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영시장 - 설재인 연작소설집
설재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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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생. 자랑은 아니지만 어려서는 머리가 커서 걸음마를 늦게 뗐다고. 뇌 용량이 크니까 공부를 제법 해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특목고에서 수학교사를 몇 년 했다. 그런데 특목고 수학교사라는 직업이란 자라나는 청소년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라 염증을 느껴 아무 대책 없이 사표를 내고 말았단다. 그 후겠지? 20대 중반까지는 “운동이란 ㅇ”도 몰랐던 설재인은 어쩌다 보니 복싱을 시작해 지금은 복싱을 한 세월이 수학교육을 한 시간보다 더 길다고. 즉 지금은 뛰고 때리고 막고 피하는 소설가라는 말씀.

  책가게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말을 최대한 줄인 채 사람을 염탐하는 몹시 음침한 사람.”

  젊은 작가? 아휴, 아니다. 37세가 무슨 젊은 작가. 이미 완숙해서 전성기를 구가할 시기. 이 책을 냈을 때는 서른다섯. 소설쓰기 딱 좋은 시절일세.

  《월영시장》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이 또래의 작가군群이 쓴 소설책 가운데 오랜만에 “읽는 재미”가 쏠쏠해서 책 읽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저 오래전, 이 책보다 22년 전, 지금부터 24년 전 가상의 월영시장이 아니라 진짜로 영등포시장의 한 밥집 삼오식당의 “딸램” 이명랑이 쓴 명랑한 소설책 《삼오식당》이 딱 생각났다. 사는 모양이야 진짜 밥집 딸이었던 이명랑이 더 생명력이 있지만(삼오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뭐 하실까?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설재인은 또 다른 모양새로 통통 튀는 매력이 가득했다. 이런 소설을 좀 더 많은 작가들이 쓸 수 없나? 만날 우거지 궁상 떠는 모습만 보다가 없는 사람들의 따듯하니 눙치는 은근한 궁상을 읽으니 그것 참 괜찮네.


  월영시장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서울의 가장 서쪽, 김포공항과 담벼락을 마주한 서울 S동의 시장을 모델로 해서 썼다고 한다. 설재인이 2023년 초에 “청년머시기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아마도 무척 기뻐서 그랬겠지?) 직접 찾아가 본 S동, 머리 위로 비행기가 1분에 몇 대씩 낮게 날기 시작하는 곳에 S시장이 있었고, 그때까지 국밥이 6천원, 소주 한 병에 4천원 하던 식당이 있었는데, 오후 한시였나 하긴 오전 열한시면 어떻고 아침 다섯시면 어떻겠느냐만, 벌써 나이 좀 자신 아저씨들이 소주 또는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있는 모습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소설집의 제일 앞에 배치한 작품 <딸램들>의 주인공이 “40년 된 건물에 들어선 20년 된 자근포차”의 2년제 유아교육과를 다니는 “자근딸램” 동지. 동지. 사람 이름이다. 안동지. 즉 동지가 아니라는 뜻? 그건 아니고 그냥 동지. 나이 지긋한 거대한 몸에 커다랗게 외양으로 위압하지만 순하디 순한 사냥개를 끌고 산보를 다니는 가발의 사나이 김제혁 씨 같은 사람들이 이 몸집 작은 아이한테 “동지”라고 부르기 머시기하니까 그냥 “자근딸램!”하던 것이 모든 시장 사람들의 입에 붙어버린 거다.

  이제 20대 초반의 동지가 가게 자근포차에 들어서는 걸 딱 엄마가 보더니 하시는 말씀이:

  “너 어디서 처자고 지금 기어 들어와, 기어 들어오길.”

  동지가 냅다 내쏜다.

  “문자 보냈거든? 무려 어젯밤 9시에?”

  흠. 문득 궁금하다. 동지가 어젯밤 9시를 “어젯밤 아홉시에?”라고 했을까, “어젯밤 구시에?”라고 했을까? 어떤 경우라도 하여간 동지, 이 기지배가 외박하고 온 건 맞지? 그러나 기대하지 마시라. 진짜로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왔다. 시험이 낼 모레다. 비록 엉망으로 망칠 예정이지만.

  이 자근포차는 월영시장에서 아주 유명하다. 매일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서 다음 날 새벽 3시에 문을 닫는다. 설재인은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할까 “아침 십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할까? 아니면 자기는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쓰지만 독자는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읽어 주거나,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 또는 “아침 십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읽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신경쓰지 않거나, 어떤 경우일까? 아마 자기 소개에 “사람을 염탐하는 몹시 음침한 사람”이라고 한 걸 보니까 신경 안 쓰는 거 같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이 자근딸램도 불만이 많다. 20여 년을 불만 가득한 생으로 살았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애정부족. 자신이 스스로 진단한 병명이다. 동지가 어려서부터 부부는 아이 돌보는 건 다음으로 하고 아침 십 시부터 새벽 삼 시까지 문을 열기 위하여, 그것도 조리된 가공음식이 아니라 물론 햄 소시지 같은 반찬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을 직접 조리해 장만한 음식을 내놓는 장사에 말 그대로 매진해왔기 때문이다. 만일 동지 자신이 다른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부모의 지극한 관심 아래 성장했다면 자기가 이 모양 이 꼴로 컸겠느냐, 하는 게 불만 가운데 상 불만.

