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 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77/196
어젯밤에는 몸도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도 병이 난 것처럼 한속이 나는가 하면, 다시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밤새 내내,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아침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5/196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 ~ 2008)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수용소에 수감된 슈호프의 '어느 평범한 하루'를 배경으로 한다. 대체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이룰 수 있었던 운 좋은 하루. 수용소 밖의 사람들 시선에는 행복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는 만족해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슈호프가 마음 편하게 잠을 자고 난 후에도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온다. 그가 눈을 뜬 다음날에는 '운수 나쁜 날'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10년이라는 기간을 매번 운수 좋게 지낼 확률은 '동전 앞 면'이 3,650번 연속으로 나올 확률보다는 분명 낮을테니까. 아마 슈호프는 그렇게 평균적으로는 '그렇고 그런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수용소 군도>는 '그렇고 그런' 많은 날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저자의 다른 작품 <수용소 군도>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작품이다. 전자가 하루의 수용소 생활을 다룬다면, 후자는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거쳐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수용소 군도>의 축소판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듯, <수용소 군도>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담고 있지 않은 부분을 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10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자부심 넘치던 인간이 반복되는 수용소의 나날을 거치면서, 제로(0)가 되고 출소의 즈음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본인은 원치 않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람의 변화가 아닐까.
혁명 후 첫 10년 동안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단지 좁은 계급적 의미만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원 노릇을 단호하게 거부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모조리 가차 없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1> , p60/341
<어떻게> 하여 인간은 악인이 되고, <어떻게> 하여 선인이 되는지, 젊어서 성공에 도취된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 절대 옳다고 믿어서 잔혹했다. 지나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살인자였으며, 탄압자였다. 가장 나쁜 행동을 할 때,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형무소의 썪은 짚단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최초의 선(善)의 태동을 느꼈다. 차츰 나에게 분명해진 것은, 선악을 가르는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는 곳은 국가 간도, 계급 간도, 정당 간도 아니고, 각 인간의 마음속, 모든 인간의 마음속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이동하고 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들 마음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 악을 가진 마음속에도 선은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아무리 선량한 마음속에도 근절되지 않는 악의 한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세계의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이해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4> , p227/290
한 인간의 미래를 더 명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석방 때 느낀 <마음속의 변화>다. 이 변화는 영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위병소의 출입구에 서면, 비로소 감옥인 동시에 고향을 떠난다는 감회가 솟구친다. 자신은 여기서 정신적으로 거듭났고, 그 감춰진 마음의 일부는 영구히 여기에 남기고 가는데, 당신의 발만이 <사회>라는 말도 없고 반향도 없는 공간을 향해 가는 것이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6> , p108/220
수용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법칙 - 밀름의 법칙, 노동의 법칙 - 등은 그들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몰아 넣고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 모습이 수용소의 하루에서 보여지지만, 10년의 수용소 생활에서는 이들이 서로에 대한 투쟁상태를 어느 정도 종식시키고, 수용소의 부당한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다함께 단식투쟁을 하는 '사회계약'에 의한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수용소 생활에서 인류 문명의 진보를 찾는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도 맞지 않고 무리한 논지가 될 것이다. 다만, 적어도 연속된 게임의 법칙에서 '이기적' 행동보다 '이타적' 행동이 보다 더 이롭다는 시행착오를 통한 공감대의 형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일의 기간은 <그 일에 의해서> 결정된다. - 요컨대 그 일이 완료된 때가 노동일이 끝나는 것이다. 만약 일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에는 숙소로 돌아가지 못한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3> , p56/437
"이봐,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의 법칙이라는 것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 가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는 놈들이고,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놈들, 그리고 정보부원들을 찾아다니는 놈들이야."(p5)...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75/196
죄수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옆의 죄수다. 만일 모든 죄수들이 서로 시기하지 않고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에이!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29/196
수용소 안의 밀고는 수용소의 가장 강력한 투쟁 형식이 된다. 즉, <너는 오늘 죽어라, 나는 내일 죽겠다!> 하는 식으로.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4> , p9/290
저자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통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삶 속에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먼저 자유를 포기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잊어버리는 삶을 강요받는다. 수용소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을 살아야 하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극한에 내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삶을 강요받는 것은 죄수들 뿐이 아니라 수용소의 간수를 비롯한 구성원 전체라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현재'의 삶을 잘 그려낸 것이 바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고 생각된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에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43/196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 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슈호프가 자유를 그리워한 것은 오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단 한 가지 희망에서였다. 그런데,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74/196
그렇지만, 이와 함께 반복되는 '현재'는 우리를 알게 모르게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하루에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는 <수용소 군도>를 통해 발견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마치 바로 물이 빠지듯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콩나물 싹이 움트듯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용이 독자들이 <수용소 군도>에서의 10년에서 깊이 느낄 수 잇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집단 단식 투쟁은 혼자 하는 것보다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가장 강한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맞춰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단식 투쟁은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결행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의가 없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2> , p207/403
"하루 중에 제일 추울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야." 부이노프스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밤새껏 내려간 기온이 마지막 고비에 이를 때거든."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38/196
이런 점에서 단기(短期) <이반 데니ㅅ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장기(長期) <수용소 군도>는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온전하게 수용소의 삶을 보여주는 두 작품은 2개의 직선이 교차해서 하나의 점(點)이 맺히듯, 독자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비로소 작가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2개의 직선이 교차해야 점 하나가 생기듯이, 어떤 사건이라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개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p143)... <선을 그을 때, 직선과 곡선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직선을 긋기 위해서는 기구가 필요하지만, 곡선은 술 취한 사람이 한 발로도 그을 수 있지. 인생의 선도 이것과 같아.>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3> , p287/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