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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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 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 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 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영진은 스스로를 모성이라는 게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여겼고 ……

73p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를 유심히 보고, 가엾게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죽음과 같은 출산과 그 출산이라는 것에 딸려오는 여성에게 씌워지는 의미와 구속들.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다가오는 구속들. 그러나 저 마음의 밑바닥에서 부정하고 저항하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식의 폭력 앞에서 들키지 않으려 하면서 얼굴을 굳힐 뿐이지. 강요된 모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 인격으로서의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그 폭력은 은근하게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올 때가 많다.

아이와 간격이 벌어진 후에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에 공감한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 분신, 피붙이…… 이런 말들이 이기적이고 본질에 덧입혀진 모성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생명, 내가 보호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생명 속에 나를 닮은 모습이 발견될 때 경이로움, 신비를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강요되고 맹목적인 모성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은 결여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일.

한국전쟁 때 비극을 맞이한 가문에 홀로 남은 여자 아이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마당 눈더미 속에 던져진 자신을 안아 올리던 어머니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 다섯 살 때 동생을 업고 어른들을 따라 도망치다 논두렁에 남겨졌던 외로움과 막막함, 동생 은일을 화상으로 죽게 했다는 죄책감, 외가에서 받은 부당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끌려와 당한 수모, 탈출을 위한 결혼 등이 뒤섞여 있다. 이순일은 자신의 아이들인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가 그 일들을 이야기로도 겪게 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이 잘살기를 바랬고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잘 몰라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되뇌인다. 이순일은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고 있는 큰 딸 한영진이 사는 건물로 이사를 한다. 두 집 살림을 돌보면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순일은 딸들에게 자신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그의 바람처럼 딸들은 잘 살고 있는가?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는 이순일이 살았던 여자로서의 고단함이 되물림 되고 있다. 보여 지는 게 달라졌을 뿐.

이순일의 불행은 전쟁이나 이념갈등, 가난보다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다. 삶의 형편이 나아진 현재, 딸들이 겪는 갈등은 모습은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영진이 감당해야 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요구되어지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 모성과 유부녀로 규정 지어진 삶. 생각은 하지만 그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습관이 된 방식들이 그녀를 가두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p


한세진은 그러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삶 곳곳에 엄마 이순일이 겪었던 폭력과 수모는 여전하다. 그녀의 친구 하미영의 삶이 그랬고 미국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한 이모할머니의 삶이 그랬다. 미군과 결혼해 이주해 살았던 이모할머니의 삶에 그 그림자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포들 사회에서 규정지어지고 평가된 여자로서의 그녀는 불행했다.

뉴질랜드에서 가끔 들르는 동생 한만수는 말한다. 그곳은 여자들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고…….

과연 그럴까?

연년세세! 우리가 사는 집단 안에 흐르는 정신이 도도하다. 그 안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영진처럼 말이나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것으로 버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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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5-14 21: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영화 <미나리>에서 부인이나 할머니의 시선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

그레이스 2021-05-14 21:43   좋아요 3 | URL
그러네요!

mini74 2021-05-14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을 꼬박꼬박 붙여 이름으로 서술되는게 인상깊었어요. 가장 가까운 듯 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참 모르는 게 가족이고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치같았거든요 *^^*

그레이스 2021-05-14 22:17   좋아요 3 | URL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겠군요.
그러네요.

scott 2021-05-14 23:47   좋아요 2 | URL

저도 이름이 아닌 성까지 언급되어서 독자들이 읽을때 가족 구성원 끼리도 서로 다른 개인 이라고 느꼈네요
드라마, 미니 시리즈로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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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상황을 직접 설명해야만 하는 타자들이 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물리적 환경이 모두에게 공평해야 하지만, 어떤 소수의 집단에게는 여전히 불평등과 불편함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편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은 직접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아직은 먼저 알아서 그 불편함을 해소해줄 수 있는 지식과 시스템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타자의 불편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세심히 듣는 것을 힘들어 한다. 나 역시 그런 피곤함을 느꼈던 때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부끄러웠다.

