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 모든 걸작에는 다 계획이 있다
카미유 주노 지음, 이세진 옮김 / 윌북아트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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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경식 선생님의 대표작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으면서 미술사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막상 구매를 했으나 예약 판매로 뜨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받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러다 구매가 취소될까봐 좀 걱정이 되었다는. 무사히 받아서 읽을 수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같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면 아무래도 혼자 미술을 감상하면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알 수 있어 좋다. 다만 나는 평소 혼자 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도슨트 프로그램을 매번 이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박물관 가이드는 거의 이용한다. 가이드는 휴대폰에서 앱이나 웹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개인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는 좀 더 깊은 이해를 원할 때 듣게 되는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미술관의 구조, 미술을 볼 때 유용한 개념들(이젤, 선, 구상, 제단화, 템페라 등)을 앞부분에 실어서 미술과 미술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그리고 뒷부분은 조토부터 뱅크시까지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에 대한 본문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페이지에는 화가별 삶과 이력, 작품에 대한 특징, 평판, 대표작에 대한 설명, 화파에 대한 특징을 싣고 있다. 르네상스처럼 시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라던가 비례, 원근법 같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은 따로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 좋았다. 비슷한 화풍을 지녔거나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처럼 서로 비교할 만한 화가는 둘의 대표작을 싣고 그림의 특징을 설명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는 같은 유디트의 그림을 그렸지만 다른 관점을 갖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한 화가의 화풍을 알아가는 것보다 비슷한 화풍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미술사를 언급할 때 화가가 살던 시기의 역사적 장소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다른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의 당시 화풍과 대표 화가,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들라크루아와 루벤스가 활동하던 같은 19세기 일본에는 에도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호쿠사이라는 대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우키요에 예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서 주목을 받았고 후지산 연작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일본의 우키요에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인 마네, 모네, 고흐, 고갱 등에게 실제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여성 화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좋았다. 최근 들어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화가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이들이 실제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작품을 갖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화가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아예 이름을 몰랐던 화가들과 작품을 만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라파엘로의 부제는 신과 같은 예술가라고 되어 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던 만큼 인간의 이상이 무엇인지 고민하여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이상을 삼았던 시기는 고대였는데(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가 14세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6세기까지 이어졌으니 그는 그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대 로마 재건 프로젝트를 건의하기도 했단다. 그의 그림에는 신과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을 그려서 비례라던지 균형이 완벽하다. 그래서 관념적이지만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어서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실제로 후대에 신라파엘파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두 번째 삶, 즉 명성의 삶은 시간도 죽음도 거칠 것이 없으니 그의 작품들과 그 작품들을 찬양하는 학자들로 인해 영원무궁하리라."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신학자 조반니 피코델라 미란돌라가 라파엘로에 대하여 한 말이다(P46). 

그는 당시 교황,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내가 라파엘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그 전에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그가 누구고 화풍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다 실제로 보고 나서 아름다운 그림에 매료되어 전시를 보고 나오자마자 영어로 된 가이드북 등 관련 상품을 잔뜩 사왔었다. 지금도 가끔 펼쳐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 때의 감각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를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났던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화를 유독 많이 그린 렘브란트, 영국의 위대한 화가이자 풍경화의 대가였던 윌리엄 터너, 대담한 시도로 근대의 문을 연 귀스타브 쿠르베, 점묘화를 그린 조르주 쇠라, 20세기 회화의 문을 연 폴 세잔, 색채의 마술 샤갈, 추상의 대가 피에르 몬드리안, 호박 그림으로 유명해진 쿠사마 야요이 등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몇몇 여성 화가들을 소개해본다. 

네덜란드 황금 시대를 대표하는 라헬 라위스는 암스테르담 최고의 정물 화가로 당시 유럽 귀족들에게 그림이 불티나게 팔릴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책에는 '과일과 곤충이 있는 정물' 그림이 실려있는데 화사한 붓놀림에 채광을 잘 이용한 덕분인지 놀랄 만큼 사실적이어서 중앙 하단의 과일은 꺼내 먹고 싶을 정도로 싱싱해보인다. 반면 상단과 모서리로 갈수록 어둡게 채색하여 한층 과일을 돋보이게 했다. 곤충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평범성을 

아프 클린트란 사람이 있다. 그는 말레비나 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렸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언에 따라 사후 20년 간 작품이 비공개 상태여서 1960년대에야 비로소 작품이 공개되었고 그로부터도 20년 후에나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스웨덴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재능이 특출났는데 작품은 자연과학이 바탕이 되면서도 신비 사상을 담은 영성에 기반을 한다는 것이 독특하다. 책에는 대표작인 백조 연작 중 그룹 9번 그림이 실려 있다. 

