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법전도 인도 전역에 적용된 적이 없다. 평범한 일상사에는 다르마 샤스트라가 법을 대신하고 있었다. 다르마 샤스트라란 브라만이 브라만 관점에서 엄격하게 작성한 카스트 규정과 의무를 담고 있는 운율적인 율법서를 말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른바 마누 법전이다. 2685개 구절로 이루어진 이 법전은 전에는 기원전 12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으나, 이제는 어렴풋하게 우리 시대 첫 세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법전 목적은 카스트 제도가 힌두 사회를 장악하는 힘을 엄청나게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정치 질서가 불안정하고 이방 민족과 종교가 인도를 유린하게 되자, 카스트가 이슬람인과 힌두인 피가 서로 섞이는 것을 막는 보루가 되어 위상이 강화되었다.

 

 

베다 시대는 카스트가 베르나(색깔)로 구분되었으나 중세 인도에서는 자타(출생)로 구분되었다. 카스트 제도 요점은 두 가지였다. 신분을 세습시키고 다르마, 즉 자신이 타고난 카스트에 따라 전통적인 의무와 직종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식생활법과 위생법을 누구나 지킬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사람 사이 나타나던 혼란한 불평등과 차별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현대와 달리 신분 상승과 소득을 향한 열기를 막아 주었다. 각 사람에게 자신 다르마에 맞는 행동 강령을 규정하여 모든 삶에 질서를 부여했다. 각 직업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되는 천직으로 높임으로써 그리고 각 산업을 하나의 카스트로 만들어 그 구성원에게 착취나 폭압에 대항하여 집단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매개를 제공하여 모든 교역과 직종에 질서를 부여했다.

 

 

게다가 귀족 정치의 유일한 대안인 것이 분명한 금권 정치나 군부 독재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수많은 외침과 혁명 때문에 정치적 안정을 상실한 국가에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 질서와 연속성을 부여했다. 국가가 수많은 무정부 상태의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브라만은 카스트 제도를 통해 사회 안정을 유지했으며 문명을 보존하고 향상시켜 후대에 전달했다. 인도는 브라만을 감당하는 인내를 발휘했으며 심지어는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누구나, 결국 브라만이 인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가 소멸되면 인도의 도덕 생활은 오랫동안 무질서한 과도기를 겪게 될 것이다. 인도에서는 도덕 강령이 카스트와 거의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은 곧 다르마였다. 힌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신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카스트 제도 속에서 하나의 위상을 점유한다는 것이며, 다르마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각 위상에는 고유 책무와 한계, 권리가 있었다. 독실한 힌두인이라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했으며, 일정한 만족을 찾고 다른 카스트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 일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일을 하는 것보다 낫다. 다른 사람 일을 훌륭하게 할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다르마란 씨앗이 자라 온전히 성장하는 것, 즉 본연의 본성과 운명을 질서에 따라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도덕관은 매우 오래 되어 그 규범에 구속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 이외 달리 생각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며 대부분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힌두인은 각 카스트에 고유한 다르마 외에도 일반적인 다르마도 인정했다. 일반적인 다르마란 모든 카스트에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자녀가 태어나기 무섭게 부모는 자녀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힌두 체계에서 결혼이란 의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변하기 쉬운 정념으로 결혼을 결정하도록 허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결혼을 변덕스러운 개인적 선택이나 낭만적인 사랑에 맡기는 일이 없었다. 부모는 자녀가 성적인 열정에 빠져 (힌두인 관점에서 보면) 환멸과 쓰린 마음으로 끝나게 될 결합으로 이어지기 전에 결혼을 주선해야 했다. 마누는 당사자들이 서로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결합에 ‘간다르마 결혼’아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욕망의 열매로 낙인찍었다. 그런 결합은 허용 되었으나 존중받지 못 했다. 마누는 여덟 가지 상이한 결혼 형태를 허용했는데 그중에서 약탈 결혼과 연애 결혼을 도덕적 척도에서 볼 때 가장 낮은 것으로 분류했으며, 매매 결혼은 결합을 주선하는 현명한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경제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 결혼이 가장 건전하다는 것이다.

 

 

결혼은 인도처럼 성적 성숙도에 맞춰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에서처럼 경제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첫 번째 기준은 인구 증가를 엄청나게 가속화시키고 여자를 거의 애 낳는 기계로 전락시켜 국가 체질을 약화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기준은 결혼을 부당하게 늦춰 성적 욕구 불만 때문에 매춘과 성병이 증가하게 되는 문제를 낳는다. 힌두인들의 조혼 제도는 오래되었으며 신성했다. 이 제도는 일반적인 성적 이끌림 때문에 카스트를 무시하고 결혼하는 일을 막으려는 염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후대에 이슬람 정복과 여타 무자비한 방식으로 유부녀를 노예로 끌고 가는 일이 생기게 되자 조혼이 장려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남자의 성적 관능으로부터 딸을 보호하려는 부모 마음에 엄격한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외국 관습을 살펴볼 때 계속 유념해야 할 점은 외국 관습을 우리 자신의 도덕 강령에 따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나라 관습에 자기 고유 기준을 적용하는 피상적인 관찰자라면 인류애를 발휘하여 인도 여자들이 처한 열악한 여건을 보고 슬퍼하겠지만, 당사자인 힌두 여자는 그런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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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20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스트 제도와 같은 계급 사회에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능력은 타고났다‘는 인식이 제도 내 ‘길들임‘을 통해 사람의 능력을 제한하고,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오랜 생명이 유지되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6-20 16:39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개인 삶과 각자 일대기가 필연성이나 자연 질서에 기반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과 사회 구조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바우만의 글이 생각납니다.^^
 

