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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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했던 책을 만나는 일은 정말 소중하고 좋은 경험이다. 저자가 김규식 평전을 준비 및 집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들뜬 기분이었는지 아직도 그 감정이 생생하다. 20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서 2023년까지 초고 완성을 했으니 집필 기간만 자그만치 10년이다. 시작도 끝도 어려웠을 작업이었을텐데 무사히 나와서 정말 독자로서 감사할 뿐이다. 


책의 제목을 ‘김규식 평전’이라 하지 않고 ‘김규식과 그의 시대’라 한 것은 왜인가. 김규식은 대한제국부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넒은 시기를 거쳐 살았고 조선, 미국, 중국의 상해, 북경, 몽골, 파리 등 다양한 공간에서 활동했으며 다양한 사람과 교류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만으로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1권의 내용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 관계, 성장 환경과 미국에서의 생활, 조선에서의 활약과 상해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이자 해방 후 중도 우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권은 생소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나 또한 몰랐던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그동안 그를 너무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김규식의 부친은 김용원으로 철종의 어진을 그릴 정도의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고종에 신임을 얻어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고 일본 공관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진술, 유리제조술, 금은분석술을 배웠다. 당시 사진 촬영에는 유리 원판이 사용되었고 감광제를 바른 후 은 용액에 담그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귀국 후 촬영국과 순화국(서양 담배 제조회사)을 개설하였다. 

1884년 김용원은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다. 고종은 조러조약 비준서 교환, 조선과의 육로 통상 문제 해결, 외부 압력이 있을 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한 공식 사절단 파견 등을 요청했고 러시아 측은 이에 화답하는 밀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청일 모두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고종은 살아남기 위해 부정,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고 김용원은 희생의 제물이 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김규식은 얼마 후 사망한 어머니, 많았던 형제들도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1886년 만 5살 남짓 된 상태에서 언더우드 고아원에 들어갔다. 김규식의 어학 재능은 출중했던 것 같다.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 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한다. 1891년 유배형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1년 남짓 살다가 할아버지, 큰 형마저 사망하자 그는 스스로 서울로 가 관립영어학교를 수학하고 잡화점에서 영어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독립신문사에서 영어 직원 겸 회계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16살 무렵 김규식은 의화군의 도미 유학 준비를 위해 언더우드 선교사와 외부 통역관 박용규와 동행하게 된다. 당시 의화군은 고종의 잠재적 정적이었는데 일본에 체류 중임에도 그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고종의 명령으로 반강제적으로 도미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화군은 생면부지인 김규식과의 미국 동행을 거부하고 박용규와 수행원인 신성구와 유학길에 오른다. 김규식은 의화군이 떠난지 40일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더우드와 로녹대학 학장인 드레허와의 인연으로 세일럼의 로녹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로녹대학은 미국 남북전쟁 중에 개교하였으며 1876년부터 외국인 학생을 받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서병규가 한국인 최초의 입학생이었다. 김규식은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문학회 활동을 하기도 하고 대학 학보에 글도 썼으며 사교클럽에 간부로 선출되면서 연설 능력도 키웠다. 

사실 나는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는데 이는 시중에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고(프린스턴 대학의 재학생 목록에 김규식이란 이름이 없다). 


