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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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로 만난 다와다 요코의 글은 여행자의 느낌이었다. 목적지를 정했지만 도착해서 바로 떠날 것을 준비하거나 계획에 없던 장소에 머물러 탐색하는 삶. 낯선 것을 동경하고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에 매혹되어 그것에 빠져드는 이야기. 14년 만에 복간된 『영혼 없는 작가』는 에세이지만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다.


다와다 요코는 공간을 이동하면서 경험하고 감각하는 모든 것들을 들려준다. 여행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언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며 정체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익숙한 것들에서 떨어져 새로운 곳에서 언어를 배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학창 시절 영어와 제2외국어를 배웠지만 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할 줄 모른다. 독일어에 남성 명사, 여성 명사가 있는 줄 몰랐다. 다와다 요코가 독일어의 남성 명사를 실제 남자로 느끼려고 애를 썼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문방구에서 마음에 든 게 연필이나 타자기가 아닌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라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니, 알 것 같다기보다 물건을 대하는 그만의 시선에 놀랐다. 나는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수 없는 생각. 이 책 전체가 그런 사유로 가득하다.


연필이나 타자기와 달리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는 글자를 하나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물건을 특별히 좋아하는데, 서로 붙어 있는 종이들을 분리해내는 것이 거의 마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8쪽)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나는 내 감정에 가장 맞는 말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한 적이 없다. 일상적인 언어로, 상황과 상대에 따라 떠오르는 대로 대화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대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에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자는 달랐다. 물론 나의 경우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와다 요코가 추구한 건 획일적이고 틀에 갇힌 것이 아닌 다양성과 확장적인 언어였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83쪽)


모든 글에서 전해지는 그의 사유는 대단하다.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들을 어머니로 비유해 들려주는데 영혼과 외로움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영혼 없는 작가』란 제목과 부합하는 글이 아닐까 싶다.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어머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많은 단어들을 낳지만 혼자 죽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어도 단어들은 슬퍼하지조차 않는다. 영혼은 언어 없이 완전히 홀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외로움은 영혼의 어머니다. 어떤 사람이 외롭다고 느끼면 바로 혼자서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때 그는 언제나 자기 말을 들어주는 어떤 인물을 상상한다. 이 인물을 영혼이라 부르는 것 같다. 어머니는 외로움의 영혼이다. (166~167쪽)


그리고 중요한 건 경계나 선을 긋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정의였는지도 모른다. 음악이란 처음부터 비인간적인 무엇이었다는 그에게 애당초 음악은 특별한 무엇이 될 수 없었다. 일본에 살 때도 바흐의 음악이 외국 음악이라는 생각도 없었기에 함부르크에서 바흐 음악회가 끝난 뒤 독일 여성이 “우”리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충격이었다는 말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수긍할 수 있었다. 독일 여성은 다와다 요코와 다르다는 전제하에 질문을 한 것이다. 정작 다와다 요코는 “우리”에 속할 생각도 없었고 속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언어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확고하게 전해지는 문장처럼 말이다.


배우지 않은 언어는 투명한 벽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멀리까지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도 방해를 하지 않으니까. 모든 단어는 무한히 열려 있고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216쪽)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시작한 에세이는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서 끝을 맺는다. 책 한 권을 따라 여행하는 기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본어, 독일어, 영어, 중국어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 같다. 인상적이고 독특한 글도 많았다.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관찰한 이야기, 사전이 낳은 마을이라는 기발한 상상의 이야기, 열세 살 소녀였을 때 갖고 있던 프랑스 여자 영화배우의 책에 대한 이야기.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매혹적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들었다고 할까. 잘 들으려고 집중하게 된다.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다와다 요코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말이다. 그는 분명히 낯선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이며 언어의 여행자다. 우리로 묶인 삶이 아닌 떠돌더라도 자유로운 삶. 너머의 너머를 향하는 그의 여정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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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시인선 224
유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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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큰일이 아니라고 여기며 산다.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벼운 건지도 모른다. 무겁고 진지함을 피하고 싶은 도망가기 위한 준비 태세라고 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는 건 내 맘대로 안 되는 일 투성이니까. 지금 가장 가까이 직면한 일만 봐도 그렇다. 도어록이 자꾸 말썽이다. 문을 열 때마다 애를 먹인다. 건전지가 문젠가 싶어 교체했는데 아니었다. 가장 간단한 건 도어록을 교체하는 일일 것이다. 알지만 귀찮아서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온 신경을 다 쓰면서 죽고 사는 일 아니면 괜찮다고 내뱉고 있으니. 나란 인간은 참...


