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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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작가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는 1975년 켄트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열 살 부근에 부모가 이혼을 했는지 어땠는지 어머니는 아일랜드로 이사했다. <궤도>에서도 지구 저궤도를 도는 우주 정거장 탑승 우주인 넬이 영국 여자인데 결혼생활 5년 여 동안 우주인 훈련과 궤도 생활로 결혼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편이 방세 비싼 런던 대신 아일랜드의 농가로 옮겨 간 이야기가 나온다. 이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이후 하비는 요크 대학과 셰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도 조금 학교를 다닌 모양이다. 졸업 후 세계적 온천 휴양도시에 있는 바스 스파 Bath Spa대학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으로 석사, 박사를 했다. 소설 쓰는 일에도 가방끈이 중요한 세월이 됐다. 이이 홀로 열라 공부한 거 아니다. 요즘 왠만한 소설가들은 거의 문예창작 석사는 가지고 있더라.

  <궤도>는 2023년에 발표해서 2024년에 부커 상을 받은 책. 우리나라에는 2025년에 번역 출판되어, 나온 즉시 나도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지만 5분 먼저 신청한 같은 도서관 이용객이 있어 이제야 읽었다. 시내 도서관마다 늘 대출중이었던지라 당분간 읽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시 외곽의 도서관에 여유분이 있길래 상호대차서비스 신청해 받았더니, 이게 웬일, 거의 새책이다.


  미국의 우주인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처음으로 달 위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긴 것이 1969년. 그리고 50년이 넘게 달에 가지 않았다고 하니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2019년 이후의 어느 날 하루. 장소는 17개의 모듈을 연결한 우주 정거장. 시속 1만7,500km 속도로 지구 저궤도를 돌고 있다. 정거장 안에는 미국, 일본, 영국, 이탈리아 우주비행사(astronaut)와 두 명의 러시아 우주비행사(cosmonaut)가 타고 있는데, 러시아제 모듈이 30년 정도 묵은 가장 오래된 비행체라 낡은 고물이지만 이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근데 하비는 우주인의 순서를 미국, 일본, 영국, 이탈리아로 줄을 세웠다. 왜 그랬을까? 알파벳 순서라면 이탈리아가 제일 앞에 나와야 하고, 앵글로색슨 위주라면 영국, 미국 또는 미국, 영국일 터인데 일본이 가운데 끼었다. 우주 개발 공헌도에 따른다 해도 미국, 영국 아닌가? 암만해도 나라 금고에 든 돈이 많은 순서 같다. 별 걸 가지고 다 염병을 하지? 그런 나도 내가 싫다. 그냥 궁금해서.

  자부심이 강한 러시아 우주국에서는 자기네 구식 모듈의 화장실을 오직 자국 우주인에게만 사용하라고 지시가 떨어진다. 그래서 러시아인 안톤과 로만은 화장실 문에 “러시아인 외에는 사용을 금함.” 비슷하게 문패를 달았고, 이에 미, 일, 영, 이 모듈이 사용하는 화장실 문에는 보복 조치로 “미, 일, 영. 이 인 외의 사용을 금함.”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온통 추운 어둠 속에서 달랑 여섯 명이 깡통 속에 갇혀 공간에 떠 있는 상태로 무서운 속도로 지구를 돌고 있는데 어찌 땅 위에서 국제적 정치 놀음에 몰두하는 사람들과 같을 수 있을까? 이들은 일종의 가족애 같은 감정으로 서로 먹을 것과 작업 같은 일을 공유하며 서로의 오줌을 식수로 정화해 꿀꺽꿀꺽 마시면서 임무기간 9개월을 보낸다. 그러니까 일본 여성 치에의 오줌을 이탈리아 남자 피에트로나 미국 남자 숀이 마셨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거꾸로도 마찬가지고.

  한 배에 남자 네 명과 두 명의 여자가 탔으니 서로 눈이 맞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독자가 관심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뻔한 코스니까. 그런데 아니었네? 일단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중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체중을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것이 없어서 뼈와 뼈 사이의 관절이 이완되고, 혈류 흐름도 전과 같지 않아 이게 뇌와 호르몬에도 영향을 주어 그렇게 되는지 도무지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탈리아 남자 피에트로도 넬, 숀과 함께 카자흐스탄의 우주기지에서 쏘아 올린 비행선을 타고 도착했는데 첫날 밤에만 꿈에 여성인 넬을 보았을 뿐 이후에는 전혀 성적인 끌림, 끌림은커녕 관심도 생기지 않아 이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장면도 나온다. 10대 시절 이후에 여자에 관한 생각을 안 하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그래서 여섯 명의 우주인들은 젠더를 불문하고 정말 동지애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다. 웃기다. 뭉치는 게 아니라, 뭉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하루? 24시간을 말한다. 우주는 우주인들의 날짜 감각을 없애 버리려 한다. 이들은 몇 십 년간 해가 뜨고, 지고 다시 뜨는 순간까지의 스물네 시간을 하루로 인식하고 살았다. 근데 우주정거장에서는 24시간 동안 열여섯 번의 낮과 밤이 지나간다. 지구를 16회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 한다. 하비의 표현대로 하자면 시속 1만7,500마일의 속도로 추락하고 있고, 이게 우연히 지구가 움직이는 속도와 같아 항상 지구의 저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다. 비록 속도감은 느끼지 못하지만 엄청난 속도와 극미한 중력으로 시간이 갈수록 근육은 급속도로 손실되고, 혈류 이상으로 얼굴이 퉁퉁 붓는 일도 발생하고, 특히 콩팥에 문제를 발생시킨다. 콩팥이야말로 핏줄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기관이니까.