 

이 책에는 새롭고 흥미로운, 나의 무지를 깨우치는 지식이 있다. 자신들의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음을 누르지 않았고, 정보 전달자로서 당당하게 다가왔다. 책이 끝날 때쯤 몸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나의 몸에 대한 시각으로 확장되었고, 우리 사회 전체가 갖고 있는 전근대적인 몸에 대한 신화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청각 장애인 김초엽 작가와 휠체어 장애인 김원영 변호사. 앞의 수식어가 붙지 않으면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함께 몸에 대해 쓰기로 했다. 상실되거나 비틀어진 몸, 손상된 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 몸들은 과학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그 기능을 보조하거나 대신할 기계를 몸에 결합했다. 그들은 이 몸을 사이보그라고 한다. 기계와 유기체라는 점에서 사이보그적인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책에서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과 정체성을 반추해보며, 장애에 관한 주된 과학기술 담론이 얼마간 어떤 존재들을 더 소외시키거나 그저 소비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취약한 사람들의 연대와 의존에 있어 과학기술의 의미와, 그 기술이 누구의 주도와 누구를 위해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로 한다. 이것은 장애를 위한 과학기술이 그들의 의사와 상황과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지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보청기는 웨어러블 보조기계 중 소형이고 첨단이다. 보청기는 작아지고 눈에 띄지 않게 귓속형으로 발전되어 왔다. 사실 외부로 수신기가 돌출되어 있는 것이 성능은 더 좋다. 보청기를 감추려는 의도된 디자인은 장애인을 위한 것인지 묻게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보청기를 장착하면 편하게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의해 증폭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더 불편할 수도 있다. 수어로 대화하고 정보를 문자로 바꿔주는 기기가 더 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첨단 보청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청각장애인을 비장애인의 활동 기준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휠체어는 여러 가지 성능을 장착하게 되면서 점점 커지고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발전되어왔다. 어떤 활동을 하는가에 따라 디자인과 크기도 다양하다. 스포츠를 위한 것부터 각종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전동휠체어까지. 휠체어장애인의 이동을 위한 심리스 공간 개발과 이동보조기계는 많은 발전을 해 왔으나 여전히 턱이 많다.

 

그들은 기술의 발전이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테크노 에이블리즘이나 장애를 종식시키는 미래를 약속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기술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인중심주의이다. 과학기술을 미래의 장애종식 약속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역시 현재를 살고 있는 장애인을 부조리 상황가운데로 몰아내는 것이다. 농인 및 청각장애인이 첨단 기술로 그의 목소리를 재현해내는 광고영상의 메시지는 따뜻한 기술을 홍보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청능주의Audism’이다. 가족들이 수어를 배워 소통하는 것 보다 장애인이 말을 하고 듣기바란다. 따뜻한 기술은 그 수혜자인 장애인에게 정말 따뜻한가를 물어야 한다.


장애인의 더 나은 삶은 손상의 제거치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현재 그들의 필요에 과학기술이 응답하고 접목하는 방식이 되어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 장애인에 대한 기사에서 보이는 영웅주의적 시각에 대해도 비판한다. 첨단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휠체어의 이용에 있어서도 스티븐 호킹이나 상위의 지적 노동을 하는 장애인과 장애인권 활동가인 장애인에 대한 불평등한 잣대를 지적한다.

 

그들의 몸에 대한 사유는 아름다움에까지 이른다. 탄소섬유의족을 한 에이미 멀린스의 우아한 몸매와, 치타의족을 한 육상선수 피스토리우스가 보여주는 강인함은 에너지 넘치고, 에로틱하고, 혁신적인 하이브리드적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에는 테크노페티시즘적인 시선과 상업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실용적인 몸에서 예술적인 몸으로 미학화 과정의 변증법은 현대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의 몸이 물질적 대상으로서 육체(körper)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며 세계와 소통하는 몸(Lieb)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김종갑,근대적인 몸과 탈근대적 증상)

 

