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민주주의 -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계보를 탐구하다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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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한국사 시리즈 그 마지막이다. 2015년에 첫 책이 쓰이고 두 번째 책이 2017년에 쓰였는데 이 책은 2025년 2월에나 나왔다. 2권과 3권 사이에 기간이 기니 확인해본 이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유는 납득할 만했다. 남한 정부가 세워진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의 과정을 훓는 작업이다. 저자가 운동권 세대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부터도 나와 직접 연관된 1980년대 이후의 역사는 중립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 열심히 공부하기 어려웟던 것도 있다. 학교 다닐 때는 박정희 시기까지의 역사는 그나마 상세하게 알려주었으나 이후 역사는 제대로 알려주지를 않았다. 1987년 이후 체제의 일은 더욱 그렇다. 정치사보다는 경제사로 접근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인것 같기도… 이제는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서 비로소 최근의 역사도 슬슬 다루고 있는 듯 싶다.

3권의 목차에는 모두 ‘민주주의’가 들어가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반공, 민족, 독재, 민중, 시민사회 키워드가 중심이 되었다. 저자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이게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마주했다고 한다. 저자가 느꼈고 우리가 느끼듯 현재의 민주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니 결코 완성형이 아니다. 서문의 제목이 모두의 민주주의 시대, 미완의 민주주의 역사라는 말이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해방 후 일제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섰고 이들이 남한의 정치사회를 좌우했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를 타도해야 했으나 남한 우파의 의견에 미국의 입김이 더해져서 보통선거법 처리가 우선시되었다. 친일파 범위가 축소되고 처벌 규정이 완화된데다가 미국 군정장관인 딘이 친일파 처벌법 인준을 보류했고 이후 폐기되었다. 이후 유엔한국위원회에 의해 소선거구제를 바탕으로 한 5.10 선거가 이루어진다. 미국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선전과 홍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자유선거가 민주주의이니 이에 반대하는 것은 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선전을 위해 만들어진 미군 본부 직속 기관인 공보원은 선거 홍보용 영화를 제작하고 미국 사회를 소개하는 영화를 상영했다. 미국의 교수법과 교과가 도입되고 미국 유학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었다.

제헌헌법에 따라 민주공화국의 기치를 내세웠지만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도민을 학살하고 국가보안법을 강화하였으며 반민법 시행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승만은 좌파를 비롯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던 정치인을 탄압하고 반공동원체제를 시행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은 개인주의를 배격한 국가주의인 반공민주주의였다. 사회 민주주의 등 반공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담론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반공 프레임은 더 강화되었고 대항 체제는 힘을 얻지 못했다.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다. 혁신정당과 시민단체에 의해 남북 협상에 의한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 대학에 통일 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승만 정부에 이은 장면 정부도 반공 임시 특별법과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시도하는 등 이전 정부의 기조를 이어갔다.

5.16 쿠데타 세력은 집권 후 혁명 담론을 내세우며 진실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방한 것은 다른 아시아의 군사 정부의 행정 정치 시스템 체제였다.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나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영구집권, 독재체제를 낳았다. 더군다나 군사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미완의 과거사 문제는 청산했다고 했다. 이에 시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문제에 천착했다. 이전 정부에 이어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고 이를 뒷받침한 것은 미국이었다. 1950~60년대 미국의 로스토는 대한정책을 입안했다. 로스토는 공산주의를 이기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었다. 이것이 경제 계획에 반영되어 동원에 의한 경제 자립과 부국 강병을 달성함으로써 공산주의에 승리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개발의 열망은 민주주의를 압도했고 민주화는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자연스레 개발권력과 지식인은 불화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에 대한 경제종속성과 예속성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의 폐단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태일의 분신, 광주 대단지 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박정희는 삼선개헌 후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고 1971년에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1972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유신 체제에 들어갔다. 긴급조치 9호 명령에 따라 자신을 반대하던 김대중 같은 세력은 납치하고 언론을 탄압하였으며 재야 세력과 지식인을 탄압했다. 민방위 훈련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이고 주민등록법을 통해 주민을 감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활발히 활동했던 반상회도 이때가 시작이다. 결국 이 시기는 삶과 문화의 모든 틀을 통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긴급조치 9호 명령이 시작되자 학생을 중심으로 운동권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재야 사회도 세력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종교계와 언론계다. 개신교는 KNCC, 천주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각기 만들어 투쟁했다. 지식인과 문학인도 각기 연대했다.