  우주인들에게 발생하는 근손실과 관련한 연구를 위하여 데리고 온 실험쥐 40마리를 관리하는 담당은 일본인 치에. 바닷가 옛집에서 홀로 사는 어머니가, 치에가 우주정거장에 있는 동안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우주공간에 있더라도 지상과 연락이 닿아 비보를 접한 치에는, 지구 복귀한 이후에 장례를 치루겠다는 친척들을 만류해 그대로 장례 절차를 진행하라 한다. 숀은 열다섯 살 때 학교에서 배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이 난데없이 생각이 났고, 넬, 안톤, 피에트로는 근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트레드밀과 프레스에 열심이다.

  정거장 아래 서태평양에서는 거대 태풍이 발생해 조만간 필리핀이 거덜이 날 단계이고, 여섯 명의 우주인들은 태풍의 눈을 촬영해 각자 본국에 보내기 위해 촬영에 열심이다. 저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 행성은 이곳에서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별. 오직 밤이 되어야 전기로 밝힌 인공 광선으로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활동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표면의 주름은 에베레스트 같은 산맥이고, 하얀 색이 칠해진 곳은 북극과 남극 지대. 미시시피와 나일강은 그저 푸른 색이 도는 한 줄기 흰 줄에 불과하다.

  이렇게 우주정거장에서의 24시간. 지구 저궤도를 열여섯 번 도는 동안 늘 생기는 일을 적은 것이 부커상을 받은 소설 <궤도>. 우주정거장에서 교대 없이 아홉 달을 지내는 우주인 여섯 명. 이들은 그냥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 어려서부터 우주비행사, 아니면 적어도 전투기 조종사의 꿈을 꾸고, 그걸 기어이 이룬 성취자들. 가족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고, 여느 부부처럼 날이 갈수록 부부사이에 금이 생기다가 본격적인 균열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 동안에도 지구인들은 다시 달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우주선을 쏘아 올렸고, 천생 우주비행사인 이들은 월행 우주선에 자신이 타지 못한 것을 조금 아쉽게 여긴다. 이 깡통 속에 갇힌 궤도 운행이 아니라 한 목표지점, 목표 위성이나 다른 행성으로의 탐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우주 비행과 비행선에 타서 바라보는 지구, 그리고 우주의 암흑. 인간과 오염과 기타 등등에 관한 명상. 평소 우주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환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품. 자기 파티션에 화성 표면 사진을 붙여 놓았던 김부장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닿아도 전처럼 또다시 관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굳이 이 책을 읽어보라고 전화나 문자도 하지 않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나도 이제는 우주 정거장 모듈 속 우주인들처럼 점점 관계를 좁혀 나가고 있는 중이라서.

  24시간 동안의 16회 지구 궤도 운행. 그리하여 이 책은 궤도 1 부터 궤도 16까지 순서로 되어 있다.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지구와 우주와 사람에 관한 명상인 듯. 진지하고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내가 좋아하는 쪽은 아니다. 그렇지만 읽어볼 만하다. 이런 사색도 있다는 걸 아는 일도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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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1-09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4년 부커상에 빛나는 작품.
2024년 공쿠르상에 빛나는 카멜 다우드의 <후리>에 비하면, 물론 비교하면 안 되지만 만일 비교한다면 이건 소설도... 아오, 역시 비교하지 말아야겠다.

stella.K 2026-01-09 14:35   좋아요 1 | URL
<후리>가 더 좋으신가 봅니다. 궤도하니까 우리나라 과학 일타강사인 줄 알았습니다. 이 사람 강의 정말 잘 하던데. 외모도 그 정도면 잘 생겼고. 저 같은 과포자도 혹할 정도죠. 이 책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억하겠슴다. 근데 후리는 작년 12월에 나왔는데 벌써 읽으셨네요.

Falstaff 2026-01-09 15:04   좋아요 1 | URL
학원 강사도 가명을 쓰는 모양이군요. 아,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궤도‘ 이런 건 아니었지만요.
<후리>는 도서관에 구입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었습죠. ㅋㅋ

yamoo 2026-01-09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소설도 있군요. 부커상 받은 작품들 모으고 있는데, 이 작품은 왜 몰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리뷰 쓰신거 보니 딱 제 취향같아 요것도 구매할 요량입니다. 뽈님 때문에 무려 소설 신간을 족족 구입하게 되네요..ㅎㅎ

Falstaff 2026-01-09 15:05   좋아요 0 | URL
부커상 수집가시면 당연히 읽어보셔얍지요. 제가 은근히 낚시한다고요? ㅋㅋ

딸기홀릭 2026-01-09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있는 중인데 우주인의 순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봐야겠어요 ㅎㅎ

Falstaff 2026-01-09 15:06   좋아요 0 | URL
에고, 그거 농담입니다. 다 아시면서요. ㅋㅋㅋ

coolcat329 2026-01-0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기 힘들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고 완전히 제쳐뒀었는데...폴스타프님 글 읽어보니 어렵긴 할 거 같아요. ㅎㅎ 홍보글에 ‘이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한 것만 봐도 어떤 글일지 감이 오긴합니다. 근데 작가가 저랑 동갑이라 조금 마음이 열렸습니다. 😃
 
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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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간쑤성 티베트족 자치구 린탄현에서 난 딩옌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둥샹족東鄕族 출신이다. 그러니까 문학사 상 누구와 비슷한 혈족인가 하면, 당신도 알고 있는 요술램프의 주인 알라딘. 알라딘이 티베트에서 북동쪽 사막지대에 살던 회족回族이었다. 앙투안 갈랑이 쓴 《천일야화》에 의하면 그렇다.

  2019년에 데뷔했고 이 책이 두번째 작품집으로 ‘화성문학상花城文學賞’ 중편소설상을 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 신예 작가 딩옌. 출판사 글항아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는 소설집이 《설산의 사랑》이다. 글항아리의 중국어 소설 시리즈 제목이 거창하게도 “거장의 클래식.” 아직 발표 작품과 저작 등을 보아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은 것은 틀림없지만, 앞으로 “거장”이란 타이틀을 달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이 엿보인다.

  나도 이 책 한 권으로 딩옌, 이 티베트 이슬람 여성에게 홀딱 반했다.


