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을유세계문학전집 150
로런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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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영국 소설. 내가 왜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영국 소설을 읽었느냐 하면,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런스 스턴이기 때문이었다. 18세기의 한복판 1759년에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이하 “트리스트럼 섄디”로 씀)>. 하긴 50년 전에 벌써 다니엘 디포와 조너선 스위프트가 각각 <로빈슨 크루소>와 <걸리버 여행기>를 써서 영국 소설의 전통을 세계만방에 고한 적이 있었으니 <트리스트럼 섄디>가 나온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수 있었겠다.

  <트리스트럼 섄디>와 <감성 여행> 두 권으로 짐작하건대, 로런스 스턴은 전형적인 희극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독자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희극이 아니라, 물론 <트리스트럼 섄디>를 읽은 후의 감상이지만, 대단히 독특한 어법으로 무장한 희극 작가, 그래서 18세기 중엽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것 참, 로런스 스턴이 정말 포스트 모던하지 않은가, 혀를 차게 됐더란 것. 그런 장면 하나만 소개한다.


  을유문화사가 찍은 을유세계문학전집 51권,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의 제1권, 제12장은 작가 로런스 스턴의 실재 친구를 모델로 한 인물, 유지니어스의 훈계, 채무를 오래 이행하지 않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인생 훅 가는 수가 있다는 설득을 귓등으로 듣다가, 드디어 채무자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그리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교구 목사 요릭 이야기이다. 스턴은 이 목사님 요릭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대리석 묘비명을 흉내 낸 가로로 긴 직사각형 안에 “애재哀哉라, 가여운 요릭!”이라 썼고, 이어지는 두 페이지를 아무런 글자 없이 그냥 검은 색으로 덮어 씌워 버렸다.

  그런데 도박을 즐긴 죄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갚지 못해 죽은 목사의 이름이 ‘요릭’? 그렇다. 하지만 당신이 아는 그 요릭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5막에 나오는 전직 덴마크 궁정 광대이자 땅에서 사토장이들이 파낸 해골 바가지로 등장해 햄릿의 대사 “아아 나의 가여운 요릭! 나는 그를 안다네, 호레이쇼.” 한 마디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해골 바가지가 된 인물. 아니, 해골 바가지. <트리스트럼 섄디>의 요릭이 <헴릿>의 요릭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요릭이라는 성姓이 흔한 이름이 아니라 독자는 저절로 덴마크 궁정 광대의 후손일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멈출 수 없을 터. 근데 이 해골 바가지 이야기가 너무 긴 거 같지? 다 이유가 있다. 로런스 스턴이 <트리스트럼 섄디>를 쓰고 9년이 지나 발표한 또다른 희극 소설 <감성 여행>에서 이 요릭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딱 한 번이기는 하지만 연극 역사에서 T.S. 엘리엇이 주장한 “객관적 상관물”의 대표적이고 고전적 예시가 <트리스트럼 섄디>의 한 등장인물로, 객관적 상관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조연으로 나왔다가, <감성 여행>에 다시 출연하는 거다.

  이걸 적당하게 섞기 위하여 셔츠 여섯 벌과 검은색 실크 바지 한 벌만 트렁크에 넣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요릭은 트리스트럼 섄디의 아버지인 월터 섄디의 친구이며, 당연히 트리스트럼과도 스스럼없는 사이로 설정했다. <감성 여행>에서 요릭의 직업은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건 <트리스트럼 섄디>처럼 교구 목사는 아니라는 것.


  하여간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나’ 요릭이 불과, 그저 21마일 떨어진 도버행 역마차에 오르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다음날 정기선을 타고 해협을 건너 칼레에 도착, 본격적인 프랑스 여행을 시작하는데, 첫 장면, 그러니까 영국인 요릭이 프랑스 땅 칼레에 도착해 처음 눈에 띈 사람이 성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승. 그러나 수도승이기도 하고 일흔 살은 되어 보이는 걸승乞僧, 빌어먹는 거지 중이기도 하다. 그 중을 보면서 요릭은 단단히 결심한다. 단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흠. 그러면 영국 국교 목사라고 해도 믿을 만하긴 하네.

  이 프란치스코파 걸승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곳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과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로런스 스턴 또는 요릭은 말한다. 한가한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으니, 첫번째가 육신이 병약해 좋은 공기와 물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둘째가 정신이 우매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감성적 여행객”들은 필요에 의해 길을 나서는 것이고 때로 긴요한 사정이 있어서. 솔직히 무슨 말인지, 어떤 뜻인지 모르겠다. 필요에 의해 해외 여행을 하는 것을 왜 “감성적”이라고 부르는 지. 그냥 대충 좋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막 던지다가 “감성적”이라는 말이 그럴 듯해서 “감성적 여행객”이라 한 거 같다. 하긴 아무러면 어떠냐.


  하여간 프랑스 땅 칼레에 와서 첫날을 여관에서 묵었다. 원래 군인이었다가 45세까지 부대낌만 많은 군대생활을 정리하고 수도원에서 안식의 성소를 찾은 프란치스코회 소속 걸승, 여관 주인 데상 씨, 여관에서 만난 틀림없이 좋은 배경을 지닌 것 같은 26세 정도로 보이는 여성, 지난번에 칼레에 들렀을 때 친해졌지만 3개월 전에 죽어 6마일 떨어진 성당 부속묘지에 매장된 로렌조 신부 등등의 이야기를 희극 소설의 재치로 써내려 간다.

  이 가운데 아무래도 가장 재미있는 건, 칼레의 여관에 숙소가 모자라 좁은 침대가 둘 놓인 요릭의 방에서 26세의 귀족(처럼 보이는, 진짜로 백작의 조카로 밝혀지는) 여성과 이이의 하녀, 이렇게 세 명이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일 터인데, 21세기에 사는 현대인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뭐 그리 읽을 만하지 않다. 흥미롭지도 못하고.