유신 독재는 한국형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하여 저항 연대는 민중 주도의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실현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삼민론을 주장하였다.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것이 앞선 이승만의 반공 민주주의이자 일민주의와 무엇이 차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면 1980년대 6월 항쟁 이후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시민 사이에서도 중요하게 부각되어 소수자, 교육 문제, 과거사 청산 등으로 범위를 넓히며 운동이 시작되었고 1990년대가 되면 이에 대한 결과물을 얻기 시작한다.

1970년대 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한 후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면서 노동자의 경제적 삶의 개선이 중요시되는 등 노동자 의식이 향상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 전국으로 노조 결성이 확대화된다. 농민들도 1980년대 농축산물 개방 문제로 연대를 시작하면서 운동 조직을 결성하였고 이들은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경제 개발의 그늘 아래 빈민들이 생겨났으나 이들의 삶에 대한 문제에는 누구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고 이들은 판자촌 철거 반대 운동 등 스스로 목소리를 높였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민중의 시대였는데 그에 맞춰 민중문학론, 민중신학론, 민중사회학, 민중역사학, 민중경제학 등이 등장하였다. 민족청년연합에서는 시민, 민족, 민중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운동 노선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발생하였고 투쟁의 방향도 달랐다. 6월항쟁 후 울산, 마산, 창원, 수도권 등 산업단지 도시를 중심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1990년대는 그것이 확대되어 노동 운동이 사회 운동에 중심이 되었다. 민주노총이 탄생한 것이 이때였고 전국농민협회가 조직된 것도 이때다.

