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2년과는 달리 지금은 매순간 이윤을 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물론 그때도 그렇기는 했지만 적어도 사회의 혁신을 위해 선택지를 고민해보기는 했던 것 같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사실상 독점 폐해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처럼 전세계적으로 부익부빈익빈은 심각하다.
부국과 빈국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누구는 넘쳐나는 자본을 다 쓰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더 얻기 위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한 나라 안에서도 자본에 따른 계급이 만들어져 위계적 불평등이 생기는 것이 심화되었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는 알겠는데 사실상 인간의 욕심과 자본주의의 극대화를 막아내지 않는다면 이것에 최선책을 찾을 수 있을까.

2.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기란 쉬운 일이다.
책에 나온 내용을 믿고 그대로 따르기도 생각보다 쉽다.
뉴스, 기사, 칼럼 등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도 많다.
맹신하는 것은 쉬우나 그렇게 대부분의 정보를 얻는다면 굳이 나를 스쳐가는 정보인데 그것을 보고 읽고 들을 필요가 있을까.
뇌를 거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자세를 저자는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나조차도 어떤 정보든 따져 물으며 확인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내가 볼 때 분명한 사실은, 경제라는 기계를 다시 정상가동시키려면 더 이상 작동하는 매순간 이윤을 내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서부와 캐나다에서는 음식이썩어나는데 전 세계 모든 산업 지역에서는 실업자들이 굶주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음식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면, 그리고 그들이 서구 농부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울 수있는 작업에 배치된다면, 개별 자본가는 이윤을 내지 못하더라도 세계는 좀 더 부유해질 것이다. 개인적 이윤이란 동기는고장 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공 부문의 조직화된 노력만이 세계의 경제 상황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32.1.27) - P108

현대인은 대부분 사안에서 결코 성가시게 자기의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전문적인 연구나 경험을 통해 권위를 갖추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편이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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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도 회사 전체적으로 쉬는 바람에 어쩌다 10일 연휴를 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피곤함은 가시지 않은 거지?^^; 


제목처럼 연휴 동안 맑은 휴일 찾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흐리고 비오고 맑은 하늘을 찾기가 이리 어렵다니... 기상청 예보 믿고 나갔다가 비가 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아무튼 수요일인가 맑은 하늘을 딱 한 번 내보인 적이 있었는데 볕이 뜨겁기는 했지만 그것이 참으로 반갑게 느껴졌다. 





그 이튿날은 또 흐려서 비가 올락말락이었는데 더 있으면 또 비가 올 것 같아 모처럼 옆지기를 끌어냈다. 

산책을 하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막걸리를 먹자고 했는데 막상 보이는 것은 맥주 호프집 아니면 고깃집 밖에 없었다(고기는 그날 따라 안 끌려서). 

결국 선택한 집은 맥주 호프집. 안주는 국물 있는 돈까스 김치 나베로 시켜주고...(왠지 모자를 것 같아 소세지 튀김류도)



한동안 외식을 안하다가 함께 했는데 그 시간이 꽤나 즐거웠다. 맥주 위에 올려진 것은 샤베트인데 역시 딱히 내 기호는 아니었지만...

안주들도 괜찮았고 나누는 대화도 즐거웠다. 집에 있으면 서로 핸드폰 보거나 각자 할 일 하기 바쁘니 점점 대화를 하는 시간이 주니 말이다.


연휴 동안은 3권의 책을 읽었다. 대서양시대를 배경으로 한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그리고 18세기의 인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대부분 굵직한 책들이어서 연휴가 아니면 사실 읽는데 꽤나 오래 걸릴 책들이었다. 

남은 10월은 여행 계획도 있고 아무래도 읽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필라테스 운동은 다행히 계속 진행중이다. 선생님이 칭찬에 후하셔서 매번 나의 의지를 북돋운다. "예전에 안 되던 자세였는데 이젠 너무 자연스럽게 되네요." "잘하고 있어요." 등등... 선생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느낀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칭찬에 사람은 약할 수밖에 없다. 질책하는 것보다는 칭찬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나저나 내일이 출근이라니...!!! 긴 연휴가 끝났으니 이제 다시 일에 집중해야 또 여행을 무사히 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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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10-1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에 묵직한 책 잔 읽으셨네요.
긴 연휴가 끝나서 많이 아쉬우시겠어요.
내일 출근 잘하시구요.
또 며칠 있음 주말이 다가옵니다.ㅋㅋ
근데 맥주 위에도 샤베트가!!😀

