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중인 BC 485년경 태어난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하며 직접 체험하고 자료를 모아 『역사』를 집필했다. 중국 사마천의 방법과 비슷하다. ‘역사’를 읽으며 든 기시감의 출처는 사마천의 ‘사기’였다. 헤로도토스는 헬라스(그리스연합)인과 비헬라스인이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찾고, 그것이 망각되는 것을 막고자 ‘역사’를 집필했다고 서언에서 밝힌다.
헤로도토스는 이 책을 사건 중심의 역사적 사실만을 내용으로 한 것이 아닌 여담 형식으로 지리학적, 인종학적, 민속학적, 역사적 자료들을 다양하게 서술한다. 개별 민족과 나라의 특징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한다. 자주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언급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더 이상 서술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도 인정한다.
『역사』 1권에서 3권은 페르시아가 점점 제국으로 발전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대의 역사는 결국 침략과 전쟁으로 끊임없이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페르시아는 뤼디아와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이오니아 지역의 여러 그리스 민족이 세운 폴리스를 속국으로 만든다. 그 뒤 지금의 이집트인 아이귑토스를 정벌한다. 퀴로스, 캄뷔세스, 다레이오스 왕으로 이어지는 통치의 특징과 그것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도 이 부분에 들어있다.
9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각 권은 9명의 무사 여신이 하나씩 배정되어 있다. 1권은 역사를 관장하는 클레이오, 2권은 피리 및 피리가 반주하는 서정시를 관장하는 에우테르페, 3권은 희극 및 목가를 관장하는 탈레이아에게 헌정된다. 고대 시인들이 희곡의 시작을 무사 여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을 비슷하게 사용한다. 이 구분은 헤로도토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의 문헌학자인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에게서 비롯된 관행으로 보인다(p.6)
고전을 읽다보면 지금의 세태와 많이 달라 한 번씩 당황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아주 오래된 시대를 지금 시대와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보통은 감안하고 읽는다. 아무리 그래도 『역사』에서 표현된 여성관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그 시대 여성은 모두 창녀와 똑같은 존재였다.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여러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다.
[칸다올레스는 귀게스에게 자기 아내의 알몸을 보라고 한다.(p.30)
뤼디아 하층민의 딸들은 결혼할 때까지 창녀 노릇을 하여 지참금을 빌며, 남편을 스스로 선택한다. (p.84~85)]
시집갈 나이가 된 처녀들이 소집되어 전부 한곳에 모이면, 남자들이 그들을 둘러선다. 그러면 전령이 처녀들을 한 명씩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인다. 경매는 가장 예쁜 처녀부터 시작되는데, 그 처녀가 높은 값에 팔리면 그다음으로 예쁜 처녀를 경매에 붙이곤 했다. 부자들은 젊고 예쁜 여인을 사려고 서로 더 높은 값을 제시했다. 그러나 장가들기를 원하는 하층민은 미색은 따지지 않고, 못생긴 처녀를 아내로 얻고 돈까지 덤으로 받았다. 가장 잘생긴 처녀들을 다 팔고 나면 가장 못생긴 또는 불구인 처녀를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이되, 가장 돈은 적게 받고 그 처녀에게 장가들겠다는 남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잘생긴 처녀들이 못생기고 불구인 처녀들을 시집보내는 셈이었다.(p.145)
왕은 자기 딸을 유곽으로 보내며 모든 남자에게 가리지 않고 몸을 맡기되, 교합하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평생 동안 저지른 짓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가장 사악한 짓을 말하게 하라고 명령했다.(p.231)]
가장 슬픈 내용은 이것이다. 어쩌면 아프로디테 여신은 창녀의 역할을 기본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 그 당시 여성들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더 중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자’라는 말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바뵐론인의 관습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이 가장 수치스럽다. 이 나라에 사는 여자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아프로디테 신전에 가서 그곳에 앉아 있다가 낯선 남자와 교합해야 한다. 여자가 일단 그곳에 자리잡고 있으면, 낯선 남자 가운데 한 명이 그녀의 무릎에 은화 한 닢을 던진다. 여자는 자신에게 돈을 던진 첫 번째 남자를 따라가야 하며 절대로 거절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일단 교합하고 나면 여신에 대한 의무를 이행한 것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잘 생기고 키가 큰 여자들은 금세 돌아가지만, 못생긴 여자들은 의무를 다할 수 없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실제로 3,4년을 기다리는 여자도 더러 있다.
- p.146~147]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과연 끝까지 잘 읽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했다. 내용이 방대해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지만 1권에서 3권까지는 생각보다 쉽게 읽혔다. 구성과 배치가 지루하지 않았고, 헤로도토스의 뛰어난 필력으로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다. 힘들지만 그동안 그리스 고전을 계속 읽어온 보람이 있었다.
