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표현.이해 고전의세계 리커버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적 세계의 연관(聯關, Zusammenhang)은 주관(主觀, Subjekt)에서 시작되며, 개개의 논리적인 과정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정신적 세계의 의의연관(意義聯關, Bedeutungs-zusammenhang)에 대한 규정에까지 이르는 정신의 운동이다. 그래서 이 정신적 세계는 파악하는 주관의 산물인데, 한편으로 정신의 운동은 그 세계 안에 있는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주관에서 정신적 세계의 구성이 어떻게 정신적 현실〔혹은 실재〕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해주는가’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25/210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 ~ 1911)의 <체험, 표현, 이해>는 빌헬름 딜타이의 《전집》 제7권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 구축》 가운데 <제3부-제1장 체험·표현·이해>를 옮긴 것으로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의 책이지만, 딜타이가 생각하는 해석학의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에서의 논의를 외부세계의 물자체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딜타이의 관심은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를 지향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에서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 Erlebn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일성이다. 왜냐하면 그 흐름은 하나의 통일적인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아가 생애에 대한 공동의 의의를 통해 서로 연결되는 삶의 부분들의 모든 포괄적인 통일성을 ‘체험‘이라고 부른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31/210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 체험은 유한함과 특수성을 함께 갖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술어‘가 나타나는데, 개인의 특수화된 술어는 정신적 세계의 운동을 통해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삶의 표출 - 표현이다.

체험에서는 체험연관의 일반적 술어들이 특정한 개인에게서 생겨난다. 그 술어들이, 이해하려는 삶의 객관화와 정신과학적인 진술의 모든 주관들에 적용됨으로써, 그 술어들의 타당성 범위는 정신적 삶이 영위되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작용연관, 힘, 가치 등이 드러날 때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이런 일반적인 술어들은 정신 세계의 범주들이 지니는 존엄성을 갖게 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28/210

<체험, 표현, 이해>에서 딜타이는 삶의 표출을 세 종류로 나눈다. 첫 번째 종류는 개념, 판단, 추리, 두 번째 종류는 행위, 세 번째 종류는 체험표현으로, 이러한 다양한 다양한 표출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주관적인 개별 체험으로부터 객관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한 인간은 문학과 진리 속에서 자신의 실존과 보편적/역사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는 문학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시대를 꿰뚫어본다. 그는 그 시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담담하게 자부심을 갖고 바라본다. 그래서 삶을 회고하는 고령의 작가에게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40/210

정신과학에서 결정적인 개념! 정신과학이 도달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 연관과 연결시킨다. 언제나 그 안에는 자명한 것과 같은 상태들의 존립이 포함된다. 그러나 역사학은 변화들을 이해하고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에너지, 운동 방향, 역사적 힘의 전환 등을 표현해주는 개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사학의 개념들은 이런 성격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대상의 본성을 잘 표현하게 된다. 삶과 역사의 이 모든 범주들은, 체험 가능한 것에 대한 진술에서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학적인 영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진술의 형식들이다. 이것들은 체험 자체에서 나온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48/210

딜타이는 <체험, 표현, 이해>에서 이해는 실천적인 삶 속에서 서로간의 대립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대상이 외부에 있는 자연과학의 물(物)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과학에서 대상은 원인-결과의 법칙에 따른 참-거짓의 판단 대신 진실한가와 그렇지 않은가의 판별대상이 된다. 딜타이는 본문을 통해, 엄격한 판별의 기준을 통해 우리는 문학작품으로부터 인류역사의 법칙을 도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체험, 표현, 이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집 중 극히 일부 파트만을 옮겨왔기에, 깊이 있는 내용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연과학에서 출발한 <순수이성비판>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정신과학을 바라봐야한다는 딜타이의 관점과 현실안에서 실존, 그리고 실존으로부터 출발한 정신과학의 체험-표현-이해의 순환 구조 속에서 주관성이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이해는 항상 자신의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체를 갖고 있다. 그리고 더 고차적인 형태들에서 이해는 이제 하나의 작품이나 삶에 함꼐 주어진 것의 귀납적인 총괄에서부터 하나의 작품이나 인격체 또는 삶의 관계에 있는 연관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제 우리 자신의 체험과 이해에 대한 분석에서 정신적 세계에서의 개체는 자기 가치, 즉 우리가 확실하게 확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 가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63/210

