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색채로 재해석한 자연의 숭고미



작자미상, 총석정의 일출, 110×59cm, 종이에 채색


강렬한 색채 대비와 독특한 질감 표현이 돋보이는 수평 구도의 풍경화다. 110x59cm(40~50호 사이의 변형 규격)라는 가로로 긴 화면은 동해의 광활한 수평선과 주상절리의 수직적 위엄을 동시에 담아내기에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동양화 전공자의 수준 높은 작품으로작년에  5만원 경매 행사날에 억수루 운 좋게 낙찰받은 작품이다.


 

1. 색채의 상징성과 감정적 파동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강렬한 오렌지빛과 붉은색의 하늘이다. 상단의 뜨거운 붉은색과 하단 바다의 차분한 황토색, 그리고 바위의 무채색에 가까운 회색조가 대비를 이룬다. 이는 일출 직전 혹은 직후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시각화하며, 관람객에게 정서적인 고양감을 전달한다. 보색 대비와 긴장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채색의 밀도 또한 좋다. 종이에 채색 기법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그러데이션이 매우 부드럽고 촘촘하게 쌓여 있어 몽환적이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2. 수직과 수평의 조형적 질서


이 그림은 자연의 기하학적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다. 화면 우측을 지배하는 주상절리는 거대한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형상으로, 자연의 강인함과 수직적인 질서미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성벽이나 신전의 기둥처럼 묘사되어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울러 가로로 긴 화폭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수평선을 강조하여 시각적인 해방감과 여유를 주고 있다. 수직(바위)과 수평(바다/하늘)이 교차하며 화면의 구조적 안정감을 완성한다.

 


3. 세밀한 묘사와 질감(Texture)의 변주


주상절리와 좌측의 암석들을 표현한 선들은 매우 날카롭고 명확하다. 이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준법(바위나 산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듯한 느낌을 주며, 돌의 단단한 질감을 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화면 좌측 하단에서 부서지는 흰 파도는 정적인 바위와 대비되는 동적인 요소다. 일렁이는 물결의 세밀한 묘사는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풍경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4. 시점과 여백의 미학


부감법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통해 주상절리의 상단부(소나무와 정자)부터 발치에 부서지는 파도까지 한눈에 조망하게 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관조하는 자세로 볼 수 있겠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섬과 가까운 곳의 바위를 배치하여 깊이감을 형성했고, 특히 밝게 빛나는 태양 주변의 명도 조절은 화면의 중심부로 시선을 모으는 블랙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총 평


미학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자연의 숭고미(Sublime)'를 현대적 색채 감각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자연 경관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상절리라는 독특한 지형을 기하학적 패턴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적인 세련미를 갖추었다. 특히 정자라는 작은 인공물을 배치함으로써 거대한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고, 이를 통해 자연 속에서의 안식과 평온이라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강한 생명력과 정적인 명상이 공존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그림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

채색화는 캔버스에 유화를 칠하는 것보다 밑작업(아교포수 등)이 까다롭고, 색을 한 번에 올리는 게 아니라 수십 번 겹쳐 발라(중채) 깊이감을 만든다. 이 정도 밀도의 주상절리와 하늘의 그러데이션을 뽑아내려면 최소 수개월의 작업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인건비와 재료비를 고려하더라도 5만원 경매 행사에 낙찰받은 것은 진정 포르투나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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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4-15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 넘 멋있네요
작자미상인데, 나중에 유명 작가가 나타나는건 아닐까요?^^

yamoo 2026-04-16 10:48   좋아요 0 | URL
제가 작자 미상 이나 무명 작가 그림을 낙찰받아 공부해서 몇 개 작가를 알아낸 적이 있습니다. 그림 만큼 확실히 화력이 깊고 중견으로 지방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려고 열심히 발품팔면 알게 되더라구요. 멋진 그림은 얼추 그린 작가를 찾아가는 것 같아요. 작자 미상의 그림을 구매하는 하나의 매력입니다..ㅎㅎㅎ

