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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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원제“Tyranny of the Minority(소수의 독재)”를 번역한 것이다. 소수가 권력을 갖게 되고 한 집단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과 폭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대부분 마이너리티는 지배 의지 보다는 한 공동체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고 평등한 지위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 그러나 극단적 소수는 특정한 이념과 폭력적 행동으로 그 집단을 지배하려 갈등을 일으킨다.

 

극단은 그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그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상식이다. 그들 지도층은 그 결여를 정치 행위나 법, 언론 등으로 호도한다. 그러나 그들을 따르는 군중에게서는 비상식, 불법, 허위, 비논리, 폭력 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 안에 고립되고 응축된 에너지는 권력 획득을 위해 이용된다.

 

이들이 지배세력이 되려 한다면 무엇인가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법이든 상식이든 여론이든. 그 집단의 양심에서 일어나는 회의를 걷어내기 위해 합법적인 전략을 세운다. 히틀러를 앞세운 나치당이 소수였지만 독일의 지배 권력이 되는 과정에서 법률가들이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다.

 

작가는 19-20세기, 프랑스나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소수가 권력을 잡거나- 때로 실패하면서- 정치 지형이 변화되는 역사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사법부가 정권의 꼭두각시가 되고, 언론에 대한 규제법을 만들어 합법적 탄압을 하면서 장악하고 지배를 넓혀간다. 헌법적 수단을 통해 성숙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는 모습은 오래된 각본이고 오늘날도 유효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현실과 유사하고, 그 해법이 오래 걸리고 때로 무력해서 답답하다.

 

작가는 남북전쟁 이후부터 트럼프 집권 시기까지 소수집단이 권력을 획득하고 다수를 지배한 미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재건시대 이후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아직은 소수당이었던 민주당이 취한 전략들이 그것이다. 헌법이 보장한 정치 활동과 소수 집단의 폭력은 미국이 다인종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첫 출발을 지체하게 했다. 이후 남부에서는 한 세기 동안 민주당 독재가 이어졌다. 이런 양상은 더욱 교묘해졌지만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정치적 지형 변화에 따라 그 스탠스는 공화당에게 넘어갔을 뿐이다.

 

극단적 소수의 집권은 독재나 압제로 흐르고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파괴시킨다. 다수는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던 많은 규칙들이 와해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규범들 때문에 속수무책이 된다. 민주주의 위기 앞에서 그 시스템이 스스로를 지킬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작가는 투표권 확립과 선거 제도의 보완과 지배하는 다수의 힘을 강화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에 적용된 것이지만 그 맥락에 있어 우리도 다르지 않다.

 

오랜만에 간 동네 미용실에서 원장님과 서로 안부를 묻고 자연스럽게 내란과 조기대선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계엄 당일 날 밤, 코인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그분은 계엄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야당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논리와 상식이 없는 말들에 당황해서 듣고만 있었다.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근거를 묻자 잘 모르고 계시네!”라는 말과 함께 격앙된 말들이 돌아왔다. 동네 이웃인데다 나는 머리를 맡기고 있는 상황이라 논쟁하지 않고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통신사 명의 도용 뉴스를 이야기하며 원장님은 괜찮으시냐고 했더니 마침 그 통신사라고 했다. 걱정하는 말끝에, 내가 이용하는 다른 통신사가 거론되고, 그 통신사가 중국 부품을 사용한다고 하며, 다시 중국을 비난하는 말로 이어졌다. 이후의 대화에서 나는 거의 침묵으로 대응했다. 대화는 잘 마무리하고 웃으면서 돌아오긴 했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왠지 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만난 극단적 소수가 된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의 생각이다. 아마 그분은 그 대화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입 다물게 한 것은 비논리와 비상식인데, 내 침묵은 상대를 의기양양하게 한다. 합법적 전략과 정치 행위로 포장된 허위와 폭력을 수용하는 대중을 보았다. 그들은 사법과 언론을 이용해 권력을 지키려는 방식을 의심하지도 않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증오와 혐오의 대상에게 분노를 돌림으로 더욱 결집한다.


