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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평점 :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란 뜻이지만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길동전>의 율도국, 제주도의 이어도, 불교의 극락, 기독교의 에덴,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 중국의 무릉도원, 아더왕 신화의 아발론 뭐 이런 곳들이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다. 깨닫거나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는 결국 '없는 세계'라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겠다.
하지만 깨닫거나 신에게 선택 받아야 갈 수 있는 세계라서 없다기보다는 모두가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없는 세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와 당신이 원하는 유토피아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당신은 싫어할 수도 있을테고,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나는 버리고 싶어할 수도 있고, 나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지만 당신은 다른 이와 함께하고 싶을 수도 있을테니까. 모두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세계,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그래서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세계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획일화 시켜 그 세계 최고 권력자에게 맞추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정보라 작가의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억압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서도 어떻게든 원하고 바라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상처 받으면서 애도하고 아파하면서 위로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이 아무리 처절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세상이 바뀌었다면 위로가 될까. 어차피 '유토피아'는 없는 세상이라지만 나의 유토피아는 조금이나마 이루어질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인간이 정착한 행성, 그리고 떠나버린 행성. 정착해서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행성에서 인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인간들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각종 생산시설이나 편의시설, 인간을 돕던 로봇들, 교통수단들을 모두 버리고 떠났다. 인간들은 남겨진 기계들의 동력인 중앙 발전기를 분해해서 가져갔다. 태양광 패널을 가진 '나'는 짧게 뜨는 해를 보며 조금씩 충전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응급로봇을 구조했다. 기계들만 남은 그곳은 기계들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괴물'이 있고, 인간 시체를 흔들며 다른 기계들을 유인하는 살아있는 '건물'이 있었다. 사람을 뒤에 태웠던 나는 응급로봇을 뒤에 태우고 안정감을 느끼고, 응급로봇은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의 유토피아는 어때? 1부터 10까지" '나'는 충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보며 수치를 매긴다.
이 기계들은 만들어진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에 맞는 상황이면 안정감을 느꼈고, 동력을 얻으면 기뻐했다. '나'의 상황은 뒤에 내가 보호하거나 목적지에 데려다 줘야 할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것이고, 움직일 수 있도록 충전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워야 했다.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하지만 기계인 '나'는 목적을 뛰어넘었다. 상실을 겪었고 애도할 줄 알았다. 이제 '나'는 자유를 위해 안정적인 충전을 포기하고 달리고 응급로봇을 고치기 위해 달린다. 자유롭고 소중한 이를 위해 달리는 '나'의 유토피아의 수치는 얼마일까. 확률 계산을 하는 '나'의 생각 너머에 언뜻 비치는 것은 '희망'일까. <너의 유토피아>는 희망의 수치일까.
<영생불사연구소>는 직장 생활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영원히 이것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 역시.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집단에 있는 것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는 모습 역시 보여준다. 영원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갑갑하고 끔찍할 수도 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편안한 느낌 역시 공존할테다.
<여행의 끝>은 흥미진진한 좀비 스릴러물이다.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파견된 우주선에서 병자가 발생하자 지구는 통신을 끊었다. 어쩌면 지구 역시 전염병으로 인간은 멸종되고 없을지도 모른다. 우주선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나는 우주선에서 친해진 우주항공기술자인 그녀석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이 우주선과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욕구가 '식욕'일까 잠시 고민해봤다.
<아주 보통의 결혼>은 너무 슬픈 이야기였다. 연애에 도통 재주가 없는 선혁은 다니던 치과에서 본 지영에게 고백했고 결혼했다. 지영은 선혁 뿐 아니라 선혁의 가족에게도 곧잘 연락을 하며 다정했고 결혼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새벽에 누군가와 통화를하는 지영을 보게 된 선혁이 지영을 의심하면서 이야기는 반전된다. 지영의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뭐냐는 질문에 손이라고 답한 선혁이 '눈'이라고 대답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에서는 나 역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화장실 변기 뒤쪽을 못 볼것만 같다.
모습이 같으면 그 사람일까, 한 사람을 정의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오늘도 선혁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지영'과 함께 한다.
<One More Kiss, Dear>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물인터넷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삶이 모두 온라인 상에 노출된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잊혀지거나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의 어느 날 엘리베이터인 '나'는 5305호 거주자가 나를 만진 이후부터 그녀를 잊지 못했다. 기계를 잘 사용하지 않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지만 단 하나 그녀가 들었던 노래를 알게 된 '나'는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그 노래를 들려줬다. 그 노래에 담긴 사연은 무엇이며, 그녀가 그토록 잊혀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베이터의 인공지능은 어째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그녀를 만나다>는 변희수 하사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팬데믹 상황에서 항체를 만들고 힘겹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던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귓가에 말을 하며 침방울을 튀었다. 그리고 폭발이 있었다. 120살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는 이런 사고에 너무나 취약하였으니 나노봇이 대거 투입되어 겨우 살아났다. 하지만 여전히 소변줄을 꽂은 채로 로봇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을 가야 했고 머리 감기도 힘들었는데 그 바람에 귓가에 튄 범인의 침방울에서 DNA를 채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작은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나'가 젊었던 시절에 기계는 사람들을 죽였다. 얼마 전에도 SPC에서는 또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고 혼자 운행하던 지하철이 광고판 갈던 사람을 죽였고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죽었고 크레인이 무너져 죽고 그렇게 억울하게 죽는 일이 많았다. 사람 목숨값이 수치화되어 헐값처럼 매겨지던 시절을 살았던 '나'가 120살이 될 때까지도 이렇게 혐오가 폭발을 일으켜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게 참담했다. 하지만 팬클럽 회원들은 살아남았고, 그녀 역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해졌다. 그렇게 모두가 살아남아 원하는 대로 살면 좋겠다. 팬미팅에서 그런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나'의 유토피아일지도.
<Maria, Gratia Plena>는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공권력이 포함된 가정폭력은 그 자체로 공포다. 어디로 도망쳐도 따라와서 총을 겨눈다. '나'는 법에 정한 대로 범죄자이고 대상자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기존 범죄 사건의 해결과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범죄 사건의 예방을 위해서만 의식 스캔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의 의식을 스캔한다. 그녀는 약을 제조하고 대중에게 유포한 악질적인 약쟁이지만 약을 팔아 돈을 번다기엔 사업적이지 않았다. 그저 약에 취하는 것이 목표인지, 모두를 약에 취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고 그녀는 죽음에 가까워만 갔다.
결국 그녀가 원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해야 할 집과 가족이 끔찍한 공포로 변했을 때, 홀로 살아남은 그녀가 보고 싶어한 이는 누구일까. 가슴이 아팠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대상으로 한 폭력은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씨앗>은 마지막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30년 정도 전에 과학잡지에서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소설은 인간이 음식을 먹지 않고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여 살아가게 된 세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구에 빙하기가 닥쳐 모두 죽었다는 결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는데, <씨앗>은 다른 이야기였다. 절망적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탐욕과 거짓, 거대 자본에 먹힌 배양된 인간과 식물과 결합하여 살아남은 인간 중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씨앗을 품지 못하지만 거대자본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물과 씨앗을 널리 퍼트리는 식물 중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쪽은 어디일까. 어쩌면 인간 자체가 사라지는 게 지구를 위해서 더 나을 것도 같지만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은 지구도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다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또 다른 유토피아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