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뜬구름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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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의 중편소설. 그동안 찬쉐의 단행본은 다섯 권을 읽었는데 이 가운데 <황니가>가 가장 읽기 어려웠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독자마저 우울하게 만든 <황니가>는 참 다양하게 독자를 어렵게 만들었다. 순간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고, 아마도 대부분 오해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여간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끝까지 읽기도 어려웠던 찬쉐의 데뷔작. 크. 데뷔작이 이랬다. <황니가>에 비하면 뒤에 출간할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시쳇말로 이도 나지 않은 수준일 정도로.

  <오래된 뜬구름>이 <황니가>와 더불어 찬쉐의 초기 작품군으로 분류한단다. 이걸 알았으면 읽었을까? 그래도 읽기는 했겠지. 중편소설. 2백쪽도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순간도 지나가리니. 책을 읽으며 주문을 몇 번이나 외웠는지, 거 참.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자 조금 덜 주인공 또는 중요한 조연 겅산우(更善无). 그가 꿈을 꾼다.

  우리말 재미있다. 꿈은 꾸고, 잠은 자고, 봄은 보고, 먹음은 먹고, 그림은 그린다. 그냥 이런 생각이 불쑥 들어서 한 마디. 책하고 관계없는.

  겅산우의 꿈속 닥나무의 새하얀 꽃. 근데 그게, 꽃이 말씀이지, “향기 속에 하수도 물을 연상케 하는 혼탁한 냄새가” 섞였다. 그리하여 작품의 시작이: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몹시 무거워졌다. 잠시 후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송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된다. 그저 나 같은 범부라면 새하얀 꽃은 보기도 좋고, 향기에도 취할 만해야 할 터인데, <오래된 뜬구름>의 새하얀 닥나무 꽃은 처음부터 밤새 빗물을 맞아 투둑, 마치 목이 잘리듯 떨어져 내리고 만다. 그러면 선운사 동백처럼 떨어진 모습이 처연하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겅선우의 닥나무 꽃은 “하수도 물을 연상케 하는 혼탁한 냄새가 섞여” 있고 이런 아침 광경을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는 여자들의 하나같이 가늘고 긴 “목이 커다란 독버섯 군락” 같다.

  겅산우의 마누라 무란慕蘭도 이리저리 감추고 몸을 숨기며 쉴 새 없이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 행동이 아주 비밀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닥나무 새하얀 꽃을 따 빻아 넣어 끓인 기괴한 국을 머시고는 밤중에 한 번 또 한 번 쉬지 않고 냄새가 고약한 방귀를 뀌어댄다. 이렇게 쉼 없이 비가 내리고 악취가 풍기는 풍경. 앞서 말한 <황니가>에서 숱하게 본 장면이다. 이 순간 독자는 끙, 신음소리를 낸다. 아이고, 또 시작이군, 하면서.

  아침. 밤비를 맞아 꽃잎이 땅바닥 가득 떨어져 있다. 그러면 앞에 묘사한 것처럼 하수도 물을 연상하게 만드는 혼탁한 냄새가 나니까, 좀 시들시들해야 할 터이건만, 떨어진 닥나무 꽃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송이가 전부 똑바로” 서 있다. 어떻게 연상해야 할까? 꽃받침을 땅에 묻거나 꽃받침이 땅을 디디고 꽃잎과 꽃술이 하늘을 향한 도발적인 모습을 상상하면 될까? 근데 그게 혼탁한 냄새하고는 그리 가깝지 않을 거 같거든. 하여간 처음부터 쉽지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겅산우의 옆집에 사는 여자 쉬루화虛汝華. 이름 좋다. 근데 이름만 좋은 거고, 찬쉐의 초기작품 주인공답게 참 기구한 여자. 엄마가 하도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죽 위를 덮은 때와 기름이 모근과 엉겨 있을 정도였다. 엄마가 다가오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러 도무지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되니까 특별하게 날을 잡아 머리를 감았는데 이게 쉽게 감기나 어디. 물을 부으니까 땟덩이가 모근에 엉겨 그냥 머리카락이 홀랑 다 빠져버렸다. 남편한테 머리에 물을 부어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바가지가 땅에 떨어졌고 그러자 엄마가 벌떡 일어나 아빠한테 더러운 욕을 쏟아내더니 머리카락이 다 빠져 빨간 대머리가 된 채 차가운 물을 아빠 정수리에 쏟아 부어, 아빠는 열을 펄펄 내며 일주일 동안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그동안에 아빠도 머리카락이 홀랑 다 빠져버렸으니 열이 하도 올라 염라대왕전을 들락날락 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너무 무서워진 아빠는 그 길로 집을 나가 담배 파는 아줌마한테 몸을 의탁해버렸다.

  시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라오쾅老況은 세상에 이런 게으름뱅이가 없을 만한 무능력자에 천생 마마보이. 라오쾅은 떨어진 낙나무 꽃냄새에 짜증을 내면서도 불면증을 다스리기 위해 누에콩 볶은 걸 열심히 오도독 씹어먹고 있다. 하여간 누에콩이 수면제 역할을 한다고 하니 그냥 민간요법이라 치자. 근데 그가 갑자기 선언한다.

  “엄마 말이 완전히 다 맞아. 우리에겐 독립적인 생활을 할 능력이 너무 부족하잖아.”

  그러더니 그 길로 좁은 집에다 아직 수태해보지 않은 아내 쉬루화 혼자 남겨두고 엄마 집에 들어가 산다. 그래도 아직 이혼하지 않아 호적상 분명히 아내라서 굶지 말라고 누에콩 한 자루씩 보내주면서.

  근데 라오쾅이 엄마한테 털어놓은 실제적인 가출의 이유는 쉬루화가 원래, 그러니까 본 모습이 쥐였기 때문이다. 책 표지에 쥐가 등장하는 게 바로 이 이유.