마리기유민 브누아라고 처음 알게 된 화가인데 역사화를 그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초상화가로 활약했다는데 스승이 다름 아닌 다비드였다고. 그렇지만 여성 화가로서 평론가들의 악평에 마음 고생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남편이 더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게 하여 더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니 참 아쉬울 따름이다. 책에는 '마들렌의 초상'이라고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작품이 실려 있는데 원래 작품 제목은 '니그로 여성의 초상'이었다가 이후 '흑인 여성의 초상'으로 변경되고 2019년 이후로 이 이름으로 변경된 모양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상이 변하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상파 화가 중 베르트 모리조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카미유 코로에게 그림을 배웠고 특히 여성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요람'이라는 작품은 어딘가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성이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주인공인 여성은 자신의 언니인데 언니도 화가였지만 결혼 후 그림을 그만둔 반면 모리조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렸다. 결혼이란 제도가 여성들을 가정에 가두고 꿈과 이상의 세계와 멀어지게 한 것 같아서 씁쓸했다. 


단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무게다. 추천사에 '이 책 없이 미술관에 가지 말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양장본으로 책 무게가 상당하여 갖고 다니기에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미술관 나들이 전후 또는 미술 작품에 대한 기초 자료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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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중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후유증이 컸다. 길치라 길도 헤매고 변동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힘들었지만 스스로 헤쳐나가는 경험이 도전 거리를 강제로 던져주기에 이것이 여행의 묘미지 싶어 좋았다. 그러다 얼마 전 2025년에 이어 2026년에도 중국 무비자가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슷한 시점에 여행사에서 생일쿠폰 7%를 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환율이 너무 올라서(위안화 거의 20원이 오른...) 다만 조금이라도 여행 경비를 줄일 수 있겠다 싶었고 그렇게 내 손가락은 결제를...ㅎㅎ
아무튼 그렇게 따뜻한 봄 어느 날 떠나게 될 것 같다. 정작 중국의 수도를 못 가봤으니 이번엔 베이징으로 정했다. 베이징은 상해와는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소원 성취를 할 것 같다. 나머지는 몸이 허락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가보려고 한다(하하 근데 옆지기에게는 또 어떻게 말할지 그게 걱정인데 ‘또 가?‘ 이러고 말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얼마 전 입사 6주년을 맞이했다. 원래도 작았던 회사인데 지금은 더 소규모가 되어서 다 같이 입사 축하해주던 행사도 없어져버렸지만 올해 초 5년 근속연수를 채웠다고 조촐한 상여금과 함께 숙박료를 선물 받았다. 영수증을 며칠 전 경영팀에 제출하면서 새삼 내 입사일이 떠오르게 된 것. 다른 업계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업계는 생각보다 장기 근속을 채우기가 쉽지가 않다. 내 주변만 봐도 같은 회사를 3년 이상 다니는 경우도 드물다. 지금은 불황이라 프리랜서 계약직보다는 정규직으로 돌아선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프로젝트 단위로 일이 움직이다보니 이직률이 높은 것 같다. 어쨌든 지금쯤이면 진작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음은 지금의 어려운 시기 개인에겐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일을 그만두고 무슨 다른 일을 할래 물으면 딱히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펜션 주인을 할 것도 아니고 닭을 튀길 것도 아니고(사람을 대면으로 서비스업을 하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몇 년간 계속 하는 고민이다. 흠... 다들 이런 고민을 안고 살겠지.