1904년 국내에 들어온 김규식은 YMCA 교사를 하다가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비밀 접선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로 일을 했는데 총독부가 교수직을 제안하자 이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그는 신해혁명 후 자극을 받아 신규식, 박은식이 만든 동제사 활동에 참가한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기도 했지만 유학 한인 학생들의 생활 학습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김규식은 신규식 자택에서 거주하면서 서서히 동제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913년 반원세개 운동인 토원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인 의사 모대위란 사람과 적십자 조직을 만들어 출동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당시 중국 전역에서 원세개에 반대하는 세력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원세개 세력에게 진압당했다고). 동제사는 중국에 있는 한인 학생들의 도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는데 김규식은 상해 거점의 한국 학생 도미 네트워크의 중심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추구 및 망명 정부를 수립, 이를 위한 계획을 추진한다. 신한혁명당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는 가정 하에 독일,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하고 한국 독립의 방략을 추구했다. 독일, 중국은 제정국가이므로 이왕가를 이용하기로 하고 고종과 연락해 그를 당수로 추대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신규식, 박은식을 비롯해 신해혁명을 주도한 친손문세력이자 공화주의 세력과 성낙형 계열의 근왕주의, 친원세개 세력도 있었는데 이는 전략적인 결합이었다. 작전을 위해서는 고종과 접선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 관련자들은 고종을 만나기도 전에 일제에 체포되어 실패했다. 원세개가 사망하고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이전에 추구한 복고주의 왕정이 아닌 공화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목표 쪽으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명, 주권재민론을 펼치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김규식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중국 내 독립운동을 위해 의주에 잠입해 자금 모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사 훈련 학교를 운영하고자 유동열, 이태준과 외몽고의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으로 넘어가게 된다. 김규식은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하고 러시아인들에게 영어 개인 강습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몽골리언프로듀스사에서 회계 및 비서 일을 했고 앤더슨마이어사에 취직해서 상해, 천진, 홍콩 및 장가구 지점의 부지배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제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추적했는데 1914년 이후 김규식의 이름은 종적을 감춘다. 1916년 장가구, 외몽고로 넘어간 뒤부터는 위의 활동 내역처럼 생계를 위한 활동에 집중한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그의 청년 시절이 다양한 활동으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유대, 의화군(의친왕)과의 연결고리도 놀라웠고 고종은 아버지 대부터 끈질긴 고리였음을 느끼기도 했다. 유년기 버려진 고아에서 언더우드의 양자로 입적되어 미국 유학을 거쳐 지성인이 되기까지가 한 편의 이야기였다면 국내에서 종교,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망명 뒤 혁명 운동과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일은 또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2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시기이자 그의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3.1혁명 이후부터 1921년까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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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빨리 읽으셨군요. 저는 엄두가 좀 안나던데요. 두께가 참.... 김규식 선생 역시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된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 반대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면서 이승만에 대립했던게 결정적이지 않을까싶은데요.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가 이런 분들의 삶을 복원해나가야 하겠죠. 한 인물에 대해 이정도의 책이 나온건 정말 대단하다싶은데 천천히 저도 읽어야겠어요.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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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80주년 즈음에 맞춰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당시 시대상과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주변 인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역시 중요한 것 같다. 단순한 시 감상에서 나아가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의 노고 덕분에 이제 윤동주 시인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의 시도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시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고 당시 시대상은 어떠했고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생각으로 그 시를 썼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은 평전으로 증언과 증거를 바탕으로 객관성을 확보하며 최대한 담백하게 씌여 있다고 보여진다. 


평전을 통해서 그간 잘 몰랐거나 대강 알고 있었던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동주는 1917년 집안에서 8년 만에 얻은 큰 아들이었으며 아명은 해환으로 ‘해처럼 빛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할아버지인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인 윤영석은 1913년 북경으로, 1923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였을 정도로 언어 감각이 출중하였고 시적 기질이 남달랐다고 하니 윤동주 시인의 재능은 아버지를 통해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인 김용은 몸이 약했으나 손재주가 좋았고 성정이 강인한 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길까지 함께 했던 송몽규는 이 책의 내용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송몽규는 아버지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의 아들로 고종사촌 형이었지만 출생일도 3개월밖에 차이나지 않았던데다 학창시절을 함께 하고 일본 유학을 하다 같이 체포되는 운명을 겪었으니 윤동주와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윤동주 가문은 북간도 용정촌에 이주했다가 나중에 명동촌으로 이사한다. 명동촌은 조선의 유학자 집안들이 많이 넘어가 초기에는 유학적인 풍토였다가 1909년 무렵 기독교가 확산된 것이라고 한다(1929년에는 공산주의 유입). 명동촌이라는 이름은 명동서숙(후에 명동학교가 됨)이 개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29년 9월 북간도의 사립학교가 모두 중국 당국의 연길 교육국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다니던 명동학교도 인민학교가 되었다. 윤동주 가문은 이때 용정으로 이사를 간다. 

