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은 내가 살아온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시작되었다. 지난해 개인전의 제목을 세계는 나의 아비투스다라고 정한 것은 내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축적해온 세계의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그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오래된 문서와 인쇄물, 책의 일부, 화폐, 문자와 광고 이미지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접하고 지나온 것들의 흔적이며, 나에게 내면화된 세계의 파편이다. 나는 이 파편들을 화면 위에 다시 배열하고 겹쳐 놓으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세계가 기억과 습관을 통해 변형된 내면의 풍경에 가깝다.

 

특히 아비투스 콜라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붙였는가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였다. 오래된 종이 위에 이미지가 겹쳐지고, 문자가 일부 가려지며, 서로 다른 시간의 흔적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한다. 처음에는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화면 안에서 그것들은 더 이상 독립적인 대상으로 남지 않는다. 잘려지고, 중첩되고, 가려지고, 다시 드러나면서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구조라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어떤 것은 다른 기억 위에 포개진다. 현재의 경험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현재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형태를 갖는다. 내가 화면 위에 파편을 쌓아 올리는 행위는 결국 이러한 기억의 작동 방식과 닮아 있었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나에게 단순히 사회적 환경이 남긴 습관이나 성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세계를 보고 선택하고 배열하는 하나의 감각적 구조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화면에 남기는가,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고 어떤 것을 지우는가, 무엇을 겹치게 하고 무엇을 비워두는가 역시 내가 축적해온 시간과 경험의 결과다.

 

지난해의 세계는 나의 아비투스다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작업에 대한 하나의 출사표였다. 나는 세계를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내 안에 축적된 방식 자체를 화면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때 시작된 질문은 이후 작업에서 점차 이미지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지금의 작업에서 내가 말하는 구조역시 결국 그 아비투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남긴 흔적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충돌하고, 겹쳐지면서 하나의 화면을 이루듯이, 나의 작업 역시 그렇게 축적되어 왔다.

 

그러므로 지난해의 아비투스 콜라주는 끝난 작업이 아니라 지금의 작업이 시작된 자리다. 내가 남기는 모든 작품은 결국 내가 살아온 세계가 나에게 남긴 흔적이며, 동시에 그 흔적을 다시 바라보고 재구성한 나 자신의 기록이다. 세계가 나의 아비투스라면, 내가 만드는 화면 역시 나의 아비투스가 된다.



[덧] 개인전 포스터가 나왔습니다. 5월부터 8월까지 쉬지 않고 달렸네요. 올해는 8월 개인전 이후 9월 이후 초대전이 한 번 더 잡혀 있습니다. 올해는 제 조형언어를 발견한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그래서 올 개인전과 도록은 제게 무척 중요한 사안이 됐네요. 모처럼 근황을 전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최근 읽고 있는 유익한 현대미술사 책이 있어 부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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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12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대단하시네요.개인전이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yamoo 2026-08-13 11: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대단할 정도는 아닙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어요~~ㅎㅎ

cyrus 2026-08-12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 28일에 하루 연차 신청했어요. 그날 저녁 독서 모임이 있어서 연차 신청을 한 건데, 마침, 잘됐네요. 개인전 보러 서울에 가야겠군요. ^^

2026-08-13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리얄리 2026-08-1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원하시는 결과 얻으시길 기원드리고 응원드립니다!
 



영화 모임에서 무대 인사 영화를 예매하여 19일 영화 <HOPE>를 볼 수 있었다. 예고편을 보고 무척 기대를 했었는데, 영화 개봉이후 평이 갈리고 평점이 낮아 기대가 많이 낮아졌다. 


그럼에도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봤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매우 재밌게 봤다. 2시간 30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재밌었다. 물론 개연성과 핍진성이 매우 떨어지는 건 사실이고, 조인성은 죽어도 너댓번은 죽어야하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심히 거슬렸다.


마지막 외계인이 성경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걸 들먹이는 장면에서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크리처물이이라서 그런가 어디서 본 듯한 연출과 크리처의 모습이 진격의 거인과 너무 흡사해서 진격의 거인 실사판을 보는 듯하기도 했다.