  요릭의 여행은 계속되어 아미앵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때마침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7년 전쟁을 하고 있던 터. 이를 이제야 알아챈 로런스 스턴은 허겁지겁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프랑스 백작과 요릭을 만나게 해놓고, 백작으로 하여금 프랑스의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으며, 그곳에 해당 관청과 모든 공무원들은 요릭을 위하여 최고의 서비스를 하라는 특별 여권을 장만해준다. 이렇게 해 놓으니까 이제 일개 여행객인 요릭도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귀족과 사교계에 진입하게 됐고, 그의 현란한 입놀림으로 프랑스 사교계에서도 한 번 적당히 접대하고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파리를 떠날 때까지 지극한 관심을 쏟아붓게 된다.


  이럭저럭 재미있을 거 같지? 그러나 정말로 책을 읽으려 마음먹었다면, 다시 한 번 이 책이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에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시기 앙망함. 비극이라면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슬픈 건 모든 사람이 슬픈 거니까 여전히 셰익스피어도 읽고, 소포클레스도 읽는 것이지만, 희극은 조금 다르다. 희극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웃음 코드가 각각 개별적이다. 서양 사람들이 웃고 즐길 내용에서 동양 사람들이 눈에서 소금물을 짜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런 현상을 빗대 일찍이 톨스토이 백작이 이렇게 말한 거다.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참 가지가지로 불행하다.”

  맞다. 내가 억지로 가져다 붙인 말이다. 하여간 희극 소설이라고 해서 18세기 영국인이 아닌 21세기 한국인도 마찬가지로 키득거릴 수 있다는 보장이 1도 없으니 그저 주의하기 바란다는 정도. 내 독후감 말고 다른 사람들이 쓴 책 읽은 소감을 다양하게 구경한 다음에 책을 선택해도 결코 늦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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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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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에 신시내티에서 난 용띠 아저씨 마이클 커닝햄은 캘리포니아 L.A 인근에서 자라 캘리포니아 최고 명문 스탠포드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글 좀 쓰는 사람들한테는 무지 유명한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예술 석사 학위를 얻었다. 여기 동문 가운데 누가 있느냐고? 존 치버, 필립 로스, 그리고 경애해 마지않는 매릴린 로빈슨 등등. 이 명단 가운데 마이클 커닝햄의 이름도 당당하게 올라 있다. 이이는 졸업 후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고 있고, 나이가 많아 아직도 하고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예일 대학 문예창작 수석 강사를 하고 있든지, 했든지 그렇다. 예일 대학이 미국 코네티컷, 뉴욕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디 아워스>에서 클러리서 본, 옛 남친이자 현 남사친 로버트로부터 ‘델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뉴욕에서 산다. 즉 작품의 1/3 이상이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다음으로, <디 아워스>에는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장유유서라 생년이 빠른 순서로 소개하자면 제일 언니가 버지니아 스티븐 울프, 가운데가 로라 지엘스키 브라운이고 막내가 클러리서 본. 아다시피 버지니아 울프는 동 시대의 이름난 귀족 출신 여성 작가 비타 섹빌웨스트와의 동성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다. 가운데 로라 브라운은,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지 전혀 모른 채 태평양 전투에 참전한 용사이자 세 살 어린, 친동생의 학교 동기동창 댄 브라운하고 결혼해, 맏아들 리치를 낳고 1949년 현재 둘째 아이를 임신중인데 훗날 딸을 낳을 예정이다. 막내 클러리서도 처음엔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열여덟 살 시절에 열아홉 먹은 리처드와 처음 경험을 했는지 그냥 시늉만 하다가 끝났는지 조금 헛갈린다. 확실한 건 훗날 틀림없이 남자하고 잤고, 그래서 임신을 했으며, 아빠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면서 살아갈 딸 줄리아를 출산한다. 확실하게 첫사랑인 리처드는 자기 제자들과 바람 피우기 여념이 없을(예정인) 올리버와 불 같은 연애를 하면서 곁을 떠나버리고, 이젠 샐리와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함께 살고 있다. 클러리서의 딸 줄리아 역시 아무거나 예쁜 옷만 입으면 완벽하게 어울릴 일생에 몇 년 안 되는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지만 만날 남성용 스웨터에 가죽 부츠만 신고 다니면서 엄마 클러리서가 질색을 하는 나이 든 여자와 연애중이다.

  작은 언니 브라운 부인의 자녀도 그러냐고? 흠. 이거 중요한 힌트인데, 좋다 알려드리지. 1949년에 엄마 배 속에 들어 있던 딸은 다 커서 음주운전 차에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즉사하고, 훗날 간경화로 생을 마감할 남편의 1949년 생일날 엄마와 함께 아빠한테 줄 케이크를 굽던 리치는 동성애자로 큰다. 당연히 로라 브라운 역시 엉겁결에 옆집 여자와 키스를 하는 바람에 자신 역시 동성애 인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 집착하던 것처럼 극도의 우울증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시간적 공간인 199X년까지 멀쩡하게, 건강하게 살아 있다. 성격이 무진장 까다롭다고 소문이 나서 그렇지.


  이 작품 속에 동성애자 밀도가 대단히 높다. 나도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하여 위키피디아에서 커닝햄을 검색해볼 때까지는 몰랐다. 커닝햄이 동성애자이고 동성 결혼도 했단다. 위키에는 배우자의 이름도 나오지만 구태여 그것까지 따 올 필요는 없겠다. 하기는 앞부분에서 리처드가 게이라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199X년 6월의 어느 날. 이 날은 리처드가 커루더스 상을 받는 날이다. 오후 여덟 시에. 커루더스 상이 무엇인가 하면, 주로 시나 소설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시인, 작가에게 주는 상으로 알년에 한 번, 뭐 이런 식으로 정기적으로 시상하는 것이 아니라 경력을 봐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심사해서 주는 대단한 상이다. 워낙 가끔 시상하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별로,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조금 그렇기는 해도.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리처드의 옛 애인이자 여사친이며 절친이기도 한 델러웨이 부인, 클러리서 본은 주변 친지들을 모시고 오후 다섯 시에 그럴 듯한 파티를 열 예정이다. 당연히 파티 전문 케이터링 업체에 의뢰하여 늦어도 네시 반에는 식음료가 완비될 것이고, 딱 하나 미진한 것이 있었으니 1925년에 진짜 델러웨이 부인이 그러했듯이 꽃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클러리서가 직접 뉴욕 시내로 나가 단골 꽃가게에 가 장미를 한 아름 사오는데, 길에서 만난 (초청장을 보내지 않은)여러 동성애 남녀이자 나름대로 문학, 영화계에서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사람에게 오늘 파티에 오라고 권했던 참이다.

