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저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6
제럴드 머네인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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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았던 머네인의 <평원>을 읽으면서 내내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의 책 <밤 끝으로의 여행>이 머리속을 배회했었던 것처럼, 작품집 《소중한 저주》를 읽는 중에는 의식이 흐르는 쪽으로 사유를 멈추지 않았던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곤혹스러웠던 <율리시즈>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꺼내 읽는 듯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피네간의 경야>와 더 비슷한데 끝까지 읽지 못해서 모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제럴드 머네인을 읽겠다고 마음먹으면 먼저 《소중한 저주》를 읽은 후에 <평원>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작가의 작품 스타일과 어떤 방식으로 픽션을 전개하는지 작지 않은 힌트를 얻을 수 있고, 그 만큼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단편 열두 편을 실은 작품집. 머네인은 자신의 책을 “산문 픽션집”이라 해야 만족할 듯하다. 그는 소설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대신 ‘픽션’이라고만 했다. 기존의 소설이라는 스토리 위주의 양식을 지양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산문 예술형식을 기존에 쓰는 단어인 픽션이라고 칭한다. 그의 세계관은 그리하여 정치와 경제, 사회적 인간들 간의 유기적 움직임에 있지 않고, 자신과 주위의 자연 그리고 사색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용하는 뇌활동에 국한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실제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의 빅토리아 주, 멜버른 시에 속하지는 않지만 영향권에 있는 멜버른과 위성 도시,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사색의 경계인 깁슬랜드와 ‘헬베티아’라고 하는 자신의 세계.

  등장인물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굳이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는 누구’로 지칭한다. 특히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인과 다르다. 새벽이 오기 전에 내 이름을 알아내면 목을 내 놓겠소. 공주 투란도트에게 이렇게 약속하고, 근사한 아리아 <아무도 잠 못 이루리>를 뽑는 테너 칼라프 왕자처럼. 나머지는 전부 그와 그녀로 표기하는데, 그와 그녀가 숱한 빈도로 등장해도 독자가 질리지 않는 이유는 “그가, 즉 주인공이” 또는 “그가, 즉 그녀의 남자친구가” 이런 식으로 보충해 설명을 해주어 독자가 도대체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조금도 헛갈리지 않게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말이지만 읽으면서 약간의 리듬감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1인칭 화자로 등장하건, 3인칭 ‘그’로 나오건 간에 1인칭 화자와 작가 시점의 그는 전부 작가인 것이 틀림없고, 소설이라기보다 산문으로 쓴 픽션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만큼 작품 속 스토리 역시 작가가 기억하는 한에서 머네인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영국에서 배를 타고 호주로 이주한 시절부터 현재까지 직접 보거나 누구한테 들었거나, 확실한 기억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한 어린시절의 음각화처럼 새겨져 있는 희미한 필름에 국한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을 한다거나, 어떻게 생각을 했을 거라는 표현 역시 없다. 그건 화자 또는 작가가 알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니까.

  정리해보면, 물리적 지리는 최대 빅토리아 주, 중간 정도로 멜버른 시를 둘러싼 몇 개의 위성도시, 작게는 책이 잔뜩 쌓여 있는 제럴드 머네인의 집 서재. 시간은 듣거나 보거나 유년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거한 할아버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사색의 공간은 자신이 만든 (아마도 빅토리아 주보다는 조금 작을) 깁슬랜드 숲과 크기를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영토인 헬베티아.


  작가가 그림에는 별로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특정 세부 모습 하나를 평생 가슴에 담게 되는데, B.W. 리더가 그린 <2월> 속 ‘길 옆에 물이 찬 특정한 바퀴자국의 이미지’이다. 부언을 하면 비가 오고 얼마 되지 않은 시골길에 마차가 지나가 땅이 팬 바퀴자국에 물이 고인 장면이다. 실제로 바퀴자국에 다가가 내려다보면 고인 물에 비친 맑은 하늘도, 우연히 동네 여자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아이의 콧잔등에 조밀하게 박인 깨소금 같은 주근깨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주인공으로 삼은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 있었다. 이 바퀴자국은 그를 따라다니며 어떨 때는 치마와 양말, 신발을 가방에 넣은 채 어둑한 길을 따라 맨발로 댄스파티에 가는 소녀의 발에 밟혀 생각지도 못한 거머리가 소녀의 발등에 달라붙기도 한다. 주인공인 그는 B.W.리더의 그림을 감명 깊게 보았지만 미술평론 잡지에서는 “칭찬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풍경화”라고 혹평을 해 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세월이 흘러 50대 초반이 된 주인공인 그는 <그 깁슬랜드 숲에서>라는 그림을 보게 되고, 이 그림에 나오는 길이 바퀴자국의 이미지와 연결이 되는데, 길과 바퀴자국과 깁슬랜드라는 지명이 또 40여 년 전 보고 여태 보지 못했던 특정 이미지와 연결이 된다.

  일곱 살 때 누군가 소박한 외국우표 수집 앨범을 물려준 적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세계각국에서 만든 우표가 망라되어 주인공인 그를 우표를 만든 나라가 어디 있는지 지도책을 찾게 만들었는데, 이 나라들 가운데 헬베티아Helvetia라는 나라 이름이 있었다. 각주를 보면 “로마 제국에 정복되기 전 현 스위스 지역…(중략)…스위스 연방국을 의인화한 여성의 이름이기도 하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주인공인 그는 헬베티아가 어느 나라를 말하는지,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지, 아니면 “높은 깃이 달린 옷을 입고 풍성하고 색이 짙은 머리칼을 가지고 표정에 슬픔이 살짝 깃들어 있는 남자”가 사는 숨겨진 나라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헬베티아는 점점, 40년이 지나도록 (물론 나중에 헬베티아가 스위스 연방의 다른 이름인 줄 알게 되어도) 자신이 속한 자신만의 나라로 기능한다.