생일에는 제부도에 가서 조개구이를 먹고 그 전에 근처에서 일몰을 보았다. 해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추운 날 몸 좀 녹인다고 잠깐 커피숍 들어가있는다는 게 뜸을 좀 들였는지 찰나에 내려가버리더라. 해수면에 구름이 끼어 있어서 해가 더 빨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몰 풍경이었다. 아! 조개구이 세트를 2~3인 기준으로 6만원에 팔더라.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상당히 저렴해서 놀랐다. 양이 그것만으로 충분했지만 석화찜도 먹고 싶어서 시켰더니만 결국 배불러 나는 거의 입을 대지 못했고 옆지기가 대부분 먹었다. 조개구이는 내가 많이 먹고 석화찜은 옆지기가 먹은 셈이니 비슷한건가?ㅋㅋ 그리고 생일 전 과메기를 먹으러 가자고 노래를 불렀더니만 온라인으로 미리 준비를 해놓았는지 생일 다음날 도착했다. 푸짐한 과메기 양에 곁들임 채소, 양념이 모두 있었는데 2만원이라니! 역시 맛있게 먹었다. 겨울철은 역시 조개구이와 석화찜, 과메기 3종 세트를 먹고 지나가야 겨울을 보낸 듯하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볼까.
11월 말과 이달에 걸쳐 여러 권의 책을 구입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펀딩한 책이다. 알라딘 북펀딩의 유혹은 생각보다 참 크다. 그래도 가능하면 기존에 가진 책은 가능하면 고민을 많이 하고 사는 편이다. 이번에도 삼국지 정사 펀딩과 메두사의 웃음은 건너뛰었다. 하지만 집에 없는 책이거나 초역이거나 하는 책은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해석에 반하여>는 손택의 저서 중 가지고 있지 않던 책이었고 <나의 일본미술순례 2>도 신간이지만 서경식 선생님의 일본미술순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구입했다(1권도 빨랑 읽어야지). <삼체 X: 관상지주>은 초반에 사지 않다가 작가가 인정한 삼체의 처음이자 마지막 버전이라고 해서 구입했다. <삼체 0: 구상섬전>도 펀딩해서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기대감을 갖고 있다.
이중 <해석에 반하여>은 완독했다. 100자평을 남겨야 북펀딩 마일리지를 받는다고 해도 읽지도 않고 소감을 남기기는 그래서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킨: 그래픽노블> 정가가 인하되었다는 메시지가 왔길래 구입했고(읽어보고 싶었다) 미술 관련 책들을 몇 권 구입했다. 한국미술사 관련 책은 얼마 전 읽고 리뷰를 남겼고 <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북>은 미술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더라. 서양 미술 중심이기는 하지만 동시대 동양 미술도 함께 소개해주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1938 타이완 여행기>는 리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완독했다. 제목이 일단 흥미로웠는데 일본 소설가와 타이완 번역가가 타이완에서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소설이다. 여행기라 재미도 있지만 인물 관계와 사건의 전개를 통해 그 시기 식민지인-피식민지인(지배-피지배) 이중적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어 더욱 좋았던 책이다.

12월 치고는 날이 따뜻한 것 같지만 내일-모레 비가 내리고 나면 또 추워진다고 한다. 요즘 날씨는 모 아니면 도여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연말이 되니 팀원들도 휴가를 많이 내서 빈자리가 많아 사무실이 썰렁하다. 물론 나도 곧 남은 휴가를 털어내고 연말을 마무리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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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12-2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도 이맘때 생일이신데 하고 있었는데... 즐겁게 보내셨군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

거리의화가 2025-12-23 13:06   좋아요 1 | URL
수하 님보다 며칠 앞섭니다^^ 챙겨주는 사람 덕분에 올해 생일도 즐겁게 보냈네요. 축하 인사 감사드려요.

잠자냥 2025-12-2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 양이 적으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5-12-23 13:07   좋아요 0 | URL
ㅎㅎㅎ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죠. 옆 쟁반에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북플은 멀티 사진 업로드가 가능한데 매번 제대로 올라가질 않아서 몇 개만 올리다보니... 개선해달라고 몇 번 푸념했던 것 같은데 고쳐지진 않네요^^;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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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내용(본질)이 아니라 스타일(형식)이다. 따라서 예술의 분석을 지양하고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1부의 ‘해석에 반하여‘와 ‘스타일에 관하여‘가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면, 2부에서 5부까지는 그 사례와 감상이다. 낯섦을 거부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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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의 창조적 단계는 그 생각이 경계를 고집스레 내세우며 여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시기다. 그런데 생각이 여타의 생각과 헐값에 타협을 추구한다면 거짓이 되고 힘을 잃는다.
현대의 진지함은 다양한 전통으로 존재한다. 이 경계를 지우고 이것도 종교적이라고 부른다면 지적으로 어떤 합당한 목적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961) - P364