 

 

 

 

 

 

 

 

 

 

 

 

 

 

차르바카


"기원전 7세기 인도의 허무주의자 브리하스파티가 남긴 경구를 모태로 힌두교 유물론자들이 생겨났다. 이 새로운 학파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차르바카라고 한다. 차르바카에 의하면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망상이고 아트만은 헛소리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나 역사 속에서도 초자연적인 힘들이 이 세상에 간섭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없다. 모든 현상은 자연적인 것이다.

 

 

물질만이 유일한 실재다. 몸이란 원소들의 조합물이며, 정신이란 생각하는 물질일 뿐이다. 느끼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몸이다. 몸과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영혼은 없다. 불멸성도 없고 환생도 없다. 종교란 정신착란이거나 질병이다. 혹은 속임수다. 이 세상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신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오직 종교에 길들어져, 신앙이 소멸되면 상실감이나 불편한 공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도덕 역시 자연적인 것이다. 도덕이란 사회가 편의상 만든 것이지 신의 명령이 아니다. 자연은 좋고 나쁨, 미덕과 악덕과는 무관하다. 태양은 악인과 성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고루 비춘다. 만일 자연에 윤리적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적인 불멸성이 갖고 있는 속성이다. 본능이나 정념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자연이 인간들에게 가르치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미덕은 실수다. 삶의 목적은 살아가는 것이며 행복만이 유일한 지혜다.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지배하던 시대에 차르바카 학파의 혁명적인 철학은 시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 철학은 브라만들이 인도 정신을 장악하던 지배력을 약화시켜 힌두교 사회를 진공 상태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새로운 종교가 성장하도록 강요하다시피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유물론자들의 영향이 매우 커져, 새로 등장하여 과거 베다 신앙을 대신하게 되는 두 종교 - 자이나교와 불교 -는 모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신이 없는 무신론적 종교였다. 두 종교 모두 나스티가(Nastika, 탈베다주의 또는 반베다주의자)라는 허무주의 계열에 속했다. 더구나 브라만 카스트에 속한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직자 중심의 의식주의와 신학에 대한 전사 카스트인 크샤트리아에 속한 인물들이 만들었다. 인도의 역사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자이나교


기원전 6세기 중엽 도시 바이샬리 근교 리히차비 부족이 속한 종파는 환생을 저주로 여기고 자살을 복된 특권으로 여겼다. 그들을 이끈 지도자를 지나(Jina, 승리자)로 받아들였는데, 지나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등장하여 인도인들을 교화하도록 운명이 정해진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지도자에게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의 ‘마하비라(Mahavira)’라는 이름을 다시 붙여주고 자신들에게는 ‘자이나교도(Jainas)’라는 이름을 택했다.

 

 

이 종파는 종교 역사상 가장 생소한 가르침 중 하나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이 처음에 펼쳤던 현실주의적인 논리에서는 지식이란 상대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기술되었다. 한 가지 관점에서 볼 때를 제외하고는 참된 것은 없다고 가르쳤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마 그 관점도 거짓일 것이다. 그들은 여섯 명의 맹인이 한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분을 더듬은 이야기를 즐겨 인용했다. 다리를 더듬는 맹인은 그 동물이 크고 둥근 기둥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모든 판단은 조건에 따라 제한되어 있다.

 

 

절대적인 진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구세주 지나에게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베다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베다는 신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창조주나 제1원인도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이나교도들은 말했다. 그런 가정은 창조되지 않은 창조주 혹은 원인이 없는 원인은 원인이 없는 세상이나 창조되지 않은 세상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어린아이라도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득한 영원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우주의 무한한 변화와 순환은 신의 간섭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연에 내재하는 본유적인 힘들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더 논리적이다.

 

 

자이나교의 가르침은 자살, 특히 서서히 굶어 죽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영혼이 맹목적인 생명 의지를 극복한 가장 위대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많은 자이나교도들이 이 방법으로 죽었다. 그리고 이 종파 지도자들은 오늘날에도 스스로 굶어 죽는 길을 통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불교


부처는 출생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하지만 출생은 끝없이 되풀이되며, 인간이 겪는 슬픔의 강을 계속 채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 시작점과 동일하게, ‘어째서 출생은 중단되지 않는 것’인지 부처는 고민했고, 카르마(업)의 법이, 영혼이 전생에서 지은 악을 속죄할 수 있도록 새로운 환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변함없이 인내하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는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만일 생겼다가 소멸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 없이 영원한 것들에만 생각을 묶어 둘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환생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의 악의 샘은 마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 욕망을 모두 다스리고 선행을 추구한다면 인류에게 가장 나쁜 미망인 개별성이 극복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악은 탄하(tanha, 갈애)다. 모든 욕망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 전체의 유익보다는 부분 이익으로 방향을 맞춘 욕망이다. 행복이란 이교 신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생에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많은 종교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내세에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가능한 것은 오직 평화, 욕망이 사라진 온전한 평온함, 오직 열반뿐이다.

