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자랑 거리도 아닌데 굳이 글까지 쓰냐라고 하면 뭐 할 말이야 없습니다만은, 당장 현재의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흡사 좀비 바이러스가 번지는 듯한 워킹 데드를 닮은 영화 같은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라고 나 할까요. 그래서 뭔가 이 상황에 대해 주절 하게 됩니다.
모 종교를 빙자한 단체(그 단체를 엄밀한 종교라고 보고 싶지는 않아서 그저 종교를 빙자한 사이비라고 해두죠)의 31번 환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먼 나라 지역의 사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감염자도 그리 많지 않았고 양성 반응이라도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31번 확진자가 나오면서부터 발생한 다음부터 그 집단의 감염자가 다수가 확진자가 발생하고 이 확진자들이 옮겨가는 확산세는 이제 2차, 3차 일반 감염자로 퍼지는 양상이었습니다.
지지난 주부터 실내생활에서 회사와 집 이외에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도 방문자나 직원들 간의 접촉을 극구 꺼렸으며 마스크는 기본적으로 착용한 상태였습니다. 주말과 휴일도 전혀 외출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자발적 자가 격리 상태였습니다. 확산세를 막기 위해서는 각자 스스로가 감염 전파자가 될지도 모르는 경우를 방지할 목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감염자가 된 가족 중에서 나이 많은 분들이 감염되면 면역력이 낮은 상태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중증으로 진행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 사이비 집단에서의 확산 촉발은 자가 격리는커녕 돌아다니면서 감염을 알거나 혹은 몰랐어도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미필적 고의성을 띄우는 형국입니다. 게다가 방역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일부 시민이나 신천지를 숨긴 공무원조차 감염 사실을 알았던 몰랐던, 밝히지 않음으로써 행정력을 낭비하고 전염시키는 등의 문제는 공통체적인 윤리성이라는 자각조차 없더군요. 나만 편하면 남들이야 걸리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란 발상을 여실히 확인하였습니다. 대부분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자기 격리하였음에도 일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 마구 돌아다니며 바이러스 뿜뿜하며 피해 의식도 없다는 게 이해할 수도 없고 인간적인 자각이 이렇게까지 없는 동네인가 실을 정도입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념을 밝힐 수 없었던 전후 사정을 백번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혹여 전염된 사람이 코로나를 이기지 못하고 숨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숨긴다고 숨겨질 것도 아니라서 타 지역 간의 이동에서 퍼트린 바이러스가 그런 이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데 있는 거라서요. 한편으로는 집단 이기심이나 배타적인 결속력이든 간에, 지역이 패닉 상태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감염되어 증상이 나타나 아파가는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혹여 그런 감염자 때문에 가족이 또 전염되어서 혹시나 중증이 되어 치료 못해서 죽기라도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의도되지 않는 일상의 평정심과 생활이 전부 어그러지는 후폭풍이 거세더군요.
역사적으로도 복기해보면, 중세의 페스트가 유행할 때, 그 역병이 뭔지를 몰라서 종교적 집단행동으로 인해 더더욱 확산되었으며, 광범위한 전파가 이루어졌던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 시대는 다들 이게 뭔지를 몰라서 그랬다 칩시다. 그러나, 지금은 원인이 뭔지, 방법이 무엇인지 의료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을 두고 어찌 중세의 전근대적인 종교적 행동인가라는 점입니다. 몰라서 못했다면 할 말이라도 있죠. 역병에 종교적 귀의야말로 인간이 무지와 나약함의 발로이기도 했으니까요. 충분히 대비할 수 있고 그 실체가 뭔지를 알며 방법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광신의 믿음은 신념의 왜곡이며 신념의 과잉 굴절이라는 겁니다. 현대이지만 그 방식은 과거와 중세적 광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게 더 놀랍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란의 집단적 발병도 또한 그 나라의 종교 방식이 모스크에서 집단기도 방식이라면 접촉의 감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해도 바이러스는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앞으로도 그런 집단의 모임이란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혹시 감염자 하나라도 있다면 막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발적 접촉 금지와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를 무시할수록 방역 당국의 부담은 늘어가고 부하가 걸리며 사회적인 전체 시간적 자본적 비용을 쏟아붓게 됩니다. 종교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수 있을까요?
