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웃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을 선물해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읽던 중 시간 時間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이번 페이퍼에서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 봅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크로노스 Chronos"와  "카이로스 Kairos"가 바로 그 것이지요.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녀를 다 먹어 치웠던 원시 시대의 신神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크로노스"는 우리를 집어삼키는 시간, 곧 우리가 쫓기듯 보내는 시간, 이런저런 일을 더 빨리 처리하도록 재촉받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촉하다"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헷첸 hetzen"은 "미워하다"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하센 hassen"에서 왔습니다. 이런저런 일을 기한 내에 처리하도록 자신을 재촉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행위로, "크로노스"는 곧 자기 증오의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쾌한 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가 있습니다.(p76)... 다른 한 편으로, "카이로스"는 "꼭 알맞은 순간"을 뜻합니다.  카이로스는 앞머리에 머리카락이 풍성하기에 제때라면 쉽게 붙잡을 수 있지만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기에 지나간 뒤에는 잡을 수가 없지요. 이 비유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기회를 제 때 잡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 했습니다.(p78)


 여기에 다른 책에 나타난 시간에 대한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사진] 크로노스 (출처 : https://www.1st-art-gallery.com/Franz-Ignaz-Gunther/Franz-Ignaz-Gunther-oil-paintings.html)


[사진] 카이로스(출처 : 중앙시사매거진)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의 저자 안셀름 그륀(Anselm Grun, 1945 ~ )신부는 크로노스를 '증오의 시간'으로, 카이로스를 '유쾌한 시간'으로 해석한 반면,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의 저자 김승중(金承中) 교수는 크로노스를 '객관적인 시간'으로, 카이로스를 '주관적인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같은 듯 조금은 다른 시간에 대한 관점이지만, 두 저자 모두 카이로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시간을 "카이로스"로 경험할지 "크로노스"로 경험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전적으로 현존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 곧 유쾌한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압박할 때는 "크로노스" 곧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편한 시간을 경험하지요.(p78)... 지금 이 순간에 전적으로 현존함은 시간을 "카이로스"로 경험하기 위한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전제 조건으로 "건강한 생활  리듬"과 "유익한 의식儀式"을 들 수 있습니다.(p79)'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운에 따라 생겨난다. 기회가 생길 때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하고, 그에 따라 승부가 판결난다는 것이다. 운이 없으면 기회가 안 생기고, 기회가 생겨도 잡지 않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튀케 tyche(운명, 행운 good luck)가 인간의 힘으로는 조정할 수 없는 우연적 현상이라면, 카이로스는 반대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을 상징한다. 즉 오직 카이로스만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결정권을 부여한다.(p43)'


 카이로스를 '기회', '꼭 알맞은 순간' 또는 '유쾌한 시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 삶이 기회 幾回 의 계속이고, 이에 대한 선택이 유쾌한 경험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작 우리들 자신은 미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매 순간의 경험이 유쾌한 경험이 아닌 힘든 경험으로 다가오기는 합니다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17년도 불과 열흘 정도  남겨두고 있는 2017년 12월 19일입니다. 일년 전에 아무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2017년 12월 20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치뤄야 했을 것입니다. 2017년 12월 20일을 '아무 일도 없던 일'로 만든 것은 우리가 '카이로스'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일년 전의 선택이 바로 지금의 시간을 바꿨다고 볼 때  카이로스는 우리 삶의 크로노스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어주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2017년이라는 크로노스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아쉬움을 주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 해야할 일을 하면서, 현존 現存을 통해 카이로스를 붙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17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을 통해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기에 맞춰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이웃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PS. 그리고, 지금 제 카이로스는 늦은 밥을 먹을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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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선거일’이었다면 몇 달 동안 선거 전쟁 때문에 엄청 시끌벅적했을 거예요. 조기 선거가 치러지길 잘했어요. 이번 연말은 차분하게 지낼 수 있게 됐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12-20 14:40   좋아요 1 | URL
네 ^^: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정권교체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페크pek0501 2017-12-20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력 2017년 12월 20일에 빨간 색으로 되어 있는 걸 보고 가짜 정보를 주는 달력이 되었도다, 그랬어요. ㅋ

겨울호랑이 2017-12-20 14:41   좋아요 0 | URL
^^: 이런 가짜 정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2017-12-21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이예요

진정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이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아이를 위해 가습기를 틀었던 어머니, 작은 상자 속 아기를 떠나 보낸 부모들, 아찔한 곳에 올라가 작업하던 아버지를 배웅한 가족들.

그리고.. 그 배에 올랐던 사람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남겨진 모두가 너무나 절실하게 바랐고, 또한 너무나 참담하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이 말은 그래서 누구나 함부로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12-21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오늘의 사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참으로 억울한 모든 이들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쯤은 주시기를..

겨울호랑이 2017-12-21 17:02   좋아요 1 | URL
어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못봤는데, 나와같다면님 말씀을 듣고 동영상을 보니 제 글의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네요... 탄핵 결정 전 인쇄된 이전 달력을 통해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풀어질 수 있다라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치심을 미덕(美德)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수치심은 마음가짐보다는 감정과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치심은 불명예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으로 정의되며, 그 효력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유발되는 것과 흡사하다.... 사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특징은 아니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느끼는 것이 수치심이라면 그전에 나쁜 짓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한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하찮은 사람의 특징이다. 하찮은 사람은 수치스러운 짓을 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마음가짐이라고 해서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1128b 10 ~ 28)'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 ~ BC 322)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ka Nikomacheia>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치는 하찮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感情)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훌륭한 사람은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그런 행동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치는 '부정적 감정'의 하나일 뿐이다. 


