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버스탬은 전후 한국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1945~48년의 미군정을 단 한 문장으로 언급한다. 그 전쟁의 잔혹한 학살과 미국의 소이탄 공습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대신 한국은 "고래싸움에 등 터진 새우"였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한 무리의 지도자를 가진 하찮은 나라였다. <콜디스트 윈터>는 미국 특유의 통속적인 장르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 이 책이 설명하는 전쟁은 한국이나 그 역사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고작 두세 명의 한국인을 언급하며, 한국인과 중국인이 훨씬 더 많이 참여했던 전쟁에서 미국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선한 편과 악한 편에 관한 1950년대의 고정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18


 데이비드 핼버스탬 (David Halberstam, 1934 ~ 2007)의 <콜디스트 윈터 The Coldest Winter>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의 평가는 비판적이다. 미국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한국전쟁'이며, 한국전쟁에 정작 한국은 없다는 커밍스의 비판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렇지만, <콜디스트 윈터>에는 다른 한국전쟁 관련 책들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이 담겨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지나친 부분이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에는 단층선(斷層線)이 있었다. 단층선의 한 면은 야전부대가 직면하는 전장의 위험과 현실의 세계고, 다른 면은 안일한 명령만 쏟아내는 도쿄 사령부에 있는 환영의 세계였다. 단층선은 군단과 사단 사이에도 있었다. 군단은 도쿄 사령부에서 스며 나오는 맥아더 장군의 열의를 느끼고, 사단은 적의 공격에 노출된 연대와 예하 부대의 취약성을 느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76/1912


 <콜드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한국전쟁의 단층을 말한다. 이 단층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틈이 아니라, 미군(美軍)을 구분하는 선이다. 이 선의 한 편에는 장진호(長津湖)에서 혹독한 추위와 중공군과 싸워야 했던 야전군인이 있다면, 다른 편에는 워싱턴 행정부와 싸우는 정치군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가 위치한다. 도쿄 책상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보며 아시아의 맹주로 처신하는 맥아더와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1884 ~ 1972)의 대립을 생생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콜디스트 윈터>는 분명 나름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동일한 선상에서 같은 목표를 바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들이 치러야 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국가 자산을 투입해야 하는지 생각이 전혀 달랐다. 1950년 6월 25일부로 대통령과 장군으로서 이들의 삶이 함께 엮였다. 미국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해 대통령의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맥아더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 자신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342/1912


 사실 여러 해 동안 맥아더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현혹했던 한 가지 비법은 진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입장이나 대의명분에 도움이 될 때에만 진실을 인정했고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에 방해가 될 때에는 가차 없이 저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그 점이 맥아더의 발목을 잡는 덫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옳다는 식이었지만 막상 진실과 견주기 시작하자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666/1912


 다만, 커밍스의 관점에서처럼 한국전쟁을 내전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콜디스트 윈터>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빠진 책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콭디스트 윈터>의 관점은  그와 다르다.


 기억해야 할 점은 한국전쟁이 내전이었으며,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초래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72


 <콜디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한국 전쟁을 다소 복합적으로 바라본다. 미국과 서구 세계에게 한국전쟁은 '축소된 세계대전'인 반면, 북한, 중국, 소련의 관점에서는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는 전선이 고착상태에 빠진 이후 마무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미국과 서구 세계에서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어 일방적으로 공격한 '침공'이었다. 때문에 예전에 히틀러의 침공을 막지 못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쓰라린 역사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는 1945년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국경처럼 그은 38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몇 달 후 미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6월 25일에 자행한 북한의 남침은 중국에서는 막 끝났지만 인도차이나에서는 진행 중인 것과 동일한 '끝나지 않은 내전'에 불과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44/1912


 분단 상황이 사회와 문화마저 분열시켰으며 남과 북 어느 쪽이든 모두 비통한 시대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엄청난 내부 분열을 불러와 한국전쟁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도발 이상의 의미였다.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십수 년 동안 쌓였던 내부 분열과 모순 그리고 오랜 정치 갈등이 터져 나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92/1912


