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신없는 할머니 부클래식 Boo Classics 90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미란 옮김 / 부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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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래 제목은 <Kalendergeshichten: 달력이야기>이다. 책을 선택하기 전에 ‘달력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익살극, 우화, 일화 같은 서사적인 작은 형식들을 포함한단다. 17, 18세기 독일에서 민간인들이 사용하는 달력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농민계층의 유일한 읽을 거리였다고 역사 후기에 나와있다. 역자 김미란은 “찬송가와 성경을 제외하고”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지금도 성경과 찬송가 값이 다른 책값과 비교하면 잠실롯데월드타워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건만 17세기, 18세기에 일반인, 농민들이 가정에 한 권씩 장만해놓고 읽을 수 있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다. “달력 이야기”가 나와 있는 소설작품도 몇 편 읽어본 적 있어서, 만일 원제가 그랬다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대출을 할 것인지 그냥 말 것인지 따져봤을 텐데, 어쨌든 브레히트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딱 고른 책이다.

  열일곱 편이 실려 있다. 위에 쓴 것처럼 익살극도 있고, 우화도 있고, 일화도 있고, 브레히트가 쓴 시도 있다. 마지막에 실린 <코이너 씨 이야기>는 원래 121편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가운데 39편만 골라 실었다. 이 가운데 표제작이며 제일 앞에 소개한 <채신없는 할머니>가 단연 돋보였다. 지금 시각으로 봐도 참 쿨한 할머니의 말년 2년 동안의 생활을 소개한 일화. 브레히트가 자신의 할머니 탄생 백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9년에 써서 1949년에 출간한 《달력이야기》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브레히트의 할머니 카톨리네 브레히트 여사의 진짜 삶하고는 일치하지 않지만 할머니한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데 어떤 작품이냐 하면:


  할머니는 일흔두 살에 과부가 됐다. 할아버지는 바덴 주의 작은 도시에서 두세 명의 조수를 두고 석판 인쇄업을 했고, 할머니는 인쇄공과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했다. 일곱 명의 자녀를 출산했지만 둘은 어려서 죽고, 빈약한 생활비로 다섯 아이를 키워야 했다. 다섯 가운데 딸 둘은 미국으로 갔고, 아들 둘은 독일 안에 있기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 나갔고, 막내아들만 몸이 허약해 작은 도시에 그대로 남아 아버지에 이어 인쇄공이 되었다. 역시 부모한테 배워 막내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리는 가장으로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어쨌든 일곱 명의 자녀와 인쇄공들이 함께 살던 큰 집에 혼자 살기로 했다. 막내아들이 작은 집에서 대가족을 거느리기가 좁고, 불편하고, 번거로워 부모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으면 했지만, 어머니는 안면 몰수하고, 천만의 말씀을,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이나 같이 먹는 선으로 칼같이 선을 그었다. 자식들은 이제 벌이가 없는 어머니가 어떻게 살까 싶어서 작은 금액을 갹출해 매달 생활비를 보내기로 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형들 보다는 자주 어머니를 찾는 막내도 용돈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라이프 스타일이 확 바뀌었다. 그래서 “채신없다”는 형용사를 제목에 붙이긴 했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음식점에 가서 외식을 하고, 당시엔 거의 부랑배들의 집합소로 여기던 영화극장에 수시로 드나들고, 중년남자인 구두수선공의 작업실에도 드나들었는데 그곳은 가난하고 소문도 좋지 않은 좁은 골목에 있으며 일자리 없는 여종업원들이나 수공업자 청년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곳으로 평판이 안 좋았다. 게다가 대형마차를 빌려 유원지에 소풍을 가고, 기차를 타고 K시에 있는 경마장까지 출입을 한단다. 이게 막내아들, 화자의 막내 삼촌이 형들에게 고자질한 것을 옆에서 들은 내용인데, 막냇삼촌이 열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경마장이 있는 K시에 갈 때마다 정신지체가 있는 어린 여자애 하나와 함께 다니면서, 그 여자애에게 모자도 사주고, 모자 위에 장미꽃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딸한테는 견진성사를 받을 때 입을 드레스 한 벌이 없는데 말이다.

  훗날 화자가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두 번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한 번은 딸, 아내, 어머니로, 또 한 번은 완전히 자유로운 독신여성 B 부인으로. 영유아 시절을 빼고 첫번째 인생으로 대략 육십 년이 걸렸고, 두 번째는 겨우 이 년이 넘지 않았다.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자식 손주들 다 모른 척하고 오직 자신 하나를 위해 즐긴 인생. 그는 말한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속박의 삶을 살다가 짧은 세월의 자유를 맛보고 인생이라는 빵의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다 드시고 가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영어 알파벳으로 P.S.라고 적고, 이어서 “돌아가실 때는 그 처녀(소녀시절의 정신지체아)가 옆에 있었다. 할머니는 일흔네 살이었다.”고 써야겠다.


