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1820~1895)는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서문을 통해 아이스킬로스(Aischylos, BC525~BC456)의 <오레스테이아 Oresteia> 3부작을 몰락해가는 '모권 母權'과 '부권 父權'의 대립으로 해석한 바호펜(Johann Jokof Bachofen)의 <모권론>을 소개한다.
가족사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이 출판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바호펜은 아주 열심히 수집한 고대 고전 문헌의 무수한 구절에서 이 명제들에 대한 논거를 찾고 있다. "난교"에서 일부일처제로 또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은, 그의 의견에 따르면 특히 그리스 인의 경우에 종교적 표상의 계속적 발전의 결과이며, 새로운 견해를 대표하는 새로운 신들이 낡은 견해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신들 사이에 끼어들어 후자를 점차 뒤로 밀어내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호펜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를 몰락해 가는 모권과 영웅 시대에 발생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는 부권 간의 투쟁의 극적 묘사로 보고 있다.(p20)... <오레스테이아>에 대한 새롭고도 아주 정당한 이 해석은 바호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다._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제4판 서문>, p21
잠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살펴보자. 먼저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 <아가멤논 Agamemnon>에서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뤼타이메스트라가, 두 번째 작품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Choephoroi>에서는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한 오레스테스가 그려진다. <아가멤논>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아가멤논 살해 이유가 딸 이피게네이아를 트로이아 출정을 위한 제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는 것과 함께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동생 튀에스테르의 관계까지 고려해본다면 과거의 모든 질서가 파괴가 한 가문의 역사 속에 모두 담긴다. 여기서, 바호펜은 혼돈의 원인을 '모권제'와 '부권제'의 대립에서 찾고, 마지막 작품인 <자비로운 여신들 Eumenides>에서 아테네에 의해 부권제의 승리가 선포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바호펜의 해석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문을 던지게 된다. 바호펜의 해석이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그의 해석에 따르면 아가멤논의 딸 살해가 이해되지 않는다. 아테나의 판결로 부권의 승리가 결정되었다면, 그 이전 트로이아 원정 함대의 출정 시점에서는 적어도 두 권한이 비등해야 한다. 자신의 남편을 살해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다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동등한 권한을 사용해 아가멤논을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미 아테나의 재판 이전에 부권제가 확립되었다는 반증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오레스테스>에서 바호펜의 '모권제-부권제'의 대립 구도를 걷어낸다면, 여기에 무엇을 새롭게 대입할 수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여신 아르테미스의 제물로 바치는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이윽고 손위 왕이 이렇게 말했다네.
"복종치 않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오.
하나 내 집안의 낙인 자식을 죽임으로써
제단 옆에서 이 아비의 손을
딸의 피로 더럽힌다면,
이 또한 괴로운 일이오.
그 어느 것인들 불행이 아니겠소?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저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오."
그리하여 그가 한번 운명의 멍에를 목에 매니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불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치욕을 꾀하는 미망(迷妄)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이제 그는 한 여인의 원수를 갚는 전쟁을 돕고
함대를 위해 미리 제사를 지내고자
제 딸을 손수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네._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205-227), p38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아가멤논을 '딸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여기지만, 작품 내에서는 함대의 총사령관과 아버지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아가멤논의 모습이 그려진다. 비록, 결심을 하고 나서는 매우 빠른 결단력을 보인 아가멤논이지만, 적어도 그의 내면에서는 아레스가 휘두르는 '두 개의 채찍'이 그에게 내려쳐지고 있었다.
도시는 모든 시민들에게 공통된 상처를 입었으며
많은 집에서 나간 많은 남자들이 아레스가 사랑하는
이중의 채찍, 두 창의 불행, 피 묻은 한 쌍에 의하여
저승으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는 경우라면,
사자가 그런 재앙의 짐을 지고 돌아오는 경우라면,
그런 복수의 여신들의 찬가를 부르는 것도 어울리겠지요._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640-645), p54
* 각주 : '이중의 채찍' - 국가와 개인을 동시에 치는 채찍이란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가멤논은 '국가'로 대표되는 함대 사령관의 위치와 '개인'(가정)으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국가'의 위치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에 대해 가족의 구성원인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회 발전 단계에서 '가정'공동체의 윤리와 '국가' 공동체의 규범 사이의 대립이, 거칠게 표현해서 '제가 齊家'와 '치국 治國'의 충돌이 <아가멤논>의 주제가 아닐까. 추가적으로 '이중의 채찍'은 아가멤논 뿐 아니라<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남매들에게도, 어머니와 애인에게도 내리쳐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직면한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중의 채찍 소리 가까이 다가오니,
이미 지하에는 그대들을 도울 이들이
누워 있고 지금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저 가증스런 자들의 손은 피로 물들었음이지요._아이스퀼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375-378), p116
** 각주 : '이중의 채찍' -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 남매의 고통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고,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 가해질 복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그리스어 원문을 확인해봐야 보다 정확하겠지만, 아가멤논을 지칭할 때 '한나라의 왕', '자기 남편' 순으로 지칭했다는 것은 그 역시 '국가' 공동체의 이념을 선택했음을 짐작케 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혈연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보편적인 우리의 아버지에게 탄원하면서 자신의 죄를 정화시키려 한다. 이는 '혈연'이 아닌 '국가'라는 형이상학적 이념에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의미가 아닐까.
오오, 잔인하고 뻔뻔스런 어머니,
마치 적의 병사를 묻어버리듯
시민들의 접근과 애도를 금지한 가운데
한 나라의 왕을, 자기 남편을
눈물도 없이 묻어버리다니!_아이스퀼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429-433), p119
가까이 둘러서서 남자를 위한 이 큰 수의를
펼쳐 보여드려라. 아버지께서 보실 수 있도록.