 <콜디스트 윈터>는 한국전쟁에서 휘브리스(hybris)에 빠진 지도자들과 이들이 저지른 실수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마치 점수만 보면 8-7 케네디 스코어로 진행되는 야구경기에서 막상 내용을 놓고보면 끝없는 실수로 벌어진 타격전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부끄러운 실수들이 당사자들에게 한국전쟁을 잊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전쟁은 어떤 식이든 일종의 계산 착오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양측 군대가 내린 모든 결정이 하나같이 잘못된 계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우선 미국은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킴으로써 다양한 공산주의 세력이 행동을 개시하도록 자극했다. 결국 소련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이번 전쟁에 발을 디디면서 인민군의 저력을 무척 과소평가했으며 각지에서 미군의 승전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릴 거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 후에는 중공군의 경고 신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713/1912


 그렇지만, 잊혀진 전쟁이 남긴 유산은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냉전 이후 경찰국가 미국의 역할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1953년 판문점 체제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후 유럽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세계전쟁으로서의 영향력을 한국전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판문점 체제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추구한 자유주의적 평화 기획이 귀결된 궁극적인 제도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판문점 체제는 중국의 개입 이후 부과된 정치적 압력하에서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정치적 해결을 유예시킨 군사 정전 체제였다. 그리고 판문점 체제는 미국과 이승만의 협상의 산물로서, 한미 군사 동맹 체제 아래에서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전시하려는 아이젠하워 근대화 정책의 대표 사례였다. 좀 더 일반화하자면,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초국적 법치가 지향했던 보편적 영구 평화나 보편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특수한 상황에서의 안보, 특수한 동맹 체제하에서의 경제 발전이라는 매우 분명한 홉스적 기획의 산물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_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 p843/1282 


 독일의 재무장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스탈린의 예기치 못한 반응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중한 자원을 재무장에 쓰기를 원하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무방비 상태의 대결 대신으로 중립이 지닌 매력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똑같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합리적인 반사실적 가정이다. 거의 일어나지 않을 뻔했기 때문이다) 실로 최근 유럽사의 윤곽은 매우 달라 보였을 것이다. _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 1>, p207/706


 그렇지만, 한국전쟁이 잊혀져서는 안될 이유는 이러한 세계적 영향력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현재까지 분단체제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지도층들의  실수와 대립으로 결정된 전쟁과 국토의 양극단까지 전선이 움직이면서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잊혀진 전쟁' 뒤에서 조용히 묻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노근리 사건과도 같은 수많은 희생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적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수많은 단층을 가진 복합적인 성격의 전쟁인 한국전쟁이 왜 발생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미국인이 가장 모르는 것은 그 전쟁이 섬뜩하리만큼 지저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간인 학살의 더러운 역사가 끼어 있는데, 북한을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보는 미국의 생각과 달리, 그 최악의 범죄자는 겉보기에 명백히 민주주의 체제였던 동맹국 남한이었다. 영국인 저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 때문에 국제연합이 한국에 "오늘날까지 지속된 도덕적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남한의 잔학 행위는? 오늘날 역사가들은 남한의 잔학 행위가 훨씬 더 많았음을 알고 있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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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법 앞에서의 평등, 시민의 권리, 영주 특권의 폐지─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1790년 이후로 몰수되거나 국유화된 교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일체 포기하도록 요구한 조항이었다. 정교협약은 농촌 (그리고 보수적인) 지역에서 환영받았지만 군대에서는 인기가 없었는데, 여전히 혁명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 군대 내의 많은 이들은 제도 종교의 복귀에 대놓고 분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실망감을 드러냈다