거리의화가 2025-10-13 07:56   좋아요 1 | URL
긴 연휴가 끝나서 아깝기는 한데 주말도 있고, 곧 여행 때문에 또 며칠 간의 연휴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맥주 위에 샤베트 신기하죠?ㅋㅋ 딱히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뭘 섞거나 소스 얹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도 보는 맛이 있었어요. 출근은 했는데 하품만 나오고 있습니다!ㅋㅋㅋ 한주 활기차게 시작하시길^^
 
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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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우리 자신을 부르는 것이며, 사람들이 우리를 언급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였는지를 나타내는 것이자 상대방이 그와 나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P17


나의 이름은 사라지고 무언가가 되거나 집단화되어 통칭된다면 어떨까.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또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구나.’하고 여기지 않을까. 과거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로 불리지 않았으며 지워진 채 이용 당하는 세월이 길었다.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일부터 시작이다. 이 책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수많은 유럽인들이 기독교 선교를 위해(명목으로) 아메리카 땅에 건너갔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개종시키면서 원래의 문화는 사라지거나 동화되었고 집단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원래 살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토착민’? 이제는 ’인디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조심스러워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원주민’도 그렇다. 어릴 때는 ‘식인종’이라는 말도 사용됐다. 어쨌든 저자는 앞선 단어 대신 인종적, 국가적 의미를 최대한 제거한 중립적인 용어인 ‘인디저너스’라는 단어를 쓰자고 말한다.  


대항해 시대 아메리카라는 공간은 익숙하지만 대부분 유럽에서 아메리카라는 방향으로 일관되어 있었던 것 같다. 출발점은 늘 유럽과 서구였고 그곳이 문명이었다. 인디저너스들은 사물화되거나 노예화되어 유럽인들에게 흥밋거리나 유용한 도구쯤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야기한다면 무시하거나 배제되었던 그들의 삶과 문화는 찾을 길이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들은 결코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체념하듯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자신만의 무기와 기술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인디저너스들은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부를 얻은 경우도 있었다. 유럽에서 여러 대를 걸쳐 살면서 가문을 일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가족이 모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구성원 중 일부는 스스로 거부하거나 부득이한 경우로 내쫓겨 아메리카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15세기경 노예는 삶의 일부였고, 이슬람 지역, 동유럽, 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 출신 사람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노에 시장에서 일상적으로 거래되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는 인디오들의 수호자였음에도 인디저너스 수를 줄이기 위해서 아프리카 해안 지역 출신의 노예 도입을 지지했다. 이렇게 노예가 당연시되던 시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당도했을 때 만난 사람들을 사물로 취급했다는 일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 인종적, 차별적 언행이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스페인으로 건너간 인디저너스들은 스페인 시민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는 노예화로부터 보호화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은 노예 제도에 세 가지 예외상황을 두었는데 인디저너스가 그 중 하나였으며, 정당한 전쟁에서(이것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는???) 포로로 잡은 경우, 몸값의 대상에서 구조된 경우가 그렇다. 과연 인디저너스들은 노예제도의 문제와 논쟁을 몰랐을까?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르틴의 예가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그는 “나는 자유를 원한다.”하고 외치며 노예를 벗어나기 위한 법정 투쟁을 끈질기게 했다. 멕시코 출신 마르틴은 9~10살 무렵 스페인 왕실 재정 담당 관리인 살라사르의 눈에 띄어 시동으로 일하게 되었다(살라사르는 마르틴의 얼굴에 낙인을 찍을 정도로 잔혹한 사람이었다). 이후 주인을 따라 스페인에 가게 되었고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가사 노동자로 일했다. 살라사르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가 법정에 서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결단과 투쟁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는 저를 때리고 벽에 밀쳤어요. 만약 다른 이들이 저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마 저를 죽였을 거예요. …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저를 해치지 못하도록 저를 그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십시오.” 그의 외침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에도 성폭력,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등 수많은 사례들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대로 분리하지 않아서 다치거나 죽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가. 


