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오쇼 라즈니쉬 지음 / 기원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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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란 평온과 '공(空)'을 의미합니다. 그 공(空)은 그곳에 항상 있는데, 생각의 흐름에 따라 모습이 감춰지고 생각이 멈추면 그것도 모습을 나타냅니다. 마음은 때로 매우 불안정한 듯이 보이는 반면 또한 쉽게 침착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초월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관조(觀照)'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의 입회인, 즉 자신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을 지켜봐야만 합니다. 그 관조 상태가 찾아든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22

오쇼(Bhagwan Shree Rajneesh, 1931 ~ 1990)의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는 명상(冥想), 관조(觀照), 공(空)이 본문 전체에서 반복된다.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는 끊임없이 주관적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아(自我)의 소멸이자, 신(神)과의 합일(合一)이기도 하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그것은 영원한 것과 하나가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의 흐름을 지켜보십시오. 오로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절로 생각을 소멸시켜 갑니다. 관조(觀照)의 깨우침이 마음속의 잡음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31

오쇼가 말하는 자유(自由)는 '~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이라는 상대적 자유가 아니다. 과거로부터 얻어지는 현실태(現實態)와 미래에 대한 가능태(可能態)가 인간 프시케(Psyche)를 구성한다면, 저자 오쇼는 오직 현재로부터 얻어진 깨달음, 진리(眞理)는 프시케, 자아와 함께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명상을 통해 과거/미래와 현재, 주관과 객관, 우연과 필연, 불멸과 필멸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인식의 대상과 인식자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 안의 신성(神性)을 밝힐 수 있다.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는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다가오지만, 잠시 멈칫하는 대목도 있다. 바로 의지(意志)와 관련된 부분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앞선 구절과, 의지는 오히려 길을 막는 장벽이라는 충돌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앞선 의지를 명상에 의해 자신의 아집을 멸(滅)하고 새롭게 피어난 연꽃과 같은 의지로, 마치 무위(無爲)를 행하는 위(爲)와 같은 의지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인간은 점점 모든 변화의 뒤를 변모시키지 않는 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속에 생겨난 그 목적의식을 환영하고 싶습니다. 그런 강건한 의지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좀 더 깊은 우리의 힘이 그것에 의해 불러일으켜지고, 활기찬 에너지가 생성될 때 거기에서 음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39

 무의식중에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 의식적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성스러운 것 중에 당신의 의지로 인해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의지는 길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벽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174

 무위를 행하는 위, 공에 머물리 위한 집중 이나 노력 마저도 피안(彼岸)에 이르면 또 다시 버려야할 뗏목이 된다면, 결국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아를 시공간안에서 끊어가고 줄여가지만,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탄탈로스의 형벌처럼 영원한 굴레 속에 갇혀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에서의 찰나를 보십시오. 공간에서의 원자를 보십시오. 그 '시간 속의 찰나'에서 시간은 존재를 정지하고, '공간 속의 원자'에서 공간은 존재를 끊습니다. 그곳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지금 이곳이 있을 뿐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91 

오쇼 라즈니쉬는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에서 궁극적으로 명상을 통해 신의 뜻에 따라 가는 순응의 삶을 말한다. 종교가 있는 이들에게는 신의 길이, 없는 이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되는 이 길에 순응하는 삶을 통해 절대적 자유를 얻는 길을 가자는 오쇼의 주장은 간단하지만, 삶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마치 양궁 경기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활을 쏴 날리고 나중에 그곳에 가서 과녁을 그려넣자는 오쇼의 말. 자칫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는 어느 수도자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향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도 최소한 어떤 국면에서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다 객관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보기'에 대한 오쇼의 말은 우리 가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좋은 조언이 되리라 생각한다...

명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완벽하게 고요한 수동성의 경지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세계와의 조화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고의 모든 형태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돌과 함께 자아도 점차 사라져 갈 것입니다(p121)... 자아는 과거 속에서만, 또는 과거의 투영뿐인 미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알아차림이 무아(無我)라는 것에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아는 현재 속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현재의 울타리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133

