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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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얇은 장편소설. 문학동네가 신공을 펼쳐 널럴하게 편집하고도 240여 쪽에 불과하지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예전 독재체제 하의 알바니아에서 사는 일. 여기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가 다시 한 번 우정 출연한다.

  먼저 죽은 아내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오 이야기. 둘이 깨를 볶으면서 살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가 너무 금슬이 좋아 저 올림푸스에 사는 신들 기분이 조금 언짢을 정도였나 보다. 질투의 신이 이를 배 아파해서 뱀 한 마리한테 주문을 걸어 에우리디케의 발뒤꿈치를 칵 깨물게 시킨다. 당연히 에우리디케는 30분도 넘기지 못하고 하데스의 나라로 떨어지고 말았지. 슬픔에 겨운 오르페오는 온 종일 수금만 켜고 세상을 돌아다니니 온갖 짐승과 신들도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바람에, 좋아, 한 번 기회를 주지, 오르페오로 하여금 땅 아래로 내려가 에우리디케를 데려올 수 있게 딱 한 번의 배려를 해준다.

  오르페오가 그 깜깜한 지하세계로 어떻게 내려가? 그때 수금과 함께 가져간 것이 겨우살이. 겨우살이 가지 끝에서 빛이 반짝거렸다나, 뭐라나. 하여간 이때 오르페오의 전기를 읽은 서양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성탄절에 현관을 이 겨우살이로 장식을 하는 거란다. J.G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에 나오는 이야기.

  하여간 지옥문까지 내려갔더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이 대가리 세 개 달린 개 케르베로스. 헤라클레스가 아닌 이상 케르베로스 뒷다리에 된장을 바를 힘이 있는 인간은 없는지라, 오르페오는 현명하게도 자기 주특기를 살려 수금을 연주해 깊은 잠에 들게 해놓고 드디어 하데스를 만나 여차저차하니 에우리디케를 내 놓으슈, 단판을 지었다. 그랬더니 이제 전형적인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들의 장난을 시작한다.

  좋다. 데리고 땅 위로 올라가라.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천 개가 조금 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너 오르페오는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쳐다보지 말아라. 만일 뒤돌아보면 네 아내는 다시 지하 세계로 거꾸로 떨어져 박힐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 아시지? 이제 결말. 계단 기어오르면서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오한테 “넌 나 안 보고 싶었니? 여기까지 쳐 내려와서 어떻게 네 마누라 얼굴 한 번을 바라보지 않는 거니?” 바가지 득득 긁는다. 아내의 바가지 반,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반. 그래서 기껏 다 올라가놓고 막바지에 이르러 오르페오가 고개를 휙, 돌리고,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목뼈, 경추가 비틀리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부로 똑 떨어진다는 얘기.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건 이탈리아의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의 이야기.

에우리디케가 바가지를 팍팍 긁으니, 이것 참,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 바가지를 계속 긁히며 살아? 에우리디케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다시 생명을 얻는다 해도 어차피 또 죽어야 할 텐데 죽을 때의 고통을 한 번 더 겪으라는 말이심?

  오르페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여기서 끝내자!”

  하면서


  <떠나지 못하는 여자>에 출연하는 에우리디케 정도의 여성은 작품의 부제 “린다 B를 위한 진혼곡”에서 이름을 밝힌 린다. 린다가 극작가이자 주인공인 루디안 스테파를 흠모하는 건 틀림없다. 처음에는 작가와 팬 수준 정도였다가, 점점 루디안의 여자가 되는데, 아니다. 작품의 스토리와 보조를 맞추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

  첫 장면. 주인공이자 화자 ‘나’ 루디안 스테파가 당 위원회의 소환 명령을 받아 출석하러 간다. 그가 생각하기를 아마도 공연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희곡 작품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또는 어린 연인 마제나와의 관계 때문 아닐까 싶다. 때는 1980년대, 40년이 넘게 통치한 알바니아의 독재자 앤베르 호자 시기. 알바니아 땅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이라도 정부가 모르는 게 없던 시절. 그래서 연인 마제나와 싸운 것도 영 께름칙하다. 모든 커플이 그렇듯이 도무지 말로 따져 마제나를 이길 수는 없고, 가뜩이나 급한 성질에 뭐라 표현을 하긴 해야겠어서 그냥 한 방 콱 쥐어박았으면 좋겠는데 차마 그럴 수 없어 일단 머리채를 휘어잡았다가, 이봐, 정신차려, 손찌검은 절대 안 돼, 하는 정언명령이 들리는지라, “넌 정신분열증 환자야! 아니면 스파이든지!”라고 한 것이 언짢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마제나가 경찰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루디안이 나한테 스파이라고 했어요, 고발을 하면, 이거, 농담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큰일 날 수도 있는 거다.

  게다가 진짜 연인도 있었다. 얼마 전부터 여자 의사하고 비혼으로 살고 있었는데, 여자가 오스트리아 학회에서 수면기술, 의학용어로 하자면 마취기술 개선을 위한 워크샵에 참석하러 떠나는 걸 루디안이 극구 반대했다면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아, 이 의사가 다시는 책에 등장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오스트리아나 서유럽의 한 나라로 망명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이런 여자 관계 때문 말고도 공연을 기다리는 희곡 속에 유령이 등장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다. 알바니아는 엄연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행해지는 자유국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심해질수록 인민들의 자유는 더욱 커진다는 진리를 세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나라, 알바니아. 근데 이런 자유의 나라에서 감히 극중에 유령이 등장해? 유물론의 나라에서 말이지? 그런 같은 맥락에서 루디안, 너 혹시 신도 믿는 거 아냐? 이렇게 따지면 루디안이 비록 완벽하게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변명할 마땅한 거리가 없을 수도 있다. 심문관이 우기면 말인데.