 

 

결국 우리는 도덕적, 심리적 개인주의가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부처는 말한다. 우리의 괴로워하는 자아들은 실재로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존재와 힘이 아니다. 생의 흐름 위에 떠 있는 덧없는 잔물결이며, 바람에 날리는 운명의 그물눈을 형성하고 또 그 속에 얽혀 있는 작은 매듭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가 우리의 자아와 욕망을 전체 관점에서 바로잡을 때, 우리가 사적으로 겪는 좌절과 패배,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은 더 이상 이전처럼 심하게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개별적인 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마침내 평화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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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상반기 읽은 책 분류


사회 7, 철학 5, 경제 5, 역사 4, 물리 3, 과학 3, 수학 2, 뇌과학 1, 생물 1, 교양인문 1, 에세이 1, 글쓰기 1 (모두 34권)

 

 

●  올해 상반기 단 한 문장

 

“소수 의식 있는 자가 의식 없는 대중 선두에 서서 기습이나 혁명을 수행하던 시대는 지났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할 때, 대중은 스스로 변혁 속에 있어야 하며, 또 문제가 무엇이고 몸과 마음을 다해 무엇을 지지해야 하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 엥겔스

 

 

●  올해 상반기 아쉽게 순위에 들지 못한 책


<휴버먼의 자본론> / 경제,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 과학, <자본의 시대> / 역사

 

 

 

 

 

 

 

 

 

 

 

 

 

 

 

 

●  그럼, 올해 상반기 읽은 책 Best Top 10

 

10.

 

 

 

 

 

 

 

 

 

 

 

 

 

 <사회학의 쓸모>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노병우 옮김
서해문집, 2015년 10월, 256쪽/ 사회

 

사회학은 사회과학이 아니다.

 

사회학은 인간 삶이 ‘필연성’이나 ‘자연 질서’에 기반한다는 믿음을 무너뜨려야 할 의무가 있다. 사회학은 홉스적 의문에 저항해야 한다. 홉스적 의문이란, 이미 정해져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 의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상상력을 상실한 사회과학은 사회학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고작 정보만 제공할 뿐이다. 사회과학은 ‘과학적 예측’을 하려는 야심과 충분히 ‘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사회과학자들은 과학적, 객관적이라는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정책 입안자나 사업가가 울리는 조종에 맞추어 기꺼이 행진할 뿐이다. 반면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 삶과 각자 일대기가 필연성이나 자연 질서에 기반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과 사회 구조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학은 ‘인간 경험이 아닌 개인 체험’과 대화다. 경험은 개인 상호 혹은 그 상위 객관적 상태지만, 체험은 분명히 명시적으로 주관적이다. 인간 체험은 과학 표준으로 명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인간은 원래 과학이 다루기에 이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관찰자가 제시하는 증거 타당성과 신뢰도는 관찰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9.

 

 

 

 

 

 

 

 

 

 

 

 

 

<물가의 경제학>
홍완표 지음
신론사, 2009년 8월, 266쪽/ 경제

 

물가가 계속 오르는 이유

 

레닌은 물가가 계속 오르면 정부와 기업이 국민 부(富) 상당 부분을 눈치채지 못하게 빼앗아 간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가난해지며, 일부 사람은 부유해진다.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를 낮추는 일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가장 사악하고 확실한 수단이다. 파괴하기 위해 경제법칙에 내재한 비밀스러운 모든 힘이 동원되지만 아무도 간파하지 못한다.

 


물가 상승은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이 선호되어 부동산 투기가 만연할 가능성이 커진다. 기업은 과도하게 채무에 의존하며 외형 확대 경영 형태를 보인다. 물가가 상승하면 기업 이익은 자동 증가한다. 기업은 남의 돈을 빌려 원료와 기계설비, 노동력을 산다. 물가가 지속 상승하는 동안 상품을 만들어서 팔면 자동으로 이익이 생기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완만한 물가 상승은 대부분 기업 이익으로 직결된다.

 

 

통화 당국이 자연이자율 - 화폐가 사용되지 않고 모든 대부가 실물자본재 형태로 이루어지면, 수급에 따라 결정될 이자율 -과 화폐이자율이 불일치하도록 화폐 공급을 조절하면 물가가 변동한다. 이때 화폐이자율은 은행 자금 공급과 기업가 수요로 결정되며 자연이자율에서 더욱 괴리 된다. 이처럼 물가 변동은 통화 당국과 기업가 합작으로 나타난다.

 

 

8.