  중∙단편이 열두 편 실렸다고 했는데, 사실 작품을 중∙단편으로 구분하는 것도 머네인이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산문 픽션 열두 편. 이렇게 써야 마땅할 듯. 열두 편 모두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동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모두 ‘픽션’이니까 어떤 픽션에서는 슬하에 1남1녀, 어떤 픽션에서는 슬하에 2남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호주로 이민 온 가족. 처음엔 농지로 개간한다는 조건으로 평야에 넓은 땅을 불하 받고 대출도 얻어 집도 지었지만 가혹한 호주의 자연에 굴복하여 개간을 포기하고 빅토리아 주 변두리의 작은 도시로 옮겼다가 세대가 바뀌면서 맬버른의 동서남북 위성도시로 또다시 옮겨 사는 가족의 일원인 것은 공통점이다. 주인공인 그는 모든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시간만 나면 책을 읽었는데 집에 책을 읽는 사람이 없어서 늘 몇 권의 책을 헤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는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하고, 초등학교 교사도 하고, 글도 쓰고, 결혼도 하고, 대학 과정을 밟고, 단과대학에서 픽션창작을 십수년 강의하다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해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등등 제럴드 머네인의 개인사와 별로 다르지 않은 환경을 유지한다. 그러니 그의 픽션은 모두 자신의 서재에서 오로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펼친 의식의 확장 과정이라고 단언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주제는 자신의 마음이며, 그의 글이 출판으로 적합하다고 판단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헬타비아인 방식으로만 쓸 수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고.(p.362~3) 다만, 내가 기껏해봐야 딜레탕트라는 점만 잊지 마시라.

  이 책의 테마는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축약하기는 하지만 자체로는 한 인간이 평생 추구한 거대한 사고. 그건 가족사와 책, 그리고 호주의 자연으로의 평야와 산. 가족사는 빼자. 가족사 없는 사람은 있기는 있지만 거의 없으니. 그럼 책, 책으로 대표하는 소위 문학과 주인공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개간하려고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만 호주의 평야. 이 거칠고 광활한 평야는 주인공인 그 또는 주인공인 제럴드 머네인이 평생을 건 문학과 다르지 않다. 독자는 이 점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책 또는 글쓰기와 읽기에 대한 사색. 자연과 평야에 대한 태생적 숙고. 이것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틀림없이 책이 가득한 서재 책상에 앉아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상태에서 서로 흘렀을 것이라서, 독자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하여간 나는 고생스럽게 읽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한번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 그 책을 다시 편 듯한 느낌. 그러나 놀랍기도 하지. 그새 세월이 흘렀나 보다. 제럴드 머네인이 결코 프루스트보다 읽기 쉽지 않건만 이제는 진도가 나간다. 적어도 읽히는데, 그것도 흥미롭게 읽힌다. 다만 읽는 속도가 문제. 그러나 이제 남아도는 것이 돈하고 시간밖에 없는 시절이라 그까짓 것, 천천히 읽어 여유로워 오히려 좋다. 하루 일곱 시간 읽어서 겨우 백 쪽을 넘기는 찬찬한 독서. 나도 머네인의 사색을 따라 급하지 않게 몇 십 년을 훌쩍 넘어다니며 순한 시간 여행도 하고, 시간 속 작은 장치들이 서로 졸졸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이렇게 즐거워질 지 몰랐다. 이게 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드디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가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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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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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그린, 하면 암만해도 책은 <권력과 영광>이요, 영화는 <제3의 사나이>렸다. 독후감을 쓰는 자리이니 영화는 다음으로 하고, 책으로 말하자면 <권력과 영광>에 필적할 그린의 작품을 기대하면서 읽지만 읽을 때마다 혹시 하다가 역시, 하고 말아 조금은 허탈하다. 그럼에도 그린의 책이 눈에 보이면 일단 읽을 책, 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그레이엄 그린이 명실상부한 대중소설의 으뜸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책, 영상과 비교하면 시시하기 그지없지만 그린 당대의 기준으로는 대단한 스릴과 서스펜스, 추리, 폭력 그리고 스파이 극이었다고. 근데 누가 슬그머니 다가와 옆구리 쿡쿡 찌르면서 <권력과 영광> 말고 어떤 책이 제일 재미있더냐고 나지막이 물으면 현대문학에서 나온 단편집 《그레이엄 그린》을, 귓속말로 속삭일 거 같다. 추리와 스파이극의 대가니까 나 역시 마치 비밀인 것처럼 귓속말로. 뭐라? 단편집? 지금 장편 독후감 초장에 다른 책을 들먹이니 이거 뭐 시작도 하기 전에 초 치고 있는 거냐고? 아이, 그럴 리가. 어떻게 하다 보니 그냥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로 빠졌을 뿐이다.


  아바나Havana, 쿠바의 수도. 시대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 그리고 체 게바라가 주도하는 쿠바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 웬만한 지방 도시를 혁명군이 장악했던 1950년대 중반 무렵으로 보인다. 쿠바의 현 대통령 정권이 위태롭게 삐걱거리며 종말을 향하고 있어서, 전통적인 쿠바의 수입원이던 관광객의 수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아바나를 중심으로 제법 밀도 있게 모여 살던 유럽인과 미국인들도 슬슬 각자의 본국으로 빠져나가던 시기에, ‘워몰드’라고 하는 찌질한 40대 중년 남자가 있었으니 며칠 후에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 어여쁜 딸 밀리의 아버지요, 미국 남자와 바람이 나 미국으로 야반도주한 아내를 잊지 못해 만날 우거지 죽상을 하고 다니는 전기청소기 아바나 대리점 주인이었다. 사실상 이혼 상태임에도 완고한 가톨릭을 ‘하느님 말씀처럼’ 믿는 어여쁜 딸 때문에 서류상 혼인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독자가 얼핏 생각하기에 혹시 나중에 다시 합치는 거 아냐?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안심하시라 그럴 일 없다.

  이제 워몰드 선생의 딱 하나 남은 소원이 있다. 근데 소원을 이룰 가망이 전혀 없어서 이제 소원은 꿈의 단계로 진입해야 했으니, 그 꿈이 뭔가 하면, 딸 밀리를 스위스에 있는 국제 학교에서 공부시키는 거였다. 스위스 국제학교는커녕 혁명으로 어수선한 쿠바를 떠나 조국인 영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것도 어려워 여태 아바나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을 뿐임에야.

  워몰드한테 딱 한 명의 친구가 있다. 닥터 하셀바허. 이름만 봐도 독일 출신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닥터 하셀바허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창기병으로 참전해 빌헬름 2세의 격려도 들었던 인물로, 전쟁이 끝난 후에 새롭게 의학을 공부해 이름 앞에 닥터를 붙였다. 독일 가운데서도 베를린이 고향이라 확실한 독일인이고, 베를린은 베를린이되 그게 동쪽인지 서쪽인지 (스파이가 아닌 게 틀림없는)하셀바허와 그의 친구 워몰드를 제외한 1950년대 중반의 뜨거운 냉전의 시대에 미국의 문 앞에 자리잡은 쿠바 아바나에 집결한 모든 국가의 스파이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던 거였다. 온갖 추측과 유언비어, 거짓이 난무하던 냉전시대. 그땐 다 그랬(을 거)다.


