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b판고전 19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손주경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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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악덕, 이 불행한 악덕은 무엇이란 말이냐?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들, 부모들, 아이들, 심지어는 자기만의 삶을 버리고 학대당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군인들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기 피와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맞서야 할 야만의 군대에 의해서도 아니고, 헤라클레스나 솔로몬 같은 자도 아닌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많은 경우 그 나라에서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유익하며, 전쟁의 화약을 결코 마셔보지도 않고, 결투의 모래바닥을 조금도 밟아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휘하는 데 뿐만 아니라 가장 가냘픈 여인네마저도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인간 같지도 않은 한 사람에 의해서 탈취와 방탕과 잔혹함을 겪에 되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8

에티엔 드 라 보에시(Etienne de La Boetie, 1530~1563)는 <자발적 복종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에서 물음을 제기한다. 왜 민중들은 폭군(暴君)에게 복종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단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상황이 다수에게 불행이라면, 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 보에시는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이유를 '자발적 복종'에서 찾는다.

우선 당장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마을들이, 많은 도시들이, 많은 국가들이 단 한 사람의 폭군을 때때로 지지하게 되는지 만을 생각해보자. 이 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준 권력 말고는 다른 권력을 갖지 않는다. 이 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준 권력 말고는 다른 권력을 갖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견뎌내기를 원하는 만큼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기보다는 스스로 참고 견디는 것을 더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4

한 명에 의해 많은 이들이 구속되어 있는 상황은 자발적 복종이 아니라면 설명되기 어렵다. 힘이 부족해서 일시적인 복종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힘의 크기가 현저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가 가능한 것은 자발적 복종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가 충족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자유(自由)망각' 때문이며, 자유망각은 '관습'에 의해 복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게 된다는 것이 보에시의 분석이다.

사람들이 복종을 당하자마자 자유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 자유를 다시 얻기 위해 깨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보는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서서 섬기고, 그것도 기꺼이 섬기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단지 단지 자유를 잃은 것이 아니라 복종을 얻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처음에는 힘에 의해 억압을 당해 굴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후에 사람들은 후회도 하지 않고 복종하며, 자기네 선조들이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을 자진해서 해낸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47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관습은 무엇보다도 복종을 배우게 만드는 관습이며, 독약에 길들여진 끝에 목숨을 잃었던 미트리다테스 Mithridates가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복종의 독이 쓰디쓰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자진해서 들이키도록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다.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48

보에시에 따르면 관습은 우리에게 사회를 살아가는 덕목들을 가르쳐 주지만, 관습이 지향하는 수많은 덕(德 vertu)에는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찬양받는 미덕(美德)에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지 않기에, 전승되는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따를 경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소수의 다수 지배라는 시스템에 자발적인 복종을 하게 된다.

용감한 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려 깊은 자들은 어떠한 고통도 물리치지 않는다(p26)...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들이 욕망하지 않는 단 하나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위대하고 감미로운 자유이다. 그것이 상실되면 모든 악덕이 이어지고, 자유 뒤에 놓여 있던 다른 모든 행복들은 굴종으로 인해 썩어버려서 맛과 풍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오직 이 자유, 그것을 인간들만이 유일하게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27

이러한 상황에서 결론은 자연스럽게 '계몽(啓蒙)'으로 흘러간다. 자기 스스로 관습을 깨치고 관습을 벗어날 수 있도록 잘 배우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구체제(Ancien Regime)의 모순을 극복하자는 결론이 <자발적 복종>의 구조이며 결론이다. 보에시가 말한 자유는 단순한 개인의 의지를 말하지 않는다. 보에시가 말한 자유는 '상호 보조'를 위한 것이며,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 사이의 연대(slidarite)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인간 이성(理性)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 깨닫고, 연대를 통해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현재의 '자발적 복종'을 넘어선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저자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

<자발적 복종>의 마지막 주장은 계몽시대의 교과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자칫 식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수로부터 권력을 받은 1인 혹은 소수에 의한 지배라는 상황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관점에서 합리화하지 않고, 개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모순된 제목의 책은 씁쓸함과 유용함을 현대의 독자들에게 함께 전달한다...