  본문이 417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런데 일곱 작품밖에 싣지 않았다. 전부 중편소설이라 봐도 좋을 정도의 분량. 촌스러운 제목의 첫 작품 <속세의 괴로움>을 읽으면서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구나.”

  사랑. 사랑? 21세기 들어 사랑은 언제나 대형 마트에서 세일 중이며, 가끔 재래시장에 가 보아도 이제는 저울에 근으로 달아 파는 경우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고인 흙탕물처럼 첨벙거리기도 하며, 어쩌다가 그저 휙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 번 슬쩍 훑어 지나갈 수도 있다. 목이 메는 건 이미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절실한 사랑은 낡은 거다. 그저 쿨한 게 좋다. 쿨하게 사랑하고, 쿨하게 불타오르다가 쿨하게 헤어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저 북쪽 산악지역,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원 지대인 티베트. 도시보다 더 유명하고, 더 크지는 않지만 더 큰 위용을 과시하는 오랜 불교 사원이 있는 곳. 자연을 닮아 거친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는 지금에서야 21세기가 폭격을 시작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곳 또는 그 지방 사람들의 사랑은 아직도 마음 속에서 함부로 내놓지 못하고, 눈짓이나 “손끝 하나 만으로도 너무 충분”하고, 특히 단어로 발음하기 쉽지 않다.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더 미어지고, 애잔하고, 쓸쓸해서 아름답다. 아직도 이렇게 소설을 써도 유효한 세월이구나. 그걸 오래 모르고 살았구나.


  일곱 편의 중편소설이 전부 사랑을 노래한다. 모두 티베트 지역의 이슬람을 신봉하는 회족 집안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모든 여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혼인한 여자들은 대개 히잡을 쓴다. 나이든 여성은 검정 히잡을 착용하지만 젊은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많은 핀으로 고정시키고 분홍색이나 하늘색 같은 예쁜 히잡을 골라 쓴다. 중동의 거친 이슬람이 아니다. 고립되어 오히려 더 원래의 이슬람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랑과 용서와 배려의 종교.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장사속이 밝았던 이들의 후예.

  자신이 이슬람 회족 출신인 줄도 모르고 어려서 버려져 티베트 불교의 비구니 절에 들어가 열여덟 살이 된 여성 샤오줘. 이이는 정식 비구니 계를 받기 원하지만 같은 절의 최고 비구니로 있는 할머니가 샤오줘의 엄마가 죽기 전에 유언한 대로 계를 받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 허락을 받으라며 도시로 보낸다. 세밑의 엄혹한 추위 속에서 도시로 향한 샤오줘는 이복의 이슬람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친절에 힘입어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한 후에 다시 비구니 절로 돌아와 계를 받으려 하지만, 이미 속세에서 이슬람의 인연을 발견한 후였다.

  이 작품이 책의 제일 앞에 배치한 <속세의 괴로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이미 당신의 심장은 한 번 쿵, 하고 떨어지고 말 것이다. 세상에. 저 먼 먼 고원지대에서 진홍색 승복을 입고 다닌 짧은 머리의 비구니가 닳고 닳은 현대인의 심사를 이리도 심란하게 만들 수 있다니.


  심란함은 계속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이 표제작 <설산의 사랑>.

  명성이 자자한 샤허夏河현 지방의 티베트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는 마씨 집안의 막내아들 마전. 사는 살림집은 린탄에 있다. 전형적인 옛 상인인 아버지가 이란의 대리석과 옥 광산을 개발해볼 생각으로 마전을 테헤란에 유학시켜 무역을 공부하게 했다. 아랍어를 배우고, 인맥을 쌓고 돌아와 이란과의 무역을 시킬 목적이었지만 마전은 그곳에서 이슬람 세밀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곧 관심의 범위가 넓어져 나름대로 옛 회화에 일가견이 생겼다. 어려서부터 보살핌 속에서 여유롭게 지내던 도련님. 회족이라 곱슬머리에 움푹 팬 눈과 얼핏 푸른 색처럼 보이는 눈을 가진 큰 몸집의 남자지만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험한 일은 해보지 않아서 할 줄 모른다.

  작은 관광도시 샤허의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비단 가게와 마씨의 골동품 가게. 비단 가게 종업원 양진의 남편이 부주의로 불을 냈고, 불이 골동품 가게까지 번져 두 가게가 완전히 타버렸다. 이때 골동품 가게에서 잠을 자던 티베트 청년 자시가 죽었다. 가게에 강도가 드는 걸 막기 위해서 가게 안에 자시가 있음에도 바깥에서 문을 걸어 닫았고, 창문마다 철근으로 방범창을 만들어 불이 났어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래 오랫동안 가게를 위해 일하던 자시 청년이 죽어 마씨는 거액의 보상금과 벌금을 지불해야 할 터.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시의 집에 붙어 있던 골동품 창고를 담보로 융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면 마씨 집안이 다시 일어날 동력인 골동품을 팔 수 없어서, 일단 돈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창고를 지키기 위하여 막내 아들 마전을 보내기로 했다. 마씨의 셈을 마전도 알았다. 사실상 자기가 부채 지불의 인질로 가는 것임을.

  춥고 추운 겨울날 린탄에서 샤허로 가, 티베트 가옥에서 귀가 달린 것처럼 생겼다고 귀의 방, 즉 이방耳房에서 살게 된 마전. 말이 방이지 도무지 사람 사는 곳 같지 않다. 집에는 지리의 할머니와 여동생 융춰만 살고 있다. 융춰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 세밀화 그림을 그린다. 취미 정도가 아니라 샤허의 유명한 거대 절, 리브랑 사원에서 낡은 세밀화 복원작업을 하는 수준이다. 마전이 일가견을 지닌 분야. 하지만 할머니와 융춰는 자신들의 손자이자 오빠를 죽게 만든 집안의 아들이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마전은 그래도 인사를 나눈다고 매일 가게에서 과일을 사 봉지에 담아 방문 앞에 내려 놓고.