  이 사람들을 초청하면서 이들과 리처드의 관계를 연상하는 대목에 접어들면, 리처드, 놀랍게도 동성애자에게 냉소적이다. 샐리와 근 20년간 동거하는 클러리사한테 이런 오랜 동거는 “클러리서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여자 전체를 욕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기억. 근육질의 남자들끼리 하는 사랑과 실연을 다룬 로맨스 소설을 써서 역겨울 만큼 많은 돈을 번 게이 작가 월터 하디를 향해서는 “어린 소년들을 유혹하는 남자들보다 영원히 젊은이로 남으려고 애쓰는 게이들이 세상에 더 해롭다”고 말했다. 월터가 46세로 제법 나이 들었지만 여태 캡을 쓰고 나이키를 신는 만년 소년 행세를 하는 게 꼴 보기 싫었겠지. 근데 알고 보면 리처드가 천성적으로 악담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를 닮아서. 딸뿐 아니라 아들한테도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거든. 그래서 리처드도 게이가 됐나? 그건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동성애가 유전 형질은 아닌 거 같은데.


  여기서 맏언니 버지니아 울프의 시계는 1923년. 바야흐로 오랜 침묵 끝에 야심차게 <델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이다. 물론 곧 완성해 발표할 것이고, 평단의 사나운 손톱에 너덜너덜해질 예정이지만 대중들도 이이의 후속작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품은 런던의 집이 아니라 버지니아의 엄마가 죽은 어린 시절에 발병한 조현병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살던 런던 교외 지역에서 쓰기 시작한다. 런던까지 기차 타고 당시 속도로 30분 거리. 책의 프롤로그는 1941년에 외투 주머니에 큰 돌을 집어넣고 템즈 강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울프의 무대는 하여간 1925년의 하루다.

  둘째 언니 로라 브라운은 <델러웨이 부인>을 열심히 읽고 있는 1949년 남편의 생일날이다. 지난 밤에도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느라 아침에 남편 미역국도 끓여주지 못해서 화가 나 있었다. 그래 아들 리치하고 둘이서 생일 케이크도 굽고 얼떨결에 부인병에 걸린 옆집 여자와 입술을 마주치기도 한 이상한 날, 그래도 <델러웨이 부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버틸 수 없게 되자 오후에 차를 몰고 변두리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 두 시간 여 동안 읽어 버린다. 집에 돌아와 성공적으로 자잘한 생일 밥상과 생일축하를 하고 드디어 밤이 몰려오자 홀로 욕실에 들어 약장에 든 수면제 한 통을 손에 쥐고 한참 고민에 빠졌던 브라운 부인.

  막내는 별명이 델러웨이 부인이니까 브라운 부인보다 더 울프 부인과 흡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나름대로 똑 부러지고 사건이 벌어지면 수습도 할 줄 아는 현명한 52세 여성이다.

  뭐 다른 소설책 아니면 영화로 <디 아워스>를 보셔서 스토리야 더 잘 아시겠지만, 이 작품을 보다 더 버지니아 울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내가 읽기에, 마이클 커닝햄이 구사하는 문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내가 읽기에 울프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나게 쓰기 위하여 커닝햄도 무지하게 연습을 했을 것 같다. 물론 나야 울프나 커닝햄이나 다 번역문으로 읽어서 단언할 수도 없고, 게다가 <델러웨이 부인>을 읽은 지도 꽤 오래 전이라 스토리마저 가물가물한데 문장까지 확실하게 그렇다, 주장하기는 사실 어렵다. 그래도 하여간 문장을 읽은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고 싶다. 나 말고 또 이렇게 읽은 분이 있나 싶어서 책가게 독자서평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마 내 느낌도 분명히 헛다리겠다. 에휴, 얼마나 더 읽어야, 언제나 눈이 띄어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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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의 말 - 제163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다카야마 하네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소명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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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달아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품 세 편을 읽었다. <헌치 백> 독후감 초두에 밝혔듯이 일본 현대 소설을 좀 읽어볼까 싶어 작품을 고르는데 유명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품 몇 편을 무작위로 선택한 거였다. 아쿠타가와 상은 ‘신인’이 아니라 ‘신진’ 작가들의 중단편 소설 중에서 당선작을 골라 상품으로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회중시계와 상금 백만 엔을 준다고 한다. “신진” 작가라는 점이 괜찮거나 좋은 일본 “현대” 소설을 선택할 수 있는 기재일 거 같아서 일단 세 편을 골랐는데, 결론만 말하면 나와 그리 맞지 않았다는 것. 책, 작가를 고르는 것도 쉽지 않다.

  다카야마 하네코는 1975년생 소설가. 2020년에 <슈리의 말>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45세. 얼핏 ‘신진’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것 같지 않겠지만, 이이가 소설을 서른 살이 넘어 쓰기 시작했고 주로 SF 장르에 종사한 관계로 순소설로는 말 그대로 신진이라 할 수 있었겠다. 도야마 현에서 나서 도쿄에 있는 다마 미술대학 회화과를 다니며 일본화를 전공했다 한다. 이후 샐러리맨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그 방면으로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30대가 되어 글 쓰는 일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두어 34~35세에 성인 대상 소설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고. 이후 SF 소설을 주종목으로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성취를 이루다가, 한 출판사 편집자가 “현실 속 장소를 무대로 해서”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해 쓴 것이 <슈리의 말>이란다.

  <슈리의 말>은 애초 독립국 “류큐”였다가 메이지 시대 때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를 무대로 하는 소설인데, 굳이 오키나와를 선택한 이유는 이이가 일본 프로야구, 특히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열렬한 팬인데 이 팀의 동계훈련 장소가 오키나와라서 거기 구경 갔다가 마음에 들어 소설로 쓰게 된 거란다. 우리나라의 삼성 라이온스도 전지훈련을 오키나와에서 하는 바람에 친숙하다고, 서문 격인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에 썼다.