  우울하고 찌질한 워몰드 선생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난다.

  한 명은 쿠바 경찰권력의 거의 정점에 선 캡틴 세구라. 붉은 독수리라는 별호를 즐기는 그는 자타 공인 고문과 신체절단의 전문가이며 사람가죽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말한새뚝, 말 한 마디에 나는 새도 뚝 떨어뜨리는 공포의 존재. 워몰드보다 약간 나이를 덜 먹었다지만 1950년대에 30대 후반, 40 초반이면 중년 취급을 받았는데, 겁도 없이, 망쪼 든 나라의 경찰권력이면 겁도 없는 게 자랑이긴 하지만 하여튼 겁도 없이 워몰드의 열일곱 살 먹은 어여쁜 밀리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아들답게 결혼을 하고 싶어도 결혼은 아버지의 동의를 먼저 얻고, 이후에 상대에게 프로포즈 해 승낙을 받는 ‘절차’를 고집한다. 따라서 아주 자주 밀리를 학교까지 태워주고, 방과 후에 집까지 데려다 주건만 여태 손목은커녕 살갗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순정파이기도 하다. 세구라의 인간 구분 방법은 고문 가능 계급과 고문 불가능 계급, 딱 두 가지. 유럽에서 온 백인과 미국인은 고문 불가능. 나머지는 대부분 가능.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역시 고문 가능 계급. 으시시하지? 걱정하지 마실 사.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진짜 악당일 확률은 거의 없으니.

  다른 한 명은 거의 백인 전용 술집 수준인 카페 슬리피 조에 나타난 영국인 호손. 그는 워몰드가 영국인이기는 한데 남프랑스 니스에서 출생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워몰드는 호손이 청소기 본부에서 나온 검사관으로 짐작했었다. 호손이 워몰드를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데려가, 수도꼭지에서 물을 콸콸 틀어놓고 어떤 도청장치도 대화를 엿들을 수 없게 만든 후 말을 하기를, 사실 자기는 비밀정보기관 소속이란다. 그리고 워몰드 주변에 숱하게 많이 스파이들이 깔려 있으며 지금 하셀바허를 주목하고 있는 중이라고. 워몰드에게 자신이 지금 세비야빌트모어 호텔 501호에 머물고 있으니 밤 열한 시에 꼭 들러 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진다. 밤이 되어 정말 호텔로 찾아가는데 이날 따라 유난히 워몰드를 잡고 놓아주지 않으며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하고 기어이 세비야빌트모어 호텔까지 따라붙는 닥터 하셀바허. 그럼에도 우리의 워몰드는 하셀바허를 눈꼽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호손을 만나러 가는 엘리베이터까지 기어이 동승하는 하셀바허. 차마 5층을 말하지 못해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6층 간다고 하고, 6층 문이 열리자마자 그대로 내빼 501호, 호손을 만나니, 하는 말씀이, 이제 대 영제국의 비밀첩보기관 아바나 사무실을 꾸리라는 것. 앞으로 금고, 무전기, 훈련 받은 직원 등 모든 필요사항을 갖출 예정이란다. 당연히 머뭇거리는 워몰드. 그런데 런던에서 한 달에 세후 150달러를 급여로 주고, 경비로 따로 세후 150달러, 여기에 필요한 활동비 추가 청구, 놀라운 조건에 어쩌면 밀리의 스위스 국제학교가 꿈이 아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수락하고 만다. 스파이 훈련은커녕 도망간 아내와 찌질한 성격과 알코올 의존증에 가까운 술 등등 거의 루저 수준에 도달한 후줄근한 중년 남자가 말이지. 어떠셔, 딱 떠오르는 인물 하나 있지? 조지프 콘래드의 <비밀요원> 주인공이자 후줄근한 문방구 사장 벌록 씨. 그나마 벌록 씨는 배 나온 중년이긴 하지만 일 벌어지면 후다닥 몸을 던지기라도 하지.


  이제 워몰드는 난리가 난 거다. 처음엔 스파이고 뭐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니까 정말로 런던의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 지하에서 150달러짜리 수표를 한 장 보내는 거다. 국장과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다림질한 회색 프란넬 정장 차림의 호손이, 워몰드가 정치, 경제 정보를 얻기에 최고의 장소인 컨트리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추가비용을 신청했다는 걸 알고, 워몰드야말로 천부적인, 뼈 속까지 스파이 체질이라고 치하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정말 워몰드가 정보 수집을 위해 저명한 백인과 쿠바 고위급만 회원으로 있는 컨트리클럽에 가입했을까? 여기에 아직 어려서 어리광이 심하고 눈치도 없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야 성질이 풀리는 밀리, 그리고 밀리의 막강한 후원자인 캡틴 세구라가 개입한 사실은 런던의 누구도 모른다. 밀리가 아빠와는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덜컥 말을 한 마리 샀다. 말? 그것도 폼 나는 경주마. 쿠바라서 유럽에 비하면 헐값이긴 하지만 그래도 워몰드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정도. 거기에 세구라가 충동질해서 최고급 안장과 채찍 등 부속품 일습을 갖추고, 어느 부자의 마구간도 임대해버린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작 말을 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컨트리클럽 밖에 없는 걸? 이때 호손이 기타 경비 어쩌고 저쩌고 해서 울고 싶은데 따귀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른 컨트리클럽 가입 비용을 장난 혹은 절망 비슷한 심정으로 런던에 청구해 보았던 것.

  근데 덜커덕, 클럽 가입 비용도 수표로 보내왔으니 이제 소심한 소시민 워몰드의 가슴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돈을 받았으니 뭔가 스파이활동 보고를 해야 할 것. 마침 진공청소기 판매를 위한 연중 정기 행사로 쿠바의 지방을 순회하는 차에, 런던에다 산악지역에 반군들이 요새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했고, 내친 김에 요새를 스케치해서 보냈는데, 이 스케치가, 배운 게 청소기 판매밖에 없어서, 전기 청소기의 부품을 스케치한 거였다. 이 보고서를 철저하게 믿는 런던의 비밀정보기관의 국장과 고위급들. 그러나 첩보력이 영국만 막강한 것이 아니라,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단단한 건물의 지하실에도 이중첩자가 있는 게 틀림없어,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영국의 다른 첩보기관, 서구는 물론이고 눈치로 보니 소련 등 공산진영에서도 쿠바 산악지대에 요새가 있고, 그것을 제공한 스파이가 워몰드라는 얘기가 퍼져, 워몰드는 하루 아침에 말 그대로 세계적 스파이 스타로 등극해버린 것.

