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회화 초상화론에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말이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한민족대백과사전)”는 뜻이다. 동진(東晋)의 인물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화가의 고민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서 단토는『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개념에 관하여 설명하며 1831년에 발표된 미지의 걸작을 예로 들고 있다. 대가 프렌호퍼가 화가 포르뷔스의 그림을 보며 평하는 장면이다.

 

자네의 성녀를 보게, 포르뷔스. 처음 보면 성녀는 근사해 보이네. 하지만 두 번째 보면 그녀가 그림의 배경에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육체를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네. 이것은 단 하나의 면만을 가진 실루엣이고, 절단된 외양이며, 뒤돌려 볼 수도, 위치를 바꿀 수도 없는 이미지일 뿐이야.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물론, 투시법상으로 모든 게 좋아. 대기원근법도 정확히 지켜지고 있고. 하지만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름다운 육체가 따뜻한 생명의 숨결을 받아 생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미지의 걸작78p)”

 

대가 프렌호퍼는 포르뷔스의 이집트의 마리아가 생명이 없는 이유는 그가 데생과 색채 사이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푸생과 루벤스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엄밀한 냉정함과 눈부신 격정, 엄격함과 풍요로움 사이에서의 선택은 세잔 이후 화가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이다. 프렌호퍼의 모델이 누구일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추측을 하지만 한 예술가를 꼽기에는 복합적이다.

 

단토는 프렌호퍼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포르뷔스의 작품에 몇 번의 붓질을 하여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장면에서 이 생명은 정신의 개념을 의미한다고 한다. 세잔으로부터 입체주의와 현대의 호크니, 고흐로부터 표현주의, 마티스로부터 로스코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의 반복되는 작업과 실험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일 것이다. 노화가 프렌호퍼의 작업과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뒤에 올 화가들이 수없는 붓질을 통해 찾은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미지의 걸작에는 이제 막 자신만의 화법을 찾아가고 있는 푸생과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려왔고 어느 정도 명성은 얻었지만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포르뷔스와 대가(大家) 프렌호퍼가 등장한다. 푸생에게 비친 프렌호퍼는 예술가의 본성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였다. 그의 천재성과 광기는 악마적인 어떤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프렌호퍼의 작업실에 초대되고 그의 작업과 작품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프렌호퍼의 완성하지 못한 작품에 대해 알게 된다. 프렌호퍼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작품의 모델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연인 질레트에게 노화가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푸생과 자신의 화폭에 그려진 여인을 보여주는 것은 끔찍한 매춘이라고 하는 프렌호퍼의 생각은 대비(對比)를 이룬다. 프렌호퍼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피그말리온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야! 나와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여자이지. 자네는 내가 십 년 동안의 행복을 외투를 내던지듯 갑자기 버리길 바라나? 갑자기 내가 아버지이자, 연인이자, 신이 되는 것을 그만두기를 바라나? 이 여자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나의 창조물이야.(116p)”

 

질레트를 모델로 프렌호퍼는 작품을 완성하고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는 푸생과 포르뷔스는 처음에는 그 화면에서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만 보이고 여인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한 구석에서 벗은 발의 끝부분을 찾고, “그 발은 색깔과 색조, 불분명한 농담(濃淡)들의 카오스로부터, 즉 형태 없는 안개 같은 것으로부터 삐져나와(미지의 걸작128p)” 있는 것을 본다. 두 화가는 프렌호퍼의 도취 상태를 모호하게나마 납득하기 시작한다.