  근데 동지한테는 완전 골통 삼촌이 한 개 있다. 맞다 한 개. 멍멍이와 유사한 수준의 인간을 칭한다. 어떻게 딸 하나를 만들어 이름을 동윤이라고 하는데 지금 열 살. 학교도 보내지 않아 글씨도 쓸 줄 모른다. 때를 맞춰 마누라가 날랐는지 아이를 데려와 그냥 자근포차에 넘겨주고 가버렸다. 생각해보니 자기도 자기지만 동윤이한테 비교할 바가 아니다. 동윤이는 동지하고 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독자는 이 작품의 결말이 동지하고 동윤이가 화해하는 장면이 되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까?


  이렇게 주로 빈민들로 구성한 월영동. 공항과 담벼락을 맞대고 있는 수준이라 고도제한이 있어 고층 건물도 없고, 높은 아파트도 없는 동네. 1분에 비행기가 몇 대나 저공비행하는 통에 무지 높은 데시벨의 항공 소음과 함께 “언제나 비행기가 성교하는 인간처럼 배를 보이며 지나”가는 동네이니만큼 빈민으로 구성된 곳에 유일하게 사람들이 비비대는 곳인 월영시장. 당연히 땀냄새, 개 오줌냄새, 음식냄새, 건강원 개소주, 고양이소주, 염소소주, 장어소주의 배릿한 냄새, 요즘말로 빈티지, 옛말로 구제 옷에서 나는 곰팡이내 같은 것도 나겠지만, 역시 돋보이는 건 비행기 소음 아래에서 단련된 사람들의 지극히 우렁차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악쓰는 소리겠다.

  삶의 악다구니. 그러나 건강하기도 하다. 남을 돌볼 줄 알고, 오지랖 넓다는 지청구를 들을지언정 남의 사정 좀 알아야겠고, 당연히 참견질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오래 전에는 흔히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술 한 잔도 나눌 수 있고, 가끔은 멱살을 쥐어 틀고 쌈박질도 할 수 있지만 딱 그만큼 화해술도 한 잔씩 하던 사람들. 그들을 볼 수 있는 21세기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네. 월영시장이다.

  한 배에서 나온 씨 다른 자매 형제 같은 작품들만 읽다가 설재인을 읽으니 그거 참 괜찮다.

  눈에 힘을 줘서 다른 설재인도 또 읽어봐야겠다. 이제 전성기를 시작했으니 더 좋은 작품,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글만 쓰면 된다. 영업은 독자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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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로의 여행 열린책들 세계문학 270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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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앰블러, 재미있는 사람이다.

  1909년 런던 근교에서 인형극을 하는 뮤직홀 아티스트 부부의 아들로 나서 런던 소재 공과대학에 들어가 배우다가 중도 작파하고 전기회사의 엔지니어 연수생으로 잠깐 일했다. 그러다가 애초에 부모한테 물려받은 예술인의 유전자가 힘을 발휘했는지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이어 점차 소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20대에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그것도 때려치우고 파리에 가, 미국에서 온 패션 특파원 여성을 만나 1939년에 결혼해 19년을 살고 이혼했다. 1939년? 이해 8월에 나치 독일과 소련, 즉 히틀러와 스탈린이 서로 불가침 협약을 맺었는데, 평소 강한 반파시스트였던 에릭 앰블러는 파시즘의 확장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소련인 줄 알았다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게다가 독-소 조약을 맺고 보름도 지나지 않은 9월 1일에 세상의 시계가 멈춘 일이 벌어진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이 터져버린 거였다. 물론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은 한 2년 전부터 전쟁의 기미를 알아채 너나할 것 없이 군비확장을 해오긴 했지만 정말로 전쟁이 이렇게 쉽게 터질 줄은 몰랐을 걸?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아직 프랑스를 향해 전차의 포구를 돌리지 않았을 무렵. 이때가 앰블러의 장편소설 <공포로의 여행>의 시간적 배경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릭 앰블러는 1940년에 이 소설 <공포로의 여행>을 쓰고, 1941년에 왕립 포병대의 말단 사병으로 지원 입대하니 그의 나이 32세. 이후 사진 부대를 거쳐 전쟁이 끝나고는 육군 영화 및 사진 부대장 중령 신분으로 제대했다.

  이러니 소련에 대해 감정이 좋을 수 없을 터. 기껏 믿었다가 발등을 찍힌 경우니까 그냥 반공주의자보다 더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된 것도 이해할 만하다. 민간인으로 돌아온 앰블러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1951년부터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지금은 모르겠고 당시엔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고.

  이이의 다른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한 책으로 열린책들 세계문학시리즈 248번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이 있다. 여태 읽은 줄 알고 그냥 지나친 책인데, 안 읽었다. 다음에 읽어야지.


  <공포로의 여행> 역시 스파이 소설. 독일과 튀르키예, 소설 속에서는 “터키”의 스파이들이 출연하지만 주인공은 스파이가 아니고 앰블러처럼 공과대학을 졸업해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마흔 살의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남성, 그레이엄이다. 그런데도 스파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이의 직장이 “카터 앤드 블리스 컴퍼니” 영국의 거대 무기 제조회사이며, 무기 가운데 대포 관련 분야의 꽤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각종 대포를 다 연구한다. 소설 속에서는 한때 전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독일의 침공을 대비해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터키 해군의 함포 성능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에 힘을 쏟고 있다. 회사의 핵심 멤버답게 높은 연봉을 받고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의 아름다운 집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어여쁜 아내 스테퍼니와의 사이에 토끼 같은 아이들을 두고 있다.

