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알라딘으로부터 다섯 편의 미스터리를 뽑아달라는 메일을 받았더랬다. 물론 나는 바빠서 하나 쓰고 일 하다가 또 하나 생각하고 하다가 제출하려니 더 이상 안 받는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아쉽게도 열심히 추렸는데 아까워서 내 맘대로 뽑은 미스터리를 정리해봤다.


미스터리라고 하면 어떤 사건이든 현상이든 진실이나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비밀을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초자연적인 이야기이거나 알 수 없는 사건을 추리로 풀어가는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데,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고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뭐 어떠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인 것을.


대략 사회파 미스터리, 역사 미스터리, 오컬트 미스터리 이렇게 나눠 봤는데, 생각보다 좋은 소설들이 많아서 고르기 힘들었다. 


1. 사회파 미스터리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가 가진 공동체 의식이 지나치게 배타적인 건 아닌지 고민했고, 같은 상황이라도 약자에게 더 가혹해지는 사회가 슬펐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피해자는 이슬람 사원도 연구하는 다문화교류연구원 교류자들이고, 오지영 형사는 이 사건을 맡게 된다.


언론이 자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경찰서 내에서는 사내정치로 오지영 형사를 압박하는 와중에 사건은 또 다른 인물을 지목하는데...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잘 보여주면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여 몰입해서 읽었던 소설이다. 오지영 형사의 다음 사건이 기다려지기도 했고. 이번 국제도서전 갔을 때 작가님 신작 쓰고 있다고 하던데 얼른 나오면 좋겠다.


이 책은 대거상 해외부문 수상으로도 유명해졌다. 신선하지만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소재를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잘 버무렸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미래인 듯한 어느 날, 세상은 재난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여행사는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는 상품을 만들었다. 이 '재난 여행'만을 파는 여행사 정글에서 10년 동안 일한 수석 프로그래머 고요나는 회사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재난 지역을 돌아보며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도록 여행을 설계하는 게 일이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데...


사막의 싱크홀 '무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국은 돈 앞에서 사람의 생명이나 존엄 따위는 다 소모품일 뿐인 상황은 전쟁 같은 극한 상황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800쪽이 넘는 책이지만 엄청난 몰입감으로 읽어낼 수 있는 놀라운 책이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때, 세상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지배하고 있다.


세상은 가장 안전한 구역이자 국가 권력의 핵심들이 거주하는 1구역부터 폭동이 일어나 버려진 9구역까지 나뉘어져 있었고, 거주하는 구역이 곧 신분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어느 구역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졌고 받는 대우가 달라졌다.


가장 높은 곳과 아득히 먼 낮은 곳. 두 곳을 잇는 사람은 루미의 제이 삼촌이다. 프라임 스쿨의 우등생 다윈 영, 프라임 스쿨에서 기득권을 비판하는 아웃사이더 레오, 그리고 야망 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아버지 조이 헌터를 부끄러워 하는 루미가 함께 살해당한 제이 삼촌의 범인을 찾는다.


살인자를 찾는 추리소설 같지만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는 개인과 사회의 모순이 점철되어 있다. 지구를 나누는 비합리성, 상위 지구를 차지한 이들의 야합,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어떤 짓도 마다않는 불순한 야심, 그리고 가진 것을 잃지 않겠다는 이기심은 한 개인의 삶도 바꾸지만 사회 전체의 방향도 정해버린다.


제이 삼촌을 죽인 이는 누구이며, 다윈 영의 미씽 링크는 무엇일까, 그리고 다윈의 진화는 어느 방향으로 이루어진 걸까.


 이 책에는 네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각각 모두 서늘하고 재미있는데 그 중에 가장 미스테리 스릴러라 불릴 만한 이야기는 <오버랩, 오버랩 나이프>이다.


