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J.R.스탠필드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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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의 사상



“폴라니는 전통적인 종교윤리를 거부했다. 종교윤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선택이 아닌 예정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자유와 책임에 대한 윤리 핵심 사항을 빼앗아 버린다. 여기서 핵심은 도덕적 규율에 의한 삶뿐 아니라 규율 자체에 의한 삶의 선택을 구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약속하는 종교 교리는 각기 삶을 도덕적으로 영위하고자 하는 갈망에 덮개를 씌운다. 인간행동의 근거로서 초자연적인 힘을 붙들어 잡는 교리는 행동과 결과에 대한 개인 책임감을 저해한다.


폴라니는 또한 시장지향의 정신을 거부했다. 개인이 자신의 효용함수만 책임지면 된다는 논법은 사회 실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문화에서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온갖 종류의 선택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다. 선택이라고 헤봤자 진실로 중요한 선택은 결여된 채 단지 삶을 은폐하는 광란적인 골라뽑기만이 난무할 뿐이다. 이것은 오히려 삶의 방식보다는 삶에 대한 열망의 부재, 즉 ‘쉼 없는 발걸음이 끝없는 뒷걸음으로 나타나게 된 형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폴라니는 파시즘을 거부하였다. 파시즘은 사회의 실제, 즉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자유 실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갈등을 반대하는 어떠한 유토피아적 시나리오도 거부하였다. ‘혁명의 도래’를 싹 틔우는 사회적 갈등의 반대는 사회적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제2차 인터내셔날을 거부했다. 이것이 갖는 역사적 결정주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사회와 역사를 데이우스 엑스 매키나(deux ex marchina) 속으로 집어넣어 개인 자유와 책임감을 대신해 버리기 때문이다.


폴라니에게 실존적 선택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도덕적으로 고양된 삶을 사는가 아닌가, 말하자면 단순한 존재라기보다는 삶의 내용과 질을 문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과 고통, 이에 맞서 삶을 가치 있게 영위하고자 하는 대결의 불안감(angst)이 바로 폴라니가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의 사실이다. 그는 쫓고 쫓기는 돈벌이 경쟁이 이러한 개인의 자유와 발전에 기여하는 우리 시대의 특이한 환상, 즉 지배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바꾸고자 하였다.


‘인간 삶(lives)’과 ‘경제생활(livelihood)’이란 말은 폴라니의 방법론을 표현하고 폴라니의 확신을 보여준다. 사회경제학 혹은 제도경제학으로서 폴라니의 방법론은 사회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경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행위가 제도화되는 방식, 그 만들어진 제도가 사회와 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폴라니의 확신은 좋은 경제란 인간 개개인 삶을 위해 물자를 공급하고, 가장 충만한 개인 발전을 준비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구체적인 문화적 상황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면, 원시와 현대 사회경제를 서로 비교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도 일찍이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 들면 임금노동과 자본은 수세기 동안 다른 원칙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주변부 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자본주의에 와서 임금노동과 자본은 성숙기를 맞아 사회경제 카테고리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습을 갖게 된다. 노쇠기를 맞아 임금노동과 자본은 새로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를 대표한 우세한 카테고리에 자리를 물려주게 될 것이다. 폴라니에게 중심적인 카테고리 대상은 시장제도이다. 즉 ‘비록 석기시대 이후 제법 보편화되었지만, 시장 역할은 경제생활에서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


교환을 통한 이윤추구는 제도적으로 강요된 행위체계이다. 이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서 분석되어야 하는 것일 뿐 결코 선행 요소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고전 정치경제의 비판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18세기의 예언가 스미스와 리카도의 상상력 속에서 자유 경쟁사회의 개인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봉건형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출현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6세기 이후 발달된 새로운 생산의 세력으로서 이상적인 존재로 부각되어 과거를 향해 투사의 빛을 쏘아 올렸다. 이들 개인은 역사적 결과가 아니라 역사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천부적 개인은 인간 본성 개념을 전유하여 역사적으로 자라온 개인이 아니라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듯 선천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마르크스는 자연법 철학을 바탕으로 시장자본주의는 불변인 인간본성인 경제적 이윤 추구와 완전히 부합하는 불가피하고도 초역사적인 사회구성체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이제 현대 경제학자들은 자연법의 틀도 필요없이 인간 개인은 선천적으로 계산적이고 경제이윤을 추구한다는 추론을 근본적으로 지속시켜 오고 있다. 이것이 제도로 정착되고 폴라니 표현처럼 시장지향의 정신을 이루어 인간의 심성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파멸을 향한 비전이었으며, 폴라니로 하여금 방법론적 관심을 정치경제적인 촉구로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폴라니는 이러한 경제이론의 편협성은 폭넓은 경험적 기반을 경제이론에 적용시킴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예견했다.


