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의 통치 전반부에 대한 의견 차이는 주로 표준화와 중앙집중화에 대한이반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의 문제와 관계된다. 일부 사람들은, 예를 들면 좀더 확대되고 보다 효율적인 중앙 행정, 보다 일관성 있는 법적 규칙과 절차, 더욱 강한 군대, 충성스런 중간 봉직계급, 그리고 충성스럽고 일 잘하는 지방행정의 발전 속에서 정치적인 "근대화"의 증거를 본다. 그렇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런 것들은 근대화가 아니라, 주로 정치적인 "동원(mobilization)"을 위한 노 - P230

력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대는 좀더 자유로운 사회라든지 서구 방식으로 독립적인 시민 영역을 발전시킨 사회도 아니었고, 국가의 필요에 잘 이용되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 P231

전제정치의 많은 상징들과 의식은 그 자체로 왕국 통합의 징표로서, 보야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한계를 그어주었다. 이것은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 많은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한 사람의 통치자를 둔 골치 아픈 정치체제였다. 여기서는 절대주의적인 통치라는 공식적인 얼굴을 제시하면서도, 계속해서 설득하고 회유하고 책략을 벌이기 위해서 통치자가 필요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 체제가역기능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야르들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이반과 봉직귀족에게는 그 체제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경우에 오프리치니나는 이러한 구속적인 체제를 깨고 나가려는 노력이었다고 볼수 있다. - P232

모스크바국의 전제자들이 오래된 상층계급에 대해서 거둔 비교적 손쉬운 승리는 그 뒤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았다. 특히 모스크바국 정부가 실질적인 대체 인물들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너무나 성급하게 분령지의 통치 세력을 제거해버렸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그 결과 정치적 및 사회적체계가 약화되었고, 이것은 동란의 시대가 발생하는 데에 일조했다. 그리고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망한 이후에 차르의 권위가 약화된 것에 이어서, 보야르의반발도 동란의 시대의 한 원인이 되었다.
모스크바국이 팽창하면서 행정과 기구를 중앙집중화하며 표준화하고, 또다른 계급의 이해를 봉직귀족의 이해에 종속시켰기 때문에 도시도 어려움을 겪었다. - P238

그러나 좀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의 지위가 약화된 것이었다. 물론 농민들은 봉직귀족의 영지에서 노동력을 제공했고, 따라서그 계급이 성장했다는 사실로부터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분명히 봉직귀족의 성장은 점점 더 많은 국유지와 농민들이 포메스티예 제도를 통해서 봉직귀족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 자신이 국가에 대한 과중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던 봉직귀족 지주들은 될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농민들로부터 짜내려고 했다. 게다가 오프리치니나로 인한 파괴 행위는 이미 지나친 부담을 지고 있던 중부 러시아의 많은 지역의 농민경제를 완전한 파국으로 몰고 갔다. - P239

미하일 로마노프는 이반 뇌제와 아나스타샤 로마노바의 결혼을 통하여 이전 왕조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가문은 대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은 이반 뇌제의 첫 아내였던 착한 아나스타샤, 난폭한 차르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몇몇 사람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옹호해주었던 그녀의 남자 형제인 니키타 로마노프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젬스키 소보르가 소집되고 있을 때니키타의 아들이자 미하일의 아버지인 필라레트 수좌대주교가 폴란드인들의 포로로 있었다는 점도 로마노프 가문에 이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밀류코프 등의사람들은 필라레트가 투시노 진영과 아주 가까웠으며, 다른 보야르들보다 카자크들과 훨씬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하일이 어리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 P256

모스크바국은 외국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알렉세이에게 보낸 사절단의 서기인 드 미주와 같은 서구의 방문자들만이 아니라다른 많은 사람들도 모스크바국을 마법의 세계와 비슷한 무엇인가로 묘사했다. 즉 기이하기도 하고, 호화롭기도 하고, 다채롭기도 하고, 그들이 그때까지보았던 어떤 것과도 달랐으며, 아주 야만적이기도 했다. 외국의 사절들은 호화로운 복장, 특히 모피 옷, 눈에 띄는 회색 수염, 정교한 궁정 예식, 풍성한 연회그리고 엄청난 음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모스크바국의 기본적인 특징들은 더욱 중요했는데, 방문자들은 이것을 재빨리 알아챘다. 즉, 차르의 거대한권력과 권위 그리고 심지어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도 고위 관료의 결정을 요구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중앙집권화가 바로 그것이다. - P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P103

