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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에티카 - 전쟁·철학·아우슈비츠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고은미 옮김 / 소명출판 / 2021년 9월
평점 :
말할 것도 없이 ‘기억’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닌 항상 현재의 문제이다. 과거의 폭력의 기억이 지금 질문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기억이 지금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 P4
한동안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질문과 회의가 오갔던 시기가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현상인데 그것은 기록에 의거하거나 누군가의 증언에 의해서 대신해서 말하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100% 진실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은 쓰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 재단될 따름이고 증언도 보는 사람의 눈과 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에서다(착각했거나 사후 편집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럼 기억과 추모는 무의미한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지하에 묻혀 있어 생존자들이 사라져서 어딘가에서 끌어올려지지 않으면 문제 제기조차할 수 없는 사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은 위에서도 볼 수 있듯 기억은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루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세계철학사> 4권을 읽으면서였는데 우선은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추가적으로 한나 아렌트와 헤겔, 레비나스의 입장에 대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 제기가 궁금하기 따름이기도 했다. 읽기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뒷부분에는 일본의 근대 사상과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도 들어 있어 내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저자는 아렌트, 헤겔, 레비나스 등의 입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일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3부의 세 번째 장에서 ‘망각의 구멍’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녀는 강제수용소 및 절멸수용소의 현실을 통해 ‘계속 생각해 나가야’만 하는 가장 ‘두려운 것’을 인지했다. 수백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량학살이 한쪽에서의 인종투쟁과 다른 한쪽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전제 아래 강철 같은 엄격함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혹은 대량생산적으로” 집행되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이 저 두려움의 중심에 있음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조차 없다. … 동시에 또한 “희생자의 흔적도 없는 소멸이 전체주의 체제에 있어 얼마만큼이나 중요했는지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 P12, P13
‘망각의 구멍’이라는 번역어가 어색하다는 것은 넘어가기로 하자. 망각의 구멍은 소멸한 존재들이 쓸모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완전히 지워서 존재한 적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한 바는 저자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아렌트의 후기 저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망각의 구멍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정도로 완벽하지 않다.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세계에는 인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완전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남아 보아왔던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 P20
앞선 저작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앞선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을 꺼내놓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반드시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남아 보아왔던 일을 이야기’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증언 자체가 ‘역사’가 될 수 있을지 아닐지는 결코 보증될 수 없다. ‘완전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아렌트의 발언은 «전체주의의 기원» 의 인식으로부터 명백히 후퇴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P25)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저자의 말도 납득은 가지만 아렌트가 입장을 변화시켰던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는 간다(그녀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고 사람의 입장이 어떻게 대쪽 같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그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고 그린 악인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히려 우둔한 광대였다고 그녀가 고백하자 이야기를 들은 대중들은 그렇다면 누구나 아이히만과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냐며 비난을 퍼부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작은 출간되었으나 히브리어로 번역되지도 못했고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책을 출간하느냐 물었을 때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의만은 영원히”라는 격언으로 대답했다.
란즈만 감독의 영화 «쇼아»를 바탕으로 펠먼은 ⌜증언의 시대에=클로드 란즈만의 <쇼아>⌟라는 글을 썼다. 이 영화는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증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2차 세계대전 절멸수용소에 있었던 이들은 절대로 증언해서는 안되도록 강요받았기에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은 영화 앞에서 증언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나치는 떠나면서 그들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려고 했다. 영화의 화면은 수용소가 없어지고 빈 공터가 되어서 평화롭기만 한 광경이라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보면서 자연스레 나는 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렌트는 European mankind의 위기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렌트에게 “서양의 몰락”이란 ‘유럽이라는 여러 민족들의 가족”이 붕괴되면서 ‘인종사회’화되는데 이는 유럽의 아프리카화로서 표상된다. 여기서 민족이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정치적 조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이 문장만 봐서는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인종 망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학자는 바로 그런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자신의 연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인종주의 광신자는 이 경악을 초월해 있다고 자칭하기 때문에, 나아가 온갖 종류의 인종사상에 정당한 싸움을 거는 사람은 인종사상이란 대개 아무런 현실적 경험의 기초도 갖지 않는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보다 조셉 콘래드의 이야기 ⌜암흑의 핵심⌟ 쪽이 역사, 정치, 비교민족학의 저작들보다 인종 망상에 대한 경험의 배경을 밝히기에 더 적절할 것이다(P107). 과연 그런가. 저자는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고 있다. 주인공이 만난 아프리카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 표상의 근거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 상처는 상흔을 남기지 않고 아문다”고 헤겔은 잘라 말했다.
