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제한선 - 1% 슈퍼 리치는 왜 우리 사회와 중산층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가
잉그리드 로베인스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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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이 분야에 대해 읽은 모든 책들(제이슨 히켈의 [격차],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의 [승자독식 사회], 앤드류 세이지의 이제까지 이 분야에 대해 읽은 모든 책들(제이슨 히켈의 [격차],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의 [승자독식 사회], 앤드류 세이지의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테크노퓨달리즘], 대니얼 마코비스의 [엘리트 세습],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주니어의 [능력주의는 허구다], 로리 파슨스의 [재앙의 지리학], 자크 파월의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클라우스 슈밥의 [자본주의 대예측][위대한 리셋], 박선미와 김희순의 [빈곤의 연대기], 노암 촘스키의 [불평등의 이유],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에드워드 로이스의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 등등)의 내용이 총망라되어 결론지어지는 책이었다.

 

세계의 격차, 불평등은 능력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부가 정점으로 축적되며 하위로 가는 길이 차단되는 것은 상속과 증여 등의 역할이 더 크다는 것에서 시작해 정점으로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초극부층은 세계의 운영 원칙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제어하고 있으며 그들의 부가 더욱 정점으로 쌓이도록 원칙과 제도를 제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부분이 능력주의 사회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며 수긍하고 있는데 이미 그런 관점에 대한 수용의 한계는 붕괴되고 있고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려면 대다수가 부를 제한하는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책의 분량이 그리 과도하지 않다 보니 초극부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제도와 원칙을 제어하는 사례들에 대한 제시가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부자들에게도 불리하기만 하지는 않다고 설득하는 장에서는 사실 이런 주장이 부자들이 설득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사회 대다수가 부의 제한선에 주목하며 공론화하자면 현재의 부가 정점으로 쌓이는 구조와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주요 쟁점으로 삼고 극부층이 자신들의 부를 악용해 사회 제도와 원칙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도록 제어하는 데 대하여 다채로운 사례를 제시하는 텍스트가 따로 더해지고 그런 연구가 지속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능력주의 사회라면서도 진짜 초거대 부는 상속과 증여로 세습되는 현실을 직시하도록 한 것은 피케티였으나 그 이후에도 대중은 문제의식을 크게 갖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사회에 대한 익숙함과 결별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지근한 물에서 이젠 열탕이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개구리와 가재는 냄비 밖으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회가 불공정했고 어떠한 방식의 부조리가 이 불평등들 유지해 왔는지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익고 쫄여지고 불탈 때까지 어떤 개구리와 가재도 냄비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평등이 목조르는 것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체감하지 않는다면 남의 얘기에는 무감각한 다수의 대중은 그냥 자신이 익어가는 상황을 남의 일인양 감당하고 말 것이다. 부의 제한선이라는 기준을 제시했으니 그 기준에 모두가 수긍할 수 있기 위해 소수가 주도해온 불공정이 무엇이었고 그런 부조리를 어떤 방식으로 실행해 왔는지 상세히 제시하는 연구가 발표되어야 할 것이다.

 



+++ 밑줄 긋기 (주목할 대목이 많았지만 가장 제시할 필요가 있는 대목만 기록한다)

 

일례로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 전 세계 상위 1%는 나머지 99%가 얻은 소득과 부의 두 배 이상을 얻었다. - P44

 

많은 경제학자가 빈곤선을 2011년 미국에서의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루 7.40~15달러 선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앨런은 현재 빈곤선인 하루 1.90달러로는 19세기 미국 노예만도 못한 생활 수준밖에 유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더 현실적으로 10달러를 빈곤선으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 세계 인구의 10%가 아니라 무려 3분의 2가 여전히 극빈곤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지만, 2011년에 미국에서 10달러로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67

 

오늘날 미국에서 인종 간 부의 불평등은 백인 노예 소유주들이 흑인을 체계적으로 착취했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노예제가 폐지되기 직전이던 1860년에 미국에는 남성, 여성, 아동을 포함해 노예가 400만 명이었다. 이들이 노동에 대해 받지 못한 상실 임금의 현재 가치는 203,0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조상이 노예를 소유한 적이 있고 그 노예들이 받지 못한 돈의 일부라도 상속을 받은 모든 미국 가구와 기업은, 만약 노예들이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부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말이다. ...... 현재 흑인은 미국 인구의 13.6%를 차지하는데도 미국 전체 부 중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4.5%밖에는 안 된다.- P101

 

