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사랑 이야기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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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의 신간이 한 번에 두 권 나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격정세계>는 도서관에서 따로 구입 계획이 있다고 반려됐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세기 사랑 이야기>만 ‘첫빠따’로 읽었다. 작가의 덧붙이는 말도 없고, 역자 해설도 없이 본문만 506쪽. 작품은 전위적이다. 무수히 상징적이고 메타포가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며,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이다. 장황한 출판사 책소개에는 욕망, 온천여관, 성접대부, 추파 등을 앞부분에 나열하여 여차하면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신세기라고 했으니, 21세기 현대인의 허리하학적 연애 이야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런 거 믿고 책 읽기 시작하면 코피 터진다. 심지어 야한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기대하지 말고 그냥 찬쉐가 풀어가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듯하다.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건 분명한데 딱 집어서 주인공이라 하기에는 좀 어색한 마흔여덟 살의 유부남 웨이보를 둘러싼 여자들, 그리고 이 여자들의 남자들이 중심이다. 그러나 한 줄기를 이루는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연인>을 읽을 때처럼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가 곧바로 집어치웠다. 처음엔 서른다섯 살 먹은 과부이자 계량기 공장 창고관리인으로 일하는 뉴추이란과 마흔여덟 살로 비누공장 다니는 평사원이지만 지식인인 웨이보의 만남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1년 전쯤 성sex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천여관에 입장한 웨이보가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입장하면서 추이란과 옷깃을 스쳤고, 퇴장하면서 불쑥 추이란 생각이 나 여관의 데스크를 통해 정보를 알아내 연인사이를 시작한 커플이다. 48세의 웨이보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아들 둘을 독립시켰고, 아내 샤오위안은 중학교 교원으로 교양 있고 말도 부드럽게 돌려 하는 교양인이다. 지금은 가르치지 않고 교직원으로 학교 업무로 중국 각지에 출장다니는 일이 잦다. 이들은 서로 무심한 단계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라 각자만의 비밀이 따로 있어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성인군자 사이의 교류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내 샤오위안은 밤열차 객실에서 만난 저 시골 현에서 병원 개업하고 있는 양의洋醫 닥터 류와 각별한 관계를 맺는데, 오해하지 마시라, 플라토닉이다, 플라토닉.

  웨이보는 이제 뉴추이란과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다. 그래 오늘 당장 추이란의 집에서 대낮에 만나 뼈와 살을 태우려 했거늘, 그리하여 추이란은 아침부터 목욕재계하고 색조화장까지 싹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웨이보가 오긴 왔는데, 집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해, 이 말 하러 왔어. 이러고 꽁무니를 빼버렸다. 웨이보와 한낮의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연차까지 낸 추이란은 혀가 쑥 빠졌다. 그러나 자신은 절대 남자한테 질척대는 여자가 아니라고 믿는 추이란. 웨이보가 괜찮은 남자이긴 하지만 남자가 밥 먹여 주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추이란은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아, 추이란은 온천여관에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온 것이지 매춘을 하기 위한 건 아니다.

  매춘을 위해 이 집에 들락거리면서 추이란과 알고 지내는 두 여성은 룽쓰샹과 진주. 이들은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공기중에 한없이 많은 입자로 나풀거리는 먼지를 더 들이마시면 북망산이 두어 걸음일 거 같아 공장을 그만두고 온천여관의 윤락녀가 된다. 이미 삼십대 중반쯤 되는 많은 나이로 업소에 자리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같은 공장을 다니다가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뛰쳐나가 업소에 터를 잡은 선구자적 윤락녀 아쓰와 몇몇 남자의 후원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쓰는 웨이보에게 미스 쓰絲라 불리며 한때 연애도 했으나 관계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등장인물은 이 정도면 됐다. 이들은 전부 어떻게라도 서로 인연이 있고, 없더라도 두어 사람만 거치면 서로 알 수 있는 사이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 글쎄 그걸 좇아가려면 책 읽기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니까. 찬쉐는 달랑 <마지막 연인>과 <황니가>를 읽었을 뿐이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마지막 연인>보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해독解讀하는데 더 어려움이 있었고, 책을 덮은 다음에 분명히 나름대로 읽어냈고 이해도 어느 수준까지는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게 어떤 것인지 설명하자니 앞뒤로 갑갑하다. 확실한 건, 이 작품이 책소개 전면에 나온 것처럼 불륜, 윤락, 자유분방, 특히 허리하학적 자유분방과 별로,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 찬쉐가 쓴 작품이라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으니 나는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혹시나 해서 미리 깔아두는 말 또는 정보다.

