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캐
필라르 킨타나 지음, 최이슬기 옮김 / 고트(goat)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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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알게 되었지? 출발점을 특정할 수가 없다. 동네 도서관에 책이 없어서 상호대차로 지난주에 빌려서 부지런히 읽었다. 요즘 책구매를 최대한(?) 자제하고 어지간한 책들은 도서관 대출로 읽는 중이다. 어쩌면 오늘도 집에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서 또 어떤 책을 빌리지도 모르겠다. 항상 후보들은 줄지어 대기 중이니 무슨 걱정이랴.

 

소설 <암캐>의 공간적 배경을 추적해 본다. 부에나벤투라까지는 찾았는데 아마 콜롬비아 서부 태평양 바닷가에 인접한 어느 작은 어촌 마을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 다마리스가 도냐 엘로디아에게 암놈 강아지, 치를리를 한 마리 데려오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수놈들은 그나마 입양이 손쉬운데, 암놈 강아지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애견인이 아니다 보니 그 쪽 세계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무려 11마리의 강아지들이 태어났는데, 어미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도입부가 결말에 가서 마주하게 되는 비극과 수미상응하는 어떤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면 소설가들은 자기 소설의 곳곳에 그런 장치들을 아주 영리하게 계획적으로 배치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치를리의 형제들은 모두 죽고 유일하게 치를리만, 아이가 없는 다마리스의 지극정성으로 생존하는데 성공한다. 다마리스의 남편인 로헬리오는 이미 데인저, 올리보, 모스크라는 세 마리의 개들을 키우고 있는데 난폭하게 개를 다룬다. 다마리스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치를리(미스 콜롬비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했던가)에게 로헬리오가 손을 댄다면 죽일 지도 모른다는 고백도 한다. 이거 조금 살벌한데 그래.

 

다마리스와 로헬리오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텔레노벨라를 시청하며 아주 소박한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리고 이웃에는 레예스 저택이 있는데, 그 집 아들이었던 7세의 동갑내기 니콜라시토를 파도가 집어 삼키는 비극이 벌어졌었다. 그 때가 197712, 셜리 사엔스가 미스 콜롬비아가 됐던 해라고 한다. 셜리 사엔스가 실존 인물인지 구글링으로 검색해 보기도 했다. 역시 소설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다마리스의 보살핌을 받는 치를리가 계속해서 가난하지만 인정 많은 부부와 같이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느 날 다른 개들을 따라 밀림으로 들어간 치를리는 한 달 넘게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마리스는 마체테 칼로 무장하고, 치를리를 찾아 무성한 정글을 이 잡듯이 뒤지지만 결국 달아난 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차에 치를리가 돌아왔다.

 

참 다마리스는 부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많은 돈을 들여 주술의 도움에 청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다마리스가 나중에 치를리가 새끼를 가지게 되었을 때, 모종의 시기심을 느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로헬리오는 다마리스에게 정글의 맛을 본 치를리가 계속해서 도망칠 거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동시에 도주와 귀환을 반복하는 치를리에게 다마리스도 서서히 지쳐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치를리는 임신한 채로 다시 다마리스에게 돌아온다. 치를리는 자기가 낳은 새끼들에게 모성이 없는지 다시 밀림으로 도망쳐 버렸고, 남은 새끼들은 다시 다마리스가 돌보게 됐다. 수컷 두 마리는 쉽게 주인을 찾아 주었지만, 하나 남은 암컷 새끼는 원하는 이가 없어 히메나 아주머니에게 주기로 결정한다.

 

일이 좀 꼬여서 히메나 아주머니에게 암컷 강아지를 주지 못하고, 대신 어미인 치를리로 대신하게 된다. 히메나에게 단속을 단단히 하라고 주의를 주지만, 치를리를 다시 다마리스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레예스네 니콜라시토 방의 커튼을 엉망으로 만들고, 비극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한다.

 

