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어쩌면 사람들에 관해서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중에서

1933년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난 필립 로스의 부모님은 유대계 미국인 2세대로 그의 아버지 허먼 로스의 부모는 오스트리아 통치를 받았던 르비브(현재 우크라이나 ) 출신이고 그의 어머니의 가족들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브에서 미국으로 건너 왔다.
1900년대 뉴욕 맨해튼에서 유대계 이민자들은 백인들이 키웠던 애완견 보다 지위가 낮을 정도로 반유대주의가 극심했는데도 불구하고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는 메트로폴리탄 보험 회사에 판매원 부터 시작 해서 회사 상사들의 반유대주의와 인종 차별에 맞서 불굴의 의지로 버티고 버틴 끝에 지점장 자리 까지 올라 갔다.
공립 학교를 다녔던 필립 로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했고 부유한 WASP 계층의 삶을 부러워 하지 않았다.
유대계 이민자 2세 였던 로스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유대교를 강요 하거나 이디시어도 가르치지 않았고 딱히 계율이나 율법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특 했던 로스는 유대교의 교리나 독특한 문화와 관습, 계율, 율법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 뉴어크 위케이크의 유대인 밀집 거주 지역의 이웃들의 삶을 통해 어렴풋이 터득해 나갔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광적으로 독서에 몰입했던 로스는 학교 생활 내내 지극히 평범한 모범생이면서 친구들 사이에 코메디언으로 불릴 정도로 유머 감각이 뛰어 났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학창 시절 친구들은 그가 20세기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될 줄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필립 로스는 자신의 작품 속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 네이선 주커먼 교수를 통해 각기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미국의 유대계 중산층의 삶을 현미경처럼 깊이 분석하고 탐구하며 유대인의 문제를 미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 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오로지 유대인과 유대계 문화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미국 내 유대계 공동체나 종교 시설에 가도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다.
그에게 독자는 일반 독자와 유대인 독자로 나눠지는데 일반 독자들 중에 일부는 그를 향해 여성 비하 ,혐오주의자라 비난을 퍼붓고 유대인 독자들은 기대와 경멸, 기쁨, 비판, 상처, 호기심과 분노의 화살을 그의 심장을 향해 날렸다.
미국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포트노이의 불평>은 단숨에 초대형 베스트가 되면서 엄격한 계율과 율법에서 숨 막혀 했던 수 많은 유대교 신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유대인은 서구 사회의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로서 물론 사회적 적응의 달인 이었다.'-데이비드 싱어
1969년 2월 <포트노이의 불평>은 필립 로스에게 작가로 가장 영예로운 상을 받게 만들기도 했지만 온갖 매체와 주요 인사들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와 방문 요청에 몸이 두 동강나 버릴 정도 였다.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창작자로 은둔 하지 않고 마치 헐리우드 유명인들 처럼 미디어의 덫에 스스로 들어가 카메라 조명 세례를 즐겼지만 필립 로스는 예술가를 위한 창작 구역인 '야도 (Yado)에서 4개월 동안 은신하며 세상과 단절 된 채 글쓰기에 몰두 한다.
4개월 동안 필립 로스가 미디어의 시선에서 사라지자 각종 매체들은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신경 쇠약증으로 은둔하고 있다등등의 루머를 만들어 냈고, 몇몇 유대계 단체들은 그에게 소송 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들끓어 올랐던 1960년대 미국에서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은 마치 종교적 자기 고백서 처럼 읽혀지기도 했는데 특히 10대들은 그의 솔직함 속에 드러나는 대담한 고백이 마치 온갖 비리와 의혹,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도전처럼 받아 들였다.
부유한 부모를 둔 성장통을 앓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거친 세상에 순진한 아이들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결심한 것과 달리 <포트노이 불평>의 앨릭 잰더 포트노이는 씹에 미친 자위로 체면과 격식, 규율과 규범 그리고 수 천 년 동안 전해지고 있는 종교적 율법을 향한 도전이였다.
