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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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열네 편과 에필로그로 구성한 작품집. 이렇게 말하는 건 의미 없다. 작품 열넷이 조밀하지는 않게, 알게 모르게 엮여 있는 큰 그림을 그린다. 사실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이런 것도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열네 편을 한 번에 다 추스려서 카브레의 명작 <나는 고백한다>처럼 장편소설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에필로그에 썼듯이 “삶의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열네 편을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는데 글을 쓰면서 작가는 “숨겨진 혹은 좀 더 명시적인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됐고,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틀림없이 각각 개별적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 읽은 후에 독자는 앞뒤가 헝클어진 한 묶음의 실타래를 정리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랬다.

  지난 겨울 내내 우리말로 번역한 가사를 읽어가며 다양한 성악가들이 노래한 <겨울 여행>을 들었다. 사흘에 한 곡씩. 그러면 겨울이 간다. 이 책의 제목 《겨울 여행》이 바로 그 <겨울 여행>,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에서 따왔고, 다만 가사의 번역은 뮐러의 독일어 시가 아닌 카탈루냐어 번역의 중역인 것만 다르다. 이 가운데 1곡 “안녕히”와 마지막 24곡 “길거리 악사”는 처음과 마지막인 만큼 더 중요하게 사용했다.


  제일 앞에 배열한 <사후 작품>의 주인공은 무대공포증을 겪고 있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페레 브로스의 리사이틀 장면. 원래 레퍼토리는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세 곡. D.958, D.959, D.960이다. 페레 브로스는 미세하게 맞지 않는 의자의 높이를 조절하고,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에 밴 땀을 닦는 김에 먼지 한 톨 없는 건반도 문질러 닦는다. 이어서 셔츠의 소매를 매만지는 브로스의 목은 타고, 혈관 속엔 가시가 떠다니며, 끝없는 걱정으로 심장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페레 브로스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벌써 4분 동안이나 손바닥에 스며든 공포를 닦고 있었는데, 그가 고문 수준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바르셀로나의 아우디토리 극장 3층에 앉은 관객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브로스가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고,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의 수군거림 속에 퍼진 건 레퍼토리의 마지막 곡 내림나장도, D960이었다. 죽음에 대한 내밀한 성찰이자 내림나장조로 흐느껴 울었다는 한 남자가 쓴 곡.

  42분 13초가 지나 마지막 음의 여운이 사라지자 브로스의 연주인생 처음으로 약 10초 또는 15초간의 고요, 완벽한 적요를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브로스의 오른쪽 맨 앞줄 7번 객석에 앉은 남자, 세련된 작은 안경에 넓은 이마, 곱슬머리를 한 채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인터미션이 지나도록 브로스는 연주 중단을 고집했지만 매니저 졸탄 파르도는 연주계의 큰손인 그로스만 부인을 접대한 뒤, 바티칸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브로스의 비공식 독주회를 섭외당하고 있었으며, 어쩔 수 없이 다시 무대로 나간 브로스의 머리 속에는 슈베르트의 나머지 곡이 아니라 시b, 라, 레b, 시, 도로 진행하는 불협화음의 사라방드,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시절을 살던 피셔의 작품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전위의 첨단으로 오랜 세월 매장당했던 곡. 브로스가 연주를 시작하자 관객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곡에 놀라 항의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성격이 조금 느긋한 사람들은 연주를 조금 더 들어보다가, 일어서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좀 더 주의깊게 들어보기를 권했으며,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일곱번째 변주로 넘어가자 이게 도대체 누가 쓴 곡인지 나직하게 묻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보다 더 현대의 작품인 것을 보니 분명히 리게티일 것이라는 추측이 공연장 허공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연주가 끝나고 페레 브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난다.


  이를테면 <사후 작품>이 흥미로운 변주곡의 아리아aria에 해당한다.

