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
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
執柯以伐柯,睨而視之。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改而止。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안니하다. 사람이 도를 실천한다 하면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도를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시(詩)는 말한다.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벰의 법칙이 멀리 있지 않아.' 도끼가 꽂힌 도끼자루를 잡고 새 도끼자루를 말들려고 할 때에는 자기가 잡고 있는 도끼자루를 흘깃 보기만 해도 그 자루를 만드는 법칙을 알 수 있는 것이거늘. 오히려 그 법칙이 멀리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가!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사람의 도리를 가지고서, 사람을 다스릴 뿐이니,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치기만 하면 더 이상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p191)
'도끼자루를 자를 때, 그 자루에 관한 법칙(이상적 굵기, 싸이즈) 등은 바로 자기가 들고 있는 도끼자루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관한 법칙이 그 존재 자체에 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내재주의 사상이다.'(<중용, 인간의 맛> p195)
'도끼는 나무를 베려고 했다. 하지만 도끼가 나무를 벤다면 도끼는 나무뿌리 밑에 눌려 있을 수 없다. 벤 나무는 자랄 수 없고, 자랄 수 없는 나무는 도끼를 휘 감을 수 없다. 인공언어를 가지고 자연언어를 베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림] <알랙산더의 노동> 마그리트 1950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mage_speech&logNo=70167288801)
'세계 속에 살고 있으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세계 속의 지식이나 가치에 물들게 마련이다. 우리가 이 선입감을 벗고 세계를 맨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선이해야 말로 이해의 전제조건이다. 이 선이해를 이해의 지평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지평이 없으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없는 한 지평을 구성 할 수 없다. 이것은 이상한 고리의 악순환이다. 하지만 해석학은 이 이상한 고리를 적극 받아들인다. '해석학적 순환'은 전체적 지평과 개별적 이해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우리의 이해는 점점 더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미학 오디세이2, 진중권>
같은 나무와 도끼를 보면서도 동양(東洋)의 <중용中庸>에서 자사(子思, BC 483? ~ BC 402?)는 인간의 도(道)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반면,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 ~ 1967)는 그의 작품 <알렉산더의 노동>에서 자기모순과 해석의 순환을 발견한다. 분석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서양적 사유체계와 포괄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려는 동양적 사유체계는 이처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같은 사물을 보며 이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고 살만한 곳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