기도로 가득 찬 마음에서의 비움이야말로 신과 연결되는 문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풀어 놓으십시오. 마치 강물에 띄워진 작은 배처럼......(p49)... 자신을 신 속에 빠뜨리는 자야말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다시는 목표를 갖지 마십시오. 목표를 지닌 인간은 헤쳐 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든 닿은 곳, 그곳이 당신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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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무의식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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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 9조에는 전쟁을 회피하려는 강력한 윤리적 의미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이거나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9조는 명확히 점령국의 강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후에 자주적인 헌법을 제대로 다시 만들자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왔고 지금 역시도 있습니다(p30)... 프로이트의 관점은 헌법 9조가 외부의 힘, 즉 점령군의 지령에 의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무의식에 깊숙이 정착한 과정을 훌륭히 설명해줍니다. 먼저 외부의 힘에 의한 전쟁(공격성)의 단념이 있고, 그것이 양심(초자아)을 낳고, 다시 그것이 전쟁의 단념을 더욱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31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헌법의 무의식 憲法の無意識>의 주제는 '평화헌법'의 상징적인 조문이라 할 수 있는 일본헌법 9조다. 전쟁, 무력행사 그리고 군대 보유를 영원히 포기한다는 9조는 일본과 일본인에게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전후헌법의 9조란 원래 1조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차적인 것이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9조만이 문제가 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경위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간과되어 온 것은 원래는 1조가 중요했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1조와 9조의 지위가 역전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1조(상징천황제)가 정착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47


  고진은 <헌법의 무의식>에서 헌법 9조와 함께 헌법 1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고진의 관점에 따르면 신(神)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왕의 존재를 인간으로 재위치시키면서, 연쇄적으로 제정된 것이 헌법 9조다. 일왕의 존재가 갖는 종교적 의미와 군국주의 일본의 군사력의 분리는 미군정에게 첫째 과제였고, 그 기원은 멀리 고대국가의 성립으로까지, 가깝게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그런 면에서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의 전후 처리는 일본정치의 전통과 연결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고대국가가 형성되었을 때, 외부와의 관계가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수장(首長)=사제를 장(長)으로 삼는 씨족사회가 그대로 국가로 발전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역시 외부에서 온 군사적 정복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군사력만으로 지배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기존의 수장=사제를 편입시키거나 추대함으로써 지반을 단단히 다졌고, 바로 그것에 의해 천황제국가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권력과 권위, 실력과 주술력이라는 이원성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이후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71


 고진은 <헌법의 무의식>을 통해 미군정에 의한 새로운 헌법 9조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단절을 넘어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시대 전통과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여기에 담긴 사상이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영원한 평화'와 연결된다는 점을 말한다. 고진은 전후 패전이라는 좌절된 죽음의 충동이 낳은 결실을 평화헌법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세계평화를 향한 교두보를 발견한다. 일본인인 저자는 이러한 구도로부터 세계평화에 앞서는 선도국가 일본을 위치시키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그의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도쿠가와 체제란 '전후(戰後)'의 '국제(國制, constitution)'인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다양한 금지를 통해 공격충동의 발생을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의해 도쿠가와 체제에서 '무기질'적인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메이지 이후에는 개국(開國)을 하고 외부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공격충동의 발생입니다. 그것이 패전과 함께 자신의 내부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헌법 9조인데, 이는 동시에 '도쿠가와의 평화'에 있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법 9조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칸트가 명확히 한 보편적 이념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87


 그의 말대로 평화헌법 9조는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았을 수 있겠지만, 그와 쌍이 되는 헌법 1조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고진의 도식에 따르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복종을 끌어내기 위한 미군정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평화헌법 1조는 다분히 미군정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본인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왕제가 의식에 자리잡아 일본의 '와(和) 문화'의 구심점으로 자리하는 한 외부로 향한 죽음의 충동은 문화로 변화하지 않고 휴화산처럼 또다른 분출점을 노린다고 보는 편이 보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일본을 영원한 평화의 선도국이 아닌 반성하지 않는 전범국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자아는 죽음충동이 공격성으로서 바깥으로 향한 후에 다시 안으로 향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현실원칙이나 사회적 규범으로 공격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공격충동은 어떻게 억제되는 것일까요. 프로이트는 이때 공격충동(자연)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격충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즉 공격충동은 안으로 향한 후 초자아=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28


