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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보고서 - 악당들의 시대, 한국현대사와 박정희시대에 대한 가장 완벽한 평가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지음, 김병년 엮음 / 레드북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프레이저 보고서 Fraser Report>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에서 1978년 10월 제출된 <한-미 관계 조사 보고서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Report>가 원제다. 원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레이저 보고서>는 당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숨겨진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보고서의 많은 내용이 보고서가 작성된 후 약 40년이 지난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프레이저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북한에 대한 위협 강조와 현실
이미 1978년에 한국군의 능력은 북한을 능가한다는 국방부 부차관보의 증언을 보더라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결코 북한보다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무기의 해외 수출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북한의 위협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왜 1970년대 미군 철수를 그토록 반대했던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국방예산 지원금과 생필품이 박정희 정권에게 돈벌이의 수단이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태극기 집회(출처 : 뉴스1)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결정적으로 외국세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더욱 안정된 억제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상의 역할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미 국방부 부차관보 아브라모위츠(Morton Abramowitz)는 대한민국은 지금(1978년 현재) 북한과 더욱 대등하게 걷고 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동맹국의 주둔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p124)
'이곳 사람들은 매우 격양되어 있다. 만일 한국인들이 최근 수년 간 말해왔던 것처럼 북한의 위협이 그렇게 엄청나다면,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방어에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것들을 해외에 팔려고 하는가?'(p144)
'한국의 국방 능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군사정책 역시 경제원조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승인 아래 한국정부는 미국이 한국의 국방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원조한 생필품들을 국내에서 판매하여 그 수익금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p257)
2.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 : 농촌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
박정희 정권은 불안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 성장이 국내 곡물 가격 억제로 인한 인플레이션 요인 통제, 그리고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공급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 경제에 있어 농촌 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불안요인이 되었고, 정권의 정당성이 결여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1960년대 PL480 프로그램은 식량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대규모 방위시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의 일부를 한국정부에 공급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기간 동안 농업분야는 산업분야만큼 급속히 성장하지 못했는데, 한국정부가 농업분야로 재원들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업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1970년대 초까지 PL480은 농업 성장률과 생산성, 그리고 수입을 꽉 억눌렀던 것으로 보인다.'(p339)
'1960년대 중반 경, AID는 한국정부가 일부 국내 식량 곡물에 대한 가격을 시장가격 이하로만 허락하는 정책 때문에 농촌 소득은 최소한의 증가만 이루어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정책과 함께 농촌 소득이 낮은 성장을 초래하는 이유는, 한국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노력과 도시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싼 생필품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이었다.(p288)...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도 도시노동자의 소득은 증가했다. 그러나 1975년과 마찬가지로 도시노동자의 월 평균소득은 월 가계지출보다 적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정부는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유순하게 했고,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지했으며, 고용주의 협력을 얻는 정책을 지속했다.'(p296)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낮은 임금 강요는 40년 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최저임금제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경제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임금은 수출 경쟁력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고, 조직된 노동자는 극도로 제한을 받았다. 1960년대의 대부분과 1970년대 초반을 통해 농산물 가격 또한 도시의 불만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낮게 유지되었다. 이것은 농촌과 농업의 발전을 방해했다. 모든 영역에서의 사회복지는 경제 개발의 뒤편으로 밀려났다.'(p328)
3. 무능한 한국 정부
