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저 보고서 - 악당들의 시대, 한국현대사와 박정희시대에 대한 가장 완벽한 평가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지음, 김병년 엮음 / 레드북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프레이저 보고서 Fraser Report>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에서 1978년 10월 제출된 <한-미 관계 조사 보고서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Report>가 원제다. 원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레이저 보고서>는 당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숨겨진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보고서의 많은 내용이 보고서가 작성된 후 약 40년이 지난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프레이저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북한에 대한 위협 강조와 현실


 이미 1978년에 한국군의 능력은 북한을 능가한다는 국방부 부차관보의 증언을 보더라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결코 북한보다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무기의 해외 수출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북한의 위협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왜 1970년대 미군 철수를 그토록 반대했던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국방예산 지원금과 생필품이 박정희 정권에게 돈벌이의 수단이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태극기 집회(출처 : 뉴스1)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결정적으로 외국세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더욱 안정된 억제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상의 역할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미 국방부 부차관보 아브라모위츠(Morton Abramowitz)는 대한민국은 지금(1978년 현재) 북한과 더욱 대등하게 걷고 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동맹국의 주둔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p124)


 '이곳 사람들은 매우 격양되어 있다. 만일 한국인들이 최근 수년 간 말해왔던 것처럼 북한의 위협이 그렇게 엄청나다면,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방어에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것들을 해외에 팔려고 하는가?'(p144)


 '한국의 국방 능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군사정책 역시 경제원조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승인 아래 한국정부는 미국이 한국의 국방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원조한 생필품들을 국내에서 판매하여 그 수익금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p257)


2.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 : 농촌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


  박정희 정권은 불안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 성장이 국내 곡물 가격 억제로 인한 인플레이션 요인 통제, 그리고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공급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 경제에 있어 농촌 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불안요인이 되었고, 정권의 정당성이 결여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1960년대 PL480 프로그램은 식량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대규모 방위시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의 일부를 한국정부에 공급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기간 동안 농업분야는 산업분야만큼 급속히 성장하지 못했는데, 한국정부가 농업분야로 재원들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업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1970년대 초까지 PL480은 농업 성장률과 생산성, 그리고 수입을 꽉 억눌렀던 것으로 보인다.'(p339)


 '1960년대 중반 경, AID는 한국정부가 일부 국내 식량 곡물에 대한 가격을 시장가격 이하로만 허락하는 정책 때문에 농촌 소득은 최소한의 증가만 이루어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정책과 함께 농촌 소득이 낮은 성장을 초래하는 이유는, 한국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노력과 도시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싼 생필품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이었다.(p288)...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도 도시노동자의 소득은 증가했다. 그러나 1975년과 마찬가지로 도시노동자의 월 평균소득은 월 가계지출보다 적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정부는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유순하게 했고,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지했으며, 고용주의 협력을 얻는 정책을 지속했다.'(p296)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낮은 임금 강요는 40년 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최저임금제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경제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임금은 수출 경쟁력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고, 조직된 노동자는 극도로 제한을 받았다. 1960년대의 대부분과 1970년대 초반을 통해 농산물 가격 또한 도시의 불만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낮게 유지되었다. 이것은 농촌과 농업의 발전을 방해했다. 모든 영역에서의 사회복지는 경제 개발의 뒤편으로 밀려났다.'(p328)



3. 무능한 한국 정부


 이러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정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는 재정 확대책을 펼칠 수 밖에 없고, 항상 재정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정권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재정지출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한국경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국 경제를 낙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만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의 경제정책은 단지 무책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낮은 외환보유고와 함께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고 단기 신용 역시 이미 한계에 달했는데도 긴축보다 팽창을 선택했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운용이다. 재계 지도자들은 그 위험을 명확히 알고 우려하지만, 이미 어려워진 정치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성장과 고용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엄청난 정치적 압력에 의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 1975년 5월 美 재무부 보고서 - '(p315)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 원조 없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결핍되어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 경제적 의존 양상이 뿌리 깊었다. 더 나아가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국민소득이 약간이라도 증대되면 그에 상응해서 미국이 원조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경제 원조로 한국군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의 염려는 특히 컸다.'(p267)


 오히려, 한국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보이고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적시된 한국의 미개발 자원이 '인적 자원(人的 資原)'이라는 사실을 박정희 정권은 알고 있었을까. 결국, 한국경제 성장의 실질적인 주역은 박정희 정권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國民)이었음을 우리는 다른 나라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장점을 우리가 모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몇몇 거대한 정부소유 기업들은 부실한 관리와 비경제적 요금 구조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해외 부문에 있어서 엄청난 지불 격차의 균형은 오로지 미국원조에 의해서만 지탱되었다.... 1950년대의 토지개혁은 비록 가난했지만, 농촌 부문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비록 비효율적인 수입대체전략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1950년대 동안 산업 능력은 꾸준히 발전되었고, 보다 효율적인 용도로 전환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근면하고 교육받고 훈련된, 엄청나다고 표현될 만한 미개발 자원이었다.'(p260) 


4. 정치 기부금 : 베트남 전쟁과 기업 뇌물


 박정희 정부는 통치 자금 마련을 위해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만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을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약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를 한국 정부에 지불했으며, 그 금액은 당시 한국의 외화 수령액을 고려한다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 또한, 당시 유력한 한국의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는 선거 때마다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최근 K-재단과 미르 재단 문제의 뿌리는 이미 반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사진] K-재단, 미르재단(출처 : SBS뉴스)


