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라는 일의 성격으로 보아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게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그래(147p)”

애티커스 판사의 말이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이 소설의 마지막 사건에서 반전을 만드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층위가 있다. 한 층위는 스카웃과 젬의 일상 속 사건들과 그들의 시선에 비친 메이콤의 어른들의 모습이다. 이웃집 부 래들리에 대한 소문이 첫 번째 사건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비행으로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갇혔다. 직업학교에 보내라는 판결을 거절하고 집안에 가두는 것이 아들을 보호하려는 뜻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판단은 아들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광견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개를 사살한 애티커스의 신중함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예단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려는 태도다. 앞으로 있을 메이콤 뿐 아니라 앨러바마 주를 떠들썩하게 할 재판을 전망하는 사건이다. 애티커스가 변호하는 톰의 재판이 또 다른 층위다. 정황과 증거가 무죄임에도 유죄선고를 받는 흑인 톰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mockingbird,흉내쟁이 지빠귀)는 죽이지 않는다는 명제는 제목 ‘To kill mockingbird’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깨진다. 위험의 가능성 때문에 사살되는 개는 그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애티커스의 망설임은 과연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기준은 옳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는 편견과 두려움의 대상들이 등장한다. 부 래들리, 듀보스할머니, 톰이 그들이다.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편견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밝혀진다. 등장 인물들과 익명의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타자화 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 대상이 된다. 사물들의 관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판단하여,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인식틀은 동일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동일성 밖에 존재하는 타자들을 만들어낸다. ‘이성이라고 이름지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영역도 왜곡되고 오히려 그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게이츠 선생님이다. 박해는 편견에서 나온다며 히틀러를 비판하던 그는 법정에서 나오면서 흑인을 향한 증오를 내뱉는다. 이것이 메이콤에서 벌어진 재판의 다른 모습이다.

 

변호사로서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았던 애티커스 변호사는 톰의 유죄 판결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부 래들리의 정당방위 사건을 재판에 넘기지 않고 덮기로 한다. 사법 정의에 대한 신뢰가 깨졌음을 보여준다. 청소년기에 재판을 받았던 부 래들리, 그리고 그 후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무성했던 그가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이 결정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사법을 믿지 못하는 법조인’, 생각해보면 참 흔한 말이다. 사실은 모두가 사법에서의 정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의심은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사법(司法)이 있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론 불안함을 떨쳐버리고 그 정의에 기대보기도 한다. 왜 불안할까? 역사나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그것이 완전하지 않음을, 완전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법철학과 관련하여 검색하다 우연히 읽게 된 철학적 사유와 인식시리즈 중 법적 실증주의와 자연법 사상 비교를 읽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법과 실정법이 어떻게 대립되고 상호 보완되어 왔는지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한 책이다. 참 쉽게 읽히지만 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실정법과 자연법이 대립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가치는 국가의 법보다 상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긴장 관계를 처음으로 철학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크리톤과 안티고네의 비극에서도 나타난다. 홉스는 법 실증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당성은 도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주권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이 법 실증주의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의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해왔다. 그러면 오늘날 과연 재판은 법 조항에 의해서만 판결이 내려지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워킨의 생각이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은 인간의 보편정의가 실정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재판장의 판결에 법 조항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사법에서 실정법과 자연법의 오래된 갈등의 역사를 읽다 보면, 법에서 정의라는 것이 참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입법과 사법의 과정에서 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는 개혁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히틀러의 법률가들은 법의 전문가들이 어떻게 전체주의와 독재에 입법과 사법을 통해 정당성을 부여했는가를 보게 해준다. 실증주의를 악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는 보편적인 인간애, 도덕 등의 자연법이 실정법을 이기는 사례들을 보여 준다.

 

개혁과 변혁은 거센 저항이 있게 마련! 지치고 흐려진 눈을 똑바로 뜨고 오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본질을 알려면 역사를 쭉 훑어보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5-10-28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어느 때보다 사법 정의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들이지만, 현실에서의 사
법 정의는 집행자들에 의해 요원해져
버렸습니다.

선동된 편견과 두려움은 항상 개혁과
변화의 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항 없는 개혁이 존재할 수 없는 것
처럼 말이죠.

그레이스 2025-10-28 20:21   좋아요 0 | URL
시간이 갈수록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번엔 반드시 이뤄지길 염원합니다
!!!!!
 

샀습니다.
알마 출판사 책인데,,, 배팅사이트에 오늘까지 1위였다는,,,
제목이 강렬하네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나리자 2025-10-15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 발표되던 날 1800부가 팔렸다고 좋아하는 기사를 봤어요.
표지 색도 강렬하네요!

그레이스 2025-10-28 08:56   좋아요 1 | URL
이제야 댓글을 읽네요.;;
모나리자님도 벌써 읽고 계실듯요

레삭매냐 2025-10-28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려 7년 전에 산 책이지만
두 번 읽다가 완독에 실패했습니
다.

