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전상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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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운 이름이다. 전상국. 소싯적에 좋아했던 작가이다.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외등> 같은 작품들. 재미난 이야기도 들었다. 사실 소설 쓰는 사람들이 가슴 속에 맺힌 게 많다고 하는데 이 ‘맺힌 것’이 도가 지나쳐 “열등감”으로 진화해, 이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해 독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지금은 아니고, 오래 전에는 많았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에 ‘키’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 사이의 길이에 따라 열등감이 폭발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간혹 이 길이 말고 다른 길이 문제로 열폭하는 인간도 꽤 있다.) 주로 키가 작은 사람들이 키 큰 것들에 대한 반발로 독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 나온 말이,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거. 소설판에서는 주로 최씨가 많았다. 최일남과 최인호 등. 근데 웃기게도 전상국도 이 키에 콤플렉스를 느껴 대학 시절에 연애도 별로 안 하고 소설만 죽자사자 썼던 모양인데, 이이의 경우에는 자신의 큰 키에 그렇게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상국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전상국에게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술꾼한테 들은 거다. 그러니 정말이라고 내세우지는 않겠지만 웃기기는 좀 웃기다. 이이가 예전에 교육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봤다. 키가 크긴 하다. 1940년생이니 지금 여든다섯, 그 시절 키로 생각하면. 우리집 꼰대는 전상국한테 막내 삼촌 뻘이어도 180cm이었건만 전혀 열등감 없이 살다 가시던데 말이지.

  이 양반이 강원도 홍천 사람이다. 공부 잘해서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유학해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1차 대학 시험에 떨어져 2차로 경희대학 국문과를 다녔다. 짐작하건데 이이가 경희대를 간 이유가 모르긴 해도, 경희대학이 성균관대학보다 성동역에서 더 가까웠기 때문일 거 같다. 조금이라도 집에 더 빨리 가기 위하여. 성동역이 어딘지 모르시지? 당시 전차 종점이 있었고, 경춘선 열차가 출발했던 역으로 북악산 기슭 정릉에서 발원하는 ‘쎄느강’변의 제기동에 있었다. 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황소가 오줌누는 장면이 일품이었는데.


  소설집 《굿》은, 작가 전상국 스스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소설집이라고 밝혔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중단편은 그의 나이 75세부터 82세까지의 작업이다. 말 그대로 노익장의 결실. “작가의 말”을 통해 그는 작가로 살면서 “전업작가”가 아니었던 것에 ‘열없음’을 가지고 살았던 듯하다. 사실 아무것도 아님에도. 마치 키가 큰 것에 열등감을 느껴 더 열심히 글을 쓴 것과 비슷하게, 마지막 소설집에 실릴 작품을 쓰면서 전업작가가 아닌 열없음을 지우려 글 쓰는 일에 더욱 미쳤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그의 70대. 미칠 정도로 글을 써서 기어이 백조의 노래를 마지막 소설집으로 상재했구나 싶었다. 노장이 그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쓴 작품들인 줄 모르고, 거 참 노인네가 여전하네, 이런 심정으로 읽고 만 독자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도서관 신작 도서 전시대에 놓인 책을 보고, 작가가 전상국이라서, 예전에 발표했던 작품 가운데 몇 편을 묶어 책을 냈겠지, 제멋대로 생각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 이래봬도 내가 전상국은 좀 읽었거든, 하면서.


  그렇다고 이이의 모든 작품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 세 편의 단편소설. <춘천 아리랑>, <봄봄하다>, <가을하다>는 각각 김유정의 <동백꽃>과 <봄봄>에, 저자의 스승이었던 황순원의 <소나기>에 헌정하는 작품으로, 각기 원작의 뒷이야기, 그러니까 후일담이다.

  <동백꽃>과 <봄봄>의 여자 주인공은 우연히도 같다. 점순이. 근데 <동백꽃>의 점순이는 마름의 딸이라 절대로 소작인의 아들인 ‘나’한테 시집올 수 없어서 서울은 아니고 남양주의 그럴싸한 집으로 시집가고, <봄봄>의 점순이는 데릴사위하고 어떻게 될 듯한데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 얘기할 수 없어서, 나도 안타깝다. 단편소설에서 더 힌트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터.

  <소나기>에 헌정한 <가을하다>는? 입 닦겠다. 직접 읽어보시라고.

  이 세 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원작이 셋 다 말 그대로 불후의 명작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쓰여진 시대에 쓰였기 때문에 불후의 명작인 것이지, 지금 시대에 다시 나올 필요도 없고, 이렇게까지 말하면 과하게 매정하겠지만, 나와서도 안 되는 거 아냐? 그런데 나왔다. 전상국이 지금 김유정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어서 그랬을까? 쓰는 김에 평소 존경했던 은사 황순원까지 슬쩍 끼워 넣어서?