  좋다. 작품을 읽은 감상으로서 독후감 대신, 책을 읽으며 든 의문을 한 번 이야기해보자.

  제목이 ‘신세기’라고 했고 출간연도도 2013년이다. 찬쉐는 밀레니엄 이후의 21세기 식 사랑에 관해 쓴 작품인가? 그것 참 모호하다. 이 독후감을 시작할 때 “상징적”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메타포”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라고 했으니 모호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실 사랑이면 사랑이지 21세기 식 사랑이란 것이 특별하게 존재할 만큼 드라마틱한 의식의 변화는 있었던 것 같지 않고, 작품 속에서도 이 시대의 특별한 사랑 방정식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주요 등장인물의 나이도 미스 쓰, 즉 아쓰만 제외하고는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과 40대 후반 이후의 남성이다. 더 이상 “조신한 여성”으로 불리기 원하지 않는 것도 이번 세기 들어 등장한 신여성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등장인물과 작가 찬쉐는 지난 날, 저 멀리 고향이나 시골, 그러니까 “존재의 시원”의 장소나 기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나의 생각이 시원始原하는 곳. 그곳에서 근원적 나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영향을 주었던 인물. 이런 것들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돈과 시간과 땀을 대가로 찾아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이미 사라진 사촌 오빠네 집, 몇 십 년 전에 묻힌 넷째 숙부가 되고, 이렇게 한 번 초현실적으로 방문한 옛 고향 동네 사촌오빠 집과 이미 죽은 넷째 숙부는 작품 속에서 계속 출몰한다. 이건 뉴추이란의 경우이고, 자아의 시원을 발견하지 못한 웨이보는 결국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 하천에서 모래 채취작업에 투입된다. 감옥에 들어가니 참으로 다양하게 시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천지다. 이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예를 들어 총을 들고 교도소로 쳐들어왔다가 그 길로 수감되고, 이후에도 별의 별 방법을 써서 교도소에서 출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곳이 그들에겐 가장 편한 시원의 장소이니까. 웨이보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 웨이보는 그것으로 자취를 감춘다.