  아내가 갑자기 쥐가 되고, 즉 쥐로 변신한다고 굳이 카프카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찬쉐하면 꼭 들먹이는 작가가 카프카이고 보르헤스인 거. 난 좀 불만이다. 그보다는, 특히 <황니가>와 이 <오래된 뜬구름>의 경우엔 프랑스에서 꽃 핀 부조리 문학 같지 않나? 쥐로 변신했다고 꼭 카프카를 들먹일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뭐 그건 감상자 마음이기는 하다.


  하여간 작품은 이렇게 시작해서, 조금 덜 주인공 또는 중요한 조연 겅산우의 바로 옆집에 진짜 주인공 쉬루화가 사니까 언제 한 번은 불이 화르륵 붙어야겠지? 그렇다. 한 번 불이 붙는다. 이들이 신기하게도 같은 꿈을 꾸는 걸로 시작해서. 그리고 쉬루화의 불꽃은 사라지면서, 겅산우는 여전히 옆집에 마누라 무관 몰래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작품은 쉬루화의 가족 간, 남편 라오쾅과 시어머니로 옮겨간다.

  낡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대머리 엄마는 참새를 귀신같이 잡아 잠깐 돌보다가 담벽에 못으로 박아 놓는데 꼭 눈에다 못을 친다. 아빠는 여전히 딸과 유대하며 살기는 하지만 근손실로 인해 허벅지가 빗자루 손잡이처럼 가늘어졌다.

  온갖 은유와 부조리한 묘사와 초현실적 그림을 보는 듯한 헷갈림. 찬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작품을 썼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간 읽기는 읽었다. 읽은 건가, 아니면 읽어 낸 건가? 읽어 치웠다고? 좋아, 좋아. 아무려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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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3-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어휴 리뷰로 다시 읽는데도 두개골이 지끈지끈..
읽기는 했는데 저도 읽어 치운 거에 만족하렵니다....

이 작품하고 비교하니까 최근에 읽은 <세 번째 경찰관>은 아주 쉬운 편이네요. ㅋㅋㅋ (이것도 지끈지끈했거든요.)
 
미국 환상곡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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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은 오브라이언의 두 작품 <카차토를 쫓아서>와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모두 베트남전 이야기였다. 전쟁이라는 독특한 환경, 독특한 비극을 특별한 블랙 유머로 그려낸 오브라이언의 신작 <미국 환상곡>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도서관에 즉각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다 읽고 나서야 작가가 이 작품을 소설로는 21년만에 출간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적어도 작품 속에서 미국 최초의 패전인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등장인물은 없다. 하지만 작가 오브라이언이 육군 보병으로 참전을 한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으리라.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작중 주인공 보이드 핼버슨의 심리가 마치 전쟁중 충격으로 PTSD를 겪고 있는 사람과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도 타당할 수 있다는 전제로 말하자면, 간략하게 소개할 보이드 핼버슨과 앤지 빙의 로드무비 역시 팀 오브라이언의 독특한 블랙유머 적인 문장으로 일종의 PTSD를 벗어나기 위한 한 인간의 발버둥을 그린 작품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1970년. 이탈리아가 아니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작은 도시 베니스 출신의 중고차 딜러(인지 그냥 판매원인지) 오티스 버드송 씨는 매력적인 아내이지만 점점 거대해져 나중엔 거실의 카우치에서 누운 채로 살다 생을 접어야 할 론다 핼버슨을 통해 유일한 아들 보이드 핼버슨을 낳았다.

  아버지의 이름 ‘버드송’은 알고 보니 개명한 거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전후 히피 문화를 접했던 오티스 씨가 당시 좋아했던 그룹 사운드 “러빙 스푼풀Lovin’ Spoonful”에서 착안, 그깟 이름이 뭐가 문젠데 싶어서 어떻게 하면 “골때린”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바꾼, 이른바 새로운 가문의 탄생을 초래하게 될 이름이었다.

  보이드의 당시 이름은 오티스 주니어. 그냥 ‘주니어’라고만 불렀다. 베니스 출신 오티스 버드송 씨가 아마도 중고차 딜러가 아니라 그냥 판매원이었던 듯, 가족을 먹여 살리기는 했지만 풍족했던 적이 거의 한 번도 없던 걸로 기억하는 주니어는 소년시절부터 샌타모니카에서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는데, 이때부터 야심만만한 어린 아이쇼핑 꾼으로 자질을 보여 휘황찬란한 번화가의 마법왕국, 쇼 윈도우 바깥을 돌며 눈을 굴리는 관음증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집안에서는 머리가 커지면서 속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거친 말과 비난을 쏟아내는 아버지 오티스 시니어와 아예 거의 완전히 대화가 끊어져버리고, 뚱보, 그것도 미국 기준으로 엄청난 뚱보로 변신한 엄마를 혐오하게 되면서 일찌감치 가정 속 독립군으로의 자리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제 주니어에게 남은 건 자수성가 하나뿐.

  주니어는 어느 순간 스르륵 오티스 버드송 주니어에서, 버드송이 뭐야, 새타령이 왜 내 이름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보이드 핼버슨이 되었다. 흉물스러운 엄마 론다 핼버슨을 따른 것. 이러니 세상이 달라졌다. 보이드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D를 세 학기만에 중퇴하고 프린스턴 대학으로 가 폴로 선수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숨마 쿰 라우데, 즉 수석 졸업의 기염을 토한다. 이후 미 육군에 들어가 쿠웨이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상이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하트훈장과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끝내주지? 이후 로즈메리 클루니, 로버트 스텍, 팻 히치콕, 세실 B 드밀의 추천서를 받아 유명 통신사의 동남아 주재원으로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다.


  홍콩에서 1년, 자카르타에서 2년을 보내는 동안 미국의 거대 그룹 PS&S 태평양 선박 및 조선의 회장 딸인지는 몰랐지만 처음부터 눈이 맞은 에벌린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다. PS&S 자카르타 지점의 강당에서 열린 초호화 결혼식에는 인도네시아에 상주하는 주요 백인국가에서 온 외교관들과 정부 고위 공무원은 당연히 참석해야 했던 자리였고, 심지어 대통령의 축전까지 받을 만한 대단한 자리였지만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티스 버드송씨.

