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인 이야기 - 모험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조각하는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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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중고서점에서 한 번 사서 볼까 싶던 책이다.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바로 옆 북트럭에 있는 걸 보고는 막 나오는 길에 빌려서 순식간에 다 읽었다. 대중들을 위한 역사 개설 정도의 수준이라 다 읽는데 이틀이 걸렸다. 역사책이 이렇게 읽는 재미가 있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1492년 콜럼부스보다 한참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는 바이킹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문난 깡패 집단인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를 근거로 해서 유럽에 진출했던 모양이다. 바다와 강은 물론이고, 육지에서도 배를 끌고 다녔다는 바이킹들은 바랑기아 용병대로 유럽 영주들에게 고용되어 마치 해병대 같은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이들은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에까지 진출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린란드에 그들이 정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후 상황이 나쁘지 않았지만, 간빙기가 지나고 다시 날이 추워지고 자원이 소모되면서 그린란드 정착지에 있던 바이킹들은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의 일파로 알려진 노르만족이 프랑스 서북부의 노르망디에 거주하게 되면서 유럽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훗날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진 노르망디공 기욤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 쟁탈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아우르는 왕국을 신설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얼마 전에 읽은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도 나오는 마틸다 왕비가 플랜터저넷 왕조의 시조가 되는 헨리 2세의 어머니였단 말이지. 사실 뜬금 없이 1권을 읽고 나서 10권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당대 역사를 모르고 읽다 보니 궁금한 점들이 좀 있었는데, 이번에 주경철 선생의 <중세 유럽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한 점들이 많이 풀리게 됐다. 역시 이래서 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싶다.

 

누가 뭐래도 중세 유럽을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은 봉건제와 교회였다. 이런 이유로, 세속군주와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의 대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내린 파문을 취소해 달라며 눈밭에서 속죄 의식을 거행했다. 결국 교황권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세속에서 권력 투쟁에 성공한 하인리히 4세가 복수전에 나서면서 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이었던 서임권은 교황에게 귀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점 중의 하나는 중세 최고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연옥>이라는 개념이었다. 원래 종래의 기독교 세계관은 구원을 상징하는 천국과 처벌을 상징하는 지옥의 이원적 시스템이었는데, 여기에 중간적인 "연옥"이 추가되었다. 사후 바로 천국에 갈 정도의 선행을 쌓지 않은 이들은 바로 이 연옥에서 수년간의 참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천국에 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훗날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이라며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지만, 정말 신박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청빈과 자본주의 이윤 추구에 대해서도 기독교는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지만, 근대 사회의 주인공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원론이 아닌 각론에서 탄력적인 운영의 묘미를 보여준다. 노동을 통해 마련된 자본이기 때문에, 돈놀이꾼이 추구하는 자본을 통한 이자장사도 가능하다는 그런 논리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렇다면, 돈놀이꾼이 주무르는 자본이 노력을 통해 얻은 게 아닌 불로소득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결국 과정과 절차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성장에 스토아 철학은 많은 부분에서 기여했다.

 

가난과 청빈에 대해서도,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프로테스탄트 자본가들은 맹공을 퍼붓는다.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잡아다가 강제 노동을 시켰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붉은색 염료로 사용되는 브라질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혹독한 노동에 빈민과 부랑자들이 동원됐다. 일하지 않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는 강압적 프로파간다의 출발점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었다.

 

살인을 금하는 기독교 정신도, 이교도와의 전쟁에서는 예외로 간주됐다. "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격문으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으로 결국 성도 예루살렘은 그들의 바람대로 탈환되었다. 서방 세계에 비해 우세했던 동방 무슬림 세력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십자군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십자군 이데올로그들은 이교도와의 전투에 참가한 기독교 전사들이 적과 싸우다 사망하면, 순교자가 되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서 살인은 금하고 있지만, 신앙의 적에 대해서는 예외적이라는 억지논리로 십자군 전쟁의 폭력성을 정당화했다.

 

세속 권력과 교황권의 투쟁은 결론적으로 근대적 사법 제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가령 예를 들어 신명재판 같이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관습법이나 성문화된 법조항이 필요하게 되었고, 부르주아 근대사회로의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던 시절이 바로 중세였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 아닌가 싶다.

