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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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다시 조르조 바사니 작가의 <금테 안경>을 읽었다. 아마 그 때,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사니 작가의 책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읽지 못했던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성벽 아래서>도 이번에는 읽었다. <왜가리><건초 냄새>까지 나왔다면 완벽했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걸작은 다시 읽어도 항상 좋은 법이다. 소설 <금테 안경>의 화자는 바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서 내가 첼레스티노로 명명한 작가의 페르소나다. 그가 사는 페라라에는 베네치아 출신 아토스 파디가티 선생이라는 저명한 중년의 이비인후과 의사가 있었다. 그가 애용하는 "금테 안경"은 그의 분신 혹은 상징과도 같은 무엇이라고나 할까.

 

탁월한 의술과 친절함 그리고 세련된 진료로 파디가티 선생은 페라라 공동체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그런 인사였다. 그리고 재산은 자연스럽게 그의 노력에 응답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적어도 파디가티의 성적 취향에 대한 추문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편 페라라에서 볼로냐로 통학을 하던 첼레스티노와 친구들은 대학 강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볼로냐로 향하던 파디가티를 기차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델릴리에르스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지난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델릴리에르스는 노골적으로 파디가티의 성적 취향을 조롱하고 놀림감으로 사용한다. 내가 보기에 델릴리에르스는 순수 악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척에서 관찰한 나, 첼레스티노의 감상과 기록이 이어진다. 바사니는 실제 있을 법했던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추가하고 혐오와 배제로 무장한 이탈리아 파시즘이 부상하던 시절의 광기를 적절하게 배합해서 <금테 안경>의 서사를 완성해간다.

 

파디가티와 델릴리에스가 빚어내는 볼썽사나운 추문의 절정은 19378월의 휴양지 리초네 부근에서 그야말로 폭발한다. 사실 그들의 기묘한 우정은 보수적인 페라라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물의와 논란의 대상이었다. 가십 전문가 라베촐리 부인에게 이 커플은 좋은 먹잇감이기도 했다. 독설가였던 라베촐리 부인은 나치를 찬양하며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서 타당성과 위대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3년 전에 있었던 나치들의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사건에 대한 언급도 살짝 등장하기도 했던가.

 

신혼부부라며 조롱을 받던 둘의 파국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그해 8월의 마지막 날, 언쟁으로 시작된 델릴리에르스와 파디가티의 다툼은 결국 청년의 주먹에 파디가티가 넉다운되고 기절하는 일대 소동으로 마무리된다. 현장을 목격한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이야깃거리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델릴리에르스는 파디가티의 모든 것을 챙겨 도망가 버렸고, 쓸쓸하게 홀로 남은 파디가티 선생은 결국 가진 돈을 다 털어 페라라로 귀환하게 된다. 문득 여기에서 금이 간 파디가티의 금테 안경은 앞으로 다가올 어두운 미래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을까.

 

1937년 리초네에서의 여름이 첼레스티노와 다른 이들에게 화양연화의 시절이었다면, 그 다음부터 비극의 연대기가 시작됐다. 리초네에서의 추문으로 페라라에서 존경 받던 파디가티 선생은 병원에서 해고됐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급속하게 늙어갔다. 그보다 큰 사건은 1년 뒤부터 유대인들을 겨냥한 엄격한 인종법이 실시된다는 소식이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박해와 학살의 미래가 올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여기서 바사니 작가는 자신의 다른 작품들에서 어김없이 빌런으로 등장하는 파시스트 시아구라를 소개한다.

 

페라라 도시 곳곳에서 벌어진 배제와 혐오에 대한 전조는 주인공과 전도유망한 법학도 니노 보테키아리와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페라라 유대인 대다수가 지닌 도시 부르주아로서의 정체성을 자랑하고 심지어 자발적 파시스트였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인종적 배경 자체를 숨길 수가 없지 않았던가. 파시즘에 대해 아무리 완벽한 연대와 수용을 한다고 말해도, 그들의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이 나이든 성적소수자 아토스 파디가티의 극단적 선택에 소식을 신문에서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전에 화자의 아버지는 잠시나마 페라라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법이 절대 공포되지 않으리라는 유력자의 거짓말에 현혹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짜뉴스는 현실을 잊기 위한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파디가티는 절망에 빠진 화자에게 저항이나 거부하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파디가티의 선택은 자신의 조언과 다른 결의 무엇이 아니었던가.

