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독서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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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겨울에게 여름이 봄에게


철원의 겨울은 무서웠다 그 겨울보다 무서운 것은 감기였고 감기 기운이 침투할 때면 얼마 전 박이병이 공중전화 부스를 붙잡고 흘렸다는 눈물보다 더 말간 콧물이 흘렀다


누가 감기에 걸리면 감기 환자를 제외한 소대원 전체가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원산에 탄두 같은 머리를 폭격해야 했다


애써 감기를 숨기고 보초라도 나가면 빙점을 넘긴 콧물이 굳어져 코피로 변해 흘렀다 부대 앞 다방 아가씨를 본 것도 아닌데 어린 피가 흰 눈 위에 이유 없이 쏟아졌다


철원의 겨울은 무서웠지만 벙커에서 보초를 설 때면 겨울보다 여름이 더 무서웠다 가끔 박쥐들이 천장에 몰래 매달려 있었지만 우리가 무서워한 것은 벽에 스며 있는 핏자국이었다


핏자국이 점점 진해진다는 소문도 돌았고 벽에 기대 보초를 섰다가 군복에 피가 묻어나왔다는 이도 있었지만 눅눅한 여름, 벙커 속의 피냄새가 온몸을 휘젓다 귀로, 코로, 입으로 터져나오는 기분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목욕을 해도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갑자기 휴가를 떠난 박일병은 코를 틀어막던 애인과 이별을 하고 돌아왔다


여름이 지나도록 피냄새는 계속 끓어올랐다 그렇게 벙커에 차오르던 냄새가 타악 터져나오면 저만치 보이는 북쪽의 능선에도 피 같은 단풍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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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합니다 - 선을 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언어 습관
희렌최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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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합니다

저자 희렌최

다산북스

2021-08-26

자기계발 > 협상/설득/화술 > 화술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해 본 적 있으신가요?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의도치 않게 상처받는 경우도 많이 생기죠.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호의 있고 매너 있는 말투를 지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중에서는 유독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뒤돌아설 때면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끊어도 되는 인연이라면 끊어낼 수 있지만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인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할 수 있는 스킬이 필요합니다.





가벼운 농담을 던진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상대를 비하하는 말투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라고 가볍게 여기지만, 이 말을 듣고 상처받은 사람이 참다 참다 당신의 말이 무례하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고 있었어?"


예컨대, 이러한 경우를 직장 상사에게 당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혹은 마찰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네." 하면서 넘어가는 게 다반사지만 그 상처는 분명 자신의 마음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이 날카롭던, 무디든 간에 무조건 벽만 세우려고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답안이 아닙니다.

본인을 방어한답시고 미성숙한 방어 기제를 택했다가는 오히려 상처만 더 쌓이게 되죠.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받아주면서 끊어내는 대답의 기술을 꼭 터득해야 합니다.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우리나라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손윗사람에게 이에 대해 말을 꺼내면 말대답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성향에 맞춰 상황별, 대상별 대화의 기술을 미리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대화의 기술 중 꼭 알았으면 하는 기술이 바로 물음표 기술입니다.

물음표는 최고의 방패막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무례한 말을 들었다면 곧장 질문으로 응수하거나 모호한 말을 들었다면 진의를 물어보면 됩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적극적인 물음표 사용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바로 백 트래킹 질문으로 되돌려주거나 리프레이밍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리프레이밍은 무례한 상황에서 나를 강력하게 수비해 내는 기술입니다.

부정적인 말에 담긴 어폐를 찾아 관점을 바꾸는 것인데, 봉준호 감독님의 인터뷰가 바로 이를 잘 적용한 케이스 중 하나입니다.

오스카에서 4관왕을 차지한 후, 뉴욕 <벌처>의 기자가 물었습니다.

기자 : "지난 20년 동안 한국 영화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음에도 오스카상 후보에는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봉준호 감독 : "조금 이상하긴 해도 별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스카는 국제 영화 축제가 아닙니다. 그저 지역 축제일 뿐이죠.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미국 언론들은 이 인터뷰에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영화제를 지역 축제로 축소해버린 봉준호 감독의 리프레이밍에 놀란 것이지요.

리프레이밍을 잘 터득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잘 적용시킬 수 있는데 특히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해 분위기를 좋게 풀어가는 데도 효과적입니다.


습관은 정신을 지배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크게 베여있는 습관 중 하나가 바로 '말'입니다.

첫인상도 매우 중요하지만 생김새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내면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말은 또 하나의 얼굴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숙제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일 것입니다.

오늘도 한 명 이상의 누군가와 마주했고 내일도 한 명 이상의 누군가와 마주해야 하며, 앞으로도 수 백 명, 수 천명의 사람을 마주해야 하니깐요.

순간순간 다 좋을 순 없습니다. 즐거울 때도 있고 도움받을 때도 있는 반면에 상처받는 경우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현명하게 방어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저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살아왔는데, 좋은 인연을 얻기도 했지만 상처받은 적도 꽤 많았습니다.

상처받는 큰 일들이 연달아 생기자 20대 초반부터 인간관계, 대화기술 등의 주제가 담긴 자기계발서를 엄청나게 읽으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켜려 노력했었습니다.

지금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동시에 똑부러지게 의견을 어필할 수 있을 정도의 스킬은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이 당황하거나 화나는 상황에 닥칠 때면 감정에 억눌려 어버버거리는 경우도 많은데, 대화 스킬을 쌓다 보면 오히려 말을 더 잘하게 됩니다.

끊어낼 수 있는 인연이면 끊어내는 게 맞습니다. 아무리 본인이 호의적이어도 아닌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타인에겐 순화된 언어를 사용하면서 정작 본인에게는 나 자신을 한정짓고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고쳐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곧 자존감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더라도 타인에게 하듯 나에게 하는 말과 생각을 꼭 순화해야 합니다.

비트켄슈타인이 말하길,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하였습니다.

배움과 성장의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해보세요.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이 방법을 적용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자존감 또한 높일 수 있을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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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7-2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행운 같아요.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대응을 잘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꼭 필요한 일 같고요.
자신에게도 좋은 말을 쓰는 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책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하나의책장님,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풀따기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지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은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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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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