노브고로드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주목받을 만하지만, 키예프가 쇠퇴한 이후에 키예프 루시의 땅이 변모되어갈 때에 생긴 하나의 변형된 발전 형태로서 그이상의 관심을 끌고 있다. 노브고로드의 특이한 성질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성질들이 키예프 시대-어느 정도는 키예프 이전 시대로부터 직접 유래되었으며, 때때로 키예프의 일부 핵심적인 특징을 강조된 형태로대변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노브고로드의 도시생활과 문화, 중간계급의 중요한 지위, 그곳의 상업, 외부 세계와의 긴밀한 접촉 등과 같은 모든것들은 노브고로드를 키예프 역사의 주류와 연결시켜주고 있다. 물론 베체 역시 키예프의 삶과 정치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담당했다. 노브고로드인들은 그것의 권위와 기능을 더 부각시킴으로써 키예프 루시의 정치적인 구성 요소들 중다른 두 가지를 희생시키고, 오직 한 가지, 즉 민주정적 요소를 발전시켰다. 그두 가지는 전제정치적 요소와 귀족정치적 요소인데,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두요소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더 비옥한 토양을 발견했다. - P134

모스크바는 14-15세기에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이되었다. 이 국가는 통치자의 "세습 재산"으로 정의된 엄청난 부와 광대한 영토에의해서,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에 의해서, 경쟁자들과 몽골 칸국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에 의해서, 유산과 운명이라는 세속적이고도 종교적인 개념에 근거를 둔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사실, 필연성이라든가 민족적 운명이라는 암축된 의미를 가지고서 이 과정을 "러시아 땅 모으기(sobiranie russkikh zemel)"라고 묘사한 전통은 이 과정에 대한 많은 역사 서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 P145

모스크바의 성장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판단은 그 과정에 대한 기술이나 설명보다 훨씬 더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성장이 모스크바 공들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하고도 필연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아서, 역사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통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시기의 역사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장은 소련 이후의 공식적인 역사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 지도자들이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반면에, 프레스냐코프 같은 혁명 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 오늘날의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 등은 이런 해석-비판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민족주의적 신화이다에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저술가들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러시아 모으기가 무엇보다도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러시아인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비러시아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스크바국 공들의 교묘한 침략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국 공들은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았고, 모든 사람들을 모스크바국의 전제정치에예속시켰다는 것이다. - P169

학자들은 비록 분화의 근원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을지라도, 14세기에 분리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확실히 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쳐서 이 언어들을 변화시켰는데, 특히 분령 시기의 분열 및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인들이 통치하던 영토와 모스크바국 러시아 사이의 심화된 분리가중요했다. 따라서 대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국의 영토와,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와 각각 관련을 맺게 되었다. 우리는 만약러시아인들이 키예프국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통일성을 유지했다면, 혹은리투아니아-러시아가 모스크바를 대신하여 새로운 중심이 되었더라면, 사건의전개 양상이 달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비록 모든 것이 동일한 키예프로부터의 유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인 분리는 문화적인 이질화도 심화시키는 - P208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로 알려져 있는 지역에는 폴란드를 통해서 라틴 유럽의 강력한 영향력이 유입되었고, 그 영향력은 그곳에서 상이한 특성을 배양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러시아 정교회는 마침내 행정적으로 분열되어, 키예프에 있던 별도의 수좌대주교가 리투아니아국의 정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대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으로 분리되었고, 몇 세기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런 현상이 더욱 강화되었던 사실은 그 이후의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에 에드거 앨런 포 단편 소설들을 읽었다. 어느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들이 서로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작가와 그의 작품이어서 궁금해져서다. 

에드거 앨런 포는 19세기 미국 추리/공포 장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포는 순회극단의 배우였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나 두 사람 모두 일찍 사망하여 양부모 아래 성장했다. 그는 여러 이력을 거쳤는데 문필가로 생활하기에는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그는 미국 주류 문단 세력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특히 그래스월드는 포에 대한 악의적인 부고와 평론을 쏟아내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 그의 초창기 이미지를 좋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사후 그의 평가가 많은 작가들에 의해 회자되며 개선되었다고 한다. 포는 미국 현대 추리 소설의 창시자로 영국 추리문학 캐릭터인 셜록 홈스의 앞선 모델인 오귀스트 뒤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가 작품을 쓰던 당시 문학계는 이성주의에 반해 신화와 전설, 비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인 것, 극단적인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포도 그 영향을 이어받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대체로 불안한 심리와 충동이 잠재되어 있다가 환각에 빠진 상태에서 기현상을 목격한다. <어셔가의 몰락>의 상황이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다. 하지만 상황은 기괴하거나 공포스러워 보이지만 주인공이 꿈꾸었던 결과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결코 천편일률적이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리지아> 같은 작품이 그런 경우였다(리지아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그곳이 성소라도 되는 양 머무르던 시기 이후, 나는 그녀의 크고 빛나는 눈동자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일으켰던 바로 그 감정과 꼭 같은 감정을 물질세계의 많은 존재에서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느낌을 정의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더 쉬워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이 더 쉬워지지도 않았다. - P53) 리지아는 강렬한 느낌으로 주인공을 사로잡았다. 특히 그녀의 둥근 검은 눈동자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고 당사자는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리지아가 시름시름 앓더니 주인공 곁을 떠난다. 이후 그는 로웨나라는 여자와 결혼하지만 그녀 또한 4일 만에 사망한다. 그는 로웨나의 시신에서 생의 감각을 느끼는데 그건 다름 아닌???(결론은 읽어보시길)


