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의 원제는 ‘질병 통역사·Interpreter of Maladies’다.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은 이민자의 삶과 자기 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 더 깊이 읽어보면 이야기를 지탱하고 있는 깊은 층위에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일상의 삶과 심리를 세밀하게 엮어내는 구성력과 통찰이 뛰어나다.
단편들 중「축복받은 집」, 「일시적인 문제」, 그리고 「질병 통역사」가 내게는 한 주제로 다가왔다. 「질병 통역사」에서 관광 가이드 카파시 씨가 다스 부부에게서 눈치 챈 것처럼,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부부들에게는 “말다툼, 무관심, 긴 침묵 같은 징후(93p)”를 보게 된다.
「일시적인 문제」의 '일시적'은 며칠 동안의 일시적인 정전과 부부 관계의 일시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다의성을 띈다. 저녁 8시부터 한 시간 동안의 단전이 예고된 5일 동안 그들 사이에 있었던 무심함과 침묵이 깨진다. 각자가 따로 하던 식사를 함께 하고, 어둠 속에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추억과 가벼운 이야기들로 시작하여, 자신의 약점들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고백들이 이어지고, 그들 부부관계는 회복되는 듯 보인다. 단전이 끝난다는 통보가 전해지고 슈쿠마는 아쉬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그들의 관계는 이전으로 돌아갈까? 불을 켜고 쇼바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슈쿠마는 이제까지 감춰왔던 진실을 전한다. 다시 불을 끄고, 알게 된 진실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5일 동안 회복된 듯한 그 관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진심을 전할 수 없을까? 긴 침묵으로 이어져 오던 갈등상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단지 불행한 사건과 환경의 문제였을까?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말이 없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헤아려지는 마음은 언어보다는 안아줌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상처에만 시선과 마음을 쏟는 우리는 원래부터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 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평일에는 ‘질병 통역사’를 하고 있는 여행 안내인에게 오래된 죄의식의 문제를 고백하는 낯선 여인에게서 인간의 질병의 징후를 읽는다.
작가는 「질병 통역사」에서 여행안내인 카파시를 통해 보이듯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카파시는 구자라트어를 쓰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의사에게 통역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 사이, 국가의 국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그 자신만이 양쪽 모두를 이해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길” 꿈꾸었다. 그는 “힌두어, 벵골어, 오리야어, 구자라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로 대화하길 원했고(92p)”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의 징후였다(92p)”고 말한다. 인도가 여러지역의 방언으로 나뉘어져 소통하기가 어렵고, 외국어를 아는 것은 성공을 위한 힘, 권력임을 알 수 있다. 벵골어, 영어, 이탈리어로의 언어 이민을 한 작가는 그녀가 의지하고 작가로서 명성을 안겨다준 주된 영어를 떠나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작가는 “영어를 포기했을 때 권위를 포기한 것”이라고,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92p)
그러니, 소통은 언어의 문제일까?
「축복받은 집」이란 제목은 산지브와 트윙클의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어 역설적이다. 겉으로 요란하게 싸우지도 않고, 자극적인 말이 오고 가지도 않으면서 부부간의 미묘한 어긋남을 섬세하게 그려낸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들의 갈등은 조금 더 요란하다. 신혼인 산지브 와 트윙클 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언어의 부재도 대화의 단절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이유를 외면하는 그들의 마음 때문이다. 신혼집에서 발견되는 성상들과 성화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도 이유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이제는 아내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산지브가 트윙클과 결혼하기로 한 것은 그녀가 “적절히 높은 카스트 출신에다 곧 석사 학위를 받게 될(235p)”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혼은 서로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결혼은 자신의 생활 속에 다른 성격과 태도, 생활 습관 등 나와 부딪힐 가능성을 가진 타인을 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때로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두 사람도 여러 번의 충돌 후에 침묵하고 서로를 외롭게 하는 단계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과연 대화의 문제일까?
「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 세 편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아내(여성)의 마음을 전혀 서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심리만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서로가 타자화 하는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지층에 깔려있는 가부장적인 남성위주의 사고를 발견하게 된다.
함께 있어도 서로를 외롭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고통스럽고 외롭게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강의 단편「아기부처」에서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를 가리는 남자와 안으로 멍든 여자의 만남, 그들의 출발이 잘못되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나’의 꿈에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아기부처는 어머니가 그리는 불화 3000장과 연결되어 있다.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 라는 말과 함께 아프게 때리던 어머니의 손길과 혹독한 훈육에 상처 입은 그녀의 자아다. 어머니가 불화를 그리는 행위는 자신 안에 있는 한을 비워내고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다. 어머니가 불화 3000장을 그리는 것과 ‘나’가 견딘 3년의 시간은 서로 병행하고 있다. ‘나’의 남편에 대한 감정에는 동정과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살면서 점차 인식하게 되는 남편의 몸에 대한 혐오의 감정 때문에 남편의 신경증적이고 폭력적 언행을 감내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충실하려 했던 그녀의 방식이고, 자신의 과오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한편 남편은 애인에게 버림받고 술에 취해 들어와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로 스스로를 고독하게 가두고 어둠에 매몰된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외롭게 한다. 그것은 차가운 침묵과 외면, 폭력적인 언어와 가해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관계는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인간의 마음은 왜 그렇게 허약한 것일까? 그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관계를 지속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집중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호소하고 변명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완벽한 이웃>이란 다큐를 떠올렸다. 이웃을 총 쏘아 죽게 하고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상황만을 호소하고 변명하던 사람! 극단적이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병’ 아닐까?
내 안에도 이 모습이 있다. 이 깨달음은 통렬했고, 그로 인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