카스피 2026-04-15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낙찰 받으셨네요.미술품의 장점은 고호에도 알 수 있듯이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대에 크게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무에 맘에 드는 작품을 저렴하게 구입행서 물려주는ㄴ 것도 좋은 미술 투자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yamoo 2026-04-16 10:54   좋아요 0 | URL
작자 미상은 경매에서 보통 시작가가 10만원 부터입니다. 1천원부터인 경매도 있어요. 시작가가 10만원인건 화풍이나 화력 등 그림이 풍기는 아우라에 따라 책정됩니다. 10만원부터시작해서 무섭게 치고 올라가 몇백만원에 낙찰되는 그림도 있어요. 누가 그렸는지 아는 사람이 경쟁이 붙어 사는 거겠지요. 저렴하게 구입하여 작가를 알면 그림 가격은 수배에서 수십배 뜁니다. 60-70년대 국전 특선 이상, 해외초대전 및 개인전 수십회 국전 심사위원 경력 정도 알려지면 가치가 달라지죠. 지방에서만 활동을 해서 이름이 아예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나중에 이력이 밝혀지면 그림은 제대로 대우 받습니다. 작자미상 그림을 찾게 되는 매력이라 하겠습니다..ㅎㅎ
 

경계를 허무는 상상력

-구상과 추상의 충돌이 빚어낸 현대적 해학-


작자미상, 고기잡이116.8×91cm, 캔버스에 유채



본 작품은 50호라는 작지 않은 화면 속에 동화적 서사와 현대적인 회화 기법을 과감하게 결합한 수작이다. 화면 중심을 관통하는 거대한 물고기와 그 위에 올라탄 아이,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노인들의 모습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선 초현실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작품이 지닌 조형적 가치와 예술적 담론을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1. 서사적 전복: 관조의 바다에서 유희의 바다로

 

작품의 좌측 상단과 중앙은 극명한 서사적 대비를 이룬다. 돛단배에 몸을 실은 두 노인은 전통적인 어촌의 풍경이나 '관조'하는 자의 태도를 보여 주는 반면, 화면 중앙의 아이는 거대한 물고기의 등에 올라타 거친 바다를 정복하거나 혹은 그와 하나가 되어 즐기는 '유희'의 주체로 묘사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케일의 왜곡'이다. 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된 물고기는 현실 세계의 물리적 법칙을 무너뜨리며, 이 공간이 작가의 내면적 상상력이 투영된 심리적 공간임을 암시한다. 노인들의 온화한 표정과 아이의 역동적인 행위가 한 화면에 공존함으로써, 작품은 세대 간의 대비를 넘어 인간 본연의 생명력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2. 조형적 실험: 액션 페인팅과 구상의 기묘한 동거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미학적 특징은 기법의 이중성에 있다. 인물과 물고기, 배의 형태는 명확한 윤곽선과 양감을 가진 구상 회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으나, 이를 에워싸고 있는 배경과 질감 표현은 지극히 추상적이며 즉흥적이다.

 

특히 화면 상단의 황금빛 소용돌이와 하단의 푸른색 드리핑(Dripping) 기법은 잭슨 폴록식의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킨다.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적인 선들은 정적인 구상 형태 위에 겹쳐지며 시각적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노이즈'는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구상화에 현대적인 세련미와 속도감을 부여한다. 수면 아래를 표현한 푸른색 층위 위에 다시 얹어진 밝은 하늘색의 자유로운 드로잉은 물의 깊이감보다는 '화면의 평면적 리듬'을 강조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캔버스라는 물리적 표면 자체를 인지하게 만드는 현대미술적 장치로 작용한다.

 

 

3. 색채의 긴장과 조화: 보색 대비를 통한 에너지의 응축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색조는 상단의 오렌지·황토색 계열과 하단의 블루 계열의 보색 대비이다. 이 강렬한 온도 차이는 화면을 상하로 분절하는 동시에, 시선을 중앙의 물고기와 아이에게로 강력하게 수렴시킨다.

 

전통적인 풍경화가 원근법을 통해 공간의 깊이를 추구한다면, 이 작품은 색채의 대비와 겹침(Layering)을 통해 깊이를 형성한다. 물고기의 어두운 비늘과 아이의 흰 셔츠는 배경의 화려한 색채들 사이에서 명도 대비를 이루며 시각적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또한, 배경 곳곳에 스며든 미세한 금색의 흔적들은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푸른 화면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전체적인 색채 균형을 맞추고 있다.

 

 

총 평

 

본 작품은 구상 회화가 가진 '이야기의 힘'과 추상 회화가 가진 '표현의 자유'를 한 그릇에 담아내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업(초현실주의라고 봐도 무방한)이다. 기법적으로는 다소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학'이라는 한국적 정서로 버무려낸 점이 인상적이다.