단편 드라마로도 제작된 이 이야기는 신 또는 악마란 존재하는가, 삶은 정해진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엄마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러 온 아버지. 죽음의 순간, 아들은 누군가의 속삭임을 듣고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과거로 간다. 순환되는 운명 속에 괴로움은 쌓여 가고,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누구였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너무 잔인했다.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일들이 결국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2. 역사 미스터리


 통일신라 신문왕이 통치하던 시절, 오빠인 자은을 대신하여 자은이 된 미은은 당나라로 유학 갔다 금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설자은'은 살인사건을 해결하며 조금씩 왕의 눈에 들게 되는데...


배에서 '주운' 망국의 백성인 목인곤과 함께 금성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하기 시작한다. 산아의 아버지 독군 김무헌 사건은 아주 참혹했다. 그리고 죽은 자은과 그 사실을 모르는 산아가 안타까웠다. 사건 하나 하나 재미있었는데, 자은은 언제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활약할 수 있을까.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이란 참 어렵구나 싶다. 


왕의 눈에까지 들었으니, 이제 자은은 왕의 일도 해결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깨닫게 될까. 그 여정이 길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세자가 궁을 비운 때,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살인범으로 지목된 이는 정수 의녀. 현 의녀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스승이었다. 현 의녀는 스승이 범인이 아니라고 믿었고, 종사관 어진과 함께 수사를 하게 되었다.


왕의 가정폭력은 국가의 재난이었다. 같은 조건이라도 신분에 따라 미치는 영향이나 결과가 달라졌다. 심한 압박 속에 사도세자는 미쳐갔고, 미친 짓을 한들 주변에서는 쉬쉬했고, 결국 애꿎은 궁인들만 피해를 입었다. 정말로 세자가 범인일까.


현 의녀와 종사관 어진은 범인을 찾고 잡을 수 있을까. 궁 안에서 벌어지는 핏빛 사건들은 잔혹하면서도 애처로웠다.




 이 책의 범주는 무엇일까. 역사 미스터리일까, 오컬트 미스터리일까. 


누군가의 뇌를 이식하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원래 몸이었던 사람일까, 이식한 뇌의 주인일까. 달리 말하면 기억의 주인이 그 사람이 되는 걸까.


1969년 어느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에서 총성이 울려 펴진다. 살해당한 이는 애덤 스펜서. 그를 저격한 바우만은 기자인 크리스틴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귀신나방은 겉모습은 흉측하지만 산란기에는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탈피하고 산란을 마치면 나뭇등걸에 모여 죽는다. 그리고 유충들은 그곳에서 다시 자라고 알을 낳고 죽는다. 다른 개체이지만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보이는 이 귀신나방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다 뻥일지도.


히틀러의 뇌가 죽지 않고 계속 몸으로 옮겨 다닌다면, 아니 그보다도 그렇게까지 해서 계속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한데, 너무 끔찍한 일이다. 어쩌면 진시황이 이렇게 계속 살아서 히틀러까지 온 거 아닌가 싶다. 영생을 향한 집념을 보자면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싶지만.


바우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경악 그 자체이다. 진짜는 누구이고 가짜는 누구일까. 과연 '히틀러'의 '과업'을 저지할 수 있을까, 누가 이길까.



3. 오컬트 미스터리


 어느 밤, 자정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펼쳤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한창 귀신들이 움직일 시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소금물? 감기도 안 걸렸는데 소금물로 왜 입을 헹궈 하면서 말이다.


다들 알 것이다. 무슨무슨 행운의 편지. 이 편지를 받으면 언제까지 일곱 명인지 열 명인지에게 보내야 한다는 그 편지 말이다. 영화 <링>에서도 사다코를 피하려면 누군가에게 비디오 테잎을 보여줘야 했다. 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살려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링>에서는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비디오 테잎을 들고 부모님을 찾아가지만, 이 이야기 <흉담>은 뭔가 좀 더 악의가 더 엿보인다.


흉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묘한 쾌감을 느낀다고나 할까. 목적 자체가 누군가의 비극을 부르는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의 비극을 자양분 삼아 부를 축적하고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고 잔인하게도 스스로 기뻐한다. 남의 아픔이 즐거운 게다. 그래서 흉하고 흉한 이야기이고.


