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읽기에 정신이 팔려, 오랫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워드슬럿>을 다시 폈다.

느낌상으로는 많이 읽은 것 같았는데, 이제 겨우 3장이라니? 

3장, "흠......네 말이 맞아." 남성들은 결코 하지 않지만 여성들이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식, 

이 장은 통째로 옮기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통쾌했다. 

장의 제목에 나타나듯, 이 장에서는 남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대화의 차이를 분석한 연구결과를 통해, 여성들의 말하는 방식을 폄하하는 남성사회의 편견을 논박한다.

 


영어 발화 방식 가운데 가장 흔히 오해받는 것은 여성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 즉 남성이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말하는 방식이다. '걸 토크'에 대한 생각은 문화 전반에 걸친 가정, 즉 여성들이 더 감정적이고, 스스로에 대해서 확신이 적으며, 립글로스나 카다시안 일가같이 소위 경박한 주제에 자연적으로 끌리기 마련이라는 가정에 의한 것이다. '걸 토크'는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뇌가 비어 있다고 가정한다. 모든 여성이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는 전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재판 중간에 화장실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도 '걸 토크'로 칠 수 있는 걸까?   - 104쪽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십'이라는 말로 폄하된다. 그러나 가십은 남성들 사이에도 빈번히 일어나며, 이는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요소라는 것. 그 예시로, 도널드 트럼프와 연예 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의 전 호스트 빌리 부시가 2005년 연예인인 낸시 오델의 등 뒤에서 벌였던 대화의 녹음본을 제시한다 ㅋㅋㅋ 이 대화 예시가 실려 있지만 너무 내용이 더러우므로 옮기지 않는다. 이 책 (108, 109쪽)을 보시거나, 인터넷을 찾아보시면 되겠다.  



'라커룸 농담'은 그저 가십의 조금 더 남자처럼 들리는 버전이다. 데버라 캐머런이 말했던 것처럼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친목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110쪽) 여성혐오적인 언사의 목적은 일종의 유대를 만드는 의례인 것이다.(111쪽) 이때 큰 문제는 그들의 언설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여성들을 향한 성적 공격이 교환됨으로써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화된다는 게 문제다.(130쪽) 


위 대화에서 트럼프는 자신을 과시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여자를 꼬시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혐오가 섞인 허위.과장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이는 타자를 배제하고 소외시킴으로써 '우리'끼리의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은밀하고,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을 나누는 관계로서 친목을 다지는 것. 그러나 여성들 사이의 유대는 이런 식으로는 형성될 수 없다고 한다. 여성들은 허구를 바탕으로 유대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여성들이 자주 쓰는 언어의 기술들에 대한 오해를 타파한다.

일단 여성과 남성의 대화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남자 대 남자가 대화하는 구술 기록을 몇백 개 분석하고 나면, 누가 지배적인 화자인지 알게 된다. 상황에 종속된 이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이는 수직적 구조다. 그러나 여성들은 보다 수평적이고 유연한 방식으로 소통한다. 모두가 평등한 플레이어인 셈이다. 남성들이 대화를 개인의 성취를 겨루는 경기장으로 활용하면서 위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반해서, 여성들은 다른 화자의 말을 지지하고 연대를 구축한다. 따라서 여성들은 서로가 한 말을 점진적으로 쌓아 올린다.   - 106쪽 

여성들은 다른 대화 참여자를 대화의 장 안에 올려 주고 흐름이 계속되도록 한다.(119쪽) 여성들의 대화는 차례를 번갈아 맡는 구조, 코츠가 음악에서 잼 세션(jam session, 즉흥 연주)에 비견하는 방식의 구조를 띤다.(119쪽) 

이런 잼 세션 구조는 남성들 사이에서는 거의 보기 어렵다. 사실상 코츠는 남성의 대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위계 구조의 유지를 돕는 특징으로 번갈아 하는 독백을 꼽았다. (...)이는 '전문가 흉내 내기' 혹은 특정 주제에 대한 개인의 지식을 전시하는 방식이다. (...) 이런 이유로 남성들은 여성의 잼 세션 방식의 대화 겹치기를 무례한 침입으로 해석한다.  (119,120쪽) 


여성의 대화를 재즈 연주에 비유한 것이 아주 흥미롭다. 이런 방식의 여성 사이 대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이걸 보면 딱 느낌 오실 것. 




남자들의 대화에서 지배구조를 찾을 수 있다는 말, 남자들은 독백을 번갈아 하고 침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들은 위와 같은 여자들의 끼어들고 겹치기 방식의 대화를 무례한 침입으로 여긴다는 것 너무 공감간다. 한동안 나는 남편과의 대화에 엄청난 불만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찾은 것 같다. '전문가 방식의 독백' 말이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고 재미 없었다. 이게 대화인가, 강의인가? 싶었던 것이다. 같은 주제- 예를 들어 정치나 경제 - 에 관해 이야기 해도 여성동료들과 이야기할 때랑은 느낌이 너무 달랐다. 근데 뭔가 지적하기도 애매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는데, 그러다보니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그렇게 파국으로..응? 아니고, 다행히 ㅋㅋ 한번 펑 터진 후로 훨씬 낫다. 남편이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둘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들의 대화방식이란 걸 한번에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니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어린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훨씬 친밀하고 감정적인 유대가 오고가고 언어 역시 여자아이들 사이와 유사하다는 것. 결국 가부장제 사회가 변화하면 남자들의 언어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여성들이 많이 쓰는 '헤징hedging'이라고 불리는 기술: '있지just, 그치you know, 음well, 그래서so, 내 말은I mean, 그런 거 같아I feel like' 등의 사용이 있다.(112쪽)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자신감이 결여된 인상을 준다고 여기지만, 사실 여성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런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매끄럽고, 개방적이며, 듣는 사람의 관점을 초대하고, 다른 관점이 끼어들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114쪽) 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상대에게 상처가 될까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특별히 그런 의식 없이 그냥 습관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여자들이 통상 대화에서 위 언어들을 많이 쓰는 것에 숨겨진 이유가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제 사흘째 목표치(하루 25~30쪽)를 달성하고 있는 <제2의 성>이다. 처음에는 25쪽 정도야 뭐 쉽지! 했는데 빽빽한 편집으로 인해 쉽지 않다. 일반책 50쪽 읽는 느낌이다;; 

그러나.



어떤 여자도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서는 성性을 무시한 채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할 수 없다. (...)

