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브로커들 -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 역사도서관 22
우치다 준 지음, 한승동 옮김 / 길(도서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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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나는 상인 고바야시 같은 이주 정착민들을 '제국의 브로커들'(brokers of empire)이라고 부르겠다. '브로커'라는 말은 매일의 상업적 노력에서부터 대규모 청원 운동에 이르는 정착민 활동을 이끈 이익추구형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을 가리킨다. 제국의 브로커들의 핵심적 과제는 일본인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활동과 팽창하려는 제국의 고투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런 역할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p30)... '브로커'라는 말은 또한 식민권력의 대리인(agent)이나 앞잡이(pawn) 역할도 했던 정착민들의 중재자적 지위를 포착하게 해준다. 정착민들과 국가간의 모호한 경계, 바로 이것이 제국의 브로커들에게 식민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31


 우치다 준(Jun Uchida)는 <제국의 브로커들 Brokers of Empire Japanese Settler Colonialism in Korea, 1876~1945)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정착민들에 대해 분석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가 관(官)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는 정착민(民)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조선총독부와 협력은 물론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자본가 계급과의 협력 또한 불사한 독립 변수(變數)였다.


 브로커들의 개인적 행동과 정착민들이 가한 집단적 충격은 대행자가 식민권력의 작동구조와 마주치게 되는 통치양식에서 선명한 것과 모호한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각각 대변한다... 정착민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부딪침의 도가니가 되고 제국의 핵이 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동역학(dynamic)이며, 조선에서의 일본 제국주의가 강력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특성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동역학 때문이었다. _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33 


 정착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제국의 중심부에서 제국의 주변부로 자원을 끌어오려고 했고, 조선인 엘리트들 또한 제국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정착민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19년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과정을 저자는 정착민들의 국가주의와 조선인의 민족주의의 융합으로 파악한다. 


 정착민 지도자들과 조선인 자본가 엘리트들은 똑같은 부류였다. 함께 선전활동을 벌이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일본인과 조선인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조선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이면 그것이 산업화의 문제든 지역자치의 문제든 종종 함께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종종 근본적인 목적이 완전히 엇갈렸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형제와 같으면서도 까다로운 관계였다... 두 동맹세력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의 원천인 식민국가와의 협력관계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까지 서로간의 이권투쟁을 극대화해갈 수 있을지를 놓고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7


 일관된 원칙보다는 문화적 열망과 경제적 필요, 그리고 정치적 기회주의 등으로 뒤엉킨 복합적인 매트릭스가 각 단계의 정착민들 활동을 떠받쳐주었다. 식민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입지가 취약할 때, 제국의 브로커들은 정부의 정책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거기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의제를 추구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물질적 이해관계, 정치적 보상을 추구했던 조선인 엘리트들과도 종종 협력했다. 이런 야누스적 동맹관계 속에서 일본인 정착민들은 통치체제에 반대하기도 하고 그것을 수용하기도 하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위기의 시대에 그들은 서로 의지했지만 조선인 반체제세력에 대처하는 전략을 놓고서는 서로 충돌했다. 공유된 열망과 충돌하는 의제들이 정착민 식민주의의 내부동역학을 만들어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3


 국가주의(state nationalism)와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간의 미묘하고 함축적인 긴장, 즉 역사학자 케빈 도악(Kevin Doak)이 식민본국(일본)의 정치논쟁 속에서 확인했다고 주장한 그 긴장은 일본 국적자들이 국민으로서의 정치적/법률적 경계 안에 불완전하게 편입되어 있던 해외영토인 조선에서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202


 저자는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를 거치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격렬한 대립과 융합이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 전쟁(태평양전쟁)의 총력적 체제 하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으나, 사실은 허구로 판명되었음을 밝힌다. 결국, 저자는 <제국의 브로커들> 안에서 제국의 변경지역인 조선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회색지대의 두 세력 - 식민지 정착민과 조선인 엘리트 - 들의 결합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격렬한 화학적 반응과 실패한 융합으로 결론짓는다. 


