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1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
여름이 극에 달하던 8월 중순에 <어부들>을 그래도 괜찮은 심정으로 읽어서, 치고지에 오비오마를 한 작품 정도 더 읽어보기로 했었다. 오비오마가 데뷔작으로 쓴 <어부들>로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니 좋은 떡잎을 가졌다고 보고, 몇 년 후에 다시 부커상 최종심까지 기껏 기어 올라갔다가 한 번 더 미역국 벌컥벌컥 마신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도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겠지. 그리하여 가을 바람 살랑살랑 불어, 내내 입고 다니던 반바지 벗어 빨아 옷장 속에 처박은 9월, 3일에 걸쳐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두 권을 읽었다.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가련한 것들, 약자들의 합동 울음.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거밖에 없어서 집단으로 엉엉 우는 거. 이걸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라고 제목으로 정했다. 일단 제목부터 조금 궁상스러우니 어떤 방식으로 궁상스러울지 이것도 궁금하다.
나는 치누아 아체베가 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처음 ‘치’라는 것을 보았다. 이 치가 나이지리아의 독자 토속 믿음/종교에만 있는지, 사하라 이남의 서쪽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토속 믿음/종교에 다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야 지야시의 빼어난 소설 <밤불의 딸>에서 7대 3백년에 걸쳐 내려오는 가나 여인의 정체성 같은 것도 일종의 ‘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해 본 생각이다.
아체베의 치는 벌써 읽은 지 오래여서 ‘치’라는 것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수준이라 더 할 말 없다. 오비오마의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를 읽어보니 이 ‘치’라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깃든 일종의 영spirit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생각보다 자기가 깃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몸의 주인이 특정 행위를 한다고 결정을 했는데, 이걸 치가 보기에 합당하지 않아 더 좋은/나은 방식의 행위를 하자고 제안을 해도, 주인이 결정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면 치도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주인의 의지의 하위 단계에 있는 정도이다. 그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하고, 합당하고, 제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보는 일, 이 비슷한 걸 ‘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다시피 인간은 최악 비슷하게 좋지 못한 결과를 낼 뿐인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사는 법이다. 왜 그럴까? ‘치’의 말 또는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뭐 이 정도로 넘어가자.
하나의 치는 한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경험을 가지고 그를 떠나 잠깐 신계에 들어갔다가, 최고의 신 추쿠의 결정으로 다른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간다. 일종의 윤회를 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도 화자이자 주인공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의 치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한 사람의 영 속에 있었던 치라서, 모든 경험을 통해 이 지역과 토속 종교의 범위 안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역할을 치가 하고 있다. 이 치가 큰 수역인 이모강江변 아버지들의 땅에 있는 우무아히아 부근의 이보족 영들의 세계인 에그부누의 법정에서 길고 길게 진술하는 내용이 이 책의 전문이다. 따라서 진술문이라고 볼 수 있으니 역자 강동혁은 모두 존대어를 사용했다.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 보통 ‘치논소’라 하고, 친한 사람끼리는 ‘논소’라 불리는 주인공은 고아다. 논소의 어머니는 여동생 은카루를 낳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8개월 전에 세상을 떴다. 아직도 어린 은카루는 밤을 틈타 나이든 남자와 함께 도망해 도시에 가서 살며 그저 아주 가끔 카드 같은 것만 한 장 보내온다. 논소는 완전히 혼자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몸도 크고, 힘도 좋아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나쁜 습관도 있어서 몸이 약한 자미케 같은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굳어져, MASSOB 비아프라 주권국가 실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엘로추쿠’라는 친구 딱 한 명이 있을 뿐이다.
논소는 농부다. 닭도 친다. 나름대로 수십 마리의 닭을 정성스레 돌본다. 그래서 책의 표지를 새의 깃털로 장식해 놓은 거다. 지금도 닭을 친다는 건 아니고, 논소의 치가 에그부누의 법정에서 진술하기 7년 전에 그랬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논소가 7년간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일이다.
