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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연의 가장 기본인 입자 단계에서 작용하는 법칙을 직접 볼 수 없기에 자신 선택이 자유의지를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 인간의 무딘 감각으로는 입자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몸의 입자들이 행동을 취하면, 그들의 집합적인 움직임이 마치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발현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에게 초능력이 주어져서 모든 현상을 입자 규모에서 분석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 산물처럼 보이는 생각과 행동이 물리 법칙의 결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를 이것으로 끝낸다면 ‘기존의 물리 법칙에 부합되면서 인간 특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를 놓치게 된다. 자유의지를 평가할 때 궁극적 원인인 입자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행위'로 관심을 돌리면 훨씬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자유는 우리 통제 영역을 벗어난 물리 법칙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 자유는 다른 입자 집단(예를 들어 무생물)에서 볼 수 없는 행동(도약, 사고, 상상, 관찰, 숙고, 설명 등)을 만들어 낸다. 인간 자유는 ‘의지가 반영된 선택’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과학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자연이 전개되는 방식은 의지와 완전히 무관하다. 인간 자유는 오랜 세월 동안 무생물을 ‘소극적 대응(전혀 행동하지 않음)’에 가둬 왔던 족쇄가 풀리면서 주어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당신의 어떤 영웅적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사실은 자유의지 발현이 아니라 물리 법칙을 따른 것뿐이다. 하지만 당신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갑자기 사람을 구하고, 훗날 그 행동을 회고하면서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위에 뭉쳐 있는 입자들에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 자유의 본질은 바로 이런 사고와 느낌, 행동에 깃들어 있다. 내가 처음에는 ‘전통적인 자유의지 관점에서 볼 때, 당신과 바위는 다를 것이 전혀 없다’라면서 기를 죽여 놓고,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고 할 때 뒷덜미를 잡으며 ‘그래도 힘내세요. 당신이 누릴 수 있는 다른 자유도 많이 있답니다’라면서 달래 준다. 내가 추구하는 접근법에서 이런 자유를 발견하려면 행동에 부과된 제한조건을 걷어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다양한 자유’에서 큰 위안을 얻고 있다.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에 물리 법칙이 적용된 결과이며, 나는 그 법칙을 절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려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몸 입자들이 의자나 머그잔의 입자와 달리 엄청나게 다양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문장을 쓴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입자이며, 나는 이런 현실에 아무런 불만도 없다. 물론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입자들이 양자역학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나타난 결과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나의 느낌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내가 자유로운 것은 물리 법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대한 내부 조직이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를 입자 집합으로 간주한 환원주의 서술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없다. 당신과 나는 동일한 물리 법칙을 따르는 동일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 삶은 거시 규모의 이야기(사람 이야기)에 담겨있다. 이런 거시 규모 서술에서는 우리 행동이 중요하고, 우리 선택이 미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우리 결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런데 물리학에 입각한 서술은 인간 수준 이야기가 틀렸음을 입증한다. 놀라우면서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 우리는 모든 선택과 결정 그리고 행동 주체가 나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환원주의 서술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경험과 직관만으로는 생각과 반응, 그리고 행동이 물리 법칙을 통해 먼저 일어난 선행 사건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개개 입자를 지배하는 법칙 대신, 개인의 복잡하고 다양한 거시적 행동에 초점을 맞춰서 자신 능력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입자 집단 중에서 생각하고, 배우고, 소통하고, 협력하고, 상상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습득한 집단은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여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집단을 양상하고, 세대가 반복되면서 능력이 더욱 향상된다. 이렇게 방향을 전환하면 입자 집단은 ‘내 의지로 이룬 것 같으면서도 결코 물리 법칙을 벗어난 적이 없는’ 놀라운 행동과 경험을 후대에 전할 수 있다.

 

 

일부 독자는 이 결론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 심정을 나도 잘 안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지금은 위에 언급한 관점을 받아들였지만, 나 역시 내가 나를 완전히 통제한다고 하늘같이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정연한 논리가 아닌 ‘친숙함’에 기초한 것이었고, 두뇌를 통과하는 입자 속성이 조금만 변해도 친숙한 정도는 크게 달라진다. 이것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마치 마음 자체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마음은 수많은 내가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개개 복사본(나)들은 다른 복사본이 경험한 현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첫 번째 복사본이 ‘내가 겪은 것이 진정한 현실이다’라고 주장하면 곧바로 두 번째 복사본이 등장하여 첫 번째 복사본이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또 다른 ‘진정한 현실’을 구축한다. 그러면 세 번째, 네 번째 복사본이 나타나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이 과정이 끝없이 계속된다.