  시원의 장소는 뒤 돌아보면 벌써 사라지고 만 사촌 오빠네 집일 수도 있고 원하는 사람이 발길을 돌리면 나타나는 자유항의 거대한 슬롯머신 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유념해 보아야 할 곳은, 가장 선한 등장인물인 닥터 류의 시원의 장소, 사람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해 있던 ‘사람을 위한 약초’가 많은 차오산의 동굴. 서양 의술을 전공한 양의이지만 중국 전래 한방의 약초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는 닥터 류는, 훗날 웨이보의 아내 샤오위안이 지리 교사로 부임하는 이상향 또는 거의 이상향인 소도시 차오현을 유토피아로 만든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데, 그의 시원의 장소인 차오산의 동굴이 작품의 뒤로 가면 아편 밀매를 하는 건달이자 아쓰의 애인이 특별 통행증을 갖고 횡행하는, 더러운 오수가 흐르는 미로 같은 지하도와 혹시 관련이 있을까? 닥터 류의 차오산 동굴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초로 차 있는 반면, 아편 판매자의 하수구를 통해서는 사람을 환희와 중독으로 이끄는 아편이 이동하는 장소이다. ‘동굴’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장용학이 쓴 <원형의 전설>에서 마담 빠타플라이 이지야李芝夜의 이복 오라버니 이장李章이 친아버지와 죽음의 담판을 벌이는 고향집 뒷산의 사적 감옥, 동시에 근친상간의 원죄의 동굴을 연상한다. 찬쉐의 동굴 또는 하수도는 분명 실존이나 원죄의 동굴은 아니고, 치유 혹은 아편(이게 무엇을 위한 메타포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의 동굴과 이동 통로일 터인데 그게 도대체 뭘까? 이럴 때 흔한 역자해설이라도 있으면 커닝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없고, 거 참, 아쉽게 됐다.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얼핏 보면 처음엔 그런 거 같지만 육체적 사랑의 이야기도 아니다. 육체적 사랑을 기대하시면 차라리 <격정세계>를 읽으시라. 근데 신기한 것이 작품이 한 1백 페이지를 넘어가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을 헤매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도 하지, 계속 따라 읽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대개 이럴 때 책 읽기에 지극한 권태가 생겨 급기야 때려 치우게 되지만 찬쉐가 특별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지금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감을 못 잡아도 기꺼이 따라 읽게 된다는 거. 심지어 지루하지도 않다는 거. 비록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어가면 된다. 확실하게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기화한 드라이아이스 흰 연기로 일종의 형태를 만들 듯 비록 애매하지만 독자들 나름대로 한 형상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상징, 메타포, 초현실주의를 기껏해야 더듬었을 뿐인데 이 정도로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신세기 사랑 이야기>가 대박이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별점으로 5별을 주지 못하는 이유로 이 정도 변명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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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9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김숨, <잃어버린 사람>
화요일. 존 웹스터, <하얀 악마>
목요일. 조지 손더스, <12월 10일>
금요일. 존 스타인벡, <달콤한 목요일>

그레이스 2024-04-19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토론했는데, 발자크와 찬쉐의 엄청난 간극과 온도차때문에 어질!합니다. ㅋ

Falstaff 2024-04-19 18:43   좋아요 0 | URL
<골짜기의 백합> 재미있잖아요. ㅎㅎㅎ
찬쉐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곧바로 이어 읽으면 나름대로 묘미가 있을 거 같기도 합니다. ^^
 
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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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만 가지고 따지자. 나도 마음 같으면 별 두 개 주고 싶은 식민주의적 유럽 백인종들의 난리굿이지만, I, C, 재미있어도 보통 재미있어야지. 오르부아르부터 쭉 읽은 독자들은 틀림없이 뒤통수 맞을 듯. 그러니까 걍 재미로만 따지자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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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4-18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르메트르… 지독한 페이지터너… 뒤통수라니까… 안되겟네요… 일단 이 시리즈 3권 먼저 챙겨오겠습니다… (한쪽 발로 도서관 행차 중)

Falstaff 2024-04-18 19:2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오르부아르>부터 차근차근 읽으면 더 재미날 겁니다.
근데 지금은 느므느므 재미있어서 열광하지만 몇 달 안 가서 그런 책이 있었지... 하는 수준으로 내려 가리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기도 합니다. <오르부아르>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디노 부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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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는 디노 부차티를 소설가, 단편소설작가, 화가, 시인, 밀라노의 신문 기자로 적었다. 작곡가 루치아노 카일리를 위하여 네 편의 오페라 리브레토를 썼고 희곡도 한 편 썼으며 동화책 <곰들이…>도 출간했다. 아오, 도서관에서 책 대출하면서 위키피디아로 작가 검색도 해보지 않고 상호대차 신청하는 불민한 독자가 세상에 나 하나 아니지? 위키피디아에 분명히 쓰여 있다. He wrote a children's book <La famosa invasione degli orsi in Sicilia>. 이게 동화책이랴, 동화책. 이래봬도 내가 동화책도 읽는다. 다만 삽화가 많이 들어가는 옛날 이야기 식의 초등 저학년 수준까지 내려가지는 못하고, 초등 중상 학년의 동화 정도는 즐겁게 읽는다. 

