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실재라는 이성의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고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기에 이르렀을 때, 이성은 곧 정신이다.  - P17

이와는 반대로 불행한 자기의식은 스스로가 절대적임을 자처하는 자기확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자기확신 속에서모든 가치가 상실되고 나아가서는 자기에 관한 지도 상실되었다는 의식, 즉 실체의 상실인 동시에 자기의 상실에 대한 의식이다. 결국 이의식이 드러내는 것은 "신은 죽었다" (Gott gestorben ist)는 처절한 표현에 담긴 비통함이다.
- P302

정신이 이렇듯 갖가지 단계를 자체 내에 필연적으로 간직하는 , 그의 전체는 단일한 자기의식에 대립하는 것으로 직관된다. 그리하여 전체는 여러 단계로 구별된 가운데 모름지기 전체는 직관된 순수한 개념, 즉 시간이나  본원적인 내용상의 구별로 나타난다. 실체는 주체임으로하여 그 자신이 본래 정신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드러내 보여만 할 내적인 필연성을 안고 있다. 이를 대상화하여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에 실체의  자기복귀 또는 실체가 자기로 생성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이 본래의 제 모습으로, 즉 세계정신으로서 완성되기 이전에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 정신으로서  완성될 수는 없다. 이렇게 되면 종교의 내용이  시간적으로 학문보다 앞서서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언명하는 것이 되지만, 정신 그 자체에 관한 정신의 참다운 지로는 오직 학문이 있을 뿐이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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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1 한길그레이트북스 63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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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현존하는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학문적 체계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이 학문의 형식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 말하자면 철학의 진의(眞義)라고 할 지에 대한 사랑(愛知)이라는 이름을 떨쳐버리고 현실적인 지를 목표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지향하는 것이다. 지가 학문으로 승화되어야만 할 내적 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깃들어 있는데,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오직 철학 그 자체의 서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38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은 인간의 의식에서 출발하여 진(眞)에 이르는 '의식의 여행'을 다룬 책이다. <정신현상학 1>은 그 중에서도 의식이 자기의식, 자기확신, 이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다룬 책이며, <정신현상학 2>에서는 정신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이번 리뷰에서는 <정신현상학 1>의 전체적인 흐름을 대략적으로나마 따라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신현상학>의 출발은 '의식(意識)이다. 의식에서 학(學)으로까지 이어지는 정신현상학의 구조는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성'이라는 의식의 본질때문에 가능하다. '참됨'것에 대한 의식의 변증법적인 운동은 이후 '운동'과 '생성'을 가져오게 되며, 이로부터 의식은 다음 단계인 '자기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의식 그 자체가 '지'라는 성질을 지니며 동시에 또 하나의 타자가 의식에 대해서 있으면서 이와 더불어 또한 이 관계의 바깥에 의식이 그 자체로도 있게 되는데, 이것이 곧 진리의 요소이다. 따라서 의식이 자기 안에 깃들어 있는 본체 또는 진리로 간주하는 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척도로서, 이는 의식이 자기의 지를 재기위하여 스스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대상의 본질 또는 본체를 개념이라 부르고 대상을 타자에 대해서 있는 대상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때 진위를 음미하는 일은 대상이 개념과 일치하는가 어떤가를 따져보는 일이 있음은 분명하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25

의식이 지와 대상의 양면에서 펼쳐나가는 이상과 같은 변증법적 운동이야말로 이로부터 새롭고 참다운 대상이 의식에 생겨나는 한 다름 아닌 '경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동을 경험이라고 할 때 지금 바로 논의된 의식의 과정 속에서 다음에 서술하려는 학문적 성격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서 특히 강조해둘 한 가지가 있다. 즉 의식은 무엇인가(Etwas)를 아는데, 이때의 대상이 본질 또는 본체라는 점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27

