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프로젝트인 시오니즘이 시작된다. 이는 유대인에 의한 유럽인들의 차별이 수면 위에 전적으로 드러난 드레퓌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물론 유대인의 차별과 배제의 역사는 그 훨씬 전부터 이루어졌다. 그러다 그무렵 저마다 민족의 기원을 찾으려는 붐 속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본래 유대교도들은 신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면 언젠가는 신이 자신들을 본래의 땅으로 돌려준다는 믿음 하에 살아갔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은 이를 인위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얻으려 했(기 때문에 정통 유대교도들과는 다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됨에 따라 가자지구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1967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요르단 서안지구, 가자지구,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였다. 국제사회가 제 역할을 해주지 않으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조국의 해방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느끼고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 같은 무장 해방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민족해방조직으로 탄생하여 민주 선거로 집권 여당이 되었다(테러 조직이 아니다). 미국은 하마스가 정권을 잡기를 원하지 않아 뒤집으려 했으나 하마스가 승리하면서 그들의 의도는 관철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가자지구 내전을 일으켰고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의 하마스 정권과 서안지구의 파타 정권으로 분열되었다. 하마스를 집권당으로 선택한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2007년 가자지구 전면봉쇄가 시작된 것이다. 봉쇄된 가자지구는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이 되었고 국토가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배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난민 상태가 되었다. 식수가 오염되는 것은 물론 바다도 오염되어 삶의 질이 떨어진 상태이며 지금도 여전히 봉쇄되어 있다. 현재 가자지구의 주민 중 70퍼센트가 1948년 난민이 되어 가자지구에 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라 한다. 2023년 하마스의 공격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집단학살이나 다름 없다. 

둘째, 역사적 맥락을 지운 채 이루어지는 언론 보도는 집단학살에 가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다.

셋째, 이스라엘은 정착민에 의한 식민지 국가이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한 국가다.

넷째,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과 다르게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이중 잣대를 펼쳐왔고 세계(인)는 이를 방조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중 일부의 내용이다.

제1조 협약국은 집단 살해가 평시에 행해지든 전시에 행해지든 상관없이 국제법상의 범죄임을 확인하고, 이를 방지하고 처벌할 것을 약속한다.

제2조 이 협약에서 집단 살해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 행해진 다음 행위 중 하나를 의미한다.

(a)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b) 집단 구성원에 중대한 육체적 및 정신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

(c) 전부 또는 일부에게 육체의 파괴를 초래하기 위해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 고의로 부과하는 것.

과연 팔레스타인에게 행해진 일은 집단학살일까. 제노사이드와는 다른가. 제노사이드는 집단 절멸 의도를 가진 것이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나. 어찌 되었든 차별에 의한 기원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민족이든 인종이든 말이다. 


2023년을 회상해보면 언론들은 하마스의 행위를 무장 투쟁 등이 아닌 테러로 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국제적 입지(에 따른), 정치적 로비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일방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의 자국주의가 조금씩 드러나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느껴진다(국제 사회도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지 않나). 현재 이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행위는 무엇보다 공간을 고립시킴으로써 이들의 삶을 해체시키고 죽이는 것이기에 폭격과 같은 물리적 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난민이 되었는가. 이스라엘 건국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가자지구의 사람들에게, 특히 이들이 처한 16년 이상의 봉쇄라는 것은 어떤 폭력인가.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호소하는 목소리로 알려준다. 

현재 가자지구에 대해 보도할 때 ‘인도적 위기’라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하지만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말살하고 조국 해방이라든가 독립 국가라든가 난민의 고향 귀환이라는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게 하려고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창출한 것입니다. 