  게다가 <봄봄하다>와 <가을하다>에서 만든 단어 “봄봄하다”와 “가을하다”가 과하게 많이 나오는 느낌. “봄봄하다”와 “가을하다”의 어감이 정말 좋다. 그래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런 고급의 단어는 진짜로 가끔, 아주 드물게 나와야지, 과하게 자주 쓰면 오히려 단어가 독자에게 선물하는 신선과 청량, 신비스러움이 천하게 보이고 느껴질 위험이 있다는 거다.


  나머지 여섯 작품에 관해서 내 주제에 어떻더라, 말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도 뚫린 입이고, 달린 손이니 자판 좀 더 두드려보자.)

  이이가 1940년생. 열 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그해 여름에서 가을까지 같은 마을 사람들이 바로 어제까지 한 두레에서 모내고, 피뽑고, 추수하던 사이에서 오늘 밤엔 서로 죽이고 죽는, 같은 하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사이로 변하는 걸, 어린 시절에 두 눈으로 보았던 세대이다. 대개 이 시절에 겪은 일, 본 책, 들은 노래는 평생 간다. 딱 이때 전상국과 비슷한 연배는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야수로 변할 수 있는지, 사람이 사람을 찔러 죽이고, 생으로 땅에 묻어 죽이고, 대나무로 꿰어 죽이는지 보고 만 것이었다. 이건 이들의 평생에 걸친 상처가 될 수밖에. 이 가운데 불행하게도 작가가 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상처를 드러내고, 덧나고, 다시 소독약을 바르며 세월을 죽였으리라.

  젊은 시절 책 좀 읽을 때, 우리나라에 한국전쟁이 없었어도 소설가들은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이야기거리가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전은 벌써 30년, 4.19가 불과 20년 전. 근데 각 사건을 다룬 작품의 양과 질은 아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많았다. 그땐 몰랐지. 알아도 심각하게 알지는 않았던 거 같다. 혁명은 절대로 전쟁만큼은 참혹하지도 않고, 살육이 넘치지도 않고, 비극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이 시절을 견딘 작가들은 결코 내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팔자를 타고 났다.


  전상국도 생애 마지막 소설집 《굿》에서도 한국전쟁에 관한 상처는 여전하다. 다만 이제 상처를 극복하자는 의지가 눈에 띈다. 유일한 중편소설이자 표제작인 <굿>이 대표적이다. 강원도 산골 깡촌 부귀리에서 무려 67년만에 , 67년 전에 부귀리에서 동네 사람들이 쇠스랑으로 찔러 죽인 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최용호가 돌아오면서 작품이 시작한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예수야? 아니다. 그때 그렇게 죽은 최용호의 아들 최준성이 언젠가는 부귀촌에 묻혀 있는 아버지 최용호의 유골을 파 좋은 자리에 정식으로 매장하고, 오랜 해원굿 한 판을 하기 위해 이름도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명을 해버렸던 거였다. 그리하여 최용호의 아들 최용호가 돌아왔다.

 해원解怨, 원통한 마음을 푼다고? 그렇다. 하지만 죽은 최용호가 그리도 원통하게 죽었나? 죽을 만큼의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최용호는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다른 건 다 건너뛰고, 백 살이 넘어 아직 살아 있는 장영팔의 아들을 인민군에 들여보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하고, 전쟁 터지기 바로 며칠 전에 휴가 나온 국방군 일등병 정대수를 잡아 당국에 넘겨 자작고개에서 재판 없이 살해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그저 포로로 잡혀 북으로 끌려갈 줄만 알았다.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던 시절. 죽은 최용호의 아들 최용호는 쇠스랑에 찔려 죽은 아버지와,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야반도주한 조부모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최용호에 의하여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대수의 유골까지 다 모아, 인근 주민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양지바른 곳에 다시 정식으로, 거창하게 매장함으로써 진정한 해원을 이루고자 한다. 아들 최용호가 굿의 주인이자 박수 무당이 되어.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작가의 연륜과 글을 써온 내력을 싹 무시하고 읽어봐도, 잘 쓴 중편이다. 한 거장이 스스로 인생의 마지막 작품집이라고 선언한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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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3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상국 작가의 마지막 소설집이군요! 전상국 소설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 작가보다 훨씬 좋았다는 인상입니다. 다만 한국전쟁을 겪은 작가들은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도 있어 좀 아타까운 느낌입니다.

Falstaff 2025-10-30 16:53   좋아요 0 | URL
저도 아휴, 얼마나 오랜만에 읽은 전상국인줄 모르겠네요. ㅎㅎㅎ 뭐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들은 나름대로 다들 진지하고 시대를 고민하고 있겠지요. 그렇게 믿습니다.
 