필라르 킨타나 작가는 다마리스와 치를리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엔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을 담담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언뜻 보면 강아지 치를리의 일생에 주인공의 삶을 투영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는 치를리(임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라고나 할까. 유년 시절, 니콜라시토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던 다마리스에게 소중하게 지켜온 니콜라시토의 방을 엉망으로 만든 치를리를 그녀가 과연 용서할 수 있었을까. 소설의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하는 증오와 애정, 시기 같은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가 느닷없이 닥치는 폭풍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2만 원에 육박하는 책값이었다. 물론 책의 가치를 분량으로 매길 수는 없겠지만 백쪽 조금 넘어가는 책인데 말이지. 그게 조금 궁금했다. 어쩌면 서지 정보에 나와 있는 대로, 알려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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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양장) - 2024년 하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도서
과달루페 네텔 지음, 최이슬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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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과달루페 네텔 작가의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를 빌렸다. SNS에 가끔 올라오는 책소개 글의 유혹을 이길 방법이 없더라. 그리고 존 밴빌의 신간과 카뮈의 <계엄령>을 만나기 전까지 네텔 작가의 <이네스>에 빠져 버렸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나서 다시 <이네스>에 매달렸다. 많은 장점 가운데서도 가독성 하나는 끝내주는 책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프랑스 유학파로 지금은 고국인 멕시코에 돌아와서 계속해서 연구활동 중인 라우라다. 그녀에게 결혼과 출산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녀의 친구 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아우렐리오를 만나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다. <이네스>에서는 라우라의 삶과 동시에 알리나 출산, 이웃 도리스네 이야기 그리고 라우라의 집에 둥지를 튼 비둘기 커플의 이야기가 엇갈리면서 흥미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우선 알리나의 출산 도전은 난관의 연속이다. 늦은 나이에 출산을 결정해서 아이를 갖기가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렵게 얻은 아이는 임신 중에 심각한 문제를 얻어, 태어나도 곧 죽게 될 거라는 비관적 전망들을 담당 주치의들로부터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옆집에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도리스와 그녀의 아들 니콜라스가 산다. 남편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도리스는 하나 남은 니콜라스마저 잃을까봐 극도로 보호하고 외출까지 막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니 바깥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어린 아들과의 충돌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뻐꾸기의 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둘기 커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서사는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한 이네스의 탄생 그리고 이네스를 돌보게 되는 보모 마를레네의 이야기를 위한 준비의 하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운명에 대해 좋은 소식은 하나 없다. 하지만 알리나는 출산을 강행한다.

 

그렇게 태어난 이네스는 살고자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세상에 보여준다. 심지어 미렐레스 박사는 얼마 살지 못할 아이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런 비극의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주변의 경고에도 꿋꿋하게 생을 영위해 나간다.

 

이런 고통의 바다 속에서 알리나는 무지막지한 인터넷 쇼핑이라는 방식으로 현실에서 도피를 시도한다. 일견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라면 과연 어떤 방식을 선택했을까? 아마 책으로의 도피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몽테스키외의 말을 빌리자면, 한 시간의 독서가 이기지 못할 세상의 고통은 없다고 했던가.

 

한편, 비둘기 커플 둥지에 탁란한 유사부모의 이미지는 이네스의 보모 마를레네 뿐 아니라자신도 실제 삶에서 니콜라스를 통해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린 그리고 언제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이네스에 대한 마를레네의 집착(?)은 과연 알리나의 의심을 살 정도로 도가 넘지 않았나 싶다. 산후 우울증세와 더불어 알리나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 절박한 처지에 처한 부모라면 아마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의 2/3 정도 되는 지점까지는 중요인물인 이네스가 언제라도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빌미로 해서 독자를 잡아 놓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나는 <이네스>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알리나의 쇼핑 부채나 마를레네에 대한 의심 같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잠재적 문제들이 하나둘씩 풀려나가는 재미는 확실했다. 하지만 여성들간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좀 작위적이라고 해야 할까. 니콜라스가 멀리 떠난 뒤, 라우라와 도리스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대표적이었다.

 

소설의 초반에 독자를 사로잡은 생명에 대한 강렬한 주제의식과 전개방식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이런 기세를 타고 소설의 후반부까지 긴장감을 유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럼에도 뛰어난 가독성과 삶에 천착하는 이네스의 강인함을 중심에 둔 서사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왠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어울리는 그런 소설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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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24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시간의 독서가 이기지 못할 세상의 고통은 없다˝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레삭매냐 2025-03-25 07:12   좋아요 1 | URL
현실과 세월이 하 수상하니,
책에서 위로를 구하게 되는가 봅니다.
 
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안건우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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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110일 전의 비상계엄 사태가 시발점이었다. 책쟁이들은 무언가 이런 시절을 달랠 수 있는 책을 원했고, 출판사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알베르 카뮈의 희곡 <계엄령>을 신속하게 펴냈다. 무려 77년 전에 발표된 카뮈의 희곡 <계엄령>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찬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희곡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에스파냐 총독이 다스리던 카디스에 어느날 페스트와 그의 비서가 등장해서, 권력을 이양 받는다. 당연히 페스트는 독재/전체주의의 상징이다. 실질적 권력자였던 총독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보장받고, 권력을 페스트에게 넘긴다. 왜 이 장면에서는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를 수상으로 발탁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페스트와 그의 충실한 비서는 각종 포고령과 표식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카디스를 장악해 버렸다. 전체주의 독재자답게 죽음이라는 공포 그리고 까다로운 조항의 규칙과 규정들을 제정해서, 대중의 비판을 무력화시킨다. 삼단계로 구성된 살생부에서 마지막 단계인 말소의 위력은 대단하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말을 듣지 않는 카디스 인사들은 예외 없이 말소 처리된다. 그렇게 카디스 시민들은 페스트의 노예로 전락한다.