인도적 위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자지구,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전부는 아니에요.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치적 해결을 요구하는 정치적 문제입니다. - P109


이 책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공격이 시작된 후 3주가 지난 10월 20일 교토에서 진행된 긴급 세미나, 10월 23일 와세다 대학에서 개최된 긴급 세미나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만들어졌다. 전쟁 초기 매일 보도가 쏟아지던 때였으니 지금보다 훨씬 긴박하고 뜨거웠던 열기를 생각했을 때 이 책의 논조가 다소 감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작가이자 강연자가 그들의 입장을 이해시키고 청자를 설득시키려는 호소적 어조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충돌은 10월 7일에 시작된 게 아니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하마스가 자행한 참사를 비난하면서, 1967년 육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뒤 팔레스타인인들이 '56년 동안 질식할 듯한 점령'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근원은 한참 전으로, 심지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창건보다 훨씬 더 과거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모든 일의 시작점은 19세기 말에서 찾을 수 있다. - P6


2023년 10월 7일 벌어진 하마스의 공격은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동시에 양국 간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민들이 도착한 이래 오늘날까지 흘러온 주요 역사를 다루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열과 갈등이 왜 시작되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지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1516년 이래 19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보통 그 기원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이야기하거나 조금 더 앞선 시기를 이야기한다면 2차대전에서의 홀로코스트 또는 19세기 말의 민족주의 시기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 앞선 배경까지 이야기해주면서 그 기원을 소상히 밝혀주어 좋았다. 아무튼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에는 약 5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중 70%가 무슬림이었고 기독교도와 유대인은 소수 집단에 속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인들이 사는 곳으로 여겨졌고 주민들은 아랍어를 쓰며 독자적인 문화를 사용하는 곳이었다. 


20세기 초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에 국제 사회 전면에 등장했다. 시온주의는 외국에서 들어온 수입품이었다. 16세기 시온주의는 유럽 복음주의 기독교의 기획으로 등장했다. 개신교도 상당수는 유대 민족이 '시온'으로 돌아가면 하느님이 구약 성서에서 유대인들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홀로코스트가 지나고 나자 유대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은 부서지고 시온주의는 유대계에 광범위한 지지를 발휘하게 되었다. 여기에 민족주의의 대두도 한 몫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오스만제국이 무너지고 영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영국 정부(와 국제연맹)는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으로 만들어주었지만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기존의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차별 정책이 이어졌다. 유대인에게는 자체 무장도 허락하고 개발 허가를 쉽게 내준 반면 팔레스타인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시온주의 운동이 종족 청소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땅을 사들이며 대지주가 되었고 팔레스타인들은 소작농이 되었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팔레스타인들은 그땅에서 그렇게 쫓겨나게 되었다. 


마침내 1936년 팔레스타인들은 중앙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영국과 유대인을 상대로 1939년까지 전면 항쟁을 벌이게 된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유엔에 회부했다. 그러나 유엔은 만들어지지 얼마 되지 않은 조직인데다 미국과 소련은 참여하지 않은채 중립국인 11개국만 참여했기에 한계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분할이 결정되자 아랍 연맹은 해방군을 구성하고 외교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 작전을 감행한다. 


국제 사회는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였다. 시온주의를 지지한 동맹은 유대 국가를 기정사실화하며 1948년 이스라엘은 건국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은 부정당했다. 유엔의 휴전 협정 중계로 이스라엘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후 1966년까지 이스라엘은 군정 체제 하에 국경에 사는 팔레스타인들을 계속 괴롭혔다. 거기에 1967년 군사 공격을 감행하여 요르단 서안,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점령하여 영토를 획득한다. 

