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인의 노래 1 - 서부의 목소리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7
노먼 메일러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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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먼 메일러. 소설가인 건 확실한데 이이의 작품을 읽어보면 이게 소설인지, 논픽션인지, 저널리즘 기사인지 헛갈린다. 이 책이 내가 읽은 세 번째 메일러의 작품인데, 다른 것들의 소감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생인 메일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하버드를 우등졸업해 애초 장교 임관이 가능했으나, 전쟁에 관한 실화 같은 소설을 쓰기 위하여 스스로 사병 입대를 지원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 수십 차례 작전에 투입된 바 있고, 승전 후 일정 기간 동안 일본에 주둔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이이의 초기 대표작 <나자裸者 와 사자死者> 즉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이때 메일러의 나이 스물다섯. 이 책이 뉴욕의 종잇값을 치솟게 만들 정도로 히트를 치는 바람에 젊은 메일러는 일찌감치 돈벼락을 맞아 버렸다. 그래서 평생 여섯 번 장가드는 게 가능했을까?

  1968년, 마흔다섯 살 때에는 1967년에 있었던 반 베트남전 시위, 펜타곤까지 행진을 다룬 책을 써서 퓰리처 상을 받았고, 1979년 쉰여섯 살에 오늘 독후감을 쓰는 <처형인의 노래>로 두번째 퓰리처 상을 받았다. 이게 내가 읽은 메일러의 전작인데, 이것 말고도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와장창 있지만, 이 세 편을 읽을 소감으로 말씀드리자면, 소위 저널리즘 픽션 또는 논픽션 소설이란 장르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해 이제 메일러는 그만 읽기로 결정했다. 다큐멘터리면 다큐멘터리고, 소설이면 소설이지, 논픽션 소설이 뭐 말라빠진 장르야? 대개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

  근데 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에 입각한 의견일 뿐, 당신 입맛에 맞으면 메일러 만큼 현장 취재를 실감나게 소설 형식으로 쓰는 작가도 별로 없으니 그냥 꾸준히 읽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메일러가 “게이 탈레즈, 트루먼 카포티, 헌터 S. 톰슨, 조안 디디언, 톰 울프와 함께 사실 저널리즘에서 문학 소설의 스타일과 장치를 사용하는 장르인 '창작 논픽션' 또는 '신저널리즘'의 혁신가로 평가받고” 있다는데, 다른 작가들은 별개로 하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은 ‘톰 울프’를 예의 주시하시압. 우리나라에 번역해 나온 소설은 <허영의 불꽃> 한 편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것도 절판. 하지만 아휴, 진짜 타의 모범이 될 만큼 재미있는 B급 대중소설이니 우연히 눈에 띄면 주저하지 마시라.


  작품의 주인공은 개리 마틴 길모어. 역시 실재 인물이었다. 포틀랜드에서 출생해 유타 주 프로보 시에 살았다. 길게 말고 짧게. 개리는 어디에서도 길게 살아본 적이 없다. 한 군데 빼고. 교도소. 열세 살 때, 이땐 엄마 베시 길모어와 함께 포틀랜드에 있을 때였는데, 처음 소년원에 들어가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은 이후 그의 주민등록초본은 주 소년원에서 오리건 주립 교도소와 일리노이 메리언 교도소 주소로 진화,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사촌 여동생 브렌다. 브렌다가 여섯 살 때 사과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때 나무 아래에서 일곱 살 게리 오빠가 떨어지는 브렌다를 붙잡아 무사한 적이 있어 가까이 지냈다. 브렌다가 매사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잘대는 성격이었던 반면, 게리는 조용하고, 정중했고 이후에도 사촌 누이가 곤경에 처하면 기꺼이 도와주었다는데 어떤 일로 어떻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게리가 오리건 교도소에 있을 때 브렌다가 편지를 썼다. 답장에서 게리가 말하기를, 자기 때문에 가족이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며, 출소하면 조직 폭력배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자기 꿈이라고 했다. 중학교 졸업의 학력이지만 교도소 안에서 상당한 독서를 한 듯 어려운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으며 편지지 여백에 작은 그림을 그려 보내기도 했다. 사실 게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지만 아빠도 교도소를 이웃집 다니듯 했기 때문에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것처럼 “스스로의 소질을 계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게리한테 편지가 왔다. 이번에 가석방이 있을 예정인데 브렌다하고 다른 한 명이 연대보증을 서 주면 자기도 가석방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게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온 브렌다는 자기 친동생 토니도 설득해 연대보증을 서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별 생각없이 인감도장을 찍어준 후에야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30년 가까이 만난 적 없는 남자의 보증인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때는 늦었다. 게리는 악명높은 일리노어의 메리언 교도소에서 나와, 예정대로라면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솔트레이크를 거쳐 프로보로 와야 하건만, 그간의 오랜 교도소 생활을 벌충이라도 하듯 비싼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다. 술을 약간 마신 상태로.

