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게으름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유영미 옮김 / 뜨인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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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로 깊은 잠은 달아나버렸다. 잠들지 못한다는 핑계로 TV 채널을 돌리고 스마트폰을 뒤적인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잠을 기다리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잠이 오지 않아 고통스럽게 여길 생각할 뿐 그 자체에 집중하거나 반대로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달랐다. 똑같은 상황을 차분한 관찰로 아름답게 서술해 나를 공간으로 이끈다. 『헤르만 헤세의 게으름의 기술』은 그렇게 기꺼운 초대였다.

어쩌면 혹자는 제목 때문에 게으름 찬양이나 자기 계발서로 여길지도 모른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헤세가 기록한 삶을 향한 고요하고 아름다운 탐색이다. 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자기 계발로 다가올 수도 있다. 헤세가 들려주는 일상의 단편은 목적 없이 달리기만 한 이들에게 멈춤, 쉼, 혹은 다른 속도를 제안한다. 재촉하지 않으며 순간에 집중할 느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말이다.

많은 부분이 여행에 대한 기록으로 마치 삶은 여행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볼 수 없는 것들, 이동하며 만나는 낯선 사람과 자연을 통해 느끼는 경이로움과 사유를 통해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여행이 아닌 유명한 관광지를 찾는 모습은 100 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걸까. 헤세의 안타까움을 우리는 잊은 지 오래다. 그 사실이 서글프면서도 뼈아프다.

지구는 정말 가득 들어차버렸다. 어디로 눈길을 주든 새로운 집, 새로운 호텔, 새로운 기차역이 눈에 들어온다. 어딜 가든 건물을 한층 더 올리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제 지구에서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한 시간 동안 산책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듯하다. (61쪽)

헤세가 만나고 그리워한 이들은 유명한 이들이 아닌 산골 마을에 살며 연기에 그을려 위생적이지 않고 침투성이 바닥의 부엌에서 낡은 양철 주전자로 끓인 커피를 내주는 마귀 같은 친구다. 그가 기억하는 여행지의 모습은 휴양지의 명소가 아닌 소도시에서 친분을 쌓은 목사와 함께 머리에 작은 총상이 나 있던 연고 없는 부랑자였던 고인의 묘지에서 그를 축복한 일이다. 누군가는 불편해서 피하고 싶었을 그 순간을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묘하게 울컥하는 건 왜일까.





폭염이 지속되는 여름이라서 헤세의 이런 글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벗에게 쓴 글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당부로 들린다. 휴가철이라 와락 달려드는 느낌이다. 쉼에도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달성해야 할 것만 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롯이 휴식에 빠져들지 못하는 현대인이라면 격하게 수긍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지는 않지만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일에는 도통 재능이 없답니다. 하지만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여름의 끝자락에 약간의 호젓함을 누리는 것이 제겐 휴식이 됩니다. (95쪽)

헤세가 누리는 휴식의 일부는 자연에 동화되는 것이었다. 붓으로 표현하고 찬미하고 싶은 순간, 그가 반한 백일홍에 대한 눈부신 사유 울림 그 자체다. 죽음의 춤이라니! 백일홍을 꺾어 방에 두고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해마다 작약과 수국을 곁에 두고 바라보지만 나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생각들. 헤세의 시선을 따라 시들어가는 백일홍을 마주한다.

한참 전부터 백일홍을 볼 때면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유쾌하고 아늑한 기분이 됩니다. 오래되어 은은한, 그러나 결코 약해지지 않는 이런 애정은 특히 이 꽃들이 시들어가는 걸 볼 때 더 각별해집니다. 꽃병에 꽂혀 차츰 마르고 죽어가는 백일홍을 보면 죽음의 춤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덧없음에 슬프고도 황홀하게 동의하는 모습이랄까요. 가방 덧없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죽음조차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사랑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97쪽)

작가 아닌 인간 헤세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도시의 축제 기간에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밤’에 참가한 헤세, 티켓을 파는 이도 참석한 이들도 그가 헤세인 줄 모른다. 낭독자가 시 속의 단어들을 누락하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하면 실망하고 상처받는다니. 끝까지 견디디 못하고 자리를 뜨는 헤세의 표정은 씁쓸함이 묻어 있지 않을까. 여행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 숭고한 건축물과 예술가의 작품을 향유하며 본연의 나에 집중하게 된다. 내가 찾으려 했던 게 무엇이며 갈망하는 그것에 대해서.