그들 내부에 힘을 응축시키는 것은 극단이라는 메커니즘이다. 고립은 그것을 더욱 강하게 하기에 봉쇄와 배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상대를 적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를 극단으로 밀어놓고 고립시킨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평화롭게 넘겨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세우는데 방해하는 정신이다.

 

그래서……며칠 후 나는 지나는 길에 미용실 문을 열고 간식을 드리면서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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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전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 다섯수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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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그 의미가 실감나는 어제 오늘이다.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
「페어 플레이는 뒤로 미루어야 한다」라는 글에서 루쉰은 물에 빠진개, 특히 자신이 직접 때려서 물에 빠진 개에 대해서는 몽둥이로 물 속에서 호되게 때려야 하며, 모든 악한 세력과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반드시 지구적인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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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루쉰 책을 보니 제가 읽은 루쉰 단편집이 생각나는데 꽤 두꺼운 책을 5분의 4쯤 읽은 것 같아요. 내용이 혁명적일 것만 같은데 소소한 이야기도 있고 재밌어요. 얼른 완독해서 독서 노트에 써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레이스 2025-05-04 14:06   좋아요 1 | URL
저도 루쉰단편 읽고 있어요 ~~
 

작가의 색채 이미지들은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다. 노랑무늬 영원이나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희랍어 시간에서도 빛과 색채 표현의 예민함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그녀의 회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엿보인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화가가 흰 종이 위에 먹과 색이 번지고 스며들게 하는 등의 작업 묘사는 더욱 그렇다.

 

작가의 색은 특정한 상징과 정서를 갖고 있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정희의 꿈에 등장하는 흰 새, 빽빽하게 내리던 미시령의 폭설, 먹이 번져가던 흰 종이 등 모두 죽음을 연상시킨다. 소년이 온다에서 시체들을 덮는 무명천, 머리에 감겨져 있는 하얗게 빛나던 붕대 등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 흰 새들로 착시를 일으키는 폭설, 주검 위에 쌓여 녹지 않는 눈, 흰 뼈들, 하얀 앵무새 등으로 밀도 있게 다가오는 흰 색의 이미지에 숨이 막힌다.

 

흰색은 죽음을 상징한다. 차갑고 투명하고 무겁고 두렵다. 이 흰색의 이미지들로 작가는 초혼(招魂) 혹은 진혼(鎭魂)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위기나 정서 때문에 낯설고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죽음들의 상황과 증언을 은폐했기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초혼과 진혼은 어두운 현실과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생각한 작가 앞에 막아선 것은 아직 따스하고 투명해 질 수 없는 빽빽한 흰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망월동 묘지에 내리던 눈, 꿈속에서 벌판을 채우던 성근 눈. 그것들은 작가를 추적하고 써야할 숙명처럼 다가온다. 꿈은 파도에 휩쓸려 쓸려가기 전에 아직 뼈들이 무사할 때 쓰라고 한다.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작별하지 않는다26p)” 작가는 생각한다. 시간이 없다고, 써야한다고.

 

카프카의 경우처럼 꿈은 작가에게 고통이기도 하다. 쓰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과 같은 무의식의 문을 여는 고통의 행위이다. 그 책을 마치면 그 꿈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대는 오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다른 꿈들로 이어지고, 다시 다른 문을 열어야 하는 숙명 앞에 서게 된다. 그렇게 소년이 온다』 『』 『작별하지 않는다진혼곡들이 탄생한다.

 

“2012년 겨울,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이 담긴 꿈들이었다.(작별하지 않는다17p)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작별하지 않는다23p)“

 

처음 두 책을 읽는 동안 중단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두 번째 독서에서 나는 작가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과정을 보는 듯 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없고서야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에서 작가는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빛과 실)“고 한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형식은 다르지만 주제로는 연결되는 작품이다.