  과일 봉지는 열어보지도 않은 상태로 다음날 새벽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다. 마전의 마음이 몹씨 좋지 않지만, 이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 식구였던 젊은 자시가 죽었으니 할 말도 없다. 마전은 현에 하나 있는 모스크에 찾아가 새벽과 밤마다 예배를 하는 걸 위안으로 삼으며 라마단 시기를 보낸다.

  낮에는 거대한 리브랑 사원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높은 승려와 안면을 트고 사원의 세밀 벽화를 보면서 깊은 대화를 하는 걸 마침 그 방에 들른 융춰가 듣고 마원이 얼마나 예술을 진지하게 알고 있는지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둘이 말이라도 나누기 시작한 건 아니다.

  이렇게 날들이 지나간다. 무심하게.

  그러다 샤허의 불탄 가게 앞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양진, 전에 자기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마전의 얼굴에 침을 뱉았던 여자가 폐허가 된 비단가게 앞에 앉아 있다가 비단 가게 주인 비슷하게 생긴 아무 남자를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 이 일이 있자마자 집의 문이 부서져라 벌컥 열고 뛰어 들어온 융춰. 이이가 할머니를 부여잡고 목놓아 통곡을 하면서, 이걸 어떻게 하느냐고, 양진이 마전을 죽여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하며, 어찌 사느냐고 울부짖는 것을 마전이 보고 말았다. 눈이 마주친 융춰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소식을 들은 마씨 집안에서는 행여 막내아들이 어느 날 비슷하게 일을 당할 줄 몰라 서둘러 마전의 형을 보내 데리러 오고, 그날로 짐을 싸 트럭에 오른 마전은 그저 융춰와 눈을 마주치기만 한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이 시대에 소설을 이렇게 쓰다니. 한 편으로 보아 낡고 낡은 것 같지만, 지금 세상엔 둘도 없을 신파가 사람 마음을 이리도 후비다니, 이게 말이 된다는 것이지? 요즘에도 사람의 심정을 손짓 하나로 묘사해 독자의 심사를 쑤석이는 작가가 있구나. 아직도 그럴 수 있구나.

  이 두 편만 좋은 게 아니다. <잿물>이란 중편도 아리다. 다른 작품 모두 좋다. 세상에나.

  놀라운 건식 사랑들.

  동북쪽 다싱안링 산맥에 츠쯔젠이 있다면, 서북쪽 티베트 고원에는 딩옌이 있었다. 딩옌의 빼어난 심리묘사를 읽을 수 있게 소개해준 출판사와 역자에게 고마움이 들 정도였으니 얼마나 좋게 읽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터. 아무쪼록 계속 좋은 글, 그리고 쓰는 김에 장편소설도 발표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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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08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라브랑스 사원에 가봤어요.
읽고 있는데 리브랑 사원이라고 하신 부분이 나와서 혹시 라브랑스가 아닐까 하는데,,,, 티베트의 제2사원이면 거기가 맞을듯요. 고원지대라 고산증세로 고생하긴 했는데, 맑고 그림같이 파란 하늘 아래 있던 마을과 사원이 기억나네요.

<속세의 괴로움>에서 사랑에 대해 쓰신 단상 넘 좋아요.

Falstaff 2026-01-08 15:46   좋아요 1 | URL
타이포 에러였군요. 리브랑 사원이 아니라 라브랑 사원인데 그만....
아마도 그레이스 님 다녀 가셨던 곳이 작품의 배경이 맞는 거 같습니다. 부럽네요. 저는 사진만 열라 봤는데요. ㅎㅎㅎ 뭐 사는 게 다 그렇지만 말입죠
사랑... 아이고... 아직 저도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6-01-08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폴스타프 님으로부터 이런 상찬을 받다니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1-08 15:4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도 좋아하실 걸로 믿습니다!

yamoo 2026-01-08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별5개에 이런 상찬이라니!!! 당장 구매하것습니다요!!

Falstaff 2026-01-08 15:49   좋아요 0 | URL
앗, 야무 님은 중국 작가에 좀 인색하시지 않으셨나요? ㅎㅎㅎ 좋은 선택일 겁니다!
 
루시퍼의 초대 알라트리스테 시리즈 1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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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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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구티에레스는 <검의 대가> 이후 8년 만에 읽는다. 10년 전에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이 별로 그럴 듯하지 않아 이 작자를 다시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헌책 배송료 아끼려 집어 든) <검의 대가>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은 물론 재미있었던 기억밖에 남지 않았고, 노 검객이 검술 레슨으로 먹고 사는 일 정도, 그것도 어렴풋하게 생각날 정도이지만 여전히 <검의 대가>를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숨은 작품으로 꼽을 정도이다.

  (아참,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크 가문의 막내딸 아리아한테 검술을 가르쳐준 키 작은 중늙은이, 난 이 장면 보면서 <검의 대가>가 계속 생각났지 뭐야.)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는 1951년에 지중해 연안의 남 스페인 도시 카르타헤나에서 상선 선주의아들로 태어나 같은 도시의 대학 마리스트 형제 수녀회에 다니다가 위키피디아도 모르는 이유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후 이사크 페랄 연구소와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을 다녔단다. 이후 1973년부터 94년까지 스페인 국영 라디오-TV에서 종군기자로 일했다고 하는데, 정규직원은 아니었던 걸로 (내가) 추측한다. 이 기간이 지금은 없어진 신문 푸에블로에서 일한 12년과 겹쳐서 든 생각이다. 하여간 이런 저널리스트 생활이 레베르테로 하여금 시대 추리극, 즉 대중소설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한 인간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1988년에 출간한 <검의 대가>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이어서 연달아 <뒤마 클럽>과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등이 마드리드의 종이 값을 치솟게 만들었을 때, 자기 작품을 프랑스어 말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걸 거부했을 정도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된 레베르테는 이후 남스페인 지중해 해변으로 이사해 개인 요트를 즐기며 여유작작한 생활을 즐겼건만, 소설과 영화 쪽에서 표절 시비에 걸려들었고, (소설의 경우)진짜로 표절했음을 인정해 사과하기도 하고, (영화)마드리드 지방법원이 원작자에게 8만 유로의 보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웃기지? 왜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까? 부자로 살면서 말이지. 글은 마음먹은 대로 잘 써지지 않지, 청탁 마감은 다가오지, 뭐 이런 경우? 아니다. 사람의 근본이 찌질해서 그렇다. 이럴 때가 은퇴하기에 좋은 시점인데 구차하게 작가의 명성을 이어가려다 들통나 버리는 것이지 뭐.