 

10년 만에 다시 <금테 안경>을 읽어 보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실현을 위해 질주하는 실존이 아닌가. 자신의 거친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환멸과 고독감에 대한 바사니 작가는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바사니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처럼, <금테 안경>에서도 화자로 대변되는 청춘들이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극단적 절망감을 표출하는 서사도 과연 대단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쉴 새 없이 달려서 조르조 바사니 작가의 소설들을 세 권을 섭렵했고, 이제 <문 뒤에서>만을 남겨 두고 있다. 남은 3일 동안 무리 없이 다 읽을 수 있겠지.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을 다시 읽고, 휘발해 버린 감상들을 되살리는 재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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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6-06-11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테 안경」 저도 다시 읽고 싶네요. 조르조 바사니의 책은 두 권 읽었는데, 생각하면 조금 쓸쓸해집니다. 슬픈데 아름답고... ‘페라라‘도 가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6-06-11 22:33   좋아요 1 | URL
책을 다 읽고 나서,
제 심정이 딱 그랬습니다.

살면서 페라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3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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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부터 읽겠노라고 별러 오던 숙제를 이제야 다한 느낌이다. <금테 안경>으로 처음 만났던 조르조 바사니의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을 드디어 다 읽었다.

 

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의 화자는 첼레스티노. 물론 소설에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첼레스티노(동명의 영화에서는 조르조)가 사랑해 마지 않던 소녀 미콜 핀치콘티니가 그를 부르던 애칭이다. 이탈리아 파시즘 시절,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모두 겪은 페라라 유대인 공동체 출신 첼레스티노의 회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트루리아인의 묘지에서였던가. 과거의 죽음은 너무 멀기에 와 닿지 않지만, 최근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닲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

 

유럽 대륙에 두 번째 세계대전의 전운이 퍼지기 직전의 모습은 오래 전 벨에포크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첼레스티노를 비롯한 일단의 유대인 청년들이 테니스클럽에서 축출되자, 페라라에 무려 3만평에 달하는 대영지(정원 포함)를 가진 핀치콘티니 가문이 기꺼이 그들에게 테니스장을 공개해준다.

 

파시스트들의 혐오와 배제가 넘실거렸지만,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일단의 청년들은 핀치콘니키 가문이 제공하는 음식과 공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에서 미콜과 그의 오빠 알베르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첼레스티노는 자연스럽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의 일부분이 되기 시작한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주류 사회에서 억울하게 배제된 유대인 청년들에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수행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부족함 없이 먹고 마시고 수다를 즐기며, 테니스를 마음껏 칠 수가 있었다. 혈기방장한 이십대 청년 첼레스티노가 자기 집보다 핀치콘티니네 집을 더 가까워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38년 이탈리아에서 그 악명 높은 인종법이 공포되면서, 페라라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시절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한 때 의사이자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첼레스티노의 아버지는 상인연합에서 퇴출되었고, 첼레스티노는 도서관 출입마저 금지당하게 된다. 당장 졸업논문 준비를 해야 하는 첼레스티노에게 그야말러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바사니의 페라라에 대한 당시의 기록들을 접하면서 놀라웠던 점 중의 하나는, 당시 이탈리아 유대인들 중에서 상당수가 파시즘에 동조하고 지지했고 심지어 파시스트당에 가입해서 당원증을 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신들의 인종적 배경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대대적인 유대인 검거가 시행되면서 페라라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도 독일 강제수용소 화장장의 비극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편, 미콜의 아버지 에르만노 교수는 첼레스티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언제라도 자신의 서재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말 대단한 특전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첼레스티노는 아름답고 베네치아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미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된다.

 

조르조 바사니는 페라라라는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도 시기와 질투가 존재했으며, 상호간에 배제가 있었다는 점들을 솔직담백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춘남녀들의 엇갈리는 사랑과 우정 이야기를 덧입힌다. 파시즘이라는 광기가 휘몰아치던 광기의 시대에도, 어디선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피어났다는 점을 작가는 놓치지 말라고 주문한다.

 

개인적으로 페라라라는 오래된 르네상스 도시를 방문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오롯이 바사니의 묘사에만 의존해서는 작가가 의도하는 페라라 구석구석의 이모저모를 떠올리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안젤리 성벽 같이 소설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청춘들이 밀회를 즐기던 곳들에 대한 형상화는 난망했다. 아마 페라라 사람들이라면 바로 인사이트를 얻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같은 이방인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이 아니었을까.

