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을유세계문학전집 124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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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나콜라우스 그라프 폰 카이절링,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자면 카이절링의 백작 요한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니콜라우스, 이 정도 될까 싶다. 북부 저지 독일 사람으로 지금 지명을 굳이 따지자면 발틱 지역인 라트비아의 남 쿠를란트 행정구역(municipality)에 있는 파데른 성castle에서 독일계 귀족 가문의 문제아로 1855년에 태어났다. 왜 이 양반에게 “문제아”라는 딱지를 붙이느냐고? 말씀드리지. ① 귀족 가문의 자재로써 19세에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에서 법학과 미술사, 철학을 공부한 것까지는 합당하다 쳐도, 3학년 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있지? 없다. 당신이나 나나 그냥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자식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당당한 귀족의 자재가 불미스러운 일로 퇴학을 당했는데 얼마나 불미스러운지 카이절링 가문에서 퇴학 사유도 비밀에 부치게 만들어야 했을 만큼 중한 것이었으며, 하물며 이 일 때문에 지역 귀족들 사이에 따돌림을 당해 급기야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의 영지를 관리해야 했다니 이게 문제아 사유 1번. 이 책에 세번째로 실린 단편 <무더운 날들>의 화자인 ‘나’, 빌은 대학입학자격시험에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낙방의 고배를 마셔서 어머니와 누이들과 여름을 보내지 못하고 엄한 아버지하고 지내야 하는 것으로 설정했는데 이 때 경험을 오늘에 되살렸는지도 모른다. ②. 카이절링이 오스트리아에서 머무르면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작품활동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서른일곱 살 먹은 1892년에 다시 고향 쿠를란트로 돌아가 지내기 시작했는데 고향집에 머물고 일년 만에 심각한 척수병에 걸려버려 몰골이 영 말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암만봐도 이이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조금 짧은 장편소설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파도>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추밀고문관 크노스펠리우스가 척추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소위 “꼽추”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척수에 문제가 생긴 건 서른여덟 살, <파도>를 쓴 게 쉰여섯 살이니 그럴 수 있겠다. 19세기 말의 귀족 계급이라 스스로 일 하지 않고도 여유있는 생활을 보장받을 정도의 영지가 있던 카이절링은 유력한 문화계 인물들과도 교류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건강만 빼고 즐거운 생을 살았을 거 같지? 아무리 귀족이라도 인생은 결코 즐거운 게 아니라서, 젊은 시절 잠깐 혹은 ‘잠깐’들이 워낙 잔뜩 모여 있어 ‘늘’ 방탕한 생활의 결과로 쉰 살이 넘어 매독증세로 인한 것이 거의 확실하게 그만 시력을 잃게 된다. 그러니 쉰세 살 이후에 발표한 작품은 구술로 지었다고 봐야 하는데 이 목록들 가운데 하나가 대표작 <파도>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살아야 하는 게 인생. 이이는 이후에 십 년을 더 살고 9월, 가을이 쳐들어온 1918년, 예순세 살의 나이로 뮌헨에 묻힌다. 더 이상 푄 바람이 불지 않을 때였다.


​  《파도》는 첫번째와 세번째에 긴 단편, 혹은 중편 또는 노벨라 정도의 분량으로 쓴 <하모니>와 <무더운 날들>을 배치하고 이들 가운데 짧은 장편 혹은 노벨라 정도 분량의 표제작 <파도>를 실었다. 그래서 본문만 360쪽. 불과 세 편의 작품만 가지고 이 높으신 카 백작의 작품세계가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릴 건 없고, 아마추어 주제에 소설책 한 권 읽고 작품세계 운운할 주제도 되지 않을 뿐더러, 하여간 그리 길지 않은 것들이라 스토리가 아닌 순수 읽은 감상으로 독후감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다 책 뒤에 실린 역자, 서울대 독어독문과 교수 홍진호의 해설 첫 문장을 읽고 눈이 팍, 떠지는 것이 어떻게 이리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멋있는 문장 하나로 딱 매조지 했는지, 굳이 더 첨언을 해야 하나, 난감하게 됐다. 한 번 보자.


  “세기말 몰락의 정서를 묘사한 독일 데카당 문학의 대표 작가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은 철저하게 통제된 유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귀족들이 내적으로 붕괴해 가는 과정을 통하여 노쇠한 문명의 몰락을 묘사했다.” (p.365)


​  흠. 역시 나하고는 가방끈 길이에서 차이가 난다. 나는 죽어도 이렇게 쓰지 못할 거 같다. 이 비슷하게라도 쓸 수 있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더 책을 읽어야 할까? 아이고, 안 그러고 만다. 역자 홍선생은 공부로 책을 읽은 양반이고 난 즐겁자고 읽는 인간이니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부럽지도 않다.

  저 한 문장이 포함한 단어 가운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세기말 몰락의 정서”, “데카당” 그리고 “유미주의”이며, 아마 부정적 의미로 “귀족”이란 말도 꼭 하고 넘어갔으리라. “내적 붕괴”나 “노쇠한 문명의 몰락”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 구절이다. 근데 그것도 읽는 순간 단번에 접수가 되니, 우짜냐, 사람은 이래서 배워야 하는 거다.

  세기말과 데카당, 그리고 유미주의라고 했으니 카이절링의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독일 문학이라 세기말 데카당과 유미주의적 충격이 프랑스 데카당의 선구자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작품들에 비하면 접수하기가 한결 편하지만 그래도 세기말 데카당은 합이 맞지 않으면 읽기가 매우 불편한 건 사실이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이 장르를 열광하지는 않으나 거부하지도 않아 카이절링을 흥미롭게 읽었으며, 재미없는(농담이다, 농담!) 독일문학이란 특징이 오히려 프랑스의 데카당 적 엽기만발을 순화시켜 읽기가 훨씬 부드럽고 편했다. 앞으로 세기말 데카당 문학이라 하면 위스망스 대신 카이절링을 이야기할 거 같을 정도로. (그런데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로비스 코린트가 그린 카이절링의 초상화를 본 순간, 익숙한 얼굴이라 이이의 다른 작품도 읽어본 거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희곡이었을 듯,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만일 별 다섯 개 만점으로 점수를 준다면, 위 문단에서 얘기했듯이 부정적 의미로 “귀족”이 하도 많이 나와, 작가가 이 동네 출신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게 지긋지긋해서 반 개 정도 디스카운트, 네개 반을 주고 싶은데, 에이, 좋은 게 좋다고 별 다섯 개를 줄 생각이다.