 

내 작업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모사와 윤곽선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자네에게 얘기했던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걸세. 가슴의 빛을 보게. 어떻게 내가 아주 두텁게 칠한 일련의 터치들과 하이라이트들로 진정한 빛을 획득하였는지, 또 어떻게 그 빛을 밝은 색조의 반짝이는 흰색과 결함시킬 수 있었는지 보게나. 그리고 어떻게 상반되는 작업을 통해 돌출 부분과 물감의 우둘투둘함을 지우면서 반-농담에 잠긴 내 인물의 윤곽을 공들여 다듬었는지, 그 결과 어떻게 데생의 인위적 수단의 개념까지 없애버리고 인물에게 실물 그 자체의 모습과 둥근 형태를 줄 수 있었는지 살펴보게.( 129p)”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포르뷔스에게 하는 프렌호퍼의 설명은 가까이는 인상파의 그림을, 더 나아가 세잔으로부터 시작된 야수파와 입체파, 현대미술의 도래를 예언하는 듯이 보여 놀랍다. 이 설명을 듣고 푸생이 그는 화가라기 보다 시인이라고 한 말과 지상에서 우리 예술이 끝나는 군(미지의 걸작129p)”이라고 한 포르뷔스의 말은 개념미술과 아서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떠올리게 한다.

 

발자크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작품에서 구현했느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그가 미술을 완전히 알고 전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 이전 푸생과 루벤스의 논쟁을 통해 예술가들의 고민과 그 갈등이 가리키는 예술의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푸생을 사랑하기에 프렌호퍼 앞에 선 질레트를 묘사하는 단어들이 독자인 나를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한다. “강도들에게 유괴당해 노예 상인 앞에 끌려온 순진하고 겁먹은 조지아 처녀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태도”, “수줍어하는 듯한 홍조” “눈을 내리깔았고.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두 손을 허리 곁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수치심에 가해진 폭력에 저항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미지의 걸작121p)” 그런 그녀를 보고 프렌호퍼는 놀라고, 푸생은 아름다운 보물을 그의 창고에서 꺼낸 것에 절망하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프렌호퍼의 작품 안에서 찾아낸 조형을 바라보고 감탄하던 푸생은 구석에서 잊고 있던 질레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질레트는 푸생을 경멸한고 증오하고 있다고 울부짖는다. 화폭을 바라보는 푸생을 보며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깨닫고 절망하는 질레트는 당시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여성들의 소외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누드모델의 감독은 이 지점에서 사유를 확장시켰을 거라 생각된다. 원하는 포즈을 요구하는 노화가에게 내가 찾겠어요라고 하는 마리안의 대응은 발자크의 질레트로부터 더 나아간 것이다.

 

노화가가 요구한 포즈, 거기에 자신의 창조물인 여성의 이미지, 그 화가의 정신이 있다. 그 포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리고 마네의 <올랭피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과 자세에 대한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비너스의 탄생>베누스 푸디카는 정숙한 여인의 자세로 여겨졌다. 그녀가 서있는 조가비가 사라지게 되면서 바닷가에 누워있는 비너스를 그리게 되고, 그것은 다시 <우르비노의 비너스><올랭피아>와 같은 변화된 이미지들을 생산해냈다.

 

시선의 불평등에서 특별히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여성에게 강요된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들과 성적이 성숙에 대한 억압이 지속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 논리를 전개한다. 미술과 주류 이미지에서 비너스의 몸은 오랫동안 인간의 성과 욕망을 탐구하는 합리적인 틀이고 보이지 않는 규범(시선의 불평등59p)”이 되었다. 성적 욕망을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고, 남성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누드 작품에서의 여성의 포즈, 배경에 그려진 사물들이 지시하는 의미들은 오랫동안 여성에게 폭력적이었다.

 

발자크의 작품을 볼 때마다 에필로그가 달려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그가 인쇄소까지 쫓아가서 그 자리에서 고쳤다는 작품에 대한 조바심이 습관의 결과물이 아니가 생각한다. 아직 발자크에게는 자신이 낳은 작품을 독자에게 맡기는 자유로움과 성숙함이 없었을까?

