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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ㅣ 아시아 문학선 13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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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전윈의 전작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읽고 쓴 독후감에서 몇 달 후에 후속작인 <만 마디 말을 대신하는 말 한 마디>를 이어서 읽겠다고 했다가, 세월이 이렇게 빨라, 빨라도 너무 빠르고, 세월이 갈수록 더 빨라져, 몇 달이라고 했건만 그게 2년이 되어서야 겨우 읽었다. 그러니 이 책 읽은 건 밀린 숙제를 한 것과 조금은 비슷하다. 물론 안 해가면 손바닥 맞는 학교 숙제와 달리 전편이 재미있어 자발적으로 후편도 읽겠다고 작정해 스스로 만든 숙제이니까 즐겁게 읽었다.
먼저 전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간략하게.
후난성 옌진땅 두부장수 집에 둘째 아들 양바이순이 살았는데, 바이순은 식초 행상을 하며, 취미 수준을 넘는 초상집 관리, ‘함상장이’도 했다. 후딱 말해야겠다. 사연까지 쓰면 너무 길어진다.
함상장이 하려 집을 빈 채로 두고 30리 멀리 있는 초상집에 갔다 오니 집에 양 한 마리가 도망가버렸다. 열받은 아버지한테 엄청 두드려 맞고 쫓겨나서, 이발사와 돼지 도살꾼의 도제를 거쳐 나중엔 천주교 신부의 도제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이름이 양바이순에서 양모세로 바뀌게 되고. 양모세는 동네에서 만터우 장사를 하는 과부 우샹샹의 데릴 남편으로 들어가 이번에 성도 ‘우’로 고쳐 애초 양바이순이 ‘우모세’가 되어버린다. 우샹샹은 이웃의 남편과 진한 사이라 모세와의 결혼으로 이른바 연막을 친 것뿐이었다. 결국 우샹샹은 이웃 유부남과 야반도주를 해버려 우모세는 우샹샹의 착한 딸 차오링과 그냥 사이 좋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난리 치기를, 이웃 남자와 바람이 나 도망한 아내를 잡아 둘 다 죽여버리지 않으면 풍기와 도덕이 무너질 터이니 당장 그것들을 찾아 나서라 한다. 그리하여 우모세와 차오링은 어쩔 수 없이, 애초에 잡것들을 잡을 생각은 1도 없이 두 명의 부덕자들을 찾는 시늉을 하며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다.
1부와 2부 사이에 있던 속 끓고 사연 많은 이야기는 이제 많이 늙어 손주들까지 생긴 아명 차오링, 정식 이름 차오칭어趙靑娥가 둘째 아들, 원래 둘째 아들이 부모 사랑 못 받고 사는 자식이라 평생 나몰라라 하다가, 나이 들어 외로워지니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둘째 뉴아이궈한테만 들려주는데:
아버지 우모세의 손을 잡고 엄마 우샹샹을 찾으러 가다가 신샹의 누추한 여인숙에서 쥐약장수이자 부업으로 유괴범을 하고 있는 랴오요우한테 납치당해 서쪽 지위안에 도착했다. 거기서 쥐약장수는 행상 라오사를 만나 은화 10대양에 팔아 넘겼고, 본격적인 인신매매범이었던 라오사는 손찌검을 해가며 데리고 다니다가 산시성 위안취에서 은화 20대양을 받고 라오비엔에게 넘겼다. 라오비엔은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거다. 게다가 돈이 떨어져 험한 잠자리만 골라 잔 터에 차오링이 고열에 시달리는 병이 생겨 이제 난감한 꼴을 당하게 됐다. 이때 샹위안현 원쟈좡의 지주 라오원의 마차꾼 라오차오가 마침 부부사이에 후손이 없는 집이라 차오링을 은화 13대양을 주고 딸로 입양을 해 드디어 정착을 하게 된 것. 라오차오의 정식 이름은 차오만창曹滿倉. 말이 없는 남자로 애초 차오링을 입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다꾼이자 집안 살림을 장악하는 아내의 뜻에 의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지역 풍습이 만일 딸이건 아들이건 후사가 없으면 동생의 큰 아들을 양자로 들여야 했단다. 아내는 그게 싫어 마침 차오링이 성도 같은 데다가 생긴 것도 예쁘장하고, 바지런하기도 해 썩 마음에 들었다.
차오링의 지난 이야기를 죽 들은 만창의 처는 딸로 입양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앞으로 옌진을 생각해서도 안 되고, 새아빠(우모세)를 보고 싶어해도 안 돼.”
차오링이 나이가 차자 양부모는 차오링을 몇 백리 떨어진 뉴쟈좡(우씨촌)의 뉴슈다오에게 시집보냈다. 나름대로 귀하게 키운 딸이라 고르고 골랐는데, 마침 라오차오와 새 지주 샤오원이 좋은 관계를 맺은 라오뉴의 집안 장남과 혼담이 오갔고, 신랑감 뉴슈다오가 그리 좋은 신랑감은 아니었지만 아가씨 집에 오기 전에 숱한 리허설을 거쳐 몸에 익힌 제스처와 말씨를 훌륭하게 시전해 단박에 점수를 따 성사된 혼인이었다. 그리하여 몇백리 떨어진 뉴쟈좡으로 시집 가 이제 차오칭어가 되어, 순서대로 아들-딸-아들-아들을 낳았고, 이 가운데 세번째, 둘째 아들이 작품의 주인공 뉴아이궈牛愛國이다.