그러니 배우도록 하자. 잘 행동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의 명예 혹은 우리의 미덕에 대한 사랑을 위해, 아니 더 나아가 우리의 행동을 충실히 증명해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심판하시는 전지전능한 신의 명예와 사랑을 위해서 눈을 떠서 하늘을 바라보자. 폭정보다 선량하고 자유로운 신에게 대항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 신은 폭군들과 그들의 공모자들을 위해 몸소 이 땅에 어떤 특별한 몫을 남겨두었다는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03

우정 l'amitie이라는 공동의 의무가 우리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 때문이다. 미덕(vertu)을 사랑하고 훌륭한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의 명예와 이득을 더하기 위해 때때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줄이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_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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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14 0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네요.
다만 이러한 자발적 복종이 계몽에 의해서 바뀌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절감하는 요즘이라서요. 어렵네요.
주말이 끝났는데 다음주도 힘내서 화이팅하세요. ^^

겨울호랑이 2022-03-14 07:43   좋아요 2 | URL
<자발적 복종>을 읽으며 보에시가 말한 ‘자발적 복종‘과 이에 대한 계몽은 ‘상태에 대한 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자신이 자발적 복종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몽은 영화 <Matrix>에서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 수단을 통해 현실을 파악한 뒤 사람들은 또 저마다의 선택을 하겠지요.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것인가... 행동 이전에 무엇이 진실인가를 끊임없는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이마저도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쩌면 1회성 숙제가 아닌 평생에 걸쳐 해내야 할 과제라고도 생각되네요... 바람돌이님께서도 한 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커피소년 2022-03-14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사람은 복종하도록 길러진다.
2. 자신과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행위
3. 그냥 관심이 없다.
4. 두려움
5. 복종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다.
6. 그것이 법과 질서라고 믿는다.
7. 독재를 찬양한다.

사람들이 독재에 저항하지 못 하는 이유이겠죠..

겨울호랑이 2022-03-14 07:51   좋아요 3 | URL
현실에서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만큼 다양하게 나타나거나, 혼합되어 나타나겠지요. 논리야놀자님께서 구체적으로 나열해 주신 이유들도 이들 안에 포함되리라 여겨집니다.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에서 말씀하신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는 구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유‘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 자유가 ‘방종‘이 아닌 ‘이성‘의 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구조적 모순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읽힙니다. ‘독재‘라는 문제를 낳는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처하는 모습도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구조에 대한 고민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보에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논리야놀자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4-09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09 08:18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이하라 2022-04-09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4-09 08:19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꼬마요정 2022-04-09 0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4-09 08:19   좋아요 0 | URL
꼬마요점인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따라서 우정은 인간들이 서로 형제임을 밝혀주는 힘이고, 형제로 만드는 힘이며,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존재라는 증거이다. 우정은 인간의 자유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도록 허용하는  정당성도 부여해준다.
탐욕에 의해 복종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개인은 고립된, 즉 파편화된 존재일 뿐이며, 인간들이 상호 관계를  통해 만들수 있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자이다. 각자의 개인적 가치를완전하게 존중하는 우정은 공동체를 구축하는 토대가 된다. 정치적 형태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우정이 파괴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성이 파괴된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여기에서  폭군의  등장이 가능해지고, 복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오류가 발생한다. 우정이 파괴된 자리에 폭군을정의하는 요소인 탐욕이 언제나 개입하는 법이다.
이런 이유로 복종한 인간에게는 자연에 의해 각자가 우정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 P153