이제 우리가 이해의 작용에서 두 가지, 즉 정신적 삶과 그 상황을 개별화의 외적인 원리로서의 환경을 통해 변화시키는 것과, 구조의 계기들의 상이한 강조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작동시킬 수 있다면, 인간의 이해, 즉 문학 작품들에 대한 이해는 삶의 거대한 비밀에 이르는 통로가 될 것이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66/21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2-10-28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게 완역이 아니라 챕터 일부만 번역한 것이지만 딜타이 사상을 맛보기에는 괜찮았던 거 같아요. 주더들이 깔끔한 번역을 빨리 번역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8 18:22   좋아요 1 | URL
네, yanoo님 말씀처럼 딜타이 사상의 큰 흐름을 잡기에 좋은 요약서라 생각합니다. 하이데거를 보다 깊이 읽기 위해서라도 딜타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독서였습니다. yamoo님,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 고전의세계 리커버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김소영 옮김 / 책세상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순수 학문은 사상이 또한 못지않게 사태 자체인 한에서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사태 그 자체가 또한 못지않게 순수 사상인 한에서 사태 자체를 포함한다. 학문으로서의 진리는 스스로를 전개하는 순수한 자기 의식이며, 자기라는 형태를 지닌다. 따라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das an und fur sich Seiende은 의식된 개념이지만 [사실은] 개념 그 자체가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34/174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Wissenxchaft der Logik-Einleitung>을 통해서 우리는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인식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헤겔은 서문을 통해서 논리학이 단순히 질료가 결여된 형식이 아니라, 질료와 형식을 다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이 객관적인 사유가 순수 학문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순수 학문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며 현실적이고 참된 인식을 위한 진료가 결여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순수 학문의 내용은 오로지 절대적으로 참된 것, 또, 여전히 질료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원한다면 참된 질료인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은 순수 이성의 체계, 순수 사상의 왕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왕국은 아무런 외피도 걸치지 않은 채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다. 이 때문에 우리는, 논리학의 내용이 자연과 유한한 정신을 창조하기에 앞서 자신의 영원한 본질 속에 있는 것으로서의 신의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34/174

분명 논리학은 우선 우리가 알고 있고 통찰하는 어떤 것으로써 습득되지만, 아쉽게도 처음에는 그 폭과 깊이, 폭넓은 의미가 빠져 있다. 다른 학문들을 더 깊이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논리[학]적인 것은 주관의 정신에게서 단지 추상적 보편자가 아니라 특수자들의 풍부함을 포괄하고 있는 보편자로 고양된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44/174

질료와 형식을 다함께 갖는 즉자대자(Anundfuersich)로서의 논리학은 처음에는 분명 작은 밀알과도 같이 단순한 추상적인 형식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즉자대자로서 자신에 내재한 부정성으로 인해 변증법적으로, 경험으로 부터 얻어지는 특수성을 아우르는 보편성으로의 고양이 이루어지는 전개과정이 논리학에서 펼쳐질 것이다. 개념 자체에 내재한 모순율에 의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기 부정은 즉자 Ansich- 대자 Fuersich -즉자대자 Anundfuersich 라는 운동을 일으키고 추상적인 보편적 형식으로부터 경험이 제공하는 특수성있는 질료가 담긴 보다 높은 상태로의 고양이 <논리학>에서 펼쳐질 것으로 생각된다.

헤겔의 <소 小논리학>과 <대 大 논리학>을 읽으려면 아직 바깥 해자를 더 메워야겠지만, 한걸음씩 나가보자...