 

결국 첼레스티노는 미콜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핀치콘티니 집안에 발길을 끊게 된다. 1942년 악성 림프육아종으로 미콜의 오빠 알베르토가 죽고, 나머지 가족들은 19439월에 검거되어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연적이라고 생각한 잠피에로 말나테는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이런 비극의 연대기는 어쩌면 프롤로그에서부터 예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파시즘의 광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던 암울한 시절을 직접 체험한 첼레스티노, 조르조 바사니 작가의 증언이 담긴 보고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미래가 허용되지 않는 그런 암담한 절망 속에서도 핀치콘티니 가문의 정원을 해방구로 삼아 잠시나마 정신적 탈출을 청춘들의 서사에 스며들어 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감정, 연적에 대한 공상과 시기, 밀고 당기는 미묘한 감정을 짚어낸 바사니 작가의 실력은 대단했다.

 

다시 100년이란 시간이 흘러,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배제와 혐오의 선동들이 난무하는 시절이 도래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나와 생각이 다른 타자에 대한 관용과 공감 형성은 과연 불가능한 미션인지 자문해본다. 아울러 순결하고 강인하게 아름다운 그 시절을 살아낸 바사니와 그의 동지들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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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녹색광선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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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루이 말 감독이 연출을 맡고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슈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 <데미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조세핀 하트의 원작 소설로 <데미지>를 만나게 됐다. 작가는 파멸의 에로티시즘과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 대한 서사의 파편들로 독자들에게 '데미지'를 선사한다.

 

소설 <데미지>의 줄거리는 정말 소설스럽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장이자 의사, 국회의원인 스티븐 플레밍의 삶에 어느 날 재앙의 기운이 내뻗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들 마틴의 약혼녀 안나 바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삶을 살아온 스티븐에게 안나는 파멸의 안내자였다. 이미 영화를 통해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조세핀 하트가 들려주는 소설의 플롯은 또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스티븐이 안나와의 관계가 플레밍 집안에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안나에게 빨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재난에 가까운 결말이 예견된 그리스 비극의 재현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은 도덕의 굴레에서만 가능한 걸까?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와 관계를 갖는단 말인가. 도대체 이 스티븐이란 작자는 양심과 도덕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스티븐만큼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 바로 안나였다. 물론 어려서 사랑하는 오빠 애스턴의 비극적 죽음과 그에 따른 부모의 이혼 등 그녀가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남달랐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집안의 근간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리는 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티븐과 안나는 만나는 순간부터 위선이라는 가면을 써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 잉그리드, 전도유망한 청년 저널리스트 마틴, 역시 빼어난 재능의 샐리 등 삶의 오점 하나 보이지 않는 중산층 가정에 외도와 파격적 불륜의 그림자가 엄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종착역에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의 파탄이 대기 중이다. 조세핀 하트는 여성 특유의 세심한 감성으로 일그러져 가는 부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낸다.

 

스티븐은 위선자다. 철저하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로 위장한 스티븐은 아들의 연인을 탐하는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영원에 존재한 단 한 번의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에게 안나는 자기 욕망의 대상이고, 노예일 뿐이다. 일반적 상식의 사랑을 파괴하다 못해 일탈의 극치를 보여주는 소설 <데미지>를 읽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사랑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기엔 솔직히 말해서 역부족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기분이 얼떨떨하다. 조세핀 하트는 <데미지>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다고 한다. 스티븐과 안나의 파멸적 사랑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평가를 유보해야 하는 게 아닌지 얼얼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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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bell 2026-06-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에는 화자의 이름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 읽으신게 맞나요?

레삭매냐 2026-06-01 12:31   좋아요 0 | URL
무명의 화자라는 표현을 쓰기가
그래서 그냥 동명의 영화 주인공
의 이름을 빌어 사용했습니다.
 
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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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작가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를 읽었다. 보통 빠른 호흡으로 책을 읽곤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며칠 동안 <브로덱의 보고서>를 들고 있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느린 호흡의 독서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물론, 책에 담긴 내용이 무거우면서도 워낙에 진중한 탓이라고나 할까? 전쟁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브로덱에게도 세상살이란 역시나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분명히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어쩐 이유에서인지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아마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독일의 변방이나 혹은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이 배경이 아닐까 하는 추론 정도를 할 따름이다. 가끔 등장하는 지명으로는 도저히 구체적인 공간을 도출해낼 수가 없었다.