 

이런 테러와 공포로 무장된 페스트 일당에게 시장이나 주정뱅이 나다처럼 적극적으로 부역하는 이른바 콜라보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희곡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에고와 그의 약혼녀 빅토리아처럼 페스트로 죽어가는 무고한 이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저항에 나서는 이들도 없지 않다. 문제는 카디스의 대부분의 인사들처럼 그들 역시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카뮈는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카디스 시민들에게 주어진 억압과 굴종의 족쇄를 풀어버릴 수 있게 저항에 나서야 한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서사를 이어나간다. 그 와중에 빅토리아의 아버지 카사도 판사네 집에서 벌어지는 막장극은 한바탕 코미디다.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에피소드 역시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희곡에서 빠지면 안 되는 그런 요소가 아니었을까.

 

카뮈가 <계엄령>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어쩔 수 없이 시대정신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디에고로 대변되는 선동가들은 전후 프랑스 정계에서 활발한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프랑스 공산당(PCF)을 연상시킨다. 전후 비시 정부의 나치 부역자들을 숙청하는데 성공한 프랑스는 서방세계를 위협하는 스탈린의 소련과의 냉전 모드에 돌입한다. 카뮈의 <계엄령>은 그런 상황에서,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모델로 삼아야 하지 않았냐는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에스파냐 내전에서 승리하고 스스로 카우디요의 자리에 오른 프랑코 총통의 에스파냐가 희곡 <계엄령>의 무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카뮈의 전체주의 비판이 공산주의 뿐 아니라 서방세계의 독재 전체주의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빅토리아가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연인을 대신해서 대속제물을 자처하는 디에고의 모습에서는 기독교의 메시아가 연상됐다. 결국 그의 거룩한 희생으로 빅토리아는 구원받고, 카디스 역시 페스트의 손에서 해방된다. 문제는 그렇게 한 번 물러간 페스트(전체주의)가 남긴 악의 씨앗이 언제고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치명적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런 점은 우리가 강고하다고 믿어왔던 민주주의가 이번 사태에서 얼마나 취약했던가와 대비되면서 많은 교훈을 준다.

 

카뮈의 <계엄령>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했었나 보다. 아무래도 디테일에서 70년이라는 시간의 더께를 뛰어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무지와 망각을 먹고 자라는 독버섯 같은 전체주의 독재의 망령에 대한 청년작가의 은유는 탁월했지만, 우리의 상황은 당시 프랑스가 처한 그것과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에 대해 몰라서 더 공감하기 어렵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책의 말미에 달린 해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자꾸만 지연되는 정의 때문인지 무력감에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린 느낌이다. 문득 <계엄령>을 진짜 연극 무대에서 관람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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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5-03-23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발써 100일이 넘었군요. 답답한 상황이 끝날 기미가 안보이네요.

레삭매냐 2025-03-24 07:26   좋아요 1 | URL
그야말로 천일 같은 백일이었습니다 ㅠㅠ
끝이 없네요.

그레이스 2025-03-24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별 3개예요?
시대적 한계가 있었군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울화가 ㅠㅠ
병나겠어요ㅠㅠ

레삭매냐 2025-03-25 07:11   좋아요 1 | URL
1948년의 프랑스와 2025년
의 한국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좀 아쉬웠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 가는데,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점
이 정말 답답합니다.
 
정신과 의사 페이지터너스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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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소굴에서 꾸준하게 출간되고 있는 페이지터너 시리즈를 응원한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발굴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기획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페이지터너가 없었다면, 내가 언제 브라질 출신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책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겠는가 말이다.

 

<정신과 의사>는 네 편의 단편들과 하나의 중편이자 문제작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처음의 네 편은 후반에 배치된 걸작 <정신과 의사>를 위한 빌드업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가치나 흥미가 떨어지는 건 절대 아니고.