  이것에 비견해 재미있는 소품이 열다섯 번째로 실린 <부상당한 소크라테스>인데, 진짜로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해 발바닥에 부상을 입은 소크라테스가 전쟁영웅이 된 기가 막힌 사연이다. 근데 둘 다 소개하면 김이 빠질 거 같아서 오늘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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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26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행복한 장례식>
화요일. 옌롄커, 《연 월 일》
목요일. 부스 타킹턴, <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금요일. 오노레 드 발자크, <골동품 진열실>
 
삼척, 불멸 위픽
김희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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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는, 안 된 이야기지만 절대 돈 주고 사지 않는다. 꼴랑 단편 하나 싣고 단행본입네, 하는 것도 웃기고, 66쪽에 10퍼센트 할인가 11.700원도 아깝지만 사실은 나라도 아마존 원시림을 지켜 지구 영속에 이바지하고 싶어서라고 구라 풀고 싶어서다. 근데 이 시리즈를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어차피 도서관에 왔으니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은 거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가 김희선 팬이다. SF를 별로 읽지 않아도 그렇다. 어쩌다 보니 이게 여섯 번째 읽는 김희선의 책이다.

  처음엔 외계인과 UFO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영혼의 전이 또는 이동을 통한 특정 인간의 영속성을 모색하더니, <속초, 불멸>은 진정한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병이 깊은 아버지 김기홍씨가 죽기 몇 시간 전에 맏이인 딸을 불러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부녀가 평소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굳세게 필름식 사진관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아침부터 사진관 암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동네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게에 돌아와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신 후에 다시 암실에서 작업을 하는 무미건조한 일을 무려 40년이 넘게 지속했다. 이것 외에는 오직 하나의 취미를 즐겼을 뿐인데, 바로 비디오 테이프로 SF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별로 애틋한 정이 없는 딸이 보기에 아버지가 하도 SF 비디오만 봐서 영화와 자신의 실제 삶을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매니아를 넘어 편집이랄까, 집착 수준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작가는 결론을 독자에게 맡길 것이다.

  이 “우주의 비밀”이 뭘까? 나는 앞 문단에서 “진정한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을 털었다.

  김기홍 씨는 주장하기를, 삼척이란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가방끈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 화자 ‘나’는 삼척이라는 지명이 “상상 속 장소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삼단논법으로 가설을 세우고 논거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방정식이나 갖가지 수식을 써서 도시가 없음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삼척이라는 곳에 자신이 가서 무엇을 본다고 해도 그건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고집한다. 누군가의 비디오 아트일 수도 있고, 가상 무대일 수도 있고, 심지어 홀로그램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평소 SF 영화를 즐겼다고 하니 당연히 비디오 아트나 가삼 무대나 홀로그램을 만든 존재는 베데스타 행성에서 UFO를 타고 도착한 외계인일 확률이 대단히 높겠지만 작가는 끝까지 입을 봉한다.


  작품 이야기는 거의 다 한 거다. 아버지가 죽고 어느 날 인터넷에 ‘삼척’을 조회했고, 이게 알고리즘에 영향을 주었는지 유튜브 추천영상에 조회수 302회의 <삼척, 불멸>이란 동영상이 올라와 클릭해 봤더니 동해안 바닷가에 삼척이라는 도시를 만드는 설치미술에 관한 거였다. 삼척을 만들고, 우리에게 삼척이라는 환영을 심어주고, 견고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세계에 삼척이라는 틈을 끼워 넣는 작업. 그걸 왜 하필 ‘삼척’이라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발음하기 좋아서.

  한 남자가 자다가 꿈에 나비를 보았다며? 이 남자가 잠에서 깨더니 그랬다며?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삼척이라는 곳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데 모두 삼척이 있다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걸 누가 알아? 삼척이란 장소만 대상이 아니다. 매릴린 먼로라는 미국의 여배우가 정말로 있었어?

  안 보고 믿는 자가 진복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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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7-25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픽 시리즈 궁금해서 한 권 만났는데 새 책으로는 사지 않을 것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7-25 15:20   좋아요 0 | URL
안 사게 되더라고요. 달랑 단편 하나고요, 읽으려면 두 시간도 안 걸립니다. ㅋㅋㅋ

stella.K 2024-07-25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의 간사함이 보이는군요. ㅎㅎ 저도 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리즈 돈 주고는 안 사 볼 것 같아요. 요즘같이 불경기 고물가 시대에 당장 줄이거나 아예 지출항목에 없는게 문화빈데...ㅠ
그래서 삼중당 같은 문고본이 다시 나와줘야 한다니까요. ㅎ
그래도 이리 쓰시니 귀 얇은 저는 또 좀 혹하네요.ㅎ

Falstaff 2024-07-25 15:21   좋아요 1 | URL
아오, 간사를 들켜버렸네요. 눈치도 빠르셔요. ㅋㅋㅋㅋ
삼중당 문고 같은 건 이제 영원히 안 나올 겁니다. 우리나라도 당시엔 해적판 왕국이었잖습니까. 요즘에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요. ㅎㅎㅎㅎ

하이드 2024-07-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어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보일때마다 빌려서 십여권 정도 읽었는데요, 읽다보니, 다시 읽고 싶은 책들도 있더라고요. 좋아하는 책은 사놓고 볼만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 책 안 읽는데, 책 읽는 문턱 낮춰주고, 일단 다 기본은 하는지라 소설의 매력에 익숙해지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디자인이 진짜 잘 빠졌어요. 뭐, 팔리는 책들이 없고, 책 값 많이 오른 와중에 괜찮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삼척,불명>도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4-07-26 05:36   좋아요 0 | URL
저는 편집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공간이 너무 널럴해서 글자가 몇 개 들어가지 않아 그나마 몇 페이지 안 되는 게 휙휙 넘어가더군요. 다 취향의 문제겠지요. 아무래도 제가 올드 패션이다보니 그런가 봅니다.
 
