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쉽게 읽고 보는 세상이다. 화면에 모든 걸 담을 수 있다고 믿는다. 화면을 삭제하고 다음으로 넘기고 화면을 저장한다. 좋으면 바로 구독하고 아니다 싶으면 해지한다. 구독과 해지를 반복한다. 모든 게 소비되는 세상. 잘못된 뉴스와 정보를 그대로 믿기도 한다. 쏠림 현상으로 이어지다 파국을 맞기도 한다. 신중하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변한다. 모든 게 속도전이다. 김기태의 단편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고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첫 번째 단편집에 수록되기 전 단편 「보편 교양」을 읽고 이렇게 쓰다 말았다. 아무튼 김기태의 「보편 교양」좋았다. 소설의 주인공 곽은 고등학교 교사로 자유선택으로 고3에게 '고전 읽기'를 가르친다. 고심해서 고전 목록을 정하고 나름 교실을 꾸미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상했듯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대부분 대놓고 잠을 자거나 다른 과목 문제집을 푼다. 특별할 것 없는 고3의 수업이라 볼 수 있다. 학부모의 민원이 들어오기 전가까지 말이다. 민원을 넣은 건 수업에 집중하는 은재의 아버지였다. 은재가 마르크스를 읽고 있다는 이유였다.


다시 읽은 「보편 교양」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만의 가치와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무너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졌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가 그랬다. 어떤 안감힘. 그러나 그게 전부였고 한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에서 김기태는 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양새다. 정작 독자에게는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니면 그런 모호함을 구축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무겁고 높은」과 비슷한 결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당선을 목표로 쓴 소설이 있고 쓰고 싶은 소설이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함께 데뷔한 아이들의 음악과 그들의 팬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세상의 모든 바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롤링 선더 러브」, 유행과 인기가 아닌 소신 있는 음악으로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의 이야기를 다룬 「로나, 우리의 별」 은 현재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보여준다. 나름의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단편이지만 그게 전부다. 물론 작가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는 군중 심리나, 혼란스러운 정체성 같은 것,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이다. 세태를 풍자하면서 뼈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보면 더욱 그렇다. 같은 중학교를 다닌 진주와 니콜라이는 선생님에게 봉투를 받는 학생이다. 봉투를 열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알 수 있다. 내야 할 돈을 내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 진주와 니콜라이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사회적 도움이 필요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학생이었다. 진주는 마트에서 일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어른이 되었고 니콜라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우연한 만남으로 밥을 먹고 술을 머시고 서로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연애 비슷한 것, 혹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그런 사이. 중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라는 선생님의 말은 어른이 된 그들에게 당도한다. 농담처럼.


“우린 친한 사이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42쪽)


그런가 하면 계획표대로 세상이 원하는 모범생처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인생이 끝내 전락하고 말 것 같은 예감을 던지는 「전조등」이나 기묘한 반전이나 스릴러가 아닐까 기대하는 「태엽은 12와 1/2바퀴」은 냄새만 풍길 뿐 정작 향도 없고 어떤 맛도 전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젊은 광부들이 넘쳤지만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폐탄광촌의 고등학교 역도 선수 송희의 이야기 「무겁고 높은」는 여운이 많이 남았다. 역도 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송희가 역도를 들게 된 이유. 우연히 마주한 역도에서 훈련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송희에겐 성공이나 1등 수상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목표가 있었다.


송희는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 「무겁고 높은」, 245쪽)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무겁고 높은」, 249쪽)


버리기 위해 들어야 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주저하다 무겁다는 이유도 외면하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놓쳐서 떨어뜨리는 게 아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들어서 버릴 수 있는 삶. 자신 있게 버릴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송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다.


SNS상에서 다들 좋다고 하는 소설도 나에게 별로일 수 있고 내가 추천하는 소설도 상대에게는 그저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소설 읽기도 구독과 비슷해서 쉽게 구독하고 해지하고 다른 소설을 구독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소설을 소비하는 세상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5-03-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점점 제 선택이 옳았다는 쪽으로..... ^^;;

잠자냥 2025-03-18 17: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그런 생각했어요!
 