 조선인들의 활동이 협력과 저항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거부한 것처럼 정착민들의 정치적 행동도 윤해동이 공적 활동과 자각의 '회색지대'라 부른 영역을 만들어내면서 언제나 타협과 무언의 대결이 벌어지는 공간인 중간지대에서 이뤄졌다. 제국의 브로커들과 그들의 조선인 동맹세력이 공동의 이익이라고 여긴 것을 증진하기 위해 함께 일한 곳은 이런 경계가 애매한 접촉지대였지만, 그들은 또한 동시에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오랜 상호투쟁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는 쌍방 모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자들과 피식민자들 사이에 일정부분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9


 최고의 역설은 내선일체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던 많은 정착민들이 전쟁 말기에 가장 무모한 내선일체의 신봉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총후활동이나 일상적인 제국의 의례행사에 조선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천황에 대한 충성의 공개적 표시로 점점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내선일체 정책의 모든 장치들이 토대로 삼고 있던 허구였다. 믿음에 눈이 멀어 그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조선인들이 '위장된 친일파, 체념한 친일파, 총구 앞의 친일파'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으며, 대다수 조선인들의 굴종이 총력전 체제 아래서 강요당한 허구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29


 <제국의 브로커들>은 일제시대의 권력 구조를 총독부라는 관(官) 뿐 아니라 정착민과 조선인 자본 엘리트 계층을 추가 변수로 투입하여 분석했다는 점에서 동역학(動力學) 구조로 식민농정을 파악한 정연태의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구조가 일제시대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사실이고, 한일 양국에서 잊혀진 존재들인 정착민들을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렸다는 점에서는 분명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이는 책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책에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937년 이후에 조직적인 저항이 사라졌지만, 많은 정착민들 눈에 그것은 단지 종족적 민족주의 정신이 내선일체의 틀 내에서 새로운 국민자격 허용요구로 모습을 바꾼 것이었을 뿐이다. 식민지 시절 내내 조선의 민족주의는 여러 가지로 형태를 달리하면서 표출되었다. 제국의 브로커들은 온건한 민족주의자들과 뒤섞이고 자본가 엘리트들과 협력하면서, 그리고 조선 사회의 각계각층과 함께 국민자격 요구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바뀌고 대립하는 외형을 지닌 조선의 민족주의와 대면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8


 저자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근대화, 산업화 구조를 가진 제국주의 내에서 국가주의와 결합시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은 민족주의를 근대화의 산물로 바라보는 겔너(Ernest Gellner, 1925~1995)의 주장과 같은 관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이라면, 만주와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투쟁을 벌인 이들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반(反)근대화 세력에 불과한 것일까. 민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반응제 수준으로 한정짓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부정당하는 것이 아닐까. 본문에서는 비록 이러한 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19세기 말 신채호(申采浩) 같은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만선사(滿鮮史 : 만주, 조선사)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만주로 간 선구자들인 1백만 조선인 동포들'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목표는 다양하게 갈렸지만. 그 두 집단의 연구자들을 모두 '만주와 조선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고대 왕국이었던 고구려의 영토경계가 만주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의 간도로의 이주는 "조상의 옛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심과 조선의 오랜 고토수복 추구가 다시 한 번 만주로 집결했다. 신채호와 같은 저자들은 민족부활의 꿈을 조선의 고대 왕국들이 지배했던 '북쪽 땅들'에 고정시켰고, 일본인 저자들은 조선인 '동포'의 활기를 자민족의 대륙확장을 촉진하는 데 활용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427


 저자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의 예로 신채호 선생(申采浩, 1880~1936) 등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만주침략 시기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들고 있다. 구한말 민족의식을 깨우려는 역사연구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역사연구가 결국 같은 방향을 지향했다는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1940년대 일본의 내선일체가 허구였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인의 강제 징용을 적극적인 참여로 착각한 정착민들처럼, 저자는 구한말의 민족주의 정신을 제국주의 침략 정신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저자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 식민지 정착세력과 조선인 지식인들간의 결합은 각자 이익을 위해 행동한 이기주의,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제국의 브로커들>은 이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조선정착민에 대한 시선을 그려낸 얼마 안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제국은 조선인들에게 광범위하고 때로는 파멸적인 변화를 안겨주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특별한 이력을 쌓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주자들의 삶은 불확실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빈손으로 되돌아갔으나, 또한 수많은 이들이 성공해서 한밑천 잡았고 제국을 떠받치는 토대가 됐다... 고바야시의 이력은 정착민들이 국가에 협력도 했지만 그들 독자적인 식민지 사업들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사업들은 국가의 공식정책에 늘 부합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해외이주 정착민들은 식민통치의 모든 국면에 걸쳐 중요하고 독자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것이 이 책에서 다룰 핵심적인 논점이다 - P26

