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어떻게든 알아내고자 하는 이 그칠 줄 모르는 열정, 이 숭고한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우리 흉악한 종족이 가진 몇 안 되는 근사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 P211

철기시대는 철이 발견됨과 동시에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과 노동에 힘입어 금속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변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 P226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는 연륜이 적어도 6000년에 이른다. 그런데 그 절반에해당하는 3000년 동안 인간 활동의 중심 무대가 된 곳이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지식의 한계에 의하면 바로 근동이었다. 근동이라는 이 모호한 용어는 이책에선 러시아와 북해 남쪽의 아시아 남서부,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서부 지역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것이다. 이 용어를 보다 넓게 사용한다면 이집트역시 근동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는 이집트도 동방 문명이라는 복잡하고 거대한 교류의 틀 속에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 P239

점토판이 등장한 건 기원전3200년 무렵으로, 수메르인들은 이때부터 죽이 위대한 발견을 커다란 낙으로삼은 듯하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썩어 없어지는 종이와 빛이 바래 버리는 잉크 대신, 쐐기 모양의 날카로운 필기도구와 무르고 축축한 점토를이용한 것은 우리로선 천만다행이다. 필경사는 이 말랑말랑한 물질을 갖고 기록을 남기고, 계약을 맺고, 공식 문서를 작성하고, 재산 내역과 판결문과 판매내용을 기록하면서, 필기구가 칼만큼이나 막강한 힘을 갖는 문화를 이룩해 냈다. 필경사는 글을 다 쓰면 점토판을 불이나 햇빛을 이용해 구웠는데, 이로써종이보다 내구성이 훨씬 좋은 사본이 만들어졌다. 돌을 제외하면 이보다 더 내구성 좋은 물건은 없었다. 수메르는 이렇게 쐐기 문자로 글을 써내면서 인류가문명을 이루는 데 더없이 훌륭한 기여를 해 주었다. - P259

현재 우리가 아는한, 최초의 국가 및 제국, 최초의 관개 시설이 나타난 곳이 수메르였다. 또 금과은을 처음으로 가치 척도로 사용한 곳도, 상업 계약이 처음 맺어진 곳도, 신용거래 체제가 처음 이용된 곳도, 법전을 처음 펴낸 곳도, 글이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발전한 곳도, ‘창조‘와 ‘대홍수‘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온 곳도 수메르였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도서관과 학교, 최초의 문학 작품과 시, 최초의 화장품과 보석, 최초의 조각과 얕은 돋을새김 기법, 최초의 궁전과 신전, 최초의 장식용 금속 및 장식 주제(主題), 최초의 아치, 기둥, 둥근 천장, 돔도 수메르에서 등장했다. 한편 노예 제도, 전제 정치, 종교 지상주의, 제국주의적 정복 전쟁 등문명의 죄악 몇 가지도 처음으로 자행되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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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wn as we were on opposite sides of a faultline-generational, cultural, linguistic-we wandered lost withouta reference point, each of us unintelligible to the other‘s expecta-tions, until these past few years when we had just begun to unlockthe mystery, carve the psychic space to accommodate each other,
appreciate the differences between us, linger in our refracted com-monalities.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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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뜻대로나갔다면 세상에 국가가 존재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었을지 모른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인간은 국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세금을 죽음과 같이 생각하며 최소한으로 통치하는 정부를 갈망한다. 인간이 여러 가지 법을 요구할 때가 있어도그건 단지 이웃들이 그런 법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으 - P111

로는 자신을 대범한 무정부주의자로 여기고, 자기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112

국가는 권력과 법이라는 촉수를 점점 더 광대한 지역으로 뻗어 나갔고, 외부적으론 유례없이 파괴적인 전쟁을 벌였지만 내부적으론 평화를 증진시키고 또 유지해 나갔다. 그런점에서 국가를 외부 전쟁에 대비해 내부 평화가 유지되는 상태로 정의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서로 간에 싸우느니 세금을 내는 편이 낫다고, 도둑들 모두에게 공물을 갖다 바치느니 덩치 큰 도적 하나에게 공물을 한 번 바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117

