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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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 재미있는 책만 골라 읽는다는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추천받았다. 앨런 베넷의 <일반적인지 않은 독자>(문학동네, 2010). 저자도 몰랐고, 책은 143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었다. 표지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중간중간 삽화도 있는데, 문고판(인디북)<톨스토이 단편집>에 나오는 삽화와 비슷했다.

 

책에 대한 첫인상은 드럽게 재미없게 생겼다’, ‘청소년 소설등과 같은 느낌이었다. 책 표지가 한몫 단단히 했다. 읽을까 말까 주저한 게 사실. 하지만 추천인이 문학을 전공했고, 나름 재밌는 소설만 찾아 읽는 이라 부정적인 인상을 걷어 내고 읽어 보기로 했다. 정말 모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럴까 첫 10여 페이지를 읽는데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드는 거다. 재미가 없을 거 같고 흡입력도 별로고, 많이 밋밋했다. 그래도 5페이지에 첫 등장하는 삽화가 있어 계속 읽기로 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번역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야기 속에 슬며시 스며들었다. 책에 관한 책을 소설로 읽으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책 읽기에 대한 우화. 처음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빠져 독서왕이 되는 과정을 플롯에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들었던 의문들과 책 속에 소개되는 책을 찾아 읽는 과정은 독서 이력이 어느 정도 있는 독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를 작성하고 모으고 읽는 과정은 공감할 수밖에 없다.

 

본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책덕후 노먼이 추천해 주는 책을 읽어나가며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들은 우리가 책에 빠져 지내온 지난날의 행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절 한창 읽어나가던 우리의 한때를 발견하고, 공감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여왕이 읽어가는 책 리스트를 보면서 내가 읽었던 책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재밌다.

 

책을 덮고 보니, 본 소설은 독서 덕후들을 위한 책이다. 지금 막 독서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에게는 여왕에 감정이입이 제대로 될 수 있고, 어느 정도 독서 이력이 붙는 이들에게는 과거의 지점들이 생각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은근한 미소를 띨 수 있게 한다. 책에 관한 책을 재미있는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니, 근사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책을 읽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을 여왕과 대비시켜 여왕의 독서를 방해하는 인물들로 설정했다. 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각국 정치가들과 각료 그리고 비서실장 및 여왕 주변의 시중드는 메이드까지 여왕이 책을 읽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총리는 여왕을 책의 세계로 인도한 노먼을 왕실에서 내쫓기까지 한다. (대학 학위를 핑계로)

 

이 상황이 매우 재밌는 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경향이 있어서다. 우리 가족만 봐도 어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헌데 아버지는 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책을 보면 책을 빼앗곤 했다. 책을 읽으면 못 읽게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기억이 있으니 소설 속 여왕의 독서를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여기서 한 가지,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 하나를 부가할까 한다. 책 타이틀이 본 작품을 일반적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Uncommon reader>이다. ‘common’에는 영국에서 왕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uncommon’은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론 ‘common reader’의 의미 중 하나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니, ‘Uncommon’은 그 반대의 뜻으로도 볼 수 있겠다. 책에서 여왕은 처음에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 책을 찾았다. 그러다가 책을 점점 많이 읽게 되면서 여왕은 자신의 독서 철학을 나타내게 된다. 즐거움이 아닌 궁금증을 해소하고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책은 행동을 촉발하지 않습니다. 책은 대개 자신이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바를,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기로 마음먹는 바를 확신시키기만 하죠.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려고 책을 찾습니다. 말하자면 책은 책으로 끝나는 겁니다.“ (p131)

 

어쨌거나 책의 타이틀은 매우 중의적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는 본 소설에서 여왕을 말하는 것으로,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특별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이되 비인간적 특권을 가진 인물로 본문에 표현된다.

앤서니 파월은 작가라고 해서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을 특권이 부여된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여왕에게는 그러한 특권이 주어진다. 나는 항상 인간처럼 보여야 하지만,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pp85-86)

 