  <루시퍼의 초대>는 레베르테의 대표적 작품으로 주인공 알라트리스테 대위의 눈썹을 휘날리는 검술 액션 미스터리 픽션이면서, 2025년까지 8편이 나왔다. 이 가운데 21세기 초, 당시 전두환의 아들이 사장을 하던 시공사에서 3부까지 찍었다가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좀 이상하다. EU 소속인 서유럽에서 자신 스스로 표절했음을 인정하고 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까지 받은 작가가 계속 글을 발표하고 심지어 왕립 스페인 아카데미 회원 자리에 앉았다고? 그렇단다. 거~ 놀랄 ‘노’자네?

  알라트리스테 대위의 진짜 이름은 디에고 알라트리스테 이 테노리오. 보병연대 소속으로 플랑드르 전투에 참전했던 전직 군인으로 제대할 당시 계급은 상사였다. 플랑드르 전투에서 척탄병 31명과 함께 얼어붙은 강을 건너 네덜란드 진영에 잠복해 스페인 본진이 공격하는 시기에 맞춰 습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칼레해전에서 코가 깨진 이후 거의 완전히 맛이 간 스페인 군부 내 장군들이 서로 기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본진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 고립되어 오히려 척탄병들은 무차별 공격을 받아 딱 두 명만 생존하고 전멸해버리고 말았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이 알라트리스테와 작중 화자 ‘나’ 이니고 발보아의 아버지, 로페 발보아. 당시 알라트리스테는 중대장 정도인 지휘관 대위가 죽자 뒤를 이어 중대를 지휘해 어쨌건 살아 남았고, 이후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대위’라고 불렀던 것이 그냥 굳어진 거였다.

  그때 생존했던 로페 발보아는 훗날 쥘리치 요새에서 적의 총에 맞아 전사했고, 여전히 함께 했던 전우 알라트리스테는 죽어가는 로페에게 로페의 아들 ‘나’ 이니고가 성인이 되면 자신이 돌보아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스페인 북부 기푸스코아에서 과부가 된 엄마가 열세 살의 이니고를 마드리드에서 칼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알라트리스테에게 보내 그의 종자로 있게 하면서 작품, “알라트리스테 대위” 시리즈의 막이 올라간다. 에잇, 써놓고 보니 족보가 복잡하네. 다 잊으셔도 좋다.


  알라트리스테의 직업이 칼잡이? 뭐 대강 그렇다. 나 몰래 내 아내 속고쟁이 벗긴 놈 작살내기, 돈 빌려가 장사해 부자 되고도 돈 갚을 생각하지 않는 놈한테 복리이자 붙여 돈 받아오기, 그냥 이유 없이 미운 놈 얼굴에 흉터내기 같은 일. 얼굴에 흉터내는 건 cm당 단가가 있지만 이것도 길이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3cm에 3백유로라면 8cm엔 8백유로가 아니고 1천2백유로, 이런 식이다. 뭐 농담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심지어 청부살인도 했다. 알라트리스테는 청부살인의 경우에 반드시 죽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여성이나 어린이는 절대 안 되고, 암살도 거부해, 여태 청부살인을 당한 대상이 건장하고 칼싸움에 능한 터키인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알라트리스테의 친한 친구 가운데 시인도 하나 있다.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이이는 나이도 들고 살이 많이 쪄 몸이 굼뜨지만 나름대로 검법에 조예가 있고 성격도 한 지랄한다. 근데 왜 이 시인을 소개하느냐 하면, 케베도가 누구 한테 검술을 배웠는고 하니, 전설적인 검의 대가 돈 하이메. 맞다. 앞에서 말한 레베르테의 대표작이자 첫 장편소설 <검의 대가>의 주인공, 멋있게 늙은 노 검객이라서.


  때는 1620년대의 어느 날. 몇 십 년 동안 왕을 해먹을 필리페 4세의 젊은 시절. 지속적인 근친결혼의 결과 심한 주걱턱을 지녔지만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미남이었던 필리페 4세는, 기울어져가는 국가의 군주답게 국정은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사냥, 연극공연 관람, 여배우와의 염문, 파티 같은 걸로 날 새는 줄 몰랐다. 돈이야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황금과 은괴 상태로 무한정 들어오니 세상에 걱정이 없다. 그 황금과 은괴가 거의 전부 스페인 귀족 몇 명의 손에 들어갈 뿐 백성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는 걸 국왕은 알 필요도 없었던 때.

  당시 필리페 4세의 여동생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찰스 왕자와 약혼한 상태이지만 가톨릭 국가에서 이교도의 나라에 공주를 시집보낼 수 없어 자꾸 약혼 기간만 늘일 뿐이었다.

  이때 누군가 알라트리스테 대위는 두 명의 복면 귀족을 만난다. 누군지는 독후감 목적상 알려드리지 않겠다. 좋다. 그럼 한 명만 가르쳐드리지. 국왕의 개인 비서관 루이스 데 알케사르. 다른 한 명은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귀족들이 주문하기를, 모월, 모일, 모처에 가면 어떤 차림의 옷을 입고, 무슨 색깔의 말을 탄 잉글랜드 귀족 토머스 스미스와 존 스미스, 두 명이 지나갈 터이니 너와, 내가 지금 파트너로 지목할 이탈리아 출신 검객 괄테리오 말라테스타와 함께 그들을 꿇려, 그들의 몸에 지닌 모든 문서를 탈취해 오라는 것. 싸움 도중에 두 명 가운데 키 큰 토머스 한테 약간의 상처를 내는 것까지는 허락하겠지만 결코 목숨을 빼앗지 말라고 주문한다. 괄테리오가 묻는다. 그들의 소지품 가운데 지갑은 제가 가져도 괜찮겠습니까? 복면 귀족은 좋다고 한다.