폴라니는 경제적(economic)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정확히 발전시켜 자주 사용했다. 그는 경제적이라는 의미를 형식적(formal) 그리고 실체적(substantive) 의미로 나누었다. 하나의 함축적 의미로서 형식주의 대부분이 주류 경제학에 의해 독점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이익지행, 효용 극대화의 선택 등 형식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계산적 경제화 행위 개념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인간사회는 희소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느 사회든 사실은 이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들이지만,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생산량의 배분과 분배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합리성은 더욱 논리화되어 하나의 공리가 되었으며, 이상적인 유형학으로 발전하여 경제학을 오늘날과 같은 선택의 과학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형식적 분석의 틀은 자유로운 개인주의 에토스와 결합하면서 경제행위의 전통적인 사회장치를 실질적으로 제거하게 된다. 개인의 자존, 창조, 주권 확립이라는 자유 가치와 개인적 발전은 까탈스러운 편협성으로 이어졌다. 자기 이익은 영광스러운 동기이고, 자유는 굴레를 벋고 도약하는 것이며, 개인적 성장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사회는 시장 상황에 직면하여 주어진 효용가치 선호도와 재화의 양을 가지고 ‘경제인’이 내리는 결정의 집합체일 따름이다. 이러한 사회가치의 형식주의 관점에서는 사적 가치의 총계라는 것말고는 어떤 중요 개념도 도출되지 않는다. 형식주의 관점은 반역사적이며, 게다가 편협한 심리적, 경험적 접근으로 인해 사회변동을 간과한다는 결점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약점은 진실로 주류 경제학의 비극적 유산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폴라니가 말하는 실체적 의미의 경제학은 경제의 물질적 기능을 다루고 있으며, 모든 생물 종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을 뜻한다. 요컨대 실체적 의미는 인간이 자신 경제생활을 위해 자연과 그의 동료에게 분명히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인간은 자기자신과 환경 사이의 제도화된 상호작용 덕택에 살아남는다. 이 과정이 경제다. 그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욕구를 채울 수단을 제공한다. 인간의 목적은 물질적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은 주로 물질적이다. 그리고 인간생활의 경제적 측면을 대표하는 것은 수단의 물질성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욕구를 물질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은 하나의 제도일 뿐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형식주의 경제학의 극대화는 수단과 목적이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애덤 스미스 사후 연구되었던 정치경제학은 이로움보다 해를 더 끼쳤다. 현대인 심성에 작용하여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여 산업을 비인간화하였다. 리카도의 이론적 체계는 상당히기각되었지만, 현대 경제학은 확실히 리카도의 악과 오도된 구체성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형식주의는 경제행위 심리를 전제조건으로 삼고 경제제도의 성격과 임무도 사전에 규정함으로써 제도적 분석의 자리를 빼앗았다. 형식주의 아래에서 경제는 그것이 아무리 제도화되었다 하더라도 희소수단의 조건 속에서 유도되는 선택행위로 이루어졌다는 기발한 상상력의 추론만한다.


그 기발한 상상력의 추론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희소성이 인간행동의 보편적 조건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형식주의 집단의 경제분석에는 구체적인 열망, 권력 그리고 인간 삶의 결함을 탐구하기 위한 통로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들 경제분석은 인간 삶의 조건을 선험적인것으로 안다. 무엇이 인간 경제문제를 구성하고 있는가 사전에 알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경제 분석은 경제행위를 연구 대상으로 삼지만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알 필요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구체적 인간행동에 근거하여 형식적 공리를 발전시킨 것은 경쟁적 시장자본주의 시기이며 이것마저도 역사적 기간으로 보아 매우 짧았다. 산업혁명 이후 독점자본주의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의 완전경쟁시대가 있었다. 이때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과잉이 자본주의 공황을 낳았고,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이끈 무질서와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광대한 역사 기록으로 볼 때 이득 동기와 계산의 범주는 언제나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이것들이 존재할 때조차도 거의 지배적이지 않았다.