잃어버린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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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릭 모디아노.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때 문학동네 좋아서 난리났었다. 자기들이 모디아노의 책 몇 권에 대한 판권을 확보하고 있었거든. 나도 그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다. 그후 2년 터울로 <도라 부르더>와 <까트린 이야기>를 읽었는데, <까트린 이야기>를 덮고 ”이 세 작품으로 난 위대한 노벨상에 빛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라는 독후감을 남겼다. 이것이 2018년 봄.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25년 가을이 되었을 때, 나는 전에 결심한 것을 까맣게 잊고 다시 도서관 서가에서 모디아노의 책을 한 권 골랐다. <잃어버린 거리>. 역자 김화영이 놀랍게도 21쪽 분량의 ‘역자 해설’이 아닌 ‘옮긴이의 말’을 썼다. 1988년에 책세상에서 초판 출간한 것을 30년 후에 문학동네에서 다시 초판 출간했단다. 이거 초판이라 해도 되는 건가? 중판 아냐? 하여간 뭐, 문학동네에서 처음 찍은 건 맞으니 초판이라 했겠지. 독자가 웃건 말건.


  영국인 탐정 소설가 앰브로즈 가이즈가 샤를 드골 국제 공항에 내려 세관에서 입국심사를 받으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프랑스에는 20년 만에 온다. 앰브로즈 가이즈의 손에는 사자 두 마리가 금박으로 찍히 옅은 녹색의 여권이 들려 있지만, 20년 전에 파리를 떠날 당시 열네 살에 난생 처음 받은 프랑스공화국의 이름으로 발부 받았던 여권은 남색 표지였었다. 가이즈는 모국어인 프랑스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습관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모든 생각과 표현은 전부 영어로 한다. 아내도 영국인. 두 아이도 영국인. 며칠 후에 영국인 아내와 아이들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있는 아내의 언니/자매의 집으로 피서를 갈 예정이다. 가이즈는 파리에서 일본의 한 출판사와의 비즈니스, 계약 체결 때문에 이곳에 도착했다. 원래는 만나서 계약서에 서명하고, 선불금 수표를 건네 받은 바로 다음 날 바스크로 날아갈 생각이었다.

  7월. 파리의 7월. 호텔 지배인은 완전한 영국인으로 보이는 가이즈에게 영어로 인사를 하고, 혼자 파리에 온 것을 알아챈 다음에는 밤의 은밀하고 특별한 파리 경험을 원한다면 이곳으로 전화를 해보라고 “헤이우드”라는 상호가 달린 명함을 밤마다 권한다. 헤이우드. 가이즈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이름 가운데 하나.


  20년 전, 막 20세가 된 프랑스인 장 데케르는 피치못하게 영국으로 건너가 막막했다. 당시에 장은 문학이건 아니건 일단 먹고 사는 게 급해서 뭔가를,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생각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자신을 스타 작가로 만든 추리소설 <자비스> 시리즈라고 말했다.

  일본 출판사에서 계약 담당자인 요코 다쓰케에게 <자비스>의 사진 소설 시리즈 제작 판권, 이를 TV 연속극으로 제작하는 판권, 일본의 기미하라 연쇄점용 피규어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다쓰케가 물었다. 자신은 왜 일본인들이 가이즈의 책에 열광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가이즈도 동감한다. 다쓰케는 한 마디 더 했다. <자비스>는 문학이 아니고 심지어 문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란다. 가이즈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비스>를 쓰기 시작한 내력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딱 위에 쓴 것만.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프랑스 출생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파리에서 가장 멋진 쇼걸이었는데 영국에서 온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 만 원 건다.

  “프랑스에서는 왜 떠났어요?” 다쓰케가 묻는다.

  “인생이란 앞뒤로 이어진 여러 주기들의 연속이랄까요…” 자비스가 대답한다.

  20세에 프랑스를 떠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름을 바꾸고 추리소설을 써 성공한 작가가 20년이 흐른 후 이제는 완전한 외국인의 신분으로 파리에 도착해 완전히 변해버려 낯선 도시가 된 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 또는 추억에 잠긴다. “이걸 <파리에 온 자비스> 비슷한 제목으로 시리즈의 제9권으로 써보시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일본 독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자비스 또는 장 데케르는 대답한다.