사건의 개연성은 말해서 뭣하랴. 하지만 이 모든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끊임없이 주인공들이 달리는 장면은(크리처의 속도를 보면 단번에 잡혀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의 속도를 계속 크리처가 못따라 잡는 것도 도드라진 결함) 뭔가 속도감을 주고 몰입감을 주는 효과가 있었다. 너무 계속되어 피로도가 쌓인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난 재밌었다.


평가가 너무 극과 극이라 이 영화 보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만큼 형편없지는 않다. 장면 하나하나는 나름대로 잘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충분히 재밌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돌비 시스템에서 보면 확실히 재미가 보장되니, 꼭 돌비로 보길 강추드린다.


이 영화를 본 가장 큰 소득은 뭐니 뭐니 해도 조인성의 실물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 진짜 얼굴 작고 잘생겼다. 조인성을 1미터 정도에서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커다란 소득. 내 앞의 여성분은 조인성과 같이 사진을 찍어 남기기까지 했다. 객석을 돌면서 배우들이 인사하는 건 좀 이례적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 영화 재밌다. 너무 기대에 차서 디테일 하게 보기 보다 한 편의 재미있는 오락영화 본다고 생각하면 돈 아깝지는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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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22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영화 초기 마을의 끈적한 긴장감과 추격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yamoo 2026-07-23 12:57   좋아요 0 | URL
이걸 재미없다고 하는 분들은 도대체 어떤 영화가 재밌다는 건지...판타지 영화는 장르에 맞게 그냥 보면 되는데, 뭔 그렇게도 비판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근래 본 한국 영화 중 재미 면에서는 그냥 원탑입니다..ㅎㅎ

페크pek0501 2026-07-23 1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관람 하셨네요. 조인성 님의 팬이 많지요.
이제 저는 2시간 30분간 같은 자리에 앉아 시청한다는 게 쉽지 않네요. 힘들어요.
연극을 보러 가면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 좋더라고요.^^

yamoo 2026-07-23 12:59   좋아요 1 | URL
저도 2시간이 넘어가는 영화는 좀처럼 집중하기 힘들어요. 그치만 호프는 지루할 틈이 없어요..ㅎㅎ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근데 페크님 정말 올만이시네요..^^

얄리얄리 2026-07-27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게 언제였는지 정말 오래 지났었는데, <왕사남>을 영화관에서 보았고 이것도 보려 합니다. 1년에 두 번 영화관 가는 것 만으로도 좋은 것 같습니다(올해 또 갈지는..). 날씨도 덥고 요즘 복잡한 일도 있어서 이런 영화 보면서 잠시 머리식히며 쉬는 것으로 대만족입니다.

yamoo 2026-07-27 18:50   좋아요 0 | URL
얄리얄리님 올만입니다!

잠시 머리 식히기에는 금상첨화인 영화입니다. 이만한 영화 없숩니다!ㅎㅎ
꼭 돌비로 보셔요~~~
 
문화로 읽는 세계사 - 문화의 눈으로 역사의 진실을 읽는다, 개정증보판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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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 교수의 문화로 읽는 세계사(사계절, 2015)는 거대 서사와 연대기 중심의 건조한 역사 서술에서 탈피하여,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와 문화적 매개체를 통해 인류사의 발자취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저작이다. 본 글에서는 책이 제기하는 주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현장의 목격, 인물의 재평가, 현재적 시사점, 그리고 기존 인식의 전도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그 세계사적 의미를 읽어보고자 한다.


 

1. 인본주의의 이행기적 역동성: 피렌체 광장에서의 인간적 가치 분출

역사적 시공간의 이동을 상정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반에 이르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광장이다. 저자가 묘사하는 이 시기는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해체되고, 신의 피조물로서 지닌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내재적 가치에 눈을 뜨던 격정적인 패러다임 전환기이다.