의식은 정신이 존재하는 대상과 관계할 때 현상형태로서 '자아와 대상과의 상호관계'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본질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 자아가 아닌 대상이 본체이기에 내부는 끊임없는 경험 속에서 무너져간다. 새롭게 성립되는 통일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정신현상학의 큰 구조다. 그 출발선상에서 의식은 감각적 확신을 통해 대상, 자아, 양자의 관계를 규명하며, 이로부터 '이것'이란 '보편적인 것으로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각'에서는 '이것'을 넘어서 '보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

부정을 통해 생겨난 이렇듯 단일한 존재,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특정한 것이면서 또한 못지않게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그런 단일한 존재를 우리는 보편적 존재(ein Allgemeines)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결국 보편적인 존재야말로 참으로 감각적 확신의 진리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37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이란 바로 이 감각적 확신의 운동과 경험의 단순한 역사(歷史)이며 또한 감각적 확신 자체가 바로 이 역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인 의식은 확산의 진리를 이루는 이 결론을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그의 진리를 경험은 하면서도 그때마다 그의 진리를 망각하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44

그리고, '지각'에서는 하나가 되려는 통일성으로 사물 자체의 성질인 개별성과 보편성은 하나로 합일되면서, '사물의 내적인 것'은 '개념'으로 새롭게 정립된다. 의식은 운동을 통해 감각적 확신과 지각을 거쳐 오성(지성)에 이르게 된다.

직접적 확신이 진리를 내 것으로 장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진리가 보편적인 것인데도 의식은 개별물로서 '이것'을 포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지각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보편성이 지각의 원리가 되었으므로 그 속에 직접 구별되어 나타나는 두 요소인 자아(Ich)와 대상(Gegenstand)도 또한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원리는 우리에게 의식적으로 발생한 것이므로 지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방식은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은 표면상의 수용이 아니라 필연성을 따른 수용방식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49

모든 것은 예외 없이 하나인 까닭에, 사물은 하나가 됨으로 해서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특정한 성질을 지님으로써 타자를 배제한다고 해야만 하겠다. 그렇다면 사물은 저마다 예외 없이 특정한 성질의 완벽한 자존적 존재가 되는 까닭에, 오직 성질을 지님으로써만 타자로부터도 구별된다. 그런데 또 이렇듯 성질이 사물 그 자체의 성질 또는 사물에 안겨져 있는 성질이라고 한다면 사물은 복수의 성질을 지니는 것이 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59

개별과 보편으로 대립되는 양극은 단지 나란히 병존해 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양자의 공통소를 이루는 독자존재는 대립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보면 독자존재라고는 할 수가 없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66

사물은 다른 것과 구별되고 분별되는데, 이같은 분별의 능력이 바로 오성(悟性 )이다. 사물을 다른 것과의 대립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오성에서의 사유는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다. 고정된 규정성과 다른 규정성에 대한 구별. 이로부터 우리는 '힘'을 만나게 된다. 오성은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파악하려고 하며, 힘은 이를 위해 다른 한 편을 고정시키지만, 이러한 힘의 작용은 변증법적인 운동에 의해 파괴되고, 주관적인 '지성' 또한 무너진다. 이제 의식은 '자기확신'으로 넘어간다.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에서 듣고 보고한다는 것이 의식에게 덧없는 것이 되었는데, 그 다음 지각의 경험을 거쳐나가는 와중에 무조건적 보편자 속에(im unbedingt Allgemeinen) 통합된 갖가지 사상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조건적 보편자 역시 여기서 또한 독자존재라는 한쪽 극에 자리잡은 정지해 있는 단순한 본질로 출현할 수 밖에 없고 여기에 반대극을 이루는 비본질체가 대립하게 된다.... 이제 의식의 참다운 대상은 무조건적 보편자가 되어 있지만 이것이 의식의 대상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고, 의식은 아직 그의 진상을 개념 그 자체로 파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69