7년 전, 논소는 농장의 비품을 보충하기 위하여 밴을 타고 근처 읍내수준인 에누구에 갔다. 그곳 닭시장에서 비품 몇 품목과,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은 새끼 거위와 거의 비슷하게 희고 눈부신 깃털의 수탉을 포함해 닭 여덟 마리도 사 짐칸에 싣고 다니는 닭장에 넣었다.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은 새끼 거위? 궁금하지? 작가가 보기에 그렇다는 뜻이고 처음에야 조금 의미가 있지 뭐 그냥 그러니까 넘어가자. 하여간 시장에서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엉망진창인 도로를 조심해서 운전해 이모강의 지류인 아마투강변 상점에서 바나나 한 다발과 파파야와 귤 한 봉지를 더 사고 다시 출발해 슬슬 오던 길에 아마투강 다리 난간에 누가 올라 있는 걸 봤다.
논소는 즉각 차에서 내려 여자에게 접근했다. 더 가까이 가면 정말로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을 거 같아 몇 발짝 앞에 서서,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외쳤다. 논소는 이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깊은 고난의 흔적을 발견했던 거다. 이제 마음이 급하게 된 논소. 그는 자기 차로 급하게 돌아가 닭 두 마리를 꺼내 들고 다시 다리에 접근했다.
어떻게 되나 보세요. 당신이 이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닭 두 마리를 강으로 힘껏 던졌고, 닭이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결국 아마투강의 급류에 휩쓸려 몇 번 빙글빙글 돌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여자, ‘은달리’는 마음이 바뀌어 논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자기 도요타를 몰고 사라졌다.
논소가 이때 강 속으로 집어 던진 닭 가운데 한 마리가 바로 “양털처럼 흰 수탉”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까웠겠지? 그래서 즉각 밴을 타고 다리로 가서 강변을 뒤져보았지만 찾은 건 벌써 파리가 꼬이기 시작한 털 빠진 죽은 닭뿐이었다.
이렇게 사랑의 씨앗이 눈을 튼다. 넉달 후에 겨우 다리 위 여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일상의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즈음, 유일한 친구 엘로추쿠를 따라 우정상 MASSOB 행진에 참여해 걷다가 운명의 여자와 상봉하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자기 목숨을 그리 열성적으로 구해주었으니 어찌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랴, 둘은 금방 사랑에 빠져, 사랑을 만들고, 소위 사랑을 나누게 된다. 즉 할 거 다 했다는 거지 뭐.
나이지리아. 나이든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시대. 둘이 정식으로 만나기 한두 달 전에 논소는 삼촌한테 결혼을 하라는 말을 이미 들었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건만, 사랑하는 은달리는 좀체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논소가 자신을 부모와 친척에게 보이기 싫을 만큼 누추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항의했고, 그래서 은달리는 자기 가족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보족이라고 같은 이보족이 아니다. 비아프라 전쟁 당시 동지의 자식들이라고 하지만 평등, 같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공평해? 천만의 말씀. 은달리는 족장의 딸. 우무아히아는 물론이고 수도 아부자까지 이름을 떨치는 부르주아 계급. 이런 집안의 딸이 닭 수십 마리를 치는 농부와 결혼을 해?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걸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때 논소의 나이가 20대 초중반, 한 스물넷 됐을까 싶은데, 하긴 그 나이에 안 될 것도 없긴 하다. 은달리도 또래니까 역시 안 될 일 없는 시기. 이미 한 새끼와 연애를 했고, 그 남자가 자기를 버리고 영국으로 도망친 바람에 실연의 깊은 고통을 겪은 상태라 이번에 맺은 인연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보상심리도 있었을 터. 논소와의 결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볼 모양이었다.
은달리가 논소에게 말하기를, 가난? 그건 문제가 안 된단다. 자기 집이 워낙 부자라서 그깟 땅 수만 평을 사주면 한 방에 대농장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 별 거 없는 집안? 처가가 막강해서 반쪽 친척만 가지고도 비까번쩍하다. 그럼 뭐가 중헌디? 논소가 중졸이라는 거. 이건 대책이 없는 거라고. 은달리는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있고, 대학원 과정은 유럽에서 마칠 예정인데, 중졸 남편은 집안에서도, 친척한테도, 부르주아 커뮤니티 안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은달리는 스스로 그 빌어먹을 커뮤니티에서 뛰쳐나와 결혼을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들은 논소는 절망한다.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은달리를 만나면 하릴없이 다양하고 격하고 슬픈 섹스만 나눌 뿐.