만일 암컷 기능으로 여자를 정의하는 게 불충분하고 우리가 '영원한 여성'으로 여자를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렇지만 우리가 지상에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잠정적으로라도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는 질문해야 할 것들이 있다. 여자란 무엇인가?  - 27쪽 

우리가 채택한 관점은 실존주의 윤리의 관점이다. 즉, 모든 주체는 계획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초월로 확립한다. 그는 다른 자유들을 향한 영속적인 초월에 의해서만 자신의 자유를 완성시킨다. (...) 초월이 내재 상태로 떨어질 때마다 존재는 '즉자卽自' 상태로 퇴보하고, 자유는 사실성(사물의 상태)으로 타락한다. 만일 이 전락이 주체에 의해 동의된 것이라면 도덕적 과실이고, 주체에게 강요된 것이라면 박탈감과 억압의 형태를 띤다. (...) 여자도 모든 인간처럼 자율적인 자유이면서 남자들이 타자로서 살도록 강요하는 세계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여자의 비극은 자기 자신을 언제나 본질적인 것으로 확립하려는 모든 주체의 기본적인 주장과, 여자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성하려는 상황의 요구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에 있다. 이러한 여성 조건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 42쪽 



이렇게 유려하게 제기되는 질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담은 책에, 어떻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에. 보부아르 천재 맞나보다. 이제 고작 90쪽 정도 읽었지만,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기존의 이론들- 생물(리)학, 정신분석학, 유물사관론 - 이 제시한 여성의 종속에 관한 이론들은 차근차근 까는 논리전개는, 눈부신 지성을 보여준다. 

밑줄 그어둔 부분이 너무 많지만, 특히 <워드 슬럿>과 관련하여 <제2의 성>에서 인용하고 싶은 부분은 아래다. 


두 경우에 주인 계급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사실 상태에서 논거를 끌어낸다. 버나드 쇼의 재담이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요지는 "미국 백인은 흑인을 구두닦이의 지위에 보내놓고 흑인을 구두 닦는 데만 쓸모 있다고 결론짓는다"는 것이다. (...)

'하다'라는 것은 '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드러나는 것처럼 되었다라는 의미다. 그렇다, 오늘날 여성들은 총체적으로 남자들에 비해 열등하다. 즉, 여자들의 상황이 여자들에게 가장 적은 가능성만을 열어 놓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가 영속적이어야만 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37쪽


<워드 슬럿>에는 여성혐오를 담고있는 단어가 과거에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였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어떻게 언어가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여 변화하는가를 많은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 버나드 쇼의 말처럼, 현상을 가지고 이유를 도출하는 방식의 논증은 비합리적이지만, 실상 널리 통용된다.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는 걸 보면 여성들은 업무상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하거나, 출산 후 여성들의 업무능력이 저하되는 걸 보면 여성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에 관한 욕구는 남성보다 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한다거나. 은연중에 많은 편견이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흑인은 게으르다는 명제, 여성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명제 - 실제로 흑인이 백인에 비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렇다고 관찰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현상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과정(역사)에 관한 고찰이 없이 흑인과 여성이 '본래' 그러하다고 존재론적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히 비약이다.  


<제2의 성>을 읽으면서 <가부장제의 창조>가 많이 생각났다. <제2의 성>의 엄청난 영향력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의 창조>도 나중에 재독하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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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2-03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 읽을 때 한달 내 읽느라 거의 매일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ㅋㅋ 참 좋습니다. 제가 여성주의 책을 아직 몇 권 읽지는 못했지만 <제2의 성>과 <가부장제의 창조>가 최고거든요~ 맥락이 이어져서인 것 같습니다. 둘 다 재독하고 싶은 책들이에요.
워드슬럿, 여성간의 대화법 흥미롭습니다^^

잠자냥 2023-02-03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 저도 놀랬어요. 이제 겨우 3장이라니? 느낌상으로는 괭님이 많이 읽은 것 같았는데........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02-03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책 <여성, 인종, 계급> 뒷면 속지에 나온 아르떼 페미니즘 시리즈에 있던데 독서괭님 읽고 계시군요!
<가부장제의 창조> 재독도 꾸려주세요! 저도 좀 따라 읽게요^^


책읽는나무 2023-02-03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3 장!!!! 심오합니다^^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2의 성!!! 완독으로~
파이팅입니다.
눈 운동도 열심히 하시구요!!!^^

바람돌이 2023-02-04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드슬릿도 읽고 싶고, 제2의 성도 읽어야 하고.... ㅎㅎ 저는 어려운 책 2권 한꺼번에 못읽으므로(사실은 거의 무조건 다른 책을 같이 읽는거 잘 못해요. ) 일단 2월의 책 먼저 읽겟습니다. 그동안 이렇게 독서괭님의 글들을 읽으면 저의 든든한 자양분을 마련하겠네요. ^^

은오 2023-02-04 0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여자가 최고다... 이 말 안통하는 무례한 족속들... 이대남들 보면 나 죽기 전까지 내 또래남들은 안 변할 것 같은데, 지금은 또 대화 스킬도 스킬이지만 어릴 때부터 인방 유튜브 게임하면서 여혐에 젖어 있는 어린 남자애들이 얼마나 좋은 방향으로 바뀔지도 모르겠고 조금 답답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워드 슬럿 재밌어보여요!
 

2023년에는 책을 사지 않겠다! 라는 독서괭의 원대한 결심. 그리고 보름... 

원래 있던 아이들 책이라는 예외에다가 예외 하나를 추가하게 되었으니,

이미 가지고 있던 책을 새 판본으로 바꾸어 소장하려는 경우! 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휴머니스트판 <폭풍의 언덕>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민음사판 <제인에어>와 <오만과 편견>도 판본갈이(?)의 대상이 되었고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역시 이왕이면 예쁜 책이 좋다! 

<폭풍의 언덕>은 민음사판으로 이미 재독을 해버렸기에 얌전히 꽂아두었고, 

<제인 에어>는 지금 절반쯤 읽었는데 첫장 비문인지 오타인지 그거 외에는 괜찮게 읽고 있고요 

<오만과 편견>은 다음 타자로 순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산책: 3권

















그리고 산 커피와 굿즈들

드립백 아리차는 그동안 사먹어본 알라딘 드립백 중에 가장 마음에 듭니다.

어린왕자 스탠드 펜꽂이는 생각보다 작고, 색깔도 좀.. 애들 같달까요. 그래서 마침 산 첫째 책상에 두니 딱입니다. 

형광펜은 <제2의 성> 읽기 준비용ㅋ 이제 읽기 시작하여 사용중인데, 제가 산 것은 민트색. 색이 은은하여 마음에 듭니다.












예외: 아이들 책


이번 달에는 전집 대여하기도 하고 얻은 책들도 많아서 산 책은 두권 뿐. 

<집에 있는 부엉이>는 만3세 둘째의 취향을 저격했습니다. 개그코드가 맞아... 

















읽은 책: 8권


어떻게 8권을 읽었네요. 그중 3권은 오디오북이지만. 

