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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 대항해 시대와 우연의 역사 ㅣ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6월
평점 :
중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받은 주입식 교육은 거의 모든 것을 달달 외우기만 하면 좋은 성적을 받게 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암기가 정석이기에 영어 숙제는 16절지 연습장 앞뒤로 빽빽하게 검정색 볼펜으로 영어단어를 쓰면서 외운 흔적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볼펜 두 자루를 쥐고, 동시에 같은 단어가 두 번 써지는 효과를 보며 숙제시간을 절약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역사 수업엔 그 날 날짜와 똑같은 번호를 가진 학생이 지목되어 그것을 시작으로 옆으로, 뒤로, 때로는 사선으로 줄줄이 한 명씩 일어나 전 시간에 배운 내용에 대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정답을 말하면 앉을 수 있었고, 대답하지 못하면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선생님이 준비한 모든 질문이 끝나고 서 있는 학생은 선생님이 힘차게 내리찍는 압력으로 등짝을 한 대씩 맞아야 했다. 역사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공포가 엄습했지만 그 덕분에 의무적으로 복습을 열심히 할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암기위주의 학습이나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언급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상식이나 지식은 거의 그 시절의 암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그것이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에 배운 것이 삶의 밑거름이 되어준다고 말하곤 한다.
그 시절의 내가 가졌던 싱싱한 뇌는 지금과 다르게 움직임이 활발해 암기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 각인된 암기의 결과로 콜럼버스의 1492년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592년의 임진왜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워낙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1492와 1592를 연결해 외웠었다.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생각한 그곳은 세상 사람들이 네 번째로 인식한 대륙이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이름도 당연히 역사 시간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은 어떻게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아메리고』를 읽기 전에는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버스보다 베스푸치와 더 많은 연관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던 것 같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거쳐 가면, 그 모든 것은 흥미롭게 변한다.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문장으로 츠바이크는 독자를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이 책에서 츠바이크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작가의 지성과 탁월한 문장으로 여러 역사적 사실을 넘나들며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방대하지만 짧게 압축된 츠바이크의 서술은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한 특정한 인물에서 시작해 ‘그러므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중세의 어둠에서 깨어나 각성하기 시작한 1300년 정도부터 사람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돌아오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서 인도까지의 직항로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바스코 다 가마가 갔던 길과는 다른, 반대방향인 대서양을 횡단해 과나하니 섬에 상륙한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은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이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라고 믿었다. 그 후로 거의 1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장소가 발견되어 그야말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p.51, 아메리고 베스푸치, 자크 라이히,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p.101, 아메리고 베스푸치 조각상,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51년 피렌체에서 출생했다. 초기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과 과학적 지식을 조금 배우고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에서 상인으로 일했다. 그는 스페인으로 파견되었고, 선박회사에서 일했지만 회사가 없어지는 바람에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다른 회사에서 말단 직원으로 20년 정도 일했던 베스푸치는 1499년, ‘알론소 데 오헤다’가 ‘폰세카 추기경’의 명령으로 원정대를 꾸렸을 때 항해에 참가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른 항해사에 비해 지식이 많았던 베스푸치는 천문학자의 자격으로 탐험에 동행했을 수도 있었다. 그 후 브라질 지역으로 가는 ‘오헤다의 원정’에도 참여한다. 베스푸치는 항해사 또는 지도제작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원정에서 베스푸치는 원하던 재산도, 명예도 얻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곳이 인도가 아닌 ‘문두스 노부스’ 즉 '신대륙'이란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콜럼버스도 하지 못한 대단한 업적이었다.
베스푸치는 항해에서 돌아올 때마다 메디치가의 로렌초에게 항해에서 본 것을 쓴 편지를 보냈다. 로렌초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신세계』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편지 형식의 보고서가 유명해진 것은 ‘신세계’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들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곳이었고 또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적도를 넘어선 항해로 이루어졌기에 더 대단한 것이었다.
그 뒤 베스푸치의 편지는 인쇄업자와 출판업자들에 의해 심하게 부풀어지고 비약된 내용의 책으로 출판되어 자신도 모르게 베스푸치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 술 더 떠 발트제뮐러라는 사람은 신대륙을 그 땅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때부터 그 땅은 영원히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지구의 세 부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는 이미 완전히 탐구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네 번째 대륙을 발견하였다. 유럽과 아시아도 여자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을 총명한 사람 아메리고가 발견한 아메리고의 땅, 아메리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p.89]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잘못한 것은 사실 별로 없다. 그저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믿듯 그렇게 믿어버린 것이다. 그 후 400년 동안 이 사실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베스푸치는 중상모략가, 위조자, 사기꾼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콜럼버스와 베스푸치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된 그들은 죽기 전, 정작 아무런 명예도 주목도 받지 못했다.
츠바이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신대륙이 ‘아메리카’라고 명명된 사실을 우연과 오류, 오해, 착오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고 한다. 작은 진실하나에 수많은 곁가지가 붙은 셈이다. 역사는 보통 이런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모두가 진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연과 오류’는 역사 현장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단어일 수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고, 최초로 그 대륙에 발을 디딘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사용한 ‘문두스 노부스’라는 단어, 즉 ‘신세계’라는 표현만으로도 대단한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 ‘신세계’는 파괴와 약탈, 죽음, 고통의 다른 말과도 같다. 바스코 다 가마와 콜럼버스는 많은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약탈했으며 그것은 사악한 식민지 시대의 시작이었다. 대항해시대로 시작된 그들의 경쟁적 모험은 세계를 쪼개고 양분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의 글로벌 금융지배의 원천이 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변하며, 그것에는 언제나 여러 개의 의미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는 자신의 세례명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 이름은 올곧고 용감한 한 남자의 이름이다. 그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그마한 배를 타고, 아직 탐험되지 않은 대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 역시 시대의 모험과 위험 속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수백 명의 ‘이름 없는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민주주의 국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은 왕이나 정복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없이 용감했던, 그런 평범한 사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는 서인도라든가 뉴잉글랜드, 뉴스페인 또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나라 같은 이름보다 분명히 더 공정한 명명일 것이다.
-p.186]

-p.44, 아메리카에 도착한 콜럼버스, 테오도르 드 브리, 15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