 

점성술과 불륜에 대한 의혹으로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점쟁이>는 비극이다. 세상에 사랑의 종류는 참으로 많다고 하지만, 세 명의 남녀가 연루된 연애사는 어쩔 수 없이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마샤두 지 아시스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가 부여한 신부의 길을 거부하고 도망친 다미앙의 비겁한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회초리>는 또 어떤가. 도대체 신학교에서 무얼 배웠단 말인가? 자신이 신학교의 엄격한 교육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학교 탈출 사유를 구명하러 간 집에서 일하는 하녀가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녀를 변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녀를 체벌하겠다는 여주인에게 회초리를 가져다 주는 행동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유사 지식인의 이중적인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작품이 바로 <회초리>였다. 내 생각에 회초리는 하녀가 아닌 다미앙이란 녀석이 맞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저명한 폴카 작곡가 페스타나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명인>에서는 요즘으로 치면 당시 인기가요 정도인 폴카 작곡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상투적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뼈를 깎는 그런 노력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니 그런데 세상 아래 그런 획기적이로 참신한 아이디어가 남아 있었던가. 결국 우리 인간은 기존의 창작 질서 아래서 만들어진 예술을 바탕으로 해서 그나마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기껏 정성을 들여 만든 곡을 아내는 쇼팽의 야상곡이 아니냐고 묻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아내의 지적이기 때문에 미스터 페스타나는 죽을 지경이다. 모름지기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이 더더욱 힘들게 다가오지 않던가. 페스타나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것으로 남은 여생을 보낸다. 누구나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쇼팽처럼 이른바 '불멸의 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거니까 말이다.

 

, 이제 문제의 작품 <정신과 의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작품에서 작가는 과학에 기반한 이성이 알고 보면, 광기의 다름이 아니다라는 주제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브라질의 이타구아이시(). 그리고 이타구아이시에 정신병원을 개설해서, 사회에서 소외된 정신병자들을 수용하고, 정신병의 근원을 연구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밝혀내겠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진 인물로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시망 바카마르치(포르투갈 어로 '낡은 산탄총'이란 뜻이라고 한다) 박사가 등장한다.

 

지금은 덜 그렇지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정신병은 사탄의 저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신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병 역시 치유가 가능한 병이 되었다. 서구에서 공부한 바카마르치 박사는 브라질 땅 이타구아이에 이런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정신병원을 열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정신병 환자들이 쇄도하기 시작한다. 물론 개설 전까지만 하더라도, 카자 베르지(녹색의 집) 병원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위용을 자랑하는 과학의 힘 앞에 사람들은 굴복했다.

 

초기의 선한 의도와 달리 카자 베르지 병원의 운영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카마르치 박사는 자신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은 광인으로 몰아 병원에 가두기 시작했다. 그나마 처음에는 이런 수용이 선별적으로 행해졌지만, 나중에 가서는 거의 무차별적으로 정신의 균형을 바로 맞추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실시되었다. 바카마르치 박사는 전면에 내세운 그렇다면 선진 과학에 반대하냐는 말에 이타구아이 시민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상황이 파시즘의 부상과 아주 유사하지 않은가? 이타구아이에서 정신병 환자 지목과 잇달은 정신병원 수용으로 바카마르치 박사는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권력자가 되었다. 이런 시스템의 지속이 과연 가능할까? 거의 4/5에 달하는 시민들이 정신병원에 갇힐 신세가 되자 결국 이발사 포르피리우스를 중심으로 해서 칸지카스 폭동이 발생하고, 11명의 사망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충돌이 발생한다. 결국 군대까지 동원해서 가까스로 사태는 수습되지만, 포르피리우스는 천하는 며칠 가지 못하고 주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소설의 서사는 그렇게 희비극으로 다가온다.

 

미치광이들을 연구하던 바카마르치 박사마저 광기에 물들었는지 자신의 아내 에바리스타 부인도 희생시키고, 마지막에 가서는 가장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인 스스로를 병원에 수용해 버린다. 어쩌면 바카마르치 박사가 광기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건 예견된 사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성으로 무장된 지식인 행세를 하는 전체주의자에게 권력을 내주었을 때, 해당 주체가 서서히 광인이 되어 가는 과정은 어느 현실과 너무 유사해서 책을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미치광이 바카마르치 박사는 궁예의 관심법을 능가하는 실력으로, 다양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적들을 광인으로 낙인찍어 카자 베르지 병원에 수용한다. 독재를 추구하는 박사는 자신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거부한다. 현실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이게 과연 1881년에 쓰인 책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정신과 의사>에서 총기라는 물리적 폭력의 은유를 상징하는 바카마르치는 선과 악을 주관하는 절대자로 등장한다. 누가 그에게 그런 권력을 주었던가. 그는 주권자인 이타구아이 시민들을 무시하고, 카자 베르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런 바카마르치 박사의 행태에 분노한 시민들을 폭동을 일으켜서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만, 동원된 군대라는 상위의 폭력 앞에 다시 한 번 좌절한다. 마샤두 지 아시스는 작가는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의 위협에 대한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볍게 시작한 <정신과 의사>가 가벼운 단편들을 지나, 후반에 가서 이런 화끈한 마무리로 귀결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블랙 유머 그리고 재치 넘치는 전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짧지만 강렬한 한 방을 담은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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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사이
케이티 기타무라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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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처음 듣는 작가인 케이티 기타무라의 <친밀한 사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서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원래 리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따끈따끈할 때 써야 한다는 나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나 보다. 그래도 기록을 위해 기억을 더듬어 가며 리뷰를 써본다.