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은 뭘까. 이 나이에 사랑이 뭐냐니. 뜬금없지만 사랑이 뭔가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 을 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계속 그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 그것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많다는 것. 단순하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조금 더 나가면 그 사람의 형편을 살피는 일,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일, 그 사람의 아픔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 함께는 아니어도 우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게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된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에서 작가는 사랑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인간, 동물, 제도) 과의 사랑 말이다. 그것은 곧 모든 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닫힌 결말이 아닌 박 터지게 싸우고 고집을 부려서라도 열린 결말을 지향하는 관계. 예소연의 단편 속 인물의 사랑은 좀 복잡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그들과 보낸 시간을 곱씹고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을 마주하며 미칠 것 같다.


크로스핏 센터에서 만나 친구가 된 석주와 맹지의 이야기 「우리 철봉 하자」만 봐도 그렇다. 석주는 의대생인 맹지의 남자친구가 맹지를 힘들게 하는 게 싫다. 대놓고 맹지에게 너 남자 없이 못 사냐고 할 정도다. 늦깎이 의대생 주제에 공부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맹지에게 푸는 것 같고 그 모든 걸 받아주는 맹지가 못마땅하다. 그건 과거 석주가 남자친구를 대했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이용하는 지질한 방식의 사랑 말이다. 그래서 석주는 맹지가 그런 사랑을 하지 않기를 바라서 모진 말로 상처를 주고 견딜 수가 없다. 석주는 맹지에게 지질한 남자 친구는 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주고 싶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석주 자신이 원했던 사랑이었다. 맹지와 같이 살며 이야기를 나눌수록 석주는 뒤늦게 깨달았다.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우리 철봉 하자」, 33쪽)


석주 같은 마음은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 속 희조의 마음과 비슷하다. 희조와 미정을 통해 십 대 시절, 사춘기, 청소년기의 마음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잘 보여준다. 세상과 어른을 바라보는 예민하고 비뚤어진 태도.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희조와 친구 미정의 관계. 희조와 미정은 친한 사이였고 종종 미정의 집에서 희조가 자고 오기도 했다. 희조가 미정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이야기를 학교에서 하면서 둘 사이는 틀어진다. 전학을 간 미정이 희조가 다니는 중학교로 전학을 오고 둘은 다시 가까워지는 듯했다 다시 멀어진다. 희조는 미정을 좋아했고 일진 남자친구가 아닌 자신의 친구이길 바랐다. 희조가 미정에게 바랐던 마음은 사회적 통념으로 우정으로 불리겠지만 석주가 맹지를 향한 마음과 같지 않을까.


예소연은 우정과 사랑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아주 잘 다룬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랑의 겹을 안다고 할까. 친구나 연인과의 사랑만이 아닌 부모와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흐르는 뒤엉킨 시간과 감정을 「팜」과 「그 개와 혁명」에서도 마주한다. 두 단편에서 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세상을, 미래를 위해 힘쓰고 투쟁한다. 단순히 세대 차이로 치부할 수 없는 부녀 사이. 아버지의 자리에서 딸의 돌봄은 안중에도 없다. 그런 아버지를 딸은 사랑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개와 혁명」 속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달라진다. 딸 수민은 아버지가 보낸 시간을 헤아릴 수 없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장례식에 아버지가 키우던 개를 데리고 오게 된다. 엉망진창이 된 장례식장도 나쁘지 않고.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딸을 사랑했다.


부모 세대가 전하는 사랑을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표제작 「사랑과 결함」에서 화자인 나(성혜)를 끔찍이 사랑하는 고모(순정)의 사랑처럼. 아버지를 키우고 뒷바라지를 하느라 젊음을 다 보낸 고모. 늦은 결혼을 실패하고 동생네 집으로 돌아온 고모. 정신병을 앓는 애물단지. 엄마와 고모는 나를 두고 경쟁한다. 나는 때로 엄마의 입장에서 고모를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 고모에게 받은 돌봄으로 고모 편에 서기도 한다. 사랑과 돌봄을 받을 때는 모든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중에 고모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그 심연의 아픔을 알고 나서야 조카를 사랑하는 일이 고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된다.