 

21세기에 메르스와 코로나19가 있었다면 중세에는 흑사병(페스트)라는 팬데믹이 전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선페스트는 교역을 통해 지중해 연안 도시에 상륙했고, 전 유럽인구의 1/3 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설적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인간의 중요성에 집중하게 되었고, 피렌체와 같은 자유도시의 발전 그리고 뒤이은 르네상스 인본주의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됐다.

 

16세기 대항해시대에 세계를 제패하게 될 서구문명의 도래에 앞서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다는 주경철 선생의 탁월한 빌드업에 경의를 표한다.

 

[뱀다리] 말미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이야기를 하지 않았네. 21년 전에 로마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만들었다는 첫 번째 피에타 상의 실물을 보고 그만 숨이 멎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작품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젊은 천재의 첫 번째 시도와 두 번째 발디니 피에타 그리고 말년의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보여주는 아우라는 또 달랐다. 대리석 돌 속에서 이런 작품들을 뽑아낼 수 있는 천재 조각가의 실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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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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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하는 빅토르 바통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아마 바통 씨가 꿈꾸던 미래의 부유한 모습이 아닐까.)


빅토르 바통은 몽상가를 꿈꾸지만 그의 실체는 망상가에 가깝다. 첫 번째 세계대전에서 왼손에 영구적 장애를 입은 바통 씨는 오늘도 거리에서 친구를 찾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외롭다. 아니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아닌가. 친구가 있다면, 바통 씨가 새로운 친구를 찾을 리가 없겠지. 그는 왜 친구가 없을까.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기가 팍팍한 프랑스 파리에서 상이 용사가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1924년 프랑스 출신 에마뉘엘 보브는 자신의 첫 소설 <나의 친구들>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은 바통 씨는 비롯 가난뱅이지만, 겸손하고 예의를 차리는 그런 친구다. 문제는 가끔 망상에 젖어 선을 때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그의 성정은 치명적 결과를 가져 오지만 말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우유 가게 아가씨에게 고백공격을 했다가 보기 좋게 차였다. 아무래도 이 친구, 금사빠인 것 같다. 모든 정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그런 경향이 있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거라구?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면서도, 종종 선을 넘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그리고 상대방의 선의를 자신이 결정하고, 관계를 시작해 버린다. 가만 살펴 보니, 인간 관계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미션이 아닌가. 특히나 나이가 들어서 그러니까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보고 난 뒤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기란 더더욱 어려운 법.

 

그렇다면 애타게 자신의 속을 드러낼 만한 친구를 찾는 바통 씨의 문제는 무엇일까? 친국에 대한 격언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다 말할 필요는 없겠지. 바통 씨의 감정이 너무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궁핍한 사정을 친구에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상대방이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나? 그들이 바통 씨에게 원하는 건, 50프랑을 빌리거나 혹은 하룻밤의 즐거움 정도다. 아니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거리에서 그가 만난 이들은 하나 같이 그에게 무언가 금전적인 부분을 요구한다. 이 소심한 남자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리고 또 앙리 비야르 같이 정체가 수상한 사람의 여자친구와 사랑에 빠지질 않나. 아까 내가 뭐랬어, 바통 씨는 금사빠라고. , 이 사람 좀 이상한데 그래.

 

자신에게 양복을 살 돈과 일자리를 제공한 라카즈 씨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기차역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박애정신의 발로로 라카즈 씨는 바통 씨에게 돈도 주고 또 일자리도 주었다. 아니 그랬더니만, 사리판단하지 못하는 바통 씨는 그의 어린 딸에게 금사빠 정신을 발동해서 추파를 던졌다가 그만 낭패를 당한다. 아니 도대체 어쩌자구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거지? 아 너무 감정이 이입된 것 같다.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그리고 평소의 바통 씨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놀랄 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단 말인가. 자신을 가난뱅이 상태에서 빼낼 구조선을 그렇게 걷어찼단 말이지. 한 숨이 절로 나온다.

