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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고리오 영감」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돈이 많았던 고리오 영감이 두 딸에게 전 재산을 다 쓴 뒤에 그 딸들에게 외면을 당한 채 싸구려 하숙집에서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 읽는 재미를 준다.
고리오 영감 다음으로 주목할 인물이 라스티냐크다. 그는 고리오의 둘째 딸 델핀과 사귀게 되는데 하숙집에 함께 사는 고리오 영감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애를 출세의 도구로 삼으려던 라스티냐크는 델핀을 사랑하게 되고 고리오에게 아버지를 대하듯 잘해 준다. 고리오가 병들어 죽어 갈 때 라스티냐크가 보살피고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지내 준다.
하숙집 주인인 보케르 부인이 하숙인 고리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고리오의 시신을 감싸 줄 시트를 내 주면서 시트 값을 계산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보면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가 느껴져 지금의 이 시대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출세 지향적인 라스티냐크라는 청년이 출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발자크(1799~1850)가 19세기에 쓴 이 소설은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청년이 상류 사회의 귀부인과 친분을 맺어 신분 상승을 꿈꾸고, 고리오의 두 딸은 각각 애인를 두고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고리오는 결혼한 딸이 딴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보며 나무라기는커녕 딸의 행복을 응원하는 등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남편이 자기의 친자식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첫째 딸 나지가 아버지인 고리오에게 전하는 장면은 놀랍기까지 하다.
대답하오. 당신이 낳은 아이 중에 내 자식이 있소?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어느 아이요?라고 그는 물었어요. 장남인 에르네스트라고 대답했어요.(323쪽)
아버지의 분별없는 사랑과 집착이 낳은 비극
부모의 사랑이 비극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사랑의 한계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보케르 부인이 파리에서 사십 년째 운영하는 싸구려 하숙집에는 여러 명이 하숙하고 있다. 그 하숙인들 중 고리오 영감은 제면업으로 큰 돈을 번 사업가이다. 부유한 농부 집에서 외딸로 태어난 그의 아내는 고리오에게 종교적 찬미와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하게 칠 년을 살고 나서 죽었다. 이들 부부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홀아비가 된 고리오에게 부성애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인 아내를 잃자 그의 사랑은 두 딸에게로 옮겨간다.
고리오는 매년 육만 프랑 이상을 벌어들이는 부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천이백 프랑 이상 쓰지 않았다. 딸들의 기분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다. 가장 우수한 선생들이 훌륭한 교육처럼 보이는 모든 기예를 그녀들에게 가르치게 했다.(124쪽)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딸들이 원하면, 이 아버지는 서둘러서 그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그는 그 선물의 대가로 단지 한번만 껴안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124쪽)
고리오는 두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며 딸들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준다. 첫째 딸 나지는 레스토 백작의 부인이 되고, 둘째 딸 델핀은 뉘싱겐 남작의 부인이 됨으로써 두 딸은 상류 사회에 진입한다.
제면업자였던 고리오는 오 년간이나 딸들과 사위들이 일을 그만두라는 종용을 해 오자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들은 고리오가 장사를 계속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내도 없고 일거리도 없는 이 노인은 마음이 오직 자식에게 쏠려 머릿속에 딸들 생각만이 꽉 차 있게 되었다. 과부가 자신의 인생길을 오직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데 바치듯이, 홀아비 고리오는 인생길을 두 딸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바친다.
딸들은 씀씀이가 커 결혼한 뒤에도 돈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면 하숙집을 찾아와 아버지에게 돈 부탁을 한다. 고리오는 그 돈이 어디에 쓰는지 알고도 돈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가령 딸들은 무도회에 입고 갈, 금은박으로 장식한 의상을 마련하기 위해 또는 애인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돈 부탁을 하는 것이다.