두번째는 완독할 줄 알았는데...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형님의
만연체에 그만 넘어져 버렸습니다.

이 양반 연설문도 그러더라구요.
숨도 안 쉬고 말쌈을 하시는 걸까요?

그레이스 2025-10-28 20:23   좋아요 0 | URL
^^
사탄탱고는 그래도 좀 읽을만 한듯요! 나름 상징적 메시지도 있구요.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홀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이스라엘 거주 현대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웃음을 주지 못하는 한 코미디언의 말,,, 지금 팔레스타인 지역 평범한 유대인들은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아이러니한 세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떠올라 그로스만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것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5-10-09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노르웨이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했으면, 흠... 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문학성이고 뭐고 하여간 눈치만 보게 되는군요. 세상에 이런 문학상이라니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5-10-09 20:51   좋아요 1 | URL
^^;;

2rjfnr 2025-10-10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시도해봐야겠어요 .~~^^♡♡

그레이스 2025-10-10 14: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세트] 빌레뜨 1~2 세트 - 전2권 창비세계문학
샬롯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그들의 공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빌레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샬럿 브론테의 가장 명백하고 절망적인 페미니즘 소설이고 주인공 루시 스노의 이야기는 아마도 지금까지 여성의 박탈을 다뤄왔던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이며 무시무시하다고 했다.

 

빌레뜨의 화자이자 주인공 루시는 체념적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고 런던을 경유해 바다를 건너 빌레뜨로 가는 그녀의 여정을 보면 그녀는 충동적이고 욕망에 즉각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여행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수동적인 듯 보이지만, 당시 낯선 곳을 향해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면, 그렇게만 볼 수 없는 타고난 기질이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황야를 떠나자.” 그런 말이 들렸다. “그리고 이제는 나아가자.”

어디로?” 그리고 떠오른 물음이었다.

멀리 볼 것도 없었다. 풍요로운 영국 중부의 평야에 있는 이 시골 교구에서 나는 육체의 눈으로는 아직 본 적이 없는 그곳을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처럼 떠올렸다. 런던이었다.

- 빌레뜨 15. 66-67p

 

그녀가 마치몬트 여사의 시중을 들 때나 빌레뜨의 기숙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복종과 침묵으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려 한다. 이 태도는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가끔씩 드러나는 충동적 행동과 반발은 숨겨져 있는 욕망을 엿보게 한다.

 

영국에서 가정교사나 하녀 그리고 빌레뜨의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루시는 가부장 사회의 구속을 내면화한다. 단조롭고 위장된 모습으로 뒤로 물러나 고통을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그런 태도로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다는 것과 자신 안에 있는 욕망으로부터 그녀가 될 수 있었던 모습, 의미, 목적, 정체성 힘 등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직관적일 수도 논리적일 수도 있다.

 

그녀가 이방인으로서 도착한 빌레뜨라는 도시는 가부장적 전통과 구교의 계율이 어둡고 강력하게 지배하는 곳이다. 그 지배 방식은 비밀스럽고 음모적이다. 성적인 범죄를 당한 수녀가 묻혀 있는 오솔길, 죽은 영혼이 나타나는 다락방, 교장의 감시와 검열이 그것이다. 산책길과 다락방은 그녀의 유폐된 욕망을 상징한다. 주검이 묻혀 있는 산책을 즐기고 다락방에서 비밀을 즐기려는 그녀의 충동은 억압과 부딪힌다. 두드러지지 않게 조용히 존재하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모두가 피서를 떠난 텅빈 도시에서 심리적 불안을 느낀다. 양가감정이다. 욕망과 죄의식으로 인해 분열을 일으킨다.

 

기숙학교 교장 베끄 부인이 루시를 감시하고 그의 사물을 몰래 뒤지고 검열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참고 묵인하는 루시는 역으로 폴리나와 지네브라와 베끄 부인을 관찰한다. 그녀에게도 관찰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감춰진 존재이다.

 

존 그레이엄 브레턴의 편지를 기다리는 그녀는 이성상상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성과 감정이 아닌 이성과 상상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외적인 행동이 아닌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갈등인 것이다. 수동적인 삶의 태도이다. 이성은 우리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주로 금지로 지배한다. ‘감정상상도 왜곡될 수 있지만, ‘이성도 왜곡된다. 통제와 억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이성은 왜곡된다. 그녀는 이곳 빌레뜨에서 어떻게 그 지배를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의 신분을 벗고 동일성 아래로 들어갈 것인가?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던 기숙학교로부터의 해방은 뽈 에마뉴엘로부터 왔다. 진정한 해방이라고 볼 수 없다. 뽈은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한 남자다. 그녀의 재능과 지적 능력을 발견하고 고양시킨 사람이지만, 현대의 눈으로 보면 그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한계를 경험하는 부분이다. 그를 사랑하는 루시는 또 다른 지배 권력에 예속된다.

