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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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를 떠나지 못한다는 거지? 카다레의 신간을 보고 든 생각이 들었다. 읽다 보니 떠나지 못하는 여자가 아니라, 떠날 수 없는 여자가 맞지 않나 싶었다.

 

대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다 걸작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터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번에 만난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전에 만난 <잘못된 만찬>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라 그런지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로 극작가 루디안 스테파가 등장한다. , 참 부제가 <린다 B를 위한 진혼곡>이었지. 극자가 양반은 당 위원회에 소집된 상황이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알바니아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불지 않았고, 여전히 공산주의 감시체제가 작동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모든 대화는 도청이 되고, 전 국민의 1/4의 서로를 감시하느라 눈에 불을 켜던 그런 시절이었나 보다.

 

저명한 극작가 루디안이 당 위원회에 소환된 건, 그의 애인인 미제나(에니그마의 은유라나)가 그의 서명을 받아 건네준 린다 B라는 인물 때문이다. 그녀는 유배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했던가. 카페 플로라에서 만난 판사는 린다 자살의 원인에 대해 스테파에게 말하길 거부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피델 카스트로의 장장 여섯 시간에 달하는 연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이런 부분들은 아무래도 엔베르 호자(대지도자?) 아래 자행된 알바니아 공산 독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우매한 독자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해야할 것 같다. 결국 해외문학 읽기의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이라는 스칸데르베그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역시나 문외한으로서는 이름조차 낯선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만큼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우리와 거리가 멀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싶다.

 

어느 순간, 나머지를 다 읽어야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맥락 없는 전개와 오르페우스-에우디리케까지 넘나드는 서술에 마음이 불편해 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쩌랴 일단 펴든 책이니 다 읽어야지. 대지도자도 한 때 참가했던 지하저항군 시절을 다룬 루디안의 극본은 공연을 위해 검열을 받아야 하는 모양이다.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주시되는 통제사회의 단면이라고나 할까. 연애는 물론이고, 예술 창작까지도. 그런 시절에도 예술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창작열을 불태웠다.

 

화자 루디안 스테파의 관점에서 이동해서, 이야기는 거주 제한을 당하고 유배 중인 린다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는 린다에게 가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상향 같은 곳이라는 걸까. 미제나가 유방촬영을 한다는 말을 들은 린다는 자신도 검사에 나서며 병 치료를 핑계로 티라나행을 꿈꾼다. 그 가운데 애증의 삼각관계가 피어났던가.

 

지루하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말미인 12장과 13장에 가서야 비로소 베일을 벗는다. 그리고 왜 루디안이 집요하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타령을 해댔는지에 대해서도 드러난다. 린다에 대한 풀리지 않는 거주지 유배형과 극작가 루디안의 작품에 대한 검열이 주요한 소설의 갈등을 빚는 요인으로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린다의 그것이 상대적으로 더 가혹해 보인다. 문화애호를 자처하는 대지도자는 정신분열적 증상을 보이는 루디안을 저승의 신부에게 보내 주라는 말에, 루디안을 옹호하고 나선다.

 

어쨌든 읽는 동안, 그전에 만난 이스마일 카다레의 다른 작품에 비해 너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대지도자의 몰락에 환호해야 하나? 악랄한 알바니아 독재 시스템의 실상을 알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루디안을 그가 보호하지 않았던가. 린다가 독재의 희생양이라는 점은 분명히 알겠지만, 그녀의 억울함에 감정이 전이되지 않는다.

 

여러 모로 보나 이번 독서는 씁쓸하기만 하다.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시간을 투자해서 읽었건만 뒷맛이 영 개운하지가 않다. 뭐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넘어가 보련다. 나중에 다시 읽게 되면 달라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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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7 1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책이 기대를 저버릴때도 있지요. 제일 아쉬울 때는 그래도 뭔가가 있겠지 하고 중간에 안 집어던지고 끝까지 읽었을때예요. 아 내 시간 하면서 말이죠.