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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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난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반유대주의법인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자 1935년에 스칸디나비아로 이주했다. 3년 후인 1938년 11월 7일부터 13일까지 베를린을 필두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서기관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폼 라트만이 열일곱 살의 폴란드 유대인 헤르셸 그린스판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사건을 빌미로 ‘수정의 밤’이라 불릴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이 벌어진다. 보슈비츠 일가는 아마도 독일을 그나마 쉽게 탈출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잡았던 듯하다. 실제로 수정의 밤이 있던 1938년에는 대거 주변국으로 탈출하는 독일 지역의 유대인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인접국들이 국경 경비를 강화해 독일 탈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독일 거주 유대인들은 집단 폭행과 체포에 이은 수용소 수감의 공포에 시달리고 그렇다고 해서 국외 탈출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23세의 유대인 작가 보슈비츠는 아마도 가장 먼저 수정의 밤을 주제로 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다. 누이클라리사는 이미 스위스를 거쳐 가족 누구보다 먼저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후였다. 이렇게 작품은 1939년에 영국에서, 40년에 미국에서 출간한다. 그러나 저자 자신은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 다른 독일인과 함께 영국 내 수용소에 수감되고, 1940년에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독일인, 독일군과 함께 수용된 유대인 보슈비츠는 수용소에서 다시 당할 수밖에 없던 차별과 멸시 속에서 <여행자>를 고쳐 쓰는 작업을 하며 견뎌낸다. 이렇게 고쳐 쓴 앞부분을 어머니에게 우편으로 보냈고, 뒷부분은 자기 품에 품은 채 1942년 10월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으나, 배가 독일군 U-보트가 쏜 어뢰를 맞아 작가는 원고와 함께 침몰해버린다. 세월이 흐르고 독일의 한 출판사 편집자 페터 그라프는 <여행자>를 뒤늦게 읽고 이를 독일에서도 출간하고자 노력을 기울여 팔레스타인으로 간 누이 클라리사의 딸과 연락이 닿고, 작품의 초고가 프랑크푸르트 소재 독일국립도서관 망명 기록 문서실에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타이프로 쳐서, 유족과 합의 하에 작품을 편집해 2017년 세상에 내놓았으니, 유대인, 독일 유대인 포로, 작품 <여행자>에 어울리는 내력일 수 있을까?


  작품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 ‘질버만’이라는 유대식 이름만 빼고 그를 관찰해보면 어느 한 구석 아리아 인이 아닌 구석을 발견하기 어렵다. 금발, 장신과 건장한 몸, 결코 매부리를 닮지 않은 코, 파란 눈까지, 인종학에 따른 유대인의 외모적 특징을 1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살아생전 한 번도 독일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업가이자 부르주아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마른 전투, 이제르 전투, 솜 전투 등 서부전선에서 가장 악명을 떨쳤던 치열한 전투를 전부 경험했으며, 전쟁 후에는 아버지에게 5만 마르크를 빌어 사업을 시작해, 물론 절세할 수 있는 한 절세하면서, 간혹 꼭 내야 하는 세금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많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살았다. 아내 엘프리데는 당연히 전통 아리안 족이며, 아들 에두아르트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부모의 입국 허가증을 받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위협을 당하기는 하지만 재산도 있고 아직은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 시민의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믿고, 방 여섯 개짜리 현대식 아파트에 사는 입주자들도 그들과 완전히 똑같은 부류로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1938년 11월 7일 저녁 때까지는.

  이날 오후, 오토 질버만은 1차 세계대전에 함께 참전한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친구이자 자금을 대지 않은 유한책임 동업자로 동고동락한 구스타프 베커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시작한다. 질버만에게 베커는 점점 난감한 동업자가 되고 있다. 베커가 도박에 빠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돈이 있어 도박장에 드나들겠는가?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만일 도박장에서 돈을 잃는다면 틀림없이 회사의 돈을 잃는 것일 터인데, 그건 어느 의미에서 질버만 자신의 돈이다. 자금을 대지 않은 동업자는 말이 좋아 동업자이지 사실상 피고용인, 대리인의 신분 이상이 아니다. 질버만은 베커에게 이 사실을 마음 상하지 않게 이야기하려 애쓴다. 그런데 오늘 오후, 베커가 하는 말이 좀 야릇하다.