 

 

이 상황을 물리학 관점에서 서술하면 내 두뇌에 조금 다른 입자가 유입된 것뿐이다. 하지만 이 작은 변화로 ‘나는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친숙한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나를 ‘나’라고 느끼는 감각과 내가 가진 능력, 그리고 내가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의지...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입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자를 조금만 조작하면 나에게 친숙한 특성이 사라진다. 나는 이런 깨달음을 계기로 물리학적인 이해와 직관적 감각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선택과 결정, 행동의 궁극적인 주체는 나 자신이며, 내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과정은 물리 법칙을 초월한다’는 인간 중심적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느낌’은 다분히 현실적이지만,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능력(인간 마음이 물리 법칙을 초월하는 능력)은 그렇지 않다. 자유의지를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면 인간 수준의 이야기는 환원주의 설명과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기원(입자)에서 자유로운 행동으로 초점을 바꾸면 확고하고 다양한 인간 자유를 수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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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DNA 돌연변이가 점차 누적되어 종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진화>

 

 

 

 

 

 

 

 

 

 

 

 

 

 

 

 

 

“진화란 자신과 정확히 똑같은 유전자를 복제하고 싶어하는 유전자의 이기적 욕구와 유전자 욕구를 무작위로 만들려는 돌연변이 능력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다.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기능에 미치는 효과는 아주 미미하거나 아예 없기에 자연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고 계속 축적된다. 이런 돌연변이를 ‘중립 돌연변이(neutral mutation)’라고 한다. 사람들 사이의 유전자 차이는 수백만 개에 이르지만, 대부분 중립 돌연변이라” 사람들, 즉 개체 사이의 차이는 발현되지 않는다.<미토콘드리아>

 

 

 

 

 

 

 

 

 

 

 

 

 

 

 

 

 

2004년 노벨상을 받은 린다 벅과 리처드 액설은 “사람 게놈에서 족히 3퍼센트가량인 1,000개 남짓 유전자가 다양한 냄새를 감지하는 데 쓰이고, 유전자 한 개는 냄새 분자 하나에 반응하는 수용체 한 개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사람의 1,000개 남짓 유전자 중에서 300개 가량은 수선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이한 돌연변이 형태라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사람 이외 다른 포유류는 이 유전자 전부를 사용한다).

 

 

안 쓰는 유전자가 그렇게 많다면, 왜 사람은 애초 그렇게 많은 후각 유전자를 거느려야 했을까? 생물이 세대를 거치면서 게놈에 간간히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만약 돌연변이가 어떤 유전자 기능을 망가뜨리면 그 결과는 위험하거나 치명적일 수 있다. 하지만 유전자를 망가뜨리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돌연변이라면 어떨까? 그런 돌연변이는 세대로 조용히 전수된다. 수학적으로 따져보아도 확실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고래의 비도는 냄새 맡는 일에 쓰이지 않는다. 고래의 비도는 분수공으로 변해, 냄새 맡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일에 쓰이고 있다. 고래는 포유류의 후각 유전자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만, 그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혀 기능하지 않는다. 고래가 비도를 분수공으로 바꾸면서 냄새 유전자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자, 냄새 유전자의 기능을 망가뜨리는 돌연변이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쓸모없는 유전자들이지만 진화의 기록으로서 조용히 DNA 안에 남게 된 것이다.“<내 안의 물고기>

 

 

 

 

 

 

 

 

 

 

 

 

 

 

 

 

 

“유전자 변형(돌연변이)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수치로 말하면 DNA 염기 1억 개당 1개꼴이다. 중세 시대 필경사가 성격 30권을 쓰는 동안 오자가 단 2개 발생한 것과 같다(영어로 번역한 성격의 총 글자 수는 300만 자가 조금 넘는다). 게다가 1억분의 1조차도 과대평가된 것이다. 변형된 유전자의 99%는 세포의 화학적 교정 메커니즘을 거치면서 수정되기에, 실제 변형이 일어날 확률은 100억분의 1에 불과하다.