  일단 교도소라는 우물 안에서 나왔으니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다. 김선우의 “폴짝인” 운운하는 시에서 내가 말한 적 있다. 개구락지가 우물에서 뛰쳐나와 넓은 세상을 보고 “빌어먹을, 하늘이 저렇게 커다랬어?” 놀라면서 세상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가기 시작했을 때, 황새, 너구리, 뱀 같은 포식동물이 그걸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지 몰랐느냐고. 머리통이 커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바람에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하거늘, 세상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게리 역시 일일이 《공통수학의 정석》 첫 장부터 열어볼 생각도 없다.

  하여간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니, 기껍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흔쾌하게 손을 내민 사람이 제화점을 하는 큰이모부 벅. 구개파열 수술 자국이 남아 있는 강골의 사나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늘 온화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구개 수술 흉터를 놀리는 아이하고는 무한 싸움을 불사했다. 벅이 게리한테 자기 제화점에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일단 자신의 집에서 아내이자 게리의 큰이모인 아이다와 함께 셋이서 살자고 제안해 그렇게 한다.

  게리의 교도소 기간이 너무 길었다. 정상적이 아니고,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절제와 조심 같은 것이 전혀 몸에 익숙하지 않다. 주급을 받으면 거의 전부 맥주 마시는 데 사용하고, 벅 이모부한테 따로 돈을 요구하여 냉장고에 맥주를 쟁여 놓고 상습적으로 들이켠다. 벅의 제화점이 말이 제화점이지 구두수선을 주업으로 하는 작은 점포에 불과하여 게리의 식대와 용돈을 대기가 힘든다. 게다가 술이라는 것이 비록 크지 않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로를 치게 만든다. 절제를 모르는 게리가 치는 사고는 좀 더 크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차근차근 기초공통수학의 정석부터 풀 수밖에.


  게리에게 애인이 생겼다. 아이 둘이 있는 이혼녀 니콜. 어린 시절에 아빠 친구한테 성폭행 당한 상처가 있어 그게 살면서 마음의 흉터로 남은 것처럼 보이는 스무 살 미인. 게리는 서른 다섯. 둘은 서로에게 빠진다. 빠져도 심각하게 빠진다. 게리가 숙소를 번의 집에서 니콜의 집으로 옮긴다. 화르륵 타버리는 사랑. 니콜이 견디지 못하고 엄마 집으로 간 사이, 여러가지로 갈등에 싸인 게리는 정신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니콜의 여동생 에이프릴과 함께 무리를 해서 산 소형 중고 트럭을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주유소에 가서, 별 생각 없이 총을 들고 사무실에 진입해 현금 수납기를 털고, 당번 중인 20대 건실한 유부남을 화장실로 끌고 가 엎드리게 한 다음, 뒤통수에 대고 두 발을 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신발과 바지에 피를 묻힌 상태로 차를 몰고 에이프릴과 함께 모텔로 가서, 다시 모텔을 지키고 있던 또다른 20대 건실한 유부남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다. 현장을 빠져나오다 권총을 풀숲에 던져 버렸는데, 워낙 예민한 자동권총이라 관목에 걸렸는지 격발이 되어 게리 역시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총을 맞는다. 이 살인강도 행위의 직접적 원인은 중고 소형트럭의 잔금을 지불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방법 말고는 게리의 생각으로 돈이 생길 구멍이 없으니까. 트럭을 사지 않으면 되는데 그것 역시 생각이 닿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근데 직원 두 명은 왜 죽였을까? 돈만 가져 나오고 그들을 꽁꽁 묶어 두면 안 됐을까? 그냥 죽인 거다. 정말로 이렇게 진술한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다른 사람, 죽은 자와 죽은 자의 가족들한테는 전혀 관심이 닿지 않으니까 별 생각 없이 죽일 수 있었겠지.

  게리는 당연히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여기까지가 1부. “서부의 목소리들.”


  나는 2부 “동부의 목소리들”에서는 다른 사건이 등장해서 서로 먼 연결고리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2부로 접어들면 이제 미국내 사형제도와 사형집행을 둘러싼 법정 다툼과 10년 만에 재현하는 사형집행을 두고 저널리즘 사이의 추한 비즈니스 다툼, 사법부 내의 복잡한 의사결정 같은 것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상세해도 너무 상세하게. 그래서 읽는 독자는 숨 넘어갈 정도로 지루하게 만든다. 두 권 합해서 1,760쪽이 넘어가는 길고 긴 장편 소설. 노먼 메일러는 그의 주특기 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별의 별 등장인물을, 거의 전부 실명이라고 하는데 그건 뭐 알 거 없고, 다 등장시켜 인터뷰하고, 녹음한 거 타이프하고, 미주알고주알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사람을 콱 질리게 한다.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 읽다가 지루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과하게 상세하다.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라고 써 놓았으면 아예 읽을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을. 다큐면 다큐고 픽션이면 픽션이지 이게 뭐람.