  일이 너무 커졌지? 그린의 작품 속에는 대개 조금씩 유머 코드가 있는데, 이 정도면 유머를 넘어 진지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코미디 수준이다. 그러나 그린의 스파이물이 하염없이 코미디로 흐를 수는 없는 법이란 걸, 그린 좀 읽은 독자들은 안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 역시 같은 의미에서 조금씩 폭력과 살인과 복수로 번져갈 것임을.

  탁월한 대중 작가 그레이엄 그린. 딱 그것만 기대하고 읽으시기 바람.


  아참, 이것 인용한다 해놓고 그냥 지나쳤구나. 본인 자신이 스파이 경력이 있는 그린은 당연히 보수주의자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말이지, 아이고 깜짝이야. 워몰드의 직원으로 들어온 비어트리스가 후에 런던으로 소환되어 변론을 해야 하는 입장에 몰린다. 이때 비어트리스가 최고의 비밀정보기관과 육해공군 지휘관 앞에서 말한다.

  “조국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2백 년 전에 누군가 발명한 깃발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혼에 대해 토론하던 주교단과, 의회에서 서로 맞은편에 대고 고함치던 하원 의원들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민노총과 영국국유철도와 협동조합을 말하는 건가요? (중략) 세상엔 누군가의 조국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어요. 안 그래요? (중략) 당신들이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원한다는 말을 우리는 더는 믿지 않아요. 어떤 자유요? 당신은 그냥 출세를 원하는 거잖아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위 인용은 <율리시즈>에서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문장과 매우 흡사하다.

  “나의 조국은 나를 위해 죽어달라.”

  그런데 나는 위대한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조금 비틀어 이렇게 말하곤 하지.

  “나의 조국은 한 번이나마 나를 위해 죽는 척이라도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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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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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 쓰기 전에 뭔가 좀 먹어야겠다. 당 떨어졌나 왜 후들거려? 하긴 뭐 스타니스와프 렘의 지극히 철학적 농담집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니 잔뜩 기가 죽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책을 번역한 정보라. 나는 정보라한테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같은 스타니스와프지만 렘 말고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를 번역해 읽을 수 있게 해준 역자가 정보라라서. 정작 그의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아 부커-인터내셔널 상 최종심사에 오른 소설이 엽기토끼인지, 저주토끼인지 막 헷갈리는 수준이긴 한데, 하여간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 35번으로 나온 정보라 역 <탐욕>을, 정보라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못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비트키예비치 한 줄도 읽지도 못하고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지. 정말 진지하고 인상깊게 잘 읽었다. 그럼에도 독자서평에 별 다섯이 아니라 하나 빼고 넷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으면서 가비얍게 만점으로 올리는 작은 일도 양심상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근데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와 다른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 기분이다. 마음 같으면 당연히 별 다섯 만점을 클릭하고 싶건만 도무지 내가 작품을 얼마나 이해하고 즐겼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양심상 하나 빼야 마땅하다. 하여간 폴란드 사람들 스타니스와프들은 너무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먹고 오자. 이왕이면 달걀 하나 동동 띄워서.

  정말로 라면 끓여먹고 왔다. 밥 두 큰 숟가락, 수프 3분의 1 봉지, 굴소스 반 티스푼, 콩나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마늘, 파, 달걀 하나 톡 깨 잠깐 더 끓인 다음에 고추가루 반 스푼과 참기름 살짝 두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쐬주를 한 병 까? 말아? 고민했다. 쐬주는 독후감 쓴 다음에 하자.


  이 책은 1971년에 출간한 《절대 진공》과 1973년 작품 《상상된 위대함》을 번역해 한 권에 묶은 착한 책이다. 출판사 현대문학이 이런 일을 많이 해서 좋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 같은 구상은 현대문학만 할 수 있을 듯. 아무쪼록 출판사 ‘현대문학’, 흑자 많이 내서 계속 번창하기 바란다.

  저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철학적 농담집”이라고 했다. 농담은 농담이되 이게 철학적이면,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철학이니 다분히 철학philosophy이면서 동시에 금속공학metallurgy 적이기도 하다. 농담은 농담이지만 잘 교육받은 소수의 전문가들만 책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한 곳에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농담’할 때의 농弄은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상당히 고단수 적인 우스개, 흔히 이야기하기를,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유머코드이겠다. 그래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를 위시한 숱한 독자는 지금 작가가 농담 코드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 눈치 채겠는데 이게 왜 웃어야 하는 지 모르거나, 농담을 하고 있는 지 자체도 모르거나, 심지어 농담을 하고 있지도 않은데 지레짐작으로 독자 혼자 낄낄거릴 수 있지 않을까? 이 책 읽으면서 간혹 웃기도 했건만 정작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이 그래서 개운하지 않다. 안 웃긴 장면에서 웃었을까봐. 웃긴 장면에서 안 웃는 건 뭐 그럴 수 있어도, 안 웃긴 장면에서 웃으면 되게 쪽팔리거나 무안하잖아? 이거 참. 그렇다고 다시 읽어 보기도 뭐하고 말이지. 사실 앞에서 라면 먹으면서 쐬주 안 마셨다고 고백할 필요가 없었다. 이럴 때 낮술에 취해 그만 써야겠다고 토껴버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거든.

  《절대 진공》은 서평을 모은 책이고 《상상된 위대함》은 렘이 써준 서문 모음집이다. 문제는 서평이건 서문이건, 애초 존재하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이고 존재하지 않은 책의 서문이라는 것.

  바르샤바의 치텔니크 출판사에서 출간한 <절대 진공>의 서평에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존재하지 않는 책의 서문을 쓴다는 발상은 렘이 처음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그런 시도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개념은 더 오래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심지어 라블레조차 이것을 처음 활용한 작가가 아니었다.”(p.9)고 주장한다.