 

 

 

 

 

 

 

 

 

 

 

 

 

 

<인문 고전 강의>
강유원 지음
라티오, 2010년 4월, 576쪽/ 교양인문

 

‘개인적 공동체’라는 형용모순

 

우리는 개인 정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개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를 고려하는 ‘개인적 공동체주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서로 모순이 되어 말이 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입헌국가는 개인 사적 이익을 모든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헌법에 명시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개인이 세계에서 우뚝 선 고유 존재며, 개인 판단과 생각,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개인이 자신과 연결된 가족, 국가, 공동체와 연결고리를 끊고 오롯이 독자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인 중심 자유주의인데, 공동체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7.

 

 

 

 

 

 

 

 

 

 

 

 

 

 <독일 이데올로기>
카를 마르크스 외 지음, 김대웅 옮김
두레, 2015년 8월, 282쪽/ 사회

 

불평등 원인, 분업

 

분업이 국가와 사회, 조직, 개인이 각기 대립하며 분열하는 원인이다. 분업은 불평등한 분배와 소유를 야기한다. 결국 분업과 불평등한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다. 분업은 활동에 관해서, 불평등한 사적 소유는 활동 산물에 관해서 일컫는 말이다. 분업은 국가와 사회, 조직, 인간을 구속한다. 노동이 분화되자 각 주체는 하나의 일정한 배타 영역에 놓이고, 그 영역이 강요되어 벗어나지 못한다.

 

 

분업으로 인간관계가 물질적 관계로 전환된 현상은 물질적 관계의 관념을 머릿속에서 몰아내어서는 안 되고, 오직 모든 주체가 분업을 지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런데 공동체가 없으면 이는 불가능하다. 각 주체가 분업으로 분화되어 그들 사이 필연적, 유대적 결합이 낯선 관계로 대체 되었기 때문이다.

 

 

6.

 

 

 

 

 

 

 

 

 

 

 

 

 

<블랙 스완>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동녘사이언스, 2008년 10월, 548쪽/ 경제

 

성공은 노력? 혹은 행운?

 

말없이 묻힌 많은 증거를 무시하는 경향은 재능과 경쟁력을 서로 비교하는 일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특히 독점 등 승자독식이 이루어지는 분야에서 더욱더 그렇다. 성공한 사람이나 기업은 자신 성공이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닌 자신 노력과 능력 덕택이라 말한다. 이는 도박꾼이 수백만 분의 1 확률을 손에 쥔 일을 마치 자신 능력 덕택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 세계 카지노 전체에서 벌어지는 수백억 회의 게임 횟수나 도박꾼 숫자를 고려하면 일곱 번 연속 이기는 정도는 나온다. 수 많은 경우와 수 많은 사람이 존재하기에 한 명에게 깜짝 놀랄만한 행운이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위대한 CEO 자서전처럼 성공 결과를 출발점으로써 확률을 계산하지 말아야 한다. 승자 위치에서 계산하면, 즉 무수히 많은 낙오자 존재를 무시하고 계산하면, 게임에서 연속 이기는 사건은 행운이 아닌 일처럼 보인다. 반면 결과가 아닌 출발점을 기준으로 계산을 시작하면, 성공이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남들 성공 스토리를 아무리 읽어도 도움 되지 않는다. 승자보다 훨씬 더 많은 패배자를 포함하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고적 결정, 즉 이미 지난 사건을 재구성하여 원인을 찾아낸다. 특히 역사는 일련의 연속된 사건이 선행 사건과 어떤 관련 있는 듯 보이도록 한다.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성공을 거둔 요인을 자의적으로 추정하거나, 많은 분야에서 전문가 솜씨를 위장하여 만들어 주거나, 예술가 성공을 합리화시킨다. 그뿐 아니라 본성-양육 논쟁에도, 역사 ‘법칙’에 대한 환상에서도, 가장 심하게는 극단적 사건 속성을 이해할 때도 눈에 보이는 것과 실재 사이에 편향이 작용한다.

 

 

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지음, 이교선 외 옮김
창비, 2001년 10월, 752쪽/ 역사

 

 

‘한강의 기적’과 IMF 대란 속사정

 

1990년대 남한의 괄목할 만한 급성장을 평가할 때, 그리고 북한과 비교한 남한의 상대적인 위치를 평가할 때, 남한 GNP는 일본 빠찡꼬 산업의 연간 총매출보다 크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한국의 ‘기적’을 들먹이는 기자나 반세기 걸친 남북 간 경쟁은 당시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말은 믿을 수 없게 한다.

 

 

1986년까지 남한과 북한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은 같은 수준이었다. 그 후 남한은 북한보다 앞서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미국과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크게 앞선 것은 아니었다. 남한의 일반 민중 생활수준이 북한의 평균수준보다 높기는 했지만 월등히 잘살지는 않았다.

 

 

냉전 기간이었다면, 1997년 IMF 대란에 미국은 남한의 주요 동맹국이자 전방국가로서 구제금융을 지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극화된 소련과 냉전이 끝나고 보니 남한 경제는 단지 자유시장과 신자유주의 시대에 얼마나 적합한지만 중요해졌다. 많은 한국 사람에게 이런 상황은 놀랍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997~98년 아시아 위기는 ‘일본/한국 유형의 후발 국가 산업발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미국 시도에 깊은 뜻이 있었다.