영국을 향한 대륙의 적의는 프로이센 외교관 프리드리히 폰 겐츠가 잘 요약했다. 그는 한 각서에서 "유럽 정치의 지배적 원리와 현재 모든 사상가와 정치 저술가들의 지배적인 원리는 영국의 힘에 대한 질시다"라고 썼고, 이 내용은 1800년 11월에 그렌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용되었다. 영국을 향한 증오는 두 가지 확신에서 나온다고 겐츠는 주장했다. 하나는 영국의 부는 유럽 나머지 지역을 곤궁하게 만듦으로써 생겨난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유럽 국제 체제에 보나파르트가 가져온 유례없는 충격은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강한 프랑스 영역 내부에서 권력을 다진 다음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능력 덕분이었다. 1802년에 이르자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과의 계속되는 대결, 저지대 지방과 독일 영방국가들,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 유지, 해외 식민 세력의 부활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반면 프랑스는 훨씬 더 만만찮은 적수였고, 캐나다에 영국 세력이 현존하는 가운데 프랑스가 미시시피 밸리를 통제한다면 미국은 두 강대국에 둘러싸이는 형국에 직면할 것이었다. 일찍이 1798년에 일부 미국 지도자들은 예방적인 루이지애나 탈취 정책을 주창했고, 심지어 미국이 미시시피강 하구를 지배하는 것을 영국은 환영할 것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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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갈릴레오 시대, 공중위생의 역사에 관한 연구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김정하 옮김 / 정한책방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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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흑사병에 대한 학술적 지식은 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인도와 만주에서 발생한 전염병들에서 기원하였다. 항생물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전 세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흑사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는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p98)... 흑사병이 극성을 부릴 당시 빈민계층은 가장 심각한 피해에 노출되었다. "사악한 병마로 인해 극빈계층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흑사병은 처참한 위생상태에서 살아가는 극빈계층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99


 카를로 M.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의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Crictofano e la peste>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17세기 이탈리아 소도시 프라토를 배경으로 한다. 병에 대한 지식과 치료법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가공할 전파력을 가진 치명적인 질병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보건위원으로 임명된 크리스토파노. 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흑사병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전염병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크리스토파노의 대처방안인 감염환자의 격리와 전염이 의심되는 물품에 대한 사후 처리 - 살균과 소각 - 는 COVID-19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효과적인 대처법으로 보여진다.


 크리스토파노의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1) 감영된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모두 22일간 격리시설로 보낸다.

 2) 감염자들을 격리시설로 보낸다.

 3) 격리시설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요양병원으로 보낸다.

 4) 요양병원에서 22일간 격리한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67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것은 경제적인 요인들에 대한 고려로 귀결되었다. 산업화 이전 시대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에 보건과 위생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들에 따라 물품들을 대대적으로 소각하는 것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오염이 의심되는 물품이 새것이거나 가치가 높은 것이면 살균하였다. 하지만 낡고 가치가 적은 물품들을 불태워졌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81


 감염환자들에 대한 치료단계 대처뿐 아니라 예방단계에서 행해진 조치들은 과거 2년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오랜 역사성을 보여준다. 사료에 남겨진  전염병 대처법들은 오늘날 보건위생학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며, COVID-19초기 단계 우리 정부의 대응에 대해 외신들이 극찬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1630년 1월 초반 피렌체 보건 당국은 공국의 모든 영토를 대상으로 '통상적인 격리기간'을 공고하였다. 이것은 흑사병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전형적인 조치였다. 즉,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주민들을 집에 머물게 하며 격리기간에 그 어떤 모임이나 집회도 금지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인 격리기간'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전염자와 보균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신속하게 격리시키는 조치가 동반되었다면 모임을 금지하고 이동과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90


 잘 알지 못하는 전염병에 대해 최선의 대응책을 고안한 크리스토파노였지만, 그의 적은 감염병만은 아니었다. 크리스토파노를 괴롭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를 둘러싼 사회제도에 있었다. 긴급한 상황에 지급되는 '생계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이들과 이로 인해 더 퍼져가는 흑사병,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해지는 집단 간의 알력과 다툼, 부족한 자원 속에서 예방과 치료를 이어가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크리스토파노와 동료들의 노력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의학에 대한 무지와 대중의 협력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경제사학자의 관점에서는 보건소 관리들의 노력이 실패한 원인이며 적절한 경제적 자원의 결핍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크리스토파노 체피니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어리석은 투쟁에서 '희망의 빛'을 상실했다. 그와 동료들의 처절한 노력은 무지, 어리석음, 완고한 고집 그리고 사람들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파노는 많은 경우에 있어 (경제적) 자원의 부족으로 좌절해야만 했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122