 

당시 피렌체는 페스트가 남긴 파멸적 상흔 위에서 고전 고대의 텍스트를 재발견하고, 브루넬레스키의 돔으로 대변되는 기술적·예술적 성취를 이룩하던 문명사적 용광로였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억압 하에 은폐되어 있던 인간의 신체, 감각, 그리고 현세적 아름다움이 예술과 학문을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인류 지성사의 가장 역동적인 국면을 체험하는 것과 같다. 광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신학적 교리가 아닌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을 두고 전개한 치열한 담론 형성의 공기를 공유하는 것은, 현대 시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인본주의적 사유의 시원을 추적하는 작업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2. 근대적 탐욕과 타자화의 메커니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비판적 재평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따라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가장 시급하게 재평가되어야 할 대상이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과 영웅주의적 서사는 그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불굴의 개척자이자 '신대륙의 발견자'로 신화화해 왔다. 그러나 텍스트가 지시하는 역사적 실체 속의 콜럼버스는 문명사적 영웅주의와 거리가 멀다.

 

현대적 관점에서 콜럼버스는 초기 근대 자본주의가 잉태한 무제한적 탐욕과 타자(Other)에 대한 구조적 약탈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환대적 태도를 황금 획득과 노예화의 기회로 치환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 문명 파괴와 대량 학살이라는 인종적·문화적 홀로코스트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항해가 지닌 지구적 연결망 형성의 파급력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제는 유럽 중심주의적 '발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문명 간의 비대칭적 충돌과 대량 희생의 관점에서 그를 재위치시켜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이야말로 탈식민주의적 지구촌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는 시발점이 된다.

 


3. 위기 상황에서의 사회적 아노미와 연대의 정당성: 페스트 대유행의 역사적 거울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비추는 인식론적 거울이라는 명제를 수용할 때, 현대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사건은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페스트) 대유행'이다. 최근 인류가 경험한 전 지구적 팬데믹 상황은 중세 말기의 대재앙이 유발한 사회적 거동과 구조적으로 결을 같이 한다.

 

당시 페스트의 창궐은 단순한 병리학적 재난을 넘어 사회적 신뢰 체계의 붕괴와 극단적인 타자 혐오를 양산했다. 불확실성과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군중은 이성적 대응 대신 마녀사냥을 자행하거나 특정 소수자 집단을 대재앙의 속죄양으로 삼아 학살하는 야만성을 표출했다. 이는 위기 국면에서 인간 공동체가 얼마나 쉽게 아노미 상태에 빠지고 타자를 악마화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실증이다. 현재의 글로벌 사회 역시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자원 고립주의 속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혐오의 정치가 재차 부상하고 있다. 페스트 잔혹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 통제와 배제라는 원시적 메커니즘으로 회귀하는 대신, 과학적 이성과 상호 신뢰에 기반한 '지구적 연대'만이 공동체의 파멸을 막는 유일한 기제라는 점이다.

 


4. 진보 서사의 이면에 감추어진 야만성: 설탕의 자본화와 고정관념의 해체


제도권 교육과 대중 매체를 통해 내면화된 역사적 고정관념 중 하나는 16~17세기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의 도래가 인류 문명을 풍요롭게 만든 단선적 진보의 과정이었다는 인식이다. 새로운 작물 교환과 식문화의 확산이 인류의 삶을 다변화했다는 긍정적 서사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저작을 통해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은 '설탕'이라는 일상적 기호품의 확산 이면에 은폐된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가시화이다.

 

유럽 부르주아 계급이 향유하던 달콤한 설탕과 차 문화의 이면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짐승처럼 포획되어 카리브해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한 노예들의 참혹한 잔혹사가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소모품처럼 대체되었다. 우리가 근대 문명의 세련성과 우아함의 징표로 간주해 온 일상적 문화 양식이, 실제로는 철저하게 구조화된 비인간적 폭력과 착취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상층 기표였다는 사실은 깊은 인식적 충격을 부여한다. 역사는 결코 수렴적인 발전의 궤적만을 그리지 않으며, 특정 주체의 풍요는 대개 타자의 철저한 소외와 야만을 자양분 삼아 발현된다는 서늘한 진실을 대면할 때, 역사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의 지평은 비로소 확장된다. (끝)


