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칸트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사랑은 우리 인생을 중독되게 하는 첫 번째 모순이지요.(Love contains all Kant's antinomies, but it is the frist that posions our lives.)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탄생과 죽음의 고통은 동시에 외치지요. 인생이란 신비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이성적 소산물은 아니지요, 그것은 비이성적 쓰라림이지 단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하강도 아니지요. 그리고 폭포가 아니라, 여울이거나 소용돌이지요. _ W.B. 예이츠, <환상록> , p44
이 페이퍼의 시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 ~ 1939) 의 <환상록 A Vision>에 있는 '칸트적 모순 Kant's antinomies'과 관련된 서재 이웃분이신 북다이제스터님과의 문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제 작성한 답글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 먼 댓글로 작성해 본다. 예이츠가 <환상록>에서 언급한 '칸트적 모순'은 무엇일까?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에서 순수이성비판 중 초월적 변증학에서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을 말한다. 우주론적 이념 체계 안에서 초월적 이념으로 순수 이성에 대해 정립(定立)과 반정립(反定立)이 넷째 이율배반에 이르기까지 펼쳐진다. 이 중에서 예이츠의 <환상록>과 관련해서는 첫째 상충이 내용상 관련있어 여기에 옮긴다.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초월적 이념들의 첫째 상충
A426 B454 정립 :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계에 둘러싸여 있다.
증명 : 왜 그러한가. 세계가 시간상 아무런 시초도 갖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모든 주어진 시점에 이르기까지 영원이 경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에서 사물들의 연이어 잇따른 상태들의 무한 계열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계열의 무한성은 계열이 순차적으로 연이은 종합에 의해서 결코 완결될 수 없는 데에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히 흐른 세계 계열은 불가능하며, 그러니까 세계의 시초는 세계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이 우선 증명되었다.
첫째 상충에서 칸트는 정립에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세계가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시간이 '기준 시점으로부터 이어진다'는 특성에 기초해 증명한다. 이어지는 반정립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한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시간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옮기지는 않았지만 공간은 '무공간'과의 관계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된다. 이로부터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는 예이츠의 말이 칸트의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구조와 관련있음이 확인된다.
A427 B455 반정립 :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하다.
증명 : 왜 그러한가. 세계가 시초를 갖는다고 가정해보라. 시초란 사물이 있지 않은 시간이 그에 선행한 현존이므로, 세계가 있지 않았던 시간, 다시 말해 빈 시간이 선행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릇 빈 시간에서는 어떠한 사물의 발생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간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앞서 비존재의 조건에 우선해 현존을 구별하는 조건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2>, p641
이러한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으로부터 칸트는 무엇을 끌어냈을까. 칸트는 넷째 이율배반까지 정립-반정립을 통해 우리의 이념이 초월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우리의 이념이 경험외적인 영역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 에서의 소결론이다.
A565 B593 우리가 우리의 이성개념들을 가지고서 순전히 감성세계에서의 조건들의 전체성과 이와 관련해 이성이 쓰일 수 있는 것만을 대상으로 삼는한, 우리의 이념들은 초월적이되, 그럼에도 우주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조건자를 전적으로 감성세계의 밖에, 그러니까 모든 가능한 경험 바깥에 있는 것에다 세우자마자, 이념들은 초월적인 것이 된다.(p748)... A566 B594 우리는 우연적인 것을 다름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데, 여기서는 전혀 경험의 대상일 리가 없는 사물들이 화젯거리이므로,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즉 사물들 일반의 순수한 개념들로부터 도출해야만 할 것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2>, p750
다시, 예이츠의 <환상록>으로 돌아오면 칸트의 구조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의 첫번 째 이율배반에 따르면 '정(正)'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이, '반(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이 이야기 되는데, <환상록>의 '정'과 '반'은 순서가 반대이며, 칸트에 따르면 '정'의 위치에 들어가야 할 '끝이 없다(공간적 한계)는 '반'에 위치에 놓인다. '끝이 있다'와 공간에 대한 '정'은 이 구조에서 보이지 않는다. '끝이 있다'를 부정하고, 논증을 '끝이 없다'로 마치는 이 구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이는 '끝이 있다'는 존재에 대한 강한 부정이 아닐까. '끝이 있다'를 생략하면서 논증을 끝내지만, 논증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언어적 표현)만으로 '끝이 있다'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기에, '칸트적 모순'이 담긴 외침과 함께 '나의 사랑'은 끝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절절한 영원함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사랑이 아닌 욕망이고, 이로부터 욕망이 무한하다는 결론이 <환상록>에서 내려진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칸트적 모순으로부터 도출된 사랑의 유한성과 욕망의 무한성이 <환상록>에서 어떻게 증명되는가를 알 수 있지만, 이에 대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은 분명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사랑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사랑이 아닌 욕망이 무한하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는.
배중률(排中律, Der Satz des ausgeschlossenen Dritten)은 모순을 제거하려고 하는 명제다. 그러나 배중률은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모순을 범한다. 이 명제에 의하면 +A는 A거나 불연이면 반드시 -A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함으로써 배중률은 벌써 제3자 즉 +A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A도 아닌 A. 그리고 +A도 되고 또 -A도 되는 A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모순개념에 관한 학설에 의하면 예컨대 한 개념은 청(靑)이고 다른 한 개념은 비청(非靑)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다른 한 개념을 긍정적인 것, 예를 들면 황(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다만 추상적, 부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 - 그러나 부정적인 것은 그 자체가 또한 긍정적인 것이다. 이 점은 벌써 한 타자에 대립하는 자는 이 타자의 타자라는 규정에서도 볼 수 있다. - 이른바 모순개념의 대립이란 것은 공허한 것이다. _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 p338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생겨나는 배중률의 문제점은 헤겔의 체계 내에서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통해 보다 나은 상태로 나갈 수 있는 있는 '정(正) - 반(反) - 합(合)'이라는 변증법적 구조를 통해 극복되지만, '정립-반정립'의 칸트 체계 내에서는 화합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 체계의 한계이자 모순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예이츠가 말한 '칸트적 모순'은 한 문장을 통해 본다면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을, 한 문단을 놓고 본다면 배중율을 기초로 한 칸트 체계의 모순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까. 이상이 어제 북다이제스터님과 문답을 통해 정리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항상 좋은 지적 자극으로 독서를 함께 해주신 북다이제스터님께 감사드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환상록>의 한 문단과 관련한 긴 페이퍼를 쓰고 보니, 원래 <환상록>을 인용한 토지 챌린지 페이퍼보다 더 길어진 면이 있지만 지적인 도전도 다른 의미에서 챌린지라고 나름 의미를 붙여본다. 다만, 토지 독서챌린지 담당자분께서 이 글들을 보신다면, '겨울호랑이는 독서챌린지를 하는게 아니라, 혼자 무한도전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