언뜻보면 어떤 경제시스템이라도 기아와 이득을 자극제로 삼아야 하다는 말에 매력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근거가 없다. 인간사회 전체를 개관해 볼 때 기아와 이득은 생산을 호소하는 자극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기에는 다른 강력한 동기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적 동기는 다른 동기와 동일하다. 경제적 기아와 이득은 사랑 또는 증오, 오만 또는 편견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다. 인간 동기는 오로지 경제적이지 않다. 물론 존재를 위한 식량 조달의 필요성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배고픔의 기아상태만이 식량 조달을 위한 심리 동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기아의 고통이 저절로 생산 자극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집단적이다. 만약 개인이 배고플 경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정치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해야 하며, 모든 것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사회 환경에 의해서 주어진다. 기아와 이득은 ‘돈벌이’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지는 생산과 연결된다. 이러한 제도 아래서 사람은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시장에다 다른 물건을 내다팔고 얻은 수입으로 다시 시장에서 물건을 사게 된다.


현대의 경제행위도 어느 정도 비이윤 또는 이윤과 비이윤의 혼합을 동인으로 삼아 움직이는데, 이윤동기를 유일한 것으로 보는 형식주의 경제학 오류는 경제정책을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방향으로 이끈다. 특히 경쟁적 자본주의의 초기 상황과 겨우 조응하는 극대화 원리는 더 이상 사회경제 조건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극대화 원리가 작용하는 가정을 근거로 세워진 정책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갈 뿐이다. 또한 형식주의 오류는 희소성을 전제하기에 진짜로 고려해야 할 중요사항을 배제한다. 경험적으로 수단의 부족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또는 진짜로 끝없이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진 특정 사람들의 물질적 욕구 성격을 규정짓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할 여지도 없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처럼, 실체주의 입장은 이 세상 어떠한 것도 무한한 것은 결코 없기에 절대적인 의미로서 무한하게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을 당연히 거부한다.


존 스튜어트 밀도 정상상태(stationary state: 경제의 생산과 교환, 소비가 동일한 규모를 갖고 반복된다는 것으로 마르크스의 단순재생산에 해당한다. 정상상태를 일종의 제로 성장론으로 볼 수 있다)를 이야기하면서 더 이상의 양적인 경제 진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아예 필요하지도 않은 시간이 오기를 고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체로 정상상태가 우리의 현재조건을 현저하게 향상시킬 것이라는 점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바람직한 상태는 남을 앞지르기 위해 싸우는 삶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밟아 뭉개고, 밀치고, 팔꿈치로 치고, 서로의 발뒷꿈치를 밟는 것이 사회생활의 존재양식이며 바람직한 인간 운명이 아니다. 이는 산업이 성장할 즈음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쾌한 징후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이미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부귀의 상징 외에는 아무런 쾌락도 주지 못하는 소비거리를 갑절로 늘리는 이유로 추앙받아야 하는지.’


끝없는 상품 소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피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과시욕은 일종의 노이로제이고 병이기에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 세력으로서 칭찬받거나 정당화되기보다는 동정받거나 치료를 요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베블런이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가 합리적인 인간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인간 자유를 늘려 새로운 차원의 신기원을 열어갈 기능도 상실했다는 비판점이기도 하다. 경제적 합리성이 널리 퍼져 있는 사회라도 어떤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치되거나 갈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치의 복합체 속에 끼어 적합화되어 있을 뿐이다. 사회는 효율성에 중점을 두고 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것을 경제적 효율의 극대화 조직으로 단단히 무장시킬 수 있지만, 아직도 이러한 가치는 갈등요소를 이루는 다른 가치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은 사회다. 계산적이고 욕심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가 자신 특기를 발휘하여 효율가치를 높인다 하더라도 사회는 이들을 싫어한다.


지금까지 야기한 형식주의 경제학 오류는 인간의 경제를 시장형태와 동일시하는 경향에서 초래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 ‘경제적’이라는 단어는 애매모호한 사용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동안 경제이론은 한시적 의미로 투사되었기에 시장 지배 사회라는 좁은 테두리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공급과 수요, 가격이라는 단어는 자원과 요구, 등가와 같이 보다 더 넓은 의미의 단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시장경제의 초월논리는 일상생활과 일상적 사고의 재구축을 요구하며, 또한 그러한 재구축은 시장지향적인 정신에 물들지 않는 사고를 통해 유도된다. 우리는 경제가 언제나 반드시 인간 내부에서 의식해 온 경험 분야라는 뿌리깊은 생각을 도려내야 한다. 은유법을 써보면, 사실로서의 경제는 원래 사회 상황 속에 묻혀 있는 것(embedded)이지 결코 경제적 본성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는 인간과 그 환경 사이의 제도화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물질적 수단이 계속적으로 공급되는 것이라고 간단히 규정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토지와 노동, 자본의 시장 거래이다. 이전에도 가끔씩 이러한 생산요소를 따로 따로 판매되곤 하였지만, 세 가지 기본요소를 합친 통합 시장시스템이 발전된 적은 결코 없었다. 이 같은 제도적 구조 하에서 개인 동기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득의 동기, 개인적이 경제이익의 계산적 추구는 인간 역사에서 수없이 산재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성숙기 또는 지배적인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오로지 시장자본주의에서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동기가 경제행위를 기본적인 자극제가 되도록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는 인간행위의 일종이 아니라 문화의 한 구성요소이며, 개인 행동의 욕구충족 과정이 아닌 사회의 물질적 삶의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기업가를 분석허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비교해야 한다.