 

비록 배경의 장식적 요소가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면서 물체의 입체감을 간혹 상쇄시키는 아쉬움은 있으나, 50호라는 대작을 밀도 있게 끌고 나가는 작가의 필력과 구성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그림은 박제된 풍경이 아니라, 지금도 꿈틀대며 움직이는 상상력의 생동감을 증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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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을유문화사, 2021 [유일한 한국어판]


, 진짜 고약한 책이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을유, 2016)3번 도전 끝에 드디어 완독했다. 진짜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진짜 인내심을 갖고 봤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책세상, 2010)을 같이 읽고 있었는데, 두 책 똑같이 약간만 딴 생각을 하면 도대체 내가 무슨 내용을 읽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이 어렵고 난해해서 그런게 절대 아니다. 번역이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매우 난해하긴 하지만 번역이 거지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망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따라가는 맛이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번역이 그냥 헬이다. 이런 문장을 세계문학에서 볼 줄은 몰랐다.

 

일단 다음의 문장을 보자. 언뜻 보면 잘 모른다. 왜 문장들이 안 와 땋는지. 문장과 문체가 넘사벽이라 제발트라는 브랜드가 확립한 작가다. 그런데 한국어 문장은 그냥 비문(非文)이라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지뢰처럼 흩어져 있다.

 

배들이 어슴푸레한 상태에서 갈탄이 타고 있는 동력 장치의 실루엣을 돌리는 것처럼, 석회색의 마름돌과 꼭대기가 톱니 모양인 냉각탑, 그리고 높이 솟은 굴뚝 위로 병든 색으로 줄무늬가 난 서쪽 하늘을 향해 연기가 깃발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지요.” (223)

 

그리고로 이어진 부분을 보면 중요한 문장 성분이 빠져 있다.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문장을 어찌나 해석을 열심히 했는지 해석문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심지어 91페이지는 무려 3번 이상 읽었다. 하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 심각한 문장들을 좀 살펴보겠다. 한국어 번역본을 완전히 망쳐놨다.

 

그 호수를 가로질러 흐른다고 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어요. 이 두 개의 강은 과거 성경에 기록된 홍수에서 몰락하지 않고 구조된 유일한 사림들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에반이 말해 주

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기치는 발라 호수의 이쪽 끝에서 봉우리 사이의 낮은 부분을 지나 알폰 모데이크 계곡으로 나아갔지요. 산들은 높아지고 점점 더 철로 가까이 다가오다가 돌겔 초원을 향해 내려갔고, 그곳에서 다시 뒤로 물러나고 부드러운 비탈들은 피오드르처럼 넓게 육지 안으로 들어오는 모데이크 어귀에서 가라앉았어요. 우리가 느린 속도로 남쪽 해안에서부터 강력한 참나무 기둥 위에 놓인 거의 1마일 길이의 다리를 지나 다른 편으로 건너가서, 오른쪽으로 만조 때면 바다에서 넘쳐난 강바닥과 왼쪽으로는 밝은 지평선까지 바머스만으로 기차를 타고 갈 때면, 나는 좋아서 어디를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요. 아델라는 대부분은 검은 광택이 나는 작은 마차를 타고 바머스 정거장으로 우리를 마중 나왔고, 그런 다음 30분 정도 가면 안드로메다 별장 입구의 자갈길이 바퀴 밑에서 뽀드득거리며 여우색 조랑말이 멈취서고, 우리는 방학 동안 묵을 숙소에 내렸지요. 밝은 회색 벽돌 담장을 한 2층 집은 북쪽과 남동쪽으로는 그 자리에서 가파르게 낙차를 보이며 연결되는 로우어 레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었지요. 남서쪽으로 반원 형태의 지형이 넓게 펼쳐져서, 시야가 앞 공간으로부터 돌겔 초원의 전체 길이로 난 강 어귀를 넘어 바머스까지 펼쳐졌지만, 이 장소들조차도 한편으로는 바위가 많은 돌출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월계수 수풀 때문에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거의 보이지 않는 파노라마에서 제외되고 있었지요.” (91)

 

유일한 사림들 : ‘유일한 사람이겠지. 이런 작은 조사들 때문에 이상하여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다시 뒤로 물러나고 부드러운 비탈들은 피오드르처럼 넓게 육지 안으로 들어오는 모데이크 어귀에서 가라앉았어요. : 비탈들이 어귀에서 가라앚았다는 말. 근데 비탈들이 피오르드처럼 넓게 육지 안으로 들어오는 모데이크 어귀에서 가라앉았다고 한다. 첨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몇 번 읽다 보니 대충 무슨 비유인지 알겠다. 활유법이란 게 있잖나. 그걸 우리말처럼 잘 다듬어 썼어야 했다고 본다.