지각 다음에 오는 오성은 물론 자기의 그릇됨과 대상의 비진리를 극복하고는 있지만 이때 오성에 생겨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있는 진리의 개념이다(p170)... 독자존재로 정립되어 있는 물질이 곧바로 통일되고 이 통일이 다시금 자기전개를 이루면서 이렇게 전개된 것이 또다시 하나로 마무리되는 교호적인 운동이 '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때 독립해 있는 물질이 밖을 향하여 존재를 드러내는 운동이 '힘의 발현'이고, 밖으로의 전개를 멈추고 발현된 상태로부터 자체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 '떠밀려들어간 힘' 또는 '본래적인 힘'이다. 그러한 첫째, 자체 내로 떠밀려들어간 힘은 발현되어야만 하고, 둘째, 발현된 힘은 자기 내면에서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응집되어 다시금 밖으로 발현된다. 힘의 두 요소가 이렇듯 빈틈없이 통일되어 있는 마당에 이들 두 요소를 서로 구별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의 작용은 힘의 개념을 소유하는 오성의 몫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73

보편과 개별의 대립을 말끔히 벗어난 절대적 보편자가 사물의 내면적 진리로서 오성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여기에 비로소 감각적 현상계를 넘어서는 하나의 초감각적인 진리의 세계, 즉 덧없이 사라져가는 차안의 세계를 넘어선 항구적인 피안의 세계가 개시(開示)된다. 이것이 물 자체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만, 갓 드러났을 뿐인 지금 단계에서는 그것이 겨우 불완전한 이성의 모습을 한, 진리의 골격만을 나타내는 순수한 장으로 정립되어 있을 뿐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181

헤겔에게 있어 '확신'은 의식에게, '진리'는 대상'에게 놓인다. 이러한 불일치는 '자기확신'에서 극복된다. 의식과 대상, 자아와 타자의 구분은 타자가 바로 자아라는 운동을 통해 '자기의식'으로 통일된다. 이러한 '자기의식'에 대해 등장하는 것이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헤겔은 이들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로 해석한다. 자립적인 의식인 '주인'과 비자립적인 '노예'. 주인은 노예를 예속하고, 일방적인 '인정'을 통해 자신을 확신하지만, 그 결과 주인은 노예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의존없이 존재할 수 없는 주인의 상황. 이것이 주인의 자립성이다. 반면, 노예는 스스로 산출하는 지속적인 것에서 자신을 직관하며 자립적인 존재임을 자각한다. 주인의 의존적인 상황가 노예의 자각. 이제 자기확신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바로 이성(理性)이다.

대상이 타자에 대해서 있는 것을 '대상'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그 자체로 있는 '즉자존재'(das Ansichsein)와 타자에 대해 서 있는 '대타존재'(das fur ein anderes Sein)는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그 자체로 있는 것'은 의식이며, 마찬가지로 그것 자체에 맞서 있는 '타자존재'도 역시 의식이기 때문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210

이제부터 전개되는 의식의 경험은 세계의 절대적 실체인 정신이란 어던 것인가를 밝혀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각기 상이한 자기의식이 완전한 자유와 자립성을 지니고 대립해 있으면서도 여기에 통일이 형성되어 있다는 데 대한 경험이며, '나'가 '우리'이고 '우리'가 '나' (Ich, das Wir, und Wir, das Ich)라고 하는 그러한 경험이다. 의식은 정신의 개념과 더불어 대두되어 있는 자기의식에 이르러서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즉 현란하게 펼쳐지는 감각적 차안과 공허한 암야에 잠겨 있는 초감각적 피안이라는 이원적인 세계를 벗어나 대낮 속에 모습을 드러낸 정신의 현재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220

이로 인하여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에게는 모두가 본질적이다...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인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der Herr)이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228

개별 의지가 부정되는 데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나타나는 공동의 의지는 불행한 의식의 반대극에 있는 의지로서, 이것이 자기의 밖에 있는 것인 이상 의식 자체가 그의 의지를 산출해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으며 그것은 중간 위치에서 매개하는 성직자의 충언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개별자의 의지가 본래의 공동의지로 고양되는 것은 자각되지만, 의식 그 자체가 본래의 의지 그대로를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262