내 아버지가 아니라 만물을 굽어보시는 위대한 아버지
태양신께서 말이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어머니의 저주받을
소행을 보시고 언젠가 내가 심판받는 날,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나를 위해 증언해주실 게
아니냐._아이스퀼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991-997), p143
결국 오레스테스는 그를 편드는 아폴론과 클뤼타이메스트라를 편드는 분노의 여신 에리뉘에스의 대립이 벌어지는 법정으로 넘겨진다. 이 재판의 단순한 재판이 아니다. 아폴론이 올림푸스 신이라면, 가이아 여신의 딸인 에리뉘에스는 기간테스에 해당되기에 이 재판은 가치관의 전쟁이자, 소(小) 기간토마키아 Gigantomachia)인 것이다. '혈연'과 '국가'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이 재판은 결국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오레스테스를 편들면서 결론이 내려진다. '국가'의 이념이 승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내 소임이니라.
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해 이 투표석을 던지노라.
나는 결혼하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니라.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734-740), p168
여자인 아테나는 왜 오레스테스 편을 들었을까? 이것을 바호펜의 구도인 '모권제-부권제'의 구도에서 바라본다면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남자인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편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폴론의 아테나 설득 이유이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대신 작품 속 아테나의 독백에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머나먼 스카만드로스 강변에 머물던 내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곳은 내가 점유한 땅이라오.
그곳은 아카이오이족 장수들과 대장들이 창으로 얻은
전리품 가운데 큰 몫으로서 나에게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나누어준 곳이오.
테세우스의 자손들을 위한 정선된 몫으로 말이오.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397-401), p168
결국, 아테나는 아가멤논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제공받은 것이다. 트로이아 정복 전쟁의 수혜자인 아테나 입장에서는 아가멤논의 죽음으로 더는 헌금을 받을 수 없었기에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내심 기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테나의 오레스테스 편들기도 설명된다.
이를 해석해보면, 아테나가 오레스테스의 편을 들어준 것은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한 경제적 이권 획득에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 편으로, 작품 내에서 아폴론은 동생 헤르메스를 부르며 함께 하는데, 헤르메스가 상업의 신임을 생각하고, 에리뉘에스의 어머니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임을 생각해 본다면, 기간토마키아는 다른 한 편으로 '상업'과 '농업'의 대립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작품의 현실적인 배경을 작가 아이스퀼로스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대립,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대립까지도 끌어온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자.
오레스테스는 무죄가 선언되었지만, 아직 분노의 여신(구질서, 농업계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팔라스(아테네)는 가장 좋은 몫을 떼어줄 것임을 약속하면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이것은 상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력들이 기존 질서(또는 지주)에게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한 부(富)의 배분을 약속하면서 사회통합이 이루어진 것임을 그려낸 것은 아닐까...
나는 팔라스와의 동거를 받아들일 것이며,
결코 이 도시를 모욕하지 않으리라.
전능한 제우스와 아레스도
신들의 성채로 존중하는 이 도시는
헬라스 신들의 제단을 지켜주는
자랑거리가 아니던가!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916-921), p189
이제 팔라스의 시민들과 그들의 재류외인들 사이에
영원한 맹약이 맺어졌도다. 만물을 굽어보시는 제우스께서
그렇게 하셨고, 운명의 여신이 이에 동의했도다.
모두들 환성을 올려 우리 노래의 대미를 장식하시오!_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1044-1047), p194
다소 산만했지만, 이제 <오레스테스> 3부작을 '국가-가족'의 관점에서 정리해보자. 고대 부족 국가에서 도시 국가로 발전하는 시기, 가치관 측면에서는 작은 공동체인 '가족/씨족' 윤리와 '(도시)국가' 윤리가, 경제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상업'과 전통적인 '농업'이 충돌하는 사건이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났다. 초창기에 일어난 이들의 대립은 '국가'의 대외 진출에서 얻어지는 일련의 전리품들을 나누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상업과 농업이 함께 번성하고, 개인/사회적으로 '제가'와 '치국'은 하나의 이념으로 통합되어 갔다... 이런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오레스테스>에서 '국가'를 말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리스 비극의 시대가 바로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429)시대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무리한 연결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그리스 비극이 씌여진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국가를 강조한 그리스 비극을 보면서 자란 시민들이 팔랑크스(Phalanx)를 이루며 전장으로 나아갔다면, 우리가 고전으로 생각하는 그리스 비극이 사실은 '대한뉴스' 수준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할만한 권위자의 추론을 덧붙이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7[23] 민족의 선생으로서 고대 비극은 국가에 헌신적이었다. 정치적 삶과 국가를 위한 충성이 고조되었기에, 예술가들 역시 무엇보다 국가를 생각했다. 국가는 예술 현실의 한 수단이었다 : 그 때문에 국가에 대한 열망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 모임에서 최고의 것이었다.(p189)... 그리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겨냥한 것은 개체가 아니라 국가이다 : 그리고 다시금 국가의 교육은 예술 작품을 향유하도록 모든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예술, 건축물의 모든 위대한 창작은 위대한 민족의 정서를 의도하고 있으며, 그것은 국가가 보존한다. 특히 비극은 해마다 국가를 위해 축제처럼 준비하고, 전 민족을 통합하는 활동이다. 국가는 예술의 현실을 위한 필연적인 수단이었다._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1869년 가을~1872년 가을)> <U I 2b, 1870년 말~1871년 4월>, p222
7[23] 민족의 선생으로서 고대 비극은 국가에 헌신적이었다. 정치적 삶과 국가를 위한 충성이 고조되었기에, 예술가들 역시 무엇보다 국가를 생각했다. 국가는 예술 현실의 한 수단이었다 : 그 때문에 국가에 대한 열망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 모임에서 최고의 것이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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