​  명색이 독후감이니 스토리도 어느 정도 써야할 거 같은 강박이 좀 생긴다. 이거 참. 세 작품 다 흥미롭게 감상했고, 세 작품 모두 세기말 데카당 문학이라 우울하고, 단절되고, 퇴폐적이고, 이것들을 다 합쳐서,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 줄 알고도 이야기하면, 세기말적이다. 그래서 모두 작품 가운데 중요한 사람 하나, 더도 아니고 딱 한 명씩 죽어야 끝난다. 남자 둘, 여자 하나가 죽는다. 누군지 일러드려? 아이고 그렇게는 못하지. 또 있다. 세 편 다 극도의 귀족 부르주아들만 주인공이다. 두번째로 실린 <파도>가 제목이 파도라서 저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가 쓴 대단한 <파도>를 생각하지 마시라. 울프도 부잣집 아가씨, 도련님이 등장하는 <파도>를 썼으나, 카이절링의 <파도>의 주요 배역들과 비교하면 미주알이 찢어지는 집안의 아이들이다. 아, 급이 다르잖아, 급이. “그라프 폰” 가문인데. 성castle에서 산다니까. 내 큰 아이 전세 사는 롯데 ‘캐슬’ 말고 진짜 ‘성城’. 몇 년 동안 신나게 놀고, 바람피고, 술마시고노래하고춤추고, 지내다가 질리고 질려서 집(성)에 돌아오면 곧바로 영지를 둘러보며 소작인들을 어떻게 쥐어짤까, 궁리할 수 있는 인간들의 세기말적 고뇌. 안나 카레니나 비슷하게 서른 살 많은 백작 내팽개쳐 이 충격으로 늙은 남편한테 심부전이 오거나 말거나 자기 초상화 그리러 온 화가와 눈이 맞아 발트 해안의 초라한 어부의 집을 빌어 작업실을 꾸린 커플, 시골 촌구석에 박혀 사랑에 눈을 뜨는 바칼로레아 낙방생 부르주아 자재 등등. 이거 하나가 아쉬웠다. 대중의 삶이 안 보이는 거.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다. 만날 대중의 삶만 쓸 수 없듯이 만날 대중의 삶만 읽을 수도 없잖여? 그잖여? 카이절링의 다른 작품이 나오면 또 읽어버리고 말리라. 오늘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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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21 0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세기말 데카당 문학은 <파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데카당 문학이지만 독일이라 그래도 좀 점잖다니 저도 맘에 드네요. ㅎㅎ

골드문트 2023-03-21 11:57   좋아요 0 | URL
세기말 소설들은 개인적인 호오에 상당히 영향을 받습니다. 아무쪼록 심사숙고하셔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

수이 2023-03-21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배꼽 잡고 웃었잖아요, 골드문트님한테 또 낚였다 🤪

골드문트 2023-03-21 11:57   좋아요 0 | URL
흠. 제가 또 낚시를 했군요. ㅋㅋㅋㅋ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하 2023-03-21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일 소설.. 농담 아닌 거 같지 말입니다.. ㅎㅎ

골드문트 2023-03-21 12:01   좋아요 1 | URL
트라우마....가 있어서요. 오래 전에 러시아어로 노래하면 재미없다, 했는데 그걸 러시아어를 전공한 양반이 보고는 을매나 뭐라 하든지요. 행간을 읽어보면 그때도 농담으로 한 건데, 하여튼 이후로 이런 표현은 자제하고 있거든요.
그리하여 재미없는 독일문학이라고 쓰긴 썼지만 여전히 캥긴단 말입니다. ㅋㅋㅋ

stella.K 2023-03-2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너무 깁니다. 오래 살았나 모르겠어요.
물론 울나라엔 수완무 삼천갑자 동방삭이란
전설같은 이름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ㅋㅋ
 
작은 도릿 1 비꽃 세계 고전문학 27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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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번째 쓰는 찰스 디킨스 독후감. 언제부터 “이제 더 이상 디킨스는 읽지 않아야겠다.”라고 다짐을 했는지도 잊었다. 전형적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물 작가. 뻔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신파극이라고 폄훼 하지만 신기하기도 하지, 그러면서도 책방 선반을 뒤적거리다 아직 읽지 않은 디킨스의 책을 발견하기만 하면 주책없이 책을 향해 돌진하다가 멈추고, 다시 돌진하다가 또다시 멈추면서, 그러나 결국은, 꼭 보자마자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읽게 되는 작가. 이쯤 되면 참,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역자 김옥수는 출판사, 주로 비꽃 출판사에서 디킨스를 번역 출간했는데 내가 김옥수 번역을 읽은 건 <골동품 상점>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이이는 소설 번역 외에도 <한글을 알면 영어가 산다>라는 제목의 “번역 방법론”까지 출간한 전문 번역가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선 이렇게 자부심이 넘치는 역자의 번역을 읽는 건 사실 쉽지 않다. 읽다가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의문을 표하기도 어렵다. 이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개 이런 역자들이 사납거든. 이게 심한 표현이라면, 조금 순화해서 다시 말해, “좀 까칠하거든.” 근데 비꽃 출판사, 참 마음에 드는 게 교정 하나는 잘 본다. 저번에 읽은 <골동품 상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런데 적어도 눈에 번하게 뵈는 오탈자가 거의 없다. 잘못 알고 쓰는 단어는 좀 있는데 굳이 그걸 문제삼지는 않겠다. 예컨데 마음 속에 꽁하게 작정을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건 “똬리를 틀다”고 하지만 김옥수는 “꽈리를 틀다”로 표현했고, 교정 과정에서도 그게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정도 가지고 까탈을 부리면 그건 정말 나쁜 독자일 거 같다. 역자도 출판사도 이 정도면 참 애쓴 수준이다. 뭐 약간의 불만은, 그래 그래 있었다, 없었으면 그게 사람이냐, 하느님이지. 하여간 앞으로도 김옥수의 디킨스가 시장에 나오면 또 읽어볼 테니 열심히 번역해 내놓기 바란다. 이젠 얼마든지 비싸게 받아도 좋다. 도서관에다 희망도서 신청할 예정이니까.


  <작은 도릿>은 2부로 되어 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무대는 디킨스의 작품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채무자 교도소. 교도소 이름은 “마셜씨 교도소”다. 첫 장면은 그러나 1826년 여름,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고약한 교도소 내 어두운 감방 안. 두 명의 재소자. 한 명은 저 뒤에 가서 참나, 그래도 과학의 세기인 19세기인데 어이없게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생을 마감할 예정인 부녀자 살인자 리고. 다른 한 명은 이탈리아 출신의 밀수 혐의로 붙잡혀 온 선량한 천성을 지닌 (영어식 표기로 하면) 존 밥티스트 카벨레토. 이 두 명은 작품 속에 세 번 정도 마주치는데 처음과 두 번째는 부유한 과부 바롱노 부인과 결혼해 절벽 꼭대기에서 슬쩍 밀어 마치 추락사한 것처럼 꾸미는데 성공해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 흉악하지만 자칭 신사 리고 라니에 블랑두아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고, 세번째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선다. 물론 작품상 더 중요한 배역은 여전히 리고 블랑두아지만. 이들이 작품에 출연해서 다른 인물들과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만드는 건 마지막을 불과 몇 페이지 안 남기고 불에 태워져 몽땅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간다. 좀 어처구니없게시리. 그래도 어디 디킨스 작품 속에 이런 경우가 뭐 하나 둘인가. 노력은 가상하되 헛되구나 인생들이여.