그러나 의식 자체로 보면 그의 현실적인 행위는 여전히 초라한 행위일 뿐이고 그가 향유한다는 것도 고통이랄 수밖에 없으니, 그 초라함과 고통을 벗어난 긍정적인 의미가 되살아나는 데는 피안의 힘을 기다리는 길밖에는 없다. 하지만 피안이 아닌 현실의 대상에서 개별 의식으로서의 스스로의 행위와 존재가 바로 행위 자체이며 존재 자체가 될 때, 개별 의식에게는 이성의 표상이 떠올라온다. 이성이란 개별 의식이면서도 절대적으로 그 자체가 곧 온갖 실재라는 의식의 확식인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263

헤겔의 이성은 역사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결부되어 역사와 현실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제도를 산출하는 필연의 논리를 의미한다. 이와 함께 이성은 필연성을 파악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주관적인 규정으로 인간의 사상 또한 의미한다. 이성은 주관과 객관, 특수와 보편, 하나와 다양한 것이 모순, 대립하는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성의 과제는 지성(의 힘)에 의해 고정된 정태적 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동적 규칙(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이성은 실재성을 확신한다. 이성은 이성본능(Vernunftsinstinkt)을 갖고 있기에 세계가 자신이라는 확신에 시련을 부여하고 본능을 실재의 인식으로까지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성은 정신(精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의식은 세계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를 욕망이나 가공의 대상으로 삼은 채 거기에서 빠져나와 자체 내로 복귀하고는 자기 나름으로 세계의 존재를 말살하는 동시에 세계를 본질로 여기는 의식이나 세계를 무의미하다고 보는 그런 의식마저도 말살하였다. 그러나 진리로 섬겨져 오던 묘가 사라지고 의식이 몸담아온 현실을 말살하려는 시도가 말살되면서 개별 의식 그 자체가 절대적 존재임이 의식되기에 이른 이상, 이제 세계는 의식이 삼투된 새로운 현실세계로서 재발견되고 이전에는 그의 소멸에만 관심이 쏠렸던 세계가 존속상태에서도 관심의 표적이 된다. 왜냐하면 세계가 존립해 있다는 것이 곧 의식이 그의 진리를 현재 손에 넣고 있다는 것에 다름아닐뿐더러 의식은 이제 세계 속에 바로 이성으로서의 자기가 경험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이란 곧 "온갖 실재이다"라는 의식의 확신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269

지금 이렇게 사물이라고 얘기되는 것은 실은 자기의식으로서, 곧 자아와 존재를 통일한 범주(die Einheit des Ich und des Seins, die Kategorie)이다. 의식의 대상이 바로 이렇게 규정될 때 의식은 이성을 지닌다. 의식과 자기의식은 본래 그 자체가 이성이지만, 대상 스스로가 범주로 규정하게 되는 의식에 대해서만 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이성을 갖는 것과 이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는 구별되어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365

자유로운 민족 속에는 이성이 참으로 실현되어 있다. 이성이 현재에 살아 있는 정신이 됨으로써 개인은 자기의 본분을, 즉 자기의 보편적인 면과 개별적인 면을 분명히 언표하며 이를 실체로서 목전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도 있는 것이다.... 이성은 이 행복한 상태를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민족의 생활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인 인륜성을 바탕으로 그 토대 위에 존재하는 세계이므로 이런 상태에서라면 보편정신은 개별적인 정신으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373

<정신현상학 1>에서는 이와 같이 의식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서술되지만, 리뷰에 서술된 내용은 극히 표면적인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정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동적인 역동성을 도입한 <정신현상학>은 마치 만화책을 보다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충격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또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와의 접점을, 내적 모순과 붕괴의 효과와 관련해서는 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와 접점을 갖는 헤겔의 논리는 분명 독자들에게 많은 흥미를 안겨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다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넘기도록 하자. <정신현상학 2>에서는 안티고네와 나폴레옹이 등장하며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목적이 아닌 그의 전개과정 속에 담겨 있으니, 실은 결론이 아니라 이 결론과 그의 생성과정을 합쳐놓은 것이 현실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 그 자체는 뚜렷한 표적이 없는 생명 없는 일반적인 것이고 목적을 향한 충동이라는 것 역시 현실성이 결여된 한낱 의욕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이렇듯 거두절미된 벌거숭이 결론이란 거기서 아무런 충동도 솟아날 수 없는 시체나 다름없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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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24 1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의미에서 자기확신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겠네요^^ 계속 의식과 대상사이의 전개과정에서 잠시 머무는지점 !