시장 메커니즘이 생산의 본원적 요소인 노동과 토지, 화폐로까지 확대된 것은 상업사회에 공장제를 도입하는 데 따르는 필연적 결과였다 생산요소는 판매할 수 있어야 했다. 실제로 일반 상품, 가공품이 사고 팔리는 매매행위는 사회구조에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지만, 허구적 상품인 노동과 토지, 화폐가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를 야기한다. 구성원 상호간에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이 공동체를 파괴하게 된다. 공동체는 서로간의 요구에 반응하고, 주고받는 일을 책무로 삼는 호혜적 의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공동체의 적대적 모순 관계를 형성한다. 노동과 토지는 단순한 생산요소 그 이상이며 그것은 자연 자체다. 토지는 효용의 원천이 아니다. 토지에는 수많은 사회적 기능과 의미들로 충만되어 있다. 게다가 이윤을 추진력으로 삼는 시스템은 고도의 화폐 안정성, 산업 생산물의 팽창을 감당할 수 있는 화폐 시스템을 갖게 마련이다. 금이나 은은 산업생산물과 단순히 보조를 맞춰 팽창할 수 없다. 만약 팽창되지 않는다면, 이윤과 경제적 계산을 파괴하는 디플레이션을 야기한다.


정상적인 시장자본주의가 가동되는 상황에서, 소득을 자기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협동을 거부하는, 즉 생산의 사회적 과정을 교란시킬 힘을 직접적으로 갖고 있다. 산업체계에서 일정한 업체 또는 지분을 갖고 있는 소유자나 경영인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자기 힘으로 뭔가의 이득을 얻는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서 협상을 최대한도로 유리하게 이끌 수 있도록 산업의 운영시스템을 결정적인 측면에서 방해하거나 지연시키거나 교란시킨다. 더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끝까지 버티는 행동 모두는 항상 흔한 일로 나타나며, 모두가 정당한 것으로 치부된다. 필요한 토지 또는 권리의 행사, 필요한 원료나 정보를 상대방 거래자로부터 차단시켜 억제하는 행동, 이러한 모든 것들은 흔한 일이며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런 현재의 조건 아래서 사업 수완이라는 것은 거의가 이러한 모든 것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사보타지는 기업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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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주의 경제학의 시대 사상




“오늘날 경제학은 인간행동과 인식에 관한 심리학 이론과 현대 물리학 이론, 진화론, 문화론 관점을 수용하는 제도주의 경제학 패러다임에 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도주의 창시자 베블런의 경제학은 다윈의 진화론과 행동심리학에 기초한 사회, 문화적 행동에 중점을 둔다. 인간행동은 사회라는 공동체와 문화적 모체에서 진화되어 온 것이며, 반면 자유시장 경제학 공리의 절대성과 인간진보의 필연성을 반대한다. 또한 쿤의 패러다임,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성과 절대구조의 해체,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와 인식론적으로도 기본을 같이 하고 있다.


베블런의 기본 입장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방법론과 대립되는 과정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베블런의 제도주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근거하는 공리주의와 쾌락주의적이고 원자론적인 인간 행동 유형을 비판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베블런이 파악하는 인간본성은 가단성을 갖고 있으며 외생변수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체계의 정상적 기능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결과물이다. 따라서 베블런은 인간본성을 합리적 사고의 모델 대신 습관, 사회적 인습과 사회적 경험에 의해 규정되는 사고에 위치시켰다. 여기서 제도는 사회적 관습과 사회적 습관이 결정화된 것으로서, 경제제도를 사고의 습관과 인습적 행동의 복합체로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자유시장 경제학의 합리적 행동이라는 것도 결국 극대화와 만족이라는 목표와 관련되지 않으며 제한된 합리적 행동의 주제였던 이전 행동이 반복되는 것으로서 제한된 합리성에 기초할 뿐이다.