  페레 브로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나는 바람에 무산된 바티칸 비공식 독주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가우스 주교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던 렘브란트의 작품 <철학자>를 복제, 절도했으며, <나는 고백한다>에서 명품 바이올린 비알에 악과 범죄가 뒤따르듯이 명화 <철학자> 역시 몇 건의 비정한 살인사건을 동반하고, 브로스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피셔의 사라방드의 기원을 따라 18세기 바흐의 집안으로 시간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브로스의 매니저인 줄 알았던 헝가리인 졸탄 파르도도 과거에는 브로스 인생에 기념할 만한 D.960 연주를 할 정도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중도에 작파하고 음악사로 길을 바꾼 인물이다. 브로스가 아리아를 연주했다면 졸탄 파르도는 25년 전에 자기 성 ‘파르도’도 모른 채 서로 사랑한 마르게리타를,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서, 12월 13일 정오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우산을 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게리타는 약혼을 한 상태였으나 자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어 빈에 와 졸탄을 만났고, 28일간 열렬히 사랑을 했으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으나 그래도 결국 약혼자에게 돌아갔다. 약혼자도 사랑했으니까. 졸탄은 비탄에 싸여 마르게리타에게 25년이 지난 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제안하는데, 그녀가 결정을 후회하는지 하지 않는지 꼭 알고 싶어서. 물론 졸탄도 사랑을 느껴 결혼을 해 20년간 함께 한 끝에 먼저 아내를 보내건만, 한 번도 살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죽은 아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어떻게 하나. 25년 동안 마르게리타를 잊기 위해 전념을 다해봤어도 얼굴은 점점, 조금씩 점점 잊혀질지언정 25년 후의 12월 13일 정오 슈베르트 무덤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절대 지워지지 않았던 것을.

  그리하여 마르게리타는 올까? 온다. 회색 머리칼로 변한 모습으로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장애 때문에 오래 소변을 참지 못하는 아쉬움을 호소하는 곱게 늙은 중년의 장애인. 결혼 2년 만에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졸탄을 잊지 못해 빈을 떠나지 않아, 바로 이웃한 구역에 살았으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마주쳤으면 알아볼 수 있었을까 싶은데, 그래서 지난 25년이 더 안타까운 졸탄. 이혼 후 졸탄을 찾아보려 헝가리 페스트 음악원에 가보기도 했지만, 페스트에서는 남학생 전부 졸탄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같이 많고 많은 졸탄이 있었으며, 졸탄의 성이 파르도라는 걸 모른 마르게리타는 그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 <겨울 여행> 24곡처럼 거리의 늙은 악사가 연주하는 드렐라이어에 맞추어 12월의 빈, 꽁꽁 얼어붙은 마을 변두리 골목을 거리의 늙은 악사와 함께 떠나가고 싶었을까?

  이 마지막 열네 번째 작품 <겨울 여행>의 내용은 정말 신파 자체이다. 그러나 세상에 신파만큼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다만 신파 또는 뽕짝으로 사람을 후벼 파려면 그만한 곡조가 받쳐주어야 한다. 자우메 카브레는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람 미치게 후벼서 파고, 파고 또 파버린다.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는 이건 신파야, 정신 차려, 끊임없이 귀에 대고 속삭이건만 독자는 결국 손을 저으며 그냥 감정의 파도 속에 빠지기로 작정해버린다. 그렇게 만든다. 문장으로. 역자 권가람의 뛰어난 우리말 솜씨로. 권가람. <나는 고백한다> 때부터 알아봤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 이야기하자면, 자우메 카브레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작품 속에 적절한 액션과 범죄 장면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악의 다양한 방식에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겨우 <나는 고백한다>와 단편집 《겨울 여행》 이렇게 꼴랑 읽고 하는 말이니 믿을 필요 없지만. 이 책에서도 앞에 말한 것처럼 몇 장면의 암살 씬, 암살이라기보다 잔인한 청부살인과 이 과정에서 살아남았지만 청부인은 제거된 것으로 여기는 살인자도 등장한다. <소피의 선택>과 유사하나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더욱 잔인한 또다른 선택의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청부살인의 배후? 고전음악의 탄탄한 후원자 그로스만 부인의 남편, 그로스만 씨. 이렇듯 제일 앞에 실린 <사후 작품>이라는 아리아를 열세 번 변주한 작품이랄 수도 있고, 아리아고 뭐고 차라리 거대한 푸가로 읽을 수도 있으며, 출판사 책소개에 나온 것처럼 “죽음의 그늘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연약함을 환기시키는 ‘범성악 대위법’ 작품”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문자를 써서 음악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기 바란다. 카브레만큼 설득력 있게 음악을 이야기하는 작가도 지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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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주문 들어갑니다~~
자우메 카브레의 단편집도 있었군요! 닥치고 구매합니다요..ㅎㅎ

Falstaff 2025-04-02 15:52   좋아요 0 | URL
옙! 좋습니다. 탁월한 선택!!
 