  뭐 솔직히 말해, 아무리 동화책이라도 디노 부차티가 썼다는 이유 하나로 도서관에서 대여한다는 조건이면 언젠가는 빌려 읽겠지만. 그 정도로 <타타르인의 사막>을 기가 막히게 읽었다. 아직 읽지 않은 분 계시면 <타타르인의 사막>, 꼭 읽어 보시라 권한다. 해설까지 딱 3백쪽, 분량도 적당하니 부담 갖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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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8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타타르인의 사막> 영업글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18 16:26   좋아요 0 | URL
빠진 한 가지는
아, 티가 났구나....

새파랑 2024-04-18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타르인의 사막 너무 좋았습니다 ㅜㅜ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Falstaff 2024-04-18 16:27   좋아요 1 | URL
˝나만의 명작˝인 줄 알았더니 많은 분들이 좋아하셔서 오히려 고마웠던 작품입니다. ^^
 
타니오스의 바위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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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르칸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읽기도 전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 이번에는 페르시아와 부하라,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광야 대신, 해변을 끼고 곧바로 산맥이 병풍처럼 들어선 레바논의 산악지대, 작가 아민 말루프의 고향이기도 한 크파리야브다를 배경으로 했다. 저 산맥 사이로 아슴푸레 바다가 보이는 산골 동네 크파리야부다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유명한 바위가 많았다. 군함바위, 곰머리 바위, 매복 바위, 장벽 바위, 흡혈귀의 젖가슴 바위라고도 불리는 쌍둥이 바위, 염탐 바위 등. 이 가운데 왕좌 형상을 한 위용이 넘치는 바위가 있었는데, 많은 이들의 엉덩이에 닳고 닳아서 움푹 파이고, 높고 반듯한 등받이와 양쪽에 팔걸이까지 갖추고 있는 바위가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타니오스의 바위”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짓궂은 개구쟁이라 하더라도 전설처럼 전해오는 미신 때문에 가까이 가는 아이들이 없었다. 저 오랜 옛날 ‘타니오스 키크’라는 사람이 이 바위에 가서 앉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게 됐다는 거였다. ‘타니오스’는 사람의 이름이고, ‘키크’는 별명이 분명하다. 예전엔 자주 먹기 힘들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흔하게 식탁에 오르는 키크는, 주성분인 응고시킨 우유와 밀을 걸쭉하게 끓인 시큼한 맛의 스프로 크파리야브다 마을의 오랜 전통 음식이다.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에 자기 이름을 올릴 정도의 인물한테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크파리야브다가 비록 천주교를 믿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이슬람 문화권에 속했음에도 남자에게 여성이 만드는 음식의 별명은 지독하게 수치스러울 수 있음에야.

  크파리야브다가 고향인 화자는 바위의 내력 또는 전설을 알기 위하여 고향을 방문한다. 이 지방 역사에 열정적인 전직 교사이며 동시대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96세의 게브라이엘 어르신을 방문해 노인 역시 구전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타니오스의 이야기를 얻어듣는다. 화자는 노인의 이야기에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찾은 엘리아스 수도사의 <산악지대 연대기>라는 제목의 오래된 책을 어렵사리 구하고, 같은 시기 산악 지역에서 사흘라인 영국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던 제러미 스톨튼 교장의 일지, 편지 등 기타 기록물을 학교 자료실에서 얻어, 이 세가지를 조합하여 그동안 변경지역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던 타니오스 이야기를 되살려낸다.