  1939년 9월이 왔다. 이건 그레이엄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만 더 많은 업무를 해야 한다는 뜻만 있었을 뿐. 그래 영국-터키 조약 3주 후에 앞에서 말한 프로젝트 건으로 터키로 출장을 가게 된 것. 목적은 터키 해군의 함포와 어뢰를 재무장하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소련은 터키의 해군 무장 강화를 좋아하지 않았겠지?

  하여간 그렇게 그레이엄은 터키에 갔고, 업무를 다 마쳤으며, 이제 다시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귀국을 해야 했는데, 때를 맞춰 터키에 큰 지진이 나 1주 전에 터키 갈리폴리까지 갔다가 이스탄불로 되돌아온 터였다.


  억지로 잠깐 이스탄불에 머물러야 하는 그레이엄은 왕짜증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 돌아가서 스테퍼니와 함께 1월 1일, 신년을 맞아야 하겠기에. 그러려면 내일 당장 기차를 타고 다시 귀국길에 올라야 한다. 이제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이스탄불 현지에 무기회사 “카터 앤드 블리스 컴퍼니”와 터키 정부의 중개인이 있다. 코페이킨. 1924년에 러시아인들 6만5천 명과 함께 이주해온 백군 출신으로 보인다. 카드놀이 사기꾼, 매춘굴 공동운영, 군복 공급 계약자를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온, 약삭빠르고 잔꾀에 능한 인물이다. 코페이킨은 그레이엄의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을 자신이 접대해야 한다고 고집이다. 저녁은 물론이고, 내일 새벽까지 이미 르 조케 카바레의 제일 좋은 좌석을 예약했다고 알렸다. 내일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레이엄은 일찍 호텔로 가서 자고 싶지만 이를 물리치기 어렵다.

  레스토랑과 카바레. 당연히 사건은 카바레에서 시작한다.

  카바레의 한 구석에는 파트너 없이 온 남자 손님 접대를 위한 여성들이 앉아 있다. 코페이킨이 보기에 그레이엄이 이런 방면으로는 잼병이라 자신이 여성들한테 먼저 접근해 알렉산드리아의 매춘부 출신이지만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를 데려온다. 그레이엄이 술도 한잔 하고, 시간이 좀 지나 마리아와 함께 춤을 추게 되었을 때, 마리아가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바에 앉은 구겨진 양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남자가 계속 그레이엄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전혀 감이 없는 그레이엄은 이를 무시한다. 춤을 추며 바로 접근해 그 남자를 관찰해보니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저 코딱지 만한 놈이? 마리아가 다시 말한다.

  “당신이 더 강하겠지만 등에 칼이 꽂히면 그걸로 몽땅 끝나는 거랍니다.”

  194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건 틀림없이 복선이겠지? 맞다. 구겨진 양복의 남자의 이름은 페토레 바나트. 전문 킬러. 소피아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알려진 독일 스파이 뮐러에게 고용되어 1주일 전에 갈리폴리에서 그레이엄을 칼로 살해하려다 아주 약간의 시간 차이 때문에 실패하는 바람에 자존심이 확 구겨져버린 프로페셔널 청부 살인자이다.


  하여간 그건 나중 일이고, 카바레 르 조케에서 그레이엄은 또 한 명의 여성을 만나니, 이 밤의 쇼 가운데 하이라이트인 커플 댄스의 주인공 조제트. 호세와 계약상 혼인 관계에 있고, 여기서 말한 계약은 비즈니스 상 계약이라는데 소설이 끝날 쯤에 알게 되는 바, 포주-매춘부의 비즈니스와 유사하다.

  문제는 조제트가 겁나게 아름답다는 것이지.