여덟 마리 말 그림 대산세계문학총서 194
선충원 지음, 강경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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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충원(沈從文)은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루쉰에 필적할 만한 평가와 추앙을 받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중국 소수민족인 묘족 아버지와 토가족 어머니 사이의 8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가 저 술맛 좋은 구이저우, 귀주貴州성에서 총사령관 대리를 지낸 장군 영웅 출신이라 모자란 것이 없이 살았다. 근데 중국 근현대사에서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곱게 산 사람은 1명도 없어서 선충원도 마찬가지였으니, 아버지 선종시沈宗子가 겁도 없이 당대의 권력자 위안스카이 암살 모의를 한 것이 발각 나는 바람에 남쪽 후난성에서 저 북쪽의 내몽골로 도망하는 동안 집안꼴이 거의 거덜이 났던 듯하다. 영웅의 집안이라 신교육을 받지 않아도 집안에서 전통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마땅하지 않았던 듯, 1915년 열세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열다섯 살이던 1917년에 졸업을 했다. 남들 중학교 졸업할 나이지만. 이후 군에 입대해서 5년간 복무를 하고 돌아와 대학 입학시험을 치루었으나 미역국을 먹었고,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베이징대학에서 청강하며 습작시대 시작, 24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이때 어울린 사람들 가운데 딩링, 후예핀 부부. 부부와 함께 상하이로 옮겨 출판사를 운영하고 잡지도 냈고, 당시 거의 대부분의 문학잡지가 그랬듯이 얼마 가지 못해 문 닫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1949년에, 그동안 공산당에 의하여 일종의 반동분자로 찍혀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비슷한 매체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죽기위한 마지막 건배로 등유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면도날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게 말이 쉽지 진짜로 죽기도 어려운 법이라 맥박은 여전히 뛰었으며 배 속의 애먼 기생충들만 죽어서 몸을 빠져나왔다. 이후 창작활동도 당연히 이어갈 수 없었다는데, 당연히 각급학교에서 교사, 교수 생활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규 교육과정으로는 초등학교만 다닌 선충원이 1946년부터 49년까지 중국 최고의 명문이자 자신이 청강을 했던 베이징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니 당대의 인재였던 건 사실처럼 보인다.

  하여간 49년 자살미수 이후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처럼 재교육을 받았음에도 1966년부터 저질러진 문화혁명 시기를 무사하게 넘길 수는 없었다. 이른바 지식분자, 반동적학문권위자로 찍혀 60대 중반의 늙은이가 여지없이 조리돌림을 당하는 수치를 견뎌야 했고, 이 타이틀은 1978년에 복권할 때까지 짊어지고 다녔다. 1980년대에 들어와 다 늦게 팔자가 피어 미국과 유럽 등지를 순회하며 강의도 하고 강연도 하며 이름을 날렸으며, 중국 출생이긴 하지만 프랑스 국적이었던 가오싱젠을 제외하고 1988년에는 중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내정되었으나, 아뿔싸, 하필이면 상을 타기 전에 숨이 넘어가는 바람에 상을 놓치고 만다. 하긴 86세까지 살았고, 말년에나마 호강한 삶이 다 늙어 노벨상 탄 것보다 좋은 일이긴 하다.


  왜 이리 말이 많은가 하면, 이이의 단편집을 읽어보니까 ①인텔리 계급, 대학 교수 또는 강사의 빵빵한 프라이드, ②군대와 전투의 비극 경험, ③빈민, 특히 (상하이로 보이는)조계지 변두리 주민들을 주요 등장인물이나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다 작가의 실제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들이 거의 고리타분해서 고린내가 폴폴 나는 올드스타일이라 작품에 관해 길게 얘기해봐야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높이 추앙받고 있는 작가를 다른 나라의 아마추어 독자가 엉뚱한 타박을 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1930년대 초반에 발표한 것인데 선충원 앞뒤로 우리나라에는 김동인, 현진건, 김유정 등, 다른 건 몰라도 단편소설 방면으로는 세상 어디에 내놔도 빵빵하기 이를 데 없는 막강 진용을 갖춘 터이어서 웬만한 단편소설은 눈에 차지 않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와 애써 번역한 강경이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한 내 감정이 그렇다.

  표제작 <여덟 마리 말 그림>은 칭다오의 한 대학에 여름학기 강의를 위하여 중국 각지에서 권위있는 교수진을 초청해 산자락의 흰색 (당시 수준으로)고급 주택에 묵게 했으니, 물리, 생물, 도덕철학, 철학, 서양문학사 등으로 이름을 낸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우연히 주인공이자 소설가인 다스 선생도 포함되어 있는 바, 20년대 후반, 그러니까 선충원의 20대부터 각급 학교에서 교수를 했던 본인이 본, 여덟 명의 준마駿馬의 스케치를 뜻한다. ‘여덟 마리 말 그림八駿圖’

  이 말 그림은 베이펑, 지금의 베이징에 있는 약혼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이 약혼녀가:

  X라는 여성은 ‘그’를 좋아하고, ‘그’는 ‘ㅁ’을 좋아하며, ‘ㅁ’은 ‘X’를 싫어하지 않은 관계였다. X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을 통감해 ‘비통한’ 마음으로 회계사와 결혼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그의 ㅁ을 향한 연애전선이 좌절의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X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뭔가 해줄 일이 없는 지 물은 적이 있었고, 이에 그는 X에게 그러면 대신 ㅁ을 만나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부탁은 X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동시에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더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는 건방진 훈수이기도 했던 것이겠지. 하여간 이 일이 있은 후에 X는 부상병을 간호하기 위하여 전선으로 떠났다가 작년에 병사했고, 그는 작품 속 여름학기 강의를 위하여 칭다오에 와서 칭다오 맥주만 벌컥벌컥 마시는 다스 선생이 되었으며, ㅁ이 바로 다스 선생의 약혼녀이다.

  그냥 그렇다. 하여간 다스 선생이 본 여덟 마리의 말, 그것도 그냥 말이 아니라 준마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여성관을 가지고 있는데, 공통점은, 다스 선생이 본 공통점이 아니라 내가 본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은 그저 배우나 못 배우나 기본은 비슷비슷하다 이건데, 다스 선생은 이들 모두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물론 본인은 빼고. 여덟 모두 문제가 있지만 특히 두 명은 이미 중증이어나 중증에서 아주 가까운 곳까지 왔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 여덟 교수들의 여성관에 대한 품평을 서신을 통해 베이펑에 있는 약혼녀에게 전하는 내용.

  기대하지 마시라. 아무리 이이가 여성 해방을 포함한 모든 계급의 해방을 부르짖은 공산주의자였으며 베이징대학의 교수를 지낸 당대의 지식인이었다고 해도, 1935년 한여름에 발표한 작품에서 그릴 수 있는 여성상이 얼마나 진보적이겠는가. 짐작하시겠지?

  이것 외에 전투 장면, 전투는 나오지 않더라도 한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가 전투 없이 철군하는 작품, 상하이 조계지 근처에서 빈민들이 겪는 참상 등이 있고 특히 지식분자들의 냄새나는 오뇌懊惱 또는 고뇌를 그린 건 목불인견, 눈 뜨고 봐주지 못할 수준이다. 작품이 후지다는 얘기가 아니라 느므느므 올드 스타일이라서. 고딩 고학년 때 중국집 뒷방에서 짬뽕 국물 안주해서 소주 마시며 궁리할 주탁 위 허언虛言 같음에야 어찌.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뜻이다.


  우우. 이런 좋지 않은 독후감을 쓰니 마음이 언짢다. 출판사와 역자한테도 또 미안하다. 에잇, 김유정의 점순이나 한 번 더 읽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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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0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요건 패쑤할 책이네요..ㅎㅎ
중국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고 좀 그렇습니다..^^;;

Falstaff 2025-04-02 15:51   좋아요 0 | URL
니옙! 패스 하셔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데 중국 문학 작품들을 우습게 보지 마셔요. 걔네들 인구가 14억입니다. 이 가운데 돋보이는 건 다 이유가 있거든요. ㅎㅎㅎ
걍 제 생각입니다. ^^

yamoo 2025-04-03 10:08   좋아요 0 | URL
14억 인구....압도적인 투자..
근데 왤케 축구는 못할까욤??
 
산하는 잠들고 더봄 중국문학 전집 12
거페이 지음, 유소영 옮김 / 더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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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복사꽃 그대 얼굴>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편. 책을 5년이나 팔고 있음에도 Sales Point 19는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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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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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작가? 심지어 큰 회사 사장까지 지낸 경영인 출신 소설가는 봤어도 경제학과 나온 소설가는 처음인 듯하다. 하여간 1980년 안동에서 나서 학교 졸업하고, 몇 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때려 치우고 글을 쓴 거 같다. 2016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에 장편소설 <누운 배>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가 됐고, 이 <누운 배>를 읽어보면 작가 스스로 조선회사에서 근무하지 않았으면 쓰기 힘들었을 터라, 글을 쓰기로 작심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몇 년 했을 거라고 짐작한 것뿐이다. 뭘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니고. 책 뒤편 ‘작가의 말’에 “이 이야기는 소설로 썼으며 그렇게 읽혔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픽션이다. 작가가 바란 대로 픽션으로 읽었다.