한편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서도 지식은 과학자 집단의 신념과 가치의 구성체가 문화적 모체로서 공유하고 누적적으로 발전시켜 온 이론의 축적이며, 여기서 문제해결을 위한 범례는 계승되어 온 도구로서 진화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조주의자들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공통된 체계와 법칙, 인간정신의 항구적인구조를 찾는 확실성의 거대 서사론에 반대하는 불확실성을 기본 입장으로 삼고 있다.


데리다의 반인본주의 관점에서 본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근본, 원리, 중심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단어 의미는 결국 본질, 존재, 실체, 주체, 목적, 초월 등을 불변 상수로 믿고 있는데, 그러한 의미의 중심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이고 흔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데리다의 해체는 구조, 절대적 질서, 닫힌 체계에 대한 저항이며, 블완정과 무질서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여 다양성과 열린세계를 추구하는 지적 탐색으로서 제도주의 경제학의 인식론인 가변성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제도주의 경제학이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을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21세기 물리학의 성과인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의 대칭성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재분배는 대상물이 물리적으로 이동하거나 배치만 변화하든 간에 중앙을 향한 움직임과 중앙에서 다시 밖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것을 중심으로 되돌아오는 연쇄를 가리킨다. 호혜, 재분배, 교환이라는 내부 통합형식은 재화나 서비스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칭성과 중심성이라는 원리를 통해 제도적 패턴과 상호행위가 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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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와 경제 사상>

J. R. 스탠필드 지음, 원용찬 옮김

한울, 1997년 5월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라니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경제학자들이 이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모순을 발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희소성의 경제 개념을 부정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원래 자급자족이다. 인간 경제는 사람의 무한한 욕망과 자원 희소성 사실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욕망은 사회적 과정 또는 문화적 맥락에서 발생하며, 사람을 무한한 욕망과 희소성의 공준으로는 결코 사회적 분석을 행할 수 없다는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다.

 

 

문화적 왜곡은 제도 차이에서 발생하며 시장상인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 욕구는 목적에 따르는 수단이 한정되기에 물자를 서로 공급해 주는 교환에 한정된다.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교환은 그렇지 않다. 추상적으로는 부의 축적, 즉 화폐적 부에는 어떤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견해를 보면 사회는 경제보다 우위에 있다. 사회는 문화적으로 무엇이 재생산되어야 하며 무엇이 공정한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결정은 교환과정을 지배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교환, 즉 공동체와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재생산하기보다는 오로지 단순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교환은, 폴라니가 말한 ‘이탈된 경제(disembodied economy)’를 개념적으로 확립시켜주는 근간이 되었다. 폴라니의 중심개념은 시장경제가 궁극적으로 사회적 해체의 위협 속에서 실체적 경제를 불안정하게 하고 연대를 파괴하면서 사회를 재편성해 간다는 점이다.

 

 

경제를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라는 본질과 선택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형식주의 부르주아적 태도는 폴라니 사상과 대척된다. 폴라니가 상징적 상호주의 준거틀로 접근하는 인류학적 개념은 기존 경제이론의 고도한 심리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뛰어난 매개장치였다. 문화개념을 통한 작업은 인간 본질을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인간 본성의 허구적 특성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집단 구성원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상징체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원래 원시화폐는 대개가 특정 목적의 화폐였으며,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전(全) 목적의 화폐는 아니었다. 교역항 등 시장은 쌍방간의 교역과정에서 비시장사회를 상업사회의 침투로부터 보호하는 경제적 완충지대를 가리킨다. 교환의 범위도 특별한 성격을 지닌 재화와 용역에 관한 특정한 유통채널을 말한다. 예컨대 관습에 따라 일반재와 교환되지 않는 위신재(prestige goods)의 범위가 존재하기도 한다. 대체로 교환 범위는 특정 목적의 화폐와 함께 설정된다. 말하자면 특정 목적의 화폐는 하나의 재화범주에 대한 교환으로만 유통되는 화폐 대상이며, 이것은 다른 교환의 범위에서 사용되는 화폐 대상으로 용도를 전환할 수 없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경우 은이 계산단위로, 대맥(barley)이 지불수단, 석유와 양모가 교환수단으로 각각 달리 사용되었다.

