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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지난달, 지인이 한 권의 책을 추천해 줬다.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는데, 나도 좋아할 거라면서 강력히 권했다. 무슨 책이냐니까 <작은 땅의 야수들>(다산책방, 2023)이라고. 언론에서 ‘톨스토이 문학상’ 받은 작가 인터뷰를 본 적이 생각났다. ‘아, 그 책이었군! 나도 읽어 봐야지’라고 그때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잊혔다.
읽을 책은 어떻게든 읽나 보다. 지인이 강력히 추천해 준 책이 그때 언론에서 봤던 작가의 책이라니. 김주혜 작가.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는데, 문학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듯하다. 데뷔 단편이 <보디랭귀지>이고, 여러 매체에 단편 소설과 수필, 비평 등을 기고했다고. 본 작품은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다.
데뷔작을 문학상으로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작가로서 쌓인 경력(에세이, 수필, 단편)이 탄탄해서 이루어 낸 성과인 듯싶다. <작은 땅의 야수들>을 집필하는 데만 6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책 안쪽 작가 소개에 적혀 있다. 읽어 보니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었다.
그래서 "<파친코>를 잇는 한국적 서사"라는 광고 카피가 탄생한 듯.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로 미국에서 공전의 인기를 얻었으니, 본작도 그 인기에 편승하려는 듯한 인상이다. 책을 덮고 나니 재밌기는 한데 청소년 문학을 읽은 느낌이 강했다. 이 책의 최고 강점은 빠른 가독성에 있다. 603페이지가 바람처럼 넘어간다. 이렇게 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장점은 여기까지. 단점이 너무도 도드라진다.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기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기대 이하였다. 전에 읽었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와 너무 흡사했다. 재미는 있는데 문학적 형상화가 떨어지는 뭐 그런 거. 어디선가 봤던 드라마 장면들의 짜깁기. 한 마디로 클리셰 범벅인 작품. 통속 드라마 한 편 본 느낌.
뭐, 그래도 이런 면은 봐 줄 수 있다.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용서가 안 되는 건 작가가 팩트체크를 하지 않고 소설을 냈다는 데 있다. 이 작품은 엄연히 1918년부터 1965년까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담는 게 역사소설의 미덕. 아무리 허구라도 역사적인 사실조차 틀리게 쓰면 작품의 무게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헌데 본 작품은 시대의 팩트체크가 거의 안 되어 있다. 작가가 미국인이라지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한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집필했다면, 그것도 우리의 아픈 근대사라면 철저히 고증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김주혜는 자신이 미국인이라서 그런지 역사적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그녀에게는 캐릭터가 가장 중요했던 듯.
역사적 팩트 체크가 얼마나 허술한지 언급하기에 앞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작품의 주제다. 도대체 김주혜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타이틀을 ‘작은 땅의 야수들’로 지었다면 야수들이 나와야 한다. 문학은 상징성이 중요하기에 야수가 그 호랑이는 아닐 것이다. 호랑이처럼 용맹스런 그런 인물들을 기대한단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본 소설에서 아무리 뒤져도 ‘야수들’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본 소설의 주인공은 안옥희이다. 소설의 남주와 연애만 했던 옥희가 야수들일 수는 없다. 적어도 일제강점기 야수들로 상징되려면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인물들 쯤 되어야 한다. 클리셰 범벅이인 소설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 소설에서 그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찾으라면 남정호나 이명보 정도밖에 없다. 이들이 야수들이라고? 소설을 읽은 이들은 알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그나마 본 작품에서 야수들에 근접한 인물들이긴 하지만 야수라고 하기엔 비중도 작고 소심한 인물들이다. 은실과 단이가 기생 시절 3.1운동에 참가했다고 해서 야수가 될 턱이 없다. 이들은 혼자 조용하게 살았던 기생이다.
본 소설의 중심은 옥희와 한철 그리고 정호의 삼각관계다. 이들이 젊은 시절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시간과 함께 그려지는 게 전부다. 그 시대가 1918년 ~ 1965년 까지일 뿐. 주인공들의 사랑은 시대의 아픔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그냥 로맨스 드라마 클리셰의 정석일 뿐. 야수? 투쟁? 이런 건 이 소설에서 그냥 시대물의 양념일 뿐이다.
그렇기에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타이틀은 본 소설에 어울리지 않다. <경성 스캔들> 정도가 가장 적절한 타이틀일 수 있다. 그래야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물들의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다. 헌데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모든 것이 엊박자가 생기며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은 개나 줘버리는 상황이 도래하는 거.
