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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브로커들 -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 ㅣ 역사도서관 22
우치다 준 지음, 한승동 옮김 / 길(도서출판) / 2020년 8월
평점 :
이 책에서 나는 상인 고바야시 같은 이주 정착민들을 '제국의 브로커들'(brokers of empire)이라고 부르겠다. '브로커'라는 말은 매일의 상업적 노력에서부터 대규모 청원 운동에 이르는 정착민 활동을 이끈 이익추구형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을 가리킨다. 제국의 브로커들의 핵심적 과제는 일본인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활동과 팽창하려는 제국의 고투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런 역할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p30)... '브로커'라는 말은 또한 식민권력의 대리인(agent)이나 앞잡이(pawn) 역할도 했던 정착민들의 중재자적 지위를 포착하게 해준다. 정착민들과 국가간의 모호한 경계, 바로 이것이 제국의 브로커들에게 식민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31
우치다 준(Jun Uchida)는 <제국의 브로커들 Brokers of Empire Japanese Settler Colonialism in Korea, 1876~1945)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정착민들에 대해 분석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가 관(官)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는 정착민(民)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조선총독부와 협력은 물론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자본가 계급과의 협력 또한 불사한 독립 변수(變數)였다.
브로커들의 개인적 행동과 정착민들이 가한 집단적 충격은 대행자가 식민권력의 작동구조와 마주치게 되는 통치양식에서 선명한 것과 모호한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각각 대변한다... 정착민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부딪침의 도가니가 되고 제국의 핵이 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동역학(dynamic)이며, 조선에서의 일본 제국주의가 강력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특성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동역학 때문이었다. _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33
정착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제국의 중심부에서 제국의 주변부로 자원을 끌어오려고 했고, 조선인 엘리트들 또한 제국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정착민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19년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과정을 저자는 정착민들의 국가주의와 조선인의 민족주의의 융합으로 파악한다.
정착민 지도자들과 조선인 자본가 엘리트들은 똑같은 부류였다. 함께 선전활동을 벌이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일본인과 조선인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조선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이면 그것이 산업화의 문제든 지역자치의 문제든 종종 함께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종종 근본적인 목적이 완전히 엇갈렸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형제와 같으면서도 까다로운 관계였다... 두 동맹세력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의 원천인 식민국가와의 협력관계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까지 서로간의 이권투쟁을 극대화해갈 수 있을지를 놓고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7
일관된 원칙보다는 문화적 열망과 경제적 필요, 그리고 정치적 기회주의 등으로 뒤엉킨 복합적인 매트릭스가 각 단계의 정착민들 활동을 떠받쳐주었다. 식민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입지가 취약할 때, 제국의 브로커들은 정부의 정책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거기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의제를 추구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물질적 이해관계, 정치적 보상을 추구했던 조선인 엘리트들과도 종종 협력했다. 이런 야누스적 동맹관계 속에서 일본인 정착민들은 통치체제에 반대하기도 하고 그것을 수용하기도 하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위기의 시대에 그들은 서로 의지했지만 조선인 반체제세력에 대처하는 전략을 놓고서는 서로 충돌했다. 공유된 열망과 충돌하는 의제들이 정착민 식민주의의 내부동역학을 만들어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3
국가주의(state nationalism)와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간의 미묘하고 함축적인 긴장, 즉 역사학자 케빈 도악(Kevin Doak)이 식민본국(일본)의 정치논쟁 속에서 확인했다고 주장한 그 긴장은 일본 국적자들이 국민으로서의 정치적/법률적 경계 안에 불완전하게 편입되어 있던 해외영토인 조선에서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202
저자는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를 거치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격렬한 대립과 융합이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 전쟁(태평양전쟁)의 총력적 체제 하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으나, 사실은 허구로 판명되었음을 밝힌다. 결국, 저자는 <제국의 브로커들> 안에서 제국의 변경지역인 조선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회색지대의 두 세력 - 식민지 정착민과 조선인 엘리트 - 들의 결합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격렬한 화학적 반응과 실패한 융합으로 결론짓는다.
