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반대들을 논의함으로써 칸트가 보여주려고 한 요점으로부터 주의를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요점이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칸트가 준칙이라고 부른 것에 따라 행위한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유한한 의지는 그것이 보편적 법에 대한 존경에 의해 발동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준칙들  혹은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들이 보편적인 법이 되도록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준칙들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즉 우리의 준칙들이 원칙으로서 보편적인 도덕적 입법의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다면, 이성은 우리가 법 그 자체에 대한 존경에 의하여  그 준칙들을 인정해야 하고 존경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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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수립을 위해 합일된 그러한 사회(市民的 社會)의, 다시 말해 국가의구성원들을 [국가]시민(市民)이라고 일컫는다. (시민으로서) 그 본질과 분리될 수 없는 법/권리적 속성들은 [첫째로]  자기가 동의했던  법률 외에는어떤 법률에도 따르지 않을 법률적 자유와, - [둘째로] 국민 중에 이자가 그를 구속할 수 있는 꼭  그만큼 법적으로 정당하게 구속할 도덕적 능력을 가진 오직 그러한 자 외에 자신에 관하여 어떠한 상위자도 인정하지 않는 시민적 평등, 그리고 셋째로 자기의  실존과 생존이 국민 중 타인의 의사에덕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신의 권리와 힘들에 덕 입을 수 있는 시민적 자립성, 따라서 법적 사안들에 있어서 어떤타인에 의해서도 대표되어서는 안 되는 시민적 인격성이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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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은 엘랑 비탈의 개념이 『창조적 진화』의 마지막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의 3장 말미에 이르러 베르그손은 궁극적으로 운동의 개념을 통해 생명과 물질의 전개과정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엘랑 비탈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초반부에 물질과 뚜렷이 구분되는 생명의 특성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일종의 가설이다.

마치 『물질과 기억』이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서 출발함을 명확히 표명하면서도 말미에 가서는 운동의 개념으로 이들을 통일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이원론을 이루는 두 요소들은 언제나 일원론으로 통일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만 첨예하게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장켈레비치를 인용하면 그의 유명한 용어, 즉 <이원론적 일원론>이라는 말로 베르그손의 입장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생명의 철학으로 알려진 『창조적 진화』의 입장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운동 혹은 흐름, 그의 용어로는 <지속>의 일원론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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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서의 목적이 참된 학문과 옳은 실천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논리학자들이 보여준것같이 가르침에는 개념과 판단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사람들이 판단에 도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는 논증적, 변증술적, 수사학적 방법, 이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개념을 형성하는 방법에는 대상자체를 상상하거나 또는 그것의 상징을 상상하는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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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논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9
아베로에스 지음, 이재경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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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동의에 이르는 방법이 서로 다른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논증을 통해 동의에 이르게 된다. 논증적인 사람이 논증을 통해 동의에 이르게 되는 정도만큼 확고하게, 어떤 이는 수사학적 논변을 통해 동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 신의 종교는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부른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27/226

성스럽고 고귀한 신, 예언적 사명, 그리고 내세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긍정이 그 예증이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원리는 세 가지 부류의 징표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모든 이들이 예외 없이 인식하도록 명해진 동의에 이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사학적, 변증술적, 논증적 징표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49/226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Ibn Rushd, 1126 ~ 1198)의 <결정적 논고 Fasl al-maqa'l>는 알 가잘리( Al Ghazali, 1058 ~ 1111)의 철학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론이다. 인간 이성(理性)으로 신의 뜻을 알 수 없기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으로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가잘리의 논리에 대해 아리스텔레스의 사상적 후계자인 아베로에스는 역반론을 펼친다. 아베로에스는 신의 부름을 세 징표로 해석하는데,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변증론> , <범주, 명제론 - 오르가논 - >에 각각 대응하는 점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성서와 연관되어 세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결코 해석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들은 수사학적 부류다. 그들은 압도적인 대중이다. 왜냐하면 건전한 지성을 가진 누구도 이런 종류의 동의에서 면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류는 변증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지 본성에만 의해서든 아니면 본성과 습관에 의해서든 둘 중 어느 한쪽에 의해서 변증술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이다. 또 하나의 부류는 어떤 해석에 정통한 이들이다. 이들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 즉 철학에서의 훈련을 통해 논증적 해석을 하는 부류다. 이 해석은 대중은 물론 변증술적 부류에게도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64/226

서로 다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다른 방식의 진리(신)에 이르는 길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수사학, 변증학, 논증학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개방되어야 하나,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이어야 하고, 핵심(核心)은 바로 논증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철학'이 유일함을 아베로에스는 밝힌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아베로에스의 <결정적 논고>는 '철학'이 결코 이슬람의 가르침에 벗어난 이교도의 학문이 아니라, 율법의 명령으로 신의 뜻을 찾는 정도에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 신앙과 이성을 화해시킨다. 아베로에스는 오직 철학을 통해 <꾸란>의 우의적 해석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경전과 생활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아베로에스의 조화는 '철학을 중심으로 한 신학의 조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 1274)는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양대 종교의 '신앙과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하게 된다...

아베로에스, 아퀴나스, 시제 모두 진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의견은 일치한다. 철학과 신학은 상이한 방식을 사용할지라도 동일한 실재와 연결되어 있다. 철학과 신학이 그러한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상이한 사상 체계는 불필요하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 있을지라도 그 진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으며, 철학과 신학은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p171)... 아베로에스의 합리주의는 인간 이성만이 모든 존재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정초해 있다. 반면 아퀴나스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넘어서는 진리가 있다고 전제한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148/226 해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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