조선의 쌀 교역이나 식민정부의 행정부처 문제, 또는 총력전 대비태세와 관련한 총독통치의 진로설정에는 본국의 수요(필요)가 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정착민들의 발언권이 컸던 식민지 통치체제의 수요와 방법이 거꾸로 본국에 영향을 끼쳤다. 정착민 정치와 조선인 동화에 대한 불안도 단일민족(그렇게 추정된)국가와 다민족제국 건설이라는, 일본제국의 국민 핵심부에서 동시에 추진된 사업에 내재된 긴장을 증폭했다. 혁명적인 시대의 산물이자 그 대리인들인 정착민들은 국가(state)와 사회, 중심과 주변, 민족(nation)과 제국의 점점 속에서 살아가면서 근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병진적인 전환 속을 헤쳐나갔다. - P532

제국통합시기 - 1905년의 통감부 체제부터 1910~19년의 무단통치 첫 10년까지 -를 통해 간파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은 정착민들이 조선인들과의 부딪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점차 투쟁으로 점철되어간 식민국가와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실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치제도를 보호하려는 정착민들의 끈질긴 운동, 또 패배 이후에 장차 닥쳐올 더 많은 투쟁에 대비하려는 그들의 무대설정이다. - P201

과잉조직된 전시(戰時)운동의 기제도 내선일체의 의도된 목표들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그 의미를 파악하게 하기보다 단신히 가담하게 만드는 것이 식민지 동원운동가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였다. 달리 말하면, 동원(mobilization)은 그 자체가 이념이 되었다. 경찰의 기록과 메모들이 보여주듯이, 조선인들이 징병 등 의무수행의 대가로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경향이 증대되어간 추세가 조선 민족의 포기 또는 ‘친일‘로 자동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일본인 정착민들도 조선인들의 모든 행동 뒤에는 민족적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 P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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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29 2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인 정착민들이 조선의 상층 부르조아들과 결합해가는 방식은 흥미가 가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로운 주제를 얻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9 21: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하루 잘 마무리하세요! ^^:)
 

도덕은 독단적이고 상대적이고 문화에 구속된 것이 아니다. 도덕은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도덕 감각을 갖고 태어나며 도덕 감정들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침반이 된다. 동시에 이러한 도덕 감정들은 그 지역의 문화, 관습, 양육의 영향을 받는다. 본성은 약속과 사회적 의무를 어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지만 양육이 그 죄책감의 수위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다. 따라서 도덕은 ‘저 밖’의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재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인간 본성의 일부로 존재한다.

우리가 도덕적 진보의 증거들과 그러한 진보를 가져온 여러 원인들을 살펴보는 동안 기억해둘 것은, 우리가 밝혀낸 도덕적 진보의 원인이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진보라는 목표를 이루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원인이 왜 우리가 애당초 도덕의 영향권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과거 몇 세기의 도덕적 발전은 대부분 종교적 힘이 아니라 세속적 힘의 결과였으며,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출현한 이 많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과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학과 이성이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일련의 논증들을 통해 추론한 다음 경험적 검증을 통해 그 결론이 참임을 확인한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나아가 나는 도덕의 궤적이 단지 정의만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를 향해 구부러지며, 이러한 긍정적인 결과들의 대부분은 더 세속적 형태의 통치와 정치, 법과 법학, 도덕적 추론과 윤리적 분석을 향해 사회가 이동한 결과였음을 증명할 것이다.