 

안드로메다 별장 입구의 자갈길이 바퀴 밑에서 뽀드득거리며 여우색 조랑말이 멈취서고, : ‘멈춰서고가 두 번 걸린다. ‘자갈길이 뽀드득거리며 멈춰서고’, ‘여우색 조랑말이 멈춰서고등 두 개 모두 걸려 모호한 문장이 됐다. ‘뽀드득거리며에서 쉼표를 안 찍은 이유가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면 중의성이 없게 바꿔야 한다.

 

2층 집은 북쪽과 남동쪽으로는 그 자리에서 가파르게 낙차를 보이며 연결되는 로우어 레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었지요. : 2층 집이 로우어 레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정보다. 문제는 그 다음 정보. 북쪽과 남동쪽으로는 그 자리에서 가파르게 낙차를 보이며 연결되는 로우러 레치 언덕이 어떤 언덕인지 도무지 상상을 할 수 없다. 왜 자꾸 ~~를 보이며 ~~하는 으로 연결하는 문장을 구사하는지 모르겠다. 문학에서 누가 저따위 문장을 쓰는지 모르겠다.

 

시야가 앞 공간으로부터 돌겔 초원의 전체 길이로 난 강 어귀를 넘어 바머스까지 펼쳐졌지만, : 시야가 바머스까지 펼져졌다. 깔끔하게 끝난 문장이다. ‘앞 공간으로부터 초원의 전체 길이로 난 강 어귀를 넘어를 주어 뒤에 붙여 넣으면 전체 문장이 어색해 진다.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관계사 문장을 염두에 두고 해석 작업을 하니 문학적 번역이 되지 않는 거다.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거의 보이지 않는 파노라마에서 제외되고 있었지요. : 거의 보이지 않는 파노라마에서 제외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모르겠다. 왜 이러한 문장으로 번역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91페이지를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빛나는 수사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제발트가 이런 식으로 문장을 썼을리 만무하다. 진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딴 생각 하면 이상한 미로를 걷는 생경함. <아우스터리츠>가 이런 번역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어쨌거나 기차로 라인 계곡을 따라 내려갈 때면 내가 지금 내 생애의 어떤 시간에 있는지 알지 못했어요. 저녁 빛 사이로 나는 그 당시 다른 쪽 강변 위로 퍼져 가고 곧 하늘 전체를 관통하는 타오르는 아침 노을을 보았고, 오늘 라인 강 여행을 생각한다 해도, 이 두 번째 여행이 첫 번째보다 덜 끔찍하진 않았으며 머릿속에는 내가 체험한 것과 책에서 읽은 것,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는 기억들, 계속되는 이미지들과 그 속에 전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통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들, 이 모든 것이 뒤섞여 버려요.” (249)

 

참으로 더디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한 번 읽고 또 읽고. 주인공 아우스터리츠가 어느 순간 기억을 잃었다가, 장성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차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비슷하다. 모두 자신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하지만 파트릭의 소설이 훨씬 재밌고 인상이 오래 남는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는 쓰잘데기 없는 장소와 공간 그리고 건물에 대한 얘기가 너무 많다. 장소와 공간 그리고 건물이 2차대전 독일의 수용소 및 감옥과 연결되어 이 장소가 과연 과거의 나치 그 장소인지 확인을 해야 했다. 정말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미는 없는 소설이 번역도 고약하니 정말 최악인데 한국어 판본이 왜 이렇게 상찬을 받는지 모르겠다.

 

읽는데 혼났다. 장장 한 달이 걸렸다. 제발트 소설 따위는 다시는 쳐다도 안 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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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09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을 철학 텍스트처럼....참 적절한 비유입니다!!!

yamoo 2026-04-10 09:14   좋아요 0 | URL
진짜 그렇습니다. 같은 곳을 2-3번씩 읽는 쪽수가 몇 페이지인지 헤아릴 수 없어요. 완전 고약합니다. 문장들을 죽~~보면 문장들은 문학에서 나올법한 문장들이 아닙니다. 헌데 왜그렇게 상찬받는지 도무지 오리무중입니다!