  오키나와는 말 그대로 비운의 땅, 비운의 섬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 군국주의와 일왕에 대한 충성, 일종의 가스라이팅 때문에 입은 섬 주민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고, 종전 후에도 무려 30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 등 ‘비운’이라는 단어 하나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든 지역이다.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물방울》에 오키나와의 참상과 지형 같은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른 작품의 독후감을 쓰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실례이지만 오키나와를 무대로 한 작품이란 측면에 국한해 말하자면 《물방울》이 <슈리의 말>보다는 몇 길 위쪽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제목에 나온 슈리首里는 오키나와 시내의 한 행정구역. 태평양전쟁 당시 최대 교전 지역으로 도시가 거의 초토화되어 전쟁 이후에 옛 정취를 살려 다시 세우다시피 한 곳이다. 워낙 태풍이 잦고 고온 다습한 지역이라 소박한 성城과 건축물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가운데 미나코가와라는 곳은 전후 외인주택 지구였다가 지금은 내국인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숙소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일본 본토 출신의 노년 여성 요리順 씨의 자그마한 콘크리트 주상복합 건물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민속학에 매진한 시민 연구자로 나이가 든 상태에서 미나코가와로 이주해 이 건물 1층에 사설 오키나와 자료관을 열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겁나게 외로운 사람들이다. 요리 씨 역시 마찬가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평화운동, 자연운동에 큰 관심을 쏟는 바람에 가족과 제법 심한 거리감이 있었다. 심지어 자연운동을 하면서는 집을 나가 산 속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기도 했는데, 때마침 일본에 이런 공동체가 종종 테러를 저지르는 바람에 주민들과 매우 서걱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좀 들어 오키나와에 정착해 섬 곳곳을 다니며, 이걸 필드 워크라고 표현하는 모양인데, 유물이나 유품, 고대인과 전쟁 당시 죽은 이들의 뼛조각 같은 것들을 모아 전시관에 보관하고, 자료를 작성했다.

  나이가 더 드니, 본토에 사는 딸 미치途도 엄마 혼자 살게 두기 거시기해서 섬으로 이주해 함께 살며 시내에 작은 치과병원을 개원했다. 딸도 두 아들이 다 커서 이제 자기들의 가정을 꾸린 데다가 과부가 된 상태라 뒤돌아볼 것이 없었다.


  이 자료관에 무보수 자원봉사자 비슷한 신분의 여성 미나코未名子가 거의 날마다 와서 자료 정리에 힘을 보탰으니, 바로 소설의 주인공이다. 십여 년 전 중학생 시절에 낯가림이 심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에 가는 날보다 이곳에서 보낸 날들이 더 많았던 여성. 한참 힘든 시기였던 10대 중반부터 요리 씨에게 흠뻑 매료된 소녀였다. 무엇보다 여태 자기한테 요리 씨만큼 한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사는 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진심을 다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속마음과 달리 천성이 겉으로 상냥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하여간 전에는 이 섬의 역사와 문화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미나코는 요리 씨의 영향을 받아 자료를 정리해가면서 대단한 관심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요리 씨는 이미 노년. 자료 관리 역시 아날로그에서 벗어나지 못해, 예전 도서관 목록함이 그랬듯이 분류 카드를 일일이 손으로 작성하여 한의원의 약 서랍 비슷하게 생긴 자료함에 보관해 왔다. 미나코는 해당 유물, 유품을 카드와 함께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어 SD 카드에 담아 보관하기에 이른다.

  이 자료관은 관람 요금을 받지 않는다. 사실 요금을 받을 만큼 자료가 충실한 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워낙 가혹한 폭격을 맞아 초토화되어 제대로 남아 있는 것도 없고, 학술적으로 민속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 전문성 역시 자신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을 요리 씨 스스로도 잘 알아 그렇게 조치한 것이겠지. 요리 씨가 건물주라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이유겠고. 그렇다고 국가나 지자체에서 보조금을 받는 것도 아니라서, 완전히 노쇠한 요리 씨가 자료관을 운영하지 못할 상태가 되면 저절로 폐쇄해야 하는 처지이다. 마니코가 비록 아버지한테 작은 단독주택 한 채를 물려 받기는 했지만 수입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당연히 다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인터넷과 TV 홈 쇼핑이 득세하면서 미나코가 다니던 업체가 문을 닫아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가 몇 달 전에 취직을 했는데, 이 직업이 조금 묘하다. 다카야마 하네코가 SF 작가라서 가능했을 듯한 직업.

  세상 곳곳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이 가운데 유독 일본어를 배웠으며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으로 화상일지언정 대면해 대화하고 싶은 소수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작품에서는 문독자問讀者 라고 지칭)을 상대로 퀴즈를 내는 일을 한다. 작품 속에는 세 명의 고객이 등장한다. 반다, 폴라, 그리고 기바노. 반다는 조국에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천재로 지금 지구를 맴도는 인공위성에 ‘혼자’ 탑승하고 있는 우주인. 폴라는 가족과 떨어져 남극의 빙하 밑 까마득한 해저에서 일하는 잠수정 승무원, 기바노는 전쟁 지역의 지하 셸터에서 생존해 있는 사람. 전부 극도로 외로운 이들이다. 그러나 모두 괜찮은 사람들.


  미나코의 삶이 이렇다.