  이 책에 관해 할 말이 많다. 아직 반도 안 했다. 사형 집행 반대의 대의를 외치다 보니, 사이코패스가 틀림없는 게리 길모어를 어쩌면 당연히 과하게 분식시킨 것, 피해 가족이 순식간에 작품에서 실종되는 일 등등.

  그리고 생명권. 세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자기 목숨. 맞지? 게리 길모어는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항소를 포기하고 법적으로 명시한 시일 내에 사형이 집행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형 반대 집단은 집행을 멈추기 위하여 갖은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이를 방해한다. 법적으로 사형을 받은 사형수가 법적 하자 없이 죽겠다는데 왜 그걸 말려? 목숨보다 온전히 사적인 것이 어디 있다고? 사형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개별적 사람을 뜻하는 자유인들의 생명 포기권, 즉 자살한 권리는 왜 정당하게 취급받지 못하는지 나는 조금 의아하다. 임신중단이 당연히 임신한 사람의 권리이듯, 자기 생명의 포기 권리도 인간의 천부 권리 아닌가 싶다.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마감할 수 있도록... 그만 하자. 조금 더 하면 정말 오지게 얻어 터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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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마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76
바를람 샬라모프 지음, 이종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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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를람 티호노비치 샬라모프는 1907년에 러시아 블로그다에서 러시아정교 세습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에 나름대로 유명한 도시 야로슬라브가 있다. 거기서 정북 방향으로 모스크바에서 온 만큼 더 가면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도시가 블로그다. 이곳에서 세습 사제를 했다니까 팔자 좋은 집안이었다고 생각하지? 조금은 맞는다. 하지만 1907년생 샬라모프가 열 살이 되자마자 러시아 혁명이 터져, 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볼셰비키들이 모스크바에 있던 대성당을 폭파시키는 일이 벌어졌을 만큼 인민의 적인 종교를 거덜내기 시작했으니 이이의 팔자는 일찌감치 찌그러졌을 수밖에.

  1920년이면 샬라모프의 나이 열세 살 때. 그는 과감하게 신앙을 잃고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정교 사제인 아버지가 벌컥 화를 냈을 거 같지? 그러지 않았단다. 이 사제님도 직업이 사제일 뿐 속마음은 왼쪽으로 팍 치우쳐 심지어 10월 혁명도 지지했다니까 말 다 한 거다.

  그러나 혁명으로 집권한 소비에트는 이제 전세계 공산주의의 어머니로 우뚝 서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세상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권력투쟁에 돌입, 70년 후, 실패한 건 공산주의요, 성공한 건 1인 독재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열세 살에 무신론자를 주장한 샬라모프는 아빠가 교회 사제라서 국가로부터 교육지원을 받지 못해 모스크바 근교의 가죽공장에서 2년 동안 무두장이 일을 배우기도 했고, 이후 드디어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 법학을 공부했다. 이 와중에 틈 나는 대로 시도 쓰고 러시아와 유럽, 미국 등의 문학작품도 탐독했다.

  좀 자세하게 말하는 이유는, 《콜리마 이야기》에서 작중 주인공급 등장인물이 콜리마의 산악지역에 있는 금광에서 채굴 작업자로 강제노동을 하는 먹물 출신 법학도 정치범이며, 굳이 법을 공부했다고 고백해 차별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을 지경을 만났을 때 하필이면 둘러대는 전 직업으로 무두장이를 선택한 일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걸?


  그런데 샬라모프가 기껏 고른 정파가 하필이면 트로츠키파. 이러니 뭐 되는 게 있겠어? 급기야 소련혁명 10주년 기념 연설회에서 “스탈린 타도”를 외치다 잡혀 3년형을 받았는데, 스무 살의 젊디젊은 청년 샬라모프는 끝내 판사의 판결문을 인정한다고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1년에 석방되어 식민지 개척을 위해 콜리마에 가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받았을 때, 배포 좋게 호송인들에게 강제로 호위를 받지 않는 한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입이 방정이지, 그래 결국 1937년 자기가 말한 대로 그대로 됐다.