  하필이면 지극히 취약한 보르헤스를 예로 들어서 첫 페이지부터 꼬리를 말고 시작했다. 라블레도? “고매한 술꾼과 고귀한 매독환자 여러분”한테 기념비적인 <가르강튀아>를 헌정한 작가 말이지? 나 스스로 거의 일주일에 네다섯 개의 찌질한 독후감을 남발하고 있으며, 소위 “서평가”라는 직업을 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하지 못한 인기 딜레탕트 정도로 치부하는 교만을 떨어왔으니 《절대 진공》 속의 서평 역시 이런 비루한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읽어보니, 이거 원. 뭐 아는 게 있어야 장단을 맞추지! 뭐라고? 맞다. 조금 엄살이 섞이긴 했다.


  말이 서평이다. 렘이 쓴 서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가상 작품의 내용이다. 즉 스타니스와프 렘은 서평을 빙자해 가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주제를 논했다는 뜻. 그러니까 독자는 하나의 서평이 아니라 장편소설 한 편을 위한 드로잉 북을 본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나는 여태 딱 세 권의 렘을 읽었을 뿐이다. 장편 둘, 단편집 하나. <솔라리스>와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외계 생명체와 생명체로 진화한 기계 이야기이고 단편집 《사이버리아드》는 주인공 자체가 로봇, 로봇은 로봇이지만 거의 신적인 능력을 갖는 최고 수준의 AI 기계이다. 이 세 권을 읽으면서 스타니스와프 렘이라는 작가가 애초에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고방식 자체가 유기체의 결합 보다는 기계와 컴퓨터의 발전, 발전을 거듭해 기계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단계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드라이한 존재. 사실 이런 논리는 렘의 독자적인 발상은 아니다. 1952년에 동성애자라는 범죄가 밝혀져 화학적 거세를 당한 후 54년에 시안화칼륨을 들이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컴퓨터 과학자이자 수학자이자 암호해독가였던 앨런 튜링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계 개념을 발표한 것부터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9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튜링 생전에 렘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튜링의 개념에 렘의 아이디어가 합쳐지고, 물론 가정이지만 튜링이 자살에 성공하지 못해 계속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를 연구했다면 지금쯤 AI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벌써 멸망을 했거나, AI 로봇의 봉사 덕분에 노동하지 않는 유토피아 근처까지 왔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행하게 살고 있거나 기타 등등이겠지.

  나는 렘의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무無, 없음인 것을 안다. 《사이버리아드》에서 N으로 시작하는 건 무엇이든 만드는 기계를 발명하고 절친을 불렀더니 절친이 기계한테 무Nothing을 만들어보라고 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 없음, 무를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절대 진공”이다. 이 절대 진공의 단위를 분모로 하면, 절대 진공의 반대이자 다른 측면인 무한대가 된다. 전 우주적으로 무한대는 대체 얼마가량일까? 렘은 10의 600제곱 정도란다. 즉 1 뒤에 0이 600개 정도 붙는 수. 그 정도면 전 우주를 덮을 수 있다고. 인간 존재는 이 확률을 뚫고 세상에 등장한다. 처음 1/10은 쉽게 예를 들면 엄마와 아빠가 만날 확률. 또는 나의 절반이 될 난자가 배란되는 날 아빠와 사랑을 나눌 확률 정도로 보면, 이 다음 1/10은 엄마 아빠가 성인이 되어 나를 낳기 전까지 살 수 있을 확률. 뭐 이런 식으로 죽 나가면 10의 600제곱 경우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존경하는 다임러 벤츠 선생이 메탄올로 움직이는 털털이 반마력짜리 엔진을 단 마차가 점점 늘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막히는 연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이 이동수단을 어디다 세워 두느냐가 대도시의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되고, 불꽃놀이와 발차기 원리 덕분에 사람들이 곧 달에서 산책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들이 달에서 걷는 모습을 지구에 있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집에서 볼 수 있는 일이 가능하고, 인공 천체를 만들어 우주공간에서 벌판이나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게 가능하다고(p.236~7 요약) 백년 전, 우주 나이도 아니고 지구 시간으로도 눈 깜짝 할 새보다 짧은 세월인 백년 전에 누구 하나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기계는 진화한다. 그런데도 아직 덜 진화한 상태이다. 진짜는 일찍이 앨런 튜링이(스타니스와프 렘 이전에) 말한 바대로 기계 스스로 알아서 진화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그제서야 시작이다.


  그러면 기계도 아름다움을 느낄까? 0과 1의 세계로 그런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컴퓨터 인격체계를 페르소노이드라고 하자. 인간은 인간의 눈과 귀, 요즘엔 코와 입을 통하여 색채, 음악적인 소리, 사물의 아름다움, 맛, 향기를 감지하는데, 페르소노이드는 자신의 환경을 둘러보면서 경험적 특성들을 ‘스스로’ 추가하는데, 예컨대 우리가 눈으로 바라본 풍경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경험의 주관적인 속성”이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p.251 요약). 사람도 많이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은 시대를 달리해 변하는 것이니까.

  앞 문단에서는 기계와 기계의 두뇌를 이루는 AI의 발전을 발했다면, 이번 챕터 (아서 도브, 『논 세르비암』)에서는 기계의 정서 발전을 다루고 있다. 즉 인식 체계가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람의 감각과 같지 않다는 말. 나는 수학적 아름다움을 ‘건식형 아름다움’이라 하고 싶은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계가 진화를 하려면 유기체처럼 생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종을 불문하고 유기체에게 최고의 관심 대상인 생식은 그러나 금속과 수학의 세계인 기계 또는 로봇에서는 말 그대로 변형된 생산을 의미한다. 스타니스와프는 페르소노이드의 전제가 인격적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 심리와의 유사성을 만들기 위하여 정보적 기층부에 “모순”을 도입해야 하며 이것으로 인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통합하면서 동시에 분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쉽게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행위로 호문클루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신화가 실현된다고(p.261 요약) 한다. 정자 또는 염색체를 담은 생명 인자 속 작은 인간을 뜻하는 호문클루스를 이야기하는 바람에 통합하면서 동시에 “분열”하는 의미가 더욱 헷갈렸는 지도 모르겠다.