페넬로페 2026-04-10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불필요한여자] 읽고 있는데, 이 책 읽으면 꼭 [아우스터리츠]읽어봐야 하거든요.
큰일이네요.
번역된 출판사가 하나뿐이라서요.

yamoo 2026-04-10 09:17   좋아요 1 | URL
유일한 한국어판본이에요. 이 번역자뿐만 아니라 을유문화사 독일어문학권 번역이 대체로 좋지 못하지만 이 책이 아주 두드러집니다. 읽다보면 아주 정독하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고 되고 내용 자체는 좋습니다만...그리 재미는 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같은 주제를 훨씬 재미있게 풀어놓은 소설...아우슈비츠에 대한 소설은 너무나 많이 읽어 이제는 피로감이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한 번 더 읽었다. 이로써 도합 4번이다. 현직 심리상담사 선생님이 진행하는 독토가 있어 참석했는데,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무감각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 좋았다. 이 책으로 3번의 독토를 경험했지만, ‘무감각에 대해 심도 있게 짚은 토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현직 상담사의 시각은 참신했다. 기억하기 위해 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독토를 복귀하며 논제를 정리해 놓는다.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 새로운 판본으로 읽었다. 각 타이틀은 토론의 논제를 집약한 것이다.

 

 

1⃣  '무감각'은 자기방어인가, 감정의 메마름인가

 

'무감각'은 분명 저자가 말한 것처럼 극단적 상황에서 작동하는 정신적 자기방어의 측면이 있다. 인간이 지속적으로 고통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정을 차단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선택된 방어로만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무감각'은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정서적 소진이나 탈진에 가깝다. 특히 반복된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개인의 성향(회피형, 불안형 등)에 따라 감정 둔화가 자동적으로 나타난다. , 이는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 환경과 성향이 결합된 결과다. 또한 '무감각'은 단순한 보호를 넘어 인간의 공감 능력과 도덕적 판단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따라서 '무감각'을 긍정적 적응으로만 해석하기보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신호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이 점에서 저자의 설명은 지나치게 기능적 측면만 강조한 한계가 있다.

 

 

2⃣  삶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인가

 

저자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핵심 동력이라고 보지만, 이는 인간을 지나치게 의미 추구적 존재로 단순화한 측면이 있다. 실제 삶에서는 의미 없이도 살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일상은 반복과 습관, 관계 유지와 생존의 연속이며, 매 순간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또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상태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을 낳기도 한다. “왜 나는 의미를 못 찾는가라는 자기 비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 상황에서는 의미가 강력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필수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의미를 찾으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그냥 살아가는 것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건강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이론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 보편적 해법으로 일반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3⃣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삶의 의미

 

수용소에서 인간이 번호로 환원되었던 것처럼, 현대 사회 역시 개인을 기능이나 역할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직장에서는 성과, 사회에서는 효율과 관계의 소비성이 강조되면서 개인의 삶 자체는 쉽게 주변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타인의 삶이 중요하지 않게취급되는 현실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구조적으로 주어지기보다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한 개인의 존재는 대체 불가능한 의미를 가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의미를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저자의 논의는 인간 존재의 존엄을 강조하지만, 현실에서는 사회적 조건이 그 존엄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킨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밀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점에서 저자의 인간 존엄에 대한 강조는 이상적이지만, 사회 구조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4⃣  기대와 실망, 감정 절제의 문제

 

기대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너질 때 치명적인 좌절을 낳는다는 점은 중요한 통찰이다. 실제로 지나친 기대는 현실과의 간극을 키워 심리적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을 절제하고 기대를 관리하는 태도는 일정 부분 필요하다. 그러나 감정 절제를 무조건 현명한 전략으로 보는 것도 문제다. 감정을 억제하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정서적 둔화나 관계 단절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의 성향에 따라 기대를 통해 동기를 얻는 사람도 있고, 기대를 줄여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 기대와 감정 조절 방식은 개인차가 크다. 저자의 사례는 극단적 상황에서의 경향을 일반화한 측면이 있으며, 일상적 삶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기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유연하게 조정하는 능력이다.

 

 

5⃣  자유 의지와 도덕성은 보편적인가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보지만, 이는 인간의 조건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도덕적 선택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성장 환경, 교육, 성향, 그리고 당시의 심리적·신체적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극단적 상황에서는 생존 본능이 도덕성을 압도하기도 한다. 따라서 선한 자유의지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일정한 조건 속에서 발현될 가능성에 가깝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서도 도덕적 선택을 한다. 그러나 이를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비난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저자의 주장은 인간 존엄을 강조하는 데는 의미가 있지만, 현실 인간의 복잡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자유의지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이라기보다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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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을 컬렉션해서 집에 걸어 둔다고 하면, 꼭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다. 그림을 사서 걸어두는 삶은 어떤 삶이냐고. 일종의 위화감의 다른 표현같다. 아주 엔날에 내가 4벽을 모두 책으로 둘러놓은 곳에서 책을 읽는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책을 읽는 그런 한량같은 생활은 자기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대동소이한 말이라서.