  인민의 모든 행위를 알고 있는 정부가 불렀으니 분명 곱게 보내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잘 나가는 극작가거든.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당 위원회.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

  저 까마득한 시절, 지금부터 4~50년 전 알바니아가 군주제였던 때 옛 왕실 측근 집안 출신의 아가씨가 자살을 해버렸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라의 유서 깊은 가문 아가씨가. 이 집안 모든 가족들은 오랜 세월 지방도시에서 유배중이다. 유배? 좀 센 단어구나. 소련에서의 유배와는 달리 그냥 한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정시키는 상태. 군인들 위수구역 이탈금지 정도로 생각하면 딱이다. 근데 자살한 젊은 아가씨의 책, 최근에 공연을 마친 루디안 스테파의 희곡 작품을 실은 책에, 공연을 했던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 가지도 않았음에도 그 책에 작가 루디안의 자필 서명이 쓰여 있다.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고 쓴 헌사와 함께.

  서명을 해 줄 수 있고 당연히 팬 미팅하면 습관적으로 해주는 헌사도 써줄 수 있건만, 문제는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는 글귀. 헌사를 읽어보면 누구나 루디안과 자살한 린다 B 사이에 공통의 “추억”이 개입되어 있는 거다. 그러니 당 위원회, 일종의 정보국에서는 옛 군주제 정권의 핵심 가문의 일원과 인기 극작가와의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봐야 마땅하다, 라고 당 위원회의 판사 등 당의 사람들은 주장한다.

  어떻게 루디안의 책이 린다 B의 손에 들어갔을까? 린다가 루디안의 팬이라는 건 앞에 얘기했고, 그이 공연을 보고 싶고, 책도 읽고 싶은 린다는 고등학교 동창한테 연극도 보고, 책도 사서 사인까지 받아 달라고 부탁해 그렇게 한 거다. 이 와중에 그 염병한 친구년이 루디안한테 접근해 안다리후리기를 걸어 자빠뜨렸으니 친구가 누군고 하니 지금껏 시간 날 때마다 함께 침대에 오르는 어린 미제나.

  그러니까 미제나는 린다가 보기에 자신과 루디안 사이의 매개인이다. 당장은 아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말하게 되었으니, 미제나와 루디안 사이의 몸 접촉 모두를 이야기한 건 아니고, 키스했다, 정도. 린다와 미제나 둘 모두 레즈비언 성향이 1도 없지만 루디안의 입술이 닿은 미제나의 입술에 린다는 입을 맞춘다. 루디안이 린다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고 하니까 린다도 미제나의 단추를 풀고 가슴을 만져보고, 자기 단추를 풀어 미제나의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본다. 이런 방식으로 미제나를 통해 루디안과의 접촉을 상상해보는 거겠지.

  린다는 미제나가 건강검진을 하러 갈 때 함께 따라가서 유방 촬영을 한다. 유방암이 걱정스러워서? 아니다. 유방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렸으면 좋을 거 같아서. 그 정도 되어야 지방도시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해 루디안이 사는 수도 티라나로 갈 수 있으니까. 이런 린다 B가 죽었다. 자살해버렸다.

  그러면 하데스가 통치하는 하계下界로 들어가버린 린다 B를 위하여 누군가가 수금을 켜면서 케르베도스를 잠재우며 땅 아래로 내려가야 하겠지? 이런 방식으로 지난 엔베르 호자 정권 시절의 알바니아를 비틀어버리는 이스마일 카다레. 근데 읽는 내내 의아했던 건, 카다레가 그리스 신화를 자주 가져다 쓰는 건 알겠는데,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는 조금 무리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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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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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에 접어든 이해미는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 케르테스의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한달 전까지 만해도 제법 알려진 신문사의 기자로 재직하던 해미는 저널리즘이 정체가 어떤 모습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염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단 다음 직업에 대한 준비 없이 무턱대고 신문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 버린 것. 우연히 이 때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전이 열린다는 걸 알고 거의 한 달째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근 도장 찍듯 전시관에 가서 폐관시간까지 똑 같은 사진을 관람하던 차였다.

  이곳에서 우연히 우재를 닮은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 해미한테 케르테스의 사진을 처음 소개해준 대학 동기생. 해미는 사회학과를 다니고, 우재는 약학과를 다녔을 때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다. 이십대 초반. 서로 들뜨고 갈급했던 시기. 그러나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우재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입대했고, 연상의 연인에게 실연을 당했으며 제대해 복학할 당시 해미는 모든 학부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눈 앞에 둔 상태였다. 함께 캠퍼스에 있을 때에도 둘은 서로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거나, 적어도 두 명 가운데 하나는 연애를 하고 있어서 그저 인연이 안 되는 괜찮은 애 정도로 여기고 말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게 벌써 근 20년 전이다.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았으면 사실 아는 척을 하더라도 짧은 인사 후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는 서먹함이 뒤따르는 법. 미해도 우재도 벌써 이 정도는 이해할 나이. 미해는 전시장에서 나온다. 근 한 달 동안 매일 들른 전시관 현관 앞에서 오늘따라 전시회 포스터를 오래 바라보고 있던 이미해. 작품에는 안 나오지만 왜 하필이면 우재를 만난 오늘 늦은 오후에 그동한 숱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포스터를 유심히 보고 서 있었을까? 벌써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고, 연락도 거의 없었던 젊은 시절 조금 가까이 지낸 동아리 친구 우재와의 시간을 만들어볼 속셈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하여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재가 전시관에서 나오고, 미해를 발견하고, 혹시 이해미? 아는 척에 이어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My Funny Valentine”을 들으며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S의 결혼식이었나?”로 시작해서 “아, 너는 결혼했어? 소식을 들은 게 없어서 못 갔는데, 혹시 했다면 미안.” 이러저러한 얘기 끝에 둘 다 공히 마흔 살에 접어들도록 아직 미혼 상태인 것을 확인한다.

  마흔살이 되면 고향에 가서 약국을 열겠다는 어릴 때부터 우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곧 제주로 내려가 약국을 개업하겠다는 말은 이 모든 일상적 이야기의 뒤에야 할 수 있었겠지. 미해도 제주에 있는 우재의 집에 가 보았다. 기말시험이 끝난 학기 말에 동아리 선배들이 MT 겸해서, 매번 가던 대성리나 새터 같은 곳에 질렸다고 돌발적으로 제주에 있는 우재의 집으로 가보자고, 돌발적인 결정을 내렸고, 그 기회에 미해 역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가 보았다. 그때 알았다. 제주의 이국적인 야자수 가로수들이 사실은 원산지가 제주가 아니고, 제주를 관광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저 민주공화당 시절의 정치인이 야자수 묘목을 도입해 제주에 심은 것이라는 것을.

