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한국 전쟁 관련 책과 소설을 읽다가 심적으로 힘들어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 고른 책이었다(전쟁에 관련된 직접적인 묘사를 읽는 것은 역시 힘든 일). 이 책이 나온지도 꽤 되었는데 그때부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읽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 책은 한국 근대 시기를 살아간 여성 세 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므로 인물에 대한 상황과 감정적인 묘사를 집중적으로 그리지만 간접적으로 그들이 살아간 역사적 배경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세 여자는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로 같은 시기를 살아낸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살아온 배경도 성격도 각기 달랐다.
허정숙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랐으며 아버지는 허헌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변호사였다. 그녀는 불꽃 같은 성정을 지녔다.
주세죽은 영생여학교를 다니며 음악 학도를 꿈꾸었다. 3.1 만세 혁명이 아니었다면 음악 교사나 피아니스트 등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녀는 겉은 약해보여도 내면은 강한, 외유내강의 여성이라고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상해에서 만나 혁명을 꿈꾸고 사랑을 만나게 된다.
고명자는 완고한 양반집 외동딸로 태어나 그야말로 풍족하고 고귀하게 자랐다. 이화학당에 다니면서도 시종과 늘 함께 다녔을 정도였다. 그녀는 집안 살림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당연히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었던 사람이었으니 여성동우회 교육 홍보 전단을 보고 찾아간 그 곳에서 당연하듯 분위기는 빈정거림이 대부분이었다. '저 부잣집 따님이 얼마나 이곳을 오갈까.'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모임에 꼬박꼬박 나오며 열의를 보였고 무엇보다 애교 가득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색안경 낀 시선을 바꾸게 만든다.
사실 그녀들의 남은 인생 이야기를 하려고 줄거리를 적었다가 도로 지웠다. 책으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고 여겨서다. 아무리 역사적 인물이더라도 전해듣는 것은 아무래도 직접 읽는 것보다 감흥이 덜하니까.
올해는 조선공산당 100주년이기도 하고 해방 8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관련 글들을 많이 접하고 있는 중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황제는 유명무실해졌고 나라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 사람은 이상을 갖고 이를 위한 배움을 쫓았으며,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현실적으로 당장 내일 밥 먹을 걱정,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궁리부터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세 사람의 인생에서 러시아 혁명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 같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무산자 해방과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기치를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당시는 수많은 식민지들이 생겨나 있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생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물자는 팍팍해졌다. 자본주의가 있는 한 계급은 생길 수밖에 없다. 부자들만 잘 먹고 사는 나라를 원하지는 않을테니 억눌려왔던 빈자와 노동자들은 그렇게 일어서던 시기였다.
1920년 무렵 인터내셔널가가 풍미하는 시대, 이 무렵 조선에도 조선공산당이 생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어떻게든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 시기 세 사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뜨거운 기대를 걸었고 추진했지만 조선공산당 색출 사건으로 대부분 잡혀 들어가면서 일차적으로 그 힘이 꺾이고 만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시기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과 마주하게 된다. 사회 진출을 하고 싶어도 그 입구는 좁았고 그마저도 여성이 잘 나가는 것을 아니꼽게 보거나 불편하게 보았다. 여전히 여성,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정조가 강요되던 시기,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세 여자들의 활약은 뭇 남성들을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대로 아니꼬운 시선을 던지고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한 마디씩 던진 것이다. 그녀들이 단발 머리를 한 것도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하니... 허정숙이 <신여성>에서 일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편집실에 술이 취해서는 난입한 남자들이 하는 말이 "잘난 여자들 얼굴 한번 보자. 당신들 시집이나 갔어?”였다고(허허허).
허정숙은 특히나 혁명과 여자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3.1운동으로 기생의 신분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정칠성의 말도 있다.
"인형의 집을 나온 노라는 해방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눈보라 치는 밤에 집을 뛰쳐나와 굶어 죽는 게 무슨 얼어 죽을 해방이야. 여자에게 경제적 독립 없는 해방은 공염불이지. 정칠성이었다.”
"남자들은 첩을 몇씩 거느리고 제멋대로 살면서 여자한테만 엄격한 도덕을 요구하니까 문제라는 거야. 사랑이 결혼보다, 제도보다 위여야 해. ... 사랑이 없으면 결혼은 굴레야."
정숙은 성명서 낭독하듯 따박따박 끊어 말했고 마지막 문장에선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삼단논법인데 ... 우선, 민족이 망했는데 여자가 가정에서 해방되면 무슨 소용인가. 그다음, 민족이 자유를 찾았는데 여자가 구속돼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또한 여자가 해방됐다 해도 한 줌 유산계급 여자만 자유로우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민족도 구제하고 여자도 구제하고 무산계급도 구제하는 방법은 공산주의뿐이라는 거!"
여성들이 누구보다 자유 해방을 꿈꾼 것에는 기존의 억압과 굴레가 큰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도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버겁고 어려운 일이다. 그 시기는 오죽했을지.
그리고 세 사람을 둘러싼 사랑이 있다. 이 사람의 인연이 시간이 되면 저 사람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 “살아보니 그렇게 되더라…” 곧잘 듣곤 했던 말이 무언지 이들의 삶과 사랑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정숙의 인생은 많은 사랑들을 거쳐 결국 혁명으로 귀결되었다고 느꼈다.
주세죽은 어떨까. 평범했던 그녀가 혁명의 손을 잡고 결국은 혁명으로 흩어진 것일까.
고명자의 인생은 무어라 정의하기 어렵다. 결국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선택을 했다고 보여진다.
나는 허정숙의 삶에서 주먹을 쥐었고 주세죽의 삶에서는 슬픔을 느꼈으며 고명자의 삶에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늘 내가 하필 그 시기에 남한에서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는 것을 신기하게 느낄 때가 많았다. 이 일은 곱씹을수록 놀랍지 않은가. 세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조금만 다른 시기에 태어났다면,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어떤 삶을 살다가 갔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선택적 운명을 부여받고 태어난다.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탄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물 일대기의 빈 공간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메꾸고 있다. 요즘은 나무위키든 위키백과든 어떤 사람의 인물의 간략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다만 그 나열된 정보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면 꽤나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꽤나 많은 발품을 들여서 조사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녀들의 인생을 확인하며 나도 함께 웃고 울었다. 마지막은 결국 어떤 '짠함'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한동안 책장을 덮고 멍하니 있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들의 인생에 중요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면 '혁명'과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 형태는 각기 달랐고 전개 과정도 달랐지만 그들은 주어진 삶을 있는 힘껏 살아냈다라고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직접 만나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