<토지>11, 12권. 토지는 이대로 쭉 완독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폭풍의 언덕> 재독- 리뷰를 썼습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 

<위대한 나의 발견*강점혁명>도 리뷰를 썼습니다.. 

<영어로 읽는 세계명작- 제인에어>는 제인에어가 너무 읽고 싶은 나머지 책 오기 전에 미리 영어공부 겸 들은 축약본. 아이들용으로 축약해 놓은 거라 무척 쉽고, 제일 중요한 제인에어의 고민이나 감정 변화 등은 당연히 안 나옵니다. 근데 그래도 재밌음. 역시 샬럿 브론테 천재..? 

<프랑켄슈타인>- 제가 읽은 판본은 리커버 특별판이라 뜨질 않아서, 보니 제일 최근에 나온 게 문예출판사판이라 넣었습니다. 표지가 무지 화려하네요. 핫핑크라니!! 예쁘긴 한데 프랑켄슈타인의 음울함이랑 좀 안 어울린다.. 

<가치 있는 삶> - 리뷰를 썼습니다. 재독하고 싶은 책.

<다락방의 미친 여자> - 이번 달의 큰 수확!! 말 그대로 '큰' 수확! ㅋㅋㅋ 완독해낸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우하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에 읽은 <제2의 성>- 밑줄 투성이! 

그리고 어제 오랜만에 편 <워드 슬럿>이 너무 재미있어서 공유하고 싶은데, 길어져서 이만 마쳐야겠네요.

2월의 독서도 즐겁게 누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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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2-02 14: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보세요들, 요즘 북플 보니까 2023년 12월 같아요......잉 다들 정리ㅋㅋㅋ

단발머리 2023-02-02 14:14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차례에요 ㅋㅋㅋㅋ전 유부만두님이 시작하신걸로 아는데 ㅋㅋㅋㅋ 얼른 글 쓰러 가시지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2-02 14:33   좋아요 1 | URL
원래 월말 정리 많이들 하시지 않았었나요? 잠자냥님도 하시지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3-02-02 14:59   좋아요 3 | URL
월말정산이에요. 늦어지면 하루에 한 권씩 이자 붙어요.

단발머리 2023-02-02 15:0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알라딘 공지로 올리셔야 하는데요 ㅋㅋㅋㅋㅋㅋ 책 많이 읽으셔서 이자 많이 붙으실 분들이여 ㅋㅋㅋ

독서괭 2023-02-03 12:30   좋아요 0 | URL
하루 한권 이자라니 ㅋㅋㅋㅋ 고금리 시대에 딱이군요! ㅋㅋ

단발머리 2023-02-02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들은 몰라도 ㅋㅋㅋㅋ 아, 폭풍의 언덕은 진짜 소장각이네요!! 😍😍😍

독서괭 2023-02-02 14:33   좋아요 1 | URL
아~ 이 책 진짜 실물은 몸체가 파랑이라 더 예뻐요!!😍

단발머리 2023-02-02 14:34   좋아요 1 | URL
이를 어쩌나 ㅋㅋㅋㅋ 저 파랑색 좋아해요!! 🤣🤣🤣

공쟝쟝 2023-02-02 23:32   좋아요 1 | URL
저도 가져야겠어요…

독서괭 2023-02-03 12:31   좋아요 0 | URL
놓치지 않을 거예요!!

잠자냥 2023-02-02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있는 부엉이가 궁금하네요. 둘째의 유머 취향이 왠지 저랑 맞을 거 같아서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2-02 14:34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 책에 나온 여러 편의 이야기 다 좋아하지만 둘째가 제일 좋아하는 게 하나 있고요,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제목이 무려 “눈물차”…

레삭매냐 2023-02-02 14: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렬한 표지 갈이의 유혹이란
증맬루.

계속해서 좋아 보이는 책들이
나오니, 읽은 책임에도 손구
락이 근질거림을 참을 수가
없다는.

집에 있는 붱이, 도쇼깡
에 가면 한 번 빌려다
봐야지 싶습니다.

독서괭 2023-02-03 12:32   좋아요 0 | URL
표지갈이의 유혹 ㅋㅋ 정말 그렇습니다.
아주 예쁜 옷 갈아입고, 심지어 번역까지 더 좋다면?
어차피 소장할 건데, 이왕이면 더 좋은 걸로? 하는 생각이^^
집에 있는 부엉이에 의외로 관심들을 가지시네요 ㅎㅎ 빌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2-02 1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 표지는 진짜 내용과 뭔가 동떨어진 느낌의 화려함인데요?ㅎㅎㅎ
무엇보다 <다미여>를 읽어내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려주실 <제2의 성> 관련한 이야기가 기다려져요^^ 2월 독서도 즐겁게 하시길!

독서괭 2023-02-03 12:32   좋아요 1 | URL
그쵸..? 프랑켄슈타인, 그냥 읽어도 음울하지만 다미여 해설 읽으니 더 그렇던데 ㅋㅋ
다미여 완독 축하 감사드립니다 화가님^^
제2의 성 꼭 꾸준히 읽고 정리도 해보겠습니다. 화가님의 2월 즐독도 응원해요^^

페넬로페 2023-02-02 1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해도 계속 책소비 자제해야 해요.
사 놓은 책을 거의 읽지 못했어요~~
아리차 커피가 어떤 맛일지 궁금한데요
가치 있는 삶도 읽고 싶네요^^

독서괭 2023-02-03 12:33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저도요 ㅠㅠ 자제자제자제!
못 읽은 책들 모아둔 책장(앞뒤로 꽉꽉 채운)을 바라보며 오늘도 참아봅니다..
저는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취향이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가치 있는 삶도 읽어보세요. 추천입니다^^

새파랑 2023-02-02 23: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외가 너무 많습니다~!!
기왕 이런게 된거 책구매는 월 10권으로 올리시지요 ^^

독서괭 2023-02-03 12:34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예외 딱 3개밖에 안 된다구요~ ㅋㅋㅋㅋ
책 영업사원 같은 새파랑님 댓글, 오늘도 흔들리지 않는 독서괭! ㅋㅋ (사실 흔들리는 중..)