 

에마뉘엘 보브 작가는 디테일의 강자답게 아주 세세한 부분을 포착해낸다. 타인의 손톱 정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서, 아 당시 파리 사람들은 그런 점들을 중요하게 생각했구나. 아울러 어느 개인의 입성에 대해서도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점을 보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바통 씨에게 그런 면면을 투영해서, 목욕재개하고 라카즈 씨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안개 낀 파리 거리가 마치 사진 현상을 하는 밝아지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 착오로 일을 망쳐 버리는 바통 씨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너무 성급하게 관계를 진도를 빼거나, 좀 쉽게 싫증내는 것도 그렇다. 인간관계란, 전력질주하는 그런 단거리 경주가 아닌 페이스를 조절해 가며 뛰는 장거리 마라톤에 가까운 게 아닌가. 아주 뜨겁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인연을 이어가는 기술을 바통 씨는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그런 것들이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배우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일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인물로 낙인 찍힌 바통 씨는 결국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몽루주의 아파트에서 퇴거명령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쫓아낸 걸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망상에 젖는 바통 씨. 당장 먹고 살기에도 바쁜 이들이, 그런 자신을 기억할 리가 있을까. 엔딩까지 씁쓸하지만, 바통 씨는 그래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명징한 해석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나의 친구들>은 너무 외로운 나머지 친구 찾기 나선 바통 씨로 대변되는 우리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다. 무슨 거창한 시대정신에 대해 토론할 그런 친구가 아닌, 어제 먹은 짬뽕 맛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주변에 있는가라고 바통 씨는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관계 속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또 그렇게 상처도 받고 반대로 위로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의 본질이 아니던가. 외로운 금사빠 바통 씨에게 한 잔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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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26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강한 것 같습니다.
21세기 뉴욕 타임즈 선정 책에 들어 있는 것 같은데요.

레삭매냐 2024-11-26 13:2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
저는 재밌게 읽었답니다.

그냥 바통 씨가 불쌍하더라구요.
전쟁에서 영구 장애를 얻게 된
불쌍한 상이용사의 절절한 외
로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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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7월의 마지막 날에 산 책을 11월이 돼서야 다 읽다니. 사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소설은 7월의 마지막 날과 어제 그리고 오늘 3일 동안 다 읽은 셈이다. 분량도 적고 또 노름/도박을 소재로 한 책이라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마 읽다 말고 다른 책 읽느라 그랬겠지.

 

오스트리아 빈 출신 의사이자 작가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한밤의 도박>이 오늘 풀어볼 책이다. 이 짧은 소설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도박 빚 때문에 불명예 전역한 친구 오토 본 보그너가 공금 횡령으로 위기에 처했다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빌리(빌헬름) 캐스다를 찾아온다. 빌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100굴덴 정도인데, 보그너는 1,000굴덴이 필요하다며 빌리의 부유한 외삼촌 로베르트 빌람 씨에게 돈을 융통해 볼 것을 부탁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로베르트 빌람은 빌리의 외삼촌으로 한 때 빌리를 돌봐 주고 적으나마 용돈도 주고 그랬던 사이이지만 최근 들어 소원해져 버렸다. 그러니까 보그너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말이다. 대신, 빌리는 무언가 한 가지 꼼수를 발견했다. 카페 쇼프라는 곳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작은 노름판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빌리는 자기가 가진 돈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요행수를 바라고 돈을 따서 보그너를 돕겠다는 복안을 도출해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벌써 제목에서부터 무언가 불행한 엔딩의 전조가 느껴지지 않은가.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빌리는 카페 쇼프의 작은 노름판에 참가하고, 노름판에서 돈을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다가 결국 사단을 내고 만다. 물론 빌리가 적당하게 돈을 따서 노름판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운명의 여신은 빌리의 편에 서지 않았다. 바덴 역에서 빈으로 가는 기차를 놓친 게 큰 패착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때마다 카페 쇼프로 돌아온 빌리는 노름판이 끝나는 230분경까지 광기에 휩싸여 슈나벨 영사에게 무려 11,000굴덴이라는 거금의 빚을 지게 된다.

 

물론 아르투어 슈니츨러 작가는 냉정하게 제3의 입장에 서서 조금씩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빌리 캐스다 소위의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 독자에게 전달한다. 나도 고스톱을 좋아하지만, 절대 큰돈으로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물러설 때를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카지노/도박판에 오래 머물수록 돈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돈을 잃었다면 손절할 수도 또 반대로 어느 정도 돈을 땄다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블랙잭 테이블 같은 노름판에서 광기에 물들어 영혼과 자본을 털어 넣는 이들을 관찰하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지.

 

도박으로 신세를 망친 보그너를 구하기 위해 노름판에 뛰어 들었다가 정말 패가망신하게 된 빌리의 운명이 비참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슈나벨 영사는 빈털터리가 된 캐스다 소위를 빈의 병영으로 데려다 주면서, 노름빚 상환 기한인 24시간에서 좀 더 연장해 주는 아량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못을 박는다. 노름빚이 기한 내에 상환되지 않으면 캐스다 소위의 연대장에게 알리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는다.