  “이를 테면 작가 자신이 직접 쓴 예술가의 초상이군요. 만일 쓴다면 이번엔 프랑스 말로 쓸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굳게 악수하고, 떠난다. 계약 선불금 8만 파운드 수표를 끊어 건넨 요코 다쓰케는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갈 것이지만, 앰브로즈 가이즈 또는 장 데케르는 런던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비서에게 한 두 주 정도 파리에 더 머물겠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0세의 장 데케르는 파리의 젊은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읽힌다. 하여간 그때 겨울. 그는 오트사부아 지방에 있는 스키장에서 주머니에 딱 돌아갈 차비만 남을 때까지, 그래봐야 며칠 동안 휴가를 지내고 있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자신도 몰랐다니까, 스무살의 유럽인답게 집에서 독립을 했는데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못해서 떠돌고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모디아노는 거의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하늘도 도와주지 않아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지경이라 눈에 띄는 아무 호텔에 몸을 피해 들어갔는데, 폭풍까지 불어 전선이 끊어져 손전등으로 조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형 가방을 포함한 열 개의 트렁크를 파리 자기 집까지 운송해줄 방법을 찾아달라는 금발의 여성. 블랭 부인. 호텔의 사장은 자기가 호텔을 절대로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파리까지 짐을 옮길 상황이 되지 않고, 누가 도와줄 사람도 따로 없지만, 한편으로 블랭 부인이 이 호텔의 소유주라서 난감한 지경으로 빠지고 말았다.

  장이 부인을 한 눈에 알아봤다. 짧은 군복무 시절 부상을 당해 3개월간 입원해 있을 때 병원에서 본 낡은 잡지의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라는 기사에 남편과 대리 경주마부와 함께 찍은 사진의 그 부인이었다. 남편 뤼시앵 블랭은 가히 미다스의 손을 가진 것처럼 돈을 버는 데 천부의 자질을 드러내 크고 큰 부를 이루었지만, 재주 있는 사람답게 아름다운 아내 카르멘 블랭을 혼자 남기고 일찍 죽었다. 장의 눈 앞에 있는 여성이 바로 과부 카르멘 블랭 여사.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로 돌아갈 곳도 딱히 없는 상태였던 장 데케르는 자신이 먼저 접근해 직접 파리의 집까지 모든 트렁크를 실수 없이 운반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를 본 블랭 여사는 장의 모습에서 결코 얼굴이 비슷하지는 않지만 베르나르 랄프 파르메르, 카르멘이 1943년에 이이가 소유한 영업소에서 무희로 일하고 있을 때부터 1년간 연인이었고, 자신의 몸에 들어온 첫 남자인 파르메르를 닮아 혹시 그의 아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자기 짐을 맡기고 자신은 가까운 비행장에서 스위스로 향한다. 나도 내일 파리에 도착할 거예요, 라는 말만 남긴 채.

  이렇게 장 데케르는 이틀 동안 호텔 수하물 배달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고, 수하물 배달원이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을 그때는 몰랐다.


  돈이 많은 만큼, 정도 많고 친구도 많고, 애인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매일 유흥업소에서의 만찬과 금준미주를 멈출 줄 모르는 카르멘 블랭. 장 데케르는 카르멘이 곤란한 지경에 나타나 스스로 봉사를 해주었으며, 첫 애인 비슷한 분위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카르멘은 그를 자기 친구들과 한 팀을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친구를 만나는 장. 하지만 거의 아버지 뻘이다. 모두 카르멘 블랭과는 같이 잔 것처럼 보인다. 장보다 열일고여덟 살 더 먹은 카르멘. 그러니 나이 많은 남자들과 혼인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남자들은 아버지뻘도 큰아버지뻘일 수도 있었을 듯하다.

  이 가운데 훗날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이름으로 <자비스>라는 시리즈를 읽고 그에게 편지를 보낸 인물이 있었다. 로크루아. 자기가 프랑스를 떠나야 할 시점에 잠시라도 숨겨주고, 영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마지막 편의를 제공한 고마운 사람.

  이제 파리에 두 주 정도 더 머물기로 작정한 앰브로즈 가이즈는 전화번호부에서 로크루아의 이름을 찾아, 다이얼을 돌린다.

  “여보세요? 저 죄송하지만 기타 바이에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여자가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는 듯이 쉰 목소리로 받는다. “전데요.”

  “장 데케르예요. 아마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장 데케르라고요? 그러면 앰브로즈 가이즈란 말예요?”

  기타 바이에. 예전 로크루아의 비서. 장이 파리를 떠난 후에 결혼한 것이겠지.

  꼼꼼하게 장 데케르와 앰브로즈 가이즈를 챙겨온 로크루아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많은 수집자료에 당연히 장 데케르에 관한 것도 있다. 심지어 서류철 표지에 로크루아 특유의 큼직한 글씨로 “가능하다면 장 데케르에게”라고 쓰인 것도 있었다. 은인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


  앰브로즈 가이즈 또는 장 데케르는 로크루아의 서류를 들쳐보고, 서류 속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먹는다.