윤리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므로 가치가 없다고, 따라서 우리가 속한 집단의 윤리적 관습을 당장에 내던져 역사를 좀 안다고 과시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짧은 인류학 지식은 위험하다. - P148

애초에는 무언지 잘 알 수도 없고 형체도 없는 영혼을 두려워하고 숭배했던 사람들은 천체와 초목 그리고 성교에 깃든 힘을 동경하더니, 나아가 동물을 경외하다가, 종국엔 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아버지 하느님‘이란 개념도 조상숭배에 그 연원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 말은 인간이 신의 자손임을 뜻했다는이야기다. 원시 신학에서는 신과 인간을 명확히 가르지 않는다. - P171

이른바 보통 명사라 불리는 그 이상한 소음이 없었다면 인간의 사고는 개별 사물과 감각적 기억 및 경험 (대개가 시각적 경험)에 국한되고말았을 것이다. 종류를 개별 사물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못해, 사물의공통된 특성을 따지지도, 공통된 특징으로 사물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종류를 나타내는 일반 명사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하는식으로만 생각하지, 일반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사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 눈은 구체적인 사람들만 보지 사람의 일반적인 개념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83

사냥과 어로, 목축과 경작, 운송과 건축, 산업과 상업 및 재무 등우리가 현대 사회를 살아갈 때 필요한 경제생활의 모든 양식이 다 만들어져 있었고, 씨족, 가족, 촌락 공동체, 부족 등 국가보다 단순한 정치 구조는 모두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문명의 두 회전축인 자유와 질서가 처음으로 타협점을 찾아 화해하면서 법과 정의가 실현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훈육하고, 성생활에 제재를 가하고, 명예와 품위, 예절과 충성심을 가르치는 등 윤리 의식이 자리 잡기 위한 주춧돌도 다 마련되어 있었다. 종교의 토대도 깔려 있어서, 종교가 불러일으키는 희망과 공포가 윤리 의식을 고취하고, 집단을 결속시키는 힘이 되었다. 말은 복잡한 언어로 발전해 나갔고, 약과 수술이등장했으며, 과학, 문학, 예술의 첫걸음도 미약하게나마 시작되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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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승전기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 지음, 이주연 옮김 / 사계절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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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이어 또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던 곳이 티무르다.
작년 말 출간 이후 추천 도서로 계속 있었는데 꼭 읽어야 하나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시간을 보내다 지금까지 왔다.
결론적으로 몽골에 대한 역사는 관련 전문서와 교양서 등을 읽었지만 티무르 제국은 관련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역사 중 한 부분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럴 땐 역시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다.

이 책은 티무르 제국을 연 사힙키란 티무르에 대한 승전기다. 티무르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이어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고 티무르는 이를 연 사람인 만큼 세계정복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과연 이 타이틀의 인식은 올바른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 몇 년동안 몽골 제국의 사서를 읽으면서 서구 제국이 주입한 그들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복자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통합을 위해 기울인 여러 노력들은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티무르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정복자‘라는 인식은 티무르 사후 근세 내내 오스만을 이웃으로 두어야 했던 유럽의 애환이 투영된 것이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세계정복자와는 절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티무르 르네상스‘란 개념은, 티무르제국 시기에 발전한 문화와 예술, 학문과 지식이 이슬람 문화 부흥의 시발점이 되어 이후 여러 이슬람권 근세 제국의 문화적 발전의 기틀이자 모범이 되었음을 설명한다. 물론 이 관념 또한 유럽의 르네상스에 대한 비서구권의 비교군으로 등장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P6~7