  콩을 볶는 신혼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미국의 저널리즘은 동남아 지역의 특파원 수를 대폭 감원하기에 이른다. 원래 출중한 결과물을 내온 보이드 핼버슨은 혼자 살아남은 대신 여러명이 해온 작업을 자기 혼자 맡아 그야말로 중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동남아 각국으로 며칠씩 출장을 해야 했던 것도 당연해,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면 사이도 멀어진다는 진리에 입각해 아내 에벌린과의 관계도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하루는 부부가 대판 싸우고 있다가 품에 안고 있는 아들을 순식간에 손에서 놓쳐, 아이가 그만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이게 두번째 트라우마.

  첫번째 트라우마는 그럼 뭐냐고? 이걸 알려드릴까, 말까? 에라 좋다. 어차피 책의 절반도 읽지 않아 독자가 알게 될 터인데 뭘. 위에서 얘기한 보이드의 이력서가 전부 허위였다는 거. 거짓말. 프린스턴, 폴로, 숨마 쿰 라우데, 퍼플하트와 은성무공훈장, 이거 다 싹 거짓말이다. 유명인사 네 명의 추천서는, 추천서 자체가 허위문서였는지 아니면 추천서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이력서에 기록했는지 그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간 보이드는 네 명과 얼굴도 마주쳐본 적이 없다.

  그럼 애초에 가지고 있던 이 첫번째 트라우마의 원인인 거짓말이 어떻게 들통났을까? 이것도 알려드려? 뭐 그러지. 여기까지 왔으니 굳이 숨길 필요 있나?


  에벌린과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할 때, 장인이 회장으로 있는 PS&S의 자카르타 조선소에서 만든 선박 세 채가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만일 미국에서 배를 만들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는 배였다. 규격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얇은 강판, 군데군데 용접상태도 개판이었고, 당연히 설치되어야 했을 장비도 누군가가 어디로 빼먹었는지 달려 있지 않았다. 이런 정보가 보이드의 손에 들어왔던 것. 한참 잘 나가던 보이드는 어느새 퓰리처 상을 꿈꾸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정보가 손에 들어왔으니 그걸 그냥 내버려둬도 바보 아냐?

  이런 모든 건 PS&S가 인도네시아의 관련 공무원들에게 찔러준 현금 뇌물로 통과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결국 선박의 침몰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고, 그것도 무려 거의 시차 없이 세 척이 한꺼번에 태평양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던 거다. 이건 보도만 나가면 대박, 당연히 퓰리처 상 감이었다.

  근데 명색이 거대회사의 회장인 두니가 가만히 있었겠어? 그는 별의 별 인맥과 탐정과 변호사와 깡패들과 심지어 동사무소 직원들까지 동원해 보이드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해, 그의 첫번째 트라우마를 찾아냈다. 보이드가 저질러온 온갖 거짓말을 한 방에 다 까발렸던 것. 그가 한 거짓말만 여기에 써 놓으면 A4 용지에 행간/자간 좁게 하고 10 폰트로 써도 꽉 차게 한 장 분량이다. 그러니까 앞 문단에서 말한 그의 거짓말은 그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정도라고만 감을 잡으시라. 인간 자체가 몽땅 거짓이었던 것. 그걸 홀아비이자 동성애자인 장인 두니가 먼저 만장하신 관계자 여러분께 폭로해버린 것.

  이것으로 보이드의 인생은 종쳤다. 라고 보이드는 생각했다. 이후 아이까지 죽었으니 그는 당연히 이혼당하고, 귀국해서, 소매 체인점 ‘JC 페니’의 지점 매니저로 지내고 있다. 인생이 종치기는. 지점 매니저가 어딘데. 참 배들 불러요. 하여간 보이드의 거짓 때문에 287쪽에서 PS&S의 회장 두니가 실토하듯이 자기가 저지른 “부당이득, 시세조작, 탈세, 금수 조치 불이행, 내부자거래, 사취 모의, 무기수출통제법 위반” 등등을 합쳐 형을 받았다 하면 3백년 형은 너끈할 범죄도 묻혀 버렸다.


  보이드는 이제 뭔가를 끝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2019년 어느덧 49세가 된 그는 토요일 오전에 키와니스 브런치 모임에 참석했다가 중간에 슬쩍 나와 지역사회 국법은행에 가서 템프테이션 38구경 권총을 꺼내, 토요일이라 창구에 혼자 있던 29세 행원 앤지 빙, 2년 동안 서로 추파를 던지기도 했던 바로 그 앤지 빙에게 가방을 던져주며 “30만 달러만 챙겨봐.”라고 무장강도를 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나 어디. 앤지 빙이 대답한다. “아저씨, 이 은행에 있는 돈을 다 모아도 반도 안 되요.” 그래서 서랍이란 서랍, 금고란 금고를 다 뒤져 8만1천 달러 조금 안 되는 돈을 챙겼고, 앤지 빙을 인질 삼아 둘이 함께 낡은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간다. 오래된 전 아내 에벌린의 여권을 앤지에게 건네주고 둘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산타로살리아 호텔에서 주로 국법은행의 돈을 써가며 여드레를 보내고 다시 돌아온다. 앤지 빙. 이 터무니없이 말도 많고, 오지랖도 넓은 아가씨와 인생 다 산 거 같은 남자 보이드 사이에 뭔가 있을 거 같지?

  참고로, 보이드의 상습적 거짓말은 미국에서 대 유행한 전염병의 일종이었단다. 작품 시작이 2019지? COVID-19가 유행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전 미국적으로 거짓말이 그렇게 유행이었다고. 물론 팀 오브라이언의 주장에 의하면.