  작품은 주인공이자 화자 ‘나’가 스물아홉부터 서른두 살까지 3년 동안 근무하는 중국에 있는 한국의 조선회사를 무대로 하는데 말 그대로 젊은 시절이다. 한참 팔팔하고, 기세좋고, 정의롭고 전망과 성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절. 자신만만해서 자기의 능력치를 실제보다 높게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존감이 한참 높을 때. 지금 나쁜 의도로 이야기하는 거 아니다. 그 시절에 그렇지 못한 젊음은 젊음도 아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혁진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조밀하고 탄탄하게, 그것도 별로 과장 없이 탄탄하게 지을 줄 아는 것이 놀라웠다. 그냥 직진하는 용맹정진. 선체 총 길이 2백미터, 높이 24미터, 폭 32미터의 거대하고 흰 절벽이자 자동차와 트럭 6천7백대를 싣고 대서양을 왕복할 대형 수송 선박 2002호선. 이 절벽이 쓰러지면서 시작한다. 진수, 대형 선박의 건조(dry시키는 거 말고 배를 짓는)과정에서 ①사전적 의미로는 처음 물에 띄우는 일이지만 ②공정상 선박의 방수처리가 완료되면 도크에 띄워놓고 내외의 장비나 부품 등 의장을 설치하는 단계를 말하는데, 이 진수식이 끝나고 의장 부두에 서 있던 배가 슬슬 기울어지는 걸 발견한 작업자/기사가 이를 상부에 보고해 전사적으로 난리가 난다. 하다못해 생산과 기술, 설계 기타 등등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경영기획팀에서 근무하는 졸병 기사인 ‘나’한테도 야밤에 전화가 와서 득달같이 택시 타고 회사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진수식 했다고 술이나 진탕 걸쳤으면 어쩔 뻔했어? 다행히 맨정신이라 헐레벌떡 택시 잡아타고 곧바로 의장 부두에 도착하니 벌써 사장, 임원, 부장, 과장, 기감 등 수십명이 집결해 있고, 그냥 눈으로 봐도 배가 조금 기우뚱해 있는 상태였다. 무슨 조치를 취할 단계는 이미 지나서 그냥 눈 뜨고 배가 자빠지는 걸 봐야만 하는, 조선 회사가 배를 짓자마자 물에 자빠지는 현장을 목격해야 하는 조선 회사 임직원들. 팀장이 지시를 내린다. 명단이 적힌 종이를 주면서 아직 집에 있는 임원들한테 전화 또는 직접 찾아가 빨리 회사로 들어오라 하라고. 사장 나와 있는데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눈에 안 띄면 찍힌다. 여차하면 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새벽 1시 38분, 2002호는 완전 전복되고 만다. 이때 ‘나’는 입사하고 1년이 되지 않았던 시점. 전에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하다 때려치우고 중국으로 온 것.

  배가 자빠졌고, 사장 명에 의해 경영기획팀이 보험 처리를 수명受命했다. 이거 처음부터 중요한 지점이다. 배가 어디 한두 푼인가. 이런 중요한 일을 이사, 상무, 전무가 아닌 부과장급의 팀장에게 맡기면, 회사의 자금 운용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일을 맡은 팀장이, 성공만 했다 하면 대박날 거 같지? 눈치를 보니까 오팀장도 알고 있는 거 같다. 성공해봐야 자긴 별거 없다고. 오히려 망쪼만 아니면 다행인 것을. 오팀장이 짬밥을 조금 더 먹었다면 스스로 자기 보스인 홍이사를 찾아가, 아이고 이사님,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이니 이사님께서 진두지휘 하시고 저는 뒤에서 열심히 따까리나 하겠습니다, 꼬랑지 팍 내렸을 거다. 성공하는 것이 실패보다 더 불리해질 수 있는데 이런 일이 대표적이다. 주인공인 ‘나’는 아무나 대장해도 상관 말고 보험 실전만 충실하게 익힐 절호의 찬스.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한국 해상보혐에서 거의 최고급으로 보이는 보험사정 능력자 홍소장을 만나 별의 별 거짓 문서 작성에 몇날 며칠 날밤을 새우게 된다. 공명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놀라운 순발력과 지식과 판단력을 갖춘 사정인 홍소장은, 선박 전복이 기본적으로 작업 불량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박 건조보험을 적용해 선박은 자연재해, 천재지변, act of god에 의하여 생긴 사고로 선가 전부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적어도 전부 비슷하게 받아낼 수 있는 유리하고 또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오팀장은 내 예상대로 날개를 다는 대신 진급에서 누락하고 ‘나’는 다른 부서로 발령난다.