용정이란 지명은 마을에 있던 용두레 우물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현재도 불리는 유명한 가곡인 선구자 가곡의 배경도 용정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은 캐나다 선교부가 자리한 동산 일대로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일본 측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곳이었다 한다. 


1935년 무렵 송몽규는 중국 측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윤동주와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 송몽규가 중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이 책은 밝히고 있다. 그는 임정 낙양군관학교에 있었다가 제남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이웅 일파의 산하에서 활동했다가 산동성의 제남에서 일본 영사 경찰에게 붙잡혀 요시찰인으로 낙인찍혔다고 한다(이것이 일본 재판 기록에 소상히 나온다). 

윤동주가 쓴 동시들은 정지용의 동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 전까지는 현학적이고 어려운 시상의 흐름을 보였다면 1935년 10월 이후부터는 구체적이고 진솔한 표현을 담은 동시를 여러 편 써냈다. 

숭실중학교에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대가로 교장이 파면되자 재학생들은(윤동주 포함) 동맹퇴학을 감행했다. 윤동주는 부득이하게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는데 이곳은 그곳에서 고등취업이 가능한 유일한 5년제 학교였으나 친일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있을 때 윤동주는 어린이 잡지에 동시를 투고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마음이 어지러울 법한데 동시가 가능하다니… 

대표적으로 ‘조개껍질’을 보자. 이 시는 현재 남아있는 윤동주 작품 가운데 최초의 동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아버지가 시적 기질이 풍부한 분이었음에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가 문학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의사가 되라고 하셨다고). 다행히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 입학시험에 통과했다. 놀라웠던 사실을 알았는데 시 ‘자화상’의 배경이 된 곳이 명동의 우물이 아니라 2학년 재학중 하숙하던 곳 근처에 있었던 우물이었다는 것이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11월까지 윤동주가 쓴 단 한 편의 시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도 1939년 11월 창씨개명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를 비롯하여 1940년은 특히 암울한 결정들이 이어졌던 시기다. 그 시기 유일하게 윤동주에게 기쁨이 된 일이 있다면 평생지기 정병욱을 만났던 일 뿐일 것이다. 모태신앙이었던 그가 기독교에 회의를 가졌을 정도였다면 그 힘든 심경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1941년에 쓴 ‘看板 없는 거리’는 당시의 그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듯했다.


停車場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른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慈愛로운 헌 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그는 ‘참회록’을 쓸 무렵 히라무라 도오쥬우’라는 창씨개명을 한 뒤 일본 동경 입교(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한다. 이때는 전과 달리 아버지가 적극 밀어주셨다고(!). 일본은 본과와 구분하기 위해 선과라는 명칭을 붙여 일부러 학생들 간의 경쟁 및 파벌을 중요시하고 위계를 강화시켰다. 그는 학교에 들어간지 한학기만에 경도의 동지사(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하는데 육군대좌 반도신지라는 군사교련 담당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군국주의 사상을 강요하며 엄격한 지도라는 미명 하에 학생들을 못살게 했다고 한다. 그시대 졸업생들에게도 (악질로?) 유명인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만할 것 같다. 이곳에서 박춘혜라는 여성을 만나 호감을 가졌다는 증언은 진짜 놀라웠다. 


