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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연구법
양계초 지음, 한성구 옮김 / 생각과종이 / 2026년 1월
평점 :
맹자는 "인물을 평가하고 세상을 논한다"라는 원칙을 제시했는데, 세상을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적 언어로 옮기자면 시대적 배경을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인류는 횡적으로는 사회적 존재이고 종적으로는 시대적 존재이다. 만약 사회와 시대를 떠나 사람이나 집단을 관찰한다면 사상과 행위의 껍데기만 보게 되므로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경솔하게 비판하면 오류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배경을 먼저 그려야 하며, 역사를 읽을 때도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배경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 P319
양계초는 청말 지식인이자 사상가로 당시 빠르게 변하는 대외 정세를 배경으로 부패한 내부 정치 및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강유위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에 참여했고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다양한 글을 남긴 사람이다. 내게도 정치가이자 지식인, 사상가로 익숙했는데 이 책을 보면 그가 역사학자로서도 큰 몫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역사연구법>은 1922년 저작으로 전통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개념과 의의, 연구 범위, 사료의 수집과 감별, 역사 서술의 체계 등을 담아 미래 역사학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담은 책이다. 신해혁명이 있고 10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 무렵 중국은 역사 방법론 붐이 일어 관련 저작이 다양하게 쏟아져나왔다. 이 책은 양계초가 1921년 남개대학에서 한 강의 내용을 같은 해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발표했던 것을 다듬어 1922년 발간한 것이다. 당시 역사 방법론 관련 저작들이 그렇겠지만 양계초는 청말 개혁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으로 근대 서양 역사학의 방법론을 적극 수용하되 청에 맞게 개조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연구 방법을 내세웠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인간의 활동(활동의 생산물이자 정태)으로 사회성을 지니며 시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온 것을 말한다. 양계초는 전통의 역사는 군주 중심의 정사 위주로 쓰여졌음을 비판하며(사마천 이후 중국의 역사서는 황실 중심의 역사로 관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관에서 여러 저자가 맡아 저작을 펴내다보니 편차가 있고 일관성이 없는 한계가 있었음) 현대는 역사에서 교훈을 삼아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역사서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져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서는 더 이상 군주, 학자나 지식인만의 전유층이 아닌 개인과 사회의 이해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는 어떤 사람이 읽어야 하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사람은 국민의 일원으로 국가 안에 존재하며, 동시에 인류의 일원으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이들이 과거의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공감할 때 역사에 대한 필요성이 생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필요한 역사는 "국민 자치통감" 혹은 "인류 자치통감"이다. - P20
양계초는 앞서도 말했듯 기존의 역사 서술 방식을 비판하면서 사회진화론, 국민국가, 사회발전론 등 서양의 여러 이론을 받아들였음에도 지나친 발전론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4장과 5장은 사료와 사료를 검증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개인적으로도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사료는 문자 기록 뿐 아니라 문자로 쓰여지지 않은 기록도 포함된다. 옛 역사서, 당안, 서신 등의 교류사 문헌, 철학서나 문학, 일반 가정의 장부, 족보나 가보, 경적, 원본이 사라진 발췌본, 불경 등의 고문서, 갑골문, 금석, 석화, 외국인이 기록한 이야기 등... 생각 이상으로 양계초는 사료의 범위를 넓게 다루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사료를 수집할 때는 예리한 감각으로 냉철하게 끈질긴 태도로 관찰한 끝에 얻어내야 하며 수집한 사료는 유력한 반증을 찾고 의심하는 태도로 바라보다 실마리를 얻었을 때 가설을 세워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동일한 역사 기록에서도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경우는 시기적으로는 사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택하는 것이 좋고, 역사를 기술한 사람과는 가급적 가까운 것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그렇다고 맹신해서도 안 된다). 역사를 기술한 사람의 태도와 지식을 고려하되 편찬 시기는 사건의 중대성 때문에 나중에 편찬된 경우도 있으니 이도 고려해야 한다. 사료에는 수많은 위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예 오류인 경우도 있으나 그럴듯하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양한 위서 검증 방법을 제시하면서 과거 편찬된 역사서를 예로 들어 설명해준다.
인류의 사건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복합적인 인과 관계가 고려하여 기술되어야 함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교적 최근인 위화단 사건을 예시로 언급하며 당시의 국제적 배경과 중국 정부의 대응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간접적으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다만 그의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글 속에 스며 있고 중국의 소수 민족 편입에 대한 생각도 불편한 점이 있어 그 점은 감안하고 읽는 것이 좋겠다.
옮긴이는 이 책을 2017년부터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초벌 번역은 일찍 끝냈으나 책이 나온 것은 지금에서야 나왔으니 시간이 제법 걸린 셈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신간을 훓어보다 얻어걸린 책이다. 평소 구입 목록을 바탕으로 한 추천 알고리즘이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책이리라. 제목을 보고 뭔가 궁금했다가 저자를 보고 '양계초? 설마 그 양계초?' 했고 목차를 보고 '이런 책을 썼다고?' 하면서 주워담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역사학자로서 중국의 역사학에 대해 가졌던 비판 의식과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학에 대해 가졌던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이지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유효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구체적 지침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를 읽거나 공부하는 사람, 역사와 역사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가져야 할 문제 제기와 의식에 대해서 곱씹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