잠자냥 2021-03-08 0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랑 비슷한 시기에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 좋았어요. 책 읽는 중간중간 알바니아 역사도 찾아보게 되고, 평소라면 관심 없었을 나라에 대해 찾아보게 되는 것도 문학의 힘이 아닌가 싶더군요.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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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앞서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이 있었다. 오래전 어느 출판사의 시리즈 가운데, 저자의 이름을 만나고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이탈리아의 독재자 일 두체가 친구를 따라 전쟁에 나선지 두 번째 해인 1940년에 발표된 책이다.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인 부차티는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파시즘 치하 아래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의 주인공은 이십대 청년 장교 조반니 드로고다. 그는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중위 계급장을 달고 바스티아니 요새에 부임한다. 처음부터 그는 이것이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라는 걸 직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친구 프란체스코 베스코비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도시를 떠난다. 말 타고 도시에서 하루거리라는 요새는 이미 십년 전에 폐쇄된 곳이고, 다른 요새는 그야말로 가득히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새로 가는 길에 그는 아마도 자신의 상관으로 추정되는 오르티츠 대위를 만난다. 그는 2년의 복무기간을 생각했는데, 오르티츠 대위는 요새에서 자그마치 18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드로고 중위는 깨달아양 했던 게 아닐까? 아니 어떻게 18년이나 국경지대에서 수비대로 복무한 사람의 계급이 꼴랑 대위란 말인가. 왠지 바스티아니 요새가 국경의 위치한 쓸모없는 이급 요새라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북쪽 사막 너머의 타타르인을 방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라고 했던가.

 

어쨌든 장군이 15일마다 검열한다는 조리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오르티츠 대위. , 그곳에는 그렇다면 장군도 있는 모양이지? 거대한 고독의 마법이라는 표현이 바스티아니 요새만큼 들어맞는 곳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드로고 중위는 황량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

 

도시에서 외떨어진 바스티아니 요새는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마력의 상징이다. 마티 소령의 설득에 네 달 정도만 머물고 떠나려던 드로고 중위는 결국 요새에 주저앉는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장교와 병사들이 그와 비슷한 처지다. 그리고 요새에서 북쪽의 왕국에서 언젠가 온다는 타타르족들의 무자비한 침입을 기다린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위협은 드로고와 동료들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철저하게 전설의 타타르인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낮과 밤이 서로 집어삼키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다.

 

어느 순간, 주인공 드로고 중위의 모습에서 젊은 날에 무한정일 거라고 생각하고 허송세월한 나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십대의 드로고 중위는 근 삼십년간을 오지의 요새에서 보냈다. 그의 선임자들처럼,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늦었던 것이다. 드로고 중위가 나라고 생각하고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에서의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을까?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는 시간은 도도하게 흐르며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시간은 드로고 중위의 젊음과 야망과 모든 것을 서서히 침잠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고 소멸된다. 다만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뿐.

 

요새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말을 생포하려고 부대에서 이탈했다가 동료의 총에 라차리와 타타르인들과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산악 지대 정찰에 나섰던 앙구스티나 중위가 차례로 죽는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언제부터인가 타타르인들이 요새 공략을 위한 도로 건설에 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총사령부는 드로고 중위의 망원경 관찰을 꼭 집어서 금지시킨다. 공연히 분쟁이나 병사들의 동요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쓸 데 없는 행동을 삼가라는 걸까?

 


그러는 와중에 드로고 중위는 대위를 거쳐 소령까지 진급하지만, 도시에 사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런 사회적 성공을 거둔다. 가정도 이루고, 심지어 이르게 손자를 본 친구들도 있다. 어쩌면 자신과 결혼할 뻔 했던 마리아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제 자신의 청춘을 바스티아니 요새에서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드로고 소령은 늙고 병들어 거동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바로 그 순간, 요새의 모든 이들이 기다린 타타르인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하지만, 요새 사령관이 된 시메오니 중령은 평생을 기다린 적과의 투쟁에 나서겠다는 드로고 소령의 마지막 소망을 거부하고 연대 마차에 태워 후송을 명령한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노병은 사라져 간다.

