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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의 초대 ㅣ 알라트리스테 시리즈 1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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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구티에레스는 <검의 대가> 이후 8년 만에 읽는다. 10년 전에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이 별로 그럴 듯하지 않아 이 작자를 다시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헌책 배송료 아끼려 집어 든) <검의 대가>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은 물론 재미있었던 기억밖에 남지 않았고, 노 검객이 검술 레슨으로 먹고 사는 일 정도, 그것도 어렴풋하게 생각날 정도이지만 여전히 <검의 대가>를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숨은 작품으로 꼽을 정도이다.
(아참,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크 가문의 막내딸 아리아한테 검술을 가르쳐준 키 작은 중늙은이, 난 이 장면 보면서 <검의 대가>가 계속 생각났지 뭐야.)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는 1951년에 지중해 연안의 남 스페인 도시 카르타헤나에서 상선 선주의아들로 태어나 같은 도시의 대학 마리스트 형제 수녀회에 다니다가 위키피디아도 모르는 이유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후 이사크 페랄 연구소와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을 다녔단다. 이후 1973년부터 94년까지 스페인 국영 라디오-TV에서 종군기자로 일했다고 하는데, 정규직원은 아니었던 걸로 (내가) 추측한다. 이 기간이 지금은 없어진 신문 푸에블로에서 일한 12년과 겹쳐서 든 생각이다. 하여간 이런 저널리스트 생활이 레베르테로 하여금 시대 추리극, 즉 대중소설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한 인간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1988년에 출간한 <검의 대가>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이어서 연달아 <뒤마 클럽>과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등이 마드리드의 종이 값을 치솟게 만들었을 때, 자기 작품을 프랑스어 말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걸 거부했을 정도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된 레베르테는 이후 남스페인 지중해 해변으로 이사해 개인 요트를 즐기며 여유작작한 생활을 즐겼건만, 소설과 영화 쪽에서 표절 시비에 걸려들었고, (소설의 경우)진짜로 표절했음을 인정해 사과하기도 하고, (영화)마드리드 지방법원이 원작자에게 8만 유로의 보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웃기지? 왜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까? 부자로 살면서 말이지. 글은 마음먹은 대로 잘 써지지 않지, 청탁 마감은 다가오지, 뭐 이런 경우? 아니다. 사람의 근본이 찌질해서 그렇다. 이럴 때가 은퇴하기에 좋은 시점인데 구차하게 작가의 명성을 이어가려다 들통나 버리는 것이지 뭐.
<루시퍼의 초대>는 레베르테의 대표적 작품으로 주인공 알라트리스테 대위의 눈썹을 휘날리는 검술 액션 미스터리 픽션이면서, 2025년까지 8편이 나왔다. 이 가운데 21세기 초, 당시 전두환의 아들이 사장을 하던 시공사에서 3부까지 찍었다가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좀 이상하다. EU 소속인 서유럽에서 자신 스스로 표절했음을 인정하고 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까지 받은 작가가 계속 글을 발표하고 심지어 왕립 스페인 아카데미 회원 자리에 앉았다고? 그렇단다. 거~ 놀랄 ‘노’자네?
알라트리스테 대위의 진짜 이름은 디에고 알라트리스테 이 테노리오. 보병연대 소속으로 플랑드르 전투에 참전했던 전직 군인으로 제대할 당시 계급은 상사였다. 플랑드르 전투에서 척탄병 31명과 함께 얼어붙은 강을 건너 네덜란드 진영에 잠복해 스페인 본진이 공격하는 시기에 맞춰 습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칼레해전에서 코가 깨진 이후 거의 완전히 맛이 간 스페인 군부 내 장군들이 서로 기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본진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 고립되어 오히려 척탄병들은 무차별 공격을 받아 딱 두 명만 생존하고 전멸해버리고 말았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이 알라트리스테와 작중 화자 ‘나’ 이니고 발보아의 아버지, 로페 발보아. 당시 알라트리스테는 중대장 정도인 지휘관 대위가 죽자 뒤를 이어 중대를 지휘해 어쨌건 살아 남았고, 이후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대위’라고 불렀던 것이 그냥 굳어진 거였다.
그때 생존했던 로페 발보아는 훗날 쥘리치 요새에서 적의 총에 맞아 전사했고, 여전히 함께 했던 전우 알라트리스테는 죽어가는 로페에게 로페의 아들 ‘나’ 이니고가 성인이 되면 자신이 돌보아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스페인 북부 기푸스코아에서 과부가 된 엄마가 열세 살의 이니고를 마드리드에서 칼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알라트리스테에게 보내 그의 종자로 있게 하면서 작품, “알라트리스테 대위” 시리즈의 막이 올라간다. 에잇, 써놓고 보니 족보가 복잡하네. 다 잊으셔도 좋다.