여행하면서 낯선 곳에 빠르게 적응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평소의 삶에서도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별을 좇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삶의 원천에 대한 강한 향수, 모든 살아 있는 것, 창조하는 것, 성장하는 것 들을 알아가고 동질감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 세상의 비밀을 여는 그들의 열쇠다. (242쪽)

『헤르만 헤세의 게으름의 기술』는 어느 부분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고 어디를 펼쳐도 헤세의 찬란한 문장이 반겨준다.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오늘이라는 하루를 여행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것. 어쩌다 빨라지거나 느려지면 약간의 게으름이 필요하다는 걸 발견하고 깨닫게 될지도. 헤세의 하루를 따라 그의 마음의 길에 동행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게으름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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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6
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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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르 아이라의 『바라모』는 1923년 파나마 콜론의 공무원 ‘바라모’가 월급을 받은 순간부터 열두 시간에 걸쳐 쓴 시「아기 예수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연 독자는 시 「아기 예수의 노래」의 전문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어떤 시이기에 라틴 아메리카에 시의 걸작으로 찬사 받는지 궁금하니까. 단 한 번도 시를 쓴 적이 없는 바라모가 쓴 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주목할 건 월급을 받는 순간부터다. 바라모가 월급으로 받은 이백 페소(100페소짜리 두 장)이 위조지폐였던 것이다. 받은 순간 알아차렸지만 바라모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공무원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위조지폐라도 상관없던 것일까.

광장으로 나온 내내 바라모를 지배하는 건 위조지폐. 왜 아니겠는가.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진 그 앞에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는 남자다. 정부 청사의 운전기사로 공무원들에게 판 돈을 대주는 도박단이기도 하다. 오늘이 월급 날인 걸 알고 빚을 받으러 온 것인가. 아니었다. 노련한 도박꾼인 어머니가 딴 돈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쯤이면 그 시절 파나마가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공무원도 도박을 하는 사회. 그렇다면 위조지폐 유통도 만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라모가 전전긍긍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수중에 진짜 돈이 생겼으니 뭐라도 먹기로 한다. 땅이 떨어졌다고 몸이 신호를 보내니. 젤리는 파는 여자에게 주사위처럼 생긴 빨간 젤리를 산다. 여자에게 줄 동전이 없어 운전기사에게 받는 1페소를 건넨다. 너무 큰돈을 받은 여자는 거스름돈을 구하기 어렵고 그걸 보던 신체 불구자가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나선다. 바라모는 자신에게 잔돈이 없음을 미안해한다. 여기서 신체 불구자의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른다.

잘못은 화폐를 제대로 발행하지 않아서 액면가가 낮을수록 일반 대중에게 더욱 희귀해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야기한 통화 당국에 있다고. (18쪽)

이런 문장을 곳곳에서 마주하는데 이 소설이 그 시대의 파나마를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젤리를 손에 들고 광장 중앙으로 가는데 미친 남자가 빚을 갚으라며 달려든다. 노상 있는 일이라 동건을 건네며 빚 갚았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젤리를 든 손 때문에 힘들다. 정작 젤리는 먹지도 못하고 흘러내려 버려야 하는데 휴지통은 없고 화단 쪽의 풀밭에 버리려다 키 큰 관목의 가지 끝에 젤리를 꽂았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바라모와 독자인 나도 진이 다 빠졌다. 근데 위조지폐는 어쩌지.

집에 왔지만 쉴 수가 없다. 공무원의 월급으로 생활하기 어려워(거기다 도박까지 하고 있으니) 바라모는 취미인 동물 박제로 언젠가 돈을 벌기를 꿈꾸며 오늘도 물고기를 만진다. 그는 물고기에 관련된 것이라면 아마뤼 사소해도 일일이 기록했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도착해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며 보여준다. 내용은 협박이었다. 어머니가 파나마로 이주한 지 오십 년이나 지났지만 두 모자에게는 사그라들지 않는 소문이 있었다. 바라모의 생물학적 부모에게서 훔쳐 왔다는. 중국인 어머니, 누가 봐도 중국인인 바라모를 보면 그럴 리가 없지만 어머니에겐 남편이 없었다. 어머니를 달래고 뒷면을 보니 매트리스 영수증이었다. 언젠가 바라모가 어머니와 함께 매장에서 직접 가지고 온 매트리스. 그토록 찾을 때는 사라지고 없던 영수증. 바라모에게 종이가 추가된다. 호주머니 속의 종잇조각들.