박정희 정부 때 노조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것이 1998년 노사정위원회가 노조의 정치 허용법 개정을 함으로써 가능해졌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2004년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진보정당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현재의 헌법은 87년 체제다. 지금은 이 헌법 자체가 낡았기에 개정해야 한다는 말이 계속 있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는 당시의 헌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87년 헌법은 특히 여야합의에 의한 최초의 개헌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시민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단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경실련, 참여연대 등…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운동이라던지 호주제 폐지 운동 같은 개혁 입법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환경 운동 등을 통해 시민 참여 시대를 열었다. 광장 정치는 미군의 장갑차 사건, 광우병 촛불 집회, 한진노조 희망버스, 세월호를 지나 2016년 촛불 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윤석열의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한국의 현대사를 확인하다보니 더 뜨겁게 느껴졌다.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고. 3권이 나오는데 오래 걸렸지만 이렇게 무사히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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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 민주주의 개념으로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다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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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민주주의 시리즈 중 그 두번째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민주주의의 눈으로 본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다만 시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 시점부터라 다른 독립운동사와 출발점이 다르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유추하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통치로 조선인에 철권을 휘둘렀고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을 두는 정책을 시행했다. 억눌려왔던 조선인들이 3.1운동 때 폭발한 것이다(여기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1권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키워드를 목차로 구성했다. 자치, 주체, 권리, 사상, 정의, 연대, 해방이다. ‘해방’은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라기보다는 독립운동의 끝에 맞이한 결과에 가깝지만 독립운동사와 관련지으면 떠올릴 수 있는 제목이다. 이 키워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관련 인물과 단체, 사건, 운동, 사상을 배치하였다. 조선처럼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나라는 봉건주의와의 결별 뿐 아니라 제국주의와의 투쟁도 해야 하는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는 주권 ‘자치’를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헌법으로 내세웠다. 총 다섯 번의 개헌을 통해 공포된 헌법은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주권재민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겼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식민지 조선은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였기 때문에 해외를 상대로 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노력을 벌였다. 1921년에는 중국으로부터, 1940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외교를 벌였으나 사실상 승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다양한 정당이 만들어졌고 신간회는 합법적인 범위 하에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 주도하여 자치 운동을 벌였다. 만주, 미국, 연해주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은 자치 조직을 만들고 독립운동을 위한 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1920년대는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가 들리던 시기였다. 학생들이 3.1운동에 나서자 조선총독부는 경성 시대에 휴교령을 내린다. 그러나 학생들은 고향에 내려가면서 운동 소식을 전했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전국에 운동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의 초등생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항거했다. 이후 벌어진 광주학생운동 시위는 전국을 넘어서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까지 퍼졌다. 노동자들의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은 소유주를 상대로 자체 운동을 벌였는데 192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직업별로 노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유입으로 만들어진 단체를 중심으로 노동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는 계급 투쟁의 디딤돌이 된다. 조선총독부는 노동자 보호는 커녕 노동 운동과 노조를 불법이라고 치부하고 탄압하였으며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신여성이 등장한 이후 여성 해방과 인권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청년은 민족을 근대화시키고 문명화시킬 장본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소년은 방정환이 인격을 부여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식민 권력에 맞서는 언론 수호 ‘권리’ 찾기 투쟁이 있었다. 천도교가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창간 시점이 절묘하다. 3월 1일에 발행된 덕분에 신문에 3.1운동 소식을 알릴 수 있었고 이것이 시위 확산에 도움을 준 것이다. 3.1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조선총독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과 몇몇 잡지 발행을 허가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언론 검열은 더 강화되었고 언론인에 대한 탄압도 심화되었다. 이에 언론계는 신문지법과 출판법 개정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전국기자대회를 열어 규탄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인간해방과 평등 해방을 꿈꾸며 만들어진 형평사는 호적 정정 운동을 하고 아동의 취학, 자녀 교육, 사원 교양을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형평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계급과의 연대를 이끌려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육 운동은 특히 활발했다. 1885년부터 초등학교 의무제를 실시하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1940년 이전까지는 의무교육에 대한 공적 제도가 없었다. 이에 공립보통학교 설립 운동을 벌였다. 대학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통해 민립대학기성운동을 벌였고 공립 대학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1925년이 되어서야 경성제대를 허가했다. 농촌 계몽 운동, 노동자 교육, 여성 야학, 서당 개량 운동 등 다양한 민중 운동도 벌였다.


식민지 시기만큼 다양한 사상이 오가던 시기도 없을 것 같다. 저항의 동력이 된 민족주의는 민족 개조 논쟁 이후 경제적 민족 담론이 생산되며 타협적 민주주의 대 비타협 민주주의로 분화된다. 기본적인 민족주의에 조선의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과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는 마르크시즘이 주도했다. 독립운동계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민족해방,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소비에트 건설의 선후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장이 달랐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거부한 채 반제국주의, 반파시즘을 주장했다. 직접혁명에 의해서만 사회혁명이 가능하며 정치혁명은 권력의 교체에 불과하다 여겼다.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에 입각한 대안의 가치로 민족을 전제로 하되 민주주의에 의한 민족의 자치를 표방했다. 다만 민족주의 진영은 민주주의를 일본과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다면 사회주의 진영은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꿈꾸었다는 것이 다를 것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평민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이 있다.


‘정의’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중요한 가치였다. 사상 검증을 한다며 조선총독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였고 고문을 비롯한 비인권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독립운동가의 후기에 따르면 고문으로 사건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며 감옥은 죽음의 집이었다고 한다. 한용운, 유관순, 김창숙, 오동진 등의 옥중투쟁기는 책에 언급된 부분만으로도 감히 상상할수조차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식민지 조선은 행정권이 사법권보다 우위에 있어 재판소는 조선총독부 명령에 의해 조직되어 검찰 권한은 막강했으며(이때부터…) 판사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한다. 이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조서 재판이 이루어지기 일쑤였기에 법정투쟁은 조선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변호사들은 조선변호사협회를 만들어 사회 단체와 연대하여 사회적인 이슈 사건을 해결했고 신간회를 주체적으로 이끌며 사회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허헌, 김병로, 이인은 특히나 기억해야 할 변호사들이다.


