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우리는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주로 서구인을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 손에 살해된 무슬림 수가 훨씬 많다. 테러리즘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를 꼽아보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시리아 등이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날려버리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적인 폭력이다. 죽음과 파괴는 가장 개탄할 만한 전쟁의 측면이긴 하지만 부차적으로 중요할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치적 목적의 추구야말로 전쟁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일반적인 살인을 구분하는 모든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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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현대조선잔혹사 사탐(사회 탐사) 1
허환주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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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가 고착된 배경에는 자본의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핵심은 ‘이윤의 극대화‘다. 적은 노력과 재화를 들여 많은 이윤을 창출해 내는 게 기업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 이윤은 주주에게 돌아간다. 이들은 하청에서 재하청으로 이뤄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하청을 쥐어짜서 생기는 이윤은 또다시 대주주들에게 돌아갔다(p279)... 이익이 날 때는 계열사를 확장하고 주주 배당금 잔치를 벌이는 등 회사가 이익을 독식하는 구조였지만, 적자가 발생할 때는 손실을 모두 하청 노동자에게 전가한 것이다. 수많은 하청업체가 무리한 기성 삭감으로 줄도산하고, 그 과정에서 하청 노동자들은 임금 체불과 정리 해고는 물론, 일하다 목숨까지 잃고 있었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노동자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_ 허환주, <현대조선잔혹사> , p283/486

파업 51일만에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와 하청업체의 파업은 임금 4.5% 인상과 폐업 하청업체 노동자 고용승계 등의 사안에 합의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는 대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원청-하청의 기업구조, 정규직-비정규직의 노동 구조 문제가 표출된 현상에 불과하고, 근원적인 원인은 달라진 것이 없기에 노사합의를 바라보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와 관련하여 현직기자가 조선소 현실을 고발한 <현대조선잔혹사>를 정리한다.

<현대조선잔혹사>는 2022년 상반기 전세계 발주량 45.5%를 수주하며 국가 경제를 이끌고 있는 조선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다. 책이 나온 시점이 2016년이니, 처음 취재를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스스로 자신을 1m 남짓한 철제우리에 가둔 유최안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 조선소의 현실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 듯하다.

원청 입장에서 하청 노동자는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노동비용을 낮출 수 있어 기업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존재다. 불황기에는 하청 노동자를 감축해 고용 탄력성을 확보하고, 호황기에는 이를 증대해 인건비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조선업 사내 하청과 원청은 ‘지휘-명령‘이 일원화된 단일 기업 조직에 가깝기 때문이다. 원청은 사내 하청업체에서 담당하는 공사 물량과 이와 관련된 임금, 자재비 등 비용 전반과 관련해 직영 생산 부서와 같은 수준의 통제력을 행사한다. 사내 하청업체의 경영 능력이란 주어진 물량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에 불과하다. _ 허환주, <현대조선잔혹사> , p384/486

‘이윤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이익의 사유화, 위험의 외주화‘되는 자본시장에서 결국 하청노동자는 비용(expense)에 불과하다. 대차대조표(Balance Sheet, B/S)와 손익계산서( Income Statement, I/S)에서 자산과 비용은 모두 차변(借邊)에 위치하지만, 이들 항목을 바라보는 투자자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자산(資産)은 경제적 가치를 가지지만, 비용(費用)은 당기에 떨어야 할 부분에 불과하다. 비용에 해당하는 하청노동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손실처리 항목이지만, 정규직 노동자는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으로 별도의 자산관리를 받는다. 원청기업 중 일부는 협력사로서 오랜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하청기업은 애드호크라시(Adhocracy)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이런 구도를 통해, 계서제(階序制)가 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중심부-주변부를 형성하고, 이로부터 원청-하청, 정규직-비정규직의 역학관계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체제(system)를 발견하게 된다.