  독자는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 외국의 나무가 제주도에 입식되어 그곳에서 몇 십년 터를 잡고 제주의 한 모습으로 고착했으니 이제는 외래 야자수도 제주의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는 점을. 그저 마흔 살의 해미와 우재가 늦게나마 만나서 관계를 이루어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만 받을 정도로 프롤로그는 끝난다.

  그럼 여태까지, 독후감의 반 정도를 프롤로그 이야기하느라 소비한 건가? 그렇다.


  해미의 가족은 이제 부모와 해미, 해미의 동생 해나, 이렇게 네 명 남았다.

  해미가 열한 살이었을 적에 가족은 부천에서 서울로 이사했고, 아이들도 당연히 전학을 해야 했다. 이때는 해미한테도 언니 해리가 있었다. 해리는 해미한테 전학 왔다고 쫄지 말라고, 턱을 수평 이상으로 들고 다니라는 의미로 말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해미가 애들 사이의 기준이 될 거라면서. 정작 언니는 벌써 중학교에 다니지만. 언니 해리는 공부도 잘하는 범생이.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된다는 엉뚱한 집념에 싸인 20세기형 모범생 언니한테 해미는 종종 “아파도 조퇴하겠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멍청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이때가 아마 1994년 12월 7일이었고, 가족이 이사와 살던 곳이 아현동 근처였던 모양이다. 학교 수업 도중 교사에게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말한 모범생 해리한테 담임은 얼마나 아프면 모범생 해리가 조퇴를 신청할까, 안쓰럽게 생각해 곧장 이를 허락했고, 학교를 나온 해리가 오후 두시 50분경 도시가스 저장고 부근을 지나던 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저장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부근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50명 가운데 한 명이 돼 버리고 말았다.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도 곱고, 집안에서도 좋은 맏이였던 딸이 갑작스럽게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후부터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균열이 발생했다. 이건 어떤 면에서 정상적인 결과인데,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고, 사고와 상실을 당한 가족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책임 전가가 부부 사이의 끊이지 않는 격렬한 싸움으로 변질된다는 뜻이다. 숱하게 많은 부부가 이 비슷한 일 때문에 갈라서고, 그보다 더 많은 가정이 오랜 시간의 고통 속에서 어찌어찌 지내다가 세월과 함께 기억이 흐려질 때까지 질긴 삶을 이어간다.

  해미네 가족도 그랬다. 엄마와 아빠는 극렬하게 부부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둘 사이의 크레바스는 도무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부부는 헤어지기 직전에 이혼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공무원이었던 아빠가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청에 부임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고, 독어교육을 전공한 엄마는 신학 석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이제 둘 남은 딸들과 독일의 대학도시인 G시로 떠나 2년 동안 지내기로 했다. 물론 해미 친가에서는 말도 많았다. 죽은 맏딸의 보상금으로 엄마가 딸들 데리고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가족을 해체시키려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친척의 시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아빠가 나쁜 남편은 아니라서 이런 말이 쑥 들어가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비록 대학도시이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소도시 G시를 고른 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엄마의 큰언니 오행자 박사, 해미한테는 큰 이모가 G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형제는 나이 순서대로 이모, 쌍둥이 외삼촌 둘, 그리고 막내로 엄마가 있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아쉽지 않게 먹고 살던 외갓집의 맏딸, 엄마는 언니가 한 명이라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될 텐데 꼭 큰언니라고 불러 해미 역시 큰이모라 하는 것이 입에 붙은 이모. 전남 지역에서는 손꼽히게 공부를 잘해 수재라고 불렸던 이모는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독자가 보기에 아마도) 작은 내과 의원의 개업의인 듯했다.

  그러나 시작은 미미했으니, 오행자 큰이모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갑자기 외할머니가 중병에 들어 전라남도 강진 부근의 넓고 넓은 들이, 외할머니의 병원비로 다 날아가버리기 시작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집에 오래 가는 병자가 한 명 생겼다 하면 집구석 거덜나는 건 오직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우리 집구석도 이런 집 가운데 하나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그렇게 망가진 집안은 아주 회복할 수 없거나, 비슷한 수준에 다시 오르기 위하여 적어도 두세 세대가 필요한 거 같다.

  한 순간에 거덜난 집구석에서 맏이로 큰이모가 선택한 것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서독 파견 간호사, 간호조무사가 되어 비행기를 타는 일. 큰이모는 독일에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직무 관련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아 간호조무사에서 정식 간호사를 거쳐 계속 의학공부에 몰두, 드디어 내과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마도 1995년, 미해가 열세살 겨울부터 열다섯 살 겨울이 될 때까지 미해는 독일 G시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책의 절반 이상이 이 시절 독일 G시에서의 일이며, 특히 독일 파견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출신 여사님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로 꾸몄다.