  “나는 국가사회주의자야. 내가 자네에게 사실을 숨긴 적은 한 번도 없어. 자네가 다른 유대인들처럼 진짜 유대인이었다면 나는 아마 자네의 대리인이었겠지. 동업자는 절대 하지 않았을 걸세! 나는 유대인 사회에 끼어들어 유대인 노릇하는 이방인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 없네. (중략) 내가 반유대주의자라면 이런 (질버만이 한 이야기) 명령 투를 용납하지 않았을 걸세. 안 하고말고! 아무도 나에게 명령하지 못해! 자네만 빼고 말이지. (껄걸 웃으며) 그런데 이런 자가 유대인이라니!”

  이런 말을 남기고 구스트프 베커는 출장지인 함부르크 기차를 타러 떠났다.


  자기 집이 있는 “현대식 건물”에 도착해 이웃인 고문관 쳉켈 부인을 현관 앞에서 만난다. 쳉켈 부인이 따뜻한 시선으로 질버만에게 말한다.

  “당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공정하고 현명하게 생각해야 해요.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누가 물어봤나? 왜 사업가 질버만에게 부당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하지? 아무리 사업만 아는 질버만 사장이라고 해도 눈귀가 막힌 것은 아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어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시작한 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파리에 있는 아들 에두아르트에게 부부의 입국허가를 서둘러 받으라고 독촉을 하고 있는 거다.

  집에 들어가니 손님이 와 있다. 테오 핀들러. 벌써부터 질버만에게 집을 팔라고 권하던 이다. 당연히 얼토당토않게 싼 가격을 제시하면서. 질버만이 생각하기를 자기 집의 적정한 가격은 아무리 싸게 보더라도 20만 마르크 아래로는 매길 수 없다. 유대인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헐값에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향유하고자 하는 소수의, 그러나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닌 독일인 가운데 한 명인 핀들러는 사실 별로 틀리지 않은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유대인 질버만은 그걸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질버만은 9만 마르크, 대금 중 3만 마르크는 현금, 나머지는 저당권 2순위로 지불하라고 요구한다. 핀들러는 제의에 코웃음을 치며 처음엔 그냥 인수를 해주겠다고 한다. 어차피 국경을 넘을 때 현금을 다 빼앗길 것이니 뭐하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려 하느냐면서. 그러다가 1만5천을 제안한다.

  이때 56세 먹은 누이동생 힐데한테 온 전화를 받는다. 거의 십대 소년들로 구성된 돌격대원, 친위대원이 집안에 난입해 남편 귄터를 구타하고 체포해 갔다고. 아마 포로수용소로 보낸 거 같다며 거의 히스테리 상태로, 오빠도 몸 조심하고 그 사람들이 언제 자기 집에 또 올 줄 모르니 자기한테 들를 생각도 하지 말라 한다. 사태가 긴박해진 것을 느낀 질버만이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자, 핀들러의 수정 제안이 기다리고 있다. 1만5천에서 1만4천으로. 흥분한 질버만. 아니 이럴 수도 있나? 그러나 질버만을 호출하는 초인종이 긴박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이곳에도 돌격대원, 친위대원이 몰려온 거다. 핀들러가 이때 말한다. 뒷문으로 피하라고. 엘프리데는 아리아 인이니 별 문제가 없을 터, 질버만 당신만 피하면 된다고. 그러면서 한 번 더 제안을 수정한다. 1만. 질버만이 생각하는 최하 적정가 20만 마르크의 5퍼센트에 불과한 1만. 질버만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빨리 떠나십시오. 여기는 독일인인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공증 받을 때까지 당신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질버만은 그렇게 도주하고, 대신 미소를 머금고 활짝 열어준 현관문을 벌컥 밀고 들어온 돌격대와 친위대 청소년들은, 유대인의 집이니 앞에 선 핀들러가 당연히 이 집의 주인인 유대인이라고 여겨 단호한 동작으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집에서 쫓겨난 오토 질버만. 지갑에는 겨우 180마르크가 들었을 뿐이다. 책상 서랍에 훨씬 많은 돈이 있었는데 그걸 챙길 시간이 없었다.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아내 말대로 호텔에 가본들 ‘질버만’이라는 이름으로 숙박계를 쓸 수나 있을까? 아니나 달라, 혹시나 해서 가 본 호텔의 매니저 로제는 질버만을 보자 난처한 표정으로 질버만의 악수하려는 손을 거절하고 호텔리어다운 온화한 말투로 숙박을 거절한다. 선생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디로 가지? 다른 호텔 앞에서 만난 프리츠 슈타인. 슈타인 회사의 소유자였던 인물이다. 역시 집에서 도망나와 먹을 것이 없어 거리를 배회중이다. 질버만은 그에게 50마르크를 건네준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로 가지? 궁리하다 떠오른 인물 한 명. 거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20년이 넘는 우정을 닦은 친구. 구스타프 베커. 그가 있는 함부르크로 가자.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른 의문, 의문, 또 의문.