3.1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하여 선례를 남겼는데 ‘연대’ 투쟁의 시작이 되기도 한 사건이다. 이후 암태도 소작 쟁의에서 더 조직적인 연대 운동이 이루어졌다. 해방이 가까워오면서 좌우파의 연대가 끊임없이 시도되기도 했다. 한중 연대를 비롯한 국제 연대 등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도 시도되었다. 평화를 원했던 동양 평화론자 안중근, 여운형도 있었다.

‘해방’은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민 민주주의, 반공 민주주의, 신민주주의 형태는 각기 달랐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민주주의였다. 통합 가치를 생각한다면 신민주주의가 조선에 정착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백남운은 인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강조했다. 배성룡은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토지 산업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안재홍은 초계급성을 강조한 사회 통합을 주장했다. 


이처럼 저자는 독립운동이 민주주의 운동이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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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가을의 끝자락이다.
지난 주말 단풍과 은행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외부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오며 가며 눈에 띄는 하늘과 단풍의 사진을 담았다.
작년 단풍은 하나도 예쁘지가 않아서 아쉬웠는데 올해는 그보다는 나은 것 같다.
초록에서 빨강까지 여러 색으로 변화하는 잎파리를 보는 일이 즐겁다.






그러고 보니 11월 하고도 1/3이 지났다.

운동하고 책 읽고 좀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훅 간다.

THE AFFAIR 책은 며칠 전 집에 도착했다. 
근데 1차로 두께에 놀라고... 1장은 그럭저럭 읽을 만했는데 어려운 단어들이 뒤에 왠지 쭉 나열될 것 같은 느낌.
다행히 <파시즘> 읽기는 다음달로 미뤄지기는 했으나 이 책도 두께 때문에 이번 달 내로 읽기는 무리일 것 같다.
리차일드 처음 읽는데 원서라니 너무 겁없이 도전한 것 같기도 한...;;;















최근에는 한국사 민주주의 시리즈를 읽었다. 마지막 3권도 오늘로서 다 읽게 된다.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한국사를 민주주의라는 주제 하에 정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예상했던 부분인데 한국은 짧은 시간 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정치, 경제, 사회가 변화하였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일어설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러고 보면 뜨거움이 때론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느 부분에 취약한지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얼마 전 중국에 갔을 때 서점에서 사고 싶었던 책이 있었는데 구하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아쉬웠다. 이 책만 없거나 있다고 해도 책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짐 무게를 생각한 것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은 국내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인기 작가의 대표작이라 이곳에서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검색해보니 역시 있었다.

타오바오 등의 직구로도 구할 수 있으나 배송비나 통관 등을 생각하면 그게 그거라... 이 책을 사는 김에 중국의 택배 기사 이야기를 다룬 책도 함께 샀다.


그리고... 

자우림 12집이 나와서 샀다. 어느덧 정규 12집이라니... 

늘 그렇듯 타이틀곡은 대중적이라서 내 취향에는 수록곡이 훨 좋다!

내일이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음반은 소장용, 이미 음원으로 어제부터 듣기 시작했다^^












입동은 지났으나 아직까지는 그래도 가을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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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11-1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어페어 1장이 읽을만 하셨다면 문제 없으실 겁니다! 중간중간 어려운 묘사가 나오긴 하는데 첫부분이 젤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아직 읽는 중입니다만.
자우림이 12집이 나왔군요?! 얼마전 자우림을 모르는 서른살 직원을 만나서 충격받았는데 ㅜㅜ

거리의화가 2025-11-11 16:25   좋아요 0 | URL
아... 그나마 다행이군요. 1장 처음부터 흥미진진하더라구요. 리처를 묘사하는 부분에선 빵 터지기도 했습니다!ㅋㅋ
자우림은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락페스티벌이나 기타 공연 등에 꾸준히 출연을 하는지라 젊은 팬층도 은근 많더라구요. 스물다섯스물하나가 드라마 ost로 쓰이면서 더 알려진 것도 있고요. 지난 번에 저희 동네 와서 공연했을 때 10, 20대들이 열광적으로 노래를 따라부르는 것 보고 놀랬더랬습니다. 이번 앨범도 들을수록 좋네요.