[덧]  주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학과지성사, 1999)의 새로운 버전 같은 책이다. 매우 쉽고 그가 읽은 여러 텍스트를 리뷰 형식이 아니라 문화적 세계사라는 통사적 구조로 정리한 면이 매우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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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 고흐의 불꽃같은 열망과 고독한 내면의 기록, 출간 25주년 기념 개정판 불멸의 화가 고흐의 편지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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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은 현대인에게 하나의 신화이자, 가슴 아픈 예술적 순교자의 대명사다. 그러나 우리가 박물관의 두꺼운 유리 너머로, 혹은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경매 뉴스 속에서 만나는 고흐는 어딘가 박제된 영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1)는 그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신화의 꺼풀을 벗겨내고, 오직 예술만을 위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통째로 소모했던 한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이다. 책에 수록된 총 88점의 생생한 도판들은 그가 동생 테오와 가족들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 글과 어우러져, 활자 너머의 감동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증명해 낸다. 이 책을 읽으며 특히 깊게 다가온 것은 고흐가 가졌던 예술적 신념의 굳건함, 그리고 파리를 거쳐 남프랑스의 '아를 시절' 이후 그가 보여준 유화 작품들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이다. 고흐의 편지 속에 담긴 예술에 대한 고뇌와 열정을 네 가지 로 정리해 따라가 본다.


 

카메라의 정확성을 넘어선 진실한 거짓말


고흐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아카데미즘이나 사진 예술의 기계적 정확성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관을 이렇게 피력한다.

 

세레에게 내 그림 속 인물이 훌륭하게 표현된 걸로 보인다면 내가 절망할 것이라고 전해라. 나는 인물이 아카데미식으로 정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밭갈이하는 농부의 사진을 찍는다면, 사진 속의 농부는 더 이상 받을 같고 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미켈란젤로의 인물은 어떠냐? 다리는 길쭉하고 엉덩이도 펑퍼짐하지만 아주 근사하지 않니. 세레에게 전해다오. 밀레와 레르미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그건 그들이 전조하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검토한 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대상에서 받은 느낌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125p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 (중략) 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 이다. 농부의 삶이나 대중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상류사회' 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길게 봤을 때 이국적인 하렘 풍경이나 추기경의 성찬식을 그린 화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126p

 

그에게 예술이란 융통성 없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인상을 강렬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고흐가 말한 '진실한 거짓말'은 사물의 외형이 아닌 사물의 본질과 생명력을 담아내기 위한 숭고한 왜곡이었다. 그는 당대 상류사회의 화려한 취향에 영합하기보다, 거칠고 투박한 농민의 삶을 그리는 것이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고 더 높은 위치에 오를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이 초기작에서 가장 뜨겁게 분출된 작품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비록 주변의 비판이 있었을지언정, 고흐에게 이 작품은 철저한 관찰과 고뇌의 산물이었다.


<감자먹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82cm x 114cm

 

지난번 네 편지를 읽으니 세라가 <감자 먹는 사람들>의 구성에서 결함을 발견했다고 하지. 나도 그런 결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한 램프불빛 아래에서 그 시골농가를 바라보느라 무수히 많은 밤을 지샌 후에, 그리고 사람의 두상을 40여 차례 그려본 후에 얻은 인상을 내 나름의 관점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126p

 

움직이도 있는 농부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현대 인물화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예술의 진수이고, 그리스에서도, 르네상스 시기에도, 옛 네덜란드 화파도 하지 않은 것이다. 127p

 

그는 단순한 미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의 숭고한 움직임과 그들의 영혼을 포착하고자 했다. 르네상스나 그리스 예술도 도달하지 못한 '현대 예술의 진수'를 그는 이미 어두컴컴한 네덜란드의 시골 농가에서 홀로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프랑스의 빛과 고독,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구원의 색채

 

초기의 어둡고 흙빛 가득한 화풍은 그가 파리를 거쳐 남프랑스로 향하면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책에서도 고흐의 삶과 예술의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아를 시절의 유화 작품들이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를 이후의 유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이전의 고뇌가 어떻게 빛과 색채로 승화되었는지가 온몸으로 전해져 확실히 가슴을 뛰게 만든다.