노조란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다. 사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이익까지 ‘굳이‘ 챙겨야 할 의무가 없다. 정규직 노조가 하청 노조와 연대하고 결속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p261)... 이런 구조에서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역설하는 것은, 지금 상황을 극복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조가 계급적 대표성,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규직 조합원을 설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p262)... 정규직 노조가 연대의 일환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나서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연관이 있을 때다. 즉, ‘비정규직을 조직해야 한다‘는 대의명분과 ‘현실적으로 비정규직까지 같이 안고 가야 도움이 된다‘라는 노조의 이해관계가 결합되었을 경우다. _ 허환주, <현대조선잔혹사> , p263/486

<현대조선잔혹사>에서 원청-하청, 정규직-비정규직 저마다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모두가 자신이 피해자이며, 자신의 절박함을 기자에게 말한다. 그러는 와중에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피해자들의 움직임도 가감없이 설명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압력에 맞서기보다 피하고 넘기는 과정에서 결국 그 압력은 가장 아래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언뜻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집단의 행동이 경제적으로 현명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대처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비춰진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자산의 비용화‘. 모든 자산은 계속 자산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감가상각(減價償却, depreciation)을 통해 자산의 일정부분은 끊임없이 정기적으로 비용화된다. 현재 자신의 위치가 ‘자산‘에 속한다고 항상 그곳에 있을 수 있을까. 부분의 최적화가 전체의 최적화가 아닐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지금 한국조선업의 원인과 문제가 결코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영국 등에서 산업재해 사망률이 우리보다 훨씬 적은 이유는 이미 오래전 제3세계로 위험을 외주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한진중공업의 경우 필리핀에 수빅 조선소를 건설했다. 그러면서 부산 영도 조선소에서는 고부가가치 산박, 즉 잠수선 등 특수선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이원화했다. 필리핀 노동자에게 위험을 전가한 셈이다. _ 허환주, <현대조선잔혹사> , p407/486

마지막으로, <현대조선잔혹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선진국-후진국 사이에 일어나는 위험의 외주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의 ‘배들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소에서 안전모와 마스크, 안전화 없이 수작업으로 철판을 다루는 이들이 글로벌공급망체인의 바닥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또다른 세계의 현실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책을 덮는다...

PS. 계급 투쟁과 부분 최적화와 관련해서 드는 또다른 생각. 재산세,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준다는 공약이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기에 계급투표를 했지만, 선택의 결과 다른 자산인 해외펀드, 주식 등이 폭락해서 전체 자산이 손실이 났다면, 이는 부분최적화문제일 것이고, 계급투표가 아닌 그저 잘못된 선택에 불과할 것이다.

[사진] 민주노총 유최안 부지회장 농성 사진(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5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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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6 1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잘못된 선택의 후과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 참...

이윤의 극대화 앞에 따뜻한 자본주의란 구호가 얼마나 허망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6 19:39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만큼 모순적인 언어의 배열이라 생각합니다.

mini74 2022-07-26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용접숙련공분들 월급을 보면서 처우를 보면서 참 처참했습니다ㅠㅠ 하청에 하청 가장 약자에게 책임전가하는 모습들ㅠㅠ 무더운 여름 별탈없이 잘 마무리되길 바라봅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7-26 20:18   좋아요 2 | URL
공권력의 압박으로 일단 봉합은 되었습니다만.... 손해 배상 카드를 만지작 거리며 계속 압박하는 모습을 보면서, 재산권과 기본권이 부딪혔을 때 우리가 서 있는 운동장이 과연 어느 편으로 기울어져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억의집 2022-07-26 20: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법대로를 지시하면서 하청노동자들에게 손배소를 제기 한다고 하는데.. 1인당 이억 정도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건 정치권에서 마무리 해 줘야죠. 월급 30프로 인상이 깍인 월급에서 30프로 인상인데다 손배소로 깍여 나가면 1m 에 본인을 가둔 결과가 너무나 가혹합니다. 갈수록 민주당이 하는 형태에 분노를 느낍니다. 제대로 일을 안 하죠. 뭐하러 입법 기관에 기를 쓰고 들어가려고 하는지… 자신들의 이익에 급급해 공공의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어요. 속에서 열불 납니다. 법사위 그냥 내준 것도 그렇고. 국힘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ㅠㅠ