 '미국정부는 최근에 합의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연계하여, 양국 대통령 간에 합의된 1억 5천만 달러의, 또는 그 이상의 개발차관을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다음 5년에 걸쳐 한국에 상당한 액수의 재원을 차관으로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p272)... 미국정부는 특히 통화 정책의 개혁을 원했다. 선거 시기에 자금 공급을 확대시키려는 한국정부의 경향은, 만성적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개인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중단되어야만 했다.'(p274)


 '1973년에 회계감사원이 지적했듯이, 미국이 한국군의 베트남 모험의 결과에 지불한 금액을 산정하는 것은 자료 부족으로 어렵다. 1970년에 국방부는 미국의 해외 안보협정과 공약에 관한 소위원회의 사이밍턴(Symington) 상원위원에게 추정을 제출했는데, 다음과 같이 복사되어 있었다. 9억 2,700만 달러였다.(p281)... 미 회계국은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베트남전과 관련된 소득이 연간 2억 달러라고 추산했다. 대충 잡더라도 그 금액은 1966년에는 한국의 외화 수령액의 40%를 차지했으나 1970년도에는 15%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만성적인 외화부족을 고려한다면, 15%조차도 중요했다.'(p282)


 '1971년에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정치자금의 필요는 더욱 심화되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1970년 6월에 민주공화당에 십만 달러씩을 기부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직접 김성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 명단에는 한국의 거대한 재벌들, 럭키 그룹, 현대 건설, 삼성 그룹, 김성곤이 경영하는 쌍용 그룹 등이 포함되었다.'(p370)


5. 정치 자금의 활용


 박정희 정부는 이렇게 모은 정치 자금을 이용하여 미 상하원 의원들을 설득하였으며, 친(親) 정부 활동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선거구에 회사 본부가 소재해 있는 하원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미 한국에 투자해 온 거대기업들(Gulf, Caltex, American Airlines, Fairchild)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과 활동들은 외부의 출처들과 다양한 수단들을 이용해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예를 들어 쌀 수수료는 박동선의 조지타운클럽과 다른 프로젝트들의 재정을 도왔다. 한국문화자유재단과 그 계획인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한국정부는 미국 내 출처로부터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친정부 활동들을 지도, 통제할 수 있었다.'(p170)


6. 개인적 뇌물 수수 


 정부 정치자금 중 일부는 개인 재산으로 축적되었고, 이중 일부는 박정희에게도 전달되었다. 박정희에게 전달된 자금은 청와대 금고와 스위스 계좌에 예치되는 형태로 보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자금과 관련한 중심에는 한국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



[사진]김-오히라 메모(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logId=minlovemuch&blogNo=100093008276)


 '1969년 이후 모든 형태의 대출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그것은 정부 정치자금의 기본적 원천들 중 하나의 감소를 재촉했다. 세금 체계를 통해 자금을 증가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하하려는 노력이 명백히 착수되었지만 -그것은 제도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한  노력들은 부패의 일반적 수준이 반영된 한국정부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 뇌물 수수의 범위가 방해받는 것이었다. 1970년 경에는 이후락, 김성곤, 김혁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p369) 


 '이후락에 의해 수집된 자금들이 스위스 은행계좌에 예치되었고, 원칙적으로 대통령에 의한 용도였다고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후락과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그 돈들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탁자 뒤에 있는 금고 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계좌의 존재는 은행 기록들로 구체화되었고, 이동훈(이후락의 아들들 중 한 명)에 의해,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다수의 청와대 고위관리들 중 최측근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본 소위에서, 스위스의 그 돈들은 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자금"이었다고 진술했다.'(p370)


 '워커힐 리조트 건설과 일본에서 자동차 수입과 같은 상업적 거래들에 한국중앙정보부가 깊이 빠져들었다는 믿을만한 표시들이 있었다. 그 후 한국중앙정보부가 워커힐 프로젝트에서 수백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추정되었다. 1963년 봄 기간 동안 한국중앙정보부는 주식시장의 은밀한 조작에 휩쓸려 들어갔고, 이 공작으로 거의 4천만 달러를 챙겼다고 추정되었다...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재정으로 사용될 선금조로 1억3천만 달러,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를 위한 민주공화당 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김종필이 일본에서 받았다는 혐의들의 가죽 끈을 풀어버렸다.'(p361)


7. 한국중앙정보부(KCIA)와 감찰


 한국중앙정보부의 권한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한국 내 국민 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을 감시하는등 민간인 사찰을 통해 언론 통제 등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반(反)정부 활동을 억압했음을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진] 군 기무사 민간인 사찰(출처 : 통일뉴스)


 '전 한국중앙정보부(KCIA) 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그것이 미국의 CIA와 FBI의 기능을 합친 것이라고 말했다. 전 한국외교관 이재현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실제로 한국중정은 한국인들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p147)


 '한국교민 담당관으로서 김상근의 다른 책무들 중 하나는, 유신헌법에 대한 선전 자료를 배포하고 반정부 활동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시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때 그는 영사관 관리들과 협력했고 한인교포들을 이용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정보를 위해 지역 한국 언론의 기사들을 읽었다.'(p152)


 '한국 법에 의하면, 비록 미국에서 발행되었다고 할지라도 서울사무소가 미주 동아의 내용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976년 1월 13일자 편지에서 김남은, 만약 정부의 비상계엄령을 위반한 기사가 앞으로 발행된다면 소환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에 비판적인 편집 정책을 가진 미국 내 다른 한국어 신문의 발행자들을 괴롭히고 협박하려고 했다.(p468)... 때때로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와 정책을 유리한 관점에서 제시하는 출판 및 방송매체를 공개적으로 설립하거나 혹은 자금 지원하려고 시도했다.'(p469)


 이외에도 프레이저 보고서의 주요한 내용으로는 통일교와 한국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교주 문선명이 이끄는 통일교 조직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폐지된 범세계적 단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이 한국 정부와 어떤 영향이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프레이저 보고서>는 1970년대 한국의 고속성장이 농촌과 도시 빈민의 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는지 그리고 개인자산을 만들었는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한 한국중앙정보부의 중심적 역할에 대해서도 상세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깊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중심이 '한-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정 부문 한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이후의 극우 정권이 '왜 미국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라는 한계로 읽기에 다소 지루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기간의 납득하지 못할 정부의 행태를 잘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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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2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씨......
얼추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알게 되니 더 열받네요.