이에 반해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중국의 맹자(孟子, BC372? ~ BC289?)는 사단(四端) 중 하나에서 부끄러움을 언급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상반된 주장을 편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측은지심(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無羞惡之心 非人也 수오지심(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辭讓之心 非人也 사양지심(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是非之心 非人也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羞는 恥己不善也요, 惡는 憎人之不善也라.  羞는 자신의 不善을 부끄러워함이요, 惡은 남의 不善을 미워하는 것이다.' 주희(朱熹, AD 1130 ~ 1200) <맹자집주 孟子集註> 公孫丑上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상반된 의견에 대해 미셸 퓌에슈(Michel Puech) 교수는 수치심을 두 사람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심 자체는 고통스러운 감정이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감정 자체보다 그 의미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수치심은 강렬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일 수 있다. 다른 모든 고통과 마찬가지로, 수치심  또한 그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거기서 해방될 수 있다.(p11)'


 미셸 퓌에슈 교수는 <수치심 La honte>에서 수치심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수치심을 신호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감정만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울 일이 있다고 해도, 정말 어려운 일은 남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수치심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자기 안의 수치심을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데, 수치심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일도 좀 수월해질 것이다.(p21)


 '수치심이 일종의 고통이라면, 이 감정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닐까? 고통을 신호로 보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자연계에서도 통증이라는 신체적 고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경고 신호이기 때문이다.(p74)'


 '수치심이란 일종의 실망감이다. 실망감이란 살다보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고, 그러니 담담한 마음으로, 지나치게 호들갑떨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구나 매일 조금씩 실망하고,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실망들은 오히려 삶의 자극제, 자신이 바라는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p78)'


 단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서 우리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거울로서 수치심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 1875)의 유명한 동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저 멋진 새들에게 날아갈 테야. 그럼 나처럼 못생긴 새가 감히 가까이 왔다고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오리들에게 쪼이고 닭들에게 맞고 모이 주는 처녀에게 발로 채이고 겨울에 굶주려 죽는 것보다 차라리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 못생긴 새끼 오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 아름다운 백조들을 향해 헤엄쳐 갔다... 가엾은 못생긴 새끼 오리는 서글프게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맑은 물 위에 비친 모습은 못생기고 볼품없는 진회색의 오리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백조가 아닌가! 애초부터 그의 참모습은 백조였기 때문에 오리에게서 태어난 것쯤은 아무런 허물도 아니었다.(p254)' <안데르센 동화전집> 中 <못 생긴 새끼 오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개를 숙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못 생긴 오리는 결코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임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 면에서 '수치심'을 유발한 작용인(作用因)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보다는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미셸 퓌에슈 교수의 말이 더 의미있게 다가오게 된다.



[사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출처 : 위키백과)


 <수치심>의 연장선상에서 지난 1996년 11월 13일에 최종적으로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당시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일제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여론의 힘에 의해 결국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철거와 관련해서 당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거를 주장하는 편에서는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 모양의 건물 구조와 나라의 혈(穴)을 끊어 놓기 위해 설치된 기초 말뚝 등의 문제등을 제기하였고, 철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역사도 역사다.'라는 주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조선 총독부 건물을 과연 철거했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그곳에 과연 조선 총독부 건물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자리를 옮겨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상기시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조선 총독부 건물을 없애서 가장 득을 본 이들은 친일 세력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는 총독부 건물을 없애면서 우리의 수치심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 청사 철거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 잔재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수치심> 페이퍼를 마친다.


[깊이 읽기]  수치(羞恥, 부끄럼) [scham(독) honte(불) shame(영)]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는 일본의 문화와 서구의 문화를 비교하여 전자를 부끄럼의 문화, 후자를 죄의 문화로 파악했다... <수치와 수치 감정에 대하여>[SGW 10.65ff]에서 셀러는 이 현상을 인간의 독특한 실존양식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셀러(Max Scheler, 1874 ~ 1928)에 의하면 신체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 ~ 1980)는 <존재와 무>제3부 '대타존재'에서 타자와의 연관에서 수치를 다루는데, 수치란 타자 앞에서의 자기에 대한 수치라고 주장한다. 


PS. 모 정치인이 자신이 국정원 돈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고 밝혔는데, 그의 말 속에서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 ~ 1970)가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듯 하다. (다만, 할복명분의 스케일이 상당히 차이나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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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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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라 2017-11-19 14: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치심을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인가요? 하지만 애초에 수치스러울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네요.

겨울호랑이 2017-11-19 19:28   좋아요 3 | URL
^^: 네 저도 이하라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평소에는 수치스러움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항상 유념해야겠지요. 다만, 그런 행동을 한 후에는 수치스러움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기 보다 이를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17-11-19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미셸 퓌에슈 교수의 <수치심 La honte>을 저에게 필요한 적절한 시기에 잘 읽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속에 제일 많이 들린 소리는..
사도 바울의 ˝ I‘m not ashamed ..˝ 였어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겨울호랑이 2017-11-19 22:20   좋아요 3 | URL
^^: 미셸 퓌에슈 교수가 일상의 행위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이 시리즈는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책들이라 생각됩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끄러움 역시 일상의 일부인 것 같아요. 부끄러움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는 책 속의 말을 통해 작은 격려를 받게 됩니다. 나와같다면님께서도 아마 같은 느낌 받으신 것 같네요...^^:

2017-11-20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0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1-20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정치인 중에 할복 근처에 간 자도 없다는, 커터칼로 살짝 긁은 1인이 있었다나 뭐라나 김어준 어록이...