 

젊은 시절, 첫 배낭여행에서 호주 사막의 거대한 고독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내가 찾은 호주 사막은 기대했던 광활한 모래사막이 아니라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사막이었다. 가는 데마다 만나는 비슷한 처지의 배낭 여행객들 때문에 원하던 거대한 고독도 찾을 수가 없었다. 디노 부차티의 걸작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으면서 그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해결해 주거나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통을 지고 사는 것이다. 드로고 중위의 삶에 내 경우를 대입해서 그의 처지에서 작은 위로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오지의 요새에서 거대한 고독을 향유하며 결코 오지 않는 적으로 치환된 메타포로서의 죽음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서사를 창조한 부차티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런 걸작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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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6 1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이 콕 박히네요. 최고의 찬사잖아요. ㅎㅎ 저는 작년에 읽었던 밀크맨에 레삭매냐님 같은 찬사를 붙였었는데 올해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으면 그 감동을 다시 받을 수 있을어같은 느낌이 드네요. 리뷰 잘 읽고 다음에 읽을 책으로 바구니에 쏙 담아갑니다.

레삭매냐 2021-03-06 13:44   좋아요 3 | URL
우연히 알게 되어 고대하고 있던
작가의 책이었는데...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예약 주문을
날렸네요.

읽을수록 고 맛이 배어나는 칡같
다고나 할까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moonnight 2021-03-06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님 서평에 이미 다 읽은 느낌이지만^^;

레삭매냐 2021-03-07 08:56   좋아요 0 | URL
올해의 책으로 꼽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라로 2021-03-06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레삭매냐 2021-03-07 08:57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디노
부차티의 다른 소설들도 발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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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책이다. 허구한 날 적립금 쿠폰을 뿌려 대니 도저히 책을 안사고 배길 재간이 없구나 그래. 게다가 예전부터 언젠가 한 번 읽어 보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책이니 더더욱 안살 수가 없었노라고 나는 변명해 본다.

 

희곡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루이지 피란델로는 단편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생전에 자그마치 250편에 달하는 단편들을 썼다고 한다. 이 정도면 스탕달에 버금가는 소설 쓰는 기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루에 소설을 한 편이라도 쓰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았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소설집 <어느 하루>에 담긴 9편의 단편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화화된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루이지 피란델로의 단편 소설들은 그야말로 이탈리아 영화감독들의 보물창고였지 싶다.

 

9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만난 작품은 <유모>(죽은) <어머니와의 대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소설들은 시칠리아 이야기로마 이야기로 나뉜다고 하는 <유모>는 그 중간 정도가 되지 않나 싶다. 로마에 사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돌볼 유모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내의 친정에서 시칠리아 출신 건장한 산모, 그러니까 다른 아이를 돌볼 안니키아를 로마로 보낸다. 물론 안니키아에게도 갓난쟁이가 있다. 유배당한 남편 대신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안니키아는 어린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물설고 낯선 로마로 증기선과 기차를 타고 떠난다. 고향을 떠나는 안니키아에게 시어머니는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의 저주가 먹힌 걸까, 결국 고향이 남은 안니키아의 아들은 죽고 만다. 자신의 젖을 먹여 키운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에르실리아 아씨의 아이에게 집착하는 안니키아 그리고 그녀를 내쫓는 고용인들. 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작가의 추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른 단편인 <또 다른 아들>에 등장하는 어떤 어머니는 첫 두 아들만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불가피하게 낳은 막내아들은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과의 희망의 나라 아메리카로 떠나 소식 없는 아들들을 기다리는 시칠리아 출신의 사모곡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국 땅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알았다면 그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다시 <어머니의 대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대단한 기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시칠리아 봉건왕국의 군인들이 쳐들어오면 딸들에게 투신하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말이다. 얼마 전에 만난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영화 <표범>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리발디의 시민군과 보르보네 왕군이 격렬하게 시가전을 치르지 않았던가.

 

또 다른 어느 어머니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십대 소년 아들 체사리노 브레이를 기숙학교에 들여보내고, 몰래 다른 동생을 낳고 그만 죽는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도대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갓난쟁이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 소년은 교장의 도움으로 문부성 서기 일을 하면서 그야말로 고학으로 공부도 하고 아기도 돌본다. 그야말로 20세기판 막장 드라마급의 이야기가 아닌가. 도대체 아기의 아버지는 누구란 말이지? 어머니가 남긴 쪽지에서 알베르토라는 이름을 체사리노는 알아낸다. 그 다음에, 아기의 아버지가 아기를 찾아온다.