겨울호랑이 2017-09-02 14:38   좋아요 1 | URL
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하는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시대를 거슬러 살고있는가를 실감하게 되네요...

AgalmA 2017-09-02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금 꼼수 부리려고 통괄로 걷을 수 있는 부가가치세를 지금처럼 마련한 게 박정희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계 세금 걷는 거 가지고도 여당인 민주당 의원이 나서서 만류하는 모양새 하며... 세금 조정만 잘 해도 문재인 정부가 국회에 예산 굽신 안해도 될 텐데 세금 조정할라치면 국회며 야당이 포퓰리즘이다 어쩐다 또 얼마나 발목 잡을지ㅎ;;

겨울호랑이 2017-09-02 16:19   좋아요 1 | URL
내년 지방 단체장 선거에서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보여줘야할 것 같아요...한동안 구체제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나와같다면 2017-09-02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열세인가 우위인가?

리영희 선생님은 1980년대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해 이미 남한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하셨죠..

겨울호랑이 2017-09-02 21:51   좋아요 1 | URL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풀려진 공포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을 보면 그들의 저의에 대해 의심할 수 밖에 없네요..

2017-09-03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국 -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김종원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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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 1873)이 의도했던 대로 상업(Commerce), 문명(Civilization), 기독교(Christianity)가 아프리카에 주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네 번째 "C" 즉 정복(Conquest)과 함께 올 것이다.'(p231) 


<제국 Empire>은 영국 제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다룬 닐 퍼거슨(Niall Ferguson)의 저술이다. <제국>은 영국이 다른 유럽 열강보다 강대한 제국(帝國)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인을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16세기 에스파냐, 포루투갈에 비해 늦게 제국으로 출발한 영국이 어떤 방식으로 최대 제국으로 발돋움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국이 해체되었는지 분석하는 <제국>을 통해 영국 제국주의의 특성을 살펴보자.


1.  제국의 시작 : 뒤늦은 출발 그리고 남다른 발전


 영국은 다른 유럽 제국보다 늦게 식민지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에스파냐, 포루투갈과는 달리 달리 금, 은 등의 귀금속이 산출되는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대신, 사탕수수 등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을 식민지로 개발하게 되었다.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식민지 개발을 통해  화폐(money)를 가져온 반면, 영국은 식민지에서 원재료를 본국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영국 본토는 제조업이 발달할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모건이 약탈한 은화를 갖고 행한 일이었다. 그는 자메이카의 부동산에 투자하여 리우미뉴 계곡(오늘날의 모건 계곡)에 100만 평 가량의 땅을 취득했다. 나중에 그는 성 엘리자베스 교구에 500만 평을 추가했다. 중요한 점은 그곳이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해외 팽창의 특성이 낳은 일반적인 변화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제국은 금을 약탈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설탕 재배와 더불어 발전했다.'(p47)


[그림] 플랜테이션 농업(출처 : http://blog.daum.net/_blog/)


2. 자본 시장 : 선진 금융제도


 1688년 명예 혁명은 당시 금융 선진국이었던 네덜란드의 금융 기법이 잉글랜드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선진 금융 기법을 통해 동원된 자금력의 우세는 영국이 경쟁국보다 앞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전해진 주식회사 제도를 통해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게 되었다.


 '신용이 전쟁을 낳고 평화를 낳으며 육군을 육성하고 해군을 무장시키고 전투를 치르고 도시를 포위한다. 그리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군자금이라고 불린다... 신용이 보수 없이 군인을 싸우게 하고 식량 없이 육군을 행군하게 하고, ... 그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그것은 대부 허가증이 되고... 수요가 있을 때는 즉시 재무부와 은행을 충분한 자금으로 채운다.'(p62)


 '(7년 전쟁의 승리는) 해군의 우위에 기반을 둔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영국이 프랑스보다 결정적으로 우위에 있는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바로 돈을 빌리는 능력이다. 영국의 모든 전쟁 경비의 3분의 1이상이 대부금으로 조달되었다. 윌리엄 3세 치세에 네덜란드 것을 모방한 제도가 이제 본래의 특성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피트 정부로 하여금 투자하는 대중에게 낮은 이율의 채권을 판매하여 전쟁 비용을 늘릴 수 있게 했다. 대조적으로 프랑스 인들은 구걸을 하거나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주교 버클리가 썼듯이, "신용은 잉글랜드가 프랑스보다 우위에 있는 주요한 강점"이었다.'(p76)


[그림] 동인도회사(출처 : http://mediapen.com/news/view/183191)


3. 노동 시장


 또한, 영국의 식민 정책은 노동 시장에서도 다른 제국들과 차이가 있었다.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등을 추구하던 이들은 해외로 진출했고, 마치 '잡초를 뽑듯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귀금속 대신 설탕산업을 육성해야 했던 식민지는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이 제공되고, 카리브해에서 설탕이 제조된 후 이 제품을 팔아 자본이 영국으로 유입되는 산업 구조가 마련되었다.