  마지막 장면은 음, 조심해서 이야기해야지 안 그러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겠구나, 그렇다, 알려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하여튼 런던 근교에 있는 마셜씨 교도소에서 누군가 출소하는 장면이다. 교도소에서 시작해 교도소로 끝나는 이야기.


​  돈을 차입해서 그걸 갚지 못하면 누군가가 대신 갚아주거나 형사 고발을 당할 경우 이에 합당한 일정기간 동안 교도소 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민사 책임은 남아 있지만 교도소까지 다녀왔는데 누가 돈을 갚나, 어차피 사기꾼으로 찍히고 난 다음인 걸. 이때 채무자는 민사법원 재판장에게 진심으로 뉘우치는 표정을 하고 “돈이 생기는 즉시 이 채무부터 갚겠습니다. 아무쪼록 선처해주시기 앙망하나이다.”라고 약간 궁상을 떨면 자상한 재판장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답할 것이다. “그래라.” 이건 우리나라나 영국이나 같다.

  영국에서는 그게 소액이라면 채무자 교도소로 보내, 소액이니까, 채무를 갚을 때까지 그곳에 구류를 시켰던 모양이다. 19세기 초까지. 실제로 디킨스의 아버지 존 디킨스 선생께서 마셜 교도소에 일차 왕림하셨던 적이 있어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독후감에서 내가 한 번 썼듯이, 당시의 가난이 찰스 디킨스의 PTSD로 작용해 작가를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걸 작품에 솔직히 드러내면서 조금씩 치유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작품이 시작하기 20여 년 전, 얼굴은 잘 생겼지만 나약하고 수줍음이 많고 매우 상냥한 반면 무기력한 중년 신사가 웬만큼 큰 금융범죄도 아닌 푼돈에 얽매어 마셜 교도소에, 혼자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얌전하지만 무기력한 부인과, 아들 팁, 딸 페니, 그리고 부인의 배 속에 또 다른 딸을 하나 싣고, 몇 주만 있으면 나갈 수 있을 거라 예상한 채 입소한다. 그러나 부인은 교도소 안에서 추저분하고 입냄새나고 거칠고 술에 취한 전직 선상 의사가 도와주는 가운데 작품의 주인공인 막내딸 에이미를 출산한다. 이 아기, 스물두 살이 되어서도 작은 몸매에 가냘픈 체격, 그러나 건강한 체력과 놀라운 생활력에 착하디 착한 심성까지 하느님 우편에 앉을 자격이 넘쳐흐르는 주인공으로 “작은 도릿”이라 불릴 아기다. 자라서 여덟 살이 되자 어머니는 몸이 약해져 어렸을 시절 유모를 보러 갔다가 그길로 숟가락을 놓고 만다. 조금 더 자라 춤 선생에게 언니 페니를 소개해 춤을 배우게 하고, 오빠는 여기저기 취직을 시키면서 자신은 삯바느질 멀티 잡을 해가며 아버지를 부양하는 효녀 중의 효녀로 큰다. 뭐 19세기엔 다 그랬다.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하고 생활력까지 강하면 생기기도 어여쁜 거. 이 사이에 기본적으로 신사계급이었던 도릿 씨는 교도소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경받을 수 있는 후덕한 인품을 가진 수감자, 책에선 “학생”이라고 칭하는데, 학생들의 아버지, 그리하여 마셜씨 교도소 아버지라 부르며 시도 때도 없이 학생들 또는 자식들의 고민도 들어주고, 알현을 허락하기도 하며, 사과 한 알, 담배 한 개비, 육 펜스짜리 동전 몇 개 같은 것들을 공물로 챙긴다. 슬쩍 자신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받는 건 더욱 좋아한다는 것을, 슬쩍, 너무 슬쩍이라서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밝혀가면서 말이지.

  뭐 이것까지 이야기해도 괜찮을 듯하다. 1부 마지막으로 가면, 마치 우리나라 만화가 이상무의 작품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 독고탁처럼 어린 시절 잃어버린 재벌 아버지가 등장하는 대신, 난데없이 후손 없이 죽은 영주의 법정 상속인이 도릿 선생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바람에 이제 최하 23년의 교도소 생활을 마감하고 지긋지긋한 송곳이 꽂힌 담장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때 그런 사실을 밝히는데 일등 공신으로, 자신의 집에 삯바느질을 다니던 작은 도릿 때문에 가까워지게 된 클레넘 선생과 주택임대인의 하수인 팽수 등에게 무진장한 친절을 베풀어(은혜를 알면 당연하지!) 자신을 위해 지출한 금액에다 이자까지 보태 다 되돌려주고는, 인연을 끊는다. 쉬운 얘기로 안면 몰수. 귀족 신분의 대부르주아가 젠트리계급이나 평민과 가까이 지내면 가오에 심하게 스크래치가 갈 듯하니까. 뭐 도릿 선생만 그러하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 우리가 참자.


​  그럼 클레넘은? 부모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건 완벽하게 고결한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시킨 어머니의 냉혹한 교육으로 더욱 승화 발전하여 우울하고 심각한 성향을 지니게 됐고, 당연히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고아로 어린 시절부터 성질 나쁜 삼촌(클레넘의 종조부) 아래로 들어가 사업을 배웠다가, 착한 여인과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삼촌이 어머니를 소개하면서 일주일 후에 이 아가씨와 결혼해라, 안 그러면 집에서 나가라, 하는 바람에 혼인을 하고 애인과 이별을 한 거라나 뭐 그렇다. 이렇게 정 없이 살고, 그걸 넘어서 서방이 미우면 자식 새끼까지 미운 게 인지상정이라서 어머니는 더욱 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엄하게 키운 모양이다.

