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공현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평점 :
사고나 위험한 일을 경험하게 된 이후의 삶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 다른 하나는 감사와 충만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작년 2월 아파트에 화재가 났었다. 3층 아래의 집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는 소방관의 안내에 따라 대피했다. 감사하게 인명사고나 피해는 없었다. 그날의 경험과 기억은 한동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후의 사고도 변화했다. 모든 게 허무하고 부질없다는 것, 그리하여 더 내가 원하는 쪽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굳건해졌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여겼지만 2월이 되니 2월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공현진의 소설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처럼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공현진은 소설을 통해 그런 마음을 나누고 연대하며 살아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지만 그런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표제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속 수영 강습에서 만난 ‘주호’와 ‘희주’는 각자의 계기로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교사였던 희주는 학폭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지구가 아프고 언젠가 물에 잠길 거라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희주의 사고방식은 옛 연인이나 그녀의 엄마에게 이상한 것으로 여겨졌다. 학교를 그만두고 환경을 생각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물론 쉽지 않았다. 버리는 대신 필요해서 사들이는 물건이 훨씬 많았다. 우연히 수영 강습을 받게 되면서도 그랬다.
주호는 직장에서 동료가 죽었는데도 공장이 돌아가고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다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기계를 껐다. 뭔가 달라져야 하는 데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동료와 상사의 반응은 달랐다. 처음엔 주호를 이해하는 것처럼 대했지만 회사를 쉬게 만들었다. 예전의 주호라면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무엇이 주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주호와 희주는 별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주호와 희주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은 책망하고 비난할 권리가 있을까.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은 좋은 단편이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될 대로 되란 식의 흐름이 아닌 그 멸망이 언제일지 모르니 멸망이 온다고 해도 그전까지 함께 잘 살아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혼자서만 살아가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삶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희주는 반짝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색색의 거리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같이 떠내려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55쪽)
「녹」은 결혼이주여성과 시간강사인 화자의 이야기로 제목의 ‘녹’은 이주여성의 이름이다. 화자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수업에서 녹을 만났다. 둘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같은 처지지만 녹이 화자의 아이를 돌봐주면서 둘은 수직관계가 된다. 녹을 배려했고 녹의 아이를 데려오는 일이 불편함을 표현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그러다 비 오는 날 녹의 아이가 사고로 죽었다. 엄마가 있은 곳으로 오는 길이었다. 녹은 화자가 강의하는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주임교수는 화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주임교수의 말은 악의가 없는 교양 있는 친절한 말이었다. 화자를 해촉하겠다는 뜻은 아닌 것처럼.
다른 의미를 담지 않는, 그래서 훼손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자격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것이야말로 특권이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말이 끝나고 난 후에도 결코 부서지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 특권. (「녹」, 13쪽)
주임교수와 화자의 관계는 녹과 화자의 관계와 같았다. 화자는 녹이 아이를 데려오는 걸 환대해야 했을까. 잘못은 화자에게만 있을까. 돌봄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 구축되었다면 녹도 화자도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화자의 아이는 녹을 찾고 화자 역시 녹이 필요하지만 그건 가능할까. 1인 시위를 하던 녹이 사라진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그려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고발하는 역할에서만 그쳐 아쉽다. 물론 소설에서 대안이나 공동체를 그려낸다고 해도 현실화되기는 어렵겠지만.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속 인물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 중심이 아닌 변두리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중심으로 향하기를 간절히 열망하거나 안달 내지 않는다. 그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체념의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짓기 직전」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화자와 ‘석주’는 친구 사이다. 화자는 여행사에서 전화 상담을 한다.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의 노동 운동에 큰 관심이 없다. 석주는 일을 하지 않고 밴드에서 보컬 활동을 한다. 석주의 아버지는 석주가 남자답지 않고 군대를 가지 않고 채식을 한다고 때리지만 돈을 준다. 석주는 밴드에서 잘린 후 스스로 밴드를 결성하는데 거기서도 잘렸다. 그래서 둘만의 밴드를 결성하고 이름을 짓는 중이다.
그저 음악을 함께 하고 싶고 그 시간을 누리고 싶은 것뿐이라고 석주는 말했다. 진심도 자격이 있어야 가질 수 있어? 내가 정말 많은 걸 바라는 거야? 나는 석주의 넋두리를 들었다. (「이름을 짓기 직전」, 131쪽)
석주에게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충분하다고. 어쩌면 공현진이 이 소설집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그대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시선이나 제도의 개선을 필요하다는걸. 석주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돌아가는 마음」과 「권능」에서도 만날 수 있다. 「돌아가는 마음」속 언니는 가출을 했지만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지만 목사인 아버지가 축도를 할 때 사라진다. 그런 언니가 5년 만에 돌아와 결혼을 하겠다고 통보한다. 엄마는 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대신 상대가 믿는 사람인지 묻는다. 가출 전 모두의 자랑이었던 언니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었지만 소설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일에 대해 부모가 언니를 위로하거나 이해하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다. 어렵게 얻는 딸을 잃은 이모가 조카인 화자의 모든 걸 간섭하는 「권능」에서도 비정상적인 신앙에 대해 보여준다. 가족 간의 관계에서 신앙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현실적 어려움은 신앙이 아닌 상대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나온다.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의 선자 씨처럼 말이다. ‘진아’와 ‘선자 씨’를 요양 보호사 자격증 준비반에서 만났다. 진아는 아픈 아버지를 돌볼 방법으로 선자 씨는 남편을 부양할 목적으로 공부하며 서로를 돕는다. 수업을 들으면서 선자 씨의 질문을 진아는 빠짐없이 알려준다. 진아가 수도계량기 동파로 새벽에 전화를 걸자 선자 씨는 트럭을 몰고 달려온다. 그런 선자 씨의 합격을 진아는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름을 짓기 직전」과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속 인물의 우정이 아름답고 따뜻하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사라지고 오직 나만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지는 세상이다. 인간이 아닌 AI와 소통하는 시대를 쫓으며 살아간다. 먼 미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풍경은 어떨까. 적막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마지막 순간에 유일한 존재로 남은 인간 ‘하나’의 이야기를 그린 「모두가 사라진 이후에─3인칭의 세계」 속 이런 문장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거리에 멈춰 서서 침묵과 소란이 오가는 시간을 지켜보았다. 이 마지막 풍경을 보기 위해 자신이 남아 있었다. 빠르게 시간이 가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시간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죽은 이후의 세상이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전하고 고독하고 아름답고 무서운지. 소란스럽고 외롭고 소름 끼치고 사랑스러운지. 누군가는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 때문에 자신이 남았다는 것을 하나는 알아챘다. 인간들이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모두가 사라진 이후에─3인칭의 세계」, 274쪽)
작가는 살아가는 삶이 고단하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고 어차피 행복한 결말이 보장되지 않은 삶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조금만 더 주변을 둘러보고 용기 내어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