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독특한 인지 능력을 갖춘 지혜로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다. 유창한 언어 능력, 미리 예상하고 추론하는 성향, 복잡한 감정 반응은 그 밖의 생명체와는 확연히 다르다.(p16)... 독특한 인지 능력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월한 사냥 능력과 더 정교해진 새로운 무기도 있었지만, 사냥감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사고였다... 관계는 실체가 없으며, 몸짓이나 말, 눈썹과 손끝의 작은 움직임이나 어루만짐으로 드러나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이 결합된 것이다. 관계는 화려한 건물이나 걸작 예술품보다도 역사적으로는 더 중요한 본질이다. 이런 관계는 과거가 흐릿하게 투영되는 탁한 거울을 통해, 기록과 예술적 표현을 통해, 동물의 뼈와 인공물을 통해 포착된다. 바로 이 점이 고고학의 가장 큰 한계다. 고고학은 주로 인간의 행동이 남긴 물건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위대한 공존> , p18/678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1936 ~ )의 <위대한 공존 The Intimate Bond: How Animals Shaped Human History>은 인류와 그리고 인류와 함께 한 여덟 동물 - 개, 염소, 양, 돼지, 소, 당나귀, 말, 낙타 - 의 관계를 다룬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수렵시대 사냥감을 나누던 관계에서, 문명화 과정의 동반자로, 사업의 파트너로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저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인류와 동물들의 관계를 쉽고도 재밌게 서술한다.


 농경과 동물의 가축화는 혁명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특히 도시와 문명의 등장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소는 곧 고기와 뿔과 가죽의 공급원 이상의 존재였다. 살아 있는 재산이었고, 귀한 선물이자 축제의 중요한 요소였다... 기원전 2500년이 되자, 동물은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서서히 세계화가 진행되던 세상에서 짐 운반 동물의 혁명이었을 수도 있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개체 사이의 관계다.... 말과 기수가 하나가 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고, 말은 명성과 왕권의 상징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위대한 공존> , p24/678


 이와 관련해서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The First Domestication: How Wolves and Humans Coevolved> 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류와 늑대의 협력을 다룬다. 서로에게 득을 가져온 이들의 관계는 오늘날 반려견이 인간과 맺는 관계와는 분명 달랐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협력적인 먹이 찾기를 한다는 것은 두 종이 서로의 생태학적 적소(ecological niche : 한 생명체가 생태계 안에서 차지한 위치)에서 중요한 측면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생물체 집단이 수천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생태학적 유산을 구축할 때, 이 집단은 뒤따르는 세대에 작용하는 선택압을 수정한다. 이렇게 수정된 선택압은 영향력이 큰 특징 쪽으로 작용하며 그 특징이 미래 세대로 퍼져나가도록 한다. 적소구축(niche construction : 생명체가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형해 자신에게 유리한 생태환경을 구축하는 것) 과정에서 생태학적 유산이 영원히 전해지는 진화적인 결과가 나타날 때, 이를 생태학적 유전(ecological inheritance)라 할 수 있다. _ 레이먼드 피에로티 외,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 p98 


 데이비드 W. 앤서니 (David W. Anthony)의 <말, 바퀴, 언어 The Horse, the Wheel, and Language: How Bronze-Age Riders from the Eurasian>는 언어와 말(소)등 가축과 청동기 문화를 연결한다. 언어와 가축의 확산의 관계를 찾아가는 내용 역시 다른 관점에서 동물들을 바라보게 한다. 에밀 뱅베니스트 (Emile Benveniste, 1902 ~ 1976)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도/유럽 문화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유럽사회의 제도·문화 어휘 연구 Le Vocabulaire des Institutions indo-europeennes>도 함께 읽으면 좋을 듯 싶다.


 새로운 가축 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회는 이를 받아들인 사회와 갈수록 달라졌다. 북부 살림 지대 사람들은 우랄 산맥 동쪽 초원에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채집민으로 남았다.  그 지속성과 선명성을 감안하면 이런 변경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것으로 보인다. 선 인도/유럽 공통조어족은 동석기 초기 서부의 초원에서 새로운 경제 형태, 즉 목축과 함께 확산했을 것이다. 자매 언어 간 연결(sister-to-sister linguistic linkage)이 가축 사육 경제와 여기에 동반한 신념의 확산을 촉진했을 것이다. 흑해-카스피 해 지역의 초기 동석기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식단과 장례 상징 두 측면에서 말의 중요성이다. 말고기는 육류 식단의 주요 부분을 차지했다. 바르폴로미예프카와 스예제에서는 뼈 판에 말을 조각했다. _데이비드 W. 앤서니, <말, 바퀴, 언어> , p283 