이것이 민중의 복종에 내재된 신비이다. 라 보에시는 폭군의 등장은 민중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면에서는 민중이 폭군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지적한다. 이 점에서 그는 민중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군주가 폭군이 되기 위해서는 다수의권한과 힘을 자신의 권한과 힘으로 몰수해야 한다. 달리 말해 폭군은 민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민중은 자발적으로 복종을 선택하는 자연적  성향을  띠고 있다. 폭군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근거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폭정은  인민정부(gouvernement populaire)와 구분될 수 없다. 즉 민주주의와 폭정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기능을 지닐 수 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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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2 한길그레이트북스 64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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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실재라는 이성의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고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기에 이르렀을 때, 이성은 곧 정신이다. 바로 앞에서 본 정신의 생성을 나타내는 운동에서는 의식의 대상인 순수한 범주가 이성의 개념이 고양되었다. (p17)... 인륜적 세계, 치안으로 분열된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세 단계의 정신이 그때마다 의식의 전개상을 나타내면서 단일한 독자존재인 정신이 자체 내로 복귀하여 바로 그의 목표이며 결과이기도 한 절대신을 의식하는 현실의 자기의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2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 2>의 시작을 이성을 정신으로 치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치환된 정신 앞에 먼저 나타나는 것은 인륜(人倫)이다. 추상적 법의 외면성과 도덕적 법의 내면성이 종합된 인륜. 인륜의 세계에서 정신은 갈등에 봉착한다. <안티고네 Antigone>에 드러난 ‘인간의 법칙‘을 나타내는 클레온과 죽은 오빠를 매장하라는 ‘신의 법칙‘ 사이의 갈등은 안티고네 개인의 갈등과 비극이 아니다. 이를 폴리스 국가의 깊은 모순과 붕괴의 필연성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헤겔은 이와 함께 소외된 정신에 의한 인륜의 회복도 발견한다. 그 결과 ‘가족‘에서 무너진 인륜은 ‘시민사회‘에서, 시민사회에서 붕괴된 인륜은 국가에서 회복되어 나간다. 결과적으로, 헤겔은 인륜의 역사를 통해 근대시민사회의 역사적 과정과 법칙성을 설명한다.

생동하는 인륜적 세계야말로 정신의 참다운 모습이다. 정신은 일단은 자기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알게 되는데, 이때 인륜성이 파괴되면서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법이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자기분열을 일으킨 정신은 가혹한 현실을 드러내는 대상 세계 속에서 ‘교양의 세계‘를 구축하고 또 이와 대립되는 사상(思想)의 영역에는 ‘신앙의 세계‘ 또는 ‘신의 왕국‘을 일구어낸다.(p21)... 인륜의 세계는 보편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와 개별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보편적인 현실체로는 민족과 가족이 있고 자연발생적인 자기이며 활동하는 개인으로는 남과 여가 있다. 일찍이 관찰하는 이성의 입장에서는 한낱 대상으로밖에는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 이성적인 자기의식이 되었고, 다시 이 자기의식으로서는 자기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던 것이 참다운 현실로 존재해 있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7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남성과 여성으로 분열된 그리스적인 인륜세계와 지와 무의식으로 분열된 그의 인류적 의식이 그러한 대립을 부정하는 힘의 주체인 운명으로 복귀해가듯이 이제 소외된 정신에서 비롯된 앞이 두 세계도 정신의 주체인 자기에게로 복귀해간다. 다만 그리스적 정신이 다다르는 곳이 첫번째의 직접적을 인정된 정신의 자기, 즉 개별적인 인격이었는 데 반하여 외화를 거쳐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두번째의 자기는 보편적인 자기, 즉 개념을 포착한 의식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온갖 요소가 고정된 현실성을 띤 채 정신을 결한 채로 존립하게 된 두 개의 세계는 ‘순수한 통찰‘의 힘 앞에서 와해되기에 이른다.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통찰이야말로 교양의 완성된 형태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66

인륜적 세계의 실현이 근대 국가에서 이루어지지만, 여기에서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뒤를 이어 나타나는 ‘국가권력‘과 ‘부‘ 그리고 이들과 관계하며 통합된 ‘고귀한 의식‘은 정신현상학의 논의에서 ‘신앙‘의 문제가 뒤이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교양‘을 통해 이뤄진 역사적 운동의 근거가 ‘신앙‘에 있다는 헤겔의 주장을 통해 이제 논의는 정치철학에서 신학(神學)으로 자리가 옮겨간다.