김원영씨는 자신의 작아진 몸을 좀 더 보기 좋게 할 사지연장술에 대한 고민을 떠올리며, 비표준적인 인간으로 있기로 결정하기까지의 사유를 이야기한다. 이제 그는 휠체어 바운드가 된 몸에서 안정을 얻는 존재이다. 취약한 신체에 자긍심을 가지기위해서 얼마나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강한 상태란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덜컹거림을 감수하는 것이다. 단일하고 매끄러운 경험보다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큰 단차를 경험하는 데서 강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차를 운전해서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고 초록색 엑센트를 세워둔 곳에 가서, 차에 키를 꽂아 오른쪽으로 돌려 문을 연다. 휠체어에서 운전석으로 옮겨 앉는다. 좌석 시트 아래에 있는 레버형 스위치를 위로 당기면서 시트를 뒤로 눕힌다. 휠체어 위에 놓인 방석과 뒤에 걸어둔 가방을 차 안에 싣고 휠체어를 반으로 접는다. 몸을 운전석 시트에 비스듬히 눕힌 자세에서 휠체어 뒷바퀴와 앞바퀴 쪽의 프레임을 잡고 살짝 들어 대각선 방향의 뒷좌석으로 넘긴다. 시트 등받이를 원래대로 하고 똑바로 앉는다. 자동차 문을 닫는다. 운전대 옆에 키를 꽂아 시동을 건다. (마침내) 출발한다. 13초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도서관 앞에 주차를 한 후 13초 전에 했던 동작부터 거꾸로 반복한다.233-234p

이 글은 내가 마치 보고 있는 듯, 아니 내가 직접 행위자가 되어 시뮬레이션을 하게 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휠체어를 뒷좌석으로 넘길 때의 근육의 당김과 이 여러 단계의 순서가 잘못 되어서 다시 반복할 때의 낭패감, 각 단계 이음새 사이의 숨소리까지…… 너무 생생하게 그 덜컹거림이 경험되었다.


 

김원영씨가 연예인들이 한가득 모이는 공중파 방송의 시상식에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했던 순간은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최첨단 기술력이 동원된 고가의 휠체어를 타거나, 아예 휠체어에서 내려 기어가면 어떨까 하는 고민도 했다. 176p

만약 최첨단 휠체어를 타고 갔다면 테크노페티시즘적 시각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예 휠체어를 버리고 기어서 계단을 올라갔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껏해야 장애가 있는 몸으로 역경을 극복한 전형적인 이미지로 환원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에 했던 모든 서술을 이해하게 하는 그림이었다. 무심히 방임한 생각의 흐름과 느낌의 기반을 전복시키는 사건이었다.

 

김초엽과 김원영이 보청기와 휠체어에 대한 생각이 다르듯이, 장애에도 종류와 정도에 따라 다양성이 존재한다. 장애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장애 당사자가 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 예를 들어, 휠체어 장애인들을 위한 심리스 공간은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위험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되어, 장애 중심적 디자인을 하고 장애 정의와 접근성 실현을 중심에서 제외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묻는다. 보조기를 장착한 장애인의 몸을 어디까지로 인정해야 하는가?

 

내가 온전한내 몸으로 춤을 춘다면 그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인공 보철로 다리를 보완해 춤을 추는 무용수 쪽일까요, 아니면 바닥에서 두 팔로만 춤을 추는 데이비드 툴 쪽일까요? 둘 다 온전한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내 몸의 가장 자유롭고 좋은모습은 무엇일까요?-352p

다음 작업으로 이어질 고민이라고 김원영은 말한다.

 

그들의 몸에 대한 사유는 나와 현대인의 몸으로 확장된다. 매끄럽고 강인하고 우아한 몸매는 현대사회가 욕망하는 몸이고 그 몸은 자본으로 환원된다. 수치나 이미지로 제시된 몸을 우리는 욕망하고 있다. 자유롭고 좋은모습은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나는 이 글을 조금 불안해하면서 쓰고 있다. 혹시 내가 쓰는 단어나 문장이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전달할까봐. 그만큼 그동안 무지했고, 감수성이 낮았다는 증거라는 생각으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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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5-13 22: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며 저의 무지에 대해 부끄러웠어요. 그러면서 정상인에 가까워지라는 은연중의 사회적 압박 또한 그들에겐 폭력일수 있다는 것도 알게됐고요. 그래이스님 리뷰 읽으니 다시금 생각하게 되네요. *^^*

그레이스 2021-05-13 22:42   좋아요 5 | URL
다 읽은지 오랜데 리뷰쓰기 어렵고 자신없는 책이었습니다.
공감해주시니 감사해요~♡

scott 2021-05-14 0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 저의 무지에 대해 반성하며 부끄러움에 ㅜ.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인식 뿐만 아니라 시선과 언어 까지 폭력이 될수 있다는 것....