조선인들의 활동이 협력과 저항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거부한 것처럼 정착민들의 정치적 행동도 윤해동이 공적 활동과 자각의 '회색지대'라 부른 영역을 만들어내면서 언제나 타협과 무언의 대결이 벌어지는 공간인 중간지대에서 이뤄졌다. 제국의 브로커들과 그들의 조선인 동맹세력이 공동의 이익이라고 여긴 것을 증진하기 위해 함께 일한 곳은 이런 경계가 애매한 접촉지대였지만, 그들은 또한 동시에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오랜 상호투쟁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는 쌍방 모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자들과 피식민자들 사이에 일정부분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9
최고의 역설은 내선일체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던 많은 정착민들이 전쟁 말기에 가장 무모한 내선일체의 신봉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총후활동이나 일상적인 제국의 의례행사에 조선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천황에 대한 충성의 공개적 표시로 점점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내선일체 정책의 모든 장치들이 토대로 삼고 있던 허구였다. 믿음에 눈이 멀어 그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조선인들이 '위장된 친일파, 체념한 친일파, 총구 앞의 친일파'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으며, 대다수 조선인들의 굴종이 총력전 체제 아래서 강요당한 허구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29
<제국의 브로커들>은 일제시대의 권력 구조를 총독부라는 관(官) 뿐 아니라 정착민과 조선인 자본 엘리트 계층을 추가 변수로 투입하여 분석했다는 점에서 동역학(動力學) 구조로 식민농정을 파악한 정연태의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구조가 일제시대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사실이고, 한일 양국에서 잊혀진 존재들인 정착민들을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렸다는 점에서는 분명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이는 책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책에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937년 이후에 조직적인 저항이 사라졌지만, 많은 정착민들 눈에 그것은 단지 종족적 민족주의 정신이 내선일체의 틀 내에서 새로운 국민자격 허용요구로 모습을 바꾼 것이었을 뿐이다. 식민지 시절 내내 조선의 민족주의는 여러 가지로 형태를 달리하면서 표출되었다. 제국의 브로커들은 온건한 민족주의자들과 뒤섞이고 자본가 엘리트들과 협력하면서, 그리고 조선 사회의 각계각층과 함께 국민자격 요구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바뀌고 대립하는 외형을 지닌 조선의 민족주의와 대면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8
저자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근대화, 산업화 구조를 가진 제국주의 내에서 국가주의와 결합시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은 민족주의를 근대화의 산물로 바라보는 겔너(Ernest Gellner, 1925~1995)의 주장과 같은 관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이라면, 만주와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투쟁을 벌인 이들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반(反)근대화 세력에 불과한 것일까. 민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반응제 수준으로 한정짓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부정당하는 것이 아닐까. 본문에서는 비록 이러한 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19세기 말 신채호(申采浩) 같은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만선사(滿鮮史 : 만주, 조선사)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만주로 간 선구자들인 1백만 조선인 동포들'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목표는 다양하게 갈렸지만. 그 두 집단의 연구자들을 모두 '만주와 조선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고대 왕국이었던 고구려의 영토경계가 만주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의 간도로의 이주는 "조상의 옛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심과 조선의 오랜 고토수복 추구가 다시 한 번 만주로 집결했다. 신채호와 같은 저자들은 민족부활의 꿈을 조선의 고대 왕국들이 지배했던 '북쪽 땅들'에 고정시켰고, 일본인 저자들은 조선인 '동포'의 활기를 자민족의 대륙확장을 촉진하는 데 활용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427
저자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의 예로 신채호 선생(申采浩, 1880~1936) 등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만주침략 시기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들고 있다. 구한말 민족의식을 깨우려는 역사연구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역사연구가 결국 같은 방향을 지향했다는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1940년대 일본의 내선일체가 허구였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인의 강제 징용을 적극적인 참여로 착각한 정착민들처럼, 저자는 구한말의 민족주의 정신을 제국주의 침략 정신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저자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 식민지 정착세력과 조선인 지식인들간의 결합은 각자 이익을 위해 행동한 이기주의,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제국의 브로커들>은 이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조선정착민에 대한 시선을 그려낸 얼마 안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제국은 조선인들에게 광범위하고 때로는 파멸적인 변화를 안겨주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특별한 이력을 쌓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주자들의 삶은 불확실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빈손으로 되돌아갔으나, 또한 수많은 이들이 성공해서 한밑천 잡았고 제국을 떠받치는 토대가 됐다... 고바야시의 이력은 정착민들이 국가에 협력도 했지만 그들 독자적인 식민지 사업들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사업들은 국가의 공식정책에 늘 부합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해외이주 정착민들은 식민통치의 모든 국면에 걸쳐 중요하고 독자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것이 이 책에서 다룰 핵심적인 논점이다 - P26
조선의 쌀 교역이나 식민정부의 행정부처 문제, 또는 총력전 대비태세와 관련한 총독통치의 진로설정에는 본국의 수요(필요)가 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정착민들의 발언권이 컸던 식민지 통치체제의 수요와 방법이 거꾸로 본국에 영향을 끼쳤다. 정착민 정치와 조선인 동화에 대한 불안도 단일민족(그렇게 추정된)국가와 다민족제국 건설이라는, 일본제국의 국민 핵심부에서 동시에 추진된 사업에 내재된 긴장을 증폭했다. 혁명적인 시대의 산물이자 그 대리인들인 정착민들은 국가(state)와 사회, 중심과 주변, 민족(nation)과 제국의 점점 속에서 살아가면서 근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병진적인 전환 속을 헤쳐나갔다. - P532
제국통합시기 - 1905년의 통감부 체제부터 1910~19년의 무단통치 첫 10년까지 -를 통해 간파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은 정착민들이 조선인들과의 부딪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점차 투쟁으로 점철되어간 식민국가와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실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치제도를 보호하려는 정착민들의 끈질긴 운동, 또 패배 이후에 장차 닥쳐올 더 많은 투쟁에 대비하려는 그들의 무대설정이다. - P201
과잉조직된 전시(戰時)운동의 기제도 내선일체의 의도된 목표들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그 의미를 파악하게 하기보다 단신히 가담하게 만드는 것이 식민지 동원운동가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였다. 달리 말하면, 동원(mobilization)은 그 자체가 이념이 되었다. 경찰의 기록과 메모들이 보여주듯이, 조선인들이 징병 등 의무수행의 대가로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경향이 증대되어간 추세가 조선 민족의 포기 또는 ‘친일‘로 자동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일본인 정착민들도 조선인들의 모든 행동 뒤에는 민족적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 P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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