겨울호랑이 2017-11-20 13:50   좋아요 1 | URL
사람이 죽어서는 안되겠지만,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이들을 보면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라쇼몽>에 나오는 사무라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는 이들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솔로몬 탈무드 (케이스 포함) - 유대 5000년 최고의 예지 총서
이희영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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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 탈무드>는 제목과는 달리 솔로몬(Solomon, BC 971 ~ BC 931)왕과는 큰 관계가 없는 책이다. 탈무드 문헌 자체가 방대하다보니, 한 권 안에 모든 내용을 담는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작업이다. 저자 역시 이러한 점을 인정하고 <솔로몬 탈무드>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솔로몬 탈무드>는 방대한 탈무드의 내용보다는 탈무드의 배경 지식 중심으로 책을 구성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과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용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깊이 있는 삶의 지혜를 느끼기 위해서라면 큰 도움이 되지 못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많은 내용이 유대 문헌의 특징, 성공한 유대인 사례, 유대인의 인생철학, 유대인 교육 방법 등을 다루기에 자기계발서 / 비즈니스 경영서적의 분위기를 많이 느끼게 된다. 때문에, 페이지는 1,000여쪽에 이르지만 크게 어려운 내용이 없어 쉽게 읽을 수 있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와 닿는 부분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차이점을 설명한 부분이다.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많은 자기 계발서와 신앙서적들 중 상당수가 탈무드의 구절을 출전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구약성경(토라)의 내용이 공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 사상에 익숙한 우리가 <탈무드>를 쓴 유대인의 관점에서 <탈무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물음을 해본 적도, 이에 대답을 한 적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솔로몬 탈무드>에서는 삶에 대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차이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구약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슬람 문헌도 언급 될만하지만 아직까지 이슬람의 <꾸란>의 내용을 가져온 서적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솔로몬 탈무드>에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의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자 제임스 파크스 박사는 이 점에 대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대비시켜 이렇게 썼다. "유대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나의 창조계획을 성취해라'고 명하고, 인간은 "예"라고 대답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은 하느님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의 창조과업을 성취해 주십시오. 어리석고 죄 많은 우리들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리고 하느님은 "그래, 그렇게 하지"라고 대답하신다"는 것이다.(p499)'


 그리고, 이러한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차이는 마사다의 청년 다윗 이야기에서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전에 먼저 마사다(Masada) 항쟁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사진] 마사다 (출처 : 위키백과)

사다(히브리어 מצדה, , 요새라는 뜻)는 이스라엘 남쪽,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를 말한다. AD 73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인 저항군이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에 하나이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AD 73에 드디어 공성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자 로마군은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일부를 깨뜨리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창고를 제외한 요새안의 모든 건물이 방화로 불에 탔고 엄청난 수의 자살한 시체들만 즐비했다... 다른 건물을 모두 불에 태우면서도 식량창고만은 남긴 것은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없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여자 두 명과 다섯 명의 아이들뿐이며 로마군은 그 무서운 자살 광경에 겁을 먹고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야훼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야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에게는 끝까지 선택의 여지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지만, 똑같은 모양으로 죽을 필요는 없다. 더구나 짐승처럼 죽어서야 되겠는가? 야훼가 우리를 불행에 떨어뜨렸지만, 우리를 타락시킨 것은 아니었다.(p517)..."우리는 우리를, 아내와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 소중한 것은 목숨이 아니다. 영혼이다. 야훼는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다. 만일 아내와 아이들을 노예로 만드는 길을 택한다면, 야훼가 주신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 되고 만다.(p518) -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 AD 37 ~ 100) 의 <유대전기> 중 -'

 마사다 항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기독교와 같은 경전(<구약성경>)을 공유하지만, 사상이 다른 이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문헌에 나타난 글에 묘사된 신(神)에 대한 태도는 보다 적극적이며, 주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음에 언급된 기독교의 황금률 (黃金律,Golden Rule)인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에 대한 유대교적 해석 등은 우리에게 기독교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준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부정 형식으로 말햇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정형 표현이었다고 하는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정형으로 하기 위한 이유가 2가지 있다. 첫째 이유는 본디 부정 표현을 좋아하는 것이 유대인의 경향이라는 점이다. 토라의 중심에 있는 10계명(출애굽기 20장 2 ~17절)을 보면 그 중의 셋이 긍정형, 나머지 일곱이 부정형으로 씌여져 있다. 특히 대인 관계에 관한 조문(6~ 10계)은 모두 부정문이다. 또 구약 외전(外典)인 <토비트>에는 인용구와 똑같은 내용으로 부정형 표현을 볼 수 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p223)'


 다만, 아쉽게도 책의 깊이면에서 <솔로몬 탈무드> 전체에서 보다 깊이 있는 차이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내용의 전개면에서 단순히 '유대인은 어떻다'라는 유대인의 특성을 전후 연관없이 나열하고 있는 점이 한계로 느껴진다. 이런 면에서 <솔로몬의 탈무드>는 유대인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기 계발서로서는 어느 정도 내용이 있지만,  '솔로몬'과 '탈무드'라는 말 속에서 보다 심오한 의미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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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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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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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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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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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7: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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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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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1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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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1 0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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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1 0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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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1 0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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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그것들이 결합해야만 인식이 일어날 수 있다.' - 임마누엘 칸트 -