이런 비인간적 특권을 행사하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독서 덕후인 노먼을 만나 일반적인 책 읽기의 세계로 들어가 일반적인 독서 행태를 보이는 과정이 이 책의 줄거리다. 책을 읽으면서 특권화된 여왕이 점점 그런 의식이 엷어지며 자신이 이전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부분을 인식하며 시나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뭔가 주장하지 않아도 독자에게 독서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게 하는 게 소설에서 말하는 Showing의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울러 나는 여왕의 독서에 대한 입장(p131 인용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책은 행동을 촉발한다.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책을 찾아 읽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책은 책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삶이 변하기 위해서다. 책이 책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허망한 것이다. 삶과 유리된 독서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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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0-30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 효과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우선 재밌으니까 또는 끌리니까 또는 궁금해서, 가 읽는 이유일 듯해요.
저의 경우 제가 글쓰기에 뜻을 두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책에 대한 큰 흥미가 없을 것 같아요. 마치 가수가 다른 가수의 노래를 공부 삼아 들어보듯이, 저는 다른 이들의 글을 공부 삼아 읽는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공부만이 독서의 목적은 아니에요. 확실히 독서를 하면 재미를 발견하거든요.^^

yamoo 2025-10-30 14:38   좋아요 0 | URL
어느 경우에나 책을 읽는 유입 경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책을 접하고 읽어나가면서 사람은 바뀌게 되죠. 재미를 찾아서 책을 읽지만...결국에는 페크님처럼 글을 쓰는 경우도 있구요. 이전에는 하지 않던 일을 하게 되는 힘...그게 저는 독서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책에서 끝나면 안되고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이지라...^^

transient-guest 2025-10-31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재미, 활자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지의 훈련, 가끔은 뭔가 배우거나 얻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읽습니다. 물론 책을 잘 정리해놓고 흐뭇해하는 것도 좋아합니다만.ㅎㅎ 눈에 띄는 변화까지는 몰라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죠. 근데 물도 독사가 마시면 맹독이 되는 것처럼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해도 사람이 이상하면 어쩔 수가 없네요.ㅎㅎ

yamoo 2025-10-31 10:24   좋아요 1 | URL
트랜스 님은 재미, 배움을 위해 읽으시는군요!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은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재미와 배움을 위해 꾸준히 읽으면 확실히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거 같습니다. 결이 계속 달라지고 추구하는 바가 달라지는 듯해요.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한 사람 중 이상한 사람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합니다. 교수들 보면 이상한 사람들 많더라구요..^^;;

cyrus 2025-11-02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이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제목 <보통의 독자>를 노리고 만든 걸까요? ㅎㅎㅎ

yamoo 2025-11-03 13:09   좋아요 0 | URL
<보통의 독자>라는 책이 있나봐요?!! 전 금시초문...아마도 울프의 그 책이 있었다면 그걸 노리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입니다.ㅎㅎ
아마도 그렇겠지요...아마도요..ㅋㅋ
 

요즘 사 놓고 못 읽는 책들이 꽤 있다. 소위 벽돌책들. 나에게 이제 벽돌책 기준은 500페이지가 됐는데도 그렇다. 500페이지 넘들 책들은 내게 이제 전부 벽돌책 부류로 들어간다.


예전에는 심심찮게 읽었는데, 그림 시작하고 부터는 책 읽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 벽돌책은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더군다나 최근에 탁구도 다시 시작하여(의사가 운동을 하라고 한다!!) 책 읽을 시간은 더더욱 줄어들고 있다.  


물론 소장한 책들은 아직 많은 자리를 차지하며 얼른 읽어 달라고 아우성 치지만 손이 절대 가지 않는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다시 꺼내들었는데 그만 무서움이 엄습하는 거다. 이걸 언제 읽지??


이런 책들의 책등을 보니 식은 땀이 흐른다. 팔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다. 





















































이 중에는 오래 전 읽은 책들도 있다. 하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분량에서 압도당해 질려버렸다.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 역시 벽돌책이라 생각되어 읽기를 미루게 된다.


어쨌거나 <그녀를 지키다>를 읽기 시작했다. 읽어야 하겠기에! 첫 3페이지 스타트는 괜찮았는데, 이 벽돌책을 돌파하고 난 후 위 책들에 대해 좀 심도있게 생각해 봐야겠다. <서구의 몰락>은 어느 서재 글을 보고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잠시 숨 좀 고르는 차원에서 이거부터 해치워야지..(근데 두깨에 한숨이 나오는 게 왜 일까?)


내게는 지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대상이 바로 벽돌책이다. 눈에 띠는 것만도 300권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이걸 어쩌나....근심과 걱정이 깊어가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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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25-10-27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딱 3권 읽어봤네요.
한국전쟁의 기원은 올해 지나가기 전에 읽으면 좋겠지만 약간은 엄두가 나질 않아 내년에라도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ノ◕ヮ◕)ノ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yamoo 2025-10-28 09:15   좋아요 0 | URL
이햐~ 그 3권이 뭔지 궁금하네요..^^
한국전쟁의 기원은 예전 한길사판5권 짜리로 봤어요. 오래 되어서 굵직한 것만 기억나고 세부적인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서구의 몰락>도 마찬가지에요. 넘 오래되면 기억나지 않나봐요..ㅎㅎ
하나의책장님두 환절기 감기 조심하셔요~~