  클레넘 가문은 상인이다. 중개 무역을 하고, 상대는 주로 중국이었다. 부부 사이가 거의 극적으로 험악하고, 강단이 워낙 세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배우자가 여편이라서 아내는 런던 저택에 머물며 영국 내 사업을 진행하고, 남편은 중국 현지에서 중국 시장을 관리하기로 했다. 뭐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아들이 기숙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너도 꼴 보기 싫어, 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아들도 멀고 먼 중국으로 보냈다. 이제 아들이 마흔 살이 되고, 남편이 빨리 떠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세상을 등질 때 아들에게 뭐라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내에겐 편지를 쓰려 했지만 쓸 힘도 없어서, 그저 회중시계 하나만 네 엄마 가져다 줘라, 하는 유언을 끝으로 중국 객지에서 한 많은 세상을 놔버렸다. 그렇게 해 20년이 훌쩍 넘어 런던에 도착한 것. 오는 길 마르세유 항에 도착하기 전에 전염병 때문에 집단 체류를 한 적이 있었고, 여기서 어울린 선한 영국 가정이 미글스 선생 댁이다. 스무 살이 넘은 페트 양을 은근히 연모하기도 했지만 잘생긴 귀족 헨리 가우언을 사랑하는 걸 알고 얼른 포기해버리면서 자신의 나이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마흔. 젊은 아가씨와 연애하기는 너무 늙었지. 그러나 디킨스 깨나 읽은 독자들은 안다. 디킨스 시절에 스무 살 정도의 나이 차이는 껌도 아닌 걸.

  하여간 삯바느질 스페셜리스트 작은 도릿을 통해 도릿 가정과 친하게 지내게 된 클레넘은 자기 가족, 자신이 앞으로 헌신하게 될 기술자와의 동업, 도릿 가족을 위한 오지랖 때문에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쁜 세월을 보내면서, 동시에, 다시 한번 옛사랑 플로라와 조우하는데, 가녀린 첫사랑은 이제 큰 키의 거구에다가 극단의 수다쟁이로 변모해 세월의 손톱에 대한 경의를 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린다.

  디킨스답게 복잡한 구조와 다양한 에피소드가 한 상 잘 차려져 있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앞에서 얘기한대로 난데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로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피시식, 김 샌다. 뭐 그래도 재미있다. 썩어도 준치고 김이 새도 디킨스 아닌가 말야.


​  * 진짜로 읽어보실 분은 각오하시라. 1권 640쪽, 2권은 흉내만 낸 역자해설과 후기 합쳐서 591쪽. 합하면 1,231쪽. 사실 못 견딜 분량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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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18 1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디킨스의 소설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제 디킨스하면 골드님 생각 나던데.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분량이 만만치 않네요.
전 이번에 토 할배의 부활을 다시 읽었는데
읽는데 한 달 넘게 걸린 것 같아요.
너무 오래 걸려 이런 장편은 안 읽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읽고 나니까 좋긴 하더라구요.
그나저나 디킨스는 또 언제 읽어볼까요?ㅠ

골드문트 2023-03-18 13:54   좋아요 1 | URL
알라딘 앱은 불편해요. 댓글을 쓸 수 없어서 나중에야 이렇게 답변을 드립니다.
디킨스, 정말 읽을 때마다 좀 그런데 정작 눈에 띄면 또 안 읽을 수 없더라고요.
저도 징글징글합니다. ㅋㅋㅋㅋ
톨백작 부활은 두 권짜리 아닌가요? 전쟁과 평화에 비하면 양호하지요 뭐. ^^
디킨스는요, 도서관 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한 번 읽고 또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잠자냥 2023-03-18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만 읽는다더니! ㅋㅋㅋㅋ

골드문트 2023-03-18 18:04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사는 게 다 그렇지요.

coolcat329 2023-03-18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보니 당시 독자가 디킨스 파와 새커리 파로 나뉘었다던데 골드문트님은 누구 파신지요?
저는 디킨스 소설 딱 하나만 읽어봐서 선택할 능력이 없네요. ㅎㅎ
새커리는 주로 중산층 이상 계급들이 읽었는데 디킨스 읽는 사람들을 무시했다네요. 두 도시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다 있는데 올해 저도 디킨스를 꼭 읽어보렵니다.

골드문트 2023-03-18 18:09   좋아요 1 | URL
저는 셰커리가 쓴 <허영의 시장>만 읽고 길기만 했지 뭐 별로네, 했었는데요, <신사 베리 린든의 회고록> 보니까, 아휴, 예사 작가가 아니더라고요. 근데 셰커리는 번역 출간한 작품이 별로 없어서 그게 아쉬워요.
일단 읽을 거리 많은 디킨스가 그런 면에서 좀 더 유리할 듯합니다.
이디스 워튼도 <환락의 집>이든가 어디서, ˝디킨스 씨와 트웨인 씨 작품엔 신사가 나오지 않아서 별로예요.˝ 요 지랄을 하잖아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3-18 23:10   좋아요 1 | URL
아 그러고 보니 <신사 베리 린든의 회고록>도 있네요. 예전에 골드문트님 리뷰 읽고 사뒀습니다. 번역된 작품 수나 명성으로나 디킨스의 승리네요~^^

골드문트 2023-03-19 06:0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신사 베리 린든....>이 정말 신사들 이야기인가? 그건 읽어보셔야 안답니다. ^^

moonnight 2023-03-18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경하는 골드문트님^^ 디킨스 작품은 크리스마스 캐럴만 읽었답니다. 수줍-_-////// 작은 도릿은 제목도 처음 들었네용. 또 수줍-_-//////

골드문트 2023-03-18 18:11   좋아요 2 | URL
아휴, 뭐가 수줍으세요. 저도 디킨스 성인용 소설은 쉰 살 넘어서 읽기 시작했답니다.
새털 같이 많은 날이 남았습니다. 돈이 없지 설마 시간이 없겠습니까. ㅎㅎㅎ

그레이스 2023-03-18 2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제 저도 디킨스 번역되 나올 때마다 도서관에 신청해서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똬리, 꽈리 에서 웃었습니다.
후반부에서
소공녀, 소공자 생각이!

