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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5 ㅣ 소설 보다
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평점 :
‘소설 보다 : 2025’ 시리즈 표지에 반해서 구매했다. 봄의 딸기, 여름의 포도, 가을의 무화과까지. 셋 가운데 무화과가 가장 탁월했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이유리의 「두정랜드」는 환상이나 상상을 찾을 수 없는 점이 나는 반가웠다. 이유리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구름 사람들』에서 다루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결이었다. 「두정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구름 사람들』 속 주인공과 겹쳐 보였다. 「두정랜드」 속 ‘나’가 조금 더 활달하다고 해야 할까. 그건 공간과 배경이 가상이 아닌 구체적인 현재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그러나 웬만한 독자라면 이미 알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니라는걸. ‘나'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연두와 놀이 기구를 타러 두정랜드에 온 이들이 서울 사람인지 아닌지를 맞추는 게임을 한다. 매번 실패하는 연두에 비해 나는 항상 정답을 맞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두정이 싫고 서울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두정에서 대학을 다니고 선배 남자친구를 둔 연두와는 다르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학 입학, 휴학, 친구, 모두 거짓이다. 쉬는 날 홍대 주변을 둘러보는 게 전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에게 서울은 홍대이니까.
나에게 ‘두정’은 정착할 곳이 아니고 떠나야 할 곳, 버려야 할 곳이다. 그에 반해 연두는 결혼할 남자친구가 서울에 집을 가지고 있어 진짜 서울에서 살 것이다. 나가 꿈꾸는 미래를 손에 쥐었음에도 연두는 감흥이 없다. 나의 입장에서 연두는 현실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물로 보인다. 가짜를 쫓으며 살아가는 나와 나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연두로 이십 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극단적이지만 요즘 시대를 보면 양극 현상은 당연한 것인지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서울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모든 삶의 표준이 되는 서울, 자연스레 따라오는 차별, 고향을 버리고 새로운 출신지를 꿈꾸는 청춘. 「두정랜드」 속 연두와 화자의 모습을 통해 현재 이십 대의 마음을 본다. 세 번 오르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관악산 정상으로 모여드는 청춘의 모습까지.
「두정랜드」가 이십 대의 이야기라면 정기현의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의 주인공은 십 대다. 주인공 ‘승주’는 전교 1등으로 반 회장 장범규와 사귀는 사이지만 학교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는 영악함을 보인다. 승주의 일상은 정확한 계획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계획, 모든 것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장범규와의 데이트도 그랬다. 똑같은 행위, 똑같은 배달 음식, 그러다 남은 음식을 창문 밖으로 투하하는 장난. 쓰레기를 던지고 몸을 숨기면 완벽했다. 불량 청소년 ‘버들치’ 무리가 승주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예측을 벗어났으니 대책이 없다. 그러나 쓰레기가 날아온 장소가 장범규의 집이었다는 사실로 승주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장범규와 결별하고 ‘버들치’ 무리와 어울린다. 승주는 전교 1등 모범생과 일탈,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이뤄질 거라 확신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승주는 늘 결백했다. 무엇에서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속이지 않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요행은 금물. 바라지도 않는 편이 좋다. 오직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승부가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승주는 나를 속이는 길과 속이지 않는 길, 그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명제를 되새겼다. (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122~123쪽)

겪어왔던 바와는 영 딴판인 세계가 자신을 덮쳐 올 때, 또 다른 무기를 갖추지 못했거나 무기를 제때 뽑아 들지 못한 사람은 원래 머물던 세계의 기반마저 한 순간에 위태로워지지 마련이었지만 승주는 달랐다. (136쪽)
맹랑하고 자신만만하며 잔망스러운 승주의 태도는 창의력 수학 시험 문제지 앞에서 정점에 이른다. 문제에 나온 유원지를 버들치 무리와의 거닐었던 공간을 대입하며 자신만만하게 풀어낸다. 요구했던 답은 최소였지만 승주는 최대를 구했다. 버들치 무리와 보내는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니까. 그러니 시험을 풀며 승주는 내내 행복했을 것이다. 외고 입시의 결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단 한 명의 어른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 어떤 결과로 승주 앞에 나타날지, 완벽하다고 여긴 계획의 실수와 오차를 승주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승주가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하다. 정기현 작가가 어른이 된 승주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
이유리, 정기현의 소설이 경험, 욕망, 방황으로 읽을 수 있었다면 서장원의 「히데오」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화자인 ‘수진’과 ‘히데오’는 대학교 연극원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선후배 사이다. 극작을 전공하며 학보사 기사인 수진은 히데오를 인터뷰한다. 조금씩 친해지자 히데오는 수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이혼하고 한국에 온 사실. 자신의 첫 번째 이름이 히데오라는 것. 수진은 그것이 히데오의 비밀이라 여겼고 둘 사이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자주 만난 산책을 하고 시간을 보냈기도 했으니까. 그 뒤로 수진이 쓴 연극 「따위 게임」에 히데오가 발탁된다. 그 연극을 계기로 히데오는 자신의 출신, 성장과정,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지며 졸업 후 배우로 성공하고 수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가 알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둘은 재회하지만 수진이 만난 히데오는 과거의 히데오가 아니었다. 그들이 나눴던 비밀은 사라졌다. 어쩌면 수진만 비밀이라 여겼을지도 모를 비밀. 때문에 수진은 그런 히데오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겼고 그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밀은 시간이 지나면 비밀이 아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연애 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나처럼 관계에 주목할 수도 있고 히데오의 성장소설로도 가능하다.
『소설 보다 : 가을 2025』에서 만난 서장원, 이유리, 정기현의 소설은 나름 재밌었고 신선했다. 각자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