  이 시절, 어린 시절부터 미나코에게 의지가 되어주던 요리 씨는 급격히 늙어가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확실하고, 건물 3층의 수상쩍은 장소, 괴이한 공간에서 혼자 근무하는 미나코도 지역 사람들한테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시기에, 미나코가 사는 슈리의 단독주택에 커다란 털 뭉치 비슷한 짐승이 한 마리 들어와 웅크리고 있었다. 동물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미나코는 문독자 가운데 한 명이 기바노로부터 그게 말이란 것을 알아내고, 말 중에서도 오키나와 토종 말로, 일반 경주마나 마차 끄는 말과 완전히 다른 독특한 말이란 것도 알아낸다. 그리하여 작품의 제목이 <슈리의 말>이 되는데, 정말 이런 말이 있기는 하겠지만 하여간 뭐 좀 그렇다. 말이나 등장인물이나. 오키나와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러하고. 사람도 외롭고, 말도 외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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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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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휴, 세월이란. 에코 읽은 지가 벌써 8년이 됐다. 이이의 마지막 소설 작품이라는 <제0호>는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월만 잡아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 초판이 2018년 말이네. 그러면 내가 “이젠 움베르토 에코는 읽을 만큼 읽었다.”라고 뻥치고 다닐 때쯤. 그러니 나온 줄도 몰랐지.

  움베르토 에코. 무지하게 재미있다. 그런데 읽기는 쉽지 않다. 마음 단디 먹고, 각도 좀 잡고 읽으면 한 해 여름밤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즐거운 지옥을 만날 수 있는 작가, 기호학자, 수수께끼 내는 스핑크스이자 미학자. 왜 “즐거운 지옥”이냐고? 그거야 읽어보시면 알지.

  우리나라에서 움베르토 에코, 하면 역자 이윤기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이윤기의 번역이, 세상에나,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빨랐다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윤기가 얼마나 이에 대해 자랑을 해댔는지 아직도 모습이 눈에 훤한 거 같다. 모쪼록 영혼이나마 평화 속에서 쉬고 있기를.

  근데 엉뚱한 곳에서 일이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속도전에 기겁을 한 단체가 있었다. “일본 에코 학회”. 이윤기 번역의 <장미의 이름>이 나오고 아마도 1년 이상이 지난 후에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는데, 에코 학회가 보기에 그것도 매우 빠른 번역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리하여 일본 에코 학회가 정기 학회를 열면서 우리나라 U. 에코 대표선수로 이윤기를 초청했다. 아마도 이윤기, 안 갔을 걸?

  내가 놀라 자빠진 건, 아다시피 이윤기는 이탈리아어를 못하는데도 <장미의 이름>을 그리 빠른 속도로 번역했고, 그리스어도 모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순식간에 번역하는 놀라운 신공을 자랑했던 인물. <장미의 이름>의 영어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중역본이었을 걸? 아니면 Sue me! 이탈리아어를 일본어로 직역한 일본 에코 학회보다 더 빨리 번역본을 깔아 놓은 이윤기와 열린책들의 신공이여, 영원할지어다. 비행기 타고 일본에 가면 에코 학회에서 한 마디 해야 할 터, 아마 천하의 이윤기도 조금 쫄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안 갔을 거 같다. 아니면 말고.

  왜 애꿎게 이윤기 타령인가 하면, 이 책 <제0호>의 역자 이세욱 역시 이탈리아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아서.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주로 프랑스 책을 번역한 베테랑이다.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미셸 우엘벡 등을 번역해 돈을 좀 만졌을 테고, 이탈리아 작가로는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아름다운 소설 <이런 이야기>와 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등을 번역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이의 이탈리아어 직역을 믿는 건 아니다. 못 믿을 확정적 증거도 없지만 우리나라 출판계와 열린책들을 보아 그렇게 생각한다. 2018년에 나온 책이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 전공자들이 번역을 시작했을 땐데 왜 중역을 의뢰했을까? 특히 이탈리아어 번역은 글 좋은 사람도 꽤 있었을 텐데. 뭐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한 마디 했다. 책 부록 “옮긴이의 말”이 좀 아니꼽기도 했고. 뭐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작품은 1992년 6월 6일, 토요일 오전 여덟 시에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탈리아 남자로는 색다른 이름 ‘콜론나’인 50세 남자. 자칭 루저. 콜론나의 불행은 할머니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혼용하는 지역인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지방 사람인 것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할머니한테 독일어를 배우고 날로 쓰매 편안하게 됐기 때문에, 대학 1학년 때 학비를 벌기 위하여 독일어 책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고, 독일어 사용자가 별로 없어서 영어나 불어 번역보다 높은 보수를 즐겼으며,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전공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으면 책 읽는 사람 언짢을까봐 대학에서 제일 권위적이고 학점 짜고, 질투 많은 늙다리 꼰대 디 사미스 교수를 만나게 됐다. 이 양반의 강의 주제는 “루터가 성서를 어떻게 독일어로 번역했는가?”였다. 루터가 16세기 초 사람. 그럼 중세 독어잖아?

  견디다 못한 콜로나는 교수에게 하이네 작품에 들어있는 아이러니에 관해 학위 논물을 쓰겠다고 제안했다가 주위의 권유를 듣고 포기했다. 아예 학업 자체를 포기해버렸다. 번역 일을 하면 책 속에 다 쓰여 있는데 뭐 하러 돈 들여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들어 핑계 김에 때려 치웠다. 이후 스위스 알프스 지방에서 진짜 돌대가리를 위해 가정교사를 하다가, 돌대가리의 엄마, 위 앞니가 뻐드러지고 코 밑에 수염이 숭숭 난 엄마가 지긋이 손을 잡고 한 번 하자는 걸 뿌리쳤더니 다음날 바로 해고당한 후부터 싸구려 글쟁이 일을 시작했다. 좋은 말로 프리랜서. 주로 지방신문에 공연과 순회극단에 관한 기사와 평을 팔았다.

  이후 이 도시 저 도시 옮겨 살다가 문제적 인물 시메이가 불러 쉰 살의 나이에 밀라노로 온 거다. 시메이가 콜론나의 오랜 출판계 관련 일을 한 경력, 대학출판사의 교정작업과 일반 출판사의 원고 채택, 심지어 대필작가 이력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쉰 살,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나이 탓하며 채용을 꺼릴 만도 한데, 그를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한 권 대필하라는 청탁을 하는 거였다. 그것이 두 달 전인 1992년 4월 4일, 월요일. 앗차, 너무 나갔다.