티무르 자신이 사서 작성을 명하여 완성된 사서 중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사서는 니잠 앗딘 샤미의 『승전기』(1404)이다. 티무르는 샤미에게 자신의 뜻과 가신들의 행동 중에 ‘(신의) 영원한 행운‘이 드러나는 바를 기록하되,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샤미의 『승전기』를 저본 삼아 완성된 야즈디의 『승전기』(이 책의 저본)는 개별 사건 및 일화들, 그리고 사건들의 전개 과정은 그대로 이용했으나, 사힙키란이라는 특수한 정통성을 보다 더 정교하게 덧붙였다.
여기서 사힙키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사힙키란은 본래 페르시아 문학에서 ‘세계정복자‘인 주인공에게 붙는 별호였으며 그 기원은 이슬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에서 사힙키란으로 불린 아미르 함자는 성스러운 행성 간의 합이 일어난 날 태어나, 용기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여 이슬람을 널리 확산시키고 피지배민들에게도 정의를 실천한 관대한 인물로 묘사된다. 13세기가 되자 이 칭호는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사서 속의 실제 인물, 군주의 별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 P331
티무르조가 성립된 14세기 후반은 ‘칼리프가 임명한 군주‘라는 이슬람적 정통성이나, ‘황금씨족의 후손‘이라는 몽골제국의 정통성이 모두 쇠퇴하는 시점이다. 이때 칭기스 일족도 아니고 칼리프에게 승인받을 수도 없었던 티무르가 내세운 새로운 유형의 정통성이 ‘사힙키란‘이었다.

역자는 이 책의 내용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및 여섯 장으로 분류했다. 원문은 336장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라서 저자가 한 편의적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는 본격적으로 역사적 사실이 전개되기 전 상황에 대한 설명과 티무르의 탄생, 『승전기』의 특징 등에 대한 개괄을 다루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티무르의 본 원정기의 내용이고 에필로그는 티무르 사후 후계자들이 사마르칸트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티무르는 어떻게 제국의 서막을 열 수 있었을까. 14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의 서부 오아시스 지대에서 몽골제국 차가타이울루스가 쇠퇴하며 혼란이 발생했다. 차가타이울루스가 강성했을 때는 울루스에 예속되어 투만(만호군), 하자라(천호군)를 이끌던 여러 부족 및 군사 집단의 아미르(장군)들이, 칸에게 사여받은 이크타(영지)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1370년 아미르 티무르가 중앙아시아 서부의 마와라안나흐르 일대를 통일했다.
티무르는 마와라안나흐르를 통일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하나씩 공격하며 자신의 세력 하에 만들어나간다. 1386년에는 3년 간 이란 서부를 공격하여 그 지역을 복속시켰고 1391년 무렵 이란 남서부와 이라크, 캅카스를 넘어 5년 원정을 이어나간다. 티무르는 5년 원정 전후로 여러 자손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맡기고 1398년부터는 인도 원정을 시작했다. 1400년 무렵에는 이슬람권 왕좌를 거머쥐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뒤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점령하고 발칸반도까지 진출하여 조지아를 복속시켰다.
여러 원정 기록이 그러했지만 특히 인도 원정,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 원정은 놀라웠다. 특히 인더스강은 징기스 칸도 건너지 못한 곳이었다는데 사힙키란은 그곳에 다리를 세우고 강을 건너 병영을 세워 지역 수장을 복속시켰다.

사힙키란은 능력이 있는 복속할 만한 이나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에게 힘을 쥐어주고 적어도 그가 배신하기 전까지는 믿음을 견지했다. 그러다 반복적으로 배신을 하는 경우 가차 없이 내치는데 그런 인물 중 대표적으로 톡타미쉬 칸이 있다. 톡타미쉬 칸이 적에게 쫓겨서 사힙키란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사힙키란은 그를 자녀로 삼고 많은 군대와 물자를 주어 주치울루스의 왕좌를 차지하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톡타미쉬 칸은 사힙키란이 이란 원정을 진행 중 여러 번이나 군대를 파견하여 영토를 파괴했던 것이다. 사힙키란은 그의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며 더는 교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복 지역과 주민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호의와 관용을 베풀었다. 초반에 마와라안나흐르를 중심으로 한 울루스를 복속시키는 동안에는 조금 경직된 면모를 보였다면 제국이 확장되고 안정되어갈수록 관용성을 보였다. 예를 들어 사힙키란은 사바의 셰이흐를 서신 및 선물과 함께 맘루크의 술탄인 말릭 알자히르 바르쿡에게 파견했다. 서신의 내용은 이와 같다. ˝과거 칭기스 칸 계보의 왕들과 그대 왕국 왕들의 전쟁으로 시리아와 주변 백성이 고통을 겪었으나, 양측의 타협으로 세계가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이 사망한 후 이란의 칭기스 칸 계보에 강력한 왕이 남지 않아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현재 내가 신의 도움으로 이란과 이라키 아랍을 점령했으니, 양국이 이웃이 되어 통로를 열고 서신과 사신, 상인이 왕래하면 번영을 이룰 것이다.˝ - P157