어머니가 준비한 저녁을 먹고 바라모는 자신의 평소 루틴대로 카페를 찾는다. 여전히 위조지폐를 생각하면서. 경찰이 자신의 주머니 속의 실체를 알 것 같아 두렵다.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구나 싶은 게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퇴근할 때 만난 정부 운전기사가 사고 피해자였고 바라 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차 안에는 경제부 장관이 있었다. 사고가 아닌 테러였고 장관이 임시 개인 사무실로 사용하는 가정집에 옮긴다. 그 집은 바라모도 아는 공고라 집안이었는데 자매가 사는 줄은 몰랐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골프채 밀수로) 처음 알게 된다.




공고라 집안에서 나와 카페에서 바라모가 합석한 세 명의 신사들과 대화를 나눈다. 늘 카페에서 봤던 그들이지만 합석은 처음이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들은 해적판 출판업자로 바라모가 출판에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해 글을 쓰냐고 묻는다. 바라모에겐 기록(물고기)이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 퇴근길에 광장에서 들었던 클라리온 소리까지 기록하는 바라모인 것을.

그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날 기록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 나중에 혹시 이때의 기록이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메모지를 잘 접어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다. (35쪽)

그럼 원고료는 얼마인가? 어쩌면 당신이 예상했을 이백 페소가 맞다. 거기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바라모의 말에 그들은 네 다섯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내 호주머니에 이백 페소가 들어온다고. 아, 이처럼 쉬운 일이었던가. 골칫거리 위조지폐 2장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해묵은 쓸데없는 습관, 즉 손에 들어오는 모든 종이 쪼가리를 보관해 두는 습관이 결실을 맺는 때였다. (104쪽)

그의 눈앞으로 광대한 사막 같은 황량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야자수, 어둠에 잠긴 정부 청사들 그리고 적막을 가로지르며 태엽 장난감처럼 외로이 굴러가는 자동차. 그는 잠을 자느라 이러한 장관을 늘 놓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것이 작가의 특권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향수에 젖었다. (106쪽)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 위조지폐는 진짜 돈이 되었고 기록하고 모아둔 습관은 책이 되었다. 한낱 말단 공무원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던 바라모는 작가이자 시인이 되었다. 예술의 재료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그것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바라모처럼. 1923년 부패한 파나마이라서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글쎄, 지금 여기는 그곳보다 나은가? 정답을 안다면 알려주면 좋겠다.

월급으로 받은 위조지폐 두 장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수많은 곁가지를 만들어 확장한다.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가장 놀라고 감탄한 부분은 카페를 나와 광장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에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나무 꼭대기 위아래로 ‘8’자와 ‘Z’자를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그 자리는 바라모가 젤리를 꽂아둔 그 가지였다는 것. 그 모든 게 풍자였고 폭로였다. 암시였고 복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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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22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라모가 중국인이라는 설정도 신선했어요. 제 편견에 또 한번 놀라기도 했고요. ㅋㅋㅋㅋ

자목련 2026-07-26 09:02   좋아요 0 | URL
그런 설정에 대한 생각 1도 못했어요 ㅋㅋ
다른 소설은 얼마나 놀라울까 싶어요.
 


글을 쓴다. 잊히지 않는 일들을 쓴다. 기억을 더듬는다. 어떤 기억은 바로 몇 분 전의 일처럼 선명하다. 상처로 남았을 때 그렇다.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는 순간, 그런 기억은 여러 차례 글감이 된다. 세세한 기록으로 은유와 상징으로 재탄생된다. 시의적절 시리즈로 만난 박상수의 『생활력』에서 내가 발견한 건 그런 것이다. 상처, 기억, 회복, 위로 같은 것들.

여타의 시의적절 시리즈와 다르게 이번 박상수의 『생활력』은 시와 산문이 교차로 수록된 게 아닌 전체가 다 산문이다. 들어가는 시, 나가는 시를 제외하고 7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31편의 산문으로 이어진다. 선명하지 않은 조각의 꿈같은 기억으로 남은 들어가는 시는 작가의 유년 시절이고 대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아이를 맞는 풍경의 나오는 시는 작가의 아이의 모습이다. 두 편의 시 사이에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더 반갑고 어떤 이는 많이 아쉬울 수도 있다.

휴가, 바다, 장마, 뜨겁고 청량한 7월를 찾는다면 이 책엔 없다.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이 있듯이. 그럼 무엇이 있는가. 시인 박상수가 있다. 그의 생활력이 있다. 그가 품어온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이 기회가 아니면 들려주지 않았을 이야기, 물론 시를 향한 마음은 가득하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돌봄이 필요한 아이는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진다.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설명한 듯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산골에서 신나게 뛰어놀았지만 밤에는 달랐다. 칡 흙 같은 어두운 밤,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은 게 아니라 무서움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을 초입의 당산나무에 올라가 부모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싹을 튼 불안은 명절에 큰집에 갔을 때에도 이어진다. 혹시라도 부모가 자신을 놓고 갈까 잠들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잠들었고 잠에서 깨었을 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 큰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가는 그 길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은 불안과 불행으로 단단해졌을 게 분명하다.