 '1660년대 초에서 1950년대 사이에 2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국 섬을 떠나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소수만이 돌아왔다... 영국을 떠나면서 초기 이주민들은 그들의 전 재산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걸었다... 영국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기초가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대량 이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국 탈출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전 대륙을 하얗게 변화시켰다.'(p104)


 '식민화에 대한 그들의 용어는 "플랜테이션'이었다. 존 데이비스의 말에 의하면 정착민들은 "좋은 곡식"이고, 원주민들은 "잡초"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원예술 이상의 것이었다. 이론상 플랜테이션은 식민화, 즉 정치적 변경 지역에 충성스러운 백성들을 내보내 정착지를 건설하는 고대 그리스의 관행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사실 플랜테이션은 오늘날 우리가 "인종 청소"로 알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p108)


 '뉴펀들랜드 어장은 오랫동안 영국 어부들을 멀리 대서양으로 이끄는 유인이었다. 물론 아메리카에서 그 어장에 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뉴잉글랜드 근해 역시 물고기가 가득했다. 마블헤드 앞바다에는 물고기가 풍부해서 "발을 적시지 않고도 물괴의 등을 밟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p114)


 '1770년에 이르자 영국, 서아프리카 그리고 카리브 해 사이의 삼각 무역은 플랜테이션에 지속적으로 노동이 공급되게 했다. 아메리카 본토 식민지들은 지속적으로 그곳에 식량을 공급했다. 설탕과 담배는 영국으로 흘러들어가 상당 비율이 유럽 대륙으로 재수출되었다. 그리고 이 신세계 상품들로부터 이윤은 제국의 아시아 교역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쳤다. '(p139)


[그림] 노예무역 (출처 : https://0jin0.com/tag)


4. 과학


 19세기 영국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해군의 지배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국 해군의 지배력은 산업 혁명 이후 발전된 과학인 '증기기관', '전신 케이블' 그리고 '철도' 등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한편, 영국 육군은 지도를 만드는 '지구 과학'의 뒷받침으로 제국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노예 제도에 반대한 전쟁과 아편을 위한 전쟁의 공통점은 영국 해군의 지배력 덕분에 가능했다. 증기력은 영제국을 접합시켜 주었다. 1850년대에서 1890년대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여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2일에서 19일로 줄었다. 증기선은 훨씬 빠를 뿐 아니라 외양도 커졌다. 그래서 같은 기간에 평균 총 용적 톤수는 대략 두 배가 되었다. 1870년대에 이르면 인도에서 오는 전보가 몇 시간 안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여왕은 전보를 주의 깊게 읽었다.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 치세 동안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세계는 축소되었다... 1840년대 말에 이르자 전보가 육상 통신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1850년대에 이르면 인도의 건설 공사는 전신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했다. 전신 케이블과 증기선 노선은 세계를 일제히 단축시키고 통제를 더 쉽게 만든 세 개의 금속 네트워크들 가운데 두 가지였다. 세번째는 철도였다.'(p242)


 '빅토리아 시대에 일어난 세계 통신 혁명은 "거리의 소멸"을 완수했다. 단거리뿐 아니라 장거리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쟁시에 거리는 극복되어야만 했다. 단지 영국 군사력의 주요 원천이 세계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p243)


 '빅토리아 중기 제국의 모든 구성 요소처럼, 인도 육군 역시 과학 기술(총을 생산하는 기술뿐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기술에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지배적 기술에서 경위의(經緯儀)가 전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p246)


[사진] 증기선(출처 : http://qumalog.tistory.com/entry)


5. 교육


 영국이 발달된 금융 제도,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계의 약 25퍼센트에 해당하는 육지와 대양을 지배하는 제국을 유지하는 것에는 자체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효율적인 제국을 통치하는 수단이 필요했으며 이는 관료 집단에 의한 통치로 현실화 되었다. 효율적인 제국의 관료집단은 어떠한 방식으로 양성되었는가? 이는 '주입식 교육'으로 제국의 이념을 공무원에게 입력시키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키플링은 <오티스 이어의 교육>에서, "제국의 작업에서 증기가 인력을 대체할 때까지", 항상 "단순 기계적인 일에 혹사당하고 소모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런 사람들은 "라이어트(ryot, 소작농민)나 쟁기를 끄는 수소와 더불어 국가의 기초가 되는 초석이라는 영예를 공유하는 일반 시민(열병의 희생양)이었다." 오티스 이어는 "공식적인 풍자에 의하면" 전형적으로 "눈이 움푹 들어간 사람으로, 스스로를 돕기에는 무력하지만 남을 해치고 훼방 놓고 괴롭히는 데에는 강하며, 불평불만으로 들끓는 나약한 군중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었다.'(p259)


 <제국>에는 영국 제국이 다른 경쟁 제국(프랑스 제국, 에스파냐 제국 등)보다 앞설 수 있었던 이유를 위와 같이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영국인인 저자의 주관적 한계 또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 윤리적 측면에서 일어난 심오한 변화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수익성이 없게 되자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고 주장되곤 하지만, 모든 증거는 이와 다르다. 실제로 노예 제도는 여전히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폐지되었다.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집단의 심정 변화다. 모든 위대한 변화들처럼, 그것 역시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아메리카에서 소위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감리교가 발흥하면서 그러한 이념은 더욱 광범위한 프로테스탄트 집회로 확산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계몽주의의 가르침으로 인해 노에 제도 반대로 돌아섰다.'(p179)