  “오늘 도대체 베커가 왜 알려주지 않았지? 뭐든 미리 아는 사람 아닌가?” 소름끼치는 의구심이 솟는다. “베커가 기회를 잡은 거야. 내가 그의 손에 있잖아. 내 재산을 전부 순식간에 빼앗을 수 있어. 베커는 나치고, 그것을 숨긴 적도 없어. (경제적)기반(현금)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하던 동료. 반평생이나 알고 지내던 사이라도 지금은 무엇이든 의심하는 시대. 흔들리면 안 돼!”


  이 유대인, 곤경에 처한 유대인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공동체에 대고 이렇게 외친다.

  “그보다 더 나쁘고, 더 멍청하고, 더 잔인한 공동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요. 선량한 소수는 사악한 다수보다 여전히 나은 법이지요.”

  오토 질버만을 포함한 당시에 희생당한 숱한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안타깝고, 그들을 애도하지만, 질버만 선생, 당신이 틀렸어. 문제는 국가사회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 언제나처럼 문제는 권력이라니까. 선생이 곤욕을 당하고 불과 십년도 되지 않아 유대인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기 시작한 폭력을 생각해봐. 지금 내 머리엔 군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소이탄이 저절로 떠올라, 당신이 당하고 있는 애타는 광경에 그렇게 깊게 감정을 몰입시킬 수 없더라고. 유대인들도 권력, 무력이 생기자마자 독일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흡사한 폭력을 구사해. 언제나 문제는 권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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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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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에 모시페그가 쓴 <아일린>을 꽤 재미있게 읽어서 곧바로 <내 휴식과 이완의 해>도 읽으려 했다가, 독자 평이 하도 좋지 않아 안 읽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어라, 도서관 개가실에 책이 꽂혀 있어서, 그래, 세월이 꽤 흘렀으니 이제 한 번 읽어봐도 괜찮겠다 싶어 책을 폈다가 에그머니, 폭삭 망해버린 책. 독자 평점이 높은 베스트셀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왕왕 있어도, 이를 5별망작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독자 평점이 아주 낮은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없다, 이건 진리 비슷하네.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이렇게 말한다.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일 년간 동면에 들기로 계획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차갑고 신랄한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고,

  책 속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① 오래 전에 지나간 것과 ② 요즘 지나가고 있는, 겪고 있는 것이 있으니, ①은 유소년 시절에 각자 자기일 때문에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표현해주지 않은 부모이고, ②는 나를 버리고 자기 또래 여성과 결혼을 모색하고 있는 나이 많고 구강성교에 환장한 (‘나’의 입장에서)애인 또는 (상대인 트레버 의견으로)섹스 파트너다.

  무정한 부모는 둘 다 죽었다. 죽으면서 지금 ‘나’가 살고 있는 뉴욕 이스트 84번가 고급 아파트와 뉴욕 주 북부의 옛집, 그리고 주식과 채권 등의 동산을 남겨, 옛집에서 들어오는 집세, 아버지의 옛 재정관리자가 아직도 관리하고 있는 투자금에 대한 이익배당과 이자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통장에 꽂혀, 아이비 리그 가운데 한 학교인 컬럼비아 대학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나’는 노동할 필요가 전혀 없으면서, 내가 벌지도 않은 돈으로 진짜 명품 옷과 속옷, 신발, 기타 악세서리까지 완비하고, 심지어 사놓고 상표도 떼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할 정도인데, 원래 되는 인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되는 법이라, 모델 같은 미모까지 완비해서, 숱한 사람들이 ‘나’를 숭배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있다. 참고로 지금 스물여섯 살이다. ‘나’가 대학 4학년 때 법적으로 확립된 고아 신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 없던 부모가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늘 느끼고 있는 과거의 한 페이지로 등장한다. 가정폭력, 학대 이런 거? 없었다.

  애인 트레버. 물론 윌리엄만큼은 늙지 않았다. 이이를 설명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체위와 기교의 종류를 이야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점잖은 우리는 이쯤에서 말을 말자.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많은 아저씨로, 하도 젊은 여성하고만 잠자리를 해서 그런지 이제 자기와 동갑, 갑장인 여성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육갑을 떨어 ‘나’와 그만 만나자면서 이별 기념으로 여태 ‘나’가 즐겼던 비디오 재생기 대신 DVD 플레이어를 선물하고 떠난다.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 가면 정말로 그 여자와 결혼한다.