1978년부터 2021년 사이에 미국의 CEO 보수는 1,460%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전형적인 노동자의 임금은 18% 증가했다. CEO는 전형적인 노동자보다 (추산 방법에 따라) 많게는 399배나 더 번다. - P212

 

실제로 상위 20%가 전체 부의 84.4%를 가지고 있었는데 응답자들은 상위 20%가 전체 부의 50%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이상적으로는 상위 20%가 전체 부의 31%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실제 분포에서 하위 20%는 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전체 부의 0.1%를 가지고 있었다.) 응답자들은 이들이 전체 부의 3%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이상적으로는 이들이 11%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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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기원 - 아기를 통해 보는 인간 본성의 진실
폴 블룸 지음, 최재천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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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부제를 번역해 책 제목으로 삼았더라. 하지만 원제는 [Just Babies]. 초반에 등장하는 아기를 대상으로 한 도덕성 실험의 결과를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선악의 기원만이 아니라 도덕성의 구축 과정을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의 관점을 통해 통섭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한 번 읽어서 깊이를 다 이해하진 못해서 다음의 재독도 작정하고 있고 현재로선 얇은 이해를 리뷰로 담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자는 결론 대목에서 도덕성은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과 사회적 요구가 더해져 구축되어가는 것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도록 서술했던데 초반의 (3개월령 이후의 아기를 주 대상으로 연구했다고 하지만 3개월령의 아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도 언급되고 있다) 아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들에서 아기가 태생적으로 이타적 선택을 하는 캐릭터에 더 끌리는 경향성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이 태생적으로 공정한 재분배와 같은 문제에서 불공정에 심한 적대감을 보이는 경향성도 있다는 걸 3세부터의 어린이들 사례를 들며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어린이의 경우 자기가 공정한 분배를 받지 못하는데 더 주목할만한 반응을 보이며 다른 이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어떤 어린이는 다른 어린이가 공정한 분배를 받지 못하는데 더 남다르게 반응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나로서는 도덕성의 개인차가 유소년기부터 두드러질 수 있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저자는 도덕성이나 사회적 가치체계들이 선험적이고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 사례로 하나를 들자면 근친혼과 이방인에 대한 문화적 차이를 들기도 또 근친혼을 꺼리는 이유에 대한 각 문화마다 해석의 차이를 들기도 한다. 근친혼을 꺼리는 이유를 어느 오지의 사람들은 남매 사이에 결혼하면 가족이 확장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동생이랑 결혼해서 가족이 확대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와 사냥을 하고 누가 나의 정원 손질을 돕는다는 말이냐고 대부분이 되묻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방인의 경우 보자마자 살해하는 것이 어느 오지에서는 당연한 관습이라는 것이다.

 

또 저자는 도덕성, 윤리관이 이성과 합치된 결론이라고 많이들 해석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결론짓기도 한다. 1770년대 제퍼슨은 강간과 동성애에 대한 처벌로 남자는 거세 여자는 코의 연골을 뚫는 형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주에서 거부당했는데 그건 형벌이 가혹해서가 아니라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많은 주에서는 강간과 동성애에 대한 처벌로 사형을 집행했다.

 