 혼네(本音)으로 1조를, 다테마에(建前)으로 9조를 내세우며 진심없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하기란 영구히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고, 이것이 고진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그럼에도 <헌법의 무의식>이 갖는 의미를 <트랜스크리틱>의 model을 가능태가 아닌 현실태로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헌법 1조와 9조는 왜 이처럼 결부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을 점령통치하기 위해 먼저 천황제 유지를 시도하고 그것과 관련하여 연합군에 속한 여러 나라의 반대를 설득하기 위해 9조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그때까지 맹위를 떨치던 천황제파시즘을 근절하려고 했지만 천황제 자체는 남겨놓으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점령에 대항하는 자는 그것을 천황의 이름으로 행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판단은 일본에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자가 역사적으로 되풀이해온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53


PS. 본문 중 고대국가의 형성과 관련해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설명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원시사회의 내용을 연결시켜본다면, 성(聖)과 속(俗)의 결탁,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쇼군이 아니라 천황이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사고는 흑선(黑船)의 도래와 존황양이운동과 더불어 확산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은 메이지유신까지 ‘상징천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헌법 1조의 규정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점령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메이지 시대, 그리고 그 이전의 형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 P55

일본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위기가 생겼을 때, 바꿔 말해 초월적인 것이 외부로부터 도래했을 때, 내부에서 천황을 초월화시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가 ‘다이카(大化)의 개신(改新)‘(645년) 입니다. 일본에서 천황이 초월적인 존재로서 실권을 잡은 시기는 내외적으로 위기상태, 전란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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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5-08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주권국가가 확립되기 이전인 칸트의 사상을 일본 헌법과 연결지은 고진의 해석은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군요

겨울호랑이 2023-05-08 07:31   좋아요 0 | URL
김민우님의 말씀처럼 일본 헌법의 기원을 서구 계몽사상과 연결짓는 부분은 다소 비약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진은 평화헌법 9조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외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이상을 패전국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본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외세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헌법 9조와 칸트의 사상이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만, 이러한 9조가 일본인의 무의식에 자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갖게 됩니다... 김민우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맑스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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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과 국가는 그것들이 어떤 필연성에 뿌리박고 있는 까닭에 자율적인 힘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초월론적인 가상인 까닭에 단순한 부정에 의해서는 사라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좀 더 강력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관한 깊은 통찰(비판)이 필요하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43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트랜스크리틱 トランスクリティ-ク―カントとマルクス >은 '탈(脫)자본주의'를 위한 고찰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이념과 국가라는 통치권력의 긴밀한 연합을 과연 깨뜨릴 수 있을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이 과제를 위해 고진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와 맑스(Karl Marx, 1818 ~ 1883)을 소환한다. 


  국가나 네이션이 비록 공통 환상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게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나 네이션은 상품 교환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역시 '교환'에 뿌리박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하더라도 그와 같은 계몽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초월론적 가상인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35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본질을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으로부터 밝혀내고, 이들의 연결고리를 맑스의 이윤원천인 '교환'에서 찾아낸다. 교환관계로 결합된 초월론적 가상. 마치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cerberus)와 같은 이들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 <트랜스크리틱>에서 고진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에 해당하는 칸트적 전회(轉回)를 꺼내든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사물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서 파악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지동설로의 '전회'를 초래한다. 즉 코페르니쿠스의 전회 그 자체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경험주의처럼 감각으로부터 출발할 것인지, 합리주의처럼 사유로부터 출발할 것인지 하는 대립을 빠져나간다. 그가 가져온 것은 감성의 형식이나 지성의 카테고리와 같이 의식되지 않는, 칸트의 말로 하자면 초월론적인 구조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56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적 전회를 통해 초월론적 구조를 도입한다. 초월론적 구조 안에서 '타자(他者)'가 도입되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보편성과 특수성은 자리바꿈을 한다. 여기에서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는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와 같이 정(正)-반(反)-합(合)의 구도를 갖지 않는다.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는 타자와의 끊임없는 관계, 사이가 목적과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은 자본=네이션=국가를 긴밀하게 엮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그것은 교환관계에서 온다. 이제부터 주제는 칸트에서 맑스로 전환된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보편성'을 추구했을 때 불가피하게 '타자'를 도입해야만 했다는 것, 그 타자는 공동 주관성이나 공통 감각에서 나와 동일화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신)가 아니라 초월론적인 타자이다. 그와 같은 타자는 '상대주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만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85


 이 명령(정언명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공동체에서 오지 않으며, 신에게서도 아니다. 이 명령은 (칸트의) 초월론적 태도 자체에서 온다. 초월론적 태도는 암묵적으로 '괄호에 넣어라'는 명령을 포함한다(p176)... 초월론적인 시점이 그와 같은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망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인 시점 자체가 하나의 명령에 의해 촉구되고 있다는 것도 망각되고 있다. 그 점은 초월론적 시점 자체가 어디서 오는가를 물을 때 분명해진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와 연관되어 있다. 초월론적인 시점 자체가 윤리적인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177