 

주인공 여성은 여러 가지 언어에 능한 통역사다. 최근까지 뉴욕에 살던 주인공(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머지 가족은 싱가폴로 가고 자신은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통역사로 취직되어 헤이그로 이사했다. 문득 이 소설에서 이름 없는 주인공의 익명성은 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모름지기 이름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마련이니까. 어느 의미에서 주인공은 미국 작가들이 선호하는 국외자(expatriate)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헤이그에서 통역사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친밀감'을 동반한 관계들을 맺어간다. 아마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여전히 국외자 신분이기 때문에 예의 적정 수준의 친밀감을 넘지는 않는다.

 

독자는 주인공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하는 통역사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예상했던 대로 모종의 임무가 주어진다. 그것은 서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의 독재자로 반인도적 범죄를 필두로, 다양한 죄목으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을 위해 통역하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빛과 어둠은 있는 법이지. 민간인 학살과 불법 체포와 구금 등 예상되는 독재자들의 일반 형태를 그는 그대로 따른다. 재판에 앞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고한 독재자를 풀어 달라는 시위에 나선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그래.

 

주인공은 헤이그 출신의 부유한 남성 아드리안과 썸을 타는 중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 과정에 있다. 무언가 깨끗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으면 좋을 텐데. 리스본으로 간 아름다운 아내 개비와 아이들을 쫓아 아드리안은 헤이그를 잠시 비우고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파트에 와서 지내라는 제안을 건넨다. 주인공이 새로운 애인 아드리안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상대방인 아드리안이 느끼는 자신의 가족과 전(?) 아내에 대한 친밀감을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국 주인공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결국 국외자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

 

한편, 독재자는 자신의 모국어인 아랍어 통역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통역을 의뢰한다. 게다가 독재자는 자신의 변호사로 개비의 지인이자 아주 유능한 것으로 알려진 케이스를 선임한다. 이런 불편한 관계의 설정은 뭐랄까, 불편한 사이에서 피어나는 친밀함을 목표로 한 그런 빌드업이 아닐까 싶다.

 

도대체 기타무라 작가가 모델로 삼은 독재자가 누군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코트디부아르 출신 로랑 그바그보라고 한다. 모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에에서 무려 박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 출신 정치인이었다. 소설에서 독재자가 아랍어 통역 대신 프랑스어 통역을 고수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한 때, 민주화투사였던 인사가 독재자로 변신해서 선거에 불복하고 나라를 내전의 수렁에 빠뜨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바그보는 전직 국가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 서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딧 레이스터르의 <젊은 여자에게 돈을 건네는 남자>라는 그림을 찾아 보기도 했다. 현대에 사진이 이미지와 상징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 근대에서는 회화가 그런 역할을 했다. 작가의 설명으로 보는 그림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명확하게 다가왔다. 케이티 기타무라는 그림의 심부에 "존재하는 불일관성"이 직조하는 긴장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떨까?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독재자를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했지만, 다수 증거와 증인들의 실체적 증언에도 불구하고 소추관들은 인용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도덕적으로 독재자는 분명 유죄였지만, 법리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바로 이런 불일관성이야말로 작가가 <친밀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그바그보 역시 현실세계에서 무죄 판정을 받고 풀려나는데 성공했다. 정의의 불일관성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모양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서의 친밀감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느끼는 어떤 친밀감이 더 나은 관계로 이끌어 간다는 보장이 없다. 주인공 역시, 재판소 통역관 일을 마치고 또 다시 부유하는 이방인이 된다면 지난 일 년 동안 쌓아올린 친밀감 역시 모래성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친밀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친밀한 사이>는 케이티 기타무라의 네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프린스턴 출신으로 무려 문학 박사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고. 다음달에 신간 <오디션>이라는 새로운 소설이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데, 플롯을 보니 상당히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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