[나는 일 년 짜리도, 일 년 반 짜리도, 또 몇 달 짜리 사랑도 해 보았어요. 부드러우면서도 관능적인 사랑이었죠. 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처럼 불가피한 일이에요-시간이 지나면 욕정이 시들해져요. 결국에는 도저히 결혼으로 발을 내디딜 수 없더란 겁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해야 하는 겁니까?]-'포트노이의 불평' 중에서
금지된 성(性)적 행동이나 가족 질서를 뒤 흔들어 버리며 자기 고백을 하는 한 남자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미국의 독실한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사회적 체면은 물론 수 천년 동안 지속되었던 자신들의 종교적 공동체에 금이 갈지 모른다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유대계 작가들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출간 할 수 있게 출판계에 돈을 뿌리기 시작한다.
1960년대 미국 출판계에는 홀로 코스트에서 살아 남아 미국 땅으로 건너 와 예술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유대인들의 체험서들이 베스트 셀러에 수 주 동안 올라가 있을 정도로 미국 땅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유대인들은 드러 나지 않게 세상을 향해 유대인들은 전쟁과 살육의 피해자라는 것을 널리 알렸다.
[4월의 어느 날 프랭크는 병원으로 가서 할례를 받았다. 다리 사이의 통증 때문에 그는 이틀 동안 몸을 질질 끌고 다녔다. 통증은 그에게 분노와 영감을 주었다. 유월 절 뒤 그는 유대인이 되었다.]-맬머드의 점원 중에서
필립 로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유대교, 유대인 문화를 찬양 하지 않았다.
그저 죄를 지은 이들이 내뱉는 속죄에 이중적인 속내를 솔직하면서 명징된 언어로 풀어 냈다.
"이봐, 유대인(Jew)! 여기!"하고 부르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이 그냥 "이봐, 너(you)! 여기!"였다고 믿기로 하고, 계속 열심히 내 할 일을 했다.-'울분' 중에서
금욕과 파토스 아래에는 오로지 분노만이 서려 있을 뿐 그것 말고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외치는 유대인의 고백이 의미하는 인간의 참된 본성은 결국 너도 나도 크게 다르지 않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1970년대 공산 체제의 동유럽 국가들에게 방문 신청권을 손에 쥐고 비밀 경찰의 밀착 감시와 미행을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문학계 인사들과 작가들을 만났다.
그는 지하에서 목숨을 걸고 창작 활동을 하는 반체제 작가들의 작품들이 영어로 번역 출간 될 수 있게 적극 도우며 목숨 걸고 서방 세계로 탈출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미국에서 출간 될 수 있게 도왔다.
미국 땅을 벗어난 필립 로스는 자신의 작품이 다른 국가에서는 고통스러운 할례에서 유대인 정체성을 발견 하지 않고 오히려 금지된 욕망에 사로 잡힌 주요 인물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모습, 주변인들의 삶을 이입 시켰다는 사실에 유대인의 족쇄에서 벗어나 더 열정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한다.
1986년 필립 로스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 온 화학자 프리모 레비와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아직도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진부한 생각을 공격하고 싶었습니다. 즉 유대인은 온화한 인간이다. 학자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다. 호전적이지 않다. 수모를 감수한다. 아무런 반격이 없이 수백 년 동안 박해를 참아왔다는 생각, 절망적인 상황에서 저항할 용기와 기술을 발견한 그 유대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겨졌습니다.]-프리모 레비
필립 로스는 작가로 입지를 굳히고 난 후 1970년대 부터 80년대까지 십 여 년에 걸쳐서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에서 공산 체제에 저항하는 작가들을 만난 후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체제에 저항하며 창작의 자유, 민중의 자유를 외쳤던 공산 체제 출신 작가들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 태워 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4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프라하 태생의 독일계 유대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 이들의 정신적 지주 였다.
카프카의 '성(城)은 2차 대전에서 살아 남은 유대인 작가들에게 집단 수용소로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가 커다란 해충으로 변했던 것처럼 마침내 수용소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살아 남았지만 어떤 국가에서도 자신들은 그 나라의 해충 처럼 느꼈다.
동유럽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국가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과 다른 정체성이 있다.
이들은 이디시 언어를 구사 하며 책을 쓰고 연극을 올리며 하시디즘과 시온주의 사상을 신봉한다.
그러기에 대규모 동유럽 유대인들은 가장 먼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해서 이스라엘 건국 땅에 피와 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다.