현재 인디저너스들의 문헌과 자료, 유물 등은 대부분 유럽에 소장되어 있다. 승리의 행진과 호기심의 서랍으로 시작하여 "인간 동물원"과 "민속학적 전시"에 이르기까지, 유색인종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무력화하는 수집과 전시 행위는 오랜 역사가 있으며, 그 흔해 빠진 "과학적" 인종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직접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아메리카인을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유럽인의 의도와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전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인종주의는 초기 단계일 뿐이었지만, 당시의 수집가, 역사가, 민속지 학자(종종 종교인들이 "다른 민족"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들을 개종시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는 사람들을 "인종"으로 구분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데에 그것을 이용하는 일을 "자연스럽고" "과학적인" 믿음으로만들었다. 유명한 물건들, 심지어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했던 16세기 수집가들의 열망은 문화, 민족, 그리고 "인종"의 분류와 위계를 구축하는데에 기여했다. - P313


대항해 시대 담배, 카카오, 옥수수, 감자, 토마토 등이 물을 건너 넘어갔다. 유럽을 비롯한 서구는 자원을 상품이자 이익으로 보았으나 인디저너스들은 자신들의 땅을 명확히 인식하고 가치를 이해했다. 땅에서 얻어지는 것은 소중하며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믿음은 “상호주의와 지속가능성의 윤리에 기반한 대지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상품화의 시대 아메리카의 물건은 세계화되었다. 그들은 유럽인에게 자신들이 가진 작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주었고 연결망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유럽인의 문화, 경계와 차별을 직접 확인한 인디저너스는 자본에 따라 일부는 부를 쌓지만 또 다른 일부는 굶는 사람들이 있는 등 심각한 불평등에 놀랐다. 유럽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거부감은 인디저너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고 한다. 유럽의 불평등을 그들이 인식했다는 시실이 흥미로웠다. 


1519년 코르테스가 아메리카에 왔을 때 아길라르와 말린친을 만났고 둘은 코르테스의 현지 통역사가 되었다. 아길라르가 스페인어를 마야어로 통역하면 말린친은 마야어를 나우아틀어로 통역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나우아틀어를 마야어로, 이를 다시 스페인어로 통역했다(지역마다 언어가 달랐다). 말린친은 스페인어를 빠르게 익혀 나중에는 코르테스의 수석 통역사가 되었다고(말린친은 나중에 코르테스 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나중에 펠리페 2세의 비서가 된다). 인디저너스들에게는 이윤을 좇아 대서양을 건널 필요가 없었으나 많은 젊은 인디저너스들이 개인의 욕심, 가문과 공동체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대서양을 건넜다. 이처럼 그들은 대륙 간 중재자이자 통역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문화 사이를 오가는 법과 언어를 배운 “중재자들”은 중간 지대에서 자신들에게만 허락된 기회와 통찰력을 지닐 수 있었다. 

아 폽 바트스는 유럽인이 왔을 때 경례를 거부하고 깃털을 세우고 케치 복장을 하면서 위신을 세우는 것으로 ‘우리를 함부로 보지 마라!’를 강조했다면 외교관의 선례를 만든 목테수마 가문 같은 인디저너스들의 활약도 존재한다. 이들은 대서양을 정기적으로 건너고 사절단과 외교관을 스페인 궁정에 보내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협상했다. 인디저너스 귀족 가문 연맹이었던 틀락스칼라 상류층은 스페인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유럽에서 인디저너스의 역사는 배제되거나 억압되거나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책에서 보듯 그들도 새로운 땅을 찾아 기회를 얻고 연결된 상업망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으며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협상을 벌였다. 그들에 대한 시선을 박물관에 새겨진 어느 존재처럼 보는 일은 벗어나야 한다. 저자의 노력처럼 인디저너스 여행자를 찾아내는 일을 통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고 희미한 삶들은 너무 닳은 나머지 서구 역사에 아주 옅은 흔적만을 남기는 듯 보이지만, 쌓이고 쌓여서 그 여행가들에 대한 과거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눈에 띄고, 때로는 평범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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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여 깃발을 꽂고 소유권을 주장한 백인들에 대해서 고정되거나 획일화되지 않은 매우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공동체들이 새로운 교역망을 맺기로 했으며(혹은 그러기를 강요당했으며), 탐나는 재화의 생산자나 공급자, 혹은 거래 당사자가 되었다. - P210