바람돌이 2023-02-03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휴머니스트판 폭풍의 언덕은 저도 있지롱요. ㅎㅎ 어린왕자 스텐드 펜꽂이 저는 완전 좋던데 딱 하나 색깔이 좀 쨍한 원색이었으면 좋겠다는요. 색깔이 너무 임팩트가 없어요. ㅎㅎ
어쩐지 앞으로 계속 예외가 생길거 같은 느낌은 저만 받는걸까요? ㅎㅎ

독서괭 2023-02-03 12:35   좋아요 0 | URL
흐흐 가지고 계신 바람돌이님. 진짜 책 예쁘지 않나요?(흐뭇)
어린왕자 펜꽂이 저는 조금 더 큰 걸 기대했나봐요. 색깔이 좀 애매하죠? 다행히 첫째가 맘에 들어해서 ㅋㅋ
바람돌이님만의 느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러다 매달 예외 하나씩 추가하는 거 아닌지.. -ㅁ-;;;

은오 2023-02-03 0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가된 예외가 너무 어이없고 웃겨요 괭님 ㅠㅋㅋㅋㅋㅋ사실 안 읽은 책 사는 것보다 이미 읽은 책 다른 판본으로 또 사는게 더 덧없는 소비인데ㅋㅋㅋㅋㅋ근데 예쁜거 참기 힘들죠... 괭님의 예외조항을 응원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추가될 것을 예감하며...

독서괭 2023-02-03 12:37   좋아요 1 | URL
덧없는 소비 ㅋㅋㅋㅋㅋㅋ 은오님, 그것은 저의 책사기 자제의 이유 때문입니다. 책장이 많지 않아서 책 둘 공간이 없다는 게 이유인데, 다른 판본으로 사면 구판은 처분할 것이기 때문에!! 공간차지는 똑같다는!! 그런 합리화에서 선택한 예외입니다 ㅋㅋㅋ 그러니까 더이상의 예외는 안 되겠지요.. 그치요.. ㅠㅠ
 
가치 있는 삶
마리 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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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삶>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어떤 이는 나처럼 꼰대의 일장훈계를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접어두어도 된다. 이미 마리 루티라는 저자에 대한- 읽지도 않았지만 북플로 인해 가지게 된 - 신뢰가 있기에 예상은 했지만, 도입부의 이런 문장은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나는 기질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고정적인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진정성"이란 특정 성격의 특성이나 속성이 아니라 삶의 방식,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진정성은 우리 존재에 대한 어떤 영구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특징인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에 우리가 어떻게 발을 내딛을 것이냐 하는 문제다.  - P33


누구나 알 만한 풍자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인 "나다운 게 뭔데?"라는 항변을 철학적으로 번역한 게 아닐까. "너답지 않다"라는 말에는 "나다운 것", 나의 기질, 나의 속성, 나의 핵심, 이른바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것이 고정불변하게 존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거기에 대항하는 "나다운 게 뭔데?"는 나에 대해 니가 얼마나 안다고 건방진 소리를 하냐는 방어적 태도 뿐만 아니라, 나다운 건 변화할 수 있다는, 기존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나다운 것으로서 내가 형성해나가는 내 모습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답이 들어있지 않은가? 


이 책은 기질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나의 기질의 부름을 듣고 그에 따라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펼쳐가며, 우리를 가치있는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해요소들-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현란한 광고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반복강박 등 - 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전체는 3부로, 각 부는 3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장은 7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꽂힌 라캉의 'the Thing' 이론은 앞서 다른 페이퍼에서 언급한 바 있다. the Thing 이론과 함께 이 책에서 다룬 기질, 반복강박 등은 계속 뇌리에 남아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떠올리게 된다.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정리해 본다. * 숫자와 순서는 책의 목차와는 관계 없습니다. 



1. 성숙한 자아는 유연하다.



 가장 "성숙"한 자아란 경계를 확실히 알고 긋는 자아가 아니라, 경계를 계속해서 재설정할 줄 아는 자아다. 가장 "발달된" 자아는 고도로 구조화된 자아가 아니라 가장 덜 구조화된 자아로, 다양한 정체성의 차원을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다. - P67


2. 불행은 삶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 요소다. 



질병, 사고, 기타 불행과 같이 우리 힘을 약화시키는 것들조차도 삶에 새로움을 가져다 주며, 우리가 그러한 시련에 맞춰 자신을 재정비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쇠퇴의 징조로, 우리 자신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잃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삶의 과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더 나아지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앗아가는 역경조차도 삶이라는 과정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좋냐 냐쁘냐 또는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자체의 문제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으므로 맞서 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과정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자극과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할 것인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 P72, 73



3. 인간에게 결여란 근원적인 것이며,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완전한 자기만족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앗아 간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행복해질 수 있고 세상과 완벽하게 조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결코 실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실현할 수 없는 환상이 우리 인간이 지닌 원대함의 근원이다. - P91

라캉은 우리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이기에 원초적인 것이며, 그 느낌을 없애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회화되기 이전의 우리는 아직 자신을 독립적인 실체로 이해하지 못해서 실제로 우리가 세계고 세계가 우리라고 이해한다. 사회화는 적어도 두 차원에 걸쳐 이 환상을 철저히 깨뜨린다. 먼저 일반적인 차원에서, 사회화는 우리와 어머니(혹은 우리를 돌보는 양육자) 사이에 어떤 쐐기를, 즉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심어 놓음으로써 환상을 깬다. 보다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우주의 배꼽이라는 자기애적 감각에 큰 타격을 가져옴으로써 다시 환상을 깬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이며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존재라는 우리의 유아적 환상을 깨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환상을 부당하게 강탈당했다고 단단히 착각하여 충족될 수 없는 갈망을 갖게 된다. 우리는 잃어버린 환상, 실낙원a lost paradise을 결코 되찾을 수 없지만 되찾길 추구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애초에 우리가 이 낙원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사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존재였던 적이 없으며 단순하고 마음이 태평하기만 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낙원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조금도 굽히지 못한다. 라캉은 이 실낙원을 "큰사물the Thing"로 명명하는데, 이 대문자 T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환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매우 특별한 것임을 나타낸다.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욕망이 바로 이 큰사물이다. 일부 사람들은 큰사물이 상징하는 실낙원을 초자연적인 낙원으로 대체한다. 이것이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체물을 찾는 과업에 착수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경감시키고자 많은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고 다양한 열망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것이 라캉이 "대상이란 본디 재발견된 것이다."라고 주장한 이유다. 우리가 창조하거나 발견한 모든 "대상"(모든 사람이나 열망)은 항상 원래 잃어버린 사물을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재발견"되는 것이다.   - P94, 95



4. the Thing의 울림과 접촉이 끊기면 허무에 이른다.

   접촉의 방해물 1: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상업 시스템 



평범한 대상에서 큰사물의 울림을 찾는 우리의 능력, 라캉의 말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일상적인 사물에 "큰사물의 존엄성""을 부여하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를 잠식해 오는 무無라는 감각에 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방비라는 것이다. -  P105

일반적으로 삶이 무감각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큰사물이 전하는 울림과 접촉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욕망이 지닌 아주 독특한 결과 같은 결을 지닌 대상과, 허구의 만족을 주는 대상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상업 시스템이 큰사물의 울림을 없애 버린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 P109, 110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우리의 욕망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단지 세계화된 경제 구조, 즉 무엇이 바람직한지 매우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구조의 특정 범위 안에서만 욕망하도록 학습되고 있다는 뜻이다.  - P239



5. 접촉의 방해물 2: 반복강박

   반복강박을 유발한 과거를 외면하고 회피해서는 안 된다.