['묘한 장치이지요.' 라고 장교가 탐험가에게 말하고는 탄복해 마지 않는다는 눈길로 평소부터 잘 알고 있는 그 장치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탐험가는 단지 예의로 사령관의 청에 응한 것 같았다. 사령관은 그에게 불복종과 상관 모욕으로 인해서 유죄 판결을 받은 한 사병을 처형하는 자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카프카의 단편 <유형지> 중에서
카프카는 단편 <유형지>에서 사형수의 발목과 팔목, 목 등에 채워져 있는 얽히고 설킨 사슬의 묘사 부터 머리를 두 동강 내는 기계 장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처형이 시작 되기 전 부터 독자들은 카프카가 천천히 세세하게 알려주는 사형기계가 과연 어떻게 사형수를 형장의 이슬로 만들지 조마 조마 한 심정으로 읽어나간다.
죄수는 머리를 수그리고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병은 죄수의 셔츠로 기계를 닦고 있었다. 장교는 탐험가 곁으로 갔는데, 탐험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장교가 그의 손을 잡고 옆으로 끌어 당겼다.'당신을 믿고서 몇 마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가 말했다.
'괜찮지요?'
'그럼요.' 하고 탐험가는 눈을 밑으로 깐 채 귀를 기울였다.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1932년 7월 빈의 요양소에서 폐결핵질환으로 죽기 딱 열 한 달 전에 카프카는 느닷없이 프라하와 아버지의 집을 영원히 떠나 버리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학교를 졸업 한 후에도 줄곧 마음 속 깊이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단 한 번도 홀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프라하의 '노동자 사고 보험 사무소' 법률 사무소로 출근 했고 일을 마친 후 늦은 시간 동안에 글을 썼다.
영원히 프라하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기 10년 전 프란츠 카프카는 폐질환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연금 생활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명의 여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고 약혼도 했지만 번번이 사랑의 결실 앞에서는 아버지에게 '결혼은 금지 된 것' 이라는 편지를 보낸 즉시 어떤 여인과의 사랑도 삶의 희망도 저버리듯 자포자기 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세상에 대한 그의 지식은 특별하고 심오하며, 그 자신이 심오하고 특별한 세계였다. 그에게는 기적에 가까울 만큼 섬세한 감정이 있었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비타협적이고 명료한 정신이 있었으며, 그래서 삶에 대한 정신적 두려움이라는 짐 전체를 자신의 병으로 감당하려 했다.'
-밀레나 예센카폴라크
만일 프란츠 카프카가 나치 침공 이후에 살아 있었다면 히틀러가 지배하는 시민 사회에 해가 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수용소로 끌려 갔을 것이다.
[굴을 팠는데 잘된 것 같다. 밖에서 보면 단지 커다란 구멍 하나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 구멍은 사실 그 어디로도 통해 있지 않아 몇 걸음만 가면 단단한 자연석과 만나게 된다. 고의적으로 이런 속임수를 부려보았다고 자랑해 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허사로 돌아간 수많은 시도들 중의 한 잔재인데, 결국에 가서는 이런 구멍 하나를 무너트리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잘된 듯 싶다. ]-카프카의 '굴' 중에서
카프카가 문학으로 파 놓은 굴에 수 많은 유대인 작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았고 탐구 하며 문학의 언어로 전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
예술은 어떻게 창조 되고 만들어지는 것인가?
앞 선 이들이 파 놓은 굴 속에서 온갖 불안과 고립, 불만과 희망을 발견하며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 하고 극복하며 은밀한 편집증적인 시선으로 세상의 이면을 예술 작품으로 탄생 시키는 것이다.
카프카는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성의 토지 측량사는 다른 언어로 살아 남아 여러 갈래의 작품으로 변형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연출'하지 않습니다. 가장 생기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는 것에 반응하지요. 입에서 나오는 것과 서술하는 것 사이에 이루어야 할 필수적인 균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함께 가는 거지요.'-필립 로스
어떤 작가는 단 여섯 줄의 시를 완성하고 어떤 작가는 수천 페이지에 글자를 새긴다.
필립 로스는 현미경 같은 펜 촉으로 인간을 관찰했고 탐구 했고 분석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솔직해 지길 힘들다. 내 전부가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건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다.