이 시대에 서양이나 동양의 계몽 지역에서는 대개 근친혼이나 근친 간 성교를 꺼리는 이유를 기형아 출산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이유로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런 사례를 들어 윤리관과 이성의 합치가 맞는지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제시와 클락이라는 남매가 대학생활 중 방학을 맞이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의 오두막에 단 둘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고 하자. 이 둘은 문득 서로 성관계를 하면 좋겠다는데 합의하고 둘 다 피임을 한 상태에서 관계를 가졌다. 그 후 오늘 일은 둘만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고 다시 하지는 말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남매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이 사례에서 이 둘의 성관계는 하면 안 되었다는 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논증하라고 한다면 아무도 제대로 된 논증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둘은 어느 한쪽의 강요나 강간에 의한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피임을 했으니 기형아 출산을 걱정할 이유도 없고 둘만의 비밀이기 때문에 가족에게 비난받거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이유도 없다. 그리고 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기에 남매 간의 관계가 깨진 것도 아니다. 대개의 사회에서 이 둘의 그날 일에 대해 불편하고 꺼림직하게 여겨진다는 것 외에는 논리나 이성을 들어 비난할 여지가 그다지 없는 것이다. 저자가 이 예를 든 것은 도덕성이나 윤리관이 사회적 요구나 혐오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고 이성과 합치되어서 윤리관을 갖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동성애에 대한 관점이 1770년대 제퍼슨의 사례에서와 같이 예전 동성애에 대한 대응과 현재의 동성애에 대한 대응은 다르기도 하다. 동성애가 옳으니 그르니를 떠나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연구한 실험의 경우 방귀 냄새나 소변 냄새 같은 악취를 맡게 하고 나서 동성애에 대한 판단을 하게 할 경우 동성애 혐오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혐오를 일으키는 신체 반응을 경험하고 나서 논란의 사례를 접하는 경우 극단적인 혐오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이나 태생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체 반응의 연장선상에서 혐오를 드러낸다는 게 저자가 말하는 이 시대까지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되던 대목은 이외에도 많았다. 이를테면 선한 행동에 대한 선호보다 나쁜 행동에 대한 처벌에 아기도 성인도 더욱 호응한다는 것과 인종 편향이나 언어 편향이 자기가 속한 집단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 그리고 교육과 접촉에 의해 그에서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 (이성으로는 존경한다고 해도) 선택의 순간 사회에 이로운 대상보다 자기 혈족의 생존을 선택하는 경향성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 등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타심을 비롯한 도덕성을 사회화를 경험하며 각 문화에서의 상식에 프로그래밍된다는 것은 상식적이면서도 주목되는 바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태생적인 것도 아니고 합리적 추론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그저 프로그래밍된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와 교육만이 아니라 영화와 연극, 공연, 광고, 드라마 등 대중예술과 미디어로 인한 프로그래밍이 상당하다는 걸 생각해볼 수 있다.

 

본서는 선악의 기원에서 시작해 도덕성, 윤리관의 구축 과정과 기능을 폭넓은 영역을 통해 주목하도록 하는 저작이다. 전문적 연구의 결론을 담고 있지만 대중서답게 제법 재미지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서로에게 자신에게 더욱 되묻게 되는 이 시절에 한번은 주목해 봐야 하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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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성 인간 - 단순한 회복을 넘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회복탄력성의 힘
알리아 보질로바 지음, 손영인 옮김 / FIKA(피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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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외상 후 성장에 대한 책이리라 짐작하고 읽게 되었다.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건 책의 소개 카피인 단순한 회복을 넘어서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회복탄력성의 힘이라는 문구도 오해에 한 몫을 했지 않나 싶다. 독서 후 저자가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Resilience , 회복탄력성으로 주로 번역되는 회복력이지 외상 후 성장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나눈 장들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인식, 소속감, 호기심, 추진력을 회복력의 주요 구성 요소로 보고 있다. 이들은 에디스 시로의 [트라우마, 극복의 심리학]에서도 언급되는 외상 후 성장에서도 중요히 다루는 요소들이지만, 저자의 서술 전체에서는 외상 후 성장을 다루고 있다는 감상보다는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해 과제를 수행해내는 힘에 관한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자신이 뉴질랜드 특수부대에 장교로 근무하며 군인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상태에서 빠르게 회복하여 과제를 완수하는 과정을 보며 심리학자로서 강력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접근하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보인다. 가장 인상적이던 사례가 가장 친한 친구와 대화 중이던 상태에서 적이 난입해 친구인 다른 병사를 죽이고 그 적도 치명상을 입었는데 친구가 죽는 걸 바로 눈 앞에서 감당한 병사가 그 상황에서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그 적을 치료했다는 내용이다. 이 군인은 이후 강력한 회복탄력성을 보이며 다음 업무들에서 성과를 보였다는 것이다. 회복력이라는 것은 이렇게 트라우마 상태를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일어나는 것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가 다시 회복하며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성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성장이나 성숙이 아니라 업무 수행에 영향을 주는 진행력 다시 말해 일종의 추진력인 것이다. 일상적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회복력과 외상 후 성장의 차이가 와닿지 않는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든다면 어느 날 자기 방에서 곤히 자고 있는 여성의 집에 여러 범죄자들이 들이닥쳐 이 여성에게 처참한 폭력을 사용하며 윤간하고 나간 상황이라고 치자. 그 일이 있은 직후 여성이 넋나간 듯 있다가 욕실로 가 씼고 나와 바로 출근을 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복귀하는 건 회복력이자 억압이랄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을 겪고 난 직후 여성이 삶의 의미를 잃고 괴로워하며 사람들과 만나는 자체를 두려워하며 세상을 떠나버렸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여성의 사연을 접하고 이렇게 있지 말자 나만큼 고통스럽고 나처럼 쓰러진 여성들을 위해 힘을 내자며 성폭력 피해 여성단체에서 피해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이 트라우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사회가 피해자들을 2차 가해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어떤 제도적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리고 힘을 다한다면 이건 외상 후 성장이다. 회복력이 있는 이는 강해 보이지만 기존의 위험을 드러나지 않게 미뤄두거나 살짝 보강해 대응한다. 외상 후 성장을 이룬 사람은 기존의 가치관, 세계관의 탈바꿈을 이루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리모델링 정도가 회복력이라면 허물고 축대와 골조부터 새로 지어올리는 것이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물론 외상 후 성장에 이르는 것도 주제에 약간은 담고 있지만 빠르게 일상적 상태로 돌아오고 성과를 내는 데에 주력해 서술하고 있다. 세상이 전쟁터라면 부서져 괴로워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줄 입장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괴로움으로 가득찬 나날도 거치는 것이 인생이다. 아프다고 자각하고 아프다고 소리칠 순간이 주어지면 손실이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한 회복력 저작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기는 다소 난해하지 않나 싶다.

