, 부역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1년에서 10년에 이르는 기한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이 채무를 다 갚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협정은 연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농민들이 지주에게 매년 내는 분담금은 종종 대부금에 대한 이자에 불과했다. 결국, 봉직귀족계급이 농업 노동력의 필요성 때문에, 농민들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런 일이 모스크바국 성장 초기에 전개되기는 했지만, 농노화는 17세기까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포메스티예 농업의 성장은 차르가 봉직을 맡을 귀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농민을 하사함에 따라 예속 상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특히 농민 이주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농민 탈주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으로 귀족 이익을 계속해서 확대시켜주었다. 비록 농노제를 직접 확립하는 법은 17세기 이전 단 한 번도 공포된 적이 없지만, 몇몇 입법 조치는 그런 목적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봉직귀족으로부터 제기된 거듭된 청원에 대한 반응으로, 정부는 탈주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낼 수 있는 기간을 계속해서 연장했다. 그 기간이 16세기 말에는 5년이었는데, 1649년에 공포된 새로운 법령 『울로제니예』로 무기한이 되 었다. 나아가 1607년과 몇몇 다른 해에는, 탈주 농노들을 숨겨주는 것에 대한 처벌을 입법화했다. 1550년부터 1580년 사이에 행한 최초의 인구조사는 그 이후에 실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거주지 기록을 제공하고 농노의 자식들을 부모와 동일한 범주에 올려놓음으로써 농노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1649년의 울로제니예와 함께, 이제 농노제의 명확한 본질은 법으로 명문하되었고, 효과적으로 강제될 수 있었다. 농민은 주인 허락 없이는 이동할 수없게 되었다. 새로운 법전은 탈주자들에 대한 모든 제한 규정을 폐지했으며 도망자들을 숨겨주면 처벌을 무겁게 부과했다. 그리고 정부는 농촌에서 탈주자들을 수색하기 위한 특별 부서를 설치했다. 울로제니예는 본질적으로 ‘한번 농노는 영원한 농노이다’라는 카스트적인 원칙을 채택했고, 귀족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안겨주 었다. 무제한적인 의무를 지고 있던 농노들은 전적으로 지주 수중에 있게 되었고, 지주들은 자신 영지에서 사법권과 치안권을 점차 더 많이 행사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에는 농노의 매매와 증여 관행이 발달되었다. 즉, 농노는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농노제는 봉건제가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군주정치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예로부터 존재해오기는 했으나 지주에 대한 농민의 경제적 의존도가 점점 더 증가했다는 점, 그리고 모스크바국 정부가 귀족에게 유리한 정책을 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의 모스크바국에서 인구의 85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농노였다고 추산된다.


2. 표토르 대제의 농노제 폐지는 선의였을까?

18세기 표트르 대제는 계속해서 돈이 엄청나게 부족한 상태였는데,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경우도 때때로 있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이미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거의 한계점에 다다를 정도로 압박받던 러시아 대중을 더욱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다.


추정에 따르면, 1702년에 정부가 거두어들인 세입은 1680년 세입과 비교해서 2배였고, 1724년에는 5배 반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벌통, 방앗간, 어업, 턱수염 그리고 대중목욕탕 등 거의 모든것에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정부는 국가 독점권이 적용되는 품목을 새롭게 확대했다. 예를 들면, 법적 처리 과정에 필요한 인지는 국가에 추가적인 세입원이 되었고, 오크 나무로 만든 관(棺)도 그랬다.


사실, 정부 재정을 증가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거나 꾸며내는 일은 그의 통치기 동안에 특별한 하나의 업무로 발전했다. 직접세의 주요 형태에서 또다른 혹은 아마도 좀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표트르 대제는 1718년에 가구별 세금과 경작지에 대한 세금 대신에 인두세(人頭稅)를 도입했던 것이다!


인두세가 가진 하나의 목적은 가구를 통합하거나 자신 땅을 경작하지 않는 탈세자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인두세는 하층계급 전체에게 부과되었고, 세금 평가액도 아주 많았으며 현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1718년부터 1722년 사이에는 인구조사, 즉 인두세를 내야 하는 소위 인구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애초에 인구조사에는 사유지를 경작하던 농부만 포함되었다. 그런데 경작을 담당하지 않는 가구 내 노예와 모든 부자유민, 심지어 부랑자들도 추가하라는 명령이 내려겼다. 인구조사 동안에 등록된 각 사람은 동일한 액수로 정해진 인두세를 내야 했다.