당연히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귀신의 소리를 듣거나 귀신의 형상을 보거나 그런 공포가 아닌 다른 경우도 있었다. <배반의 심장> 같은 경우 어떤 사람의 특정 신체 기관을 보고 문제를 삼아 그를 죽여야겠다고 다짐, 그것을 실천하는 상황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독자가 자신을 보고 미쳤다고 탓할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건 상대가 문제였기 때문에 살인이 정당화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서는 인간혐오에 대한 생각이 엿보여서 무서웠다. 이는 <군중 속의 사람>, <검은 고양이>, <아몬티야도 술통>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군중 속의 사람>에서 화자는 건물 안에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군중 속에서 눈에 띈 한 사람을 쫓아가면서 사건이 만들어진다(매일 밤 침대 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령 같은 고해신부의 손을 꽉 쥐고 그의 눈을 안쓰럽다는 듯 들여다보면서 죽어 간다. 밝혀지기를 거부하는 흉측한 비밀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 절망을 품고 목에 경련을 일으키며,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인간의 양심은 이따금씩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짐, 오로지 무덤 속에서만 부릴 수 있는 짐을 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범죄는 본질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 P237). <검은 고양이>에서는 주인공의 도착 심리와 광기가 심해지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아몬티야도 술통>도 복수를 하겠다는 핑계로 벌어지는 일인데 <검은 고양이>도 그렇고 <아몬티야도 술통>도 그렇고 마지막에는 도둑이 제발저려 범죄를 실토한다. 

작가는 이처럼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꿰뚫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건을 읽는 동안 현실에 이런 사람들이 있겠지 싶어 연이어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분노와 폭력에 대한 잠재 의식은 누가 다 알 수 있겠는가.  


한편 <도둑맞은 편지> 같은 추리 단편도 있었다. 사건 해결사인 오귀스트 뒤팽이 출연하는데 그는 명문가 출신에 독서광으로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이미 이전에 <모르그 가의 살인>, <마리 로제 미스터리> 사건을 연이어 해결하여 파리의 경감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바 있었다. 이 책에는 앞선 사건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 아래 책을 통해서 읽었다. 

쫄깃한 반전을 생각하면 ‘뭐지?’ 할 수 있는데 사건은 의외로 단순하게 생각해야 보이는 법이라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현실에서 만나는 사건은 인간 간의 벌어지는 일들이니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법칙도 경험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단편은 <군중 속의 사람>이나 <타원형 초상화>, <배반의 심장>이었다. 인간이 어떤 것에(감정이든 대상이든) 미쳐서 꽂히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여실히 느끼게 해준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고독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그 생각이 들고 나자 저는 밤낮 없이 그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행위엔 아무런 목적도 열정도 없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리적인 조건은 역사를 위한 무대가 될 수 있지만,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 - P29

역사의 재료는 바로 지속성이다. 비록 모든 역사적 사건이 독특하고, 따라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유동성과 변화와 다양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지도록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재와 과거의 관련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속성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주장일 따름이고,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비록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보이는 이 책의 표제도 하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많은 특정 민족들, 문화, 역사를 "러시아"라는 제목 아래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중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러시아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나중에 차이점을 인식한 데에서 영감을 얻어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 P30

얻어내고, 자신들의 역사가 러시아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 P31

우리는 무엇을 키예프국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은 좀더 근대적인 "러시아"보다는 고풍스러운 "루시"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루시가 역사적인 용어였을 뿐만 아니라, 키예프국이 "러시아" 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는 초기 역사를대변하는지, 아니면 나중에 모스크바국이 팽창함에 따라서 그곳에 포함될 지역에 있던 슬라브 계통의 민족들이 관련된 수많은 별도의 역사들 중의 하나인지의 문제가 격렬한 논쟁거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키예프에 수도를 두기 이전의역사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도 "루시"라는 용어가 선호되고 있다. - P54