동지사 대학에서는 두 학기를 다니고 ‘경도에 있는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사건’으로 1943년 7월 14일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의 특고경찰 기록을 보면 송몽규를 비롯한 사건 가담 인물들을 1년간 미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독한 놈들). 송몽규가 하숙하던 곳에 함께 하숙하던 고희욱도 체포자 중 하나였으나 그는 1944년 1월 19일 6개월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1944년 2월 송몽규와 윤동주는 기소되었고 징역 3년이 구형되어 출감예정일은 윤동주가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가 1946년 4월 12일이었다. 일본 형무소 중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복강(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을 한 두 사람은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매일 육체 노동을 했다. 가족 간 편지는 가능했으나 매달 엽서 한통, 그것도 일본어로만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편지 내용이 검열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다 드러내고 쓸 수 없었다.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5년 2월 16일, 1945년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역 땅에서 옥사했고 우여곡절 끝에 두 분의 묘는 용정 동산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동시 이외에는 정식 시집을 출간해보지 못했던 윤동주는 특히 정병욱, 강처중, 정지용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고 그의 시도 빛을 보게 되었다. 강처중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본 원고를 보관하고 있었고 강처중은 일본 유학 가기 전 서울에 두고 간 원고 등 윤동주의 유품과 일본에서 쓴 5편의 시(편지에 적혀 있었음)를 고이 보관했다. 누이동생 윤혜원은 중학생 시절 쓴 시와 동시의 원고들을 보탰다.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유고시집의 서문을 쓸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다. 해방 후 시인의 시가 최초 실린 것이 경향신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였고, 정지용은 주간의 자격으로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윤동주 시인 대부분의 시는 담백하며 난해하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울림을 주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그의 민족 정신도 한몫을 하겠지만). 나 또한 시인의 시를 참 좋아하는데 평전을 읽고 그와 그의 시가 더 좋아졌다. 광복절 80주년이 되는 날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더욱 특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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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동주시인은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었다면 정말 얼마나 훌륭한 시를 많이 남길수 있었을까요. 광복절에 더 마음이 와닿는 리뷰입니다.

거리의화가 2025-08-17 21:08   좋아요 1 | URL
댓글 마음 제 마음입니다^^ 하필 광복 몇 달전에 돌아가셨다는게 더욱 마음이 아플 따름이죠ㅠㅠ

희선 2025-08-16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동주 시인은 죽은 다음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졌네요 아쉬운 일입니다 죽지 않고 살았다면 좋은 시 많이 썼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한들 바뀌는 일은 없겠네요 윤동주 시인 시가 남아서 지금까지 읽히는 것만으로도 좋게 생각해야겠습니다

가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8-17 21:09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보고 읽을 수 있음은 정말 천만다행이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 이데올로기와 근대화의 이론 체계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9
홍정완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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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함께 하던 독서 모임을 쉬었다. 독서 모임의 순기능을 알기는 하지만 일이 바빠지자 모임을 위한 책까지 읽기가 버거워진데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어보겠다는 욕심이 커져서 한동안 쉬기로 했던 것이다(하지만 그런 욕심을 채우지는 못한 것 같다). 모임을 쉬더라도 모임방에는 계속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매달 어떤 책을 읽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은 예전부터 궁금했고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기 때문에 읽어보자 생각했다. 매달 말이 독서 모임이라 조금 일찍 읽은 감은 있지만 임박해서 읽으면 그만큼 집중을 못할 것 같아서 여유가 있을 때 읽어보자 생각했다. 주중부터 가지고 다니기는 했는데 도무지 짬이 안 나서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결국 어제 하루를 통을 내어 읽었다. 역시 그러기를 잘한 것 같다. 


이 책은 현대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건설의 기본방향이 형성되었던 1960년대 이전까지의 시기를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밝힌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적, 학문적 지향을 살펴봄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정치적 지형의 변화에 따른 학계의 변화와 흐름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부제가 이데올로기와 근대화의 이론 체계이다. ‘근대화’라는 용어는 다양한 함의를 띠는 것이지만 저자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전반까지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 건설을 둘러싸고 나타났던 사상적 동향을 아우르기 위한 것(P17)으로 사용했다. 남한의 경우, ‘근대화’라는 용어는 한국전쟁의 전선이 교착되고 전후복구와 재건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지식인층에 크게 확산되었고, 4월혁명을 거치며 더욱 고조되는 가운데 1964년 박정희 정권의 출범과 함께 ‘조국 근대화’라는 정권 차원의 슬로건으로까지 등장했다. 그런 측면에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 제기되었던 ‘근대화’는 냉전과 전쟁-분단과 결부된 안팎의 힘들이 교차하는 속에서 체제의 이념적 폭이 특정 범위로 제한되는 가운데, 그러한 이념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P19). 


