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다려온 구원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 IFS가 전하는 행복한 커플의 심리학
리처드 슈워츠 지음, 권혜경 옮김 / 싸이칼러지 코리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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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기다려온 구원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 리처드 C. 슈워츠 / 싸이칼러지 코리아

 

출판사로부터 #도서협찬 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년(2024) 4월경 내면가족체계(IFS) 치료법에 관한 소개서 [내면 혁명으로의 초대 IFS]를 읽었는데 IFS의 시스템이 워낙에 원형적이면서도 받아들이기 쉬운 체계라 오래도록 각인이 되었다. 전작은 IFS의 기본적 체계와 적용 방법 그리고 효과가 소개되어있는 소개서였다면 본서는 이 시스템이 커플 사이의 갈등에 적용되면서 개인적 성장과 치유에 이르는 여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추방자, 매니저, 소방관과 참나의 네 가지 원형의 다양한 인격으로 개인의 인격이 나뉘어 있다고 보고 상처받고 박탈당한 추방자와 그 추방자를 관리하는 매니저, 그 내면의 갈등과 분노를 제어하는 소방관이 추방자를 보호하거나 제어하고 있고 그런 자기를 이루는 다양한 인격들을 이끌어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온전한 나인 참나가 있다는 독특한 체계로 심리 치료를 가져오는 것이 내면가족체계(IFS)이다. 독특하다고 한 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일 인격 신화가 아직까지는 지배적이기에 다중인격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인격이 기본적인 것이라고 보는 이 체계는 생소하기보다는 독특한 시선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심리학의 선구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부터가 이드(원초아), 에고(자아), 수퍼에고(초자아)의 셋으로 인간의 자아를 분열시켰고 더나아가 무의식까지 찾아내면서 단일 인격도 결코 단일함에 갇히지 않는다는 포문을 열지 않았나 싶다. 카를 융 또한 그가 한 인간의 일생을 영웅신화에 대입해 니체가 인격 발달의 여정을 구분한 것과 유사한 여정으로 구분한 것을 한 인격이 지금이라는 순간에도 발달 부분과 미발달 부분이 있을 시 동시에 영웅신화에서 영웅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인격들이 개인의 인격 속에서 다양히 나타날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다. 융이 연금술과 인격 발달 여정을 비교한 바도 발전이 선형적으로만 이뤄진다는 가정을 제쳐버리면 다양하고 다층적인 인격을 모두 지닌 것이 개인의 인격이라는 가정도 할 수 있다. 어쩌면 본서의 저자 말처럼 단일 인격은 신화 그 이상은 아니지 않나 싶다.

 

어쨌든 본서는 IFS 치료를 부부와 연인의 갈등에 적용하는 책이라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존 볼비가 제기하고 메리 에인워스가 발전시킨 애착 이론을 추방자의 이미지에 대입하여 추방자의 신념체계를 가져온 것을 애착 상처라 정의하며, 연인이나 배우자가 원래 보호자의 행동을 답습하면 이때 애착 재상처라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이에 붕괴되거나 연인을 자신에게 맞게 변화시키려 하거나 자신을 연인에 맞춰 변화시키려 하거나 헤어짐을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일반적인 경로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토멘토라고 하여 이를 연인이 자신에게 치유의 기회를 다시 가져다준 것으로 인식을 전환하며, 참나의 리더쉽을 통해 성장하고 치유할 기회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여정은 연극치료와도 비슷하고 최면 치료와도 유사하기도 한데 정신분석과 분석심리학도 어우러진 것 같아 보인다. 게다가 커플 치료라는 점에서 상호 간의 성장과 치유를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본서에서는 커플 사이의 문제가 성 역할과 인식의 변화로 서로에게 요구되는 바가 다채로워진 시대적 변화로 인해 더욱 가중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개인의 충족이 우선되는 시대이기도 해서 나를 위해 상대를 바꾸려한다거나 상대를 위해 나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택에 단순과 속도를 요구하거나 일시적인 흥미를 충족시키는 게 우선하는 시대라 헤어짐이 쉽게 선택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성장 그것도 함께 나아가는 성장 그리고 우리가 치유되는 것을 기본으로 보는 본서의 취지는 자신의 선택과 약속에 무게를 두는 좀 더 인간적인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양육자(라고 하면 좀 그렇기도 한데 본서에서는 내면의 여러 인격을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보기에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데 자신의 참나를 자신의 파트들(앞서 말한 여러 인격들)의 주양육자로 보고 연인이나 배우자는 보조 양육자가 되는 것이 저자의 치료방식이다. 서로 각자의 참나가 주체이며 서로의 참나가 협조하고 보조하기에 치유와 성장에서 더욱 시너지 효과가 커진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치료를 자기만 또는 커플 간에만 하기보다 중재자랄까가 있어야 효과적이라 말하는데 상담가 내지는 치료사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각하지 않은 갈등이라면 본서를 읽어보며 서로 노력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심각한 갈등 상황이라면 IFS의 치료과정을 본서를 통해 엿보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 상장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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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로서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인 데이비드 흄은 ‘자아를 그저 환상’이라고 했다.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 역시 ‘자아를 허구’라고 했다. 뇌과학서인 본서에서는 유독 두드러진 비판인데 대니얼 데닛은 “뇌에서 자아를 찾겠다는 것은 범주 오류이다”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의 자아 곧 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본서는 뇌의 각 기능이 정지될 때 인간이 겪는 오류를 실제 사례로 예시하며 인간의 자아, 다시 말해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저작이다.