 

 

유전자 변형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효과가 누적되면 신체적, 생리적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지구 생명체들은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를 겪어왔다. 백만 년의 수천 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생명이 진화하는 동안 1년마다 프린트용지 한 장을 쌓았다면, 지금 그 높이는 거의 100km에 달할 것이다. 에베레스트산의 10배가 넘는다. 누군가 매년 한 번씩 이 종이에 ‘올해의 생명체’를 그려 넣어서 10억 페이지짜리 플립북을 만들었다면, 이웃한 페이지 사이에는 다른 점이 거의 없겠지만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는 아메바와 침팬지만큼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진화적 변화가 신중하게 세운 계획에 따라 단순한 생명체에서 복잡한 생명체를 향해 한 페이지씩 천천히, 꾸준히 진행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는 시행착오를 통한 혁신에 가깝다. 즉 유전 물질의 무작위 조합과 변이를 통해 혁신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여기서 시행은 하나의 혁신과 다른 혁신을 생존 경쟁의 장에서 대결시키는 것이고, 착오는 실패한 혁신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사업을 말아먹는 혁신이다. 언젠가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제품 일부를 무작위로 수정해서 파는 식이다. 당신 회사의 이사회에 이런 전략을 내놓는다면 며칠 내 해고되기 십상이지만, 자연에는 회사에 없는 막강한 자원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자연이라는 회사는 매사에 서두를 필요가 없고, 수익을 낼 필요도 없다. 작은 변화를 무작위로 일으키면 그에 따르는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데, 자연은 이 비용을 시간으로 때워 왔다.“<엔드 오브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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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콘드리아는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소기관의 하나로,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인 ATP(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에너지)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세포 속 발전소다. 미토콘드리아 양이 부족하면 에너지 공급량이 불충분해지고 호흡과 체온조절 등 생명에 관계하는 활동에 우선적으로 에너지가 사용되는 반면, 뇌나 내장 기능이 떨어져 몸 전체 기능이 쇠약해진다. 즉 노화가 진행된다. 미토콘드리아는 나이가 들수록 감소한다. 노화를 막고 활기찬 몸을 유지하려면 미토콘드리아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미토콘드리아를 늘리는 것은 가능하다. 주로 방법은 1) 가끔 추위와 공복을 느껴서 세포가 에너지를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한다. 2) 근육세포를 늘린다.“<죽기 전까지 걷고 싶으면 스쿼트를 하라>

 

 

 

 

 

 

 

 

 

 

 

 

 

 

 

“노화 과정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칼로리를 줄이는 다이어트가 노화 현상을 막아주는 것을 발견했다. 영양 공급을 줄이면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일어나 노화를 억제한다. 피하지방의 포도당은 산소가 공급되면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되며 이때 ATP 형태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몸은 에너지를 위해 ATP를 사용한다. ATP는 차례로 분리 가능한 세 개의 인산기를 포함하고 있다. 분리할 때마다 특정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각각의 인산기는 약 30kJ/mol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화학으로 이루어진 세상>

 

 

 

 

 

 

 

 

 

 

 

 

 

 

 

 

 

 


"산화환원(포도당+산소)에서 얻은 에너지는 모든 세포에 내장된 생물학적 배터리(양성자)를 충전하는 데 사용되며, 충전된 배터리는 모든 세포에 에너지를 운반하고 공급하는 수송 전문 분자(ATP)를 합성하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매우 정교한 과정으로,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략적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전자가 산화환원 수용체의 길게 뻗은 분자 팔로 점프하면 수용분자(전자를 받아들이는 분자)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방위에 변화가 생긴다. 즉 주변 다른 분자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는데, 유독 수용 분자 방향만 달라진다(외형상으로 톱니바퀴가 한 이빨만큼 앞으로 전진한 것과 비슷하다). 잠시 후 변덕스러운 전자가 두 번째 수용체를 향해 점프를 시도하면 첫 번째 수용체의 수용 분자는 원래 방향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수용 분자가 또 다시 경련을 일으킨다. 그 후 전자가 계속 점프하면서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는데, 전자를 받아들인 분자는 경련을 일으키며 톱니바퀴가 한 단계 앞으로 전진하고, 전자를 잃은 분자는 원래 위치로 되돌아간다.

 

 

전자의 점프와 수용 분자의 경련은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분자가 오락가락하는 톱니바퀴처럼 앞뒤로 움직이면 한 무리의 양성자들이 이 동작에 밀려나면서 자신을 에워싼 막을 통과하여 얇은 두께로 축적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성자 베터리’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인 배터리는 화학 반응을 통해 전자가 배터리의 한쪽 끝(양극)에 축적된다. 이때 전자들 사이에는 전기적 척력이 작용하기에 언제든지 달아날 준비가 된 상태다. 여기에 닫힌 회로를 연결하고 전원 스위치를 켜면 양극에 갇혀 있던 전자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모종의 전기 기구(전구, 휴대용 컴퓨터, 휴대전화 등)을 통과한 후 배터리 반대쪽(음극)에 도달한다. 요즘 사람들은 배터리를 흔해 빠진 소모품쯤으로 취급하지만, 사실은 매우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배터리는 ‘기회만 주어지면 사용자가 선택한 전기 기구에 자신 에너지를 모두 헌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자 집단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