겨울호랑이 2022-07-26 20:30   좋아요 3 | URL
헌법으로 보장된 집회 결사의 자유보다 발생하지도 않은 기회비용으로 측정한 손해배상이 우선한다면, 헌법 위에 민법이 있는 기형적 구조가 아닐까 싶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입법을 통해 잘못을 잡아나가야 하는 것이 수순이라 생각됩니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의 대부분은 이러한 기대감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의 함정에 빠져 스스로 중도의 덫을 만들고 몸을 사리는 모습이 지지자들에게는 절망을, 반대편들에게는 경멸을 받는 것이 오늘날 민주당의 처지라 여겨집니다. 실질적인 양당제의 구도 안에서 너무 앞서나가지 않고, 국힘보다 반걸음만 욕을 덜 먹게 행동하는 그들의 행태에 대한 실망이 이번 대선과 지선의 결과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다음 총선에서는 무소속의 돌풍이 예상됩니다...

그레이스 2022-07-26 20: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 감옥’ 열리자 함성과 눈물 “빨리 못 꺼내줘 미안하다”
출처 : 한겨레 | 네이버 뉴스

합의안 보니 말문이 막히더군요.

겨울호랑이 2022-07-26 20:42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개인적으로 합의라기 보다 위력에 의해 강제로 작성된 포기각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70년대 박정희 때부터 ‘선성장 후분배‘를 외치며 불균형 성장으로 커 온 한국경제가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불수하고, ‘분배‘를 말하면 죄악 시 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레이스 2022-07-26 20:42   좋아요 1 | URL
△4.5%(업체별 평균) 임금인상 △내년부터 설·추석 각 50만원과 여름 휴가비 40만원 등 상여금 140만원 지급 △고용 기간 최소 1년 보장 △재하도급 금지 △폐업한 하청업체 노동자 최우선 고용 노력 등에 잠정 합의했다. 

얼마나 불안하고 불평등한 고용상황이었는지.

겨울호랑이 2022-07-26 20:49   좋아요 1 | URL
과거 노사 합의안 중 많은 부분이 이행되지 않은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번 합의안은 경기불황을 이유로 흐지부지 되지 않길 바라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지음, 이용철 옮김 / 에피스테메(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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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에 자연과학이 했던 일을 18세기에는 정신과학이 완성시킨다. 방대한 영역의 학문들 전체는 이후로 비종교적 정신에 따르게 된다. 이처럼 신학적 방식이 강요했던 족쇄에서 풀려난 정치적 개념들은 심층적인 변모를 겪게 될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사회현상을 자유롭게 분석하고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관계들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절대주의 체계가 근거를 두고 있는 이론들의 공허함을 보여 주었다. 정신과학의 영역에서 교회의 권위를 몰아내는 것은 동시에 교회가 강력하게 지지했던 절대군주제의 권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68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Philosophie de la Revolution francaise precede de Montesquieu>은 몽테스키외( 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 볼테르(Voltaire, 1694 ~ 1778)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로 이어지는 대혁명 철학의 큰 흐름을 짚어주는 책이다. 비록, 저자로 소개된 베르나르 그뢰퇴유젠(Bernard Groethuysen, 1880 ~ 1946) 이 집필한 내용은 미완성 유작 '몽테스키외'에 한정되지만, 이어지는 글들의 논조는 매끄럽게 전편과 이어지며, 프랑스 대혁명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7세기 초반에 과학은 세계, 세계의 체계를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이러한 점에 과학의 가치, 존재 이유가 있었다. 반면 18세기에 과학의 목적은 개별 사실들을 알고 그것들을 최대한 모아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다양한 관계를 그 개별 사실들 사이에서 확립하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32


