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자극하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을 생각할 때 주로 머리를 사용했다. 이와 관련된 논문을 ‘수학으로 표현된 흥미진진하면서 추상적인 영감의 집합’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내가 진정으로 모든 삶과, 모든 사고와, 모든 노력과, 모든 업적을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랬다. 개개의 단어에 담긴 의미를 습관처럼 흘러 넘기지 않고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더니, 모든 것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모든 것이 암울하게 보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우쭐해지거나 자연의 치밀한 구조에 경이로움을 느낀 적은 종종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학으로 얻은 결과에서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 감정이 서서히 정제되어, 지금은 먼 미래를 생각할 때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경험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에 파묻혀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독자들은 ‘이 친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 독자는 나와 개인적 친분이 없으므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감이 잡힐 것이다. 나는 엄밀하고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수학과 물리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는 명확한 계산을 통해 입증된 방정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며, 방정식으로 예측된 값과 실험을 통해 얻은 값은 소수점 이하 열 번째 자리 이상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래서 내가 생전 처음으로 ‘평온한 관계’를 느꼈을 때(그때 나는 뉴욕시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 있었다), 나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종업원이 얼그레이에 상한 두유를 넣은 걸까? 아니면 내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기어이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둘 다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 흔적을 남김으로써 짧은 삶의 허무함을 위안해 온 오랜 혈통 후손이 아니던가. 그 흔적이 오래 남을수록 자신 삶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미국 철학가 로버트 노직은 ‘죽음은 당신 삶을 지워 버린다. 하지만 완전히 지워지려면 한 인간 삶에 담긴 의미가 남김없이 파괴되어야 하고, 이렇게 될 때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나처럼 전통적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워 버린다’는 말을 애써 무시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가치관 속에서 양육되고, 교육받고, 경험과 경력을 쌓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내 주된 관심사는 항상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오래 지속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었기에, 결국 시공간과 자연 법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물리학자가 되었다.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을 초월한 곳에 집중하면서 살고 싶다면, 사실 물리학자만 한 직업도 없다. 하지만 과학적 발견 자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생명과 사고는 우주의 방대한 시간대에서 아주 작은 오아시스와도 같다. 경이롭기 그지없는 온갖 물리적 과정은 우아한 수학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생명과 마음이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별로 길지 않다. 별과 행성,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 우주를 생각할 때, 지금 이 시대는 참으로 특별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스타벅스에서 얼그레이를 마시다가 문득 떠오른 느낌이다. 이날 나는 앞서 말한 대로 평온한 마음과 함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고, 암울한 미래보다 ‘일시적이지만 경이로운 현재’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과거에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 작가, 예술가, 영적 스승들이 남긴 교훈, 즉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는 교훈의 우주적 버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교훈에서 영감을 얻었다.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영원은 수없이 많은 ’지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고, 초월주의자이자 시인이었던 핸리 소로도 ‘매 순간에 담긴 영원’을 이야기했다. 이런 느낌은 시간을 시작에서 끝까지(until the end of time)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더욱 강렬해진다. 방대한 우주와 유구한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here and now)’는 정말로 특별하면서 순간적인 개념이다. 이 책 목적은 ‘지금 여기’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여기'는 왜 특별한가?
"사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원인과 결과, 기억과 희망, 후회와 의지 차이)는 없다. 시간 흐름은 열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이처럼 시간과 열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마다 열이 관여한다. 공이 이동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는 것은 마찰 때문이고, 이 마찰이 열을 생산한다. 그리고 열이 있는 곳에서만 과거와 미래가 구분된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역행 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엔트로피’라는 명칭을 붙였다. 볼츠만은 과거와 미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별’한 상황은 ‘질서’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질서 정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구성이다. 특별한 상황은 어떤 측면만 봤을 때 두드러지게 보이는 상황이다. ‘특수성’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우리가 희미한 시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즉 우리 무지가 얼마나 되는지 산출하는 양)이라는 점을 정확히 증명했다. 과거와 미래 차이는 이 무지 정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정확한, 미시적 상태에 대한 모든 상세한 내용을 고려할 수 있다면, 과거와 미래 차이는 사라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로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현상을 흐릿하게 보는 경우에만 과거와 미래의 놀라운 차이가 나타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 구분은 무의미하다. 볼츠만 연구에서 나온 결론은 당혹스럽다. 결국 과거와 미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무지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을 특징짓는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의 과거에서 ‘특정한’ 상태로 환원되며, 그 ‘특정성’은 우리의 무지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엔트로피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시각이 식별하지 못한 미시적인 상태들의 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볼츠만은 시간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특별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다. 관점과 관련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과거 사물의 배열에서 특별함이란 희미함이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그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관점의 효과일 수 있다. 이렇듯 시간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모든 변수들이 사실상 동등한 수준에 있고 그것들에 대해 오직 거시적 상태들을 통해 흐릿하게만 알 수 있는 기본 물리계에서는, 하나의 거시적인 일반 상태가 하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볼츠만은 한 잔의 물속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시적 변수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열의 거동이 흐릿함을 알아냈다. 여기서 물에 대한 가능한 모든 미시적 배열들의 ‘수’가 바로 엔트로피다. 흐릿함은 우리가 세상의 미시적인 세부 사항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우리 시각은 희미하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의 일부와 나머지 세상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수많은 변수에 대해 여전히 깜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미함이 볼츠만 이론의 핵심이다. 엔트로피가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에 영향을 받는 이유는 ‘구별할 수 없는’ 무수한 배열들에 의해 엔트로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미시적 배열이 어떤 희미함에 대해선 엔트로피가 높을 수 있고, 또 다른 희미함에 대해선 낮을 수 있다. 이는 희미함이 정신적인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희미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다.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물체 속도는 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다른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물체의 성질이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세상과 우리 상호 작용은 부분적이기에 우리 무지가 특별한 변수인 열적 시간의 존재와 우리 무지를 양화한 엔트로피 존재를 결정한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우주의 전개를 이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잔존물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도록 한다.
