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평점 :
.
줄리언 반스는 이 책을 하이브리드라고 규정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자서전이 합쳐진 책이란다. 책을 읽어가면서 문학의 하이브리드가 어떤 방식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 독자는 그냥 읽기만 하면 될 일이다. 주로 나이 든 픽션 작가가, 결국 개(책에서는 루이라는 늙은 개)한테 주지 못한 버릇인 픽션을 조금 섞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책. 그래서 상당한 부분은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 같고, 어떤 쪽에서는 자기 삶의 특정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작중 화자 ‘니’는 작가 줄리언 반스이다. 대략 76세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 78세까지의 반스.
책의 초반을 끌고 나가는 주제는 불수의 자전적 기억 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
혈액암에 걸린 줄리언 반스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닥터 재키 한테 엉치뼈 위에 뻐근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마취 주사를 맞은 후, 작은 드릴로 척골에 구멍을 내고 골수를 채취해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의사 재키가 하는 말에 따르면 예후가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암에서 나을 방법은 없고, 평생 암을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암은 반스를 죽음으로 몰고가지 않으며 반스가 죽어야 암도 사라질 것이라고. 즉,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혈액암을 죽이는 결과가 된다.
반스의 책을 몇 권 읽어 엽기적이고 극단적 관심을 잘 알고 있는 주치의 닥터 재키가 <브리티시 메디컬 센터> 스크랩 글을 보내주었는데, 기사는 좌측 시상 후부 출혈성 뇌졸중을 겪은 45세의 남자 케이스가 나온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침상에서 먹었던, 먹어도 참 변함없이 여러 번 먹었던 마들렌을 떠올리며, 이때도 마르셀이 한 번 마들렌을 연상하고 그것이 불수의자전적기억IAM에 의하여 기억 속에서 잠재하고 있던 거의 모든 마들렌 먹던 기억이 와그르르 쏟아져 나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역시 반스는 엽기적인 인간이니, 마들렌, 비스킷 또는 애플파이로 변화시키지 않고, 만일 사람이 소리 죽여 방귀를 뀌었는데 이 순간 IAM이 작동해 몸에서 새 나간 모든 방귀가 시간별로 상황별로, 냄새의 강약 별로 떠오른다면 어떻겠는가, 아니면 평생 먹은 베이컨 샌드위치가 날짜별로 휙휙 지나칠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진이 빠질지 상상해보란다. 이게 좌측시상후부에 출혈성 뇌졸중이 발병해서 생기는 일이라면.
이 기사를 읽은 70대 중후반의 줄리언 반스는 혹시 자기 뇌에서도 이런 IAM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도 지금 출혈성 뇌줄중이 있는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노령의 초입에 들어선 독자 나도 마찬가지인데) 반스는 지금까지 먹은 모든 파이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행동하거나 비도덕적으로 행동한 순간들도 시간 순으로 정리되는 것 같은 기분이고, 진심이든 아니든 “사랑해”라고 말했던 모든 순간, “사랑해”라고 말해야 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 저질렀던 모든 거짓말, 위선, 피할 수 있었던 또는 피할 수 없었던 잔혹, 매정한 망각, 시치미, 지키지 못한 약속, 언행불일치의 기록 같은 것들이 와장장창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반스는 이런 불수의자전적기억IAM을 스펠링을 조금 다르게 나열하여 I AM, 즉 자신의 현재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나는, 이게 나 한테만 일어나는 특수한 기억현상이 아니고 내가 어느새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표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구나,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하고 조금, 아주 조금 안심했다. 왜냐하면 이런 IAM 현상은 대부분 좋지 않은 기억을 위주로 연상을 시작하는데, 글에 관한 한 세계적 명성을 즐기고 있는 반스의 경우에는 글을 씀으로 해서 IAM을 다스릴 수 있지만, 나같은 범부는 여전히 그 시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과 자책과 죄의식 때문에 이게 뇌 속에서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육체적으로도 떨림 혹은 호흡의 아주 약한 불규칙, 어쩌면 혈류 속도의 경미한 이상 같은 현상도 생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IAM,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머리글자. 이걸 수천년 동안 잘 써먹은 집단도 있다. 우리가 한 낱낱의 행동, 생각, 감정을 다,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죽은 뒤에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협박해 돈과 권력과 최고의 위세를 얻은 집단. 오랜 동안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죄의 기록, 목록은 성베드로의 외상장부에 새겨져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뇌, 시상 후부에 담겨 있으며 그걸 열 수 있는 열쇠는 신경의학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안다.
새로운 궁금증. 그러면 이제 누가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할까? 뇌수술 전문의? 신경분석학자? 천만의 말씀.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한테 역할을 맡기면 괜히 얻는 것 없고 돈만 깨진다.