공포소설가 '나'는 차미조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아버지 차문조 교수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관해서였다. 둘은 민속신앙 덕후인 발람과 함께 '악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을 도시 괴담을 통해 알게 되고, 예전부터 내려오던 금기를 깨닫는다. 일제시대 뿐 아니라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이 남긴 처참함까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다들 소금물로 입을 헹구셨을라나. 잊었더라도 걱정 마시라, 나는 저기 적힌 금기를 다 어겼지만 잘 살아 있으니. 



 이 책은 진짜 빨리 읽힌다. 사실, 첫 이야기를 읽자마자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누가 빌런이고 끝에 어떻게 될지까지 다 떠올랐다. 하지만 아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가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 책을 순위에 넣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소희는 자신에게 고모가 있으며 그 고모가 유산을 남겼다고 무려 변호사에게 들었다. 그리하여 어릴 때나 봤을 기억에 없는 사촌들을 만나고 핏줄이어서 얽히게 된 일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누가 좋아보이는 거 준다고 하면 의심부터 해야 한다고. 좋은 거는 빚을 내서라도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 남을 주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엄마도 잃고 홀로 된 어린 소희는 정답게 다가오는 사촌들에게 정이 갔을 것이다. 외로운데다 핏줄이라고 하니까. 그래도 소희에겐 절친도 있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너무 외로워하지 말길. 그리고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면 되려 더 큰 걸 떠안을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이 알길. 


 드라마 '손 더 게스트'를 재미있게 봤다. 박일도의 정체는 아무리 짐작해도 밝혀질 때까지 계속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 


한국형 엑소시즘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악령에 빙의된 인간은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의 눈을 찌르고 자살한다. 박일도란 큰 귀신은 작은 귀신을 부려 사람들을 해쳤고 빙의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족을 해쳤다.


동쪽 바다 깊은 곳에서 와서 사람에게 빙의된다는 큰 귀신, 손은 1998년 화평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화평을 구마하러 왔던 신부들 중 한 명이 일가족 및 형사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 한 가운데 있던 화평, 최윤, 길영은 20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큰 손 박일도를 찾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


구마도 다양하게 하고, 민속신앙도 잘 버무려져 있고, 무엇보다 드라마를 봐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세상이 혼탁하고 사람이 타락하면 그것이 바다 깊은 곳에서 온다는데, 사다함이나 선묘, 아리나발마, 생치새라는 이름이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다함이나 선묘, 아리나발마가 왜 큰 손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외에도 너무 많은데 일단 여기까지. 좋은 이야기들이 참 많아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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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책을 뽑아달라는 부탁을 받는 꼬마요정님 와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한번도 그런 메일 받은적 없는데요. ㅎㅎ 꼬마요정님과 친구인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ㅎㅎ

여기 있는 책들이 대부분 집에 있네요. 그런데도 한 권도 안 봤어요. 왜냐하면 저거 다 우리집 둘째 책이라서 말이죠. 딸래미가 한번씩 좋다고 추천하는데 왜인지 손이 안 가던데 집에 있으니, 그리고 꼬마요정님이 이렇게 추천했으니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합니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6-07-3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미스테리물 추천받으신 요정 님.^^
놀랐지만 저도 그간의 요정 님 읽어오신 책 내역들을 떠올려봤을 때 기대가 무척 됩니다.
안타깝게 제출기한을 넘기셨지만 이렇게 올려주시니 기쁘네요.
정말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여름이잖아요.ㅋㅋㅋ
목록 중 세 권이나 읽었어서 나름 기분좋기도 하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제목들의 책과 드라마까지 곁들여 있어 일단 찜해뒀어요.
미스테리물이나 호러쪽은 작년부터 이제 읽기시작한 초보자라 갈래잡기가 쉽지 않던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정리해주세요.
독촉 메일이나 독촉 댓글은 앞으로 제가 압박해드리겠습니다.ㅋㅋㅋㅋ