  6월 5일. 그러니까 어제, 콜로나 주변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거,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엣다 모르겠다. 콜론나의 진짜 직업이 시메이의 이름으로 회상록을 한 권 써주는 건데, 겉으로는 시메이가 새 신문을 만드는 단체의 이른바 데스크 역할을 하는 거였다. 근데 이 신문사, 아직까지 정식 신문사는 아니고 준비 모임 혹은 예비 신문사의 직원 한 명이 밀라노의 골목에서 등에 칼을 맞아 피살당한 시체로 발견됐고, 그리하여 직원 전부 경찰로부터 신문을 받았으며, 여차하면 다른 직원을 포함해 콜론나 역시 다음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집에 들어와서, 술도 세지, 위스키를 반 병이나 꿀꺽꿀꺽 마신 걸로도 모자라, 엣다 모르겠다,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싶어 컵에 물을 받아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삼키고,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졌다가 오늘, 6월 6일 오전 여덟 시에 일어난 터였다.

  근데 수도가 나오지 않는다. 개수대도, 세면대도, 샤워실에도, 심지어 변기도 물이 안 나온다. 화들짝 놀란 콜론나. 우왕좌왕하다가 옆집 아줌마랄까 할머니네 현관을 두드려 “이 집도 물 안 나와요?” 물었고, 아줌마랄까 할머니가 원 별 말을 다, 하면서 무작정 콜론나의 집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배수 꼭지를 틀어 시원하게 물이 나오게 하는 거였다.

  앞에서 썼지? 어제 밤에 분명히 컵에 물을 받아 스틸녹스를 한 정 먹고 잤다고. 그럼 이게 무슨 일? 설마 형체도 드러내지 않고 집안에서 이상한 장난을 친다는 집요정 폴터가이스터의 해코지? 아닐 걸? 어제 신문사 직원을 죽인 일당 가운데 몇 명이 틀림없이 콜론나의 집에 잠입해 집안을 뒤졌을 거다. 한 사람이 죽었고, 사람들을 모은 시메이는 벌써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 마당에 그들이 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닐 듯하다. 목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하다. 집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한 일. 뒤져보니 주방에 크래커 몇 상자와 고기 통조림, 어제 마시다 남은 위스키 반 병이 있다. 죽음의 공포가 기억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콜론나는 두 달 전, 4월 6일부터 믿을 수 없이 상세하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시메이 주필을 처음 만난 날부터.


  시메이는 신문은 신문인데, 결코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콜론나가 할 일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신문을 내기 위해 1년간 준비작업을 하면서 겪은 일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Domani” 내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콜로나가 쓸 책의 제목도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 좀 골치 아프지? 결코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창간하기 위하여 1년 동안 진행하는 작업이라니.

  시메이가 주장하기를 자기 신세도 콜론나와 별로 다르지 않단다. 절대로 나오지 않을 신문이 곧 나올 것처럼 사업을 벌이는 책임을 맡은 자.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를 만큼 저널리즘에서 업적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루저. 그저 잡지사 편집장이었던 인물.

  그가 제안하는 콜로나의 보수가 엄청나다. 1년 동안 매달 현금 6백만 리라. 장부에 기입하지 않고 현금으로 주겠단다. 즉, 세금이 한 푼도 없다. 게다가 책의 원고를 완성하면, 다시 말해 창간 준비 활동을 끝내고 6개월 이내에 다시 현금으로 천만 리라를 추가로 주겠단다. 그러면 1년 반 사이에 현금 8천만 리라가 넘게, 세금 한 푼 없이 챙길 수 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나이든 콜로나는 남쪽의 편안한 작은 섬으로 이민을 가 남은 여생을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 얼른 미끼를 문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핵심은 음모론.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음모론이라면 누구? 당연히 두체Duce. 베니토 무솔리니. 이이가 정말 파르티잔한테 잡혀서 총살당한 거 맞아? 총살 이후에 밀라노 광장에 시신으로 던져졌다가 성난 군중의 발길질에 시신마저 훼손당한 채 다시 주유소 철골에 거꾸로 매달린 후에 매장당한 것이 틀림없냐고. 혹시 그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자신을 닮은 대역 아니었을까? 아돌프 히틀러가 지하실에서 권총자살한 시신을 누가 본 적 있어?

  혹시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적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극우 성향을 가진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미국을 비롯한 진영에서 비밀리에 살려 두었다가 민중들의 화가 삭은 다음에 다시 전면에 내세우든지 아니면 정신적 지지대로 명성만 유지한 채 제2의 반공세력 또는 파시즘, 나치즘으로, 소비에트 측의 진출을 방지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히틀러는 나이가 많아 일찍 죽어 틀어졌지만, 적어도 무솔리니는 1970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극좌 테러, 극우 테러가 극에 달했을 때까지는 아르헨티나쯤에서 살아 있었을 지도 몰라.

  당연히 사실과 다른 그냥 음모설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말을 이렇게 만들어 확장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해도 재미는 있다. 한 번 읽어보시라. 이 책 이후에 움베르토 에코는 단 한 편의 소설도 더 쓰지 않았으니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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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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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찾은 제인 오스틴. 이제 <이성과 감성>만 읽으면 대충 알려진 오스틴은 다 읽는 셈이구나. 그건 까치밥처럼 좀 내버려 둬야겠다. 한 작가의 작품을 싹 읽어버리면 섭섭하다. 비록 오스틴이 잉글랜드 국가대표 소설가 4인방으로, 조지 엘리엇, 조지프 콘래드, 헨리 제임스와 함께 제일 맏언니/누나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나와는 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냥 착하고 예쁜, 절대로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수수한 수준은 확실하게 넘는 예쁘고 젊은 아가씨의 연애 성공담이, 그것도 19세기 초를 무대로 하는 구식 연애 이야기가 21세기 독자한테 그리 화끈하게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확실한 건, 19세기 독자들이 읽었다면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을 거라는 점. 모르긴 하지만 당시 수준으로 치자면 막장 드라마였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의 재미있음. 이건 인정하지 못하겠다. 달리 잉글랜드 국가대표 소설가라고 하겠느냐고. 특히 선역이건 악역이건 간에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같은 건 확실히 돋보인다. 이 책도 마찬가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양이 바람둥이인줄 뻔히 아는 헨리 크로퍼드 씨가 청혼할 때, 처음엔 당연히 거세게 거절했지만 점차 혹시 저이가 정말로 마음을 착하게 먹기로 결심을 한 건 아닐까, 마음이 왔다 갔다 망설이는 수준까지 진전되는 과정이 거 참, 그럴 듯하다는 말이지.