 우리에게 '계몽시대 철학자'로 알려진 이들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절대적이고 단일한 법칙 세계를 부정하고 다양한 현상들로부터 가능성에 주목한 몽테스키외와 절대적인 이성을 강조한 볼테르. 마치 몽테스키외가 17세기 절대왕정과도 같은 바로크(Baroque)양식을 대신하는 섬세한 18세기 로코코(Rococo)양식을 도입시켰다고 한다면, 볼테르는 이를 더 심화시켜 로코코 양식을 발전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율성의 몽테스키외와 통일성의 볼테르. 이 부분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몽테스키외가 생각하는 질서는 유연하고 자율적이다. 그는 삶의 표현되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형태들을 인정한다. 몽테스키외가 생각하는 이러한 넓은 개념의 사회에는 아무리 다양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그것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있다. 그것들이 설사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모든 발현을 위한 자리가 있다. 정치적 문제는 사회조직 안에서 나타나고자 하는 여러 다양한 경험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86


 볼테르에게 인간 정신의 역사가 제시한 다양한 사실에서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도덕적 가치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그리고 각자의 내면에서 결정적인 객관적 요인으로 나타난다.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동일한 원칙, 즉 자연법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지침들이 무엇인지 또 우주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규정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볼테르와 몽테스키외의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64


 몽테스키외에게 법은 목적론적 이성의 창조물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몇몇 규칙에서 기인하기는커녕 다양한 역사적 여건들에 항상 적응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는 집단적 형태들을 유지하는 수단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볼테르의 사유에 내재적인 논리는 법이 그 평가에서 최고의 권한을 갖고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운 절대적 이성의 산물일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 이성은 혼란스러운 법들과 관례들의 부조리함 모두를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원칙들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98


 그렇지만, 몽테스키외의 사상은 '법의 기원' 부분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개인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으로는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담아낼 수 없고, 이는 볼테르의 통일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볼테르의 사상이 바로 대혁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볼테르는 통일성있는 외부 법칙에 의해 주어지는 밝은 미래를 말한다. 그렇지만, 볼테르의 비판이성 대신 대혁명의 정신과 연결되는 것은 스위스 출신의 루소 철학이다.


  (몽테스키외와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은 법을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에서 나오는 산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은 그 본성상 자의적이고 편협하며 개인적 이유들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법의 비개인적 본성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비개인적 입법권밖에 없다. 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일반 의지이다. 스스로에게 법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뿐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54 


 볼테르와 루소는 인류가 다른 시대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희망과 개인적 성찰의 유용성에 대한 믿음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엇이 특별히 인간적인가라는 문제에서는 의견이 같지 않다. 볼테르가 인간의 가치를 사유 능력과 그 능력이 도달하는 결론의 명료함에 둔다면, 루소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것에 그 가치를 둔다. 볼테르는 인류에게 그들이 더 훌륭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계몽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말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희망으로 가득 채운다. 루소는 사람들의 영혼, 그들의 본성, 내면에 있는 행복,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프랑스 대혁명 동안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것은 루소의 이해 방식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52


 볼테르가 이성을 통한 통일성있는 미래를 보기 위해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루소의 눈은 내면으로 향한다. 가치는 외부에 의해 강제로 계몽(啓蒙)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았을 때 비로소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의 울림은 밖이 아닌 우리 내부에 밝은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로부터 우리는 '천부인권(天賦人權)'의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단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Retour a la nature.)"는 이러한 루소의 철학을 잘 표현한 문장이다.


 루소는 두 종류의 인간을 창조한다. 한편에는 자연인, 자연이 만들었던 그대로의 인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자신의 영혼에만 열중하는 인간이 있다. 또 다른 한 편에는 시민이 있는데, 그의 자아는 공동체의 대(大)자아에 녹아들어 가고 그의 감정과 생각과 행위와 전 존재는 자기 인민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당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인간들의 삶에 대한 동일한 반감에서 생겨났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32