 

그 사람의 뒷말이 위화감의 실체를 뒷받침했다. 책을 소장하고 읽으려면 서재라는 공간이 필요하고 그만한 공간이 있으려면 부르주아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럴까? 당시 나는 10평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고 평생의 소원이던 서재 벽 4면을 책으로 채울 수 있었기에 뿌듯했는데 어떤 이에게는 이게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이었나보다.

 

음주와 흡연을 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돈이 적게 나가고 기호품 중 책은 의외로 돈이 적게 드는 취미 컬렉션 중 하나다. 1300권을 산다고 해도 저렴한 헌책방에서 사면 150만 원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7년 정도 지나면 약 1천 만원으로 2000 천 권 넘게 모을 수 있다. 이게 부르주아적인 삶인지 잘 모르겠다. 음주와 흡연을 7년 정도 했다고 하면 1년에 150만 원만 될까.

 

어쨌든 책 이야기를 소환했던 건 그림 컬렉션이 취미 생활의 끝판왕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이다. 컬렉션을 해 보면 안다. 컬렉션의 끝은 미술품 구매라는 걸. 돈도 돈이지만, 구매에 아주 큰 돈이 들어가니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심미적 안목이 뒷받침 돼야 엄한 걸 구매하지 않는다. 갤러리가서 갤러리리스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막 데뷔한 신진작가의 10호 그림을 3백만 원에 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거다.

 

미술품 중 대중에게 그나마 접근성이 쉬운 게 그림이다. 갤러리나 아트페어에 가면 그림이 주가 되는 이유가 다 있는 거다. 대중이 쉽게 사서 집 거실에 편하게 걸 수 있는 게 그림이기에 미술품의 대명사가 그림이 된 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집에 그림 하나 걸려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소유자의 취미가 고상한 것으로 승격되는 마술을 발휘하곤 하니까.

 

헌데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안다. 집에 그림을 걸어놓는 직원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림을 어디서 구입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아트페어에 가 보면 사람들이 넘친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아트페어는 그림 장터와 마찬가지의 공간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듯이 그림은 아트페어에 가야 다양한 매물을 볼 수 있고, 구매할 그림의 선택을 늘릴 수 있어 좋다.

 

원래 그림을 파는 곳은 갤러리다. 우리나라는 마트처럼 갤러리가 동네에 있지 않다. 물론 있는 곳도 있긴 하지만 금새 망한다. 대부분 갤러리들은 모여있다. 강남 청담동, 종로 인사동, 서대문구 홍대부근 등에 몰려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 그림은 사치재로 분류되기 때문에 비싸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 상권이 형성되지 않으면 홍보도 어렵고 그림 팔기도 힘들다.

 

아까 위에서 책 얘기를 했는데, 그림은 책과 동일한 기호를 표출하는 물건이지만 경제적으로 그 가치가 확연히 구분된다. 책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그림은 매우 비싸다. 책은 대중적인 상품이고 그림은 절대 대중적이지 않은 사치재이기에. 그래서 그림을 걸어놓는다고 하면 일반적이지 않은 삶이 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위화감을 발생시킬 정도로 다른 세상의 삶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갤러리에 가서 그림 가격을 물어보면 기가 찬다. A4용지 크기만한 신진작가 그림이 50만 원이란다. 미키마우스를 그린 작은 그림이. 위화감을 느낄만한 가격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그림을 걸어놓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나온다. 고액 연봉을 받는 사람 중 그림을 향유할 줄 아는 특권층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 취미활동이 아닌 쓸모 없는 작은 그림을 몇 백만 원을 주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을 생각할 때 갤러리 그림값은 일반 샐러리맨들이 접근할 수 없는 가격이다.

 

왜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을까? 나는 우리나라의 미술시장이 기형적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그림 시장이 가장 많이 왜곡되어 있다. 그림을 집에 걸어놓는 집이 5가구 중 하나라는 통계는 참으로 많은 것을 나타내는 지표다. 통계 숫자보다 표면적으로 느끼는 바는 아마도 10가구 중 한 집이 그림을 걸어놓을 것이다. 아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30가구 중 하나이지 않을까. 내가 아는 직원만 100명이 넘는데 집에 그림이 있는 집은 딱 1곳이었다. 그 이유가 자기 언니가 회화를 전공했단다.