 '칸트를 가리켜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고 종합한 철학자라 일컫는 것은, 그가 인식의 형식(또는 능력)은 본래부터 갖고 있지만 인식의 내용(또는 재료)은 경험으로 얻을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재료(내용)으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 능력(형식)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p171)'


 이번에 백종현 교수의 칸트의 3비판서 특강을 듣게 되었습니다.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의 3대 비판서를 중심으로 칸트의 핵심주제에 대한 강의를 우리나라 칸트 철학의 대가이신 백종현 교수께서 직접 강의를 하시기에 청강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순수이성 비판> , <실천이성 비판>은 특강은 마무리 되었고, <판단력 비판>만 남은 시점입니다. 종강을 향해 가는 지금 간단하게라도 이번 페이퍼를 통해 정리를 해보려 합니다. 칸트 철학을 처음 접했기에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은 페이퍼이지만, 개인적인 발제라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순수이성 비판>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를 내용 정리를 통해 생각해봤습니다.


 '칸트는 과학적 방법의 본질과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다. 그는 이 방법이 물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를 "과학이라는 탄탄대로에 올려놓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탐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왜 우리의 세계 경험에 과학적 방법이 통할까?"(p168)'


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

 

칸트는 먼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대한 접근을 시작한다. 과거에 학문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형이상학이 논쟁의 장(場)이 된 것은 과학적 방법이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비판한다.


'칸트는 기존 형이상학에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영혼, 자유, 신의 존재에 관하여 다루는 형이상학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확정시켜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칸트는 형이상학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은 형이상학에는 과학처럼 확실한 방법이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p123)'


나. 칸트의 초월철학


  '칸트는 지식을 둘로 나누었다. 하나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 감성에서 얻어지는 '직관'이고, 다른 하나는 오성에서 간접적으로 비롯하는 '개념'이다. 이런 지식(감성, 오성)의 일부는 경험적 증거에서 비롯하는 반면, 일부는 선험적으로 알려져 있다. 칸트에게 개념이란 일반적 '책'의 개념처럼 사물들을 어떤 사물 유형의 예로서 간접적으로 인식한다. 개념이 없으면 우리는 직관의 대상이 책이라는 점을 알지 못할 것이고, 직관이 없으면 우리는 여기 책이 존재한다는 점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P168)' : <철학의 책>


  칸트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우리는 '직관'과 '오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수학이나 자연과학 등과는 달리 영혼, 자유, 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성의 한계) 인간은 '감각적 직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게 된다. 칸트에게 문제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에게 있다. 


 '칸트는 사유 능력 주체인 이성 자신의 능력을 비판하지 않고 이성(理性)을 월권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독단론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와 같은 독단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이 모든 경험에서 독립하여 이르고자 하는 모든 인식과 관련하여 행하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비판적 탐구"를 엄정하게 수행해야 한다... 칸트가 이성을 비판하는 것은 정신적 실체로서의 이성의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순수한 조건들에 관해서 탐구하기 위한 것이며, 이와 같은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칸트에게는 초월철학이 된다.(p124)'


 '칸트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경우와 관련하여 학문 일반의 자격 조건을 사실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권리적 차원에서 마련하고자 하며, 바로 이 작업을 "초월적 분석론"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와 관련하여 그는 초재적 존재인 영혼, 자유, 신과 같은 것들에 관한 이론적 학문을 구축하는 것은 부당함을 밝히고자 하며, 바로 이 작업을 "초월적 변증론"에서 다루고 있다... 칸트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사변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아가 실천이성의 정당한 길을 제대로 열어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비판철학을 통하여 자연형이상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p127)'


  '칸트는 인식의 소재가 "경험"에서 나와야 하고, "인식이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과 함께 시작되어야 하기"때문에 사유 작용만으로는 인식이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의 모든 인식의 객관성은 경험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칸트가 보기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생각과 존재를 곧 바로 일치시킬 수 있는 지적 직관이 가능하지 않고 단지 감각적 직관만이 가능하다.(p128)'


다. 형이상학과 선험적 형식


 영혼, 자유, 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해 인간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반면,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우리는 이들로부터 보편성과 필연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칸트는 탐구과정에서 특수 형이상학의 영역이 이론적 인식의 학문이 되는 것을 배격했다.  즉  그는 특수형이상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영혼, 자유, 신이라고 하는 대상에 관한 인식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주장은 모두 허구를 유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칸트는 형이상학을 "소질로서의 형이상학"과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누구나 초월적 존재인 신이나 영혼 그리고 내세 같은 것에 대한 지식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간이성에게 자연스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되고자 할 때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p126)'


 '칸트는 인식의 문제에서 방법론적으로 일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대상 중심의 인식을 주체 중심의 인식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대상에서 아무리 끌어 모아도 학문이 갖추어야 할 보편성과 필연성은 나올 수 없다... 수학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칸트는 당대의 제반 과학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해명하고, 그러한 작업에서 인식 주체 안에 이런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 형식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정립하고자 했다.(p129)'


라. 감각적 직관과 두 개의 세계 : 세계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우리의 육체이고, 하나는 외부의 세계다


 우리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주어진 현상을 단지 '사유', '감각적'으로 받아 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사유된 세계'를 '주어진 세계'로 동일시 했을 때 허구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철학이 칸트의 초월철학의 내용이 된다.