 영혼이 자신의 진정성과 현실 속에서 느끼는 것, 그것이 최종적인 가치이다. 너의 감정은 네 안에 있다. 그것이 너를 고양시키고 이끈다. 네 영혼을 믿어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도야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들은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멋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혼에 단지 외면적인 삶만을 부여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래야 된다고 믿는 존재를 추구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를 왜곡할 뿐이다. 네 영혼에 사람들이 가하고 싶어 하는 모든 변형을 멀리하고 네 영혼의 진정한 삶을 살아라. 이렇게 해서 영혼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한다. 바로 이 점에서 루소는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43


 그렇지만, 이들 사상가들의 생각이 서로 대체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개념은 서로간에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비판적 계승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구성한다.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몽테스키외에 의한 다양성의 인정은 '자유'를 개인의 본성으로 인정케 했으며, 볼테르의 통일성에 의해 '자유'는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고, 루소의 사회계약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평등한 권리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이들 사상가들의 다른 생각은 저마다의 빛깔을 남기면서 프랑스 혁명의 철학으로 융합되었음을 깨닫게된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고유한 권리의 성격을 표현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지 개념이다. 자유의 개념에서 볼 때 각 개인의 본성은 법적으로 이해된다. 인간 삶의 모든 발현은, 그것이 본성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그리고 자연적 성향의 표현인 한 권리에 근거를 둔다. 그것은 폭력으로 방해받을 수 없다. 자유는 인간 본성의 법적 표현, 즉 자연권이다. 따라서 권리가 갖는 이러한 자연적 성격을 일반화하고,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하면, 필연적으로 권리의 평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68


 프랑스 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기본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이 우애를 강조하며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한 이후 생겨나는 개인과 공적 권리의 충돌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과제다. 점차 거대해지는 집단(자본, 국가)의 권력앞에 개인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은 문제의 근원을 알려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프랑스 대혁명이 영감을 받은 공적 권리의 체계를 요약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그 체계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두 가지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하나는 시민들이 서로 간에 맺는 법적인 상호 약속의 개념, 즉 사회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 법으로 이해되는 국민의 의지의 개념, 즉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다. 이 일반 의지만이 국민의 권력 행사를 국민에 의해 지명된 대리인에게 위임하게 될 헌법을 국가에 부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입법권과 행정권 행사가 누구에게 위임될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입법권 행사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맡겨지고, 행정권 행사는 왕에게 맡겨질 것이다. 따라서 우선 권리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계약이 있고, 그로부터 결사가 형성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327

근대인에게서 인류는 말하자면 탈중심화되었다. 인간사 전체를 단일한 관점에서 정리하고, 인간의 운명들을 ‘보편적 섭리‘에 종속시켜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세계적 질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근대인에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옛 세계의 지형은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여러 민족의 무한히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 눈에 보이는 통일성도 없고 그리 뚜렷한 경계도 없는 광대한 계획의 전망만이 남아있었다. 영원히 변화하는 이 삶은 그 자체 안에서만 고찰될 수 있었고, 신학적 개념의 협소한 틀 속에 갇여 있을 수 없었다 - P19

예상치 못한 것, 그것은 바로 인간 정신이 인지할 수 있는 개별적 원인들 너머에 신의 섭리라는 영원한 하느님의 뜻을 개입시켜서 교회만이 밝혀낼 수 있는 총체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가 사용하는 주요 논거이다. - P37

모든 국가는 고유의 규칙에 따라 발전하는 조직을 구성하는데, 그 특성들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정신은 예로부터 언제나 신학적 사고를 부추기는 이상, 즉 세계사의 관점을 포기하면서도 개별적인 현상들 그 자체 속에서 민족들을 지배하는 규칙을 탐구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간 정신은 예전에는 전체의 관점에서 찾던 그러한 법칙성을 각 민족의 개별적인 삶 속에서 되찾는다. 인간의 삶에 의해 이렇게 무한히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 형태들 속에는 우연이나 초월적인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되는 사건들이 불규칙하고 무질서해 보인다고 해도 그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는 내재적 논리가 존재하며, 우리는 바로 이 내재적 논리를 통해 민족들의 변화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 P41