  해미와 동생 해나는 독일에서 자연스럽게 마리아 이모의 딸이자 반half독반한 혼혈 레아, 한 살 위 한국계 독일인 한수와 친구가 되고, 해미와 해나도 독일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수준이 되지만, 스토리의 핵심은 뇌종양 전력이 있는 간호사 선자 이모의 첫 애인 KH를 찾는 일이다. 언제 뇌종양이 재발해 생을 마쳐야 할 지 모르는 말수 없는 억척어멈 선자이모의 아들 한수는, 엄마가 죽기 전에 이미 떠난 파독 광부 출신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십대 시절 사랑했던 KH라는 이니셜의 연인을 찾아, 가능하다면 독일로 초청해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주고 싶다. 착한 아들 답게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한수와 레아, 그리고 미해가 일종의 탐정 놀이 비슷하게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여정은 해미가 열세 살이었던 1994년부터 시작해 마흔 살인 2020년 경까지 계속된다. 20여 년 동안 찾았다니까 결국 문제의 KH, 이미 고인이 된 선자이모의 첫사랑이자 벌써 노인이 된 KH를 찾게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 독자는 이제 해미가 거동마저 불편한 KH를 만나고 그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까지 모두 본 다음에, 프롤로그에 이어 다시 에필로그에서 각본대로 해미가 우제를 만나는 장면으로 책을 덮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추리소설 기법으로 작품을 진전시키는데, 아오, 백수린의 거미줄 또는 실핏줄 같은 문장이라니. 그렇게 섬세하고 깔끔하고 사색적인 문장이 아주 제대로 감성을 폭발시켜, 독자는 간질간질한 섬세함과 사색과 고독 속에 질려서 까무러쳐 버리기를 몇 차례인지도 모른다. 질리고 질려서 책의 중간도 오지 않아, 무지하게 지루한 난관까지 만나는데, 애초 이런 작품들로 독서생활을 시작한 독자들은 연신 감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나, 꽃노래도 삼세번이건만 같은 또는 비슷한 귀절을 매끄럽지 않은 둔주법, 푸가로 연주해대고 있으니, 귀 밝지 않은 절대 음치더러 도무지 뭘 하라고 하는 말이고 문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시지? 하여간 아마추어가 읽기에 그랬다는 거니까, 백수린의 많은 팬들이 읽기에 기분 나쁜 독후감이라도, 세상에 같은 의견만 있어도 좋지 않은 법이라는 선에서 이해해주시기를 앙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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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9-09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실핏줄같은 문장이라니... 너무 적절해서 진짜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ㅎㅎ 전 거미줄보다는 실핏줄에 한표입니다. 거미줄은 좀 끈적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래서 백수린 작가는 실핏줄. ㅎㅎ 물론 이런 문장을 좋아하고 말고는 독자의 몫일뿐이고요. 저는 이런 문장을 안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백수린 작가는 또 좋아요. 실핏줄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호불호가 달라질듯요.

Falstaff 2026-09-09 08:55   좋아요 1 | URL
아침 햇살에 비치는 영롱한 거미줄, 그거 참 미칩니다. ㅎㅎ
 
미츠 - 블룸즈버리의 마모셋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메이 옮김 / 코라초프레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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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슬렁어슬렁 개가실을 걷다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새 책이 신착도서 책상에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와 얼른 집어 들었다. 다른 건 하나도 안 보고 작가 이름만 탁, 봤다는 건데, 왜냐하면, 누네즈 책 읽고, 와따 이거 대낄이네, 감탄해본 적은 없어도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망친 책 역시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망쳐도 평타. 얼마나 안정된 작가이냐는 말이지.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미츠>를 검색해보니까, 출판사 코라초프레스가 처음 찍은 책이란다. 2026년 4월. 그래서 더 유감이다. 출판사가 처음 낸 책인데, 이왕이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출판사도 좋아할 독후감을 쓰면 참 기분이 좋을 텐데 차마 그리할 수가 없다. 이건 누네즈 때문도 아니고, 출판사 때문도 아니고 더군다나 역자 메이 때문도 아니다. 불과 몇 주 전에 퓰리처상을 받은 마이클 커닝햄의 작품 <디 아워스>를 읽어서 그렇다.

  가뜩이나 작품과 삶이 노출될 대로 노출된 버지니아 울프가 1941년 3월 28일 아침에 외투 주머니 가득 무거운 돌을 잔뜩 집어넣고 3월 말이라 해도 여전히 차갑기만 한 우즈강 속으로 맨발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작품을, 불과 몇 주 전에 읽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던 거였다. 게다가 <미츠>에서도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랄 수 있는 언니 버네사의 젊은 맏아들이자 천하의 바람둥이인 ‘줄리언 벨’이, 1년 동안 중국 우한 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갔다 와서 또다시 스페인 내전에 자기 발로 갔다가 두 달만에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을 것도 홍잉이 쓴 야~한 책 <영국 연인>을 통해 알고 있던 거고, 버지니아-레너드 부부, 언니 버네사-클라이브 벨 부부의 자유분방한 성생활, 혼인 중 버지니아와 비타 섹빌웨스트와의 동성애 등등 이미 거의 다 들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읽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할 때나 떠올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이 더 이상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원래 영국 귀족 끄트머리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손 끝에 물 한 방울 묻힐 필요 없이 자란 버지니아 스티븐 양. 은수저를 입에 물고 머리 꼭대기에 허연 소기름을 뒤집어쓰고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최하 연 수입 5백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확보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란 똑똑이 아가씨였다가, 유대인의 핏줄을 타고 났으니 귀족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머니에 금화 떨어질 일 없는 부잣집 레너드 울프와 결혼해 자기 결정에 의하여 맨발로 우즈강으로 들어갈 때까지 전형적인 부르주아로 삶을 누린 사람.

  당연히 아무리 돈이 많고 신분이 높아도 행복하지 않다. 부르주아도 충분히 불행할 수 있고, 고독할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날마다 밤을 하얗게 새울 수도 있다. 아니다. “~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정말로 “~한다.” 그러나 <미츠>의 시대적 상황이 1934년부터 39년까지. 간전기의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경에 쓰인 대로 어미 배 속에서 낙태되지 못한 것을 슬퍼할 정도로 살기 팍팍했던 시절에, 이 버지니아-레너드 울프 부부는 바버라-빅터 로스차일드 부부의 초청을 받아 케임브리지에 있는 로스차일드 저택으로 차를 몰아 행차한다. 여기서 남아메리카 원산인 암컷 유인원 한 마리를 처음 만나고, 원래 동물을 좋아했던 레너드의 눈에 들어왔다가, 몇 달 후에 로스차일드 부부의 해외여행 기간 동안에 암컷 유인원을 울프 부부가 맡아 키우기로 하는데, 이 유인원이 ‘미츠’라고 이름지은 마모셋이다.


마모셋


  잔디밭 건너편에서 발견한 잿빛의 조그만 생물. 얼마 전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런던의 중고품 가게를 지나다가 우연히 쇼 윈도우에서 발견해 아내 바버라의 생일선물로, 가게 주인이 사들인 가격의 열 배도 넘게 주고, 즉 달라는 대로 에누리 없이 다 주고 사온 생물체이다. 그러나 바버라는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전혀 관리를 안 했다. 결과 마모셋은 뼈 발육에 장애가 발생하는 구루병도 있는 거 같고, 윤기가 나지 않는 털은 거칠고 건조해 보였으며, 군데군데 상처가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주로 쇠사슬을 걸었던 목 부근의 피부가 쓸려 있었고, 드문드문 털도 빠진 상태였다.