  자, 이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이제 본격적인 로드무비의 막이 올라가니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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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3-03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을 읽지 않고 이 작품을 먼저 읽어도 될까요?

Falstaff 2026-03-03 08:58   좋아요 1 | URL
아무 문제 없을 거 같네요. 즐기셔요!

yamoo 2026-03-0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은 확실히 재밌을 거 같아욤! 별5개니 무조건 구매각입니다..ㅎㅎ

Falstaff 2026-03-03 15:34   좋아요 0 | URL
ㅋㅋㅋ 대신 나중에 탓하기 없기입니다!

coolcat329 2026-03-03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들>을 언젠가 꼭 다시 읽고 싶었는데, 21년만에 신작소설이 나왔다니 넘 반갑네요.
적립금이 7천 원 넘게 있어서 뭘 살까 고민했는데 폴님께 땡투하고 구매합니다.

Falstaff 2026-03-03 15:35   좋아요 1 | URL
땡투 고맙습니다!!
329님은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믿씁니닷! ㅎㅎㅎ
 
후리 -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카멜 다우드 지음, 류재화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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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개띠 작가 카멜 다우드는 알제리 북서부 항구도시 모스타가넴에서 경찰관 아버지와 중산층 주부 어머니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후리>를 읽기 위해서 독자는 작가의 바이오보다는 알제리 현대사를 먼저 훑어보는 것이 좋다.

  오랜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해가 1962년. 알제리의 식민지 추락은 우리나라처럼 몇 위정자들이 식민국의 작위를 얻어가며 합의서에 도장 콱 찍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손에 얻기 위하여 알제리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부족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했다. 이 싸움에서 알제리인의 저항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에 잘 그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식민국으로부터의 해방 역시 (우리처럼)종전협정에 의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해방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처절한 대가를 치룬 알제리는 그리하여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7년이 지난 1962년에야 독립국의 국기를 올릴 수 있었다. 독립전쟁에 참가해 전투를 하고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당연히 베테랑의 품격을 지킬 수 있었으며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 곳곳에 기념비의 암각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전할 수 있었다.

  알제리의 정식 국호는 알제리인민민주공화국. 사회주의 국가로 시작한 이 나라는 당연하게 국민해방전선(FLN) 일당독재를 유지했다. 초대 국방장관이었다가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부메디엔이 소련, 중국, 동유럽의 본을 받아 석유산업 등을 국유화하는 것은 물론 독재 장기집권을 확립해서 국제유가상승 등으로 1978년까지 잘 살다 갔다. 부메디엔 사후에 집권한 벤제디드 역시 높은 유가 덕택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85년부터 석유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국고가 비기 시작했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독재자는 정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망가지는 법. 1988년부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더니 1989년에는 일당제가 무너지고 이슬람해방전선(FIS)이 등장했다.

  다음해인 1990년에 치룬 총선거에서 해방전선이 의회의원 231석 가운데 188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다.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압승. 이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해방전선이 독재를 시작할 것이 확실한 처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FIS를 불법화하고 이들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반군세력이 무장이슬람그룹을 이루어 10년간 본격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10년 후인 1999년에 대통령에 오른 부테플리카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사면하고 대신 해방군은 해산하여 내전의 종식을 맞았는데, 대 프랑스 독립 전쟁과 달리 내전은 죽이고, 불구로 만들고 재산을 빼앗는 등의 고통을 같은 민족끼리 서로 저질렀다는 데 더 큰 상처를 낼 수밖에 없었다. 부테플리카 정부는 2005년에 이슬람해방군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해 그나마 남아있는 내전의 앙금을 지우려 했고, 실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쨌든 내전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 일 이후로 내전에 관하여 논의하거나, 대화하거나, 입에 올리는 일은 암묵적으로 거부당하고, 백안시하고, 피해가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멜 다우드 역시 피가 끓는 10대 시절에는 이슬람원리주의에 마음이 기울었으나 오랑 대학에 진학해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면서 원리주의의 폭력성이 지나치다는 걸 확인했는지 결별하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가 히잡을 쓰기 시작하자 이혼한 경력도 있다. 이제 다우드는 확실하게 종교에서 멀어졌다. 그는 몇몇 원리주의 입장의 이슬람 지도자 이맘들에 의하여 사형선고인 파트와 선언을 받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슬람을 부정하며, 아랍 문자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그럼에도 계속 쓴다. <후리>가 2024년에 공쿠르상을 받았지만 알제리 내전의 참상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알제리에서는 출판은 물론 읽는 행위, 반입도 할 수 없다. 나도 알제리,하면 프랑스 식민전쟁과 독립전쟁, 그리고 용감한 축구를 하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지, 내전이 있기는 했으나 <후리>에서 읽을 수 있는 처참한 수준이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있었던 일은 언젠가 밝혀진다. 역사가 하지 못하거나 준비중일 때 가끔은 문학이 먼저 밝히려 애를 쓰기도 한다. 이 책이 그런 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후리. 브리태니커 사전에 “천국에서 독실한 무슬림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처녀” 또는 “정화된 아내” “흠 없는 처녀”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실제 생활에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영혼. 그러나 후리는 조금 뒤로 미루자.

  주인공 오브. 2018년에 스물여섯 살. 알제리의 아름다운 항구 오랑에서 어머니 하디자와 함께 살고 있다. 직업은 미용실 주인. 길 건너 맞은편에 모스크가 있고, 젊고 잘생기고 정말 하늘에서 내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맘은 아쉽지만 이슬람원리주의에 입각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히잡도 쓰지 않고, 바지를 입고 다니며, 몸의 여섯 군데에 한 문신 가운데 그게 드러나는 부위도 있어서 오브를 매우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다. 희생절에 맞춰 셔터를 내린 날 미용실 셔터를 부수고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쓸만한 것은 몽땅 훔쳐간 절도범의 뒷배에 혹시 이 이맘이 있는 건 아닐까 여길 정도로. 읽다보면 이맘이 시켜서 그랬다는 건 아니고, 강도를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변호사 엄마를 두어 엄마가 출장을 간 사이, 전부터 사귄 동갑내기 어부 청년과 사랑을 해 몸에 수정란이 착상을 했으나, 청년은 그걸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으로 밀항한 후로는, 갔는지, 갔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임신을 했으니 이것 참. 그럼에도 오브는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딸이라 단정하고 ‘후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품의 제목이 <후리>가 된다.