이스라엘은 나크바 시기에 국제 사회가 보인 침묵과 수수방관을,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고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종족 청소를 계속 사용해도 된다는 백지 수표라고 이해했다. 어쨌든 누구도 처음에 그들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1948년 이래 계속된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는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과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현재 진행형 나크바'라고 부른다. - P100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인들이 고안한 발명품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아랍인의 토지를 몰수한 뒤 군사 기지와 유대인 정착촌을 세웠다. 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은 강제 추방과 체포, 구금과 학대가 일상인 상황이었다. 1987년 12월 이스라엘 트럭이 가자 지구에서 민간인 자동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난 뒤 1차 봉기가 시작되었다. 1차는 팔레스타인들이 마을과 동네를 통제하고 연대와 자급자족 기본 원리에 따라 운영하며 비폭력 항의 운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들 1천여 명을 살해하고 재판 없는 구금, 집단 처벌, 주택 파괴, 통행금지, 학교 폐쇄, 추방 등을 횡행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조직들(예를 들어 하마스)가 세력을 키우게 된다. 이스라엘 당국은 무슬림 형제단이 팔레스타인들을 분열시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정치적 이용). 2000년 2차 봉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계 시민 13명이 시위를 벌이다 이스라엘군과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졌다. 이슬람주의 저항 단체들은 자살 폭탄 공격을 벌이는 방식들을 시도했다. 이스라엘은 방어 방패 작전으로 대응하며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일부를 재점령했다. 


양국 간의 평화 노력은 1967년 이후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팔레스타인의 고통과 권리를 무시했으며, 평화 '과정'을 방패막이 삼아 이스라엘이 점령과 식민화를 지속하게 해주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은 점령의 형태만 바꾸려는 시도였으며 이룰 수 없는 협정 내용을 제기함으로써 2차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었다(P191). 


이 책은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배경, 시온주의의 대두 과정, 1967년 이후 2차례에 걸친 봉기(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분쟁, 국제 사회의 중재 실패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다만 번역이 좀 어려워서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아 두 세번 거듭해서 읽었다. 좀 더 매끄럽게 번역되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가자란 무엇인가>는 조금 더 대중친화적인 책이라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열의 아주 짧은 역사>는 선후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나는 그래서 후자의 책이 더 도움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반식민운동임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문제는 탈식민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스라엘 정부의 우경화와 국제 사회의 국수주의로 평화적인 방향은 더 힘들어지지 않나 하는 암울한 생각이 든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책읽기를 시작했다. 다음 책은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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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계속 구입하고 있지만 읽는 속도는 한참 못 미치니 이제는 '책 샀어요!'하고 이야기하기에도 민망하다. 그래도 어쨌든 알라디너 이웃 덕분에 구입하고 읽은 책이 있기 때문에 감사는 표해야한다 생각해서 글을 올려본다.


이웃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같은 시대의 글을 읽어도 문학을 읽는 비율이 현저히 낮은 편이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위해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 문학 책을 돈 주고 사는 경우는 잘 없다. 이번에 구입한 책들 중에 문학의 비중이 좀 있는 것은 이웃 분 덕분이다. 


세계문학전집을 구입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세계문학전집을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기도 해서인지 더 그렇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300권 무렵쯤에 사고 더는 안 산 것 같다. 아무튼 500권이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여서 사야겠다 생각했다. 이웃 분이 추천해주신 <올빼미의 낮>과 <야생 종려나무>와 함께 말이다. 주말 동안 <올빼미의 낮>과 <압록강은 흐른다>를 연이어 읽었다.  


한국 문학보다는 외국 문학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시대적 배경이 아무래도 낯설테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압록강은 흐른다>가 더 쉽게 읽혔지만 <올빼미의 낮>도 다른 외국 문학을 읽을 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올빼미의 낮>은 좀 신기한 소설이다. 작가가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이라 그런지 책에는 은연중에 본토와 시칠리아 섬 사람들 간의 차별이 녹아 있다. 이탈리아도 본토와 섬 간에 사람들의 차별이 있었다니. 물론 이는 배경일 뿐이고 중심 주제는 마피아와 정치 권력의 결탁에 관한 내용이다. 비단 역사적 내용으로 치부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상대적으로 더 잘 읽혔다. 한국도 한때 조직폭력배가 정치 권력과 긴밀히 연결되었을 때가 있었지 않나. 지금도 물리적 힘은 권력과 쉽게 결탁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긴다.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물리적 행사력을 놓지 않으려하는 많은 국가와 사람들이 있는한 이 아수라장은 계속될 것인지 씁쓸해진다.