카스피 2026-08-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미스터리 추천을 요청받으셨다니 대단하시네요.그런데 추천하신 책 대부분이 한국저자분들 이시네요.그만큼 한국추리소설의 저변이 늘어 반가운 마음이 드는데 눈이 좋아지면 꼬마요정님의 추천도서를 읽어봐야 겠네요^^
 
잃어버린 환상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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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뤼시앵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3권에서야 비로소 앙굴렘으로 돌아온다. 뤼시앵은 파리에서 다비드의 서명을 위조하여 3천 프랑의 어음을 발행했는데, 이는 다비드를 커다란 위험에 빠트린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돈' 보다는 '어음'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종이돈 즉 지폐는 불신의 대상이었고, 주로 경제활동은 어음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어음이란 기간이 도래하여 돈이 되든, 누군가 할인해서 돈으로 바꿔주든 해야 되기에, 처음 뤼시앵이 자신의 소설 '샤를 9세의 궁수'를 팔아 손에 쥐게 된 5천 프랑의 어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뤼시앵은 이 어음을 현금화 하기 위해 어음할인업자를 찾아다니지만 결국 카뮈조를 찾아가게 된다. 상인인 카뮈조는 그 어음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고, 상사와 관련된 어음으로 바꾸어 돈을 지급한다. 이 어음은 결국 뤼시앵을 감옥으로 보내려 했고, 코랄리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다시 카뮈조의 정부가 된 듯한 분위기를 보인다.


뤼시앵은 이와는 별개로 돈이 부족해지자 다비드의 서명을 위조하여 각각 1, 2, 3개월 만기의 1천 프랑짜리 어음을 3장 발행한다. 다비드에게는 그저 편지 한 장 보냈을 뿐. 그리고 이 어음은 다비드를 감옥으로 보냈다. 이 고단한 발명가는 아버지에게 눈탱이 맞고, 처남에게 호구 잡힌 채 이상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종이 제조법 발명에 몰두해 있었는데, 그가 생각한 방향은 맞았으나 그에겐 조력자도 돈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제조법을 노리던 쿠앵테 형제는 이 어음을 미끼로 종이 제조법의 이익을 가로채고자 한다. 그 와중에 한때 같은 학교에서 동문수학했던 소송대리인 프티 클로의 야심까지 얹어져 다비드는 한층 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발자크는 이 소송을 아주 자세하고 설명하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이 떠오른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라는 다르지만 소송에 휘말리면 본 소송에 걸린 금액보다 소송 비용이 더 나와 영국의 <황폐한 집>에서의 잔다이스 상속 소송은 끝나버렸다. 이곳 프랑스인 <잃어버린 환상>에서 역시 원래 채무액인 3천 프랑은 소송 비용 등이 더해져 5천 프랑이 넘게 되고, 약간의 재산이나마 지키기 위해 아내인 에브와 재산분리 소송을 한 덕에 그 비용이 더해지고, 아버지 세샤르 역시 소송에 참가하여 총 부채가 1만 프랑이 넘어버린다.


예나 지금이나 법에 무심한 발명가가 교활한 상인과 법률인을 만나면 특허도 잃고 재산도 잃게 되는 건 진리인가 보다. 쿠앵테 형제는 다비드에게 어음 상환을 요청하고, 프티 클로는 기한 연장을 위해 모든 서류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는 곧 소송 비용을 계속 발생시켜 다비드를 파산시키고자 하는 음모였다. 그 결과가 1만 프랑이 넘는 부채인 것이다. 발자크는 자신이 채무자가 되어 파산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 곳곳에 풀어놓았다. 뤼시앵의 파산과 다비드의 소송은 모두 발자크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수한 문예지를 청산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골짜기의 백합> 저작권 때문에 긴 소송전에 휘말렸다. 거기다 발자크의 작품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던 베르데 출판사가 파산하여 채무자의 고통은 더 가중되었다. 뤼시앵과 다비드가 맞닥뜨린 고통은 다름아닌 발자크의 고통인 셈이었다.