그레이스님 리뷰가 아니였다면 평소에는 물론 이런 생각 전혀 안하고 살고 있었네요

그레이스 2021-05-14 10:35   좋아요 3 | URL
예! 맞아요
글쓰면서 용어가 적합한가? 찾아보고 확인했어요.
이 책에 대해 딸과 이야기 하다가 버릇처럼 수화 라고 했다가 지적당했어요.^^
순간 용어에서부터 문제가 있는 저에 대해 반성했어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용어를 무심히 사용하지 않았나 하고.

바람돌이 2021-05-14 01: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장애를 이해하기는 정말 어려운것 같아요.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어느정도 어딘가에 충분치 못한 무언가를 다 가지고 있잖아요. 저도 이 책을 읽고 좀 더 장애에 대해 공감지수를 높여야 겠다는 생각이 막막 드는 리뷰였습니다. ^^

그레이스 2021-05-14 10:36   좋아요 3 | URL
노년에 이르러 청력 시력에 장애가 오고, 이동장애를 경험하는 예를 들더라구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몸의 상태요
올리버 색스가 교통사고로 병상에 있을때 환자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던 것들도 생각나고...
어느정도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레이스 2021-05-14 13:56   좋아요 1 | URL
우리모두 장래에는 사이보그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몸을 지니고 있죠.

고양이라디오 2021-05-14 18: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연년세세>에 대한 리뷰에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저만 소설을 잘못 읽었나 싶었는데 위안이 많이 되고 그레이스님 댓글에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1-05-14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어보면 많은 사유를 하게 될 책이군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14 18: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식사하고 조금있다가 연년세세 리뷰 카피해서 올려보려구요

붕붕툐툐 2021-05-14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원영님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너무 감명깊게 읽었던 지라 이 책도 너무 기대가 되네요!!🙆

그레이스 2021-05-14 23:32   좋아요 1 | URL
예 그책도 좋은데 그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좋아요
 

수전 손택의 서문중에서 발췌
쿠체(쿳시)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언급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쿳시의 작품이 더 소설적인 요소가 더 많다.
다른 느낌이다. 픽션보다는 팩트에 가깝다는 느낌이다.일기를 바탕으로 구성했으므로.
현재의 치프킨의 여행과 잘 짜여져서 흥미롭다.

바로 이 사실성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주인공으로 한 뛰어난 소설인 쿠체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와 이 소설이 다른 점이다.

비록 치프킨이 모든 것을 ‘정확‘ 하게 기록하려는 강박이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의 아들에 따르면 그는 매사에 대단히 꼼꼼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다큐 소설이 아니다. 만일『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출판한다면, 치프킨은 자기가 찍사진들을 함께 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그의 소설은 작가 시볼드의 작품을 앞선 것이 된다. 시볼드는 사진을 책에 함께 실음으로써, 핍진성(眞性)이라는 단순한 요소가 수수께끼 및 파토스와 공존할 수 있도록 했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어떤 종류의 책인가? 시작부터이 책은 이중적인 서사를 보여준다. 
하나는 12월 말의 겨울로, 날짜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현재‘의 시간이다.화자는 레닌그라드(한때의 그리고 미래의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 안에 앉아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867년 4월중순을 배경으로 한다. 재혼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페쟈)와 그의 젊은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 도스토예프스키 부부의여행 —소설 속에서는 대부분 바덴바덴을 포함한 해외가 배경이다. — 에 대한 서술은 아주 세심하게 재현되어 있다. 치프킨 자신이 화자로 나와 자신의 궤적을 묘사하는부분들은 자전적이다. 때문에 상상력과 사실성이 대비된다. - P19