<야생 종려나무>는 아직 경험한 적 없는 포크너의 작품이다. 작가의 이름은 유명하나 그동안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이웃분들께서 재밌다고 하셔서 조금 기대해본다. 


장바구니에 빠졌던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역사비평 계간지에서 서평을 읽은 뒤 궁금해져서 다시 주문 목록에 들어간 책이다. 6월에 읽었으면 더 시기적절했겠지만 언제라도 읽으면 되니까 괜찮다. 제목 그대로 중국 시민들의 시선에 따른 한국전쟁의 이야기다. 중국군이 경험한 한국전쟁 이야기는 있었으나 시민의 시선에서의 한국전쟁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진다.


<진리의 발견>은 이웃 분들께서 꾸준히 언급해주신 책인데 읽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제야 구입하게 되었다.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언급되는 책이 아닐까 한다. 생각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는 일은 결국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개혁의 첫걸음이 된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혼자가 아니라서 힘이 된다.


그리고 최근에 최소한의 역사 시리즈를 모두 구비했다. 한번씩 정리하기 좋은 책이라 느껴서다. 특히나 삼국지는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인데 이 책을 통해 인물과 주요 사건들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관련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무척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한국사와 세계사는 정리하기 좋은 책이다. 한국사 시리즈는 읽으면서 몇 년전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준비할 때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역시 아직까지 나는 이런 공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세계사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에 좋다.




장마도 이제 거의 끝났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이런 날일수록 오히려 선풍기, 에어컨 아래서 책 읽는 것이 최고의 피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은 7월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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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6-07-28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의 한국사와 세계사 제목처럼 최소한이어도 거리의화가 님은 그것만 보시고도 어느 정도 아시겠네요 삼국지도 그런 게 나왔군요 책을 바로 읽지 못해도 언젠가는 읽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6-07-28 08:45   좋아요 0 | URL
한 권으로 볼 수 있는 역사라 좋더라구요. 핵심만 담아서 한 번씩 보면서 정리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희선 님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기를요!

다락방 2026-07-2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올려주신 책들 중에 최소한의 한국사가 눈에 띄네요. 관심이 갑니다. 저걸 읽고 한국사를 조금이라도 알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말이지요.
더운데 거리의화가 님, 물 많이 드시고 잘 이겨냅시다. 사둔 책들도 열심히 읽어봅시다!! (이건 진짜 제가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ㅎㅎ)
 

형천과 황제가 신(神)의 자리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황제가 형천의 머리를 베고 그를 상양산 자 - P201

락에 묻었다. 형천은 ‘목 잘린 장군‘이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젖꼭지를 눈으로 삼고 배꼽을 입으로 삼아서, 손에는 방패와 큰 도끼를들고 연신 춤을 추며 다시 황제와 자웅을 겨루려 했다. - P202

서방에 2마리 용을 타고 다니는 욕수라는 신이 있다. 그의 왼쪽 귀에는 작은 뱀이 있다. 욕수는 신(神)으로, 사람얼굴에 호랑이 발톱을 하고 온몸에 흰 털이 나 있으며, 손으로 대성을 잡고 하늘에서형벌을 주관한다. - P206

상류는 뱀 몸에 머리가 아홉인 괴물로 수신 공공의 신하다. 우가 홍수를 평정하고신통력으로 상류를 죽이자 아홉 머리 괴수의 몸에서 폭포처럼 비릿한 핏물이 쏟아져 냄새가 심하게 역겨웠다. 피가 흘러간 곳마다 오곡이 자라지 않았고 물에서도 맵고 쓴 괴이한 맛이 나서 전혀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우가 이 지역을 흙으로메워보았지만 허사였다. 우는 곤륜산의북쪽에 누대를 세우고 요마를 진압하는데 사용했다. - P222