 

미지의 걸작의 첫 번째 버전(프렌호퍼 선생)은 질레트의 울부짖음으로 끝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뒤에 내용이 덧붙여졌다. 노화가와 작품의 마지막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까지 읽었던 발자크의 에필로그나 추가된 부분 중에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내용이다. 처음의 엔딩이라면 질레트에게 시선이 모아지게 될 것이다. 발자크는 노()화가와 그의 걸작에 시선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 역시 시대의 감옥에 갇혀있던 작가이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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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다른 분들이 왜 김홍도에 관한 이런 책을 못내는지 알것 같다. 조선 미술사에서 김홍도 챕터는 대부분 이 책을 인용하고 있는듯. 상세하고 도판이 충분히 담겨있어 이 화가를 공부하기엔 아주 좋은 텍스트다. 다시 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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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01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몇년 전에 오주석님 ‘한국의 미 특강‘이랑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읽었는데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 김홍도는 이 책이 찐이군요! 절판이라니 안타까워요.. ㅠ

그레이스 2024-07-01 18:2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한국미술사 공부하면서 중고책으로 샀어요 ^^
 
왜 우리는 쉽게 잊고 비슷한 일은 반복될까요? - 기억하는 사람과 책임감 있는 사회에 관하여
노명우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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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세월호 이후 바뀔 인문학의 방향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변화가 올 것임을 기대하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동의했고 기대했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었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가 알고 싶어 했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무력감과 무심함과 패배의식만 가득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만큼은 변했다고 증명하고 설득하려 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은 애써 외면하는 피로해진 얼굴들이다.

 

열광했던 인문학은 바람 빠진 공처럼 그 탄성을 잃고 늘어져 있는 것 같다. 당시 우리를 지배했던 자본의 권력에서 자유하게 될, 모두는 아닐지라도 나를 포함한 누군가는 그렇게 될, 방법이라 여겼던 공부는 의미를 상실한 채 습관과 자기만족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임에서도 그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한다. 상대방을 피곤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또 다른 재난들이 이어졌다. 무력감을 느끼며 거리두기와 버티기를 해야 했던 팬데믹과 그 재난들을 동일한 범주에 넣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또 다른 참사 소식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다. 내 마음 때문에.

 

노명우 작가는 이 책에서 세월호 사건에서 물어야 했던 ?”라는 질문들을 계속 해야 하고, 그 물음 끝에 답을 얻어야 한다고 당위를 주장한다. 우리는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이 침몰한 공동체의 재난이기 때문이다. 낙관론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세상의 어두운이면을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고통이 되풀이 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20세기 제노사이드의 시대를 열었던 1915년 튀르키에서의 아르메니아인들 학살과 1948년 제주 4.3 사건, 1989년 힐즈버러 스타디움 참사와 2022년 이태원 참사, 1978년 미국 러브 운하환경참사와 2023년 현재 7,891명의 피해자가 등록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그 재난이 닮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소개 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대체 왜 재난은 되풀이 되는 것일까? 그것도 같은 원인과 결과로.

 

대체 재난은 왜 끊이지 않고 되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그 자체로 악을 품고 있는 존재여서 그 폭력성이 학살이라는 재난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길을 걷다가 영문도 모른 채 압사당하고,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목숨을 잃고, 건강을 염려해 권장하는 대로 가습기 소독을 하다가 생명을 잃고, 신도시로 이주했다는 이유로 삶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의 악운과 가혹한 운명을 탓해야 할까요? (59p)”

 

우리가 인간의 역사에 쌓여 있는 이 재난의 파국 앞에서 그 원인을 개인의 운명이나 잔혹함으로 돌려 버린다면그 재난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시야를 넓혀서 그 재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매커니즘을 규명해야 하고 그 반복되는 작동을 중지 시켜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에 진보가 더해지는 개선이 아니라 비극에 비극이 더해지는 파국의 역사(63p)”라고 한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한다. 아르메니아의 제노사이드는 파국의 시작이었고, 이후 인류의 역사 속에 홀로코스트(1945~48), 난징 대학살(1937),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1975~79), 르완다 내전 중 투치족 집단 학살(1994), 보스니아인 학살(1995) 등 수많은 집단 살해가 반복되었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기 전 그 사회에는 이미 그런 일이 가능해질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다. 희생자인 유대인들조차도 이 전조를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참사의 경우도 재난의 전조가 있음에도 그 경고를 알아채지 못할 때 일어난다.