  재미있겠지? 재미있을 수 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나’ 문기사였다가 문대리로 승진하고 사표내는 ‘나’처럼 기획팀에서 뼈가 굵었고 10년이 넘게 팀장으로 일했고, 나중에 “당신이 희망퇴직을 희망하는 것이 회사가 희망하는 바”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동안 회사가 나를 필요로 했지만 이제는 내가 회사를 필요로 하니 그런 줄 알아라, 하고 또 10년 가까이 버티다 정년을 맞았다. 그래서 보험사정, 경영회의, 예산편성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실로 지긋지긋할 때가 많았고, 우리나라 기업만 그런 것도 아니고 전세계의 무지 많은 기업들이 ‘나’가 일한 조선회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정년을 끝내고 회사를 나오며 다시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각오를 했지만, 당연히 실제로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는데, 비록 업종은 다르다고 하나, 조직생활을 다시 구경하는 것이 아주 징글징글해서, 읽는 내내 지겨웠다. 내가 말하는 지겹다는 지루하다는 뜻과 달리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 바, 보기 싫은 광경이 자꾸 눈에 띌 때의 기분과 유사한 상태를 그냥 ‘지겹다’라고 표현했다.

  이혁진이 글을 진지하게, 삼십대 초반의 경험답게 정의로운 관점으로 쓴 것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이런 의미에서 지겨움을 극복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작가에게 미안하다. 지난 35년 간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사는 거 별 거 아니다. 아무것도 연연해 할 필요 없다. 그러나 말미에 하준구 고문의 말처럼 “지나고 나면 다 좋은 것만, 좋았던 것만 남”지는 않는다. 이런 보살은 소설에만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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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3-28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선충원, 《여덟 마리 말 그림》
수요일. 자우메 카브레, 《겨울 여행》
금요일. 헤르타 뮐러,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그레이스 2025-03-28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재밌을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군요! 폴스타님은 그러실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관심 책입니다.

Falstaff 2025-03-28 15:49   좋아요 0 | URL
넵. 저도 기대하고 읽었는데 그만.... -_-;;

stella.K 2025-03-28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광인 한때 열풍이어서 읽다 덮었던 기억이 나네요. 연애 소설은 당췌 제 취향이 아니라. ㅠ
근데 묘사는 잘하는 것 같긴하더라고요.

Falstaff 2025-03-28 15:51   좋아요 1 | URL
다른 책 읽으셨군요. 근데 왜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ㅋㅋㅋ 일단은 올해 안에는 이혁진을 더 안 읽는 걸로...

yamoo 2025-03-28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이해> 작가의 데뷔작. 드라마 보고 작가의 원작을 읽을 생각이 샥 가셨습니다. 이 작가의 데뷔작이 다른 작품보다 훨씬 좋다고 얘기는 들었어도...아직 읽어 볼 요량이 없는 작가입니다.

근데 스타프 님, 이혁진 작가 데뷔작을 읽으셨으니 <사랑의 이해>도 읽으시고 독후감 남겨주시면 하는 맘이 있습니다. 이거 굉장히 이상한(?) 작품...드라마 보니 그렇더라구요..ㅎㅎ

Falstaff 2025-03-28 15:52   좋아요 0 | URL
드라마로도 만든 작품이 있군요. 흠. 돈 좀 만졌겠군요. ㅋㅋㅋ
언젠가 읽을 지 모르지만 하여간 당분간은 아닙니다. ^^

han22598 2025-03-29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직장생활 3년......일,이년은 적응하고 내일 해내느라 정신없었는데,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이...직장생활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지기 시작했어요. 도대체...머하러 이러고 사는지..생각하다 이곳으로 왔더니만. 별거 없다는 말이 왜케 위안이 되는지...ㅎㅎ 감사해요

Falstaff 2025-03-29 16:06   좋아요 0 | URL
정말 별거 없는데,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회사 안의 무수한 미친 연놈들 다 무시하면서 살 수도 없고, 언젠가 나도 미친놈이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ㅎㅎㅎ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셨다니 고맙습니다. 지지고 볶으면서도 그래도 직장 덕에 아이들 키워 독립시켰고, 누옥도 하나 장만했고, 넉넉하지 않지만 연금 받으면서 살고 있으니, 에휴, 그것도 고맙다면 고마운 일입니다.
 