 

자 이제 벼랑 끝에 몰린 빌리 캐스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순식간에 한 개인의 운명이 전도유망한 청년 장교에서 거액의 노름빚을 진 도박쟁이 신세로 추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비극적 가능성을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능수능란하게 도출해낸다. 그래도 로베르트 빌람 외삼촌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던 빌리는 그르 찾아가 보지만, 레오폴디네라는 여성을 만나 전재산을 탕진해 버렸다는 말에 의기소침하는 빌리. 그런데 그 레오폴디네는 예전부터 그가 알고 있던 여성이 아니던가.

 

오래전에는 매춘부였지만, 이제는 외삼촌의 자금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옛 연인 아니 외숙모 레오폴디네를 찾아가 거의 구걸하다시피 자금을 빌려달라고 사정하는 빌리. 궁색한 처지에 몰린 빌리를 희망고문하던 레오폴디네는 사실 빌리에게 구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구원의 가능성이 닫혀 버린 빌리는 결국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물론 작가는 엔딩에 젊은 청년 장교의 죽음을 더욱 비극으로 만들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이런 역설적 장치야말로 소설 <한밤의 도박>이 품은 씁쓸한 현실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의사로 경력을 출발했지만, 작가 활동을 더 많이 했던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한밤의 도박>에서 주인공 빌리 캐스다 소위의 수시로 변하는 심리를 독자에게 충실하게 전달한다. 노름판에서 돈을 많이 딸 때는 부유한 육군 장교의 모습을 그리며 행복해 하다가,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져서는 당장 닥칠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는 비참한 청년의 모습을 연출한다. 장황한 심리 묘사 대신, 급변하는 청년의 감정을 임상에서 체득한 전문가답게 유려하게 그려낸다.

 

빌리 캐스다가 전문 도박꾼이었다면 오히려 그의 비참한 최후를 동정하지 않았겠지만, 동료 보그너를 위해 노름판에 나섰다가 그만 패가망신했기에 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료 빔머 중위가 나서서 판돈을 올리고 계속해서 노름빚을 지는 걸 제지했지만, 도파민 과다로 이성을 잃은 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예정된 파국이 다가왔다. 아마 빔머 중위의 제지를 빌리가 받아 들였다면, 소설 자체가 구성되지 않았겠지. 그렇게 예정된 비극은 굴러갔다.

 

이 책을 샀던 지난여름을 회상해 보니,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다른 책들을 만나 보겠다고 <엘제 양> 그래픽 버전을 먼저 읽지 않았나. 왠지 매력적인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어졌다. 집에 쌓아 놓은 책탑을 좀 허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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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5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 놓고 안 읽은 책이 산더미입니다. 부지런한 셈인데 자책을 하시다니요. ㅠ 슈니츨러 별로란 평이 많던데 이 작품은 안 그런가 봅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그림 좋습니다!

레삭매냐 2024-11-25 14:56   좋아요 2 | URL
스레드에서 소장한 책이 특정량
을 넘어가면 부동산 문제가 된
다고 하던데... 어제 책탑을 쌓다가
멘탈이 살짝-

이 악물고 책탑 정리에 들어가야
지 싶습니다.

아직 다른 슈니츨러의 책들을 만
나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한밤의
도박>은 재밌었습니다.

이미지는 AI가 맹글어 주었는데
신기하더라구요.

stella.K 2024-11-25 19:31   좋아요 1 | URL
헉, 스레드에서 소장한 책이 특정량
을 넘어가면 부동산 문제가 된다굽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와, AI가요? 제법인데요?
전 아직 AI이 써 본 적이 없네요.
어떻게 쓰는 거죠? ㅋ

레삭매냐 2024-11-26 08:06   좋아요 1 | URL
책이 많아지면 그 만큼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
이 아닐까요 :>

레오나르도라는 녀석
을 사용하는데, 키워드
를 넣으면 이렇게 알아
서 이미지를 만들어준
답니다.
 
고행의 순례자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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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도서관에 2권이 있다고 해서 먼저 빌려 보려고 했는데, 내 차례가 도통 오지 않는다. 그래서 과감하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인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고행의 순례자>를 사서 읽었다. 이 이미지는 AI가 만들어 주었는데, 십자군 전사 출신이라 좀 더 우락부락한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거의 교황 수준이 아닌가 싶다.