  변죽 울리지 말고 드라마 이야기로 곧장 넘어가자.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저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아직 바스티유 감옥이 멀쩡하던 1780년대 초반에, 바다 건너 그리 크지 않은 잉글랜드라고 하는 섬나라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헌팅던이라는 마을 워드 첨지댁엔 저절로 아우라가 펼쳐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 자매가 살았으니 첫째는 맏이라 그냥 워드 양이라 부르고, 둘째가 물론 눈썹 하나 정도의 차이지만 제일 예쁜 마리아 양이었으며, 막내가 둘째와 비교해도 아쉬울 것 없는 미모의 프랜시스 양이었다. 근데 이 나라에서 혼인이라는 경사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상대 집안이 동산, 부동산이 얼마나 많은 가문이며, 혼인 상대자가 남자라면 얼마나 많은 재산과 만일 작위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물려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제일 중요했고, 여자일 경우에도 외모의 아름다움보다 친정에서 가져올 수 있는 소위 지참금이라고 일컫는 현금이 얼마나 많은지 여부였다. 워드 첨지 댁이 제일 아름다운 둘째 딸 마리아에게 줄 수 있는 재산이 7천 파운드 정도였는데, 그만하면 아주 상급 부르주아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골 향사, 소위 젠트리 계급에서는 웬만큼 방귀 좀 뀐다, 하는 수준이었겠다?

  지나던 길에 우연히 마리아 양을 한 번 보고 넋이 나가버린 노샘프턴 카운티에 있는 맨스필드 파크의 젊은 주인장인 토머스 버트럼 경이 그만 오금이 저려와 단박에 청혼을 해버리고 말았다. 토마스 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근사한 저택과 대단한 수입으로, 비록 정식 귀족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준남작에 하원의원이었지만, 워드 가문 입장에서는 쉽게 넘겨다볼 수 없는 높으신 양반이었던 것. 혼인만 했다하면 마리아 양은 단박에 남작부인 반열에 올라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건 당연하고, 물 한 방울이 뭐야,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집안일까지 착착 알아서 돌아갈 정도라, 감히 청혼을 거절할 계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아 양이 빼어난 미모를 가지기는 했지만 천성이 태평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으며 세상에 오직 자기 하나만 아는 인간이었는데, 혼인을 통해 팔자가 펴자마자 천성이 저절로 발전, 진화해, 하는 일 없이 그냥 자식만 넷을 쑥쑥 뽑아냈다. 맏이가 아빠 이름을 물려 받은 톰. 엄마처럼 무사태평에 낭비벽이 심해 일찌감치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책에서는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한 어지럽지는 않았다. 둘째가 에드먼드인데 이 아들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튼을 거쳐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둘째아들 답게 군인이나 성직, 적과 흑 가운데 성직을 택해 성공회 목사가 될 예정. 셋째와 막내가 딸 마리아와 줄리아. 둘 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면 잔뜩 골을 부리는 철딱서니들. 짐작하시겠지?


  워드 집안의 다른 딸로 말할 것 같으면, 맏이 워드 양은 둘째 마리아가 버트럼 부인이 되고 6년이 지나 돈 한 푼 없는 노리스 목사와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혼인을 감행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마리아의 남편 토머스 경은 맨스필드 교구의 성직록(이거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수준에서 넘어가자)으로 노리스 부부에게 연 1천파운드의 수입을 보장해주어 아주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냥저냥 당시 잉글랜드 향사 수준에서 남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무자식상팔자의 즐거움까지 누리게 됐다. 혹시 모르지. 슬하가 비어서 그나마 괜찮은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있었는지도. 그러나 이런 자잘한 행복도 잠시. 노리스 목사가 덜컥 병이 들어 몇 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됐으며, 여태 살던 목사 사택에서도 계속 살 수 없어 동생 집 가까운 곳 자그마한 집을 얻어 그곳에 머물며 1년 365일, 하루에 적어도 열 두어 시간 동안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닥거리며 밥도 먹고, 동생 옷도 얻어 입고, 석탄도 조금씩 꿍치면서 무진장 빈대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원래 강퍅한 성질도 있었지만 생활의 손톱에 할퀴어 점점 성격이 모질어진 늙은이로 변해갔으니 이이도 불쌍한 인간…이라고? 웃기는 이야기. 세상에 생활의 손톱이 노리스 여사한테만 할퀴고 지나가는 거야? 원래 성질 머리가 못된 사람이지.

  막내 프랜시스 양은 맏언니 노리스 부인보다 훨씬 못한 남자를 만나 혼인해 해군 정박지가 있는 포츠머스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때 토머스 경은 노리스 목사한테 베풀었듯이 해병대 소속 프라이스 대위한테도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활에 도움이 될 정도의 지원을 하려고 했으나, 준남작 경과 해병대 대위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관련자에게 경의 신분으로 한낱 대위의 복지를 부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느냐 하면, 준남작 경 입장에서 자신의 지위, 도리, 자존심상 체면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데 프랜시스 양, 이젠 프라이스 부인이 열을 받겠어, 안 받겠어? 포츠머스로 이사한 프라이스 부인은 이후 두 언니하고는 딱 연을 끊어버리고 어영부영 11년을 살았다. 프라이스 부부가 금슬이 좋아서 그랬는지, 썩어도 준치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해 현역 복무 불가능 판정을 받아 제대해 거의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 되었건만 그래도 해병대 출신이라 체질이 더할 나위 없이 건강체질이라서 그랬는지 프라이스 부인의 배에 아홉 번째 아이가 자리를 잡고 얼마 안 있어 막 밀고 나올 거 같았을 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던 프라이스 부인 프랜시스는 두 언니한테 절절한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두 언니가 편지를 읽어보니 그동안 자기들 한테 한 행실은 괘씸하지만 글자 한 자, 한 자가 어쩌면 그렇게 눈물이 앞을 가리게 썼는지 화해를 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제 나올 아이의 후원자가 돼 달라는 프랜시스의 간청 대신 둘째 아이이자 맏딸인 작품의 주인공 패니를 데려와 보살피겠노라 일렀다.