해방 전후 남한의 정치학 이데올로기의 지형은 어떠했을까. 당시 정치계의 주도 세력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공부를 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당시의 정치학자와 지식인들은 다양한 세계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0~30년대 유럽을 선도하던 전체주의 정치 원리를 수용하는가 하면 일본으로부터 사회적 법치국가 형태를(독일의 바이마르 헌법 수용) 받아들이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의 번역서로부터 자유주의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다원주의 형태의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한국 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영향이 지속되는 가운데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가 출간되고 케인즈 경제학 등 비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근거한 학자들의 움직임이 활성화되었다. 케인즈 이론은 일반적으로 불황에 대한 대비에서 나온 것이므로 한국 경제계는 이를 장기성장이론으로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적용하고자 했다. 

후진국 개발론은 후진국 사회 구조를 문제 삼고 후진국 개발 방향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후진국의 경제 현상과 특질을 진단하고 타개할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기본 틀을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 정치학계에서 행태주의 정치학이 형성되고 주류가 된다. 이는 기성 정치학의 역사적 접근법이나 추상적 철학과 제도적 접근(이 문제라고 보아)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과학적 조사와 검증 방법이 요구되었다. 행태주의 정치학은 첫째, 정치 연구의 초점(대상)을 ‘행태(behavior)’, 특히 집단, 과정, 체계에 깃든 정치행태에 두었고, 둘째, 방법론으로서의 ‘과학’, 즉 양화(量化)할 수 있는 관찰 가능하고 증명 가능한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조사방법을 강조하여 자연과학과 흡사한 것으로 구축하려고 했다. 셋째, 미국 정치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집중하여 자유의 가치들에 의해 활성화된 다원주의 정치체계의 기본 윤곽을 설명하고 확인하고자 했다(P156). 한국은 한국전쟁 무렵 행태주의를 받아들이고 1960년대 확산시켰다. 행태주의를 주도적으로 수용한 윤천주는 저개발국가의 정치체제를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중요시할 것이 아니라 정치 교육을 통해서 실질적인 개선을 이끌어내야한다고 보았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미소를 모두 반동 세력으로 규정하며 반제민족전선통일의 제3세계 세력에 혁명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치학자들은 소련과 미국을 축으로 한 이념대립과 남북한 체제대결 속에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국 사회가 추구할 새로운 민주주의 이념을 설계해야 했다. 해방 후 전쟁 이전까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혹은 온건 사회민주주의 형태에 귀를 기울였던 이들은 이제 그 설계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특히 반둥회의 후에는 중립성과 균형성은 거부되고 반공주의에 더 힘이 실린다. 


1956년 소련에서 평화공존 노선이 선택되고 제3세계 국가의 비동맹 중립 노선이나 반식민주의에 근거한 자립경제체제 건설 운동이 호응을 얻으며 국내 학계 분위기가 잠시 전환된다. 지식인들은 현실주의 국제 정치 이론을 받아들이며 미소 중심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고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재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제3세계의 쿠데타와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를 정치적 후진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승만에 비판적이던 지식인 세력은 정권 권력 구조와 통치 행태를 비판하는 근거로 이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1950년대 후반 제3세계 국가들의 동향을 다루는 텍스트들에서 제3세계 군부 세력의 집권이나 집권자의 독재적 경향 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거나 ‘민족혁명‘의 일환으로 우호적인 관점에서 다룬 글을 찾기는 힘들다. 물론 경제 분야에서 ‘후진‘국가들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가(정부)와 시장(민간 자율)의 관계, 정부 정책의 위상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 정부의 역할이나 경제개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논의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정치적 동력과 권력형태, 정치체제의 재편 등 ‘발전체제(developmental regime)‘를 상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P311).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자 학생을 중심으로 후진성을 탈피하고 발전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진다. 제국주의 지배질서에 의한 예속 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탈냉전, 민족자주, 평화 추구의 흐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벌어지면서 이 흐름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군부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이 미 제국주의에 반하여 민족적 자주의 기치를 내걸고 쿠데타를 벌였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놀라운 것은 군정기에도 이들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제3세계 국가 동향을 통해 혁명의 필요성(’이러니까 혁명이 필요해’)을 설파하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형식상의 민주주의 법질서를 파괴하고 나선 5·16 혁명과 그 후의 사태 진전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의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5·16 혁명이 초기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제국의 반대와 의혹을 무릅쓰고 성공하였다는 사실에서 한국의 이익은 한국이 스스로 결정하려는 민족적인 자주독립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 한국민을 수천년간에 걸쳐 지배하여온 사대주의적인 사상이 정면으로 부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그 사상적 연원을 멀리 3·1운동의 정신에서 구할 수 있다(P341).