  우리는 미국 남북 전쟁(美國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1861 ~ 1865)을 대표적인 노예 해방 전쟁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노예 해방이 남북전쟁 모두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노예 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의 주(州)와 북부의 주(州)간의 대립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닌 경제체제의 대립이었다. 산업화를 통해 북부는 노예제가 필요없어진 반면, 농업에 의존했던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미국남북전쟁이 발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이라는 아름다운 가치의 실현을 위해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1세기 이전에 일어난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 역시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서는 영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종교에 기반한 박애정신의 확대로만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렵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저자가 경제적 체제 대립이라는 해석방법을 모르지 않았을테고,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과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그림] 남북전쟁(출처 : http://www.kamerican.com/GNC/new/)


 또한, 이슬람 포로를 학살하는 영국군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는 부분을 보면 제국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그래도 영국 제국주의가 다른 곳보다는 인도적이었다는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십보 백보'차이정도 아닐까. 


 '이 내용을 읽으면 독일군 SS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 인들에게 행했던 방식이 떠오른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이 살인을 목격한 영국 병사들은 처음에는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쳤고, 총이 발사되었을 때는 "분노와 야유의 함성"을 터뜨리며 장교의 행동을 큰 소리로 비난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독일 병사들이 공개적으로 상급자를 비난한 일은 있다 하더라도 아주 드물었다.'(p221)


 <제국>에서는 영국 제국주의가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와 달랐던 점을 상품시장, 노동시장, 문화, 정부, 자본시장 등의 분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고, 이를 통해 영국이 가장 강력한 제국을 만든 원인에 대해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원재료 공급지로서의 식민지 역할, 네덜란드와의 합병으로 인한 선진 금융 기법의 전수, 종교적/경제적 이윤을 추구한 자발적인 식민지 이주, 과학기술의 적절한 적용, 효과적인 제국 통치를 위한 교육 시스템 구축. 이러한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여 영국을 제국주의 시대의 승자(勝者)로 만들었음을 <제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저자 자신이 영국인인 관계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다소 우호적인 목소리는 영화 <덩케르크 Dunkirk>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독자에게 선사하는데 이 부분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영국을 이어 새로운 제국인 미국(美國, America) 순서다. 다음은 저자의 또다른 저서인 <콜로서스 Colossus>를 통해 미국 제국주의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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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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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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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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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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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15: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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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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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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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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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9-01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9월입니다. 즐겁고 기분 좋은 날들로 이어지는 한달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편안한 금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09-01 19:23   좋아요 1 | URL
^^: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상쾌한 9월 출발과 한주 마무리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1. 현악 4중주(Quartet)


'고전적인 콰르텟(Quatuor)에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악기 편성은 두 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첼로죠.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소나타나 교향곡의 일반적인 진행 - 알레그로, 안단테, 미뉴에트, 피날레 -를 따르죠. 따라서 현악 4중주의 독창성은 형식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소나타와 교향곡도 진행은 똑같으니까요. 그보다는 같은 족 族에 속하면서도 각기 개성이 있는 네 개의 악기들에 그 형식을 적용했다는 점이 독창적이죠.'(p265)


'현악4중주를 처음 쓴 작곡가는 일반적으로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 ~ 1809)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든이 현악 4중주를 완성된 형태로 만든 것은 사실이에요. 이 분야에서 하이든의 첫 시도들은 1755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그때까지는 조곡 형식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죠...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한, 그를 현악 4중주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p267)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 1791)는 1782년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의 음악을 접하고서 여섯 편의 현악 4중주를 만들었죠. 이 여섯 개의 경이로운 작품들은 하이든에게 헌정되었습니다. 하이든은 첫 곡, 현악 4중주를 듣자마자 모차르트도 있는 자리에서 그의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지요.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건대 당신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입니다.'(p270)



2. 종교음악


 '모차르트를 생각해봐요 바로크 시대 사람이자 바로크 양식의 영향하에 있는 예술가죠. 하지만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곡이나 <아베 베룸 코르푸스 Ave Verum Corpus>가 팔레스트리나의 모네트보다 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술은 경건과 고양이라는 상반되는 두 효과를 통해 종교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예술이 감성의 경건에 부응한다면 바로크 예술은 감성의 고양에 해당하죠. 전자는 말을 삼가게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후자는 기쁨을 불러일으켜 <마그니피카드 Magnificat (마리아의 찬가)>를 낳는 겁니다.'(p284)



3. 깊이 읽기 : 그리고리오 성가의 탄생

 

'새로운 성가는 모든 신성로마 제국의 영토 에서 적용되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갈리아 지방의 성가와 로마 지방의 성가가 점차 융합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성가의 권위를 확정 하기 위해 서유럽의 여러 지역 교회의 전통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음악가들은 성가들의 기원을 그레고리오 1세라고 언급하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이 여러 필사본에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장크트 갈렌 수두원에 보관되어 있는 <하르트커 수사의 교창 성가집 Antifonario Hartker>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며, 여러 성가가 성령에게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탄생"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실행한 전례의 자유와 관련해서 보자면, 서유럽의 종교 곡의 역사 중 마지막 페이지를 구성한다.'(p881)



 한동안 가을을 부르는 비가 내리더니 기온도 많이 떨어지고 하늘도 푸르러 졌습니다. 초가을이 되었군요. 이웃분들 모두 여유롭고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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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전원생활(田園生活)에 대한 책 두 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가 그 책들입니다. 둘 다 전원생활, 시골생활에 대한 이야기지만 주제에 대한 저자들의 입장은 사뭇 다릅니다.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경북 성주로 이주한 엄윤진 작가의 경험담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시골 생활에 다소 부정적인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통해 시골에 대한 두 작가의 다른 입장을 비교/대조해 봤습니다.