이렇게 1934년 7월 19일 밤의 첫 장면에서는 그저 울프 부부가 로스차일드 저택에 놀러가 미츠를 한 번 본 것으로 끝난다.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속에 앉은 버지니아. 이이는 생각한다.

  “그래도 로스차일드 부부에게는 부러워할 만한 것이 많았다. 부는 아니었다. 울프 부부는 부를 경멸했으니까. 그보다는 미래, 9월에 태어날 아기, 그들 앞에 펼쳐진 삶 전체였다. 한마디로, 젊음.”

  빅터 로스차일드 3세 남작이 레너드 울프보다 딱 서른 살 젊다. 그리고 이때, 1934년에 첫번째 아내 바버라는 임신중이었으니 로스차일드의 부 보다는 임신중인 것이 더 부러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울프 부부는 결혼 때부터 딩크로 살기로 딱 합의를 했던 건데 그렇게 22년을 살아 이제 쉰두 살, 완경을 맞은 상태에 이제 와서 태어날 아기 타령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당대 세계 최고 부자였던 은행왕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를 부러워하지 않는 건 좋다 이거지. 근데 부를 경멸한다고? 유대인 족속이? 속으로는 아니겠지만 겉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우리처럼 없는 집구석에서 사는 인간들은 백 년을 살아도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 못한다. 지들 스스로도 부르주아의 일원이니까, 집에 가면 침모, 식모, 찬모, 마당쇠, 집사 등등 하인, 하녀가 수두룩하고, 부부 가운데 한 명이 하인, 하녀에게 관대하면 다른 한 명은 혹독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이나 자기 마음대로 글자로 쓰는 거다. 폼도 나고 뭐 그렇지.


  버지니아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내려온 영토와 혈통, 수 세기에 걸쳐 배양된 교양과 전통을 가진 자기네 집안 같은 귀족이 지금껏 사회 정의나 공동선을 위해 어떤 식으로 힘이 되었는 지는 말할 수 없었단다. (p.60) 그러나 (앞 인용에 바로 연결해 쓴 것처럼) 버지니아가 끝내 포기하지 못한 건, 푸른 피를 향한 찬미였다. 푸른 피? “내 몸에는 푸른 피가 흘러요.”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 아니고, 각주에 쓰인 대로 옮기자면 “귀족의 고귀한 혈통을 말한다.”

  귀족이 1930년대에 국가와 민족과 국민과 세계평화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지는 모르고, 아마도 이바지는커녕 도움되는 일도 하나 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버지니아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고귀한 혈통에 대한 자부심은 포기하지 못했고, 오히려 찬미했다. 내 말이 아니라 시그리드 누네즈가 쓴 것에 의하면.

  레너드 울프는 몰라도 버지니아는 확실히 귀족 출신의 부르주아 말석에는 앉는 부류. 그래도 빅터 로스차일드나 동성애인이자 깊은 우정도 나누고 있는 비타 섹빌웨스트 앞에서는 절대 돈 좀 있다고 입도 벙긋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래서 시그리드 누네즈는 쓴다.

  “울프 부부에게는 로스차일드 부부를 비롯해 화려한 생활을 하는 지인이 많았다. 한번은 버지니아가 비타의 시싱허스트성城에 갔다가 돌아와 ‘내가 중산층 출신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다.”

  이러면 앞에서 “울프 부부는 부를 경멸했다.”라고 쓴 건 백퍼 구라지? 글쎄 그렇다니까. 이 책이.


  시그리드 누네즈가 동물주의자인 건 아실 걸? <친구>에서 조금 냄새를 피우잖아. 이 책에서는 미츠라는 이름의 마모셋이 등장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약 4년간, 4년 조금 넘는 세월을 쓴 작품으로, 이 기간 동안 히틀러가 전쟁 위협을 하고, 영국은 히틀러를 달래기 위하여 협정을 맺어 체코 일부를 점령하게 내버려 둘 때까지인데 사실 나도 울프 부부가 정말 마모셋을 길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렀나 보지 뭐. 그냥 믿자. 돈 안 든다.

  그래서 사실 미츠는 울프 부부의 애완동물일 뿐이고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네즈의 동물주의는 여전하다.

  울프 부부가 미츠를 데려오기 전에 핑카라는 늙은 개를 키웠다. 근데 부부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오는 날을 맞춰 죽어버렸다. 잘 묻어주고 이제 13개월 된 스패니얼 암컷 강아지 셸리를 입양했는데, 100페이지에 이 강아지를 보고 버지니아 울프가 하시는 말씀이,

  “대단히 고상한 외모”지만 “과연 지성이 있을까?”

  개한테 지성을 함양시키려면 ABC를 가르쳐야 하나, 미적분을 가르쳐야 하나? 성문기초영어 먼저? 아니면 공통수학의 정석이 먼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숭배할 만하지만, 나는 계급적 인간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별로 좋지 않아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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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권인 줄 모르겠는데, 위에 사진 찍은 거 말고, 딱 한 컷 분량의 책도 다 버렸다. 책 쌓아 놓는 거, 이거 욕심이다. 책 때문에 방에서 뭘 어쩌지 못하겠다. 그래서 버렸다. 아쉬울 거 같지? 속이 다 시원하다. 최근 5년 동안 읽은 책, 읽지는 않더라도 생각이 나 특정 부분을 찾아본 책, 서재에 인용한 적 있는 책 기타 등등, 이런 거 다 빼버리니까 90퍼센트는 그저 그냥 가지고 있는 책이더라. 그걸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거 참 신기하지. 정말 책을 버리려고 하면 아내가 그러지 말란다. 버리는 거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거라고. 있지, 알지. 근데 귀찮다. 이번에 버린 책 중에는 끝내주는 작품도 제법 있을 걸? 그래도 뭐, 내가 버리겠다는데. 