  이런 제안은 노리스 부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 패니를 데려와 레이디 버트럼의 말벗 또는 몸종 비슷한 용도로 데리고 있으려는 것이었다. 이제 누가 패니를 돌볼 것인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때는 아직 노리스 부인이 과부가 되기 전이었는데, 원래부터 떠들고 일을 꾸미는 한에서는 자애롭고 후하게 베풀며 지시하는 데 능하지만, 누구보다 돈을 좋아하고 친지들의 돈을 쓰는 법과 자기 돈을 아끼는 법을 잘 아는 부인인지라, 자신은 남편의 통풍 치료 때문에 아이를 맡을 능력이 없다고 한 마디로 패니를 맨스필드 파크에 떠넘겨버리고 만다. 아니, 마는 건 아니고 시시때때로, 주야장천 맨스필드에 머물면서 눈에 패니가 들어올 때마다 타박하고, 구박하고, 잔소리하고, 하여간 때리는 것만 빼놓고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을 다 해대는 못된 중년이었다가 못된 늙은이로 변해간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양이 갓 열 살이 되어 저 거친 해군들의 천국이자 해군 함정의 집합소였던 병영도시 포츠머스에서 꼬박 1박 2일 동안 마차를 타고 맨스필드 파크에 도착하게 되니 모두 3부 48장 가운데 이제 1부 1장과, 2장 초입까지 끝났을 뿐이다.

  패니 프라이스 양을 소개하자면, “사람을 사로잡을 수는 없어도 크게 거스르는 점도 없는 소녀.” 그냥 평범하게 착한 아이라는 뜻이겠지. 나이에 비해 작은 편이고 빼어나게 예쁜 구석도 없다지만, 아직 덜 자라 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챈다. 무엇보다 해병대 대위 출신 퇴역자 집안의 아홉 아이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행동거지가 어색하기는 해도 상스럽지 않고, 목소리도 곱고 말하는 표정이 귀여웠단다. 간단하게 말해 꿔다 놓은 작은 보릿자루. 그러나 아이를 맞는 버틀럼 가족들은, 속셈이야 어떻건 간에 겉으로 보면 잘 생기고, 용모 빼어나고, 잘 먹고 운동 많이 하고 잘 자니 심신 발달 상태 훌륭하고 사람 응대하는 솜씨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 이때 셋째이자 맏딸 마리아가 12세, 막내 줄리아가 11세. 맏이 톰과 둘째 에드먼드는 각각 17세와 16세. 근데 에드먼드가 성격이 참하다는 거지? 패니하고 여섯 살 차이네? 흠. 오스틴 좀 읽은 독자는 첫눈에 알아본다. 결국 에드먼드와 패니의 연애가 이야기의 줄기가 되겠군 그래. 설마. 그렇게 뻔한 스토리일 리가 없지. 그래도 제인 오스틴인데. 그랴? 정말? 뭐 첫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지긋지긋한 건, 첫째가 돈 타령. 누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서 결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남자 또는 상속받은 남자가 내 남편이 될 수 있는지, 내 아내가 될 여자는 얼마나 많은 지참금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제일 커다란 방점을 찍는 거. 그걸 읽는 일이었으며, 둘째가 3부 앞 장면의 가장 큰 스토리로, 징글징글하게 싫어도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가 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 말하지 못하는 고구마 백 개였다. 이 두가지 빼면 나머지는 19세기 초엽에 쓴 작품이라 넘길 수 있을 정도. 하긴 내가 고른 두 가지도 당시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지만, 고구마 정도가 하도 심해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게 된 건지 모르겠다.

  제인 오스틴, 하여튼 재미있다. 이번 달엔 어떻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별로 읽지 못해 괜히 시간만 버린 거 같은 생각이 들던 차에 제인 오스틴의 옛 노래 한 곡조 들으니 속이 다 뻥 뚫리는 느낌. 그래. 언제나는 아니지만 클래식이 좋기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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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6-08-14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저 요즘 「이성과 감성」읽고 있는데, 폴스타프님이 안 읽으셨다니 놀랐네요. 😅 아주 예전에 민음사 판으로 읽었는데 엘리에서 나온 걸로 다시 읽어 보고 싶어서 읽고 있답니다. 이 책도 돈 얘기 많이 나오고 역시 고구마 100개입니다.ㅋㅋ 특히 별 매력도 없는, 남주3인방이 속을 터지게 하네요 ㅋㅋㅋ

Falstaff 2026-08-14 07:42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책이 재미있기는 한데, 너무 로맨스 이야기만 하는 바람에 확 읽어버리게 되지는 않더구먼요. 아이구... <이성과 감성>도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ㅋㅋㅋ

건수하 2026-08-14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스필드 파크>가 두꺼우면서 제일 재미가 없었던 기억입니다. 그러고보니 제인 오스틴을 많이 읽어서 제가 <불필요한 여자> 읽으면서 돈 생각했던 것 같아요... - -; 생활은 현실이죠 암...

Falstaff 2026-08-14 19:38   좋아요 0 | URL
앗, 이 책이 제일 재미없는 오스틴이었습니까? ㅎㅎㅎ 저도 본문에 썼다시피 돈하고 고구마 때문에 애 좀 먹었는데, 전 <노생거 사원>이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불필요...>가 여기서 등장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듯합니다. 맞지요, 생활이 삶의 대빵입니닷!

건수하 2026-08-15 00:56   좋아요 0 | URL
<노생거 사원>은 좀 실험적인 느낌이라 (그때 그런 장르 소설들이 유행했다고 해요) 그런가보다 했는데 <맨스필드 파크>는 그것도 아니면서 두껍고 두께에 비해 재미가 없었어요. 역시 재미는 <오만과 편견>이 최고였고 의외로 <엠마>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