 

한편 뽈 역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의 희생자이다. 구교의 신부에 의해 마치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듯 보이고,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또한 루시를 사랑하는 그를 멀리 떠나보내려는 외적인 방해와 금지 보다 출몰하는 유령에 의해 심리적인 억압을 당한다. 그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함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지만, 한편 돌아온 후 루시와의 사랑이 이루어진 그 이후의 시간이 더 걱정스럽다.

 

명백하고 절망적인 페미니즘 소설이고 여성의 예속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자유쇄신을 얻었다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사랑에 얽매이고 조바심을 내는 그녀를 본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외 시키고 타자화 하는 듯하다. 그 관계가 불평등할 때 더욱 그렇다. 전통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랑은 여성을 더욱 예속시킨다. 오늘날엔 무엇이 여성을 타자화하는지. 나는 자유로운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에 의한 것인지 질문해 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5-09-30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레뜨가 도시 이름이었군요. 전 사람이름인줄 알았습니다... 요즘 살롯 브론테의 작품이 많이 보이네요~! 어느시대나 사랑이 문제입니다~!!

그레이스 2025-09-30 12:36   좋아요 1 | URL
샬럿이 머물렀던 브뤼셀을 가상 도시로 해서 이름을 빌레뜨라고 붙인듯요
불어로 작은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찾아보지 않아서,,,,) 이해했습니다^^
네 사랑이 문제이면서도, 여전히 욕망하는 것이죠^^

페크pek0501 2025-10-01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2권을 읽고 뿌듯하셨겠습니다. 저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1, 2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1을 읽고 나면 2을 안 읽을 수 없죠. 여성은 끝까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자기 몸을 지켜야 하는 것만 해도 그래요. 절에 가서 3년간 공부를 한다고 칩시다. 남자나 가능하지 여자는 불가능하죠. 밤마다 문을 잠그고 자도 불안할 것 같아요. 늘 나쁜 남자를 의식해야 하는 것, 형벌 같습니다. 스스로 형벌을 받는 거죠. 제가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밤길 조심시켜야 하고 등등. 불편한 게 많아요.

그레이스 2025-10-03 06:49   좋아요 1 | URL
^^
저도 딸이 있어 말씀 공감 가네요.
그러지 않아도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읽어야겠다 생각중이었습니다.

독서괭 2025-10-12 0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예속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설… 진짜 제인에도 그렇고 빌레뜨도, 여자 혼자 홀로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ㄱ레이스님은 제인에어와 빌레뜨 중에 어느 작품이 더 좋으셨나요?ㅎㅎ

그레이스 2025-10-28 17:48   좋아요 0 | URL
제인에어를 먼저 읽어서 그런지 제인에어가 더 나았습니다.
샬럿 브론테의 작품들은 자기복제같은 느낌을 주네요.
일단 감금되고 유폐되고 주검으로 묻혀있는 고딕적 요소가 있죠^^
 

 암스텔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책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암스텔담 국립 미술관(Rijksmuseum Amsterdam)을 보고 싶었다. 17세기 전성기를 이뤘던 네덜란드 미술사를 읽기 위해 찾아본 책들 중에 시선을 끌었던 책이었다. 표지 그림이 램브란트의 유대인 신부여서 눈길이 갔고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읽기라는 부제도 당시 내가 알고자 했던 주제와 딱 맞아떨어졌었다.

 

내밀한 미술사의 첫 번째 장은 브뤼헐의 풍경화로 시작하고 있다. 얼어붙은 운하 위 사람들의 풍경은 한겨울에 그 많은 사람이 활동하는 것도 놀랍지만, 썰매를 타고, 놀이를 즐기고,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타는 연인 등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활력을 보여주고 있어 경이롭다. 그 속에 세심하게 그려진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인물을 발견하는 순간 탄식한다. “! 여기……!”하고 말을 멈춘 채 오랜 응시를 하게 된다. 브뤼헐이라는 이름과 함께 얼어붙은 운하 위 사람들의 풍경은 그렇게 각인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품에 대한 수요 급증의 원인과 그에 따른 화가들과 그들의 작업실과 작품 시장에 미친 영향과 미술론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저자는 램브란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페이메이르도 소개하고 있다. 램브란트에 비해 남긴 작품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페이메이르를 서로 견준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BBC에서 사이먼 샤마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이 위대한 두 명의 화가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청중들이 모의투표를 벌였다는 기이한 장면은 급부상한 페이메이르의 위상을 시사한다. 저자는 페이메이르의 작품 수가 많지 않은 이유를 그의 작업 스타일에서 찾고 있다.