 '칸트에 따르면 대상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전제하에서만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이런 사고 혁명이 전제된 경우에는 대상에 관하여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선험적 형식에 의거하여 구성한 부분만은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인식은 대상에 관한 인식인 만큼 단순히 개념을 분석하는 형식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p131)'


 '여기에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이 선험적 형식이 마음대로 대상 자체를 전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내가 나의 선험적 형식으로 규정한 대상이 곧 대상 자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대상을 선험적으로 규정할 권리를 갖고는 있지만 그것은 다만 주어진 현상 세계에만 국한된다.(p132)... 칸트는 주어진 gegeben 세계와 부관된 aufgegebene 세계를 분명히 구별한다. 전자는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현상의 세계이고 후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이념의 세계이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주어진 현상 세계뿐이며 주어진 세계 자체, 즉 물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유될 수 있을 뿐이다. 사유된 세계를 주어진 세계를 주어진 세계와 동일시할 때 허구가 생겨나게 된다. 칸트는 이 허구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초월철학을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p133)'


 

이번 <순수이성 비판 서문>을 정리했기 때문에 아직 구체적으로 <순수이성 비판>의 깊이 있는 내용(지식의 판단 형식, 초월적 통각, 12개 범주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깊이 있게 정리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는 특강 후 내게 남겨진 과제라 생각된다. 다만, 특강의 주제였던 내용 '<순수이성 비판>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다는 것을 이번 페이퍼의 목적으로 했을 때, 그 답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내게 주어진 세계에 대해 선험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다. 내가 인식하는 지식은 내가 감각을 통해 알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며, 내가 감각을 통해 안 사실은 실제 세계와는 다를 수 있다.



2. 용어 정리


가. 선험적 종합판단 先驗的綜合判斷 [synthetisches Urteil a priori]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판단을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별한다. 분석판단은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을 술어로서 추출해낸 판단으로서 선험적으로 참이지만 지식을 확장시키지는 않는다. 종합판단은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개념을 술어로서 부가시킨 것으로서 지식을 확장시키지만 오로지 후험적으로만 참이다. 이 두 가지 판단에 더하여 칸트는 지식을 확장시키면서도 선험적으로 참일 수 있는 판단을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나. 초월론적 超越論的 [transzendental]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중심적인 술어. '선험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묻는다고 하는 이 저작의 근본 짜임새를 나타내는 말로서 그의 주요 부문의 각각의 표제가 이 형용사를 달고 있다. <순수 이성의 비판>은 형이상학의 원천인 순수 이성 그 자체에 관계되지만, 그 자신이 순수 이성의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비판은 순수 이성의 자기인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립하는 순수 이성의 자기관계야말로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다. 통각 統覺 [Apperzeption]


 통각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Apperzeption은 라틴어 ad+perception(=An/Zu + Wahrnehmung)에 대응하는 말이다. 따라서 통각은 '지각에 의거하여, 지각에 대해서'라는 식으로 지각과의 관계없이는 통각의 개념 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칸트에서의 통각은 경험적 통각과 순수한 근원적 통각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상대적 자기의식이며, 후자는 초월론적 통각으로서 모든 인식 내용으로서의 지각을 통일하면서 자기 자신을 통일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칸트에서의 통각은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사유하는 자아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하다.


ps. <순수이성비판> 특강 때 필기한 내용을 첨부해 봅니다. 필체가 별로 좋지 않아 알아보시기 어렵겠지만, 관심있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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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20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역자 직강이군요. 저 파란책들은 읽어내지도 못할거면서 어쩐지 너무 탐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0 22:20   좋아요 0 | URL
^^: 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칸트전집 15주년 기념으로 4권 전집을 알라딘에서 예약판매중이더군요. 만약 syo 님께서 구입하신다면 특별판으로 구매하시는 편이 여러 면에서 좋을 것 같습니다^^:

오거서 2017-09-21 07:50   좋아요 1 | URL
네~ 저한테도 그림의 떡이군요. 먹고 싶기는 하군요. 늘 식탐이 문제지요.

겨울호랑이 2017-09-21 08:08   좋아요 0 | URL
저도 구입은 해놓고 계속 미루게 되더군요. 특강이 없었다면 서문 읽는 것도 뒤로 밀렸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은 갖춰두면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요?^^

2017-09-20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1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케 2017-09-21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의 비판 시리즈 책이 제 서가에도 있는데 저는 newbie 시절에 해설서 부터 보는 습벽을 들여 놓아서
철학책은 원전보다 주석이나 해설만 봅니다. 문학도 평론을 더 많이 읽는,,,헛똑똑이들의 전형이죠. ㅋ

열심히 공부하시는군요. 저는 음주가무로 밤을 새는데...ㅜ

겨울호랑이 2017-09-21 10:19   좋아요 0 | URL
^^: 알케님 감사합니다. 철학책에서 주석과 해설을 보실 수 있다는 것은 기본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저는 해설만 보면 잘 모르는 수준이 되어 놓아서요... 예전에 많이 놀다보니 기본실력이 부족함을 시간이 지난 다음에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열심히는 아니고 그저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2017-09-21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1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는 절대로 혼자 공부하기 힘들고, 혼자 공부하면 낭패 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철학자일 겁니다. 하이데거도 그렇고요.. ^^

겨울호랑이 2017-09-21 13:42   좋아요 0 | URL
cyrus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서문만 읽어도 이렇게 어려우니, 본문을 읽기는 더더욱 그렇겠네요. 하이데거는 가늠조차도 못하겠네요.ㅋ

나와같다면 2017-09-21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계적이고 흐름에 따른 노트 필기가 겨울호랑이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1 13:44   좋아요 0 | URL
^^: 백종현 교수님의 체계적인 강의였지요. 겨울호랑이의 받아쓰기는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구요ㅋ. 나와같다면님 감사합니다.