 

파리에 온 지 16개월어 지나자 이 도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났다. 파리에서 고흐는 자화상, 정물화, 몽마르트로 풍경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130p

 

파리의 번잡함과 피로를 뒤로하고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마치 눈이 먼 사람이 처음 빛을 본 것처럼 캔버스를 강렬한 색채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예술적 성취 뒤에는 눈물겨운 육체적, 경제적 궁핍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온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135p

 

굶주림마저도 그림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했던 고흐는, 밥을 먹는 대신 물감을 사고 모델을 구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가 예술적 자양분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당대의 문학과 선배 화가의 정신이었다.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 리슈팽, 도데, 위즈만 등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소설은 정말 훌륭하다. 그런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137p

 

그는 시대를 읽는 눈을 잃지 않으려 치열하게 독서했으며, 1887년 여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삶을 대하는 자신의 뜨거운 태도를 전하기도 했다.

 

글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해라.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니 네 스스로 퇴보하길 바라지 않는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 많이 즐기고 많은 재미를 느껴라.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에서 요구하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명심해라. 네 건강을 돌보고 힘을 기르고 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공부다. 141p (1887 여름 여동생에게 보애는 편지)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이라는 그의 통찰은 아를에서 고스란히 실현된다. 아를 시절 고흐는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8호에서 30호까지 다양하다. 이 시기 그의 작업 방식은 철저히 주관적인 감정의 해방을 향해 있었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고 색칠하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72p

 

요즘 작업하는 방식은 인상파 화가들보다는 들라크루아의 생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복제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더 임의적으로 쓰고 있다. 187p

 

책의 곳곳에서 고흐가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이론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 또렷이 보인다. 눈앞의 대상을 정확히 복제하는 인상파의 광학적 탐구를 넘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임의적이고 주관적으로 변형해 사용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색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187p)고 말할 정도로 색채의 마술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본 확신과 가치의 증명

 

비록 당대에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비참한 가난 속에서 허덕였지만, 고흐는 결코 절망 속에만 주저앉아 있던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편지 곳곳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확신하고, 후대에 반드시 재평가받을 것이라는 단단한 자부심과 기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랑글루아 다리>, 캔버스에 유채, 49.5cm x 64.5cm

 

이번에 부치는 짐 속에는 거친 캔버스에 그린 분홍색 과일나무 그림이 있고, 폭이 넓은 하얀 과일나무 그림, 그리고 다리 그림이 있다. 그걸 보관해 두면 나중에 가격이 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수준의 그림이 50점 정도된다면, 별로 운이 없었던 우리의 과거를 보상받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 그림 세 점을 네 집에 두고 팔지 말아라. 시간이 지나면 이 그림들은 각각 600프랑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157-159p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205p

 

스스로 자신의 그림이 훗날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 확신하는 대목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낸 헌신적인 지원이 결코 헛된 소모가 아니며, 자신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언젠가는 세상에 의해 '보상받을 것'임을 굳게 믿었다. 각각 600프랑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던 그의 소박한 소망은, 오늘날 수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바뀌어 실현되었다. 세상을 앞서간 천재의 고독한 확신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프고도 위대한 대목이다.

 

 

영혼을 담은 초상화, 그리고 단 하나의 기적

 

고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예술의 종착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즉 모델의 내면을 관통하는 '영혼의 재현'이었다.

 

모델의 마음, 모델의 영혼을 담고 있는 초상화야말로 정말 그려야 할 그림이다.” 196p

 

그는 인물의 겉모습을 치장하는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뇌하고 슬퍼하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영혼을 화폭에 담길 원했다. 그가 그린 수많은 자화상과 우체부 조셉 룰랭 등의 초상화에서 우리가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그림들이 모델의 영혼과 고흐 자신의 영혼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교감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위대한 영혼을 가졌던 화가에게 세상은 너무나 인색했다. 그의 치열했던 평생의 삶 동안, 세상이 그에게 허락한 상업적 성공은 단 한 번뿐이었다.

 

브뤼셀의 20인전에 전시되었던 <붉은 포도밭>이 팔렸다. 안나 보흐라는 사람이 400프랑에 이 작품을 샀다. 이것은 그의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 작품이다.

