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에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전의 마음의 준비가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이미 그 두려움, 괴로움, 가련함을 <지나서>, 이미 슬픔을 뛰어넘어, 자기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승복하고, 지금은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에서는 비참한 군도생활의 끝이 그려진다.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의 탈주와 이들에 대한 엄한 처벌 그리고 반란. 죽음을 각오한 후에야 비로소 탈옥을 할 준비가 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우리는 광산 갱도의 마지막 끝, 막장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공통된, 돌멩이가 많은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인격은 그 시기에 완성되어 갔으며, 그 이후에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때 익숙해진 시선과 습관에 충실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지만, <수용소 군도 5>에서 저자 솔제니친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뿐 아니라 이들을 감시하는 경비병들 역시 같은 밑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벗어날 희망을 갖지 못한 버림받은 땅에 놓여진 이들은 분명히 같은 처지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다. 때문에, 이들은 반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각자의 사회적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 계급이 '주인 계급'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다면, 다른 계급은 '노예 계급'이라는 기반에 있어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우리를 가둔 자들도 우리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특수 수용소의 규율은 완전한 격리를 시키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호소할 수도 없고, 아무도 여기서는 석방되지 않고, 아무도 여기서는 도망치지 못한다... 어찌하여 이렇게 순종하게 되었는가? 이런 수용소는 따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배받는 측도, 지배하는 측도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와서, 전자는 몇십 년의 노예의 전통을 짊어지고, 후자는 몇십 년의 주인의 전통을 짋어지고 왔기 때문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결국, 문제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그래,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정치 기구를 가진 사회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에 있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이제 우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말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을 수용소 질서에 가져올 수 있겠다. 위력에 의해 강제로 수감된 이들이 갖는 '힘에의 열망'과 능동적인 힘에 의해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동(Reaktion)에 의해 생겨난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모습은 니체의 도식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강자(경비병)=악인'으로 간주하지만, 강자인 경비병들에게 복종함으로서 겨우 살 수 있었던 노예(죄수)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는 탈옥, 후에는 집단 항명 등을 통해 거부하는 모습은 글자그대로 '노예의 반란'이다. 그렇지만, 결국 진압된 항명과 구질서로의 회귀는 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선과 악 Gut und Bose'의 반복의 전형으로 보여진다. 결국, 죄수들의 르상티망은 자신들을 선(善)으로 규정하고,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절망하게 된다.
인간이 정서나 감정 없이 사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것을 일단 악이라고 보게 되면, 그 속에 있는 선마저도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있는가? 우리의 인생에 광명이란 있을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억압받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근절할 수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다면, 세상에서 버려진 땅 수용소 군도에도 나타난 '주인 - 노예'계급의 갈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인에게는 스스로 '좋음'이라는 우월 의식을, 노예에게는 '아니다'라는 부정의 답을 끌어내는 이 힘을 솔제니친은 '체제'에서 발견한다. 체제로부터 '반동'으로 낙인 찍힌 이들은 말 그대로 노예(죄수)로 강등되니, 수용소에 있는 이들에게 체제는 말 그대로 하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수용소의 천명(天命)은 동양의 천명인 민본(民本)과는 분명히 다르다.
만일 경비대의 <장교>가 죄수들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려고 한다면, 그는 그 친절을 병사들 앞에서, 그리고 병사들을 통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죄수들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는 가운데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밀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체제라는 것이다!... 이 체제의 힘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과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반드시 장교나 정치 지도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 있다. 이 청년들의 힘은 그들의 무지에 있다. 수용소의 힘은 이 청년들에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수용소의 '체제'는 개인과 개인을 고립시키고, 새로운 정보를 차단하며, 명령을 주입함으로써 수용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과 개인이, 개인과 집단이 의견을 나누며 교류를 하게 된다면, '여론'이 형성되고 꺾을 수 없는 힘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ebruary Revolution, 1917)으로 소련을 만든 이들 대부분이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곳곳에서 제정 시대보다 열악한 수용소 생활에 대해 언급한다.
결국, 수용소 내에서 빚어진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의 갈등이 더 첨예해진 것은 '무지'를 주입받은 이들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가지고 인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면에서 히틀러의 극우와 스탈린의 극좌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5>를 통해 '선(善) - 악(惡)'의 문제를 잠시 생각하며, 이제 <수용소 군도 6>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자기의 양심을 남에게 맡긴 채 명령에 따라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선악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인쇄된 지령서나 상사의 구두 명령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선서! 떨리는 음성으로 되풀이하는 이 엄숙한 맹세, 그 의미는 악당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 이런 선서를 통해 아주 간단히 그들은 악당의 편이 되어 국민들을 탄압하게 된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끄림반도 전쟁은 - 그것은 러시아에서 가장 행운의 전쟁이다 - 농노의 해방과 알렉산드로 황제의 여러 개혁을 가져오게 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에는 가장 위대한 힘, 즉 <여론>이 탄생했다... 여론! 사회학자들이 여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정부와 당의 견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자유롭게 표명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견해로서만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질서>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배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도적질을 하여 남을 짓밟고 살아가며, 죄수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