 

 

살아 있는 세포 배터리도 이와 비슷하다. 일상적인 배터리와 다른 점은 전자 대신 양성자가 저장되어 있다는 점인데, 양성자들 사이에도 전기적 척력이 작용하기에 작동 원리는 같다. 세포 산화환원 반응으로 양성자들이 한곳에 축적되면, 이들은 동료로부터 멀어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배터리는 세포의 산화환원 반응을 통해 충전된다. 사실 양성자들은 매우 얇은 막(원자 수십 개에 해당하는 두께)의 한쪽에 모여 있기 때문에, 전기장(전압을 막의 두께로 나눈 값)이 수천만 V/m에 달할 정도로 높다. 세포의 생물학적 배터리는 크기만 작을 뿐이지,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세포는 이 초소형 발전소(미토콘드리아)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정작 놀라운 일은 지금부터 일어난다. 양성자를 가로막는 막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노 크기의 터빈이 달여 있어서, 빽빽하게 모여 있던 양성자들이 막을 통과하여 흐르면 터빈도 돌기 시작한다. 마치 강풍이 불어서 풍차 날개가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세포의 풍차(터빈)도 하는 일이 우리 일상의 풍차와 비슷하지만, 구조를 분쇄하는 대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분자 터빈은 양성자를 바람 삼아 회전하면서 두 종류의 입력 분자(아데노신 2인산[ADP]과 인산기)를 합성하여 하나의 분자(아데노신 3인산[ATP])를 만들어 내고 있다.

 

 

터빈에 의해 강제로 형성된 ATP 분자들은 전하 부호가 같은 입자들이 화학 결합을 통해 꽉 끌어안고 있어서 역학적으로 ‘잔뜩 긴장한’ 상태다. 강한 힘으로 압축된 채 해방될 날만 학수고대하는 용수철과 비슷하다. 무엇이건 에너지를 많이 품고 있으면 사고 칠 위험이 그 만큼 높아지지만, 세포는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어서 오히려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고 있다. ATP 분자는 세포 안을 돌아다니다가 필요할 때 화학 결합을 끊고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으며, 이럴 때마다 구성 입자들은 에너지가 낮은 ‘편안한’ 상태로 떨어진다. ATP 분자가 분열되면서 방출된 에너지가 세포 공장에 동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몇 가지 숫자만 확인하면 세포 공장의 지칠 줄 모르는 기능을 실감할 수 있다. 평범한 세포 1개가 1초 동안 정상 기능을 유지하려면 약 1천만 개의 ATP 분자가 필요하다. 우리 몸은 수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초 사이에 무려 10^20개의 ATP 분자가 소모되는 셈이다. ATP가 소모되면 원자재(ADP와 인산염)로 분해되고, 양성자 배터리로 구동되는 터빈에 의해 다시 ATP로 재생되어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포 전체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사람의 평균 에너지 소모량을 생각할 때, 세포 터빈의 생산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당신이 제아무리 속독의 대가라도, 이 한 문장을 읽는 동안 당신 몸은 5억 X 1조 개의 ATP 분자를 생산했다.“<엔드 오브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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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궤도들 사이에는 전자적인 출입금지구역이 있다. 전자들은 이 구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전자들은 이 금지구역을 그냥 뛰어넘어서 다른 궤도로 쉽사리 옮겨갈 수 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궤도를 옮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이런 점프는 공짜가 아니다. 전자가 다른 궤도로 점프하려면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해야 한다. 전자는 원자핵에서 먼 궤도로 점프할 때 에너지를 흡수해야 하므로, 원자핵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담게 된다. 불꽃이 확 일면서 열기구가 공중으로 뜨는 모습과 조금 비슷하다. 반대로 원자핵과 가까워지려면, 전자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뭔가를 방출해야 한다. 열기구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기 위해 뜨거운 공기를 방출하는 것과 같다.

 

 

그럼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빛이 등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전자는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함으로써 궤도와 궤도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아무 빛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가 다른 궤도로 점프하려면 그 사이의 출입금지구역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재주를 부리려면, 특정한 양의 에너지, 즉 특정한 광선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집어삼키거나 내놓아야 한다. 에너지가 부족한 빛과 만나면, 전자는 점프를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무를 것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에너지가 많은 빛과 만나면 출입금지구역을 몇 개나 뛰어넘다 못해 아예 원자에서 튕겨 나갈 수도 있다.“<우주, 시간, 그 너머>

 

 

 

 

 

 

 

 

 

 

 

 

 

 

 

 

 

 

“전자는 특별한 반지름을 갖는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른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그냥 점프를 해야 한다. 문제는 점프를 하는 동안 궤도 사이를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한 궤도에서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짠하고 나타난다. 역시 이유는 모른다.