 

평생 수백 점의 눈부신 유화를 남겼고, 오늘날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그 수많은 걸작 중에서 생전에 단 한 점만이, 그것도 단돈 400프랑에 팔렸다는 사실은 잔인하도록 비극적이다. 하지만 안나 보흐가 산 그 한 점의 유화 <붉은 포도밭>, 고흐가 그토록 갈망했던 '세상과의 소통'이 마침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외로운 신호탄이기도 했다.

 

 

맺음말: 편지 끝에 남은 영원한 빛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덮으며, 책 속에 실린 88점의 도판들이 마음속에서 다시금 강렬한 잔상으로 소용돌이친다. 특히 아를 시절 이후, 그가 온 정신을 쏟아부어 완성해 낸 유화들의 격정적인 붓 터치와 임의적이고도 강렬한 색채는 왜 그가 "색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웅변한다.

 

그는 미치광이도,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시대를 고민했고, 들라크루아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던 확신에 찬 선구자였다. 비록 그의 삶은 굶주림과 고독, 그리고 단 한 점의 판매라는 초라한 기록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가 남긴 '진실한 거짓말'은 세기를 넘어 우리에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실로 다가온다. 그의 편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태워 세상을 밝힌 한 화가가 후대의 우리에게 보내는, 가장 뜨겁고도 아름다운 초대장이다. (끝)


* 읽은 판본은 2001년 예담에서 나온 신성림 번역본이다. 최근에 24년판인 위즈덤하우스본도 입수했는데, 읽은 건 2001년판 예담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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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8월, 개인전 준비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6월 들어 단 1권의 책도 읽지 못했다.모임에도 나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8월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을 5월 초까지 단 한 점도 제작하지 못했기 때문.


그러다가 5월 첫 주부터 작업하기 시작하여 6월 초까지 대략 1달 동안 20여 점을 완성했다. 100호부터 10호까지. 진짜 미친듯이 작업했다. 


이렇게 작업할 수 있었던 건 갑자기 '돈오점수'와 같은 깨달음이 있고 난 후였다. 올 초부터 4월말까지 내가 지금까지 습작했던 400여점을 매일 보면서 장단점을 분석했다. 


그러다가 5월 초 어느 순간 내가 습작한 모든 작업 결과물들의 공통적인 조형적 특징이 보였다. 화면은 다 달랐지만 본질적 행위는 똑같았다! 그걸 확인한 후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지 깨달았고, 내 조형의 근간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이후 작업은 급물쌀을 탔고, 이전에 개별적인 화면은 다채로우면서도 깊이있게 변했다. 이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작업을 안할 수가 없었다. 지난 작품들을 꺼내 새롭게 부가한 작품에서 화면의 다른 차원이 열렸다.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서도 나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올해 작품이 쌓이면 확실히 뭐라도 되겠지..라는 기대감이 있다. 


어쨌거나 8월 개인전 이후에는 조금 여유가 생길듯하다. 이제 어느 정도 개인전 할 작품도 확보했으니 조금씩 책을 읽어야 겠다. 한 달 내 잡고 있던 책이 고흐에 관한 책인데, 낼이면 완독할 듯하다. 




이제 다시 책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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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6-24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전 준비하시느라고 서재에 자주 오지 않으셨군요.8월 개인전이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yamoo 2026-06-24 17: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

댄스는 맨홀 2026-07-04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한달동안 그렇게 작업이 가능하세요?? yamoo님 정말 대단하세요. 건강 조심하시고 개인전 멋지게 성공하시길 바랄께요.

yamoo 2026-07-06 09:52   좋아요 0 | URL
하다보니 그렇게 되더이다. 진짜 미친듯이 작업했더니 어느새 19점이 완성돼 있었습니다..ㅎㅎ 저도 개인적으로 좀 놀랐다는..^^;; 4월까지 올해 전시작 헌 점도 그리지 못해 압박감이 상당했는데...작업의 근본 언어를 발견한 순간 작업이 급물살을 탄 느낌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