 

1편이 1137년 그리고 10권은 4년 후인 1141년경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시리즈 가운데, 이 책을 고른 이유 중의 하나가 성녀 위니프리드에 대한 연작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서다. 캐드펠 수사와 몇몇 사람만 아는 것처럼,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이장된 성녀의 관에는 다른 이의 시신이 들어 있다. 그래도 많은 신자들이 그 실체를 모른 채, 기적와 이사를 바라는 마음에 오늘도 성녀를 기념하고 순례의 길을 나선다.

 

어쩌면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위한 포석을 준비한 지도 모르겠다. 중세에 성인들의 유골이 가지는 의미는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1편에서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직접 나서서 슈루즈베리 수도원에 신도들과 자금을 모을 수 있는 성유골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던가.

 

<고행의 순례자> 초반에 당시 잉글랜드의 복잡한 정치상황이 소개된다.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사실 이 부분은 좀 따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중세사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의욕도 없고 좀 읽기가 버거웠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 진중한 독서에 대한 나의 열정이 이렇게 식어 버렸단 말인가. 귀차니즘이 폭발한 모양이다.

 

어쨌든 왕위 계승권이 놓고 모드 황후와 스티븐 왕/마틸다 왕비가 내전에 가까운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 주교의 지원을 받은 모드 황후가 권력을 장악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양측의 협상을 위해 협의회에서 모드 황후를 공공연하게 반대했던 마틸다 왕비 편의 크리스천이라는 성직자를 자객이 습격했고, 그를 보호하기 사투를 벌이던 황후 측 로랑스 당제의 가신 라이날드 보사르가 죽고 말았다. 엘리스 피터스는 12세기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위니프리드 속편을 개시한다.

 

나는 이번 <고행의 순례자>편에서 전반적인 스토리보다는 저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가에 중점을 두면서 책을 읽었다. 전직 십자군 전사 출신의 주인공 캐드펠 수사가 종교계를 대표한다면, 그의 동지로 등장하는 행정 장관 휴 베링어는 지역 책임자로 캐드펠과 합을 맞춘다. 지역 책임자로 휴야말로, 공권력이 필요할 경우 캐드펠 수사를 지원할 수 있는 적임자다.

 

성녀 위니프리드 축일을 앞두고, 기적과 이사를 염원하는 이들이 각처에서 몰려들면서 이야기는 굴러 가기 시작한다. 흐륀 같이 장애가 있는 십대 소년에게 성녀 위니프리드의 기적은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아니던가. 또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상처투성이 맨발로 고행에 나선 키아란 그리고 그를 옆에서 조력하는 매슈 같은 청년들도 등장한다. 물론, 시미언 포어 같이 순례자들을 상대로 한탕을 노리던 부랑배들도 빠질 수 없다.

 

순례자를 상대로 한 절도사건이 벌어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시미언 패거리의 소행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순례길의 인연으로 흐륀의 누이인 멜랑에흘은 키아란의 조력자 매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둘 사이를 눈치 챈 키아란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흐륀의 기적으로 슈루즈베리 수도원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멜랑에흘의 눈에 띄게 된다.

 

한편, 황후 로랑스 당제의 가신 올리비에 드 브르타뉴는 뤼크 메버렐이라는 청년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슈루즈베리에 도착한다. 뤼크 메버렐은 기사 보사르 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니프리드 순례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한 모양이다. 그전 시리즈를 읽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캐드펠 수사와 메시르 올리비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소설에 다양한 캐릭터들을 투입시키고 또 동시에 복잡한 잉글랜드 국내 정치 상황까지 다뤄야 하는 어려운 미션을 엘리스 피터스 작가는 멋지게 해결해냈다. 1편에서는 캐드펠 수사가 전면에 나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면, 주인공이 이제 노년에 접어든 만큼 주변 인물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면서 이야기를 몰고 간다. 물론 나중에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뤼크 메버렐을 추격하기 위해 수도원장의 재가를 받아 직접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주 바람직하게 여러 문제들을 해결한 캐드펠 수사들 앞에, 런던에서 상대방을 포용할 줄 모르던 모드 황후가 시민들의 쿠데타로 실권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메시르 올리비에가 스티븐 왕의 편에 서 있던 휴 베링어를 설득했던 것처럼, 이제는 입장이 역전된 올리비에를 휴가 설득하지만 강단 있는 기사 올리비에는 그의 제안을 마다하고 말에 올라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엔딩에서는 캐드펠 수사의 놀라운 비밀이 밝혀진다.