  두 복면 가운데 더 높은 계급의 복면이 퇴장한 후, 여지껏 몰랐던 그늘 속의 한 거물이 등장하니, 종교재판관 보카네그라. 흠. 보카네그라가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 성씨군 그래. 종교재판관은 복면도 쓰지 않고 당당하게 검객들을 위협한다. 모월 모일 모처에서 만날 두 명 모두 싹 죽여버리라고. 그러면서 추가 수당 금화 다섯냥. 그러면 합해서 한 명당 금화 스무냥이니 세상에 이런 돈벌이는 난생처음일세.


  드디어 모월, 모일이 되고 모처에서 매복해 있던 두 검객 앞에 정말로 두 명의 영국 귀족이 말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청부 칼잡이가 앞으로 썩 등장해 한 명이 한 명씩 맡아 싸움을 벌이는데, 상대가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칼잡이로 먹고 사는 인간들 한테 이길 도리가 없어서 이탈리아인 칼잡이는 벌써 존 스미스를 잡아놓고 당장 죽이지 않은 채, 마치 쥐를 잡아 놓은 고양이처럼 칼로 슬쩍슬쩍 베면서 장난질을 하고 있다. 알라트리스테 역시 키 크고 더 건장한 토머스의 목에 칼 끝을 대고 있는데, 이때 토머스가 하는 말이’

  “항복, 항복하오. 나는 어떻게 해도 좋지만, 제발 부탁하건대 저이 존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시오.”

  알라트리스테가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올 찰나에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자기 일행의 생사여부에 더 관심을 쏟고 그를 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원 참. 그래서 조금 감동, 또는 동정한다. 알라트리스테는 항복한 토머스한테 칼 끝을 거두고, 때마침 존의 심장을 향해 결정적 최후의 한 방을 찌르는 괄테리오의 칼을 자기의 장검으로 막아 살인행위를 저지한다.

  그럼 임무는 어떻게 된 거지? 처음 복면을 쓰고 온 귀족이 준 임무는 성공했지만, 보카네그라 종교재판장 발행 지옥행 특급은 자동 예매한 거 아닌가? 그것 참. 어떠셔? 재미있겠지? 재미있다. 그러나 역시 <검의 대가> 만큼은 아닌 걸로.

  그래도 나는 “알라트리스테 대위” 연작을 나온 데까지 달려볼 생각이다. 아직 화자 ‘나’ 이니고 발보아가 사춘기 청소년에 불과하거든. 혹시 알아? 다음 편 정도 가면 로맨틱한 장면도 나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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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판시선 71
서정춘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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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도 무심하지. 서정춘. 벌써 여든다섯. 등단하고 스무 여덟 해 만에 낸 첫 시집 《죽편》으로 그때까지 붕어빵 찍어내듯이 시를 쓴 시 생산업자한테 면목없게 만들던 기억. 여전히 언어의 구두쇠. 이번 시집 《랑》은 표지까지 39쪽의 짧은 분량에 서른세 편의 시를 실었다. 서정춘의 시는 그냥 읽으면 된다. 척, 읽으면 탁, 와 부딪는다. 예컨대:



  홍매설紅梅說



  첫, 보시기에

  꽃도

  불이시니

  불티 먹은

  꽃가지에

  불이시라

  남의 님

  넘보듯

  불콰하시니

  지난 날

  물불 없이

  사르다 간

  불이시라  (전문. p.10)



  아후, 세상에나. 아직도 이렇게 시를 쓰는 것이 유효할 줄 누가 알았을까? 붉은 매화 한 송이 또는 한 그루를 보고 “지난 날을 물불 없이 사르다 간 불”이라 노래하면, 노랠 듣는 사람은 어찌하라고. 제일 첫 마디 좀 봐. “첫, 보시기에” 저 쉼표의 절묘함이라니. 일찍이 쉼표의 단애斷崖는 송기원의 단편 <월행>에서 유감없이 표현된 바, “구름 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반짝, 개천이 드러났다.” 이후 무단 없이 쉼표를 사용한 글쟁이들은 누구나 송기원에게 빚진 바 있다 하겠으나, 같은 40년대생 송기원이나 서정춘이나, 보성이나 순천이나 거기서 거기니까 두 양반이 알아서들 하시압고, 하여간 잡소리 없는 절창이라 아니 할 수가 없네 그려.

  꽃도 불이니, 불티를 먹은 꽃가지에 매달린 불이러라. 크. 낮에 마신 소주가 지금 다시 취한다. 이런 시 한 수는 외워두어야 마땅하건만 이젠 외우는 것보다 잊는 게 더 많아져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 게 한이라면 한이랄까. 이런 시 쓰는 서정춘 시인이 미울 지경이다.

  아무리 서 시인이라 하더라도 39페이지 얇은 책 속에 좋은 시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시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차지 않는 건 굳이 소개할 필요 없으니, 딱 들어온 시만 하나 더 골라보자.



  아픈 꽃



  어린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는데, 맞고도 틀렸다

  그 꽃도 아플 터라  (전문. p.14)



  맞아, 맞아. 어린 아이라도 골밀도 촘촘한 두골이 있을 터. 거기에 부딪는 꽃이라도 어찌 아프지 않을소냐. 아이를 보면서도 한 눈으로 꽃도 보는 이, 그게 시인일 터.