 

출간 순서와는 다르게 을 나중에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소설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고, 이 지점은 두 소설을 아우르는 어떤 메시지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두 소설에서 해결되지 않는 고통과는 다른 어떤 밝음이나 따뜻함을 느꼈다. 에서 흰은 나의 흰과 그녀의 흰으로 나뉘어진다. 그녀는 세상에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떠난 언니다. 화자(작가)는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 ’-강보, 배내옷, 소금, 얼음, , ,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그녀’-성에, 서리, 날개, 주먹, ,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 소금, ,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등-과 댓구와 평행을 이룬다. 이들은 모든 에서 통합된다. 각각의 흰 것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대응하면서 한 편의 긴 시를 만들어간다.

 

오래 전 세를 얻어 이사했던 집의 철문에 날카로운 무엇으로 함부로 새겨놓은 녹슨 ‘301’호라는 글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문을 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행위로부터 나는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 사람의 밖에 보이는 상처를 떠올렸다. 돌보지 않고 함부로 대했던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타나는 상처의 흔적, 성격이나 습관으로 나타나는, 때로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주면 낫게 될, 아니 나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다.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완전히 재가 되었었던 흰 도시라 불리는 바르샤바에서, 그녀는 자신 안에 그리고 도시의 타인들 안에 있는 상처들과 고통의 기억들을 흰 것들의 이미지를 통해 찾는다. 그것은 기억에 남은 언어의 파편일 수 있고, 사물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배추의 속살 같은 연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언니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는 의미는 타인 어쩌면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그녀가 되어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바르샤바의 많은 이들이 총살되었던 벽 앞에 모인 넋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앞에 밝혀진 초는 넋들을 위함이 아니라 초를 켜놓은 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살육당한 역사는 수치가 아님을 믿는 그들은 그렇게 오래 애도를 연장한다. 고국에서 일어난 일들과 죽은 자들이 받지 못한 애도를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건을 생각한다. 개인이라는 작은 범주에 사용할 단어를 국가라는 큰 범주에 사용할 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자신의 재건에 빠진 것이 있었다. 고국에도! 그녀 자신 안에 있는 상처들이 여전히 총알의 파편처럼 박혀 있음을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서 아문 듯 보이지만 나은 게 아님을 가리킨다.

 

총살의 벽 앞에서 고국의 애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할 일들을 다짐처럼 생각한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109)”

 

바르샤바에서 흰쌀밥을 지어, 그 앞에 기도하듯 앉아있는 그녀, 그 밥은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아님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 거기서 나는 생에 대한 의지, 위안을 느꼈다. 따뜻한 밥에서 흰 김이 오르는 장면에서 사랑을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작가는 이 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빛과 실」) 에서 잠깐 보여줬던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따뜻한 글을 기다려본다. 세상이 그런 글을 쓸 만큼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따뜻해지길!

 

신형철 교수는 강의에서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 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壽衣)가 타고 있더라는.(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프로이트의 꿈 이야기를 하며 고통스런 꿈을 꾸는 또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아직도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분들을.

 

작별하지 않는, 작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 우리의 오늘이 미래를 살릴 수 있기를!

반복되는 초혼과 진혼이 아닌 애도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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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4-29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한강 작가님 칸이 따로 있어요.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레이스 2025-04-29 15:30   좋아요 1 | URL
많은 분들이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5월이 오네요!

페크pek0501 2025-04-30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소설로는 세번째로 여수의 사랑, 을 읽고 있어요.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보다 더 문장력이 빼어나다고느꼈어요. 역시 노벨상을 탄 작가는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그레이스 2025-04-30 12:27   좋아요 1 | URL
잘 쓰는 작가들은 단편이 더 좋더라구요. 밀도있고 !