우강은 우경(京)이라고도 하며 바다의신이자 바람의 신으로, 황제의 적손이다.
<여씨춘추 ·유시(有始)>를 보면 ‘우강이그의 날개를 퍼덕이니 둥둥둥 소리가 울리며, 맹렬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전염병과 독이 실려와 사람들이 부스럼에 시달리다가 죽기도 했다‘고 한다. 우강은사람얼굴에 새 몸을 하였으며, 귀에 2마리 푸른 뱀을 걸고 발로 2마리 푸른 뱀을밟고 있는 위엄 있고 용맹한 신이다. - P226

정(鄭)나라 목공(穆公)이 낮에 사묘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어떤 신이 불쑥 들어왔는데, 새처럼 생겼고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공이 놀라 도망가려는데 그 신이 말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천제가 당신의 어진 정치를 아시고 저를보내 19년을 더 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날로 번창하고 육축도 번성할 것입니다."
목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물었다.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구망이라고 합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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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 반도 잔치
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시끌벅적한 잔치는 왕모낭낭의 반도회다. 이때 여러 신선들은 요지에 가득 모여 잔치를 연다. 사람은 결코 맛볼 수 없는 장생불로의 반도는 신선이 되려는 환상에 젖은 사람들조차 생각해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 P159

요임금은 중국의 전설적 제왕으로 부계씨족사회 후기 염황 부락 연맹의 수령이자 제곡의 작은 아들이다. 요는 성씨가 이기이고 이름은 방훈이며호는 도당씨(陶唐氏)로, 역사에서는 요임금이나 당요로 불린다. 그는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근검하고 소박하고 어진 임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요는 관부(官府)를 설치해서 국정을 다스렸으며 희(義)와 화(和) 두사람에게 시령에 따라 역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이 시령에 맞춰 농사를 짓도록 했다. 요가 재위에 있을 때 자주 홍수가 범람한 탓에 곤을 치수사업 책임자로 임용했다. 만년에 사방 부락의 수령인 사악의 의견에 따라 순을 계승자로 천거했다. 그 후 3년을 시험적으로 살펴본 뒤 순에게 재위를 물려주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선양‘이라고 한다. - P175

관흉국 사람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옛날 우임금이 방풍씨(防風氏)를 죽였고, 아들 계가 하후씨(夏后氏)의 왕조를 세워 덕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자 용 2마리가 나타나 그 앞에 엎드렸다고 한다. 우는 범(范) 성을 가진 사람을 보내 천하를순수할 때 자신을 보호하게 했다. 남방의 어떤 지역을 지나갈 때 공교롭 - P177

게도 우와 마주친 방풍신(防風神: 방풍씨의 혼이 변한 것)은 즉시 활로우를 쏘았다. 우가 타고 있던 2마리 용이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내며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덕분에 우는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방풍신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칼로 자기 가슴을 찔러 죽고 말았다. 그를 불쌍히 여긴 우는 불사약을 써서 그를 살려내었다. 이후로 그의 가슴에는 구멍이 남게 되었으니, 그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를 관흉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 P178

순은 성씨가 요이고 이름은 중화(重華)며 호는 우순(禹舜)으로, 상고의 제왕이다. 규예(嬀: 현 산서성 영제)에서 태어나 20세 때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요임금이 연로하자 사악의 의견에 따라 순을 천거하여 섭정하게 했다. 순이 사방을 순수하면서 곤, 공공, 환두, 삼묘의 ‘사흉‘을 제거했다. 요가 서거하고 나서 순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포판(현 산서 영제 서쪽)에 도읍을 정했으며, 우, 후직, 고요, 수, 익 등이 나누어 정사를 보았다. 순이 연로하자 홍수에 공이 있는 우를 후계자로 추대했으며 남쪽으로 순수를 나갔다가 창오(蒼梧)의 들(현 호남 寧遠 남쪽)에서 운명을 다했다.
순임금은 구의산(현 영원 동남쪽)에 안치되었다. - P188