  자신이 파리를 떠나기 전까지 로크루아의 자료와 앰브로즈 가이즈가 이방인으로 파리에 도착해, 장 데케르가 파리를 떠날 때까지의 과정을 한 편의 프랑스어 소설로 쓰겠다고. 그리고 정말로 썼다. 이렇게 쓰인 소설이 <잃어버린 거리>다.

  이게 웬 일? 내가 여태 읽은 모리아노하고 완전 다르다. 심지어 재미도 있으려고 한다. 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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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0-29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모디아노라니… 믿기 어렵지만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0-29 15:36   좋아요 1 | URL
아오... 팍 가보셔요!

꼬마요정 2025-10-29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저도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0-29 15:37   좋아요 1 | URL
넵! 근데 요정님 독서 경향으로 봐서는 좀 미지근할 수도 있을 듯하네요. ㅋㅋ

yamoo 2025-10-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에이~
저는 믿지 않겠습니다..ㅎㅎ
그래도 모디아노 소설은 기본 평타 이상은 치니 리스트에 넣고 읽어 보겠습니다. 모디아노 몇 권을 읽어 봤는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비슷한 작품들만 있어 좀 거시기 했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디아노라니...저도 걍 읽어 볼럅니다~~ㅎㅎ

Falstaff 2025-10-29 15:38   좋아요 0 | URL
저도 상점들 거리 부터 모디아노는 팔자에 맞지 않는 거 같다고 생각했습지요. ㅎㅎ
함 읽어보셔도 좋을 듯한데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ㅎㅎ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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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데 그뤼텐. 노르웨이 남서쪽에 있는 하르당에르 피오르 지역의 작은 도시 오다에서 1960년에 출생한 쥐띠 남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고 노르웨이에서 작가가 받고 싶어하는 문학상은 싹 받았다는 것만 위키피디아에 적혀 있다.


  자신의 출생지가 피오르 지역. 피오르가 뭔지 아시지? 옛 시절에 큰 빙하 지역이었다가 빙하가 녹으면서 얼음이 산의 측면을 깎아 경사가 급한 깊은 바다를 만든 곳. 그래서 이이의 2023년 작품,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의 주인공 닐스 비크의 직업도 피오르 지역 이쪽과 저쪽을 왕복하며 사람과 재화를 운반해주는 페리 선 MB 마르타 호의 선장이다.

  제목이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이니까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오늘 닐스 비크가 죽을 것임을 알고 시작한다. 사고? 북유럽 소설에서 흔해 빠진 피살? 아니다. 닐스 비크의 두 딸이 벌써 쉰 살은 된 것 같이 보이는 노인이다. 자기 페리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아내 마르타 역시 오래 전에 뇌졸중에 시달리다 세상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 닐스는 자신이 이제 다 살았다는 것, 그래서 오늘 죽을 것임을 미리 알고 전쟁 직후에 구입해 평생 함께 한 페리를 타고, 오랜 세월 누비고 다닌 피오르 위에서 마지막 숨을 쉬려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이 착하면 죽음도 미리 언질을 주어 자기 생을 잘 마감할 수 있게 해주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닐스 비크는, 내가 여태 살면서 한 명도 만나본 적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순박하고, 정직하고, 곧은, 이런 미덕을 다 합쳐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이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할 정도로.


  MB 마르타호. 그냥 마르타라고 부르는 낡은 페리. 길이 36피트, 너비 9피트의 흰색 참나무 배를 사서, 손재주도 좋은 닐스 본인이 12마력 엔진을 장착한 위풍당당한 범선. 선실과 조타실도 직접 제작하는 등 범선을 페리로 바꾸기 위해 배를 사고 14개월을 투자했다. 아내 이름 마르타를 배의 선명으로 고르자 이를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 아내에게 “그래야 내가 언제나 당신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지.”라고 대답했고, 마르타는 “아이, 징그러워.”라고 투정했다는 배. 흰색 선체에 선실에 빨간색 줄무늬를 두른 피오르 지역의 가장 이름난 페리선.

  그러나 배 이야기는 조금 미루자.

  새벽 5시 15분에 닐스 비크의 마지막 날은 시작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건장한 몸집, 희끗하게 변한 머리카락과 거친 피부. 주름진 얼굴과 벗겨진 이마를 한 닐스 비크 노인이 11월 8일, 비 내리는 고요한 새벽에 3대가 살았던 집을 나서기로 작정한다. 그는 엽서를 써서 커피잔 옆에 놓는다. 두 딸, 엘리와 구로가 읽겠지. 오늘 이후에 절대로 집을 두고 다투지 않겠다고 약속한 자매. 한갓진 피오르 지역이 지금은 노르웨이와 세계 각지의 부자들이 여름별장으로 개발하는 바람에 부동산 가격이 하늘을 찌른다. 부모의 집과 땅을 두고 형제 자매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을 너무도 많이 본 닐스. 그는 이 지역에서 집과 보트창고, 창고 주변의 땅을 아직까지 팔지 않은 단 한 명 남은 피오르 주민이었다.