고진감래라고 늙은 차오칭어가 행복하게 살았을 거 같지? 남편 뉴슈다오가 드디어 삶을 다 살고 늙어 죽었다. 땅을 파 묻고나서 여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차오칭어가 땅바닥에 주저 앉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땅을 치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차오칭어를 달랬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말아요. 운다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진 않아요.”
차오칭어는 눈물을 그치지 않고 말했다.
“그 개새끼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우는 거예요. 내 한평생이 그 놈 손아귀에서 망가졌단 말이야.”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개새끼 또한 당신 때문에 한 평생이 망가졌는지도 모르지.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게 결혼생활이잖아. 좋은 건 표가 안 남고, 흉한 것만 표를 내거든.
차오칭어의 둘째 아들 뉴아이궈는 부모한테 아무 정도 받지 못하고 살았다. 그렇게 믿었다. 그나마 아이궈한테는 누나 아이샹이 있어 살면서 처음엔 자잘한, 대가리 굵어지면서는 중요한 일을 상의할 의지가지나 있었지, 누나 아이샹 역시 부모한테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직 첫째와 막내만, 첫째는 아버지한테, 막내는 어머니 정을 듬뿍 받고 자랐다. 이런 유복한 아이들은 주인공 반열에 오르기 쉽지 않으니 이름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래, 나도 둘째 아들이다. 샘나서 그런다, 왜?
누나는 우체부와 연애를 하다가 개자식이 양다리를 걸치는 바람에 헤어지고, 여러 번 후속 연애를 했지만 결국 전부 실패를 해, 거의 마지막인 열번째 연애까지 실패로 끝나자 농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죽으려다고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과 관장을 동시 상영한 끝에 살아났다. 대신 훗날 담배를 피우기 전까지 심한 딸꾹질을 자주 했으며, 목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도무지 똑바로 펴지지 않는 후유증을 겪었다.
아이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에 실패하자 그냥 놀 수도 없고, 집구석이 지긋지긋하기도 해서 군대에 지원 입대했다. 운전병 모집이라 당시엔 운전도 기술, 그것도 나쁘지 않은 기술이어서 군대 가면 운전은 기본으로 배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운전병 교습소에 가서 운전을 배워, 딱 자대 배치를 받아보니 저 북쪽의 고비 사막. 부대에는 정작 차가 없다. 어쩔 수 없어 아이궈는 취사병을 하다 제대했다. 친구 두칭하이만 사귀고. 두칭하이는 보병으로 입대했지만 자대에 차가 있어서 운전병으로 복무한 것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세월이 더 흘러 뉴아이궈는 서른다섯이 됐다. 진한 연애 경험이 있는 아가씨 팡리나와 혼인해 예쁜 딸 바이후이도 낳고 살았지만 결혼 두 해 만에 부부는 서로 지극하게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팡리나가 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진관집 아들 샤오장과 바람이 나버리고, 처음엔 그렇구나, 덤덤하게 여기고 넘어가려던 아이궈한테 샤오장의 아내가 쳐들어와, 너는 소갈딱지도 없는 졸장부냐, 나 같으면 두 연놈을 다 칼로 찔러 죽인다, 어쩌구저쩌구 하는 바람에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고민하다가 35세 당시의 가장 소중한 친구 셋과 상의한 끝에 바람 난 아내를 극진하게 모시면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샤오장이 이혼하지 않고 자기 아내와 더욱 깨가 쏟아지는 제2의 신혼을 만든 모습을 보면서.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팡리나는 이번엔 자기 형부와 얄짤없이 야반도주를 해버렸고, 이제 뉴아이궈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 우모세처럼 딸 바이후이를 데리고 넓디넓은 중국땅을 두 연놈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하여, 물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하기 위해 시늉만 내는 수준으로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여튼 가슴에 칼을 품은 척하면서 떠돌아다녀야 할 신세였던 거디었다.
이렇게 해서 70여 년 전에 양바이순이었던 우모세가 자기 수양딸 차오칭과 함께 부정한 아내를 찾기 위해 옌진을 떠나 산천을 떠돌아야 했던 것처럼, 뉴아이궈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차오칭은 학교에 다녀야 해 결국 나이 많은 남자의 재취로 들어간 누나 아이샹의 순둥이 남편한테 부탁하고, 홀로 젊은 시절의 친구들을 찾아 떠돌다가, 우연히 만난 사내들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니 그곳이 바로, 또 옌진이었던 거다. 무려 70여 성상이 지나 거의 비슷한 이유로 옌진으로 돌아온 양바이순 또는 우모세의 어쨌든 손자 뉴아이궈.
사람도 많고 땅도 많으니 사연도 많을 수밖에.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곰의 가랑이엔 털도 많은 법.
그날이 오면 또 통음을 해야 하나?
오늘은 4월 28일. 이 독후감을 업로드하는 날이 6월 3일. 21대 대통령 선거일일 것이다. 국민들, 아파트 주민, 친척,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식칼로 두부 자르듯 똑 잘라내어 서로를 꼬나보게 만든, 어느 쪽에 투표하든 서로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방향으로 사용하던 투표. 너와 나, 우리편과 네편으로 갈라져 기어이 서로가 서로를 저주의 대상으로 삼았던 지난 십수년의 투표가 반복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깟 1찍과 2찍의 다름이 뭐가 대수랴. 어차피 평생 서로 쳐다보고, 의지하고 아주 가끔은 사랑하고 살았고, 살고 있을 터이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할 같은 시민, 주민, 친척, 가족이 아닌가 말이지. 투표를 즐기지는 못하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향한 조소와 질시와 경멸을 이제는 멈추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편을 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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