이 책이 특별한 것은 한국 사상사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과 미소를 중심으로 한 분석에서 나아가 일본, 유럽 뿐 아니라 제3세계 국가의 노선과 동향을 살폈다는 데 있다. 말미에 언급했듯 1950~60년대 학계는 제3세계의 동향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대중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일 수 있을 것 같으나 한국 초기 정치 지형의 흐름과 사상사적 이해를 위해 아주 훌륭한 교과서가 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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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과 함께 정치학자들이 당면한 중대한 과제의 하나는 소련과국을 축으로 한 동서(東西) 이념대립과 남북한의 체제대결 속에서 반공주의‘
를 근거로 하면서도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구성적 체제이념으로서 ‘민주주의‘를 형상화하여 제시하는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민주주의‘는 하나의 사 - P90

실이기보다는 개념이자 이념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합의된 단일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며,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새롭게 개념화되는 가운데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 P91

요컨대, 한국전쟁의 발발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 세계적인 정치경제적 체제변동 속에서 자본주의는 "지양될 운명"이라고 평가하는가운데 이를 한국 경제 체제건설과 연관 짓던 한국 경제학계의 사상적 경향을 일변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양되어야 할 것이었던 자본주의 체제는 ‘객관적 필연으로 긍정되었고, 그 속에서 한국 경제의 후진성은 ‘전자본주의‘ 단계로 낙착되었다. 전쟁을 거치며 ‘필연‘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자본주의 선진과 후진의 역사적 거리는 더욱 현격하게 감각되었으며, 그러한 거리가 ‘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구도로 비춰지는 가운데 유럽 자본주의의 탄생 과정은 ‘부럽게 돌아봐야 할 근대화의 경전으로 초점화되었다. - P212

미소의 냉전이 격화되고, 국내 좌우 세력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1948년남북 분단이 공식화되고, 남한 사회에서 운동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폭은점차 협착되었으나,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조선‘에서 탈식민지적지향은 반공주의로 온전히 전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분단 이후에도 남한 사회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활동했던 중도파(중도좌파, 중도우파 성향의 지식인층 사이에는 미국 혹은 소련의 양자택일식 사고보다는 양대국에 의해 분단된 희생된 ‘민족‘, ‘한반도‘라는 관점이 퍼져 있었고, 이런 인식은 ‘조선‘ 또한 여전히 아시아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이해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263

파편적인 형태로 표출된 사례를 제외한다면,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승만·자유당정권은 ‘제3세계 국가들의 정치현상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적·독재적 통치양식을 근거로 자신들의 권력확장을정당화하지 않았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사실상 동일시하면서 이승만에게 ‘세계적 반공 지도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으로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정당 - P292

대의제도를 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내세웠다. 따라서 그들은 이승만의 집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선거제도를 통해
‘의회‘를 장악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제3세계의 잦은 쿠데타와권위주의적 통치양식은 ‘정치적 후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층에 의해 정권의 권력구조와 통치행태를 비판하는 근거로 자주 활용되었다. - P293

1950년대 후반 제3세계 국가들의 동향을 다루는 텍스트들에서 제3세계 군부 세력의 집권이나집권자의 독재적 경향 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거나 ‘민족혁명‘의 일환으로 우호적인 관점에서 다룬 글을 찾기는 힘들다. 물론 경제 분야에서 ‘후진‘국가들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가(정부)와 시장(민간 자율)의 관계, 정부 정책의 위상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 정부의 역할이나경제개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논의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정치적 동력과 권력형태, 정치체제의 재편 등 ‘발전체제(developmental regime)‘를 상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P311