 

 

4.

 

 

 

 

 

 

 

 

 

 

 

 

<철학 이야기>
윌 듀런트 지음, 임헌영 옮김
동서문화사, 2007년 9월, 520쪽/ 철학

 

이카로스의 꿈

 

우리는 사고(思考)의 도움을 받아 한층 더 넓은 시야를 얻는다. 특히 사고 행위가 결과를 그리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때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훨씬 더 생생한 현재의 감각이 상상력을 방해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상력으로 현재 경험을 선견(先見)으로 바꾸고 미래 창조자가 되어 노예 상태서 해방되어야 한다.

 

 

사실 플라톤은 자신 유토피아가 도저히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런 욕망을 그리는 자체가 가치 있다고 말했다. 인간 의의는 보다 나은 세계를 상상하여 적어도 일부분이나마 실현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계획하는 동물이다. 이카로스의 꿈처럼 우리의 많은 꿈은 손발이 자라 걷고 날개가 돋아 날았다. 우리가 이상(理想) 하는 바를 그려놓기만 해도 우리 행동 목표와 모범이 많은 사람에게 빛이 되어 언젠가 지상에서 유토피이가 실현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전형(이데아)이 있어, 그것을 보려 하는 자는 볼 수 있고 그것을 모범으로 하여 스스로 자신을 다룰 수 있다. 그런 국가가 지상에 존재하는가 또는 언제 나타나는가 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고, 이상적인 나라의 법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국가 안에서도 완전한 법률이 적용될 것이다.

 

 

3.

 

 

 

 

 

 

 

 

 

 

 

 

<서양 문명의 역사 - 하>
에드워드 맥널 번즈 외 지음, 손세호 옮김
소나무, 2007년 2월, 770쪽/ 역사

 

 

국가

 

실업은 정부가 주도한 통화 정책 결과다. 정부는 대출을 어렵게 만들고 통화를 줄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이렇게 해서 인플레이션은 감소한다. 하지만 통화 긴축 정책은 소비 지출과 사업 투자를 서서히 감소시켜 결국 취업 기회를 줄인다.

 

 

인플레이션 및 실업과 싸움하면서 정부는 노사 양측 힘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경제를 장악해 나아갔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부 힘과 통제력이 한층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부하는 나라에서도 정부 통제로 우리 스스로 자신 삶을 이끌지 못하여 민주주의는 점점 더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 정부의 중앙 권력은 국민을 책임지겠다는 생각에서 이미 상당히 벗어나 있다.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로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세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경계가 흐려졌어도 자신을 자본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더 이상 칭하지 않거나, 이러한 용어에 의미가 없어진 건 아니다. 또한 목적과 수단에 지속적이고 뜨거운 논란이 사라졌음을 함축하지도 않는다.

 

 

2.

 

 

 

 

 

 

 

 

 

 

 

 

 

<논술과 철학 강의 2>
김용옥 지음
통나무, 2006년 8월, 299쪽/ 철학

 

세상은 ‘믿음’ 문제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전제 없이 사고할 수 없다. 인간 사고가 언어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이상, 언어 체계는 필연적으로 연역 체계를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연역적 삼단논법은 매우 상식적인 경험판단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대전제 성립과정은 분명 경험적 귀납추리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타인 죽음만 경험할 뿐,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일일이 확인한 적 없다. 따라서 대전제에서 도출된 결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는 우리 경험 사실과 무관하게 도출되는 논리적 비약이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명제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이며 허구며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상식을 검토해보면, 우리 판단 대부분은 경험명제 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대전제를 갖고 있다. 모든 결론은 그것에 전제하는 믿음일 뿐이다.

 

 

1.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백상현 지음
책세상, 2014년 8월, 320쪽/ 철학

 

진실한 사랑

 

라캉은 인간 사유의 내용과 원인 모두 허구일 뿐 영원한 원인이 없다는 주장으로 자신 이론을 시작한다. 인간사는 아무리 확고해 보여도 결국 주체의 판타즘을 구성하는 요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리란 바로 이와 같은 지식 체계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구멍’이다.

 

 

라캉 개념은 진리가 의미로 충만한 것, 이데아와 같은 것이라고 사유했던 과거 형이상학 전통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진리는 상식으로 결코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출현한다. 진리는 세계 질서의 불완전함을 폭로하며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구조의 균형점이다. 우리는 진리를 절대적 수렴점이 아닌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보편적 시작점으로 사유해야 한다. 진리는 상식적 세계관 자체를 포기하도록 강제하기에 고통이 존재한다.

 

 

라캉 이론으로 ‘진실한 사랑’을 설명하면, 사랑의 대상인 타자가 더 이상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즉 자신 고유의 타자성으로 출현할 때 일종의 ‘유령’과 같은 모습이 된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바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인 ‘유령’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실현된다. 내가 알 수 없으며 알기 원치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자신의 질서 잡힌 영토를 찢어서 균열의 자리, 공백의 자리를 마련하는 고통스러운 행위가 있어야 한다.