 그러나, 인류와 공진화를 통해 함께 문명을 만든 이들과의 관계는 산업화(industrialization)과정을 통해 새롭게 바뀌게 된다. 인간의 노동(labour)만이 자본(capital)에 의해 대체된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통해 말이 재갈로부터 풀려나고, 소가  코뚜레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이 되지는 못했다. 전자는 경마 등 스포츠 산업의 상품으로, 후자는 식품으로 파트너에서 사물화되기에 이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피터 싱어 (Peter Singer, 1946 ~ )의 <동물 해방 Animal Liberation>, <죽음의 밥상 The Ethics of What We Eat> 등이 함께 읽을 만한 책이라 여겨진다. 


 중세의 농민은 가축과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각각의 동물을 다 아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과 동물의 관계는 진정한 동반자 관계였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었고 수천 년 동안 역사의 흐름을 결정했다. 그러나 도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마침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친밀한 유대 관계는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다. 어떤 동물은 존중받으며 소유자의 자부심이 되었고, 어떤 동물은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가축 사육장과 실험실까지 확장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현재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을 종처럼 부리거나 먹거나 착취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 과정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변화를 모색해야 할까? _ 브라이언 페이건, <위대한 공존> , p28/678


 개인적으로 <위대한 공존>은 도시 문명과 관련하여 고고학 권위자인 브라이언 페이건의 이름만으로 펼쳤던 책이라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청소년에게는 물론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Diamond, 1937 ~ )의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 마빈 해리스 (Marvin Harris, 1927 ~ 2001)의 문화인류학 3부작을 읽기 전 참고한다면 보다 깊이 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페이건의 인류사와 관련해서 <인류의 마지막 항해>, <피싱>,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는 별도의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며 간략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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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8 18: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호랑이님 서재를 두 번 방문하네요 ㅎㅎ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2-07-08 23:25   좋아요 2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얄라알라 2022-07-08 18: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7-08 23:25   좋아요 2 | URL
얄라얄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그레이스 2022-07-08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7-08 23:26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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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0년간 지속된 한국의 분단은 세계냉전의 한국적 변용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시작논쟁은 냉전을 해석하는 문제로 상승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구의 학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의 시작과 세계냉전을 해석하는 관점은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큰 아이러니이다. 이 전쟁의 시작 주체를 북한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냉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전통주의적 입장에 섰고, 반대의 경우는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냉전을 접근하였다. 그러나 냉전과 전쟁의 시작에 대한 해석은 분리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자면 전쟁은 북한이 먼저 시작하였다. 이제 이 가공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진실은 다툴 수 없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328


 박명림(朴明林, 1963 ~ ) 교수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한국전쟁의 개시는 북에 의한 남침임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1949년 김일성의 신년사에 등장한 '국토완정론'의 물리적인 실현이었고, 국토완정론은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박헌영(朴憲永, 1900~1955)이 가지고 있는 남측에 대한 우위를 담은 언어였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한국전쟁 개전 직전 표현된 북측의 자신감에 대한 근거와 함께 한국전쟁의 의의를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의 완정'이라는 익숙지 않은 용어를 13번이나 사용하였다. 이는 곧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의 전면적인 등장이었다. 1949년 초의 이 신년사는 북한 통일정책의 한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이 연설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연설 중 몇몇 핵심연설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로 김일성의 연설에서는 국토완정과 완전 자주독립이 항상 붙어다녔다. 이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은 아직 완전한 자주독립이 아니며, 북한에 의해 국토완정을 이루었을 때만 자주독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87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농민의 측면은 토지개혁 중심으로, 민주주의 측면은 정치 부문에서, 민족주의 문제는 민족주의자의 체제 내 포용 여부 관점에서 분석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직전 체제의 우위는 북측 일방 우위라 볼 수 없었다. 일부에서 남측의 체제는 우위를 보이고 있었으며, 북측에 다소 뒤처진 측면도 있었지만,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의 관점과 다소 다른 부분이다.