이러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정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는 재정 확대책을 펼칠 수 밖에 없고, 항상 재정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정권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재정지출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한국경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국 경제를 낙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만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의 경제정책은 단지 무책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낮은 외환보유고와 함께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고 단기 신용 역시 이미 한계에 달했는데도 긴축보다 팽창을 선택했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운용이다. 재계 지도자들은 그 위험을 명확히 알고 우려하지만, 이미 어려워진 정치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성장과 고용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엄청난 정치적 압력에 의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 1975년 5월 美 재무부 보고서 - '(p315)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 원조 없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결핍되어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 경제적 의존 양상이 뿌리 깊었다. 더 나아가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국민소득이 약간이라도 증대되면 그에 상응해서 미국이 원조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경제 원조로 한국군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의 염려는 특히 컸다.'(p267)
오히려, 한국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보이고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적시된 한국의 미개발 자원이 '인적 자원(人的 資原)'이라는 사실을 박정희 정권은 알고 있었을까. 결국, 한국경제 성장의 실질적인 주역은 박정희 정권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國民)이었음을 우리는 다른 나라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장점을 우리가 모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몇몇 거대한 정부소유 기업들은 부실한 관리와 비경제적 요금 구조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해외 부문에 있어서 엄청난 지불 격차의 균형은 오로지 미국원조에 의해서만 지탱되었다.... 1950년대의 토지개혁은 비록 가난했지만, 농촌 부문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비록 비효율적인 수입대체전략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1950년대 동안 산업 능력은 꾸준히 발전되었고, 보다 효율적인 용도로 전환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근면하고 교육받고 훈련된, 엄청나다고 표현될 만한 미개발 자원이었다.'(p260)
4. 정치 기부금 : 베트남 전쟁과 기업 뇌물
박정희 정부는 통치 자금 마련을 위해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만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을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약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를 한국 정부에 지불했으며, 그 금액은 당시 한국의 외화 수령액을 고려한다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 또한, 당시 유력한 한국의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는 선거 때마다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최근 K-재단과 미르 재단 문제의 뿌리는 이미 반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사진] K-재단, 미르재단(출처 : SBS뉴스)
'미국정부는 최근에 합의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연계하여, 양국 대통령 간에 합의된 1억 5천만 달러의, 또는 그 이상의 개발차관을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다음 5년에 걸쳐 한국에 상당한 액수의 재원을 차관으로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p272)... 미국정부는 특히 통화 정책의 개혁을 원했다. 선거 시기에 자금 공급을 확대시키려는 한국정부의 경향은, 만성적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개인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중단되어야만 했다.'(p274)
'1973년에 회계감사원이 지적했듯이, 미국이 한국군의 베트남 모험의 결과에 지불한 금액을 산정하는 것은 자료 부족으로 어렵다. 1970년에 국방부는 미국의 해외 안보협정과 공약에 관한 소위원회의 사이밍턴(Symington) 상원위원에게 추정을 제출했는데, 다음과 같이 복사되어 있었다. 9억 2,700만 달러였다.(p281)... 미 회계국은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베트남전과 관련된 소득이 연간 2억 달러라고 추산했다. 대충 잡더라도 그 금액은 1966년에는 한국의 외화 수령액의 40%를 차지했으나 1970년도에는 15%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만성적인 외화부족을 고려한다면, 15%조차도 중요했다.'(p282)
'1971년에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정치자금의 필요는 더욱 심화되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1970년 6월에 민주공화당에 십만 달러씩을 기부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직접 김성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 명단에는 한국의 거대한 재벌들, 럭키 그룹, 현대 건설, 삼성 그룹, 김성곤이 경영하는 쌍용 그룹 등이 포함되었다.'(p370)
5. 정치 자금의 활용
박정희 정부는 이렇게 모은 정치 자금을 이용하여 미 상하원 의원들을 설득하였으며, 친(親) 정부 활동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선거구에 회사 본부가 소재해 있는 하원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미 한국에 투자해 온 거대기업들(Gulf, Caltex, American Airlines, Fairchild)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과 활동들은 외부의 출처들과 다양한 수단들을 이용해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예를 들어 쌀 수수료는 박동선의 조지타운클럽과 다른 프로젝트들의 재정을 도왔다. 한국문화자유재단과 그 계획인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한국정부는 미국 내 출처로부터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친정부 활동들을 지도, 통제할 수 있었다.'(p170)