게다가 지금 거리에 상점들이 기약 없이 문을 닫았습니다. 혹시나 모를 감염 때문에 출입할 손님이 걸리기라도 하면 폐쇄해야 하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단지역의 공장과 거리의 상점들, 대형마트들, 혹은 일반 기업체의 사무실 등 전부가 금전적인 부하를 호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매출 감소, 임금 감소 등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모두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너무나도 많이 받습니다. 당장에 중동에 전쟁이라도 난다면 석유 값이 오르고 비용 부담은 즉각적인 것처럼 전염병도 마찬가지 악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1차적으로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2차적 경제적인 후폭풍이 만만찮게 다가오며 바이러스는 물러가도 이 영향은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지역의 정서 대부분이 정부를 그렇게 욕하면서도 정부에 대해 바라는 게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욕할 거 같으면 정부에 대해 바라지 말고 자체적으로 하면 될 거예요. 능력도 없으면서 바라는 바대로 안된다고 징징대며 앓는 모순적인 태도는 이해가 안 됩니다. 다른 지방 자치 단체가 하는 걸 뻔히 보고도 배우지를 못합니다. 추진력이 아무리 없다 해서 따라 배워 볼 수는 있거든요. 처음부터 근원지를 차단시키고 명단을 제출받아 묶었더라면 사태가 이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겁니다. 감염자 한 사람의 광범위한 전파와 집단 간의 전염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지도록 만든 건 1차적으로 지방 자치단체의 권한과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방은 하는데 왜 여기는 못했을까라는 점입니다. 평소 때는 마스크가 남아돌았습니다.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도 특정 사태에 수요가 폭발하고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공급자가 틀어쥐고 내놓지 않게 되었지요. 매점매석으로 특정 사태에 수요가 넘칠 때 돈벌이 수단이 된 사건은 역시나 남들이 병에 걸리든 말든 난 돈 벌란다라는 천박 자본의 대표가 된 거라서요. 결국 병의 원인은 외부에서 왔으나 병의 진행과 중증 진행은 우리 내부에 들어 있는 전근대성과 오류, 그리고 탐욕이 뒤섞여 있다는 거죠. 이 결과가 비난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90 넘은 노인네를 재림 예수화시키는 종교적 구원의 메시아는 멀리서 보면 코미디 같아 보이나, 이는 구원의 과잉입니다. 구원의 과잉은 현실의 결핍적 상황에 처한 괴로움일 것입니다. 누군가 아쉬울 때 진정한 친구처럼 손을 내밀 때 덥석 잡고 보니 오염된 손일 경우기도 하거든요. 뒤늦게 알게 되어도 그 분위기와 위압감과 관계적 상황, 논리적 도취 이런 등등이 포교의 대상이 되었을 때 각성하기란 대단히 어렵거든요. 메시아란 구원에 경도되어 있는 의식의 필터를 거쳐서 나온 행동은 바이러스를 퍼지든 말든 무수한 행동반경을 만들어 내고 접촉을 하고 감염의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너를 구원을 시겠다는 것이 바이러스 전파가 훨씬 치밀한 이유겠지요.
어떤 세계가 오더라도 인간의 욕망에 대한 완벽한 달성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인간의 어떤 결핍도 모두 해소가 불가능합니다.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욕망은 사라지지도 못하고 욕망의 부족이란 결핍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 모순이 인간 스스로가 가진 엄연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살고 죽고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다만 죽지 않을 것이란 착각과 오류의 논리가 예외가 있는 것처럼 만들 뿐입니다. 종말론적인 세계관에서 메시아란 욕망 또한 예외가 아니거든요. 이 세계, 이 시대의 진정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일 따름입니다. 시간은 변질이 없고 늘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대성이 그 무엇이라도 에외를 허용된 적도 없습니다. 이게 신이란 의식화된 체계에서 종교화되었을 거라고 여깁니다. 모두가 현실의 부정성이 뉴 어너드 월드(신세계, 뉴 해븐 랜드)을 원하겠지만,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지금도 없거든요. 인류의 시작이 어느 세포에서 출발했고 그 변화의 흐름, 이 연속적인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오늘날까지 거듭했으니까요.
마침 어느새 바이러스로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봄을 바라봅니다. 주말엔 밀폐된 실내가 아니라 볕이 잘 들고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는 야외로 나가도 좋을듯합니다. 집에서 김밥이라도 사고 시원한 맥주 한 통이라도 들고 매화꽃이 만발한 남녘의 봄을 봄이라 찾듯이 찾아 보면 이게 진정 욕망이 무엇인지 성찰의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