 

 

이처럼 폴라니의 모든 경제 사상에는 문화와 사회가 녹아 들어있다(embedded). 그런 점에서 노동착취는 소득의 박탈이라는 한 가지 측면보다는 문화적 붕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폴라니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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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표현한 앤더슨에 따르면 16세기 인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같은 종류의 신문과 잡지, 소설을 보던 주민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민족은 비슷한 견해를 공유하는 공동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족 공동체의 상상 과정에서 이성적 추론보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앤소니 스미스는 민족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공동 운명체라는 감각과 종족성의 각종 신화와 상징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문화적 친근함에 의해 규정되는 ‘느낌의 공동체’로 표현한다.

 

 

어니스트 르낭은 민족을 두고 ‘매일매일의 인민 투표’라고 정의해 민족이란 한번 구성됨으로써 영구히 안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선택되고 확인받아야 하는 유동적인 생성체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민족 구성원의 적극적인 소속감과 소속 의지를 민족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설정하는 것을 민족에 대한 주관적 정의라고 한다. 그리고 민족을 선택하고 민족에 소속되려는 욕구와 결단에는 본질적으로 정치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 만큼, 민족에 대한 주관적 정의는 곧 민족에 대한 정치적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은 종래의 왕에 비하면 지극히 추상적이고 세속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새로운 주권자인 민족을 종교적으로 대상화하고 숭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화적, 상징적 전통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듯 전통 숭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정치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민족은 근대 세계에서 일종의 종교적 숭배 대상이며, 무수한 전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권력이 제의를 만드는 측면만큼이나 제의가 권력을 만드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전통이 수행하는 문화적 구성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민족은 구성원들이 신화와 기억, 상징, 가치, 전통을 배양한다. 전통과 달리 인습이나 관례는 좀 더 효율적인 것이 있다면 바뀌게 마련이다. 그 반면에 전통은 아무리 불편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더라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습이나 관례는 기술적인 것이고, 전통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의 특징이 불변성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통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럼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전통을 강조하여 보존하려고 하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전통은 근대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근대성의 산물이다. 우리가 그토록 전통을 강조하고 보존하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하는 근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 각국에서 앞다투어 민족의 전통들이 발명된 것은 필경 상상의 공동체, 나아가 느낌의 공동체를 강화하려는 민족 국가들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적 차원을 중시하는 논자들은 중세 이래 유럽에서 만연한 전쟁을 민족 형성의 주요 요인으로 간주한다. 유럽 각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민중을 동원했고, 그런 과정에서 민족적 결속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례로 1181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일종의 국민군을 창설하기 위해 무장 조례를 발포하여 말과 갑옷을 갖춘 부유한 자뿐 아니라 그저 활과 화살로만 무장한 가난한 자들까지도 군대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군대에 가난한 농민을 포함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잉글랜드 민족 형성 역사에 의미심장한 결과를 낳았다.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자영농이 큰 활약을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정치적 차원보다 경제적 차원에서 민족 형성과 자본주의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민 사회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철저히 원자화된 개인이 경제 행위를 독립적으로 꾸려나가는 장, 그런 가운데 사적 이해관계들이 경합하고 쟁투를 벌이는 장을 말한다. 국가는 바로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조절하고 중재하는 기관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은 원자화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시민 사회의 통합을 유지하는 일종의 외연적인 틀로서 기능한다. 시민 사회의 ‘개인화’ 경향은 개인들이 ‘민족’으로 호명됨으로써 다시 ‘총체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해체적 경향은 내재적으로 민족주의의 통합적, 구심적 역할을 꼭 필요로 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대표적인 근대 이데올로기들은 결국 민족주의라는 상상계의 번역본 따름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민족주의는 여타 모든 이데올로기의 저변에 존재하는 인식과 표상, 감각의 모체, 즉 민족적 상상계로서 자리 잡게 되었고, 이 모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이었다.

 

 