 

 

전자가 이렇게 점프를 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우리가 원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점프할 때 드나드는 빛뿐이다. 빛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점프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나는 상태’가 반드시 정해져야 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려면 입구와 출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리에서는 입구와 출구 모두 에너지로 기술된다. 즉 시작 에너지와 끝 에너지가 필요하다. 가로 방향을 시작 에너지, 세로 방향을 끝 에너지 순서로 이들을 늘어세우면 2차원 격자 모양의 배열이 얻어지는데 이런 숫자들의 배열을 수학에서는 ‘행렬’이라고 부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는 행렬이다’라고 말했다.“<떨림과 울림>

 

 

 

 

 

 

 

 

 

 

 

 

 

 

 

 

 

 

 

“물 분자의 기하학적 구조는 우주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 분자의 구성 원자는 넓은 V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데, 꼭짓점에 산소 원자가 있고 수소 원자 2개는 갈라진 가지의 양 끝에 자리잡고 있다. H2O 분자는 전체적으로 중성이지만 산소 원자의 전자 포획 본능이 워낙 강하기에, 수소와 결합했을 때 음전하(전자)의 위치가 산소 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H2O의 산소 원자는 음전하를 띠고, 2개의 수소 원자는 양전하를 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어차피 물 분자 전체적으로 중성인데, 내부의 음전하가 산소 쪽으로 조금 치우쳤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미세한 불균형이 없었다면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 분자는 전하가 비대칭적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거의 모든 물질을 녹일 수 있다. 음전하를 띤 산소 원자는 주변 양전하를 무조건 끌어당기고, 양전하를 띤 수소 원자는 주변 음전하를 무조건 끌어당긴다. 전하를 띤 물질이 물속에 오래 잠겨 있으면 물 분자 양끝이 전하 갈퀴처럼 작용하여 물질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소금이다. 나트륨 원자(Na)와 염소 원자(Cl) 결합으로 형성된 소금 분자는 나트륨 근처에서 양전하가 조금 초과된 상태이고(전자 1개를 염소에 기증했음), 염소 근처는 음전하가 조금 초과된 상태다(나트륨으로부터 전자 1개를 기증받았음). 물에 소금을 떨어뜨리면 H2O의 산소 원자(음전하)가 나트륨(양전하)을 움켜쥐고 수소 원자(양전하)는 염소(음전하)를 움켜쥐면서 소금 분자를 해체시킨다. 이 과정을 두 글자로 줄인 것이 ‘용해’이고, 결과물을 세 글자로 줄인 것이 ‘소금물’이다. 물에 관한 한, 소금뿐 아니라 다른 물질도 마찬가지다. 세부 사항은 물질마다 다르지만,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물 분자의 비대칭적인 전하 분포 때문에 설탕물이 되고, 술이 되고, 양잿물이 된다. 비누 없이 손을 씻을 때에도 물의 전지적 극성이 손에 묻은 이물질을 잡아당겨서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간다.

 

 

물이 다른 물질을 포획하는 능력은 개인위생 뿐 아니라 생명 활동에도 필수적이다. 세포 내부는 거대한 화학 공장을 방불케 한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물질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폐기물을 배설하고, 화학 물질을 재료 삼아 세포 기능에 필요한 여러 가지 효소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물이 없으면 모든 공정이 중단된다. 세포 질량의 70%를 차지하는 물은 한마디로 ‘생명의 액체’다 193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출신의 생화학자 알베르트 센트죄르지는 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물은 생명의 물질이자 생명의 기반이며, 모든 매개체의 어머니다. 물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지구 생명체는 원래 바다에서 살다가, 피부에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한 후에야 육지로 진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물과 함께 살고 있다. 다만 바깥에 있던 물을 몸 안으로 가져온 것뿐이다.’

 

 

생명이 에너지를 처리하는 과정의 핵심은 산화환원 반응(redox reaction)이다. 그다지 매력적인 이름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사례(불에 타는 장작)를 들어보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장작이 탈 때 나무에 함유된 탄소와 수소는 자신이 갖고 있던 전자를 공기 중 산소에게 나눠주면서(앞서 말한 대로, 산소는 항상 전자를 애타게 찾고 있다) 서로 결합하여 물과 이산화탄소가 되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한다(그래서 불은 뜨겁다). 산소가 전자를 포획했을 때, 흔히 환원되었다(reduced)고 말한다(전자를 향한 산소의 갈망이 누그러들어다(reduced)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산소에게 전자를 양도한 탄소와 수소는 산화되었다(oxidized)고 한다. 이 둘을 합쳐서 부른 것이 바로 산화환원 반응이다. 불타는 장작은 화학적 연소를 보여 주는 전형적 사례다. 궤도에 전자를 다 채우지 못하여 불안한 원자가 다른 원자로부터 전자를 기증받으면 억누르고 있던 다량의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한다.