  오브. 원래 이름은 오브가 아니었다.

  오브가 살던 곳은 하드 셰칼라. 언덕 위에 집이 있고, 건천이 흐르는 척박한 땅에 농장을 지어 살았다. 부모와 언니. 너무 오래 전이라 파편 같은 기억뿐이다. 언니가 물잔을 가만히 들고 있으면서 물잔에 별을 담아 건네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눈을 가리고 숨바꼭질을 하던 것도. 그리도 당연히 그날.

  1999년 12월 31일.

  산에서 산사람들이 내려왔다. 수염 난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해방군이라도 하는. 수염 난 사람들은 하드 셰칼라 주민 약 천 명을 건천으로 데려갔으며, 오브의 가족들도 언덕 위로 데려 올라갔다. 내전이 끝나는 날. 그러나 모든 원리주의자들이 전쟁을 끝낸 건 아니었다. 아니면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마을을 통째로 점령하고, 종교적 판단에 의하여 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에게 파트와를 선언했는지, 아니면 저 태초의 이브라힘처럼 자기 아들을 목 베어 신에게 바치려 했는지, 이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목을 베는 참수를 말한다.

  한 남자가 다섯 살 먹은 오브의 머리를 잡았다. 칼이 예리하지 않았는지, 남자가 초보였는지, 아직 완력이 덜 성장한 청년이었는지, 칼날은 오브의 왼쪽 귀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귀 아래까지 부욱 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지나가며 후두와 성대와 식도와 혀를 갈랐음에도 효과적으로 경정맥과 경동맥을 절개하지 못한 상태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브. 오브는 아프지 않다. 아마도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되었거나 죽음 바로 이전의 실신 비슷한 상태였는지 모른다. 눈에 옆에 누워 참수의 칼을 기다리는 언니가 보인다. 그런데, 언니가 말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무엇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아니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눈을 감는다. 오브는 죽어가면서 무슨 뜻일까 잠깐 생각하고는, 절대 다시 뜨지 않을 눈을 감는다. 절대, 절대로 뜨지 않을. 적어도 이곳 언덕의 건천에서는.


  몇 시간 후 붉고 푸른 빛과 함께 목의 절반이 잘라졌지만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오브의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암전. 어딘가 판판한 곳에 실려지고, 몸이 움직이다. 누군가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 것 같다. 또다시 암전. 그곳은 가장 가까운 도시, 그러나 멀리 떨어진 동부의 작은 도시 렐리잔에 있는 병원이었으며, 귀에 자기 말이 들리냐고 묻던 여자는 지금 오브의 두번째 엄마를 맡은 용감한 하디자였는데, 또다시 붉고 푸른 빛과 함께 몸이 흔들린 다음에, 오브는 성대를 잃어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것 말고도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턱 아래로 이어지는 17센티미터의 꿰맨 자리 때문에 오브는 위고의 <웃는 남자>와 위치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웃는 소녀>가 되고 말았다.

  오브는 두가지 언어로 말한다. 밤night 같은 언어와 초승달 같은 언어. 안의 언어와 밖의 언어. 소위 말하는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다. 디즈니 만화 도널드의 목소리와 비슷한 걸 작은 소리로 낼 수는 있다. 호흡하기 위하여 인후에 박은 튜브를 통해 숨도 쉬고 말도 나온다. 일주일에 한 두 번 튜브를 갈려면 소독액으로 손을 깨끗하게 씻고 먼저 목에 꽂힌 튜브를 뺀 다음 완전히 살균한 튜브로 갈아 끼운다. 혀와 식도에 큰 문제가 있어서 음식은 액체 상태로 갈아 그저 목을 넘길 뿐이다. 이렇게 21년을 살았다. 그래서 2021년이 됐고, 스물여섯 살의 미혼 임산부가 되었으나 아직 엄마 하디자도 모른다. 그리하여 오브는 저 변두리 의사의 처방을 받아 매우 위험한 임신중절약 세 정을 가지고 있어, 자기 속의 후리를 없앨 작정이다. 엄마 하디자가 자신의 성대 수술 가능 여부를 묻기 위하여 브뤼셀의 외과의사에게 간 며칠 안 되어.

  그러다가 마음을 바꾼다. 아직도 계속되는 종교와 남자들의 폭력, 비이성적 사고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게 틀림없다. 자신한테 저질러졌던 폭력, 범죄, 참수라는 형태로 드러난 이브라힘의 희생제의가 있던 곳, 하드 셰킬라에 가 보아야겠다. 마음먹은 오브. 이슬람 국가에서 젊은 여자가 혼자 여행을 해? 그것도 희생절에? 결코 쉽지 않은 길.

  슬픈 이야기. 슬픔이 슬픈 이야기로만 되어 있으면 진정한 비극이 아니다. 좋은 비극이 되려면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들어 있어야 하는 법. <후리>가 그렇다. 슬프고 아름답다. 하기 힘든 이야기를 용기 내어 드러낸, 그래서 극동의 한 독자가 지역의 아픈 내력을 알게 해준 작가가 고맙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에 관하여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문학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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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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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석좌교수가 쓴 작품 해설을 조금만 빌려오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데이먼 갤것은 196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입법수도인 케이프타운에서 대학을 다니며 드라마를 전공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1963년생 토끼띠가 유난한 것처럼 남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인지 이들은 세계적인 암덩어리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황금 같은 20대에 넬슨 만델라가 27년만에 감옥에서 석방되고 몇 년 후 민주주의적 투표에 의하여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들은 그들의 피부색과 관련 없이 모두 일정부분 아파르트헤이트 적 요소를 띨 수밖에 없다고 왕교수는 주장한다. 일찍이 존 쿳시 번역 등으로 이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전문가가 쓴 해설이니 믿어 마땅하리라.