  하여간 카바레에서는 새벽이 될 때까지 즐겁게 놀기만 한다. 눈매가 맵고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가 2차 가자고 하는 걸 좀 많은 팁과 함께 기분 나쁘지 않은 말로 거절한 그레이엄은 코페이킨의 차에 타고 자기가 묵는 페기 가street 애들러 팰리스 호텔로 들어간다. 1939년 터키 호텔에서는 아무리 유명호텔이라 하더라도 늦은 밤에는 엘리베이터가 가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어두운 계단을 올라 3층 자기 방에 도착해 열쇠를 돌려 열고 방에 들어가 오른손으로 조명 스위치를 더듬는 순간 방 저편 어둠속에서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벽의 회 조각이 파박, 떨어졌으며, 두번째 총성이 들렸을 때는 하얗게 달군 쇠막대가 그레이엄의 손등을 지지는 느낌이 났다. 이어서 다시 한번 섬광에 이어 총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3층 창문을 통해 방에서 탈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군지는 당연히 모른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그레이엄은 곧바로 호텔 부지배인을 호출하고, 의사가 도착했으며, 주인공이니만큼 초장이니까 총알이 손등에 가볍게 스치기만 해 응급처치와 붕대를 감는 것으로 끝났다. 이어 도착한 지배인이 모든 편의와 비용을 대겠으니 호텔의 명성을 위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뭐 당연하지.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온 코페이킨. 그가 그레이엄을 싣고 다시 모처로 데리고 갔다. 터키 소속의 일종의 정보부대. 대장이 하키 대령. 하키 대령은 내일 열차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면 그레이엄, 당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앞에서 내가 열라 이야기한 그레이엄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대신 하키 대령이 마련한 귀국행은 허름한 증기선. 화물 운송을 전업으로 하되 승객 몇 명에 한해 저렴한 비용으로 실어다 주는 배 세스트리 레반테호였다. 모든 스토리를 알게 된 그레이엄이 세스트리 레반테 호에 올라, 선실 담당 승무원이, 코페이킨이 그레이엄에게 준 리볼버 권총이 들어있는, 슈트케이스를 들고 승객용 문으로 들어서고, 그레이엄이 뒤따라 들어가 작은 선실 5호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 스파이 극은 시작한다. 리볼버 권총? 코페이킨이 주었다고? 소설에 나와 있으니 언젠가는 한 번이라도 쏘겠네? 글쎄. 살다보면 혹시 안 그런 날도 하루쯤 있지 않겠어? 확인은 당신이 하시라. 비록 품절을 넘어 절판 상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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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6-1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는데요….

Falstaff 2026-06-18 15:21   좋아요 0 | URL
근데 좀 낡아서 말이지요. 1940년에 쓴 작품이라 아무래도 실감이 덜 납니다.

yamoo 2026-06-1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4개 쳐놓고 겁나 재밌을 거 같습니다..ㅎㅎ

Falstaff 2026-06-18 15:2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그냥저냥 읽을 만한데 절판이라서 혹시 다음 달에 올릴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선택하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그냥 돌 다 안 읽으시는 걸로 하심이...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
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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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2009년에 출간한 책이니 노터봄의 나이 76세 때. 계유생이지만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지금 92세네.

  나이 일흔여섯이면 이제 죽음이 보이려나? 그럴 수 있겠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근데 가끔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는 한다. 이제 몇 년 남지 않았겠구나. 뭐 이런 생각. 가끔은 얼른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나는 전혀 들춰보지 않는데 노터봄은 가끔 앨범을 넘기는 모양이다.

  어떻게 영정사진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는 젊은 시절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고 싶다는 의견이 꽤 많다. 더 보기 좋으니까. 몇 살 때 찍은 거? 너무 젊으면 또 그러니까 한 마흔에서 쉰 사이가 좋을 듯하단다. 난 싫다. 지금쯤 찍은 게 더 좋다. 마흔에서 쉰 넘어까지 예순에도 너무 뚱뚱했다. 지금 살이 쏙 빠지니까 보기 좋다. 쪼글쪼글해도 마음에 든다. 뚱보들이여, 무지 힘든 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살 좀 빼 봐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입던 옷 다 버리고 새 옷 사야 해서 돈이 좀 든다. 살 빼는 게 무지 힘들어서, 그래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진짜로 20kg 뺀 걸 자랑하고 싶다. 괜찮지? 귀엽게 봐줘.


  노터봄, 하면 여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도 고향 네덜란드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세계를 다니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마주치고, 어울리고, 사진찍고, 기억하고, 기념한다.


  제일 앞에 실린 <곤돌라>. 곤돌라니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이야기일 터.

  막이 올라가면 암스테르담 출신 예술담당 프리랜서 기자가 베네치아에서, 캘리포니아 밀스밸리에서 온 1960년대 플라워파워 시대의 여자 아이와, 그리스 해안에서 만났다. 기자는 일종의 이혼 기념 여행이었다. 이혼한 것을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그리스 어느 섬에 있는 한 친구 소유의 집을 소개해주어 떠난 길이었다. 그 섬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이름을 가진 미국인. 열여섯? 열여덟? 뒤에 정확한 나이가 나오는데 열일곱이었다. 손과 팔에 12궁 별자리를 문신한 자칭 마법사 소녀. 마녀는 그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같이 자되 잠자리는 하지 않는 조건으로.

  프리랜서 기자는 이혼남. 이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욕망이 끓었단다. 기자 입장에선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도조차 안 해보는 것도 찜찜했겠다. 마녀의 머리를 잡고 키스를 했고, 입술을 떼자마자 마녀는 손으로 그를 밀어내고 마법의 힘인 것처럼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스의 섬에서 며칠 지낸 기자와 마녀는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가서 하루 묵는다. 맥주집에서 슬로보비치라는 술도 마시고 빈 잔을 어깨 넘어 깨뜨려 우정을 쌓기도 했다. 다음날 다시 기차에 올라 베네치아로 갔다.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녀의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는 안다. 원양어선도 묶어둘 수 있는 선박 계류용 말뚝. 그 위에 올라 앉은 열일곱 살짜리 작은 아가씨. 여러 사진 가운데 한 장.

  그러나 이것이 40년 전 이야기이다.