내 생각에 셔머와 나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셔머는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경험적 검증’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명시적으로 말했지만, 그가 의미하는 바의 과학과 그것의 기여는 결국 이성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반면 나는 과학, 증거, 실험, 관찰, 모델링이 앞서 논했던 도덕적 관점의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항상 의구심을 지녀왔다. 나는 그것이 과학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셔머의 말대로 각 개인이 어떻게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것이지 도덕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도덕의 궤적이 직감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인도된다는 주장에는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철학자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도덕의 궤적이 모든 측면에서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가 수집한 과학적 증거에 의해 인도되어 왔고 인도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나는 어떤 연구도 셔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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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린 왕자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세계 명품 고전 2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 바로이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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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북으로 <어린왕자>를 들었다. 1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성우가 읽어주는 <어린왕자>를 듣는 것은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구절, 내용 상 연결을 위해 앞뒤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이 눈으로 읽는 책읽기라면, 자리를 뜨지 않는 이상 시간의 손을 잡고 이끌려 여행하는 것이 듣는 책읽기인 듯하다.

듣는 책읽기는 색다른 경험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지금'이라는 시간의 접점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벌써 저만큼 내용이 앞서가기에 그 흐름에 쫓아가는 수밖에 없다. 읽기가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면, 듣기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내가 오디오북에 익숙치 않아서일수도 있겠지만. 결국 독서가 끝나고 시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후에야 내용정리를 하다보니 밑줄긋기가 가능했던 예전과는 달리, 머리에 남겨진 몇몇 내용만 단편적으로 남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 관계. 수많은 닮은 이들로부터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 등등

누군가를 위해 소비한(또는 함께 한) 시간이 관계를 만들고, '길들임'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에게 의미를 발견한다는. 그렇지만, 이러한 의미는 상자 속의 양처럼, 보아뱀 안의 코끼리처럼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며, 소행성의 왕, 사업가, 지리학자 등이 말하는 것처럼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일까.

여기에, 서로를 '의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에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겠지만,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순간의 만남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것을 더하고 싶다. 오디오북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있는 내용이 남는 것처럼. 진정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이처럼 찰나의 순간에 강한 인상으로 느껴지기에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오디오북을 처음 접하면서, '보기'와는 또다른 '듣기'가 가져다 준 새로움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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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9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29 0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29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29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7-29 06: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겨울호랑이님도 오디오북을 접하셨군요^^ 또 다른 맛이지요? 눈감고 들으면 더 집중되더라구요. 어린왕자는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듣는 것으로 접하면 어떨까 궁금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9 10:49   좋아요 1 | URL
참, 거리의화가님께서는 오디오북 입문 선배님되시지요... 그때 말씀하신 맛이 요런 맛인가 싶습니다. 오디오북을활용하면 인지의 사각지역을 더 비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여건이 맞는다면 같이 활용할 계획입니다. <어린왕자>뿐이겠습니까, 다른 모든 책이 더 맛있어질 것 같아요. 31가지 맛..ㅋㅋ 거리의화가님 건강한 하루 되세요! ^^:)

그레이스 2022-07-29 08: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으로 들을만한 소설이란 생각입니다.
불어로 들어도 좋더라구요.
뜻을 몰라도 ^^

겨울호랑이 2022-07-29 10:52   좋아요 3 | URL
아, 그레이스님께서는 다른 차원의 독서를 하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David Copperfield>를 오디오북으로 듣다가 빠르게 무의식독서로 전환했다는 ㅜㅜ. 저는 열대야 ASRM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만, 외국어로 집중력있게 들으신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얄라알라 2022-07-29 18:13   좋아요 1 | URL
어린왕자는 불어로 들어야(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뜻을 몰라도‘) 감미로울 것 같네요^^
 

문명이라는 개념은 18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이 ‘야만’의 개념과 반대되는 뜻으로 발전시켰다. 문명사회는 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원시사회와 다르다.

문명은 유한하긴 하지만 아주 오래간다. 문명은 진화하고 적응하며, 인간의 결속체 중에서도 유독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극단적인 ‘장기 지속’의 현실이다. 문명의 독특하고 특별한 본질은 바로 그 장구한 역사적 지속성이며 사실상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문명이다

‘서구’라는 말은 이제 예전의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권을 일컫는 말로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서구는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나침반의 방위로만 확인되는 유일한 문명이다.* 서구는 자신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울타리를 넘어섰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은 유럽 문명이다. 근대 이후의 서구 문명은 유러아메리카 문명 혹은 북대서양 문명이다.