형식상의 민주주의 법질서를 파괴하고 나선 5·16혁명과 그 후의 사태 진전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의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5·16혁명이 초기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제국의 반대와 의혹을 무릅쓰고 성공하였다는 사실에서 한국의 이익은 한국이 스스로 결정하려는 민족적인 자주독립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 한국민을 수천년간에 걸쳐 지배하여온 사대주의적인 사상이 정면으로 부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5·16혁명의 그 사상적 연원을 멀리 3·1운동의 정신에서 구할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에 반대했던 미국의 초기 대응을 공개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민족적 자주독립의 정신의 표현이었으며, 따라서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주의 세력임을 주장하고 있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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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한국 전쟁 관련 책과 소설을 읽다가 심적으로 힘들어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 고른 책이었다(전쟁에 관련된 직접적인 묘사를 읽는 것은 역시 힘든 일). 이 책이 나온지도 꽤 되었는데 그때부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읽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 책은 한국 근대 시기를 살아간 여성 세 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므로 인물에 대한 상황과 감정적인 묘사를 집중적으로 그리지만 간접적으로 그들이 살아간 역사적 배경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세 여자는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로 같은 시기를 살아낸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살아온 배경도 성격도 각기 달랐다. 

허정숙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랐으며 아버지는 허헌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변호사였다. 그녀는 불꽃 같은 성정을 지녔다. 

주세죽은 영생여학교를  다니며 음악 학도를 꿈꾸었다. 3.1 만세 혁명이 아니었다면 음악 교사나 피아니스트 등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녀는 겉은 약해보여도 내면은 강한, 외유내강의 여성이라고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상해에서 만나 혁명을 꿈꾸고 사랑을 만나게 된다.

고명자는 완고한 양반집 외동딸로 태어나 그야말로 풍족하고 고귀하게 자랐다. 이화학당에 다니면서도 시종과 늘 함께 다녔을 정도였다. 그녀는 집안 살림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당연히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었던 사람이었으니 여성동우회 교육 홍보 전단을 보고 찾아간 그 곳에서 당연하듯 분위기는 빈정거림이 대부분이었다. '저 부잣집 따님이 얼마나 이곳을 오갈까.'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모임에 꼬박꼬박 나오며 열의를 보였고 무엇보다 애교 가득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색안경 낀 시선을 바꾸게 만든다.


사실 그녀들의 남은 인생 이야기를 하려고 줄거리를 적었다가 도로 지웠다. 책으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고 여겨서다. 아무리 역사적 인물이더라도 전해듣는 것은 아무래도 직접 읽는 것보다 감흥이 덜하니까. 


올해는 조선공산당 100주년이기도 하고 해방 8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관련 글들을 많이 접하고 있는 중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황제는 유명무실해졌고 나라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 사람은 이상을 갖고 이를 위한 배움을 쫓았으며,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현실적으로 당장 내일 밥 먹을 걱정,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궁리부터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세 사람의 인생에서 러시아 혁명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 같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무산자 해방과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기치를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당시는 수많은 식민지들이 생겨나 있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생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물자는 팍팍해졌다. 자본주의가 있는 한 계급은 생길 수밖에 없다. 부자들만 잘 먹고 사는 나라를 원하지는 않을테니 억눌려왔던 빈자와 노동자들은 그렇게 일어서던 시기였다. 

1920년 무렵 인터내셔널가가 풍미하는 시대, 이 무렵 조선에도 조선공산당이 생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어떻게든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 시기 세 사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뜨거운 기대를 걸었고 추진했지만 조선공산당 색출 사건으로 대부분 잡혀 들어가면서 일차적으로 그 힘이 꺾이고 만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시기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과 마주하게 된다. 사회 진출을 하고 싶어도 그 입구는 좁았고 그마저도 여성이 잘 나가는 것을 아니꼽게 보거나 불편하게 보았다. 여전히 여성,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정조가 강요되던 시기,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세 여자들의 활약은 뭇 남성들을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대로 아니꼬운 시선을 던지고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한 마디씩 던진 것이다. 그녀들이 단발 머리를 한 것도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하니... 허정숙이 <신여성>에서 일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편집실에 술이 취해서는 난입한 남자들이 하는 말이 "잘난 여자들 얼굴 한번 보자. 당신들 시집이나 갔어?”였다고(허허허). 