반복 강박은 큰사물의 특별한 울림이 우리 삶에 불러오는 일종의 혼란을 부단히 없애려한다. 다시 말해, 큰사물을 향한 우리의 충성심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 예측 가능한 일이라는 표면을 깨고 나올 수 있게 하지만, 반복 강박은 이 표면을 수비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강박이 완고할수록 우리는 큰사물의 아우라를 극적으로 부활시키고 삶을 변화시킬 큰 잠재력을 지닌 바로 그 대상(또는 활동)을 거부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 P129

과거를 땅속에 파묻으려고 (또는 추방하거나 무시하고 외면하려고) 하면, 우리는 과거를 반복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억압된 과거가 되돌아온다는 의미다.)  의식적으로는 기억하지 않으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계속 "기억"하게 되고, 그 결과 무의식 속의 악마는 더욱더 탐욕스러워진다. 게다가 우리가 이 악마를 의식하기를 포기하면, 악마를 통제하는 능력 또한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악마의 (언젠가는 다가올) 기습에 제대로 경계 태세를 갖추지 못하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삶의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 행동의 특징을 잘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악마가 하려는 일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 P187

기질을 형성한다는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과거에서 공급받은 원재료를 (제한적일지라도) 어느 정도 우리의 이상에 걸맞은 현재의 현실로 변환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P140



6. 친밀한 관계는 기질 형성에 도움이 되지만, 어떤 관계는 그저 죽어있는 것일 뿐이므로 빨리 벗어나자. 



더욱 친밀한 관계가 우리와 우리가 외면해 온 모습을 만나게 할 가능성을 높인다. 우리가 낭만적인 동맹의 관계를 갈망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 동맹 관계가 우리 내면의 비밀스러운 방의 문을 열고, 우리 안에서 억압받거나 경시되었던 기질의 측면을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우리가 감추어야 한다고 배운 성격의 아주 은밀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소환해 낸다. 이렇게 우리 안에 묻혀 있는 특성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은 삶에 특별한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기에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침묵하던 것이 갑자기 말을 하게 되고, 무시당하던 것이 세상으로 뛰쳐나오고, 버려졌던 것이 삶의 경쟁 속으로 다시 들어오게된다.  - P157

독신 생활은 공허하고 황량하고 우울하고 절망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되어 버렸다.
독신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이런 방식은 두터운 연인 관계에도 엄청난 공허함, 황량함, 우울함, 절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장기적 동맹을 맺고 있는 커플의 일상적인 현실이 우리 문화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항상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을 띠고 있진 않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결혼이 영혼을 죽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많은 이가 결혼 생활에서 절망스러울 정도로 외로움을 느낀다. 결혼한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또한 많은 동맹 관계는 서로가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일상과 편의, 의무 또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묶여 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다.

이러한 동맹 관계에서 우리는 마치 고갈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러한 느낌은 우리를 덮쳐 버릴 수도 있다. - P160, 161



7. 과거/반복강박을 의식한다고 하여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서로의 한계와 책임을 인정하는 연대가 필요하다.



무의식적 동기라 해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면, 타인이 자신을 자제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분별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속을 잘 모르겠다는 것을, 즉 무의식적인 악마가 우리가 내린 올바른 판단을 무시하고 타인을 해치도록 몰아간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 또한 타인의 윤리적 실수에 인내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타인들도 똑같이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여, 말하자면 일종의 취약성의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 P193

무의식적인 삶의 세계를 탐구하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우리더러 제멋대로인 방종 상태에 빠져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오히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습관이 관계를 포함한 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우리가 잘 인식하여, 세상과 상호 작용할 때 더 좋은 선택을 내릴 수 있길 바랐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실수가 항상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며, 자기 성찰을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길 바랐다.  - P207



* 취약성의 연대라고 하니, 주디스 버틀러가 떠오른다. 


버틀러는 지금까지 논했던 무지, 불투명성, 취약성과 같은 우리의 한계를 책임감과 윤리의 바탕으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 또한 이 책임감은 우리의 무지, 불투명성, 취약성과 같은 한계들이 우리를 사회적 몸으로 만들고 연결시킨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 (...) 나아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지구 반대편 타자들의 삶에까지 내가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 또한 이미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꺠달음을 통해 나의 상실과 당신의 상실, '우리'의 상실과 슬픔을 어떤 방향으로 정치화할 수 있을까?  - <퀴어이론 산책하기> 528, 529쪽 


존재의 취약성, 그로부터 빚어지는 고통과 슬픔이 정치윤리적 가치로 생성되고 전환될 수 있다면, 강함과 약함, 능동성과 수동성, 긍정성과 부정성, 기쁨과 슬픔처럼, 마치 대립 관계에 있는 듯이 설정되어 있었던 논리의 축이 흔들리게 된다. 나아가 만약 정동의 역능이 다수적이고 이질적이고 변화적인 것들의 결합과 선택으로서 개진되는 긍정화로의 변환 과정이라면, 이 원리에 따라 취약성 역시 능동의 강도로 고양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버틀러와 아흐메드의 논의에서 취약성과 고통이 오히려 강건하며 공존적인 정치윤리로 전화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 29, 30쪽



8. 주저앉지 말자. 기질의 부름을 따라가는 여정에 불안은 친구같은 동반자다. 


요컨대 사건은 예상을 넘어서는 뜻밖의 것에 믿음을 가져보길 권유한다. 이것이 바디우가 우리에게 "절대 두 번 다시 믿지 않을 것"을 사랑하라고 말한 이유다. 또한 바디우는 이상하고 독특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항상 진실이라고 믿어 왔던 것만을 사랑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 P215

기질의 부름은 삶이 그런 단계로 전락하게 될 때, 즉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데만 열중해 습관, 일상, 생활 계획표가 현실을 완전히 삼켜 버릴 때, 삶의 빛과 함께 창의력 또한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 P220

자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든 우리의 이상에는 특수성이라는 것이 있어, 어떤 것이 만족스러운 실존적 삶의 여정이고 어떤것이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아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한 실천적 선택들이 모여서 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새롭고 무한한 실존적 가능성을 성취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삶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결국, 구성되어 있던 것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상에 부합하는 선택을 반복적으로 내리다 보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삶을 이룰 가능성이 커진다. - P236

우리는 불안이 삶에 침투하도록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균형"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더욱 사회와 동떨어지고, 삶은 더욱 단조롭고 지루해진다. 실존적 균형이라는 이상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기질은 더욱 억제된다. - P249



9. 삶은 결코 허망하지 않다. 우리의 한계, 우리의 필멸, 우리의 결핍은 결국 우리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실존적 투쟁에 어떤 "요점"이 있다면, 사회가 제공하는 명쾌한 해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해답은 우리를 기만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의미 있는 삶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 P253

결과적으로 삶의 덧없음은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고 드높인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덧없음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 P256



삶은 결코 허망하지 않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 "왜 살아야 합니까?"라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마리 루티의 답일 것이고, 나는 이 답이 마음에 든다. 어려운 용어를 자제하고 소박하고 진실되게 그 답을 차근차근 제시해나가는 마리 루티의 태도는 더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이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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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01 14: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 윳 빛 깔 독 서 괭!!