어떤 사랑은 전부를 내어준다. 어떤 사랑은 아주 작다. 어떤 사랑은 지긋지긋하다. 어떤 사랑은 증오와 분노를 키운다.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을 데려오고 어떤 사랑은 끝내 알지 못한다. 사랑해 한 마디가 어려웠던 순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견딜 수 없어서 나를 내동댕이쳤던 시절로 되돌릴 수 없기에 사랑은 상처로 남지만 그 경험으로 우리는 다른 사랑을 꿈꾼다. 그 이름은 연대가 될 수 있고 돌봄이 될 수도 있다. 예소연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은 사랑, 용기가 필요한 사랑. 사랑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제부터 시를 좋아했을까. 읽지도 않을 시집을 욕심내며 사들이는 나는 시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시집이 있다. 선배 언니가 선물한 정현종 시인의 시집이다. 나를 시로 이끈 사람은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과 선배 언니였다. 그리고 문학소녀 흉내를 내고 싶었던 나의 열망. 그 후로 나는 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시를 배우던 수업 시간에 가장 중요했던 건 시험에 나올 것들, 은유와 상징, 공감각적 표현 같은 걸 외우기에 급급했다. 십 대에는 시집은 좋아하는 이를 위한 선물이 전부였다. 나를 위한 시집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 나를 위한 시집을 곁에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황인찬, 박준, 신미나, 최지은, 유희경 등 20명의 젊은 시인들이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쓴 60편의 시와 시작노트를 만날 수 있는 『도넛을 나누는 기분』을 읽으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빨리 그 시절이 지나가기를 바랐던 마음,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잠잠해질 수 있을까, 의심하고 의문하던 시절을 가만히 떠올린다. 지난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나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어 자꾸 일게 되는 시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새를 기르는 사람과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

그렇다면 너는?

우리는 하늘과 바다 그 사이의 평지를

험준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어항이 출렁거려 넘치지 않게

새장이 쏟아져 문 열리지 않게

그렇게 조심조심 걸어가는 게 삶이래

그동안 잃어버린 새와 물고기는

모두 어디에 모여 살고 있는지

그곳의 도로명 주소는 내 이름이 아닌지

하늘을 모두 읽을 수가 없어서

새장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바다를 모두 받아 적을 수가 없어서

어항을 쏟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 대신 살아가는 말들이 있어서

종이를 펼쳐 긴 편지를 쓴다

둥지를 떠난 하늘에게

도착한 적 없는 바다에게

넘어지지 않고 걷는 너에게 (「새장과 어항」, 서윤후)






무언가 되고 싶었던 날들, 무언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날들을 지나 무감하고 무기력해진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바다에 도착하지도 못한 나의 조각들, 그 조각들은 여전히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여전히 사는 게 뭔지 모르겠고 버거운 날들. 어쩌면 그게 삶이라는 걸 모른 척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자존감이 강했다고 자부했지만 속내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던 모자란 마음에게 미안하다 말한 적 없다는 걸 신미나의 시를 읽으며 깨닫는다. 왜 그리 숱한 비교를 했던가. 왜 그리 나를 작게만 여겼던가. 숨겨야 할 것도 창피해야 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너의 미소가, 너의 모든 게 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런 나를 사랑하고 지금껏 우정을 나누는 소중한 친구와 함께 읽으면 좋을 시.

못생긴 내 손

뭉툭하고 굵은 내 손

남들이 볼까 봐

부끄러워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너는 내 손을 끌어다

주머니에 넣었지

주머니 속은 새 둥지야

너의 어두운 마음도

슬픔도 품을 수 있어

어두운 데서도

네 슬픔이 환히 보인다

내가 끌어다 쥔 내 손

작고 못생긴 내 손

주머니 안에서 따뜻했지

새알을 쥔 것처럼 두근거렸지 (「주머니」, 신미나)

어른이 되면 모든 게 쉬울 거라 상상하며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나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시절의 나를 잊었다. 잊어야 속상한 마음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현명한 선택과 올바른 판단을 하는 어른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동시에 나름 나아지고 있다고 아주 실패는 아니라고 그 정도면 괜찮다고 위로한다. 그래서 결정된 미래가 있다면 조금 수월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는 마음을 옮겨둔 박준의 시를 읽으며 그때 나도 그랬었지 하며 웃게 된다.

연안에 내리는 눈들을 좋겠다

내리자마자 바다가 되니까

마을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내리자마자 사람이 되니까

골짝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산그늘을 덮고 봄을 볼 수 있으니까 (「눈」, 박준)

스스로의 존재를,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조금 위로가 되는 시집이 아닐까 싶다. 어떤 조언과 격려보다 뜨겁게 그들의 마음에 안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시를 권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시를 읽는 기분은 이런 거라고 말하는 시집이다. 가만히 시를 필사하면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다 진짜 시가 좋아질지도 모르고. 마음에 품을 시를 만날 수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시가 좋아하는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모든 게 괜찮아지는 순간과 맞닿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유희경의 시작노트에서 말하는 그 기분을 느끼고 만끽하게 될지도.