 

 

살아 있는 세포에서도(일단은 동물 세포에 집중하자) 이와 비슷한 산화환원 반응이 일어나지만, 당신이 아침에 먹은 원자에서 분리된 전자는 곧바로 산소에 영입되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면 이 과정에서 방출된 에너지가 세포에 화재 비슷한 사건을 일으켜 세포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다. 음식이 기증한 전자는 일련의 산화환원 반응을 거친 후 궁극적으로 산소에 안착하지만, 각 단계마다 소량의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간간이 휴식을 취한다. 야구장 관람석 꼭대기에 떨어진 야구공이 한 번에 바닥에 내려오지 않고 계단을 따라 층층이 떨어지는 것처럼, 전자는 하나의 분자 수용체에서 다른 분자 수용체로 점프하면서(뛰어내리면서) 에너지를 단계적으로 방출한다(나중에 만나는 분자가 먼저 만난 분자보다 전자를 더 간절히 원하기에 매 단계마다 조금씩 에너지가 방출된다). 모든 원자 중 전자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산소는 제일 아래층에서 기다리다가 전자가 도착하면 단단히 끌어안으면서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쥐어 짜내고, 이것으로 에너지 추출 과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은 식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물과 식물 차이점은 ‘전자의 출처’뿐이다. 동물은 전자를 음식에서 얻고, 식물은 물에서 얻는다. 녹색 잎의 엽록소에 햇빛이 도달하면 물 분자의 전자가 에너지를 얻고 이탈하여  계단식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산화환원 반응을 시작한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에너지를 얻는 과정은 전자가 점프하면서 진행되는 일련의 산화환원 반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알베르트 센트죄르지는 ‘모든 생명 현상은 최후의 쉼터를 찾아가는 전자의 여정’이라고 했다.

 

 

이것은 물리학 관점에서 볼 때 정말로 놀라운 현상이다. 에너지는 우주 전역에서 통용되는 동전으로, 주조된 형태와 사용처도 매우 다양하다. 그중 한 형태인 핵에너지는 원자핵이 분열되거나 융합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전자기적 에너지는 하전 입자들이 밀고 당기는 와중에 생성된다. 또 다른 동전인 중력에너지는 무거운 물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된다. 하지만 지구 생명체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관리한다. 음식이나 물에서 시작하여 전자가 에너지가 낮은 쪽으로 계속 뛰어내리다가, 마침내 산소 품에 안기는 일련의 전자기적 화학 반응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에너지 추출법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지구 생명체 전매특허가 되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유전자 암호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생명이 에너지를 취하는 방법에 통일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지구 모든 생명체는 40억 년 전에 최초로 등장했던 단세포생물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엔드 오브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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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자극하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을 생각할 때 주로 머리를 사용했다. 이와 관련된 논문을 ‘수학으로 표현된 흥미진진하면서 추상적인 영감의 집합’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내가 진정으로 모든 삶과, 모든 사고와, 모든 노력과, 모든 업적을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랬다. 개개의 단어에 담긴 의미를 습관처럼 흘러 넘기지 않고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더니, 모든 것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모든 것이 암울하게 보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우쭐해지거나 자연의 치밀한 구조에 경이로움을 느낀 적은 종종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학으로 얻은 결과에서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 감정이 서서히 정제되어, 지금은 먼 미래를 생각할 때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경험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에 파묻혀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독자들은 ‘이 친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 독자는 나와 개인적 친분이 없으므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감이 잡힐 것이다. 나는 엄밀하고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수학과 물리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는 명확한 계산을 통해 입증된 방정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며, 방정식으로 예측된 값과 실험을 통해 얻은 값은 소수점 이하 열 번째 자리 이상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래서 내가 생전 처음으로 ‘평온한 관계’를 느꼈을 때(그때 나는 뉴욕시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 있었다), 나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종업원이 얼그레이에 상한 두유를 넣은 걸까? 아니면 내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기어이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둘 다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 흔적을 남김으로써 짧은 삶의 허무함을 위안해 온 오랜 혈통 후손이 아니던가. 그 흔적이 오래 남을수록 자신 삶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미국 철학가 로버트 노직은 ‘죽음은 당신 삶을 지워 버린다. 하지만 완전히 지워지려면 한 인간 삶에 담긴 의미가 남김없이 파괴되어야 하고, 이렇게 될 때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나처럼 전통적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워 버린다’는 말을 애써 무시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가치관 속에서 양육되고, 교육받고, 경험과 경력을 쌓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내 주된 관심사는 항상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오래 지속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었기에, 결국 시공간과 자연 법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물리학자가 되었다.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을 초월한 곳에 집중하면서 살고 싶다면, 사실 물리학자만 한 직업도 없다. 하지만 과학적 발견 자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생명과 사고는 우주의 방대한 시간대에서 아주 작은 오아시스와도 같다. 경이롭기 그지없는 온갖 물리적 과정은 우아한 수학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생명과 마음이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별로 길지 않다. 별과 행성,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 우주를 생각할 때, 지금 이 시대는 참으로 특별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스타벅스에서 얼그레이를 마시다가 문득 떠오른 느낌이다. 이날 나는 앞서 말한 대로 평온한 마음과 함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고, 암울한 미래보다 ‘일시적이지만 경이로운 현재’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과거에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 작가, 예술가, 영적 스승들이 남긴 교훈, 즉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는 교훈의 우주적 버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교훈에서 영감을 얻었다.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영원은 수없이 많은 ’지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고, 초월주의자이자 시인이었던 핸리 소로도 ‘매 순간에 담긴 영원’을 이야기했다. 이런 느낌은 시간을 시작에서 끝까지(until the end of time)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더욱 강렬해진다. 방대한 우주와 유구한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here and now)’는 정말로 특별하면서 순간적인 개념이다. 이 책 목적은 ‘지금 여기’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여기'는 왜 특별한가?