 

 

진리는 나의 판타즘이 공백 형상으로 텅 비워지는 순간 나에게 강제되는 일종의 희생이다. 그렇게 해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랑의 진리와 관련한 ‘연인의 유령‘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단번에 지워버리는 유령이미지 출현이 그녀에 대한 사랑의 진리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주었던 과거 흔적이 아니라 이제부터 그녀가 보여줄 수도 있을 어떤 미래 ‘유령’에 대한 내 신뢰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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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6-18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북다님 알차고 꽉찬 독서목록....

북다이제스터 2019-06-18 13:10   좋아요 1 | URL
매일 밤 기도하고 있습니다.ㅋ
syo 님이 하루 빨리 좋은 소식 들려주셔서 syo님께서 책 다시 많이 많~이 읽게 되실 날 오기를요....^^

syo 2019-06-18 14:12   좋아요 1 | URL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북다님 기도빨이었구나ㅋㅋㅋ

겨울호랑이 2019-06-18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국의 시대>가 순위에 들지 못한 것을 보니 대진운이 어지간히 없었던 듯 합니다. 저도 북다이제스터님 처럼 월별 또는 분기별 정리를 해야하는데... ㅜㅜ 어렵네요

북다이제스터 2019-06-18 14:19   좋아요 1 | URL
올해 저는 홉스봄의 <제국의 시대> 안 읽었는데요....ㅠㅠ

겨울호랑이 2019-06-18 13:14   좋아요 1 | URL
죄송합니다... <
자본의 시대> 오타였습니다 ㅜㅜ
 




인도 역사 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 즉 뱀을 숭배하는 나가족은 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침략했을 당시 인도 북부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산 속 오지에는 그 후손들이 남아 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피부가 검고 코가 둥글넓적한 부족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드라비다족˝이라고 부른다. 아리아인들이 그들을 습격했을 당시 이미 문명화되어 있는 부족이었다. 모험심이 많은 상인들은 배를 타고 수메르와 바빌론까지 갔으며, 그들의 도시들은 세련된 물품들과 호사품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아리아인들은 바로 이들에게서 부락 공동체와 토지 보유 제도, 조세 제도를 물려받았다. 오늘날까지도 데칸 고원은 인종과 관습, 언어, 문화, 예술 면에서 본질상 드라비다족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다른 모든 부족들처럼 아리아인들에게도 종족 집단 밖에서 결혼하거나 가까운 친족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족내혼(族內婚)과 족외혼 규칙들이 있었다. 이런 규칙들이 모태가 되어 힌두인들의 가장 독특한 제도가 형성되었다. 아리아인들이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피정복민인들이 수적으로 우세했으므로, 그들은 통혼을 제한하지 않으면 곧 종족이 정체성을 잃고 동화되어 흡수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므로 카스트를 구분했던 초기의 기준은 신분이 아니라 피부색이었다. 카스트는 단순히 긴 코와 둥글넓적한 코를 구분하여 아리아인들을 나가인들 및 드라비다인들과 구분함으로써 결혼을 족내혼 집단으로 제한하려는 규제 조치였을 뿐이다. 종족과 직종에 따라 세습적으로구분하는 카스트 제도는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베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온 세상에서 우파니샤드를 연구하는 것만큼 유익하고 마음을 고양시키는 것도 없다. 우파니샤드를 연구하는 일은 나의 삶에 위안을 주었다. 내가 죽을때도 위안을 줄 것이다.˝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우파니샤드에는 우리 인류에게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철학과 심리학이 있다. 인간이 정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또 이 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끈질긴 노력이 있다. 우파니샤드는 호메로스만큼 오래된 책인 동시에 칸트만큼 현대적인 서적이다.


우파니샤드라는 용어는 가까운 이라는 의미의 ‘우파(upa)‘라는 말과 ‘앉다‘라는 뜻의 ‘샤드(shad)‘라는 말로 이루어져있다. 본래는 스승에게 ‘가까이 앉아 있음‘이라는 의미를 지녔던 이 용어는 스승이 가장 총애하는 우수한 제자들에게 맡기는 은밀한 가르침이나 비전(秘傳)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는 기원전 800~500년에 활동했던 다양한 성인들과 현자들이 작성해 놓은 108편의 강론이 담겨 있다. 이 강론들은 일관된 철학 체계가 아니라, 사물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피상적인 현상 세계의 저변에 놓여 있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실재를 이해하고 경외하는 자세로 그 실재와 연합하고자 노력한 많은 사람들의 철학과 종교가 녹아 있는 견해들과 통찰들과 교훈들이다. 이 강론들은 불합리한 내용들과 모순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헤겔의 말씨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톰 소여가 사마귀를 고쳐 주려고 사용한 것 같은 기묘한 주문들을 제시하기도 하며 때로는 철학사에 나타난 가장 심오한 사상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우파니샤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담긴 모든 신비를 주제로 삼고 있 다. ˝우리는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브라만을 알고 있는 자여, 우리가 누구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살고 있는지 말해 다오. ...… 제1원인은 무엇인가? 시간인가, 자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인가, 4원소인가? 아니면 푸르샤(Purusha)라는 절대정신인가?˝ 인도에는 인구수에 비해 자신들이 안고 있는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재물보다 더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감각들과 이성이 아니라 깨달아 알 수 있는 모종의 다른 기관이다. ˝(세상의 근본 원리인) 아트만은 배운다고 얻어지것도 아니며 책에서 배운 많은 지식이나 천재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최고의 깨달음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직접 감지하여 깨닫는 것이며 베르그송식으로 말하자면, 고의로 영원한 감각의 출입구들을 최대한 닫아 버린 정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직관적으로깨닫는 것이다.