  다음 번에 날 잡아서 버릴 책 목록 중에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도 끼어 있다. 오늘 다 해치우려 했는데 몇 번 힘쓰니까 혈중 알코올 농도가 떨어져 영 힘이 없더라고. 달라고 하지 마시라. 택배 포장하고, 우체국 가서 보내고, 시간 잡아먹고, 모두 귀찮은 일이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황석영은 <장길산>하고 <오래된 정원> 두 개, 바르가스 요사는 <천국은 다른 곳에>, 볼라뇨는 <야만스러운 탐정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하니까 대강 책꽂이가 균형이 맞혀진다. 이럴 줄 진작 알았다. 그러면서 여태 하지 못했던 게 바보스럽다. 다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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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07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다락방을 버리셨군요 🤣

건수하 2026-09-07 22:40   좋아요 1 | URL
😹

잠자냥 2026-09-07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기 가서 주워오라고 코치하고 싶은 책이 좀 보입니다그려….🥹

Falstaff 2026-09-07 19:42   좋아요 1 | URL
혈중 알코올 농도 보충하고 저 사진 만큼 더 버렸는데요, 담에 사진 업로드 하겠습니다. 거긴 더 많을 듯하군요. 현재 발행 중인 세계문학 시리즈를 포함시키기 시작했거든요. ㅋㅋㅋ

독서괭 2026-09-07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그 동네 주민들 중에 분리수거 하러 나갔다가 득템하신 분들 좀 계시겠는걸요!

Falstaff 2026-09-07 19:44   좋아요 2 | URL
알라딘에나 좀 이상하게 책 읽는 우리 머글들이 모여 있는 것이지 그냥 사는 사람들은 책, 아무리 좋은 거 가져다 줘도 안 읽거나 피하는 게 일상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6-09-07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책은 그렇다면, 폴스타프 님께 소장욕 불러일으키는 책이란 뜻인가요?

Falstaff 2026-09-07 20:14   좋아요 1 | URL
아직 멀었습니다. 아주 싹 버리고 말 겁니다. ㅎㅎ

다락방 2026-09-07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밀레니엄 시리즈 갖고 계셨던게 의욉니다!!

Falstaff 2026-09-07 19:45   좋아요 3 | URL
다른 건 몰라도 밀레니엄 시리즈가 재미 하나는 정말 끝장이잖습니까!!

다락방 2026-09-07 20:03   좋아요 2 | URL
재미로는 압권이죠!!

stella.K 2026-09-07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몇권 겹치는 책도 있네요. 저도 작년부터 다시 안 볼 책 몇권씩 추려서 집앞 공터에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 달인가, 지지난 달 잠깐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책탑 한쪽이 무너져 내렸더라고요. 내 이 놈의 책을! 더워 죽겠는데 이걸 다시 세워 놀 생각을 하니까 어찌나 한심한지. ㅠ 그 김에 다시 안 볼 책을 추려 집앞 공터에 내놓긴 했지만.
옛날 같으면 반반한 책은 중고샵에 내놨겠지만 그것도 귀찮더라구요. 티끌모아 태산인데 먼지 밖에 더 되겠나 싶고. 그래서 책에 정 안 줄려고 새책은 가급적 안 사려고 하는데 저의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자꾸 새책 가지고 하려고 해서 죽겠습니다. 그래도 가끔 새책 집에 도착하면 기분이 설레긴 하는데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예전엔 책을 싸게 사는 맛에 중고책 샀지만 지금은 읽고 버리기 좋게 정말 헌책 삽니다. 근데 좋아하는 작가는 헌책으론 못 살 것 같아요.
암튼 잘하셨습니다. 동지 만난 것 같아 저의 마음도 후련하네요. 저도 조만간 또 버릴 생각입니다. ㅋㅋ
잘 지내시죠?^^

Falstaff 2026-09-07 20:36   좋아요 2 | URL
아이구, 이게 얼마 만입니까. 별고 없으셨지비요? ㅋㅋㅋ
책 안 사는 게 장땡입니다. 도서관 가니까 무진장 책도 많고, 그래도 없어서 사달라고 하면 재까닥은 아니지만 하여간 사주고, 조용히 읽으라고 열람실도 있고, 때에 따라 냉난방도 빵빵하게 해주니 이게 무릉 아니고 어디겠습니까?
그걸 그저 책을 이고지고 세상에나,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싶다니까요. ㅎㅎㅎ
늘 건강하세요!

stella.K 2026-09-07 21:03   좋아요 2 | URL
에고, 수정하는 사이 답글 다셨네요. 이 시간 혼술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 느긋하게 고치고 있었는데. ㅋㅋ
저는 진짜 도서관은 버스 타고 나가야 하고, 이용하려면 집앞 주민센터 이용해야 하는데 가면 좋긴한데 안 가게 되더라고요. 간지 두 시간쯤이면 와서 집안 일을 해야하는지라.ㅠ
암튼 격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폴님도 건강하십시오. 종종 들리겠습니다.^^

곰돌이 2026-09-07 2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는 검은 책…… 아, 원통하도다……

Falstaff 2026-09-07 20:47   좋아요 2 | URL
파묵은 빨강 내 이름하고 눈, 두 작품만 남길 거라서 말입죠. ㅎㅎㅎ

망고 2026-09-07 2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다놓고 아직 안 읽은 책들도 있어요🥺 얼른 읽어야지 폴스타프님의 버리는 책탑 보며 저는 쌓인 책 읽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9-08 03:48   좋아요 1 | URL
옙. 좋은 책 있으면 얼른 읽고 치우는 게 대빵입니다!

페넬로페 2026-09-07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아파트 동 1층 경비실 앞에 책꽂이가 있어요. 다 읽었지만 버리기 아까운 책 서로 바꿔보자는 취지일 겁니다. 거기다 제가 좋은 책 많이 갖다놨는데 몇 년째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해방일지 갖다 놨는데도 아무도 안 가져가더라고요.
그저 책은 나만의 기쁨이자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책에 대한 집착도 없어졌어요.
어차피 다 읽은 책은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잘 하셨어요, 시원하게요👍👍👍

Falstaff 2026-09-08 03:49   좋아요 1 | URL
그죠, 비슷한 종의 머글들이 알라딘에 무척 밀도 높게 모여 있는 거더라고요. 세상에 책 읽고, 좋아하는 사람들 거의 없어요.

건수하 2026-09-07 2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복거일 주워오고 싶네요 ㅎㅎ 후련하시겠어요!