 

기적적으로 장애가 나은 흐륀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작가는 마냥 소설적 재미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본질에도 심오한 질문을 던지지 않나 싶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이성에 기초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캐드펠 수사의 성심 어린 치료와 마사지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을 수도 있지만, 단기간에 그런 목발을 짚던 소년이 스스로 걷게 된다는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설정이야말로 소설을 다채롭게 만드는 그런 요소 중의 하나다.

 

소설의 중반은 좀 지루한 맛이 없었지만, 엔딩으로 갈수록 서사는 힘을 얻고 그리고 작가가 준비한 엔딩의 결정타가 터지면서 역시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10편이나 되는 장편 시리즈가 되다보면 매너리즘은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엘리스 피터스는 시리즈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런 기발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지 않았나 싶다. 역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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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4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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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만나보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1946년 프랑스 출신 작가 보리스 비앙이 미국 스타일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작품을 번역한 것으로 위장해서, 버논 설리반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예전에 라스 폰 트리에가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서 <도그빌>이라는 걸작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리스 비앙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은 너무 강렬하고 분량도 짧아서 단숨에 읽을 줄 알았지만, 며칠 시간이 걸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흑인 피를 1/8 정도 보유한 얼핏 보기에는 백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 주인공 리 앤더슨의 증오 어린 복수극이다. 보통 스릴러하면 연상되는 내적 갈등 따위가 발붙일 틈은 없다. 리는 백인 소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동생을 위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있다.

 

불특정 피해자를 고르기 위해 리는 자신을 아는 이들이 하나도 없는 벅텀이라는 작은 마을 서점관리인으로 취업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도를 감춘 채, 마을 소녀들과 일탈을 즐기는 리. 어떤 면에서 리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그는 절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타로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고, 춤까지 잘추는 리는 소녀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그런 가운데 부잣집 도련님인 덱스터를 알게 되고, 그를 매개로 리는 훨씬 더 부유한 진과 루 애스퀴스 자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그의 타겟이 나이 어린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왜 리는 자신의 동생을 죽인 남자들을 목표로 삼지 않았을까? 그가 동생의 진혼을 위한 진정한 복수를 원했다면, 원인 제공자들을 공격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왜 그들을 대신해서 진과 루 자매가 희생되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어떻게 되는 좋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리의 최후에 전혀 동정이 가지 않았다.

 

소설 전개에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은 일절 배제하고, 오로지 복수라는 일념 아래 움직이는 리의 기계적인 모습과 순진하게도 리의 매력에 빠져 수렁에 빠져드는 진의 모습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진의 그런 모습에 잠시 리의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의 복수심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 루의 통통 튀는 매력에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언니 진과 달리, 리의 위험성을 알게 된 루는 그에게 총탄을 날리기도 한다. 그녀들이 마냥 사이코패스의 희생양은 아니었고, 저항의 일면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간에는 미국 사회의 고질병인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리 앤더슨이 이런 무모한 행동에 나서게 되는 발단이 자기 동생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 아니던가. 동생의 가해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았던가? 무려 1940년대다. 중범죄를 저지르고서도 백인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리는 삐뚤어진 복수심에 불타, 애꿎은 루와 진을 희생시켰다.

 

리가 신앙심 깊은 자신의 형처럼 신에 귀의했다면, 해피엔딩이 되었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억울하게 죽어간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 계속해서 리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엔딩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중인 리를 잡기 위해 추격에 나선 두 백인 경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존 사회 질서를 허물고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짐승을 잡아 특진하기 위해 그들은 규정 따위는 모두 무시해 버리고 사방에 총질을 해댄다.

 

강력한 하드보일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리가 탄 뷰익의 정면 유리를 부순 장면이 책의 표지였다는 걸 리뷰를 쓰다가 알게 됐다. , 그랬군. 리의 최후는 장렬했고, 백인들은 이미 죽은 리의 시신 훼손도 마다하지 않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복수의 힘이 보여주는 가공할 분노가 소설의 전반을 아우른다. 무려 78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강렬함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게 되면 또 어떤 감정으로 만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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