내면의 실재를 느낄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에게서 악한 행동과 생각, 몸과 마음의 모든 번뇌를 깨끗이 씻어 내야 한다. 2주일 동안 단식을 하며 물만 마셔야 한다. 그러면 (말하자면) 마음이 굶어 평온하고 고요해지며, 감각들이 깨끗하게 되어 고요해지고, 영혼이 평화를 누리며 자신이 일부에 지나지 않는 거대한 영혼의 대양과 자신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가 갖춰지면 마침내 개별자는 사라지고 보편자인 실재가 나타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런 순수한 상태에서 선각자가 보는 것은 개별적인 자아가 아니다. 개별적인 자아는 일련의 뇌의 상태들, 즉 정신 상태들일 뿐이며 내면에서 바라보는 몸일 뿐이다. 선각자가 추구하는 것은 아트만(Atman)이다. 이 아트만은 모든 자아들의 자아, 모든 영혼들의 영혼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을 때 우리 자신을 담그는 물질도 없고 형체도 없는 절대자다.


그러므로 이 ˝은밀한 가르침의 1단계는 이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자아의 본질은 몸이나 마음, 개별적인 자아가 아니고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으나 형태도 없이 침묵하고 있는 심오한 존재인 아트만이다. 2단계는 브라만(Brahman)이다. 브라만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중성이고, 인격과 무관하고,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무형의 세상의 본질, ˝실재의 실재˝, “태어나지도 않고 부패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혼˝이다. 그리고 아트만이 모든 영혼의 영혼인 것처럼 만유의 영혼이며, 모든 힘들과 모든 신들의 뒤에, 밑에, 위에 있는 유일한 힘이다.


3단계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비개별적인) 영혼 혹은 힘은 비인격적인 세계 혼과 동일하다. 우파니샤드는 이 가르침을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모든 형태들과 베일들을 넘어서면 주체와 객체가 하나다. 개별성을 벗어던진 우리와 만물의 본질인 신은 하나다.


아트만과 브라만 그리고 이 둘의 통합,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다른 것도 많이 가르치고 있으나 모두 부수적인 가르침이다. 단편적인 개별적 자아를 벗어버리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지고한 복락을 누릴 수 있다. 개별적인 의식(意識)이 사라지고 존재에 흡수되어, 잠시 분리되어 있던 단편이 ‘전체‘와 다시 연합하게 될 것이다.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만큼이나 개인주의에 젖어 있는 종교를 지닌 서구인이라면 이런 이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개별성은 미망일 뿐이라 여기는 힌두의 신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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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비판하려면 그 대상이 지닌 한계를 뚜렷이 밝혀 드러내면 된다. 이것을 비난과 혼동하면 안 된다. 저자 깜냥과 한계를 지적해 주는 건전한 비판 덕에 학문이 발전한다. 구체적으로 비판하면 (비판한 사람) 자신 한계도 함께 노출되므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다른 사람이 다시 지적해 줄 수 있다. 그러면 최초 비판자인 나는 창피하여 얼굴이 화끈거리겠지만 깨닫지 못한 걸 알게 됐으니 고맙게 받아들이면 된다. 합리적으로 비판하자. 비판이나 제안으로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적 자산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유유, 2014)

 

 

 

 

 

 

 

 

 

 

 

 

 

 

이 책 <비즈니스모델 4.0> 서문은 무척 공들여 쓴 느낌이다. 각 문장이 간결한 단문으로 읽기에 편하고, 논리 상 흐름도 부드럽다. 경영의 핵심 전략 ‘차별화’를 대중 개념어 ‘다르게’로 표현하여, 독자가 처음부터 책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끝까지 읽지 않아도 책에 무엇이 담겨 있으며,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한눈에 감 잡을 수 있게 한다. 몇 페이지의 서문에서 저자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필요한 인용문이 몇 개 있다. 그렇지만 다소 적절치 않은 경우도 있다. 서문에 담긴 인용 두 가지만 말해 보자.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은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똑똑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적응을 잘하는 종이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비즈니스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즈니스 생태계에서도 이에 적응하는 기업만이 생존하고 성장합니다.”

 

 

저자가 말한 다윈 인용문에서는 핵심 단어, ‘우연한 돌연변이’가 빠졌다.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똑똑한 종이 아니라 (우연한 돌연변이로 인해) 변화에 가장 적응을 잘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진화론에서 종이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은 단지 ‘우연’한 일이다. ‘비즈니스모델’을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노력해서 만들어야 하는 기업체에는 적절치 않은 인용이다. 굳이 진화론을 경영 이론에 제대로 접목한다면,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비즈니스모델을 계획하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고, 기업 성공이란 결국 대부분 ‘우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원래 세상사에 더 적합(fitness)하지 않을까? 저자의  또 다른 ‘적절한’ 인용문을 보자.