6. 개인적 뇌물 수수
정부 정치자금 중 일부는 개인 재산으로 축적되었고, 이중 일부는 박정희에게도 전달되었다. 박정희에게 전달된 자금은 청와대 금고와 스위스 계좌에 예치되는 형태로 보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자금과 관련한 중심에는 한국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
[사진]김-오히라 메모(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logId=minlovemuch&blogNo=100093008276)
'1969년 이후 모든 형태의 대출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그것은 정부 정치자금의 기본적 원천들 중 하나의 감소를 재촉했다. 세금 체계를 통해 자금을 증가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하하려는 노력이 명백히 착수되었지만 -그것은 제도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한 노력들은 부패의 일반적 수준이 반영된 한국정부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 뇌물 수수의 범위가 방해받는 것이었다. 1970년 경에는 이후락, 김성곤, 김혁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p369)
'이후락에 의해 수집된 자금들이 스위스 은행계좌에 예치되었고, 원칙적으로 대통령에 의한 용도였다고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후락과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그 돈들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탁자 뒤에 있는 금고 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계좌의 존재는 은행 기록들로 구체화되었고, 이동훈(이후락의 아들들 중 한 명)에 의해,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다수의 청와대 고위관리들 중 최측근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본 소위에서, 스위스의 그 돈들은 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자금"이었다고 진술했다.'(p370)
'워커힐 리조트 건설과 일본에서 자동차 수입과 같은 상업적 거래들에 한국중앙정보부가 깊이 빠져들었다는 믿을만한 표시들이 있었다. 그 후 한국중앙정보부가 워커힐 프로젝트에서 수백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추정되었다. 1963년 봄 기간 동안 한국중앙정보부는 주식시장의 은밀한 조작에 휩쓸려 들어갔고, 이 공작으로 거의 4천만 달러를 챙겼다고 추정되었다...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재정으로 사용될 선금조로 1억3천만 달러,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를 위한 민주공화당 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김종필이 일본에서 받았다는 혐의들의 가죽 끈을 풀어버렸다.'(p361)
7. 한국중앙정보부(KCIA)와 감찰
한국중앙정보부의 권한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한국 내 국민 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을 감시하는등 민간인 사찰을 통해 언론 통제 등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반(反)정부 활동을 억압했음을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진] 군 기무사 민간인 사찰(출처 : 통일뉴스)
'전 한국중앙정보부(KCIA) 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그것이 미국의 CIA와 FBI의 기능을 합친 것이라고 말했다. 전 한국외교관 이재현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실제로 한국중정은 한국인들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p147)
'한국교민 담당관으로서 김상근의 다른 책무들 중 하나는, 유신헌법에 대한 선전 자료를 배포하고 반정부 활동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시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때 그는 영사관 관리들과 협력했고 한인교포들을 이용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정보를 위해 지역 한국 언론의 기사들을 읽었다.'(p152)
'한국 법에 의하면, 비록 미국에서 발행되었다고 할지라도 서울사무소가 미주 동아의 내용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976년 1월 13일자 편지에서 김남은, 만약 정부의 비상계엄령을 위반한 기사가 앞으로 발행된다면 소환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에 비판적인 편집 정책을 가진 미국 내 다른 한국어 신문의 발행자들을 괴롭히고 협박하려고 했다.(p468)... 때때로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와 정책을 유리한 관점에서 제시하는 출판 및 방송매체를 공개적으로 설립하거나 혹은 자금 지원하려고 시도했다.'(p469)
이외에도 프레이저 보고서의 주요한 내용으로는 통일교와 한국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교주 문선명이 이끄는 통일교 조직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폐지된 범세계적 단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이 한국 정부와 어떤 영향이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프레이저 보고서>는 1970년대 한국의 고속성장이 농촌과 도시 빈민의 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는지 그리고 개인자산을 만들었는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한 한국중앙정보부의 중심적 역할에 대해서도 상세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깊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중심이 '한-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정 부문 한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이후의 극우 정권이 '왜 미국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라는 한계로 읽기에 다소 지루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기간의 납득하지 못할 정부의 행태를 잘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다.