  19세기 초, 그러니까 1820년대의 레바논 산악지역 크파리야브다 마을은 영주 샤이크가 3백여 가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사실 마을의 모든 땅은 샤이크의 소유이며 거주민들은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소작인 정도였겠지만 봉건적 사고방식에 따라 샤이크는 자기 영지 내에서 벌어진 사건, 주민들 간의 갈등 같은 것을 해결하는 판사 역할도 겸했다. 작품에서 ‘가신’이라고 일컫는 주민들은 샤이크를 존경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었으며, 샤이크는 어떤 상황이든지 주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니, 여지없는 봉건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샤이크 위로는 산간지역을 통치하는 ‘아미르’가 있으며, 그 위로 트리폴리, 다마스, 사이다, 아크레 지방의 총독인 파샤가 있다. 더 위로는 샤이크조차도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던 군주,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의 술탄이 오랜 세월 레바논 지역까지 통치했다.

  나라 밖을 보면, 19세기 들어와 오리엔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뚫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시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렸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없었으니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을 견제하고 싶어하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권에 속했던 리비아를 실질 통치하기 위하여 공을 들인다. 영국 입장에서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레바논 지역에서 이집트 세력을 축출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하려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병력보다 먼저 침투하는 것이 교회와 학교. 영국은 왕국에 충성하는 목사 부부를 카파리야브다의 상위 지역인 사흘라인에 보내 천주교 영향권에 개신교와 영국에 우호적인 엘리트 요원을 확보하려 한다.

  작품의 주요 무대인 크파리야브다의 샤이크도 다른 샤이크와 마찬가지로 자기 말에 거역하는 주민한테 귀싸대기를 아끼지 않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주민들에게 손해가 가지 않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산악지역 전체를 관장하는 아미르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려 하면 적당한 뇌물을 써서 세금을 깎든지, 일단 지불 기한을 최대로 늦추고 어영부영 납부하지 않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당시엔 전쟁이 흔해서 징병을 해도, 크파리야브다의 샤이크는 절대로 주민들을 개별 입대시키지 않고 명예로운 자진 입대 형식을 취해 영지 주민들이 단체로 하나의 단위, 소대면 소대, 중대면 중대를 이루어 출전함으로써, 부상병이나 전사자를 전장에 그냥 버리고 온 적도 없고, 가족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는 일도 없었다. 이런 샤이크를 주민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서 하나의 안타까운 결점이 있었으니 여자를 유난히 밝히는 몹쓸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샤이크에 관해 소문이 나기를, 여자란 여자는 모두 탐을 내며(진실), 밤마다 영지의 여자를 농락한다고(과장) 했다. 마을의 영주이니 외부에서 손님도 자주 오고, 그때마다 중동지역 특유의 손님맞이로 음식 깨나 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는 마을의 여자들을 성으로 불러와 어떤 어떤 요리를 하라고 할 수 있었고, 이때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눈에 띄면 낮이고 밤이고 처소로 불러들였다.