  26세의 ‘나’는 돈이 많다. 동산, 부동산 다 많다. 그런데도 취직을 했다. 버그도프스와 바니스와 이스트빌리지의 최고급 빈티지 부티크에서 쇼핑한 경탄스러운 의상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배경이 ‘나’의 무지막지한 직업적 자산이 되어 웨스트 21번가에 있는 ‘순수미술’ 갤러리 중 하나인 더키트의 직원자리를 손쉽게 얻었다. ‘나’의 보스 너태샤가 ‘나’에게 바라는 건 패션 캔디. 아방가르드한 옷을 입고 갤러리의 책상에 앉아 관객 누가 질문을 해도 잘 모르는 척하는 일을 하며 연봉 2만 2천 달러를 받았다. 그깟 연봉은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놀면 뭐해. 그러다가 창고에서 잠들어버리는 일이 습관이 됐다. 중국계 핑시의 전시회가 있었다. 개들의 박제를 놓은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근데 유럽 출장 간 너태샤가 전화를 걸어 ‘나’를 해고해버렸다. ‘나’는 짐을 챙겨 나가려 하다가, 어차피 오늘까지니까 할 일이 남았다면서 밤까지, 다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기 전에 개1과 개2 사이에다 똥을 누고, 닦은 휴지를 개3의 입에 물려놓고 나왔다. 너태샤가 욕을 욕을 했겠지만 고소를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완전한 맨정신은 아니었다. 정말 맨정신이었으면 진짜 도라이게? ‘나’는 뉴욕에서 아주 드물게 찾을 수 있는 나쁜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을 만나 진정제를 처방 받아 많은 양을 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내 휴식과 이완의 해>도 잠에서 깨, 24시간 영업하는 잡화점 ‘보데가’에 가서 대용량 커피 두 잔을 사, 한 잔은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원샷으로 마셔버리고, 두번째 잔은 TV로 영화를 보며 동물 모양 크래커와 함께, 트라조돈, 앰비언, 넴뷰탈을 먹은 후 천천히 잘 때까지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트라조돈. 수면 유도제. 앰비언. 진정제. 넴뷰탈. 진정제이면서 약물을 이용한 사형집행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약물을 처방해주는 의사가 닥터 거북이, 터틀이다. 택시 사고로 목에 발포고무로 만든 보조기를 달고 있고, 뚱뚱한 얼룩고양이를 안고 있는 나이든 여자.

  ‘나’는 닥터 터틀에게 호소한다. 6개월간 잘 자지 못했다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 절망과 불안을 느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욕구를 막아줄 뭔가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PTSD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진정제가 필요하다고.

  닥터 터틀은 말한다.

  “일단은 리튬과 할돌을 먼저 받아 가요. 치료를 처음부터 요란하게 시작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나중에 좀 별난 약을 써볼 필요가 있을 때도 보험사가 놀라지 않거든요.”

  닥터는 전문가였다. 약물 전문가이면서 보험사를 이마 치고, 뒤통수도 치는 선수. 그리하여 닥터 터틀의 약물 처방과, 처방받은 약물의 임의 과용, 오용, 혼용이 시작되면서 작품은 노골적인 목불인견, 눈 뜨고 볼 수 없는 차원으로 접어든다.  진정제, 수면유도제, 안정제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수준에 도달한 ‘나’는, 세상에 ‘나’만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불행, 부모와 트레버의 애정 부족으로 점점 망가져, 빨래하기 귀찮아 더러워지고 뻣뻣해진 팬티는 그냥 버리고, 샤워는 잘 해야 일 주일에 한 번하고, 눈썹 뽑기, 탈색, 제모는 생략하고, 보습제, 각질제거제도 중단한다.

  게다가 ‘동면’에 들어가서 잠을 자는 “내 휴식과 이완의 해”가 2000년 6월에 시작하니까, “해year”라 했으니 2001년 6월에 동면이 끝나면, ‘나’를 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2001년 9월 11일, 무역협회 건물 테러 사건이다.

  도대체 뭐야? 뭘 주장하는 거야? 난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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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4-07-22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랑 비슷한 반응이에요.
전 예전에
“Things are alive. She is beautiful. 이라고 되뇌이는 주인공의 마지막 몇 문장을 읽으면서는 여지껏 (그래 이건 과거의 일이고, 소설이고, 이렇게 씁쓸한 코메디로 쓰는게 이 작가의 스타일이야 라지만!) 재미있게 읽었지만! ....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고 말았다. 영어책으로 읽었으니 영어욕.
WTF “ 이라고 했거등요.

Falstaff 2024-07-23 08:11   좋아요 1 | URL
어제 오랜만에 과음을 해서 꽐라.... 지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흑흑흑....
아이, 이 책을 갖고 무슨 코메디 운운.... 그냥 돈 많은 젊은이가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이야기예요. ㅎㅎㅎ
 
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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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에 국립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 군사학부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빅토르 올레키예비치 펠레빈은 아버지가 권했는지 모스크바 에너지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음에도 학업을 때려 치우고 글쓰기에 몰입한다. 이 시기가 우연히 소비에트 각지에 우뚝 솟아 위용을 과시하던 레닌의 동상이, 목에 굵은 밧줄이 걸린 채 콘크리트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뎅거덩, 떨어지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는 모스크바에서도 양철 상자에 동전을 넣기만 하면 와당탕, 소음을 내며 양철 자판기에서 펩시콜라(P)가 쏟아져 내리던 때, 대마초 연기와 코카인을 코로 흡입하느라 코 점막이 거덜이 난 청년들이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파는)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 마시면서 당연히 러시아 말로 “피즈테츠(P)”라고 가장 더러운 욕을 하던 P-세대의 시절이었다. 1989년에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발표해 작가로 데뷔한 펠레빈은 1992년,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아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첫 장편소설 <오몬 라>를 발표하는데, 이 범죄형 얼굴을 한 거구의 사나이가 발표하는 소설은 이후 나오는 족족 러시아 판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니, 아무래도 대학 또는 전공 선택은 초장에 헛발인 거 같지?