 

"사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원인과 결과, 기억과 희망, 후회와 의지 차이)는 없다. 시간 흐름은 열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이처럼 시간과 열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마다 열이 관여한다. 공이 이동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는 것은 마찰 때문이고, 이 마찰이 열을 생산한다. 그리고 열이 있는 곳에서만 과거와 미래가 구분된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역행 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엔트로피’라는 명칭을 붙였다. 볼츠만은 과거와 미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별’한 상황은 ‘질서’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질서 정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구성이다. 특별한 상황은 어떤 측면만 봤을 때 두드러지게 보이는 상황이다. ‘특수성’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우리가 희미한 시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즉 우리 무지가 얼마나 되는지 산출하는 양)이라는 점을 정확히 증명했다. 과거와 미래 차이는 이 무지 정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정확한, 미시적 상태에 대한 모든 상세한 내용을 고려할 수 있다면, 과거와 미래 차이는 사라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로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현상을 흐릿하게 보는 경우에만 과거와 미래의 놀라운 차이가 나타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 구분은 무의미하다. 볼츠만 연구에서 나온 결론은 당혹스럽다. 결국 과거와 미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무지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을 특징짓는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의 과거에서 ‘특정한’ 상태로 환원되며, 그 ‘특정성’은 우리의 무지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엔트로피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시각이 식별하지 못한 미시적인 상태들의 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볼츠만은 시간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특별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다. 관점과 관련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과거 사물의 배열에서 특별함이란 희미함이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그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관점의 효과일 수 있다. 이렇듯 시간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모든 변수들이 사실상 동등한 수준에 있고 그것들에 대해 오직 거시적 상태들을 통해 흐릿하게만 알 수 있는 기본 물리계에서는, 하나의 거시적인 일반 상태가 하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볼츠만은 한 잔의 물속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시적 변수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열의 거동이 흐릿함을 알아냈다. 여기서 물에 대한 가능한 모든 미시적 배열들의 ‘수’가 바로 엔트로피다. 흐릿함은 우리가 세상의 미시적인 세부 사항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우리 시각은 희미하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의 일부와 나머지 세상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수많은 변수에 대해 여전히 깜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미함이 볼츠만 이론의 핵심이다. 엔트로피가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에 영향을 받는 이유는 ‘구별할 수 없는’ 무수한 배열들에 의해 엔트로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미시적 배열이 어떤 희미함에 대해선 엔트로피가 높을 수 있고, 또 다른 희미함에 대해선 낮을 수 있다. 이는 희미함이 정신적인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희미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다.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물체 속도는 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다른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물체의 성질이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세상과 우리 상호 작용은 부분적이기에 우리 무지가 특별한 변수인 열적 시간의 존재와 우리 무지를 양화한 엔트로피 존재를 결정한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우주의 전개를 이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잔존물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도록 한다.