:Dora 2017-09-21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먼지가 되어.... 칸트 3권의 파랑책 ㅜㅜ 필체가 아주 근사하십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1 18:30   좋아요 0 | URL
칸트 사상은 어려워 쉽게 손이 가지 않네요. 저도 특강을 계기로 겨우 시작해봅니다^^: Dora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AgalmA 2017-09-22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의 ‘인식주체‘는 불확정성 원리에서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수 없는 ‘관찰자‘와 유사한 상황같습니다?
그래서 ˝소질로서의 형이상학˝과 ˝학문으로의 형이상학˝을 나눈 게 참 과학적 합리성으로도 보이네요. 그럼에도 칸트의 ˝선험적 형식˝은 제겐 여전히 동의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개념 느낌이 물씬 난단 말이죠...
이번에 칸트선집 넘 예쁘게 나와서 예전꺼 다 팔고 다시 사고 싶더라고요ㅎㅎ; 있는 거라도 제대로 읽어! 제게 면박줬습니다;;

요즘 겨울호랑이님 글이 뜸하다 했더니 칸트 공부하시느라 그러셨구낭!

겨울호랑이 2017-09-22 07:14   좋아요 1 | URL
^^: 저도 AglamA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칸트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기존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계몽철학을 주장했지만, 아직은 기독교의 영향에서 철학이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헤겔 이후 변증법이 보다 구체화되면서 ‘신->사상(이데올로기)‘로 대체되는 맑스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맑스에게 신이 ‘공산주의‘라고 한다면 이도 온전히 새로운 사상은 못된다는 생각도 거칠게 해봅니다...) 그래서, 서구 문명은 기존 형이상학을 대체하지 못하고 결국은 이를 해체시키는 ‘철학적 철거 작업‘ 중에 있지 않나 생각도 조금 해봤습니다... 막연한 추론입니다만.^^: 칸트 특강은 들었는데, 잘 몰라서 공부라고 하기에는 성과가 많이 없네요.ㅜㅜ 참, 이번 칸트 선집에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형이상학 서설>등이 빠져 있어서요. 이 책들을 가지고 계신다면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AgalmA 2017-09-22 07:20   좋아요 1 | URL
칸트 이후에 대한 겨울호랑이님 해석과 저도 비슷합니다.
서양철학은 신-형이상학에서 벗어나기 정말 어렵죠. 과학 때문에 억지로 왕관 뺏기고 있는 형색인데, 신을 믿는 과학자도 많잖아요ㅎㅎ 창조과학 믿는 장관후보자처럼 ˝소질로서의 과학˝과 ˝신념으로서의 종교˝ 그렇게 말하긴 쉽겠으나 인식틀이라는 게 종합인데 컴퓨터도 아니고 그게 쉽나요. 지금의 불협과 한계도 그게 잘 안 돼서 만들어진 세계인데.

예, 다 있는 선집이 아니라 안 사도 돼 위안삼았죠ㅎㅎ

고은아 2017-09-27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요하던 내용이었는데 깔끔한 정리에 감탄하고 갑니다ㅎㅎ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7 13:46   좋아요 0 | URL
^^: 고은아님께 작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본유 관념이란 감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마음에 명석하고도 판명하게 떠오르는 관념이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에 따르면 대표적인 본유관념이 '신(神)의 관념'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관념을 우리에게 넣어 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객관적 세계의 존재, 즉 외계 물체의 존재는 이 '신의 성실성(veracitas dei)을 매개로 하여 증명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출처 : 철학 사전)


 대륙의 합리론(合理論)과 영국의 경험론(經驗論)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부분 중 하나가 '본유 관념(innate idea)'이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로크의 <인간지성론>을 중심으로 '본유관념'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본다.


1. 고대 그리스의 본유관념


 '본유 관념'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올라갈 수 있다.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메논 Menon>에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가 노예 소년에게 질문을 통해 기하학 증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플라톤은 이를 통해 진리가 인간 내면에 있으며 '상기(想起)'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메논>에 나타난 '본유 관념'을 확인해 보자.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질문할 뿐인데, 그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인식을 되찾음으로써 인식할 수 있지 않겠나?

메논 :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그가 자신 속에서 인식을 되찾는 것이 상기하는게 아니겠나?

메논 : 물론이죠.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이 아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인식은 그가 언젠가 획득했던 것이거나, 아니면 언제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겠나?

