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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조문객 ㅣ 쏜살 문고
메리 셸리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평점 :
이 책은 아홉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 <변신>은 고딕서가에서 출판한 책인 <공포, 집, 여성>에도 실린 이야기이다. <변신>은 돌아온 탕아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과 <나귀 가죽>이나 <카사노바의 귀향> 같은 이야기가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였다. 탕아와 사악한 난장이의 계약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저러나 결국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약혼녀 줄리엣일텐데, 이런 18, 19세기 유럽 상황 너무 화가 났다.
표제작인 <강변의 조문객>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불이 나서 곧 가라앉을 배에서 클라리스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사랑하는 아버지를 두고 구조배에 올라야 했을까. 한없이 쌓이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 그녀는 숲 속에서 외로이 살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네빌은 그런 그녀에게 위안을 얻었고, 그녀가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싶었다. 누구의 간절함 때문일까. 서로의 소식은 결국 서로에게 닿았으니, 짧은 인연이나마 아름답게 갈무리 하기를. 조선시대 때 부모를 여읜 사대부가의 아들이 겹쳐졌는데, 조선시대가 '효'를 중시하였다면 이 이야기의 클라리스는 종교적 사랑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유프라시아> 역시 안타까웠다. 영국인인 발렌시가 그리스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가하기로 한 건 단순히 모험 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그리스 군대를 만나고 대장인 콘스탄틴을 만나 튀르크 군과 싸우면서 전투가 단순히 모험으로 치부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콘스탄틴이 튀르크 군에게 잃은 여동생인 유프라시아의 이야기는 너무 절망적이었다. 죽음 앞에서 듣는 이야기는 더 엄숙했으며 처절했다.
<폴란드인의 사랑>은 보다 정치적인 음모가 가득한 이야기였다. 러시아에게 조국을 강탈당한 폴란드인 라디슬라스는 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황녀인 대시코프 황녀를 만났고 황녀의 소개로 이달리에를 만났다. 이달리에는 우연히도 라디슬라스가 구해 준 마리에타의 언니였고, 마리에타를 괴롭히던 남자는 오빠인 조르조였다. 사랑에 빠진 라디슬라스와 이달리에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음모와 배신, 모략은 제법 흥미진진했다.
<순례자들>은 회한에 가득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분노에 휩싸여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그는 뒤늦게 딸을 되찾으려 하지만 이미 딸의 소식은 들을 수 없게 된 터였다. 그리고 찾아 온 순례자들. 그들의 정체는 그 남자로 하여금 신을 찬양하도록 했다. 모든 은원이 다 해소된 아름다운 결말의 이면에는 참회와 용서가 있었다.
<순례자들>이 회환에 빠진 나이 든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꿈>은 원수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어린 여자의 이야기이다.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종교전쟁(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왕위에 올랐을 때, 콩스탕스 가문과 가스파르 가문은 원수가 되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결국 가문에는 콩스탕스와 가스파르만이 남았는데, 콩스탕스는 자신의 연인이 원수라는 사실에 절망하여 수녀가 되기를 원했다. 앙리 4세는 자신의 기사인 가스파르가 콩스탕스와 행복해지길 바랐으므로 그녀를 설득하려 했고, 가스파르 역시 절망에 빠진 그녀를 다시 속세로 데려오고자 했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침상'이 모두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소녀> 역시 절망에 빠진 연인이 등장한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잃게 된 헨리와 로지나가 어떻게 망망대해에서 배의 길잡이가 되는 탑의 불빛을 만들어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탑과 '보이지 않는 소녀'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화자에 따르면 무조건 사실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악마의 눈>은 <순례자들>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과거의 원한이 드미트리를 '악마의 눈'이라고 불릴만큼 잔혹하게 만들었다. 잃어버린 딸을 찾지 못한 채 과거의 원한을 곱씹으며 파괴를 일삼는 그에게도 형제 같은 친우가 있었으니 카투스티우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역시 성격이 좋지는 못했으나 결국 그를 딸에게로 이끌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신비롭다고 할밖에.
<불멸하는 필멸의 존재>는 정말 웃픈 이야기이다. 멍청한 조수가 연금술사 스승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불사의 약 절반을 삼켜버렸으니 말이다. 스승은 죽기 직전에 한 번 더 그 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끝내 먹지 못했다. 윈지는 그 약이 사랑의 영약인 줄만 알았더랬다. 그래서 사랑하는 버사와 영원할 거라 믿었건만 늙지 않는 육체는 그 사랑마저 빛바래게 했으니... 그래서 그는 불멸할까, 필멸할까.
모든 이야기에는 화자가 있고, 그 화자는 대부분 남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여자의 이야기이며 아주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중첩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답게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도는 이야기들도 많다. 종교적 전설이나 설화 등을 적절히 활용했으며 결말이 행복하다고 하여 그 앞에 일어난 슬프고 끔찍한 일들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참회하고 용서한 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결말을 주었으니 만족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