 

눈을 멀게 하는 권력은 무엇일까? 결국 그 시스템을 만든 권력이다. 세월호 당시 많은 소문들이 있었지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전조가 있었음에도 눈을 멀게 했던 자본의 권력에 분노했다.

 

1969년 인도 보팔의 미국의 유니언카바이드공장에서 일어난 가스 누출 사고는 24일 일어난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는 노동력의 수요와 공급이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의 희생이라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공장 건물 붕괴로 천여명이 숨지는 방글라데시의 재난 현장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을 수 있다. 반복되는 참사와 재난을 지배하는 힘은 자본이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그 매커니즘을 알았다고 해도 그 거대한 힘에 맞서 중지시킬 힘이 있을까?

 

1789년 윌버포스가 영국 하원에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첫 번째로 상정했다. 오랜 시간 자료들을 수집하고 거듭 법안을 상정하고 설득했다. 그의 의회 연설은 정의에 가득 차 있었고 강한 설득력이 있었지만 대다수 의원들의 마음은 불편했다. 윌버포스가 제시한 사실에 동요되기는 했지만, 노예무역 폐지가 경제적 재앙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가 앞섰다. 이 법안이 통과되고 노예제가 폐지 된 것은 1833년이었다. 무려 4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윌버포스라는 한 사람의 각성으로 시작하여 그와 함께 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함께 한 결과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욕망이 모여 만들어진 시스템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단 없는 투쟁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때로 무력감에 휩싸여도 공부하자. 그리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도 할 말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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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6-30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형 재난(인재)이 일어나기까지 100가지가 넘는 징후가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걸 다 무시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다 침묵해야 비로소 일이 터진다는 거겠죠. 자본주의의 횡포와 파괴력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그런데 정작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고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힘이 없고 다수는 권력을 선망하거나 두려워하고...어렵네요.

그레이스 2024-06-30 23:44   좋아요 1 | URL
ㅠㅠ
그렇죠
미미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그 거대한 권력 아래 있는 것을 절감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는 없는일!

독서괭 2024-07-01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스템.. 그렇죠.. 무력감에 휩싸여도 공부하자, 는 그레이스님 말씀을 새겨야겠어요.
세월호 참사도, 이태원 참사도 그 충격이 컸는데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새 잊고 있고 ㅠㅜ 잊지 않게 하는 이런 책들도 계속 나와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4-07-01 19:19   좋아요 0 | URL

작가와의 만남 다녀왔거든요.
4월이었던것 같은데,,, 그때는 4월에만 이런책 올리나 싶어서 나중에 잊을만하면 쓰자 했다가,,, 이번에 또 화성화재 같은 사고가 또 일어나네요 ㅠ
그래서 올렸습니다.

젤소민아 2024-07-06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당선,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4-07-06 08: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메르카데는 투기자다.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사뒀다가 오르기 시작하면 매입자를 속여 되팔아 넘기는 수법으로 돈을 번다. 그의 투기 형태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았다. 자신의 경제 상황과 사업 능력을 포장하고 은행과 채권자에게서 끌어온 자본으로 거대한 투기장에서 이익과 자리를 획득한다

 

메르카데 : ……오늘날 하나의 주식은그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당장 수익이 보장되는 종목이라면 할 만한 거야! 사람들은 미래를 팔아, 불가능한 행운의 꿈을 복권으로 팔 듯이. 그러니까 증권 시장 회합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날 도와주게, 거기서 그 꽉 막힌 속을 뚫어 보세! 이보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주 어렵게 그걸 찾아내, 하지만 노리지 못하면 결코 찾지 못한다네.(194p)”


그가 하는 투기는 현대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Project Financing)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오늘날에는 그것이 법으로 보호되고, 더 규모가 크고계획적이며, 실물이 아닌 보이지 않는 금융 경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PF는 사업의 미래 가치만으로 수천억원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이것이 메르카데의 시대로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방향이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윤리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 경계들이 존재한다. 메르카데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법과 윤리의 경계들이 서로 별개인 것처럼 보인다.