  타니오스의 어머니 라미아는 아름다움을 십자가처럼 지니고 다녔다. 무리 속에 숨에도 후광이 빛나는 듯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2층 객석에 한 남자가 떴을 뿐인데 아예 그 남자가 선 일대 전체가 환하게 빛나는 듯한 것도 봤다.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음에도. 하여튼 타니오스의 어머니 라미아가 그런 족속이었다. 라미아? 스펠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마리아’하고 비슷하다. 크파리야브다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이다. 라미아는 샤이크의 집사, 그것도 충성스러운 집사 게리오스의 아내로 성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다. 게리오스는 집사 말고도 비서, 시종, 서기, 회계사, 친구를 겸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샤이크의 말이나 지시를 어겨본 적이 없다. 그런 라미아가 드디어 샤이크의 눈에 들어온 거다. 샤이크가 라미아에게 키크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어떻게 하다 라미아가 샤이크의 방에 든 것까지는 확실한데, 이후 라미아가 임신을 해서 아홉 달이 지나 타니오스를 낳은 것도 분명하지만 그게 정말 샤이크가 키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가 만든 아이인지, 아니면 남편 게리오스의 아들인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똑부러지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제 타니오스가 “타니오스 키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시겠지? 타니오스는 평생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신이 정체성에 관해 얼마나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을까? 짠하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위에서 오스만 제국과 영국, 이집트와 프랑스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반면에 리비아, 이 가운데 작품의 무대로 국한하면, 크파리야브다 마을과 샤이크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서는 한편, 상위의 아미르는 새로운 실력자인 이집트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당연히 크파리야브다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전에 샤이크의 집사를 하다가 재산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후 양잠업으로 돈을 벌어 귀향한 루코즈와 연합해 샤이크를 압박한다. 어머니가 키크를 만들러 간 김에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타니오스가 점점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루코즈와 좋은 관계를 맺어 그를 지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루코즈의 외동딸 아스마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처음엔 루코즈도 타니오스를 사위감으로 생각했지만, 얘기가 길어지니 결론만 말해서 나중엔 안면몰수하고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때 아버지 게리오스가 혼인문제를 가운데서 틀어버린 천주교 총대주교를 나중에 ‘매복바위’라고 불릴 바위 뒤에 숨어 지나가던 총대주교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타니오스와 아버지 게리오스는 이 일로 레바논을 탈출해서 키프로스로 몸을 숨기는데, 총대주교가 암살당한 건 역사적 사실이라고 작가의 덧붙이는 말에 쓰여 있다. 게리오스라고 하는 샤이크의 집사가 쐈는지, 아니면 열강 싸움에 레바논 지역간 다툼의 와중에 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총대주교가 암살당한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순전히 상상으로 지어낸 것만은 아닌 픽션”이라 한다.

  이렇게 <타니오스의 바위>는 열강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레바논의 근대사를 깔고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보태면서 당시의 사회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에 소개한 스토리는 작품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재미있고 유익한 작품이다.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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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6 0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르칸트>를 이렇게 쓰지, 염병한다고…….
 
트리스탄 대산세계문학총서 186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차윤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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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앞 이야기, 그러니까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에 트리스탄이 출생하게 된 것부터 이졸데를 만나 마르케 왕의 비로 배에 태워 오게 된 사연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대본을 따라가면 이졸데 삼촌의 머리뼈에 박힌 칼의 조각도 나오고,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은 트리스탄을 이졸데가 치료해주었다는 것도 나오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 줄도 몰랐다. 또 고전소설을 읽으면 트리스탄이 용을 죽이기도 했다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제 책을 다 읽어 눈이 훤하게 뜨인다. 그래? 트리스탄이 용도 죽였다고? 그거 참 별일이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역시 여러 판본이 있는 모양이다. 역자 해설에는 1160년대에 토마스 폰 브리타니아가 고대 프랑스어로 앵글로 노르만 버전 <트리스탄>을 썼고 이것을 오늘 읽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큰 줄거리는 그대로 사용하되 작품의 중요한 전환을 이루는 장면에 중세 기독교 극성기엔 금기였던 사기결혼, 마법의 약물, 혼외정사, 불륜 같은, 이것들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기 힘든 내용을 과감하게 삽입해 다시 썼다고 한다. 여기에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후원자일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는 디트리히 백작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서, 피헌정자에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해 사랑과 (사랑의 동의어이기도 한)고통, 질투, 시기, 음모 같은 현상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글씨체를 달리 해,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물론 이 작품이 나오고 8백년 이상이 지나 마이스터 고트프리트가 주장하는 내용의 7할은 공자왈, 맹자왈, 깨진 기와를 덮은 이끼 수준이라 읽기에 진력이 나기도 한다. 하여간 그렇다.