메논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래서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또한 언제나 알았을 걸세. 하지만 언젠가 획득했다면, 그는 적어도 이승에서 획득하지는 않았을 걸세. 아니면 이 아이에게 누가 기하학하는 걸 가르친 적이 있나?' (85 d ~ e) <메논 Menon> 


2.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기하학)이 절대적 진리로서 본유 관념의 자리를 차지했다면,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신(神)'의 개념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본유 관념을 통해 '신 존재'를 증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정신-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한다.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tia, in quibus Dei exstentia, & animae hamanae a corpore distinctio, demonstrantur> 중 '본유 관념'에 해당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런 관념 가운데 어떤 것은 본유적(innatae)이고, 어떤 것은 외래적(adventitiae)이며, 다른 나머지는 내 자신이 만들어 낸(factae) 것으로 생각된다.(p61)... 내 속에 있는 관념은 상과 같은 것이고, 게다가 이것은 자신이 기인하는 사물의 완전성을 잃어버리기는 쉬우나, 이 사물보다 더 큰 것 혹은 더 완전한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무엇이 귀결될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그 표상적 실재성이 대단히 커서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하다면, 이 세상에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사물도 현존하고 있음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는 나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관념이 있는데, 이때는 전혀 문제가 없으며, 또한 다른 관념들, 즉 신(神), 물질적이고 생명이 없는 것, 천사, 짐승, 마지막으로 나와 유사한 다른 인간을 표현하는 관념이 있다.'(p67) -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中 -

 

3. 로크의 경험론


 이처럼 '본유 관념'에 기초한 데카르트의 사상이 대륙 합리론의 바탕이 되었다면, 이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영국 경험론의 입장은 무엇일까. <인간지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는 이전 사상에서 인정되는 '본유 관념'을 비판하고, '관찰'과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메논>에서 노예 소년을 증명으로 이끈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듯한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아이들이 생각하고 알고 동의할 수 있을 때 자연이 이들에게 심어준 개념들을 (만약 그런 개념들이 있다고 한다면) 모를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가? 아이들이 외부사물들에서 얻은 인상들은 지각하면서도 자연이 몸소 수고를 기울여 마음속에 새겨놓은 글자들을 모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이들이 외부에서 얻은 개념들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면서도 자신들의 존재의 원리들 안에 짜넣어지고 지워질 수 없는 글자들로 심어져서 그들이 장차 획득하게 될 모든 지식과 그들이 행하게 될 미래의 모든 추론의 토대이자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상정되는 개념들을 모를 수 있을까?...따라서 설령 더욱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과 이 관념들을 나타내는 이름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성인에게 제시되어 늘 지체없이 동의되는 몇몇 일반적인 명제들이 있다고 해도, 이 명제들은 다른 것들은 알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지성을 갖춘 사람들의 보편적인 동의를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결코 본유적이라고 상정될 수 없다.'(p88)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본유 관념들, 즉 그들이 바로 맨 처음 존재하게 될 때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본래적인 글자들(original characters)을 갖고 있다.... 나는 내가 지성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관념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관념들은 어떤 경로로 점차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줄 때, 내가 앞서 제1권에서 말했던 바(본유관념에 대한 논박)가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지리라고 본다. 나는 이를 위해 각자의 관찰과 경험에 호소할 것이다.'(p149)


 <인간지성론>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이제 마음이 이른바 백지(white paper)라고 가정해보자. 이 백지에는 어떤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어떤 관념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하여 이 백지에 어떤 글자나 관념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마음은 어디에서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는 한 마디로 경험(experience)에서라고 대답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그 토대를 갖고 있다.'(p150)


 '백지'상태 의 인간은 '관찰'과 '경험'을 통해 여러 관념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본유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 경험론에 대한 당대의 비판과 현대의 비판을 다음에서 살펴보자.


3. 빈 서판에 대한 당대의 비판 :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 ~ 1716)는 그의 저서 <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에서 로크의 경험론을 비판하고 있다. 다소 복잡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간략하게 줄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신(神) 안에서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따라서 경험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는가, 또는 우리가 자신의 고유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논쟁 문제로 말하자면, 우리가 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통찰한다하더라도, 우리도 또한 고유한 관념을, 즉 말하자면 작은 모사물이 아니라, 우리가 신 안에서 통찰하게 되는 것에 상응해야 할 우리 정신의 특성들 또는 변형들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일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정신이 그의 현 상태 안에서 그들을 개별적으로 판명하게 고찰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다양하고 아주 작은 형태들과 운동들의 감각 외에는 다른 어떤 감각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정신은, 자신의 감각이 전적으로 아주 작은 형태들과 아주 작은 운동들에 대한 감각들로 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p24) < 형이상학 논고 Discours de Metaphysique> - 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 - 中


4. 빈 서판에 대한 현대의 비판 : 스티븐 핑거


 그렇지만, 스콜라(Schola)철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이보다 설득적으로 경험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는 책은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1954 ~ )의 <빈 서판 The Blank Slate>이라 생각된다. <빈 서판> 머리말은 다음과 같은 말로 로크 사상의 의의와 책의 저술 목적을 설명한다.


