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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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사람들은 십자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프랑크인들의 전쟁 내지는 침략이라고 말한다. 프랑크인들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지역, 저자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 오늘날 서유럽인들을 가장 대중적으로 부르는 말로, 특히 프랑스인들을 지칭하는 프랑크다. - P11


최근 며칠 간 십자군 전쟁에 관련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 내가 아는 소수의 지식이 얼마나 서구 중심, 그리스도교 중심의 역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력은 십자군 전쟁을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성전의 기치를 내걸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측인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잘 살고 있는 땅을 유린당하고 가족, 친지를 잃으며 떠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지은 작가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에서 태어났으나 조국이 내전에 휩싸이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여 아랍 문화와 서양 문화를 동시에 경험한 배경을 지녔다. 게다가 소설가인 동시에 역사가이면서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한 바 있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랍의 다양한 사료를 기반으로 갖고 와 당시 아랍인의 생각과 목소리를 전하고 사건은 르포처럼 현장감이 있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특징이 있었다(작가가 머리말에서도 밝히듯 실화 소설을 다루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사료 중 가장 많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는 ‘이븐 알 칼라니시’이다. 그는 문필가이자 연대기 사가로 1096년 프랑크인들이 들어온 이래 사건을 목격하며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나이 23살 때부터 기록을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청년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십자군 전쟁을 겪은 셈이다. 


그 해 여름, 서쪽 하늘에 혜성 한 개가 나타났다. 그 혜성을 스무 날이나 계속 올라가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곧 사라져 버렸다. 소문은 점점 구체성을 띠어 갔다. 그리하여 9월 중순에 이르자 사람들은 프랑크인들의 전진 과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1097년 10월 21일,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안티오케이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들이 온다!” … 이른 아침 수크의 왁자지컬함은 뚝 끊겼고 상인들과 손님들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여자들은 기도문을 웅얼거렸다. 삽시간에 온 도시는 공포에 휩싸였다. - P42~43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가 생생히 전해진다. 


프랑크인들은 계속 전진하여 1098년 말 시리아의 ‘마라’라는 도시에 들어오게 된다. 이 때 시리아에 들이닥친 프랑크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보자.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 P70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모습인데 프랑크군의 연대기 저자가 직접 쓴 것인만큼 충분히 잔혹한 상황이었을거라 짐작할 수 있다. 

프랑크인들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에게서 엄청난 용기와 전투에 대한 열정을 갖춘 맹수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힘세고 호전적인 동물들이었다. - P71

그럼에도 ‘마라’ 근처의 도시인 ‘샤이자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엄청난 기근이 있었다고는 해도 꼭 그런 상황이 불가피했는지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아무튼 마라에서 벌어진 살육은 아랍인들과 프랑크인들 사이에 큰 반감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주목할 만한 인물이 몇 있었다. 

이마드 알 딘 장기는 알레포와 모술의 새 통치자로 선출된 이후 프랑크인들과 최초로 맞선 전사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전사이자 전술가였을 뿐 아니라 추후 아랍계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통치가였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주변에 인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얻음으로써 프랑크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장기는 선전술이나 교란술도 능수능란해서 프랑크군의 애를 먹였다. 그리고 그는 군율을 엄격하게 하여 군기를 어지럽히는 자를 벌하면서도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성이 아닌 막사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장기의 둘째 아들인 누르 알딘은 장기의 아들답게 선전선동에 탁월했다고 한다. 

그는 시와 서신, 책을 쓰게 하였으며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만한 적당한 때를 골라 퍼뜨리게 하였다. 그가 설파하는 교리는 간단했다. 단일 종교. 곧 이슬람 순니파로서 모든 ‘이단들’에 맞서는 격렬한 싸움을 의미하였다. … 권좌에 머무른 28년 동안 누르 알 딘은 여러 울라마들을 부추겨 조약을 쓰게 했으며, 이슬람 사원들과 학교에서는 대중 강독을 통해 성지 알 쿠드스의 가치를 선전하게 하였다. - P208

그는 알레포를 장악하고 에데사를 함락시켰으며 프랑크군의 다마스쿠스 진군도 실패하게 만들었다(이때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넘겨받았다는 것이 탁월한 점). 또 각종 세금을 없앰으로써 군중이 인정하게 만들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시켰다는 점도 있다. 


장기는 힘을 실어준 술탄이 사망한 이후 계승 전쟁에서 불리해지는데 이때 타크리트의 지도자인 아이유브의 도움을 얻는다. 아이유브의 아들이 바로 살라딘(유수프)이다.

