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 중이다. 이제는 많다고 할 수 없는 책들을 골라낸다. 요즘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건 시집이다. 욕심껏 사들인 시집,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작가가 읽고 있거나 추천해서 구매한 시집. 그리고 내가 좋아서 계속 좋아하려고 구매한 시집들을 본다. 그리고 발견하고 질문한다. 아, 나는 이 시집도 갖고 있구나, 나는 이 시집을 읽었던가. 허연의 시집 『오십 미터』도 그러했다. 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글을 검색하고 책장을 살피니 정갈한 자세로 있었다. 이 시집이. 그러니까 이 글은 미안하고 미안해서 쓰는 글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에게, 내가 좋아한다고 여긴 허연 시인의 시집에게. 그리고 내 마음에게.


시인의 시를 따라 읽다 보면 과거에 읽었던 시의 분위기와 마주할 때가 있다. 같은 제목이거나, 어디선가 듣거나 읽은 시인에 대한 기억들.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가 그렇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뭐 그래도 상관없다. 모든 글들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 독자로 칭하는 이들에게 건네졌을 때 그것은 독립적인 것이 되기도 하니까.


『오십 미터』가 출간할 당시 나는 수술 후 회복 중이었다. 지난 글을 읽어보니 그랬다. 그래서 나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세」란 시에 끌렸다. 단어, 그 자체에 말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어쩌면 처음 읽게 된 시는 이랬다. 최근에 가장 많이 펼쳐보는 『작약과 공터』에서 만난 「시월이 시」 때문이다. 시인에게 10월은 특별한 달이구나 생각하면서. 어느 시절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11월의 기억이 떠올라 기억은 불편하고 기억이 슬퍼서 서러웠다.


기억은 우리보다 빠르고 허름하다. 기억은 피로 말한다. 행복해도 짐일 뿐인 것. 어짜피 모든 별의 소식은 우리가 사라진 다음 이곳에 도달한다. 캄차카 반도의 반딧불이도, 북해의 일각고래도 기억 속에 있다. 기억은 불편한 짐이다. 석관(石棺)보다 무거운 짐이다. 기억은 피를 흘린다.


가면극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 세 번쯤의 통증이 찾아온다. 세 번의 기억이 그녀를 직면한다. 그녀는 세 번쯤 피를 흘린다. 피 앞에서 자비는 언제나 착각이다. 배우의 실수에서 시를 찾기 위해 그녀는 피를 흘린다. 기억은 피가 된다.


시월에 대해 울고, 시월에 대한 기억을 흘리며, 시월에 대해 시를 쓴다. 시월은 기억이다. 시월은 피다. 구체제 같은 완행열차 소리가 들린다. 왠지 편안하다. 오늘의 구도(構圖)는 피를 흘리고 완행열차와 함께 기억이 됐다.


‘기억’ 그 어감을 피가 말해주지 않는가.

(「word 시월」, 전문)




기억이 소멸하길 바라지만 기억은 언제나 굳건하다. 그래서 기억을 지우려 애쓴다. 댕강 잘려 나가기를 바라지만 불행하게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시구절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주문처럼 그렇게.

망각이여 오라

지층을 읽으려고 했던 날들은

속죄할 테니

망각이여 오라

거대하고 흰 망각이여 오라

전부가 사라져도 좋다

망각이여 달려오라

뒷모습으로만 남아도 좋다

망각이여 오라

(「망각이여」, 일부)


내가 좋아했던 허연의 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계속 좋아한다고 여긴 허연의 시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첫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만난 이런 시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을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전문)


그렇게 서슬 퍼런 유리 조작으로 살기를 바랐던 나쁜 소년은 여전할까. 아니, 독자인 나는 그런 마음을 품었나 보다. 그래서 여전히 조금은 불행하고 하루에 한 끼는 슬픔을 먹는 그런 시인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바람을 모른 채. 그리고 시를 읽으며 인사를 건넨다. 반가우면서도 왠지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이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 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오십 미터」, 전문)

다시 또 책장 앞을 서성인다. 내가 좋아한다고 여겼던 시집을 본다. 정리는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당분간 이곳을 서성이는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것이다. 모르겠다. 그냥 우선은 시인을 따라 해본다. 때가 오면 벚꽃 날리는 그 길에서 너와 이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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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12-28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허연 시인의 시집 <오십 미터> 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덕분에 오랜만에 꺼내서 다시 읽어보았어요.
잔뜩 끄적거려놓은 메모가 많네요.