그림자 없는 사람들
하산 알리 톱타시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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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꽤 그럴듯했다. 튀르키예 사람 하산 알리 톱타시더러 발칸 쪽에서는 ‘튀르키예의 카프카’라고 한단다. 읽어보면 정말 그렇다. <성>과 <심판>을 합친 듯한 느낌. 카프카가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숱한 후배들이 그를 모사하고, 그와 비슷하게 세상을 조망하려 하고, 그의 세계를 다시 구현하려고 힘을 쏟으니. 그런데 톱타시는, 쇤네가 뭘 알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저 읽은 감상으로 말씀드립자면, 과하게 카프카의 세계를 모사하는 바람에 찬쉐나 크러스너호르커이처럼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거 같았다. 그리하여 요샌 이름 좀 났다 하면 어김없이 명단에 오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영원히 걸지 못할 것이다. 놀랍지? 어떻게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한 극동의 일개 서생이 나름대로 튀르키예 소설의 대표선수 가운데 한 명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지? 이유가 있다. <그림자 없는 사람들>을 재미없게 읽은 이유는 ①작품 속에서 카프카가 너무 구체적으로 떠올랐던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었지만, 지금 독후감을 쓰기 전에 하산 알리 톱타시가 누구인지 구글검색 해보니, 세상에, ②2020년 12월에 성추행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였는데 자신이 톱타시에게 성추행을 당했노라고 선언한 여성이 약 스무 명에 달해, 그동안 톱타시의 책을 출판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에베레스트 퍼블리케이션스마저 전속계약을 파기할 정도였으니, 이런 작가를 다분히 정치적 성향이 돋보이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아무리 톱타시의 작품이 좋더라도 겁도 없이 상장과 상금을 던져줄 리 없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출판목록을 보면 2020년까지 15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2020년 이후로는 단 한 권도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그는 튀르키예의 포스트모던-모더니스트, 튀르키예의 카프카로 명성을 떨쳤으나 결국 타의에 의하여 절필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16년부터 영어권으로 번역 출판되기 시작해 이제 잘 하면 돈방석에 올라갈 수 있을 찰나에 그놈의 손모가지 때문에 인생 거덜난 거다. 이런 성추행과 혼외 연애는 감출 수 없다. 조물주는 사람의 입을 그렇게 무겁게 디자인하지 않아서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날 일, 아예 시도할 생각도 않는 것이 훗날 동네방네 사면팔방 쪽팔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거 뽀록나면 진짜 쪽팔릴 거 같다. 나 같으면 이민간다.


  튀르키예 작가라면 대개 이스탄불 근처에 살고,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근방을 무대로 하는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톱타시는 그러나 더 동쪽, 수도 앙카라에서 가까운 작은 도시 바클란에서 태어나 자란 58년 개띠 아저씨다. 작품해설에서 바클란을 그냥 소도시라고 해 두었는데, 소설의 무대는, 만일 바클란이 정말 작은 ‘도시’라고 한다면, 이 도시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황량한 마을, 책 속에서는 편의상 읍이라고 했을 뿐인 오지, 한쪽으로는 마치 벽wall같은 절벽이 서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평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치욕스럽게 신과 국가에게 버림받은 곳이라고 무려 16년째 역임하는 읍장이 스스로 평한 삭막한 곳이다. 만일 이 읍에서 무슨 일이나 사건이 벌어지면, 읍장은 말을 타고 적어도 하루 이상을 가야 도착하는 도시, 앙카라 급인지 바클란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도시의 관청에 가 일/사건을 보고하고 <성>에서 측량사가 그러했듯이 그저 말로만 알았다는 대답만 들을 뿐 아무런 대책이나 지시나 공문 없이 다시 터덜터덜 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그래도 튀르키예는 아무리 독재정권이 수십년 동안 권세를 잡아도 읍장도 선거를 통해 뽑는 지방자치가 활성화했던 모양이라, 이번에도 읍장이 또 연임에 성공했다. 그동안 읍장은 4년에 한 번씩 당선 축하 파티라기 보다 자축하는 의미에서 대낮부터 느긋하게 구운 닭과 파프리카를 안주로 잔뜩 라크(술)을 마셔대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읍에서 제일 먼저 실종된 사람은 이발사 즐근 누리였다. 읍장이 처음으로 읍장 선거에 당선하여 당선을 자축하기 위해 라크를 마시려 할 때, 즐근 누리의 안사람이 읍장을 만나러 집으로 쳐들어왔다. 여사님 하는 말이,

  “이 화상이 어제 이발질을 잘 하다가 난데없이 ‘내 영혼이 오그라든다!’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집에서 뛰쳐나갔지 뭡니까? 여태 돌아오지 않아 동네사람들하고 온갖 곳을 뒤져봤는데 보이지도 않는 거예요. 아마 대처로 내뺀 거 같은데 그러면 세 아이와 쇤네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깜깜무지하니 읍장님께서는 어서 제발 제 서방을 찾아주시든지 어디서든 그 화상을 끌고 오십소서.”