페넬로페 2025-10-27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에 띄는 벽돌책이 300권!
요즘 저는 집중력이 너무 떨어져 벽돌책 하나 깨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렇지만 책 욕심이 있어 읽고는 싶어요 ㅎㅎ

yamoo 2025-10-28 09:16   좋아요 1 | URL
네..이중으로 꽂혀 있는 다른 책꽂이에도 안보이게 꽂혀있어 더 될 듯합니다. 하드커버 책만 모아놓은 책꽂이도 있어..이넘의 벽돌책은 정말 많은 듯해요..ㅜㅜ

저는 벽돌책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냥 회피해버려요...이제는 읽고 싶은 마음도 안들어요...ㅋㅋ

아침에혹은저녁에☔ 2025-10-27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녀를 지키다는 가독성이 아주 좋아서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yamoo 2025-10-28 09:17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나 가독성이 좋단 말이죠?!! 그럼 별 문제가 안되겠습니다..ㅎㅎ 안심하고 읽어야 겠어요!^^

Falstaff 2025-10-28 0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책만 눈에 띄는데요, 전부 명작 또는 명작에 아주 근접한 책들만 골라 놓으셨군요. 와우.... 피어시그의 책은 좀 뒤편으로 밀어놓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소설책은 재미있는 벽돌이라 그리 겁먹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yamoo 2025-10-28 09:20   좋아요 1 | URL
흠...명작 또는 명작에 아주 근접한 책이라....폴 님께서 아주 잘 보셨네요...저건 전부 폴님 서재에서 폴님이 별5개 준거 위주로 구매한 책이거든요~~ㅋㅋㅋ

피어시그는 말씀대로 안 읽겠습니다요...ㅎㅎㅎ 나머지는 재밌는 듯하니, 말씀마따나 겁먹지 않고 기대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ㅎ

페크pek0501 2025-10-30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공감이 가면서도 웃깁니다.ㅋㅋ
저도 집에 쌓여 있는 책을 보면 근심이 깊어갑니다. 분명히 꼭 읽어야 해서 구매했던 것일 텐데..^^

yamoo 2025-10-30 14:13   좋아요 1 | URL
책덕후들의 공통사항이 아닐까요?ㅎㅎㅎ
욕심이 많아 눈에 띄면 읽어야지 하고 구매했다가 일주일 뒤면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ㅎ 정말 어쩔 수가 없어요..ㅜㅜ

카스피 2025-10-30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진정한 벽돌책은 최소 천 페이지는 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천 페이지 쯤 되면 실제 읽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양손 운동용(한손으로 드는 분은 헬창임)이나 자신을 보호할 무기 대용으로 쓸 수 있기 떄문이죠^^
근데 저도 야무님이 갖고 계신 책 몇권은 있는 것 같아요ㅋㅋㅋ

yamoo 2025-10-30 14:39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에는 1000페이지가 기준이었는데, 지금은 500페이지만 넘어도 제게는 벽돌책으로 분류가 된답니다. 그만큼 시간내서 읽기가 너무 힘들어요..ㅎㅎ
 

진짜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듣는 것이.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은 30대 이후 처음인 것 같고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듣는 것도 8년 만인듯하다. 무엇보다 교향곡을 오케스트라 실황을 영접하는 건 내 생애 처음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은 말해서 무엇하랴.

어쨌거나 어제(토요일)  갑자기 지인이 나눔 티켓이 생겼다고 급히 디엠을 주셨다. 난 일요일 특별한 일정이 없어 작업하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홍콩필 티켓이 생겼다고 지인 p님이 내게 참석을 권유하신 거다. 정말 의외이고,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듯해서 바로 접수했다. 




그래서 예습할 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교향곡 5번을 들었는데, 모두 익숙한 곡이었다. 특히 교향곡 5번은 딱 내 스타일. 그래서 기대를 안고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오후 4시가 좀 안 된 이른 시간. 열차가 딱딱 와줘서 너무 일찍 왔는데, 다행히도 Y님도 좀 일찍 도착해서 무료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이 보게된 A님이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진은숙 및 찰스 쾅에 대한 얘기를 해주셔서 재밌게 기다릴 수 있었다. 티켓나눔 해 주신 k님이 도착해서 표를 나눠 갖고 S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10.19. 일요일 오후 5시.