러시아가 비잔티움에 충성을 바친 것은 러시아의 이후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거나, 결정짓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외부에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고, 반대로 러시아가 가톨릭 교회 자체가 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나머지 유럽 및 라틴 문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도록 크게 부추겼고,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 사이의 비극적인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그가 풍부한 대가를 얻기 위해서 당대에 택할 수 있었던 최상의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라틴어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역언어를 강조한 것은 이점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그로써 종교가 대중에게 가까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슬라브어 의식(儀式)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민족문화의 발달에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의하여 "사도들과 동등한 러시아인들의 세례자로서 시성되었다. - P63

그러나 어린 시절의 황금기와 마찬가지로, 키예프 루시는 러시아 민족의 기록에서결코 희미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맑은 샘과도 같은 그 시기의 문학 작품을 통하여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종교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그 시기의신망받을 만한 저술가들에게서, 누구든지 복잡한 근대 세계의 일들에 대한 지침을찾아볼 수도 있다. 키예프 기독교는 푸시킨이 예술적인 감각을 위해서 가진 가치와동일한 가치를 러시아의 종교적 심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기준이자 황금의 척도이자 왕도인 것이다.
-페도토프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우생학 -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과학’이 되었나
N. 오르도버 지음, 김현지 옮김 / 오월의봄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생학은 언제나 극히 기민한 이데올로기였다. 우생학은 스스로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동원되기도 한 운동들, 즉 국가주의, ‘개혁 지향‘ 자유주의, 절대적인 동성애 혐오, 백인우월주의, 여성혐오, 인종주의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우생학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운동들과 공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생학이 모든 유형의 편견에 호소력이 있다는 것은 배제나 유전적 추정이나 외과 수술의 대상으로 지목된 개인들이 대부분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표적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56~57

미국의 우생학은 이제는 더는 사라진 학문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더는 자신이 백인 코카서스 인종임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흑인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인종, 계급, 젠더의 위계에 의한 불평등은 우생학을 낳는 기본 토대다. 거기에 정책 입안자, 의사, 법률가, 기업가 등이 서로 간에 양분을 주며 우생학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우생학은 가산적 이데올로기다.

20세기 미국 이민의 역사는 우생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실천 영역 중 하나다. 1875년 페이지법부터 1882년 중국인 배척법, 연방이민금지령, 1917년 재외국인 미국 이민 및 거주 규제법에 이르기까지 인종 및 계층에 따라 입국 불가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특히 1917년 재외국인 이민법이 발표될 당시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보편적인 반이민정서가 횡행할 때다. 이후 1921년 이민자의 범위를 총 인구의 3%로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더니 1924년 이민제한법이 발표된다. 이민제한법은 우생학 전문대리인인 로플린이 적극 역할을 했는데 그는 재외국인 국가등록제를 촉구하고 자격 통과한 이민 예정자에게 개발적으로 여권을 발급해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이다(정책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법은 나중에 히틀러의 나치 독일 단종법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우생학을 지지한 사람들은 몰려드는 이민자들로 인해 인종 혼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증폭됨에 따라 백색 인종적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고 이를 적극적으로 타개하고자 뛰어들었다. 파이어니어 펀드라는 회사는 우생학 출판물을 영어로 번역하고 미국의 우생학회 등 우생학을 선전하는 단체를 지원하며 반이민 기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동성애의 원인이나 치료법을 찾는 것이 동성애에 일탈이라는 꼬리표를 단다는 점, 동성애에 대한 의학적 또는 정신의학적 병리화가 이성애를 정상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 국립보건원은 어쨌든 이성애 유전자를 찾는 일에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만, 아마도 의도치 않게 연구를 하는 경우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1869년 헝가리 작가 카로이 마리아 케르베니 Károly Mária Kertbeny가 만든 ‘동성애자 homosexual라는 용어가 ‘이성애자 heterosexual‘라는 용어보다 먼저 통용된 것도 놀랍지 않다. - P183