책읽는나무 2025-11-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우림 벌써 12집이 나왔군요?
대단한 자우림!^^
그리고 어페어 원서 읽으시는 화가 님도 대단하시구요. 파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5-11-11 16:2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벌써 12집! 가수의 연식만큼 팬도 나이가 들고 있지만 그래서 더 뜻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꾸준히 앨범을 내주어 감사할 따름이죠.
사실 잭리처 책을 처음 읽는지라 뭐가 뭔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욕심 안 부리고 천천히 저만의 속도로 읽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주시오.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자주 이야기를 하여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은 때맞춰 하도록 하여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하게 하여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주시오. - P124

3·1운동 시기 지하 신문은 대안언론의 역할을 했다. 사설을 통해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고, 기사를 통해 국내외의 3.1운동 소식을 알 - P135

리고 이를 왜곡하는 <매일신보》를 규탄했다. 또 국내외의 임시정부 수립소식을 알려 만세시위 확산을 북돋웠다. 지하 신문 발간 운동은 곧 언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또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언론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일본 내의 목소리조차 무시해온 조선총독부에대한 일대 가격이었다. - P136

1924년 6월 20일에 열린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는 언론인 최초의 언론 자유 투쟁이었다. 그해 4월 2일 박춘금을 비롯한 각파유지연맹원들 - P141

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이사 김성수를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각파유지연맹은 1924년 3월 25일에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12개 친일단체가 모여 결성한 연합체였다. 각파유지연맹은 창립총회에서 독립사상과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총독부를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3월 30일자와 4월 2일자 사설은 각파유지연맹 결성 과정을 밝히고, 각파유지연맹이 ‘총독정치의 선전기관이며 이를 좇는 자들의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각파유지연맹이 송진우와 김성수를 협박했던 것이다. 각파유지연맹원들은 두 사람에게 <동아일보> 사설과 같은 주장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송진우는 사담(私談)이라는 문구를 넣어 각서를 썼고,
김성수는 개인 돈 3000원을 주기로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 P142

낮고 가난하고 뒤떨어지고약하고 천하고 굽실대는 자는 누구였던가? 아아, 우리 백정이 아닌가? 그런데 이와 같은 비극에 대하여 사회의 태도는 어떠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압박과 멸시만을 하였도다. 이 사회에서 우리의 연혁을 아는가? 모르는가? 결코천대를 받을 우리가 아니다.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짐승의 생명을 뺏는자 우리 백정뿐만이 아닌가 하노라.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적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2000만의 1인이라. - P151

조선총독부는1932년 말부터 ‘백정의 해방은 형평운동보다 계급운동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형평사 해소를 조종하는 동시에 적화운동을 위한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100여 명의 급진파를 검거했다. 형평청년 전위동맹사건이 그것이다. 급진파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온건파였다. 이제 형평사는 온건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리고 형평사는 1935년친일융화를 표방하는 대동회로 개편되었다. 스스로 생존권을 찾아나서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결국 식민권력에 포섭된 것이다. - P159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시에 내가 설립에 관한 용무로 도쿄에 갔을때 구보다(保) 추밀원 고문관에게 호출되어 대학 설립에 관한 여러 가지이야기를 나누었던 바, 그는 조선에는 법과대학이 필요 없지 않은가? 오히려그보다는 농과대학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민립대학 설치 운동이 꽤 맹렬하여 기부금 모집을 시작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선교사들도 사립대학 설립의 계획이 있었으며이들 대학은 주로 법률·정치·경제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관계상 이때만약 관립의 법과대학을 세우지 않으면 조선에서 법률·정치·경제 등의 최고교육은 이들 사학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시 민족운동을 볼 때 이는심히 위험시되는 것이라고 답변하여 이해를 얻었던 일도 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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