개념이 스스로를 계속 이끌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개념 자체에 내재된 부정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변증법적 계기를 구성한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42/174

철학의 욕구는 다음과 같이 더 자세하게 규정될 수 있다. 즉 정신은 느끼고 직관할 때에는 감각적인 것을, 상상할 때에는 상 Bilder을, 무엇인가를 원할 때에는 목적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또한 자신의 현존재와 대상이 갖는 위와 같은 형식들과 대립해 있거나 단순히 구별되어 있으면서, 자신의 최고의 내면성인 사유를 만족시키고 또 그 사유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이른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리, 곧 정신의 순수한 자아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사유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 _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빌헬름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68/174

사유가 지닌 이 맨 처음의 추상적인 보편성을 고려한다면, 철학은 경험에 힘입어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정확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경험과학은 보편적인 규정과 유, 법칙 등을 발견하기에, 현상의 개별성들을 지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고함으로써 철학의 소재를 제공해왔다. 경험과학들은 위에서 말한 특수자로서의 내용이 철학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끔 미리 준비해둔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72/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지음, 이용철 옮김 / 에피스테메(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세기에 자연과학이 했던 일을 18세기에는 정신과학이 완성시킨다. 방대한 영역의 학문들 전체는 이후로 비종교적 정신에 따르게 된다. 이처럼 신학적 방식이 강요했던 족쇄에서 풀려난 정치적 개념들은 심층적인 변모를 겪게 될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사회현상을 자유롭게 분석하고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관계들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절대주의 체계가 근거를 두고 있는 이론들의 공허함을 보여 주었다. 정신과학의 영역에서 교회의 권위를 몰아내는 것은 동시에 교회가 강력하게 지지했던 절대군주제의 권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68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Philosophie de la Revolution francaise precede de Montesquieu>은 몽테스키외( 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 볼테르(Voltaire, 1694 ~ 1778)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로 이어지는 대혁명 철학의 큰 흐름을 짚어주는 책이다. 비록, 저자로 소개된 베르나르 그뢰퇴유젠(Bernard Groethuysen, 1880 ~ 1946) 이 집필한 내용은 미완성 유작 '몽테스키외'에 한정되지만, 이어지는 글들의 논조는 매끄럽게 전편과 이어지며, 프랑스 대혁명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7세기 초반에 과학은 세계, 세계의 체계를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이러한 점에 과학의 가치, 존재 이유가 있었다. 반면 18세기에 과학의 목적은 개별 사실들을 알고 그것들을 최대한 모아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다양한 관계를 그 개별 사실들 사이에서 확립하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32


 우리에게 '계몽시대 철학자'로 알려진 이들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절대적이고 단일한 법칙 세계를 부정하고 다양한 현상들로부터 가능성에 주목한 몽테스키외와 절대적인 이성을 강조한 볼테르. 마치 몽테스키외가 17세기 절대왕정과도 같은 바로크(Baroque)양식을 대신하는 섬세한 18세기 로코코(Rococo)양식을 도입시켰다고 한다면, 볼테르는 이를 더 심화시켜 로코코 양식을 발전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율성의 몽테스키외와 통일성의 볼테르. 이 부분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몽테스키외가 생각하는 질서는 유연하고 자율적이다. 그는 삶의 표현되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형태들을 인정한다. 몽테스키외가 생각하는 이러한 넓은 개념의 사회에는 아무리 다양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그것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있다. 그것들이 설사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모든 발현을 위한 자리가 있다. 정치적 문제는 사회조직 안에서 나타나고자 하는 여러 다양한 경험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86


 볼테르에게 인간 정신의 역사가 제시한 다양한 사실에서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도덕적 가치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그리고 각자의 내면에서 결정적인 객관적 요인으로 나타난다.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동일한 원칙, 즉 자연법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지침들이 무엇인지 또 우주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규정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볼테르와 몽테스키외의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64


 몽테스키외에게 법은 목적론적 이성의 창조물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몇몇 규칙에서 기인하기는커녕 다양한 역사적 여건들에 항상 적응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는 집단적 형태들을 유지하는 수단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볼테르의 사유에 내재적인 논리는 법이 그 평가에서 최고의 권한을 갖고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운 절대적 이성의 산물일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 이성은 혼란스러운 법들과 관례들의 부조리함 모두를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원칙들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98


 그렇지만, 몽테스키외의 사상은 '법의 기원' 부분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개인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으로는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담아낼 수 없고, 이는 볼테르의 통일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볼테르의 사상이 바로 대혁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볼테르는 통일성있는 외부 법칙에 의해 주어지는 밝은 미래를 말한다. 그렇지만, 볼테르의 비판이성 대신 대혁명의 정신과 연결되는 것은 스위스 출신의 루소 철학이다.