  재미도 있고, 가끔 심각하기도 하고, 스타니스와프 렘 특유의 유머도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 과학 픽션을 쓴 렘이라 해서 인문학적 깊이를 간과하지 마시라. 그의 지적 함의 역시 깊고 깊어서 이 책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학과 물리적 기초 지식은 물론이고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괜히 읽고 자만심 상했다. 웃자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이런 책 역시 읽어봐야 한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 줄 알기 위하여. 10의 600제곱 가운데 오직 하나 있는 미물. 그게 당신이고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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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6-25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라면 끊일 줄 아시네요. 폴님께서 리뷰를 쓰시기 전에 뭔가를 하신다는 건 엄청난 책을 리뷰하시겠다는 건데 이거 저 같은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자신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5-06-24 22:34   좋아요 1 | URL
라면이야 레시피가 하도 많아서 말씀입죠, 저도 한 번 레시피 만들어봤습죠. ㅋㅋㅋ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셔요! 먼저 <솔라리스>나 <사이버리아드>로 기름칠을 좀 하시는 게 좋을 듯하기도 하고요. 근데 제가 뭘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리....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슈베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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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고른 건 딱 하나.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미완성 블랙 코미디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브레히트의 슈베이크 역시 하셰크의 슈베이크를 무대만 바꾼 작품이다. 하셰크는 1차세계대전 당시 프라하에서 개장사를 하며 부족하지 않게 생계를 이어가던 파렴치, 우리말로 하면 뻔뻔한, 그리고 귀여운 악당 슈베이크를 등장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가차 없이 희화해버렸다. 말이 “훌륭한 병사”이지 멀쩡한 다리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탄 채 징병검사장에 갔지만 결국 최전선에 배치된 슈베이크는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는다. 이때 벌써 마흔이 넘은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는 못해도 일흔 살 정도의 노인 아닐까, 이렇게 궁리하며 책을 열었다. 오, 슈베이크는 나이도 먹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막간극에서 원래보다 과장된 몸집으로 등장하는 히틀러가 득세를 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폭망을 하건만 슈베이크는 여전히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장면마다 장면마다 하셰크가 그린 슈베이크와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를 비교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셰크의 슈베이크는 전쟁에 관한 블랙 코미디 모델로 서양 문학에서 종종 인용하고 있을 정도의 유명세를 누리고 있으니 뭐 이상한 건 아닐 터이지.

  막이 열리면 본막 이전 서막. 빵빵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틀러, 비행부 장관이자 국가 원수 괴링, 계몽선전부 장관 괴벨스, 친위대장 힘러.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체코 등 독일이 강점한 나라의 국민이 자신을 사랑해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아랫것들은 당연히 총통을 하느님처럼 숭배한다고 아부한다. 서막은 이렇게 시대를 잠깐 보여주는 형식.


  이어서 본막.

  무대는 술집 ‘술잔.’ 술집 옥호 한 번 끝내준다. 술잔. 하셰크의 <…슈베이크>에서도 첫 무대가 술집이다. 공통점은 술집에 스파이 한 명이 앉아 있는 것. 하셰크의 경우엔 체코 국민인 경찰 프락치가 꼬투리를 잡을 것이 없자 요제프 황제 초상화에 파리가 똥을 싸 까만 점이 촘촘하게 박힌 것을 까탈 삼아 술집 주인을 불경죄, 슈베이크를 반역죄로 몰아 체포한다.

  브레히트 판에서는 독일 친위대원이 술집 ‘술잔’에 앉아 있다. 술집 주인은 코페카라는 이름의 여성. 과부로 보인다. 청년 프로하스카가 짝사랑하고 있다. 후에 청년과 결혼에 성공 잘 먹고 잘 산다. 슈베이크와 친구 발룬이 술을 마시고 있다. 발룬. 풍선? 뭐 비슷하게 뚱뚱하다. 먹을 걸 얼마나 밝히는지 앉으나 서나 고기 타령이다. 친위대원하고 말을 트자마자 독일군은 잘 먹는다면서요? 묻고 독일군이 먹는, 그러니까 나치의 급식 수준으로 체코군에게도 보급을 해준다면 자기도 지원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가 취소할 정도. 극이 코미디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마시라. 술이 거나해지니 친위대원이 발룬을 껴안으며 의용군 모집소로 데려가려 한다. 이를 본 술집주인 코페카. 노래 한 곡을 불러 의용군의 불을 끈다. 좀 길다. 가사 전부를 소개할 수 없어 요점만 써보자.


  나치 병사의 아낙네는 옛 수도 프라하에서 무슨 선물을 받았나?

  프라하에서 뾰족구두를 받았네. 잘 있다는 편지와 함께 뾰족구두를 프라하에서 보내왔네.

  (이하 축약)

  바르샤바에서 리넨 블라우스를 받았네. 이국적인 블라우스를 바익셀 강가에서 보내왔네.

  오슬로에서 모피 깃을 받았네. 그녀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해협 건너 오슬로에서 보내왔네.

  로테르담에서 모자를 받았네. 그녀에게 잘 어울려! 네덜란드산을 로테르담에서 보내왔지.

  브뤼셀에서는 진귀한 레이스를 받았네. 아 그런 걸 받다니! 벨기에에서 보내왔지.

  파리에서는 실크 드레스를 받았네. 이웃이 샘내는 실크 드레스를 파리에서 보내왔네.

  트리폴리스에서 목걸이를 받았네. 부적이 달린 목걸이를 트리폴리스에서 보내왔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과부가 쓰는 베일을 보내왔네. 장례식에 쓸 미망인의 베일을 러시아에서 보내왔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전을 은유 또는 희망하는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잔의 주인 코페카는 끌려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위대원이 이미 술이 취해 떡이 되었기 때문에.

  이 희곡은 실제로 공연을 한 것으로, 브레히트의 많은 희곡은 이런 노래 장면이 있고, 노래의 대부분을 크루트 바일이 작곡을 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음악은 바일Weil이 맡았다고 한다. 공연은 잘 하지 않는 거 같다. 나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 노츠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이후 작품 속에 이렇게 노래 가사가 많이 등장하지만 소개하지 않겠다.