  작가이면서 화자이기도 한 고트프리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를 “세상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랑의 열망을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물론 작품이 나온 13세기 초가 마법의 시대라서 지금처럼 앞 뒤 따져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건 무리겠지만, 세상에 사랑의 묘약이 어디 있니? 두 남녀가 눈이 맞아 결혼하러 가는 길에 사고 치고 적당히 둘러댈 말이 없으니 사랑의 묘약을 마셔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죄 없다, 발뺌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사랑으로 인한 고뇌, 마음의 환희로 인한 상사병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높은 평가와 오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거란 의견에는 동의한다. 사랑? 당시에 휴대전화가 있나, 우표만 붙이면 날아가 소식을 전해주는 편지가 있나? 그저 연락이 두절되면 다시 이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이 바로 기다림이란 건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먼저 파르메니에의 영주 리발린에 대하여 알아보자.

  파르메니에는 브리타니아 지방에 있다. 여기서 주목. ‘브리타니아’라니까 고대 잉글랜드라고 생각하시지? 프랑스 북서부 해안지역에 브르타뉴도 있다. 책에서도 브리타니아가 지금의 잉글랜드 섬을 말하는 브리타니아인지, 프랑스 브르타뉴인지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지만, 영국 남서부 끝에 위치한 콘월과 파르메니에를 왕복하는 수단이 배이며, 후에 독일 땅에서 있을 예정인 전쟁에 배를 타지 않고 참전하는 걸로 보아 프랑스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거 같다. 이 파르메니에의 영주 리발린으로 말하자면 혈통은 왕처럼 고귀하고 나라는 제후령 못지 않았으며,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이자 기사도의 모범이라, 통치자와 기사의 덕목에 있어 일족의 자랑이자 나라의 희망으로 칭송받았다.

  당연히 파르메니에와 리발린도 우환이 하나 있으니, 모르간을 영주로 하는 호전적인 이웃 영지가 틈이 날 때마다 경계를 넘어 노략질을 일삼고 변경지역에 공물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동안 두 영주가 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했지만 승부를 가리지 않고 두 진영 다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이었다. 이제 두 진영의 국력을 모두 쏟아 일대 회전을 벌였으나 역시 둘 다 쌍코피만 줄줄 흐른 채 서로 얻는 것이 없어 불만이지만 화친까지는 아니고 적어도 일정 기간 휴전에 돌입하기로 서약했다.

  젊은 영주 리발린은 피가 끓어 도무지 영지 안에 틀어박힐 체질이 아니어서 나라와 백성의 “신의를 간직한” 충실한 총대장 로알 리 포이테난트에게 영지의 경영을 부탁하고 예법과 기사도를 배우기 위하여 마르케 궁전으로 배를 타고 출발한다. 콘월과 잉글랜드를 다스리고 있는 젊은 왕 마르케는 아서 왕의 탄생지이기도 한 틴타욜에 머물고 있어 그곳에 도착해 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 리발린. 5월이 오자 왕은 봄을 맞아 4주에 달하는 큰 축제를 열어 잉글랜드의 모든 기사가 매혹적인 숙녀들을 대동하고 콘월에 집결한다. 여기서 리발린은 왕의 동생, ‘하얀 꽃’ ‘백합’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블란셰플루어를 소개받고 눈길을 교환하더니 즉각 자신이 블란셰플루어를, 그이가 자신 리발린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방문객이며 기사인 리발린이 왕의 여동생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할 기회도 없어, 진정한 사랑이 그토록 아픈 고통인 줄 몰랐다.

  축제가 끝나자 마르케 왕의 가장 강력한 적이 콘월 땅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선에서 들려왔다. 마르케는 즉각 전군을 소집했고, 리발린 역시, 당연하게 자발적으로 참전을 희망해 은빛 갑옷을 받쳐 입고 높은 말 위에서 장창을 꼬나 쥐고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적들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다가 드디어 적장을 단 칼에 베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신 역시 옆구리를 창에 찔리는 중상을 입어 실려오는 처지.