  세월은 흐른다. 그간 암스테르담에서 청탁을 받아 글을 하나 썼다. 많은 글을 썼는데 하필이면 이 글을 미국에 사는 예전의 그리스-유고슬라비아-베네치아 마녀가 보고 읽었다. 네덜란드 화가,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그래픽 아티스트인 야코바 판 헤임스케르크에 대해 그가 기고한 평론을. 옛 아가씨도 간혹 기자를 생각해왔는데 마침 글과 이름을 만나니 반가웠겠지. 그래서 기자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는 사진도 두 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마녀는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으며 아들이 둘 있고, 야코바 판 헤임스케르크 같은 그림을 그리며 산다면서. 마녀의 얼굴은 명상 센터의 벽면에 걸릴 법한 얼굴의 여인. 집 인근의 수도원에서 큰 위안을 찾았으며 불교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왔다.

  기자는 옛 시절의 마녀를 만나러 갔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드디어 만났다. 한순간 서로를 평가하는 번개같이 빠른 눈빛을 교환했으며, 극도의 날카로움이 담긴 내적 사진, 눈가 주름,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칼, 갑작스런 연민과 다정함을 부르는 세월의 흔적 또는 할퀸 자국을 확인했다. 그녀는 편지를 써야 한다는 암시를 받아 그렇게 했을 뿐 그가 정말로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왔다. 와 버렸다.


  마녀를 만나고 시간이 더 지났다. 20년. 그동안 마녀는 죽었다. 기자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 베네치아에 왔다. 사진을 찍은 곳. 베네치아의 석호 계단. 마녀의 사진들 가운데 한 장을. 기자는 편지를 읽지 않은 채 석호에다 슬쩍 버렸다. 뒤에서 누군가 그걸 보고 말했다.

  “석호가 편지를 버리는 쓰레기통이로군.”

  석호에다 편지를 버린 남자가 기자 한 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상 누구라도 비슷한 추억이 있었던 것이겠지.


  이렇게 죽음을 주제로 하는 작품 여덟 편. 그런데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고?

  그렇다. 예전에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 어둠 속의 두려움. 어둠 속에서만 찾아오는 당신에 대한 두려움. 이미 죽은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등장,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 모두 그냥 여우라고 해 두자. 죽음과 죽은 다음에 관한 책. 그리하여 여우는 밤에만 찾아온다고 할머니가 저 옛날 화롯가에서 말씀하셨지. 얘야, 여우는 밤에 찾아온단다. 그러니 얼른 자거라. 자장자장 자장자장… 자장자장 자장 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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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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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두 권을 읽었는데 모두 10년을 훌쩍 지나버렸다. 두 권 가운데 <소멸>은 책을 붙들고 금요일 밤 꼬박 새워 읽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몰락하는 자>는 하필이면 글렌 굴드와 동문수학하게 된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천재 굴드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야기 정도로만 남아 있다. 둘 가운데 한 명이 아마 목매달아 죽어버리지? 이 수준이다. <소멸>은 독후감 쓰기 시작한 초기에 읽어서 작품의 정보도 제대로 써놓지 않았다. 당시에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조국인 오스트리아와 대판 쌈박질 한 번 하고 정나미가 뚝 떨어져 자기가 쓴 무슨 책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다. 그게 시간이 지나니까 아 씨, 나 죽기 전에 조국 오스트리아 땅을 밟지 않을 거야, 이렇게 희뿌연 기억이 자가발전을 해 여태 오해하고 있었고. 그러니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믿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록을 해 놓아야 하는 법이다. 일기를 써라. 일기 속엔 거짓이 없다고 할 수 없어도 제일 작은 거짓을 적었을 터이니 가장 정확한 기억일 터.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국가대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5촌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 작가 본인. 이렇게 두 명이 주인공이고, 이 둘의 우정 주변에 있던 인물 몇 명이 조연으로 우정출연한다. 알다시피 베른하르트는 결핵을 품고 살았다. 하필이면 폐 근처에 있는 심장까지 좋지 않아 평생 고생한 거 같은데, 결국 1989년에 58세의 나이로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갔다.

  죽기전에 병 때문에 황천길 제일 가까운 곳까지 갔다가 다시 온 경험이 있다. 빈Wien 서쪽에 드넓게 펼쳐진 빌헬미네 산지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하나는 베른하르트가 입원한 폐병 환자들을 위한 작은 구역인 ‘바움가르트너회에’이고, 넓은 구역은 ‘암 슈타인호프’라고 하는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구역이었다. 이곳 병동은 전부 남자 이름을 붙인 건물이어서 베른하르트가 길어야 한 두 달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판정을 받아 일생일대 큰 수술을 받은 곳이 헤르만 병동이었고, 하필이연 같은 시기에 약 5백미터 떨어진 암 슈타인호프의 루트비히 병동에 ‘수감’되어 악명높은 전기치료 같은 걸 감내하고 있던 이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었다.


  파울이 베른하르트(이하 “토마스”)와 친하게 지내게 된 건 음악 때문이었다. 빈의 블루멘슈톡가세, 여기서 ‘가세Gasse’는 큰 길 말고 좁은 거리나 골목 같은 걸 칭하는 말로, 하여간 그곳에 음악에 대단한 관심, 아마도 프로페셔널한 비평을 할 수준의 소양이 있는 여성 이리나의 집이 있어서 토마스가 불쑥 찾아 갔더니 마침 카를 슈리히트가 지휘한 런던 필하모닉의 하프너 교향곡에 관해 이리나와 파울이 열라 재미있게 토론을 하고 있었나 보다.