겨울호랑이 2022-02-24 12:05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그레이스님께서는 이미 <정신현상학>의 모든 내용을 다 알고 계시는군요! ^^:)

그레이스 2022-02-24 12:07   좋아요 1 | URL
다 안다기보다
조금 이해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2-24 12:27   좋아요 1 | URL
헤겔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그저 ‘조금 이해했다‘가 우리같은 평범한 이들의 보편성인 것 같아요.^^:)
 
윤리형이상학 대우고전총서 31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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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의 의무와의 관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 목적에서 출발해서 의무에 맞는 행위에 맞는 행위들의 준칙을 찾아내거나, 거꾸로, 이런 준칙에서 시작해서, 동시에 의무이기도 한 목적을 찾아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 법이론은 첫 번째의 길을 간다. 그의 행위에 대해 어떤 목적을 세우고자 하는가는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의 준칙은 선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윤리학은 반대의 길을 취한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덕이론 서론> (A7) , p461

자기 약속을 지키는 것은 덕의무가 아니라, 그것의 이행이 강제될 수 있는 법의무이다. 그러나 아무런 강제도 심려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도 역시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덕 있는 [유덕한] 행위(덕의 증명)이다. 그러므로 법이론[법학]과 덕이론[윤리학]은 그들 사이의 상이한 의무들로 인하여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법칙과 이 동기를 결합시키느냐 아니면 저 동기를 결합시키느냐하는 법칙수립의 상이함으로 인해 구별되는 것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윤리 형이상학 서설>(B17), p135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윤리형이상학 Die Metaphysik der Sitten 1: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Rechtslehre>은 법(法)과 덕(德)의 형이상학 원리를 설명한 두 권의 내용을 담고 있다. 칸트는 '목적'과 '의무'의 관계를 서로 다른 방향점에서 출발하여 논증하는 방식으로 '법'과 '도덕'의 이론을 고찰해나간다. 이는 마치 <순수이성비판>에서 (사변적인) 순수 이성의 월권 행위에 대해 비판하며 선험적인 사항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반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경험적인) 실천이성의 월권 행위에 대한 비판이 다뤄지며, 인식과 경험의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이성 고찰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연상시킨다. <윤리형이상학>의 두 권의 책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는 이처럼 다른 방향을 통해 '목적'과 '의무'에 대해 논한다.

모든 의무는 법의무(法義務)들, 다시 말해 그에 대한 외적 법칙수립이 가능한 그런 의무이거나 덕의무(德義務 乃至 倫理學的 義務)들, 즉 그에 대한 외적 법칙수립이 불가능한 그런 의무이다. - 그러나 후자는, 그것이 (또는 그것을 갖는 것이) 동시에 의무인 목적에 상관하기 때문에 어떤 외적 법칙수립에도 종속할 수 없는 것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법이론 서론> (V239), p164

목적이란 한 대상의 표상에 의해 의사가 이 대상을 산출하는 행위를 하도록 규정되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사의 대상이다... 감성적 충동들에서 오는 목적에 대립될 수 있는 어떤 목적을 갖도록 구속되어 있다는 것, 이 사실이 그 자체로서 의무인 목적이라는 개념일 터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 대한 이론은 법의 이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법칙들에 따른 자기강제를 자기 개념 안에 동반하는 윤리학에 속하는 것이겠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덕이론 서론> (A5) , p459

칸트는 '의무-목적'의 관계를 통해 '법'과 '도덕'이론을 세우려하지만, '의무-목적'의 결합에 대한 고찰은 많은 부분이 '덕이론'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법이 '어떤 이의 의사가 자유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이의 의사와 합일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 <법이론 서론> (AB33)'로서 강제하는 권한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은 강제력을 가진 최소한의 규정으로 이의 준수에 대해서는 '의무-목적'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때문에 사법에서는 물권(物權)과 점유(占有)에 대한 논의가, 공법과 국가법에서는 법 체계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뤄진다.