사람만물의 영장이라는 이유는 바로 한 가닥 마음이 의(義)와 리(理)를 밝히고시비를 가리고 이해를 따지고 득실을 살피면서 신령스러워지기 때문이니이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은 쓸수록 영험해지는 법이지요. 섬인이나 현인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바로 마음을 잘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특별히 발달해서 아주 영험하고 민감해진 것이지요.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점점 어리석어질 것입니다. 옛 성현은 ‘산의 계곡도자주 다니면 길이 되듯이, 사람의 마음도 자꾸 묻지 않으면 잡초로 막히게되네. 지금 잡초가 그대의 마음을 막고 있네‘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지요. 하루 종일 배부르게 먹고 아무 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으면곤란하다!바둑이라도 둘 수 있지 않은가? 바둑을 두는 것이 안 두는 것보다는 현명하니‘ 이는 바로 마음을 사용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팔만 써도 모두 팔이 길어져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니, 마음을쓴다면 더욱 좋지 않겠소!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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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곳이 집 디아스포라 역사가 왕겅우 회고록 2
왕겅우.왕마거릿 지음, 김기협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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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중엽까지 중국행을 늦춘 덕분에 두 가지 혜택이 내게 돌아왔다. 받아놓은 졸업증서가 싱가포르의 새 대학 지원을 위한 자격을 충족해주었다. ‘비상사태’란 이름의 반영 항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나처럼 현지 출생도 아니고 국적도 없는 중국인의 신분은 입학 자격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버지도 말라야가 자리잡아 살 곳이라는 생각을 점차 받아들이셨다. 지역 중국인 중 타이완의 중화민국 지지자들과 베이징의 신중국 지지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부모님은 마음속으로 예상하면서 내가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기를 바라신 것 같다. - P18

앞선 회고록 1권 후기에서 왕겅우의 싱가포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었다. 싱가포르로 가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상황이었다. 나뉘어진 정치적 선택지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말라야 현지의 정치적 혼란도 한몫 했다. 말라야 연방이 말라야 공산당이 독립을 위해 세운 말라야 민족해방군을 상대로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가 입학한 말라야 대학은 영국인 관리의 행정을 도울 현지인을 훈련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 곳이었다. 일종의 제국 시민을 키우기 위한 곳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영국식 교육에는 익숙하면서도 현지 동남아시아 시스템과 역사를 이해에 대한 인식력은 약했다. 왕겅우는 말라야 출생이 아니었기에 특히나 정치 활동 참여, 반제국주의 발언 등에 조심해야 했다. 말라야 대학은 입학 때 전공을 고르지 않고 3년 간 통합으로 공부하다가 학위를 받은 후 최종적으로 전공을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말라야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를 써서 지방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작에 한계를 느껴 문학의 길은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을 느낀 것이 아닐까. 외국인이 외국 문학의 길을 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라야 연방 지역 사회를 둘러싸고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이해 충돌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말레이 공산당이 해산된 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싱가포르와 말라야 연맹 간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싱가포르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공부해야 했다.
1950년 마리아 헤르토흐 폭동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이렇다. 마리아 헤르토흐의 네덜란드인 가톨릭교도 아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하고 있다가 1942년 일본 점령 때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 유라시아 혼혈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갈 때 마리아를 한 말레이 여인에게 맡겼다. 그 여인은 마리아를 딸로 입양하고 자기 고향 트렝가누에 데리고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아의 아버지가 딸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가 양모를 찾아 싱가포르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이곳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는 마리아가 네덜란드인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말레이 양모가 항소에서 이겨 풀려난 어린 마리아를 말레인 총각과 결혼시켰다. 네덜란드인 아버지가 재항소를 통해 결국 마리아의 양육권을 확보했다. … 판사는 마리아가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수녀원에서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마리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하는 것 아니냐는 감정적 반응이 나왔다. 마리아가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로 가라는 판결이 나오자 폭동이 시작된 것이다(P82~83). 군중은 유럽인만 보면 싸움을 걸었다.
그는 이 사태를 통해서 싱가포르의 현실과 제국주의가 종식된 후 탈식민, 신민족국가 건설의 험난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학생회 일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꼈다. 그가 문학을 접고 역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어떤 종류의 배타주의에도 반대하겠다는 내면적 변화와 정치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생긴 결과였다.