골드문트 2023-03-19 06:02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저는 앞으로 줄창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기로 작정했습니다. 한 달에 제 이름으로 세 권, 아내와 아이 이름으로 여섯 권, 합해서 아홉 권. 사이사이에 내돈내산 책 디밀고요. 그러다보니 사 놓고 1년 넘었는데 아직 못 읽은 책이 수두룩합니다. ^^

우끼 2023-03-18 2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단어에 예리한 감각 있으신거 넘 부러워요 ㅠㅠ 매 리뷰때마다 알차게 써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골드문트 2023-03-19 06:03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제가 무슨 단어 감각이.... 남이 쓴 거 읽으면서 느끼는 거 말고, 자기가 직접 쓰면서 단어를 골라내는 것이 진짜 단어 감각이지요. 에구,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언제나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리옌 대산세계문학총서 177
항타고드 오손보독 지음, 한유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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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타고드 오손보독, 상당히 독특한 이름이다. 이이의 이름을 한자어로 쓰면 “항도덕 오순포도알 杭圖德 烏順包都嘎” 이라고 쓰는데, 항타고드가 성family name인지, 오손보독이 성인지 잘 모르겠고, 오순’포도알’을 ‘오손보독’이라 읽는 것도 재미있다. 마지막 알嘎자는 나도 처음 보는 글자로 ‘새소리’와 ‘깔깔웃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 글자만 보면 “까마귀가 포도알 물고 만족해서 순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이이의 이름이 희한한 이유는 몽골인이기 때문이다. 몽골은 몽골인데 고비사막 한 가운데, 내몽골 사람이고, 내몽골은 중국 내 자치지역이라 몽골의 언어를 사용해 작품 활동도 한자어가 아니라 몽골 문자로 하고 있다. 내몽골이라도 전체가 사막지대는 아니라서 농촌지역인 나이만 허쇼의 툴렌탈 솜 세친달라 가차에서 1969년에 임시교사를 하다가 솜에 있는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농사를 짓는 어머니와의 슬하 삼형제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저 참고로 알아 두시라는 뜻에서 주소지의 암호를 좀 풀어드리자면 허쇼와 솜, 가차는 각자의 행정단위를 칭하는 것으로 허쇼⊃솜⊃가차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시⊃구⊃동 비슷하게. 날 때부터 문재가 있어서 불과 열네 살에 산문을 지어 자치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발표를 하고 열다섯 살에는 시를 싣기도 한다. 그러나 저 고비사막 근방의 농촌마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따로 할 것이 있을 턱이 있나. 졸업하고 두 해 동안 농사를 짓다가 뜻한 바가 있어 내몽골과 외몽골, 즉 중국과 몽골국의 접경지역에 있는 에리옌 시로 거처를 옮겨 2년 동안 거간꾼 일을 한다.

  아리옌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주민의 1/3은 한족으로 중국에서 생산한 물품을 가지고 와 몽골인에게 팔거나 그들의 특산품을 구입해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려는 상인이고, 1/3은 외몽골 사람으로 한족과 비슷한 이유로 시에 유입해 들어온 몽골인 상인, 그리고 나머지 1/3이 한족과 외몽골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구전을 받아 돈을 버는 거간꾼이라고 하는데, 항타고드가 바로 이 일을 했다는 거다. 이 거간꾼, 한자어를 섞어 부르면 좀 더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인류를 위해 다른 말로 부르자면 중개인들의 가장 큰 자산은 돈이 아니라 언어, 중국어와 몽골어를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이들은 한족이면 한족, 몽골인이면 몽골인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기를 치고, 협박을 하고, 필요하면 린치도 가하며, 아주 간혹가다가는 정말로 생명까지 해쳐가며 인간 말종의 삶을 살고 있는데, 사실 알고보면 아직 문명화가 덜 된 것 같은, 또는 현대화가 덜 진행된 원시도시에서 흔하게 벌어지곤 했던 일이다. 여기에 공안으로 대표하는 공권력 역시 중국문화 특유의 ‘꽌시’나 체면 등을 우선하느라 사실과 정의는 다음 순번으로 밀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곳. 어디 가서 전근대적이라고 나대지 말자. 우리나라도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했다. 관리에게 봉투에 (당시 화폐로)돈 십만 원 넣어 슬쩍 밀어주면, 얼마야? 묻고, 열 갠데요? 하면 다시 이쪽으로 밀어주면서, 집에 가다가 애들한테 과자나 사 가지고 들어가, 라고 하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다.

  하여튼 항타고드는 두 해 동안 거간일을 하면서 국경도시 에리옌이라고 불리는 지옥도에서 벌어진 온갖 난장판을 다 구경하고, 그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재를 사용해 원고지를 메꾸기 시작했으니 단편 <에리옌의 남부시장에서>, 중편 <에리옌, 에리옌, 에리옌>, 그리고 장편 <에리옌>이다. 재미있는 건, 에리옌은 국경도시의 고유명사 말고 “잡색의”, “얼룩덜룩한”, “다채로운” 등의 형용사이기도 하다는데, 작중에서도 간혹 등장해 주로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난잡하고 험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나타낸다.

  중국인이지만 몽골족이기도 한 항타고드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면서 스스로 아쉬워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몽골 놈이 몽골 놈에게 못되게 굴고, 나무 삽이 진흙을 못 뜬다.”는 몽골 속담이다. 내몽골이나 외몽골이나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 등쳐먹는 걸 안타깝게 생각했다는 건데, 미국 가면 한국인한테 제일 많이 사기치는 게 한국인이라면서? 다 그런 거지 뭐.


​  <에리옌>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은 나산달라이와 그의 아우 바양달라이 형제. 나산달라이 가족은 내몽골 시골에서 (항타고드의 부모처럼)병원 원무과에도 다니고 농사도 짓고 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결코 삶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1994년에 에리옌 소재 한템게르 컴퍼니의 사장으로 있는 아우 바양달라이 하나만 보고 무작정 에리옌으로 터를 옮겨왔다. 바양달라이는 하는 일마다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이제 금고 저 아래에 쌓인 백 위안 짜리 지폐가 누렇게 썩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돌 만큼 부자가 되어 남은 평생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여유있게 하고 싶은 거 해가면서 살 수 있는 처지다. 맏아들 고비는 공안의 경찰관이 되어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고, 늘씬한 키와 몸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의 외동딸 아리오나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벌써 시인으로 등단한 내몽골 가난한 농촌 출신 숨베르 씨와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 그와 함께 에리옌의 기차역에 도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막내 아들 테니게르는 친절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전형적인 부잣집 도령으로 세상에 아쉬운 것 없이 자란 티가 벅벅 나서 독자로 하여금 걱정이 들게도 만들지만 다행히 끝까지 무탈하게 배역을 마친다. 이렇게 잘 나가는 바양달라이는 작품이 시작할 때쯤엔 사업 운이 대낮에 뜬 별보다 많지 않아 하는 일마다 본전까지 다 거덜을 내는데다가, 유력인사와 마작에 맛을 들여 날마다 마작 판인데 거기서도 하는 족족 빈털터리가 된다. 그건 그거고 이 정도면 잘 나갔을 때 에리옌으로 처들어온 형네 식구들 좀 건사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조카 둘에게 일자리 하나 알선을 해준 적이 없으니 알 만하시지? 나중에 어떻게 될 팔자인지? 그려, 지금 생각하시는 것이 맞아.