치프킨이 재창조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도박도 글쓰기도 신앙도 아니다. 그것은 저 괴롭고도 절대적인 부부애였다. 바다를 헤엄치는 것에 비유된이 부부의 섹스 장면은 잊기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안나의 저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위엄 있는 사랑은, 문학적 후예로서 치프킨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바치는 사랑과 겹쳐진다.
창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한편으로는 또 모든 것이창작된 것이다. 이 짧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행위는, 화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소설이 이루어진 장소를 찾아가면서,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를 천천히 실감하게 된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다른 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실존 인물의 생애를 복원함으로써, 희귀하고 뛰어난, 그리고 야심적인 소설 하위 장르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 실존인물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실패한 소설가의 이야기와씨줄 날줄로 엮인다. 그는 역사적이면서 기념비적인 존재가 된 그 인물의 운명과 내면적 삶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사례로, 20세기 이리아 문학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안나 반티의 『아르테미시아를 들 수 있다.)- P21

만일 당신이 러시아 문학의 깊이와 매혹을 경험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을 택하려 한다면, 바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만일 당신이 영혼을 단련하고 당신의 감각과 호흡에 더넓은 지평을 제공하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2001년 7월수전 손택-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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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종종 벌어지는 일이 네흘류도프에게도 일어났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역설적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농담처럼 보이던 것들이 점차 삶의 확신으로 나타났고, 결국은 그에게 있어 가장 단순한 부동의 진리가 되었다. 그래서 인류가 고통받는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은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죄인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한다든지 교화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을 이제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마태복음18장을 읽던 주인공 네흘류도프에게 일어난 각성의 순간이다.

왜 우연히 펼친 성경에서 마태복음18장에 끌려 들어갔을까?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목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6)

라는 구절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으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아왔고 무죄함에도 죄수의 신분이 된 여인 마슬로바에게 참회하기 위해 유형지까지 따라가면서 네흘류도프는 동행하는 죄수들을 보며 고뇌한다. 저마다 유형수가 된 이유가 무지하고 가난함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특히 무죄한 자들이 유형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조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가난과 무지한 농민들, 마슬로바와 같이 무죄하나 힘이 없는 자들이 그에게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을 죄짓게 하는 존재는 부패한 국가, 귀족, 자기와 같은 지주일 것이다.


탐욕과 죄가 가득한 사람들이 만든 법과 권력은 다른 작은 자들의 죄를 교화할 수 있는가? 죄를 죄로 다스릴 수 있는가? 네흘류도프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답을 찾는다.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네흘류도프는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선 목자의 심정을 유형지의 정치범들의 동정과 사랑에서 보게 되었고 사랑만이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슬로바의 결정은 어쩌면 네흘류도프를 훨씬 자유롭게 하고 그의 삶을 확장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결정에 네흘류도프도 슬프고 당황했지만, 그녀의 결정 속에는 그를 향한 사랑과 더 큰 용서가 있었고, 그는 그의 삶을 앞에서 말한 약자들에게 헌신할 결심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것이 1만 달라트를 탕감 받은 자의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고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하는 사랑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3

 

그는 결심한다. 마슬로바에게 참회하기로 하면서 시작했던 일, 토지를 파는 일부터 시작했던 정의를 실천하는 일을 위해 계속 전진하고 확장시킬 것을 결심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명의 주인이며, 생명은 우리의 쾌락을 위해 부여된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보내졌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살기로 결정한다면, 주인의 의지를 이행하지 않는 포도밭 농부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셈이 된다. 주인의 의지는 이 계율들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계율을 실천할 때에만 지상에 신의 왕국이 건설되고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은혜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곁들여 받게 될 것만을 구하고 있으니아마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내 필생의 사업은 바로 이것이다이제 한 가지 일이 끝나고 다른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생활 즉 부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문학은 사상과 윤리를 제시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사상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182512월에 러시아 귀족층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일어난다. 이들을 12월 혁명당원(黨員)이라 한다. 러시아어()12월인 데카브리에서 유래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군은 파리로 입성하고(1815), 러시아 젊은이들은 파리에서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과 정치에 영향을 받게 된다. 사실,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는 프랑스 혁명 발 자유주의가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참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군대의 젊은 장교들에 의해 혁명을 맞이했다.