1. 결단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의 엄윤진 작가는 다소 즉흥적으로 성주 이주를 결심합니다. 엄윤진 작가는 다소 즉흥적인 결정으로 제2의 인생을 열지만(물론, 작가는 성공적으로 안착을 합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시골 생활에 대해 신중한 고려를 조언합니다.


가. 길을 잃고 집은 만나다 : '그 무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내가 도시에서 무엇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울하게 보내게 될지도 모를 내 상황에 조금 겁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혼자면 어때, 그런 맘도 들었다.... 정말 이상했다. 난 이미 이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p21)


나. 지쳐 있을 때 결단하지 마라 : '모든 것을 접고 시골에 틀어박히기로 마음먹는 것은 정말로 괜찮을까요. 당신은 벌써 여러 번 우려내 맛과 향이 다한 차 같은 존재인가요. 오랜 세월을 축적해온 그 귀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과 인관관계를 몽땅 하수구에 버리고 마는 식의 삶은 순수함과는 분명 다릅니다... 시골로 거처를 옮겨 지치고 지친 심신을 충분히 쉬게 하고픈 마음은 압니다만 그런 피로야 반년쯤 쉬면 바로 사라집니다. 다시금 일하고픈 의욕이 솟구칩니다. 그때 당신이 아직 도시에 있다면 재기할 기회는 시골에 비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장 지쳐 있을 시기에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은 피해야만 합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p48)


2. 선택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이 끌려 집을 구매한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내린 결정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가. 길을 잃고 집은 만나다 : '왠지 모르게 산길이 마음을 끌었다. 편안한 느낌, 그 이상이었다. 산길이 많이 굽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내려오는데 오른쪽 창으로 한옥의 지붕이 눈에 띄었다.... 그 틈 사이로 살며시 집이 보였다. 고즈넉하니 멋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주인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빈집이었다. 마당의 잔디는 손을 본 듯하나 그 주위는 온통 나무였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내가 잡목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몇 년째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옷자란 풀이었다. 뒷마당은 언감생심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집이 네 채나 되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 (p20)

 

나. 아름답다고 좋은 곳이 아니다 : '자연에서의 현실이란 것을 잘 몰랐던 젊은 시절, 몰래 눈여겨둔 별장지가 있었습니다. 높은 지대에서 바라본 전망은 아름다운 아즈미노에서도 각별했습니다.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 구름 위에서 생활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집필 의욕이 솟구쳐 생각대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집필 의욕이 솟구쳐 생각대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설픈 기대에 사로잡혔습니다... 만약 당신이 땅값이 싸다는 점에 눈이 멀어 곧바로 사기로 결정하고 말았다면 이는 중대한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시 땅값과 비교하면 분명하면 분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쌉니다.  하지만 현지 시세를 감안하면 턱없이 비싼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운 것입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p33)


3. 불편한 생활


 시골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생각하는 시골 생활에 대한 공통적인 어려움은 불편함일 것입니다.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 에서는 시설에 대한 불편함이 나타나 있고,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에서는 불편함의 의미를 찾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가. 푸세식은 힘들어 : '진짜로 급한 게 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첫째, "화장실이랑 세면장!"하고 소리쳤다. 정말이지 난 밤에 "푸세식"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무서웠고 샤워도 쪼그리고 앉아 씻는 게 아니라 서서 하고 싶었다. 두 번째, 겨울에도 따뜻한 방! 작고 아늑한 방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에가 고치를 틀듯 말이다. 세 번째, 환한 주방 만들기. 그리고 노후한 전기와 보일러 시설 손보기.'<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 (p33)


 나. 불편함이 치유다 : '시골에서는 내 일은 내 힘으로 한다는 강한 마음가짐과 체력이 필요합니다. 이주하고 나서 도시의 편리함과 비교하며 불평을 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스스로 해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굳이 불편한 곳에서 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불편함이, 너무 편리한 도시 생활로 흐늘흐늘해진 당신 심신을 달련시켜 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뇌를 계속 지배해 온 싸구려 이미지를 말끔히 제거하고 가혹한 현실과 대치하는 묘미를 알게 해 줍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p185)


4. 이웃과의 관계


 시골에서 이주했을 때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이웃과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는 이웃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하는 반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에서는 되도록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가. 세상사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  '연(蓮) 밭을 만들면서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면서 사는 비결은 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는 마을 어른들과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여쭈었다. 방법을 말씀하실 때마다 수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말씀드렸다. 다행히 그런 자세 때문에 어르신이 웃으면서 그러셨다.'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p53)