  상처가 곪아 악취가 진동하고 정신이 혼미해 북망산을 헤매기를 몇 주. 여기에 고통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 우울하게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된 또 다른 청춘 하나가 있었으니 블란셰플루어. 이 젊은 여성은 비단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거지 차림을 한 후, 자기를 여의사라 거짓 증명하고 리발린의 죽음의 침상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뭐 치료를 할 줄 알아야지. 치료를 하기는 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는:

  “연인을 팔에 안고 자기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입술이 그 안에서 사랑의 욕망과 힘이 불타오를 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키스를 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녀의 입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술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서, 그는 그 멋진 여인을 반쯤 죽어가는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욕망이 채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사랑스러운 여인은 그의 아이를 배었다.”

  크. 죽어가는 와중에도 했네, 했어. 작품의 시기가 13세기 초. 1210년경. 이 당시에 귀족계급에서 혼전임신은 전혀 용인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처녀가 아닌 여성이 결혼하는 것도 당사자의 명예에 심각한 스크래치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과감하게 혼전관계에 이은 혼전임신을 나름대로의 러브씬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비록 오래 걸리지 않았던 섹스지만 이걸로 리발린은 기사회생하여 차츰 건강을 회복한다. 그게 건강에 좋다니까, 글쎄.

  원래 주인공한테는 오래 쉴 시간이 없는 법이라 이제 상처도 회복하고 좀 즐길 만하니까 조국 페르메니에에서 전갈이 오기를 모르간이 다시 쳐들어왔단다. 허겁지겁 다시 갑옷과 무기를 챙겨 귀국 배에 오르려니 블란셰플루어가 득달같이 달려와, 여보 리발린 경, 나는 어쩌라고 혼자 튀십니까? 그깟 명예고 뭐고 간에 문제가 아니라 이 몸에 있을 게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한대요? 우리의 리발린은 두 번 이야기할 거 없이 블란셰플루어를 옆구리에 끼고 야밤에 배에 올라 출항시켜버린다.

  중세 기사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자주 출생과 동시에 큰 비극을 당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지크프리트는 엄마 지클린데가 임신하고 하루, 아니, 몇 시간 지나 아빠 지크문트가 훈딩의 칼에 맞아 죽는다. 그것도 모자라 지클린데도 지크프리트를 낳다가 산고로 죽어버려 악당 난장이 미메가 데려다 키운다. 이 작품에서도 전례를 따라 리발린은 모르간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장에서 죽음을 당해 방패 위에 시신을 올려 실어오고, 블란셰플루어는 지클린데처럼 아들을 낳은 직후에 숨이 넘어간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우리의 주인공 트리스탄. 그래도 다행스럽게 리발린에게는 충성스러운 대장군 루알 리 포이테난트가 있어서, 장군은 트리스탄을 자신의 두 친아들보다 훨씬 더 공을 들여 세상의 모든 언어, 음악과 악기, 노래, 무공, 말타기를 익히게 해 당대 최고의 기사로 만드는 데 성공해, 이 아이가 자라 스무살이 넘어 드디어 외삼촌 마르케 왕을 찾아가 우리가 아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설을 만들어가게 한다.

  이졸데 관련해서는 이야기를 아껴두겠다. 혹시 당신도 읽을 지 모르니까.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하지만 당신까지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시원하게 풀 수 있는 기회였던 반면 당신한테는 서양 옛이야기 한 편일 수도 있으니. 그런데 13세기 초 소설에서 이 정도면 엽기 포르노 취급을 당해 종교재판 대상 아니었을까? 걱정 마시라.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생을 마감했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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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5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다 죽어가면서도 ㅋㅋㅋㅋ그걸하다니 ㅋㅋㅋㅋ 아놔 ㅋㅋㅋ 그리고 그 한방에 애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의사쌤 치료법 아주 신통방통하구먼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15 15:34   좋아요 0 | URL
글쎄 그게 몸에 무척 좋은 거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