  “나는 이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다.”

  6시 45분이 되자 닐스는 침대 매트리스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등유를 끼얹고 불에 태운다. 수십년 간의 추억. 지극히 사적인 삶이라 다른 건 몰라도 매트리스만큼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온갖 내밀한 부부간의 사랑과 냄새가 묻어 있는 기념물. 오, 사랑하는 마르타. 그녀가 은혼식 선물로 준 오메가 시계를 차고, 배를 운항하면서 밀려올 절대 적요를 물리쳐온 라디오와 힙플라스크(휴대용 술통)을 챙긴 닐스 옆에 개 루나가 와 있다. 태어나 눈 뜬지도 얼마 안 되어 도살되기 바로 전에 닐스가 품에 안아 들어 함께 살기 시작한 개. 20년~25년 전에 트럭에 치어 죽었다. 죽은 후에도 오래 함께 해 이제는 사람의 언어로 배, 비행기, 정치, 축구 등 온갖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해 온 동행. 닐스는 기꺼이 마지막 항해에도 루나를 동행시킨다.

  이제 8시 30분. 아침이긴 하지만 높은 위도의 11월이라 여전히 밤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하긴 닐스는 이미 시간을 떠났다. 이제 닐스는 루나와 함께 마르타호에 올랐고, 선실에는 그가 수십년 동안 써 온 대충 스물다섯 권을 될 것 같아 보이는 항해일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올라 묶은 줄을 풀고 닻을 올린다. 고개를 드니 숲 속에 죽은 자들이 몰려 있다. 외로운 이들이 이제 서로를 찾는 것일 터. 환영幻影, 환영일 수밖에 없을 것. 죽은 자들이 그에게 온 것일까? 저들 모두 닐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 이제는 자기보다 먼저 시간의 벽을 넘어선 이들. 그들은 닐스의 속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스물다섯 권의 항해일지 안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닐스는 항해일지를 편다.

  마르타호에 올라 탑승료를 지불한 첫 승객.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쉰베 네스베와 스베레 네스뵈.


  닐스 비크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뱃사람은 오직 배만 믿는다. 예로부터 뱃사람들은 헤엄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배가 가라앉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방법은 즉시 익사하는 거였단다. 수영을 할 줄 알면 그만큼 고통만 길어질 뿐이었으니.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둘러싼 피오르,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다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도 몰랐을 터이다.

  닐스 역시 끝까지 수영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자, 피오르 지역의 여자들처럼 빼어난 미인이었던 사랑하는 아내 마르타는 닐스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야지. 살아날 생각을 해야지. 집에 남은 아내와 두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닐스는 피오르의 뱃사람답지 않게 북해의 차가운 바다 속에 들어가 마르타한테 수영을 배웠다. 평생 한 번도 실제로 써먹은 기회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마지막으로 항해하는 오늘까지.

  이제 닐스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작은 옛 시절의 선착장에 앉거나 서서 그를 기다린다. 기타를 쳤고 노래를 잘 부르던 소년 욘 안데르손, 거친 땅에서 수수한 농부로 살다가 앞으로 고꾸라져 흙에 얼굴을 파묻고 죽은 옌스 헤우게, 피오르 건너 도시에 가 총으로 자기 얼굴을 쏴 자살해버린 막냇동생 이바르 비크, 외지에서 와서 피오르 사람과 학생들에게 불만 많고 깐깐했던 학교 선생 잉그리드 알스타세테르, 그리고 전직 장관, 평생 하이힐을 신고 다닌 1968년 미스 노르웨이,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 브리타 셀도스, 에이나르 스보르테비크, 프레드릭 모스, 아문 모게, 릴리 글로펜, 마르기트 예센달, 에길 에릭센, 엘렌 쇠르트베이트, 그리고, 그리고 틀림없이 닐스의 아내 마르타와 사랑을 나누었고, 서로 사랑을 했을 미국인 로버트 소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들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귀신들.


  요즘 죽은 자들, 귀신 이야기 많이 읽는다. 이 책에서도 오늘 죽을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미 죽은 자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당시를 생각하고, 추억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오직 두 명, 엘리 비크와 구로 비크. 두 딸.

  죽은 자들. 죽었다가 다시 죽어가는 사람 앞에 나서는 이미 죽은 자들을 귀신이라 부르니까, 이 책은 당연히 ㅆㄴㄹ 소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이고, 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빼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평은 꽤 괜찮다.

