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네아데스 (천줄읽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플로티노스 지음, 조규홍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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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7.엔네아데스-플로티노스

총페이지:113p

읽은 기간:2021.5.9~2021.5.9

특이사항: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플로티노스의 대표작

나만의 서평:

N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N, 나는 고전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책을 누가 읽고 있을까'라는. 책을 읽으면서 책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바라보면서 이 책을 과연 몇명이나 읽었고, 지금도 누가 읽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아. <박학한 무지>나 <모놀로기온&프로슬로기온>,<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세 편의 대화> 같은 책들을 읽을 때 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책 읽기의 고독'에 대한 자각이라고 해야할까. 독서라는 게 혼자서 하는 행위인 건 맞지만, 내가 읽은 책들을 누군가 읽었으며 현재 읽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함께 읽는다'라는 느슨한 연대감이 들어. 혼자 하는 독서가 함께 하는 행위처럼 느껴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생겨. 일종의 동지를 만난 느낌이랄까. 그런데 위에 적은 책들을 읽고 나서는 항상 '책읽기의 고독'을 철저하게 느껴.

'책읽기의 고독'이 나쁜 감정인 것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독서는 혼자 하는 행위라서 고독하지. 고독하지만 책과 대화하며, 책속의 내용과 책속에 남겨진 저자의 목소리와 대화하며, 혼자이자만 정신적인 충족감을 느낄 수 있지. 문제는 책읽기의 고독이 아니야. 책읽기의 고독이라면 익숙하거든. '책읽기의 고독'을 철저하게 느낀다는 것에서 문제가 있어. 철저하게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것도 아니야. 남들은 쉽게 하지 않는 행위를 혼자서 한다는 만족감, 지적 허영심의 충족이 들기도 해. 하지만 철저하게 '책읽기의 고독'에 매몰되었다 나오면 이상한 고독감이 엄습하지. 혼자 해서 좋기도 하지만 혼자 해서 이상하게 외롭다고 해야할까. 세상에 나 혼자서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느낌, 잊혀져가는 옛 책의 수호자가 된 기분이랄까. 그 감정이 엄습하면 나도 모르게 책의 이름을 치고 그 책의 서평을 검색해. 서평들이 나오면 조금은 안심이 돼. '나 혼자 이 책을 읽는 게 아니구나, 다른 누군가도 이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구나' 하고.

<엔네아데스>를 읽고 나서도 그랬어. 이상한 고독감이 엄습해서 책 제목을 검색해봤어. 역시 몇 편의 글이 검색되더군. 그 글 중에 한 편을 읽는데, '누가 이런 책을 찾아서 볼까요?'라는 구절이 나왔어. 나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 나야 고전독서라는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이니까 눈에 보이면 찾아서 읽는다고 치자. 다른 사람은 이 책을 찾아서 읽을까? 이 책을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고, 안다고 해도 또 읽는 것은 다른 얘기라서. 하지만 나도 읽었고, 어떤 이유로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읽은 소수가 분명히 한국이라는 땅에 있는 것도 사실이야.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됐어.

쓰다 보니까, 이상한 이야기만 잔뜩 하는 기분이야.^^;; 그래도 어쩌겠어? <엔네아데스>를 읽다가 떠오른 이 이상한 고독감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걸. 일단 내가 느낀 기분을 다 쓰고 나니까 이제 책 이야기를 해야겠어.^^ <엔네아데스>는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 중 한 명인 플로티노스의 대표작이야. 신플라톤주의라는 사상의 이름에 플라톤이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예측 할 수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플로티노스는 진리를 강조해. 플로티노스는 우리가 사는 삶 너머에, 불변하고 절대적으로 선하고 지혜로우며 모든 것의 원형이 되는 진리가 있다고 이야기해. 그는 우리가 할 일이란 진리를, 다른 말로 하면 이데아를 좇는 것이라고 말해. 이거 뭔가 비슷한 게 떠오르지 않아?^^;; 맞아. 진리나 이데아를 으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거야. 실제로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바뀌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기독교의 신으로 변형시키는 데 신플라톤주의 사상가들이 기여했다는 말이지.

이 책은 <엔네아데스>의 모든 부분을 이야기하지는 않아. 딱 세 가지 파트만 발췌해서 적어 놓았어. 아름다움, 정신의 아름다움, 사랑에 관한 세 가지 파트. 위의 글들을 읽었다면, 플로티노스가 세 가지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될 거야. 그는 아름다움, 정신의 아름다움, 사랑을 진리와 연관지어서 이야기해. 아름다움의 원형은 진리에 있다든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정신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봐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든지 사랑은 인간이 진리로 가는데 도움이 된다는지. 물론 진리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야. 사랑의 경우는 사랑이 신에서 유래한 개념인지 정령에서 유래한 개념인지 따지기도 해. 사랑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어리둥절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 신이 인간에게 불어넣은 감정인지 정령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감정인지를 따지는 건, 신화와 종교의 힘이 생생히 살아 있는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 막강했던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던 것 같아.