새파랑 2025-05-01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한강작가님 책탑~!!
한강작가님의 작품을 읽다보면 좀 괴로운 부분이 있는거 같아요 ㅋ 정상적인 생활이 안됩니다~ 문장이 너무 아픕니다~ 다음번에는 <흰>을 읽어야 겠습니다~!!

그레이스 2025-05-01 09:04   좋아요 1 | URL
맞아요.
한동안 헤어나오기 힘들어요.
그래도 <흰>에는 결심 같은 것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어요.
더구나 작가의 시선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바르샤바의 역사적 비극을 향한다는데서, 매몰되지않는 느낌, 긍정적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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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가 떨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던 나의 마음속에서 철커덕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소설은 이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듯하다. 형기를 마치고 유형지를 떠나던 날 그의 다리와 손을 연결해 묶고 있던 사슬을 푸는 장면!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10년 동안 항상 몸에 붙어 있던 것이었음에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물건은 그에게 생경한 외형과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족쇄 자체의 무게만이 아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읽혀진다.

족쇄를 풀고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바라보는 이 행위는 유형 생활의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화자의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인간의 자유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퍼포먼스다. 독자로서 이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일원이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이후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더구나 사형장에서 벌인 황제의 반인륜적 처형놀이는 그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군사재판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지 4년 징역과 사병복무 형을 언도받는다.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용소 병원의 원장과 초소 위병들의 배려로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작가의 일기중 이 시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직접 경험한 많은 사건들과 감정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부 서론으로 시작한다. 서론에서 기록자(전달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이주민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 고랸치코프의 수용소 일기를 선별하여 옮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서론은 소설의 형식인 것이다. 다음 11장부터 화자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다. 그는 살인죄로 10년 형을 살고 나와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화자(주인공)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에서 작가 자신살인범에서 정치범으로 바뀐 듯 보인다. 이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경험한 4년의 수용소 기억이 그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서 주인공을 타인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스트예프의 삶에서 이 경험이 그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품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가 불안정하고 불안한 심리, 특정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같은 부정적 심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용소의 풍경을 그리며,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반복하는 화자의 말은 인간 존재의 진실이라는 동의와 동시에 비참한 수용소 환경에 대한 역설로 다가온다. 부친 살해범, 아내를 죽이고도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죄수, 쾌락을 위해 살인하는 사람, 굶어죽지 않으려고 살인한 죄수, 태어날 때부터 산적질이 생업이었던 공동체와 가족의 일원이었던 타타르족 소년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같은 감옥에 갇혔다. 농노, 평민, 귀족 계급도 상관없다. 수용소는 그들의 변수와 차이를 없애버린다. 기결수와 미결수, 형기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미결수란 아직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죄수를 말하는데 이때 형은 체형을 말한다. 몇 천대의 태형을 받은 죄수의 경우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나누어 받는 동안 그는 형장과 수용소 병원을 오간다. 그 기간 동안 그 죄수가 겪게 될 불안과 공포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형 집행 전날 자해나 폭력행위로 시간을 벌려는 시도에서 그 극단적 공포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가 죄수로서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분명한 가시적 이미지가 바로 족쇄다.

거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철선 네 가닥을 서로 세 개의 고리로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그것들은 바지 밑에 차게 되어 있었다. 혁대는 중간의 고리에 매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거꾸로 그것을 루바쉬까 셔츠 위에 직접 입는 허리 혁대에 고정시켜야 했다.”

처음 그것이 채워졌을 때의 무게, 소리, 불편함이 묘사된다.

 

그는 감옥 생활의 첫날부터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봄이 오는 4월 노역을 나간 죄수들이 먼 들녘을 바라보며 어떤 초조함이나 충동적인 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쉬는 한숨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초원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족쇄에 갇혀 있는, 시들어 가는 영혼을 달래 보려는 한숨이다.