나. 친해지지 말고 그냥 욕먹어라 :  '시골 생활을 시작할 때 그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는 정도를 미리 정해 두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아주 중요한 문제에는 단호한 양자택일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긴밀히 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둘 중 하나만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미움을 사는 편이 어울리고 나서 미움을 사는 편보다 원망이 훨씬 더 적다는 점입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p129)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 시골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시골 생활을 보는 관점은 반대입니다. 아마 현실은 그 중간 어딘가 있을 것입니다. 시골생활이란 두 얼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자기만의 주택을 가졌을 때 위의 작은 연못과 같은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아래 사진과 같은 분위기 있는 공간을 가질수도 있고(다소 잡초가 많네요) 이를 통해 여유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여유는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가질 수 없는 부분이고 많은 이들이 이러한 여유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것은 자연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의무가 권리보다 큰 것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과 크게 차이 나지 않습니다. 위의 연못을 5분만 바라보면 곧 질리게 됩니다만, 관리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새 자라는 잡초를 보면서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에 감탄함과 동시에 빨리 제거해야하는 의무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시골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시골 생활과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공통점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어린 아이를 보면 누구나 웃음을 지으며 예뻐하지만,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처럼 시골 생활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것을 알면서도 시골 생활을 그리는 것은 아마도 우리 조상들의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많은 비가 오고 난 후 하늘과 공기가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나고 있습니다. 이웃분들 모두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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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6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6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26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움을 말하긴 했지만 두 분 다 낭만적인 글이네요. 리얼한 경험담 들어보면 분투기죠. 비 오고 자고 나면 훌쩍 자라는 잡초 정리에 쉴 틈이 없고 텃밭 관리, 집 주위 정리도 고역이라 연못 메워 버렸다는 분도 다반수. 겨울철 난방비가 50~100만원 이상, 주말이면 이 사람 저 사람 놀러 온다고 하는 터에 그 수발에 정리에 또 지치고,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편의점이라도 갈라 치면 차타고 5분 이상 나가야 되는 온갖 귀찮음... 무턱대고 갈 게 아니라 얼마 간 살아보고 결심할 일이죠. 농사나 손재주 있는 분들 아니면 노년엔 더 피해야 할 게 시골 생활이라는 게 인터넷중론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08-26 22:24   좋아요 1 | URL
네 그렇지요^^: 도시에서는 당연하게 갖춰진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어느 정도의 마음 가짐이 우선 필요할 것 같아요^^:

yureka01 2017-08-27 08: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시가 게으른 이유가 피곤 때문입니다. 직장이란 조직은 사람의 심신을 파먹죠. 시골의 부지런함은 심신이 보충하거든요. 바람.물.공기.심지어 하늘에 구름 마저도 경이롭다 라면 시골이 맞을 것이고, 그래서 모든 불편을 행복으로 바꾸죠. 도시는 반대로 돈을 행복으로 바꾸려 들거든요. 이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시골가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주거에 대한 제품들이 워낙 잘 나오니 시골에서도 도시의 아파트 처럼 깔끔하게 얼마든지 만들수 있죠. 건축을 좀 알면 시골 생활도 훨씬 주거환경도 자유롭거든요....시골은 뭐든지 가급적 자체해결의 재미를 못느끼면 시골 가면 망합니다. 환경을 유지 보수 설계할 기술이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거든요..그러니 시골 갈려면 도시인들보다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이게 안되니 시골가서 전원의 낭만을 찾다가는....못버티죠..

겨울호랑이 2017-08-28 14:43   좋아요 0 | URL
^^: 유레카님의 ‘시골은 불편을 행복으로 바꾸고, 도시는 돈을 행복으로 바꾼다‘라는 표현 정말 공감되는 멋진 표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불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한 도피처로 생각하는 것이 귀향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라 생각되네요. 유레카님 행복한 일요일 보내시고, 마음에 드시는 멋진 사진을 찍으시길 바랍니다.^^:

. 2017-08-28 14:40   좋아요 2 | URL

장문의 댓글을 스마트폰으로 작성했으나 댓글이 지워져서 폰에서 북플을 아예 지워버렸습니다..ㅎㅎ

유레카님의 도시가 게으른 이유에 대해서 매우 공감되더군요.. 감정 에너지소모... 이게 상당히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더군요... 육체노동보다 더 한 피로함이 몰려오더군요... 그래서 감정 노동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이롭게 하기보다 해롭게 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람이 없는 시골로... 산으로.. 가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골에서의 삶도 도시와 같으면 무의미하겠지요... 위에 포스팅에서도 나오죠.. 관계를 맺어서 서운해지는 것보다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낫다고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밀착되면 밀착될수록... 본질은 흐려지거든요... 보통 고마움은 멀리.. 안 보일 때 생각나는 법이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거리를 멀리해야겠지요... 도시는 매일 사람이 붙어 다니니... 심신을 파먹을 수밖에요.. 시골 가니 사람 한 번 만나려고 하면 한참을 가야 한 사람 만날 정도죠... 사람이 귀하니... 속은 몰라도 겉으로라도 다 친절함을 베풀더군요..

몸은 힘들지만 마음만 편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도 나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난중일기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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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도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난중일기 亂中日記> 뒷편 책 표지글이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를 이렇게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난중일기> 속에는 물론 충무공(忠武公)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렇지만,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평범한 우리 삶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고 있다. 날씨, 업무 내용, 제사일 등의 공적인 내용, 가족 이야기, 건강 이야기, 사람에 대한 평가는 물론 점 치는 이야기와 꿈 해몽 이야기까지 소소한 삶의 기록이 <난중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단순히 <난중일기>를 '애국일기'로 한정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힘들다. 더 나아가, <난중일기>에 대한 이러한 편견 - 애국일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안 읽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간단하게나마 <난중일기>에 표현된 기록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난중일기> 속에는 매일의 날씨, 업무처리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업무일지(業務日誌) 같다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준다. 