자아에 대한 본서의 의문은 결국 뇌의 국소병변이 자아의 완전한 상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깨우침도 남기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게 한다. 저자는 정체성을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개인 정체성이 자아(나)와 다른 자아들(타인들)과 구분하는 방식이라면 사회 정체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개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리킨다고 한다. 저자가 저작으로 완성하기까지 정체성의 문제를 심각히 여긴 것은 그의 출신과 경력이 작용했다고 보인다. 저자는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으로 영국에 이민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외모와 언어 등에서 차이를 처음 자각했고 그 차이를 줄이고자 개인적인 노력을 이어온 사람이다. 게다가 저자가 전공한 신경과는 영국 전체 200명 정도의 소수 백인들이 장악했던 영역으로 이에 변수처럼 침투하게 된 저자가 인정받는 의사가 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런 저자의 전적이 정체성이라는 문제,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고 저자 역시 이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데이비드’라는 바닥핵 뇌졸중으로 병적인 무관심 상태가 되어 자신의 생계와 주위와의 소통에 전혀 개의치 않게 된 인물과, ‘마이클’이라는 관자엽(측두엽)이 쪼그라들어 단어를 잊어버리고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지식 결핍자가 등장하며, ‘트리시’라는 해마와 마루엽(두정엽) 그리고 신경전달 체계에 이상이 생겨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와히드’라는 뒤통수엽(후두엽)에서 마루엽과 관자엽으로 전달되는 뇌 신경 체계의 교란으로 환영을 보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윈스턴’이라는 오른쪽 마루엽에 뇌졸중이 생겨 왼쪽 무시라는 왼쪽에 있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수’라는 이마관자엽 치매에 걸려 자제력을 잃고 막무가내로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과, ‘애나’라는 왼쪽 마루엽 바깥에 거미막낭이 자라 오른쪽을 인식도 못하고 오른쪽 반신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도 등장한다. 대부분 약물로 증상을 완화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치료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짧게 인용한 예들에서도 상당한 문제라고 인식하겠지만 본서에서 읽고 보면 문제가 상당함을 느낄 수 있고 실제 임상의 입장에서도 그랬겠지만 당사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증상들로 개인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 정체성이 함몰되면 사회적인 사망 다시 말해 인간관계와 사회 조직에서의 사망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 예시 이외에도 사회에서 넘치고 있을 것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삶을 선택하는 경우, 사회적인 사망이라기보다는 사회로부터의 탈출이랄 수 있겠으나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강제적으로 이런 사회적 사망을 겪는 이들 그리고 이제까지의 자신과 다른 자신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들의 괴로움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자아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도 한다.


뇌에서 자아를 찾을 수 없다는 선언과는 다르게 뇌의 기능장애가 인지와 행동에 장애를 준다면 우리는 어느 선까지의 장애에서 자신을 기존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행동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바가 모두 달라진다면 그때도 ‘바라보는 내가 진짜 나’라며 ‘나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다’라고 쉽사리 말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지각, 주의, 일화기억과 의미기억, 동기 부여, 행동 제어와 신체 도식 같은 기본적인 인지 기능들도 모두 우리 정체성에 기여하며’ ‘성격 형질과 감정 반응도 자아 정의에 중요’하지만 앞서 예를 든 인물들의 사례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인지 기능들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본서는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고 인식하며 살아가듯 우리의 자아를 정의하는 요소들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본서는 나란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돌아본 적 있는 분들이라면 상당한 끌림과 깨우침을 안겨줄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아웃사이더 #마수드후세인 #과학책 #신경과학 #뇌질환 #뇌과학 #과학책추천 #뇌과학책추천 #도서협찬 @kachibooks