살라딘과 누르 알딘과는 교묘한 경쟁 관계였다고 보여진다. 당시 이집트 원정을 떠난 시르쿠와 살라딘에 맞서 이집트는 프랑크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시르쿠가 사망하자 살라딘이 파티마 왕조 칼리프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통치자에 오른다. 누르 알딘은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결국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르 알딘이 사망하면서 그 결행은 이어지지 못했다고. 만약 둘이 승부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무튼 살라딘은 결국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어떤 학살이나 약탈 행위도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당시 주변 관리들이나 이슬람 주민들에게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살라흐 알 딘은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포위 공격을 할 때 방어자들이 거세게 저항하면 그는 이내 지겨워하며 포위를 풀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운명이 아무리 그에게 호의적이더라도 말이다. 그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성공을 굳히기보다는 성공의 과실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라흐 알 딘이 티레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예다. 무슬림이 그 도시 앞에서 말머리를 돌린 것은 분명한 과오였다. - P287

공격자들의 공격이 지겨워서 설마 포위를 풀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그가 보인 행동은 이슬람 측에서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상대측에게 퍼주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1189년 프랑크 왕은 살라딘과의 협약을 깨고 아크레를 포위해버리고 만다. 아크레 전투는 장장 2년 동안 이어졌고 결국 살라딘군은 프랑크군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살라딘의 동생이었던 알 아딜은 아이브유 왕조를 하나로 모으는 일을 일구어냈다. 그는 뛰어난 행정가로 아랍 세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고 번영하게 만들었으며 관용의 태도를 보인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아이브유 제국의 일인자가 되었으면서도 프랑크인들과 공존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랍인의 목소리를 통한 서술인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저자가 이슬람 칭찬 일색으로만 이야기를 서술하지 않으려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이야기적 서술로 재밌게 읽을 수 있으나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뒤섞여 나오는 경우가 많아 거시적으로 역사를 정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부분은 책의 뒤에 연대기를 실어놓고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물의 특징, 특정 사건에 대한 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읽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십자군 전쟁 동안 에스파냐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아랍 세계는 아직은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앞선 문명의 보고였다. 그러나 나중에 세계의 중심은 결정적으로 서쪽으로 옮겨진다. 여기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과연 십자군이 서유럽에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며 아랍 문명에는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전혀 그릇된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판단이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는 점이다. 아랍인들은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분명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이라는 존재가 그것을 드러나게 했고 더 악화시켰을지는 모르지만 그 결함을 창출한 장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 P36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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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칠 줄 모르는 전사는 무려 18년에 걸쳐 시리아와 이라크땅을 누비고 다녔다. 때로는 진창에 빠지지 않으려고 짚단 위에서 잠을자고, 어떤 이들과는 싸우고, 어떤 이들과는 우호조약을 맺는 등 모두를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광활한 영지 곳곳에 널려 있는 궁전에서 편히 머무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비위 맞추기에 연연하는 간신들이 아니라 그에게필요한 연륜 깊은 조언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한 바그다드는 물론, 이스파한, 다마스쿠스,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심지어 자신의 영지인 알레포와 모술에까지 퍼져 있는 촘촘한 정보망 덕분에 지속적으로 정보를얻을 수 있었다.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다른 군대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 P169

언제든지 배반하거나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던 에미르들의 자율적인집단지도체제를 따르지 않았다. 군기는 엄격했으며 지극히 사소한 과실도 엄하게 다스려졌다. … 알레포의 통치자는 다른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그는 도시에 도착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머무를 수 있는 그 많은 성들을 무시하고 늘 성 밖에 있는 자신의 막사에서 묵었다. - P170

단 몇 주만에 장기는 동방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로 특사를 보내 다니슈멘드의 후계자들이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하도록설득하였을 뿐 아니라 바그다드로 선동가들을 보내 1111년에 이븐 알카샤브가 일으켰던 것 같은 소요를 조직하여 술탄 마수드가 샤이자르로군대를 급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시리아와 자지라의 모든 에미르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서신을 보내 새로운 침략에 맞서 힘을 모을것을 명했다. 적의 군대보다 수가 적었던 아타베그의 군대는 전방에 나서지는 않으면서 작은 교란 작전을 펼쳤다. 아타베그는 바실레이오스와프랑크 지휘관들한테 긴밀히 전갈을 보냈다. 그는 바실레이오스-일단은 그가 황제였으니까-에게 자신은 이 연합군이 두려우며 그들이 시리아 땅을 조속히 떠나기를 바란다는 뜻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면서데사의 조슬랭과 안티오케이아의 레몽 같은 프랑크인들에게는 이런 전 - P184