  나도 이이가 쓴 작품은 <P 세대>와 <스너프>를 읽어봤다. <P 세대>는 앞에서 잠깐 소개한 시절의 시대극이고 <스너프>는 한 3천년이 지난 시점을 무대로 해서 (글을 쓰던) 지금 시대의 문제점을 풍자한 SF 소설이었는데, 내가 읽기로는, 내 취향이 SF 보다 아무래도 시대극을 좋아해서 그런지 <P 세대>를 재미있게 읽었다. 역시 SF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뇌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하고, 소비하는 만큼의 효용을 보장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 국한하면 그렇다는 거다. 아무쪼록 SF 팬들께서는 이 말 읽고 열 내지 마시라. 그러면 장편 데뷔작인 <오몬 라>는? SF다. 1992년 발표해서 93년에 브론조바야 울리츠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직 옛 소비에트 연방에 맺힌 아쉬움과 아픔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때라서 소비에트 시절의 말도 안 되는 냉전 상태를 제대로 비틀고 있기도 하다. SF라도 현실 비판이나 풍자를 품고 있으면 독자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법이다.


  마트베이 크리보마조프 씨는 평생 모스크바 경찰로 근무했다. 아들 오비르와 오몬을 낳은 아내는 그만 일찍 세상을 접는 바람에 아이들을 동생한테 보내고 평생 다시 결혼하는 일 없이 홀아비로 살았다. 큰 아이 이름 ‘오비르’를 우리말로 하면 “외국인 비자 등록부”라는 뜻이고, 작은 아이 ‘오몬’은 크리보마조프 씨의 바람대로 자신을 이어 경찰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경찰 특수부대”라는 이름을 주었다. 불행하게 오비르는 열한 살 때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으며, 더욱 상심한 크리보마조프 씨는 거의 하루 종일 보드카와 맥주에 절여져 다 낡은 소파에 기대 앉아 세월만 죽이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원래 이이의 진실한 꿈은 모스크바 근교에 작은 밭뙈기를 장만해 비트와 오이 따위를 기르면서 말년을 평화롭게 보내는 거였는데, 꿈이 쉽게 이루어지면 꿈이 아니라서 그냥 꿈만 꾸었다.

  작품의 주인공 오몬 마트베예비치 크리보마조프는 어려서, 유소년 시절 동네 작은 놀이터에 창문이 두 개 달린 장난감집을 기억한다. 이 장난감집이 오래 돼 망가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이것을 다시 리모델링했고, 그게 어린 오몬이 보기엔 비행기처럼 보여, 안에 들어가 유소년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이 설원의 상공을 나는 비행기 안에 있다는 식으로 설정하고는, 조국의 상공을 침범하는 유럽, 미국의 전투기와의 교전 같은 걸 상상하기를 즐겼다. 조국의 하늘은 내가 지킨다! 그게 오몬의 인격을 발아시킨 이후 처음으로 비행물체 조종사의 꿈을 키운 계기였다.

  이후 모스크바 변두리에서 열린 “국민경제 달성 박람회장” 주위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거대한 전화기의 울음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바로 ‘그’가 보였으며. ‘그’는 허공에 앉은 자세로 공중에 떠서 천천히 이동했는데, ‘그’의 뒤에 호스가 달려 아마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았으며 검은색 헬멧 유리를 통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박람회장이다. 일종의 쇼를 보여주는 곳. 이때가 1960년대 말쯤이니까 미국과의 우주 개발 경쟁을 하던 시기로 우주공간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했을 터이다. 하여간 오몬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으니,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중력뿐임을 영원히 절감”하게 된 일. 이걸 조금만 더 멋있게 쓰자면, “지상에서 평화와 자유를 획득하는 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 오몬의 영혼은 하늘 저 높은 곳을 염원”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오몬은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눌 미쪽 스비리덴코를 만난다. 미쪽은 만사에 의문을 갖는 타입이지만 일단 비행사가 될 것이고, 그런 다음 달로 날아갈 것을 확신하는 소년이었다. 다행히 미쪽의 아버지 스비리덴코 씨는 크리보마조프 씨와 달리 술과 우울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양반이라, 미쪽이 7학년을 끝낼 여름에 아들과 친구를 위해 “로켓” 캠프 이용 허가증을 얻어주어 모스크바 중상급 가정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캠프에 갈 수 있었다. 캠프의 식당 안에 종이로 만든 로켓의 모형이 놓여 있었는데, 미쪽과 오몬의 궁금증은 처음엔 모형 안에 사람 모형도 들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아무도 모르지. 캠프 강사들도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거의)뭐든지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위하여 미쪽은 한밤이 되자 몰래 식당에 숨어들어 로켓 모형을 해체해버린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 모형도 들어 있는 거다! 그래서 추리하기를, 애초에 제일 먼저 사람을 만들고 의자에 앉힌 후에 조종실을 시작으로 로켓을 안에서 바깥 순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흥미로우면서도 실망스럽고, 작품으로 보면 거대한 복선이지만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힘든 문제점이 하나 있으니, 조종실에서 로켓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없다는 거였다. 로켓에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조종실 내부하고는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 이 캠프에서 미쪽과 오몬은 통행이 금지된 야밤에 이동을 했고, 로켓을 해부한 벌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는다.