많은 인디저너스들에게 거래는 의무 및 이해, 상호주의등 더 큰 연결망의 일부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들은 친선, 외교, 동맹이라는 틀을 설정했고, 상호 간의 이해를 바라며 아낌없이 제공했다. 목테수마 황제가 코르테스에게 "내가 다스리는 모든 영토와 그에 속하는것들은 당신의 뜻에 따를 것이며 당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당신은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집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환대이지 권력의분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디저너스의 예절과 상호 관계에 무지했던그 정복자는 그 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 P240

침략으로 인한 첫 충격이 지나간 후, 정치적 목적으로 대서양을 건넌 원주민 남성들(그리고 종종 여성들)은 더 이상 모르는 이들 사이에 내던져진고립된 개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국제법이라고 부르는(국제법은 이 시기 인디저너스 외교관들의 이의 제기에 대한 답으로서 그 기초가 형성되었다) 부문의 뉘앙스에 정통한, 교양 있는 외교관들이었고, 자신들보다 앞서 대서양을 건넌 여행자와 법률 조언자, 식민지 관리들의 경험과지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 - P276

대서양을 건너서 행해지던 외교적인 노력은 16세기에 도시, 주, 가문,
관을 대표하는 인디저너스 대표들이 법정에서 관심을 받고자 경쟁해면서 범위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졌다. 그중에는 수행원을 대동한 공식사절단, 가족과 친척, 하인을 대동한 귀족, 때때로 스페인 관리나 성직자를 대동한 개인, 혹은 혼자인 사람도 있었다. … 그들이납치되어 통역을 맡게 된 우발적 외교관이든, 가족이나 지역, 혹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분쟁을 중재한 자발적 외교관이든, 혹은 단지 만나본 적 없는 먼 지역의 지배자에 대한 확신이나 정보를 원했던 사람이든간에, 이 아메리카 토착 정치가들은 왕궁과 제국의 중심지에서 눈에는 소수자로서 유럽 사회의 형성 및 대서양 횡단 무역에 기여했다. - P280

승리의 행진과 호기심의 서랍으로 시작하여 "인간 동물원"과 "민속학적 전시"에 이르기까지, 유색인종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무력화하는 수집과 전시 행위는 오랜 역사가 있으며, 그 흔해 빠진 "과학적" 인종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직접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아메리카인을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유럽인의의도와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전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인종주의는 초기 단계일 뿐이었지만, 당시의 수집가, 역사가, 민속지학자(종종 종교인들이 "다른 민족"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들을 개종시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는 사람들을 "인종"으로 구분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데에 그것을 이용하는 일을 "자연스럽고" "과학적인" 믿음으로만들었다. 유명한 물건들, 심지어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했던 16세기 수집가들의 열망은 문화, 민족, 그리고 "인종"의 분류와 위계를 구축하는데에 기여했다. - P313

작고 희미한 삶들은 너무 닳은 나머지 서구 역사에 아주 옅은 흔적만을 남기는 듯 보이지만, 쌓이고 쌓여서 그 여행가들에 대한 과거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눈에 띄고, 때로는 평범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 P335

침략 초창기에 스페인 여성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므로, 많은 남성들이인디저너스 아내를 선택하거나 강제로 취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식민지에서의 변화무쌍한 관계를 쉽게 받아들였을지라도, 인디저너스 아내나 연인과 함께 유럽으로 귀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인디오를 완전한 국왕의 신민으로 여기고 기독교도로 취급하는 온정적인 서사가 흘러넘쳐도, 스페인 남성이 자신의 인디저너스 파트너를 유럽으로 데려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최상류층의 원주민 여성을 제외한 인디저너스 여성이 스페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는 매우 어려웠다. - P191

대서양을 걸쳐 형성된 가족의 연계를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상류층 인사들은 아메리카를 오가는 여행 허가증에 이름을 기재하지만, 가족 구성원을 포함한 다른 많은 이들은 익명의 귀족이나 사제, 행정가나 크리아도(수행원)로서,
그리고 종종 속거나 강제로 배에 탑승한 포로로서 유럽에 도착했다. - P189