현실에도 어음은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의료기기 업자들은 병원에 의료기기를 납품하고 어음을 받는데, 기간이 1년 짜리도 많아서 현금화 하려면 할인을 크게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안 그런 병원도 많겠지만, 내가 아는 어느 의료기기 상인은 병원이 하도 돈을 안 줘서 결국 파산했다. 그게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긴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더 나아졌을까나.


소송대리인 프티 클로는 마지막엔 다비드에게 나쁜 일들 중에 그나마 좋은 일을 해줬다. 유명한 충고도 해줬더랬다.


 "자! 나쁜 타협이 좋은 소송보다 낫다네......"(307쪽)


다비드는 뤼시앵과는 달리 잃어버린 것에, 가지지 못한 것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평온함을 사랑했고, 가족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가족과 함께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이 떠올랐다. 키티와 함께 신념대로 사는 레빈과 다비드는 닮았다 느꼈다. 이 고뇌하는 발명가는 현명한 아내인 에브와 함께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러기를!!


뤼시앵은 환상을 잃어버렸고, 다비드는 삶을 되찾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 같은 뤼시앵은 에브와 다비드에게 돈을 남기고 떠났다. 이제 이야기는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으로 넘어간다. 나는 그 전에 <고리오 영감>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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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환상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7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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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뤼시앵은 샤틀레의 계략으로 바르주통 부인과 함께 앙굴렘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정치 쪽으로 닳을대로 닳은 샤틀레는 이제 바르주통 부인을 손에 넣기 위해 두 사람을 이간질 하는데, 굳이 이간질을 하지 않아도 파리라는 곳은 서로가 서로를 촌스럽고 얼간이로 보이게 하는 마력을 가진 곳이었더랬다. 지방에서 온 그들은 때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고, 촌스러운 몸짓을 했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서로에게 실망했고 곧 화려하고 눈부신 다른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어쩌면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애초에 환상을 사랑했던 것 아니었을까.


배신이든 변심이든 어쨌든 다시 멋쟁이가 된 뤼시앵은 잘생긴 얼굴과 타고난 재치로 데스파르 부인을 사로잡았으나 샤틀레가 퍼트린 소문 때문에 파리의 사교계에서 쫓겨난다. 칙령이 없는 한 어머니 쪽 성을 따르지 못하게 된 뤼시앵은 뤼방프레가 아닌 약제사 샤르동의 아들이 되어 데스파르 부인과 바르주통 부인이 속한 곳에서 추방당했다. 가족이 마련해 준 돈을 헛되이 낭비한 뤼시앵은 한동안 자숙하며 시인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타락하고 만다.


책을 계속 읽다보면 이토록 허영에 가득 찬 한 인간에게 이렇게나 많은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준다는 게 놀라웠다. 잘 생겨서 그런가? 다비드도 그렇지만 파리에서 만난 다르테즈 역시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르테즈가 속한 세나클 회원들 역시 말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도 뤼시앵은 루스토를 따라갈 수 있었을까. 결국 그는 발자크가 클로드 비뇽의 입으로 말했던 "사상의 매음굴"인 언론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왕정 복고기 언론은 과격 왕당파 신문, 자유주의파 신문, 정부 여당지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구독료가 비싸서 구독자는 한정되어 있었는데 총 6만 5천 명 중에 5만 명이 자유주의 신문 구독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정부는 언론을 탄압했지만 신문의 영향력과 권력은 커졌고 언론은 결국 왕정복고 체제를 무너뜨렸다. 언론이 타락했다지만 무용하지는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곳에서 신성한 비평이나 정치적 신념,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 원하는 대로 기사를 작성했고 돈이 부르는 대로 기사를 받아적었다. 그리고 기이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뤼시앵은 날카로운 펜으로 바르주통 부인과 샤틀레를 모욕했고, 카뮈조의 정부인 코랄리는 그를 나락으로 이끈다. 뤼시앵은 분명 추악해보이는 그곳의 화려함과 자신의 펜이 주는 권력에 취해 돈을 물 쓰듯 쓰고 심지어 도박에까지 손을 대며 빚을 늘려갔다.


