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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름이 모일 때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이번에도 역시 인스타 피드를 통해 남아프리카/보츠와나 출신 작가 베시 헤드를 알게 됐다. 국내에는 오늘 소개할 <비구름이 모일 때>, <마루> 그리고 <권력의 문제> 이렇게 세 권이 소개가 되었는제 앞선 두 책들은 절판이 되어 도서관을 이용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괜찮은 책들은 항상 구할 수가 없는 법이지.
남아프리카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보츠와나로 거의 강제추방하다시피 쫓겨난 베시 헤드의 데뷔작으로 자신과 비슷한 삶의 경로를 보여주는 마카야(맥) 마세코를 작가는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설은 1968년에 발표되었고, 시대적 배경은 1964년 정도라고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마카야는 보츠와나 국경을 넘는다. 이미 그전에 투옥생활을 한바 있는 마카야는 절대 국경순찰대에게 잡히면 안되는 그런 상황이다.
보츠와나로 일종의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마카야는 이미 경찰의 정보망에 걸려 있는 상태다. 그리고 외국인 신분으로 골레마음미디 마을에 정착하게 된 마카야는 마을의 디노레고 노인을 만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한편, 골레마음미디에는 영국 출신 농업전문가 백인 길버트 밸푸어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 하지만, 전통과 부족주의에 물든 골레마음미디 사람들과 새로운 협동조합 활동을 시작하려는 길버트의 노력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보츠와나 골레마음미디 마을의 남자들을 소를 치는 유목활동을 중시한다. 나머지 노동은 모두 여자들에게 맡겨졌다. 길버트와 마카야는 그들의 처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소들을 정리하고 터키 담배 같이 수익이 많이 나는 상품 작물을 재배해서 부를 축적하고, 축적한 부를 이용해서 마을을 발전시켜야 한다는데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왠지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키는 그런 게 아닌가 말이다.
사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앞두고 있던 보츠와나에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식민 당국자들은 곧 자신의 손에서 벗어날 신생국가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했다. 대추장 세코토는 여전히 기존의 권력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이자 소설에서 빌런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될 캐릭터이자 부족주의의 화신인 부추장 마텐지는 골레마음미디 마을의 모든 변화를 정면에서 거부한다. 기득권층에게 외지인에 불과한 길버트와 마카야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은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고, 자신의 권력을 붕괴시킬 위험 요소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길버트와 마카야의 노력에 의해 계몽된 골레마음미디 마을의 여성들은 실제로 행동에 나섰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디노레고 노인의 딸인 마리아와 과부 폴리나 세베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역시 소설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폴리나는 마카야를 보는 순간, 반해 버렸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 마리아는 강력한 적수로 부상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마리아를 사랑해온 길버트가 마리아에게 청혼하고 결혼에 골인하면서, 폴리나가 빚어내던 긴장감을 자연스레 해소되어 버린다. 나고 자란 사랑하는 남아프리카를 떠나 이국땅에 정착하게 된 마카야에게 여인이나 가정은 당장의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청년이자 미래의 아프리카를 이끌어갈 그런 리더의 상징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부추장 마켄지나 조아스 체페 같이 음험한 정치인의 생각은 달랐다.
대추장 세코토의 절친한 지기인 영국 출신 경찰 조지 애플비스미스는 마카야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무고를 받지만,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다. 마카야가 영주권을 받고 그의 골레마음미디 마을 거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길버트-마카야의 터키 담배 농장 프로젝트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폴리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부분의 마을 여성들이 상품성 작물 재배를 위한 공동노동에 나서게 된다. 이런 작지만 유의미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결국 국가적 차원의 발전과 계몽을 이루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베시 헤드 작가는.
마음에 증오와 분노를 품고 고향 남아프리카를 탈출한 마카야는 보츠와나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리고 사람에게 상처 받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람으로 치유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른자 '인간 종교(people religion)'라는 베시 헤드가 구사하는 방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폴리나를 받아들이고, 가뭄이라는 자연 재앙과 더불어 갑자기 들이닥친 아이작의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을 돌파해 나가면서 유토피아 건설의 희망을 제시한다.
사사건건 길버트-마카야들을 괴롭히던 마켄지 부추장은 폴리나를 재판에 소환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촉발한다. 하지만, 결국 자각한 골레마음미디 주민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황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권선징악적 결말이 이어진다.
처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더디게 나갔다. 작가가 구사하는 1960년대 남아프리카/보츠와나의 사회경제적 요소들이 빚는 갈등들이 일단 소화하기에 좀 낯설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내부적으로 갈등하고 번뇌하는 영혼 마카야의 내면 세계 수용도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너무 여러 가지 형태로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이 독서의 진도를 수월하지 않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고수하겠다는 마텐지로 대변되는 고집불통 부족주의자들은 변화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구질서가 붕괴되고, 부족을 대신할 국가라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라는 이름의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도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세코토와 마텐지 같은 전통/부족주의자들은 그런 이상에 동참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은데 왜 굳이 삐걱대는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갈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국가 발전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우리끼리' 부족주의를 대신하기 위해 베시 헤드 작가는 아예 부족을 넘어 타국 출신 망명객인 마카야 마세코를 주인공으로 기용한다. 그리고 마카야에 앞서, 백인 이상주의자 길버트를 미리 배치하는 더블캐스팅으로 유토피아 건설의 현현이라는 작가의 의중을 드러내 보인다. 과연 그런 유토피아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생각 같아서는 <마루>와 <권력의 문제>도 내친 김에 읽어 보고 싶지만, 다 읽고 나서 그전에 읽던 다른 책들부터 마무리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명절 전에 베시 헤드 작가의 다른 책들을 수배하게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