어느 시대든, 어떤 국가에 대한 내용이든,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위대한 고전을 읽다보면 매번 느껴지고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고 언제나 인간은 어리석다는 사실이다. 특히 3권 마지막 부분인 독재자인 캄뷔세스의 행태가 더욱 그렇다. 거기에 마침표를 찍는, 일갈하는 듯한 헤로도토스의 멘트에 소름이 돋는다.
『역사』의 세계관은 ‘인간사는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에서 헤로도토스는 국가와 인간의 부침을 노래한다. 이 책을 계속 읽으면 과연 역사는 무엇일지, 거기에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무조건 어떤 지혜는 터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발밑의 세계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지정학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한다. 페르시아는 왜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진출해 그리스와 충돌했는지를 ’지리‘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제국 페르시아는 주변의 국가와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다시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했다. 페르시아는 파르사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아나톨리아반도의 사르디스까지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페르시아의 동부는 자그로스 산맥, 힌두쿠시산맥, 카라코람 산맥이 자리 잡고 있어 험난했고, 용맹하고 무자비한 유목민족인 스키타이 족에 참패해 더 이상 동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반도로 진출하기 전부터 에게해에 연한 발칸반도 남부와 이오니아(아나톨리아반도 서부 해안 지대)에 그리스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오니아인, 아이올리스인, 도리스인, 아카이아인 등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있었고 정체성과 풍습, 정치, 경제 체제가 달랐다. 이오니아인의 아테네, 도리스인의 스파르타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BC 499년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아테네가 도왔지만 페르시아군대에 의해 패하게 된다.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의 보복이 두려웠고, 그로인해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은 단합하기 시작한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원정을 하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북부를 손에 넣는다.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서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손을 잡고 그리스 연합군의 토대를 마련한다. BC 490년 다리우스 1세가 다시 그리스 원정을 도모함으로써 제1차 페르시아전쟁이 시작된다. 낙소스와 에레트리아를 신속하게 함락시키고 아티케 반도 서부의 아테네로 향하지만 험준한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인 아테네에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페르시아 장수인 아르타페르네스와 다티스는 마라톤 평원에 병력을 상륙시켜 주둔시킨다.
페르시아 정예부대가 아테네를 습격하기 위해 함선을 타고 마라톤평원을 빠져나가자 아테네의 장군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각개 전투로 격파한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평원의 습지로 밀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전멸한다. 알려진 대로, 마라톤전투 후 한 병사가 아테네로 쉬지 않고 달려가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장렬하게 죽었다는 전설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제1차 페르시아전쟁에서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굴하지 않고 승리를 거둔 아테네를 보며, 전체 그리스 세계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상대로도 독립과 영광을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기원전 478년 에게해 일대에서 페르시아를 완전히 몰아내고자 아테네를 중심으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 기원전 337년 아예 페르시아를 원정하고자 마케도니아가 주도한 코린토스 동맹이 등장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진정한 ‘그리스’가 탄생했다.
- p.40]
BC 480년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시 그리스 원정에 나선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대규모 함대 건설을 추진한다. 그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에게해가 있다는 지리적 특징을 간과하지 않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다른 폴리스에 지원 요청을 하고 그리스 세계의 연합이란 뜻의 ‘헬라스 동맹(p.42)’을 체결한다.
페르시아군은 승리하기 위해 테르모필레를 먼저 장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리스군은 그들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레를 지키려고 한다. 1만 명 정도의 그리스군은 엄청난 수의 페르시아 군을 상대해야했다. 길이 워낙 좁은 지형이라 페르시아는 병력을 빨리 이동시키지 못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우회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돌아가 그리스군의 배후를 치라고 명한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1세는 300명의 근위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운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고 페르시아의 불사부대에 의해 그리스군은 패한다.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2만 명의 목숨을 잃었지만 그리스군 사망자는 2000명 정도였다. 이 테르모필레전투 역시 유명한 전설로 남아있다.
페르시아군은 계속 남하했고 BC 480년 9월 아테네가 함락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피란민들을 데리고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한다. 그는 함대를 배치하고 크세르크세스는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섬멸하고자 한다. 결전이 다가오자 크세르크세스는 전장을 한눈에 보고자 아이갈레오스 산에 자리를 잡는다. 왕은 그곳에서 페르시아가 승리하는 순간을 직접 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 함대의 계략으로 페르시아 함대는 비좁은 해협에서 불리한 전투를 해야 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는 패배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뒤 마르도니우스가 그리스 원정을 했지만, 플라타이아전투에서 패한다.
[페르시아전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충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페르시아로 상징되는 오리엔트 세계(동양)의 등장 앞에 지중해 세계(서양)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곧이어 문명의 주도권을 쥔 사건으로 평가할 만하다.
- p.53]
- p.37
*위의 내용은 『발밑의 세계사』 23페이지에서 54페이지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았지만, 지리를 바탕으로 한 내용에 비해 지도가 많지 않다는 점이 약간 아쉽다.