                                       *연주 프로그램*

지휘자 :  리오 쿠오크만
피아노 : 선우예권
연주 :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 진은숙    수비토 콘 포르차(Subito con Forza) 5'

2. 찰스 쾅    페스티나 렌테 질여풍, 서여림(Festina lente 疾如風, 徐如林) 6'

3.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 Op.23 피아노: 선우예권  32'

Intermission   20'

4.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    44'



S석. 1층 A블록 17열 7, 8, 9번. 배정받은 좌석이다. 앉아서 차례로 감상했다. 먼저 <수비토 콘 포르차>. 연주 시간 5분. 피아노 진은숙이 협주했는데, 존재감이 정말 미미했다. A님 왈 진은숙이 진중권 친누나라고. 어쨌거나 현대 음악을 처음 들어서 그런지 넘 난해했고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 곡은 잘 몰라 그냥 패쓰한다.

찰스 쾅의 <페스티나 렌테 질여풍, 서여림>, 연주 시간 6분. 한국 초연이란다. 찰스 쾅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재일 쯤 된다는 A님의 전언이다. 들어봤는데,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난해하다. Y님은 영화음악 같다는데, A님이 와호장룡과 영웅 얘기하니 얼추 장면이 떠오른다. 질여풍, 서여림이 이 곡의 주제라고. 바람과 고요함을 음악으로 나타냈다고 하는데, 역시 내 취양이 아니라 패쑤. 별 감흥이 없었다.



드디어 차이콥스키 음악이다. 선우예권 피아니스트가 등장하고 협주곡 1번이 시작됐다. 연주 시간 32분. 너무도 익숙한 초반부. 매우 좋아하는 곡이다. 오케스트라로 들으니 더 좋은 듯. 근데 협주곡 1번을 다 듣고 나니 협주곡 1번은 장대한 초반부가 제일 좋다. 물론 피아노 솔로와 오케스트라가 마치 대화하듯 또는 경쟁하듯 경연을 펼치는 부분은 화려하다. 선우예권의 손이 안 보일 정도의 섬세한 기교와 열정이 넘치는 연주는 정말 빼어나다. 막귀가 들어도 세계 콩쿠르 1위를 휩쓴 실력자인 듯, 그의 연주는 거침이 없다. 허나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을 알리게 해 준 일종의 데뷔작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곡을 탈고하자 이 초고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하기 위해 곡을 갖고 루빈스타인 집에 갔는데, 루빈스타인은 곡을 치고 난 후 도처의 결점을 지적하며 혹평을 가했다고 한다. 

앞에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피아노 독주 부분의 선율이 초반의 선율과 비교해 매우 비정형적이라고 느껴서였다. 루빈스타인이 초고를 치면서 결점을 지적한 부분은 아마도 고전적인 정형성을 벗어나 익숙하지 않은 곡의 전개여서 결점을 지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교적인 면이 뛰어난 피아노 독주 부분은 개인적으로 난해함을 느꼈다.

협주곡 1번이 끝나고 선우예권이 슈베르트 곡을 앵콜로 들려줬다. 잔잔하며 듣기 좋은 곡. 앵콜까지, 멋진 녀석이다. 중간 휴식 20분이 주어졌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교향곡 제5번이 시작됐다. 연주시간 44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교향곡은 완전 내 취향을 저격한 곡이다. 44분이 4분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독일 고딕메탈 그룹 라크리모사의 팬이다. 지금도 여전히 내 핸펀 음악 앨범에 라크리모사 애창곡이 5곡 들어있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듣고 있다.

라크리모사 뿐만 아니라 고딕메탈의 정형적 특징 중 하나가 다크하고 비장미가 다분하다는 거. 그래서 1악장의 다크하고 비장한 선율이 그대로 꽂혔다. 그리고 비장미가 서서히 걷히면서 1악장 후반부가 밝고 찬란하게 마무리된다. 이 구성이 좋았다. 마찬가지로 2악장 초반부에 시작되는 호른과 오보에의 선율은 비통함을 어루만지듯 애틋하여 계속 듣고 싶게 하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 호른 선율은 1악장의 초반부의 비장함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좀 더 가볍고 활기차게 마무리된다. 1악장의 구성과 흡사하면서도 변주되는 2악장 구성이 돋보였다. 

3악장은 이제 초반의 비장미와 애수어린 선율에서 벗어나 미뉴에트 풍으로 전개된다. 오보에의 선율로 시작되는 경쾌하고(앞 부분에 비해) 우아한 선율은 4악장의 피낼래를 위한 전주 역할을 하는 느낌이다. 이어지는 4악장은 1악장에 나왔던 주요 악상이 변주하며 장엄하게 나타나는데 진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관악기가 사정 없이 내뿜는 기운은 아드레날린을 폭주하게 하며 환희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휘몰아치는 선율과 화음에 아타락시아의 경지를 맛 본 느낌.