예술의 초현실주의 전통은 기존의 의미를 파괴하고 극단적 병치(또는 ‘콜라주 원칙)로 새로운 의미 또는 반反의미를 창조하려는 개념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 로트레아몽의 말을 빌리면 아름다움이란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우연히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개념의 예술은 뚜렷한 공격성을 띤다. 관객의 상투적 기대에 대한 공격성이며무엇보다 매체 자체에 대한 공격성으로 움직인다. 초현실주의 감•성은 극단적 병치 기법을 통해 충격을 주려 한다. - P383

사람들은 대체로 감수성이나 취향을 순전히 주관적인 선호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주로 감각의 불가해한 끌림일 뿐 이성의 지배 아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본다. 취향이 사람이나예술 작품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고 인정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다. 취향의 기능을 봐주듯 경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경시하는 일이다. 취향은 모든 자유로운 (주입된 것이 아닌) 인간의 반응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취향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없다. 사람에 대한 취향, 시각적취향, 감정적 취향이 있을 뿐 아니라 행동에 대한 취향, 도덕성에대한 취향도 있다. 지성도 사실은 일종의 취향이다. 생각에 대한 취향. - P392

오늘날 예술은 의식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감수성을 조직하는 도구가 되었다. 예술을 실천하는 수단은 급진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뚜렷이 표현되었다기보다는 강하게 느껴지는) 새로운 기능에따라 예술가들은 자의식적인 미학자가 되어 자신이 사용하는 수단, 재료, 방식에 끝없이 도전해야 했다. 그래서 ‘예술‘의 세계에서(예를 들면 산업 기술, 상업적 프로세스와 이미지, 순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환상과 꿈에서) 가져온 새로운 재료와 방식을 정복하고활용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주된 과제가 된 듯하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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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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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육,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P487


어떤 책을 구입하자마자 정독으로 2회독 이상을 해본 것은 오랜만이다. 독서 모임 책으로 이 책을 11월에 샀다가 1회독을 했지만 뭔가 미진한 것 같았다. 모임이 12월로 미뤄졌길래 그참에 정독을 한 번 더 했다. 한 번 더 봤다고 해서 책을 잘 이해했느냐 물어보면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없겠지만 역시 1회독보다는 2회독이 훨씬 낫다는 것은 확실하다.


파시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나치즘(파시즘)과 대중을 선동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그들이 연출하는 의식적 행동은 당시 대중에게 감정적 수사로 작용하여 먹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행위는 과장된 연출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떡고물을 주었(기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파시즘은 어떤 사상, 이념과도 결합하여 유연성을 가졌기에 운동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설명보다 파시즘이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고 각 지역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추적하는데 집중한다.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공산주의 사이에 제3의 질서가 만들어질 공간이 생긴 것이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자유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 성립된 반자유주의, 이민 인구의 증가로 인한 내부 보수 세력의 결집, 그것을 이용하고 조장함으로써 성립된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배경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파시즘 정권에 반드시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파시즘 정권은 다양한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여러 과정을 통해 사회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나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자 상황)이 필요했다. 일단 대중이 정치에 전면으로 등장한 것,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기득권층이 위협을 받은 것, 좌파 내부에서 분열과 갈등이 벌어진 것이다. 파시즘은 무엇보다 근대성에서 발현된 갈등과 문제점을 현실에서 맞닥뜨린 군중이 대안적인 근대성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시점에서 나왔다고 본다. 어쨌든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전제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파시즘과 비슷한 형태의 상황은 나올 수 있어도 파시즘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렵다고.


파시즘은 1919년 3월 23일 밀라노에 모여든 군중이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파시즘의 기원이 되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구나... 그러니 나는 파시즘을 이데올로기와 구체적인 실현 형태와 섞어 놓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태가 두루뭉술하여 그 시작이 언제지 떠올릴 수 없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가 생각한 파시즘의 이미지는 초기가 아닌 후기의 급진화된 파시즘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념적인 접근으로 가볍게 시작했으나 사회적 상황과 구체적 현실에 따라 점점 더 과격해져 자리한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담아 정당을 만들었으나 초기에는 그 세력이 미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주아 정당과 결탁하는 선택을 감행했고 대중에게 가능한 이상적 현실을 보여주며 선택과 지지를 호소했다. 