 

본서의 내용은 일상의 소소한 스트레스일 때는 적용할 만하다. 그러나 완전히 부서져 세상을 버리고 싶은 순간에 적용하기는 난감하다. 이 책대로 하자면 그런 붕괴와 파괴의 순간에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만이 작용해 아주 오래 정신적 타격이 지연되며 장기 트라우마 상태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 책은 일상의 소소한 괴로움 정도가 있는 스몰 트라우마인 사람들에게 유용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매뉴얼이 될 수는 있어도 트라우마로 당장 모든 게 무너진 사람에게는 권할 만하지 않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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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 책세상 세계문학 2
안네 프랑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책세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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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네의 일기는 많이도 언급되고 청소년기에 읽은 사람들도 많았던 책으로 알고 있다. 아마 요즘 세대 중에서도 독자층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로서는 전쟁 시기를 거친 사람들의 당시 심정과 그 시기의 대처법 등이 궁금하기도 해서 선택한 책이다. 점점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시절이다 보니 현재에 닥칠지 모를 위협에 대해 알아두어 나쁠 게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에 쓴 일기문이자 하나의 기록문학이랄 수 있는 본서를 읽고 난 감상은 당시의 건조하고 위협적이면서 공포를 불러오던 현실을 간접 체험하게 해주는 소중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42년부터 194413살부터 15살 사이의 시기 안네 프랑크가 쓴 이 일기는 전쟁의 막바지가 거의 이르러 끝나는데 이 일기문의 중단 이후 안네 프랑크의 가족은 함께 은신처에 숨어있던 다른 유대인 가족들과 모두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안네의 가족은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일기문에서는 안네의 가족이 은신처로 먼저 숨어들고 이후 속속 다른 유대인 가정이 합류해 함께 생활하며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과 유대 그리고 전시에 겪는 일반 시민의 두려움과 유대인으로서 이는 공포 등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십대 소녀에게 이는 섬세한 정서와 반항과 욕정까지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다. 사실 안네와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자기 친엄마에게 상당히 되바라진 안네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고 시대적으로 금욕적이었을 당시 유럽 청소년과는 다르게 상당히 성적으로 조숙하고 까져있는 안네의 모습은 대중에게 공개되기 긍정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안네의 일기 중 엄마와의 갈등과 페테와의 일화 가운데 일부 등을 제외한 내용만 출간했었다고 한다. 21세기가 되어서 기존 유럽의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하지 않은 안네의 모습까지 수용할 만치 세태가 변하자 안네의 일기 미공개분까지 그녀의 친필인지 검증을 거쳐 공개되었다. 본서는 21세기 공개분까지 함께 수록된 완전판이다.

 

안네의 일기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으며, 유대인의 수용소 생활 등을 다루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독일의 많은 이들이 이건 실화가 아니다라고 반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 중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인물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대중이 실화라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분명 이 책에는 전시에 은신해 있는 이들의 건조한 일상이 담기긴 했지만 폭격을 두려워하거나 자신들이 은신이 들킬까 조마조마해 하는 정도일뿐 전쟁의 참혹함이 담기지도 그렇다고 유대인 수용소 생활이 담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반발한다. 증거가 명확해도 이런 반응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한 실상을 밝히는 이들의 증언에 대한 반응이 이보다 더하다 해도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다.