그는 영문학 학도인 마거릿을 만나게 되었다.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베다 림이라는 사람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얻어 대학 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녀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니 공통적 관심사가 있기도 했다.
마거릿 덕분에 전에 별로 생각지 않던 ‘사랑’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랑 노래를 많이 알고 그 말을 멋대로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 말을 쓰는 방법이나 함축하는 의미는 확실히 안 적이 없었다. 마거릿을 만나면서 그 말이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일어난 변화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수수께끼다. 사랑이란 소리 없이 자라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내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 가정, 자유와 관계가 크다는 것만 안다(P132).

마거릿은 역사학 공부를 위해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당시 영국 식민지인으로서는 영국으로 가는 유학이 최고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양 등지에서 쑨원과 혁명 동지들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료 조사를 위해 홍콩으로 출장을 떠난다. 홍콩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정치 활동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중심지인 만큼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영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필리핀, 실론,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중국인의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원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으나 10세기 중국 오대사 연구로 주제를 변경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와 관련 직접 자료가 부족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 초기 기록을 통해 남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게 된 만큼 인도양에서 기원한 문명에 중국 교역이 뒤섞이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영국으로 떠나오고 1년쯤 뒤 마거릿이 영국으로 공부를 위해 왔다(영국으로 오기 전 두 사람은 약혼만 한 상태). 그러나 학교의 위치가 서로 달라 주말마다 만나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활에 지쳐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부모가 잠시 런던에 왔을 때 두 사람은 결혼 예식을 올렸다. 케임브리지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뒤 파리에서 첫 아이를 힘들게 낳았다. 아이가 태어날 때 탯줄이 엄마 목에 칭칭 감겨 있어 한동안 격리되어 지낸 통에 왕겅우는 아이와 그녀를 바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1957년 말라야 연방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싱가포르로 돌아온 뒤 부부는 바로 일을 시작했으나 얼마 후 일 때문에 쿠알라룸푸르로 가게 되었다. 그는 남양 화교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동남아시아에서의 화교에 대한 위치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강연도 호평을 받으며 책으로 출판까지 되었다고.
그무렵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까지 관심을 뻗쳤고 동남아시아판 나토인 시토(SEATO)를 조직한다. 그는 1960년 미국 아시아 관련 연구소를 둘러보고자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연구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거릿은 미국의 영어 교육기관을 시찰해달라는 요청으로 미국 대학을 돌아본다. 그는 1961년 1년간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소아스에서 명나라 초기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한다. 1962년에는 말라야 대학에 돌아와 문학부 학과장을 맡았다.

1963년 말레이시아 통합에 반대하는 수카르노 콘프론타시 폭력이 시작되었다. 말레이시아는 국제 승인을 위해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싱가포르에 잔혹한 폭동이 일어나자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는 공식 협상에 돌입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 결국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합에서 떨어져 나오고 인도네시아 PKI는 파괴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은 진격했고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 벌어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상황은 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최규하 주말레이시아 한국대사 덕분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이기백, 김준엽과 만남을 가지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그때 중국 관련 연구를 집중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세운 일이었다.

1968년 이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말레이시아가 고향과 다를 바가 없다. 자기 집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더는 현대 중국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중국사 연구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행히 마거릿도 부모님도 그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얼마 후 돌아오려 했으나 1969년 쿠알라룸푸르에 폭동으로 국가 비상 상태가 발생하자 귀환을 미루었다(그 사이 그의 아버지는 1972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18년 간 그곳에서 삶이 이어졌다.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1996년 싱가포르로 이주해 24년째 살고 있다 한다. 마거릿은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있는 곳이 집’이라는 제목은 그의 삶(의 경험)을 그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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