‘가(可)‘와 ‘불가(不可)‘라는 단순한 사고는 곧바로 자기소외에 직면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고란 현실적인 것으로서 현실의식 속에서 대상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 세계로 등장하는 것이 ‘국가권력‘(die Staatsmacht)이고 두번째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 ‘부‘(富, der Reichtum)이다.(p74)... 국가권력과 부를 자기와 동등시하며 이와 관계하는 의식은 ‘고귀한‘ 의식이다... 이와 반대로 두 개의 대상 세계와 부등한 관계를 고정시켜놓은 의식은 ‘비천한‘ 의식(das niedertrachtige)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80

자기가 인정된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즉 부와 권력을 수중에 넣는다고 할 때 이렇게 수중에 들어온 부와 권력은 자기본질(Selbstwesen)을 지닐 수 없는 허망한 것이고, 오히려 부와 권력을 수중에 넣은 자기야말로 참다운 위력을 지닌 것으로 밝혀진다. 이처럼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바로 그때 자기는 부와 권력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는 것이 재치 있는 언어로 표현되는데, 바로 이 언어야말로 그의 최고 관심사인 세계 전체의 진리이기도 하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03

사유하는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신앙에 신은 직접 존재하는 것이지만 순수한 의식은 이에 못지않게 확신과 진리를 매개하는 그러한 관계이기도 한데, 바로 여기에 신앙의 근거가 마련된다. 이 근거란 계몽사상에게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관한 우연한 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참으로 지의 근거란 지의 보편적인 힘에 의거하여 절대정신의 진리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서, 그의 절대정신이 신앙이라는 추상적인 순수의식 또는 사유 그 자체 내에서는 절대신으로 나타나고 자기의식 속에서는 자기에 관한 지(das Wissen von sich)로 나타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27

이러한 신의 운동의 구도는 전형적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모습이다. 최초 주체로서 ‘성부(聖父)‘와 타자로서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성령(聖靈)으로 통합되며 완성에 이른다. 헤겔에 따르면 이들간의 관계는 완벽하고 완전한 운동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이성=정신‘이 자유롭게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 될 것이다.

신의 운동을 그 외형만 놓고 간단히 살펴볼 경우 교양의 세계에서는 국가권력이나 정의가 으뜸가는 사안(事案)이었다고 한다면 신앙의 세계에서는 단일한 영원의 실체, 즉 조물주이며 절대신이라는 완전무결한 정신이 으뜸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단일하고 영원한 실체는 정신적 존재라는 자기본질을 실제로 명시해야만 하므로 결국 ‘타자에 대한 존재‘로 변신하여 자기동일적인 천상의 세계를 벗어나 현세에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자기를 희생하는 절대자, 즉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p109)... 셋째로 이 소외된 자기이며 모멸당한 신은 최초의 단일한 존재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 비로소 신은 성령이며 정신으로 표상되기에 이른다. 이 세 개의 존재는 현실세계를 전전하고 난 다음 사유의 힘으로 제자리로 되돌려져서 안정된 영원의 정신성을 갖추게 된다. 이로써 이 세 존재는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09

진리가 지 그 자체가 되고 이 둘 사이의 대립이 전적으로 소멸되는 가운데 더욱이 이를 방관자인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그 자체가 이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자기의식은 의식의 대립을 극복하기에 이르렀다(p169)... 자기의식의 지는 자기의식에서 실체 그 자체이다... 절대신은 신앙에서와 같이 사유의 틀 안에서의 단일한 본질적 존재로 규정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일체의 현실을 떠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지로서의 현실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70