법이란 그 아래서 어떤 이의 의사가 자유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이의 의사와 합일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이다.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는 법적이다/권리가 있다/정당하다/옳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가, 또는 일반적으로 나의 상태가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을 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나에게 불법/부당함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해(저항)는 보편적 법칙등에 따라 자유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법이론 서론> (B34 Vi231 A34), p151

나의 의사의 외적 대상으로는 오직 셋만이 있을 수 있다. 1) 나의 밖에 있는 (물체적) 물건; 2) 특정한 행동(給付)을 하려는 타인의 의사; 3) 나와의 관계에서 타인의 상태. 이것들은 자유의 법칙들에 따르는 나와 외적 대상들 사이의 실체, 원인성, 상호성의 범주에 의한 것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법이론 서론> (AB59), p174

나의 밖의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갖는 방식은 주체의 의지가 저 대상과, 공간 시간상의 그것과의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예지적 점유라는 개념에 따라서, 순전히 - 법적으로 결합함이다. - 지상의 한 장소는 내가 내 몸으로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인 나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 장소에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면, 그때에만 그것은 나의 외적 권리에 관계한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법이론> (VI254 A70 B70) , p184

칸트에게 법은 행위를 의무에 맞게 규제하는 것이며, 자유의 외면과 관계하는 최소한의 것이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상호 간의 자유를 타당한 범위 내에서 제한하는 것. 공동체 유지를 위한 외적 강제력을 부여받은 것이 '법'이라면, 이러한 법이 지향하는 바는 '시민적 상태(市民的 狀態)'다. 칸트는 각자 자신의 생각에 따르는 '자연상태(自然狀態)'에서 벗어나 선험적으로 필연적인 '근원적 계약(contractus originarius)'에 스스로 복종하는 '시민적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으며, (민족) 국가 내의 시민적 상태를 국제법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칸트의 다른 저작 <영원한 평화>는 '시민적 상태'에 이른 국가들 상호간의 긴밀한 관계가 국제적으로 '영원한 평화'에 있음을 보여주며, 법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봤을 때 그 내용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법적 상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일반적 공포를 필요로 하는 법칙[법률]들의 총체가 공법이다. - 그러므로 공법은 한 국민, 다시 말해 다수의 인간들을 위한, 또는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법칙[법률]들의 체계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교호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법적인 것을 분유하기 위해서 그들을 합일시키는 의지 아래에서의 법적 상태, 즉 하나의 [헌정] 체제/헌법(憲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상호 관계 속에 있는 국민 중의 개인들의 이러한 상태는 시민적 상태(市民的 狀態)라고 일컬어지며, 그 개인들의 전체는 그 자신들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국가(國家)라고 일컬어진다. 국가는 법적 상태에 있고자 하는 모든 이의 공동의 이해관심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 형식으로 인하여 공동체(廣義의 共同體/共和國)라고 불리며, 다른 국민들과의 관계에서는 지배력(支配力)이라고 단적으로 일컬어진다. 이것은 또한 상속된 통합체이기도 해서 민족(民族)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래서 공법의 보편적 개념 아래에서 국가법뿐만 아니라 국제법(國際法/萬民法)도 생각할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면(地面)은 한계 없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둘러싸는 [폐쇄적인] 평면이기 때문에, 이 둘을 합하여 제민족국가법(萬民法) 내시 세계시민법(世界人法)의 이념으로 불가피하게 이끈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법이론>(B192 A162) , p263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의무와 목적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칸트에게 '도덕'은 강제적인 것이다. 순수이성의 강제에 대한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이 행동으로 일어났을 때 그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며, '동시에 의무인 목적'들만이 오직 '도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자연의 충동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의무수행의 장해물들 그리고 (때로는 강력한) 반항하는 힘들을 함유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런 것들과 맞서 싸우고, 이성을 통해 비리소 장래에가 아니라 바로 지금 (동시에 사상적으로) 그것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인간은, 인간이 행해야만 한다고 법칙이 무조건적으로 명령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하나의 강력하되 부정한 적에 저할할 수 있는 능력과 숙고된 결의가 용기(勇氣)이며, 우리 안의 윤리적 마음씨의 적과 관련해서는 덕(德)이다. 그러므로 외적 자유가 아니라 내적 자유를 법칙 아래에 두는 편(篇)의 일반 의무이론이 덕이론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덕이론 서론> (A4) , p459