특히 4악장에 나오는 익숙한 선율!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멜로디.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이라 생각했는데 바로 오래 전 민해경이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였다. 한국의 작곡가가 이 교향곡 5번 4악장에 영감을 얻어 편곡한 곡이라 한다. 몰랐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듣고 있었던 거.

어쨌거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은 내 최애 클래식 곡이 됐다. 폭발할 때 폭발하고 절제할 때 절제하는 강 약의 절묘한 드라마틱한 구성은 정말 딱 내 취향이다. 다른 연주자가 지휘한 5번을 여러 개 들어볼 요량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콘서트 홀에서 직관한 감동만큼은 느낄 수 없겠지. 여러모로 좋은 감상이었다. 막귀가 정말 귀 호강한 날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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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21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이어폰으로 클래식 응악을 듣는 것보다 직접 콘서트 홀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 음악적 감동이 더 마음속에 다가올 것 같아요.S석이라 보고 듣는 감동이 배가 되셨을 것 같네요^^

yamoo 2025-10-21 09:40   좋아요 0 | URL
좋은 헤드셋이 욕심이 나긴 했지만....콘서트 홀에서 직관하는 건 그 어떤 엠프나 헤드셋으로도 충족될 수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돈을 들여 콘서트홀 가서 듣는 거겠죠. 그치만 이 돈주고 가서 들을 정도의 취향은 아직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기회가 되면 아주 가끔은 가겠지만 정기적으로, 좋아하는 지휘자가 내한한다고 가서 듣는 정도는...어후~~ 위 콘서트 홀 R석 가격이 20만원. S석은 16만원인데...저는 절대 내 돈 내고 갈 거 같지 않습니다...ㅎㅎ

이환한 2025-10-22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책이 좋아도 알고보면 그보다 음악이 더 좋아요. 낙엽만 골라 밟으며 노래 부르며 헤매면 아주 먼 동네까지도 갈 수 있고, 기진맥진 택시 타고 돌아와얍죠. 저작권 푸는 용감한 음악가의 음악만 트는 레코드가게를 열고 싶네요. 길에 캐롤이 흐르는 겨울은 이제 영영 다시 없군요.

yamoo 2025-10-23 10:58   좋아요 0 | URL
음악 듣는 게 좋긴 좋죠. 이런 콘서트홀에 가서 듣는 음악은 돈 값을 하는데...
제 취향이 아니라 그만단 돈을 내고 직관하기는 어려워서 위와 같은 기회가 아니면 솔직히 감상하기 쉽지 않죠. 좋은 건 알겠습니다만....그만한 돈을 지불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함정..^^;;

이환한 2025-10-22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클래식 콘서트는 감상만 해도 돼서 좋아요. 유명 가수들 콘서트는 일주일 이상 누워 있게 만들어요. 일어나서 같이 불러야 하고, 춤도 춰야 되고, 때에 맞게 지급된 봉도 흔들어얍죠.
절대 잘 수는 없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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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에서 나하고 친한 팀장님 한 분이 있다. 나보다 선배고 세 살 정도 연상이다. 직장에서 꽤 친한 선후배 사이인데,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가 책과 관련된 TV 프로그램과 책 콘텐츠 등을 찾아보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게서로 시작해서 교양서 위주로 열심히 읽고 있다.

 

내가 추천해 준 책들도 꽤 읽었다. 작년부턴가는 문학책도 꾸준히 읽으시는 듯하다. 지난 달인가, 점심을 먹으면서 내게 강력히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있단다. 궁금하고 반가워서 뭐냐고 하니,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20)랬다. 엄청 감동적으로 읽었고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고.

 

추천 책을 듣고 책 표지가 떠 올랐다. 몇 년 전에 보급판으로 저렴하게 나온 걸 헌책방에서 천 원 주고 데려온 책이 바로 <죽음의 수용서에서>였기 때문. 읽고 있는 책이 있어 다음에 읽을 요량으로 옆 책더미 위에 엊어 놓았는데, 추천받아 읽으려고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다. 할 수 없이 하드커버 책을 다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출퇴근용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좋은 책이었다. 솔직히 기대치가 거의 없었는데 삶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어 일독할 가치가 충분했다. 나치 생존기는 좀 식상한 면이 없지 않고(아우슈비츠 생존수기는 많다), 더군다나 정신분석 쪽이라 사례 위주의 이론서 인줄 알았다. 헌데 본 책은 담담한 체험으로부터 명확한 정신-심리적 치료법을 평이하게 제시해 주는 책이라 신선했다.

