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야마의 단극 체제론이 빈약한 실증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일세(라기보다는 일시一時)를 풍미한 것은 당시 유일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세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강력한 담론으로 나온 것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질서의 구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성장이다. 1996년의 중국은 아직 WTO(세계무역기구)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스스로 ‘개발도상국’ 위상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1998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둘러싼 논란에서 당시 중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이 방문에 반대한 것이다.

‘문명의 충돌’에 기반을 둔 다극 체제론에는 세계질서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의 독점 지배가 풀려 다양한 경제외적 가치가 되살아날 가능성을 짚은 것은 헌팅턴의 뛰어난 통찰이다.

아리기의 흥미로운 논점 하나가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다. 스기하라 가오루가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에 빗대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데 쓴 이 말은 서양식 자본집약적 근대화와 다른 노동집약적 근대화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오면서 깃발을 비롯한 십자가, 초승달 같은 문화 정체성의 상징물이 중요해졌다. 문화가 중요해졌고, 문화 정체성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정체성을 발견하여,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깃발 아래 행진을 벌이다가,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적수와 전쟁을 벌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