인디저너스들에게는 이윤을 좇아대서양을 건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원주민들이, 특히 대부분 젊은이들이 개인적인 야망과 가문과 공동체를 위해서 동쪽으로 여행했다.
유럽인들이 남긴 자료에는 인디저너스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한 탐험가 및 침략자들에 의해서 중재자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남아있지만, 이들은 침략자의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동포들을 위한 외교관이자 브로커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굉장히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대서양 횡단 여정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이중 신분은 문제가 되기에충분했으며, 그들의 충성심 역시 의심의 눈초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네판틀레라스, 즉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 P140

왕의 "가신"으로서, 인디저너스는 스페인 시민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는 노예화로부터 보호되었다. 그러나 식민화 초기에 왕실은 노예제도에 세 가지 예외 사항을 두었다. 첫째, "식인종인 인디저너스는 노예로 삼을 수 있었다. 둘째, "정당한 전쟁just war**에서 포로로 잡았다면노예로 부릴 수 있었으며, 셋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값의 대상에서 구조된 경우에도 노예화할 수 있었다. - P80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우리 자신을 부르는 것이며, 사람들이 우리를언급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였는지를 나타내는 것이자 상대방이 그와 나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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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 - 탐욕과 혼돈의 아수라
윌리엄 달림플 지음, 최파일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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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의 시대 동남아시아에 대한 책을 읽고 이어서 이후 인도를 배경으로 한 기업이 경제를 잠식하는 과정을 다룬 책을 읽게 되었다. 내 취향이 아닐까봐 우려했는데 이야기처럼 잘 읽혀서 진도를 빨리 뺐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대형 상업 기업과 제국적 권력과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다. 기업이 국가(의 권력자), 제국주의와 결탁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 책은 긍정성보다 부정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 


1599년 동인도회사의 시작은 다른 기업들처럼 미약했다. 설립 후 100년이 넘어서도 상근 직원이 35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인도 등지에서 거둬들이는 물자와 세입을 바탕으로 한 부가 어마어마해진 상태였으니 그 수완이란 놀랍긴 하다. 1600년 12월 마지막 날 동인도회사는 칙허장을 통해 동인도와의 무역을 15년간 독점할 뿐 아니라 영토를 통치하고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으며 인도를 향해 항해를 떠났다. ‘누구 맘대로. 허락한 적도 없는데…’ 그러니까 애초부터 동인도회사 권리는 지나치게 주어져 있었던 셈이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항해를 시작했을 때 남아시아에서는(특히 몰루카 제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미 이익을 선점한 상태였고 1602년 투자금 규모가 10배에 달했다. 투자를 위해서는 실질적인 이득이 있어야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무렵 인도는 무굴제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굴 제국은 직물 산업을 이용하여 어마어마한 수입을 끌어들였고 제국은 반짝였으며 무굴 황제는 세계적인 갑부였다.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처음부터 무력으로 점령하려 하지 않고 이권 획득을 위한 협상 상대자로 삼고자 했다. 물론 뒤에서는 무굴 제국의 분열과 갈등을 이용하며 이권을 확장하며 인도 내에서 영향력을 넓혀 나간다. 무굴인들 입장에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영악한 수단이고 기업가 마인드일지도. 마라타 연맹, 페르시아 나데르 샤가 무굴제국을 공격해 들어오면서 혼란이 가중되었고 중앙 재정은 바닥이 났으며 이에 지방은 제갈길을 찾는 형국이 된다. 


그들은 내분의 불협화음을 용의주도하게 부추기다가 최대한 신속히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중재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소하려고 나서므로 그들의 행동이 이 같은 장기 전략에 정확히 일치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해 동안 고수해온 이런 행동 패턴으로 그들은 벵골 경계 너머로 많은 지역을 차지했고, … 그들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는 모습을 보이는 법 없이 전진하는 게임을 한다. 한마디로 말해 로마인들이 정치에서 따른 그 오랜 금언, 다시 말해 타키투스가 표현한 대로 백성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기는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현지의 세습] 군주들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금언을 열심히 실천한다. - P489


이때 인도에 발을 담그려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끼어든다(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이후 인도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완전히 이권을 내어줄 때까지 끊임없이 경쟁자로 나선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캐나다 접경 지역에서 7년 전쟁으로 제국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상태였다(나중에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들어선 뒤 영국과 프랑스는 또 한 번 치열한 경쟁에). 