결국 보편적 자유에 대립되는 최고의 현실, 아니 오히려 보편적 자유에 부과되어야 하나 유일한 대상은 현실적인 자기의식에 필수적인 개별적 자유라고 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유기적 조직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띠지 않은 채 불가분한 연속성 속에서 자기를 지켜나가려는 보편적 자유는 끝내 의식이 뿜어내는 자유의 운동을 야기하게 됨으로써 내부 분열을 조성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p162)... 절대적 자유가 현실의 사회조직을 말끔히 해체하여 자유가 확고하게 정립될 때, 이 자유야말로 절대적 자유의 유일한 대상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63

이제 이성의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이제부터 영원한 실체인 신의 삼위일체 구도는 근대국가를 이룬 이성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나갈 길이 될 것이다. 헤겔은 개별적인 자아가 타자로서의 보편성을 만나 생겨난 갈등과 갈등으로 소외된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주체로 통일되는 과정을 통해 도덕의 완성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성과 감각이 알력을 빚는 마당에 이성이 취해야 할 태도는 대립을 해소하여 그 결과로서 양자의 통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통일은 양자가 동일한 하나의 개체 속에 있는 본원적인 통일이 아니라 양자의 대립을 인식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는 데서 생겨나는 통일이다. 이러한 통일이야말로 마땅히 현실적인 도덕(die wirkliche Moralitat)이라고 하겠으니, 거기에는 현실의식으로서의 자기와 자기임에는 틀림없는 보편자로서의 자기와의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보는 바와 같이 도덕의 본질에 깃들어 있는 매개작용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75

현실의 의식은 그토록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순수한 의지와 지에서는 의무만이 본질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현실과 대립하는 개념이나 사유에서는 의식이 완전한 것이 된다. 절대신이란 어디까지나 사고의 결실로서, 현실의 피안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고에서는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지와 의지가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신만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한에서 신에게 바쳐져야 할 봉사를 한 만큼의 보수로서 응분의 값진 행복이 안겨질 수도 있다. 여기서 도덕적 세계관은 완성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80

도덕의 완성이란 바로 앞에서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규정됐던 것이 바로 그 도덕성 속에, 도덕성과 함께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도덕은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추상적인 비현실적 관념체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도덕의 진리는 현실에 대립하여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가운데 티끌만큼도 현실에 오염되지 않는 데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96

결국, 이성의 운동은 신의 운동의 모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변증법(辯證法, dialectics)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보편정신과 보편정신이 표상화된 개체의 갈등과 이들의 통일은 종교사에서는 자연종교, 예술종교, 절대종교의 발전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러한 발전과정은 민족정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성의 발전을 통해 역사 속에서 근대국가의 모습으로 드러난 정신은 이제 민족을 넘어 세계로까지 확장되며, 마침내 세계정신에까지 도달한다.

결국 개별과 보편, 이 양자에 의해 순수한 지가 성립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에 의해 순수한 지가 성립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간의 대립을 통하여 의식이라는 모습을 띠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아직 자기의식은 아니다. 의식이 자기의식이 되려면 바로 양자 사이의 대립의 운동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의 대립은 오히려 자아=자아라는 단절 없는 연속성이며 동일성(die indiskrete Kontinuitat und Gleichheit des Ich = Ich)이다. 여기서 자아는 저마다 자립해 있으면서 스스로를 순수한 보편적존재로 아는 그런 모순을 지닌 채 타자와의 동일성에 반발하여 그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니, 결국은 자기로 인하여 스스로를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의 외화를 통하여 두 개의 존재로 분열된 지는 마침내 자아, 자기로서의 통일성을 되찾아온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자아의 모습으로서, 이 자아는 자기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보편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또한 이 자아는 자기 내면에 잠겨 있는 지(知) 속에서, 그의 내면의 지가 순수히 고립해 있음으로 하여 오히려 완전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35