 

책 후반부에 정신분석학적 담론과 철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전혀 현학적이지 않다. 수용소의 체험으로부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어 거부감 없이 사유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저자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로고테라피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정신분석학에서 제3의 학파라 일컫는 '로고테라피'가 니체 철학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p137)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 나오는 니체의 말이다. 저자가 인용한 이 말은 본 책에서 매우 중요하다. 플랭클린 박사가 수용소 체험에서 살아 돌아와 로고테라피라는 정신 치료 요법을 제창하게 된 이론적 뿌리와 같은 언명이기에. 니체의 이 명제로부터 플랭클 박사의 의미 치료 이론이 도출될 수 있었다. 로고테라피의 핵심이 바로 의미 치료라고 할 수 있기 때문. “심리치료와 정신 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p137)이라고.

 

<죽음의 수용소>는 읽어보니 정말 좋은 책이다. 음미해 봐야 하는 문장들이 꽤 된다. 특히 2부인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에 저자의 핵심 사상이 집중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의사 선생이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최적의 안내서라 할만했다. 힐링 분야의 책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정신분석학 이론서(임상서). 1부 수용소 체험이 반을 넘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물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1)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함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 할 수 있다.” (p221)

 

읽기를 잘한 책이고, 줄도 많이 쳤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도 매우 좋았다. 하지만 2로고테라피 개념을 읽으면서 로고테라피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커졌다. 의미 있는 지점도 있었지만, 수긍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이후 서술할 내용은 로고테라피에 대한 내 개인적인 비판점이라 하겠다.

 

의미를 찾는 의지력이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면, 수용소에서 그냥 죽음을 택한 사람들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것을 삶에의 의지로 설명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갖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다.”(p215)

 

정말 간편한 발상이다. 사람의 내면에는 성자와 돼지(카포)가 되려는 잠재력이 있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다니, 이런 도식화는 정말 그럴듯하게 많이도 보아 왔다. 특히 정신분석학 이론들이 그렇다. 항상 그럴싸하지만 증명할 길이 요원한 뭐 그런 거. 비슷한 논증으로 내가 현재 이 모양 이 꼴로 있는 건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어떤 결정을 해 버렸기에 그렇다는 거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 결정은 좋은 길과 나쁜 길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무수한 선택의 갈림에서 최선으로 당시의 순간 내가 택한 결정이다. 좋은 반대편 길이란 현재의 순간에는 없다. 항상 과거를 돌이켜보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좋은) 길을 재구성하여 상정할 뿐이다. 우리의 뇌는 이러한 편견에 자주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프랭클 박사가 말하는 사람의 내면에 잠재해 있다는 성자와 돼지가 의지를 통해 발현된다는 건 신화에 가깝다. 성자가 되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성자가 된다는 건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좀 우스운 감이 없지 않다. 이건 '범죄의 탄생'에서 이미 밝혀진 통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이론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배트맨에서의 조커)는 환경적 요인이나 사회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악한이 되겠다는 의지에 차서 범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성자적 측면과 돼지적 측면(악한 측면)이 있긴 하겠지만 복합적으로 섞여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환경에 따라 적응하면서 성자적 측면이 나타날 때도 있고, 돼지적 측면이 나타날 때도 있을 것이다. 잠재적 한 면만이 의지로 발현된다는 건 환경을 도외시한 발상이다. 저자가 수용소라는 특별한 환경의 체험을 통해 이를 발견하여 이론화했지만, 장소의 특수성이 너무 크게 작용한 듯하다.

 

무엇보다 플랭클 박사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면을 너무 간과했다. 사람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 내면의 의지보다는 성향의 차에 의해 생존 방식을 달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성향 차이를 보인다. 위험을 선호하는 성향과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 어떤 사람은 새디스트적 경향을 띠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이러한 성향의 차가 많이 좌우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희망을 발견하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컵에 물이 반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컵에 물이 반만 찼다고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만큼이나 있다고 본다. 이 성향의 차이가 삶을 대하는 방식을 가른다. 어떤 사람은 삶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고, 어떤 사람은 삶의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포기가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수용소에서도 이런 성향의 차이가 생존 경향을 갈랐을 거라고 본다. 이는 내면의 성자 - 돼지 측면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 듯싶다.

 

사람의 내면에 성자적 측면과 돼지적 측면이 있다는 발상은 프랭클 박사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발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사가 수용소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기에, 내면의 '성자 - 돼지' 유비는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하는데 매우 좋은 도식이 될 수 있었을 듯해서다.