파시즘 정당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뿌리내리는데 성공했으나 다른 곳에서는 실패했던 이유는 지도자의 자질도 있겠지만 사회적 위기가 얼마나 더 큰가, 또 동맹 세력의 선택지가 거의 없는 상황인가에 따라 달라졌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기득권 보수층은 왜 군대를 동원하여 폭력적인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데 나아가지 않았는가? 폭력을 선택했다면 대중과 노동자들, 지식인들의 반감에 의해 그들이 좌파의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급진파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변화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파시스트들은 혁명이란 단어를 언급하며 대중을 선동했지만 정작 사회경제적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족 강화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공동체에 귀속시켰다. 특히 젊은 세대를 육성하여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하는데 무척 애를 썼다. 모든 파시즘 정권은 국가주의를 강조하여 외국으로부터 자국 문화를 보호하고 통제하는데 주력하면서 문화를 통해 국민 단결 메시지를 내세우는데 주력했다. 파시즘 정권은 경제적으로 저축, 투자를 강조하고 개인의 소비를 줄이도록 설득했으나 대공황, 전후 유럽 경제의 성장률은 1차 대전 이전의 유럽 성장률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일부 국가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동원할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사실상 경제 개발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우위를 둔 것이 아닌가 한다. 파시즘 정권은 개인이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인권, 국제평화 등 전통적 헌법 수호 가치에 비추어 본다면 반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이야기했듯 파시즘이 마지막 급진화 단계에 이르면 자기 파괴(파멸)에 이르게 된다. 정권은 전 국민을 전쟁 수행을 위한 기계로 내던지게 하고 종국에는 민족과 국가마저 거부하는 단계에 이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조국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오늘날에도 파시즘이 있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1945년 후에는 파시즘이 막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70년대 세계적인 석유 파동, 나아가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사회적 위기는 특히 서유럽에 극우 정당이 들어설 수 계기가 마련되었다. 동유럽과 발칸 지역도 선회한 자유주의의 부작용과 영토 분쟁, 소수 민족과의 충돌로 인해 극우적 환경이 마련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자는 유럽이 시장 자유와 경제 개인주의에 대한 공격이나 시장 규제로 문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거나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등의 행위가 없기 때문에 극우정당들이 들어설 자리가 크지 않다고 보았다.

라틴 아메리카에도 파시즘과 비슷한 형태가 있으나 저자는 그들이 대중의 열광적 지지에 기반하지 않았고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할 만큼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독재 정권 또는 폭압 정치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은 천황제 파시즘 또는 위로부터의 파시즘으로 취사선택한 파시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전제 조건인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1920년대 벌인 관동 대학살 등에 참여한 일본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처럼 <파시즘>은 파시즘의 기원부터 바뀌어가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나라별로 다른 양상을 보였던 이유를 맥락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그려냈다. 

그렇지만 한계도 보였다. 나는 저자가 과거 파시즘의 배경을 독일과 이탈리아 등 너무 유럽 중심으로 본 것이 아닌가, 파시즘을 전제 정치, 독재 정치나 폭압 정치와 구분하면서 그 범위를 너무 한정적으로 좁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또 젠더적으로는 남성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여성은 보조적으로 그려지는 등의 아쉬움도 있었다.

이 책은 초판이 2004년에 씌여지고 2005년에 번역본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부동산 파산, 실업률의 급증 등의 경제적 위기(로 인한 계급적 갈등), 이민자 증가로 인한 사회적 문제(민족, 인종적 차별로 인한 대내외적 갈등) 등의 현 상황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생각과는 달리 현재 세계는 유럽도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올라 1,2당이 되기에 이르렀고 연일 MAGA를 부르짖으며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전 세계를 미국 질서에 맞게 다듬으려는 미국의 트럼프가 있다. 일본과 중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은 아니라 말할 수 있나. 


여러 모로 지금 이 혼란한 정국에 이 책을 읽다니 참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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