 

목욕장에서 족쇄를 한 채로 옷을 벗는 화자의 어설픈 동작, 벗은 몸에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목욕하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들, 병원에서 폐병으로 죽어가는 죄수들의 깡마른 몸에도 족쇄에 채워져 있는 모습, 족쇄가 채워진 채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라고! 족쇄는 단지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족쇄란 하나의 수치심이며 굴욕이고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자에게도 과연 형벌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수용소에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중은 한 치도 고려되지 않는다.

 

대재기(大齋期, 러시아 정교에서 부활절 전 6주 동안의 근행기)가 끝날 무렵 죄수들이 조별로 교회에서 하는 재계(齋戒, 고백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러시아 정교 의례)의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경험이 그의 삶에 일으킨 변화의 심리적 근원을 보게 된다. 죄의식!

 

사제가 두 손에 성배를 들고 < ……그러나 우리를 강도들처럼 여기소서>라고 기도서의 한 구절을 읽자, 모든 죄수들은 이것을 말 그대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며,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도, 살인죄로 이 곳에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엎드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들이 죄수임을 각인시키는 시청각 효과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갑자기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곤 갑자기 마치 어떤 기적에 의해 내 가슴 속에서 모든 미움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걸으며 내 눈에 들어오는 얼굴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작가의 일기도스토옙스키 75p)”

 

작가는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죄수들에게서 유년시절 그에게 친절을 베풀던 농부 마레이를 떠올린다. 사형선고와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및 강제복무 이후 그는 심리· 철학·윤리·종교적 관점에서 인간과 민중의 문제에 천착하고 죄와 벌·악령·백치·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역작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비인간적 경험을 겪은 그의 삶에,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감정에 연민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형기를 마치는 날, 익숙해지고, 어찌할 수 없는 신체의 일부쯤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던 족쇄가 풀어지고 낯선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죄수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했던 제도, 관습, 프레임으로서의 관념들을 벗어나 그 억압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진부한 질문인 듯 느껴지지만 내 인생의 족쇄는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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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8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코의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가 이 작품을 각색해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 <죽은 자의 집에서>를 작곡합니다. 저도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읽었는데 많이 다르더라고요. 자기도 한 문장 한다, 생각하는 작곡가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5-04-18 21:01   좋아요 1 | URL
아!
이걸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많이 다르다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레삭매냐 2025-04-18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도끼샘의 <카라마조프> 읽고
나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1:04   좋아요 0 | URL
그 소설이 제일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종교적 내용이 많아서!
제겐 아직까지 <죄와 벌>이 최고입니다.
다시 읽어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5-04-30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익숙해지는 것 맞는 것 같습니다. 시체 바로 옆에서도 밥을 맛있게 먹더군요. (실제 경험을 쓴 책인데 요즘 제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 책 제목은 언급하지 않겠음ㅋ)

그레이스 2025-04-30 12:25   좋아요 0 | URL
네 그런듯요.
ㅠㅠ
 


 

선고유예!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카프카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이다. 요제프 K는 선고를 받기 원하지만 판사도 만날 수 없고, 법정도 찾을 수 없다.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판별하는 예심 판사만 만났을 뿐이다. 법정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있지만 문지기가 막고 서있는 역설 역시 인간의 상황이다.

 

카프카의 소송에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없다. 주인공이 혼자 있는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조명이 켜지듯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문고리를 잡은 손 위에 어떤 손이 얹어져 있고 갑자기 시야가 넓어져 그 손의 주인을 의식한다. 마치 꿈을 기억하듯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여기엔 어떤 인과관계도 설명도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 없음은 주인공 요제프 K 혹은 카프카의 꿈과 무의식을 수면위로 끌어올려 드러내고, 그의 억압과 실존의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존재하는 사회의 부조리들을 비판하면서 K의 꿈과 심리, 작가의 깊은 내면까지, 깊이 들어가며 여러 층위의 의미를 형성한다. 한 장면에서 다층적 해석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의 뒤편에 자리 잡은 꿈과 같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상의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꿈과 같은혹은 신비한, 또는 환상적인이야기를 독자의 눈앞에 실재인 것으로 제시하고, 실재적인 수법을 사용해서 설명한다고 미하엘 뮐러는 프란츠 카프카-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낯선 자들이 이른 아침 갑자기 요제프 K를 찾아오고 소송과 체포를 선언한다. K는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마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스치듯 언급하지만 그 소송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집행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것이다. 그럼에도 K는 오히려 먼저 예심판사를 찾아간다. 여기서 그 존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죄의식을 상정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에는 그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거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와 삶의 부조리를 의미하는 행위들과 사물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읽다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을 받고 되돌아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많다.