 이 연구가 설정한 세 가지의 준거, 즉 농민, 민주주의, 민족주의의 측면에서 남북한을 분석할 때 위로부터의 혁명과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결합된 북한의 방식이 반드시 남한의 위로부터의 개혁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변혁방법과 과정, 농민에게 돌아간 혜택의 측면에서 더 나은 점을 별로 갖고 있지 못했다. 특히 48년질서하에서 북한의 농민은 남한의 농민보다 결코 더 평안하거나 해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민주주의 문제의 경우, 그것을 비록 정치적 민주주의로 한정하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에서 우월한 쪽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었다(p873)... 민족주의문제의 경우 남북한은 상호 길항적이었다. 친일-항일의 대립구도에서는 명백히 북한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체제를 창출한 미소중심부로부터는 남한이 북한보다 더 자율적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4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이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가장 크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토지개혁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토지개혁의 완성에 따라 국가 성격을 규정하고 한국전쟁을 항일세력와 친일세력의 전쟁으로 정의 내린 커밍스의 관점과는 달리, 박명림은 토지개혁은 남측에서도 1950년 상반기에 마무리되었음을 밝히며 반론을 펼친다. 실질 내용면에서 남측의 토지개혁은 북측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 토지문제야말로 남한과 북한 두 사회의 상이성의 표상이었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어 왔다. 즉, 북한은 토지개혁이 되었고 남한은 토지개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는 높은 탈식민성과 민중성을 갖고 있었고, 후자는 토지개혁이 되지 않아 높은 식민성과 반민중성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간단하게 말해 남한은 친일파와 한민당, 지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커밍스는 "남한은 경찰국가였고 그것은 지주라는 작은 계급의 대리기구(an agent of a small class of landlords)였다." 고 진술한다. 반면에 북한은 항일독인운동 세력과 농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유력한 연구경향의 중심테제이기도 하다. 이 차이가 전쟁의 한 기원이고, 이 차이야말로 한국전쟁의 내전적, 계급투쟁적 성격을 함축하는 핵심문제라는 주장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475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중심에 '대쌍관계동학'(對雙關係動學, interface dynamics)이 자리한다.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북측의 토지개혁은 매우 열렬한 지지를 받았기에, 남측의 토지개혁은 좋든 싫든 내용적으로 이에 근접하는 수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해방 이후 두 체제의 움직임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매우 비슷한 길로 가게되었다는 것도 본문을 통해 함께 보여준다.


 국가의 무상몰수와 국가에 의한 무상분배는 전형적인 볼셰비키 방식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점 외에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특징적인 두 가지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는 해방후의 '우파-반동들'도 민족반역자로 규정되어 토지를 몰수당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주와 민족반역자의 것은 토지 이외에 모든 것을 박탈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후자는 북한의 토지개혁을 특징지은 중요한 요소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200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었지만 상호 대비되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였다. 하나는 그러한 급진적 주장이 반동적 주장과 맞붙어 상호 상쇄효과를 결과함으로써 중도의 개혁적 입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즉, 수구보수주의, 중도개혁주의, 급진민중주의의 3자 정립(鼎立)관계에서 앞 뒤의 둘은 서로 길항관계를 형성하며 상대를 공격하며 대립, 개혁주의를 강화하였던 것이다.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498


 남한의 정세는 북한에 비해 구조적 변환도 저항도 늦게 시작되었고 늦게 폭발하였다. 친일파의 배제와 토지개혁 등 식민지 민중의 열망을 소련군정과 북한리더십은 발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시차는 억압성과 민주성의 차이이기도 하였다. 남한은, 비록 어떤 주어진 틀 안에라 하더라도, 약간의 자유경쟁적 갈등이 허용되었고 존재하였다면 북한은 허락되지 않았다. 남한은 좀더 민중적일 필요가 있었고 북한은 좀더 민주적일 필요가 있었으나 둘 다 자기 길만을 가려 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264


 우리는 1946년 북한에서 진행된 정치적, 사회경제적 변화를 북한혁명이라고 규정하였는 바 이 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비유혈적이고 철저했다는 세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북한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결합된 혁명이었다. 필자는 그것을 도이처의 용어를 빌어 반정복과 반혁명의 결합인 혼합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혁명은 그 급진성에 비례하는 부(負)의 영향을 남겼는데 체제의 비민주성과 민족주의 세력의 남하의 초래가 그것이었다. 급진주의적 시원을 안고 출발한 체제였기 때문에 남한과의 격렬한 대결을 수반한 48년질서에서는 더욱 급진적인 모습을 띠어갔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5