 분쟁, 부정부패, 규정위반, 지루한 언쟁, 일련의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 병원의 관계자들에게는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환자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는 계속되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들의 보고서에는 정신적 피곤과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목격되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심각한 고독감과 의심으로 인한 좌절감은 보다 큰 결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감으로 드러났다. 프라토 보건위원들이 역사에 남긴 심리상태에서 또 다른 동기는 고통스런 절망감이었다. 사람들은 무지함 때문에도 제약과 통제에 견디지 못하기 마련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50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에서 놀라운 점은 17세기 흑사병을 겪은 사회의 모습과 21세기 코로나를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변이를 통해 진화(進化 evolution)하는 바이러스와 몇 세기가 지나도록 의학기술 외에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인류 공동체와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과연 인류 사회의 진보(進步 progress)를 낙관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통해 개인의 욕심에서 벗어난 성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의 깨달음이 공동체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개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역사를 보며 앞으로 더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한결 성숙한 자세로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크리스토파노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좌절했다면, 우리의 노력은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정치적 한계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인지... 치폴라의 얇은 책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은 코로나 19 상황이 종결되는 시점에 있는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크리스파노가 자신의 글에서 말한 ‘실수‘는 ‘부정부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격리기간이 지난 후에도 일상의 생계보조금을 기대하면서 집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건위원에게 주어진 임무들 중 다섯 번째와 관련해 보건소 관리들에 따르면 집안에서 사망한 자들은 곧바로 보고되지 않았으며 도시정부는 계속해서 이들에게 일상의 보조를 하였고, 이렇게 해서 부당하게 지급된 생계보조금은 관련 직원이나 죽은 자가 또는 양측이 함께 착복하였다. - P62

1631년 2월 25일, 피렌체의 보건 당국은 이 병원의 총독이 격리병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p71)... 인간적인 충돌과 관료정치의 분쟁으로 인해 격리병원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결국 1631년 6월, 병자와 요양병원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많은 물품들이 공급되지 않음에 따라 세속구호단체인 베네란다 콘프라테르니타델 펠레그리노(Veneranda Confraternita del Pelegrino)는 프라토 보건소의 관리들에게, 격리병원과 요양병원의 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주택들에 대한 관리와 물품 공급의 행정업무를 자신이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크리스토파노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환자들에 대한 대우가 크게 개선되었다. 한편 몇 달이 지나자 전염병의 기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 P73

보건소 관리들이 주목한 최대의 기준은 격리기간을 줄이는 것보다 예방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 않은 일련의 요인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건소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다른 이유들과 전혀 다른 사고들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모든 규칙들에 대해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프라토에서는 격리병원의 환자들까지도 격리규정을 지키려들지 않았다. 게다가 공중 보건의 필요성에 상충되는 이해관계들이 존재하였다. 상인들은 전염병에 오염된 지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지키려들지 않았으며 보건소 직원들이 설정한 예방조치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예외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교회는 종교행사와 기도회를 금지시키는 행정조치들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저명인산들의 이기주의와 천박함은 보건소 관리들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보건소 관리들 역시 당대의 전형적인 사고에 의한 미필적 희생자들이었다. - P119

흑사병은 삶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재앙도 초래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지역시장의 위축과 특히 공중보건 상 격리 지역의 설정으로 외부상인들과의 접촉이나 거래가 차단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피렌체 대공국의 경제정책은 공국 내의 소도시들에는 피해를 주었던 반면 피렌체의 수공업 분야에는 매우 유리하였다. - P103