 

소송 사실을 통보받고 잠시 방 안에 홀로 있게 되었을 때 K가 침대 옆 탁자에서 집어먹는 예쁜 사과(17p)”는 선악과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방이나 다른 공간이 아닌 하필이면 뷔르스트너 양의 방에서 낯선 자들에게 취조를 받는 것이나, 심문받기 위해 그 방의 한가운데로 옮겨진 그녀의 탁자(20p)”K의 성적 욕망 혹은 죄의식을 암시한다.

 

왜 이렇게 K에게서 억압된 욕망과 죄의식을 읽게 되는가? 라고 물으면서, 카프카의 삶을 소환하게 된다. 그가 믿든 안 믿든 유대교는 정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신앙적 전통은 그의 생활과 문화의 배경이 될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금지법과 죄를 해결하는 의식(儀式)의 종교다. 깨끗한가 부정한가, 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율법과 유전이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법정이 주거지 안에 위치하고, 화가의 화실 문을 열면 법원 사무처가 나타나는 장면은 이 신앙적 배경에서 기인된 작가의 심리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K의 죄의식과 판결을 받으려는 시도들은 법정이 가까이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도무지 무죄이든 유죄이든 선고로 이어지지 못한다. 카프카의 해결 받지 못한 심리적 모순 상태와 더 나아가 인간의 부조리 상태를 보여준다. K가 법정을 찾아 지나가면서 어쩔 수 없이 우락부락하고 불량한 소년들(52p)”의 놀이를 방해하게 되었을 때, 그 소년들의 화난 얼굴들은 작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십대의 상처를 보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 선고에서는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저주를 받은 뒤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함으로 그 판결을 실행해버리는 이야기는작가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억압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 고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친의 이 선고로 아들이 자살하는 결론은 역으로 아들에게 있는 부친살해의 무의식적 욕망을 엿보게 된다. 카프카의 이런 무의식에 대한 예민한 포착은 죄의식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아들이 아버지의 선고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K가 심판을 받기 위해 법정을 찾고 변호사를 찾고 브로커를 찾는 상징적 행위의 의미다.

 

뷔르스트너 양에 대한 상상과 법원에서 만난 여자(72-73p), 변호사 비서, 화가를 따르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성적 욕망과 수치심을 엿본다.

 

카프카에게서 관청과 가족의 상황들은 다양하게 맞닿아 있다. ……관청과 소녀가 공통으로 지닌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K소송에서 만나는 수줍은 소녀들처럼 모든 것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 소녀들은 마치 침대에서 그렇게 하듯이 그들 가족의 품안에서 불륜에 몸을 맡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소녀들을 만난다. 그다음에 하는 일은 술집여자를 정복하는 일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창녀 같은 여자들이 한 번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프카와 현대발터 벤야민 64p)”

 

그녀들이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나 법정의 부조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억압되고 왜곡된 성적 욕망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누군가 엿보고 듣고 있다는 의식을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소송을 당하고 예심판사 앞에서 변론은 했으나 선고는 유예된 상태에서 K는 판사를 만나기 위해 변호사와 브로커 화가를 만난다. 당시 법에서의 불의를 보게 된다. 화가는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 배경에 그려져 있는 정의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을 합쳐 놓은 이미지는 정의는 승자의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정의에는 중립이 없,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 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기 바란다는 바티칸 추기경의 호소가 맥락 없이 떠오른다.