  체제간의 경쟁에서 분명히 북측이 앞서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된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의 속도전을 위해 '38선'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처음에는 분할점령표시에 불과한 38선은 정치적, 사회적 경계의 의미도 포괄하게 되는데,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38선은 일종의 '배출구'로 작동했다. 이른바 반동분자(反動分子)들을 모두 숙청하는 대신 남측으로 가는 것을 방관하면서, 북측은 구성원들의 순수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남측을 혁명의 대상으로 타자화(他者化)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나아 38선 이남으로 체제불응자를 쫓아내서, 구성원들의 순수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북측에 비해, 갑자기 많은 수의 월남자로 인한 사회혼란을 겪어야 했던 남측에서 한국전쟁 기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것도 이와 연관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를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물론, 이러한 이유를 찾는다고 해도 민간인에 대한 만행의 죄가 감해질 수는 없을 것이겠지만.


 최초에 38선은 영토분계선, 즉 전후처리를 위한 강대국의 합의선이었으나 점차 한국 내 좌우 두 정치세력의 계급적 이념적 분할선으로 구조화되어 갔으며 나중에는 남북한이라는 두개의 분단국가의 분할선으로 고착되었다. 중국혁명을 계기로 그것은 결국 다음의 세 수준이 복합적으로 분할된 선으로 상승하였다. 그 세 수준은 남북한 대결, 중국-북한의 동아시아 사회주의연대와 일본-남한-대만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연대간의 동아시아 소국제체제의 대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세계적 수준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즉, 이 선은 세계냉전의 동아시아적 초점이었던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8


 (대규모)남하를 미군은 오히려 막으려 했고 소련군은 오히려 방임하였다는 점이다. 즉 월남자에 대해 소련군과 북한리더십이 초기에 취한 정책은 일반적인 이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은 월남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장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월남자의 대규모 유입에 따른 사회경제적 문제를 우려한 미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남하 물결은 계속되었다(p361)... 대규모의 월남은 북한사회의 변화와 함께 남한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북한사회에 압력의 완화를 가져왔고 남한에는 서로 다른 두 영향을 가져왔다... 하나는 토지개혁과 친일세력 배제에 의한 남한민중의 개혁에의 기대였고, 후자는 이로 인한 구체제 지배새력의 월남 및 남한 국가기구에로의 결집, 그리고 이들이 퍼뜨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나쁜 소문에 의한 남한민중들의 반공의식의 확산이었다. 김일성은 전자만을 보았고 더 큰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부(負)의 영향이 더 크 심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363


 토지개혁을 비롯한 대규모 사회혁명과 함께 이미 1940년대부터 북측에 조성된 중공업시설이라는 인프라 위에  사회주의 계획개발경제 정책이 맞물리면서 북측은 남측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 우위에서 비롯된 자신감은 사회를 동원체제로 바꾸면서 북측은 전시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이에 반해, 남측은 1948년 여순사건(麗順事件)을 기점으로 빨치산 세력을 꺾는데 성공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할만큼 체제가 공고해지기에 이르렀다. 


 대중의 동원체제로의 견인과 급진군사주의의 확산을 가능케 한 북한리더십의 자신감은 경제적 발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정치적 이념적 군사적 준비와 동원 및 공세는 경제적 강점(强點)의 기반 위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북한리더십에게 경제적 하부구조의 조기 구축은 정치와 사회, 군사와 이념 부분에서의 자신감과 이의 실현의지를  결정적으로 높여주었다. 현재전쟁에서의 경제적 요인의 역할을 소개하는, 소련문건의 번역으로 보이는 인민군 학습요강의 핵심내용은 전쟁의 승패는 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763


 48년질서에서 북한이 전쟁을 위한 경제적 강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식민시기의 산업화와 경제적 하부구조의 구축, 초기계획경제의 장점, 소련의 장비와 기술원조가 그것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768


 보도연맹의 설립과 자수의 권장,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샐틈없는 옥죔의 시도였다. 과거에 좌파활동을 한 자들은 자수하여 국가에 대한 과거의 불충(不忠)을 사죄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을 받으라는 종용을 받았다. 위로부터의 뿌리뽑기와 밑으로부터의 충성의 동원의 병행이었다. 일반민중들은 한 번의 혹독한 패배를 경험한 뒤 국가강권력의 강대함과 공포스러움을 절감하여 알아서 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스멀거리며 사회의 심저에 존재하는 한국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의 기원이 형성된 것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642


 이러한 분위기에서 1949년 중국혁명은 결정적이었다. 1949년 이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2개 사단의 귀대와 소련의 군사지원과 북측의 자신감은 군사동맹으로 이어진 반면,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정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소극적 움직임은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모든 여건이 갖추어진 이후 최종적인 결정은 정치적 리더십의 몫이었다.  