 

구시대의 상징으로 봉건사회였던 시칠리아가 근대화 시기로 돌입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죽어서도 묻힐 땅 한 뙈기가 없어 마르가리 영주를 상대로 한 투쟁에 돌입한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죽어가는 노인이 산 채로 자신이 묻힐 곳에 가서 묻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나, 그런 그에게 줄 땅은 없다며 공권력을 동원하는 마르가리 영주의 비정함이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깨진 항아리의 보수를 놓고, 기술자 지 디마 리카시와 항아리의 주인장 돈 롤로 지라파가 벌이는 해프닝도 흥미진진하다. 아니 어떻게 기술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항아리 안에 들어가서 항아리를 보수하는 작업을 해서 결국 스스로 갇히게 된 거지? 이런 땜장이에게 왜 돈을 주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애써 고친 항아리를 깨부수지 않고, 땜장이를 꺼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루이지 피란델로 작가는 결국 이런 타협이 어려운 이슈에 대한 상충하는 의견을 들어 당대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도출한 게 아니었을까. 누가 점심값을 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들에 합격점을 주고 싶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특히 늑대인간 스토리!), 정선되어 출간된 단편들이니만큼 그 콘텐츠의 완성도는 보장되지 않았나 싶다. 읽어야할 책들이 줄 지어 대기 중인 3월이 지나가고 나면 피란델로 선생의 책들을 좀 더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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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1-03-06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말씀처럼 정말 많은 단편을 썼네요. 소개해 주신 덕분에 저도 이 단편들을 읽고 싶어졌어요. 보관함에 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21-03-06 13:42   좋아요 0 | URL
세상은 넓고, 참으로 모르는
작가들이 넘쳐 나는 것 같습니다.

피란델로 선생의 책들을 좀 더
찾아 보고 싶네요.
 
마지막 순교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은형 옮김 / 지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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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의 책장에만 있다면 언젠가는 읽는다. 책쟁이인 나의 신조다. 지난 가을에 중고서점에서 산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순교자>를 읽었다. 이 책을 왜 샀는지,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산 모양이다. 제목만 보고는 저자의 특기인 일본 가톨릭 박해사를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추측이었다.

 

<마지막 순교자>에는 모두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타이틀인 <마지막 순교자>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 신정부로 넘어가던 1867년 대박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천주교 박해는 아마 에도 막부의 국시였던 모양이다.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이래, 종교의 자유에도 봄이 오나 싶었지만 카쿠레키리스탄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몰락해 가던 막부는 국시를 어긴 천주교 신도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방식의 도도이라는 고문을 가하고 배교를 종용한다. 형제와 자매를 동원한, 심지어 어린 아이까지 데려다가 고문을 하니 배길 재간이 없었다. 신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는 이들도 있던 한편, 키스케 같이 타인이 고문 받는 것을 보고 그만 곧바로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다.

 

키스케의 동료들은 하나 같이 그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를 연상했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배교한 키스케가 평안과 구원을 얻었을까? 아니다. 그는 다시 동료들이 갇힌 감옥에 찾아와 스스로 투옥을 자처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문과 그에 이어지는 고통이 두렵다. 그 가운데 바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키스케에게 자신을 다시 배신하고 좋고, 도망쳐도 좋다고 말한다. 다만, 그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역시나 보기 드문 일본의 종교를 주제로 다룬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집의 상당 부분에 1950년대 프랑스에서 희귀한 일본 출신 유학생이었던 자신의 체험을 글로 형상화했다.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리옹을 찾은 패전국 출신 청년은 당시만 해도 두터운 인종주의의 벽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네그로 친구가 새로운 학생으로 왔을 때, 연대하지 못하고 어설픈 차별와 혐오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지성인은 부끄러워한다.