  그저 시간이 이들의 상처를 아물려 이젠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작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 바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을 낸 문학사상 뿐만 아니라 왕은철 교수까지 작품의 제목인 “약속”을 스와트 가족이 하녀인 살로메에게 살로메와 아들 루카스가 살고 있는 비뚤어지고 지붕이 새는 방 세 칸짜리 낡은 집의 소유권을 주자고 가족,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아내 레이철의 죽음의 침상에서, 레이철의 요구에 남편 마니가 확약했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물론 문학사상과 왕은철의 주장은, 작품 속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이 “약속”이 흑인 하녀에게 다 쓰러져가는 집을 증여하기로 부모 들이 합의한 것이라는 막내딸 아모르의 굽힘 없는 증언 때문에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엄마 레이철이 죽은 후에 남은 가족, 아빠와 아들 안톤, 딸 아스트리드와 아모르. 아빠와 아스트리드는 아예 처음부터 이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거나(아빠), 무시하기로 마음먹거나(아스트리드),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결국 뭉개버리거나(안톤),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의 약속을 지키려 든다(아모르).

  그러면 작품 속에 실제 약속의 장면은 어땠을까? 39~40쪽에 나온다.


  [나한테 약속해 줄래, 마니?

  그래, 약속할게.

  난 정말이지 살로메가 뭔가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모든 일을 해줬잖아.

  알겠어. 아빠가 말한다.

  당신이 꼭 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직접 말해 줘.

  꼭 약속을 지킬게. 아빠가 목이 멘 소리로 말한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1986년 엄마가 죽기 두 주일 전에 막내딸 아모르가 집이 잘 보이는 불탄 나무 아래 바위가 겹친 곳에 웅크려 앉아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는 주장하는” 부부간의 약속 전부이다. 일종의 마지막 유언을 마친 엄마와 아빠는 “마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처럼” 서로 엉겨 울었다. 아모르는 이 장면을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즉 기독교의 신적 존재를 걸고 한 약속 정도로 깊게 각인한다. 게다가 이 “약속”을 들은 장소는 아모르가 전에 벼락을 맞아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전기 충격으로 새끼 발가락 하나를 잃은 곳이다. 그래서 열세 살의 아모르한테 이곳에서 들은 약속이 더욱 성스럽게 들렸을 수도 있다. 살로메에게 줄 “뭔가”를 더욱 크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바위 틈에서 내려와 걷다가 또래 흑인소년 루카스를 만난다. 살로메의 아들. 41~42쪽에 이들의 대화가 나온다.


  안녕, 루카스, 그녀가 말한다.

  어떻게 지내, 아모르.

  네 엄마 일은 정말이지 안됐어, 그가 말한다.

  (중략)

  이제 너희 거야, 그 집. 아모르는 말한다.

  루카스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본다.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그 집을 너희 엄마에게 주라고 했어. 기독교인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아.

  우리 집이라고?

  그건 이제 너희 집이 될 거야.


  독자 나는 39~42쪽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 난리 났군.”

  내가 짐작한 난리는 아빠가 죽어가는 아내 레이철에게 하녀 살로메한테 “집”이 아니라 “뭔가”를 주겠다고만 약속했음에도, 살로메와 어린 루카스는 주인 나리가 자기들한테 집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기독교인이니만큼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을 것 같았다. 즉 “약속”이 아닌 “오해”가 이렇게 시작하리라 여겼다는 말이다. 아모르의 거짓말 때문에. 아니면 적어도 아모르가 자기 마음대로 확대시킨 약속이 진실인 양 말했기 때문에. 말이 곧 또다른 약속이니까.

  아빠 마니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죽음의 침상에서 나한테 유언 비슷하게 요구한다. 살로메가 무엇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이럴 때, 당신 같으면 “싫어, 안돼.” 할 수 있겠어? 아마도 틀림없이 그저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지 않을 심정으로 “약속할게.” 했을 것이다. 만일 정말로 살로메의 집을 그냥 주자고 했을지언정. 방을 나선 순간 잊을지라도. 그리하여 마니가 장례식 후 식사 자리에서 전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갤것 또는 아모르는 끊임없이 말한다. 아빠가 엄마한테 약속했다. 살로메한테 살로메와 루카스가 살고 있는 집을 주기로. 거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스와트 집안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하잘것없는, 지붕이 새고 비뚤게 서있어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을 주는 아주 사소한 적선일 수도 있는 약속. 아니, 갤것이 말하는 게 아니다. 아모르가 주장하고, 선한 루저 안톤 오빠가 동의하고, 나머지 가족과 친척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약속이다. 갤것은 그냥 그걸 백지에 옮겼을 뿐이다.

  다시 왕교수의 해설.

  “(갤것이)대학에서는 드라마를 전공했다. 그의 소설에서 희곡이나 영화에서 쓰이는 다양한 기법이 활용되는 이유다.”

  왕교수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했을까?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다중 시점 작품이라서? 문장이 조금 별나서? 그건 요즘 작품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건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이쪽으로 포인트를 맞추는 것 같다.

 과감하게 추리하자면, 갤것은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오독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아내 레이철과 남편 마니의 대화는 큰 괄호 […] 안에 들어 있다. 아모르가 부부의 대화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집 밖에 있는 바위 틈에서 유리창 안쪽의 엄마 아빠가 나눈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즉 큰 괄호 안의 내용으로 “인식”했다. 어쩌면 아모르는 대화를 나누는 부모의 입모양과 대화 후에 서로 울며 포옹하는 장면 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약속 자체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지만. 어쨌건 아모르가 주장하는 약속은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되면,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거짓을 엉뚱하게 진실로 인식하고, 혹은 거짓임을 알지만 자기가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한 반작용으로 자신 혼자 그걸 지키려 평생을 외롭게 기다리는 여성의 이야기로.

