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 잊히지 않는 일들을 쓴다. 기억을 더듬는다. 어떤 기억은 바로 몇 분 전의 일처럼 선명하다. 상처로 남았을 때 그렇다.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는 순간, 그런 기억은 여러 차례 글감이 된다. 세세한 기록으로 은유와 상징으로 재탄생된다. 시의적절 시리즈로 만난 박상수의 『생활력』에서 내가 발견한 건 그런 것이다. 상처, 기억, 회복, 위로 같은 것들.

여타의 시의적절 시리즈와 다르게 이번 박상수의 『생활력』은 시와 산문이 교차로 수록된 게 아닌 전체가 다 산문이다. 들어가는 시, 나가는 시를 제외하고 7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31편의 산문으로 이어진다. 선명하지 않은 조각의 꿈같은 기억으로 남은 들어가는 시는 작가의 유년 시절이고 대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아이를 맞는 풍경의 나오는 시는 작가의 아이의 모습이다. 두 편의 시 사이에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더 반갑고 어떤 이는 많이 아쉬울 수도 있다.

휴가, 바다, 장마, 뜨겁고 청량한 7월를 찾는다면 이 책엔 없다.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이 있듯이. 그럼 무엇이 있는가. 시인 박상수가 있다. 그의 생활력이 있다. 그가 품어온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이 기회가 아니면 들려주지 않았을 이야기, 물론 시를 향한 마음은 가득하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돌봄이 필요한 아이는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진다.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설명한 듯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산골에서 신나게 뛰어놀았지만 밤에는 달랐다. 칡 흙 같은 어두운 밤,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은 게 아니라 무서움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을 초입의 당산나무에 올라가 부모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싹을 튼 불안은 명절에 큰집에 갔을 때에도 이어진다. 혹시라도 부모가 자신을 놓고 갈까 잠들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잠들었고 잠에서 깨었을 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 큰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가는 그 길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은 불안과 불행으로 단단해졌을 게 분명하다.

그 시절 많은 아버지가 그랬듯 돈을 벌기 위해 시인의 아버지도 리비아로 떠나기로 돼 있었지만 출국 전 날 발작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는 그 밤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지만 끝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아는 때가 온다고 해도 자신의 일부가 된 기억을 분리할 수 없는 것. 어쩌면 그런 기억과 상처가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혹은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문학도 고통과 상처가 전부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랑하고 유쾌한 애인을 만나 마음껏 웃어도 되고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단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시 시도해 볼 마음도 없었다. 실패는 이미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사람에게만 가야 할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렇게도 원하는 사랑을 피했던 것이다. (101~102쪽)

등단을 하고 첫 시집을 냈지만 시만 쓰는 삶은 가능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 시간 강사, 대필, 사교육 알바를 해야 했다. 그런 시절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달아날까 두려웠을 것 같다. 그러니 처음 시를 배우던 시절, 시가 좋아서 시를 잘 쓰고 싶지만 생각처럼 안 돼서 힘들었던 시간이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됐을지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아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148쪽)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문장이 좋아서 소리 내어 읽기를 반복했다. 그게 무슨 마음이든 아직 거기 있다는 걸 잊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거기 있다는 걸 아는 건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종종 놓친다. 늘 거기 있어 그것의 소중함을 말이다. 생활을 위해 일하느라 크리스마스이브인 것도 모르던 작가처럼.


다만 여기, 우리가 밤과 낮을 같이 살며,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도 생활을 잃지 않고, 생활을 속이지 않고, 생활을 나누며 살아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다면. (「나가는 시」, 260쪽)


어떤 기억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을 안을 새로운 풍경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조각이 아닌 우리의 그것으로 만든 풍경들. 그리하여 먼 훗날 꺼내어 볼 때 괜찮은 슬픔이 되고 다행인 기억이 된다. 결국 시인이 쓰고 싶은 시는 그런 생활이다. 그의 시집 『메신저 백』의 이런 시처럼.


흘린 듯 귀기울이다보면 우린 한데 묶여 있다는 걸 알게되죠 오래전부터 우린 고통의 목격자, 서로가 겪었던 바닥을 알고 있어요 햇빛에 반짝이는 강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갔던 우리, 제발 뒤를 돌아보라고, 더이상 가지 말라고 외쳐도 구부정하게 가버리던 작은 등을 가진 우리, 무너지는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해온 것일까요 우린 이 행성의 소박한 여행자이지만 이렇게 묶인 서로가 있어서 다시 집밖으로 걸어나갈 수도 있는 거겠죠, 보세요, 작은 보라색 단화의 주인공이 나타났어요 담요를 두르고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들고 아궁이로 다가가네요 토치에 불을 붙여 장작불을 만들고, 작은 불이 너울로 번져가는 동안 발그레해지는 얼굴, 어느덧 한 사람 두사람 신발의 주인공들이 모여들고 있네요 바람을 막아주고 싶어도 제 몸을 통과할 뿐이라서 저는 그저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요 장작불을 쬐는 내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누가 한숨처럼 내뱉어도 우리가 여기 모인 게 기적이야! 그런 말로 되받을 줄 아는