 

소설은 처음에 주인공 브로덱이 그 일과는 무관하다는 말로 시작한다. 도대체 그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브로덱이 사는 마을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사나이 안더러를 살해한 일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소설을 읽으면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제목에도 나와 있는 보고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질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어느 날 저녁, 마을의 슐로스 여인숙에서 벌어진 모두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사건을 브로덱은 에라이그니스”(방금 일어난 일)이라는 요상하기 짝이 없이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마을의 지원을 받아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브로덱은 관청 소속으로 동식물에 대한 상태, 강의 수위, 강수량과 강설량 등 오만가지 것을 기록하는 일로 먹고산다. 에라이그니스가 일어나고 나서, 시장인 오어슈비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이제는 존재가 사라진 안더러에 대한 보고서를 쓰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무조건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브로덱은 그들이 원하는 기록이 담긴 보고서뿐만이 아니라 진짜 자신이 보고 들은 안더러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현재 진행 중인 에라이그니스의 정황과 더불어 브로덱 과거의 플래시백으로 뒤섞이면서 독자를 흡입한다. 부모를 잃은 브로덱은 페도린과 함께 오래전에 마을에 흘러 들어와 정착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브로덱의 입에서 어느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수용소 시절의 끔찍한 기억은 필연적으로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수용소 간수들의 비인간적인 폭력과 부당한 대우를 참을 수 없었던 인간은 모두 죽었다. 사실 그러지 않고서도 마치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종잇조각 같이 나부끼는 순간에도, 브로덱은 고향에 남겨 두고 온 사랑하는 에멜리아를 생각하며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남아 귀향한다. ‘똥개브로덱은 그렇게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수모를 견뎌냈다. 서사가 계속되면서 외부인(alien)에 의해 그가 어떻게 해서 수용소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공포의 연장선에 서 있다. 죽은 디오뎀의 글을 통해 알게 되는 진실은 고통 그 자체다.

 

주변인들의 날카롭고 삼엄한 감시를 뚫고, 브로덱은 자신만의 기록을 계속한다. 브로덱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던 안더러는 놀랍게도 마을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와 비밀을 그린 초상화와 풍경화 전시회를 기도한다. 마을의 모든 남자가 모인 가운데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전시회에 초대된 이들은 경악해 마지않는다. 정말 누구나 다 잊고 싶어 하던 추악한 과거의 진실이 이방인 안더러의 손끝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그들이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 ‘안더러의 운명은 바로 결정지어졌다.

 

필립 클로델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 연명을 해야 했던 수용소 생활의 비참했던 과거를 고향으로 돌아온 브로덱의 삶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다. 더 이상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지만, 진실을 감추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의 협잡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전쟁 당시 마을에 주둔했던 침략군 분대장 불러가 들려준 나비 렉스 플라메이야기는 나치가 주장하던 인종주의 이론의 변종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화하라는 침략군의 요구에 브로덱과 프리프만을 프렘더로 몰아 그들에게 넘겨준다. 이런 인간적 배신은, 훗날 안더러에게 근원을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를 폭발시킨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소설에서 소개된 정화의 밤”(크리스탈나흐트)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으로 시대적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해준다. 필립 클로델은 마치 독자가 직접 그 끔찍했던 밤의 사건을 목격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준다. 나치에 의해 선동된 보통 사람들의 프렘더에 대한 증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훗날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학살의 단초가 되었는지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를 통해 한나 아렌트가 일찍이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했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어떻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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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을유세계문학전집 149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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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시사회로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만났었다.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됐다. 사실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주인공 알마시 백작 역의 랄프 파인즈가 화상을 입고 붕대 감은 모습만이 기억났다. 좀 더 기억을 되살려 보니 북 아프리카 사막에서 죽어가는 연인 캐서린을 안고 동굴로 가던 장면도 떠올랐다. 물론 원작 소설을 읽어 보니, 영화하고는 많이 달랐다.

 

스리랑카 출신 캐나다 시인 마이클 온다치가 1992년에 발표한 세 번째 소설로 맨부커상에 빛나는 작품이다. 영화는 4년 뒤에 고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되었고, 아카데미상을 무려 9개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은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로 지독한 화상을 입고 거의 빈사의 상태에서 베두인 족에게 발견된 영국인 환자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마이클 온다치는 실재했던 헝가리 탐험가 알마시라는 인물에게서 주인공 캐릭터의 모티프를 따왔다고 한다.