적어 놓고 보니 내가 왜 고독을 이야기했는지 알겠지? 발달한 기술 문명을 가지고 바쁘고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플로티노스가 이야기하는 진리는 씨알도 안 먹힐 확률이 높아. 누가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겠어. 먹고 살기도 바쁘고 건강관리도 힘든데다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온갖 동영상들이 널려 있는데. 하지만 그래서 가끔은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의 삶이 궁금해. 절대적인 무언가를 추구하고 그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는 삶의 확실성이 부럽기도 하거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삶의 태도가 불확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뭔가 신기하고 독특하거든. 아마 그래서 내가 플라톤 같은 고대 그리스의 책들도 읽고, 이렇게 신플라톤주의 책도 읽나봐.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으로. 아니 잊혀져가는 옛 책의 수호자 같은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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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5 1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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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5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신현상학 2 한길그레이트북스 64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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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9.정신현상학2-G.W.F.헤겔

온갖 실재라는 이성의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고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기에 이르렀을 때, 이성은 곧 정신이다.(17)

여기서 개인의 힘이 공동세계를 제압하고 또 극복해나갈 듯이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실은 공동세계를 실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위력이란 자기를 공동세계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의 본체를 외화하여 공동세계에 동참하는 대상으로 정립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이 교양을 쌓음으로써 스스로 현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공동세계 그 자체를 실현하는 것이다.(71)

이 순수부정성이야말로 오직 자기로서, 이 단일한 자기가 순수하게 도덕을 인식하는 동시에 '이' 개별 의식으로서의 자기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전에는 공허하다고 했던 순수의무의 본체는 이 자기에 의해서 내용이 주어지게 되었으니, 왜냐하면 이 자기는 자기의 고유한 법칙에 연연하여 본체와는 이질적인 위치에 있다던 그런 상태를 벗어난 현실적인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는 부정의 운동을 행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본체와는 구별되는 내용을 지니지만, 바로 이 내용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204)

그러나 자아=자기는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는 운동이다. 즉 이러한 동등성은 동시에 절대부정으로서 절대적 차이를 낳게 되므로 자아의 자기동일성은 이 순수한 차이와 대립하게 되고 순수한 차이는 자기를 아는 지와 대립되는 순수한 대상으로서, 이것은 곧 시간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앞에서는 존재의 본질이 사유와 연장의 통일이라고 불렸다면 이제는 그것이 사유와 시간의 통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차이에서 차이로 이어지며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도리어 자기 내면의 붕괴에 봉착하여 안정된 대상 세계를 꾸며내는 연장으로 전화하는데, 이 연장은 자기와의 순수한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다름아닌 자아이다.(335)

총페이지:376p

읽은기간:2021.5.5~2021.5.5

특이사항:세상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책 중 하나로 악명이 높은 책

나만의 서평: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책을 읽은 탓에 책읽기만 계속 하고, 써야 할 서평은 적지 않고 있다. 이전이라면, 서평 쓰기를 포기했었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달라졌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 대신에 읽은 순서에 연연하지 않고 쓰고 싶은대로 쓰기로 했다. 그게 그마나 서평을 계속해서 쓸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구 N에게

N, 며칠 전에 오랜만에 너와 통화했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구답게, 마치 오늘 만난 것처럼, 격의 없이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지. 내가 겪은 일부터 요새 일어나는 일까지. 통화를 끊고 생각해봤는데, 내가 너한테 이야기를 하다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뭔가 놀라웠어. 니가 나의 온갖 이야기를 다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헤겔의 <정신현상학> 이야기까지 들어줄 줄이야. 이야기를 들어준 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반대로 이야기를 한 나는 이상한 인간이 되겠지만.^^;; 하지만 친구야, 헤겔의 <정신현상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읽는 것이 힘든 것도 있지만,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그 책이 나를 스쳐지나가면서 남긴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홀린 듯이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거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내 안에 남아서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지.

그 때,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려봤어. 나는 아마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잘 봐. 내가 어떤 주장을 한다고 치자. 그건 시작이지. 이걸 '정'이라고 할 수 있어. 일단 '정'은 '정'으로서 놔두자. 이번에는 내가 '정'이 아닌 다른 '타자'의 주장을 한다고 치자. 이건 '정'과는 다른 주장이겠지. 이걸 '반'이라고 부르자. 마지막으로 내가 '정' '반'의 주장을 합친다고 하자. 이게 '합'이야. 하지만 이 '합'을 말할 때의 '나'는 혹은 '나의 정신'은, 내가 '정'을 말했을 때의 '나'나 '나의 정신'과는 달라. 타자의 주장을 하면서 타자의 입장을 받아들여 나 자신이 이전보다 폭넓게 변화했기 때문에. 이걸 정신의 운동으로서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어.'

아마 나는 여기까지 말했을 거야. 써놓고 보니 첨가해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더 첨가해서 써 볼께.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정신의 운동으로서의 변증법'을 단순히 개인의 정신을 넘어서서, 더 확장시켜서 이야기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부터 공동체, 국가, 역사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서 그는 최종적으로 '절대지'에 이르게 돼. '절대지'라는 말을 써놓고 보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내가 보기에 헤겔이 말하는 '절대적 지성'은 '신의 다른 이름'처럼 보여. 결국 헤겔은 인간 정신의 운동에서 시작하여 공동체,국가,역사를 포괄하는 하나의 철학적 법칙을 만들었고, 그걸 신에게로까지 향하게 했지.'