  이 시집에는 예전에 자기가 쓴 시를 새로 쓴 시도 있다. 2010년에 <흘림>이었다가 2013년에 <飛白비백>으로 제목을 바꾸고 다시 내용을 고쳐 쓴 <비백>.



  비백

  ― 은어잡이 황갑철



  저것이냐

  자네 흘림체 먹물에서 보았던 흰점박이 飛白

  내리내리 섬진강 내린 물을 은장도 빛깔의 은어 떼가 차오를 때 보이는 飛白

  저 역류의 힘!  (전문. p.17)



  원래 시는 이렇다.



  흘림



  저것이냐 飛白 어느 흘림체 먹물에서 보았던 飛白 오늘 섬진강 여울에서 시린 니쏘리로 여러 번씩 보인다 飛白 돌자갈에 몸을 갈며 여울물 차오를 때 보이는 飛白 은장도 빛깔의 은어 떼가 보인다 飛白 저 역류(逆流)의 힘!  (《귀》 시와시학사 2005. 전문 p.27)



  내 읽기로는 둘 다 좋은데, 시인은 암만해도 <흘림>이 뭔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홍매설> 첫행에서 본 절묘한 쉼표를 이 <흘림>에선 “시린 니쏘리”가 역할을 하건만, 독자는 그게 빠진 모양이 암만해도 섭섭하다. 뭐 그렇다고 구시렁거릴 입장은 아니긴 한데….

  또 재미있는 시가 있으니:



  乭과 새 1



  돌에 눌린 새라니요

  한글박이 시인의 눈에

  저러한 뽄새가 서름해설랑

  돌은 들내놓고

  새를 건드려

  한글 나라 소리로 훨

  날려 버릴까를 궁리중입니다요  (전문. p.19)



  乭의 우리말 음가는 “돌”이니 갑돌이 할 때 甲乭이 이 돌이다. 생김새가 돌石 아래 새乙이 눌려 있어 새가 날지 못할 것이 시인 보기에 서름해설랑, 돌을 들어내고 새 옆구리를 찔러 하늘 멀리 날려보내려 궁리중이란다. 어디로 날려보낼까? “꽃 그려 새 울려놓고 /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 소식” <봄, 파르티잔>처럼 지리산 빨치산 한테? 참 “봄봄하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



 



  전라도 순천 어머니가 서울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하면서 아가 온 나라가 난리통이다잉 밥은 집에서만 묵고 다녀라잉 마스크는 꼭꼭 눌러쓰고 다녀라잉 사람들 모닥거린 데는 쳐다보지도 마라잉 이래잉 저래잉 잉잉대는 꽃벌의 날짓 소리 같은,  (전문. p.27)


  남도 사투리 끝에 “잉” 붙이는 건 다 아시지? 비슷하게 시집의 제목을 《랑》이라 한 건, 이음새가 좋아서이다. “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 / 사랑하기 좋은 말”이라서인 것처럼 <잉>도 마찬가지. 근데 감염병이 2019년인데 이때 서정춘의 연치가 78세. 순천 사는 어머니는 적어도 오메, 90대 후반 아녀? 장수하셨네. 이이의 아버지가 마차를 모는 마부였다. 당연히 가난하고 어려운 세월을 살았겠지. 그런 살림을 꾸린 아버지는 속으로 애간장이 녹아났을 터. 이제 시인은 아버지 제사를 지낸다.



  향불 앞에서



  오늘따라 아버지 제상의 향불 타는 연기가 나에게는 마른 말똥 타는 냄새로 싫을 것이 없는 것은 차마 아버지의 한 평생인 마부의 몸 냄새라 우겨보는 데 있다  (전문. p. 36)



  한 수만 더 인용한다 해놓고 또 한 수를 보태면 반칙 아니냐고? 꽃별의 날짓 같은 어머니의 잉 소리를 한 바에 아버지 제상 향불 하나 보탠다고 어찌 흉이랴. 그냥 곱게 봐주시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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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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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엄지의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을 흥미롭게 읽어 주저 않고 이이의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지만 장편? 후후훗 웃기네…)을 읽었다. 쇼핑하듯 개가실 훑어보다 눈에 뜨인 것이 아니라 아예 김엄지를 향해 직진해서 딱 두 권 있는 책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 다른 하나는 전에 읽은 소설집. 2015년에 찍어 벌써 책 나오고 10년이 됐건만 손때가 묻지 않았다. 도시의 다른 도서관 목록을 검색해도 레퍼토리가 그리 많지 않다. 이 도시에서는 김엄지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지? 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E의 일상을 그렸다. E는 생일기념으로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았다. 앞 장면 읽을 때는 젊은 의사 같았는데 뒤에 다시 나오면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같은 느낌이 드는 의사의 말에 의하면,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가 직접 스케일링을 해주었다는 것도 신기하기는 한데, 4번과 12번에 충치가 생겼고, 앞니는 금이 갔으며, 사랑니가 가까운 미래에 말썽을 부릴 것 같단다. 의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치료하면 괜찮다면서. 당연하지. 근데 돈이 없다. 의사의 의견을 좇아 이를 고치려면 반년치 연봉이 필요하다.  E의 통장엔 잔고가 별로, 거의 없다.

  저축한 돈이 있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까?

  결혼에 특별한 동경이 없는 E는 치과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치과 옆에 나란히 내과, 피부과, 정형외과 그리고 이비인후과가 붙어 있는 건물. 결혼을 동경하지 않으니 그동안 저축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지도 않는다. 곧 크리스마스. 여자를 만날 거다. 작가가 여성이라 E도 여성인 줄 알았다. 이때 까지는. 근데 남자다.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없거나 있기는 있어도 애매하다는 뜻이라고 독자는 방점 박았다.

  백화점에 가서 여자에게 줄 선물로 장갑을 샀다. 이때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다. 집에 우산이 없지만 눈이 오지 않았으니까 우산도 사지 않았다. 여자를 만날 희망이 있으니 선물을 산 거고, 희망이 있으니까 눈 또는 비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산도 살 필요가 없었다. 이거 주목해야겠는걸? 쫌 웃기잖아?