 

확실히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서 보니 영화보다 소설이 담아낸 이야기들이 더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영화는 소설에서 다룰 수 없는 비주얼적인 측면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헝가리 출신으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삶의 나침반으로 삼아 사막을 누비는 자유인 라디슬라우 드 알마시, 사랑하는 이들을 전쟁에서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간호병 해나, 도둑이자 스파이로 엄지손가락을 잃고 모르핀 중독에 빠진 도둑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그리고 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병 출신 폭탄 처리전문가 시크교도 키르팔 싱이 북쪽으로 퇴각하는 독일군과의 전투가 한창인 이탈리아의 파괴된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에 모이면서 시공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보다 극적으로 해나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전장의 동료 잔 그리고 연인을 전쟁에서 잃은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상실한 스무살 내기 해나는 역시 과거의 기억과 이름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영국인 환자의 치료에 모든 것을 건다. 어쩌면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은 상실의 시대를 직면한 이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인 환자 알마시의 지혜의 숲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거의 모든 문학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 영화에서는 음악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다는 것을 카라바지오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베니 굿맨이 연주한 <왱 왱 블루스>를 맞추는 것을 보고 카라바지오는 감탄한다.

 

두 손가락을 잃은 카라바지오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극적으로 등장한다. “무스라는 암호명으로 암약하던 영국 스파이였던 카라바지오는 치열한 격전 끝에 영국군의 키레아니카 지역 중요기지였던 토브룩을 함락한 롬멜 아프리카 군단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두 엄지손가락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카라바지오 역할의 윌렘 데포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소설과 달리 알마시가 연인 캐서린을 살리기 위해 독일의 아프리카군단에게 넘긴 지도에 대한 정보 때문에 자신이 엄지를 잃게 되었다는 설정이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서 책의 독자와는 다른 타겟 오디언스를 상대로 한 각색에 공감할 수가 있었다.

 

다른 주인공들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킵에 대해서 영화에서는 아쉽게도 잘 다루어주지 않은 느낌이다. 소설에서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 싱은 펀잡 출신으로 독일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전쟁에 왜 그는 목숨을 걸게 된 걸까. 게다가 그에게 아버지 같았던 스승 서퍽 경도 폭발물 처리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나치 독일과 싸우기 위해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식민제국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피지배계급과의 동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킵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에게 밀리면서 북쪽으로 계속해서 퇴각 중인 독일군은 창의력 넘치는 부비트랩과 각종 지뢰로 북진하는 연합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늦추는데 성공했다. 사실 처칠이 구상한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공략해서 서진하는 스탈린의 공산주의 위성국가 건설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는 전략은 독일의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이 구축한 삼중 방어선으로 막아낸, 특히 고딕라인 앞의 지연전술로 무산되어 버렸다.

 

, 이제 알마시와 캐서린의 본격적인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해 볼 차례인가. 영화에서는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 보이지 않는데 자그마치 15살 차이나 되는 남녀가 그야말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장면은 역시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영화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소설에서 보다 플라토닉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앤소니 밍겔라 감독은 처음의 냉랭한 사이였지만 점점 열정으로 바뀌어가는 알마시와 캐서린에 대한 관계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짚어냈다.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였던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막의 캐러밴에서 탐험가들이 시구 대결을 하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연애 이야기를 낭송하면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연애의 감정 표현은 정말 대단했다. 소설과 영화의 장면들을 대조해 보는 재미는 정말 대단했다. 캐서린의 남편 제프리 클리버튼 역을 30대의 콜린 퍼스가 맡았었다는 점도 미처 몰랐었다. 중년 넘어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배우의 청년 시절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알마시, 해나, 카라바지오와 킵이 휘말린 전쟁 역시 그들의 삶을 앗아가 버렸다. 폐허가 되어 버린 성과 속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그들은 치유의 시간을 맞는다. 킵이 해나의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준비한 45개의 달팽이집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아름다웠다.


* 이건 그냥 여담으로 나의 추측인데, 아마

책의 판권 개정이 8년마다 되는 게 아닌가 싶다.


1997년에 한 번, 그리고 13년 뒤인 2010년에

그리고 2018년에 그리고 다시 다시 8년이 지

난 올해 재개정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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