이때 논소의 눈앞에 나타난 은인 비슷한 잃어버린 친구. 잊고 살았던 친구 자미케. 작은 키에 퉁퉁한 몸집의 자미케는 작가 오비오마처럼 키프로스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단다. 키프로스는 유럽과 터키 중간 정도이고, 좋은 일자리가 넘치고 넘쳐서, 일을 하며 대학에 충분히 다닐 수 있다. 공부만 따라가면 유럽의 대학으로 전학을 가던지, 대학원 과정을 유럽에서 할 수도 있다. 자미케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논소는 은달리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별 문제없이 은달리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땅과 집과, 닭을 모두 팔아 돈을 마련한 논소는 자미케를 통해 1년치 대학 등록금을 납부하고, 기숙사 비용도 지불하고, 키프로스에서의 생활을 위하여 키프로스 은행 계좌를 열고 4천 파운드를 예금했다.
그리고 이를 은달리에게 말한다. 떠나겠다고. 돌아오자마자 결혼하는 거라고. 은달리는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결국 떠나보낼 것임을 알고, 처음으로 논소에게 질내 사정을 허용한다. 독자는 팍, 알아차리지. 은달리가 논소의 아이를 낳겠구나. 아이를 만드는 걸 보니까 논소는 키프로스인지 터키인지에 가서 고생만 오지게 하고 오겠구나. 그리고 이런 불길한 생각은 언제나 들어 맞는다.
당연히 2부에서 이어지는 본격적인 논소의 불행은 친절한 자미케에서 시작한다. 천부적인 사기꾼. 자미케 때문에 누구는 거지가 되어 나이지리아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오늘도 키프로스의 황야를 걷고 있다. 누구는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질러 터키 감옥에 갇혀 있고, 누구는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걸 논소는 모른다. 하지만 논소의 ‘치’는 안다. 저 멀고 먼 어린 시절, 몸이 약한 뚱보 자미케를 심심풀이로 괴롭히고 때린 논소로 하여금 세상을 저주할 이유를 얻은 자미케라는 것을.
이렇게 1부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사실 이게 중요한데, 좀 야하게 진행해서 만족한 상태로 2부를 읽게 만들지만, 아이고, 키프로스에서의 고생담이 너무 징글징글맞아 곱게 늙은 나는 학을 질렸다는 얘기 아냐? 물론 그건 내 경우일 뿐, 극점으로 치닫는 묘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무릎을 칠 수도 있으리. 다 복골복이다. 책을 읽고 자신과 맞고 안 맞고는.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 더 얘기하고 싶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어졌다. 1권 134~135페이지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도서관 가서 책 찾아 읽으실 분은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다. 이 책은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읽으려면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선택하시라.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명색이 제목을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라고 했으면 약자, 빈자, 무식자를 위한, 무식자에 의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품 내내 약자처럼 보이는 논소는 사실 나이지리아 전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땅과 농장과 집을 가진 중산층이다. 여주인공 은달리에 비해 약자로 보일 뿐이다. 그리하여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의 핵심은 계급간 갈등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으로 가야 할 것인데, 화자인 논소의 ‘치’는 논소의 신분을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제 주인이 걸출한 사람들의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것입니다. (중략) 그는 무슨 과일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사람들과 같은 등급이 아닙니다! (후략)” (2권 p.126)
이거 뭥미? 논소 자신이 걸출한 인물이다, 걸출한 사람들을 배출한 가문은 따로 있으며, 보통 사람하고는 애초에 다른 등급의 인간이라는 얘기지? 뭐 이런 후진 치가 있나 그래. 사람들의 집단에서 다른 집단보다 더 ‘훌륭하고 높은’ 등급 또는 계급, 혹은 핏줄이 존재한다는 뜻이지? 어이가 없네.
말로만 마이너리티 어쩌고 저쩌고 동동 뜨더니, 속은 여전히 봉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누가? 누구기는 누구야, 작가 치고지에 오비오마자. 아니더라도 이 발언의 모든 책임은 작가가 져야 마땅하지.
근데,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유도했는지도 몰라. 그러니 직접 읽어보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