가장 중요한 측면은 유럽 제국주의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이식했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 전역에 강한 부족의식이 여전히 지배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점차 아프리카인으로서의 동질감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종교는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이다. 도슨이 말했듯이 거대 종교는 거대 문명이 의지하는 토대다.19 베버가 말한 세계 5대 종교 중에서 넷은(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거대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문명들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한 시기에 존재하던 문명의 수도 몇 안 되었을뿐더러, 벤자민 슈워츠Benjamin Schwartz와 아이젠슈타트가 강조했듯이 ‘축 시대aial Age, 軸時代’ 문명과 ‘전축 시대pe-Axial Age, 前軸時代’ 문명 사이에는 초월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의 구분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과거 문명의 보편국가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정치형태는 민주주의이므로 지금 태동하는 서구 문명의 보편국가는 제국이 아니라 연방, 연맹, 국제제도 및 국제기구의 혼합체다.

인류 역사에서 몇 가지 근본적인 가치와 제도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상수常數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간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제대로 분석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한다.

지난 역사를 보면 세계의 언어 분포는 세계의 권력 분포 현실을 반영했다.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 곧 영어·북경어·스페인어·프랑스어·아랍어·러시아어는 자기 언어를 다른 민족들에게 적극적으로 보급한 제국 국가들의 말이었다. 권력 분포의 변동은 언어 사용의 변모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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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을 당기는 행위는 기억을 보존하거나 강화한다. 이때는 사진을 찍어도 단순히 관찰에 집중하는 경우만큼 대상을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줌은 나중에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장면을 무심히 담는 것에 비하면 훨씬 능동적인 촬영 방법이다.

기억연구자들은 여전히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한 가지 답은 이미 분명하다. 기억(다른 과업도 마찬가지지만)을 아웃소싱할 때는 그에 따른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기록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믿을 수 없는 두뇌로 사진을 멋대로 해석하고, 입맛대로 고치고, 함부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선탠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을린 피부를 선호하기 때문이다.30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선탠을 하는 것이 사회적·생물학적·심리학적 요인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시사한다. 한 연구에서 펠드만Feldman과 그의 동료들은 다른 조건은 모두 동일하되 한 장비는 자외선을 방출하고 다른 장비는 방출하지 않도록 한 후 피험자에게 태닝을 하도록 하면, 선탠을 자주하는 사람일수록 자외선을 방출하는 장비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혔다.31 이런 연구결과는 선탠을 자주하는 사람들이 생리학적으로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UVIT와 피부암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햇빛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으로도 암을 유발할 수 있는데, UVIT에서 방출되는 자외선의 강도는 햇빛보다 12배까지 높다.12 즉, UVIT에서는 천연 자외선의 위험성이 더 커진다.

하버드 대학교의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은 도덕적 의사결정의 신경과학에 대한 다수의 문헌을 검토한 후 이른바 도덕판단의 ‘이중과정dual-process’ 이론을 제시했다. 그린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두 가지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윤리적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도덕판단의 형태를 바꾼다. 이 이론의 기본 견해는 우리의 인지과정(대략적으로 말해 이성적 사고능력)은 공리주의적 판단과 관련되는 한편, 정서적 반응(즉, 직감 혹은 직관)은 의무론적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두 종류의 윤리이론을 논리적으로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개념은 흥미로운 상황을 야기한다. 다시 말해, 뇌에서 어떤 형태의 판단이 선취를 점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판단을 내리게 될지 모른다.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우리의 결과는 정의가 공정성의 감각에 뿌리를 둔다는 칸트와 존 롤스의 직관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칸트 및 롤스와는 대조적으로, 이 감각은 이성적인 의무론 원칙을 적용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 처리과정의 결과다. 즉, 우리의 연구는 도덕적 정서주의moral sentimentalism를 지지하는 증거가 된다."

실천철학에서 우리는 실현 불가능한 플라톤 철학의 이상을 추구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윤리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 사고의 과정에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이 인간의 조건에 대해 강조했던 말들을 숙고함으로써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런 다음 생각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여전히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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