미루고 싶은 일처럼, 미루고 싶은 감정이 있다. 미루고 싶은 슬픔, 미루고 싶은 마음, 나중에 알면 괜찮아질 것 같은 일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란 서정적인 제목의 시집에서 만난 시도 그러했다. 슬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다스리고 다독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 마음이 훤히 보여서 안쓰럽다. 원래 그런 마음은 감출 수 없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울고 싶은 면 울고 싶은 대로 그렇게 놔둬도 좋다고.



슬픔이 바나보다 빨리 익는다

두면 먹겠다 싶었는데 한 개는 끝내 검게 변했다

생긴 건 저래도 맛은 있단 걸 잘 알지만

보기 좋은 슬픔이 울기도 좋은 걸 누가 모르나

손도 대기 싫어지고

한 겹 까기 전에 으깨진다

이거 갈아 먹으면 맛있어

믹서에 집어넣고 꿀을 한 바퀴 돌린다

같은 거라도 다르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다르게 만드는 재주로 슬픔도 요리할 수 있겠니

컵에는 삼키니 힘들 게

걸쭉해진 것이 담기고

먹는 건 나의 일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만

잘 먹고 그다음 잘 살고가 여태 어렵다

갈고 으깨고 때론 무언가 한 바퀴 돌려 뿌리면

못 살고 못 먹을 슬픔도 없지 않을까

상하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사람은 그런 거라고 말하는 너의 얼굴에

톡, 톡 검버섯 많아지는 걸 보니

당신이 두고 잊은 세월을 내가 반만 나눠 익고 싶었다

(「슬픔이 익을 동안 나워 잊을까요」, 전문)


슬픔이 익으면 슬픔이 아닌 게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슬픔을 둘러싼 뽀족한 가시들이 조금 뭉툭해질 것이다. 슬픔의 원형은 그대로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 그걸 매만지는 손길이 달라진다. 시인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시를 쓰는 것이리라. 소중한 사람의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소중한 사람의 슬픔이 잦아들기를 바라서.



웃음처럼 울음처럼 졸음처럼

숨길 수 없는 현상이야 그러니 아파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

그러니 재채기처럼 애쓰지 않아도 될지 몰라

화를 내보는 것도 좋겠어

술래가 된 듯이

바통을 넘겨받은 것뿐이야

이제 이건 너의 것이란다

나를 대신해 살아주렴 살아서 사는 걸 대신하렴

생일은 축하받는데

기일은 왜 그러지 못할까

축하받는 탄생만 있는 건 아니지

그래 축하받는 죽음도 있긴 하잖아

그 사람은 끝까지 그 사람은 끝내

그랬지 그랬다

병은 앓으면 그만이고

슬픔은 울면 그만인데

죽음은 왜 지속되기만 하는 걸까

돌아갈 집이라도 있는 듯

과자를 울음처럼 뚝, 뚝 떨구는 중이었다

부츠 컷 바지가 다시 유행이래

그저 웃다가, 아득해지다가

아픔은 다른 아픔으로 잊히는 거래도

피할 때까지 피해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한 명은 피했으니까

(「행복의 유행」, 전문)

그러니 이 시집은 상실을 대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일,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상이며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시인 스스로의 고백이자 같이 살아가지는 다짐 같은 것처럼 읽혔다. 어떤 일은 나에게만 닥치는 불행과 불운처럼 여겨져 화를 내고 분노하고 울분을 토해내지만 실상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는 건 버티는 일이고 사는 건 쌓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일이라는걸.