 

아울러 로고테라피는 인간의 의미 추구 동기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사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음),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면 의미를 위한 의미를 찾게 될 수도 있다. 일부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의미를 가볍게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극단적인 환경에서 개인의 선택권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

 

 

[]

1. 본 책을 뒤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다. 좋은 책인데 거의 모든 리뷰가 찬사 일색이라 이 책에 대한 비판점을 좀 부각해 보고 싶었다. 로고테라피가 만능은 아닐진대, 책을 읽으면 모든 것을 의미로 환원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듯한 내용이라 여기에 좀 반박을 해 볼 요량이었다. 

2.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정하기도 쉽지 않다. 사람마다 삶의 의미는 다 다르기 마련이고, 삶의 의미는 다차원적인 개념이다. 근데 이 책에서는 삶의 의미만 찾으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요법이라,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으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삶의 믜미는 '당신은 누구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같은 차원이라 확정하기 매우 어렵다.)

3. 음미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자신이 실업에 처해 있거나 수년간 입시나 입사에 실패한 사람이라면 본 책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자신이 터널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히 권해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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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19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한국의 자살율이 높다고 하는데 그런 분들이 마음속에서 음미해야 할 글귀가 아닌가 싶어요

yamoo 2025-10-20 09:47   좋아요 0 | URL
네, 우리나라에서 방황하는 분, 번아웃 오신 분, 실업에 처해 있는 분들이 이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좋은 책이에요~

잉크냄새 2025-10-19 1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경에 의하여 성자와 돼지로 구분되는 것이 잠재력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인간의 의지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의 또 다른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매일 이를 닦고 단테의 신곡을 수도 없이 외운 것이 최소한 인간으로서 남기 위한 처절한 절규였다는 것에 수긍이 갑니다.

yamoo 2025-10-20 09:50   좋아요 1 | URL
환경에 의해 개인이 영향을 받고 인간의 의지가 작동된다는 거라면...환경결정론자인 저도 충분히 이해했을 거고, 의문점이 들지 않았을 거에요. 근데 분명히 이 책에서는 인간의 잠재력이 순수한 의지로 발현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극단적 환경에서 발견한 이론이기에 보편적이지는 않은 듯합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다는..^^;;

페크pek0501 2025-10-1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삶은 운, 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인상 깊었어요. 이 책의 저자가 운 줗게도 자기가 치료해 준 적 있는 사람을 만나 덕을 보는 경우와 같이, 또는 딴 사람은 운 나쁘게 폭력을 잘 쓰는 사람 밑에서 일해야 하는 나쁜 자리에 배치되는 경우와 같이.
그리고 최악의 샹황 속에서 어째서 짐승 같은 악질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했어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왜 없을까 하는... 인간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에요.^^

yamoo 2025-10-20 09:53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저자도 자기 바로 옆 줄(자기가 서 있었던 줄에서 옆 줄로 옮겨졌음)이 이동한 곳이 아우슈비츠 가스실이었다는 걸 담담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순간의 결정과 이동으로 죽음이 한순간에 결정된다고..
실제 일상적 삶도 우연이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운이 좋은 거죠. 저는 환경결정론자이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맞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인간관철 기록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ㅎㅎ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최재혁 옮김 / 돌베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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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일종의 유목민, 노마드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이민가서 오래 살다 보면 그 2, 3세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미국인으로 동화된다. 그런 와중에 어떤 계기로 자신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라 이해했다.

 

이런 것은 참 많이도 봤을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외국으로 입양되어 갔다.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고 유럽이나 미주로 입양 가서 장성한 후에 자신의 뿌리를 찾는 프로그램 말이다. 외국에서 의도치 않게 이민이나 입양으로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나는 디아스포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게, 2023/2006 재판)을 읽고 이와 같은 인식이 완전히 깨졌다. 이 책의 부제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명확히 한다. 제일조선인(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의 이산(離散;떼어놓아 흩뜨리다)이 그 의미의 핵심이다. 누군가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강제로 추방당하여 타지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자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기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 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p13)


구한말 일본의 간섭으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한 사람들보다(마지못한 자발적 이주), 이들이 그곳에서 정착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하여 낯선 곳에서 살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재일조선인도 그들과 같은 부류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자아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이들은 모국어와 모어 사이에서 갈등하며 내적 존재의 비애를 짊어지고 있다. 재일조선인 2세로서 서경식의 고뇌는 재일조선인이 아니면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재일조선인을 이해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해의 바탕에는 공감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나는 재일조선인의 아픔이 무엇인지 도저히 가늠하지 못 하겠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이 생겼다.