벵골의 은행가, 상인을 비롯한 유력 세력들은 동인도 회사에 힘을 쓰지 못하는 군벌에 등을 돌리고 오히려 동인도회사와 결탁한다. 여기에 군벌의 실정과 무능으로 인한 국고 바닥은 무굴 귀족의 불만을 키우게 된다(반면 인도 내에서 영국 상인은 세금을 안내고 벵골 경제를 잠식해간다). 

그렇지만 무굴 귀족들도 자신들의 처지를 점점 자각해가고 있었을 것이다. 늘어만 가는 동인도회사의 이권에 자신의 밥그릇도 빼앗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이렇게 각지에 있던 무굴 군벌들이 연합했고 이는 북사르 전투로 영국 동인도회사에 대항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알라 하바드 조약으로 인도 북동부 지역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이어서 인도 남부를 차지하기 위한 폴릴루르 전투도 영국 동인도회사의 승리였다.

마라타 연맹과 샤 알람이 결합하여 동인도회사에 대항하고자 한 시도도 있었지만 지휘관이 사망한 뒤 일어난 내분과 폭정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지막 남은 인도의 마이소르 군벌 세력마저 1792년 일어난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동인도회사와 인도 내 질서는 확연히 한 쪽으로 기운채 회생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마이소르의 티푸가 프랑스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아 델리전투가 벌어졌지만 이것은 사실 영국군 대 프랑스군의 전쟁이 아니었을까. 


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저자의 인물에 대한 평가와 묘사다. 이는 독자마다 나름의 해석과 판단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기억나거나 인상적인 인물만 몇 명 언급해보려 한다. 우선 영국 동인도회사의 클라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사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출세와 명예에 욕심이 많았던 듯^^;) 몇 번이나 좌절되고 나서 동인도회사 회계원이란 작은 직책에서부터 시작하여 결국 벵골 제독으로 오르게 되는 사람이다. 이에 맞서 인도 벵골의 권력자로 시라지 우드다울라가 있었는데 그는 남아 있는 기록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악평과 혹평이 가득하다. 클라이브에게 결정적으로 진 탓이 크겠지만 폭정으로 공포정치를 했기 때문이 클 것이다. 사촌마저도 그를 강간범이자 사이코패스로 기록해놓은 걸 보면 정상인의 범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인물이 한참 뒤에 나오는데 쿨람 카디르다. 그도 황제인 샤 알람을 내쫓고 공포 정치를 자행하는데 그와 관련한 기록이 너무 끔찍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다. 

승승장구했던 클라이브에 뒤를 이어 워런 헤이스팅스가 자리를 잇게 되는데 묘사가 굉장히 후한 편이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이전에 이루어졌던 권력 오남용(클라이브?)이 시정되고, 유용한 규정들이 정부의 모든 부문마다 제정되었다. 헤이스팅스는 클라이브와 달리 인도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P361)는 것이다. 과연 인도를 진심으로 좋아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아무튼 프랜시스와 버크가 헤이스팅스를 법정에 세워 그를 탄핵하려고까지 한 것을 보면 인기를 시샘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샤 알람은 최후까지 살아 남은 사람인데 과연 그가 인도의 대부분의 이권이 동인도제국에 넘어간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책의 표현에 의하면 신체는 망가지고 종교에 귀의하여 속세를 떠난 사람 같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왠지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전투 과정과 결과보다는 전투 사이 벌어지는 인물들의 묘사와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또 에드워드 기번이나 웰즐리 같은 유명 인물을 책에서 만나는 재미도 있었다. 이 책은 동인도회사라는 기업이 시작해서 인도에서 자리를 잡은 뒤 물러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거대 기업의 권력의 남용과 횡포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니 역사적 교훈을 삼을 만한 일이다. 


동인도회사의 도래가 18세기 인도에 가져온 파열은 그것을 다루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문학 장르가 발명될 정도였다. 이는 이브라트 나마, 즉 훈계서로 알려진 교훈을 이끌어내는 역사서 장르다. 이런 역사서의 교훈적 목적은 이 장르의 가장 유명한 저자인 카이르 우드딘 일라하바디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이 같은 과거의 삶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대의 미래를 위해 유의하라)”. -P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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