  1937년이면 1년여에 걸친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 기간. 여기에 용코 없이 걸려들었다. 하물며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조차 거의 언제나 한밤중에 체포하는 관행이 자신한테 닥쳤을 때 잠옷바람으로 달려가는 걸 바라지 않아 늘 외투 차림으로 침대에 들었을 때, 샬라모프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죄목은 당연하게도 반혁명 트로츠키주의자. 그나마 사실상 처형을 의미하는 “가족과 연락할 수 없는 10년 유배형”이 아닌 5년 유형이었지만, 아뿔싸, 호송인들에 의하여 콜리마에 끌려가 금광에 투입되었던 것.

  그런데 《콜리마 이야기》를 읽어보면 모든 단편이 그의 두번째 투옥 때의 이야기는 아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에 아직 모스크바에는 가지 않은 상태에서 1943년에 소련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반 부닌을 “위대한 러시아의 작가”라고 했다가 스탈린 정부에 의해 다시 한 번 10년 교화형을 받아 다시 금광의 채굴꾼으로 끌려가 죽기 일보직전, 염라대왕 전에 들렀다 온 것까지를 망라한다. 영양실조와 발진티푸스가 겹쳐 샬라모프 본인은 깨어날 때까지 자기가 쓰러진 줄도 몰랐다고 하니 그것 참, 세상에 그런 일도.


  콜리마가 러시아의 어느 동네인가 하면, 일단 극동지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 캄차카 반도보다 더 높은 위도에서 시작해 북극해까지 잇는 콜리마 강과 콜리마 산맥 지역을 통틀어 말하는데, 이 지역은 몇 개의 코뮌이 나누어 관리하고 있을 만큼 넓다. 게다가 강제노동을 한 산악 지역은 평야 지대보다 섭씨 몇 십 도 정도 낮은 기온을 기록, 1년에 아홉 달이 겨울인데, 보통 영하 40도, 호흡하기 좀 거시기하면 영하 45도, 침 뱉으면 땅에 닿기도 전에 얼음으로 변했다 하면 영하 50도, 현지 사람들은 온도계가 없어도 거의 정확하게 현재 기온을 맞춘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가장 조심할 것은? 졸면 죽는다. 근데 추우면 잠의 침략은 더욱 매섭다.

  열량 확보를 위하여 잘 먹어야 하지만, 기본으로 제공하는 부식이 워낙 하찮을뿐더러, 죄수 입에 들어가야 하는 정량의 대부분을 이놈이 떼 먹고, 저놈이 떼먹고, 다른 놈이 훔쳐가 거의 대부분은 아사 일보직전이다. 죽은 사람의 고기도 먹고, 덜 자란 병아리도 산 채로 뜯어먹는다. 그런 것이 다 용인되는 사회. 수감자들끼리 별 다툼도 없이 그냥 때려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집단. 하물며 호송원이나 관리병들은 그러지 않기 망정이지 여차하면 살인을 취미생활로 할 수도 있는 곳.

  하지만 제일 중요한 수용자 살해는 수용자들 집단에서 자동적으로 지배 계급으로 떠오른 깡패 수감자들. 샬라모프의 유배지는 도스토옙스키 시대의 유배지가 아니다. 표도르 D. 선생이나, 네흘류도프가 졸졸 따라간 카추샤의 유배처와는 비교 자체가 힘들다. 우두머리 깡패 집단은 숙소에서 카드 도박을 하며, 최상위의 두목 깡패는 곧 숱한 무지렁이 수용자들의 생사여탈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에게 도착한 소포 등의 소유권까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둘째 손가락으로 지목하기만 하면 지목당한 죄수가 누구든지 간에 얼른 달려와 발뒤꿈치 각질을 살살 긁어주면서 감언이설을 속삭여야 한다. 소리 한 마당 해보라 하면 또 거절하지 못하고 쑥~대머리, 한 곡조 뽑아야 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


  이런 모든 광경이 적나라하게, 그러나 이런 비인간의 벌판에서 그곳에 떨어진 한 지식인의 감정은 모두 배제한 채 그냥 그런 광경을 드라이하게 묘사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또 같은 세대인 유형자의 아버지 솔제니친과도 다르다.