세나클 회원들은 그의 재능을 알았기에 그의 허영에 안타까워했다. 정말 뤼시앵에게는 성실하고 선한 친구들이 많았다. 인간의 훌륭한 본성을 믿고 실천하는 이들 말이다. 하지만 뤼시앵은 인내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는 친구들보다는 자신을 추켜세우고 화려한 곳에 데려다주고 짜릿한 한 방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더 좋아했다. 이토록 허영에 가득 찬 인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하고 어이없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배신이 난무하는 곳에서 뤼시앵은 상대에게 상처 받을 때마다, 어음이 거절당할 때마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눈물로 참회하고 후회하고 난리 부르스를 춘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은 걸 참는다. 뤼시앵은 끝까지 불행할 테니까. 이토록 만족을 모르고 허영을 쫓는 이가 만족하며 행복해할 수 있을까?


  천장의 등이 꺼졌다. 이제 극장 안에는 좌석 안내원들만 남아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작은 의자들을 치우고 박스석의 문을 닫았다. 한 자루의 양초가 꺼지듯 순식간에 꺼진 무대 앞 조명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막이 걷어 올려졌다. 천장에서 램프가 내려왔다. 소방수들이 잡역부들과 함께 순찰을 돌았다. 무대 위의 요정극, 예쁜 여자들로 가득했던 박스석, 눈부신 조명과 무대 장식과 새로운 의상의 화려한 마술, 그 뒤에 남은 것은 냉기와 공포와 어둠과 공허함이었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247쪽)


하나의 무대가 서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을 테고, 그 결과 무대는 절정을 맞이했을 테고, 무대가 끝난 뒤 텅 빈 극장은 적막하여 공허하기도 하지만 제 할 일을 마친 충만함도 있을 테다. 뤼시앵은 앞, 뒤는 보지 못하고 오로지 화려한 돌출의 구간만을 진짜로 느끼는 지도 모른다. 그는 더 큰 자극을 원하지만 그럴 능력은 없다. 메타인지가 안 되는 그는 모든 것에 행복회로를 돌린다. 그러다 실제로 불행이 눈 앞에 닥치면 울면서 참회한다. 그리고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데, 그러다가 또 누군가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아니, 왜 뤼시앵에게 자꾸 도움을 주는 거지? 잘 생겨서? 이 복장 터지는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건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침 주말이어서 <잃어버린 환상 2>를 하루만에 다 읽었더랬다. 세 권 중 2권은 약간 피카레스크 같은 느낌도 들고 다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뤼시앵은 다비드의 서명을 위조해서 돈을 마련하고, 도박을 해서 돈을 날리고 다시 누군가에게 돈을 얻어서 앙굴렘으로 향한다. 



바르주통 부인을 따라 파리로 간 지 18개월 정도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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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스 1 - 어느 순박한 영혼의 이야기 울림 3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마이너스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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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환상>이 매운맛이라면, <킵스> 1권은 순한맛이다. 


뉴 롬니의 작은 마을에서 장난감 가게를 하던 삼촌, 숙모와 살던 킵스는 삼촌의 가게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동네에서 친구처럼 지내던 시드 포닉의 여동생인 앤에게 반한 킵스는 아주 순한 소년답게 마음을 키워나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킵스는 키스를 하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그는 포스크톤의 상점으로 가야했다. 더 큰 가게에서 새로운 도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뉴 롬니와는 다른 큰 가게의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던 킵스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소년은 청년이 되어갔고, 풋사랑은 서서히 옅어져갔다. 떠나올 때 증표로 받은 반쪽짜리 6펜스 동전은 빛을 바랬을까.