기분의 세계는 기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유 따윈 없는 기분. 기분은 좋고 나쁘고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기분은 오지도 가지도 않고 느닷없고 난데없어서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분은 형언할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 또 시를 읽는다는 것 역시 기분의 문제이다. 나는 당신의 기분을 침범할 수 없다. 당신이 나의 기분에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사이를 두고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시를 나눈다는 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한다. (유희경의 시작노트)


알 수 없는 어떤 기분을 상상한다. 시를 품었던 나의 첫 마음과 닿았던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꺼낸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그 마음을 그려본다. 그들의 첫 시집에 담긴 그들의 첫 마음을.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5-03-1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좋아라~ ^^

올려주신 시도 좋고, 자목련님의 독백같은 글도 좋아요.

자목련 2025-03-17 11:42   좋아요 0 | URL
아이쿠, 행복해라~~

blanca 2025-03-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고 싶어지는 페이퍼네요.

자목련 2025-03-17 11:43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솔직한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5-03-1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의 글이 시 입니다.
다른 시를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자목련 2025-03-17 11:44   좋아요 1 | URL
복사해서 저장하고 싶은 댓글~~

감은빛 2025-03-1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글이네요. 저도 오늘은 시집들을 펼쳐봐야겠어요.

자목련 2025-03-17 11:44   좋아요 0 | URL
펼쳐둔 시집과 함께 봄을 만끽하면 좋겠어요!

새파랑 2025-03-17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고 싶어지네요~! 사놓고 안읽은 시집을 꺼내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5-03-17 11:45   좋아요 1 | URL
지금은 시 읽는 시간~~
 


야금야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뭔가를 먹고 있다. 야금야금 맛있게. 이름하여 독서간식! 그래도 지난 계절보다 책을 읽는 양과 속도가 나아지고 있으니 뭐 나쁘지 않다. 최근에 먹은 마른 오징어가 너무 맛있어서 쿠팡에서 오징어를 검색하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오징어를 먹으면 맥주도 먹고 싶고 맥주를 먹으면...


백수린의 단편집을 다 읽었다. 수록된 단편 가운데 두 번째 읽는 단편도 있었는데 두 번 읽으며 더 좋아졌다. 그런 좋음을 기대하며 단편집을 한 권 더 구매했다. 윤성희의 단편집 『느리게 가는 마음』과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 『루시 게이하트』로 만난 윌라 캐더의 소설은 이제야 생각났다. 이 소설도 좋다는 평이 많으니 얼마나 좋을까.






책보다 더 반가운 건 독서간식. 알라딘의 간식은 책보다 더 큰 유혹이다. 이번에 구매한 건 ‘촉촉 고구마 스틱’이다. 달지 않아서 좋다. 맛을 봤으니 이제 ‘촉촉 단호박 스틱’을 먹어봐야겠다. 다음에 책보다 간식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조금 따뜻해지나 싶더니 황사가 따뜻한 기운을 빼앗으려 한다. 뿌연 하늘에 익숙해지는 순간 봄꽃이 흐드러질지도 모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올봄에는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안부도 듣고 싶다. 나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5-03-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마 스틱 조금 고민하다 안 시켰는데 이 글 보니 벌써 후회되네요. 다음엔 꼭 먹어볼래요. ^^ 달지 않다,는 말에 더 관심이 갑니다. 윌라 캐더 책들도 정말 좋았어요. 읽고 정리하지 않고 갖고 있을 만큼 좋았어요.

자목련 2025-03-16 11:21   좋아요 0 | URL
제 기준에는 달지 않아서 추천합니다!
윌라 캐더 책들 좋다고 해주시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새파랑 2025-03-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라캐더의 <나의 안토니아>도 좋아요~!! 백수린 작가 단편집은 읽어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5-03-16 11:22   좋아요 0 | URL
윌라 캐더 추천하시는 새파랑 님께 백수린의 단편을 추천합니다^^
 
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밤의 모든 것』을 읽으면서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었을 때처럼 행복했다. 아련하면서 포근하고 따뜻하면서 서늘한 슬픔 같은 것들이 몰려왔다. 소설에서 에세이 느낌이 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집을 함께 읽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5-03-13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자목련 2025-03-16 11:23   좋아요 1 | URL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에세이 같아서 저는 좋았어요^^

새파랑 2025-03-1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 겠네요~!!

자목련 2025-03-16 11:23   좋아요 0 | URL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