 

동료 시코쿠 쿠니오 씨는 비록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을 버렸으면서도 학장과의 면담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실체는 숨기고, 오히려 화자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거론하니 화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에서 같은 나라 사람이자 동료에게 이런 배신을 당한 저자의 낭패감이 어떠했을지 이해가 되었다. 시코쿠는 귀국해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는 조교수가 되었다던가. 그러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타이틀 소설 외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로 <군종신부>였다. 프랑스 유학 시절 알게 된 지인의 편지로 1950년대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알제리 전쟁에 대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그전의 이야기에서 자신과 시코쿠를 초대해준 프랑스 가정에 대한 반발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로 르블롱 씨의 심기를 거슬렸다지. 편지의 화자는 그저 아무런 삶의 목표 없이, 살고자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나이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그가 원대로 가만 두지 않았다. 기관총 사수로 알제리 전선에 파견되었다고 했던가.

 

알제리로 가는 길에 만난 장교 대우를 받는 군종신부에게 신이 전쟁을 원하고, 신의 피조물인 다른 인간들을 죽이길 원하냐는 엄청난 질문을 던진다. 원래 알제리가 프랑스의 땅이었던가? 아니다. 알제리는 알제리 사람들의 땅이고, 프랑스 사람들은 그곳을 자원과 인력을 약탈할 식민지로 삼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들어온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할 차례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지배할 이유가 있다면, 알제리 사람들은 그들대로 민족해방과 독립을 주장할 이유가 있다.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정의가 충돌하면서 무력투쟁은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 되었다. 군종신부가 궁색하게 내놓은 신은 정의로운 전쟁을 원한다는 따위의 설교는 천 년 전 십자군 전쟁에나 걸맞은 구호가 아닌가 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 식민지에 살던 일본인들의 거주지 우물이 오염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방단을 조직해서 아무런 혐의 없이 만주인들을 의심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을 떠나 프랑스에서 연극배우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여동생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어느 아버지(아마도 자신의 경우가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자신이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이 원주민들을 배척하고 핍박한 일에 대해서도 저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난징과 인도차이나에서 전쟁 중에 일본군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양심적인 지식인 부류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도움이 안돼>에서는 폐병으로 요양차 병원에 입원한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상에 다양한 직종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병원에서 제각각 나름의 소용이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약사는 동료 환자들에게 공짜 약을, 요리사는 병원의 맛없는 밥으로 야식을, 전파사 수리공은 라디오를 고친다. 그렇다면, 연필과 종이로 벌어먹고 산다는 편견의 제물이 된 소설가는? 타인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냐는 핀잔을 먹기 일쑤다. 삶과 죽음이라는 형이상학 문제에 대해서도 소설가는 똑 떨어지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결론은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반세기 전, 소설가라는 직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통의 생각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가들의 위한 변명도 또한 많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글 쓰는 이들이나 독자의 범위에 포함된 이들에게나 먹힐 법한 이야기다. 먹고 사는데 바빠서, 혹은 너튜브에 혼이 팔려 소설이나 문학을 읽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도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닌가 말이다.

 

연휴의 끝물에 무언가 흥미로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예전에 사서 쟁여둔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순교자>가 큰 도움이 되었다. , 나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구나. 중고서점에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집이 떴다고 하던데 당장 나가서 사와야겠다. 이달에는 읽을 책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적어도 읽을 책이 없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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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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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전에 빌린 책들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빌린 책이다. 내가 도서관을 사랑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물론 어떤 책을 빌리러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만나게 되는 책들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나름 목적 있는 독서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것이 책 읽는 이들의 즐거움이 아닐까.

 

아마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저자가 에코이기 때문이리라. 숱한 저자들일 책을 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집어 들지는 않는다.

 

이 세계적인 석학은 정보 과잉과 극단적 소비의 시대를 유동 사회(Liquid Society)라고 명명한다. 우리 현대인은 소비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우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끊임없이 사들이고, 방치하고 결국 폐기한다. 저자의 주장 대로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핸드폰은 이미 우리의 눈을, 귀를 그리고 심지어 성기까지 대신할 판이다.