  누리가 왜 실종됐을까? 누가, 어느 기관이 슬쩍 접근해서 납치해간 걸까(K처럼)? 이발소 바깥에 한 발을 딛자마자 딱정벌레는 아니고 땅강아지로 변신해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갔을까? 주민들은 누리의 실종 뒤에 엄청난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실종과 비밀을 연상하자마자 한 순간에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진다. 그리고는 틀림없이 어떤 종류가 됐건 비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제 읍장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말을 타고 적어도 하루 이상 먼 길을 떠나 도시에 도착해 상급기관에 들러 누리의 실종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강구해달라고 하지만, 도시의 관리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정말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건 아니고, 도무지 <성>의 여관에 틀어박힌 관리처럼 엉뚱한 말만 해대고 거의 쫓아 보낸 거다. 관청 하는 일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은 읍장은 도시의 거의 모든 커피집, 목욕탕, 여관, 이발소에 들러 ‘즐근 누리’라는 이름과 생김새와 체격을 말하고 보는 대로 집에서 애타게 찾고 있다고 얼른 돌아오라 말해달라고 부탁한 후 다시 말을 타서 하루 이상 걸려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을의 한 방향엔 여전히 건조한 먼지들만 풀풀 날리고, 아주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우편배달부는 아무런 소식도 가져오지 않는다.

  읍민들은 동요한다. 즐근 누리는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시체가 된 지 오래지만 공식 기록부에는 트럭 운전수로 기록했을 거야. 전국을 떠도는 직업. 주소 없는 직업이잖아. 그런데 도무지 풀지 못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국가는 누리를 제거할 가치가 있다고 봤을까? 사실을 알고 보면 즐근 누리의 정체가 K라서? 트럭 운전수가 됐다는 말은 누구한테 들은 거야? 도붓장수가 그러던데. 다시 주민들이 머리를 굴린다. 만일 누리가 트럭 운전수가 됐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도붓장수가 틀림없이 국가 정보원이라는 증거야.

  이때 이슬람 지도자 이맘이 등장해 사람들을 꾸짖는다. 다들 정신이 나갔구먼! 도붓장수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은 게 벌써 몇 년 짼데! 그러나 도붓장수를 입에 올린 몇몇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를 보았다고 코란에 대고 맹세를 했던 거였다. 이야기는 갈수록 꼬이기만 한다.


  몇 년이 흐르고 새로운 이발사가 마을에 도착한다. 평온한 모습이지만 사형집행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과거가 지워진 인물. 이이는 읍장에게 누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의 눈길로 누리의 아내를 40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 바라본다. 당연히 이이가 실종된 즐근 누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웃에 사는 구두장이는 생각한다. 누리가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머나먼 어딘가에 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읍장은 마을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고, 누리의 아내는 누리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이발소를 써도 좋다고 승낙한다.

  그리하여 사형집행인의 눈길을 가진 이발사가 몇 년에 걸쳐 이발소를 운영하고, 귀머거리 아이를 조수로 두었는데, 하루는, 하필이면 화자 ‘나’가 이발소에 대기 손님으로 기다리고 있던 날, 이발의자에 앉은 손님의 얼굴에 비누칠을 잔뜩 해 놓은 상태에서 면도날이 변변치 않은 것을 발견하고 조수에게 얼른 달려가 면도날을 사오라 지시한다. 그러나 소년은 이발소를 나가더니 감감무소식. 핏대가 오른 사형집행인의 눈길을 가진 이발사가 조수를 찾으러 나가더니 그도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소설 속에는 몇 건의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실종자가 여성, 특히 미혼일 경우에는 누명을 써 읍장과 읍의 사실상 경찰 역할을 하는 파수꾼에 의하여 고문을 당해 정신이 헤까닥 돌아버리는 청년도 생긴다. 그러다가, 세상에나, 작품이 끝날 때까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이발사 즐근 누리가 누더기 꼴을 하고 돌아오고, 헤까닥 돌아버린 청년의 정신을 돌아오지 않은 채 허리가 잘라져 죽는 등, 실종에 이은 누더기 차림의 귀향과 여러 형태의 죽음이 마을에 내려 앉는다.

  이게 다다. 포스트 모던. 튀르키예의 카프카라기 보다 그냥 카프카의 사생아. 사생아라서 너무 닮았다. 앗참, 실수. 요즘 시대에 사생아라는 표현은 무례하다. 사과한다. 카프카의 체세포 복제품이라고 바꿔 말하겠다. 이 말도 먼 훗날엔 무례한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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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27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평점은 높게 주셨는데요? 깐깐한 폴님께서 그 정도로 주셨다면 꽤 괜찮다는 말인데 체세포 복제도 능력인 거 같습니다.
근데 사생활이 문란하네요.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절대로...ㅋㅋ

Falstaff 2025-03-27 15:37   좋아요 1 | URL
옙. 꽤 그럴 듯합니다. 문장이 재미가 없더라고요. 성추행만 아니었으면 몇 권 더 읽어볼 텐데 거 참. 하긴 뭐 이런 인간 말고도 읽을 책은 무지하게 많으니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