의무개념은 그 자체로서 이미 법칙에 의한 자유의사의 강요(강제)에 대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강제는 외적 강제 또는 자기강제일 수가 있다. 도덕 명령은 그것의 정언적 단언(무조건적인 당위)을 통해 이 강제를,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자들 일반 - 그 가운데는 가령 신성한 존재자들도 있을 수 있겠는데 - 에게가 아니라, 이성적 자연존재자인 인간들에게만 상관되는 이 강제를 고지한다... 그것을 내키지 않아 하면서/마지못해한다. 바로 이 점에 본래 강제의 본질이 있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덕이론 서론> (A3) , p457

인간의[적] 의사는 그에 반해 충동에 의해 촉발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규정되지는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자체로 (이성의 획득된 숙련/습성없이) 순수하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순수한 의지에 의한 행위들로 규정될 수 있다. 의사의 자유란 저러한 감성적 충동에 의한 의사 규정의 독립성이다. 이것이 자유의 소극적 개념이다. 적극적 개념으로,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순수 이성이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순수 이성이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임은 다름 아니라 각 행위의 준칙을 그 준칙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적합하게 하는 그 조건 아래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윤리 형이상학 서설> (AB6 VI214), p124

강제에 대한 자발적인(자유롭게) 복종이자, 의무인 동시에 목적인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 칸트는 이에 대해 '자신의 완전함(성)'과 '남의 행복'을 든다.(이들의 역易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의 완전함은 모든 의무 일반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지'개발이 될 것이며, 남의 행복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의무가 여기에 해당된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보편법칙에 따르려는 후천적인 노력과 함께 자신의 주변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 이것이 칸트의 덕이론의 체계를 이룬다.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행위가 단지 객관적으로 실천법칙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어야 한다...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행위를 통해 달성해야 할 의무에서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는 준칙에서 갖는다. 그러므로 도덕적 가치는 행동의 대상의 실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의 대상 일체를 고려함 없이 행위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의지의 원리'에 달려 있는 것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덕이론 해제> , p402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은 이처럼 의무-목적의 도식을 바탕으로 준칙과 목적의 관계를 밝혀낸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보편적인 법칙에 대해 자신의 내적 규칙인 준칙을 자발적으로 일치시키는 '자신의 완전함'을 위한 노력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 이것이 도덕적인 사회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법칙과 일치할 수 있는 준칙의 기준은 <실천이성비판>에서 끌어낸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또는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이 될 것이다. 이처럼 '덕'은 준칙을 법칙에 합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도덕적인 개인들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강제력을 가진 최소한의 규정인 법으로, 이를 통해 공동체는 '자연 상태'에서 국가의 '시민적 상태'로 갈 수 있게 되는 조건을 갖추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적으로 '영원한 평화'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실천이성비판>, <윤리형이상학>, <영원한 평화>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칸트의 윤리철학이 후대에 미친 영향이 큰 만큼 이에 대한 비판점도 적지 않지만, 이번 리뷰에서는 <윤리형이사항학>의 전체 얼개를 대강 훑어보는 것으로 이만 줄이도록 하고, 비판점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퍼에서 다른 이론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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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2-15 2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와 같은 주제의 책 리뷰 남기셨습니다. ^^
이런 우연의 일치, 반갑습니다. ㅎㅎ
전 절대 앞으로 칸트 원전은 못 읽어볼 것 같습니다.
넘 어렵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2-15 20:4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오늘 북다이제스터님 글을 읽고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칸트를 못 읽으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칸트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셔서 안 읽으시는 거 다 압니다.ㅋㅋ 아무래도 선거 전까지는 여러 다른 책에 대해 정리하겠지만, 이후에는 전에 말씀드렸던 흄에 대한 정리도 시작할 계획입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만족하시기는 어렵겠지만, 부족함을 채워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2-02-15 20:57   좋아요 1 | URL
제가 칸트 싫어하는 거 넘 티 낸 것 같습니다. ㅋㅋ 요즘 개인적으로 제가 젤 미워하는 사람이 칸트라서 그런 거 같습니다. ㅎㅎ 칸트가 없었다면 세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조차 들지만, 아마 칸트가 없었더라도 자본주의가 자신 사상에 어울리는 다른 철학자를 또 발굴하여 끌여들었을 거 같습니다. ㅠㅠ
흄은 살살 다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요즘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라서요.^^

