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모키치도 이치소우도 지금 주님 옆에서 그들보다 먼저 간 많은 일본인 순교자들과 똑같이 영원의 지복(至福)을 얻고 있을 것이라고.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의지와는 달리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육체의 공포는 의지와 관계없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가르페가 있을 때는 빵을 두 개로 나누듯이 공포도 서로 나누었습니다만, 앞으로는 혼자서 이 밤바다의 추위와 어둠을 모두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幻影)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저는 그때까지 계속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통과한 부락은 모두 관리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머릿속에 의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배교한 자들이 관리의 앞잡이로 이용된다는 것은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배교자는 자신의 비참함과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동료를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같은 운명 속으로 끌어넣으려고 합니다. 그 심사는 추방당한 천사가 하나님의 신도를 죄 가운데로 유인하려는 심리와 비슷한 것입니다.

기치지로가 하는 말처럼 인간을 모두 성자나 영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시대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신도가 배교한다거나 목숨을 던진다거나 할 필요도 없이 은혜받은 그대로 신앙을 계속 지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평범한 신도였기 때문에 육체의 공포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어디에도 갈 수 없어서 이렇게 산속을 헤매고 있답니다, 신부님." 가련하고 불쌍한 자에 대한 연민이 지금 이렇게 제 가슴을 아프게 조이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자 기치지로는 겁에 질린 듯이 명령대로 조심조심 땅 위에 당나귀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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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12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과 다른 영화의 결말이
참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침묵의 다양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2-04-12 10:36   좋아요 1 | URL
<침묵>이 영화로도 나와 있군요. 예전에 가톨릭 출판사(바오로딸)에서 나온 <침묵>을 읽고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침묵>을 읽고 있습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영화로도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