 

에코는 또한 SNS와 너튜브 시대에도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자신은 트위터를 하지도 않는데, 자신을 사칭한 이들이 암약하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라는 점을 꼬집는다. 그렇다면 그를 사칭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유명세가 아닐까? 며칠 전 들은 팟캐에서는 인별그램을 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필라테스를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필라테스와 빡센 다이어트로 만들어진 환상적 몸매는 버추얼 공간에서 자산이 된 지 오래다. 누군가의 고통이 나에게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동영상을 찍어 너튜브에 올릴 생각을 하지 말고, 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대가는 말한다. 진짜 넘쳐 나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적합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에코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미친 세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표현은 역자와 출판사의 작품일까? 그것이 좀 궁금했다. 에코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서 당시 이탈리아 총리였던 베를루스코니가 히틀러 같다는 비유를 적당하게 만들어서실은 언론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한다. 기자가 지식인의 속마음까지 넘겨짚어서 기사화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긴. 세 개나 되는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사실을 마음대로 왜곡하고 주작질도 마다하지 않는 언론 현실에 빗대어 본다면 그 정도는 애교지 싶지만 말이다.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광풍처럼 몰아닥치는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에코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세계는 거의 우연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런데 어떤 우연들이 겹친다고 해서, 누군가가 어떤 사적 이익을 편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근거 없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음모와 비밀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가령, 미국의 달나라 착륙에 대해 여전히 불신하는 이들이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당시 가장 유력한 라이벌이자 검증할 실력까지 있었던 소련이 가만 있었겠냐는 것이다. 지금은 퇴임한 어느 나라 대통령 역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검증되지 않은 낭설들을 퍼뜨리는데 앞장섰다가 결국 선거에서 지고 초라하게 물러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본거지를 남부의 어디로 옮겨 권토중래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더 이상 정치판에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 대가는 대가라는 생각이 에코의 글들을 접하면서 불쑥불쑥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작가의 빛나는 문장들과 사유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베를루스코니 같은 B급 정치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끝으라는 말로 점잖게 그는 조언한다. 내추럴 본 관종을 자처하는 그런 인물들에게 언론이나 대중이 주는 관심 자체가 과분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도 그와 유사한 인물들이 준동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에코 선생의 처방전을 주문하고 싶다. 보수언론의 지면이고 자신이 그렇게 애착하는 SNS고 간에 뭐라고 떠들어 대건 간에, “똥싸개타령을 하던 에코의 어머니가 하셨던 대로 그냥 무시하라는 거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다. 내가 던진 일말의 관심과 비판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모바일폰에 대항하는 책의 시대가 끝났다는 타령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책은 꿋꿋하게 이 위기의 시절을 버티어 가고 있다. 수백년 전의 책들은 여전히 우리의 곁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80년대 초반에 등장한 플로피 디스크를 읽어낼 수 있는 컴퓨터는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정전이라도 된다면, 그 현란한 정보 검색과 숱한 기능을 자랑하는 이북을 필두로 한 전자기기들은 모두 쓸모 없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라는 게 현자의 고언이다. 우리가 신주 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CD나 엄청냔 대용량을 자랑하는 USB도 마찬가지란 말씀. 나만 하더라도 오래 전 100메가 짜리 ZIP 디스켓이나 1기가 짜리 재즈 드라이브가 출현했을 때 얼마나 경이롭게 느꼈던가. 지금은 손톱만한 사이즈의 USB들이 그 이상의 저장 용량을 자랑한다. 앞으로 저장 매체 기술의 진보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저장된 정보의 유용성과 유효기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도 에코 선생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정보 과잉의 시대, 에코 선생은 인터넷을 타고 퍼지는 가짜 뉴스들에 대해서도 경계하라는 말씀을 잊지 않는다. 예전에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전파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범지구적 차원의 가짜 뉴스가 횡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팩트 체크에 좀 더 신중하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아니 그런데 그런 팩트 체크를 담당해야할 언론이 나사서 투박한 스타일로, 자신이 예전에 썼던 기사에도 반하는 가짜 뉴스들을 앞장서서 전파한다면? 그야말로 쉬르리얼스틱한 현재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미친 세상일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에코 선생은 우리가 숱하게 읽어대는 책들에 대해 우리가 책장을 덮자마자 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었다. 나같은 책쟁이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는 무당파의 대사부 장삼봉 앞에서 신묘한 태극권을 연마하는 장무기 같은 선수들일 뿐이다. 읽고 상상하고 잊어라. 그러다 보면 구원에 도달할 지도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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