  노래가 끝나도 발룬의 먹는 타령은 그칠 줄 모른다. 다시 한번 마음 좋은 ‘술잔’의 주인 코페카. 자기를 짝사랑하는 청년 프로하스카가 푸줏간집 아들이라서 프로하스카한테 고기 두 근을 몰래 가져다 달란다. 고기 두 근을 몰래? 그렇다. 어떤 책이든가,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 햄 한 덩이를 품에 숨기고 가다가 적발되어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는 장면을 읽은 거 같다. 당시엔 그랬다. 이게 말은 쉬워도 목숨을 걸라는 얘기인데 프로하스카의 마음이 어떻겠어? 그래도 사랑하는 코페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청년을 과감하게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후에 슈베이크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끌려가고, 블랙 코미디의 주인공답게 기지 넘치는 재담 끝에 귀에 점 있는 순종 스피츠 한 마리를 구해야 하는 처지를 맞는다. 이것도 사실 코믹 장면이다. 순종 스피츠는 코와 눈, 그리고 발바닥을 제외하고 전부 흰 털로 몸을 가려야 하는 개. 슈베이크의 직업이 개장사라고 말했지? 우리나라 개장사처럼 유기견 잡아 도살해서 고기를 근으로 달아 파는 개장사가 아니고 남이 애지중지 키우는 개를 훔쳐 다른 사람한테 입양해 돈 벌어먹고 사는 사기꾼이자 절도범이다. 그래서 날 잡아 블타바 강변을 거닐고 있는 두 하녀 카티와 아나, 그리고 그들이 끌고 다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딱 눈 여겨보던 바로 그 개다. 슈베이크와 발룬은 카티와 아나하고 즐거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개를 훔쳐, 게슈타포 대장에게 넘겨준다.

  전쟁은 점점 막바지 국면으로 치닫고 프라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굶주림에 지친다. 이중에서 제일 곤경에 처한 인물은 역시 발룬. 이를 지켜보던 슈베이크가 말없이 길을 나서 결국 프로하스카도 가져오지 못한 고기를 크게 한 덩이 들고 술집 ‘술잔’으로 들어온다. 이게 웬일? 침착하고 노련한 코페카. 이거 무슨 고기야? 알고 물어보는 거다.

  개. 게슈타포 대장 마누라 거.

  베르톨트 브레히트. 험한 작품 여럿 썼어도 프라하 시민한테 개고기를 먹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고기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슈베이크를 본 사람이 있으니 친위대 대장 블링거. 그는 현행범으로 잡혀 총살을 당하는 대신 체코 의용군으로 들어가 스탈린그라드 전투 현장으로 간다.

  정말 가느냐고? 슈베이크는 간다. 엄동설한에 모자도 술집 ‘술잔’에 두고 왔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간다. 탈영병을 만나도 그들과 관계없이 전선으로 간다.

  이 대목에서 브레히트가 아닌 하셰크의 생애를 떠올렸다.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생을 접은 하셰크. 젊은 시절 그는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당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동료 체코 청년들과 탈영해서 러시아군으로 편입한다. 브레히트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를 초연한 것이 1955년. 미국과 서유럽에서 브레히트는 슈베이크가 소련군에 들어가기 위하여 전선으로 향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는 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귀여운 악당이자 사기꾼인 슈베이크가 가는 도중에 연극상 히틀러를 만나면서도 그렇게 동쪽으로 갈 이유는 없을 테니까.

  독후감을 재미없게 썼다. 하셰크의 원작과 브레히트의 희곡 모두 무척 재미나고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치는 골계미가 돋보인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옮길 수도 없고, 비슷하게 쓸 재간도 없어서 그렇게 됐다. 하셰크의 슈베이크이건 브레히트의 슈베이크이건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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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4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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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앨리 스미스의 “계절 4부작”을 다 읽었다. 3년 반 걸렸다. 이젠 제일 먼저 읽은 <가을>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곤혹스러웠던 느낌만 남았을 뿐. 다행히 이후 <겨울>, <봄>, <여름>은 훨씬 재미있고 수월하게 읽었다. 계절 4부작에 들어와서 앨리 스미스는 브렉시트, 난민 수용과 구치custody, 환경 등 정치 문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에서 읽었던 발랄한 엽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좀 아쉽다.

  <여름>이 제일 재미있었다. 별점을 준다면 넷 반이 적당할 듯. 차마 다섯까지 올리지 못하겠지만 넷은 많이 아쉽다.


  본문을 시작하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 이렇게 쓴다.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뿐이다. 이 나라에서 평생 또는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추방 협박을 받아 추방되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그리고 결과가 바란 대로 나지 않자 정부가 의회를 폐쇄해 버린 그때부터.

  많은 이들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거짓말을 한 사람들에게 투표하여 권좌에 앉혀놓은 그때로부터.

  어떤 대륙은 불타고 어떤 대륙은 녹아내린 그때로부터.

  전 세계의 권력 쥔 자들이 종교, 민족, 섹슈얼리티, 지적능력, 정치적 입장 등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르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다음 장chapter로 가면 구체적인 시점이 나온다. 브렉시트 시행 1주. 나는 헷갈린다. 1주週 7일? 1주周 365일? 헷갈림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좋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을 체포, 추방하기 시작하고, 의회를 폐쇄하고, 오스트레일리아는 불타고, 북극의 빙하는 녹아내리지만 많은 사람들은 라디오, 텔레비전,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말했다. ‘그래서So what?’ 앨리 스미스는 통탄한다.

  “역사가 확증해 주었듯 우리가 무관심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정치적 무관심의 배양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에 대해 각종 사실을 나열해가며 이야기하고 출처와 그래프와 사례와 통계를 사용하여 예증하는 데 평생을 바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부인하고 싶다면 누구나 단숨에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센 한 마디로… ‘그래서?’” (p.15)

  백기완이 노랫말을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한 소절,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가 퍼뜩 생각났다. 무서운 말이다. 투쟁을 위해 내가 앞장선다. 대열에 서지 않은 자, 너희들은 모두 죽은 자, 시체들이라는 웅변.

  앨리 스미스가 말하는 무관심의 배양과 ‘산 자여 따르라’의 공통점은 자신과 다른 의견은 전혀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 것. 오직 자기 뜻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가야 할 길이라는 주장이다. 합의 불가능의 최고선임을 선언하는 모양새인데, 의도는 알겠다. 일단 넘어가자.


  “이 나라에서 평생 또는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추방 협박을 받아 추방되기 시작한 그때” 라고 했는데, 이게 오늘 이야기해야 할 제일 큰 주제이다. 이들이 누구일까?