한철과 옥희는 보는 순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고, 성수와 단이 역시 보자마자 사랑의 감정 때문에 서로의 몸을 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배신을 때려도 만나면 눈에 불꽃이 튀니, 사랑의 빌드업 같은 건 시간 낭비다. 한철을 사무치게 사랑하면서도 정호는 내 인생의 마지막 소중한 친구라는 낯간지러운 대사도 그래서 가능하다.
전형적인 청소년 소설에서나 볼만한 로맨스 구조. ‘나라를 위한 투쟁을 그린 작품’(광고 카피)이라고? 이런 광고를 보고 호도한다고 한다지? ‘야수’와 ‘나라 위한 투쟁’은 그럴싸한 유비이자 상징이다. 지금까지의 문학적 클리셰는 그렇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내용은 클리셰 투성인데 문학적 클리셰는 정면으로 배척하는 꼴이다. 연애소설을 투쟁소설로 명명하면 안 되는 거다.
중간을 지나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것은 작가가 이 책에서 얼마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는지 좀 헤아려보고 싶었기에 그렇다. 일단 김주혜는 1910년대부터 계속해서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한국인은 1945년 해방이 된 후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한 이후에나 등장하는 단어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정체성은 조선인이었다.
작가는 계속해서 본문에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쓰다가 단 한 곳에서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월향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전쟁 동안(대동아 전쟁) ‘조선’과 미국 사이의 서신 왕래가 끊겼기에”라는 부분. 1945년 장에 나와 있다. ‘한국인’이라고 일관성 있게 표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심지어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도 ‘한국 동물들’(p476)이란다. 1918년 장에서 땅은 조선 땅인데 김주혜는 여기서도 ‘한국 땅’(p129).
작가가 미국인이라서 그런지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위에 언급한 ‘한국 땅’은 1918년 장에 나온다. 그 뒤 장도 1918년이다. 근데 작가가 129쪽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은 산미증식계획(1920~1936)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1918년 일본에서 일본 민중이 쌀 도매가격 담합에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의 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시행한 정책이 산미증식계획이다.
작가는 작가적 역량(상상력?)으로 1918년 일본의 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쌀 수탈 정책을 1918년에 수행케 했던 거다. 이러한 역사적 혼동은 ‘전국연합진선협회’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466쪽에 그 문제의 진선연합이 나온다. 전국연합진선협회는 1939년 9월에 결성되어 이념적 노선과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940년 4월에 해체된다.
헌데 작가는 1941년에 이명보가 진선협회 동지들과 회합하느라 늦게 귀가했단다. “그 중에 명보는 전국연합진선협회 소속 동지들과 회합을 하느라 늦게 귀가했다. 연합진선은 나라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실로 다양한 정치적 관점을 지닌 여러 집단을 하나로 묶는 기구였다.” (p466) 작가의 친절한 부가 설명은 그래서 어설프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혼동은 계속된다. 483쪽에 ‘프랑스 조계’가 등장한다. "임시정부가 있는 프랑스 조계" 프랑스 조계는 1944년 장에 등장한다. 프랑스 조계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없어졌는데 1944년 작가적 상상으로 다시 등장한다. 판타지 소설이면 그려려니 하지만 이 작품은 엄연히 역사소설이다.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배경은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암묵적 전제다.
이러한 함량 미달 소설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니, 참으로 놀랍다. 외국이라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인가? 재미있고 역사적 배경이 <파친코>와 비슷하니, 더욱이 한국 문화도 핫하니 그래서 상을 준 것인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용두사미 형식의 연애물이라 기대가 과했나 보다. 아쉬운 책이다. (끝)
덧
1.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초반부 범과 사냥꾼 얘기에 확 빠졌다. 타이틀과 잘 들어맞아 기대했는데, 결국엔 용두사미 로맨스물이라 실망이 컸다. 더군다나 에필로그의 '해녀'는 뭔지. 생뚱맞게 해녀라니. 앞에서 암시나 복선이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진짜 갑툭튀다. 에필로그는 없는게 낫다.
2. 이 책을 <파친코>와 비교를 많이 하는데, 이민진 작가에게 실례되는 짓이다. 절대 그러지 말기를! 대좌가 갑자기 소좌로 바뀐 부분과 같은 사소한 오류가 책 도처에 있다. 팩트체크도 제대로 안된 소설인데 왜 그렇게 상찬받는 작품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개연성과 핍진성 그리고 상징성도 떨어지는 로맨스 시대극인데 말이다.
3. 작가가 페미니스트여서 그런지 본 책에 ‘여자’를 지칭하는 대명사를 ‘그’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의 대화에서 둘 다 ‘그’로 표기하니 헷갈려서 계속 이상했다. 천연덕스럽게 여주가 순응적 여성관을 대변하는 클리셰인데 ‘그’라는 표기가 좀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