  하지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제하더라도, 주인공 닐스 비크, 조금은 완고한 노르웨이의 변방 피오르 지역의 연락선 선장이, 정말 거의 결점이 없는, 너무도, 너무도 선하기만 한 인간으로 살다가, 지극하게 선한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더라는 것. 아무리 빙하 녹은 물 위에서, 빙하 녹은 물만 먹고 살았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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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0-28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이거 왠지 좋아보여서 보관함에 담아뒀던 책인데... 빼야겠습니다.
ㅆㄴㄹ 소설이었다니....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10-29 04:28   좋아요 0 | URL
다른 독자들은 평이 좋다니까요! ㅎㅎㅎ
 
나는 바보다
셔우드 앤더슨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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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전에 앤더슨의 소설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참 괜찮게 읽었다. 지금 당시에 쓴 짧은 독후감을 읽어보니, 그때는 독후감 쓰는 습관이 이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때라 짧게, 그저 메모를 넘어서는 정도밖에는 쓰지 않았는데, 소프트한 그로테스크, 소외되고 고독한 군상들, 단편소설 습작하는 분들의 필독서 운운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의 우화 같은 죽음에 관해서도.

  지금은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어떤 모습에 그렇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거의 기억나는 게 없다. 그럼에도 누가 미국의 단편소설을 이야기하면 꼭 셔우드 앤더슨을 말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얼마 전에 읽은 필립 로스의 장편 <울분>에서 뉴욕에 사는 유대인 주인공 마커스가 대학을 오하이오에 있는 와인즈버그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인상깊었다니까? 아마 로스 선생도 하고 많은 동네 가운데 콕 집어서 와인즈버그를 선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싶다. 어떤 엽기적 말썽을 부려도 소프트한 그로테스크로 덮어둘 수 있는 외딴 동네. 아닐까? 넘겨 짚은 것이긴 하지만 뭐 그런들 어떠랴.


  단편소설 열두 편을 실었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와 겹치는 작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확인하기 위하여 전작을 한 번 더 읽어볼 생각까지는 나지 않아서, 같은 작품을 제목만 바꿔 실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알아서 하시라. 3백 페이지 분량이지만 하루면 뚝딱 다 읽어버린다. 작은 판형에 큼직한 글씨체.

  셔우드 앤더슨이 미국의 대표적인 지방주의 작가라고 알고 있었다. 이 책 역시 미국의 중서부 지역을 무대로 하는 것들이 많고 가끔가다 시카고나 펜실베이니아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단편소설. 이이가 1876년에 태어나 1941년에 숟가락 놓았으니, 소설 속 이야기와 묘사 같은 스타일에서 새로운 걸 찾는 건 애초에 포기하고 읽는 편이 좋다. 좀 낡은 이야기 속에 <숲속의 죽음>처럼 소외당하는 이웃, <달걀>처럼 미국식 성공을 위하여 아등바등 삶을 이어가는 보통의 사람들, <슬픈 나팔수들>의 등장인물 같이 성인으로 탈각해가는 젊은이들을 차분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소프트하게 그로테스크한 시각으로 조망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나처럼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후딱 읽어치우면 나중에는 좀 질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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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10-27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 책 언제 샀는지 집에 있다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5-10-28 03:57   좋아요 1 | URL
이 책 신간인데 ㅋㅋㅋ 언제 샀는지 모르신다니.... 무지 재밌지는 않고요 그냥 그런데 좀 재미있는 정도입니다. 벌써 오래 전 사람인지라서 말입지요.

꼬마요정 2025-10-29 14:08   좋아요 1 | URL
얼마 전에 책 살 때 같이 샀네요... 헐.... 장바구니에 마구 담아놓고 선택해서 결제하는데 그 때 같이 체크되었나봐요 ㅋㅋㅋㅋㅋ 아 놔.... 책 제목이랑 제 상황이 같아요 ㅋㅋㅋㅋ
 
비극의 일인자 - 김성민 희곡집
김성민 지음 / 연극과인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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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김성민이 극단 ‘피오르’의 대표라는데,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당선한 중견 극작가이고, 이러저러한 상을 받았다는 수상 경력 이외의 바이오는 찾기 힘들다. 같은 이름을 한 인사들도 참 많다. 극작가, 작가, 소설가, 만화가, 화가, 연극인, 심지어 몇 년 전에 잘 나가다가 마약 복용이 들통나 TV에서 퇴출당하고 스스로 삶을 거둔 전직 연기자 김성민까지.

  《비극의 일인자》를 읽은 다음이면, 특히 제일 뒤에 실린 <마지막 물방울 너는 영원해>를 읽고 김성민을 검색하면, 이 극작가가 여성이라는 걸 알고 뭥미?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세 편의 작품을 실은 희곡집. 표제작 <비극의 일인자>는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창작팩토리 대본공모에 당선한 것을 필두로 201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 지원에 선정되고, 2014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재공연”지원작품에 다시 선정되었단다.