Falstaff 2026-09-08 03:50   좋아요 1 | URL
건수하 님이 복거일을? 70세가 넘은 복거일은 자기 책 속에서도 골통 보수적인 시각을 조금도 감추지 않던데, 참으실 수 있겠어요? ㅋㅋㅋ

건수하 2026-09-08 06:19   좋아요 0 | URL
ㅋㅋ 그래도 궁금히더라고요

meesum 2026-09-07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아아아… (부러워하고 배워야 하는데 내 것도 아닌 것이 그냥 아까운 마음…)

Falstaff 2026-09-08 03:51   좋아요 1 | URL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저 독하게 마음 먹고 저지르는 것이지요.

coolcat329 2026-09-08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리신 책 중에 저도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있네요. 😢 시원 섭섭하시겠어요.
밀레니엄 시리즈 저도 가지고 있는데 정말 너무 재밌죠! 누군가가 가져가서 또 재밌게 읽어주면 좋겠네요. 떠나는 책들 보니 살짝 슬프기도 합니다.

Falstaff 2026-09-08 07:32   좋아요 1 | URL
책 사면 즉시 읽어버리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제가 쿨캣님 마음 압니다. ㅋㅋㅋ
밀레니엄 시리즈는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아야지, 한 번 읽었다하면 끝을 봐야 하는 아주 나쁜 책입니다. 잠도 못자게 하는 책 말이예요.
 
가스등 쏜살 문고
패트릭 해밀턴 지음, 민지현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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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패트릭 해밀턴은 작가이자 수습 변호사 아버지와 그의 두번째 아내, ‘올리비아 로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엘렌 아델 호클리와의 사이에서 1904년에 태어났다. 전형적인 중산층 속물계층인 부모. 아버지 월터 버나드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잘 봐줘도 평범한 작품을 몇 개 만들어냈으면서도 스코틀랜드 왕위의 적정 상속자라고 평생을 술 마시고 꼬장부리다가 갔다. 속물이기는 마찬가지였던 엄마도 콧대가 하늘을 찔러 하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식들은 최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키우려 했으나,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 덕분에 가산을 좋은 술 마시는 데 탕진하여, 열다섯 살의 패트릭을 웨스트민스터에서 퇴학시키는 것으로 사실상 집구석은 문을 닫았다고 봐도 좋겠다.

  패트릭 해밀턴은 이 시기, 열다섯 살 때부터 시와 산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누이동생 랄라도 ‘다이애나 해밀턴’이라는 예명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고.

  위키피디아는 이이의 작품 성향을 “전간기 런던의 거리문화를 디킨스적 방식으로 보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과 신랄한 블랙유머”를 그린다고 소개했는데, 오늘 소개하는 두 편의 희곡이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인 <가스등>과 <로프>와는 좀 먼 평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패트릭 해밀턴은 작품 가운데 <가스등>이 영국과 미국에서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 졌는데, 이 중에서 1944년에 미국의 조지 큐커 감독이 잉그리드 버그만과 샤를 부아이에를 캐스팅해 제작한 흑백영화가 널리 알려져 있고 나도 이 영화를 보았다.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튼 허연 달덩이 같은 얼굴의 키와 덩치가 가히 발할의 브륀힐트 급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그녀의 어깨 정도까지 올 정도로 그냥 보통 체격인 남자 샤를 보아이에의 가스라이팅에 하릴없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이 좀 어색했던 게 기억나지만, 너무 오래됐다, 그동안 쌓인 두 명배우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세월을 거치면서 왜곡되었는 지도 모른다. 샤를 부아이에가 보통 배우인가, <가스등> 말고도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다>와 <애련> 등에서도 명연을 보여준 옛 시절의 명배우.

근데 샤를 부아이예와 함께 등장하는 파트너, 소심한 캐릭터를 소화하기엔 피지컬이 너무 좋은 잉그리드 버그만. 그래도 당시 영화 전문가들이 보기엔 이 커플이 괜찮은 조합으로 보였나 보다. 훗날 <개선문>에서도 라비크와 조앙 마두 역으로 다시 한 번 은막 위에 모습을 비치는 것을 보니까. 아휴, (배우로서의 자질을 말하는 ‘체급’이 아니라 신체적)체격이 덜 맞는 이유로, ‘안 맞는다’고 하면 눈이 삐었다고 할 분도 계실 것 같아서 그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걸 꼭 밝혀야겠다.

  하여간 버그만이 이 영화 찍고 10여 년 있다가 율 브리너의 파트너로 <아나스타샤>를 찍었을 때도 율 브리너의 박박 대가리가 어깨 근처에 오니까 열을 받은 브리너가 버그만한테 무참하게 댁댁거렸다는 건 유명하다. “난 절대 계단 위에 올라서 연기하지 않을 거요!”

  사실 잉그리드 버그만이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처럼 상대 배역이 적어도 게리 쿠퍼 정도 되어야 비로소 어울리는 커플이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거 말고 비주얼 상으로는.


  예전에 영화 한 편, 그것도 더빙한 “명화극장”을 보고 몇 십 년만에 원작인 희곡 <가스등>을 읽는다. 우리나라 서점에서 작가 패트릭 해밀턴을 검색하면 이 책 한 권만 뜨는 걸로 보아 우리나라 초역일 거 같은다(아닐 수도 있다). 읽어보니 이런 수준의 작품이건만 왜 이리 더디게 번역을 했을까? 잘 안 팔리는 희곡 장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말로만 가스등이지 사실 몇 년 전부터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 비로소 영화 <가스등>도 새롭게 알려져 이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그저 이렇게 짐작해본다는 말이다.

  이제 원작을 읽으니 과연 두 주인공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물론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게 궁금했던 것도 뭐 이해는 하시겠지?