풍부한 옛 흔적의 존재는 과거가 결정되어 있다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어떤 비슷한 미래의 흔적도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열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적의 존재는 우리 뇌가 지나간 사건들의 지도를 광범위하게 펼쳐놓을 수 있게 해주지만,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느낌의 바탕을 이룬다. 과거에 대해서는 뭔가를 할 수 없을지라도, 다양한 미래에 대해서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 상황에서 질서(생명체)가 가능한 이유
비가역성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미래로 진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 개념이므로, 물리 법칙을 분석하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이 개발한 방정식을 아무리 분석해 봐도, 시간 역행을 방지하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뉴턴의 고전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수십 명의 물리학자가 개발한 양자물리학은 한 가지 확고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떤 이론이건, 물리 법칙은 과거와 미래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물리계 현재 상태가 주어졌을 때 계의 과거와 미래는 똑같은 방정식에 의해 결정되며,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고 해서 수학적으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는 하늘과 땅 이상으로 큰 차이가 있지만, 물리 법칙은 둘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물리 법칙이 여러 사건의 순차 발생을 허용한다면, 그 반대 순서로 발생하는 것도 똑같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경험은 왜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있을까? 우리는 왜 특정 방향으로 진행되는 사건에만 익숙하고, 반대로 진행하는 사건은 볼 수 없는 걸까? 해답은 우주 진화 비밀이 담긴 ‘엔트로피’에서 찾을 수 있다. 열과 엔트로피 흐름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열을 흡수한다는 것은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뜻이고, 한 물체 분자의 무작위 운동을 통해 운반된 에너지는 다른 물체 분자 속도를 높이거나 넓게 퍼지게 만들어서 엔트로피 증가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A에서 B로 엔트로피가 이동하려면 그 방향으로 열이 흘러야 한다. 열이 A에서 B로 흐르면 엔트로피가 A에서 B로 이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엔트로피는 흐르는 열의 파동을 타도 이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계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경우가 있다. 이 과정을 ‘엔트로피 2단계 과정’(중력 등이 중심부를 안으로 짓눌러서 고밀도-초고온 상태가 되고, 가장자리에 있는 물질은 밀도가 감소하면서 차가워지는 현상)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지만 하나의 물리계 안에서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도 있지만 주변 환경의 엔트로피 증가량이 내부 감소량보다 많기에 엔트로피 총량은 항상 증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2법칙은 진작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해지는 우주에서 별과 행성, 인간과 같은 질서 정연한 구조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엔트로피 2단계 과정’ 덕분이었다. 물리계에 흐르는 에너지(석탄을 태워서 발생한 에너지는 수증기를 통해 외부에 일을 한 후 증기 기관 밖으로 방출된다)는 엔트로피를 외부로 방출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심지어 질서를 창출할 수도 있다. 생명과 마음, 그리고 마음이 중요하게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엔트로피 층‘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제2법칙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자발적으로 질서가 수립되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다. 이런 현상은 액체 분자가 특별한 환경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액체 분자가 열에너지를 계속 흡수하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런 경우 임의의 물리계는 자발적 요동을 일으키면서 순간적으로 작은 영역에 집중된 질서 정연한 패턴을 보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미세요동이 금방 흩어져서 원래의 불규칙한 패턴으로 돌아가지만, 분자가 특정한 패턴으로 배열되어 있을 때에는 에너지 흡수 능력이 크게 높아져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분자의 특별한 배열로 이루어진 물리계가 주변으로부터 집중된 에너지를 꾸준히 공급받으면 무질서에서 질서가 창출되거나, 이미 존재했던 질서가 더욱 질서 정연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품질의 에너지(넓게 퍼져서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주변 환경으로 방출된다. 질서 정연한 패턴은 에너지를 분산시키기에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로 불리기도 한다. 이 경우 주변 환경을 포함한 총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에너지를 공급받는 물리계는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던 입자들이 외부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흡수하여 질서 정연한 배열로 바뀌고, 향후 유입된 에너지는 현재의 배열을 유지하거나 질서를 더 높이는 데 사용되며, 이 과정에서 품질이 하락한 에너지는 가차 없이 외부로 방출된다. 이 현상을 ‘소산적 적응(dissipative adapt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정 분자계는 이런 식으로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살아 있는 생명체도 이와 동일한 과정을 수행하고 있으므로(고품질 에너지를 취하여 용도에 맞게 사용한 후 저품질 에너지를 열과 폐기물 형태로 방출함), 소산적 적응은 최초의 생명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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