 

카프카는 선고유예 상태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간 상황의 원인을 찾아갈 때, 그를 이런 상황에 빠뜨리는 원인을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소유한 볼 수 없는 존재에서 찾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신이든, 해석의 권위를 가진 권력이든, 정신이든, 그를 대신하고 있는 부친이든!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가 성당에서 사제를 만나는 장면이다. 성당에서 홀로 있는 K의 시야에 갑작스럽게 신부가 등장하고 그는 자신을 교도소 신부라고 소개한다. 그 신부는 그에게 법 앞에 문지기(267-269p)” 이야기를 한다(이 내용은 작가가 법 앞에서라는 단편으로 먼저 발표한 작품이다). 법정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문지기가 막는다. 문지기는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문지기는 해석자 혹은 철학자 혹은 지도자이며, 신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모르게 재판정이 열렸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가 끌려가는 채석장, 죽임을 당하는 방식 모두 유대교의 의식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개 같군!”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있을 것 같기(287p)” 때문이다. 결국 그의 질문은 해결 받지 못했다. 치욕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던 욕지기와 수치심과 관련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반쯤 잠든 상태에서 찾아오는 환상들은 그의 글의 소재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불면증으로 고통 받았고, 이런 꿈들을 꾸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꿈과 같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일상의 중심에 놓아 독자로 하여금 아무 어색함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작가의 천재적인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불연속적이고 환상적이고 괴이한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과 작가의 심연을 읽고, 그들이 찾는 답을 찾고, 여러 층위에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작가가 드러낸 존재의 뒤편을 통해 나의 무의식 안에 침잠해 있을 억압과 상처 혹시 모를 내면 아이를 탐사한다.

 

10년 쯤 전, 지역 도서관에서 책 바꿔가기 행사를 했었다. 한 노부인이 그녀의 남편이 생전에 읽었던 책을 기증하면서, 계속 갖고 있으려 했지만 이제는 관리하기 어려워 내놓는다고 못내 아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가 내놓은 책들 중에 내 눈에 띈 책이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평전이었다. 이 책은 절판 상태였었다(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나의 카프카역시 절판이다). 낡아서 누렇게 바랬지만 귀한 책이었기에 무조건 가져왔다. 그 날 하루 이 책을 다 읽었던 것 같다. 다 읽고 나서야 책 뒤쪽 헛지에 독서에 대한 단상이 흘림체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적바림은 생을 형기(刑期)”라고, “옥중에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하고 있었다. 제일 마지막 줄에는 “84324〇〇로 가는 길, 터미널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은 바람이 찬 터미널에서 카프카를 읽던 한 남자, 마지막 장을 넘기고 카프카의 삶에 대한 감회에 젖어 볼펜을 꺼내드는 그를 그려본다.

 

카프카 평전』 『변신』 『단편집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일련의 독서였다. 그리고 소송』, 발터 벤야민의  『카프카와 현대』, 『프란츠 카프카은 그에게 깊이 들어가는 독서였다. 특별히 프란츠 카프카은 카프카의 꿈과 소설과의 연결을 이해하는 특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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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2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는 숫자가 맞나요?
84년? 대단하네요.
저는 몇년 전에 젊었을 때부터 모았던 책들을 팔아서 그렇게 오래된 책은 없습니다. 카프카 평전 겨우겨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내용은 기억에 없습니다. 😂

그레이스 2025-03-25 10:49   좋아요 1 | URL

그래서 더 감상에 젖게 돼요.
돌아가신 분의 유품과 감상이어서,,, 평전이 더욱 다가왔던듯요.

고양이라디오 2025-03-25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프카가 여전히 읽기 어려워요ㅠ <성>, <소송> 모두 몇 번씩 도전했는데 완독을 못했네요.