  남주 잭 매닝엄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한 45세 정도의 남자. 잘 차려입고 지나치게 말끔하다. 살면서 아내 벨라를 쉼없이 가스라이팅 해왔으니까 당연히 무지하게 권위적이고, 자기보다 아래쪽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권위적이라기보다 위압적이라고 하는 편에 가깝다. 이게 다 이유가 있다. 원래 출신이 범죄자. 그것도 희대의 보석, 19세기말 기준으로 1만5천 파운드 이상 나가는, 아홉개의 ‘발로 루비’로 장식한 브로치를 강탈하기 위하여 앨리스 발로라는 이름의 노부인 집에 잠입했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마부들의 곤궁한 삶을 지원하는 데 열심이었던 노부인을 초저녁에 칼로 찔러 무참하게 살해하고,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죽어 넘어진 노부인을 무시한 채 밤새도록 집안을 뒤졌지만 애초 목표로 했던 발로 루비 아홉 개가 박힌 브로치를 찾지 못해 도망할 수 없었던 내력이 있다.

  이것이 15년 전의 일. 이후 10년 이상,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현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과업, 아홉 개의 발로 루비가 박힌 브로치, 이걸 어쩌나. 어쩌면 콧대 높은 범죄자의 자존심인 줄도 모른다. 그걸 손에 넣기 위하여, 15년 전부터 아직도 궁리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집 어디에다 숨겼을까, 하는 것이었다.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을 만든 작은 손 금고가 있을까? 방이나 허술한 창고의 바닥 한 부분을 뜯어내면? 많고 많은 가구 가운데 어느 허술하게 보이는 가구의 저 깊고 깊은 속에 장치한 비밀 서랍일까? 그의 고민은 깊어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더 커진다. 그리하여 그동안 번 돈을 몽땅 가지고 혼자 본명 시드니 파워를 ‘잭 매니엄’으로 바꾸고 영국에 잠입한 상태.

  앨리스 발로 부인의 집을 사야 한다. 그래야 집을 홀랑 뒤져 보석을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돈이 모자란다. 자기 돈으로는 발로 부인의 옆집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필요하다. 발로 부인 집을 사기 위하여 서른 두 살 먹은 과부인지 노처녀인지 하여간 돈 많고 미인인 벨라를 유혹해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 매닝엄은 벨라로 하여금 예전 앨리스 발로 부인의 집을 사게 하고, 신혼여행 이후 줄곧 그 집에서 거주하며, 아름다운 벨라한테 쉼없이 가스라이팅을 가해 이제 다 시들어버리게 만들어버렸다. 이 상태에서 막이 올라간다.


  예를 들어, 잭 매니엄이 벽에 걸려있기는 하나 관심있게 쳐다보는 사람 한 명 없는 초상화 한 점을 슬쩍 집어 내려, 아내 벨라가 물건을 자주 가져다 두는 특정한 장소에 슬쩍 두고, 벨라한테 묻는다.

  “어, 벽이 비었네. 당신이 초상화를 뗐군.”

  벨라는 자기가 안 그랬으니, 안 그랬다고 해야 할 밖에. “아닌뎁쇼?”

  그럼 매니엄은 집에 두 명 있는 하녀 하나하나 불러 네가 치웠니, 물어보고, 당연히 하녀들 역시, 아닌뎁쇼, 라는 대답이 나오면 성경에 키스를 함으로써 진실임을 담보하라고 압박한다. 뭐 꿇릴 것이 하나도 없는 하녀들이야 못할 일이 없다. 그래 성경의 양가죽 표지에 입술을 때고 쭉쭉 키스를 박는다.

  이후에 벨라한테, 그래도 당신이 안 그랬다고?

  벨라 역시 자기가 안 그런 것이 확실하니까 입술을 뾰죡하고 내밀고 자기도 하녀들의 침이 묻은 성경 양가죽 표지에 쭉쭉 키스를 할 밖에. 그러나, 여태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매니엄이 자기가 숨겨놓은 벨라의 장소에 가서 초상화를 가져오면, 벨라는 틀림없이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장소에서 초상화가 나왔으니, 자기가 잠깐 정신이 빠진 사이에 그런 짓을 했다고 믿게 된다. 물론 처음이었더라면 안 그랬겠지만, 이런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남편이 사준 결혼 반지, 예물 시계, 중고지만 어여쁜 브로치, 하다못해 어제 식료품 가게에서 가져온 영수증까지. 오늘도 영수증 좀 보자고 남편이 슬쩍 물어봤다. 분명히 책상 위에 던져 놓았는데 귀신이 곡을 하는지 그것도 없어져 버렸다. 그건 자기가 아니면 버릴 사람도 없는데, 점점 내가 미쳐가는 건 맞는 모양이다. 이런 것이 가스 라이팅. 전부 남편 매닝엄이 한 짓. 이렇게 아내를 미친 여자로 만들어 집에서 합법적으로 쫓아내 정신병원으로 보낸 다음이면 마음 놓고 집을 뒤져 문제의 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게 정말로 될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 15년 전 앨리스 발로 살인사건 당시 초짜 수사관으로 심증은 가지만 발언권이 별로 없어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못했던 형사가, 이제 경위 정도의 계급이 되어 다시 이 집을 방문한다. 그래도 사건의 해결이라는 관점보다, 어떻게 특정인을 계속적인 강박으로 인해 비인간이 되게 만드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재미있다.

  앱 북적북적에 별 넷 반 주었다. 두번째 작품 <로프> 역시 재미있지만 조금 번잡해서 반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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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07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이 작품 정말 재미나던데... (영화보다 더) ㅋㅋㅋ 왜 이제야 이 희곡집으로 처음(?) 소개된 것일까 의아했어요.

Falstaff 2026-09-07 11:04   좋아요 0 | URL
희곡이 워낙 인기가 없어요. 현상문예 공모전에서도 희곡 상금이 단편 상금 절반 정도 되는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희곡은, 심지어 우리나라 희곡도 라틴어로 쓰여 있다는 얘기도 있고, 뭐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얄리얄리 2026-09-07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스등‘..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영화네요.

Falstaff 2026-09-07 11:05   좋아요 0 | URL
넵. 제가 부아이에를 좋아합니다. 추억 돋는 배웁니다. ㅎㅎ

바람돌이 2026-09-07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이거 잠자냥님이 예전에 쓴 글 보고 읽고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이건 꼭 읽으라는 얘기죠. ㅎㅎ

Falstaff 2026-09-07 17:34   좋아요 1 | URL
제가 뭐라고 읽어보시라, 마시라... ㅋㅋㅋ 저야 예전 영화의 추억이 특별해서 말입죠.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