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색채 이미지들은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다. 「노랑무늬 영원」이나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희랍어 시간』에서도 빛과 색채 표현의 예민함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그녀의 회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엿보인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화가가 흰 종이 위에 먹과 색이 번지고 스며들게 하는 등의 작업 묘사는 더욱 그렇다.
작가의 ‘흰’색은 특정한 상징과 정서를 갖고 있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정희의 꿈에 등장하는 흰 새, 빽빽하게 내리던 미시령의 폭설, 먹이 번져가던 흰 종이 등 모두 죽음을 연상시킨다. 『소년이 온다』에서 시체들을 덮는 무명천, 머리에 감겨져 있는 하얗게 빛나던 붕대 등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 흰 새들로 착시를 일으키는 폭설, 주검 위에 쌓여 녹지 않는 눈, 흰 뼈들, 하얀 앵무새 등으로 밀도 있게 다가오는 흰 색의 이미지에 숨이 막힌다.
흰색은 죽음을 상징한다. 차갑고 투명하고 무겁고 두렵다. 이 흰색의 이미지들로 작가는 초혼(招魂) 혹은 진혼(鎭魂)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위기나 정서 때문에 낯설고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죽음들의 상황과 증언을 은폐했기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초혼과 진혼은 어두운 현실과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생각한 작가 앞에 막아선 것은 아직 따스하고 투명해 질 수 없는 빽빽한 흰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망월동 묘지에 내리던 눈, 꿈속에서 벌판을 채우던 성근 눈. 그것들은 작가를 추적하고 써야할 숙명처럼 다가온다. 꿈은 파도에 휩쓸려 쓸려가기 전에 아직 뼈들이 무사할 때 쓰라고 한다.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작별하지 않는다』 26p)” 작가는 생각한다. 시간이 없다고, 써야한다고.
카프카의 경우처럼 꿈은 작가에게 고통이기도 하다. 쓰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과 같은 무의식의 문을 여는 고통의 행위이다. 그 책을 마치면 그 꿈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대는 오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다른 꿈들로 이어지고, 다시 다른 문을 열어야 하는 숙명 앞에 서게 된다. 그렇게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진혼곡들이 탄생한다.
“2012년 겨울,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이 담긴 꿈들이었다.(『작별하지 않는다』17p)”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작별하지 않는다』 23p)“
처음 두 책을 읽는 동안 중단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두 번째 독서에서 나는 작가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과정을 보는 듯 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없고서야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흰』에서 작가는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빛과 실」)“고 한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형식은 다르지만 주제로는 연결되는 작품이다.
출간 순서와는 다르게 『흰』을 나중에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흰』이 두 소설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고, 이 지점은 두 소설을 아우르는 어떤 메시지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두 소설에서 해결되지 않는 고통과는 다른 어떤 밝음이나 따뜻함을 느꼈다. 『흰』에서 흰은 나의 흰과 그녀의 흰으로 나뉘어진다. 그녀는 세상에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떠난 언니다. 화자(작가)는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 나의 ‘흰’-강보, 배내옷, 소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은 그녀의 ‘흰’-성에, 서리, 날개, 주먹,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등-과 댓구와 평행을 이룬다. 이들은 모든 ‘흰’에서 통합된다. 각각의 흰 것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대응하면서 한 편의 긴 시를 만들어간다.
오래 전 세를 얻어 이사했던 집의 철문에 날카로운 무엇으로 함부로 새겨놓은 녹슨 ‘301’호라는 글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문을 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행위로부터 나는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 사람의 밖에 보이는 상처를 떠올렸다. 돌보지 않고 함부로 대했던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타나는 상처의 흔적, 성격이나 습관으로 나타나는, 때로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주면 낫게 될, 아니 나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다.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완전히 재가 되었었던 ‘흰 도시’라 불리는 바르샤바에서, 그녀는 자신 안에 그리고 도시의 타인들 안에 있는 상처들과 고통의 기억들을 ‘흰 것들’의 이미지를 통해 찾는다. 그것은 기억에 남은 언어의 파편일 수 있고, 사물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배추의 속살 같은 연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언니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는 의미는 타인 어쩌면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그녀가 되어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바르샤바의 많은 이들이 총살되었던 벽 앞에 모인 넋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앞에 밝혀진 초는 넋들을 위함이 아니라 초를 켜놓은 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살육당한 역사는 수치가 아님을 믿는 그들은 그렇게 오래 애도를 연장한다. 고국에서 일어난 일들과 죽은 자들이 받지 못한 애도를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건을 생각한다. 개인이라는 작은 범주에 사용할 단어를 국가라는 큰 범주에 사용할 ‘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자신의 재건에 빠진 것이 있었다. 고국에도! 그녀 자신 안에 있는 상처들이 여전히 총알의 파편처럼 박혀 있음을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서 아문 듯 보이지만 나은 게 아님을 가리킨다.
총살의 벽 앞에서 고국의 애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할 일들을 다짐처럼 생각한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흰』109)”
바르샤바에서 흰쌀밥을 지어, 그 앞에 기도하듯 앉아있는 그녀, 그 밥은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아님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 거기서 나는 생에 대한 의지, 위안을 느꼈다. 따뜻한 밥에서 흰 김이 오르는 장면에서 사랑을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작가는 이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빛과 실」) 이 『흰』에서 잠깐 보여줬던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따뜻한 글을 기다려본다. 세상이 그런 글을 쓸 만큼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따뜻해지길!
신형철 교수는 강의에서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 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壽衣)가 타고 있더라는.(『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프로이트의 꿈 이야기를 하며 고통스런 꿈을 꾸는 또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아직도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분들을.
작별하지 않는, 작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 우리의 오늘이 미래를 살릴 수 있기를!
반복되는 초혼과 진혼이 아닌 애도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