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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평점 :
모든 글은 하나로 연결된다. 발터 벤야민의 『고독의 이야기들』를 읽고 처음 든 생각이다.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의 다른 글을 읽은 기억이 없다.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지 않았으니 읽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첫 느낌이 가장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마흔두 편의 짧은 글은 벤야민의 가장 근본적이고 내면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책은 꿈과 몽상, 여행과 이동, 놀이와 교육론으로 3부로 나눠져있다. 『고독의 이야기들』의 표지부터 본문에서 만나는 벤야민이 사랑한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은 글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많은 이야기가 몽환적인 분위기로 이어진다.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벤야민의 내면을 채운 모든 걸 꺼내어 풀어놓은 것 같다. 상상 속 미지의 공간으로 걸어가는 기분, 조울증에 걸려 불안과 동행하는 삶의 이미지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꿈속에서 깨어나 꿈을 기억하려 안간힘을 쓰며 무언가 쓰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벤야민 자신일 수도 있고 그가 마주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자 독신남이 등장하는 「두 번째 자아」에서는 그 남자를 따라 독자도 낯선 가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묘한 상대를 만나는데 그가 바로 이야기 제목인 두 번째 자아인 것이다. 두 번째 자아는 독신남에게(그러니까 첫 번째 자아)를 비난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새해를 맞이 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후회하는 우리네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때 저 길로 가고 싶었는데
그때 저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때 저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는데
(…)
그때 저 책을 읽고 싶었는데
그때 저 기회를 잡고 싶었는데 (「두 번째 자아」, 43~44쪽)

신기하게도 문예학자이자 비평가인 벤야민도 방황과 갈등, 고민을 반복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게 큰 위로로 다가온다. 그가 자란 곳에 있었다는 꿈 이야기로 시작하는 「또 한 번」과 익숙한 공간을 묘사하는 「달」은 무의식의 흐름이 어디로 그를 존재와 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짐작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SF 영화의 한 장처럼 한순간 해체되는 존재의 무기력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이런 문장을 오래 읽었다.
하늘에 떠 있던 보름달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지구를 산산조각 냈다. 거리에서 올려다보이는 철제 발코니에 앉아 있던 우리 앞에서 발코니 난간이 산산이 부서졌고, 우리의 몸도 순식간에 잘게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들이닥친 달은 깔때기가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 무엇도 원래 모습대로 빠져나가기를 바랄 수 없었다. “지금은 고통이 있으니 신은 없다”라고 선언하는 나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 89쪽)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그것은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벤야민의 글쓰기와 같은 맥락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 그것은 여행이며 삶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런 것처럼. 여행을 통해 경계를 넘어가고 다른 이를 만나는 것. 그러 면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선인장 울타리」에 등장하는 ‘오브라이언’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별난 사람이다. 화자인 나와 함께 그물을 걷기 위해 바다에 나와 그물의 매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감동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야 할 인생의 답 같다고 할까.
“이 매듭을 단 번에 짓는 사람은 꽤 잘 살아온 사람이고, 자신을 좀 쉬게 해줘도 괜찮아요. 은퇴하다,라는 말뜻 그대로요. 매듭 집기는 요가 기술 같은 거라서요, 어쩌면 세상 모든 이완 방법을 통틀러 이렇게 효과가 뛰어난 방법도 없을걸요. 배우는 방법은 연습 또 연습뿐입니다. 연습은 배를 탓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집에 있을 때도 합니다. 완벽한 평정 상태에서도 하고 기울어도 하고 비가 와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근심 걱정이 있을 해 하지요. 이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아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201쪽)
‘오브라이언’이 벤야민일 수도 있고 화자가 벤야민 일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벤야민을 모르고 그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책이 특별한 책이라는 걸 안다. 어렵고 잘 모르겠고 읽는 시늉만 했지만 말이다.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이야기,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만난 것이니까. 그건 비밀을 알려주는 것과 같고 친구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하여 벤야민의 『고독의 이야기들』은 모두를 친구로 만들고 혼자가 아닌 함께 여행을 떠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