민족정신의 집합체는 자연의 전체와 인륜세계의 전체까지도 포괄하는 일군(一群)의 신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민족정신은 또한 하나의 신에 의해 통치되어 있다기보다는 그의 명령 아래 있다. 각각의 민족정신은 인간 존재란 본래 어떤 것이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지시해주는 보편적인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며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신들은 그를 에워싼 쟁탈전을 벌이는데, 다만 애초에는 우연하게나마 인간의 편이 민족에 부과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의식의 내용이 자연과 인륜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성을 띠는 데 맞추어 내용이 생겨나는 의식의 형식도 당연히 보편성을 띠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은 더 이상 축제에서의 현실적인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비록 개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표상에 잠겨서 자기의식적인 존재와 외적인 세계를 합성(合成)하고 결합하는 행위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표상이 구현되는 것이 언어인데...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81

필연성을 인식하는 사유의 본체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직접적 존재 자체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또 개념의 단일한 통일체라는 그 자체가 직접적 존재인 이상 이 구별은 개념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개념이 자기를 외화하여 직관된 필연의 존재가 되는 가운데 필연성 속에서 자기를 고수하며 자기를 알고 자기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의식, 즉 인간의 형태를 띤 정신의 직접적인 존재는 현실의 세계정신(der wirkliche Weltgeist)이 이렇듯 자기를 아는 데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07

변증법적 운동의 끝단에서 우리는 신의 운동과 만나게 된다. 순수한 사유의 운동으로서 그 통일체에는 정신으로서의 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서 선과 악은 하나이면서 또한 다른 것이라는 두 주장이 대립하면서, 운동의 근원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주체)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술어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헤겔의 논증은 결국 모든 것은 운동이며, 이로부터 자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선과 악이라는 구도의 기본이 운동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사유가 절대개념을 향한 끊임없는 정진에 있음을 헤겔은 변증법의 구도 속에서 밝혀내는 것이다.

감각적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순수한 추상(eben diesereine Abstraktion)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추상적 사유에 대치해 있는 존재가 바로 직접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최저의 것(Das Niedrigste)이 동시에 최고의 것(das Hochste)이고 표면에 완전히 드러나 있는 계시가 최고의 깊이를 지닌 것이 된다... 의식이 직접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은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대상인 절대신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개념적으로 ˝존재가 본질이다˝라고 의식하는 사태가 종교적 의식의 의식하는 바가 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와 본질의 이러한 통일(Diese Einheit des Seins und Denkens), 즉 사유가 곧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으 종교의식이 일구어낸 사고의 결실이고 그에 의해서 매개된 지이면서 동시에 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지이기도 하다. 존재와 사유의 이러한 통일(Diese Einheit des Seins und Denkens)이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 사유에 기초한 통일이 동시에 존재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서 신이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바, 이때 신은 그의 본래 모습인 정신으로서의 존재를 계시하며 거기에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11

결국 선과 악이 그의 개념에 비추어서 선도 악도 아니고 오히려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에 못지않게 선과 악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상이한 것이라고도 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단일한 독자존재라는 것과 단일한 지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순수한 부정성을 지닌 절대적 차이를 자아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329)... ˝선과 악은 동일한 것이다˝라는 명제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라는 두 개의 명제가 함께할 때 여기에 비로소 전체가 완성되는데, 이 경우 첫번째 명제의 주장과 단언에는 두번째 명제가 단호히 자기 주장을 맞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27

개념은 외화된 자기와 일체화된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서 지가 순수한 지를 아는 것이 되어 있다. 즉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추상적인 신의 지가 아니라 바로 ‘이것‘의 지이고 ‘이‘ 자기의식을 신으로 아는 지인 것이다. 여기서 대상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자기에 다름아니다(p346)... 이렇게 순수한 지의 등장은 곧 대립을 걸머지는 것으로서 신의 순수한 지는 어쩔 수 없이 지의 단일성을 지양하고 개념이 지니는 분열이나 부정성을 발동시킨다. 이 분열이 자각적으로 자기에게 맞서는 한은 (sofern dies Entzweien das fur sich Werden ist) 여기에 악이 생겨나고 그것이 잠재적인 본래의 상태로 있는 한은 (sofern es das Ansichist) 선이 유지된다. 애초에는 잠재적으로 새겨나던 것이 명확히 의식되면서 동시에 이중의 상(像)이 떠오르는데, 즉 의식은 존재와 행위를 자각하는 것이면서 또한 스스로가 존재하며 행위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47