' 갑오 정월 초이레. 맑음. 동헌방에 앉아 배 첨지, 남의길과 종일 이야기를 했다. 늦게 공무를 보았으며 남원(南原) 도병방을 사형했다.'(p200)


'을미 칠월 열나흘. 늦게 갰다. 군사들에게 말미를 주었다. 녹도 송여종을 시켜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 지내도록 쌀 두 섬을 주었다. 이상록, 태구련(귀련), 공태원들이 들어왔다. 어머님의 쾌평하시다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다.'(p434)


 그런가 하면, <난중일기> 속에는 저자의 좋지 못한 건강 또한 나타나 있다. 일기 곳곳에는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장군의 모습이 담겨있는데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온 장군의 강철과 같은 무인(武人) 이미지는 현실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정유  구월 스무나흘. 맑음. 몸이 좋지 못해서 신음하였다. 김홍원(金弘遠)이 보러 왔다.

정유 구월 스무닷새. 맑음. 이날 밤 몸이 몹시 좋지 못하고 허한이 온몸에 배었다.

정유 구월 스무엿새. 맑음. 몸이 좋지 않아 종일 나가지 않았다.'(p681)


[사진] 충무공 이순신 동상(출처 : http://blue-paper.tistory.com/185)


 또한, <난중일기>에는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회식(會食)이야기, 활쏘는 이야기, 점(占)을 치는 모습, 간밤에 꾼 꿈을 해몽하는 부분 또한 여러 부문에 나타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장군의 인간적인 면을 확인하게 된다. 


'병신 사월 초여드레. 종일 비, 비. 늦게 들어가 부찰사와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몹시 취하여 관등(觀燈)하고 헤어졌다.'(p452)


'갑오 구월 초하루. 맑음. 앉았다 누웠다 잠을 못루고 촛불을 켠 채 뒤척이며 지새었다. 이른 아침 세수하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에 대해 점을 쳤더니,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如僧還俗)"는 괘를 얻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다.'(p328)


 그중에서도 <난중일기> 속에 인간적인 면이 가장 잘 표현되는 부분은 원균에 대한 기록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난중일기> 곳곳에는 경상우수사 원균에 대한 불신(不信)과 비난을 확인할 수 있는데 보통 근엄하고 인자하게 그려지는 충무공의 모습과 달리 뒷담화(?)에 가까운 일기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 이순신'을 느끼게 된다.


 '계사 팔월 스무엿새.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원 수사가 술을 마시겠다고 하므로 약간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흉학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해괴하다....

계사 팔월 스무여드레. 맑음. 원 수사(원 균)가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하였다. 심히 해괴하다.

계사 팔월 그믐.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스물다섯 척의 배는 모두 내보내고, 다만 칠팔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행사함이 모두 이따위다.'(p188)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의 기간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이미지로 막연하게 느낄수 밖에 없다. 막연한게 다가오는 과거 기록은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이의 기록은 비록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의 삶"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7년의 기간동안 하루하루가 끔찍했을 것이라 우리는 짐작한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는 어려운 중에도 회식이 있었고, 바쁜 중에도 활쏘기를 하는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우리는 외적의 침입에 일치단결하여 대응한 조선 수군을 막연하게 상상하지만, 그 안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개인적인 감정 대립이 있음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난중일기>속에는 우리의 일상(日常)과 다름없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의 기록이 모여 <난중일기>라는 시대의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난중일기>를 통해 '충무공 이순신'이 '군신(軍神)'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위장병에 고생하며 결근을 하기도 하고, 동료와 갈등을 겪으며 마음 고생을 하는,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꿈 해몽과 점에 의지하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충무공의 위대함은 인간적인 약점(弱點)에 의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난중일기>를 읽으며 희노애락(喜怒愛樂)의 감정과 의식주(衣食住)가 펼쳐지는 삶의 공간인 일상(日常)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어느 '개인의 하루'가 7년 동안 모이고, 어느 개인들이 모여 사회(社會)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물을 우리는 지금 '임진왜란'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하루가 결코 작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책표지 뒷면의 글을 바꾸어 <난중일기>를 읽은 느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일상(日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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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3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중일기 문체를 보니 왜 김훈이 칼의노래 문체와 닮았는지알것 같군요.. ^^

겨울호랑이 2017-08-23 20:20   좋아요 0 | URL
^^: 그렇군요.. 저는 작가도 역사적 사실을 모사할 때는 배우처럼 몰입해서 닮아간다는 것을 곰곰발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2017-08-23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3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4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4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25 0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퇴근하며 해철형 생각했는데ㅜㅜ

겨울호랑이 2017-08-25 07:05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저도 참 아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0-10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추석 때 시간죽이기 겸사하여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를 다시 봤는데, 감동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생각해도 위대한 것은 본인의 불굴의 의지도 있지만,
왜 그를 많은 백성과 병사들이 따르냐는 말이죠.

다른 장군(원균)이나 고관대작들은 기생을 끼고 좋은 안주에 술만 마시기 바쁘지만
정작 통제사인 본인은 병사들이 먹는 식단을 비교하여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최근 광해군을 다시 생각하며, 한명기교수의 <광해군>이란 책이 다시 떠오르나, 드라마에서 광해군은 이순신을 옹호하는데
이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역사가 문듯 아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도 광해군이 조정에서 혹은 무군사로 내려갈 때 사관이나 기록만큼은 분명 기록에 의지했습니깐요..



겨울호랑이 2017-10-10 17:13   좋아요 0 | URL
^^: 만화애니비평님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요즘 「남한산성」도 개봉하는 등 16세기 조선에 대한 내용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 같네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재조명과 해석이 꾸준히 이루어진다면 만화애니비평님께서 말씀하신 역사에서의 아쉬운 점도 점차 줄여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