어째서 고리오는 딸들의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었을까? 금은박으로 장식한 의상이 필요한 딸에게는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살면 안 된다고, 애인을 위한 돈이 필요한 딸에게는 남편을 두고 애인을 만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거나 타일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딸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고 싶은 고리오는 영속 연금 공채를 팔기도 하고, 종신 연금을 저당잡히기도 하고, 도금한 은 식기를 팔기도 하면서 돈을 마련하며 점점 가난해진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해진 딸들은 그 익숙해진 관계를 당연시하고 보답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결혼한 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한 괴로움 때문인지 고리오는 병이 든다. 병은 회복되지 않고 가벼운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 상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라스티냐크는 고리오가 잠든 줄 알았다. 크리스토프라는 소년이 고리오의 딸들을 부르러 심부름을 갔다 와서 보고했다. 소년의 보고에 따르면 고리오의 첫째 딸은 남편과 다투고 있어서 갈 수 없다며 다 끝나면 곧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둘째 딸은 무도회에서 새벽에 돌아와 지금 자고 있어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고리오가 자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었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그 애들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368쪽)
결국 고리오는 앓다가 죽는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그가 임종할 때 그 자리에 사위들은 물론이고 두 딸도 없었다. 딸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아버지가 돈을 다 써서 가난하기 때문일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물론 아버지가 부자라면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딸들이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아버지가 자기밖에 모르는 딸들로 키웠다는 점이다. 즉 효심이 있는 딸들로 키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딸들이 원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고리오는 한마디로 말해 두 딸을 잘못 키운 아버지였다. 잘못 키웠기에 결혼한 뒤에도 아버지에게 돈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리오는 아버지로서 딸들을 어떻게 키웠어야 했을까? 고리오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제어할 줄 아는 자식으로 키웠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면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돈 문제를 해결하는 딸들이 되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것이 부모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고기를 잡아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말은 고리오에게도 필요한 말이겠다.
자식에 대한 사랑의 한계선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한 사건이 뉴스에서 보도되기도 하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은 판단을 무디게 하므로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매로 다스리라’라는 속담은 헛말이 아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도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사랑은 내려가고 걱정은 올라간다’는 속담도 있다. 사랑은 언제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어 주게 되고 걱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끼친다는 말이다. 이런 속담들만 봐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는 쉬우나 그에 비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베풀기만 하는 사랑이 좋은 게 아니다. 자식에게 집착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모로서 꼭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분별력이다. 사랑은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잃기 마련이다. 분별력을 갖고 부모가 자식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본다.
분별력이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 사랑에 한계선을 정해야 할 것 같다. 한계선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고리오는 자기 딸들이 먼 훗날 자기처럼 가진 것을 자식에게 모두 내 주어 빈털터리의 몸으로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터이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되, 자식이 자신의 인생과 똑같이 살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딱 그 선을 한계선으로 정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면 자식 사랑의 부작용이 생기지 않으리라 믿는다.
파리와의 대결을 외치는 라스티냐크
고리오가 ‘지는 해’라면 라스티냐크는 ‘뜨는 해’이다. 시골 출신의 순수한 청년이었던 법대생 라스티냐크는 사치 허영 불륜 출세욕 탐욕 등이 난무하는 혼탁한 도시인 파리에 어울리는 인물답게 공부는 뒷전이고 사교계에 진출하고자 한다.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는 보트랭이 출세하는 방법에 관해 알려 준 것이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겠고, 그가 무도회에 직접 가 보고 느낀 것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겠고, 무엇보다 파리 자체의 분위기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려는 것을 암시하듯, 소설의 마지막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다음과 같이 우렁차게 말한다.
라스티냐크는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리오 영감이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해 불행을 낳았듯이, 출세에 대한 집착이 강한 라스티냐크 역시 행복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행복’과 동행할 수 없으므로.
<내가 뽑은 밑줄긋기>....................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149쪽)
돈이 바로 인생이야.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315쪽)
<리뷰를 마치며>....................
발자크의 작품은 「붉은 여인숙」이라는 단편 소설로 처음 만났다.「붉은 여인숙」은 워낙 수작이라 내게 짙은 여운을 남겼다.
「고리오 영감」은 아버지가 가진 것을 모두 딸들에게 주고 나서 딸들에게 외면당하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고리오 영감과 리어왕을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고 푸시킨의 단편 소설 「역참지기」가 떠올랐다.
「역참지기」는 이런 내용이다. 역참에 머물던 경기병 대위가 역참지기의 딸에게 반해 버려 그녀를 데리고 사라져 버린다. 아내 없이 사는 홀아비 역참지기는 사랑하는 외딸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는 딸이 그 경기병 대위와 편안히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다.
「고리오 영감」과 「역참지기」는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집착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날씨가 쌀쌀해져 오랜만에 순댓국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