  혹시 이런 이야기에 흥미있는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하지만, 이제 지난 시절의 큰 슬픔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이 그리 탐탁하지 않다. 동상과 괴혈병 상처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고름, 솔기마다 득실거리는 이, 닫은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동안 문이 열리기 전에 죽지도 않은 어린 닭을 산채로 뜯어먹는 배고픈 죄수 이야기 같은 건, 거대 비극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읽으면 안 될까 하는 마음이 드는 솔직한 심정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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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긴 사연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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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독립만세사건이 있던 1919년에 프랑스 지중해 연안 칸 말고, 파리에서 서북서 쪽에 있는 캉에서 태어난 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애니메이터. 19년생이면 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에는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였던 스무살. 소설집 《짧은 이야기 긴 사연》에도 전쟁 발발 직후 곧바로 징병 대기하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이 터진 다음해, 난공불락의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 돌파한 독일군에 의하여 1940년 6월에 파리가 함락되는 치욕을 겪고, 같은 달 22일에 페텡이 항복을 선언, 어쨌든 그르니에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전쟁을 통과한다. 물론 나중에 좀 험한 꼴은 당했다지. 44년에 프랑스 저항군 활동도 하고 뭐 그랬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전쟁 중에 소르본에서 가스통 바슐라르한테 배웠다 하니 전쟁 중에 20대 젊은 남성이 그 정도면 호강했다고 봐도 되지 뭐. 애먼 미국 젊은이들이 프랑스 땅에 들어와 픽픽 죽어간 걸 생각하면 말이지.

  열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으면서 편집도 자간, 행간 널럴하게 해 쉽게 읽힌다. 본문이 194쪽에서 끝나 분량도 많지 않다. 그래서 단편소설과 꽁트의 중간 정도, 분량이나 장르 양쪽을 감안해서 중간 정도의 작품도 제법 있다. 즉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집.


  이 책을 출간한 2012년에 이이는 벌써 아흔 두셋. 한 해에 열세 편의 소설을 화르륵 불 태우듯 썼다고 보기 힘들지만, 어쨌든 80대 후반과 90대 초반에 쓴 작품을 모은 책이라 봐야겠다.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노 작가들이 쓴 작품은 대개 노인들의 기억 속 자잘한 삶의 흔적을 픽션 또는 반half픽션-반half다큐멘터리 형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그렇지 않은가, 실제 경험한 또는 기억한 과거의 것들 것에 픽션을 가미해, 줄리언 반스의 표현대로, 하이브리드 픽션으로 쓴 건 아닌가 싶었다.

  근데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 웃기게도,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김화영. 이상하게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책을 읽고 좋은 독후감感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는 거. 이번에도 “옮긴이의 말”이 웃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프로방스 학파의 일원이면서, 자기 자랑을 화려하게 펼치는 데 빈틈이 없다. 또다른 프로방스 학파 최현무, 필명 최윤이 <부영사> 해설을 통해 독자를 ‘오독을 마다하지 않는’ 집단으로 단칼에 선을 그어 버린 것처럼 악마 같이 거만한 '소위' 프로방스 학파 선생들. 다행히 이젠 전부 다 꼰대 가운데 꼰대가 되어 버렸다. 세월 만세!

  분명히 말하자. 나는 김화영 선생의 번역의 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그가 번역한 책 가운데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거다. “옮긴이의 말”도 워낙 인상깊게 웃겼던 것도 많고. 어느 작품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역자 후기 타이틀에 왜 자기가 페테르부르크 역전 시계탑 앞에 앉아 급하게 역자 후기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하냐고? 솔직히 나는 김화영이 좀 밉다.


  여든 후반, 아흔 초반에 쓴 짧은 픽션. 애초에 큰 걸 바라지 않았다. 기대가 크지 않았고, 딱 생각했던 것만큼의 차분한 픽션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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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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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에 일본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에서 나서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선천성 근병증으로 인한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는데, 이게 하도 심각해 뼈 혹은 근육이 호흡기관을 압박하는 모양이다. 정확한 거 아니다. 소설과 위키피디아 내용을 읽고 짐작하는 것뿐이다. 코를 통한 호흡이 힘들어져 결국 목의 인후에 구멍을 내 카테터와 부속 장비를 삽입해 그곳으로 호흡을 한다. 이건 근(육)병증 뿐만 아니라 중환자들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 나 어릴 적 동네에 한국전쟁 참전한 노병 한 분이 평생 이런 상태로 살았다. 근병일 경우에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외부 오염 공기가 곧바로 호흡기 점막과 접촉해 담, 즉 가래가 많이 낀다. 와병중인 환자는 석션 장치로 얇은 고무관을 기관지와 폐 입구까지 밀어 넣어 제거하지만, 아치카와는 기침 같은 것을 통해 스스로 가래 배출을 했던 것 같다. 이 장면이 소설에 몇 번 등장한다.