  책에는 슈리히트라고 성姓만 부르는데, 이이는 19세기에 출생해 20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구가한 지휘자이다. 나치가 집권하고 전쟁에 돌입하자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가 종전 후 주로 독일에서 연주한 걸로. 우리나라 클래식 골수팬들 가운데 이이가 연주한 베토벤을 제일 좋아한다고 떠드는 사람도 많다. 음악 포털 “고전은 가라”에 가보시면 꽤 모여 있을 듯.

  이 슈리히트가 언제 죽었느냐 하면 1967년 1월. 그러니까 토마스는 폐병 병동에, 파울은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죽은 사람이다. 하여간 토마스가 몇 년 전에 이리나의 집에서 자기도 무척 좋아하는 하프너 교향곡, 모차르트 K.385 공연을 직접 관람한 바로 그 공연에 대해 침을 튀었으니 방에 모인 세 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슈리히트와 모차르트와 K.385 찬양에 날밤을 새웠다는 거 아니냐.

  흠.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 중에서는 딱 두 개밖에 없는 단조, 그것도 우연히 둘 다 사단조 교향곡인 25번과 40번이 좋던데 말이지. 특히 40번 3악장의 미뉴에트, 경쾌한 발랄함이라니!


  그런데 토마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면, 뭐 독자야 작가가 하는 말을 웬만큼 믿을 수밖에 없지만, 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으로 말씀드리자면, 당대 최고 수준의 음악과 문학과 철학과 미술과 수학과 기타 등등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뇌활동에 관한 한 거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 인물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탁월한 자”의 수준에 완벽하게 도달한 인물이다. 그리고 겸양의 말씀이겠지만 자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조금, 아주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약간 덜 탁월한 자이고.

  게다가 파울은 무기 제작 회사를 가업으로 하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직접 상속자로 어마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백만장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젊음을 소진한 중년이었다가 나중에는 노년이 되고 결국 그렇게 죽는 인간으로, 살면서 노동이란, 그 많던 재산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불쌍한 사람들한테 다 나누어 주거나 사기도 당하면서 완벽하게 거덜이 난 상태에서 이때는 벌써 낼 모래 환갑상 받을 때인데 처음 보험회사 사무직으로 ‘취직 당해’ 근무해본 것이 유일하다.

  음악을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해 모든 오페라하우스의 시즌을 다 경험해보기 위하여 세계일주를 감행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쓴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에서 체르비네타 역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노래한 미국 소프라노를 애인으로 두기도 했다. 자기가 언제나 묵을 수 있는 호수가 딸린 대지가 있는데, 호수 위에 수상 무대를 짓고 그 무대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R.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을 공연하는 걸 결국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는 사람. 말러와 브루크너와 바그너 같은 대규모 편성을 좋아하다가 나중에, 내가 보기에는 너무 늦게 실내악으로 되돌아가 줄리아드 사중주단과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을 즐겨 듣게 되었을 때는 이 백만장자 거부가 방 하나에 부엌, 화장실과 작은 욕실이 달린, 언제나 고장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의 꼭대기에 씻지 않은 접시가 쌓인 산더미와, 빨래하지 않은 천들이 널부러져 무더기 지어 있는 욕실에서, 부자 친척이 입다 버린 고급 비단 옷을 입고 남의 눈에 띌 새라 장 본 것을 비닐 봉지에 담아 비척거리며 계단을 올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때가 1979년.


  3년이 더 흘러 1982년.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말하기를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했던 1967년부터 1979년까지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이제 내가 읽었다. 2026년에. 그리하여 이들과 나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매개체, 시간이 놓여 있다. 나름대로 받아들이려 감안은 하겠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내 스타일을 버렸다. 메모하지 않았다. 대신 책갈피를 몇 장 꽂았다. 첫 번째 책갈피가 42쪽에 꽂혀있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나는 참으로 파울의 머리가 그리웠다. 그동안 수백 개의 다른 머리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유감스럽게도 오직 앙상하고 황폐하기만 한 그 머리들 때문에 질식할 만큼 괴로웠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흔하게 마주치는 머리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 자란 감자 알갱이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지루할 뿐이다.”


  그러니까 월등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보다 눈썹만큼 더 월등한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제외한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아마도 지식계층) 사람들의 지능수준이 그저 다 자란 감자 알갱이 수준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이렇게 오만하게 살아도 된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정작 그렇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 만약 진짜 있다면, 그 오만해도 되는 사람이 정말로 오만하게 살았을까? 오직 덜 떨어진, 좀 아는 새끼들, 혹은 아는 척하는 새끼들이나 이런 마음을 갖는 거 아냐? 여태 베른하르트 선생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거 참 진정한 개 호로새낄세.

  그런 토마스가 경애했던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젊은 시절을 되살려보는 토마스.