결국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우리의 인식이 지각으로 지각에서 지성을 거쳐 이성으로, 정신으로서 이성이 인륜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제도인 가정, 시민사회, 국가의 모습과 함께 이들의 원형으로서 신의 운동을 표현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운동인 신의 운동에 따라 정신의 운동 역시 변증법적 구조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러한 영원한 운동의 방향성은 외부로 향하지만 결국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내부로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절대개념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의 방법은 오직 학문(學文)밖에 없음을 헤겔은 밝힌다.

이러한 구도의 <정신현상학>에는 여러 내용이 담겨있다. 헤겔의 미학과 역사철학, 법철학 등이 모두 종합된 이 저작에는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헤겔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생각할 점이 적지 않지만, 이러한 논의를 하나의 리뷰에 모두 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른 페이퍼로 미루도록 하자. 이번 리뷰에는 <정신현상학>의 대략적인 뼈대를 서술하였기에 빠진 부분이 적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개인적으로 <정신현상학>을 읽고 나면 헤겔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참 친절한 사람이라는 인식변화를 할 수 있었던 점은 작은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자아=자아는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는 운동이다. 즉 이러한 동등성은 동시에 절대부정으로서 절대적 차이를 낳게 되므로 자아의 자기동일성은 이 순수한 차이와 대립하게 되고 순수한 차이는 자기를 아는 지와 대립되는 순수한 대상으로서, 이것은 곧 시간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앞에서는 존재의 본질이 사유와 연장의 통일이라고 불렸다면 이제는 그것이 사유와 시간의 통일(Einheit des Denkens und der Zeit)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차이에서 차이로 이어지며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도리어 자기 내면의 붕괴에 붕착하여 안정된 대상 세계를 꾸며내는 연장으로 전화하는데, 이 연장은 자기와의 순수한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다름아닌 자아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55

새로운 형태를 갖춘 정신은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스스럼없는 전진을 개시하여 마치 이전의 모든 것은 상실되어 정신은 이제까지 축적해온 그의 온갖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는 듯이 심기일전하여 처음부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것은 기억 속에 보존되고 내면화되어 실제로는 더욱 고차적인 실체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정신이 오직 자기 내면만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의 교양을 처음부터 쌓아나가려고 할 때 출발점 그 자체가 이미 높은 단계에 정립되어 있다... 여기서 목표가 되는 것은 정신의 심오함을 계시(die Offenbarung der Tiefe)하는 데 있으니, 바로 이것을 계시하는 것이 절대개념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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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달랑베르가 제안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현상논문으로 "민중을 속이는 일은 용인될 수 있는가" 라는 일반적인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는데,  사실 이에 답하기  전에 그 물음부터가 빗나간 것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도대체 민중을 기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황금 대신 놋쇠를, 또는 진짜 어음 대신위조어음을 팔아치우는 일은 가능할 수 있겠고 또 싸움에서 패하고도많은 사람에게 승리한 듯이 내보인다는 식으로 감각적인 사물이나 개별적인 사건을 놓고 어설픈 거짓말을 일정 기간 동안 믿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직접적인 자기확신이라는 경우와 같이 신에대한 지에 관한 한 속임수를 써서 이를 믿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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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갖는 부정의 힘은 안으로는 서로가 단순히 흐트러져 있는개인의 자의를 억제하고 대외적으로는 자발적인 활동을 펴나가려고 하는 것인데, 개인은 이때 싸움을 위한 무기의 역할을 한다. 전쟁이란 인륜적 실체의  본질적인 요소, 즉 인륜에 기초한 자기존재가 일신상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데서 누리는 절대의 자유가 현실 속에 확연한 모습을 드러내는 정신의 형태이다. 전쟁은 한편으로는 개인과 연관된 재산제도나 인격적 독립 그리고 개개인의 개성을 부정하는 힘을 실감하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부정의 힘이 전쟁 속에서 전체를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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