  그러니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독자여, 작가에게 휘둘리지 말자.


  이미 이 책을 읽은 분은 모르겠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이 갤것의 <약속>을 선택하시려면 내가 주장하는 바를 꼭 기억하셨다가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아모르는 “살로메가 무언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걸 자기 마음대로 집의 소유권으로 확대해 그 가족으로 하여금 믿게 했거나, 아예 듣지 못하고 보기만 한 것을 그렇게 인식해 그걸 약속이라고 평생 알고 살았거나, 마지막으로, 스스로도 자기가 말한 약속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남은 생을 그렇게 곤고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만일 내 주장에 일면 타당한 구석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열린 결말을 가진 소설로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작품일까? 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 스와트 집안 사람들이 누구 한 명 빼놓지 않고 전부 선병질 적 기질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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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2-27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서하면서 이렇게 궁금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한건지, 아님 오독한건 아닌지 하고요.
만약 이 책 읽으면 저도 그 부분에 대해 꼭 생각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2-27 15:25   좋아요 1 | URL
넵. 꼭 읽어보시라고 말씀 드리지 못하겠지만 혹시 기회가 닿으면 한 수 훈수 바랍니다. ^^

잠자냥 2026-02-27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에 쓴 리뷰를 살펴보니 전 이 부분을 이렇게 썼더라고요.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 마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자신이 아플 때 헌신적으로 돌봐준 살로메에게 무언가 꼭 주고 싶다고. (....). 그런데 이 장면을 때마침 그 방 안에 있었던,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아모르는 가족 중에 가장 존재감이 희미하다) 이 소녀가 목격한 것이다. 아모르는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한 그 약속을 아빠가 반드시 지킬 것이라 생각하고는 또래인 루카스에게 장담하듯이 말해버린 것이다.”

저도 이 작품 읽으면서 내내 소녀가 집을 주겠노라 약속했다고 믿어버린 게 아닌가 그래서 자기가 자기 말을 지키려고 더 그렇게 산 게 아닌가 싶었어요. 작가는 약속이 진짜로 존재했든 아니든, 약속을 지킬 의무와 상관없이 그 집이 있는 땅은 본디 흑인들의 땅인데 백인인 너희들이 약속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 같았고요. 암튼 제 생각입니다.

Falstaff 2026-02-27 15:29   좋아요 0 | URL
자냥 님은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했잖아요.
문제는 쇤네 경우에.... 어? 이걸 약속한 게 아닌데... 이거에 너무 함몰되다 보니까 진짜 주제를 계속... 뻔히 알면서도 놓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죠.
출판사와 왕교수는 무슨 마음으로 저런 카피를 날렸는지 거 참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잠자냥 2026-02-27 15:38   좋아요 0 | URL
집을 준다고 했다고 아모르 옆에서 들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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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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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롤드 핀터는 1930년에 동런던에서 동유럽 출신 유대인 가족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아쉬케나지이다. 청소년 시절인 1942년부터 48년까지 6년 동안 동 런던에 있는 해크니 문법학교에 다니며 영어, 연극,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졸업 후에 왕립연극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중도에 때려 치운다. 아마도 징집영장을 받았고, 이에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해 징역의 갈림길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벌금형만 받고 끝낸 다음에 다시 몇몇 연기 학교에서 배우 수련을 받으면서 배우와 극작가를 겸한다. 인생의 절정기를 향해 질주하는 시기가 와서 자연스레 사랑도 하고, 결혼도 몇 번 하고, 아이도 낳고, 연극도 적극적으로 해서 실질적으로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생일 파티>를 공연해 대박을 친다.

  핀터가 비록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그리 편하게 살지는 못했다. 영국 역시 골수 우익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런던 사람들이 “히틀러한테도 배울 게 있다니까!” 하며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장면은 소설책에서도 몇 번 나왔을 정도였으니. 핀터도 해크니 거리에서 이들한테 린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일 폭격기에 의한 공습. 이런 폭력을 당한 경험 또는 상처는 핀터의 작품 속 특유의 “폭력과 공포, 위협” 같은 요소를 갖게 만들었단다.

  좋다. 근데 문제는 이이의 작품이 영국의 국가대표급 “부조리 연극”이라는 거다. 부조리극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래서 절판된 핀터의 책을 도서관에서 구해 읽어본 것인데, 사실 “부조리극” 딱 한 가지 조건만 가지고도 실제 공연을 보지 않은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가 무지하게 힘들 터, 여기에 핀터 특유의 폭력과 공포, 위협을 팍팍 가미한 “희극”이기까지 했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정직하게 얘기해서, 나는 두 희곡을 읽으며 이것이 희극, 코미디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읽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도무지 영국의 국가대표급 부조리극은 아닐 거 같은데, 뭐 이렇게 궁시렁거리다가 작품을 다 읽고 해설을 들춰보니, 아이쿠, 다시 읽어야겠구나, 뒤통수 팍, 얻어맞은 거 같았다. 그렇다고 진짜로 다시 읽어볼 정성까지는 없고, 이미 읽은 것을 뇌 속에서 재배치했을 뿐이니 그게 얼마나 합당하지 않은 감상일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극작가의 작품에 대한 독후감은, 아 어떡하지? 안 쓸 수도 없고, 그래 생각나는대로 조금만 써볼 터이니 읽는 분들도 그냥 가비얍게 훅 한 번 읽고 지나가시라.


  희곡 두 편이 실렸다. <벙어리 웨이터 Dumb Waiter>와 <핫하우스 Hothouse> <벙어리 웨이터>를 위주로 쓰겠다. 앞쪽에 실리기도 했고, 조금 더 주목받은 작품이다. 1960년 1월에 햄프스테드 연극 클럽에서의 초연이 끝나자마자 영국왕실의 요청으로 왕립극단이 3월에 다시 공연했을 정도로 주목받았나 보다. 우리나라 청와대에서는 연극 공연 안 하지? 하긴 대통령이 뭐간디, 가서 보면 되지.