※ 가제본으로 읽었는데 리뷰를 올리려니 아직 책이 출간 전이네요. 우선 페이퍼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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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넘쳐나고, 인간은 배고프다 - 바츨라프 스밀의 세계를 먹여 살리는 법
바츨라프 스밀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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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로부터 도서협찬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 안장을 보면 에너지, 환경, 식량, 인구, 역사, 공공정책 등 50여 년간 광범위한 연구를 선도해온 환경과학자이자 경제사학자, 캐나다 매니토바대학교 환경지리학과 명예교수이며... 세계 발달사를 꿰뚫는 통계분석의 대가로 손꼽히며 빌 게이츠가 가장 신뢰하는 사상가로 주목받았다.’는 저자 소개가 등장한다. 본서를 읽으면 그런 그의 경력들이 제대로 응축된 저작이라는 감상이 들고 만다.

 

본서는 세계 식량생산 체계의 기본특성을 돌아본다는 의의가 담긴 책인데 이 과정에서 저자 소개에서 등장하는 방대한 영역을 모두 다루고 있다.

 

현재의 식량 선택에 이르기까지를 역사와 고고학, 인류 진화와 연결 지으며 되짚어보고 이에서 생존을 위한 가장 과학적인 식량 선택과 농축산의 과정이 무엇일지를 체계적이며 분석적으로 통계를 기반으로 돌아본다.

 

이를 분석하며 환경과 불평등, 생산적이면서도 비파괴적인 농법은 무얼지, 식량의 효율성과 적절성, 영양과 인간의 입맛까지 고려한 식량 생산에 대한 접근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스마트 농법에 대한 소개들이 유투브 등의 매체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현재지만 이에 대해 다각도에서 적절하게 개발되고 있는지는 아직 각국 정부나 국민들의 관심 밖인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저자와 같은 전문가의 깊고 넓은 분석이 더해져야 더욱 적절한 대안으로 완성될 것 같다.

 

저자는 일부 농산물과 가축류가 개량되며 식량의 효율성을 갖추게도 되었으나 아직까지 생산에 이르는데 과도한 비용과 자원이 동원되는 데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유전자 조작이나 배양육 등에 마냥 반기는 시선도 아니다. 저자는 기존의 식량 체계를 개선하고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깊은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의 분석들은 모두 이제까지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한 것으로 이러한 통찰은 전방위적이고 공공정책까지 고려한 50여 년의 연구가 가져온 것이다.

 

그의 저작은 인문학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저자 소개와 같은 다방면의 다층적인 연구가 통섭되어 있는 깊고 넓은 통찰이 담겨있다. 식량이라는 생존의 영역이 화두인데도 불구하고 다분히 인문학적이어서 역사와 진화가 일상과 교차하고, 그러면서도 과학적이라 사회적인 시선이 통계와 교차하며, 긴 역사를 되짚어오며 이야기하면서도 동시대에 여러 국가와 지역들의 현실을 실질적인 효과와 과학과 환경이 어우러진 시선으로 돌아본다.

 

그의 이런 학자로서의 깊은 분석과 통찰은 그의 약력을 보고도 감탄이 지어졌다. 이와 같이 현실을 다루면서도 학문적 풍격을 갖춘 저작은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 장 지글러의 자성어린 비판이 담긴 대중서로 식량과 기아 문제에 관심을 가진 바 있던 사람들이라면 본서를 통해 식량 문제로 역사와 현실, 비탄과 과학, 생존과 환경을 통계와 함께 두루 돌아볼 기회를 놓칠 수 없을 거라 생각된다.

 

분명 대중 누구나가 한번은 돌아보아야 할 문제이고 그렇다면 본서처럼 전문적인 데이터를 탁월한 학자가 통섭하며 담아낸 저작을 탐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분량은 부담 없었으나 충분히 부담감을 안고 읽을 만한 책이면서도 몰입하게 만드는 책이다. 전문적인 내용을 읽기 쉽게 서술한 권할 만한 책이다 싶다.