 

 

“1998년 일론 머스크와 함께 온라인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인 페이팔(PayPal)을 설립해 2002년 15억 달러라는 거금을 받고 이베이에 매각한 피터 틸은 ‘성공한 기업은 모두 달라서 독특한 문제를 해결하고 ‘독점’을 구축한다. 실패한 기업은 모두 비슷비슷해서 경쟁을 벗어나지 못한다.”

 

 

재미있는 인용 글이다. 이 같은 말을 한 피터 틸은 대단히 솔직하고 센스 있으며, 언어적으로도 충분한 소양이 있는 듯 하다. 그의 말 모양새가 무척 익숙한데, 톨스토이의 책 <안나 카레리나> 첫 문장과 구조가 흡사하나 내용은 반대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안나 카레니나 1>(민음사, 2009)

 

 

유명한 문장이라 많이 회자되며, 읽는 사람마다 해석도 다양하다. 내 해석의 도움은 ‘필요조건, 충분조건’이다. 불행한 가정은 단 한가지 필요 조건만 있어도 불행하며, 행복한 가정은 모든 충분 조건이 있어야 하기에 행복하기란 매우 힘들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 같은 뜻을 피터 틸 인용문에 그대로 적용하면 대부분 기업은 아무리 ‘계획’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실패하며, 기업 성공은 ‘우연’한 일이며 불가능에 가깝지만, 굳이 성공하려 든다면 시장을 ‘독점’하는 방법 이외는 없다는 솔직한 표현이다.

 

 

무수한 경영학 이론이 있지만, ‘현실’적인 경영학 이론이 분명히 밝히든 혹은 감추든, 기업 생존과 성장 열쇠는 결국 ‘독점’뿐인 셈이다. 하지만 ‘독점’은 명시적으로 불법이며, 인간적으로 반사회적이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경쟁적이고,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믿는다면 당신은 속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은 결합, 합병, 통합, 트러스트, 위탁 등 독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점이 이윤을 늘리며, 반면 경쟁은 이윤을 줄이는데, 자본가가 왜 경쟁을 하겠는가? 제품 생산이 몇몇 기업에 집중됨에 따라 경쟁에서 독점으로 이어지는 변화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초래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경쟁이 독점으로 바뀌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경쟁’ 그 자체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특히 산업과 금융 자본의 결합을 통해 몇몇 기업들은 엄청난 규모로 팽창하여 독점 대기업이 되었다. 독점 자본가들은 가격을 자기 뜻대로 정하며, 그들이 가장 높은 이윤을 올릴 수 있는 지점에서 가격을 고정시킨다. 이밖에 기본적인 특허권을 장악하고 그들이 정한 가격에 따르는 후순위 기업들에게만 생산기술 사용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한다.

 

 

독점 사업자는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가격을 내리려는 소매업자들에게 제품 공급을 거절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독점 사업자는 이익 극대화를 위해 산업의 기술 발전을 방해한다. 예를 들면, 듀퐁 연구소는 저렴한 안료인 ‘모나스트랄’ 시리즈를 새로 개발했다. 이것은 탁월한 기술적 진보였지만, 그 기술이 회사의 섬유 가격 수준을 높게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어 섬유 부문의 이윤을 떨어뜨릴 수 있었기에, 듀퐁은 연구소에서 개발된 안료를 상품화하지 않았다. 게다가 독점은 상품의 질을 떨어뜨린다. 내구성이 떨어지면 소비자들은 제품을 더 자주 많이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상품 수요 감소 시, 독점 기업은 가격 하락을 방치하는 대신, 생산 감축을 유도한다. 이런 정책이 노동자들에게는 실업을 의미한다. 독점 사업자는 불안정한 가격 수준에서 자신 상품을 내다파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공장을 놀리고 노동자를 해고한다. 이로 인해 소비자의 소득이 줄면서 경쟁 산업의 생산물 수요까지 하락한다. 결국 소득이 줄어든 경쟁 산업의 제품 생산자들은 여전히 고가인 독점 산업의 상품들을 구입하기 힘들어 진다.

 

 

자본가들은 흔히 자신 돈을 특정 사업에 투자하면서 돈을 잃을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마땅히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독점적으로 통제된 경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독점이 만연한 경제 시스템에서는 위험을 감수한 주체가 독점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와 농민, 소비자다. 부익부 빈익빈 초래는 독점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 독점 사업자는 노동 생산성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불황 시 생산 감축을 쉽게 하여 실업을 야기한다. 원료 공급지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 독점 사업자들이 때때로 원료에 낮은 값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독점 사업자들은 상품 가격을 높게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휴버먼의 자본론>(어바웃어북, 2011)

 

 

사회를 고려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돈을 벌고 싶다면, 이 책 <비즈니스모델 4.0>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렇지만 우리 공동체를 염려하고 자신 정신이 피폐해지고 황폐해지기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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