이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세우고, 전근대적인 농노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이 혁명은 실패하고 많은 당원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 혁명은 젊은 지배계층 지식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러시아의 문학계도 이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푸시킨의 경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경험과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골리와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은 러시아 농민의 처참한 삶과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정신이 19세기 문학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트만은 18세기 러시아 문학과 독자들의 관계양상을 책에 따라 살기라고 표현했다. “독자들에게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 것이 요구되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인들은 개인성, 자유, 도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종류의 철학적, 이념적 사유를 문학으로 표현했다. 18세기 이후(푸시킨 이후) 러시아에서 철학자나 비평가, 정치가나 법률가, 언론인이나 역사가가 담당했을 문제가 문학의 대상이 되는 두드러지는 현상은 제정러시아의 현실을 역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러시아 중엽에 비평가 벨린스키는 러시아인을 책을 읽는민족으로 정의한 바 있다. “오직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자만이 러시아 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민족을 결정짓는 요인은 피도 계급도 아닌 독서의 재능인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작은 인간은 같은 계급의 프랑스인과 달리,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그 대신 그가 꿈꾸는 것은 훌륭한 글쓰기이다. 러시아에서 작가는 언제나 일종의 비공식적 권력, 말하자면 두 번째 정부로 간주되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의 통치자들(예카테리나 2세부터 레닌에 이르기까지)역시 부단하게 스스로를 문학가로 표상하려 시도해왔다. 레닌은 문학 비평가, 스탈린은 언어학자였으며, 흐루쇼프는 현대예술 비평가였고, 브레즈네프는 직접 소설3부작을 썼던 작가였다. 요컨대, 문학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문학보다 언제나 문학보다 어떤 것이어야 했던 러시아 문학은 철학적 사유의 시험대이자 사회 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며, 민족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미래를 향한 예언의 기초였던 것이다.

-김수환, 책에 따라 살기-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25~26p

 

삶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고의로 뚜렷하게 긋지 않는그들의 태도를 가리켜 벌린은 윤리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가 현대문학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지나간 시대의 계몽주의적인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문학을 읽은 뒤, 삶이 뒤따르는 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독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책만 읽을 뿐 뚜렷한 삶의 궤적이 없는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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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11 20: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책에 따라 살기>표지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전쟁직후 모습인가봐요? 어디선가 본것 같기도하고요. 저 상황에 책을 둘러보고 있다니...ㅠ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저의 일부는 러시아인♡ 좋은데요?!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5-11 22:52   좋아요 4 | URL
저도 표지를 보고 감동받았어요 ^^
예 미미님은 러시아인.

mini74 2021-05-11 21: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 적 가요무대에서 나오던 카튜사의 순정? 이란 노래 들으며 카튜사가 누굴까 궁금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문장을 쓰고 잠시 다짐 ㅎㅎ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생각합니다 *^^*

그레이스 2021-05-11 22:53   좋아요 5 | URL
고민의 흔적이 삶에 배어들겠죠?!

그레이스 2021-05-11 22: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제 기호학 책 얘기 나누다가...
오늘 로트만을 인용하게 되네요.^^

새파랑 2021-05-11 22: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 <부활> 정말 좋아요~! 이 책 읽고 나서 책임질 줄 아는 삶에 대해서 생각했었는데, 다시 까먹고 살지만 ㅜㅜ 삶이 뒤따르는 독서를 하고 싶지만 쉽지는 않은 같아요. 저도 다짐만^^