  1.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유입한 난민

  2.  노턴과 북동부 지역에서 브라이턴으로 집단 이송된 수많은 노숙인

  3.  중국인들이 뱀이든가 천산갑을 잡아먹어 발생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

  이래서 <여름>의 큰 주제는 수용 또는 격리이다. 잉글랜드 현대사에서 격리가 브렉시트 또는 COVID-19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2차 세계대전 때도 있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서로 안면을 트고 좋은 관계를 지니게 되는 건 <봄>의 경우와 마찬가지고 같은 플롯인데, 이 작품 속에서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잉글랜드에서 낳고 소년시절까지 자란 후 독일로 돌아가 조금 지내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백 살이 넘은 대니얼 씨. 이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이 지원 입대하려 했으나 해군 당국으로부터 깨끗하게 거절당하고 대신 이곳 저곳의 수용소를 거쳐 마지막으로 서남부 섬에 집단 수용된다. 이때 잉글랜드 병사는 이들에게 적대감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시내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고 오다가 무겁다고 병사가 소총을 건네고 자기는 맨몸으로 잠깐 걷기도 했을 지경이었으니. 길지 않은 수용기간을 끝낸 1943년에 대니얼은 다시 해군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한다.

  전쟁 전부터 영국에서 살던 모든 독일인이 다 대니얼처럼 영국을 조국으로 알고 산 건 아니다. 간혹 정말 스파이도 있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켄 폴릿이 쓴 액션 스릴러 소설 <바늘구멍>이 대표적이다. 대니얼과 그의 아버지는 가장 널럴한 등급인 3등급으로 분류되어 그나마 편한 수용소로 간 듯.

  근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용소는 주로 휴양소에 있는 대규모 위락시설을 변조하여 만들어, 물론 당사자들이야 불편하겠지만 그나마 쾌적한 장소와 편리한 위생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201X~202X년의 난민 수용소나 노숙인 숙소 같은 곳은 <겨울>, <봄>에서도 봤듯이 다양하게 골 아프다. 작품 속에서 수용시설을 주관하는 민간 기업은 꾸준하게 AS4S. <겨울>에서는 저작권 감독 회사로 <여름>에선 민간 전력회사의 외양을 갖추었다.

  여기에 새로이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COVID-19 격리수용이다. 초기 단계에 영국 정부는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해서야 감염자 자가 격리를 주문했는데, 전세계와 마찬가지로 마스크나 검진 장비 부족으로 주로 노인들이 집단적으로 사망했나 보다. 사람들은 열이 조금 나고 몸살 기운이 있으면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 지도 모르고 스스로 알아서 끙끙 앓다가, 지독히 개인적인 유럽인들인지라 혼자 죽어도 아무도 모른 채 며칠이고 지나갔으니, 그것 참. 하여간 이런 의미에서 자가 격리도 수용의 일환으로 보고 이 목록에 오른 것.


  브라이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그란로 가족이 살았다. 엄마 아빠가 대판 싸우고 아빠가 자진해서 집에서 나가버렸다. 빈집을 구하러 왔다갔다 하다 보니 처자식이 사는 집의 바로 옆집이 매물로 나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이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안 한 거 같은데, 아내에게 열쇠 하나를 복사해 주었다. 이거 별거 맞아? 하여간 이렇게 3년 살다가 아빠 제프리는 웨일스 출신의 공부하는 여성 애슐리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애슐리와 이쪽 집 사람들, 전처와 딸 사샤와 지독한 사춘기의 절정에 달한 아들 로버트와 소 닭 보듯 하며 살다가 갑자기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겠지만 애슐리의 학문적 내공도 대단한 거 같다.

  사샤도 똑똑하긴 한데 사샤가 속으로 무척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맨날 다투기만 하는 동생 로버트는 가히 영재 수준이다. 이런 아이들이 영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주로 왕따를 당하는 법. (실제 생활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독한 린치를 당하고 견디지 못해 전학을 했건만, 다니던 학교 아이들이 이쪽 학교 애들한테 토스를 해주는 바람에 똑 같이 왕따를 당해 학교에 취미를 딱 작파해버린 상태이다. 사샤가 밤 늦게까지 에세이 숙제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들어서려는 순간, 로버트가 문자를 보낸다.

  “지금 십 스트리트로 꼭 좀 와줄 것. 3분쯤 도움 필요함.”

  명색이 누나에,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실감나지 않을 터인데, 부탁하는 것이 어쩐지 좀 애절해보여 친구한테 대리 출석 부탁하고 달려갔다. 로버트가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있더니 누나 손을 잡고 자기 품으로 가져간다. 그러더니 그거 있지? 유리로 만든 타이머 용 모래시계. 그걸 순간접착제로 누나 손가락 몇 개에 찰싹 붙여놓고 도망간 거다. 유리, 얇은 유리. 남매 사이가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침착한 누나. 이 와중에도 농담한다. 마침 옆으로 온 커플 샬럿과 아서에게 (손가락을 쓸 수 없어서) 전화기를 건네주고 문자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례적인 유대(bonding)의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구나.”

  이 선한 커플은 사샤를 병원에 데려가 사샤의 손가락에서 모래시계 유리를 떼 내고 피부를 꿰맨 다음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커플은 엄마, 사샤, 로버트와 함께 저 북쪽 노퍽, 일찍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머물렀던 곳까지 여행을 떠난다. <봄>에서도 본 거 같은 장면이지?


  하나만 더. 앨리 스미스는 환경론자이다. 그의 주장은 그린로 가족의 엄마 그레이스의 신념으로 확고해지는데, 엄마는 화석연료를 태워 움직이는 운송수단을 거부한다. 그러면 자전거와 전기자동차 말고 없다. 당연히 선한 커플이 운전하는 차 역시 전기차. 그래서 노퍽까지 함께 갈 수 있었던 것. 이 노퍽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 경험이 있는 대니얼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있어 보러 간 길이다. 엄마 그레이스는 이정도 수준이고, 똑똑한 딸 사샤도 우상이 그레타 툰베리. 음.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이게 답이다. 그러나 전기는 무엇으로 만들어야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들도 전기의 혜택을 계속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이제 이것 좀 궁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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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6-2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앨리 스미스의 계절 시리즈도 다 읽으시고...
전 뭐 뽈님의 별5개만 선별해서 읽으면 되니까...ㅎㅎ 별5 독후감 뜨는날이 책 사는 날입니다..ㅎㅎ

Falstaff 2025-06-21 07:15   좋아요 0 | URL
대단하긴요 뭐. ㅋㅋㅋ 백수가 있는 건 시간하고 돈밖에 없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