언을 보냈다. 일단 룸인들이 시리아 땅의 요새 한 군데를 점령한다면 머지않아 당신네 도시들을 전부 손에 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또한 페르시아와 이라크,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엄청난 무슬림 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사기를 저하시키라는 임무를 띤 첩자들이 비잔티움과 프랑크의 일반 전사들 틈에 잠입했다. - P185

누르 알 딘은 선전선동을 몸소 관장했다. 그는 시와 서신, 책을 쓰게 하였으며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만한 적당한 때를 골라 퍼뜨리게 하였다. 그가 설파하는 교리는 간단했다. 단일 종교, 곧 이슬람 수니파로서모든 ‘이단들‘에 맞서는 격렬한 싸움을 의미하였다. 이어 단일 국가. 이것은 프랑크인들을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단일 목표. 이것은 빼앗긴 땅을 되찾고 특히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지하드를 의미했다. 권좌에 머무른 28년 동안 누르 알 딘은 여러 울라마들을 부추겨 조약을 쓰게 했고, 이슬람 사원들과 학교에서는 대중 강독 - P208

집회를 통해 성지 알 쿠드스의 가치를 선전하게 하였다. - P209

누르 알 딘은 승리자다운 아량으로 아바크와 그 측근들에게 홈스지역의 봉토를 하사하였으며 그들이 재산을 갖고 피난하는 것도 허락했다.
전투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누르 알 딘은 무기가 아닌 설득 - P221

으로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4반세기 전부터 아사신이건, 프랑크인들이건, 장기이건 간에 자신들을 예속하려는 누구에게나 격렬히 저항해 왔던 이 도시는 안전과 자주성을 존중해 주겠다는 한 왕자의 너그러움에손을 들고 만 것이다. 다마스쿠스인들은 그 점을 후회하지 않았다. - P222

살라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작고 가냘픈 몸에 단정하게 수염을 길렀다고. 그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살라딘은 사색적인 표정에 약간은 침울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졌다고 한다. 그는 늘 손님에게 상냥했다. 음식을 자꾸 권했으며 그들의 요구는 되도록 들어주려 했다. 비록 불경을저지른 자들일지라도 모든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실망스럽게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그의 이런 성격을 때로이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 P255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 금은보화가 탐이 나서도 아니요. 복수 삼아 한 일은 더더욱 아니라고 했다.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다만 신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무에서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살라딘이 거둔 승리의 의의는 성지를 침략자 무리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뿐 아니라, 피와 파괴를 동반하지 않고, 증오 없이 행해졌다는 데 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무슬림은 기도를 드릴 수 없었을 이 성지에서 무릎을꿇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라딘은 흡족할 따름이었다. - P284

아크레, 아스칼론, 또는 예루살렘 등 도시나 요새를 점령할 때마다살라흐 알 딘은 적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티레로 망명하는 것을 허락했다. 현실적으로 이 도시를 완전히 함락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불구하고 말이다. 연안 지대의 프랑크인들은 바다 저편에 있는 자들에게 연달아 전령을 보냈고 이들은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살라흐 알 딘이야말로 자신의 군대에 대항하는 방어군을조직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 P288

사실 성지 예루살렘은 알 카밀의 세력권에 있지 않았고 얼마 전에 사이가 틀어진 동생 알 무아잠의 수중에 있었다. 알 카밀은 자신의 벗인 프리드리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서 알 무아잠의 야심을 저지하는 완충국을 건설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길게 보면 다시 힘을 회복한 예루살렘이 이집트와 그 위협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아시아의 호전적인 전사들(몽골을 말함-옮긴이) 사이에서 효과적인 중재역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열렬한 무슬림이라면 결코 냉정하게 성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겠으나 알 카밀로 말할 것 같으면 백부인 살라딘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무엇보다 정치적이자군사적인 사안이었다. 종교적 입장은 여론을 상대할 때에나 고려할 문제였다. 한편 스스로를 그리스도 교도도, 이슬람 교도도 아니라고 느끼고있던 프리드리히도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였다. 그가 성지를 탐냈던 것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묵상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동방으로의 출발을 늦춘다고 자신을 파문한 교황과의 싸움에서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P320