영지에서 지주들은 돈을 국고로 즉각 이관하는 책임을 맡았다. 인두세로 인해서 마침내 농부와 농노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모든 농민이 국가에 하나의 예속민(bonded mass)으로 통합되었다. 인구조사 이후에 농노들은 주인의 서면 허가증을 가지면 영지를 떠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통행증 제도의 출발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그리고 인두세는 황제의 지속적인 혁신정책 중의 하나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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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리더십 -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혁신을 위한 리더의 조건
김진호.최용주 지음 / 북카라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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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빅 브라더는 기업일지도...



“미국 기업 엑시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기업에 판매한다. 액시엄은 한 사람의 개인 정보를 약 1,500개 항목별로 평생 동안 추적하면서 관리한다. 당신이 어디에 살고 직업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몸무게, 소비 패턴, 정치 성향, 가족 건강, 휴가 계획까지 속속들이 안다.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거의 모든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약 5억 명의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연간 50조 건의 거래 내역을 분석한다.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미국 연방수사국이나 미국 국세청보다 훨씬 깊이 있게 조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9·11 테러 당시 19명의 가담자 가운데 11명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액시엄은 일단 특정한 개인의 정보를 취득하면 그 사람에게 13자릿수로 만들어진 번호를 부여한다. 이후에는 모든 정보가 이 번호로 분류·관리된다. 수집되는 정보는 나이, 주거지, 성별, 피부색, 취향, 정치 성향부터 선호하는 휴가지, 기르는 동물, 물품 구매 행태, 교육 수준, 수입, 병력病歷, 재정 상태, 가족 관계, 잡지 구독 여부 등 엄청나게 많다. 액시엄의 장점은 그들이 가진 정보가 소비자들의 오프라인 데이터라는 데 있다. 즉,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정보다.


액시엄은 사람들이 생활에서 남기는 흔적(데이터)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면 공문서 신청, 신문·잡지 정기 구독, 각종 설문 참여, SNS 활동,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보통 5~6개씩 갖고 있는 고객 서비스카드 사용 내역, 부동산 담보 대출 신청, 보험 가입 등을 수집한다. 액시엄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데이터 수집 노하우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개인 정보를 엄청나게 축적해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었다.


엑시엄은 현재 4,000개 이상의 데이터 뱅크를 관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용카드 회사 10곳 중 7곳, 미국의 대형 백화점 10곳 중 6곳,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 중 8개 회사도 액시엄의 고객이다. 액시엄의 매출은 2010년부터 약 9억 달러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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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영웅 1인의 성공 신화


둘. 여건과 조건이 다른데 벤치마킹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


셋. 고객 불행을 기반으로 한 성공


넷. 종업원 고용을 우습게 보는 태도


다섯. 결국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배금주의

 

 

 

“카지노 기업인 해리스는 빅데이터 리더십 덕분에 위기에서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으로 우뚝 섰다. 빅데이터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화려한 카지노 기업도 데이터 분석으로 승부를 갈랐다. 이 이야기는 어려움에 처한 기업이 데이터 분석적인 리더를 영입해 최고 성과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1998년 해리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서비스 경영을 가르치던 게리 러브먼 교수를 영입했다. 그의 분석 지향 리더십으로 해리스는 승승장구하게 됐고, 업계 라이벌인 시저스를 인수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카지노 해리스는 지역별로 산재된 자사의 카지노 시스템을 통합해 전국적으로 고객들애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데이터베이스를 고객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 정책에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고객을 인구 통계변수와 지출 이력을 바탕으로 무려 80개의 이질적 집단으로 구분한 뒤 각 집단의 특성에 적합하도록 차별적으로 마케팅을 했다.

 

 

가령 개개인이 잃고 따는 금액을 실시간 추적하다가 어떤 개인이 그의 인내 한계점(영어로는 ‘pain’ threshold라고 한다), 즉 총 잃은 금액이 도박을 중지하도록 만드는 액수에 가까워지게 되면 직원이 접근해 공짜 식사나 쇼 티켓을 무료로 제공해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계속 호텔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직원들에 대한 인센티브나 성과급도 그들이 창출한 매출이 아니라 그들이 봉사했던 고객의 만족을 기반으로 산정했다. 이는 서비스에 만족했던 고객이 다음 해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한다는 데이터 분석 결과 때문이었다.

 

 

심지어 게리 러브먼 교수는 “우리 회사에서 해고되는 사유는 3가지다. 절도, 성희롱, 근거가 되는 데이터 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리 러브먼을 영입한 후 고객들이 카지노 해리스에서 도박에 지출한 돈은 약 40퍼센트가 증가했으며, 영업이익도 평균 27퍼센트나 늘었다. 특히 2003년에서 2006년 사이 해리스 주식 가격이 14달러에서 85달러로 약 6배나 폭등했다. 또한 2005년에는 전세계 7개국에서 51개 카지노를 운영중인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 시저스를 인수한 후 기업명을 시저스엔터테이먼트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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