 

안네 가족의 사망을 미리 알고서 본문을 읽는 이들은 이 일기가 끝나는 마지막에 격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은신한 이들의 삶이다 보니 이들이 겪는 내적 격동들과는 다르게 참 단조로운 일상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 과정을 담은 안네의 정서를 통해 여과를 거치며 담백하지만 무서운 현실감을 갖게 된 것이다 싶다. 시대와 소녀가 시대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에 어떤 빛깔을 갖게 했다. 그런 빛깔과 이들이 맞이한 결론이 다시는 재현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안네의일기 #안네프랑크 #배수아 #책세상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제2차세계대전 #네덜란드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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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묻고 니체가 답하다
이희인 지음 / 홍익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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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피앤씨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본서는 예술 분야에 니체가 미친 영향을 주제로 한 책이다. 그러나 중심 주제인 니체가 미친 영향만이 아니라 니체라는 인간의 생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이들과 영역들까지 아우르는 책이다. 니체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는 니체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들을 기회가 될 수 있고 이미 니체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께는 그간의 지식을 정리하는 기회가 될 만한 책이다.

 

일반적인 니체에 관한 책들은 니체의 아포리즘 일부를 전하거나 그의 철학을 풀어 설명해주는데, 철학 대중 교양서라고 할 수 있는 책들에서는 니체의 생이 이 저작과 같은 정도로 소개되지 않고 있어서 니체 철학의 기원이나 형성 요인 등을 짐작하기 어렵다. 본서는 니체가 병약했다거나 니체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요절한 이야기 등과 그의 이성 교제 등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바그너와의 교류나 니체가 바그너의 부인을 흠모했다는 이야기 또 루 살로메와의 교제 등의 사소해 보이지만 그의 정서를 알 수 있는 기록을 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받은 영향이나 바그너의 음악에서 받은 영향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연결 지어지는 니체의 저작들과 일화 등을 다루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니체가 일방적으로 유럽의 철학과 문학, 예술에 지대한 영향만 미쳤을 뿐이라는 서술은 아니라 니체에 대한 이해가 인간미를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아닌가 싶다.

 

니체가 예술에 미친 영향으로는 문학과 철학에서의 내용만이 아니라 이사도라 던컨 같은 무용가가 언급되며 무용에 또 그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교향곡으로 만들어진 과정을 짧게 언급하며 음악에 미친 영향 그리고 니체의 영혼회귀설이 SF소설과 SF영화에 미친 영향이 서술되기도 한다. 니체 철학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전달되는 낙타, 사자, 어린이의 이야기와 니힐리즘은 언급만 될 뿐 설명이 생략되어 있고 초인 사상, 힘의 의지, 영원회귀설 또한 설명이 간략히 될 뿐이다. 니체 철학의 상세한 내용이 서술되지는 않고 있어 본서는 니체 철학을 이미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있는 이가 그의 철학이 형성되는 배경과 미친 영향을 알고 싶을 때 선택하면 좋을 책이라는 감상이다.

 

니체는 병약한 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아모르파티를 외치던 이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실사화한 듯 채찍질 당하는 말을 감싸다가 기절한 후 평생 정신적 사망 상태로 지내다 사망했다는 그의 생을 예수와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비교적 건강하던 때도 1년의 166일을 침상에서 환자로 보내리만치 건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나치와 파시즘이 그의 철학을 중시하리만치 권력과 초인을 중요시하던 이이기도 하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자신의 저작들을 설명하며 "나는 왜 이리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등의 자뻑어린 목차를 나열하고 있지만 그의 초기 저술들은 미친놈이 쓴 저작이라는 평을 들었고 그의 병약했던 평생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 인물처럼 그가 채찍질 당하는 말을 감싸 안고 기절하도록 만든 거라 짐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힘을 예찬했으나 신으로부터 매맞는 나약한 한 인간으로 자신을 인식했기에 채찍질 당하는 말에 자신을 투사하며 그걸 저지하다 쓰러져 남은 평생을 정신적 사망 상태로 살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신에게 호되게 채찍질 당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인식했기에 신은 죽어야 하고 죽었다는 그의 논리가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팠지만 삶을 긍정하고 힘을 예찬했으며 삶에 짓눌렸으나 초인(극복인)을 이야기했고 자뻑어렸지만 미친놈 취급을 받았고 지성인으로 인식되었으나 결국 정신적 사망에 이른 것이 그가 드러낸 삶의 빛깔이다. 참 양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본서는 그의 철학을 깊이 다루지는 않았으나 그의 생과 그의 연보를 알 수 있고 그가 받은 영향과 그가 미친 영향을 두루 다루는 책이다. 니체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니체의 빛깔을 조금은 이해하기에 충분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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