  (몽테스키외와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은 법을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에서 나오는 산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은 그 본성상 자의적이고 편협하며 개인적 이유들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법의 비개인적 본성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비개인적 입법권밖에 없다. 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일반 의지이다. 스스로에게 법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뿐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154 


 볼테르와 루소는 인류가 다른 시대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희망과 개인적 성찰의 유용성에 대한 믿음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엇이 특별히 인간적인가라는 문제에서는 의견이 같지 않다. 볼테르가 인간의 가치를 사유 능력과 그 능력이 도달하는 결론의 명료함에 둔다면, 루소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것에 그 가치를 둔다. 볼테르는 인류에게 그들이 더 훌륭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계몽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말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희망으로 가득 채운다. 루소는 사람들의 영혼, 그들의 본성, 내면에 있는 행복,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프랑스 대혁명 동안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것은 루소의 이해 방식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52


 볼테르가 이성을 통한 통일성있는 미래를 보기 위해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루소의 눈은 내면으로 향한다. 가치는 외부에 의해 강제로 계몽(啓蒙)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았을 때 비로소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의 울림은 밖이 아닌 우리 내부에 밝은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로부터 우리는 '천부인권(天賦人權)'의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단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Retour a la nature.)"는 이러한 루소의 철학을 잘 표현한 문장이다.


 루소는 두 종류의 인간을 창조한다. 한편에는 자연인, 자연이 만들었던 그대로의 인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자신의 영혼에만 열중하는 인간이 있다. 또 다른 한 편에는 시민이 있는데, 그의 자아는 공동체의 대(大)자아에 녹아들어 가고 그의 감정과 생각과 행위와 전 존재는 자기 인민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당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인간들의 삶에 대한 동일한 반감에서 생겨났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32


 영혼이 자신의 진정성과 현실 속에서 느끼는 것, 그것이 최종적인 가치이다. 너의 감정은 네 안에 있다. 그것이 너를 고양시키고 이끈다. 네 영혼을 믿어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도야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들은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멋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혼에 단지 외면적인 삶만을 부여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래야 된다고 믿는 존재를 추구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를 왜곡할 뿐이다. 네 영혼에 사람들이 가하고 싶어 하는 모든 변형을 멀리하고 네 영혼의 진정한 삶을 살아라. 이렇게 해서 영혼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한다. 바로 이 점에서 루소는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43


 그렇지만, 이들 사상가들의 생각이 서로 대체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개념은 서로간에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비판적 계승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구성한다.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몽테스키외에 의한 다양성의 인정은 '자유'를 개인의 본성으로 인정케 했으며, 볼테르의 통일성에 의해 '자유'는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고, 루소의 사회계약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평등한 권리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이들 사상가들의 다른 생각은 저마다의 빛깔을 남기면서 프랑스 혁명의 철학으로 융합되었음을 깨닫게된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고유한 권리의 성격을 표현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지 개념이다. 자유의 개념에서 볼 때 각 개인의 본성은 법적으로 이해된다. 인간 삶의 모든 발현은, 그것이 본성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그리고 자연적 성향의 표현인 한 권리에 근거를 둔다. 그것은 폭력으로 방해받을 수 없다. 자유는 인간 본성의 법적 표현, 즉 자연권이다. 따라서 권리가 갖는 이러한 자연적 성격을 일반화하고,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하면, 필연적으로 권리의 평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68


 프랑스 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기본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이 우애를 강조하며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한 이후 생겨나는 개인과 공적 권리의 충돌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과제다. 점차 거대해지는 집단(자본, 국가)의 권력앞에 개인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은 문제의 근원을 알려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프랑스 대혁명이 영감을 받은 공적 권리의 체계를 요약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그 체계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두 가지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하나는 시민들이 서로 간에 맺는 법적인 상호 약속의 개념, 즉 사회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 법으로 이해되는 국민의 의지의 개념, 즉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다. 이 일반 의지만이 국민의 권력 행사를 국민에 의해 지명된 대리인에게 위임하게 될 헌법을 국가에 부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입법권과 행정권 행사가 누구에게 위임될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입법권 행사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맡겨지고, 행정권 행사는 왕에게 맡겨질 것이다. 따라서 우선 권리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계약이 있고, 그로부터 결사가 형성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327