제가 좋아하는 마리 루티의 책을 독서괭 님도 좋다고 추천하시니 제 마음이 한없이 흡족합니다. 으하하하하.
저 아직 이 책 안읽었는데 곧 읽을게요.
(아니 이렇게 곧 읽는다고 댓글 달고 다닌 책이 도대체 몇 권이냐 ㅠㅠ)

잠자냥 2023-02-01 14:57   좋아요 3 | URL
나도 사놓고 아직 안 읽음;;;;;;;;;;

독서괭 2023-02-01 17:29   좋아요 3 | URL
으하하 ㅋㅋㅋㅋ
다락방님은 그래도 곧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읽고 싶은데 제가 책을 안 살 거라..˝라는 댓글을 무수히 달고 다닌답니다 ㅋㅋㅋ 언제 당장 사겠어요! 할 수 있을런지 ㅠ
잠자냥님도 아직 안 읽으셨군요ㅋㅋ 어서들 읽으시길 기대합니다!

미미 2023-02-01 15: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나갔다 와서 정자세로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아직 읽다 말았지만 저 또한 마리 루티 너무 애정합니다.
집중이 필요한 책이라고 느껴서 이래저래 미뤄진. 아 괭님 너무 멋지심요👍

독서괭 2023-02-01 17:30   좋아요 2 | URL
미미님, 정자세로까지 읽어주실 필요는 없고요 ㅎㅎ 직접 읽으시면 미미님의 멋진 리뷰가 탄생할 겁니다. 집중이 필요한 책 맞아요. 저 처음에 가볍게 폈다가 진도 안 나가서 좀 기다렸다 작정하고 읽었어요. 감사해요^^

난티나무 2023-02-01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앞부분 읽다가 좋아서 샀어요! 아직 안 읽고 있지만 독서괭님 글 보니 좋을 것 같아요.

독서괭 2023-02-01 17:30   좋아요 2 | URL
난티나무님 사셨다는 글 본 기억이 납니다! 저는 참 좋았는데 어떠실지, 기대되네요^^

수하 2023-02-01 2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군요…

저는 이런 정신에 관한 책 읽는 거 힘들어해서… 마리 루티의 다른 책을 먼저 읽어보려고 했는데, 독서괭님 글 보니 또 끌려요. 기억해둬야겠어요.

독서괭 2023-02-02 14:09   좋아요 0 | URL
수하님 정신에 관한 책 읽는 걸 힘들어하세요? 음. 어떤 포인트에서 힘들어하시는 건지 잘 몰라서 이 책이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후에 기회되시면 읽어보셔요^^

단발머리 2023-02-02 0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너무 좋아서 (이 이야기 5번째 중) 리뷰를 못 썼습니다. 은혜롭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독서괭님, 이 리뷰 너무 좋고, 정리해주신 것도 너무 좋아요.

인간에게 결여란 근원적인 것이며,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저는 여기에서 결여를 ‘고통‘ 혹은 ‘외로움‘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행복에 대한 강박 혹은 멈추지 않는 행복 추구, 이런 거에 대해 많이 생각했는데 아... 글을 못 쓰겠더라구요. 독서괭님 명품 리뷰를 꼼꼼히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잘 읽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독서괭 2023-02-02 14: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너무 좋아서 리뷰를 못 썼다! 그 마음 압니다. 알고 말고요! (저도 그런 책 많음..)
공감하며 읽어주셔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결여가 고통이나 외로움으로 치환 가능할 것 같아요. 빈 곳을 채워 넣으려고 이것저것 집어넣어 보는데, 현대사회에 너무 선택지가 많고 거기에 휘둘려서 엉뚱한 걸 자꾸 집어넣고.. 점점 허무주의로 치닫고.. 그런 세태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자기 이론이 오해를 받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조심조심 계속 설명을 곁들이는 것도 좋더라구요.
단발머리님의 리뷰도 언젠가 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책읽는나무 2023-02-01 2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좋다고들 하셔서 서점에서 샀어요!
근데 아직 안 읽었~^^;;;
더욱 기대가 되네요?
책 읽기 전이라, 리뷰를 대충 읽었는데, 책 읽고 나면 다시 꼼꼼하게 읽으며 깊이 공감하고 싶네요.^^

독서괭 2023-02-02 14:1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책나무님, 얼른 읽으시고 공감해주세요^^
아주 많은 이론들을 깊이있게 연구한 후 자기 언어로 쉽게 풀어쓰려고 한 노력이 인상적입니다.

유부만두 2023-02-03 05:50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제 맘을 그대로 써주셨어요;;;
 
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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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재미있게 읽었던 몇 권의 19세기 여성문학(폭풍의언덕, 제인에어, 오만과 편견)에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을 줄이야. 이미 읽은 책도 다시 보게 하는 책. 읽어가는 내내 그 시대 여성들이 겪었을 고통에 마음이 아팠다.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 작품을 찾아읽은 후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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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2-01 12: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 어제 다미여 다 읽었다고 표시하고 거기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 있었는데 왜 그게 삭제됐을까요??ㅠㅠㅠㅠㅠ 죄송합니다..
여성주의 책읽기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책을 완독해낼 수 있었을까요? 감사드립니다~~^^

다락방 2023-02-01 13: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휴 고생하셨고 축하합니다. 우리 이 길을 계속 같이갑시다!! 빠샤!!

독서괭 2023-02-01 17:3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빠샤빠샤!!

미미 2023-02-01 1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외관도 내부도 무시무시한 책! 19세기 문학의 재발견!!
완독을 축하드려요 괭님~^^♡

독서괭 2023-02-01 17:30   좋아요 2 | URL
감사드려요 미미님~~^^

책읽는나무 2023-02-01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축하, 축하!!!
시어머님도 기뻐하시겠어요ㅋㅋ
이젠 다미여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는 고부간?ㅋㅋㅋ

독서괭 2023-02-02 14:0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직 말은 안 꺼내봤습니다..
˝어, 그거 사놓고 안 읽었는데..˝라고 하시면 어쩌죠? 그럼 더 친근하게 느껴질 것 같긴 하네요? 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2-02 14:55   좋아요 0 | URL
ㅋㅋㅋ 바로 그거에요!
우리 알라디너들 대화 대부분이 사다 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로 친분을 트잖아요?ㅋㅋㅋ
왠지 시어머님도 알라디너 멤버이실지도?
우와~ 이런 상상은 좀 무섭다!!😰😨
 















<토지> 11, 12권에 걸쳐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역시 봉순이의 말로다. 