병적일 정도의 민족주의 무모함은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 운동인 파시즘과 나치즘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조지 모스는 특히 독일 나치즘에 주목하면서, 이 독특한 정치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을 이른바 ‘대중의 민족화’라는 역사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장 자크 루소 이래로 근대적 주권 정치 원리로서 일반 의지가 민중이 숭배하는 일종의 세속 종교가 되었음을 간파하고, 나치즘이 이를 공식화했다고 보았다. 이제 민중은 신이나 왕이 아니라 스스로를 숭배하기 시작했고, 이것의 절정이 바로 나치즘이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였다. 이처럼 세속적인 대상을 종교적으로 숭배하기 위해서는 환희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신화와 상징이 필요했다. 특히 민족적 신화와 상징을 통해 시민을 민족으로 분장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나치즘은 민족 숭배와 아리안 숭배를 민족적 전례 의식으로 탁월하게 대중화했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아래로부터의 민족화 과정에 편승하고, 나아가 그 과정을 촉진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역사 속에 자주 출몰하는 통상적인 독재자들과는 유형이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대중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대중 ‘속’에 스며든 독재자였다. 왕의 몸이 국가를 육화하던 절대주의 시대가 저문 이후 주권자로서의 민중이 추상화되면 될수록 민중에게는 더욱더 구체적인 표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히틀러가 국민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국민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국민에 의해 선택된 만큼 쉽사리 버림받을 수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비록 파시즘과 민족주의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파시즘이 민족주의를 모체로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전후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파시즘처럼 악마화되지는 않았지만, 파시즘을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말 대신 애국주의(애국심)라는 말이 선호되기도 했다. 애국주의는 민족의의 부정적인 면을 털어내고 오직 좋은 점만을 취한 어떤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비판적인 다소 냉소적인 지성의 소유자들은 양자 사이에 실체적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민족주의는 거슬리는 애국심이고, 애국심은 선호되는 민족주의이다’라고 말한다.

 

 

세계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민족주의는 더욱 강력하게 번성할 자양분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세계화가 몰고 오는 가장 큰 변화는 이동과 변화의 기회가 극대화되는 만큼 삶의 ‘불안정성’도 급증한다. 또한 일부 논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진 전략, 즉 작금의 세계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을 ‘시민 사회 운동들의 집합 권력을 침해하는 전략으로서 불안정성을 의도적으로 제조하는 것’에서 찾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불안정성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당연히 ‘친숙한 것들, 즉 자신 나라, 자신 이웃, 자신 고향, 자신 가족, 그리고 때때로 자신 ‘인종’ 속으로 퇴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친숙한 것들 목록에서 민족이 빠질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세계화의 역동성이 야기하는 삶의 불안전성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비롯하여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각종 보수적이고 심지어 퇴행적인 공동체주의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의지하고 싶은 삶의 버팀목이자 감정적 도피처로 보이게 한다. 이것이 세계화의 역설이다.

 

 

1989년 이후 냉전 체계가 와해되면서 민족주의가 제 목소리를 찾고 예전 활력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가히 민족주의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환한 민족주의는 전 세계에 전쟁과 테러 등의 불길하고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지각 있는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앞다투어 경고하고 나섰다. 이제 민족주의는 테러리스트나 게릴라를 연상시키는 파괴와 유혈의 개념으로 표상되었고, 그럴수록 동유럽이나 제3세계에서나 통용될 법한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이데올로기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호주의 민족주의 연구가 톰 네언은 2001년 이후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선진국에서 권위주의와 결합된 새로운 민족주의 추세가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원래 민족주의가 강대국 이념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예컨대 1874년 프랑스에서 민족주의가 거세진 것은 강대국으로서 프랑스 지위가 추락하던 당대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본다. 요컨대 민족주의는 강대국 우월성이 위협받는다고 의식될 때 등장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2001년 이후 민족주의에서도 똑같이 확인된다는 것이 네언 생각이다. 이렇게 보면, 민족주의는 과거 후진국에서나 유효한 퇴물 이데올로기로 간주 될 수 없을 것이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길항 관계에 있다. 민족이 건강할 때 구태여 민족주의에 호소할 이유가 없다. 민족주의를 외치는 이유는 민족이 위태롭거나 또는 그렇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비책은 민족주의적 보편 이념을 호소하는 데 있지 않고 민족의 건강을 위협하는 진정한 원인을 진단하는 데,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기 조절적 시장 경제가 우리 삶에 미치는 효과를 명철하게 분석하고 그 대란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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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에 대한 대중 오해는 아주 심각해서, 어떤 정책을 들고나오든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매우 힘들다. 많은 사람은 핵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 여기며, 가이거 계수기의 딸각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떤다. 만약 핵폐기물 저장고가 핵폐기물을 충분히 오랫동안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많은 사람은 당신을 원자력 산업의 앞잡이라고 몰아세울 것이다. 숫자를 내세워서 설명하려고 해 봐도 결국 아무도 그런 걸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만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린 1만 년 동안 완벽하게 안전할 핵폐기물 저장소를 만들 필요가 없다. 좀 더 합리적인 목표는 누출 위험도를 0.1%로 줄이는 것이다. 핵폐기물 방사능이 땅속 우라늄보다 1천 배 더 해로운 것이라고 할 때, 0.1% 줄임으로써 위험도(확률 X 위험도)는 1,000 X 0,001=1, 즉 기본적으로 우라늄을 처음 있던 장소에서 캐내지 않은 것과 같은 위험도가 된다. 게다가 0.1%의 안전도를 1만 년 내내 유지할 필요도 없다. 300년 뒤면 분열 부산물의 방사능이 1/10로 감소하여, 천연 우라늄의 100배 정도의 방사능이 된다. 그땐 0.1%가 아니라 1% 정도가 누출되어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1만 년 내내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핵폐기물 저장 문제도 슬슬 다룰 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핵폐기물의 방사능이 지하수에 스며들 위험은 땅 속 천연 우라늄의 자연 방사능이 지하수에 흐를 위험보다 덜 하다. 왜 우리는 (핵폐기물을) 더 위험할 수 있는 토양 속 묻혀 있는 천연 우라늄과 비교하지 않는 걸까? 미국 콜로라도 지역의 자연 방사능은 핵폐기물 저장장치 법적 허용치의 20배에 달하며, 방사능이 10분의 1 수준으로 반감하려면 적어도 130억 년이 걸린다. 콜로라도 지역의 강 수원은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고를 포함한 서부 지역 대부분의 식수원으로 쓰인다. 핵폐기물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 상수도원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이 사례는 불가사의하고 생소한 종류의 위험에 대해서 걱정하다 보면 때로 균형 감각을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료를 갖고 여러 가지 계산하면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핵폐기물 저장 시설의 누출 가능성은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살림, 2011)