근대인에게서 인류는 말하자면 탈중심화되었다. 인간사 전체를 단일한 관점에서 정리하고, 인간의 운명들을 ‘보편적 섭리‘에 종속시켜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세계적 질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근대인에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옛 세계의 지형은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여러 민족의 무한히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 눈에 보이는 통일성도 없고 그리 뚜렷한 경계도 없는 광대한 계획의 전망만이 남아있었다. 영원히 변화하는 이 삶은 그 자체 안에서만 고찰될 수 있었고, 신학적 개념의 협소한 틀 속에 갇여 있을 수 없었다 - P19

예상치 못한 것, 그것은 바로 인간 정신이 인지할 수 있는 개별적 원인들 너머에 신의 섭리라는 영원한 하느님의 뜻을 개입시켜서 교회만이 밝혀낼 수 있는 총체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가 사용하는 주요 논거이다. - P37

모든 국가는 고유의 규칙에 따라 발전하는 조직을 구성하는데, 그 특성들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정신은 예로부터 언제나 신학적 사고를 부추기는 이상, 즉 세계사의 관점을 포기하면서도 개별적인 현상들 그 자체 속에서 민족들을 지배하는 규칙을 탐구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간 정신은 예전에는 전체의 관점에서 찾던 그러한 법칙성을 각 민족의 개별적인 삶 속에서 되찾는다. 인간의 삶에 의해 이렇게 무한히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 형태들 속에는 우연이나 초월적인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되는 사건들이 불규칙하고 무질서해 보인다고 해도 그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는 내재적 논리가 존재하며, 우리는 바로 이 내재적 논리를 통해 민족들의 변화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 P41

과학은 이중의 목적을 지닌다. 우선 그것은 개별 사실들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이어서 자신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룩하게 될 연속적인 혹은 동시적인 발견들을 가지고 형이상학적 의미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종류에 따라 분류되고 항목별로 정리되거나 어떤 법칙들을 따르는 집합체들에 통합되는 잘 정돈된 전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속은 자신이 집합체에 가져오는 개별 지식들에 의해서만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는 개별 사실들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수단만이 중요하다. 과학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개별 사실들을 그것들이 주어진 그대로 아는 것이다. - P131

나는 본성상 한 인간, 자신을 의식하기에 이른 인간, 자연적으로 선량한 삶이 근본 여건으로 주어진 인간, 자연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혁명의 결과는 명백하다. 이러한 자의식, 사회와의 모든 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 인간은 현행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그것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사회에 대항하여 내세우는 것은 순전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사회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인간은 자신 안에 담고 있다. 자연이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인간은 근본적인 여건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저 인간 자체에 결부되어야만 하는 절대적 가치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임무가 될 것이다. - P245

모든 문제는 다음의 질문으로 귀착된다. 누구에게 법을 제정하는 책임을 맡겨야 하는가? 왜냐하면 바로 그 질문이 권리와 법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자연권 덕분에 나는 자유롭고,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과 법에 따른 구속이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권리는 법보다 앞선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자연권은 법에 앞선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와 함께 주어진 것이다. 법은 권리를 만들 수 없다. 법과 권리 사이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싶다면 법의 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법을 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 P308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07-25 2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던
종교개혁으로 출발한 자연에
대한 도전은 자연과학의 발전
으로 이어지게 되었나요.

역설적으로 자연과학의 끝판왕
은 결국 정신과학이라는 말의
방증일까요.

여전히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가
자연처럼 정복되질 않는 걸 보면
보다 심오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
을 해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6 07:47   좋아요 3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자연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 발견되는 ‘자연의 법칙‘을 인간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라는 면에서 ‘자연과학->정신과학‘으로의 진행은 자연스럽게 보여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 문제는 신에 대한 도전의 면도 있지만, 이와 함께 기존 교회질서에 대한 개혁의 성격도 있다 생각됩니다. 기존 질서의 붕괴 후 이를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발견 과정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려 자연에 대한 탐구, 자연 질서를 인간세계로 끌어오려는 여러 노력들이 있지 않았나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2-07-28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의 차이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유용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07-28 15:12   좋아요 1 | URL
짜라투스트라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scott 2022-08-10 1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추카합니다
계신곳 비 피해 없으신지요.
서울 이틀 동안 물 폭탄 ㅠ.ㅠ