반면 정복자임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모습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복 지역을 약탈하고 군대를 점령한 후 지역 주민을 모두 살해하여 언덕을 쌓고 머리를 잘라서 두개골 첨탑(미나렛)을 세운 것이다.
티무르만 그러지 않았겠지만 이런 모습은 그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증거이지만 정복 대상에게 복속하지 않으면 비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로서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초반에 역자가 말하길 티무르의 세계정복자적 면모와 함께 (문화적으로) 티무르 르네상스라는 면모가 있다고 밝혔는데 사실 승전기 기록만으로는 개인적으로 지역의 문화를 수용한(이슬람 문화의 확대) 측면을 찾기란 어려웠다. 돔을 건설하고 종교인, 장인, 의사 등 전문직업인을 사마르칸트로 데려가는 모습 정도가 있을까.

또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 않다(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종교적 관용성을 보여준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힙키란이 인도 원정을 떠난 것도 이교도들을 상대로 성전을 치르겠다는 명분이었다. 이후 키타이 원정을 하기로 결심한 것도 우상 숭배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 것이다. 조지아 지역 등에서 주로 믿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이슬람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강요한 모습이 엿보인다.

사힙키란은 자신이 사망할 때가 되자 피르 무함마드 이븐 자항기르를 자신의 대리인이자 후계자로 삼으라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지도하여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가 되지 않게 해달라 명했다. 자손들에게는 백성을 경시하지 말고, 이란과 투란을 적과 반란 세력에게서 지켜내며, 서로 적대심을 갖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수도인 사마르칸트의 왕위를 계승한 아미르자다 할릴 술탄은 창고 문을 열어 아미르와 정부의 중진과 군사들에게 사여를 베풀었는데, 경제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금액을 남발하여 통치한 지 4년 만에 모든 창고가 텅 비어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정부의 중진들을 멀리하고 외부인을 가까이하는 바람에 결국 백성과 군대에 신뢰를 잃고 말았다.

티무르의 역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이 책은 티무르 제국을 연 사힙키란의 영웅기이자 원정기를 담고 있다. 역자는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역사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의 박사 논문을 교양서로 낸 버전이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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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1-1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과는 좀 관계가 없지만 티무르라는 인물을 보니까 예전 생각이 나네요.

2008년에 어쩌다 회사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출장갔는데,
그때도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이 떠받들던 인물이었죠.
타슈겐트와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전국 어딜 가나 티무르가 빠지는 곳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독재자 소리를 듣던 대통령이 티무르를 신격화에 가까울 정도로 강조하면서
반공개적으로 자신을 그 후계자인 것처럼 선전하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어느 시대, 어느 국가나 정치에서 영웅을 소비하는 방식은 비슷한가 봅니다.
 

It used to be so clear to me, the difference between living anddying. My mother and I had always agreed that we‘d rather endour lives than live on as vegetables. But now that we had to con-front it, the shreds of physical autonomy torn more ragged everyday, the divide had blurred. She was bedridden, unable to walkon her own, her bowels no longer moving. She ate through a bag dripped through her arm and now she could no longer breathe without a machine. It was getting harder every day to say that this was really living.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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