허정숙은 특히나 혁명과 여자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3.1운동으로 기생의 신분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정칠성의 말도 있다. 


"인형의 집을 나온 노라는 해방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눈보라 치는 밤에 집을 뛰쳐나와 굶어 죽는 게 무슨 얼어 죽을 해방이야. 여자에게 경제적 독립 없는 해방은 공염불이지. 정칠성이었다.”


"남자들은 첩을 몇씩 거느리고 제멋대로 살면서 여자한테만 엄격한 도덕을 요구하니까 문제라는 거야. 사랑이 결혼보다, 제도보다 위여야 해. ... 사랑이  없으면 결혼은 굴레야."

정숙은 성명서 낭독하듯 따박따박 끊어 말했고 마지막 문장에선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삼단논법인데 ... 우선, 민족이 망했는데 여자가 가정에서 해방되면 무슨 소용인가. 그다음, 민족이 자유를 찾았는데 여자가 구속돼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또한 여자가 해방됐다 해도 한 줌 유산계급 여자만 자유로우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민족도 구제하고 여자도 구제하고 무산계급도 구제하는 방법은 공산주의뿐이라는 거!"


여성들이 누구보다 자유 해방을 꿈꾼 것에는 기존의 억압과 굴레가 큰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도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버겁고 어려운 일이다. 그 시기는 오죽했을지.


그리고 세 사람을 둘러싼 사랑이 있다. 이 사람의 인연이 시간이 되면 저 사람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 “살아보니 그렇게 되더라…” 곧잘 듣곤 했던 말이 무언지 이들의 삶과 사랑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정숙의 인생은 많은 사랑들을 거쳐 결국 혁명으로 귀결되었다고 느꼈다. 

주세죽은 어떨까. 평범했던 그녀가 혁명의 손을 잡고 결국은 혁명으로 흩어진 것일까. 

고명자의 인생은 무어라 정의하기 어렵다. 결국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선택을 했다고 보여진다. 

나는 허정숙의 삶에서 주먹을 쥐었고 주세죽의 삶에서는 슬픔을 느꼈으며 고명자의 삶에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늘 내가 하필 그 시기에 남한에서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는 것을 신기하게 느낄 때가 많았다. 이 일은 곱씹을수록 놀랍지 않은가. 세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조금만 다른 시기에 태어났다면,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어떤 삶을 살다가 갔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선택적 운명을 부여받고 태어난다.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탄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물 일대기의 빈 공간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메꾸고 있다. 요즘은 나무위키든 위키백과든 어떤 사람의 인물의 간략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다만 그 나열된 정보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면 꽤나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꽤나 많은 발품을 들여서 조사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녀들의 인생을 확인하며 나도 함께 웃고 울었다. 마지막은 결국 어떤 '짠함'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한동안 책장을 덮고 멍하니 있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들의 인생에 중요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면 '혁명'과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 형태는 각기 달랐고 전개 과정도 달랐지만 그들은 주어진 삶을 있는 힘껏 살아냈다라고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직접 만나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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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여자도 머리를 식힐만한 책은 아닌듯한데요. ㅎㅎ 저는 오히려 많이 갑갑할까봐 미루고만 있는 책이거든요. 화가님 리뷰 읽으면서 그 시대를 잠시 상상해봅니다. 여성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도 어려운데 독립도 혁명도 쟁취해야 했으니 그 고난이 어땠을지 숙연해지기도 하구요

거리의화가 2025-08-05 08:1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상대적으로 그랬다고 이해해주세요^^; 저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지금껏 미뤘던 책이었는데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여성의 지위도 그렇고 감안하고 봐야겠지만 막상 읽어보니 저는 의외로 수월하게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숙연함이라는 말이 맞겠죠. 막장까지 읽고 나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옵니다ㅜㅜ 제가 직접 만나뵐 수 있었다면 술 한잔 건네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네요.

희선 2025-08-1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시대를 산 세 사람, 세 사람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은 다들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앞으로도 많이 달라져야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8-10 20: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당시 여성들은 전통적인 굴레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신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에도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 같아요. 이중적인 구속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더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세 여성의 행보가 당시로서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느끼기에도 놀라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