 

#음식은넘쳐나고인간은배부르다 #바츨라프스밀 #김영사 #식량생산체계 #서평단 #도서협찬 @gimm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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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학 - 서양, 중국, 일본과의 다름을 논하다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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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서양, 중국, 일본과의 다름을 논하다]이다. 저자는 서양의 문화 의지를 분화로 보고 중국은 동화, 일본은 응축, 한국은 접화로 정의하고 있다. 서양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고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나누는 데서 미에 대한 감각이 출발한다고 이야기한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미에 대한 감각은 어우러지는 데서 출발하지만 세부적인 게 다른 것이 중국은 생명체의 동화, 이화 작용처럼 하늘, 땅과 어우러지면서도 이물은 배출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는 수증기가 모여 구름을 이루고 유전학적으로 염색질이 염색사로 응축하듯이 정수를 응축하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일본은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 정수를 모아 의미를 두기를 즐겨해 일본에는 사소한 부분의 박물관들까지 많다 보니 전 국토에 어마한 숫자의 박물관들이 있는 정도라고 하며 작게 응축하는 것을 좋아해 초소형화하는 기술이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중국의 미술은 기운생동을 중시해 겉이 아닌 정신을 담는 것을 중시한다고 하며 서양이 수학적으로 칠음계를 기본으로 할 때 중국은 오행 철학에 입각해 오음계를 낳았다고 한다. 물론 중국의 오음계도 수학적인 기반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학적 기반의 토대는 오행 철학이다. 이 오행 철학이 기반이 되기에 서양이 무지개색을 일곱 색깔이라고 할 때 오색찬란한 무지개라는 다섯 가지 색깔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은 철학과 정신을 높이 여겨 사물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표현해내는 것이 근간이 되었고 그림에서도 서양의 일원적인 원근법이 아니라 기억을 근간으로 해 낮은 곳에서 높이 보는 고원법, 앞에서 뒤를 보는 심원법, 가까운 곳에서 먼 곳을 보는 평원법을 한 번에 아울러 표현하는 삼원법으로 그림이 표현된다고 한다.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서양이 육적으로 보이는 데 비해보다 깊은 통찰을 위해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미술은 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일본의 문화는 물아일체와 유겐, 모노노아와레가 예전에는 미쳐 몰랐던 일본의 문화를 엿보는 계기를 주는 듯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깊이를 이해하려 하고 타자와 공감함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어 우분투처럼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정신이 일본 문화에서도 느껴졌다.

 

한국의 문화는 맛의 시원함을 논하듯 어우러지고 통합된 것에서도 그 맛을 찾고 느끼는 바가 이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던 한국문화의 맛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국의 풍류는 다름 아닌 멋이고 이 멋은 하늘과 사람이 통하는 데서 온다고 선조들은 믿었다. 신라 화랑 물계자의 이런 미학적 해석이 그의 이전부터 그의 이후까지 한국의 미를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신명이라는 것은 결국 억압된 한이 풀어지는 데서 오는 쾌라는 것도 명쾌하게 다가왔다. 평온이라는 것은 정중동과 정감 어린 절제라고 보던데 동양의 율려가 율동과 려정으로 설명되며 율려(우주와 세상의 기반 운영 원리)라는 것은 결국 동적이면서도 정적임이 동반되는 것이자 그 어울림이라 이해하게 되었다. 평온의 기반이 되는 절제에 대한 한민족의 이해는 서양의 그것과 달랐는데 서양은 억압이 절제이고 이것이 결국 내적 충돌을 야기하는데 비해 내가 이해하기로는 한민족의 절제는 억압이 아닌 자연 그대로라고 느껴졌다. 이를테면 옷을 벗은 나신의 정신을 잃은 여자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주치고 서양인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내적 갈등을 하는 데 비해 한국인의 절제는 내가 다른 행동을 하면 이 여성이 깨어난 이후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할까 라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이해되었다. 서양인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한국인은 이성이 사라지는 데서 신과의 합일이 있다고 믿는다는 데서 서양과 한민족의 원형적 의식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 외에도 저자는 해학과 소박을 한국 문화 또는 한국 미학의 특징으로 보았는데 웃음, 차이와 평등, 애환을 아우르는 해학,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소박은 다른 미적 요소들과 함께 한민족의 문화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데서 소박이 드러나며 이는 큰 기교나 큰 재주는 오히려 어설퍼 보인다는 대교약졸이라는 사자성어로 저자는 표현하기도 했다.

 

본서의 내용과 본서를 통한 감상을 짧은 리뷰에 다 담을 수 없기도 하고 풀어내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짧게 서술했지만 타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길이, 맺힌 것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되기도 한 것 같다. 미학책이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심리적 치유의 효과도 있다는 걸 다소 느낄 수 있는 독서였다.