  <비극의 일인자>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읽힌다. 2012년 작품이니 소설가 한강보다 훨씬 앞서 우리나라의 극작가 고일봉 씨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시기, 고일봉과 고일봉의 (죽은)아내, 고일봉씨의 처음 모습일 수도 있고 그럴 것 같은 젊은 작가, 젊은 작가의 아내, 고일봉 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작가의 첫사랑 등이 출연한다.

  하여간 고일봉 씨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아직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각 매체의 기자들이 고일봉의 집에 들이닥쳐 인터뷰를 하려 하지만 고일봉은 특별히 할 말도 없다. 서둘러 취재를 마친 기자들이 빠져나가자, 이미 죽은 고일봉의 아내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드디어 부부가 만난다.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성취를 이룬 작가가 옛 시절을 회상하는 것일 수도 있고, 회한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연출가가 어떻게 극을 만드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을 듯. 이 작품이 부조리극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극처럼 연출하는 것도 상당히 그럴 듯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두번째 순서로 실린 <숲 없는 숲>은 귀신들의 난장판이다. 약자로 ㅆㄴㄹ.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  말이 그렇다는 거다. 죽음과 탄생. 아이를 원하는 처녀와 농부. 출산 행위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은, 인간의 가장 오랜 본능을 잇고 싶어하는 처녀의 소원을 들어주려 저승 명부 순서를 뒤바꾸는 저승사자. 저승의 염라대왕급은 아니지만 대신 급의 판관들, 이런 이들이 등장해 삶과 죽음과 생명의 연속, 즉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여차하면 나처럼 ㅆㄴㄹ 정도로 읽을 수도 있다. 극작가 김성민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숲 없는 숲>은 공연을 해도 보러 가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런데 사실, 연극의 대본인 희곡을 읽고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라는 말보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표현도 없다. 연극 자체가 삶의 의미에 관한 다양한 도구라서. 수다한 연극과 희곡을 보고 읽으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작품이라고 하면 2 곱하기 2는 4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하품나는 말일 터이다. 그러니까 이런 독후감을 쓰는 게 사실은 면목 없는 일이다.

  노르웨이 소설가 프로데 그뤼텐의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에서도 주인공인 뱃사람 닐스가 입센의 연극을 보고 “3막에 걸친 연극이 펼쳐지는 동안, 그는 조명 아래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그래, 연극이 바로 그거라니까? 삶의 의미에 관한 것. 자기 삶이 아니라면 유사 이래로 그렇게 많은 관객이 공감을 했겠느냐고.


  제일 뒤에 실린 <우주의 물방울 너는 영원해>는 왕년의 잘 나가는 연극배우이자 지금은 늙어 서울 변두리의 룸살롱에서 기타 반주해주고 받는 팁으로 먹고 사는 악사 일봉의 이야기. 그렇다. 일봉 씨가 또 나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극작가 고일봉 씨가 아니라, 왕년의 연극배우 일봉 씨. 남성의 로망, 우뚝 선 봉우리 한 개, 일봉 씨. 제대로 서는지 아닌지는 확인한 바 없지만 젊었던 한 시절엔 꽤 대단했던 거 같다. 아무리 연극판에서 날고 뛰어도 TV 조연으로 한 번 뜨는 것보다 훨씬 배고팠던 시절이니까 그냥 알아서 판단해도 좋을 듯. 일봉씨가 평생 사랑했던, 그러나 연극 배우들의 생활에 비추어, 그리 호강시켜주지는 못했던, 호강? 호강 비슷한 것도 바라지 않았으니 그저 크게 불편함 없이 살게 해주지도 못한 아내 화수는 지금 뇌경색으로 오늘 내일 한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 한참 예쁠 때 사고로 죽은 아들 동수. 화장해서 산골을 하지 않고 매장을 했다. 당시엔 죽은 아들 생각나면 한 번씩 둘러보겠다고 했겠지. 이제 화수가 자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 무덤에 한 번 가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봉씨 부부와 일봉의 친구 만수, 만수의 아들이자 일봉이 악사로 일하는 룸살롱 웨이터 병만, 이렇게 넷이, 화수의 휠체어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밀어 나중엔 병만이 화수를 들쳐 업고 동수의 무덤에 가, 무덤의 풀이나마 한 번 쓰다듬고 내려온다. 화수는 죽고, 일봉은 월세방에서 쫓겨나고, 월세방에는 새로 신혼부부가 와서 자리를 잡고,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이런 작품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쪽. 죽음, 귀신, 사후세계, 영적 교류 같은 4차원적 이야기들이라 그냥 훅훅 읽었다. 이런 책 읽으면 괜히 극작가한테도 미안한 기분이 든다. 김성민 씨, 미안합니다. 이렇게밖에 쓰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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