  아니나 다를까, 여자한테 여덟 번 전화하고 다섯 통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여자의 휴대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이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자의 휴대폰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희망이 꺼지니까 눈이 오기 시작하고, 곧이어 비로 바뀌고, 눈 또는 비가 오니까 우산을 사야 한다. 경호원들이 쓰는 검정색의 튼튼한 우산. 이후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하늘은 흐리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약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눈 또는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다. 작품 끝날 때까지 우중충하게 비 오는 거. 근데 그게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참 책임 없이 쓴 거 같다. 내가 독자면 다야? 어떤 작품인지 특정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게? 맞다. 반성하겠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씨.


  E도 지인들 한테 연말연시 선물을 받았다. 책, 목도리 그리고 와인. 왜 포도주라면 될 걸 꼭 와인이라고 하지? 맞아, 나도 와인이라고 하는군. 하여간 와인은 마트에서 산 고등어를 구워 한 방에 다 마셔버렸다. E가 조금 술이 과하다. 센 편도 아닌데 자주 마신다. 술이 잦으면 사고를 면할 수 없다. 자동차 운전하면서 완전 무사고가 불가능한 것처럼. 후반부에 가면 E도 바닷가에 가 혼자 술 마시고 비 겁나게 오는 해변에 앉아 있다가 자살 여행 온 사람으로 오인받는 일도 겪는다. 그건 나중 일이고 E도 지인들 한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저것 고르기 귀찮아 전부 양말로 통일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죽어도 소원은 통일.

  E 한테 선물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낚시 좋아하고 낚은 생선을 가져와 직접 회를 떠 직원에게 먹으라 나눠주는 상사 백도 있고, 동료 a, b, c도 있다. 백은 자기가 뜬 회는 자신이 먹지 않지만 회 뜨는 실력 하나는 죽여준다. a는 회를 먹지 않아 백의 눈 밖에 났다. E와 a, b, c는 12월 31일 출근해서 오늘 계획에 대해 말한다. a는 여자하고 바닷가에 가겠다 하고, b는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단다. c는 고향에 간다는데 E는 뭘 할까 생각하다가 산에 올라 일출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계획이 있으니 눈도 그쳤다. 아닌가? 아직 눈이 오지 않았나 보다. E는 퇴근하기 전에 렌터카 업체에 전화해 경차를 빌렸다. 그걸 타고 산 밑에까지 가려고. 퇴근하다가 마트에 들러 헤드 랜턴, 아이젠, 목장갑, 초콜릿과 커피믹스를 샀다. 집에 가서 다음날, 그러니까 새해 첫날 새벽 세시 반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잤다.

  세시 반에 알람이 울리자 단호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E. 상의로 반팔, 셔츠, 카디건과 파카를 입었다. 하의엔 타이즈와 코르텐 바지. 코르텐 바지는 면으로 만들어 눈 쌓인 겨울엔 쥐약이다. 밤색 양말 위에 검정색 양말을 겹쳐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도 가지가지로 겨울산엔 쥐약이다. 김엄지는 그런 건 몰랐나보다. 산에 갔다. 산을 오르는 한 여자의 뒷모습에 눈이 갔다. 단화를 신고 있어서 발목이 드러나 보였다. 흠. 그리 춥지는 않았나 보다. (여기서 웃어줘야 하는데…)

  우리의 찌질한 주인공 E는 산을 오르다 수백명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중턱에서 헉헉, 바위에 기대 앉아 있다가 조금 아래 천막 치고 장사하는 남자한테 만원 주고 컵라면 하나를 사먹고 내려왔다. 컵라면이 오천원이다. 만원짜리를 내니까 잔돈 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내려왔다. 천막 가게 안에 열댓 명이 있었는데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인간은 E 한 명인 거 같다.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맞다. 이제부터 비가 내린다. 끝날 때까지. 그리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E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이유는? 모호하다. 상황이 모호한 게 아니라 정말로 김엄지가 그렇게 썼다. 모호하다고.

  모호하긴 뭐. 여자한테 전화해도 불통이지, 동료 직원들은 전부 연말 계획이 있는데 자기는 없었지, 산에 올라 새해 첫날 일출 보는 것도 날 샜지, 비는 오지. 우중충 itself 아냐? 그러니 비는 오고, 눈엔 눈물이 흐르지.


  독자는 시작부터 알아봤다. E는 앞으로 계속 충치가 있는 4번과 12번 이가 아니라 금간 앞니 때문에 전전긍긍할 것이며, 언젠가 한 번은 자빠져 금이 갔고 전전긍긍한 앞니에 충격을 받을 것임을. 마치 소설 속에 권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한 번은 쏘아야 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 a, b, c와 상사 백에 대한 험담이 끝이 없을 것도. 현재 연락두절이며 전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던 여자에 관한 갈증도 계속될 것. 당연히 하염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릴 것이고, 높은 습기로 인한 부작용까지.

  여기에 하나 더. E는 직장 동료 세 명과 함께 퇴근 후 일상처럼 술자리를 갖는데, 특별하게 2차로 포장마차에 간 날, 옆 테이블의 여성 네 명과 합석을 한다. 여기서 한 명을 낚아챈 E는 그날로 여관에 가서 함께 자긴 했지만 말 그대로 그냥 잤다. 틀림없이 키스는 했건만 여자의 혀가 두꺼웠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고, 섹스를 하려 했다가 E가 하도 주절거리는 바람에 김이 샌 여자는 E한테 등을 돌려 그냥 자버리고 말았다. E의 머리 속에는 돌아누운 여자의 등뼈가 확 박혀 버렸다. 이 등뼈도 책이 끝날 때까지 E의 머리에 삼삼할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이렇게만 얘기해도 김엄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시지? 뭐 그런 거지. 그렇게 젊음과 시간은 황량하게 가버리는 거지. 중뿔난 거 하나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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