 '로크가 겨냥한 공격 대상은 인간이 수학적 이상, 영원한 진리, 신의 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본유 관념 이론이었다... 로크는 정치의 현 상태에 대한 교조주의적 정당화에 반대했다. 자명한 진리로 강요되었던 교회의 권위와 신성 왕권이 대표적이었다... 로크의 빈 서판 개념은 또한 세습적인 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의 토대를 침식시켰다... 지난 세기 동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많은 분야에서 빈 서판 학설은 합의된 토대로서 작용했다.'(p30)


'인간 본성에 대한 이 이론, 즉 인간 본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모든 종교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이 포함되어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들이 각각의 종교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현대 지식 세계에서는 빈 서판이 세속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종교적 전통들이 결국에는 과학의 명백한 위협들을 참고 받아들였듯이,  우리의 가치관도 빈 서판의 종말을 이기고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다.'(p28)


 스티븐 핑거는 <빈 서판>에서 경험주의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본유 관념'을 극복한 경험주의의 모순을 '과학(科學)'적으로 증명하면서, '경험주의'는 '전체주의'라는 또다른 폐해(弊害)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빈 서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빈 서판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공백이 생겼고, 전체주의적 체제가 그 공백을 열심히 채웠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의 대학살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육, 양육, 예술을 사회 개조를 위한 형식으로 악용하고 있다(p737)...좋고 나쁜 영향에 상관없이 빈 서판은 뇌 기능을 설명하는 경험적 가설이고 따라서 진위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마음, 뇌, 유전자, 진화를 연구하는 현대 과학은 빈 서판이 그릇된 이론임을 갈수록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p738)


 결국, '본유 관념'은 종교(宗敎), 사회 체제(社會體制) 등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思想)으로 작용했으며, 이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등장한 경험주의 역시 지금은 또 다른 사상이 되어 우리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빈 서판>을 통해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科學)'을 통해 이러한 이념(理念 : 경험주의의 폐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진] Monsanto에서 생산되는 GMO 제품( 출처 : Monsanto 홈페이지)


 생명공학을 활용한 유전자 변형 생물(GMO :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이 글로벌 대기업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우리는 지금 '과학'이라는 또다른 이름의 '본유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많은 책들이 '과학'이라는 또다른 종교를 말하고 있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도구로서의 과학'이 아닌 '주체가 되버린 과학'을 많이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상황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페이퍼를 정리하다보니 대중과학서적을 보다 재밌게 읽는 방법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빈 서판>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양과학서이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단순하지 않다. 사실, <빈 서판> 뿐 아니라 우리가 접하고 있는 많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서적 중 많은 주제가 오랜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예를 들면, <이기적 유전자>, <코스모스>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랜 철학적 과제를 안다는 것이 비록 쉽지 않지만, 이러한 논쟁의 역사와 내용을 안다면 보다 재미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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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의 역할 vs 철학의 역할
    from Value Investing 2017-08-01 22:54 
    겨울호랑이 님께서 여러 책들에서 인용해 주신 문장들 때문에 '본유 관념'과 '빈 서판' 이론뿐만 아니라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까지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베르그송은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에서 과학의 역할과 철학의 역할을 아주 흥미롭고도 명쾌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들 가운데 이번에 겨울호랑이 님의 글 때문에 다시금 펼쳐 읽고 거듭 음미해 볼 만한 대목들을 '먼댓글 형식'으로 덧붙여 봅니다. 한가지 덧붙일 점은,『창조적 진화』
 
 
oren 2017-08-01 19: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학‘이 아무리 ‘만능열쇠처럼‘ 여겨지더라도 결국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학으로서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됩니다. 앙리 베르그송도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했고요. 어쨌든 ‘철학‘은 영원히 ‘과학을 보완하는 임무‘를 어깨 위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마치 아틀라스가 무거운 지구를 어깨 위에 계속 떠메고 있듯이요.
* * *
본래적인 의미의 과학이 모두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충분한 설명을 할 수도 없다는 것

원인을 실마리로 하여 합법칙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근본적인 힘은 사실은 의지로부터 설명된다. 따라서 인식은 물질의 변용이라는 주장에는 모든 물질이 주관적인 인식의 변용, 즉 주관의 표상이라고 하는 주장이 언제나 정당성을 갖고 대립된다. 그렇지만 모든 자연과학의 목적과 이상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완성된 유물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물론을 명백히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진리로 이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 진리란 우리가 앞으로 고찰해가면서 분명해질 것인데, 그것은 내가 충족 이유율에 근거한 체계적 인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의 과학이 모두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충분한 설명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과학은 세계의 가장 심오한 본질에는 접촉하지 못하고, 표상을 넘어서지도 못하며,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표상과 다른 표상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겨울호랑이 2017-08-01 17:54   좋아요 0 | URL
베르그송이나 쇼펜하우어 모두 ‘과학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군요. 19세기에 선각자들이 이미 깨달았던 부분을 21세기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의 발전‘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oren님 감사합니다^^:

AgalmA 2017-08-03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험론과 합리론 비교 궁금했는데 겨울호랑이님이 이렇게 상세히 말씀해 주셔서 좋네요^^

인간은 태어날 때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촘스키 견해는 본유관념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알다시피 경험과 학습이 쌓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인간은 완전히 백지상태라 보기도 어렵고 관찰과 경험만으로 존재한다고도 보기 어렵습니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신체는 거대한 화학작용이지요. 그 논리에서는 본성이 있기 어렵죠ㅎ. <신의 입자>에서 레더먼이 비유했다시피 우리는 축구공의 실체는 보지 못하고 축구 경기를 해괴하게 바라보는 외계인의 상태라고 해야겠죠. 상태들은 보는데 원인은 정확히 모르는.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신 ‘공백‘ 논란처럼 각자의 인식과 이데올로기로 이많은 관념과 질서를 배태하고 향유하는 것이겠고요.

겨울호랑이 2017-08-03 14:4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레더먼이 말한 내용은 칸트 철학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결과‘만을 볼 수 있기에 각자의 기준에 따라 ‘원인‘을 범주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린 마음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