당시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을다스리고 있던 아이유브 왕조의 소국 왕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칭기스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침략자들과 손을 잡아서 왕조의 적이기도 한 이집트 맘루크들과 대적할 생각을 할 만큼 정신 나간 자들도 있었다. 서유럽과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들의 입장도 가지가지였다. 하이톤이 통치하던 소아르메니아는 몽골인 편을 들었다. 하이톤의 처남이었던 안티오케이아의보에몽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아크레의 프랑크인들은 오히려 무슬림 쪽에 유리한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은 물론 동방에서도 - P339

몽골 군의 원정을 프랑크인들의 원정처럼 무슬림에 대항하는 일종의 성전으로 보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 P340

아크레를 정복하고 나자 신께서는 시리아 연안에 아직 남아 있던프랑크인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심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이다와 베이루트, 티레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도시들에서도 서둘러짐을 싸기 시작했다. 술탄은 그 어떤 술탄보다도 좋은 운을 타고난사람이다. 그 지역을 그처럼 수월하게 정복해서 즉각 파괴시켜 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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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군의 침공 초기에는 알 하라위가 그랬듯이 서쪽으로부터비롯한 위협이 그처럼 광범위하게 퍼지리라고 짐작한 아랍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너무 빨리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체념하고 살아 남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낯선 상황을 이해하려고 비교적 냉철한 관찰자의 모습을견지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바로 다마스쿠스 명망가 출신의 젊은 문필가이자 연대기 사가인 이븐 알 칼라니시3일 것이다.
1096년에 스물세 살의 나이로 프랑크인들이 처음 동방으로 들어오던 모습을 목격한 이래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기적으로 기록하였다. - P19

그 해 여름, 서쪽 하늘에 혜성 한 개가 나타났다. 그 혜성은 스무 날이나 계속 올라가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 P42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곧 사라져 버렸다. 소문은 점점 구체성을 띠갔다. 그리하여 9월 중순에 이르자 사람들은 프랑크인들의 전진 과정을포착할 수 있었다.
1097년 10월 21일,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안티오케이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들이 온다!" 몇몇 사람들이 성벽으로 뛰어갔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멀리 벌판 끝 안티오케이아 호수 근처에서 이는 희미한 먼지뿐이었다. - P43

새벽 4시, 도시 남쪽에서 밧줄과 돌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오각형 망루 꼭대기에서 한 남자가 몸을 매단 채 손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꼬박 밤을 새웠는지 그의 수염은 심하게 헝클어져있었다. 이븐 알 아시르는 그의 이름이 피루즈이며 망루를 지키는 일을담당한 갑옷 제조인이었다고 쓰고 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무슬림인 피루즈는 오랫동안 야기 시얀의 주변에 머물러 왔으나 암거래를 한 혐의로얼마 전에 큰 벌금을 문 적이 있었다. 복수를 벼르던 피루즈는 포위자들편에 가담하기로 했다. - P61

당시 시리아는 아주 작은 부락조차도 독립적인 군주국으로 자처할 만큼 정치적 분열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거나 침략자들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든, 카디든, 귀족이든 누구라도 지극히 미미한 저항만으로도 자신의 공동체를 단번에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 애국심은 따로 묻어둔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공물을 지참하고프랑크인들에게 존경을 표하러 찾아왔다. 네가 부러뜨리지 못할 팔이라면 그것을 껴안고 그 팔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를 하라는 그지방 속담을 따르기나 하는 듯. - P74

생질은 그에게 신의 저주가 있기를 클르츠 아르슬란에게 패한뒤 시리아로 돌아왔다. 그의 휘하에는 3백 명의 병사들밖에 없었다. 그 때 트리폴리스의 영주인 파크르 알 물크는 두카크 왕과 홈스의 통치자에게 전갈을 보냈다. "생질에게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이번에야말로 그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 P106

아니겠소!" 두카크는 2천 명을 서둘러 모았고 홈스의 총독도 가세하였다. 트리폴리스의 군대는 성문 앞에서 이들과 합세한 뒤 생질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다. 생 질은 1백 명은 트리폴리스 군대와, 1백 명은 다마스쿠스 군과, 50명은 홈스 군과 맞붙게 하고 나머지50명은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런데 적을 보자마자 홈스의 군대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다마스쿠스 군도 똑같이 도망쳤다.
트리폴리스 군대만 홀로 맞섰는데 이 모습을 본 생질은 2백 명의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하여 7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 P107