  먼저 “벙어리 웨이터”가 뭘까? 장소는 지하실 방. 지하실의 특징은? 창문이 없다는 거. 즉 들어온 문이 아니라면 이곳에서의 탈출이 아예 불가능한 장소라는 의미다. 벽쪽에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그래서 등장인물도 단 두명이다. 벤과 구스.

  벤은 왼쪽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고, 구스는 오른쪽 침대에 앉아 다분히 부조리 연극 답게 이유 없이 신발끈을 묶었다가 풀고, 풀었다가는 구두 속에서 난데없이 성냥갑을 꺼내기도 하고 담배갑을 꺼내기도 한다. 부조리극 좀 읽어본 독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성냥과 담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관단총이나 장갑차 정도가 신발 안에서 나와야 이게 뭐지, 할 수준이지 그것 가지고는 뭐.

  이들이 이 지하실 방에 들어와 뭔가 먹기도 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포유류는 무엇을 먹으면 일정 분량의 잉여분을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그래서 구스가 무대 왼쪽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퍼더덕 푸닥거리 해산을 한 번 하고, 매화타령을 했으니 쪼그려 쏴 식 수세식 변기의 줄을 당겼고, 줄을 당겼지만 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구스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다시 등장한다. 찜찜하겠지? 그래서 또 화장실에 들어가 줄을 내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번에도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이런 낭패가.


  여기까지 읽었는데도, 독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 두 출연자들의 직업이 무엇인고 하니, 살인청부업자다. 벤이 신문기사를 구스한테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기사인가 하면, “87세의 노인이 길을 건너려고 한 거야. 그런데 차들이 너무 많았지. 알았어? 노인은 그 길을 어떻게 건너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는군. 그래서 화물 자동차 아래로 기어갔다는 거야. 화물 자동차가 출발했고 그를 치었대.”

  이런 식으로 주로 죽는 이야기. 사람에 국한하지 않는다.

  “8살짜리 어린애가 고양이를 죽였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 응? 8살짜리 어린애가 고양이를 죽이다니! 남자아이가 죽였대? 여자아이였어. 여자아이가 어떻게 죽였어? 그 아이는― 쓰여져 있지 않은 걸”

  “잠깐만 기다려봐. 이렇게 쓰여 있어 ― 11살 된 여자아이의 오빠가 공구실에서 그 일을 목격했다.”

  노인의 죽음. 여자아이가 고양이를 죽인 일을 벤이 마치 중요한 사건인양 구스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사실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라서 여기까지 진도가 나갔건만 형광등 비슷한 독자인 나는 이들의 직업이 청부살인자인 줄도 몰랐고, 이 드라마가 심지어 “희극” 코미디인 줄도 몰랐다. 그러니 이게 재미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만일 정말 무대극이었다면 배우들이 나누는 대사의 억양이나 말투, 발음 같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행위의 과장 같은 걸로 벌써 몇 번의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희곡은 드라마를 보는 행위가 선행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아, 그러나 내가 사는 촌구석에서 해럴드 핀터의 작품이 무대에 오를 날이 있기는 있을까? 땅 팔고 (땅? 땅도 있어? 아, 그건 없어서 못 팔겠다), 아파트 팔고, 주식 팔고, 기타 등등 다 팔아서 서울 18평 아파트 전세라도 들어갈까?


  궁상은 이만큼 떨었으면 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벙어리 웨이터 Dumb Waiter가 뭘까? 벽에 달린 작은 엘리베이터. 주로 음식을 주문하고, 주문한 음식을 주방에서 만들어 올려 보내거나 내려 보낼 때 쓰는 작은 음식 이송용으로 쓴다. 저번에도 얘기했는데, 앨리 스미스의 <호텔 월드>에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장난으로 거기 들어갔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추락사하는 그런 거. 동네 웬만한 2층짜리 중국집 가도 짜장면, 탕수육. 이거 타고 올라온다.

  살인청부업자 벤과 구스한테도 이 벙어리 웨이터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명령지가 도착한다. 이럴 때마다 두 킬러들은 신경이 곤두서겠지? 근데 엉뚱하게도 벙어리 웨이터 말고 무대 오른쪽의 방문 아래로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밀봉된 봉투. 벤의 지시에 따라 봉투를 뜯어보는 구스.

  뭐가 들었어? 성냥이야. 성냥? 응. 이리 줘봐.

  아까 구스가 신발끈을 묶었다가 풀었을 때 신발 속에 성냥갑이 들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등장하지 않는 빅보스 또는 자신들의 정보를 알아낸 적들이 성냥 몇 개비를 봉투에 담아 준 거다. 빅보스라면 큰 문제는 아닌데 만일 이들이 성냥갑만 있고 성냥개비는 없다는 걸 알고 마치 적선하듯 성냥개비 열 개를 준 거라면? 이거 심각한 일이다. 희극에서 말이지. 긴장해야 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불안과 폭력의 공포를 느껴야 마땅하다. 코미디니까. 근데 문제는 아직도 독자인 내가 이 드라마가 코미디인 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

  이런 상황이니 극이 재미있고 없고 따지기 전에, 도대체 지금 두 등장인물이 어떤 내용을 연기하고 있고,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는 거다. 지금 이들이 머물고 있는 지하 안가가 버밍엄이라서 축구팀 웨스턴빌라와 토트넘 훗스퍼의 시합을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만 따따부따 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성냥개비 열 개라니.


  그래, 그래. 다시 읽어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기는 하겠다. 좋아, 시간도 많은데 그렇게 해보지 뭐. 하지만 그렇다고 독후감도 다시 쓰겠다는 건 아냐. 같은 책을 읽고 느낀 걸 다시 쓰는 일이 여간 피곤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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