과학은 이중의 목적을 지닌다. 우선 그것은 개별 사실들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이어서 자신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룩하게 될 연속적인 혹은 동시적인 발견들을 가지고 형이상학적 의미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종류에 따라 분류되고 항목별로 정리되거나 어떤 법칙들을 따르는 집합체들에 통합되는 잘 정돈된 전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속은 자신이 집합체에 가져오는 개별 지식들에 의해서만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는 개별 사실들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수단만이 중요하다. 과학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개별 사실들을 그것들이 주어진 그대로 아는 것이다. - P131

나는 본성상 한 인간, 자신을 의식하기에 이른 인간, 자연적으로 선량한 삶이 근본 여건으로 주어진 인간, 자연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혁명의 결과는 명백하다. 이러한 자의식, 사회와의 모든 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 인간은 현행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그것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사회에 대항하여 내세우는 것은 순전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사회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인간은 자신 안에 담고 있다. 자연이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인간은 근본적인 여건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저 인간 자체에 결부되어야만 하는 절대적 가치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임무가 될 것이다. - P245

모든 문제는 다음의 질문으로 귀착된다. 누구에게 법을 제정하는 책임을 맡겨야 하는가? 왜냐하면 바로 그 질문이 권리와 법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자연권 덕분에 나는 자유롭고,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과 법에 따른 구속이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권리는 법보다 앞선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자연권은 법에 앞선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와 함께 주어진 것이다. 법은 권리를 만들 수 없다. 법과 권리 사이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싶다면 법의 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법을 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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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5 2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던
종교개혁으로 출발한 자연에
대한 도전은 자연과학의 발전
으로 이어지게 되었나요.

역설적으로 자연과학의 끝판왕
은 결국 정신과학이라는 말의
방증일까요.

여전히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가
자연처럼 정복되질 않는 걸 보면
보다 심오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
을 해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6 07:47   좋아요 3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자연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 발견되는 ‘자연의 법칙‘을 인간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라는 면에서 ‘자연과학->정신과학‘으로의 진행은 자연스럽게 보여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 문제는 신에 대한 도전의 면도 있지만, 이와 함께 기존 교회질서에 대한 개혁의 성격도 있다 생각됩니다. 기존 질서의 붕괴 후 이를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발견 과정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려 자연에 대한 탐구, 자연 질서를 인간세계로 끌어오려는 여러 노력들이 있지 않았나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2-07-28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의 차이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유용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07-28 15:12   좋아요 1 | URL
짜라투스트라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scott 2022-08-10 1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추카합니다
계신곳 비 피해 없으신지요.
서울 이틀 동안 물 폭탄 ㅠ.ㅠ

겨울호랑이 2022-08-10 22:10   좋아요 0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저도 수도권이라 물폭탄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ㅜㅜ 이번 주 내내 비온다고 하는데 걱정이네요... scott님께서도 물난리 겪지 않고 한 주 잘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

mini74 2022-08-10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당선 축하드려요 *^^*

겨울호랑이 2022-08-10 22:10   좋아요 0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거리의화가 2022-08-10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요새 프랑스 대혁명 관련하여 계속 책을 읽고 계시더군요.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8-10 22:12   좋아요 1 | URL
모처럼 연관된 주제로 책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중에 자꾸 새기는 합니다만 ㅜㅜ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8-10 22:1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하게 하루 마무리하세요! ^^:)

이하라 2022-08-10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님^^
모쪽록 비 피해 없이 지나시길 바랍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2-08-10 23:18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다음 주까지 비가 온다고 하네요... 이하라님께서도 평안한 밤, 건강한 시간 되세요! ^^:)

thkang1001 2022-08-11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8-11 13:08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thkang1001 2022-08-11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8-11 13: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2-08-11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프랑스사를 공부하고 계신지요
철학을 통해 보는 프랑스사!
관심이 갑니다
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8-11 15:20   좋아요 1 | URL
^^:) 공부까지는 못되고 연관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8-12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리뷰 열심히 읽었는데 감탄만 하고 갑니다 ㅎㅎ 좋은 주말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2-08-13 03: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 평안한 주말 되세요! ^^:)
 

후쿠야마의 단극 체제론이 빈약한 실증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일세(라기보다는 일시一時)를 풍미한 것은 당시 유일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세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강력한 담론으로 나온 것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질서의 구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성장이다. 1996년의 중국은 아직 WTO(세계무역기구)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스스로 ‘개발도상국’ 위상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1998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둘러싼 논란에서 당시 중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이 방문에 반대한 것이다.