 

#한국의미학 #최광진 #미술문화 #서양 #중국 #일본 #한국 #미학 #문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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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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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정확히는 한 여자, 더 정확히는 한 여자의 유년기부터 소녀시절을 온통 지배한 훈육과 독재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그녀의 감상에도 공감은 하지만 출판사나 여러 독자들이 이야기하듯 완전한 폭력과 강탈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의 생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사유의 틀로 감상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까닭에 내가 본 그녀의 삶은 주어질 것은 다 주어졌으나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과도하거나 지나치거나 압제적인 운명이 주어졌다고 느꼈기에 이런 자전적 이야기가 쓰여졌던 거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분명 그녀에겐 안전이 주어졌고 식량이 주어졌고 교육이 주어졌다. 생존을 위해 어린시절 누려야 할 것들이 모두 주어졌다. 다만 그녀나 대중이 느끼기에 무언가 그릇되고 강압적이고 삐뚤어져 전해졌다고 느끼기에 이 책에 대한 감상들이 대체로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레몽이라는 빌런의 행동 외에는 과거에는 대부분이 이런 정도의 환경과 유사했거나 이보다 지나쳤다. 내게는 그랬는데 나 이전 세대 분들에게는 더했을 것이다. 저자는 나보다 훨씬 이전 세대이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그녀는 자신이 기대한 것과 다른 환경이 주어져서 괴로웠던 것이지 대부분에게 주어지는 환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고 느껴졌다. 성장기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괴로움을 매운맛의 9단계로 분류한다면 그녀의 삶은 9단계 어디에도 들어서지 않는 그저 순한 맛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에게는 아버지의 강압이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녀가 홈스쿨링만 했지 학교생활이 결여된 환경을 겪어서 모르나 본데 학교는 그보다 더 폭력적인 곳이다. 그녀에게는 단체 생활의 결여가 큰 상실감을 자아낸 모양인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도 많은 이들이 홈스쿨링을 선택하고 고독한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다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면이 다소 안타깝기도 하지만 대부분 특히나 한국 같은 경우에는 성인이 되기 이전에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이 완벽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없다. 태어나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기까지 자신이 놓이는 환경이라는 것은 부모의 재정 상태, 주거지역, 인간관계 등등에 의해 제한되는 경우가 거의 다이고 어느 누구도 자기만의 선택으로 환경이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 교육과 사회화라는 것도 대중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서 정의이거나 바른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문제다. 대부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식적인 프레임인 개인주의, 이기주의, 약육강식, 승자독식, 다수결 원칙 등등도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사회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알고 보면 저자의 아버지처럼 하나의 세뇌를 거치는 방식이 거대 집단인 사회 체계 속에서도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 상식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사회에서 일탈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이 책의 소재와는 다르지만) 우리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소수단체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다르다는 인식 외에 알게 모르게 이질감의 부정적 경로인 배척이라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저자가 느낀 감상들을 그녀와 같이 느끼게 된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가정이든 나라든)을 떠날 권리가 주어지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의 한국이 싫으면 한국을 떠날 자유도 분명히 주어져야 하듯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요소인 가정도 싫다면 떠날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절대악이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다수의 방식이 아닌 방식은 절대악이고 다수가 선택하면 선이라는 논리는 아니라고 본다. 스카이 캐슬 같은 부모들의 강요도 옳지 않다. 하지만 그들을 절대악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 우리가 알기에는 그런 가정도 다수이고 흔하기 때문이다. 스카이 보내려고 공부 닦달하는 부모 때문에 자식이 자살을 했다면 적당히 하지에서 그쳤을 감상이 자신이 옳다는 걸 자신의 아이에게 적용했다고 절대악이라니 이상한 논리다. 대부분에 부모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자식에게 누리게 하고 대부분에 가정에서 다 부모의 상식대로 자녀를 양육한다. 내가 보기에는 스카이 닦달하는 부모와 저자의 부모가 결이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상식적으로 상식 밖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 부모들의 상식 밖 대응과 결이 같은 대응들을 일상에서 자기 부모들에게 겪는 경우는 흔하고 이보다 더 심한 부모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저자의 감상에 딴지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딴지라기보다는 그녀가 감성이 풍부한 20세기 소녀였기에 더 크게 문제라고 느꼈던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이 정도만 주어졌어도 만족하겠다는 사람들도 세상에 적지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배움의 발견]을 쓴 타라 웨스트오버는 실존적 위기였다면 모드 쥘리앵은 보다 더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구였다고 보인다. 나로서는 타라에게는 공감과 안타까움과 함께 대견함이 느껴졌지만 모드 쥘리앵에게는 그녀의 생애 전반기 전체에서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아이 #모드쥘리앵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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