  33세 때인 2012년에 가나가와의 요코하마에 있는 야스 학원 대학에 특수학생으로 입학해서 2019년에 와세다 대학 e-스쿨 인문 및 환경과학과에 편입,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졸압했다. 2023년에 단숨에 써내려간 소설 <헌치백>이 “문학계” 신인상을 받아 소설가로 데뷔했으며, 그걸로 모자라 그해 아쿠타가와 상을 받아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었는가 하면, 현대 일본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일본에서도 유명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이면 그래도 방귀 한 번 제대로 뀌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거 한 번 찾아보자, 싶어서 골랐다. 이것 말고 또 골라 놓은 아쿠타가와 수상작품이,

  구단 리에, <도쿄도 동정탑>

  아사히나 아키, <도롱뇽의 49재>

  마쓰나가 K. 산조, <베리에이션 루트>

  다카야마 하네코, <슈리의 말>

  이 정도인데, 지금 <헌치백>을 읽고 정말 이것들을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이키가와가 그동안 SF, 판타지 등 장르문학과 라이트 노벨을 쓰다가 비장한 마음으로 처음 집필한 순문학이 <헌치백>이라는데, 그건 알겠고, 하지만 내 기준에는 맞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암만해도 골라 놓은 네 권의 책 가운데 딱 한 권만 더 읽어봐야 하겠다.

  일본도 대단한 문화 강국이다. 그런데 많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 내 입맛에 맞는 현대소설 작가 찾기가 이리도 힘들다. 비단 위에 나열한 작가/작품이 아니더라도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작가나 작품 있으면 귀띔해주시면 좋겠다.


  <헌치백>의 주인공 이자와 샤카도 책을 쓴 작가 이치카와 샤오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다. 부모가 별세하면서 재산 전부를 이자와 샤카가 물려 받았다. 엄마는 죽기 전에 원룸 맨션 한 동을 통째로 개조한 장애인 시설 그룹홈 <잉글사이드>를 만들어 샤카한테 증여했다. 각각의 원룸은 다섯 평짜리 방, 주방, 화장실, 욕실로 되어 있고, 샤카 말고 당연히 다른 환자도 입주해 지내고 있다. 이 가운데 몇 명은 원룸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의 중증. 아마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듯하다.

  샤카도 자기 발을 딱딱한 바닥에 딛고 몸을 움직여 본지 30년은 되는 거 같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근육병증 때문에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아 왼편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특별한 장애가 없는 독자 나는 이해하기 힘든, 특정한 장치로 종이책을 읽고, 글도 쓴다.

  작품의 첫 장면은 포르노 바로 직전까지 수위를 올린 일본의 성 해방구역 “해프닝바” 잠입 수기로 시작한다. 3층에 있는 룸으로 두 명이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 들어가 두 쌍이 성 또는 유사 성행위를 벌인다. 나머지 한 명은 기록자. 웬만하면 조금 인용해볼까, 했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

  이 장면은 그냥 한 시절 이런 글을 청탁 받아 써서 잔돈 푼이나 만졌으며, 원래 부잣집 딸로 태어나 못해도 수십억엔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잠입수기로 번 돈은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저 유럽,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티네 라반트하고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이치가와 샤오가 주인공 이자와 샤카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물론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책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와, 여성으로 임신했다가 임신중단을 해보고 싶은 마음.

  앞의 것은 종이책에 과하게 집중되어 있어서 근병증인 샤카는 읽기가 매우 곤란하는 것이고, 헌치백이며 호흡을 기관지를 뚫어 카테터를 이용해 해야 하지만 남들과 같이 섹스도 하고 임신도 하고, 출산은, 출산은, 출산은 차마 바라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대신 중절수술이나마 받아보고 싶다는 거.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창녀가 되고 싶을 정도라는 것.

  작가의 마음이 이럴진대 어찌 독자가 책을 읽으며 가벼울 수 있을까.

  그러나 표현이 과하다. 경쾌하면 조금 언짢았을까? 예를 들면 천쓰안처럼. 이이가 쓴 <제일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 어디죠?> 같이.

  장애의 정도는 훨씬 덜 하지만 샤카와 마찬가지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중국 여성 청즈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키 큰 젊은 여성이 청즈를 내려다보더니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한다.

  “다리가 참 가느시네요….”

  청즈, 대답하기를,

  “네. 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랍니다.”

  그러면 여자가 갑자기 알아차리고 입을 막으며 놀란 눈을 하는 거다. 어때, 이렇게 가볍게 치고 나가는 거 하고, 젊은 중증환자 돌보미 남자에게 1억5천5백만 엔을 줘 임신 한 번 해보려 하는 것하고?

  그냥 해본 말이다. 나는 이제 비장한 게 별로 좋지 않아서, 그래서 천쓰안이 더 좋아지게 된 지도 모른다. 다들 자기 취향대로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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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2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일본 현대 작가들 소설 읽을 때마다 지뢰여서... ㅋㅋㅋ 소개드릴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정욕> 쓴 작가 아사이 료, <인 더 메가처치>까지는 읽어볼까 싶어요. 믿음이나 구원? 신앙에 관한 이야기 같아서 좀 관심이 갑니다.