겨울호랑이 2022-02-15 21:04   좋아요 1 | URL
에고, 제가 흄을 제대로 이해할 지가 걱정입니다. 제가 오독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그가 남긴 세 권의 저서 <오성에 관하여> <도덕에 관하여> <장념에 관하여>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 대응되는 저서인데, 이들간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섣부르게 칸트와 비교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여러 차례 읽고 난 후에 리뷰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다이제스터님께 혼날 듯 싶네요^^:)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소유자로서 토지의 독점적인 이용을 위해 대를 이어가면서 (무한히)  일정한  법규들에 따라 전승해 갈 수 있는 국가내의 어떤 단체도, 어떤 신분이나 교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언제든 그 법규들을 폐기할 수 있다. 다만 생존해 있는 후손들에게 보상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말이다. (개개의, 특히 명예로운, 인격들의 단체 내지 한낱 계층으로서)  기사단, 교회라고 부르는 성직자 단체는 그들이 혜택받고 있는 이러한 특권을 통해 결코 승계자들에게 이전할 수 있는 토지의 소유를 취득할 수 없고, 단지 토지의  일시적 이용만을 취득할 수 있다.
- P283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는 또한 제3의 권리, 곧 감찰의 권리가필요하다. 곧 사회(公衆)의 공적 안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광명회내지 종교광명회의) 어떠한 결사도 숨겨지지 않고, 오히려 경찰에 의해 요구되면 그 체제의 공개가 거부되지 않게끔 감찰받아야 한다. 그러나 경찰의 각자의 사적 주거에 대한  조사는 긴급한 경우에 한하며, 이에 대한 사찰은  각각의 특수한 경우에 상위 권위에 의해 그 권한을 부여받아야만 한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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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이성적 존재자의 본질적 속성이고, 도덕법칙은  이 본질적 속성에서  비롯한 것, 자율적인 것이고,  그런 한에서 자기강제성을 갖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의지란 바로 도덕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를 말한다. 자신의 법칙에 종속하지 않는 의지는 한낱 ‘자의(意)‘일 뿐으로, 그것은 실은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는 자유롭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의지로서 순수한 실천이성의 존재자인 인간은 응당 도덕법칙에 복종하여 그것을 준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가 자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 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GMS, B98=IV447) 의지의 자유가 자율이라는 것, 곧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라는 명제는 "바로 정언명령의 정식(定式)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와 윤리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가지이다." (GMS, B98=IV447)EL malu - P224

법 의무는 인간에게 무엇이 옳은가, 정당한(recht)가를 말해주므로 그거은 인간임의 정당성, 곧 인간의 권리에 관련되어 있고, 덕 의무는 인간에게서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 곧 인격성, 인간의 목적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의무 모두 그것을 규정하는 법칙수립자인 실천이성의자율에 기초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또한 양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자는 일단 법칙을 통해 규정되면 외적 강제가 가능한 반면에, 후자는 오로지 자유로운  자기 강제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법 의무의 이행 여부에 대한 심판은 외부 재판소에서 가능하지만 덕 의무의 이행 여부에 대한 심판은 궁극적으로는 내부재판소, 곧 양심 안에서만 가능하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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