샤라프의 수하 몇몇이 그에게 말했다. "성지를 탈환하러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보다는 자파를 손에 넣읍시다!" 샤라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가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바다를 건너온 원군과 합세한 프랑크인들은기세를 회복하였고 샤라프는 결국 빈손으로 이집트의 부친에게 돌아가야 했다. - P108

여름이 시작되자 프랑크인들은 그들의 이동탑들을 성벽으로 밀어붙이면서 트리폴리스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주민들은 격렬한 공격을 감당해야 할 것을생각하자 일찌감치 기가 질려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벌써 느꼈다. 식량도 바닥난 데다 이집트 함대의 도착도 늦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지으려는 신의 의지인지 바람은 반대편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공격의 수위를 곱절로 높였고 1109년 7월 12일,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 P125

하산이 적을 겁주는 데 선호한 무기는 바로 살인이었다. 조직원은 대개는 혼자서, 아주 드물게는 두세 명의 무리를 이루어 지목한 인물을 살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주로 상인이나 수행자로 변장을 하고범행을 저지를 도시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와 희생자의 습관 등을 익혔다. 계획이 일단 결정되면 그들은 단번에 실행했다. 그런데 준비는 극도로 엄중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행은 되도록 많은 군중들이 모인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장소는 대사원이 시기는금요일 정오가 선호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산에게 살인은단순히 적을 제거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중에게이중의 교훈을 주는 방식이었다. 살해당한 자에 대한 개인적인 징벌이하나라면 그 일을 행한 조직원의 영웅적 희생이 또 하나였다. 이 암살자를 이른바 ‘자살 특공대‘ 라는 뜻의 ‘피다이‘로 불렀던 것도 그들이 주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원들이 침착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 때문에 이들이 하시시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동시대인들이 많았다. ‘하시시 중독자‘라는 뜻의 ‘하슈샤신‘이라는 별칭이 훗날 ‘아사신‘으로 변형되어 여러 나•라 말들에서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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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저녁까지 걷기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리디 살베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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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해야 했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이해하지 못한 영역이 조각이었기에 그것을 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제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었다. 자코메티라… 몇 년전 자코메티 전시를 보러 갔다가 ‘걷는 인간’을 보고 오래도록 잔상에 남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인 리디 살베르는 2014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그는 우연히 알리나를 통해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온전한 하룻밤의 시간을 보내며 자코메티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걷는 인간’을 보면서 작가가 어떠한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오래도록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작가는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토해내는데 정서적 측면에서 상당 부분 공감이 갔다. 그녀는 이민자 부모 아래 자란 폭력적인 아버지 하에서 학대를 받은 경험을 고백하며 상처와 콤플렉스가 오래도록 그의 정서를 뒤흔들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흘러갔지만 잔상과 흔적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녀는 ‘걷는 인간’ 앞에서 거대한 벽을 느끼며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 내적 스트레스가 오히려 자신과 주변을 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함께 사는 반려자와 입씨름을 하며 미술관의 미술품들이 자본주의의 노예로 좋은 투자처일 뿐 아니냐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니까. 뭐 일부는 공감이 가기도 한다. 어떤 미술관의 미술품은 전리품인 경우가 있고 어찌 되었든 미술관에서는 돈이 되는 전시품을 모은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특히나 사설 미술관은 돈이 되지 않으면 영업을 이어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자코메티의 삶과 예술에 세 명의 중요 인물이 등장한다. 아네트, 이사쿠 야나이하라, 그리고 카롤린. 아네트는 아내이자 모델 겸 작업 조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 상당 부분 등장했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둘은 술집에서 만나 동거 후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야나이하라는 사르트르의 소개로 자코메티를 만났고 이후 그의 모델이 되었다. 카롤린은 자코메티의 마지막 연인이었는데 자코메티는 그녀에게서 강한 에너지와 힘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처럼 삶과 예술은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걷는 인간’은 뼈대만 남은 사람이 앞을 향해 기운 채로 서 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궁금했다. 아래 구절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실패를 계속해야 했고, 고꾸라져야 했다.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실패해야 했고, 그 모든 암중모색과 망침, 후회, 망설임, 엉김, 돌출, 사고, 비틀림, 추함, 자신이 견뎌낸 모든 실패와 불확실성을 작품에 담아야 했다.
쉬지 않고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저 자기 내면에서 나아가는 것일지라도.
그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행위가 어쩔 도리 없이 그를 끔찍한 난파로 이끌지라도.
심장이 고동치는 한 걷고, 걷고, 걸어야만 했다.