  바양달라이의 형 나산달라이는 에리옌에 와서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하겠는데 그게 쉽나, 이때 아우가 형네 식구를 위해 해준 단 하나의 일이 형 나산달라이를 작은 호텔의 수위로 취직시켜준 거였다. 큰아들 만라이는 나이만 먹고 몸이 약해서 따로 하는 일 없이 늙은 아버지와 팔팔한 동생이 벌어온 돈으로 허위허식하면서 그래도 꼴에 배꼽 아래 꼬다리 달린 거 있다고 목하 열애중인데, 상대는 같은 나이만 허쇼 출신의 경박하고, 배운 거 없고, 사납고, 몸 헤프고, 놀기 좋아하고, 노인 공경하기는커녕 즐거이 쌍욕하는 걸 취미생활로 알고, 범죄에 관한 개념이 없어서 도저히 선량한 나산달라이 가족과 어울리지 않는 올라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연애는 급격하게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건 여기서 못 알려드리지. 둘째 철멍은 작품에 제일 먼저 소개되는 인물로 180cm가 넘는 장신이 신체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공부도 잘 해 중학교까지 졸업한 다음에 에리옌으로 왔는데 꿈이 있으니 돈을 벌어 그걸로 검정고시를 패스해 대학을 졸업한 다음 마이클 조던 같은 유명한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야말로 꿈 같은 꿈이었다. 매사 반듯한 청년이지만 사람이 반듯하다고 앞길까지 반듯해지면 그건 사람 사는 일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지구상에 반듯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도 없게?

  철멍은 작은 아버지가 취직자리도 하나 알아봐주지 않아 삼륜거, 바퀴 세 개 달린 자전거 운송수단을 운전하는 일을 한다. 철멍은 도시에서 이것 말고 다른 돈벌이를 도무지 구할 수가 없던 거였다. 하고 싶은 거야 자기도 거간꾼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것도 맨손 하나 가지고는 뛰어들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용 하나를 보고 동업을 제의할 만큼 호락호락한 시장도 아니었고. 철멍이 기차역에서 도착 열차를 기다리다가 때마침 열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에리옌에 도착한 사촌 여동생 아리오나, 그리고 그의 약혼자, 창백한 지식인이자 시인인 숨베르를 발견하며 이 황금, 황금도 아니고 그냥 금전만능주의의 복마전 에리옌에서의 이전투구가 시작된다.


​  몽골족이 쓴 작품이라 특별한 관심이 있어 예의 주시한 책이다.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이런 류의 작품으로 우리는 이미 채만식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쓴 <탁류>가 있지 않은가. 채만식의 반, 아니다, 반의 반에라도 미치기만 했으면 즐겁게 읽었다고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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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몽골 소설이군요. 이름, 지명이 어색한 거 빼곤 역시나 사람 사는 이야기네요 ㅎ 포도알 이름이 넘 귀엽습니다 ㅎㅎ
근데 큰 재미를 못 느끼신 거 같은데 별4개를 주셨네요.

골드문트 2023-03-16 14:09   좋아요 2 | URL
옙. 분명히 네 개는 많고, 그렇다고 세 개를 주자니 좀 박한 거 같고, 하다가, 요즘에 너무 늦게 익힌 처세술, 좋은 게 좋다고 걍 네 개 주고 말았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세 개 반도 좀 후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몽골 소설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ㅎㅎㅎ

잠자냥 2023-03-16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 이 책 출간 당시 몽골 작품이라 관심이 갔는데 어디선가 계몽적이다, 우리나라 1920년대 농촌소설 보는 거 같다는 평을 읽고 일단 보류했거든요. 골드문트 님 리뷰 읽으니 역시 그냥 넘기기로…. 감사합니다.

골드문트 2023-03-16 14:13   좋아요 2 | URL
아휴, 저도 기대가 컸답니다. 게다가 작년 8월 초하루, 백수가 무려 내돈내산 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누아르 경향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만 1920년대는 아니고요, 조금 더 써서 70년대, 그니깐 유신 시절 대중소설 정도로 보시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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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처음 읽은 옌롄커는 <풍아송 風雅頌>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번역 소개한 작품은 2008년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단다. 이 책으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서 옌롄커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작가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소설의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금한다는 5금禁의 영광을 안았으니 이 아니 아이러니인가. <인민을….>이 5금을 당한 2005년 8월, 그의 서재에서는 또 한 편 장편소설 <딩씨 마을의 꿈>의 초고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리고 11월에 책의 초판본에 실릴 “작가의 말”을 쓰지만 이 작품 역시 당국에 의하여 5금의 계관을 쓰게 된다. 판매뿐만 아니라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까지 작품에 대한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것에 대하여 “5금의 영광”이니 “5금의 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의 금지를 결정한 단체, 옌롄커의 경우엔 정부일 텐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유신이나 5공화국 정부같이 지독한 규제와 감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집체적, 전체적 집단일 경우라면, 어떠한 형태가 됐든지 간에 현재 자행되고 있는 통제와 금지의 영역에 한 발을 걸쳐놓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신이나 5공, 그리고 현재 또는 최근의 중국 정부는, 작가는 별 생각 없이 문학적 함의로 풍요로운 글을 쓴 것을, 담당하는 감독관이 읽어보고 괜히 자기 또는 자기들의 발이 저리거나, 자라 보고 놀란 눈알에 솥뚜껑이 보였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로 화들짝 놀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성급하게 금지의 딱지, 라고 생각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독자로 하여금 금지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는 일이 많았다는 거다. <딩씨 마을의 꿈>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 작품을 읽고 깜짝 놀라 5금을 때린 감독관은 두 해 전에 옌롄커가 쓴 <즐거움受活>, 우리나라엔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을 틀림없이 읽어보지 않은, 비전문가이거나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알아서 긴 속물 잡놈이었을 확률이 높다.

  <레닌의 키스>는 버러우 산맥의 품 속에 있는 작은 서우훠 마을이라는 유토피아 적 장소를 기초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 말 그대로 서우훠, 受活, 즐거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네의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장애인이다. 장애 대신 각기 특별한 재주 한 가지씩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딩씨 마을의 꿈>에서도 얼토당토않는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딩씨촌, 한자어로 쓰면 정장(丁莊)으로 고무래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 딩씨촌에 있는 딩좡 초등학교가 바로 유토피아다.