알라트리스테의 직업이 칼잡이? 뭐 대강 그렇다. 나 몰래 내 아내 속고쟁이 벗긴 놈 작살내기, 돈 빌려가 장사해 부자 되고도 돈 갚을 생각하지 않는 놈한테 복리이자 붙여 돈 받아오기, 그냥 이유 없이 미운 놈 얼굴에 흉터내기 같은 일. 얼굴에 흉터내는 건 cm당 단가가 있지만 이것도 길이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3cm에 3백유로라면 8cm엔 8백유로가 아니고 1천2백유로, 이런 식이다. 뭐 농담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심지어 청부살인도 했다. 알라트리스테는 청부살인의 경우에 반드시 죽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여성이나 어린이는 절대 안 되고, 암살도 거부해, 여태 청부살인을 당한 대상이 건장하고 칼싸움에 능한 터키인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알라트리스테의 친한 친구 가운데 시인도 하나 있다.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이이는 나이도 들고 살이 많이 쪄 몸이 굼뜨지만 나름대로 검법에 조예가 있고 성격도 한 지랄한다. 근데 왜 이 시인을 소개하느냐 하면, 케베도가 누구 한테 검술을 배웠는고 하니, 전설적인 검의 대가 돈 하이메. 맞다. 앞에서 말한 레베르테의 대표작이자 첫 장편소설 <검의 대가>의 주인공, 멋있게 늙은 노 검객이라서.
때는 1620년대의 어느 날. 몇 십 년 동안 왕을 해먹을 필리페 4세의 젊은 시절. 지속적인 근친결혼의 결과 심한 주걱턱을 지녔지만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미남이었던 필리페 4세는, 기울어져가는 국가의 군주답게 국정은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사냥, 연극공연 관람, 여배우와의 염문, 파티 같은 걸로 날 새는 줄 몰랐다. 돈이야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황금과 은괴 상태로 무한정 들어오니 세상에 걱정이 없다. 그 황금과 은괴가 거의 전부 스페인 귀족 몇 명의 손에 들어갈 뿐 백성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는 걸 국왕은 알 필요도 없었던 때.
당시 필리페 4세의 여동생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찰스 왕자와 약혼한 상태이지만 가톨릭 국가에서 이교도의 나라에 공주를 시집보낼 수 없어 자꾸 약혼 기간만 늘일 뿐이었다.
이때 누군가 알라트리스테 대위는 두 명의 복면 귀족을 만난다. 누군지는 독후감 목적상 알려드리지 않겠다. 좋다. 그럼 한 명만 가르쳐드리지. 국왕의 개인 비서관 루이스 데 알케사르. 다른 한 명은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귀족들이 주문하기를, 모월, 모일, 모처에 가면 어떤 차림의 옷을 입고, 무슨 색깔의 말을 탄 잉글랜드 귀족 토머스 스미스와 존 스미스, 두 명이 지나갈 터이니 너와, 내가 지금 파트너로 지목할 이탈리아 출신 검객 괄테리오 말라테스타와 함께 그들을 꿇려, 그들의 몸에 지닌 모든 문서를 탈취해 오라는 것. 싸움 도중에 두 명 가운데 키 큰 토머스 한테 약간의 상처를 내는 것까지는 허락하겠지만 결코 목숨을 빼앗지 말라고 주문한다. 괄테리오가 묻는다. 그들의 소지품 가운데 지갑은 제가 가져도 괜찮겠습니까? 복면 귀족은 좋다고 한다.
두 복면 가운데 더 높은 계급의 복면이 퇴장한 후, 여지껏 몰랐던 그늘 속의 한 거물이 등장하니, 종교재판관 보카네그라. 흠. 보카네그라가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 성씨군 그래. 종교재판관은 복면도 쓰지 않고 당당하게 검객들을 위협한다. 모월 모일 모처에서 만날 두 명 모두 싹 죽여버리라고. 그러면서 추가 수당 금화 다섯냥. 그러면 합해서 한 명당 금화 스무냥이니 세상에 이런 돈벌이는 난생처음일세.
드디어 모월, 모일이 되고 모처에서 매복해 있던 두 검객 앞에 정말로 두 명의 영국 귀족이 말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청부 칼잡이가 앞으로 썩 등장해 한 명이 한 명씩 맡아 싸움을 벌이는데, 상대가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칼잡이로 먹고 사는 인간들 한테 이길 도리가 없어서 이탈리아인 칼잡이는 벌써 존 스미스를 잡아놓고 당장 죽이지 않은 채, 마치 쥐를 잡아 놓은 고양이처럼 칼로 슬쩍슬쩍 베면서 장난질을 하고 있다. 알라트리스테 역시 키 크고 더 건장한 토머스의 목에 칼 끝을 대고 있는데, 이때 토머스가 하는 말이’
“항복, 항복하오. 나는 어떻게 해도 좋지만, 제발 부탁하건대 저이 존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시오.”
알라트리스테가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올 찰나에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자기 일행의 생사여부에 더 관심을 쏟고 그를 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원 참. 그래서 조금 감동, 또는 동정한다. 알라트리스테는 항복한 토머스한테 칼 끝을 거두고, 때마침 존의 심장을 향해 결정적 최후의 한 방을 찌르는 괄테리오의 칼을 자기의 장검으로 막아 살인행위를 저지한다.
그럼 임무는 어떻게 된 거지? 처음 복면을 쓰고 온 귀족이 준 임무는 성공했지만, 보카네그라 종교재판장 발행 지옥행 특급은 자동 예매한 거 아닌가? 그것 참. 어떠셔? 재미있겠지? 재미있다. 그러나 역시 <검의 대가> 만큼은 아닌 걸로.
그래도 나는 “알라트리스테 대위” 연작을 나온 데까지 달려볼 생각이다. 아직 화자 ‘나’ 이니고 발보아가 사춘기 청소년에 불과하거든. 혹시 알아? 다음 편 정도 가면 로맨틱한 장면도 나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