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각자의 믿음이 달라서 끔찍한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가 달라서, 이념이 달라서 등 말이다. 정말 역설적인 것은 그 모든 종교나 이념이 모두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전쟁이나 프랑스 혁명이나 볼셰비키 혁명 같은 것을 들여다보면, 종교는 사랑을 외치고 이념은 모두가 평등하고 잘 사는 세상을 외치는데 정작 그 이상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억압한다. 그것이 마치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절대적이고 선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만들거나 배척한다. 그렇게까지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 읽은 <바라바>와 <침묵>을 읽으면서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모두가 사람을 위함인데 어째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님에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종교적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됐다.
바라바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사면된 도적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진짜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준 여러 가지 기적인 다섯 마리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였다거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나병 환자를 치료하거나 등의 기적도 기적이겠지만 바라바가 겪은 기적은 비신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진짜 기적이라 여겨질 만한 기적이다.
바라바는 죽음에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수가 숨을 거둘 때 빛이 사라졌다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 기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삼일 뒤 예수가 부활할 거란 사실을 듣고 동굴에 찾아갔지만 실제로 승천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믿지 않았다.
바라바는 그 뒤로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쫓았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를 꺼렸다. 직접적인 은혜를 입은 그였으나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비난받을 일이었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만난 기독교인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나자 그를 달리 대했다. 저런 도적놈을 대신해서 십자가형을 받았다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가르침대로 끝까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를 위해서 사랑을 실천한 그분의 뜻보다는 스승을 잃었다는 슬픔이 더 컸기 때문일까.
바라바는 사형 선고를 받기 전까지 불행하게 살았다. 윤간으로 임신한 바라바의 엄마는 거리에서 바라바를 낳고 죽었고 거리를 전전하던 그는 결국 도적이 되었다. 예수는 그에게 삶의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지만 그는 그 삶의 의미를 몰랐다. 계속해서 자신 대신 죽은 그분을 따라다니고 생각하지만 '믿는다'는 행위를 해 본 적도 가르침 받아 본 적도 없어서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세속에 무관심했고 산대로 살았으나 늘 부채감을 느꼈다. 그는 결국 도적 무리의 두목인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 물론 둘 다 서로가 부자지간이란 사실을 몰랐다. 그는 다시 붙잡혀 광산에서 노동을 하다가 땅 위로 나왔다. 그는 계속 믿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가 만나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동참하지 못했다. 바라바는 방황했고 고뇌했다.
바라바가 받아들인 신은 누구일까. 마지막 순간, 어둠을 향해 "당신께 내 영혼을 드립니다."라고 했는데 바라바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그토록 고뇌하고 번민하던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믿음은 충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토록 사랑을 외쳤는데 바라바는 그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일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세속의 삶이 모두 고통이니 그분의 세상이 재림하려면 세속을 정화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세상이 이루어질 것처럼 보인다면 바라바처럼 행동할지도.
바라바처럼 죽음의 순간 기적을 경험한 또 한 명의 유명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이다. 그는 이후 신을 경배하며 살았다. 그와 바라바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 역시 믿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17세기 일본, 기독교는 박해 받았다. 일본으로 선교를 떠났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청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인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페, 마르타 신부는 상황을 확인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포르투갈 상선 정박이 금지되자 병든 마르타 신부를 제외한 두 사람의 신부는 배교자 기치지로를 만났고 몰래 일본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무장한 로드리고 신부 앞에 놓인 시련은 어떤 것인가.
선교란 무엇일까. 나는 다른 것보다 페레이라 신부의 말 중에 일본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자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다르다는 말이 충격이었다. 유럽인이 믿는 그리스도와 일본인이 믿는 그리스도가 다른가. 만약 일본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서로를 사랑하며 산다면, 그렇다해도 믿는 신이 다를까. 솔직히 유럽인이든 일본인이든 신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일본인들이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들을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다 한들, 제단을 쌓고 성물을 보관하고 싶어한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로드리고 신부가 갖고 있는 십자가는 우상이 아니고,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성물은 우상이 아닌가 말이다. 진짜 믿음은 신의 말씀을 이해하고 따르려는 노력에 있는 건 아닐까.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나 일본인들이나 다를 게 무얼까.
게다가 당시 일본에는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위정자들의 가혹한 수탈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그런 그들에게 천국이란 곳은 얼마나 달콤하고 탐나는 곳일까. 죽었으니 고통이 끝났을 거라 부럽다고 중얼거리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선교가 실패했다는 페레이라 신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야쓰 막부는, 이노우에는 어째서 그렇게 선교를 막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했을까.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거라 생각한다지만 그렇게 잔인하고 가혹해야 했을까.
하나의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는 그 신의 권위를 떨어트리거나 신의 사제들을 투항시키면 신도들이 떠나기에 존속하기 어려울테다. 그렇기에 이노우에는 그런 방법으로 겉으로나마 배교를 하도록 종용했다. 자신들이 추앙하는 성모를 그린 그림을 발로 밟고 그림에 침을 뱉고나면 어찌 다시 우러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문은 견뎌도 사랑하거나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문은 견디지 못한다. 이노우에의 잔인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죄를 떠넘기는 것. 고문 방법도 너무나 잔인하였는데 읽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이 떠올라서 치가 떨렸다.
기치지로는 본인이 당하는 고문도 못 견디는 약한 자이기는 하지만 신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기치지로와 바라바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어쩌면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손 내밀어 줄 사람들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래서 나는 로드리고가 그토록 외치던 그리스도는 왜 이 순간에도 침묵하고 있냐는 물음이 의아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이들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할테니까. 그러니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을까. 로드리고는 자신이나 기독교 신자들이 '구멍 매달기' 같은 고문을 당할 때 이노우에나 관리들에게 벼락이라도 내리치길 바랐던 건가. 로드리고가 바라야 하는 건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선교하는 것이지, 믿지 않는다고 심판을 받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매달리는 벌을 받아들였을까. 그냥 저 헤롯왕이나 관리들을 돌로 만들어버리면 쉬운데 말이다.
'서로를 사랑하라.' 인간이 가장 하지 못할 일이 아닐까. 로드리고는 이노우에를 미워할까 기치지로를 미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