  어느덧 소년 오몬과 미쪽이 클 만큼 다 커서 이제 대학을 정할 시간이 왔다. 이들은 고민도 없었다. 항공학교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정하고 다만 어느 항공학교에 가느냐만 남았던 터. 결국 마레시예프 기념 자라이스크 붉은 깃발 항공학교를 선택했다. 때를 맞추어 잡지에 이 학교와 연관된 월면月面도시 생활기사를 본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지역군사징병사무소가 발행한 영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열차를 타고 멀고 먼 자라이스크 마을에서 내리고, 다시 버스로 한참 거리에 떨어진 숲 속의 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위 본고사를 봐야 한다. 본고사는 우리나라 본고사와 달리 필기시험 점수와 별개로 진행하는 면접시험이 결정적으로 당락을 좌우한다. 면접관은 대령급 장교와 군복을 입지 않은, 나중에 별이 세 개인 중장 계급으로 밝혀지는 노인도 동석한다. 면접 초기에 오몬은 버벅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우주비행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로 로켓 캠프에서 있었던 일과, 그 결과 당해야만 했던 혹독한 군사 벌칙을 이야기하자 사복 입은 노인이 마구 홍소를 쏟아내 당당하게 합격한다.

  합격발표가 있던 날, 비로소 학교 건물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첫날 밤부터 사달이 나버렸다. 어떤 끔찍한 사건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이것도 뭔 풍자겠지만, 어쨌든지 간에 오몬과 미쪽, 두 소년은 사건에 말려들지 않고 따로 둘만 사복 노인의 호출을 받아 그를 만나러 간다. 여기서 그가 현역 중장임이 처음 밝혀진다. 그는 말한다.

  “자네들의 시험 결과를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특히 면접 결과를. (중략) 자네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까게베 제1과 부속 기밀우주학교 입학 대상으로 선발되었다. 진짜 인간이 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대신 모스크바로 갈 준비를 하도록 해라. 그곳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까게베”를 알파벳으로 쓰면 “KGB: 국가보안위원회”다. 악명높은 그곳, 맞다. 소련 국민과 외국인의 활동을 감시하던 비밀경찰.

  시절은 벌써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일 것이다. 말은 우주 경쟁이지만 이미 소비에트는 자금력과 기술력 모두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전세계가 다 알고 있었다. 소련 국민들만 빼고. 그래서 소련은 달 착륙과 차별할 생각으로 대신 유인우주선의 우주 체류를 통한 지구관찰에 역점을 둔다. 영화 <아마겟돈>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이끄는 석유시추팀들이 소련인이 관리하는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딱이다. 그럼에도 KGB는 달 탐사를 세상에 광고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같은 장소에서 경쟁하면 있는 것, 가진 것 다 뽀록이 날 터이니 달의 뒷면을 탐사한다고 발표를 했고, 우리의 오몬과 미쪽이 월 배면 탐사의 팀원으로 발탁이 된 거다. 이렇게 작품은 소비에트 시절 정부와 정부기관에 의하여 저질러졌을 지도 모르는 행위를 풍자하기 위하여 펠레빈의 뇌를 짜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오몬 라>에서 “라”는 뭐냐고? 그건 알려드리지. 오몬이 선택한 최고 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수천 년 전에 믿었던 ‘라’ (중략) 신이 매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 였을 것이다. 조종사나 우주비행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영웅들은 종종 매라고 불렸으니까. 나는 만약 내가 정말로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형상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결정해버렸다.”

  즉 오몬 마트베예비치 크리보마조프는 자신의 가문 크리보마조프를 버리고 대신 자신이 선택한 최고의 신인 ‘라’의 가문으로 이적해버릴 결심을 해버린 거다. 미리 알려드리는 이유는, 이게 아니면 작품의 결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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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19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오테사 모시페그, <내 휴식과 이완의 해>
화요일.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여행자>
목요일. 김희선, <삼척, 불멸>
금요일. 베르톨트 브레히트, 《채신없는 할머니》

건수하 2024-07-19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F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뇌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하고, 소비하는 만큼의 효용을 보장하지 않는다.

명언인데요 ㅎㅎ SF 팬들은 이 말 오히려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

오몬 라 예전에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다시 나왔나봐요.. 가 아니라 예전에 나온 책 맞네요. 엄청 재밌어보입니다!

Falstaff 2024-07-19 07:37   좋아요 0 | URL
이 책이 2012년, 12년 전에 나온 겁니다. 기억하고 계신 책 맞을 것 같네요. ^^
뇌 에너지 많이 써가며 다행히 즐겁게 읽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