 고진은 맑스의 <자본>에서 특히 3권에 주목한다. 잉여의 원천과 신용관계를 통한

자본의 끊임없는 지불유예와 만기연장을 통한 자본증식의 본질을 고진은 밝혀낸다.  다른 가치 체계에서 교환을 통해 형성된 이윤이 끊임없이 돌려막기되면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 고진은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긴밀한 유대를 끊어낼 수 있는 약한 고리를 생산-교환-소비의 단계 중 교환에서 찾아낸다. 초월론적 구조 안에서의 영구 교환 시스템. <트랜스크리틱>에서 논의된 구조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 행동 논의는 <세계공화국으로>와 <윤리 21>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된다...


 맑스는 G-W-G'에서 W-G'가 실현될지(상품이 팔릴지) 아닐지 하는 것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보고 있다. 그 경우 덧붙여야 할 것은, 실제로 자본은 상품이 팔린 것으로 간주하고 운동을 계속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신용'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235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을 촉진하고 '판매'의 위태로움을 감쇄하는 '신용'이 자본의 운동을 무한(endless)히 강제한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본의 자기 운동은 마치 자전거 타기처럼 바로 '결제'를 무한히 뒤로 미루기 위해서 존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거기에 '끝'이 있다면 신용은 붕괴하기 때문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342


 맑스는 자본의 원천에서 바로 화폐의 페티시즘을 고집하는 수전노(화폐 축장자)를 발견하고 있다. 화폐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것과도 직접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사회적 질권'을 갖는 것이다. 화폐 축장자란 이 '권리' 때문에 실제의 사용 가치를 단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설적이게도 수전노는 물질적으로 욕심이 없다. 수전노에게는 종교적 도착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실 세계 종교도 유통이 일정한 일정한 '세계성' - 공동체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이윽고 공동체들에게도 내면화되는-을 지닐 수 있었을 때에 나타났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325


통상적으로 공적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에 반해 공동체나 국가 차원에 대해 말해짐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역으로 후자를 사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칸트적 전회‘가 놓여 있다. 이 전회는 단지 공공적인 것의 우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의 의미를 바꿔버린 것에 있다. 공적이라는 것=세계 공민적이라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는 오히려 그저 개인적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개인적인 것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공적 합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개인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다. - P150

언어는 개별성-일반성의 회로로 회수되지 않는 잔여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 명사가 초래하는 패러독스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거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단독성이 이를테면 ‘사회적‘인 것과 관계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반성-개별성과 보편성-단독성의 구별이다. 또는 공동체-사회의 구별이다(p165)... 고유 명사(proper name)은 종종 사유 재산(property)과 결부된다. 따라서 고유 명사에 대한 공격은 반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인다. - P166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기 위해 채택된 시스템의 핵심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에 있다. 제비뽑기는 권력이 집중되는 장소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참으로 삼권분립을 보증한다. 이리하여 만약 익명 투표에 의한 보통 선거, 요컨대 의회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적인 독재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추첨제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싱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어소시에이션은 중심을 지나지만, 그 중심은 제비뽑기에 의해 우연화된다. 이리하여 중심은 있음과 동시에 없다고 해도 좋다. 즉 중심은 이를테면 ‘초월론적 통각 X‘(칸트)인 것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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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4-18 2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는데… 상당히 어려운데요!!!

겨울호랑이 2023-04-18 22:39   좋아요 2 | URL
아, 제가 <트랜스크리틱> 리뷰에서 큰 골격만 떼어 요약하다보니, 그렇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생각하기에도 100% 이해했다고 보기에는 스스로도 부족함이 많은지라... 직접 읽으시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DYDADDY 2023-04-19 0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05년에 번역된 책과 같은 내용인줄 알았는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크게‘ 바뀌었다고 하네요. 새로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ㅠㅠ