오랜만에 등장한 주갑의 모습을 보며, 문득 주갑과 봉순이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명창의 자질을 타고났다. 봉순은 어릴 때부터 즐겨 노래를 부르고 사당패들의 공연을 따라하곤 했는데, 엄마 봉순네를 비롯한 어른들이 저러다 사당패 되거나 기생 될 거라며 걱정을 했더랬다. 땅속에 묻힌 봉순네가 가슴을 칠 일이지만, 그 말대로 봉순이는 기생이 되었다. 주갑 역시 어릴 적 명창이 되겠다는 말을 들었으나, 먹고 살 일이 바빠 그 길로 나설 수 없었던 아쉬움을 품고 있다. 

둘은 역마살을 타고났다. 봉순은 기생이 된 후 한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떠돈다. 남자들 시선을 빼앗도록 타고난 요염함, 거기에 명창의 자질까지 있어 많은 기회가 찾아오지만, 진득이 붙어있지 못하는 성미와 욕심 없는 마음 때문에 명기도 명창도 되지 못한 채 떠돌다가 기생으로서 너무 많은 나이가 되어 버린다(30대?). 주갑 역시 가정을 이루거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돈다. 전라도 출신인 그는 간도에 와서 돌아다니다 용이를 만나 용정에 잠시 머물지만 우연히 만난 한의사를 따라 떠돌다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또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주갑이 봉순이를 보고 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하지만 그들이 간 길은 너무 달랐다. 

주갑은 떠돌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명창의 소질을 살려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사람들은 주갑의 노래를 들으며 '어쩌면 저렇게 고귀한 것이 저 사람 안에 있을까'라거나, '한마리 학 같다'라며 감탄한다. 그는 창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으나 이미 명창이고, 온 나라 발 닿는 땅이 그의 무대였다.

그러나 봉순이는 어떤가? 주갑이 냇가에서 멋드러지게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때도 봉순이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녀는 길가에서, 주막에서, 아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기생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여자가 아무데서나 노래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던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이 타고난 '기질'은 중요한 부분에서 이렇게 유사하다.

그러나 봉순이가 기질을 살릴 수 없었던 것은 성별 때문이었다. 여자는 결혼하지 않고 기생도 되지 않은 채 발 닿는 대로 떠돌면서 살 수 없었다.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길에 주갑이가 간 길은 없었다. 그나마 타고난 소질을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기를 택했지만, 그녀는 늘 '관계'에 덜미를 잡혔다. 봉순이가 타고난 다정한 성정 탓도 있지만, '관계'가 주갑의 덜미를 잡지 않고 봉순이의 덜미만을 잡은 것은 그들의 성별 차 때문이다. 이 시대 남자들은 결혼하고도 마음대로 집을 떠나 돌아다닐 수 있었다. 홍이가 아버지 용이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만주로 갈까 말까 고민할 때,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홍이의 아내 보현에게 오라비인 범석은 "가장이 한다면 하는 거지 바깥일에 간섭하는 거 아니다" 따위의 말을 한다. 그런 시대였다. 

봉순은 봉순네가 죽은 후 최참판댁을 떠날 수 있었다. 묶인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 훌쩍 가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봉순이는 서희와의 관계 때문에 주저앉았다. 기생이 된 후 그녀는 어떤 못난 양반과 잠시 살다가, 서울에 가서 서의돈과 관계를 맺는데, 딱히 사랑할 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그를 받아주고 위로해주는 봉순이. 이어 이상현의 방황하는 시기에도 따뜻한 위안이 되어 주는 봉순이.. 아.. 정말 안타까워 죽겠다. 결국 또 그 관계에서 생긴 아이가 봉순의 덜미를 잡는다. 기생답게 남자들 주머니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그들을 대했지만 결국 그들은 봉순이를 기생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타고난 기질과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봉순이가 만일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키츠가 자신의 소네트에서 시가 모든 곳, 즉 자연의 모든 것에 있듯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건강함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적어도 자신이 창조의 주인이라는 남성적 확신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드/로세티는 자신을 연약하고 허영심만 가득한 여자로 보았고,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고통받은 하인으로 여겼다. - 939쪽 


<다락방의 미친 여자> 15, 16장에서 다루는 여성 시인과 남성 시인 사이의 분명한 태도 차이는 인상적이었다. 엘리자베스 배넛 브라우닝, 크리스티나 로세티, 에밀리 디킨슨처럼 자신의 재능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들도 여성으로서의 한계, 모순, 분열에 부딪혀 예술 속에 왜곡된 자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 휘트먼처럼 당당하게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노라"라고 외치지 못하는가.(근데 너무 밥맛이지 않나..) 봉순이는 관계에 얽매여있다가 관계가 끝나면(남자가 떠나면) 떠나고, 다시 관계에 얽매이는 걸 반복한다. 그런 그녀는 결코 명창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야망도 꿈도 없고 그저 자신을 내어주기만 해서는. 



<제인 에어>를 절반 정도 읽었다. 번역 오류나 비문은 그 뒤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오타는 하나 있었던 듯.

다시 읽는 제인 에어는 새로운 느낌이다. 제인 에어가 타고난 기질 - 호기심에 차 있고, 부당한 것에 굴복하지 않고, 따져 물으려 하는-  에 대해 게이츠헤드는 감금으로 벌한다. 감금 상태를 벗어나 로우드 기숙학교에 들어간 제인 에어에게 보다 부드럽고 완곡한 방식의 구슬림으로 그녀를 '정숙한 숙녀'를 키워내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그러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던 템플 선생님이 결혼하여 떠나자, 감춰온 그녀의 기질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때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음을 깨달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내 정신은 템플 선생님께 빌려 온 것을 모조리 버렸다. 아니, 오히려 템플 선생님이 떠나면서 그녀 옆에서 느꼈던 차분한 분위기까지 사라졌다는 게 맞는 말이다. 이제 나는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예전의 감정이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 몇 년 동안 로우드가 내 세계였고, 그곳의 규율과 체제가 내 경험의 전부였다. 이제 나는 진짜 세상은 넓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희망과 공포에 찬, 감정과 흥분으로 들끓는 다채로운 삶의 현장이 그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위험 속에서 진정한 삶의 지식을 찾아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 121쪽 