겨울호랑이 2022-08-10 22:10   좋아요 0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저도 수도권이라 물폭탄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ㅜㅜ 이번 주 내내 비온다고 하는데 걱정이네요... scott님께서도 물난리 겪지 않고 한 주 잘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

mini74 2022-08-10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당선 축하드려요 *^^*

겨울호랑이 2022-08-10 22:10   좋아요 0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거리의화가 2022-08-10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요새 프랑스 대혁명 관련하여 계속 책을 읽고 계시더군요.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8-10 22:12   좋아요 1 | URL
모처럼 연관된 주제로 책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중에 자꾸 새기는 합니다만 ㅜㅜ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8-10 22:1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하게 하루 마무리하세요! ^^:)

이하라 2022-08-10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님^^
모쪽록 비 피해 없이 지나시길 바랍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2-08-10 23:18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다음 주까지 비가 온다고 하네요... 이하라님께서도 평안한 밤, 건강한 시간 되세요! ^^:)

thkang1001 2022-08-11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8-11 13:08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thkang1001 2022-08-11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8-11 13: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2-08-11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프랑스사를 공부하고 계신지요
철학을 통해 보는 프랑스사!
관심이 갑니다
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8-11 15:20   좋아요 1 | URL
^^:) 공부까지는 못되고 연관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8-12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리뷰 열심히 읽었는데 감탄만 하고 갑니다 ㅎㅎ 좋은 주말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2-08-13 03: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 평안한 주말 되세요! ^^:)
 

그러므로 한편에는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바와 같은 인간의 발전과정에 대한 비관적 이해 방식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이성이 명하는 새로운 사물들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병존한다. 이후 이성은 열정을, 17세기가 이해한 바와 같은 위대한 열정을 새로운 시대를 향해 이끌어 나갈 것이다. 이성은열정에게 인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할 것을 목표로 제시할 것이다. 열정이 이성이 되고, 이성의 열정은 프랑스 대혁명기의 사람들, 예를 들면 미라보 같은 사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인간의 철학은 야만적 미신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대 중국철학은 참인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또는 거짓인 것)을 구별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철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질서(治)와 혼란(亂)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컸으며, 특히 혼란이 아닌 질서를 세우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노자』에서 내가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측면은 이 텍스트가 인간적 행위주체성human agency에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측면이기도 하다. 주체성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의 전통은 자아ego와 그 자아의 힘들에 너무 집중해왔다. 이런 전통에서 『노자』의 입장은 다소 거북스러운 것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 『노자』의 격률인 "행위하지 않음(無爲)"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를 개별적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또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생산적autopoietic" 대안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노자』는 더 이상 그것이 생겨난 원래의 문화적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지금의 『노자』는 예전 어느 한 지역에서 생생하게 통용되었던 의미론 ─ 의미의 네트워크 ─ 이 화석화되어 나타난 변형물의 일종이며, 그 지역은 소위 "서양 문명"의 전신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곳이다. 『노자』에 담긴 의미가 엮어내는 의미론적 네트워크는 한때는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추정상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타당성을 가졌고 숭배되었지만, 지금은 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많은 독자에게 어둡고 불가해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놀랍게도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터넷의 소위 하이퍼텍스트hypertext 같은 비전통적이고 비선형적인 텍스트들에 견주는 것이 더 용이할 수도 있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역시 한 명의 명확한 저자가 결여되어 있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특정한 한 가지 사안만을 다루지도 않는다.

요약하자면 『노자』에서 만나게 되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영속적이라든가 생산적이라든가 하는) 어떤 특성들을 가진 (텅 비어 있음/가득 차 있음, 낮음/높음 같은) 구조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들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그 이미지들은 전략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효력을 얻는 것에 대한 교수 모형이다.

『노자』에서 "네트워킹"은 언어학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장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메타포들을 사용함으로써, 또 유사한 모토들을 약간의 변주를 통해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동일한 일군의 어휘들을 응용함으로써 다른 장들과 연결되고 있다.

『노자』를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이 책은 수사학적 연결 고리들의 끝없는 연쇄이자 서로 연관된 격언들의 네트워크이며 서로 연상되는 이미지들과 교훈들의 모음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링크들을 따라가면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그 텍스트가 지닌 모호함은 사라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