 중국혁명이 이 전쟁의 도래에 끼친 영향을 세 가지로 요약한 바 있었다. 하나는 북한리더십으로 하여금 전쟁에의 기회의식과 자신감, 즉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치를 병력의 북한으로의 대규모 이월이며, 세번째는 결국은 전쟁을 가능케 한 소련-중국-북한 간의 동아시아 공산주의 삼각동맹의 형성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7


 한국전쟁의 시작결정은 소수지도자들의 합의로 가능하였다. 내부적으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의가 결정적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스탈린과 모택동, 특히 스탈린의 동의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즉 소련, 중국, 북한의 한국전쟁 시작에 대한 설명은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책임을 면하여 다른 쪽에게 전가하려는 데에만 초점이 놓여 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177


 한국전쟁은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군사적 수단에 의해 남한과 북한을 통일하려는 의지에서 구상하게 되었으며, 이를 스탈린에게 제의하여 동의를 얻고 이어서 중국의 모택동의 동의에 의해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결정에 대한 우리의 연구의 결론이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지나치게 급진주의적이었고 현실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들은 넘치는 의욕으로 인해 자신들의 선택이 가져올 파멸적 결과를 고려하는 정치적 사려가 부족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66


 기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적극적인 유도는 없었으나 자료가 말하는 바를 따를 때 미국은 전쟁의 발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미국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적절히 대응하였느냐는 문제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유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전쟁은 주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이 없었으면 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또한 남한정부와 군대의 일부는 좌파 내지 오열로서, 전쟁 직전 남한을 위한 유도가 아니라 북한을 위한 개문 호응을 하였음을 규명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7


 미국과 남한의 차이는 애치슨과 이승만의 차이였다. 애치슨식 생존방식과 이승만식 생존방식의 차이가 갈등의 폭이었다. 북진통일론이야말로 그 두 방식을 가르는 기준이었다(p535)...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남한이 전쟁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무기원조를 제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군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무기가 공산군에 넘어가서 미군이 통제할 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미국을 향한 공격무기가 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남한과 이승만에 대해 또 하나의 중국이자 장개석이라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536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이처럼 해방 전후 수립된 두 체제가 38선을 경계로 서로 경쟁하면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경쟁에서 앞서나가던 북측의 자신감과 주변 정세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이 일어났음을 보인다. 물리적으로는 남북간의 내전으로, 정치적으로는 소련-중공-북한과 미국-대만-일본-남한 간의 동아시아 대결로,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 된 한국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커밍스의 <한국전재의 기원>보다 동적(動的)으로 사태를 바라본다. 커밍스의 분석 틀이 각 체제 내에서 폐쇄적이라면, 박명림의 분석 틀은 역동적으로 체제 내외에서 변수로서 영향을 미친다. 다른 한편으로,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에서 보여주었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넓은 시야로 사건을 바라본다. 때문에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낸 물줄기와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박명림은 정치적 리더십에 의한 결정적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면에서 '우연과 필연'이 이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다른 용어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역사학자와 정치학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본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을 맞아 한국전쟁을 분석한 또 다른 대작(大作)을 읽으며 한국전쟁에 대해 더 생각할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정리한 페이퍼는 이것으로 갈무리하지만, 해방 전후사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다시 정리해보려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미뤄두었던 책들을 꺼낼 때가 된 듯하다...  


 남한과 북한의 사회와 경제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남북한 모두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생존을 위한 강인한 정신만이 남았고 이것이 곧 체제유지와 재건의 제일 요소였다. 상대에 대한 적대의식과 자기체제의 우월의식이 결합하여 형성되고 증폭되는 단결과 생존에의 의지는 남한과 북한의 각각을 강하게 묶는 단단한 끈이었다(p885)... 사회의 모든 성원은 비로소 국가의 평등한 구성원, 즉 국민이 되었다. 이 전쟁은 근대적 요소를 사회의 많은 부분에 침투시켰던 것이다. 신분과 함께 이념이, 수직적 위계와 함께 수평적 분업에 대한 구조와 의식이 확산되었다. 분단과 전쟁, 단기간의 산업화야말로 현대한국의 독특성을 낳은 두 요소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86