«정신현상학» 6장 정신의 마지막, ‘악과 용서’의 논의이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모든 실재’로서의 이성의 자기 확신이 ‘진리’로까지 고양되고, “자기 자신을 세계로서, 또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행위도, 그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도 역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부정성의 기억-역사의 상흔-은 정신의 힘을 통해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아렌트의 주장과 맥락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저자의 의견을 짐작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그 상처가 아물고, 양자 사이에 화해와 유화가 성립되는 일이 가능한가.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고 그 의도나 부정성의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피해자의 상처가 너무 깊다면 용서란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레비나스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신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물론 헤겔도 ‘인간의 온갖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정신에 반하는 죄만은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공적 역사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당한 개인의 생의 의미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정의’를 손에 넣을 수 있는가(P169)에 대하여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은 ‘나’를 응시하고 고발하는 존재로 심판은 나에게 내려지기 때문에 나는 교환불가능한 존재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타자를 위한 변호의 책임으로부터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은 자신의 비참함 가운에서도 이미 제3자에 봉사한다. 타인의 증인인 나는 증인의 증인이다. ‘나’가 그 ‘증인’인 ‘타인’은 ‘제3자’를 변호한다. 이 구조 속에 공적 공간에 울려 퍼지는 증인들의 목소리는 변호가 가능해진다.
다만 ‘자아의 유일성은 번식성(부계)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하고 ‘아버지의 공통성이 있는 한 모든 인간은 형제이다’는 입장을 취하기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저자는 ‘번식성’이라는 ‘무한의 시간’은 ‘증언’의 무한반복가능성에 한정해야 하는 하나의 경우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한 증언’은 아버지의 공통성을 넘어, 모성까지도 초월해야 한다고 말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하이데거와 <유대인>»의 일본어판 서문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은 없다⌟에서 ‘교토학파’의 ‘정치철학’-이른바 ‘세계사의 철학’-을 언급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유럽 근대’를 초극할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그 학파 안에 실제로는 ‘유럽적인 형이상학적 모티프의 회귀’가 확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 P199
근대 세계는 유럽풍 일색으로 빈틈없이 필하려는 세계였다. 이는 유럽 근대의 원리가 공리적 이지적이었던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도의적 세계원리는 그러한 것과 다르며, 각 민족 본연의 우수함을 살리고 서로 다름의 근저에서 깊숙한 통일성을 실현하려는 작용이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한 구성에 존재하는 것이 ‘자리를 얻는 일’이며, 그러한 구성을 만드는 것이 ‘자리를 얻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 점에 있어 비로소 일본적 세계가 일본을 지도적 중심으로 삼으면서, 각 민족 제각각이 자리를 얻어 진실한 공영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 P237~238
교토 철학은 세계사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기본이다. 이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고야마 이와오는 일본이 세계사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체의 독자성에서 찾아야 한다 말한다. 또 교토학파는 유럽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각 민족 각 국가가 제각기 그 자리를 얻음으로써 세계사에서 자기 자리를 위치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으로의 회귀가 되고 말았다. 일본의 철학적 내셔널리즘의 논리의 시작이다.
사실 더 다루고 싶은 내용들(국민국가, 인종주의 등)이 많은데 내용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려고 한다. 마침 러시아 내전을 읽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더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폭력과 기억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일 것 같다.
모든 폭력, ‘근절’의 폭력, ‘세계’의 외부에 있는 절멸이든 ‘세계’ 그 자체의 절멸이든, 일반적으로 절멸의 폭력, ‘인간이 기억할 수 있고 모종의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 세계’라 불리는 것의 창설 자체가 이미 ‘근절’의 폭력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멸의 폭력의 망각과 은폐에 의해 자기를 ‘법’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 그 자체의 폭력, ‘법’ 그 자체의 폭력, ‘벽’을 만들어 ‘경계선’으로 ‘에워싸는’ 것 그 자체의 폭력, ‘법’으로서 작용하는 기억 그 자체의 폭력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세계에는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 ‘기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억’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