자코메티 하면 실존주의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는 삶을 중요시 여겼고 수없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실패를 새로운 창작을 위한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작가는 나아가 그것이 죽음의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한다. 계속 걸어가다보면 그 끝은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공교롭게도 자코메티의 전시품을 피카소 미술관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삶은 피카소와 비견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피카소는 예술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사’보다는 ‘생’을 추구했던 작가였다고. 하지만 나는 자코메티도 예술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다고 본다. 다만 둘은 그 방식의 차이가 있었을 뿐.

예술은 사는 일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사실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술이 우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허기를 늘리기도 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에 당당히 도전하거나 냉혹하게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것. 몸과 영혼이 포맷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를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시대는 더이상 불가능을 희망하지 말라고 엄명하는데 예술은 불가능을 좇는 우리의 취향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 유용한 목적만 좇는 정신이 곳곳에서 우세할 때 예술이 무용한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되살리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을 다시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유년기에 무척 좋아했던 색채들, 특히 빨강에 대한 취향, 잊어버린 취향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형태와 사물에 대한 취향, 그것들의 소재와 빛에 대한 취향,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주어진 단순한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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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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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입문서인 이 책은 작년에 나왔다. 올해 나온 책 이외에 라투르의 사상을 요약 정리하여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신간과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라투르 사상의 흐름을 잘 정리한 책이라 보여진다. 한 명의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약력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의 이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하면서 자연스레 사상이 전개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저작과 함께 소개한다. 이보다 탁월한 구성이 있을까. 


브뤼노 라투르는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교사에 근무했다. 그리고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서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프랑스과학연구소(ORSTOM)에 군 복무 대신 근무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과학이 객관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학문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인류학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다양한 학문이 걸쳐 있는 것은 이런 이력에서 온 경험들이 축적된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라투르는 이후 엔지니어 양성기관인 파리 국립고등광산대 혁신사회과학센터의 교수에 임용되었다. 그곳에서 과학사회학 연구자인 미셸 칼롱을 만나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개발하는데 여기에 영국 과학지식사회학 연구자인 존 로도 동참했다.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과학과 기술의 여러 서로 다른 요소들이 과학자, 엔지니어에 의해 긴밀한 연결망으로 결합되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고 정의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과학자, 엔지니어 등의 인간 행위자 뿐 아니라 기구 등 사물에도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읽을 때 이 부분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사물에도 역할을 부여한다고?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구 근대주의의 모순, 과학기술에 의한 산물이 무한대로 뻗어 나가며 현대의 생태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이는 사람 대 사물 등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존재론과 행위 원칙을 세워야 함을 알린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근대주의자이지 탈근대주의자는 아니라고 명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 이론 등과 구분해볼 수 있겠다).

라투르는 과학에는 어느 정도 중요성을 부여했으나 사회학에는 유독 비판적이었던 모습을 보인다. 사회학은 사회학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다른 것과 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철학이나 과학과의 결합을 말한 것이 아닐까. 


그는 ANT에서 나아가 지구인이 살아가기 위한 존재 양식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구상한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이 가이아 이론이었다. 가이아 이론은 1970년대 이미 나온 바 있는 이론으로 지구의 자기조절 시스템에 대한 자연 과학론이었다. 

가이아 정치생태학을 통해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려는 라투르와 슐츠가 ‘계급’ 개념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과연 어떻게 하면 서구 역사에서 정치를 조직하는 이념이었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그리고 극우 민족주의)에 이어 생태주의가 그러한 이념이 될 수 있을지 고심한 결과였다. - P157

계급 투쟁은,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 P161

이처럼 라투르는 가이아 이론을 ANT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정치 생태학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가 제시한 생태 계급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국경으로 둘러싸인 내부로의 회귀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챕터 제목이 ‘지구정치신학’이라는 것에 눈길을 끌었다. 그의 사상에 종교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론적 관점에서 실재를 의식하게 하여 이전에 사실이라고 생각한 것을 새롭게 재정렬할 수 있게끔 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신학이 현대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순기능이라면 여러모로 이기주의와 파괴 행태로 나아가는 이 세계의 행위자들에게 윤리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인류세에 대응해야 하는 정치신학을 ‘지구정치신학’으로 명명했다. 라투르는 지구종교신학의 올바른 행위자로 공교롭게도 얼마 전 타계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언급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말했다. “이 자매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지구에 선사하신 재화들을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남용하며 가한 해악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을 시간 순에 따라 요약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여러 모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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