현재 남아있는 고대 그리스 비극 33편중 신화가 아닌 역사를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인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PERSAI)』은 ‘패배자의 시각으로 본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의 의미(p.196)’를 주제로 한다. 다시 말해 이 희곡은 철저히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극이다. 이 극의 작가인 아이스퀼로스(BC 456년 사망)는 페르시아전쟁 당시 생존해 있었던 사람이다. 시인은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생생하고 극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도시인 수사의 궁전 앞에 있는 다레이오스의 무덤가에서 원로로 구성된 코로스는 먼저 다레이오스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왕이 전쟁에 출정하는 과정을 노래한다. 수많은 군사와 함선을 이끌고 떠났지만 운명과 신의 교묘한 기만에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코로스는 걱정과 한탄을 쏟아낸다.
다레이오스의 아내이자 크세르크세스의 노모인 아톳사 역시 아들의 출정에 불안해한다. 불길한 꿈에서 불행한 미래를 예상한다. 소식을 가져 온 사자는 살라미스 해안에서 페르시아 군대가 전멸했다고 전한다. 여러 페르시아 장수들이 죽는 모습과 전투 장면을 상세히 설명하고 다행히 크세르크세스는 살아있다고 말해준다. 압도적 군사적 우위에도 그리스에 패배한 원인을 복수의 정령이나 악령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페르시아의 수치를 통탄한다.
아톳사는 죽은 남편에게 헌주를 바치며 그의 혼백을 불러낸다. 무덤에서 일어선 다레이오스는 페르시아군대의 패전 소식을 전해 듣고 아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선조들이 이룬 제국의 위업을 아들이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한다. 지혜롭지 못했던 전략에 대해 지적한다. 이 모두가 ‘교만과 불경한 마음가짐’에 대한 응징이라고 한다.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제우스께서는 지나치게 오만불손한 마음의
응징자이자 준엄한 판관이기 때문이오.
p.232]
다레이오스의 혼백은 퇴장하고 코로스와 아톳사는 그들의 찬란했던 과거에 대해 회상한다. 소수의 호위병을 데리고 등장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불운과 죽은 자를 뒤로 한 채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것을 괴로워한다. 그들 모두는 비탄과 곡성으로, 가슴을 치는 만가로 극은 끝맺어진다.
이 비극에서 아이스퀼로스는 페르시아가 패배한 원인을 분수를 모르는 오만을 나타내는 ‘히브리스(hybris)(p.440)’를 바탕으로 둔다.
[히스리스 못지않게 이 작품의 앞부분에 나오는 아테(Ate) 역시 아이스퀼로스 비극에서 세계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아테는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인간에게 내리는 운명이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상냥하게 다가와 마음을 호린 다음 종국에는 파멸로 인도하는 미망이다. 그러므로 아테의 엄습을 받은 인간은 크세르크세스처럼 히브리스에 빠져 분수를 모르고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결국은 자신의 미망의 제물이 되고 만다.
- p.440~441]
그리스인을 관객으로 한 공연에서, 그들에게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인 아이스퀼로스는 철저히 패배자의 입장만을 견지한 페르시아인의 회한과 애탄만을 보여준다. 마라톤전투에 같이 참여한 형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읽힐 정도다.
이런 시인의 일방적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모든 것을 떠나 그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한 주제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살아있는 동안 ‘히브리스’와 ‘아테’를 언제나, 매번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2025년 1월 15일>인 오늘처럼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3권 14장은 신형철 작가가, 아니 발터 벤야민이 소환하지 않았다면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내용이다.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더 중요하고 임팩트 있는 구절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14장의 내용은 단순하다.
페르시아의 캄뷔세스가 멤피스성을 함락하고 아이귑토스(지금의 이집트)의 왕인 프삼메니토스를 모욕함으로써 정신력을 시험해 보고자 그의 딸인 공주에게 노예 옷을 입히고 물을 길어오는 것을 보게 한다. 목에 밧줄을 매고 입에 재갈이 물린 자신의 아들이 끌려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 광경에 다른 아이귑토스인들은 울고불고 했지만 프삼메니토스는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행렬이 모두 지나가고 왕의 술친구 중 한 명인 중늙은이가 재산을 모두 잃고 알거지가 되어 병사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본 왕은 울음을 터트리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머리를 친다.(역사, p.278) 가족의 불행을 볼 때는 의연했던 왕이 친구의 불행에 격한 반응을 보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한 캄뷔세스는 왕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왕은 ‘자신의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 하기에는 너무 큰 일 이고, 차라리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만하다’는 대답을 한다.
캄뷔세스 만큼이나 이 사실을 이해 못한 발터 벤야민은 친구들과 토론을 한다. 여러 의견이 나왔고 벤야민 자신은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 시종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었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31)’라고 해석한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책에서 머무는 장소는 다르다. 이 내용에 대한 여러 사람의 해석이 모두 흥미로웠고 탁월했다. 슬픔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감정은 습관이나 관습대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엉뚱한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기에 신형철의 말대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어디 슬픔뿐이겠는가?
신형철 작가가 서술한 이 구절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제야 시작했다.
그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