보건소 관리들은 전염병에 대항하면서 막중한 책임을 수행했으며 몇 달 동안 걱정, 피로, 위험 속에서 살았지만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했다. 이들에 비해 별로 고생하지 않은 자들은 봉급과 ‘사례금‘을 받았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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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2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세에도 저런 식의 전염병관리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군요. 흑사병하면 거의 어쩔줄 모르는 상황에 신을 부르는 모습만 연산이 되는데 말이죠. 저는 오히려 실패했을지라도 크리스토파노와 같은 노력이 공동체의 기억속에 새겨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가 그래도 안 망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요. ^^

겨울호랑이 2022-06-22 23:14   좋아요 1 | URL
움베르트 에코가 <중세> 시리즈 서문에서 현대인들이 중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무식하고 단순한 기사와 기도 밖에 알지 못하는 수도자. 중세를 대표하는 두 계급의 모습으로 우리가 중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근대가 르네상스에서, 르네상스가 중세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로 보면, 지금과는 배경이 많이 다르지만 배경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은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
 

이제 끝으로 전쟁의 성격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이다. 현실적으로 이 전쟁은 합의된 경계선을 넘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에서 이 전쟁의 개념은 단순한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앞으로 많은 토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교전국 일방이 당사자간의, 또는 국제법과 협약에 의해 용인된 경계선을 넘는 군사행동과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에서의 침략전쟁이자, 다른 한편 분열된  민족을 합치려고 시도하였던 많은 국가들의 사례와 일치하는 민족내부의 단일민족국가의 형성 노력의 하나였다. - P894

이 전쟁은 두 분단국가간의 민족의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 점에서는 민족 내부의 전쟁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의 등장원인, 38선의 복합적 성격과  전쟁의  결정 및 발발에 깊숙이 개입된 소련과 중국의  존재로 인하여 애초부터 이 전쟁은 결코 순수한 내전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국 유엔마저 개입함으로써 이 전쟁은 국제전으로 상승하여 버렸다. 미국과 중국의 참전 이후 이  전쟁은 전혀 이승만과 김일성의 전쟁이 아니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결정은 워싱턴과 동경, 모스크바와 북경에서 이루어졌다. - P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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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6-21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번 째 문단이 눈길을 잡아 끄네요.

결국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한 결정
이 외세에 의해 내려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21 15:47   좋아요 1 | URL
네, 책의 본문에서도 해방이 미/소 양국에 의해 ‘도둑처럼 닥쳐왔다‘고 표현되었고, 분단 또한 도둑처럼 주어졌다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eBook] 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2022-2027 - 인구 절벽 위기를 기회로 맞바꿀 새로운 미래 지도
전영수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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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기존 이론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로에 진입한 듯하다. 이론대로라면 고용, 소득 등 재무 개선만으로 출산율이 높아져야 하지만, 한국은 출산 포기가 사뭇 사회 트렌드로 번지는 양상이다. 과거엔 거의 없던 평생 비혼이 남(14%), 여(7%) 모두 급증했다. 20~30%로 상승하는 건 시간문제다... MZ세대는 ‘무자식‘을 표준으로 받아들일 기세다. 그들의 시대 의제는 다양성이다. 다양한 생활 모델을 골라 본인의 효용을 높이는 카드를 선호하고 선택한다. 그 때문에 ‘졸업 -> 취업 -> 결혼 -> 출산 -> 양육‘의 전통 모델은 기능 부전에 빠졌다. 저출산이 팬덤적 문화 현상으로 번지면 기존의 인구 정책은 무의미해진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수일 수밖에 없다. _ 전영수, <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2022-2027>, 62/378

전영수의 <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2022-2027>은 향후 대한민국 인구와 이러한 트렌드 변화에 관한 책이다. 다만, 해당 기간 동안 인구 변화에 변곡점이 특별히 생긴다는 의미보다는 향후 5년간 유망산업, 구매력있는 소비자, 소비의향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마케팅에서 타겟팅(targeting) 책으로 구분하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리고, 변화는 현재 우리보다 조금 앞서 고령화 길을 걷는 일본의 사례를 주된 예시로 분석된다.