N, 써놓고 보니 내가 <정신현상학>을 너무 일반화했다는 느낌이 들어. 책을 읽어보면 내가 일반화한 주장보다 훨씬 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거든. 그런데 내 이해력과 독해력의 부족으로 그 부분들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여. 사실 읽으면서 힘들기는 했어. 책을 읽었는데, 문장과 단어들을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 마치 검은 문자 덩어리 속을 헤매다 나온 느낌이야. 검은 문자 덩어리를 헤매는 몸부림을 치다 독서가 끝났다고 할까. 그래도 친구야, 나의 고전 독서는 계속될 거야. 이미 포기하기에는 늦었거든. 해 놓은 게 너무 아깝기도 하고. 앞으로도 니가 나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주었으면 한다. 고전 독서라는 게 한 번 하기도 힘들고, 하고 나서도 무언가가 남는데, 그걸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될 거 같거든.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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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게으른 저는 평소에는 게으른 성향대로 게으르게 살았죠.

게으르게 살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벼락치기를 합니다.

이게 습관이 된 것일까요?^^;;

저번 주말과 이번 주 초에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몰아서 막 읽었습니다.

이런 걸 '벼락독서'라고 해야할까요?

그런데 '벼락독서'라고 하니 뭔가 이상하네요.

뭔가 벌 주는 느낌도 있고...^^;;

다른 단어를 한 번 생각해봅니다.

폭풍독서?

폭풍처럼 마구 읽어대는 독서라고 생각하니 뭔가 느낌은 맞네요.

그런데 왜 '폭풍독서'라고 하니 '폭풍설사'가 생각나죠. ㅎㅎㅎㅎㅎ

폭풍설사를 떠올리니 뭔가 이상해지네요.

어찌되었든, 저는 지난 주말와 이번 주 초에 마구 독서를 해댔고,

그 결과 리뷰고 뭐고 다 쓰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조금 생각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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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본을 읽자 북클럽 자본 시리즈 1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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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4.다시 자본을 읽자-고병권(3)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곳의 인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면 자본주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고,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중세 봉건제 사회의 인간이 되는 것이고, 수렵채집 사회에 산다면 수렵채집사회에 맞는 인간이 되는 것이죠. 반대로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사는 인간이 갑자기 자본주의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고,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는 인간도 순식간에 계산적이고 돈에 집착하는 자본주의적인 인간이 되기는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그 사실을 전제하고 묻습니다. '당신이 사는 자본주의 사회란 무엇인가?'라고.

자신이 사는 체제 혹은 구조에 대한 이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한번 들여다보게끔 합니다. 일명 '낯설게 하기'.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라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고 자신이 살던 세상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이들이 '낯설게 하기'라는 효과를 통해 세상을 조근조근 따져보는 것입니다. '왜 지금의 세상은 이런 구조를 가지게 됐지? 왜 체제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지? 지금의 모습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식으로.

마르크스가 던졌던 질문을,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 독자가 하게 되는 순간, 세상으로 향하는 마르크스의 시선은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 독자와 하나가 됩니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상황의 특수성을 포착하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합리적이다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정치경제학의 사후정당화는 그런 시선을 가진 이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가렸던 더께는 사라졌으니까요.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독자가 이제 할 일은, 더께가 사라진 눈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마치 마르크스가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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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4.다시 자본을 읽자-고병권(3)

총페이지:180p

읽은 기간:2021.5.1

특이사항: 세번째 읽었음

읽은책에 대하여:

<다시 자본을 읽자>는 오늘 처음 시작하는 온라인 독서 모임의 첫 책이다. 모임 준비를 한다고 <자본>에 관련된 여러 책을 읽었고, 이 책도 저번에 미리 읽어두었다. 오늘은 모임에 맞추어 다시 읽었고. 신기한 건, 세번째로 읽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읽기가 지겹지 않다는 사실. 읽을 때마다 지루하지 않고 잘 읽어 나간다는 건, 이제 내가 책을 읽음에 있어서 재독, 삼독, 사독을 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독을 했을 때는 책에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에 가장 관심이 갔다. 마치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만 다른 단어들 보다 커 보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이번에는 정치경제학에는 관심이 안 가고, 시야나 역사성, 당파성, 입장, 힘, 변증법, 역설, 패러디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저번에 읽을 때보다 더 두루두루 책에 관심이 갔다고 해야하나. 독서 자체가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드는 기분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을 두루두루 살피는 다극적인 느낌의 독서를 했다고 해야할까.

내가 서 있는 삶의 기반이 자연스럽고, 정당하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 주어진 것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산물로서 형성된 것이라는 인식을, 마르크스와 <자본>이 준다는 사실을 세번째로 파악하니, <자본>도 그렇고, <다시 자본을 읽자>도 계속해서 읽어볼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카프카의 말처럼, <자본>과 <다시 자본을 읽자>가 기존의 인식을 깨는 도끼로서의 역할을 계속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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