 

생활 문화 전반에 그림을 향유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심지어 벽은 아무 것도 걸어놓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분들도 만나 봤다. 뭔가를 걸거나 붙여 놓으면 안된다고. 참 특이한 나라다. OECD 선진국 중 우니나라만큼 미술 저변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 필리핀이나 인도를 대상으로 찍은 다큐멘터리를 봐도 집에 그림 하나씩은 다 있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는 말해서 뭘할까. 그 나라 주민들의 집들은 우리나라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좋은 환경의 집이 아니다. 그럼에도 벽에 그림이 걸려 있음을 본다.

 

우리나라는? 없다. 대체로 없다. 당신의 집을 생각해 보면 된다. 사무실에는 그림이 있는가? 회사 사무실에는? 최근에 교육을 들으러 연수원에 간 적이 있다. 연수원 화장실을 가니 김환기 복제 그림들이 작게 걸려 있는게 보였다. 연수원 직원들에게 그 작은 그림들은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놀라면서 화장실에 그림이 있어요?” 쉬하는 변기 눈높이에 변기 위 마다 붙어있는데 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림에 관심이 없다. 하도 바쁘게 사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선진국을 넘어 국제 공급망을 좌우할 정도로 큰 나라가 됐는데, 문화면에서도 강국으로 올라섰는데 여전히 미술 문화는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문학이나 미술은 아직도 아프리카 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아서다.

 

제일 큰 원인이 우리나라 미술 시장에 있다. 아니 원죄는 미술인들이겠지. 상아탑에 갇혀 그들만의 리그를 최우선시했기에 비리도 많고 시장이 왜곡되는 걸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10집 건너 그림이 있는 나라에 연 전시회가 1만여 건에 달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저렴한 그림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작가들은 연봉 500만 원도 안 되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작가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위에서 그림을 사서 걸어 두는 생활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그림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아트페어나 갤러리에서 경력이 일천한 신진작가 1호 그림이 30만 원을 넘는다는 건 아주 심각한 시장 왜곡이다. 타 상품과 비교해 가격(작가)의 선택폭이 너무 좁다. 외국처럼 저가 작품을 취급하는 갤러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장이 전혀 없으니 비싼 그림이 대접받는 이상한 시장이 형성되는 거다. 미국이나 유럽은 동네 작가들을 위해 3만원, 5만원, 10만원 정도의 그림을 파는 갤러리들이 꽤 된다. 아마추어 작가나 등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작가들을 위한 갤러리다.

 

10(50×45cm) 그림 한 점에 5만 원이나 10만 원 정도면 그리 비싸지 않아 집에 좋아하는 그림을 걸 만하지 않을까. 헌데 우리나라는 이런 시장 자체가 없다. 멕시코나 브라질 심지어 인도에도 있는데 말이다. 세계에서 순수 미술 작가들은 대체로 가난하지만 우리나라 작가만큼 어려운 나라도 없을 듯하다. 저가 그림 시장 자체가 없으니 작가들이 그림을 팔래야 팔 수 없는 거. 갤러리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림값이 10호에 200백 이상이니 누가 그림을 사겠는가.

 

물론 우리나라에서 좋은 원화 그림을 10만 원 내에 살 수 있는 곳이 아예 없지는 않다. 소규모 경매를 이용하면 중견 화가 이상의 10호 작품을 10만원 이하로도 낙찰 받을 수 있다. 1천원부터 시작하는 경매가 있어 운이 좋으면 원로 작가의 원화를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이고, 경매에 참여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하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확고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매하고도 후회하게 된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림을 사서 걸어 두는 삶이 현실과는 유리된 특권적 삶이 아니라는 점이다. 쉽게 얘기해서 어떤 사람은 버버리 코트를 300만 원에 사서 그 브랜드를 향유하지만 나는 그 정도 퀄러티 상품을 10만 원에 사서 그 클래식함을 즐긴다는 차이다. 책도 마찬가지. 누구는 3만 원 정가 주고 사지만 나는 헌책방을 전전하며 같은 책을 5천 원에 데려오는 삶 말이다. 이게 현실과는 유리된 특권층의 삶인지 모르겠다.