 


풍부한 옛 흔적의 존재는 과거가 결정되어 있다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어떤 비슷한 미래의 흔적도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열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적의 존재는 우리 뇌가 지나간 사건들의 지도를 광범위하게 펼쳐놓을 수 있게 해주지만,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느낌의 바탕을 이룬다. 과거에 대해서는 뭔가를 할 수 없을지라도, 다양한 미래에 대해서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 상황에서 질서(생명체)가 가능한 이유

비가역성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미래로 진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 개념이므로, 물리 법칙을 분석하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이 개발한 방정식을 아무리 분석해 봐도, 시간 역행을 방지하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뉴턴의 고전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수십 명의 물리학자가 개발한 양자물리학은 한 가지 확고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떤 이론이건, 물리 법칙은 과거와 미래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물리계 현재 상태가 주어졌을 때 계의 과거와 미래는 똑같은 방정식에 의해 결정되며,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고 해서 수학적으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는 하늘과 땅 이상으로 큰 차이가 있지만, 물리 법칙은 둘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물리 법칙이 여러 사건의 순차 발생을 허용한다면, 그 반대 순서로 발생하는 것도 똑같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경험은 왜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있을까? 우리는 왜 특정 방향으로 진행되는 사건에만 익숙하고, 반대로 진행하는 사건은 볼 수 없는 걸까? 해답은 우주 진화 비밀이 담긴 ‘엔트로피’에서 찾을 수 있다. 열과 엔트로피 흐름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열을 흡수한다는 것은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뜻이고, 한 물체 분자의 무작위 운동을 통해 운반된 에너지는 다른 물체 분자 속도를 높이거나 넓게 퍼지게 만들어서 엔트로피 증가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A에서 B로 엔트로피가 이동하려면 그 방향으로 열이 흘러야 한다. 열이 A에서 B로 흐르면 엔트로피가 A에서 B로 이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엔트로피는 흐르는 열의 파동을 타도 이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계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경우가 있다. 이 과정을 ‘엔트로피 2단계 과정’(중력 등이 중심부를 안으로 짓눌러서 고밀도-초고온 상태가 되고, 가장자리에 있는 물질은 밀도가 감소하면서 차가워지는 현상)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지만 하나의 물리계 안에서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도 있지만 주변 환경의 엔트로피 증가량이 내부 감소량보다 많기에 엔트로피 총량은 항상 증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2법칙은 진작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해지는 우주에서 별과 행성, 인간과 같은 질서 정연한 구조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엔트로피 2단계 과정’ 덕분이었다. 물리계에 흐르는 에너지(석탄을 태워서 발생한 에너지는 수증기를 통해 외부에 일을 한 후 증기 기관 밖으로 방출된다)는 엔트로피를 외부로 방출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심지어 질서를 창출할 수도 있다. 생명과 마음, 그리고 마음이 중요하게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엔트로피 층‘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제2법칙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자발적으로 질서가 수립되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다. 이런 현상은 액체 분자가 특별한 환경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액체 분자가 열에너지를 계속 흡수하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런 경우 임의의 물리계는 자발적 요동을 일으키면서 순간적으로 작은 영역에 집중된 질서 정연한 패턴을 보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미세요동이 금방 흩어져서 원래의 불규칙한 패턴으로 돌아가지만, 분자가 특정한 패턴으로 배열되어 있을 때에는 에너지 흡수 능력이 크게 높아져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분자의 특별한 배열로 이루어진 물리계가 주변으로부터 집중된 에너지를 꾸준히 공급받으면 무질서에서 질서가 창출되거나, 이미 존재했던 질서가 더욱 질서 정연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품질의 에너지(넓게 퍼져서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주변 환경으로 방출된다. 질서 정연한 패턴은 에너지를 분산시키기에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로 불리기도 한다. 이 경우 주변 환경을 포함한 총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에너지를 공급받는 물리계는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던 입자들이 외부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흡수하여 질서 정연한 배열로 바뀌고, 향후 유입된 에너지는 현재의 배열을 유지하거나 질서를 더 높이는 데 사용되며, 이 과정에서 품질이 하락한 에너지는 가차 없이 외부로 방출된다. 이 현상을 ‘소산적 적응(dissipative adapt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정 분자계는 이런 식으로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살아 있는 생명체도 이와 동일한 과정을 수행하고 있으므로(고품질 에너지를 취하여 용도에 맞게 사용한 후 저품질 에너지를 열과 폐기물 형태로 방출함), 소산적 적응은 최초의 생명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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