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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아였다 - 알코올 중독자 딸의 상처와 극복의 기록
허선화 지음 / 책과나무 / 2024년 12월
평점 :
산다는 건 같지만 모두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삶을 이루는 환경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이유로 친구가 되고 그런 거리를 두기도 한다. 아픔이나 상처에 공감하며 이해하거나 처음부터 그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심리 때문이다.
허선화의 에세이 『나는 코아였다』에 대해서도 누군가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코아(알코올중독자의 자녀 COA: Children of the Alcoholics)란 단어를 몰라서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코아를 아는 이는 그래서 이 책이 불편하고 읽기 힘들 수도 있다.
지금은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도박, 마약 같은 범죄의 범주가 아니더라도 중독은 그 자체로 병이라고 인식한다. 정신의학과의 진료를 받아 상담이나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70~80년대는 아니었다. 중독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남편이 술만 마시면 술 때문에 폭력적이 된다고 여겼다. 술만 아니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했다.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하지만 십 대의 저자에게 그렇게 말해준 이는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날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저자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꽤 안정적인 직업이지만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예상 가능한 결과다. 가정을 지키는 중심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위해 장녀였던 저자는 열심히 공부했다. 두 남동생을 챙기고 어머니를 도왔다. K- 장녀의 굴레였다.
물론 저자의 아버지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오면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또 술에 빠져들었다. 기댈 수 있는 어머니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안타깝게 저자가 열네 살에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이후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림을 돌봐준 사촌 언니와 친척이 있었지만 임시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저자는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할 수 없었다. 홍익대학교 4년 장학생이라는 선생님의 추천을 거부하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 사람들의 기대, 그것에 철저히 맞춰졌던 나의 야망.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며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주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45쪽)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온 저자의 이력을 보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저자의 내면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아버지, 사회적으로 실패한 아버지를 남동생에게 맡기고 유학을 선택했을 때 지금껏 아버지를 돌본 시간에 대한 보상 같은 것.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더 큰 고통이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삶은 더 피폐해졌다.
코아는 외로움에 극도로 취약하다. 때로는 나처럼 다른 사람의 의존 대상이 되어 외로움을 극복하기도 한다. 남을 돌봄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성향을 ‘동반 의존’이라고 한다. 코아는 나약하지 않고 강해 보여서 타인에게 의지 대상이 되지만, 실상 내면에는 충족되지 않은 의존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동반 의존은 코아가 해결해야 할 부정적인 관계 패턴이다. 건강한 상호 의존을 가로막지 때문이다. 코아가 그런 자신의 관계 패턴을 인식하고 노력하면 동반 의존을 줄여나갈 수 있다. 나 역시 지금까지도 노력 중이다. (216~217쪽)
코아인 저자의 이 에세이는 자신의 지난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기록이자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 일련의 과정이다. 강한 책임감도 일종의 코아의 특징이라는 사실. 생의 마지막까지 병원에 입원하며 보낸 아버지, 아버지가 왜 술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중독의 위험성에 무지했던 시절, 누구도 알코올 중독 부모를 둔 자녀의 감정을 돌보지 못했다. 코아였던 저자는 스스로 결정하고 성장해야만 했다.
집사님의 말은 아주 짧았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잘 살아왔어.”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눈에서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러움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이해받은 데서 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내가 원했던 것이.’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통찰이 섬광처럼 뇌를 0.1만에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 그거였구나. 내가 아팠던 이유가.’ 집사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잘 살아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풀린 것 같았다. 비밀의 문을 굳게 채워놓았던 자물쇠가 열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드러났다. (286쪽)
저자는 신을 의지하고 기도를 하고 공부하면서 회복되기를 바랐고 조금씩 회복되었다. 십 대였던 저자에게 누군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죄책감은 가질 필요 없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같은 코아에게 그러 말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전한 치유는 아니지만 치유는 계속될 거라는 믿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