그레이스 2025-12-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황지우 시 읽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ㅠ
단어가 시인들에게 가면 부서지기도 하고, 피를 철철 흘리기도 하고, 적셔지기도 하는 듯요. 저렇게 꽂아놓으니 넘 예쁘네요.
전 시집을 너무 막대하는듯요
 



누군가 눈이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고 오늘, 내일 눈이 오기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눈 대신 쏟아진 많은 비로 아파트 입구는 미끄럽고 위험하다.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아니다, 기다린 건 친구였고 책이었다. 지난주 친구를 만났고 엊그제는 책이 도착했다. 친구와 책은 다 좋고 반갑다. 길고 긴 수다로 다음 날은 피곤한 하루였지만 즐거운 피곤함이었다. 그리고 즐거움을 예고하는 책이 있다. 그 즐거움을 언제 만끽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은 좋지 아니한가.





많은 책은 아니다. 작은 책탑이다. 세 권의 책 가운데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은 도착한 지 꽤 된 책이다. 앨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고 『의미들』이란 제목에 끌려 구매한 책이다. 앤솔러지 ‘얽힘’의 네 번째 프로젝트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은 예소연 작가가 참여해서 선택했다.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잠자냥의 5별로 궁금해서 땡스투 하고 구매했다.


알라딘 통계를 보니 올해는 정말 책을 많이 사지도 않았고 읽지 않았다. 그러니 리뷰를 쓴 책도 적다. 내년에는 어떤 책을 얼마나 읽게 될까. 목표를 세우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올해보다는 조금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 주구장창 책을 읽던 예전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책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이니 인사를 전해야겠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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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12-2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눈이 왔는데 자목련님 사시는 곳엔 비가 내렸군요 날씨가 춥지 않아서 빙판길이 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자목련님 메리 크리스마스🎅

자목련 2025-12-24 16:02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 곳은 꽤 많은 비가 내렸어요.
망고 님, 해피 크리스마스 🎄

페넬로페 2025-12-2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겨울엔 비가 많아요.
비 내리는 날은 겨울의 색깔을 좀 더 어둡게 하는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책읽기는 좋네요.
집중이 잘 돼요.
자목련님!
메리 크리스마스^^
내년에도 같이 열심히 책 읽자고요.

자목련 2025-12-24 16:06   좋아요 0 | URL
저는 이래저래 집중을 못해서 걱정입니다.
페넬로페 님의 깊고 알찬 책읽기, 응원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잠자냥 2025-12-2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워진다고는 하지만....)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자목련 2025-12-24 16:08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도 냥이들과 포근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해피 크리스마스 🐱 🐱 🎅 🎅

독서괭 2025-12-2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메리 크리스마스!!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저도 궁금하네요~

자목련 2025-12-27 11:25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 덕분에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이곳엔 눈이 와요, 함박눈으로~~
주말 평온하게 보내시고요!
 
에티오피아 구지 G1 우라가 고고구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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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드 오렌지선셋>이 제일 좋아서, 비교하는데 디테일하게 커피의 맛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마실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맛이다. 그리고 알게 됐다. 콜롬비아보다는 에티오피아를 좋아하고 있다는걸. 점점 나만의 커피 취향을 알아가는 것 같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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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12-19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랜드 오렌지선셋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게 하는 100자평이네요.

자목련 2025-12-24 10:5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냥 저한테는 최고의 커피입니다!
 
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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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내게 있다. 붉고 탐스러운 장미를 기대했으니까. 로베르트 발저의 문장을 흠모하지만 해석하고 이해하기엔 나의 능력은 한참 부족했다.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에 반하면서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아직 책장에는 그의 책이 남았으니 나는 더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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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624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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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시를 읽으면서 좋아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했다. 그냥 그랬다. 지나온 계절의 상흔을 더듬는 시간이라 홀로 아파하면서. 다시 맞이할 계절의 풍경은 비슷하거나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 미지의 그것이라는 것이 위로가 된다. 이 시집이 좋아서, 좋아서, 좋다고 계속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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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2-18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를 잘 모르는 저도 허연 의 시는 읽고 싶어요! 한국 가면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허연 의 <오십 미터>를 좋아합니다.

자목련 2025-12-24 10:57   좋아요 0 | URL
<나쁜 소년이 서 있다>로 처음 허연의 만났는데 그 시집을 좋아해요. 다락방 님이 좋아하는 <오십 미터>도 기회 되면 읽어봐야겠습니다.이 시집도 좋습니다!

자목련 2025-12-24 15:5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허연의 신간이 나오면 분명 샀을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페이퍼도 썼더라고요 ㅠ,ㅠ
아,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가득입니다.
다락방 님 덕분에 <오십 미터>를 다시(아니, 처음 읽는 것일수도 ㅎㅎ)읽을 것 같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12-19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년부터는 자목련 님을 본받아 시집 좀 읽어보려구요.
좋은 시집 추천 많이 부탁드립니다.^^

자목련 2025-12-24 10:59   좋아요 1 | URL
시를 잘 모르지만 시는 좋습니다, 시집을 정리하고 있지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