그러기에 소설이나 기타 다른 매개를 통해 나와 너를 발견하며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 나와 너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소설의 도움 없이도 세상에 관해 많이 알 수 있지만, 어떤 것도 소설의 방식으로 아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지요. 어떤 것도 세상을 소설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소설은 유일 무이한 양식의 정밀한 조사와 상상으로부터 파생하고 그 지혜는 상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소설은 실제로 행동에 영향을 주고 의견을 형성하고 행동을 바꿉니다. 책 한 권이 물론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삶이 반드시 하나의 경로, 하나의 단순한 연속성, 하나의 예측 가능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니 반대의 삶, 반대의 삶들, 반대로 살기라는 관념, 삶은,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변화를 일으키려는 강력한 충동을 갖고 있습니다.]-필립 로스

필립 로스의 철학과 사상, 인터뷰와 생각이 담긴 이 책 <왜 쓰는가?>를 탐독 하는 동안 책장에서 카프카의 전집, 평전,밀란 쿤데라의 작품, 이반 클리마, 프리모 레비, 브르노 슐츠, 아이작 바세비스 싱어, 맬러머드, 솔 벨로의 책들을 꺼냈다.
필립 로스가 평생 동안 출간 한 서른 한 권의 책들 중에 스물 일곱 권이 소설들로 소설이라는 변장과 꾸밈과 책략 속에 자신의 삶과 주변인들의 삶, 가족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배우게 되면 행복은 두 번 다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없다.'- 미국의 목가 중에서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들은 이교도들과 백인 기득권들 층으로 가득 찼던 보험회사에서 간부까지 올라간 유대인 아버지와 오로지 자식에게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 주었던 어머니로 그의 모든 작품 속에 이들의 모습이 투영 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 <새버스의 극장>에서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필리핀 상공에서 격추되어 실종된 공군 조종사였던 형 모트의 묘지를 찾아가 묘석에 돌멩이를 얹으며 영원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형의 영혼에 동생의 사랑을 새겨 넣었다.
오래된 무덤들 최초의 해안의 유대인들이 초기에 만든 매장지에 이르자, 그는 진행 중인 장례식에서 한참 떨어져 물길을 따라 움직였으며 작고 빨간 집을 지나갈 때는 경비견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조심해서 항해 했다.
조부모의 묘지를 찾으려고 가랑비를 맞으며 십 분 동안 어슬렁 거리는 소년...
사랑하는 누구도 살아서 나오지 않는 그곳에서 작가 필립 로스의 분신이 소년 모트는 이렇게 중얼 거린다.
우리 아들이자 형 네이선, 우리의 소중한 아버지 에드워드, 남편이자 아버지 루이스를 기억하며 나의 묘석에는 사랑하는 뭐? 그냥 바로 그렇게. '사랑하는 뭐.' 데이비드 슈워츠, 조국을 위해 복무하다 죽은 사랑하는 아들이자 형제 1894-1918, 거티를 기억하며, 진실한 아내이자 충실한 친구, 우리의 아들, 열 아홉살, 1903-1922, 무명, 그냥 '우리 아들.'-필립 로스의 <새버스의 극장> 중에서
필립 로스는 평생 동안 '살아야만 하는 삶'에 대해 미치도록 집착해서 글을 썼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삶은 미국의 동부 뉴저지 어느 동네의 유대인 마을 일 수 있고, 동유럽의 심장 프라하 일 수도 있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게토 거리 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살아야 할 의지를 다지게 될까?
필립 로스는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총 서른 한 권의 작품을 남기며 노벨문학상을 제외한 미국을 넘어 세계 저명한 문학상은 거의 전부 수상 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더 이상 창작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땅 속에 묻혀 있는 자신의 핏줄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내가 여기 왔어요.'
20세기 최고의 미국 작가로 평가 받았던 제롬 샐린저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을 발표하고 반 평생 은둔한 채 살면서 펜을 놓았고 필립 로스는 다양한 국가 인종 종교인들에게 공격을 당해도 끝까지 숨거나 은둔하지 않고 쓰고 또 썼다.
매년 미국 전역에 저명한 문학 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발표 되고 있지만 다음 세기에도 필립 로스를 뛰어 넘을 미국 태생의 작가는 없을 것 같다.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거의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듯이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깁니다.'-필립 로스 (1933-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