이런저런 말도 없이 제가 조금 늦었어요, 스르륵 같이하고 싶지만 그럼 너무 놀라서 사람들은 이 집을 뛰쳐나갈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저는 밤새 세 사람의 신발을 지키고, 끝없는 이야기를 기다리고, 바람소리를 먼바다의 파도 소리로 잠재워 세 사람의 잠을 지킬 거예요 이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것뿐이지만.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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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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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가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니. 나의 읽기는 정말 엉망이었구나 싶다. 연애와 사랑은 너무도 흔하고 익숙한 주제지만 고닉의 글로 만나면 특별하다. 사랑이 아닌 나로 살기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하게 이어진다. 책 속 작품을 다 만났더라면 완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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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6
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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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소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위조지폐 이야기로 시작해 도박, 박제, 중국인 모자, 교통사고, 밀수, 출판까지. 끝에 다다랐을 때 이 작가 정말 천재구나 싶었다. 시대를 비트는 풍자와 유머가 놀랍고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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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2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족합니다… 😸
 


필요한 건 커피였다. 커피 할인 쿠폰이 있었고 마침 커피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커피만 사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커피와 책은 세트가 된다. 여름에 카페인 섭취를 줄이라고 권고하지만 쉽지 않다. 물처럼 자꾸만 마시고 싶다. 커피 때문에 예정 도착 예정일은 내일이었다. 그런데 연휴 시작인 오늘 도착했다. 덕분에 내일 아침은 새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다.


커피와 함께 산 책은 『바라모』였고, 야금야금 그전에 산 두 권의 책은 『연애 시대의 종말』, 『세부 속으로』다. 세 권의 공통점은 내가 사고 싶었던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고 싶지 않았던 책이라는 건 잘 모르는 작가란 말이기도 했고 더 이상 읽게 될까 하는 작가의 책이라는 말이다.




이웃 알라디너가 먼저 읽은 글에 반했고 직접 반하고 싶었다. 『바라모』와 『연애 시대의 종말』의 땡스투는 리뷰로 나를 낚아주신 분에게, 『세부 속으로』는 멋진 리뷰를 쓰신 분에게, 커피는 힘들고 지치는 한여름을 커피 한 잔으로 견뎌보자는 분에게.


량이 많은 책이 아니라서 부담이 적기도 했다. 그렇다고 당장 달려들어 읽을지는 모르겠다. 날은 너무 덥고 작은 활자보다는 커다란 화면에 눈이 간다. 연휴의 첫 날인 오늘은 TV 화면 속으로 나머지 이틀을 기대한다.

가볍고 부담 없는 책들이다. 물론 읽기 전이라서 그렇다.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떠난다면 이런 책들을 데리고 가면 좋겠다. 막상 그곳이 책들에겐 휴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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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7-17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도 잘 낚이시네요ㅋㅋㅋㅋ오늘도 알라딘 낚시대마왕은 흡족하게 웃고 계시겠죠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6-07-21 09:07   좋아요 1 | URL
특정 알라디너에게 종종 낚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6-07-17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대 시대의 종말>에 빵 터졌습니다. 🤣

건수하 2026-07-18 10:08   좋아요 1 | URL
저도 이 댓글 쓰려다가…. ;)

자목련 2026-07-21 09:08   좋아요 1 | URL
음, 저는 분명 <연애>라고 썼는데
수정하지 말까 하다 수정했습니다!

페넬로페 2026-07-1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갔다가 너무 지쳐 집에 오자마자 진하게 커피 한 잔 마셨어요.
힘들고 지칠땐 커피 한잔으로☕️🥤🥤

자목련 2026-07-21 09:08   좋아요 0 | URL
정말 요즘 너무 힘듭니다. 습하고 덥고 ㅠ.ㅠ

책읽는나무 2026-07-1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연애 시대의 종말>책 선물 받아서 가지고 있어 흐뭇합니다.^^
그나저나 자목련 님도 낚이시다니..ㅋㅋㅋ
여름은 낚시의 계절인가봐요.^^

자목련 2026-07-21 09:09   좋아요 1 | URL
여름 한정이여야 할 텐데, 자주 낚입니다 ㅋㅋ

서니데이 2026-07-1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줄이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자목련님, 맛있는 커피 드시고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자목련 2026-07-21 09:09   좋아요 0 | URL
시원한 바람이 곁에 머무는 화요일이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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