그레이스 2021-05-11 23:10   좋아요 3 | URL
하지만 우리는 삶이 뒤따르지 못하게 하는 세상보다는 깨달은 내용대로 살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기울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5-12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 작품에 강조되는 ‘그리스도의 사랑‘ 은 갑작스럽게 전류처럼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불교식으로는 ‘돈오돈수‘가 될까요... 분명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감작스럽게 모든 갈등을 뒤덮으며 사랑으로 마무리 짓는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마땅히 해야하는‘ 당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레이스 2021-05-12 01:04   좋아요 2 | URL
예 톨스토이 작품에는 대부분 그렇죠.
전쟁과 평화도, 안나 까레니나도 사랑이 모든 것을 덮는 내용이 나오죠.
갑자기 설교조가 삽입되기도 하구요.
사랑은 톨스토이의 주된 사상이었다고 생각해요. 삶(사상)이 문학이고 문학이 삶이길 추구했던 작가여서 그런듯요.
저도 당위로 느껴져서 그 부분은 소설 같지가 않았어요. 글은 아름답지만.
그런데 그가 추구하는 사상을 실천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 현실과 사상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겨울호랑이 2021-05-12 07:2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개인적으로 톨스토이를 좋아하지만, 작품 인물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톨스토이‘의 그림자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느낌이랄까요... 대체적으로 저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해서 읽으려 하는 편입니다만, 그레이스님 말씀을 듣고보니, 톨스토이는 다르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덕분에, 새롭게 배워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12 10:53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는 톨스토이로, 고골리는 고골리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로 읽죠.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더 끌려요!
댓글 주셔서 덕분에 저도 이런저런 문학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앞부분만 올려봐요.
예를 들어가며 설명도 하고 여러 언어학자 ,기호학자 들도 소개하고 있어요.
저도 마저 읽어봐야겠네요.^^

기호학이란 뭘까요?
심리학이 인간 심리를 다루는 학문이고 역사학이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듯, 기호학은 기호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정의하기는 쉽지만, 정작 기호학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만큼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비단 기호학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어떤 분야든 가장 먼저 문제시되는 것은 역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용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호(號)‘란 무엇인지, ‘학(學)‘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합해진 ‘기호학‘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일은 분명히 쉽지 않을 겁니다. 혹 기호학에 입문하려는 사람이 기호학 전문서적에 나오는 수많은 전문용어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면 그것은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처음 만난 상대를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너무 쉽게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에서도개념을 너무 쉽게 정의하고 그 정의를 의심 없이 진실처럼 받아들이지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호‘나 ‘기호학‘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데 그저 백과사전을 찾아보거나 하루 만에 끝내는~‘ 이라는 방식으로만들어진 책을 읽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개념들은 쉽게 정의할 수 없기에 스스로 탐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만큼 이해하고 활용하면 됩니다. 이 책은 그렇게 기호학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 P17

첫째, 이 세상을 기호로 본다는 것은 이 세상을 표현된 것과 표현한것의 관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곧 인간의 문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자연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 거기에 문화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수만 년 동안 갈고 닦인 바위 하나가 숲 속 어디엔가 있다고 합시다.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연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문화의 일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호로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 기호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 기호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요. 적어도 우리가 어떤 것을 기호라고 부를 때에는 대상 자체에 표현하는 성질이 있거나,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는 성질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관점과 대상의 문제를 말하면서 밝혔듯이 표현하는 성질이 있다.
는 것과 표현하는 성질로 인식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된 관념이라 할 수 없습니다.- P23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말로 구조의 성질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처럼 바위가도구적인 의자도 될 수 있고, 정신적인 명상의 매개도 될 수 있다는 유연한사고를 보여줍니다. 바위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바위가 놓여 있는 상황의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는가가 중요한데, 바로 거기에서 기호로서의 성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위가 그러할진대, 인간이 앉으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의자니 종교적 숭배를 위해 세운 성상 같은 것이 내포한 기호학적 성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의자는 성상이든 어떤 목적을 위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을 창조했다면, 이야말로 각각의 독특한 표현을 갖춘 문화적 산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문화라면 이런 문화가 생성되는 과정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논리를 찾아낼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바로 기호학이 하는 일입니다.
- P25

둘째, 기호학은 모든 것을 기호로 치환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서로 연관 짓게 하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문학을 설명하는, 그림을 설명하든, 음악을 설명하든, 아니면 영화를 설명하든, 이들을 기호학적으로 설명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호학은 기호로서 이들의 공통된 성질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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