 

마지막은 램브란트의 초상화의 주인공 얀 식스와 그 가문의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 <얀 식스의 초상화의 주인공이고, 램브란트의 친구인 얀 식스는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다. 정치적 역량과 예술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였다. 그는 램브란트가 파산한 뒤 돈을 빌려주고 그의 작품을 사주었다고 한다. 그가 소유했던 미술작품을 유산으로 이어받은 그의 자손들은 그 작품들을 보존해왔고, 현재 11대 식스가 관리하고 있다.


 암스텔담 국립 미술관에서 단연 관심을 갖고 본 것은 램브란트와 페이메이르의 작품이었다. 고흐 미술관에서도 기대하던 그림들을 보게 되어서 국내 전시회에서 볼 수 없어 느끼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항상 겪는 경험이지만 미술관에 직접 가서 보면, 처음 목적과 달리, 다른 작품들이 새롭게 다가온다는 사실! 이번에는 프란스 할스(Frans Hals)였다. 그의 초상화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초상화 속 인물들 눈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도 그렇지만 특히 프란스 할스의 작품 속 인물들의 눈동자는 성격과 말을 담고 있다. 그 눈동자를 오래 동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면 목과 손목에 둘러져 있는 주름 잡힌 얇은 레이스가 들어온다. 하얗고 투명하게 비치는 레이스의 디테일 묘사에 감탄하는 관람자들을 여럿 보게 된다.

하를렘 골목을 돌아다니다 마주친 프란스 할스 뮤지엄(Frans Hals Museum)의 정경과 잘 가꾸어진 중정의 모습은 그가 17세기 미술에 중요한 화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민병대 집단 초상화와 어느 기사의 초상화 등 주인공들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들의 눈은 한시도 말을 멈추고 있지 않고 있다. 수다스럽다. 그 앞에 서면 그들이 저마다 외치는 큰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램브란트의 야간경비대는 유리로 막아놓은 방 안에 복원 중인 상태로 전시되어있었다. 가까이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기대했던 페이메이르의 여성들! 첫 번째 인상은 생각보다 작품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눈이 시릴 정도로 옷의 푸른색이 작품 전체를 압도한다. 디테일한 화가의 붓질에 몸은 점점 앞으로 기울이게 되고 감탄하며 그 앞에서 떠날 수가 없다. 내가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가 아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스키폴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맡기고, 트램을 타고 아침을 맞는 암스텔담을 통과해 중앙역까지 갔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청소하는 사람들, 가을빛이 든 나무들, 유럽식 테라스로 장식된 낮은 높이의 공동주택과 빌딩들이 운하와 다리들과 어우러지는 풍경에 감탄하게 된다. 8월 중순의 암스텔담의 인상은 가을이었다. 카메라는 예쁜 건물들과 운하와 다리와 오가는 배들을 향했지만 앵글은 그 실루엣을 만드는 파란 하늘에 초점이 맞춰졌다. 짙푸른 하늘빛은 페이메이르의 그림 속 여인의 치마 빛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를 고집한 이유를 해지기 전 더욱 짙푸른 하늘에서 찾게 된다.

 짧은 일정 때문에 브뤼셀에 갈지, 쾰른엘 갈지 동생과 아이들과 고민하다 이번에 안가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쾰른을 선택했다. 도이치 반을 타고 다녀오는 하루 일정이라 아침 일찍 출발해 밤늦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기차역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쾰른 성당이 웅장한 몸체를 드러낸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솟은 첨탑과 짙은 색의 건물이 내뿜는 아우라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이 무장한 창 기사의 이미를 떠올린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고딕의 전성기 3대 고딕 성당에 포함되는 건물이라고 한다. 고딕식 성당의 외부에 초기나 중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벽이 잘 보이지 않고, 프랑스처럼 장미창이 보이지 않았다. 내부로 들어가면 높은 기둥과 천정의 첨두아치리브볼트가 돋보인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월도 시선을 끈다. 아미앵의 높이와 생 샤펠의 장식을 들여와 더 발전시켰다고 한다. 호엔촐레른 다리에서 바라본 성당은 잊지 못할 풍경이다. 쾰른을 선택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다.

 돌아와 고딕 성당의 역사와 구조 지역마다의 특징들을 다룬 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을 읽고 다시 복기했다. 책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란 생각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매일 숙소 앞에 있는 암스텔 파크에서 산책했다. 6시가 지나면 달리기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요트와 카누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자체가 풍경을 이루어 평화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도대체 이 여행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왔을까 생각했다. 소매치기, 마약 등을 떠올리며 출발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은 여기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공기도 너무 좋고, 깨끗하고 친절하고하며 이유를 댄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본 암스텔담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생활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음엔 어디를 어느 미술관엘 갈까? 갈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