Falstaff 2026-07-27 16:03   좋아요 0 | URL
아, 치매예요, 치매. 알라딘 비밀번호를 잊다니... 이게 가당한 일입니까? ㅎㅎㅎ
일본 현대, 말고 요즘 소설가들한테 기대가 컸는데 아휴,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얘기하신 책들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읽는 게 좋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ㅎㅎㅎ
 
수림 -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
백민석 지음 / 예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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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정말 빠르다. 가장 최근에 읽은 백민석이 벌써 8년 전 이야기. 도서관 서가를 거닐면서도 백민석의 책을 보면,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분이 들어 아무 생각없이 지나쳐왔건만, 지금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공포의 세기> 독후감을 쓴 것이 벌써 두세 달 모자라는 8년 전, 2018년이다.

  사실 그래봐야 백민석의 책은 꼴랑 두 권 밖에 읽지 않았다. 제일 처음에 읽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하도 머리에 남아서 그저 늘 본 거 같은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것도 10년 전 이야기라 스토리는 거의 날아갔고 작중 aw라는 이름의 도련님만 딱 남았다. 여기서 aw가 뭔지 모르시지? 난 안다. 근데 말 못한다. 옛 인터넷 동무님께서 비밀댓글로 알려주신 것을 밝힐 수 없다.


  《수림愁霖》은 단편소설 아홉 편을 모은 소설집이라고 읽어도 좋고, 서로 인연이 닿는 사람을 좇아가는 연작 장편으로 읽어도 좋다. 연작인 건 확실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을 때는 제일 앞에 실린 것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야 하지, 사정 때문에 중간에 실린 것부터 팍 읽어버리면, 뭐 큰일이야 있겠느냐만 그래도 덜 좋을 것 같다.

  소설집의 첫 작품 제목이 표제작 <수림愁霖>.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수림을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라고 설명했고, 예담 출판사도 이 해석을 책 표지에 박아놨다. 그냥 단어 그대로 “수심에 찬 긴 장마”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수愁’에 어두침침하다는 뜻은 없잖아?


  한자어 수愁는 근심, 시름을 말한다. 네이버는 뜻 풀이에서 이 愁가 가을 秋 아레 마음 심心을 붙였는데, 왜 가을이 되면 시름이 깊어질까? 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①가을걷이가 끝나면 관청에서 세금을 걷으러 오니까 ②곧 닥칠 겨울 날 생각해서. 그래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수심의 계절이라고 설명했지만 내가 주장하는 바, ③곡식을 거두어 함포고복 한 번 하려할 때를 딱 맞춰서 오랑캐와 향토 비적들이 쳐들어오니까, 이게 빠졌다. 그래 겨울에 쳐들어온 오랑캐한테 절세 미녀를 바치고 억지로 고비사막 밑으로 끌려간 왕소군은 봄이 되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노래를 했겠지. 근데 愁는 문자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는 다음으로 하고, 참 아련하게 쓸쓸한 말 아닌가 싶다. 앞에다 슬플 애哀 자 하나 붙이면 뭐 앙가슴이 찢어지지. 애수.

  서론이 길다. 소설집 읽고 독후감 쓰면 대개 분량이 짧더라고. 그래서 지나가는 말을 좀 붙였다.


  《수림愁霖》이 책의 제목이며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게다가 연작 소설. 책 속의 모든 이야기는 이 단편 <수림>에서 시작한다.

  <수림>의 주인공은 확실하게 그렇다, 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한 시절에 바바리맨(책에서는 판초맨) 경력이 있는 것 같은 성추행범 전과자. 정확하게 설명하면 밀폐 또는 공개 장소에서 한 여성에게, 또는 밀폐나 공개 장소건 간에 여러 여성에게 자기 생식기를 훌렁 내놓고 성적 요구를 했다는 죄목으로 빵에 다녀오셨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당연하게 이혼당했고, 아내는 아이가 성추행범 아버지를 두었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남자의 접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만나고 있으면 주변 20미터 안에 전 아내, 아이의 엄마가 자기가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게 기척을 낸다.

  다시 취직한 회사에서 과장급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사람이 좀 굼뜨지만 일처리나 인간관계에 모자람은 없이 둥글둥글하니 잘 살고 있다. 지역사회 봉사활동 커뮤니티에 가입을 해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 모임에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를 만나, 여자가 수시로 연락을 해 그나마 친하게 지내지만 결코 딱 그어버린 선을 넘지는 않는다. 자기도 자신이 성적 이상심리가 있으며 그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언제 갑자기 폭발할 지 모른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신경정신과 개업의를 방문하여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이이의 나날과 정서와 실제의 날씨는 언제나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두번째 작품 <비와 사무라이>의 주인공은 <수림>에서 남자와 함께 봉사활동을 다닌 젊은 유부녀. 서른은 넘은 것 같다. 우울증이 심해 혹시 무슨 일을 저지를까봐 남편이 좀 더 환경이 좋은 한강변 아파트로 무지하게 무리해서 이사했다. 부부는 서로 상의하고 합의하여 아이는 조금 더 있다 가지기로 해, 단둘이서 산다.