여기서 마르셀 프루스트, (당연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그에 관한 반스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나,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생략한다.
대신 하이브리드라고 말했으니 반스는 실제 자기가 겪은 실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화이기는 하지만, ① 두 중심인물의 이름을 바꾸었으며, ② 이야기를 하려면 대부분 픽션일 수밖에 없는 배경을 제공해야 했고, ③ 이야기의 시작과 끝만 실화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중간의 빠진 부분은 개략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④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20년 동안 금지, 타 대학 배경은 10년간 금지했으나 2004년 부터는 그걸 20년씩 더 연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옥스포드 출신인 줄리언 반스 입장에서,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적어도 40년 전에 시작한 사건/일화라는 뜻이겠다.
반스는 60년대 중반에 옥스포드에 입학했는데 당시 여학생은 16.1%. 성비가 5.26.대 1.
이때 반스는 두 명의 친구를 만난다. 진과 스티븐.
스티븐은 반스처럼 중산계급 출신의 장학생이었지만 그는 장차 공무직 또는 경영 분야에서 일하려고 철학을 공부하며 뇌를 정리하고 있었고, 반스는 작가가 되기 위하여 더 진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철학과목을 듣고 있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 중산층의 아들들 답게 참을성 많고, 친절하고, 잘 파악되지 않는 명제나 이론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자유분방함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진은 처음에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두 남자 아이들과 달리 약간 더 화려하고 약간 더 불안정한 집안 출신이었다. 별거중인 부모 가운데 아버지는 애인이 있었고 집에서는 만날 말다툼이었다. 상황도 아슬아슬하고 이건 진 역시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그래도 벌써 스페인과 이탈리아, 모로코에 가보았고 러시아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으니 스티븐과 반스 보다는 진취적이었다고나 할까?
셋 가운데 스티븐과 진이 드디어 사랑했던 모양이다. 반스는 다른 아가씨와 한 침대에 오르긴 했는데 하도 서툴러서 밤새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내려온 적 밖에 없었지만, 먼저 스티븐이 반스에게 와서 고백했다.
“이제 결혼을 하든지 헤어져야 하겠어.”
진도 반스에게 와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이제 우리한테 남은 건 결혼하느냐, 아니면 헤어지느냐야.”
이들은 원만한 합의 하에 이별을 선택했고, 이후 몇 년간 전화, 우편 등으로 연락을 이어가더니 흐지부지 헤어졌다. 스티븐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아내와 아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스티븐 혼자 잉글랜드에서 이것저것 하며 중산층 조금 윗길로 살아간다. 진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화훼 회사를 차려 괜찮게 사는 평생 독신녀로 늙었다.
그러다가 반스를 찾아온 스티븐. 이제 반스에게 두 번째로 진과 만남을 주선하란다. 40여년 전에 그렇게 했으니 이제 한 번 더 못해줄 이유가 없지 않으냐며. 하지만 연락처가 없다. 전화번호 적어 놓은 건 벌써 번호가 바뀌었겠지. 그래도 어찌어찌 해서 인터넷 메일 주소를 찾았다. 반스가 힘을 보태 둘을 연결시켰고, 셋이 만나 적당한 시간에 반스가 자리를 피해주었으며, 이때부터 스티븐과 진은 로맨스 그레이, 늙은 연애를 꽃피우기 시작했는데, 아이고야, 마음은 20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나? 심지어 이미 70대 중반인 스티븐은 그때까지도 절륜한 전립선을 보유하고 있어서 진 평생에 그런 밤은 또 처음 지내봤단다. 거 참 주책들이야.
하지만 쉽지 않다. 예전에 사랑을 쏟아주지 못한 스티븐은 늘 조금이라도 많은 사랑을 쏟아부으려 하고, 세상 살면서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진은 그게 버겁다. 행복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한테만 골라 온다는 것을 이들은 몰랐고, 반스도 몰랐고, 나도 몰랐고, 세상 사람 거의 다 모른 채 그 자리를 오해 및/또는 착오에게 물려준다.
이들의 결혼에 대표 증인으로 나섰던 반스는 이들의 결혼생활을 지켜본다. 그리고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 낯설지 않은 죽음. 그러나 자신의 작업을 중도에 죽음에게 뺏기기 싫어, 그럴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마음먹고 자신이 쓸 마지막 책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쓴다.
줄리언 반스답다. 팬으로 반스의 픽션은 거의 섭렵을 했으나 정작 더 이상의 픽션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들으니 섭섭한 마음을 피할 수 없다.
반스 선생.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