동성애는 유전의 영향인가, 환경의 영향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사항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문제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애당초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끌고 가려 했다. 한쪽에서는 동성애는 유전이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향은 유전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실패를 선천적인 지적 결함으로 이야기하면 특권층에 유리하기 때문에 먹히는 매커니즘이다. 한편 의학이, 의사의 주장이 사법 제도가 된 사례는 단종법의 통과다. 1909년 캘리포니아의 단종법 통과 이후(1911년 아이오와주, 나중에는 오리건주까지) 상습성범죄자 등에 대한 단종 수술이 징벌적 성격이 아닌 치료 목적으로 둔갑되었다. 이는 명백한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고다. 동성애자는 이렇게 사회에서 근절되어야 할 악이자 그 대상이 되버렸다.
마찬가지로 젠더가 유전적 요소에 따른다는 편견과 집착이 존재했다. 젠더부적응도 마찬가지다. 젠더 역할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인종, 계급에 기초하여 동성애를 구성하고자 했다. 의사든 비전문가든 레즈비언은 신체적으로 이상하고 기괴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동성애로 짐작되는 아이들 중 자위하는 아이들의 음핵을 제거하고 두개골 크기 및 얼굴 생김새로 범죄 성향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레즈비언도 지배적 레즈비언과 소극적 레즈비언으로 구별하여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동성애에 대한 정신의학 및 생물학 논문이 내놓은 가설은 퀴어에 대한 적대감 및 신체적 위해를 제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르몬으로 동성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가설은 심리학자, 의사, 연구자들을 만족시켰다.

테크노픽스는 점점 더 암호화된 방식으로 활용됐고, 자유주의자들에게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보수주의자들과 합세해 인종, 계급, 젠더(청소년 여부 및 장애 유무에 의해 더 강화됨)를 우생학 프로젝트의 주요 결정 요인으로 확립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공공 정책 분야의 ‘혁신‘과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양상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 및 여자아이들이 먼저 하나 이상의 특정 인구통계학적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병리화된 다음, 의학적으로 위험하고 헌법에 비춰 의심스러운 ‘치료법‘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당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 P411~412

산아제한은 계급(지위든 경제든)과 연관되어 우생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마거릿 생어는 적극적 우생학(‘적자‘는 인종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을 늘려야)은 비난했으나, 소극적 우생학(‘부적자‘ 사이의 생식은 방지되어야)은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푸에르토리코의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경구프로게스테론 실험약이 투여된 것은 미국의 식민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니그로 프로젝트‘는 흑인 사이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면 남부의 빈곤이 해결될 것이라는 가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 W.E.B.듀보이스). 클래런스 겜블은 강제 단종수술 클리닉을 설립하고 널리 시행했는데 여기에 생어는 적극 동조하고 지원했다. 생어는 빈곤층이 재정 부담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구 과잉은 국가적 재앙을 불러온다며 단종수술이 필요하다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장애나 정신적 부적자에게도 단종수술이 필요함을 설파하는 인간개량재단에도 참여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조직적인 단종수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9년에서 1940년 사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단종 수술 후보자 중 78%가 여성이었고, 그중 21%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으며, 1964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전체 단종 수술의 65%를 차지했다. 수술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에는 인종 및 사회 경제적 지위 뿐 아니라 연령(낮은) 기준이 작용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단종 수술을 받지 않으면 복지 혜택이 줄어든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수급자에게는 협박으로 작용했다는 현실이다. 이처럼 산아제한의 명목으로 여성의 선택권은 보호받지 못했고 의료계가 선택한 자율성과 편의성에 의해 단종수술이 시행되었는데 이를 제공한 의료 서비스 제공자들의 권리는 철저히 보호되었다. 이는 난관결찰술 및 자궁적출술에 이은 노플란트, 데포-프로베라도 마찬가지다. 국외 빈곤 퇴치 방안으로 행해진 두 시술은 모두 부작용이 제대로 고지되지도 않은 채 미국 외 저개발국가에서 실시되었다. 특히 노플란트는 원상태로 돌릴 수 있다(주로 5년 이후 빼낸다고 하지만 빼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는 사실 때문에 더 호혜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여성의 몸(의 부작용과 위험적 결과)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친다.

이처럼 이 책은 과거 미국의 우생학이 펼쳐진 다양한 국가 정책적 사례를 자세히 보여준다. 그러나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우생학은 결코 죽지 않았고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하고 진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 우생학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반동주의적 의제와 개혁주의적 의제가 늘 협력한 것은 아니더라도 공통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경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 그리고 심지어 전면적인 파시즘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을 더 밀고 나아갔다. 여성, 가난한 사람, 인종화된 사람, 장애인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양쪽 모두 온정주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양쪽은 모두 실패했다. 양쪽 모두 미국 국내와 ‘개발도상국‘의 인구 조절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이런 공동의 대의의 기틀을 만들고 조성한 사람이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 중 한 명인 마거릿 생어다. 물론 생어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P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