 

이것은 순전히 이 책의 힘이다. 저자는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해외로 나갔다. 재일조선인이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기약 없는 탈출이다. 여권도 없고 그냥 귀국 허가증만 받고 해외로 나가는 거다. 해외에서 그 어떤 기본적인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사고가 나더라도 여권이 없기에 이 사람을 책임져줄 국가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재일조선인의 국적은 한국이다. 하지만 한국은 재일조선인의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 이 말할 수 없이 답답한 모순. 재일조선인과 국적의 문제는 아주 오래 묻어둔 한일 관계의 풀지 못한 숙제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그 어느 정권도 재일조선인 국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재일조선인 비극은 천황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는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만들었으니 일본이 해결해야 하는데 일본은 이 문제를 그냥 무시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은 모두 하루 아침에 외국인이 됐다. 세금을 내도 일본에서 그 어떤 해택도 받지 못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존재들. 국적은 한국인데 말이다.

 

그래서 서경식은 끊임없이 해외로 나간다. 아주 불안한 여행이지만 해외로의 여행은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종의 수단이다. 해외에서 자신과 비슷한 디아스포라 사람들을 만나 자신과 동질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그는 해외에서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

 

그의 책들 대부분은 예술 견문 기행록이다. <디아스포라 기행>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의 순서대로 쓴 기행문이 아니라 여러 기고문에 실었던 순간순간 여행기들을 모아 책으로 묶은 게 본 책이다. 그래서 체계성은 없다. 그럼에도 기행문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의 예술 기행은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하나의 방편이다.

 

프리모 레비, 시린 네시트, 후지이 노부르(문승근), 자리나 빔지, 장 아메리, 펠릭스 누스바움,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등 본 책에 실린 예술가들의 그림과 글 등은 디아스포라적인 삶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됐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지표이다. 특히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데이비드 강의 <입을 위한 선>은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처절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해외 작품들을 보고 감상하면서 서경식은 자신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전 지구적인 디아스포라적 삶으로 확장한다. 세계의 디아스포라 예술이 서경식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의 모습이 근대 특유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p15)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조선인) 디아스포라는 600만 명 정도 된다니,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서경식을 포함해서 이들이 바라는 바는 아마도 존재의 특이성이 아니라 평범하게 대접받는 것일 게다. 일반적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받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서경식은 국민국가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의 일련의 저작들은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서경식이 생각하기에 이를 위한 매체가 예술의 언어이고 이를 통해서 그는 소극적이지만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여기 실린 예술 작품들을 보면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한편 본 책은 일반적인 기행문이 아니다. 기행문은 보고 들은 바를 토대로 견문을 넓히는 것이지만, <디아스포라 기행>은 저자의 자유롭고자 하는 바람들의 총체, 즉 그가 지향하는 미술품들의 목록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작가가 발굴한 디아스포라 예술 작품의 큐레이션 쯤 된다. 예술 작품 위주로 봐도 된다는 말씀.

 

본 책에는 행위예술, 설치 미술, 조각, 회화 등 여러 미술 작품이 등장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자면 문승근의 <활자구>(p131)와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p177)이다. 특히 후자는 누스바움이 죽었기에 그의 마지막 자화상이 되었다. 어둡고 황량한 밀폐된 공간을 통해 옴짝달싹 못하는 자아의 상태를 담담히 그린 작품. 쉽게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승근,  <활자구>


펠릭스 누스바움,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물론 글과 작품을 통해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국민국가를 넘어서 근대 이후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디아스포라적 삶은 소박한 이상이라 생각한다. 현실은 아직 국민국가가 건재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만이 근대를 종결시키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작일 것이다. ()



 

[덧]

1.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여행기를 모은 편집본) 특이한 기행문 형식이 됐다.

2. “디아스포라야 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 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p.16)”이라고도 했는데 너무 이상적인 주장인 듯. 디아스포라적인 삶은 지극히 불안정한 삶인데 정치적 연대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물론 예술로는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3.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을 같이 읽으면 금상첨화 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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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0-01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꽤 무게 있는 리뷰를 쓰셨습니다. 소수자만이 가진 시각으로 썼을 책이라 우리 모두 읽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일본과의 역사 문제는 참 진전이 없네요. 일본과 관련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쌓여 있는데 언제 다 해결이 될지... 이 책을 검색해 보니 저자가 별세, 한 것으로 나오네요. 맞습니까?
세금을 다 내면서 일본에서 혜택을 못 받는다는 게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신문에서도 본 것 같아요.

yamoo 2025-10-01 18: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돌아가셨어요. 죽기전까지 한국을 오가며 집필하고 책을 냈는데..
오래 전 그의 <서양미술 순례>를 인상깊게 봐서 이후 그림 에세이집을 한 권 더 보고 이 책을 봤는데, 그가 왜 그렇게 미술작품을 많이 보고 미술 순례기 등을 썼는지 이 책을 보고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일독할 만한 책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 페크님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어떤 리뷰를 쓰실 지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