밀어도 열렸다

하지 말란 건 꼭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 말란 말이 끝나기 전에 해버린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을 여는 건

밀고 당기는 힘만으로 역부족이다

사람은 막는 것이었다

여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잠가두었다

그때 부탁이 있다 했다

잊지 말라고 했다

강력한 태풍이 북상중

창문마다 신문지를 붙이다

네가 아닌 너의 이름을 본다

더 버티기로 한다

(「당기시오」, 전문)

한가득 슬픔을 껴안고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 누구의 슬픔이 더 크고 위대한지 중요하지 않아. 그건 알 수도 없는 일이니까. 슬픈 채로 살아가는 일상, 온갖 감정을 쌓아두고 살아가는 일상, 언젠가 폭발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일상이기도 하다. 그 모든 감정이 출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비밀인데요

친구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이를 닦다 울었습니다

이를 닦을 힘이 남은 게 부끄러워서요

아직 누굴 사랑할 용기가 남았단 거니까요

내 숨이 조금은 더럽지 않았으면

하는 다짐처럼

웃기는 일이에요

웃진 않고 있지만요

죽음 같은 걸 생각하다

내 몸을 치울 걱정을 합니다

이런 걱정을 하지 않게 할

어떤 걱정을 힘껏 떨치면서

거품을 뱉습니다

그제야 알아요

거울을 보지 않았군요

헹구지 않은 슬픔이 쌓이고

안 치운 플라스틱도 가득해요

오늘은 수요일

내일은 종이를 내놓는 날이에요

치우기 어려운 건 미루기로 해요

언제가 좋을까요

언제 다 내놓을까요

(「수거」, 전문)



때가 되면 차분해진다. 때가 되면 모든 걸 말할 수 있고 때가 되면 모든 게 제 자리를 찾는다. 다만 그때를 기다리는 게 고통이다. 영영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 조바심이 나서, 몸부림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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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8-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괜찮다는 말 그 속에 담긴 뜻이 결코 가볍지 않고, 또 그렇게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잖아요. 자목련 님의 안쓰러움을 담은 진심이 글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더욱 와닿네요.

거리의화가 2025-08-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쌓아둔 일거리, 쌓아둔 감정... 이 글귀에 오늘은 콕 박힙니다.
저는 평소 감정을 꾹꾹 눌러놨다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러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감정의 문을 닫아버리거든요. 이런 걸 몇 번 반복해서 고쳐야지 하면서도 참 쉽지는 않습니다.
사는 건 별 게 맞는 것 같아요.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갈 뿐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기를 바라지요. 도어락은 문제는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시인선 224
유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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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 위해 가는 것은 살기 위해 소란을 선택한 거니까‘, ‘ 사는 건 그런 거리서 사는 중엔 잊기로 한다‘ 이런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런 시기를 건너는 중이라면 이 시집이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내는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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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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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할머니는 일본 말을 할 줄 아셨다. 나이가 많으니 전쟁을 겪었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옛날이야기 정도로 여겼다. 제목부터 기이하고 불온한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조예은의 『적산가옥의 유령』 을 읽으면서 소설 한 귀퉁이에 할머니와 비슷한 삶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통과 공포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처럼 말이다.

4대에 걸쳐 이어진 적산가옥의 이야기다. 주인공 현운주의 외증조할머니 박준영의 유산으로 남긴 적산가옥. 일본식 정원이 있고 본채와 별채로 구성된 낡은 집. 일본에서 지내던 운주는 준영의 유언대로 적산가옥에서 1년을 지낸 후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를 할 생각으로 남편 우형민과 함께 돌아왔다. 남편은 일본에서 운주가 힘들 때마다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운주는 집에 도착해 별채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보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운주가 본 건 무엇일까. 정말 적산가옥의 유령일까. 바로 그 별채가 이 소설의 가장 핵심 공간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잠작이 가지 않았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적산가옥을 둘러싼 비밀을 들려준다. 일제 강점기 시대 붉은 담장의 집으로 일본 무역상 가네모토와 그의 아내 하나코와 아들 유타카가 이사를 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준영은 시간이 흐른 뒤 입주 간호사로 그 집에 들어간다. 자신을 추천한 병원장은 자세한 말은 아낀다. 그 집에 도착하자 준영은 자신이 누구를 간호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준영을 맞이한 건 가네모토의 아들 유타카의 기괴한 행적이었다. 악취로 가득한 방, 물고기를 해부한 흔적만으로 정신 병동의 환자를 떠올렸다. 이상한 건 그런 아들을 대하는 가네모토의 태도였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아픈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이나 애처로움은 찾을 수 없었다.