‘문명의 충돌’에 기반을 둔 다극 체제론에는 세계질서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의 독점 지배가 풀려 다양한 경제외적 가치가 되살아날 가능성을 짚은 것은 헌팅턴의 뛰어난 통찰이다.

아리기의 흥미로운 논점 하나가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다. 스기하라 가오루가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에 빗대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데 쓴 이 말은 서양식 자본집약적 근대화와 다른 노동집약적 근대화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오면서 깃발을 비롯한 십자가, 초승달 같은 문화 정체성의 상징물이 중요해졌다. 문화가 중요해졌고, 문화 정체성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정체성을 발견하여,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깃발 아래 행진을 벌이다가,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적수와 전쟁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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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유전자에 너무 바싹 묶여서 변화가 용인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길고 느슨하게 묶여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인가?
사회생물학자들은 이 끈이 짧고 바싹 조여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르게 만들어져서 다른 성적 동기와 충동을 느낀다는 다윈진화론자들을 들 수 있다. 한편,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인류에게 단 하나의 확고한 성적 전략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전자와 문화를 묶는 끈이 길고 느슨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이 획득한 것은, 환경과 환경적 요구에 재빠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극도로 유연한 뇌뿐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공감을 잘한다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적극적이라는 고정관념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성역할과 책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여성은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가 반영된 것이지 실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반영하지 않는다.

여성도 신체적 폭력, 전쟁 참여, 비열하고 잔인한 행위를 함에 있어 남성만큼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성들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지지하고 독재자를 지지했던 것만큼이나 여성들도 그들을 지지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KKK의 침대보를 뒤집어쓴 것 같은 멍청한 유니폼을 대체 누가 만들었겠는가? 여성의 공감 능력과 협력 본능은 계급과 이념, 권력과 특권 앞에서 무너졌다. 마치 남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많은 분의 생각과 달리, 과학은 어려울 수는 있지만 복잡하지는 않다. 과학 자체가 복잡한 것이 아니라 과학의 대상이 복잡한 거다. 과학자의 눈앞에서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온갖 복잡한 것들을, 이론의 틀을 가지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과학의 정수다.

또 다른 오해의 예는 "아무리 구성이 단순한 시스템이어도 얼마든지 복잡한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카오스 이론의 결과를 그르게 해석해서 생긴다. 이 결과가 오해되어 "얼마든지 복잡한 현상이라도 우리는 항상 그 현상을 설명하는 몇 개의 변수로 이루어진 단순한 수식들을 찾아낼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를 본 적도 있다.

우리가 오컴의 면도날을 이론에 적용하는 까닭은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경험적 증거가 있기 때문이며, 그 원리가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고 왜 효과가 있는지 보여주는 수학적 모형들도 있다. 단순성과 이론의 가치 사이에 관련성이 있음은 명확하며 입증 가능하다. 그리고 단순성은 다른 평가 기준들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나아가 오컴의 면도날을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과 다르게, 우리가 단순성을 기준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세계 자체가 단순하다는 믿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우리를 둘러싼 세계, 곧 경이로울 만큼 복잡한 세계를 설명할 때 좋은 이론일수록 으레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지 않다. 온갖 예측 불가능성이 내재해 있는 혼돈이론chaos theory조차도 비교적 단순한 수학 방정식들로 표현해낼 수 있다.

물론 이는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할 때 크게 신중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적합성 여부와 상관없이 단순한 이론에만 매달리는 경솔한 환원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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