 

나는 갤러리에서 좋은 그림을 500만 원, 1천만 원 주고 살 돈이 없다. 그 정도 작가는 경매 시장에 나올 확률이 거의 없다. 쉽게 말해서 되팔 수 없는 그림들이다. 나는 그림은 무조건 최대한 싸게 구입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래야 나중에 되팔 수 있다


 농촌풍경, 122×61cm, 캔버스에 유채


쉽게 생각해서 국전 심사위원장이나 교수 출신 30호 그림을 1천만 원에 구입했다 치자. 갤러리 적정가격이다. 하지만 갤러리에서 산 그림은 절대 그 가격에 되팔 수 없다. 10만 원에 구입했다면? 되팔 수 있다. 이 정도 경력의 30호 그림이면 30만 원에 내 놔도 수요가 있다. 되팔 수 있게 된다.

 

그런 그림을 집에 사서 걸어놓는 삶이 특권층의 삶이라면 할 말이 없다. 요즘 브랜드 코트 한 벌도 아울렛에서 사면 20만 원이 넘는다. 내 임금이 월 200만 원이라면, 한 달에 취미로 20만 원 정도 지출하는 삶이 특권층 삶이라면 사람들이 비웃겠지. 근데 그것이 그림이라면


갤러리에서 5백 만원에 팔리는 그림을 10만 원에 살 수 있다면 그건 특권층의 삶이 아니라 그림 덕후의 삶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옷 덕후, 책 덕후들은 해당 상품에 대한 가격에 빠삭해서 좋은 품질의 상품을 아주 저렴하게 살 수 있다. 그림 덕후도 마찬가지. 그림을 싸게 사서 그림 자체를 즐기는 삶. 이건 특권층의 삶이 아니라 덕후의 삶이지 않을까. ()

 

 

[덧]

1.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갤러리에서 5백 만원 정도에 팔리는 원화 그림을 50만 원 미만에 살 수 있는 방법을 써 볼까 한다. 

2. 위 그림은 내가 몇 년 전에 인터넷 온라인 경매에서 10만원에 낙찰받은 그림이다. 박수근 그림을 좋아해서 박수근 화풍이 있는 그림을 컬렉션하곤 한다. 이 그림은 박수근 화풍에 작가적 색채가 드러나 입찰해서 데려온 그림이다. 당시 작가 서명을 알아볼 수 없어 작가 미상작으로 저렴하게 나온 작품인데, 열심히 찾아 보고 공부해서 작가 이력을 알게 됐다. 작가 미상의 저렴한 작품은 이런 매력이 있다. 심지어 1천원부터 시작하는 경매가 있어 좋은 작품이 5만원에 낙찰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3. 이 그림을 지인(미술가임)이 집에 와서 보고 낙찰 받은 가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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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6-04-04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좋아하고 집에 짝퉁 프린트 액자나 미술관 포스터 등 여러개 있는데요. 이런 진짜 그림 걸어 놓는 것도 위시입니다!!! 제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랄까요. 그림 진짜 멋지네요..

yamoo 2026-04-06 09:07   좋아요 1 | URL
그림 좋아하는 분들 의외로 많고, 이런 분들이 주로 프린트를 액자해서 걸어놓더라구요. 포스터를 액자해서 걸어 놓은 분들도 봤습니다. 물어보니 원화는 너무 비싸서 감당이 안된다더군요. 저도 오지 않을 미래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 그림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림을 선물받거나 어떤 루트로 원화 그림을 소장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림을 사게 된다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어쨌거나 포겟님의 위시가 이루어지길요!!

카스피 2026-04-05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야무니처럼 커다란 서가가 있는 집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지요.사실 책 구매가 흡연과 음주에 비해서 그나마 돈이 덜가고 건강을 안 해치는 저렴한 취미(물론 값비싼 고가의 취미도 있겠지요)임에는 틀림 없으나 조그만 방에서 책만 가득 쌓아놓고 사는 것도 사실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누구 말 마따나 서가 1평을 넓히기 위해서 서울에서는 평당 수천만원이 들어가다고 하니 책을 모우는 취미도 가난한 서민에게는 사치인가 봅니다ㅜ.ㅜ

yamoo 2026-04-06 09:10   좋아요 0 | URL
물론 책을 디피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긴합니다만, 어떻게든 쌓아놓고 살아도 되긴 합니다.ㅎㅎ 책때문에 불편하지만^^;;
엔날에 제가 시도했고, 아는 분도 지금 지금 쟁여놓는 방법인데 책을 바닥부터 천정까지 벽을 따라 일직선으로 쌓는 겁니다. 꽉 채우면 기둥처럼 되요..ㅎㅎ 책도 아주 많이 쟁여넣을 수 있어 좋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