  시작하자마자 여자는 15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창문을 활짝 열고 베란다 난간에 손을 얹고, 배를 대고, 허리를 굽힌다. 난간을 바르쥐고 점점 더 길게 허리를 펴니, 이제 베란다 바닥에 붙어 있는 여자의 신체는 오른쪽 발가락 두 개밖에 없다. 둔치로 내려가는 공원을 보려 한다. 정확하게는 공원에 노숙인들이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하여. 또는 개나리나 목련이 피어 있는지 보려고. 개나리와 목련 가운데 어느 꽃이 먼저 피더라? 궁리하면서.

  남편은 정확한 사람이다. 아침에 시간되면 일어나 정확하게 출근해서, 칼퇴근 후에 집에 들어오면 오후 7시에서 7시 20분 사이. 야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잔업이라는 것도 없다. 부서 회식 같은 특별한 일이 있어도 1차에서 밥만 딱 먹고 빠져나온다. 7시 10분. 평균 귀가시간. 앞뒤 오차 10분. 귀가 시간은 정규분포. 남편은 겁난다. 갑자기 아내를 잃을까봐. 그래서 봉사도 하고, 건전한 단체이니 남자를 포함한 건전한 다른 사람들과도 교류해보라 권한다.

  하지만 독자 눈에는 아무래도 조금은 가식 같기도 하다. 봉사단체에서 같이 일한 남자와 함께 셋이 저녁 식사를 한 적도 있지만 속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겠지.


  세번째 작품 <검은 눈>. 시작하자마자 서산의 갈숲에 SM5를 끌고 들어가 수면제를 왕창 먹고 잠들기 전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앞 <비와 사무라이>에서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여자의 전 애인. 죽은 사람은 지금 이혼 숙려기간이다. 딸 둘과 함께 서산에 왔다가 딸들은 부두에서 놀라 하고 자기는 차를 끌고 들어가 죽어버렸다. 원래는 함께 죽으려다 자기 혼자 죽었는지, 처음부터 자기 혼자 죽기로 하고 죽기 전에 딸들과 마지막 소풍을 간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앞에서도 우울증 여자하고 문자 연락을 가끔 했지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 직업은 소설가.

  부모를 가장 크게 엿먹이는 방법은 게이가 되는 거라고 보니것은 말했다. 게이가 될 깡다구가 없으면 예술에 종사하겠다고 작정을 하는 게 제일 좋은 대안이란다. 이런 진실을 지금 소설을 쓰는 이 남자의 애인은 안다. 애인은 시를 쓰는 시인. 일찌감치 시인으로 등단해서 한 시절엔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강사 자리도 하나 얻지 못했다. (책의 뒤편으로 가면 문창과 2학년 시 강사는 한다.) 하지만 소설가 남자한테는 그것도 부모 속을 썩일 방법이 아니다. 직장을 얻기는커녕 평생 돈을 벌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는 부르주아의 자제. 커다란 오피스텔에 혼자 독신을 유지하며 사는 건 틀림없이 이 오피스텔에 들어와 기꺼이 자기 침대를 덥혀줄 여자들한테 과시할 목적이다.

  하지만 이런 도련님들도 지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으니, 결코 사랑하지 말 것. 그러나 소설가 남자는 불행하게도 시인 여자를 사랑했으며, 시인 여자는 매우, 매우 야물딱지게 소설가 남자를 걷어 찼다. 걷어 찬 이유는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다. 직접 확인하시기를.


  다음 작품은 시인 여자가 강사가 되고, ‘나른 보이’라는 별명을 갖는 남자 제자를 만난다. 그 다음 작품의 주인공은 나른 보이의 조현병이 가볍지 않은 어머니, 또 그 다음엔 나른 보이의 어머니와 아마도 <수림>의 남자에게 심리 상담을 해주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다시 그 다음엔 신경정신과 전문의와 원조교제를 하는 별명 ‘링고’ 여고생. 또 다음엔 링고네 학교와 옆 학교에 출몰하는 판초맨. 그리고 다시 장맛비. 장마, 긴 장마. 습한 날씨와 구름과 심지어 바다의 용오름까지. 글을 습기차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뭔가 맺혀있고, 비장하다. 워낙 입 거칠기로 호가 난 백민석 답게 묘사 역시 적나라하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적나라하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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