초고령사회, 구매력있는 노령층,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젊은 층으로 특징되는 인구 구조 속에 유망 부동산, 사업분야 등이 소개되지만,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이슈에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개인적으로 점심시간에 EXCEL을 가지고 해 본 계산이 있어 올려본다. 2021년 우리나라의 저출산 관련 예산은 42.9003조다. 이를 정부에서 지출하지 않고 당사자에게 배분하면 얼마가 돌아갈까? 단순하게 계산해보자.

저출산 문제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금액은 달리 배분될 수 있을 것이다. 크게 이렇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1) 가임기 여성의 경제적 문제 2) 신혼가구의 소득 문제 3) 자녀 양육비 문제. 2020년 현재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15~49세)의 인구는 11,422,000명이며, 2020년 혼인 건수는 214,000건, 신생아수는 272,337명이다. 가임기 여성에게 저출산 예산 42.9조를 나누어 준다면 1년동안 이들에게 3,755,936원씩 지급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15세 여성부터 지급되기에 현실성이 떨어지기에 대략 금액만 짐작하는 것으로 넘기자. 혼인건수와 신생아수는 대략 비슷한데, 대략 1년에 30만명씩 신생아가 태어나고 이들이 속한 가정에 18살까지 양육비를 지급한다면, 약 800만원 정도 금액을 지급할 수 있다. 한 가정에 아이가 1명만 있어도 800만원을 지급할 수 있는 돈이 이미 편성되어 있는데 가정에서는 돈이 없어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현실. 차라리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출산 예산을 기금에다 넣고 출생신고 때마다 계좌번호 받아서 바로 송금해주면 다른 저출산 대책이 필요할까.

저출산 문제와 저출산 예산을 보며, 이 문제야말로 정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장에 맡긴다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된다...

출산 정책은 더 눈물겹다. 액수와 대상 등 자녀 숫자별 지원금을 내세워 출혈경쟁을 반복한다. 자녀를 낳으면 빚 1억을 갚아주거나 임대료를 면제해준다는 곳도 생겨났다. 튈수록 주목받기에 파격적인 아이디어는 계속 나오지만 중앙 정책과 겹치는 내용이 부지기수다. 해서 경쟁을 넘어 과열이란 혹평이 많다. 돈으로 보자면 가성비가 낮거나 없다. 투입(15년간 200조 원)은 많은데 산출(출산율 세계 꼴찌)은 별로다. 영리 조직과 개별 가계의 살림살이면 진즉 망했을 수준이다. _ 전영수, <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2022-2027>, 30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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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6-21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급기간을 18년으로 하셨는데, 현실적으로 최소 26년으로 해야하지 않을까요? ^^
그리고 자녀 결혼비용, 집값 등 엄청난 플러스 알파를 고려하면 무자식 상팔자라는 시대조류도 이해는 됩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6-21 14:18   좋아요 2 | URL
^^:)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결혼전까지 생각을 하면 좋겠지만, 그 정도 기간까지 감안한다면 출산예산이 아닌 기본소득의 구조에서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가 자란 후 비용까지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모든 부분을 정부에서 보조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여겨집니다. 자녀 출생으로 인한 한계 편익과 한계 비용을 생각해볼 때, 많은 부분을 가정에서 가져가는 것도 사실이니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생각해본다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레삭매냐 2022-06-21 16: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자식 표준과 출산 기피
가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군요.

출산 장려 정책은 부동산부터
시작해서 복지 그리고 교육까
지 모두 아우르는 그야말로 지
속가능한 종합 패키지 정책이
되어야 하는데, 땜질식 처방으
로 그저 예산폭탄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시대의 거
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21 16:21   좋아요 2 | URL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점점 악화되는 저출산 문제는 분명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하고 접근해야 할 문제를 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환경문제와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여러 면에서 참 위기감을 느끼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