 

메르카데는 채권자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그의 파산에 대한 주변인들의 반응과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드 라 브리브와 딸 쥘리를 결혼시키려는 그의 계획은 그 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돈의 권력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나타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결혼은 돈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문명 뒤에 감춰진 야만성이다.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먼에서 돈은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늙은 것을 젊게만들고, 심지어 문둥병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도록만들며, “늙은 과부에게도 젊은 청혼자들이 오게 만든다(아테네의 타이먼43)”고 말한다. 돈의 능력을 저주한 타이먼의 말을 인용하며 맑스는 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고병권은 화폐, 마법의 사중주에서 이것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의 돈에 대한 예속을 말한다.


메르카데와 그의 친구들은 고도가 다시 돌아오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 믿고 기다린다. 고도는 메르카데의 동업자였다. 그는 도망치듯 떠났다. 그후 메르카데는 고도로 인해 이익을 보기도 했다. 그들의 기다림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메르카데는 고도는 전설에 불과하고 허구”, “유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248p) 고도는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그를 본 사람들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고도의 귀향은 그들의 상황을 회복시킨다.

 

한편, 고도는 직접 등장하지 않음으로 이 소설에서 다중적인 상징을 갖고 있다. 고도는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권력)이다. 투기를 하는 그들에게 호황과 불황을 가져오는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그 부침은 고도의 도주와 귀향처럼 갑작스럽다. 고도는 캘커타에서 돌아왔다. 이것은 당시 유럽이 식민지로부터 배를 불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발자크의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발자크는 메르카데의 가정과 그의 딸 쥘리와 가난한 아돌프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자본주의를 그려가고 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이들처럼 돈이라는 큰 권력 앞에서 굴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은 자본주의이다. 또한 메르카데를 속이고 정략결혼을 하려는 드 리 브리브의 욕망은 돈과 언론과 정치가 한몸처럼 묶여 있는 시대의 부조리를 시사하고 있다.


곱세크는 고리대금업자다. 화자는 곱세크의 소송대리인으로서 목격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이야기한다. 곱세크와 고리오 영감』에서 드 레스토 백작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다. 곱세크에게 돈을 빌리는 백작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담보로 취한 물건들로 방을 가득 채우고 죽어간 곱세크와 같은 인간이 있다. 두 유형 모두 돈의 지배를 받는다. 돈은 그 사람들의 욕망, 거짓을 드러내어 파괴하고 냄새를 풍기게 한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등장하는 당시 모든 인물들이 겪는 문제들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화폐에 새겨진 숫자의 가치를 믿는 믿음, 오늘날로 말하면 통장에 적혀진 숫자와 마그네틱 카드를 판독기에 넣음으로 지불했다는 믿음은 이상하고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이 믿음만으로 무엇을 지불하기도 하고, 내게 이만큼의 재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밀튼 프리드먼은 모든 화폐제도는 어떤 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허구에 불과한 것을 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듯 그 허구는 쉽게 깨지지는 않는다.

 

화폐는 일종의 허구이다. 왜 우리는 그런 허구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삶의 조건으로서 그런 허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왜 우리는 그런 허구적 존재에 지배받고 있는가.(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 23p)“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사기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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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6-17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곱세크, 빌려서 결국
못 다 읽고 반납한 기억이...

비트코인이 허구라는 건 확실
히 알겠는데...
말씀해 주신 대로 통장에 숫자
로 기록된 무언가가 자신의
자산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
다.

그레이스 2024-06-17 13:09   좋아요 1 | URL
^^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우상이고 고도와 같이 보이지 않는 무엇,,,,
우리는 그것에 사기를 당하기도, 스스로 사기꾼이 되기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곱세크는 스크루지를 연상하게 해요!
 
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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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외모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노력해서 나아질 수 없는 조건을 갖고 있는 아이는 체 게바라를 형님이라 부르고 혁명을 동경할 수밖에! 청소년은 난쏘공을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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