  여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이스라엘 삼국지 가운데 창세기. 형제들에게 밉보여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곳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술과 떡을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술 관원장이 출소해 뒤숭숭해 하는 파라오의 꿈을 요셉으로 하여금 해몽하게 만들어주는데, 옌롄커는 그들의 꾼 꿈의 네 번의 꿈의 내용으로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제1권을 구성했다. 책의 본문을 다 읽은 후에 다시 1권을 꿈 네 편을 읽으면, 45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장편소설이 이 네 편의 꿈 이야기와 해몽처럼 풀어져 나갔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어떤 해몽인지 구약성서 창세기를 읽어봐야 한다. <딩씨…> 읽기 전에 될 수 있으면 창세기를, 그것도 귀찮으면 요셉의 이야기만 발췌되어 있는 위키피디아라도 검색한 후에 읽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초장부터 사방이 피투성이다. 잔혹하다고? 그건 아니고, 딩씨 마을로 가는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마을 사람들이 피를 팔아 닦은 시멘트 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관리들이 딩씨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닦은 길로 생각했건만, 알고 보면 <허삼관 매혈기>처럼 주민들이 각자 피를 팔아서, 어려운 말로 하자면 매혈賣血을 해 번 돈 가운데 조금씩 갹출해서 도로를 닦았다는 뜻이다. 중국의 행정단위가 촌-향-현-성 뭐 이런 식으로 되는데, 전작 <레닌의 키스>에선 해방 조국이 국민들에게 쇠, 철물을 만들어 바치라는 강력한 요구를 자행한 바 있는 반면에 <딩씨…>에선 국민들의 진짜 피를, 약하지 않은 가격으로 사겠으니, 어려운 얘기로 매혈買血 하겠으니 피 파는(賣血) 일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관리들을 닦달했던 모양이다. 혹은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완고한 딩씨 마을 사람들이 어딜 생명 같은 피를 팔 수 있을까? 그리하여 현의 교육국장은 딩씨 마을을 세 번째 방문한 자리에서 촌장 리싼런을 해고해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대표적 빈농들의 마을 샹양촌 견학을 시킨다.

  딩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궁상벽지의 가난한 동네 샹양촌에 들어서보니 집마다 희디 흰 타일로 벽을 해 붙인 붉은 벽돌의 이층집에, 번드르르한 마을의 포장도로에다, 입성까지 자신들과 달리 쪽 빼 입은 것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됐느냐고 물어보니, 아줌마나 아저씨나 하시는 말씀이 피를 팔아서 그렇다고, 옷소매를 쓱 걷어 깨알 같이 주사바늘 자국이 난 팔뚝을 보여주는 거였다. 이 다음날부터 딩씨 마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만 16세 이상 50세까지 신체 건강한 남녀들이 홰나무 아래 임시로 친 텐트 안이나 밖에 누워 피를 뽑기 시작했고, 집마다 살림살이에 윤택이 나고, 너도나도 맛난 돼지고기 가브리살을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고, 쪄서 먹기 시작했던 거였다. 한 번 이리 여유 있는 생활을 맛보자 이젠 그만둘 수 없어 마을사람 팔뚝마다 샹양촌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깨 꽃이 피었지만 이젠 관에 의한 매혈소는 철수해 다른 고장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딱 이럴 때, 글 깨나 읽어 식자 연하지만 신식공부를 한 건 아니어서 학교에서 종치는 일을 하던 딩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큰아들 딩후이(이름이 빛날 휘輝)가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하더니 현으로 달려가 보나마나 누가 쓴 적 있는 중고 주삿바늘과 주사기, 알코올 솜, 피 담는 병 등을 사와 사설 “딩가 채혈소”를 차려 비닐봉지 하나 5백씨씨에 시세보다 높은 80위안으로 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딩후이가 바보는 아니라서 80위안은 분명 좋은 값이기는 한데, 봉지를 살살 돌려가며 피를 채우면 7백씨씨도, 악착같이 채우면 8백씨씨도 무난히 들어간다는 걸 당연히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뭐든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싸게 팔거나, 싸게 사거나, 원가를 낮추는 거다. 세 번째 것을 위해 딩후이는 세 명을 찌른 다음에야 주삿바늘을 알코올 솜으로 한 번 닦았는데, 문제는 아뿔싸, 이게 위에서 얘기했듯 (하지만 책에선 기척도 나지 않는다만) 시내 병원에서 이미 사용한 내력이 있는 주사기요 주삿바늘이었다는 것. 어쨌거나 딩후이는 이 일로 해서 많은 돈을 벌어 어여쁜 아가씨를 골라 장가 들어 아들 샤오창(小强)과 딸 잉즈(英子)를 낳았다. 이럭저럭 흐른 세월이 십 년. 딩씨 마을엔 한 명 두 명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이게 딩씨촌만 그런 것도 아니라 향 내 거의 모든 촌도 마찬가지, 현 내 거의 모든 현도 마찬가지, 성 내 모든 현도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성도, 현도, 향도의 시내에 거주하는 도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별로 없었던 바, 어느덧 이 열병의 정식 명칭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이며 짧게 “에이즈”라고 부르는 병인 것을 알았다. 걸리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천형. 어쩌면 인류가 이 병으로 해서 멸종을 당할 수도 있다니, 아이고, 이걸 어쩌나. 그리하여 누군가 딩후이의 집에 독물인지 독약인지 아니면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는 방귀를 뀌었는지, 집에서 기르는 닭이 죽어나가고, 개가 죽어나가고, 돼지가 죽어나가더니, 급기야 현명하고 선한 딩씨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유일한 혈손 딩샤오창이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거품을 물고 죽어버린다. 누군가가 복수를 했다고 짐작만 할 뿐. 그래서 학교 담장 아래 묻힌 딩샤오창, 이 아이의 유령이 작품의 화자가 된다.

  집집마다 에이즈 환자가 있으니 전염확률도 높고 주민들의 불안감도 높아져 가고, 길가엔 개새끼 한 마리,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을뿐더러 한 시절 피 파는 걸 거부하다가 촌장 자리에서 쫓겨난 리싼런까지 열병에 감염되어버리자, 딩수이양은 이 병을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아들 딩후이의 잘못을 보충할 겸하여, 에이즈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교사들이 모두 도망가 빈 학교가 된 딩좡초등학교로 에이즈 환자들을 불러모아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레닌의 키스>에서 나오는 바러우 산맥의 서우훠 마을처럼, <풍아송>에서 양커가 찾던 곳처럼 유토피아가 열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저 먼 시절, 3천년 전 애굽의 파라오가 꾼 꿈의 첫 번째 장면, “강에서 올라온 아름답고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갈대밭에서 풀을 뜯는 모습”이 피를 팔아 이룬 함포고복의 시절이었다면 이제 독자의 눈에는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암소가 이 살진 암소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장면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이 기근의 시절, 순간의 유토피아, 그게 얼마나, 어떻게 갈 것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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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14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읽은 책. ㅎㅎ 내내 못읽은 책 리뷰만 보다가 읽은 책 리뷰를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요. ㅎㅎ

골드문트 2023-03-14 18:42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습니까!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저도 읽은 책 나오면 더 반갑고 그래요!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첫 옌렌커도 이 책이었는데 옌렌커는 디스토피아 전문가 같아요… 그렇지만 저의 최애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최강 막장 마을스토리는 작렬지…(제가 시아버지 복상사…를 독후감에 써서인지 블로그 유입 검색어에 자꾸 시아버지의 육욕…이 연관되고 있습니다…)레닌의 키스도 보고 싶네요.