 분단의 역설 중 가장 크고 비밀스런 역설은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역설일 것이다. 전쟁 자체는 혹심하게 파괴적이었지만 그 전쟁이 남긴 질서는 경쟁적, 다른 말로 하여 건설적이었다는 배반성을 던져주었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간의 불꽃튀는 경쟁과 냉전의 한반도에의 자력적(磁力的) 집중은 두 국가와 분단질서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두 한국 모두 정권수준에서는 불안과 격동이 있었으나 국가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89


 현실적으로 한국전쟁은 합의된 경계선을 넘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에서 이 전쟁의 개념은 단순한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그것은 교전국 일방이 당사자간의, 또는 국제법과 협약에 의해 용인된 경계선을 넘는 군사행동과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에서의 침략전쟁이자, 다른 한편 분열된 민족을 합치려고 시도하였던 많은 국가들의 사례와 일치하는 민족내부의 단일민족국가의 형성 노력의 하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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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한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일제 말에 쌀을 공출하면서 말 그대로 박박 긁어가지 않았나. 그 때문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심하게 굶주렸나. 그런데 미군정이 이름을 바꿔서 미곡 수집령을 내렸다.

우익이 반탁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반탁은 맞다. 그러나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을 중심에 놓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찬탁, 반탁’ 식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더 놀라운 건 12월 27일 자 보도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한다고까지 보도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 두 가지를 통해서 변신이랄까 세탁을 한다. 하나는 반탁 투쟁,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단정(단독 정부 수립)운동이다. 단정 운동에서 친일파가 대단한 힘을 발휘하며 한민당과 함께 중추 역할을 하지 않았나.

김규식 같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한 거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키지 않으면 분단되고 분열을 겪는 건데,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제1항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냐. 빨리 미소공위에 협력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런 다음에 임시정부에서 신탁 통치를 열화와 같이 반대하면 될 것 아닌가. 제3항에 임시정부하고 협의한다고 돼 있는데, 우리가 다 반대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미국, 소련도 어떻게 우리 의견을 무시하겠는가. 우선 임시정부를 세워놓고 보자.’ 그 얼마나 현명하고 정확한 답인가.

미소공위가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극좌와 극우가 미소공위에 과연 현명한 태도를 취한 건가.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선 해도 너무했다. 미소공위가 완전한 성공까진 못 가더라도 적어도 몇 단계는 갔어야 하는 건데, 최소한의 첫 단추도 못 끼운 것 아닌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극좌와 극우의 탓이 크다고 본다.

우리가 친미·친소 정책을 견지함과 동시에 내부에서 경쟁은 하더라도 좌우 합작을 이뤄내면,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경쟁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한반도를 잃지 않으려고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우리를 지원할 거다. 지정학적 요인을 패배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전진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걸 여운형과 김규식, 특히 여운형이 아주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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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큰 죄인은 누구일까.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진보 세력은 수구 세력이 뉴라이트의 도움을 받아 근현대사 쟁점에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놨는데도 더 이상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그렇게 현대사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해방과 광복, 광복절과 건국절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해방을 어떻게 맞았는지를 여러 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게 아니다. 끊임없이 항일 투쟁을 해온 분들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맞았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처럼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은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점을 적당히 넘겨서는 안 된다.

정리하면 한국은 해방을 통해 시민 혁명이자 정치적 혁명,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 문화적 혁명을 맞았다. 그야말로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순식간에, 한꺼번에 맞이하게 됐다는 것,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젊은 사람들은 ‘공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해방도 자연스럽게 왔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국내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싸워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획득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해방된 바로 그날부터 그런 자유를 누리지 않았나.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를 인수해 우리 스스로 매일신보를 내고 그랬다. 이게 나중에 서울신문으로 바뀌는 거다. 미국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게 아니다.

건준은 초기에 좌우 연합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했다. 해방 이틀 후인?1945년?8월?17일 간부를 발표하는데, 그때?7명의 간부 명단을 보면 안재홍 부위원장 등?4명이 우파거나 중도 우파다. 좌파나 중도 좌파는?3명뿐이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다. 그만큼 배려를 많이 하면서 일했다.

토지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아, 한민당 중진이 이렇게까지 발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식민지 지주제 폐해가 컸다. 거기에 한국인의 정의감까지 가세해서 ‘토지 개혁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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