  “그가 한때 전 유럽, 구 유럽뿐 아니라 신 유럽의 모든 최고급 호텔까지도 최고 신사의 신분으로 들락거렸던 사람이라는 것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수십 년 동안 빈 오페라 극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거나 휘파람을 불어댐으로써 오페라 공연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던, 바로 그 당사자라는 것도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중략) 자신이 몇 번이나 파리에 갔는지, 몇 번이나 런던과 로마에 갔는지, 샴페인을 몇 천 병이나 비웠는지, 여자들을 몇 명이나 유혹했는지, 읽은 책은 도합 몇 권이나 되는지를 헤아려보곤 했다.” (p.84)


  노동하지 않고 즐기기만 한 파울 남작 비트겐슈타인. 유럽의 귀족 자재이자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난 부르주아 꼭대기에서 자진해 비렁뱅이로 추락해 쓸쓸하게 죽은 자.

  이 책의 목적은 117쪽에 직접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밝혔다.

  “내 친구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내 인상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전부.”

  스스로 자기 둘이 대도시 스타일의 우월한 자, 탁월한 자. 그래서 일반 대중을 다 자란 감자 알갱이, 감자 덩어리도 아니고 거기에서 부스러져 나온 감자 알갱이로 알고 평생 산 두 인간의 관계 이야기를, 우리 가운데 누구는 돈 주고 사서 읽었고, 누구는 빌려 읽었다.

  내 스마트폰에 깔린 앱 북적북적에 별 셋 반을 올렸다. 탁월한 자 가운데 한 마리인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한 문단짜리 글이 몰입감 있게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힘에만 준 별점이다. 내용에 관해서는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토마스와 파울, 너희들 만의 샹그릴라. 그 속에서 행복하라. 나, 감자 알갱이 하나는 개똥을 밟아도 땅 위에 좀 더 있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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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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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건의 데뷔 소설집을 세번째 키건으로 읽는다. 이이가 이렇게 시작했구나.

  이 책을 출간한 것이 서른한 살 때. 키건은 열일곱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로 건너가 로욜라 대학에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 6~7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첫 소설집 《남극》에 실린 작품의 절반 정도는 아일랜드, 절반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1960년대생 아일랜드 여성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즉 거의 모든 남성은 찌질하거나 폭력적이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해 분노하지만 견딘다. 아일랜드, 바람이 많이 불고 유사이래 기근이 많이 들어 늘 궁핍했던 섬나라. 하필이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잉글랜드 옆에 있어 늘 침략당하고 땅을 빼앗기며 굶주림에 허덕였던 곳.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폭력도 혀용 또는 묵인해야 했을 터이고, 이런 땅에서 여성은 늘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 굶주림과 전쟁이 있는 곳에서 여성은 없다. 폭력 때문이다. 폭력이 모든 악의 근원이니까. 클레어 키건의 아일랜드는 21세기, 세계 1위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가장 부유한 나라 아일랜드가 아니라 여전히 척박한 토양 위에서 궁상에 전, 삭아버린 땅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아일랜드. 그리하여 날씨에도 딱 맞게 키건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간결하면서도 서늘한 문장이라서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클레어 키건, 하면 나는 제일 먼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연상한다. 앞에서 말했듯 1960년대생 아일랜드 여성이라면 정말로 그런 아버지를 겪었을 수 있다. 비록 키건의 다른 책에서 나오는 개썅노무 아버지처럼 친 딸을 성폭행하는 개자식들부터 시작해 동네의 온갖 똥개새끼들 같은 아저씨들, 심지어 상습적으로 동네 소녀들을 성폭행하는 가톨릭 사제 새끼까지 밀림의 왕국이나 세렝게티-마사이마라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거기에 속수무책 당하고 마는 여성들.

  키건을 읽으며 불편했던 것은, 폭력/완력 빼고 형편없는 남성들의 등장이 그랬듯이,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그냥 감당하고 마는 아일랜드 여성들의 수동성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남극》의 <자매>에 등장하는 둘째 딸 루이자처럼 십대 후반, 적어도 이십대 초반 정도라면 더블린에서 잉글랜드행 배를 타고 떠나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지.

  떠나지 않더라도 왜 기어오르지 못했을까? 가부장적 아버지/남편 그리고 폭력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반란을 꾸미지 않으면 언제나, 영원히 그 올가미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하는 걸?


  <남자와 여자>에서는 기어오른다. 아내가 남편한테. 그것도 절대 남성우월주의자이자 더 할 나위 없는 가부장적인 남편임에도.

  아빠는 여간해 움직이지 않는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집의 여자들, 그러니까 아내와 딸 한테는 운전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딜 여자가 차를 운전해? 그냥 옆에 타고 있다가 차가 나갈 때 집 문을 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내/딸이 무도회용 드레스를 입었건 청바지를 입었건 간에, 문을 열고, 차가 나간 다음 다시 문을 닫고, 다녀와서는, 역순으로, 다시 문을 열고 차가 들어온 다음에 다시 닫아야 마땅하다. 대문과 집까지 거리가 있으니 다시 남편의 옆자리에 타, 남편이 운전하는, 운전해주는 차에 타고 와야 한다.

  오빠도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차 안에 흘린 염소똥과 양똥도 치워야 하고, 외양간의 허드레 일도 해야 하는데 공부 잘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생 구라인 오빠는 자기 방에서 숙제한다는 핑계로 열심히 딴 짓만 하고 있다. 저녁밥을 차려놓고, “오빠한테 나와서 밥 먹으라고 해라” 엄마가 말하면 여동생이 가서 “내려가서 먹어. 이 망할 게으름뱅이 새끼야.” 하고 말한다.