겨울호랑이 2023-04-19 04:58   좋아요 0 | URL
서두에 이전 내용 중 일부를 보완했다는데 저는 이전 본을 읽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습니다만, DYDADDY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그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4-25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칸트=나쁜 놈 이란 도식을 알기 위해 저도 읽어봤는데 앞 부분은 참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23-04-25 23:00   좋아요 1 | URL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의 사상이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의 골격을 설명하다보니 처음에 저도 선뜻 내용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강한 칸트의 초월론은 그 내용은 차치하고, 이해의 어려움으로 독자들의 건강에 유해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유 명사(proper name)는 종종 사유 재산(property)과 결부된다. 따라서 고유 명사에 대한 공격은 반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는 고유 명사를 가진 ‘작자‘에 의해 소유(appropriate)된다. 또는 저자(author)의 이름에 의해 권위화(authorize)된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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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말하다 -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6
가라타니 고진 지음, 고아라시 구하치로 들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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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독자들의 접근이 용이한 '대담'이라는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서로 씌여진 <세계공화국으로>의 자매편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세계공화국으로>보다 흥미로운데, 첫째 인간 가라타니와 그의 사상 사이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둘째 1960년대 대학생부터 가장 최근의 사상적 역정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옮긴이 후기 , p186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의 <정치를 말하다 柄谷行人 政治を語る>의 성격은 옮긴이 후기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저작에 대한 전반적인 조망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정치를 말하다>가 그의 전집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 여겨진다.


 메이지 이래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국가나 네이션은 명확히 능동적인 주체로서 존재합니다. 사실 일본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일본제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국가에 의해 시작되어, 이후 민영화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험에서 보면, 국가나 네이션을 그저 표상이나 상부구조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가나 네이션은 단순히 환상이나 표상이 아니며, 그 자체의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32


 저자는 <정치를 말하다>에서 자신이 '자본주의=국가=네이션'이라는 도식을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조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위와 같은 관점은 <트랜스크리틱>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되는데, 그 계기는 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였다. 관념론적인 그의 탐구가 이 사건 이후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음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밝힌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공산혁명을 실패로 끌고내려갔는가?


 1991년에 소련이 현실적으로 붕괴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오히려 소련이라는 존재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p68)... 소련붕괴, 즉 미소 이원적 구조의 붕괴는 동시에 철학적 논의의 리얼리티를 빼앗아갔습니다. 소련이 붕괴하자,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탈구축적 힘에 기대한다는 식의 레토릭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탈구축적 힘은 완전히 노골적이 되어 전 세계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지요.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69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상품교환이라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초점을 맞췄기에 계급을 넘어선 국가와 네이션의 문제에 답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하부층위의 문제가 아닌 상부층위에서 국가와 네이션과 관계를 맺으며 존속한다. 이와 같은 고진의 관점은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주장한 관점 - 시장경제 위에 다른 층위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라는 교환양식 - 을 떠올리게 한다. 


 마르크스는 초기부터 화폐 또는 자본재경제를 종교비판을 응용하여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이 과제를 <자본론>에서 완수하려고 했지요. 이것은 역사[史的] 유물론의 공식과는 무관합니다. 역사유물론에서는 경제적 하부구조(토대) 위에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말하자면 상품교환이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형성된 종교적 상부구조로서 존재합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46


 마르크스주의는 항상 국가와 네이션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스탈린주의나 파시즘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반성에서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말하게 되고, 또 고유한 차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p80)...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은 국가나 네이션을 상품교환과는 다른 교환양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81


 이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국가와 네이션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힌다. 한계상황에서 고진은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를 등판시킨다. 칸트가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에서 보여준 하나된 세계로서의 가능성 안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구체적으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모습으로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실현될 것이다.


 칸트는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을 구별했습니다. 또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과 '규제적 사용'을 구별했습니다. 구성적 이념은 현실화되어야 하는 이념입니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지표로서 존재하고, 그것을 향해 서서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념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구성적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71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유란 자발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는 도덕법칙으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그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도 다루어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득이합니다. 그러나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상대를 목적(자유로운 존재)으로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상인자본을 개재시키지 않는,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76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는 현실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설명하는 <트랜스크리틱>, 그리고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세계사의 구조>라는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그의 입장이 간략하게 나마 모두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를 말하다>는 그의 전집의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트랜스크리틱> <세계사의 구조>로 들어가 보자...


 내가 말하는 반복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자본주의에는 반복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경기순환이 그렇습니다. 공황->불황->호황->공황 .... 왜 이런 순환이 존재하느냐 하면,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하면서 공황과 불황을 통해 폭력적인 도태와 정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복은 말하자면 반복강박적인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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