 

 

 

 

 

 

 

 

 

 

 

 

 

 

 

 

 

 

 

“기술적인 의미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독자 스스로 무식하다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독자의 반항심만 부를 것이고 글쓴이의 에토스는 훼손될 것이다. 예컨대 의학전문가와 환경전문가들은 핵페기물과 유독성 폐기물의 ‘안전성’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지만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했다. 최근에야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위험’과 대중이 생각하는 ‘위험’이 다르다는 데 원인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전문가들은 위험이라는 말을 ‘발생가능성 X 비용’과 같은 기술적, 통계적 의미로 사용한다. 위험이란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노출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다 그로 인한 대가(죽음, 부상, 질병 등)를 곱한 것이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 주변 3km 이내에서 30년 동안 살았다면 발전소로 인해 암에 걸릴 ‘진짜’ 위험은 0.1퍼센트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이는 욕조에서 미끄러질 확률보다 낮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수학을 안다 하더라도, 위험을 통계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일반적인 측면에서 심리적으로 정의한다. (이런 뻔한 사실을 사회심리학자들이 밝혀내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요인을 종합하여 위험을 판단한다.

 

 

1. 대가의 크기: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까?
2. 대가의 급박성: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한 번에 다칠까, 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해를 입을까?
3. 위험에 대한 통제: 위험이 자신 행동으로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일어나는가?
4. 위험의 선택: 위험은 우리가 무릅쓰기로 선택한 것인가?

 

 

정리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위험이란, ‘크기 + 급박성 + 통제의 부재 + 선택의 부재’라는 의미이다. 위험전문가들이 통계적이고 인증된 정의로 위험을 설명하는 한, 원자력 폐기물을 실은 차량이 마을을 거쳐 가도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일반적인 정의를 사용하여 위험을 설명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좀 더 합리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는 기술적인 의미를 사용하여 일반의미를 무시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권위가 있어 보이고 독자들이 쉽게 설득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전문용어를 독자 이해수준에 맞춰 설명해야 한다.”<논증의 탄생>(홍문관, 2008)

 

 

 

 

 

 


‘이론(theory)’이라는 단어만큼 과학과 대중 사이에 오해를 유발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과학자에게 이론이란 ‘어떤 현상을 체계적으로 입증하고 분명하게 진술한 설명’을 의미하는 명확한 인증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따라서 양자이론이나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면, 전자나 빛의 속도에 대한 추정이나 입증되지 않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이 폭넓게 받아들이는 체계적인 설명을 의미한다.
반면 일반대중은 이와는 정반대로 단순한 사색, 육감, 추측을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론일 뿐’이라고 공격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이론’이란 말을 일반의미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이는 생물학자들이 생각하는 ‘이론’의 인증의미와 전혀 다르다. 진화론에 대해 논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야’라는 주장은 절대 이유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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