  이 가족이 송년 춤파티에 갔다. 아버지는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를 안고 신나게 뺑뺑이를 돌지만 엄마는 한 구석에서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게다가 마지막 순서인 경품 뽑기에서 실수도 해 이웃들한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집에 올 때 차 안에서 아빠가 엄마한테 이 말을 하며 비웃기도 하고 약 올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자기도 덩달아 창피를 당한 거 같아 열받은 게 틀림없다. 집에 왔다. 엄마더러 내려서 대문을 열라고 한다. 엄마는 차에서 안 내린다. 그냥 버티고 앉아있다. 뒤에 남매가 쳐다보고 있으니 아빠도 답답하겠지. 분명 잔뜩 화가 나서 자기가 궂은 날씨에 내려 직접 문을 여는 순간, 재빨리 운전석으로 넘어간 엄마가 차를 운전해 집까지 부웅, 아빠더러 비오는 진흙탕 길을 걸어오라는 듯이 출발해버렸다. 엄마는 TV에서 유심히 운전 교습하는 방송을 보아왔던 거였다.


  겨우 이것 가지고 가정 속 반란이야? 라고 하지 말라. 태풍도 찻잔 속의 작은 흔들림으로 시작하는 거다. 한 편 더 있다. 어떤 작품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책 뒤표지에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위안? 아일랜드 남자들은 여자한테 위안 받기를 원했던 모양이지? 그리고 여성들은 그런 찌질하고도 후지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남자들한테 기꺼이 위안을 주었던 모양이고. 이게 168페이지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카피 가운데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가 빠져 있다. 이 문장의 전제는 남자 또는 아일랜드 또는 키건이 바라보는 세계의 남성들이 모두 자신을 아이처럼 보살펴달라고 요구했다는 거다. 안 그랬는데도 여자가 자진해서 보살펴주었으면 스스로 자초한 일일 것이다. 세상의 남자들이 정말 나 좀 보살펴줘, 이렇게 졸랐을까?

  지금 읽고 있는 발자크의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 1> 79쪽에도 비슷한 광경이 나온다. 주인공 쥘리앵을 사랑하는 (글자를 쓸 줄도 모르지만 천사처럼 아름다운)에스테르 앞에 스페인 사제가 나타나 쥘리앵과 떨어져 수녀원으로 가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으라고 한다. 그랬더니 에스테르가 신부한테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그를 위로해주나요?”

  신부가 대답하기를, “그가 어떻다고 당신이 그를 위로해야 하지?”

  남자가 여자한테 위안/위로 받기를 원한다고? 좀 웃기다. 합의한 섹스를 원하기는 하지. 물론 “모든” 남자가 아닌 “대부분의 남자”를 일컫는 거다.


  그런데 책을 좀 더 읽어보면, 앞의 단편 <남자와 여자>에 주인공 화자 ‘나’가 이렇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다른 집 아빠들이 아내의 외투를 들어주고, 문을 잡아주고, 가게에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필요 없다고 해도 초콜릿과 잘 익은 배를 사 오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군. 하필이면 우리집 아빠 새끼만 저 지랄이고 다른 집 아빠 님들은 안 그렇단다. 주인공이 하는 얘기니까 당연히 맞는 말일 듯. 키건의 소설을 읽고 개썅노무 아빠 두어 새끼들을 아일랜드 또는 세상 전체 아빠로 생각하면 오산이겠군. 당연하지. 아주 선량하거나 악마 같아야 소설의 주인공 자격이 있을 터이니. 그러니 사실 별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현대 소설에서 이왕이면 주인공이 천사보다 악마인 것이 훨씬 잘 팔리겠지. 그러면 같은 값이면 악마를 캐스팅하지 뭐. 그건 좋은데 가끔 순진한 독자들은 그걸 일반화시킨다는 말이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반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히 당신 의견이 옳다. 다수의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은 사실 주인공으로 고려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차라리 눈비오는 진흙길에 아빠를 놔두고 떠난 엄마처럼 반란을 획책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괜히 표제작 <남극>의 첫 문장처럼 허튼 짓 해서 코 깨지지 말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대단한 거 있어? 여자나 남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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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6-15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나 좀 보살펴줘, 라고 말하진 않지만 위안을 얻고자 하는 남자들이 많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미디어 같은데서 세뇌된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성폭력같은 중대한 범죄에 저항하는 것도 힘들지만, <남자와 여자> 처럼 딱히 죄는 아닌데 짜증나게 하는 경우에는 그냥 좀 참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죠. 약간의 반란은 있을지언정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80-90년대 한국에 그런 가정도 많았을 것 같아요. 제가 속한 가정도 그랬고.

Falstaff 2026-06-15 20:37   좋아요 1 | URL
댓글 달기가 쉽지 않네요. 남자가 보살펴 줘, 라고 말하기 전에 보살피려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그걸 핑계로 더 달라 붙으려 할지.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도 좋지 않을 수도 있고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세상 사는 일 가운데 쉬운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냥 끝없이 말, 대화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하는 겁니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아마 제가 형광등인 거 같습니다.

건수하 2026-06-16 00:08   좋아요 1 | URL
요즘 젊은 사람들은 더 현명한 것 같고, 미디어나 문학작품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그들의 인식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