그래도 <변신>이랑 단편집은 읽었습니다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카프카가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2025-03-25 11:22   좋아요 1 | URL
쉽지는 않죠
미완성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막바지 퇴고와 탈고를 거치지 않은 원고인듯요
그래서 막스 브로트가 초판본출간할때 순서를 변경하고 편집을 했다 해서 비판을 받았고, 다시 후에 원고의 원래 순서대로 출간했다고 하더군요.^^

제 경우 <프란츠 카프카-꿈>이 도움이 됐습니다.
추천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3-25 12:59   좋아요 1 | URL
<프란츠 카프카-꿈>! 카프카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을 먼저 보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5-03-26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할아버지네요~!! 84년이라니~~
카프카는 그냥 읽는것보다 평전이랑 같이 읽는게 좋을거 같아요. 카프카<소송>, <성>은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ㅜㅜ 꿈이 핵심 키워드군요~!

그레이스 2025-03-26 21:04   좋아요 1 | URL
네! 멋지시죠!
이건 말 안하려고 했는데,,, ^^
그 노부인이 사별하신 남편을 교수님이라고 부르신걸로 보아, 강단에 서셨던 분으로 추측합니다.

초란공 2025-03-26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4년 3월 24일... 딱 이맘때네요.. 산수유 피고, 진달래 개나리 피기 시작하는 시기.. 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시는 청년(?)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레이스 2025-03-26 21:13   좋아요 1 | URL
3,40대였을 듯 한데,,, 청년이죠^^
예 그러네요
3월 24일

초란공 2025-03-26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KBS 다큐에 나온 새한 서점 이야기가 감상에 젖어요. 학창시절에 서점이 서울에 있을 때 잠시 일했던 헌책방이었는데, 단양으로 이사 가셔서 숲 속에 책방을 열었는데요, 지난 12월에 화재로 책 60%가 소실되었거든요.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장님 나이드신 모습을 보고 짠했습니다. 텀블* 펀딩이라도 참여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5-03-26 21:17   좋아요 1 | URL
아!
마음이 아픕니다.

(화재 이야기 들으니,,, 경남 산불이 저절로 떠오르네요
제발 빨리 진화되길 ...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페크pek0501 2025-03-2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변신만 대단한 게 아니라 소송을 오디오로 듣고 쇼킹했죠. 낯설음과 생소함이 느껴졌어요.
판결, 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는 내용인데 결국 아들이 강에 뛰어드는 걸로 끝나죠. 이것도 쇼킹했어요.^^

그레이스 2025-03-27 22:17   좋아요 1 | URL

저도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변신도 그렇고 판결도 그렇고 우화나 자살 모두 같은 심리의 근원을 보게 되더라구요.

전야제 2025-03-27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우리 안에 저 깊숙히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는 추기경님의 말씀과 카프카의 <소송>이 연결되는 흐름에 반해버렸습니다ㅎㅎ
유흥식 추기경님의 말씀 맞지요? 좋은 구절이라서 찾아보았는데 글에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중고책을 이어받으신 추억이 평생 남을 것 같아 부럽습니다.
누군가가 마음을 쏟으며 읽었던 책은 지니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느낌이라 저도 그런 중고책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ㅎㅎ

그 적바림은 생을 “형기(刑期)”라고, “옥중에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하고 있었다.
이 문장이 글을 다 읽고도 마음에 강한 여운으로 남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3-27 22:23   좋아요 0 | URL
예!
소송과 선고까지의 과정 중 부조리를 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 추기경님의 헌재에 호소한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저도 보물을 찾은 듯 했습니다

페넬로페 2025-03-27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때 카프카를 꽤 읽었는데 오랫동안 다시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읽으면 너무 허무해서~~

그레이스 2025-03-27 22:16   좋아요 1 | URL
그렇긴 하죠
실존주의가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긴 하죠.
사실 카프카는 제 안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돼요
오늘 <실종자>가 배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