그렇게 안정되고 편안한 로우드에서의 선생으로서의 생활(학생이었다가 후에 선생이 됨)을 등지고, 홀로 결단을 내려 광고를 내고 가정교사 일을 찾아 손필드 저택으로 가는 제인 에어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아직 읽지 않았지만 알고 있듯이 변화를 일으키는 그녀의 선택들을 생각하면) <가치 있는 삶>에서 마리 루티가 말하는 삶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자아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한 실천적 선택들이 모여서 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새롭고 무한한 실존적 가능성을 성취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삶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결국, 구성되어 있던 것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상에 부합하는 선택을 반복적으로 내리다 보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삶을 이룰 가능성이 커진다. - P236


 우리는 불안이 삶에 침투하도록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균형"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더욱 사회와 동떨어지고, 삶은 더욱 단조롭고 지루해진다. 실존적 균형이라는 이상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기질은 더욱 억제된다. - P249


 결과적으로 실존적 투쟁에 어떤 "요점"이 있다면, 사회가 제공하는 명쾌한 해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해답은 우리를 기만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의미 있는 삶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 P253



한편, 손필드에서 드디어 등장한 로체스터. 그의 어린 가정교사 꼬시기가 시작되는데... 하... 아직은 탄탄한 중년 사내, 부유하고 지위 높고 경험 많은 남자가 젊음 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미모조차) 경험도 없으며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여자를 유혹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은근슬쩍 자신의 젊은 날 잘못을 고백하면서 연민을 자극하고 그러면서도 진짜 중요한 잘못은 숨기는 교활함이라니. 



"(...) 내가 좀 더 굳건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그랬기를 신이 얼마나 바라는지 알고 있소! 에어 양, 유혹에 빠져 잘못을 저지르면 끔찍한 후회가 밀려든다오. 후회는 인생의 독이오."

"참회가 인생의 치유제라고들 하는데요."

"치유제는 아니오. 아마 개심은 치유제가 될 거요. 그리고 개심할 수도 있고. 아직은 개심할 힘도 있소. 하지만 나처럼 방해물이 있고 부담을 져야 하고 저주받은 사람이 개심을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 있겠소? 더욱이 내게는 절대로 행복이 주어지지 않을 테니, 인생의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는 거요.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쾌락을 추구하겠소."   -  197쪽 


제인 에어는 모르는 척 순진하고 선을 넘지 않는 대답으로 벽을 치지만 마음은 순식간에 그에게 넘어간다. 

우리가 흔히 보던 나쁜 남자 캐릭터가 이미 이때 있었구나. 난 착한 놈이야, 하는 놈 치고 믿을 놈 없다지만 난 나쁜 놈이야, 하며 되려 자기가 상처받은 척하는 놈은 더욱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상현에게 넘어간 봉순이가 다시 생각난다... ㅠㅠ 봉순이... 크흐흥..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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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 2023-01-3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갑과 봉순을 비교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독서괭님 글 보니 성별이 그 차이구나 싶네요.
이상현이 서희에게 상처를 받고... 그렇기도 하지만 또 원래 좀 나약한 캐릭터라서 전 맘에 안 들더라고요.

어쨌든.. 로체스터의 여자 꼬시기 정말... <제인 에어>를 여학생 필독서로 지정하고 싶어요.

독서괭 2023-01-31 18:09   좋아요 0 | URL
아 이상현 저는 너무 싫더라구요. 서희랑의 이야기를 ‘여자한테 당했다‘는 식으로 -주변인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부정 안 하고 씁쓸한 표정 짓기- 생각하는 거 되게 짜증나요. 그럼 지가 유부남이면서 서희랑 어쩌려고 했던 건지 어휴. 이혼도 못할 거면서 가족은 생전 안 챙기고 혼자 자기연민에 빠져서 여기저기.. 너무 싫습니다. 그 시대 룸펜들이 이랬을까 싶긴 한데요.
<제인 에어>를 읽고 페미니즘 해설을 덧붙이면 너무 좋겠습니다!^^

다락방 2023-01-31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쩐지 눈물콧물 흘리면서 봉순이의 이름을 외치고 싶네요. 서희랑 나이 차이 몇 살 나지도 않는데 꼬박꼬박 시중드는 삶인것도 참 마음이 안좋았어요. 아. 여성과 계급이란 무엇일까요 ㅠㅠ

독서괭 2023-01-31 18:10   좋아요 0 | URL
아 증말 봉순이 너무 안타까워요 ㅠㅠ 서희보다 나이도 위인데 서희 승질 받아주면서.. 그게 후에는 남자들 받아주는 걸로 ㅠㅠ

잠자냥 2023-01-31 17: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엮어쓰기의 달인 괭!

독서괭 2023-01-31 18:10   좋아요 2 | URL
달인까지?? 달인을 목표로 계속 엮어보겠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3-01-31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기질, 비슷한 재능의 주갑과 봉순이 성별 때문에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을 설명해주신 부분을 읽노라니,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의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 떠오르네요. 저는 아주 예~~~~~ 전에 읽어서 사실 주갑이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제 봉순이랑 엮어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이런 좋은 글을 무료로 읽네요!!!

제가 로체스터를 좀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기는 합니다만, 독서괭님 페이퍼에서는 처참히 부서지네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로체스터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2-01 12:1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주디스 셰익스피어 이야기 참 인상적이었어요. 다락방의미친여자에도 언급되어 반가웠고요. 저는 주갑이 등장부터 강렬해서 ㅋㅋ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유일하게 전라도 사람이라 사투리가 달라서 더 그런지.
저도 예전엔 로체스터에 대해 좀 낭만적인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는 막 째려보게 되더라고요 ㅋㅋㅋ 다미여 영향 ㅋㅋㅋ

공쟝쟝 2023-01-31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봉순아 ㅠㅠㅠㅠㅠ (1권 듣다가 동생이 해지해서 못들었지만 봉순이는 뉜지 아오…)

독서괭 2023-02-01 12:11   좋아요 1 | URL
아니 동생 왜 해지했대요 ㅋㅋㅋㅋ 결국 쟝쟝님의 토지완독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는가.

공쟝쟝 2023-02-01 12:39   좋아요 0 | URL
또 하겟죠ㅋㅋㅋ ㅋㅋㅋㅋ 아니면 제가 하든가용?!?

독서괭 2023-02-01 12:48   좋아요 0 | URL
나중에 정기적으로 출퇴근 할일 생기면 도전하셔도 될 듯요 ㅎㅎㅎ

유부만두 2023-02-01 0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로체스터 능구렁이 징그런 사십대. 이런걸 제인이 좋아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독서괭 2023-02-01 12:11   좋아요 0 | URL
능구렁이 징그런 사십대!! ㅋㅋㅋㅋㅋ 정말 맞습니다. 나이차가 스무살 넘게 나는데 아휴 ㅠㅠ 나쁜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