골드문트 2023-03-14 21:2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저도 최고 검색어가 ˝형수 시동생 브래지어˝랍니다. ㅋㅋㅋㅋㅋ 웃지만 웃는 게 아니죠?
옌롄커가 괘씸한 건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시침 뚝 떼고 한 가운데에 유토피아를 슬쩍 흘린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래 못 가기는 하지만 말입죠. <레닌의 키스>가 딱 그짝입니다. 전 이이의 스토리가 과하게 드세서 읽을 때마다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럼에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1: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저 그래서 저 검색어 쳐봤게요 안 쳐봤게요? ㅋㅋㅋ네이버 갔다 여기 아니네 하고 다음에 가서 아, 알라딘 망할까 봐 피난처 두는 게 나만은 아니구나 하고 알라딘 망하면 여기서 리뷰봐아지 하고 이웃추가 하고 왔어요 ㅋㅋㅋㅋ

골드문트 2023-03-14 21: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이고, 못 말리는 열반인 님. 그렇다고 정말 검색을 해보십니까.
ㅋㅋㅋㅋㅋㅋㅋ

골드문트 2023-03-14 21:5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렇고 알라딘이 암만해도 책방이라서 서재가 종종 위태위태 하잖아요. 예전에 올린 글이 한 순간에 싹 날라가버린 적도 있고 해서 보험을 들어놓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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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여선의 <레가토>는 생각지도 않게, 나를 쓸쓸하게 했다. 그리고 33년 동안 틈만 나면 도리질을 하게했던 그것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채근했다. 주인공 조준환의 말대로 그 "개 같고, 씨발 좆같아" 하나도 아름답지 아니했던 청춘의 골방을. 그렇구나. 그때 그들처럼 나도 청춘이었구나. 눈부시기는커녕 누군가가 세차게 오줌을 갈긴 개골창에 빠져 흠뻑 젖어있었던 불멸의 황금시대. 어느 때보다도 엿같았던 황금시대 말이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어느 종교에 의해 파문당한 듯한 고립감. 그것보다 더 크게 심장을 저미는 무감각의 통증. 나보다 먼저 화장장의 화염으로 불태워버리고 만 33년 전의 수치스러움. 결코 추억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오랜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인공 박인하가 눈에 밟혀서.
 그들은 세월이 흘러 야당 국회의원이었다가 물을 갈아타 빛나는 여당의 중견 의원이 됐고, 피라미드 업체의 더블 다이아몬드가 됐으며 조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임원으로 휴일마다 라운딩을 했고, 대학에서 학과장 쯤의 타이틀을 후광처럼 둘렀는데, 삼십 여년 전의 원죄를 홀로 뒤집어 쓴 것 같은 나는 아직까지 그들을 즐거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임에 좀 나오라는 권유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여전히 콧방귀를 뿜어댄다. 다시 조준환의 말대로 "개같고 씨발 좆같은" 눈부셨던 때의 좌표를 조금씩 망각해 나가는 게 인생이 아니라는 고집은 나를 외롭게 한다. 볼셰비키는 무너졌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선 인민들이 굻어죽어간다. 좌표는 바뀌는 것이지 버리는 게 아니다, 개새끼들아. <레가토>의 주둥이만 산 등장인물 새끼들아. 작가 권여선, 너를 포함해서.
 
 다시 책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고난 다음 숙고해본다.
 이거? 속이 빤하게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삶을 걸어간다기 보다, 작가의 구성에 따라 이미 정해진 길을 따르는 게 눈에 훤하다. 읽는 동안은 몰랐다. 내 시절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날 몰두하게 해 그들이 또각또각 발자국을 찍어가는 포장도로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니 내 또래의 독자들은 재미나게 읽을 수 있으리라.
 후배들은 이것들로 인해 천하에 못나고 기만적인 선배들의 모습을 안개 속에 넣고 환상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난..... 더 이상 이런 글은 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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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12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십 년 전에 이 소설이 골드문트님의 ‘하나도 아름답지 아니했던 청춘‘ 시절을 떠오르게 했나보네요. 글에서 분노와 절망이 느껴집니다.😥

골드문트 2023-03-12 18:18   좋아요 2 | URL
아오, 아오.... 이러면 안 되는데... 십 년 전에 쓴, 뭐 독후감이랄 것도 없고 그냥 책을 읽고 끼적인 건데요, 왜 오늘 올렸을꼬... 아휴 쐬주 두 병 까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지금 읽어보니까. 이걸 왜 올렸을꼬.... 왜 올렸을꼬.... 아 씨... 뭐 그렇습니다. ㅠㅠ

stella.K 2023-03-12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주인공 땜에 잠을 못 주무시다닛!
글은 이리 쓰셔도 골드님의 소설 사랑이 느껴집니다.^^

골드문트 2023-03-12 21:35   좋아요 0 | URL
에이, 그 때, 그러니까 한 십 년 전 쯤에 그랬다는 거지요 뭐. ㅋㅋ

다락방 2023-03-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좋아하는 작가에 권여선을 올리진 않는데요, 그런데 권여선 소설 읽으면 특히 더 소주 땡기지 않나요? 아마 골드문트 님 그래서 이 리뷰 올리신 거 아닐까요? 소주 두 병 때문에…..

골드문트 2023-03-12 21:36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제 불행의 8할은 알코올 의존 때문인 거 같습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23-03-12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술을 좋아하는 작가 그래서 인지 안녕 주정뱅이는 읽을만 했었는데요!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이 생각도 안나는데 씁쓸한 내용이었군요! 술 하니 생각이 나네요!

골드문트 2023-03-12 21:37   좋아요 2 | URL
권여선이 술을 즐기는 지는 몰랐는데 정말 그렇답니까? ㅋㅋㅋㅋ 은근히 반가운 걸요!

coolcat329 2023-03-12 22: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권여선 작가 술 세더라구요. <안녕 주정뱅이> 저도 좋았어요.

골드문트 2023-03-12 22:14   좋아요 1 | URL
으앗, 별 걸 다 아시네요. ㅋㅋㅋㅋ
한 번 초대했으면 좋겠는데 요즘 술값이 만만치 않아서리 ㅋㅋㅋㅋ
자리 한 번 마련해볼까요? ㅋㅋㅋㅋ 농담입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