준영은 자신의 일만 하면 그만이라 여겼다. 유타카를 치료하며 받은 월급으로 일본에 있는 오빠와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여동생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유타카가 가네모토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된 후 유타카를 향한 연민을 느낀다. 유타카의 몸에 난 상처는 정신적 이상으로 자해를 한 게 아니라 양부에 의한 것이이며 그때마다 유타카는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별채의 지하에서 그 모든 게 벌어졌다. 유타카의 예지력으로 가네모토는 부를 축적했다. 유타카는 자신의 미래도 볼 수 있었다. 원자폭탄, 일본의 패망, 아버지의 죽음. 그가 기다린 건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일까.


준영이 적산가옥에서 유타카를 돌보았다면 현재의 운주는 꿈에서 유타카와 준영을 보았다. 이상한 건 꿈에서 깨어도 현실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정한 남편은 운주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만 나아지지는 않는다. 별채에서 본 누군가를 확인하면 아무도 없었다. 분명 별채의 바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말이다. 과거 별채에서 행해진 폭력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랬다. 운주의 사망 보험금을 목적으로 결혼한 남편 형민의 계획적인 폭력이었다. 운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유타카의 유령이 나타난 것일까. 그 모든 것을 유타카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적산가옥은 다시 타올라야 한다.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므로.

본채와 별채가, 수도관과 정원과 나무 기둥이 하나의 기관처럼 이어져 유기적으로 숨과 기억을 주고받는다. 그런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먼저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집은 누군가의 삶을 담으며 존재한다. (10쪽)

공간이 지닌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한다. 문득 공간으로 지배하려던 일제의 교묘한 악랄함에 치가 떨린다. 역사적 배경을 잘 곁들인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다. 과하지 않고 적절하게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며 일제 강점기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적산가옥을 통해 숨겨진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공간에 유타카의 유령이 나타나 그들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운주가 자신을 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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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8-26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기묘했지만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귀신도 좋은 귀신이 있구나. 그런 생각도 했구요.

자목련 2025-08-28 10:30   좋아요 1 | URL
이미 만나셨군요.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좋은 귀신이라 하시니 <벽장속의 치요>가 생각나네요. 남은 여름 건강하게 지내시고요! 곧 가을이에요^^

바람돌이 2025-08-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산가옥을 통한 공간의 이야기라니 관심이 가네요.

자목련 2025-08-28 10:31   좋아요 0 | URL
적산가옥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조예은의 묘사가 놀라워요!
 

늦여름이라고 쓰다가 검색을 해보니 늦여름은 주로 음력 6월을 이른다고 한다. 올해는 윤달이 6월이니 음력을 두 번이다. 그럼 늦여름의 늦여름일까. 다시 사는 즐거움에 빠졌다. 책을 샀다. 책을 사는 일은 왜 이리 즐거운가. 이번 구매는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시의적절 시리즈와 위픽 시리즈는 복불복 게임 같다. 시리즈의 모든 책을 다 구매하는 건 아니지만 좋을 것 같아서 산 책은 별로일 때가 있고 그냥 읽어볼까 한 책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 백은선의 『뾰』는 어떨까. 아직 모른다. 표지에 자두가 없었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아, 나 같은 독자를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위픽 시리즈도 마찬가지인데 이번에 예소연의 『소란한 속사임』은 기대가 크다. 예소연의 다른 소설이 좋았기에 확신에 가깝다. 수전 손택의 에세이 『여자에 관하여』는 잘 모르겠다. 수전의 다른 책을 읽다가 완독하지 못한 기억이 있어서다. 먼저 읽은 리뷰가 하나같이 좋아서 구매했다. 시집도 한 권. 정다연의 『여름 대삼각형』이다. 여름이니까 이런 시집은 읽어봐야지!





막바지 더위라고 생각하면 더위를 대하는 게 조금 쉬지 않을까 했던 나의 마음은 어리석었다. 더운 것도 힘들지만 습한 게 너무 힘들다. 잠시 휴식을 취했던 에어컨은 열일 중이다. 그래도 곧 9월이다. 9월은 여름보다는 가을에 가까우니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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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는 좀 잘 읽혔어요. 마지만 인터뷰는 좀 끼다롭긴 했지만요. 북엔드와 책들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자목련 2025-08-21 09:42   좋아요 1 | URL
잘 읽힌다고 하시니 얼른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