그 시절 많은 아버지가 그랬듯 돈을 벌기 위해 시인의 아버지도 리비아로 떠나기로 돼 있었지만 출국 전 날 발작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는 그 밤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지만 끝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아는 때가 온다고 해도 자신의 일부가 된 기억을 분리할 수 없는 것. 어쩌면 그런 기억과 상처가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혹은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문학도 고통과 상처가 전부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랑하고 유쾌한 애인을 만나 마음껏 웃어도 되고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단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시 시도해 볼 마음도 없었다. 실패는 이미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사람에게만 가야 할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렇게도 원하는 사랑을 피했던 것이다. (101~102쪽)

등단을 하고 첫 시집을 냈지만 시만 쓰는 삶은 가능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 시간 강사, 대필, 사교육 알바를 해야 했다. 그런 시절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달아날까 두려웠을 것 같다. 그러니 처음 시를 배우던 시절, 시가 좋아서 시를 잘 쓰고 싶지만 생각처럼 안 돼서 힘들었던 시간이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됐을지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아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148쪽)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문장이 좋아서 소리 내어 읽기를 반복했다. 그게 무슨 마음이든 아직 거기 있다는 걸 잊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거기 있다는 걸 아는 건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종종 놓친다. 늘 거기 있어 그것의 소중함을 말이다. 생활을 위해 일하느라 크리스마스이브인 것도 모르던 작가처럼.


다만 여기, 우리가 밤과 낮을 같이 살며,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도 생활을 잃지 않고, 생활을 속이지 않고, 생활을 나누며 살아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다면. (「나가는 시」, 260쪽)


어떤 기억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을 안을 새로운 풍경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조각이 아닌 우리의 그것으로 만든 풍경들. 그리하여 먼 훗날 꺼내어 볼 때 괜찮은 슬픔이 되고 다행인 기억이 된다. 결국 시인이 쓰고 싶은 시는 그런 생활이다. 그의 시집 『메신저 백』의 이런 시처럼.


흘린 듯 귀기울이다보면 우린 한데 묶여 있다는 걸 알게되죠 오래전부터 우린 고통의 목격자, 서로가 겪었던 바닥을 알고 있어요 햇빛에 반짝이는 강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갔던 우리, 제발 뒤를 돌아보라고, 더이상 가지 말라고 외쳐도 구부정하게 가버리던 작은 등을 가진 우리, 무너지는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해온 것일까요 우린 이 행성의 소박한 여행자이지만 이렇게 묶인 서로가 있어서 다시 집밖으로 걸어나갈 수도 있는 거겠죠, 보세요, 작은 보라색 단화의 주인공이 나타났어요 담요를 두르고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들고 아궁이로 다가가네요 토치에 불을 붙여 장작불을 만들고, 작은 불이 너울로 번져가는 동안 발그레해지는 얼굴, 어느덧 한 사람 두사람 신발의 주인공들이 모여들고 있네요 바람을 막아주고 싶어도 제 몸을 통과할 뿐이라서 저는 그저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요 장작불을 쬐는 내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누가 한숨처럼 내뱉어도 우리가 여기 모인 게 기적이야! 그런 말로 되받을 줄 아는


이런저런 말도 없이 제가 조금 늦었어요, 스르륵 같이하고 싶지만 그럼 너무 놀라서 사람들은 이 집을 뛰쳐나갈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저는 밤새 세 사람의 신발을 지키고, 끝없는 이야기를 기다리고, 바람소리를 먼바다의 파도 소리로 잠재워 세 사람의 잠을 지킬 거예요 이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것뿐이지만.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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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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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가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니. 나의 읽기는 정말 엉망이었구나 싶다. 연애와 사랑은 너무도 흔하고 익숙한 주제지만 고닉의 글로 만나면 특별하다. 사랑이 아닌 나로 살기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하게 이어진다. 책 속 작품을 다 만났더라면 완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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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6
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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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소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위조지폐 이야기로 시작해 도박, 박제, 중국인 모자, 교통사고, 밀수, 출판까지. 끝에 다다랐을 때 이 작가 정말 천재구나 싶었다. 시대를 비트는 풍자와 유머가 놀랍고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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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2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족합니다… 😸

자목련 2026-07-22 12:22   좋아요 1 | URL
낚이길 잘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