킵스는 포크스톤의 상점에 적응하면서 사회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벼운 연애놀음도 하게 되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것을 하더라도 편안하지 않았다. 돌파구로 찾은 그림 수업은 그에게 뜻밖의 만남을 가져다주었는데, 킵스는 그림 선생인 헬렌을 마음에 품게 된다.


그러던 와중, 킵스는 부모의 실마리를 찾아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소설 전체에서 손에 꼽힐만큼 극적인 장면이어야 할 것 같지만, 이야기는 그냥 아주 원래 그렇게 정해져있기라도 한 마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어떻게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지만 과연 킵스의 인생에서 그 일이 기적일까. 훌륭한 조력자가 없을 때 나타난 커다란 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갈까.


다시 헬렌을 만난 킵스는 이제 부자가 되었다. 둘은 아마 결혼하겠지. 이제 킵스는 어떻게 될까. 2권은 매운맛으로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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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환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6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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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든 과거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든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뤼시앵과 다비드. 뤼시앵이란 남자는 재치가 번뜩이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지만 그 머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불타는 시인의 가슴을 가졌지만 그 불은 허영심을 태워버리진 못했다. 다비드는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원하는 바를 만들 능력은 있지만, 사업을 운영할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이용당할 지언정 남을 속이거나 분수에 넘치는 부를 원하지 않는 성실하고 착한 남자였다.


1권은 이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설명하고, 이들이 곧 맞이하게 될 운명을 예고한다. 구도시 앙굴렘에서 다비드의 아버지 세샤르 영감은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인쇄소를 물려받는다. 대혁명 이후 인쇄소 주인이 사망하자 혁명 정부는 인쇄소가 필요했기에 면허를 남발한 것이다. 세샤르 영감은 사업 수완이 좋았고 시대가 그를 도왔다. 그리고 이 수전노 같은 영감은 아들이 자신보다 잘났다는 이유로 혹은 뭐 자기만의 어떤 이유로 아들인 다비드를 등쳐 먹으려고 한다. 


뤼시앵의 아버지 샤르동은 군의관 출신 약제사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뤼방프레 가문의 아가씨를 구출해 도망친다. 그들은 결혼했고 뤼시앵과 에브를 낳았다. 귀족이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뤼방프레 아가씨는 이제 약제사의 아내가 되어 온갖 잡일을 한다. 


앙굴렘에 나타난 바르주통 부인은 뤼시앵을 흔든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도록 뤼시앵이 모계의 성을 따르라고 부추겼다. 잘생긴 얼굴에 매력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뤼시앵은 바르주통 부인에게 매료되고, 그들은 순식간에 질시의 대상이 되어 이상한 스캔들에 휘말려 앙굴렘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1권의 이야기이다. 역시 사람이 사는 이야기는 막장이 대세인 걸까. 그 시대나 지금 이 시대나 여러 인간 군상들이 있지만 우쭈쭈해주면 좋다고 잘난 척하다가 패가망신하고 주변인들까지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사람은 꼭 있다. 그렇게 뤼시앵은 여러 번 후회하고 울면서 참회하다가 바로 다시 도박 하러 가는 종류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뒷바라지하는 참한 가족들이 있기 마련이고.


복장 터지는 것 같아도 어쩜 그렇게 그 인간의 행태를 잘 따라가는지 감탄했다. 그리고 망할 것 같으면서도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그를 보며 신기했다. 예나 지금이나 잘생기면 아주 아주 유리한 법이다. 


이쯤되면 조금은 다른 의미지만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와 레빈이 그들이다. 뤼시앵과 다비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마음이 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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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6-30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기존의 기득권세력이 몰락하는 혁명의 시대에는 어김없이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들어가는 막장극이 펼쳐지는것 같더군요.

꼬마요정 2026-06-30 14:54   좋아요 0 | URL
그럴 때 아무래도 더 인간의 본성이 더 비극적으로 펼쳐질 것 같습니다. 여튼 막장이라 그런가 내용이 예상이 가지만 재미있게 읽었어요. 3권짜리인데 진짜 술술 넘어갑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